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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19:35:00

제27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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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사단 이라크 평화·재건 사단
※ 둘러보기: 해체·해편된 각급 육군 부대
사단 | 해체된 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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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보병사단
第二十七步兵師團
The 27th Infantry Division
파일:제27보병사단 부대마크.svg
<colbgcolor=#e71f19> [ruby(中部戰線, ruby=중 부 전 선)]의 [ruby(守護者, ruby=수 호 자)], [ruby(祖國統一, ruby=조 국 통 일)]의 [ruby(先鋒將, ruby=선 봉 장)]
창설일 <colbgcolor=#fff,#191919> 1953년 9월 18일
해체일 2022년 11월 30일
상징명칭 이기자부대
소속 대한민국 육군
상급부대 제2군단
규모 사단
역할 화천군 전방 지역 일대 수색 및 방위
초대 사단장 예)소장 이형석(육사 특5기)
마지막 사단장 예)준장 민인기(육사 46기)
위치 강원특별자치도 화천군 사내면 삼일리

1. 개요2. 특징3. 역사4. 예하 부대
4.1. 사단 직할대4.2. 제77보병여단 용호4.3. 제78보병여단 상승독수리4.4. 제79보병여단 쌍독수리4.5. 포병여단 최무선4.6. 신병교육대
5. 출신인물
5.1. 사단장5.2. 장교/부사관5.3.
6. 기타
6.1. 근무환경6.2. 사단가6.3. 일화
7. 사건 사고
7.1. 1990년대7.2. 2000년대7.3. 2010년대
8. 여담

[clearfix]

1. 개요

사단령
제1조(설치) ① 육군에 사단을 둔다. ② 사단은 관할구역의 작전·훈련 및 군 행정에 관한 사항을 관장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Main_gate_of_ROKA_27th_Infantry_Div_HQ.jpg
제27보병사단 사령부의 정문이다.[1]
대한민국 육군 제27보병사단은 제7보병사단, 제15보병사단과 함께 있었던 제2군단 예하부대이다. 강원특별자치도 화천군에 위치한 중부전선을 책임지던 예비사단이었으며, 무자비한 훈련강도로 악명이 높았다.

2. 특징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부대'라는 뜻으로, '이기자부대'라는 상징명칭을 가지고 있다. 부대마크는 제27보병사단의 숫자 27에서 2색(빨간색, 흰색)과 7각을 조합한 방패모양이다. 가운데에는 '이기자'라는 부대명칭이 쓰여있다.

악명 높은 훈련강도로 유명하다. 원래 전방 예비사단의 특성상 훈련강도가 높을 수밖에 없지만, 제27보병사단은 예비사단 중 거친 지형으로 악명 높은 화천군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다.[2] 이런 특징은 같은 화천군이 작전 구역인 제7보병사단, 제15보병사단 항목에서도 잘 묘사된다. 오죽하면 (구)제102보충대대에서 제27보병사단으로 배치받은 장정들에게는 '전투화를 바꿀 기회'를 한 번 더 줬겠는가! 사단장부터 일개 병사까지 모두가 공평하게 힘든 부대로 유명했다.

자주 짤방으로 돌아다니는 훈련은 무자비하게 문구가 새겨진 비석은, 바로 여기 제27보병사단 유격장에 존재한다. MBC 진짜 사나이에서 방영되었듯, 정예수색요원 양성교육으로 사단 직할 수색대대가 굉장히 유명하다. 사단 내 정예병력으로 취급받는 각 사단의 수색대 중에서도 인지도와 훈련결과, 부대 운영성과 등을 종합적으로 볼 때 최고 수준으로 평가된다. 수색대대는 누구나 지원할 수 있지만, 아무나 될 수 없다. 왜냐면 매 기수마다 많은 수의 인원이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훈육관들도 힘들면 포기하라고 권유한다.

제27보병사단은 6.25 전쟁이 끝나고 창설된 사단으로, 개전 초기 비참하게 밀려난 제7보병사단이나 금성 전투 때 깃발을 빼앗긴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의 이야기가 와전되어 마치 '한국전쟁 때 한 번도 못 이겨서' 또는 '북한군에게 깃발을 빼앗겨서' 이름을 이기자라 지었다는 근거 없는 낭설이 있지만, 이는 강도높은 훈련으로 악명이 높아 유명해진 이기자부대를 못 가본 이들이 비하시키는 망언에 불과하다.

사단명에 대한 또 하나의 낭설은 초대 사단장의 부인 이름이 '이기자' 여사님이 아니냐는 것이다. '사단장 부인 이름설'(?)을 의식한 탓인지, 27사단 부대사에서는 초대 사단장 이름을 표기할 때 반드시 사단장 이름 옆에 괄호를 치고 부인 이름도 함께 싣는다. 다른 사단들을 찾아본 바에 따르면 유일하게 이기자 부대만이 초대 사단장과 부인의 이름을 함께 표기한다.

3. 역사

6.25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년, 20개 사단 증편 계획에 따라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병력들이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인근에 산재해 명령을 기다리던 중, 동년 9월 18일 사단 창설일에 맞춰 기갑연대(현: 제1기갑기계화보병여단) 3대대 11중대장 안도현 대위와 일행 장교들이 이끄는 2개 중대가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명월리까지 도보로 이동해 별도의 부대 창설을 한 게 해당 사단의 시초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79연대 1대대가 군사 원조단인 비둘기 부대 예하 제101경비대대로 참전하였다.

한국군사원조단 이후 건설지원단, 비둘기 부대 순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예하에 127공병대대가 있었는데 이를 경비하기 위한 부대가 제101경비대대였다.[3] 군사원조단은 사이공 인근 순환고속도로 건설등 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했기 때문에, 한국군 지원 목적의 제100 군수사령부와는 별개의 부대이다.

제101경비대대는 79연대 1대대를 모체로 하여 편성 후(장교 34명, 사병 728명) 1965년 3월 16일 사이공 북서쪽 22km 지점인 '지안'에 지휘소를 설치 했고, 이후 추가 파병 요청에 의해 6월 27일, 제27사단에서 다시 1개 중대를 편성(장교 6명, 사병 161명)하여 제101경비대대 제5중대로 증편했다.

이들은 2개 중대는 주둔지 경계, 수색작전 및 예비부대였고 2개 중대는 중대전술기지 또는 이동식 중대전술기지 형태로 움직였는데 주로 127공병대대 예하 1개 공병중대와 편조되어 건설현장 외곽경비를 담당하였다. 공병대가 사이공 외곽에 원형으로 도로(16번 동부 환상도로. 일명 따이한 고속도로)를 건설하다 보니 일정 시일마다 계속 이동하였는데 이에 따라 경비대 중대전술기지도 이동해야 했다.[4] 경우에 따라 1개 소대가 소대전술기지로 운용되기도 하였고, 1개 소대는 철수한 해병대 공병분대 대신 사이공의 대사관과 관저, 주월사이공 방송국 경비를 담당했다.

작전 지역인 지안과 라이티에우의 북베트남군 165A 연대와 지방게릴라는 도합 510명 가량으로 상호 교전으로 총 전사 48명(장교 1명)과 전상 76명(장교 5명)이라는 피해를 입었다. 이렇게 27사단 일부 병력이 먼저 파병되어 있는 관계로 남베트남미군 측에서 추가파병을 요구하자 주월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은 처음에는 27사단을 논의했지만, 한국전 참전 경력이 있는 부대를 파병해야 한다는 정부내 방침에 의해 제9보병사단 (백마부대)가 2차 파병부대로 결정이 된다.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도 참전하였으며 78연대의 김대영 상병이 9월 25일에 강릉 교전현장에서 전사하였다.

파일:2사-17사_해체.jpg

2019년 9월 국방개혁 2.0을 이 사단도 피해갈 수 없었다. 육군본부 관계자가 제6보병사단은 포천으로 이전시키고, 제20기계화보병사단과 함께 해체를 기정사실화 하는 발언을 했는데, 이에 화천 주민들은 "마을도 해체하란 말이냐!" 는 현수막을 걸고 한 목소리를 내며 서명 운동을 벌이면서도 여타 전방지역 실무단과 함께 회의를 갖기도 했다. 물론 대다수 네티즌들은 군인들에게 바가지 씌우던 사람들이 뭔 말이 많냐는 반응이다.

국방개혁으로 인해 2020년 12월 1일부로 예하 연대들이 여단으로 승격되었다.

제27보병사단은 2022년 11월 30일 해체가 확정되었으며, 해체 후 예하부대들은 대부분 제15보병사단으로, 일부는 제7보병사단, 제2공병여단, 제2포병여단제2군단 예하부대로 나뉘어 소속이 변경된다. 해체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전평시 임무가 해제된 2022년 9월, 제27보병사단이 해체가 아닌 제66보병사단과의 통합개편이 추진되기도 했지만 비용 문제, 여러 제한사항 등으로 인해 국방부에서 승인되지 않아 제66보병사단과의 통폐합 계획은 취소되었다. KBS 기사에 따르면 제27보병사단의 주둔지로 제66보병사단이 이동한다고 하지만 어떤 이유인지 이것도 무산된 모양이다.#

4. 예하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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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보병사단 예하부대
제77보병여단 제78보병여단 제79보병여단
포병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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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단 신병교육대는 제27보병사단/신병교육대 참고.

4.1. 사단 직할대

4.2. 제77보병여단 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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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제78보병여단 상승독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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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제79보병여단 쌍독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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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포병여단 최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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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신병교육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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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출신인물

5.1. 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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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이형석
2대
김봉철
3대
김계원
4대
정래혁
5대
이치업
6대
박경원
7대
김동수
8대
전부일
9대
안광영
10대
이준학
11대
임지순
12대
나희필
13대
윤흥정
14대
최영식
15대
김선일
16대
권영각
17대
정진권
18대
정순현
19대
김찬기
20대
편동수
21대
윤인하
22대
편장원
23대
양상태
24대
오형근
25대
김현수
26대
이풍길
27대
김승광
28대
김기성
29대
김군식
30대
이명구
31대
하정열
32대
이승우
33대
김인동
34대
전인범
35대
이진원
36대
김종태
37대
김정수
38대
허강수
39대
정해일
40대
정진팔
41대
민인기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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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드체는 대장 진급이 된 사단장.
역대 제27보병사단장
<rowcolor=#fff> 역대 이름 계급 임관 비고 기타
초대 이형석 예) 소장 1953. 10. 09 - 1954. 08. 24
2대 김봉철 예) 소장 1954. 08. 25 - 1954. 10. 09
3대 김계원 예) 대장 군영 1기 [6] 1954. 10. 10 - 1956. 04. 12
4대 정래혁 예) 중장 육사 7기 1956. 04. 13 - 1956. 11. 13
5대 이치업 예) 준장 육사 2기 [7] 1956. 11. 14 - 1958. 08. 12
6대 박경원 예) 중장 육사 2기 [8] 1958. 08. 13 - 1959. 07. 07
7대 김동수 예) 준장 특임[9] [10] 1959. 07. 08 - 1960. 07. 01
8대 전부일 예) 중장 육사 2기 1960. 07. 02 - 1962. 03. 02
9대 안광영 예) 소장 육사 3기 [11] 1962. 03. 21 - 1964. 01. 09
10대 이준학 예) 소장 육사 특7기 [12] 1964. 01. 10 - 1966. 03. 15
11대 임지순 예) 중장 육사 8기 [13] 1966. 03. 16 - 1967. 12. 07
12대 나희필 예) 소장 육사 5기 [14] 1967. 12. 07 - 1969. 11. 26
13대 윤흥정 예) 중장 육사 8기 [15] 1969. 11. 27 - 1971. 11. 29
14대 최영식 예) 중장 육사 8기 1971. 11. 30 - 1974. 01 .24
15대 김선일 예) 준장 육사 7기 1974. 01. 14 - 1976. 02. 26
16대 권영각 예) 중장 종합 5기 [16] 1976. 02. 27 - 1978. 02. 05
17대 정진권 예) 대장 육사 8기 [17] 1978. 02. 06 - 1980. 01. 06
18대 정순현 예) 소장 갑종간부후보생 46기 [18] 1980. 01. 07 - 1981. 07. 17
19대 김찬기 예) 소장 종합 27기 1981. 07. 18 - 1983. 06. 22
20대 편동수 예) 소장 육사 14기 1983. 06. 23 - 1985. 06. 09
21대 윤인하 예) 소장 갑종 141기 [19] 1985. 06. 10 - 1987. 06. 09
22대 편장원 예) 대장 육사 18기 [20] 1987. 06. 10 - 1989. 01. 09
23대 양상태 예) 소장 육사 19기 [21] 1989. 01. 10 - 1991. 01. 06
24대 오형근 예) 소장 육사 22기 1991. 01. 07 - 1992. 12. 28
25대 김현수 예) 중장 육사 22기 1992. 12. 29 - 1994. 04. 24
26대 이풍길 예) 소장 육사 24기 [22] 1994. 04. 25 - 1995. 10. 22
27대 김승광 예) 소장 육사 25기 1995. 10. 23 - 1997. 10. 24
28대 김기성 예) 중장 육사 27기 1997. 10. 25 - 1999. 11. 11
29대 김군식 예) 소장 3사 1기 1999. 11. 12 - 2001. 11. 19
30대 이명구 예) 소장 육사 29기 2001. 11. 20 - 2003. 09. 08
31대 하정열 예) 소장 육사 31기 2003. 09. 09 - 2005. 11. 11
32대 이승우 예) 소장 육사 33기 [23] 2005. 11. 11 - 2007. 11. 09
33대 김인동 예) 소장 3사 12기 [24] 2007. 11. 09 - 2009. 11. 10
34대 전인범 예) 중장 육사 37기 2009. 11. 10 - 2011. 11. 22
35대 이진원 예) 소장 육사 39기 [25] 2011. 11. 22 - 2013. 04. 26
36대 김종태 예) 소장 3사 18기 [26] 2013. 04. 26 - 2015. 04. 15
37대 김정수 예) 대장 육사 42기 [27] 2015. 04. 15 - 2017. 09. 29
38대 허강수 예) 중장 3사 23기 [28] 2017. 09. 29 - 2019. 05. 14
39대 정해일 예)소장 육사 46기 2019. 05. 14 - 2021. 06. 03
40대 정진팔 중장 육사 48기 2021. 06. 03 - 2022. 06. 13
41대 민인기 예)준장 육사 46기 2022. 06. 13 - 2022. 11. 30
출처

5.2. 장교/부사관

5.3.

6. 기타

6.1. 근무환경

포병 여단의 경우 예하 4개 대대가 모두 전시초기 대포병 화력전을 위해 미리 전방에 배치되어 있다.[35] 아예 7사단, 15사단의 주둔지역 내에 배치되어 있어 사단 본부까지 가려면 육공 기준 1시간이 넘는 고행의 길을 가야 한다. 다만 그만큼 사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은 오히려 재앙에 가까운 수준이다. 포병여단부터 사단본부, 심지어 다른 사단에서까지 와서 간섭해대는 경우도 있다. 위병소 근무를 서보면 실제로 사단 관련 차량보다 주변에 깔려있는 제2군단 예하 부대들인 제7보병사단, 제15보병사단이나 2포병여단 관련 차량을 훨씬 더 자주 볼 수 있는데, 그 때문에 포병대대 위병근무자들은 사단 예하 연대의 차량번호보다 제7보병사단과 제2포병여단의 차량번호를 더 먼저 익히는 불상사가 있다. 게다가 99포병대대를 제외한 나머지 3개 포병대대는 다른 수많은 제2포병여단 및 제7보병사단 부대들이 밀집된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탈영을 하더라도 등산장비로 암벽만 타고 다니지 않는 한 멀리 벗어나기가 힘들다.

주둔지인 사창리의 물가가 비싸서 외박나간 장병들이 고통받고 있다. 물론 이것은 거의 모든 군부대 주변 지역이 비슷하다. 주말에 외박 나오는 군인들의 지갑이 가장 큰 돈줄이기 때문. 숙박업소는 주말/평일 요금표가 따로 있을 정도다. 국민의 세금으로 위수지역 악덕상인들만 배불리는 셈이다. 위수지역을 확대하든지 물가를 통제하든지 대책이 필요하지만 그런 거 없다.

2012년 8월에 78연대에 또래오래가 생겼다. 운영 시간은 평일은 일과 이후와 주말이고, 맥주도 파는데 개인당 500ml 1잔으로 통제하고 있다. 병사 봉급으로 자주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이라 자주 이용하기는 어려우나, 통상 군대 안에서 먹기 힘든 피자, 치킨, 맥주를 영내에서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타 부대에 비하면 엄청난 행운이다.

6.2. 사단가

1절
민주 자유 대진군에 발맞춰 가는
조국의 부름 받은 우리 전우들
북녘땅을 향하여 총칼 겨누고
최선봉에 나서리라 북진의 사단
2절
추상 추풍 엄한 군기 굳은 단결로
필승의 훈련 받은 우리 전우들
조국 산천 찾아서 천여리 넘어
진출선을 헤치리라 북진의 사단
후렴
이색 칠각 빛나는 우리의 사단
장부의 일편단심 함께 뭉쳐서
하늘 높이 올려보자 27사단

6.3. 일화

해당 사단의 초기 멤버이자 1968년 4월 예비군 창설과 함께 초대 예비군 중대장이었던 안도현의 일화가 존재한다. 이 중대장은 당시 수시로 무장공비가 출몰하고 반공 이념이 누구나 투철했던 시기답게 현역과 견줄 만할 매우 엄격한 훈련체계로 예비군 대원들을 통솔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중대장을 했었을 당시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용담리에서 농민의 조모가 이른 새벽 가마솥 속 옥수수와 감자를 훔쳐 달아나는 공비를 발견하고 그의 아들이 이장님 댁[36]에 신고하여 군경 합동 수색팀이 조직, 공비의 이동 동선을 따라 험준한 화악산을 중심으로 포위망을 펼치고자 그와 예비군들도 여기에 동원되어 M1 카빈과 실탄을 지급받고 그의 지시에 따라 수색 작전에 참여하게 된다.

이 와중에 그는 십오 년 전 경험을 토대로 피로와 허기에 발각을 감수하고 민가를 약탈할 정도라면 절대 화악산 방향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짓고, 만약 이 상황에서 이동 경로를 예상한다면 화악산보다는 광덕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울을 끼고 수도권 방향으로 도주하고 있을 것이라며 상급 부대장을 설득했으나 간첩작전 대응 메뉴얼 이외의 루트로는 수색할 수 없다 하여 그는 대원 절반을 경찰 지원으로 투입하는 한편, 나머지 절반과 함께 경기,포천 방향의 광덕 계곡으로 향하게 된다.[37]

신고 후 3시간이 경과해 먼 동이 터서 전방 식별이 가능할 즈음, 개울을 수색하던 예비군에게 이상한 발자국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그는 물속 이끼에 찍힌 발자국을 발견하고 이후 모든 대원들에게 노리쇠 장전을 명한 후 정밀 수색과 함께 전방 주시 주의를 명령했다. 그렇게 약 5분을 진행할 즈음 기관총 발사음이 콩볶는 소리처럼 들렸고, 그는 서둘러 군경에게 공비의 현 위치를 무전으로 송신하는 한편 예비군 대원들과 함께 발음지를 향해 나아갔고 이윽고 바위 뒤에 숨은 무장공비와 예비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다 잠시 소강 상태에 있을 무렵 그 중대장은 무장공비들에게 투항을 권고하게 된다.
"야 내래 리북서 내려와 남한서 살고 있는 예비군 중대장이다, 투항만 하면 내가 너희 목숨만큼은 내가 보장한다. 투항하라"

그럼에도 교전이 지속되는 사이 그의 무전대로 춘천과 화악산 방향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병력들과 군용 트럭 소리를 들은 두 명의 무장공비들은 수류탄 두발로 그 자리에서 자폭을 하게 된다. 다만 이후 전공을 두고 일이 꼬여서 그와 예비군들은 마을 주민들이 공비 잡느라 수고했다며 끓여 놓은 육개장과 막걸리로 목을 축이는 걸로 없었던 일로 하게 되고, 공비들을 압박한 게 전부인 군경들은 각각 일계급 특진을 했다. 1990년 여름 포병 239대대 촤리 포대에서 훈련 도중 이등병이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포차가 전복되고 MG50을 잡고 이동하던 이등병이 사망하였다. 의무대 박스카로 춘천으로 후송중 사망했다.

7. 사건 사고

7.1. 1990년대

1990년대 초반 신병교육대에서 총검술 훈련 중 찌르기 자세를 잘 하지 못하는 훈련병의 자세를 교정하던 조교가 발목을 트위스트 추듯이 움직이라며 오른쪽 발등의 옆(지표면)을 착검한 K2로 찌르며 가르치던 중 긴장한 훈련병이 발을 틀었고 그대로 발등에 대검이 관통... 조교는 영창, 훈련병은 퇴교 후 다시 입대, 영창으로 간 조교는 꽤 모진 것(K2 가스마개 잃어버린 훈련병을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패다가 분이 안 삭는지 총열을 잡고 몽둥이 쥐듯해서 실신할 정도로 폭행)으로 유명해서 당시 영창 근무자들이 엄청 갈궜다는 후문. 해당 사건의 조교는 나름 인기도 많고 잔정도 많았다. 또한 당시 다른 조교들은 매우 합리적이고 잔정이 많은 조교들이었다. 특히 인상이 매우 날카롭고 창격술을 잘해 북한군 소리 듣던 조교는 자신이 교육한 전경 차출 인원들이 퇴소후 서울에서 전령 교육 받는 곳까지 찾아와 간식을 사주고 갈 정도였다.

1990년대 군단 FTX 중 도하훈련을 하다가 피곤에 지친 병사 한 명이 부교를 졸면서 건너던 중 소총을 물에 빠트렸고 결국 못 찾았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군 사고 사례집에 단골로 나오는 유명한 사건이다. 그리고 1997년에 78연대 X대대 X 중대에서 도하훈련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훈련상태가 마음에 안 든다고 중대장이 얼차려의 일종으로 소대장[38]을 포함 전원 입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나오는데 소대장 한 명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당황한 중대장이 중대원들에게 전부 물에 들어가 찾으라고 했다. 이에 침전물이 일어나 물속이 더욱 탁해져서 소대장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나중에 소대장은 익사한 채로 발견되었다. 이후 해당 대대는 3년에 한 번하는 도하훈련을 5년간 못했다. 그리고 이건 괴담인데 사건 직후 해당 대대 탄약고에서 거동수상자가 나타나 "정지! 정지! 누구냐?"라고 수하 했더니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을 입고 있던 한 장교가 "나 5중대 소대장이다.", "용무는?", "옷 갈아 입으러."라고 말한 후 5중대 옆문을 열고 들어갔다고 한다.[39]

1990년대 말 위의 부대 6중대에서 A병사가 막사 안에서 목 매달아 자살했다. 구조상 2소대와 3소대가 문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1자형인데 그 문에 목을 매달았다.[40]

7.2. 2000년대

2002년 말~2003년 초 사단 직할 수색대대에서 이등병이 100일휴가 때 탈영하여, 청와대에 글을 올리는 사건이 있었다. 이후 수색대대는 해체 위기까지 왔었다. 그러나 그렇게는 안 되고, 이 이등병은 다른 연대에 전출 됐으나, 거기서도 좀 많은 문제를 일으키나, 무사히 전역을 했다. 2003년 이 부대 모 연대에서는 탄약대대로 2개월 정도 각 중대가 돌아가며, 파견 탄약고 경비 근무를 서나(ASP경계근무지원), 그때 신임 중대장이 탈영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검거인지 자수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처분후 옆 대대 군수장교로 보직되었다.

2002년 ~ 2003년 사이는 탈영과 자살 등 사건 사고가 많았다. 한 탈영병은 겨울에 부대 철망을 넘어 탈영하였는데 새하얀 눈밭에 홀로찍힌 발자국에 잡혔으며 몇 개월후 탈영병은 산길이 아닌 강가옆 만들어진 도로를 따라 탈영하다 하수구에서 군견에 잡혔으며 부대내 대대본부 옆 창고에서 병사가 자살하였으나 그 부모님이 오히려 부대내 폐를 끼쳤다며 중대별 세탁기를 사비로 기증하였다.

2005년 초 77연대 본부에서 전입온지 1달도 채 안되었던 이등병이 보일러실에서 자살했다. 유서에서 병영부조리 관련 내용이 적시되어 있었고 뉴스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가 된 사건이기 때문에 이때부터 군 전체에서 이등병에 대한 관리를 시키게 되면서 이등별이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2006년 여름 79연대에서 ASP경계근무지원으로 파견나갔던 소총중대에서 K3 사수인 일병이 자살했다.

2007년 5월경 입대한 한 병사가 제27보병사단 신병교육대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던중 각개전투 낮은 포복 훈련간 무릎 부상을 당했고 당시 제27보병사단 신병교육대측은 해당 병사에게 적극적인 치료지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단 한번의 사단 의무대 진료에서 당시 의료시설의 낙후로 정밀 진단이 되지 않아 상급병원 진료가 필요했으나 당시 훈련병이라 불가능하다라는 말만 했다고 하며 결국 부상 부위의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한 채 복귀해 훈련을 계속 받아 부상 부위는 악화되었고 설상가상 유급판정까지 받으며 치료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오랜기간 방치되며 7월말 자대로 배치 받아 이동해 치료요청을 했으나 자대측은 꾀병으로 간주하는 어이없는 상황을 연출하였고 이후 해당 병사가 8월 초 신병위로휴가를 이용해 민간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후에야 치료지원을 해줬다고 한다. 당시 국군 춘천병원에서 무릎의 상태가 수술이 필요한 상태였으며 처음 진단명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오쓰굿씨병이란 진단을 받았고 추가적으로 걸린 질병은 하지정맥류였다고 한다. 결국 수술을 통해 치료를 하였으며 이후 2008년 1월 말 퇴원을 하는 과정에서 부대에 복귀하니 해당 부대측이 부대전출 사실을 뒤늦게 통보하는 등 어처구니 없는 행보를 보였다고 한다. 관련해 보급품도 소홀하게 관리되어 일부 보급품이 유실된 사실도 파악했으나 전출간 부대에서는 별도 조치가 없었으며 전출 받은 부대에서 생활도 순탄하지 않았지만 해당 병사는 꿋꿋하게 만기전역해 부대를 나와 사회로 돌아왔다고 한다 허나 전역 후 당시 훈련중 부상이란 사실정도 인지하고 있어 국가보훈처에 상이군경 심사를 진행했으나 비해당 처분을 받았고 처분 사유는 비전공상이란 이유였는데 그 당시 해당 병사는 비전공상의 의미를 몰라 계속 이유를 찾아다녔고 2021년 6월경 해당 보훈지청에서 정보공개제도를 안내받아 당시 2010년에 진행한 상이군경 심사자료를 넘겨받아 비전공상의 이유를 확인하였는데 첫 자대에서 수술기간에 진행한 것으로 여러부분에서 오류가 발견되었고 심지어 내용은 허위진술을 한 정황을 찾아 27사단에 민원을 넣었고 재심을 조치해주었고 당시 육군 보통전공상 심사를 진행했으나 당시 실무자의 안내에 따르면 2007년 작성된 비전공상 확인서의 내용중 수정부분에 직인 누락으로 인해 심사결과가 비전공상 처분을 받은 것으로 안내 받았고 이를 즉각 다시 27사단에 항의해 국방부 중앙전공상 심사를 받을 당시 제27보병사단의 공문을 제출하는 등의 조치를 받았고 이후 심사 결과가 나오는 시점에 제27보병사단은 공식 해체되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추가적인 문제를 확인했고 육군 기록정보관리단에 있어야 할 당시 발병경위를 증명 할 자료인 사단의무대 진료기록이 부존재한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육군본부에서 실무자가 최종 답변에서 더이상 군의 잘못은 없음을 못박았고 해당 병사는 피해 사실이 있음에도 사과받지 못하고 억울한 지난 16년의 세월을 살아온 것에 통곡하여 지난날 선택하지 못한 자살이란 선택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현재 해당 병사는 모든걸 포기한 채 현재 국가보훈부에서 공상군경 심사 결과만 기대라며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 군에서 더이상 이런 비겁한 사고가 있어서는 아니된다는 해당 병사의 전언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추가적 피해가 발생했는데 당시 제27보병사단이 재심안내과정에서 담당자가 바뀐 규정을 제대로 알지 못해 받지 않아도 될 심사를 추가로 받아 시간적 낭비를 하여 27사단에서 피해를 마무리 지을 수 없게 되어 현재 상급부대 제2군단에서 계속 민원을 처리중에 있으며 해당 재심을 받고 난 이후 해당 병사에게 중요한 기록물인 사단의무대 진료기록지가 유실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해 이후 국가보훈부 재심에서 사실관계 입증이 되지 않아 비해당 처분되어 추가적인 피해를 받아 고통에 나날에 살아가고 있으며 현재도 구제 받지 못하고 있다.

2009년 여름 제27보병사단 259포병대대 브라보포대에서 한 병사가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해당 병사는 조리지원 임무를 수행 중이었는데, 조리반장이 창고에서 조리 물품을 가져오라고 하여 들어간 후 몇 시간 뒤 결국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되었다. 곧 바로 응급 후송을 실시하였으나 결국 후송 도중 사망하고 만다. 창고는 조리 밴에서 불과 2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실제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사건이라 더욱 아쉬움이 크다. 참고로 당시 병사를 발견한 간부는 아직까지 해당 부대에서 근무 중이며 현재 그 창고는 치장물자 창고로 여전히 쓰이고 있다.

7.3. 2010년대

이 부대의 가장 큰 흑역사로는 2010년 흑금성에게 작계 5027을 유출시킨 33대 제27보병사단장 육군소장 김인동 장군이 있다. 그때는 사단장 직을 마치고 제1야전군사령부 참모장을 하고 있었고 이 보직 자체가 요직인 만큼 군단장 진급이 유력했다고 한다. 김인동은 이적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징역 2년을 살았다. 물론 군 연금이고 뭐고 다 잘렸으니 인과응보에 가깝다.

2011년 겨울경 병사 한 명이 활동복만 입고 탈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초기에는 수색대로만 이루어진 추격조가 편성되었으나, 날이 밝아오면서 시간이 지체되었기에 각 부대에서 병력들을 차출해 주변을 탐색했고, 결국 탈영병은 근처 농가에서 잡혔다. 2011년 초 혹한기 훈련도중 이등병 병사 한명이 총기를 소지한채 탈영하는 사건이 있었다. 훈련중이던 부대와 헌병들의 끈질긴 추적끝에 탈영 18시간만에 춘천에서 붙잡혔다. 2011년 6월 부대 전술 훈련 중에 부대원 최모 상병이 탈영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무기와 장구류는 놓고 갔었기에 무장탈영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더 웃긴 사건이 추가적으로 발생했는데, 이 부대와 함께 훈련 중이던 같은 제27보병사단 대항군 부대에서도 똑같이 탈영병(이모 일병)이 발생한 것이다. 아마도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 탈영병을 잡기 위해 훈련으로 대치 중인 두 부대는 즉각 훈련을 중단하고 탈영병 수색에 전념했고, 결국 탈영병 체포에 성공했다. 기사

2012년 말 포병연대 어느 예하부대에서 병사 한 명이 포상에 목을 매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포병대대 특성상 포상에서 자살하는 일이 빈번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연도와 장소를 유추해볼 때 제27보병사단 X9포병대대 X포대에서 있었던 일인 거 같다. 그리고 그 포상에서 귀신 목격담과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들이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여담으로 당시 사단장이었던 이진원 예비역 육군 소장(육군사관학교 39기)은 포상때문에 또 다시 악몽을 재현하는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7사단 포병연대장 시절 예하대대에서 실종 병사 포상 발견 사건으로 해프닝을 겪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자살이라는 대형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결국 중장 진급에 실패하고 고향 인근[41] 부대장을 지내고 2016년 11월에 예편했다.

2012년 한여름 제27보병사단 2XX포병대대 X포대에서 포상에서 한 병사가 목을 매달아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 후 한 달간 포상을 폐쇄하게 되었고, 모든 장병들은 정신교육 집중기간 때처럼 막사에 남아있었다. 2012년 9월 사단급 전술훈련 마지막날 훈련을 마치고 복귀하던 수색대대 차량이 졸음운전으로 춘천-사창리 구간 국도변 가드레일을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 사고에서 병력수송을 하던 K-511 2-1/2톤 트럭이 가드레일을 뚫고 전신주를 충돌하였는데, 그 전신주가 그대로 차량 위를 덮쳐 뒤에 타고 있던 상병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탑승자들이 부상을 입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숨진 상등병은 쓰러지는 전신주에 그대로 덮쳐져 화를 면하지 못한 안타까운 상황이였다. 그런데, 이 사고가 더 안타까운 이유는 사고 상황을 접수받고 출동한 정비대대 10톤 구난차량이 긴급한 상황에서 과속을 하다 운전부주의로 사고현장 5km를 앞두고 전도되어 구난차량을 운전하던 운전관은 경상을 입었고, 선탑임무를 실시하던 차량정비관은 중상을 입어 한 달 동안 의식을 찾지 못하다가 결국 사고 발생 40일 만에 사망하였다. 이로써 이 사고로 발생한 사망자는 총 2명이 되었다. 나머지 인원은 경상 및 중상이여서 잘 회복하고 전역하였다

이 사고에서 숨진 상병은 사후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고 1계급 추서되었다. 당시 상병의 부모님이 사단에 보낸 편지가 있는데 이 내용이 '국가를 위해 희생한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와 관련하여 본인들은 어떠한 수사요청도 하지 않고 다만 아들의 희생이 귀감이 될 수 있도록 기억해달라' 정도의 내용이었다. 이 내용은 곧장 귀감사례로 선정되어 국방일보에 게재되었고, 장례도 최고 예우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단본부 내부에 해당 상병을 기리는 건물이 있다.

그러나 구난차량에서 숨진 정비관은 선탑임무 부주의에 대한 유족의 이의제기로(당시 구난차량 전도사고는 1차적 접촉사고 후에 운전관/선탑자가 지속운행가능이라고 판단하여 운행하다가 이들이 발견하지 못한 뒷바퀴 이탈로 인해 벌어진 2차사고이다. 유족 측에서는 부대에서 강제로 지속운행 지시를 하였다고 주장한다) 1계급 추서되지 못하고 중사계급으로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017년 9월 기준으로 숨진 상병의 유족은 매년 묘지를 방문할 때마다 숨진 정비관의 묘에도 헌화를 하고있다. 여담으로 정비대대 공원에는 숨진 정비관을 기리기 위한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당시 부대입구에 설치하려고 정비대대장이 건의하였으나 사단에서는 유족의 이의제기로 인하여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금지원은 커녕 설치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반발한 대대장이 자신의 사비로 설치하였다. 이 대대장은 이후에도 원주, 춘천에서 근무하며 상급부대 지시를 무시하고 부하를 위한 부대운영을 했다.

2013년 가을쯤 다른 포대에서 한창 유행하던 살인진드기에 감염되어 병사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이 병사는 서울에 있다는 큰 의무대까지 실려갔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3년 중순 78연대 1대대의 유격훈련 마지막 날에 인접대대(3대대)의 부대원이 탈영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당초 예정된 복귀 행군을 취소하고 이들을 탈영병 추적에 동원하기 위해 급히 예정된 루트를 수정 급속코스로 복귀행군을 하였다, 다행히도 해당 탈영병은 새벽에 신병이 확보되어 유격으로 골골대는 상황에서 탈영병을 쫓는 대참사는 피할 수 있었다.

대학에서 컴퓨터공학과, 3사관학교에서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임관 후 첫 근무지로 2008년 7월부터 2009년 10월까지 1년 4개월 동안 27사단 정보통신대대에서 근무했던 유호철 대위의 사망 사건에 대해 논란중이다. 군에서 제27보병사단 정보통신대대, 수도방위사령부 제1경비단 등 3개 부대에서 7년간 정보통신 장교로 근무하면서 군 건축물 내에서 통신선로 보수 및 설치작업을 하며 지속적으로 석면에 노출되었던 유호철 대위는 2014년 8월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2015년 1월 의병제대 후, 국방부와 소송 중이던 같은 해 3월 26일 연세대학교의료원 세브란스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유호철 대위에게는 부인과 갓 태어난 아들이 있있고, 게다가 국가유공자 및 관련하여 당사자로서 소송 증에 판결을 일주일 앞두고 사망하여 소송종료 사유로 소송까지 중지되어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하였다. 2018년 4월에 청와대 웹사이트에 유 대위의 대한 청원이 올라왔으나 30일간 총 청원자수가 20만명을 넘지 못해 청와대의 답변을 듣지 못했다. 기사 청와대청원글

8. 여담



[1] 현재는 정문 상부 판넬이 전광판으로 개수되어 있다.[2] 화악산이 악명 높은 이유는 매우 가파른 업힐이기때문이다.[3] 군사원조단 산하에는 제1이동외과병원도 있었지만 지역도 다르고 별도로 움직였다.[4] 반면 제100 군수사령부는 경비대대가 따로 없어 제103공병대대의 2개 중대는 도로 경비, 1개 중대는 탄약고 경계를 담당하였고, 추가로 병력을 빼서 지원나온 미 헬기장 경계까지 담당해야 했다.[5] M48A5K를 운영한다[6] 제3공화국의 그 중앙정보부장 맞다.[7] 관동군 59사단 출신이며 번개장군으로 유명했다. 간략한 행적은 송호성 장군 맨 마지막 문단 참조.[8] 2군단장, 제2군사령관, 합동참모본부 본부장 역임[9] 황포군관학교 제10기 졸업[10] 한국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11] 5군단, 1군단 참모장, 50사단장, 육군 인사참모부장 역임[12] 31사단장, 국방부 재정국장, 제3관구사령관, 1야전군사령부 인사참모[13] 육본 인사참모부장, 육군 군수기지사령관(현 군수사령관), 국방대학원장 역임[14]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3군사령부 참모장, 육군대학 총장 역임[15] 육군교육사령관, 육군 5군단장, 합참 정보국(현 국방정보본부)장 역임[16] 국방부 차관, 9사단 포병사령관(현 화력참모) 역임[17] 육군교육사령관, 제1야전군사령관,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 역임[18] 이기자 유치원 앨범에서 나오는 원장 선생님 짤로 알려졌다. 퇴역 후 금오공업고등학교 4~5대 교장을 역임한 경력이 있다.(1985년~1992년) 금오공고 링크[19] 해남군 삼산면 출생[20] 육군교육사령관, 3군단장, 합동참모차장 역임[21] 미8군 한국군지원단장, 국방부 차관보 역임[22] 육군의 얼마 없는 참군인이었으나 아래 부하였던 공군 중령의 군사기밀 유출사건으로 경질되었다. 출처[23] 27사단장 역임 후 제3야전군사령부 참모장, 육본 인사참모부장, 육군학생군사학교장 등을 거쳤다. 예편 후 군인공제회 감사로 임명되었다.[24] 군단장 진출이 유력했으나 흑금성 사건으로 구속되었다.[25] 유승호 전입 당시 사단장이었으며 이후 육군미사일사령관을 역임했다.[26] 27사단장 역임 후 교육사령부 교육훈련부장으로 영전하였다.[27] 수도방위사령관을 역임 후 대장 진급하여 제2작전사령관에 취임하였다. 직속상관이자 육사 2년 선배인 김운용 2군단장이 대장진급과 동시에 3군사령관으로 영전되자 잠시 2군단장 직무대리를 수행했다는데, 2군단 예하 사단장들 중 최고참이었기 때문이다. 15사단장은 1기수 후배 7사단장은 2기수 후배.[28] 前 7포병여단장 출신으로 2017년 9월 발표된 장성급 인사에서 진급과 동시에 영전하였다.[29] 그가 유튜브에 올리는 대부분의 군대 썰은 이기자 부대 복무 당시의 썰이다.[30] 이기자 출신 가오가이 군필 나는야 진짜 사나이[31] 조교 출신 7:45[32] 당시 이진원(육군사관학교 39기) 사단장이 조교로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유는 불명.[33] 현.지상작전사령부[34] 1984년 중창단 '덧마루'를 결성하여 '길을 잃은 친구에게'라는 곡으로 장려상을 수상함.[35] 제27보병사단이 제2군단 예비사단 역할을 해야하기에 1990년대 중반에 1군에서 가장 먼저 포대가 K-55로 자주화가 되었다.[36] 전화기가 흔치 않던 당시엔 긴급 신고처였다.[37] 광덕산 포천 경계의 고개를 현역 장병, 장교 등 군 관계자 및 이곳을 거쳐갔던 전역자들은 속칭 캐러맬고개라고 부르는데, 이에 대해서는 백운산 문서 참조.[38] 일반적으로 장교나 부사관에게는 양성교육과정이 아닌 이상 얼차려를 주는 규정은 없고 그게 있다해도 얼차려를 주지 않는다. 대신 평정을 최하점으로 주면 장교의 경우 중위를 끝으로, 부사관의 경우는 하사를 끝으로 군생활 마감 확정이다. 장기복무자에게는 타격이 크나 단기복무자라고 개의치 않아하거나 단기라 해도 빡세게 하는 장교/부사관이 있다는건 Case by case다.[39] 탄약고 앞이 5중대 막사 옆문 쪽이다.[40] 중대형 붉은 단층막사이다.[41] 이진원 장군의 고향은 공주이고, 송영무 국방부 장관의 고등학교 후배이다.[42] 필승 유치원, 충성 유치원, 상무 유치원 이나 백골 유치원 등 당시는 흔했다. 백골 유치원의 경우 이름이 너무 노골적이라 그런지 이후 진백유치원으로 개명되었다.[43] 선봉 유치원의 경우 원장이 무려 포스타다.[44] 여자 선생님들인데 군복은 안 입고 있었다고 한다.[45] 안경 착용자는 훈련중 안경이 상당히 거추장 스럽다는 사실은 자타공인.[46] 전인범 사단장 시절이고, 제27보병사단은 짧은 머리규정이 완화된 반면 제3보병사단이 그런 헤어컷을 채택한 상태다. 일명 백골컷이다. 백골컷을 만든 사람은 비육사 최초 특전사령관이 되었다.[47] 육군사관학교 39기로 대령 시절에 이미 화천에 근무한 적이 있는데 7사단 포병연대장을 지냈다. 그 직전에는 청와대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탈모 때문에 고생을 한다고 한다.[48] 하지만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에선 그런 건 없다. 당장 김정수 사단장이 직통으로 중장 진급과 동시에 수도방위사령관으로 영전되었다.[49] 15사단 섹터 내에 있었다[50] 원래는 특전부사관이었으나, 허리 부상으로 야전 전환된 케이스다. 현재는 전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