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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미얀마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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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미얀마 군부 쿠데타
၂၀၂၁ မြန်မာနိုင်ငံအာဏာသိမ်းခံရခြင်း
2021 Myanmar coup d'état
일시
2021년 2월 1일 (현지시각)
장소
파일:미얀마 국기.svg 미얀마 전국
원인
군부의 2020년 11월 총선 결과 불복
유형
군사반란(군사 쿠데타), 내전
교전 세력
파일:미얀마 국기.svg 미얀마 정부 파일:미얀마군기.svg 미얀마군
지휘관
파일:미얀마 국기.svg 아웅 산 수 치
파일:미얀마 국기.svg 윈 민
파일:미얀마군기.svg 민 아웅 흘라잉
파일:미얀마 국기.svg 민 슈웨[1]
병력
불명
피해
도시 내 주요 도로 및 인터넷통신망 일시적 차단
약 4개월간 양곤 국제공항 폐쇄
NLD 회원 3명 사망
진행 상황
군부의 군사반란 성공, 국가비상사태 선포
아웅 산 수 치 국가고문과 윈 민 대통령 구금
국가행정위원회 수립, CPRH 수립 및 반군과 연합
영향
미얀마군 최고사령관 민 아웅 흘라잉의 정권 찬탈
민주화 운동 발발 및 2021년 9월 경부터 본격적으로 내전 발발

1. 개요2. 배경
2.1. 빵롱 조약(Panglong Agreement)2.2. 소수민족, 로힝야 족, 군부의 쿠데타2.3. 군부의 공고한 지위2.4. 8888 항쟁의 악몽2.5. 2020년 11월 총선2.6. 시진핑의 미얀마 방문2.7. 정부의 개헌 요구와 군부의 쿠데타
3. 경과
3.1. 2021년
3.1.1. 2월 1일3.1.2. 2월 2일 이후: 민주화 운동 및 내전3.1.3. 3월 29일 미얀마 군의 날 행사3.1.4. 4월3.1.5. 5월3.1.6. 9월 이후: 본격적으로 내전으로 격화3.1.7. 10월3.1.8. 12월
3.2. 2022년
3.2.1. 1월3.2.2. 2월3.2.3. 4월3.2.4. 5월
3.3. 2023년
3.3.1. 1월
3.4. 2024년
4. 반응5. 전망
5.1. 미국-중국 패권 경쟁과의 연관성
5.1.1. 다른 해석
5.2. 인도적 개입 문제5.3. 사실상 내전 중 및 2021년 9월 경부터 본격적으로 내전 발발
6. 참고 자료7. 여담
7.1. 하나회 숙청과의 비교

[clearfix]

1. 개요

2021년 2월 1일, 미얀마에서 일어난 쿠데타. 미얀마의 국부 아웅 산의 딸인 아웅 산 수 치가 이끄는 집권 국민민주연맹(NLD)이 압승한 2020년 11월 총선 결과에 군부가 불복하며 일어났다.

미얀마 군부는 쿠데타 이전부터 이미 정부에 대한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문민통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 1988년 쿠데타에 이어 2021년 쿠데타에서도 별다른 저항이나 무력충돌 없이 소규모로 굉장히 쉽고 빠르게 쿠데타에 성공하면서 미얀마의 불안정했던 민주주의 정권은 5년 만에 무너졌다.

약 두 달 뒤인 4월 1일, 임시정부 측은 소수민족과 반군들을 포함한 통합 정부를 구성, 본격적으로 내전을 시작했다.

2. 배경

2.1. 빵롱 조약(Panglong Agreement)

아웅 산 수 치의 부친인 아웅 산은, 반영 독립 운동을 주도하던 운동가였다. 그는 30인의 동지와 함께 일본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버마로 돌아와 1942년부터 44년까지는 당시의 일본 제국의 편을 들어 영국군의 후방을 교란하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나, 1945년부터는 영국의 편으로 돌아서서 일본을 대상으로 무장 투쟁을 한다. 그리고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버마는 다시 영국령이 된다. 아웅 산은 영국으로 가서 버마의 독립을 요구하고, 1947년 2월 12일에 소수 민족 지도자들과 함께 영국과 빵롱[2] 조약#을 맺는다. 그 결과 버마는 자치 공화국이 되었다.

문제의 빵롱 조약에서, 아웅산은 친 주와 카친주[3] 지역에 거주하던 소수민족의 협력을 얻어 버마를 자치 공화국으로 독립시키는 대신, 이들 민족의 자치 및 독립 여부를 추후 논의하기로 하고 이를 6조에 남겼다. 소수민족의 수가 적음에도 자치권을 요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중간에 갈아탄 아웅 산과는 달리 소수민족 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국에 협력해서 일본과 싸웠기 때문이다. 이들은 추축국에 협력하지 않고 영국에게 협력했으므로 명분에서 더 유리했고, 그래서 인도가 그랬던 것처럼 조약에 따른 독립을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웅 산은 불과 5개월 뒤에 암살당하고, 이후의 버마 및 1962년 이후의 군사정권은 소수민족의 자치 및 독립 요구를 묵살한다.

또한 조약문 7조에서는 버마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국민으로서 권리와 혜택을 받는다고 서술되어 있다. 독립 조약으로서는 새삼스러운 문장이다.[4] 하지만 이는 버마 측에서 영국에게 '그 외의 소수 민족과 로힝야 족을 같은 연방의 국민으로 안고 가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삽입된 문장이다.[5] 7조를 소수 민족 입장에서 보자면, 순전히 땅덩어리를 더 얻어내기 위한 가식이었고 6조처럼 묵살되었다. 로힝야 족 입장에서 보자면, 쿠데타로 군부 정권이 대두하기 전까지는 괜찮게 지켜지고 있었다.

오늘날 미얀마에서는 빵롱 조약이 조인된 2월 12일을 연합의 날(union day)로 기념하지만, 실제로는 빵롱조약은 연합(union)에 대한 조약도 아니었고, 미얀마는 독립한 순간부터 연합(union)의 정신으로 연방을 유지한 적도 없었다.

2.2. 소수민족, 로힝야 족, 군부의 쿠데타

군부에게 제대로 기만당한 소수민족의 불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터져나왔지만, 일단은 무장 투쟁이 아닌 정치적인 갈등으로 번졌다. 게다가 7조에 따라 버마 연방의 연립 정부에 참여한 로힝야 족은 인구수가 많아서 영향력이 컸는데[6], 해당 항목에서 보듯이 미움을 받는 입장인데도 처신을 제대로 한 것도 아니었다. 결국 신생 버마 연방의 내각[7]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되고, 우 누 총리는 어떤 과업을 진행하기에 앞서 의회의 신임을 유지하는 것으로도 벅찬 상태가 되었다.

이 문제는 결국 사회주의자이자, 아웅 산의 정치적 동지였던 네 윈이 1962년 3월 2일에 벌인 군사 쿠테타로 군부가 집권하면서 강제로 해결된다.[8] 네 윈은 서방과의 모든 조약을 무효화했고, 그 조약에는 뺑룽 조약도 포함되었다. 영국 지배 시절의 플랜테이션 농장에 흩어져있던 로힝야 족은 강제로 소개되어서 아라칸 지역[9]으로 몰아넣어졌고,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소수민족은 무력으로 토벌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해결한 것이 아니었고, 이는 소수민족들을 제대로 분노하게 만들어 소수민족들이 무장단체를 결성하여 미얀마 정부와 반정부 투쟁을 벌이면서 소수민족 반군과 로힝야 학살 문제는 2021년까지 현재 진행되고 있다. 군부가 해결하지 못한건 당연하거니와,[10] 버마족의 민정 세력들이 주축이 된 아웅 산 수 치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다 못해 미얀마 군부의 로힝야 학살을 묵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서방국가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2.3. 군부의 공고한 지위

1962년 쿠데타에 성공한 이후 미얀마 군부는 사실상 미얀마 내 모든 권한들을 장악한 상태였다.

미얀마 헌법 상 미얀마군 통수권자는 미얀마군이 스스로 임명한 총사령관이고[11] 대통령과 총리는 군부에 명령할 권한이 없다. 특히나 미얀마에 자유선거를 재도입하는 과정에서 만에 하나 있을 개헌을 막기 위해 개헌을 저지할 만한 의석 25%를 군부가 임명한다. 심지어 미얀마는 헌법 40조에서 비상사태시 군 총사령관에게 권력을 인계할 수 있다고 명시해 아예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조항까지 만들어놓기도 하였다. 기사[12][13]

또 군부가 배후에 있는 기업인 '미얀마 이코노믹 홀딩스(MEHL)'는 일본 기린 홀딩스 계열 미얀마 브루어리와 만달레이 브루어리, 한국 포스코그룹 계열사 포스코 C&C 미얀마 등에 지분투자를 하여 미얀마의 경제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로 인한 문제점이 상당한데 2020년에 낸 국제앰네스티 보고서에도 확인 가능하다.

2.4. 8888 항쟁의 악몽

미얀마의 군사독재 기간은 1962년 네 윈 미얀마군 총사령관이 쿠데타를 일으켜 사회주의 독재 체제를 세운 이후 2015년 총선에서 민주화 세력이 승리하기 전까지 무려 53년 간이었다. 오랜 기간의 군부 통치 속에 미얀마 내 시민사회 세력들은 사실상 역량을 상실하다시피 했다.

그나마 1988년도에 군부의 독재에 대항해 일어났지만 군부는 유혈 진압으로 대응, 당시 미얀마 시민 3,000여 명이 총에 맞아 사망하고 10,000여 명이 실종됐다. 그래도 8888 항쟁의 결과로 네 윈이 실각하고 사회주의가 철폐되면서 잠시 민주화의 바람이 불며 1990년에 자유총선이 치러지기는 했다. 이 시기에 연방이 버마 족만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천명하기 위해, 국명을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신생 군부세력들은 자신들의 국민통일당이 선거에서 패하는 결과가 나오자, 선거결과를 무효화하고 다시 독재정치를 펼치며 시위의 성과도 일장춘몽이 되어버렸고, 2007년에도 승려들을 필두로 또다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으나 이마저도 유혈진압으로 실패했다.[14]

이로써 미얀마에 자유총선이 다시 치러질 때까지 22년의 세월이 흘렀으며 이것마저 반쪽자리였으며 결국 정권이 교체될 때까지 25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자신들의 권한이 위협당할 경우 미얀마 군부가 시민들에게 어떠한 만행을 할 수 있는지를 똑똑히 보고 또한 시위로 얻은 성과가 어떻게 빼앗길 수 있는지를 똑똑히 목도한 미얀마의 많은 수의 기성세대들은 사실상 미얀마 군부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은 포기한 상태다. 군부에서 통금령을 실행하자 전날 10만명이 운집했던 양곤 시위의 참가 인원이 절반 가까이 줄어들 정도. #

물론 군부도 미얀마 시민들이 유혈진압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거리낌없이 쿠데타를 실행했고, 그 후 어김없이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명령하면서 이러한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

2.5. 2020년 11월 총선

이에 대해 국민민주연맹은 2020년 초반 개헌을 시도하며 군부를 견제하려 했지만 당연히 군부가 반발하여 통과되지 못했다. 그러나 미얀마 군부의 지속적인 독재 야욕, 반민주적인 행태, 극단적인 버마 민족주의, 부정부패에 지친 미얀마인들은 2020년 11월에 치러진 미얀마 총선에서 아웅 산 수 치국민민주연맹에 선거 가능한 75% 의석 중 무려 83.2%를 몰아주면서 전체 의석의 62.4%를 확보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에 따라 국민민주연맹은 독자적으로 정부를 구성할 권리가 생겼고 미얀마 정부는 이 힘을 바탕으로 1월 5일, 군부에게 25%의 의회 의석을 할당해주는 헌법을 개정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군부는 당연히 이를 거부하고 반발하였으며 이는 쿠데타의 원인이 되었다. ##

2.6. 시진핑의 미얀마 방문

그 결과 군부와 정부의 긴장이 한창이던 1월 17일에 시진핑이 미얀마를 방문하였고, 정부 지도자인 아웅 산 수 치와 군부 지도자인 민 아웅 흘라잉을 각각 접견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왕이 외교부장도 미얀마를 방문해서 군부와 논의를 했다.[15]

원래 미얀마 정부는 서방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었으나, 군부의 로힝야 인종 청소로 인해서 지원이 거의 끊긴 상태였다.[16][17]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정부는 중국에 접근하게 된다. 국민민주연맹의 대변인 마이오 킨눈(Myo Nyunt)은 시진핑이 미얀마의 특수성을 이해하고 있으며, 로힝야족 인종 청소에 대한 도덕적 지원을 해주기 위해 방문했다고 밝혔다. 또한 이 방문 동안 일대일로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미얀마 군부는 중국이 국경지대의 소수민족 민병대들에게 자금과 무기를 조달해준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고 중국에서 미얀마를 사실상 속국으로 취급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터라 그 대안으로 러시아에 접근한다. # 그래서 군부는 정부의 정상 회담 결과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 간단히 말해, 군부는 그냥 묻어버리길 원했고, 중국에게서 무언가를 빚지길 바라지 않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중국과 러시아는 민주화 운동을 좋지 않게 보고 있으며, 간접적으로 군부의 편을 들고 있다. 미얀마 군부가 그들을 좋아하든 말든, 관계없이 말이다.

2.7. 정부의 개헌 요구와 군부의 쿠데타

총선에서 승리한 아웅 산 수치와 아웅 산 수치를 지지하는 정치인들과 정당들이 현재 미얀마에서 군부가 상·하원 의석 25%를 할당받고 내무·국방·국경 경비 등 치안과 관련한 3개 부처의 수장을 맡도록 한 현행 헌법을 개헌해서 미얀마 군부에게 강제로 할당된 국회 의석수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부에서 미얀마 군부의 권력을 축소하려 하면서 군부와 정부 간 사이가 틀어졌다.

결국 군부는 가질자신들의 권력을 빼앗기느니 미얀마 정부를 뒤엎기로 결심한다.

우선 군부가 미얀마 정부에게 자발적인 의회 해산 후 군부 주도하의 재투표를 실시할 것을 강요하였고,[18] 미얀마 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더는 참지 않기로 결정한 군부가 의회 소집 시작일인 2월 1일에 바로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와 정부를 강제로 해산한 후 권력을 장악했다. 경찰조차 군부의 산하에 있는 기관이기에, 미얀마 정부는 막상 쿠데타가 벌어지자 군부에 대항할 수 있는 병력이 전혀 없었다. 군부의 공고한 지위를 보장하는 현재의 미얀마 헌법에서조차 미얀마군의 쿠데타는 명백한 위헌이다.[19]

군부가 아웅 산 수 치를 체포하는 순간 부정선거의 예시로 트럼프와 2020 미국 대선을 언급했다고 한다.

군부 쿠데타를 나흘 앞둔 1월 28일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과 군부 측의 막판 담판이 결렬되면서 쿠데타가 사실상 기정사실화됐다는 것이다. #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이 쿠데타 직전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에게 차기 대통령직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수치 고문이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자리를 제안했으나, 흘라잉 최고사령관은 이를 거부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증언이 나왔다. #

3. 경과

3.1. 2021년

3.1.1. 2월 1일

3.1.2. 2월 2일 이후: 민주화 운동 및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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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이전까지는 민주화 운동에 가까웠으며, 9월 이후부터는 미얀마 군부의 강경 대응으로 인한 학살로 인해 본격적으로 내전으로 격화되었다.

3.1.3. 3월 29일 미얀마 군의 날 행사

미얀마 군의 날 행사에서 러시아중국,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베트남, 라오스, 태국 대표가 참석하면서 사실상 군부의 쿠데타를 지지하는 입장을 드러냈다. # 특히 서로 사이가 별로 안 좋은 데도 불구하고 한 뜻으로 뭉쳤다는 데서 미얀마의 완전한 민주화가 각국의 독재정권에게는 악재임을 알 수 있다.[23]

3.1.4. 4월

최근 ASEAN이 제시한 유화책 상당수를 받아들이며 한발 물러나 있다. 서방의 제재로 군부의 돈줄이 막히고 있는데다가 미얀마 국민들의 저항이 만만치않으며, 4월 16일 벌어진 알로범 고지 전투에서 민주주의 정부와 손잡은 카친 독립군이 미얀마군 100명을 사살하고 38명을 포로로 잡은 것을 시작으로 4월 23일에는 미얀마군의 한 대대를 궤멸시키고 군 기지 10곳을 점령하는 등 서서히 미얀마 군부를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다보니 무슨 생각으로 쿠테타를 일으켰는지 모르겠다는 의견들이 많다. 비슷하게 쿠데타가 일어난 한국이나 이집트 같은 경우 반정부세력들이 전무했기에[24] 성공할 수 있었으나 미얀마의 경우 아웅산 수치라는 구심점이 있는데다가 미얀마 내에는 군부를 없앨 기회만을 노리는 소수민족 반군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얀마와 비슷한 아프리카의 경우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반군과 국민의 손에 끝장난 경우가 흔하다.

3.1.5. 5월

2021년 5월 들어서는 더욱 궁지에 몰리고 있다. 카렌족 해방군, 카친 독립군 같은 아웅 산 수 치를 지지하는 반군 단체들의 공세가 매서워지고, 5월 6일에는 카친 독립군에 의해 미얀마군 헬기가 격추되는 참사가 일어났으며 시민들이 시민군을 조직해서 맞서고 있다. 군부의 군인들마저 탈영해 시민군에 합류하고 있는데 문제는 탈영한 군인들이 영관, 위관 등 높은 계급의 장교들이라는 것이다.[25] 이들에게 시민군이 체계적인 훈련을 받으면서 군경을 상대로 전과를 올리고 있는데다가 민주정부와 손잡은 카친 독립군, 카렌 민족해방군 같은 반군과의 전투에서 연패하며 피해가 누적되고 있다. 카렌족 해방군과의 전투에서 194명이 전사하고 카친 독립군과의 전투에서는 164명이 전사하여 총 358명이 전사했다. 그에 따라 중요한 고지들을 연달아 빼앗기고 있는 실정이다. 미얀마 군부의 지도자 민 아웅 흘라잉은 홍콩 봉황TV와의 인터뷰에서 현재와 같은 저항을 예상했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저항이 이 정도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고, "100% 통제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일부 지역에는 여전히 파괴적인 행위들이 있다"고 언급했다. #

3.1.6. 9월 이후: 본격적으로 내전으로 격화

3.1.7. 10월

2021년 10월 들어서는 시민 방위군과 소수민족 반군들의 게릴라 공세에 일선장병들이 무력하게 분쇄기마냥 갈려나가고 있는데, 1592명이 전사하고 552명이 중상을 당하면서 서북부의 통제권을 소수민족 반군들과 NUG에게 서서히 빼앗기고 있는 데다가 ASEAN 국가들도 점차 지지를 철회하자 일단 수감했던 민간인 5000명 가량을 석방하며 한 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3.1.8. 12월

12월 9일 양곤에서는 기습시위를 벌이던 청년들을 향해 쿠데타군의 군용트럭이 돌진해 최소 5명이 숨지고 여러 명이 다쳤다. 그 전날에는 미얀마 중부 사가잉주의 한 마을에서 10대 청소년을 포함해 민간인 11명이 쿠데타군에 붙잡혀서 불에 타 숨진 채 발견됐다.

3.2. 2022년

3.2.1. 1월

미얀마 반군과 정부군의 교전이 계속 되는 와중에 미얀마 동부 까야주에선 반군이 정부군 진지를 공격하여 탈환에 성공하였다. #
26일 <이라와디> 등 현지 독립매체들은 “쿠데타 1년을 맞는 2월 1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출근도 외출도 장사도 하지 말자”는 글이 소셜미디어에서 확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3.2.2. 2월

미얀마 군부 쿠데타 1년을 맞은 1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시민들이 ‘침묵 파업’ 시위를 벌였다. 일부 상점은 문을 열었지만 사실상 가게를 방치했다. 한 식료품점의 매대에는 ‘모든 물품 구매 가능’이라고 쓰인 팻말 옆에 콩, 두부, 케일 등의 글자를 써붙인 빈 그릇들이 군부의 엄포를 조롱하듯 진열됐다. #

3.2.3. 4월

17일, 미얀마 국영방송 MRTV는 쿠데타 수장인 민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이 외국인 42명을 포함해 약 1천 620명의 재소자를 사면했다고 전했다. 다만 대부분이 마약 사범, 일반 범죄자이고 정치범은 해당사항이 없다고 한다. #

27일 수치 고문이 미얀마 최대 도시인 양곤의 전 주지사로부터 현금과 금괴 등 60만 달러(약 7억5000만원)에 이르는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에 대해 징역 5년 형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수치 고문의 변호인단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아직 수치 고문을 만날 수 없었다고 전했다. 앞선 여러 판결들과 이번 징역 5년 형까지 합해 선고 형량은 총 11년으로 늘어났다.

29일 현지 독립매체 이라와디에 따르면 조 민 툰 군정 대변인은 이틀 전 군정 매체와 인터뷰에서 친군부 민병대, 퓨 소 티에 대한 군정의 지원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

3.2.4. 5월

13일 이라와디 등 현지매체에 따르면, 미얀마 민주진영의 중심 축인 국민통합정부(NUG)는 전날부터 미 워싱턴에서 진행 중인 미ㆍ아세안 정상회의 현장에 진 마 아웅 NUG 외교장관을 파견했다.

3.3. 2023년

3.3.1. 1월

19일 현지 온라인매체 '킷팃미디어'가 지난 달 중앙테러위 회의록 일부를 입수해 이를 공개해, 미얀마 군부에서 갈수록 악화되는 전황에 크게 당황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

3.4. 2024년

4. 반응

4.1. 국가

4.1.1. 아시아

4.1.1.1.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대한민국
Statement by the Embassy of the Republic of Korea
(29 January, 2021)
The Embassy of the Republic of Korea in Myanmar is monitoring with concern the recent political situation in Myanmar. The Embassy is of the view that the will and voice of the people of Myanmar expressed in the elections dated 8 November, 2020, should be fully honored by all concerned parties. Any grievances or disagreements should be resolved through established legal mechanism and political dialogue in a peaceful manner. The Embassy reaffirms the strong support of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for Myanmar’s democratic transition, peace process, and inclusive economic development. The Embassy calls on all stakeholders to refrain from actions that will hurt the reform process and the interests of the people of Myanmar.

မြန်မာနိုင်ငံဆိုင်ရာ တောင်ကိုရီးယားသံရုံးမှ ကြေငြာချက်
(29 January, 2021)
မြန်မာနိုင်ငံဆိုင်ရာ တောင်ကိုရီးယားသံရုံးသည် လတ်တလော မြန်မာနိုင်ငံ၏ နိုင်ငံရေးအခြေအနေပေါ်တွင် များစွာသော စိုးရိမ်စိတ်ဖြင့် စောင့်ကြည့်လျက် ရှိပါသည်။ မိမိတို့ သံရုံးသည် ၂၀၂၀ခုနှစ် နိုဝင်ဘာလ ၈ရက်နေ့တွင် ကျင်းပခဲ့သော အထွေထွေရွေးကောက်ပွဲ၌ မြန်မာနိုင်ငံသားတို့ ထုတ်ဖော်ပြသခဲ့သော ဆန္ဒနှင့် အသံကို အပြည့်အဝ အသိအမှတ်ပြုရမည်ဟု လက်ခံထားပါသည်။ မည်သည့် မကျေနပ်ချက်နှင့် အငြင်းပွားမှုမျိုးကို မဆို တည်ဆဲဥပဒေကြောင်းနှင့် နိုင်ငံရေး ဆွေးနွေးမှုဖြင့်သာ ငြိမ်းချမ်းစွာ ဖြေရှင်းသင့်ပါသည်။ မိမိတို့ သံရုံးအနေဖြင့် ကိုရီးယားနိုင်ငံအစိုးရသည် မြန်မာနိုင်ငံ၏ ဒီမိုကရေစီ အသွင်ကူးပြောင်းခြင်း၊ ငြိမ်းချမ်းရေးလုပ်ငန်းစဉ်၊ အထွေထွေ စီးပွားရေး ဖွံ့ဖြိုးတိုးတက်မှုဆိုင်ရာ ကြိုးပမ်းအားထုတ်မှုများကို အခိုင်အမာ ထောက်ခံအားပေးကြောင်း အတည်ပြုပါသည်။ မိမိတို့သံရုံးသည် မြန်မာနိုင်ငံသားများ၏ ပြုပြင်ပြောင်းလဲရေး လုပ်ငန်းစဉ်များနှင့် အကျိုးစီးပွားအား ထိခိုက်နစ်နာစေမည့် မည်သည့် အပြုအမူမျိုးကိုမှ ဆောင်ရွက်ခြင်း မပြုပါရန် တာဝန်ရှိသူများအား တိုက်တွန်းလိုက်ပါသည်။

[번역문]
대한민국 대사관 성명
(2021년 1월 29일)
주미얀마 대한민국 대사관은 미얀마의 최근 정세에 대해 우려하고 있습니다. 대사관은 2020년 11월 8일 선거에서 표출된 미얀마 국민의 의지와 목소리가 모든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떠한 불만이나 불화도, 확립되어있는 법적 절차와 평화로운 정치적 대화로 해결되어야 할 것입니다. 대사관은 미얀마의 민주화와 평화 정착, 포용적인 경제 발전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강력한 지지를 확인합니다. 대사관은 모든 이해당사자들에게 미얀마의 개혁 과정과 미얀마 국민들의 이익을 해치는 행동을 자제해 줄 것을 촉구합니다. }}} ||[아시아인권의원연맹_보도자료] 미얀마 군부 쿠데타를 강력히 규탄한다!
-아시아인권의원연맹, 미얀마 군부 쿠데타 규탄 성명 발표

□ 아시아인권의원연맹(회장: 하태경 의원)은 미얀마 군부가 민주 정부를 전복시키고, 비상사태를 선포한 쿠데타에 대하여 강력히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 연맹 회장 하태경 의원은 “한국도 민주화 성취를 위해 과거 많은 희생을 치렀으며 이번 미얀마 쿠데타는 민주주의에 대한 반동이자, 반역사적 사안으로 절대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면서 “국제사회는 쿠데타를 주도한 군인들이 쿠데타를 철회하고 미얀마 민주정부가 다시 복권되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라고 밝혔다.

2021년 2월 2일
아시아인권의원연맹 회장 국회의원 하태경}}} ||□ 우리 정부는 최근 미얀마 내 정치적 상황에 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 우리 정부는 지난 총선에서 표명된 민주주의를 향한 미얀마 국민들의 열망을 존중한다는 점을 재확인한다.
□ 우리 정부는 또한 아웅산 수찌 국가고문 등 구금된 인사들의 즉각적인 석방을 촉구하며, 합법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절차에 따라 평화적인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를 희망한다.
□ 우리 정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국제사회와 함께 미얀마내 정세 동향을 예의 주시할 것이다.

끝. }}} ||

* 2021년 2월 2일, 외교부는 미얀마 쿠데타로 인한 국가비상사태 관련하여서 재외국민 상황을 점검하였다고 밝혔다. 또한, 항공편 운항 가능성 타진과 경제활동 계속 등 재외국민을 보호를 위해 긴밀히 대응 중이라고 말하였다. 파일:정부상징.svg
□ 외교부 재외동포영사실장은 2.2.(화) 오후 주미얀마대사와 긴급 화상회의를 가지고 미얀마 내 재외국민 안전 상황을 점검하였다.
□ 재외동포영사실장은 미얀마의 국가비상사태 관련 우리 국민의 안전 여부, 항공기 운항 동향, 통신 상황 등 제반 상황을 점검하고 미얀마 내 재외국민 보호를 위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 주미얀마대사는 △미얀마 내 우리 국민들과 비상연락망 구축 및 지속적인 안전 공지, △항공편 운항 가능성 타진, △우리 국민의 안전과 경제활동 계속 등 재외국민 보호를 위해 긴밀히 대응중이라고 하였다.
□ 외교부는 앞으로도 미얀마 국내 정세 등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사태 추이에 따른 현지 우리 국민 보호 대책을 다각적으로 모색해 나갈 예정이다. 끝. }}} ||우리 대사관에서 구호용 항공기(Relief Flight) 운항을 위해 주재국 정부와 협의를 적극 진행한 바, 미얀마 당국은 2.5(금)부터 구호용 특별기를 운영할 계획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양곤 국제공항도 2.2(화) 저녁부터 운영재개 되었습니다.(단, 공항입구에서 신분증, 항공권 예약 서류 등 확인 후 통과)

따라서 한국에서 미얀마로 입국하는 우리 국민께서는 당초대로 주한미얀마대사관에서 입국 허가를 요청하시고, 미얀마에서 한국으로 귀국하시는 국민께서는 각 항공사에 문의 후 항공편을 예약하시면 될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미얀마국제항공(MAI)의 경우, 2.5일(금)과 2.6(토) 운항 승인을 받았다고 하며, 그 이후 당초대로 화요일 운항 계획이라고 합니다.

대한항공도 2.5일(금)부터 운항 재개를 위해 미얀마 항공청과 협의 중에 있으며, 그 이후 당초대로 월, 수, 금요일 3편의 구호용 특별기 운항을 추진 중입니다.

한편, MNA(Myanmar National Airlines)를 비롯한 미얀마 국내선도 2.4부터 당초대로 운영 예정이라고 합니다.

추가로 관련 진전·변경 상황이 있을 경우 동포사회와 신속히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의안번호 : 2108338 / 미얀마 군부 쿠데타 규탄 및 민주주의 회복과 구금자 석방 촉구 결의안(대안)(외교통일위원장)

- 주문 -
2021년 2월 1일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미얀마 ‘민주화 상징’인 아웅산 수찌 국가고문을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가운데 미얀마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있다.

미얀마 군부는 지난 50년 동안 무력을 앞세워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며 권력을 유지해왔고 이 과정에서 미얀마인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1988년 민주화 항쟁과 2007년 샤프란 항쟁 당시에는 무차별적인 학살 만행을 저질러 전 세계를 경악하게 한 사실도 있다.

2015년 민주 정부를 이룬 오늘의 미얀마는 민주화를 향한 수많은 시민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싹을 틔우고, 2020년 총선에서의 압도적인 지지와 선택을 받은 민주정부를 통해 또 한 번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미얀마의 군부는 바로 이 중차대한 시기에 또다시 무력으로써 민주화의 열망을 꺾고, 국민들의 생명을 위협하며 지난 50년의 역경 끝에 만개하게 될 민주주의의 결실을 짓밟아버렸다.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이에 대한민국 국회는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 자행을 규탄하며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대한민국 국회는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를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행위로 규정하고 이를 강력히 규탄한다.

2. 대한민국 국회는 아웅산 수찌 국가고문을 비롯하여 미얀마 군부 쿠데타 과정에서 구금된 정치인 및 관계자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한다.

3. 대한민국 국회는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로 인해 현지 체류 중인 우리 교민 3,500여 명의 생명과 자유가 위협받고 있는 것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며, 미얀마 측의 우리 교민 안전 보호를 촉구한다.

4. 대한민국 국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민주주의를 적극 지지하며,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온 미얀마 국민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한다.

5. 대한민국 국회는 미얀마 군부가 표현의 자유와 신체의 자유 등 기본적 인권을 준수하고,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무력 사용을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

6. 대한민국 국회는 대한민국 정부가 UN 등 국제사회와 함께 미얀마 민주주의 질서 회복을 위해 국제적 의지를 다지고 실행할 것을 촉구한다.

- 제안이유 -
지난 2월 1일 미얀마 군부는 작년 11월 8일 총선 결과에 불복하여 아웅산 수찌 국가고문을 비롯한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인사들을 구속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음.
이에 대한민국 국회는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를 강력히 규탄하며, 현지 체류 중인 우리 교민 3,500여 명의 생명과 자유가 위협받고 국제적으로 인권과 민주주의의 동반 퇴보를 부를 수 있는 것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며, 미얀마 군부가 아웅산 수찌 국가고문 등 지난 2월 1일 이후 구금한 인사들을 즉각 석방하고 비상사태를 철회할 것을 촉구하려는 것임.}}} ||
- 미얀마 국민들에 대한 폭력은 즉각 중단되어야 합니다. 더이상 인명의 희생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미얀마 군과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을 규탄하며, 아웅산 수찌 국가고문을 비롯해 구금된 인사들의 즉각 석방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민주주의와 평화가 하루속히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Use of violence against the people of Myanmar must stop now. There should not be any more loss of lives. We condemn the violent suppression of protests by the military and the police forces and strongly call for the immediate release of all those detained,

- including State Counsellor Aung San Suu Kyi. We stand firmly with the people of Myanmar for a quick, peaceful restoration of democracy.

#JusticeForMyanmar
#StandWithMyanmar}}} ||
4.1.1.2.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4.1.1.3.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30]
4.1.1.4. 파일:방글라데시 국기.svg 방글라데시
4.1.1.5. 파일:ASEAN 깃발.svg 동남아시아
4.1.1.6. 파일:일본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일본

4.1.2. 오세아니아

4.1.2.1. 파일:호주 국기.svg 호주
4.1.2.2.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뉴질랜드

4.1.3. 아메리카

4.1.3.1.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4.1.3.2. 파일:캐나다 국기.svg 캐나다

4.1.4. 유럽

4.1.4.1. 파일:유럽 연합 깃발.svg 유럽연합
4.1.4.2.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
4.1.4.3.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이탈리아
4.1.4.4.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4.1.4.5.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튀르키예
4.1.4.6. 파일:바티칸 국기.svg 바티칸
4.1.4.7.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노르웨이
4.1.4.8. 파일:러시아 국기.svg 러시아
러시아중국과 함께, 미얀마 군부에 대한 제재에 거부권을 행사한 나라이다.

4.2. 국가 외

4.2.1. 파일:UN기.svg 유엔

4.2.2. 단체

4.2.2.1. 페이스북

4.2.3. 언론

4.2.4. 경제계

5. 전망

단편적인 정보만 접해서는 군부가 잘 굴러가던 민주주의 정부를 무리하게 뒤집은 쿠데타로 단순하게 해석하여 왜 쉽게 진압되지 않는지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지만,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비록 민주정부에 대한 쿠데타라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군부가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는 불완전한 민주화 구도에서 긴장과 협조를 반복하던 정부와 군부가 물밑 수 싸움 끝에 설마하던 무력으로 뒤엎어 버린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일단 미얀마 국내에서는 아웅 산 수 치를 비롯하여 민주정권의 주요 정치인들이 체포, 연금당했고, 정권 이양이 강제로 이루어졌다. 더불어 미얀마 헌법부터가 쿠데타 이전부터 미얀마 군부의 권한을 명시하고 있었고, 군부에 도전할 만한 개별 무장세력이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당장은 군부가 실질적인 주도권을 장악한 상황이다. 설령 정치적으로 어떻게 잘 타협하여 주요 정치인들이 가택연금에서 풀려난다고 해도, 군부의 일방적인 정치 간섭을 막는 개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비슷한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으니 사실상 민주주의의 이름만 빌린 꼭두각시 정부에 불과한 꼴이다.

그리고 3월에 들어서는 시민들도 총기와 수류탄들을 탈취하거나 시민에 의해 경찰, 군인들이 사망한 사례가 나오는 등 이 상황이 악화된다면 시리아 내전이나 1979년 군부 쿠데타 이후 군부 독재정권과 반정부군 세력 간 내전을 겪었던 중남미의 소국 엘살바도르와 같이 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실제로 시리아 내전의 원인 중 하나가 시리아 국민들이 정부와 정부군에 대한 반감으로 무장한 채로 정부군들과 경찰들을 사살했기 때문이다.

사실 미얀마 군부가 선거에 불복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군부는 1980년대 후반에 8888 항쟁으로 입지가 악화되자 네 윈을 실각시켰고 가까이 가까운 시일내에 권력을 민간에게 되돌려주겠다며 총선 실시를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그리고 1990년 실시된 총선에서 아웅 산 수 치 여사가 이끌던 국민민주연합(NLD)이 무려 80%의 의석을 차지하면서 과도 군사정부의 후원을 받고 있던 국민통합당을 누르고 압승하자 당시 집권 군부 세력들은 선거 무효화를 선언하고 아웅 산 수 지 여사를 가택연금시켰고 결국 다시 자유총선이 치러질 때까지 22년, 정권이 교체된 것이 2016년이니 실질적으로 26년씩이나 정권을 다시 독차지했고, 2016년 총선에서 비록 정권을 내주기는 했지만 최대로 늘리면 1962년까지 무려 반세기가량 차지했던 영향력이 어디 안 가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정권이 교체되는 과정에서도 군대에 대한 영향력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다. 이른바 로힝야족 학살 사건이 벌어진 것도 이러한 군부의 영향이 지대했고, 아웅산 수 치가 학살을 막기는커녕 침묵할 수밖에 없던 것도 이러한 군부와의 관계 설정 문제에서 발생했다.[37]

현 시점에서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려면 다음과 같은 가능성들이 존재하는데, 현실적으로 모두 그다지 가능성이 높지는 않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가 적절히 섞인 사례에 속한다.

결국 민주정부가 정권을 장악했을 때 대내외적인 압력을 가하든 기습적으로든 군부를 숙청하여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하는 것[42]이 필요한데, 민주정부의 독자적인 무력이 없다시피 한 현재의 권력 구도에서는 성공 확률이 높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최근 민주정부가 소수민족 반군을 끌어들이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현 시점에서 군부가 미얀마의 국민들에게 거의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변수가 될 수 있다. 반대로 보자면 쿠데타가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성공하더라도 국민 대다수가 전혀 지지하지 않다 보니 독재가 매우 힘들 가능성이 높다. 결국 군대를 이용해서 점령 및 지배해도 국민 대다수가 지지하지 않는다면 성공하든 실패하든 미래가 무척 암울할 수 밖에 없다.[43] 예컨대 대한민국 제4공화국 당시에 유신정권에 1/3의 의석이 배분되었지만, 나머지를 두고 벌어진 선거에서도 1973년에는 146석 중 73석(50.0%), 1978년에는 154석 중 68석(44.2%)을 차지하는 등 어느 정도 지지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현 미얀마 군부가 직전의 두 차례 선거에서 투표로 따낸 의석은 고작 6~8%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군부는 쿠데타 이전까지 배정된 1/4의 의석으로 개헌에 대한 거부권만 간신히 유지해왔던 실정이다. # 게다가 반공주의산업화처럼 국민들을 유인할 이념이 있던 과거의 한국과는 달리, 미얀마는 전시상태도 아니며 직전의 민주정부가 경제적으로도 연착륙에 성공했으니[44] 쿠데타 세력에게 더 이상 자신들의 우월성을 선전할 만한 도구도 없는 셈이다.

일단 유엔 안보리 차원의 결의안은 공공의 적 중국러시아의 거부로 무산되었지만, G7EU 등 서방세계에서는 차례대로 쿠데타를 규탄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유엔 역시 주요국들 간의 정치적 알력으로 인해 거시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하고 있으나 군부의 장기집권 가능성에는 명확하게 거부감을 표현하고 있으며, 민정이양 약속을 지키라고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선 미얀마 군부는 수 치 정부가 압승한 직전 선거를 부정선거라 주장하며 1년 뒤 '공정한' 재선거를 치르겠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국제사회가 외교적 압박을 통해 이를 막아내느냐 막아내지 못하느냐가 일차적인 승부점이 될 듯하다.[45]

미얀마 군부를 말로만 규탄하고 정작 행동으로는 실천하지 않는 국제사회로 인해 미얀마인들이 절망에 빠지고 있는 상황이다. 오죽하면 얼마나 더 죽어야 UN이 행동을 할 거냐라는 비아냥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 당연하지만 말로만 규탄해봤자 실질적으로 의미가 없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미얀마 군부 또한 이걸 잘 알기 때문에 군대를 이용해서 강제진압 및 유혈사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며 실제로 사상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심지어 국민들을 향해 사격하라는 명령까지 내린 상태이기 때문에 상황이 더 심각해지고 있고 미얀마인들은 더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현재 세계 최대 패권국인 미국은 미얀마 군부 정권에 대한 규탄을 하는 것 외에는 개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미국은 현재 중국에서 퍼진 코로나 사태라는 당장 발등에 붙은 불부터 꺼야 하는 판국이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미얀마 근접국들인 ASEAN 국가들은 각자의 체제에 대한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불간섭 주의를 내걸고 있어서 미얀마 국민들에게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46]

미얀마 시민들의 처우가 어려운 것은 인정하고 그들에 대한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에 공감을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 국제사회가 개입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는 자유를 원하는 시민들의 처절한 투쟁 속에서 달성되는 것이다 라는 말은 민주화는 오로지 미얀마 시민들의 힘에 의해서만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인류역사에서 오로지 자국의 힘으로 혁명을 일궈낸 국가는 프랑스와 소련뿐이다. 미국조차 프랑스 왕실의 막대한 지원이 없었으면 독립운동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도 미국의 영향력과 지원이 있었기에 87년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여러 민주주의 국가들의 대부분은 미국과 서구권의 지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은 개입이 아니었다. 리비아 내전에서조차 서구권은 항공병력에 대한 지원을 했지만 아예 처음부터 진입하여 개입한 것이 아니다.

사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민주화를 이룩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자생적인 민주화 세력과 그를 지원하는 국제사회의 제재와 압박으로 이루었지 무력으로 해결한 사례는 이라크 후세인 정권 축출, 파나마 노리에가 정권 축출 등 몇몇 국가에 지나지 않는다. 독재정권을 무력진압을 한 사례들은 대부분 각 국가의 반군을 국제사회가 간접적으로 지원하면서 성공한 케이스였다. 그러나 이도 쉽지 않은 것이 시리아 내전처럼 흘러갈 위험성이 크다. 당시 시리아 반군을 미국과 서유럽 등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과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요르단 등 친미 성향의 아랍 군주국들이 지원하였고,[47] 반군과 전쟁을 벌이던 시리아 아사드 정부군을 러시아이란, 이라크 등이 지원하였다. 여하튼 아사드 정권만 연장되었을 뿐, 내전은 해결되기는 커녕 미-러 양국의 대리전 양상으로 번져 혼란만 가중되었다. 그렇다고 UN군을 편성하여 무력을 투과할 수도 없다. 어느 나라가 미얀마 시민들의 민주화를 위해 자국군을 보내려 할까? 상기한 이라크나 파나마 공습 같이 강대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려 있거나 그리스 내전 당시처럼 낭만주의가 퍼져있는 시대가 아닌 이상 이는 불가능하다.

흔히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UN이 설립되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UN의 설립목적은 세계평화주권보장, 인권보장이다. 이는 UN헌장에서 볼 수 있는데, UN헌장 어디에서도 정치체제에 대한 명시는 없다. 다시 말해 UN헌장에는 민주주의의 ㅁ자도 없다.[48] 다만 헌장에 명시된 인권침해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90년대에 인도적 개입이라는 이름으로 논의가 되었지만 아직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왜냐면 자칫하다가는 내정문제에 국제사회가 마음대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기 때문이고, 이는 강대국의 입맛대로 약소국의 내정에 간섭할 명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또 인도적 개입이라는 것 자체가 그 기준이 모호해서 자칫하면 히틀러의 행위의 재현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한다.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 이유로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계 주민들의 안전과 인권을 위협하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침공한 것이라고 선전했다. 사실 인도적 개입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처럼 한 국가의 주권을 제한하기에 상당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이러한 인도적 개입을 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인류가 보편적으로 생각했을 때 심각하다고 명백하게 밝혀진 경우에나 가능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후술한다.[49]

또한 미얀마 헌법상 외국군이 미얀마에 주둔하는 행위가 금지되며 이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반역으로 간주되기에 외국군이 개입하기도 어렵다. 미얀마 헌법을 묵살하는 침략전쟁으로 비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제1세계를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에서 이렇다할 제재 조치를 추가로 내리지 못한다면 정치, 경제 영역에서 여전히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군부가 더 날뛸 여지를 주는 셈이고, 그렇게 되면 미얀마 군부는 국민들이야 죽든 말든 간에 장기적으로 버티기만 하면 되기에 쿠데타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50]

KBS는 시민혁명이 패배로 가고 있다고 분석을 했다. #

미얀마 국민통합정부의 경우, 미얀마 군부와 맞설만한 무력을 가진 세력과의 협력이 절실한 상황이다. 바로 미얀마의 소수민족 반군세력인데 이들의 경우 그들을 멸망시키려는 군부에 대한 반감이 깊지만, 미얀마 국민통합정부와 소수민족 반군세력의 연대는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군부가 탄압하는 시민들도 어차피 주류인 버마족인데다가, 2016년에 미얀마 민선정부가 출범했지만 소수민족에 대한 대우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기에 소수민족들과 반군 세력들이 그들을 불신하기 때문이다. 2017년에 일어난 로링야족 학살은 민선정부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을 뿐더러, 아웅산 수치가 방관하다시피 넘어간 것 또한 통합정부와의 협력을 꺼리게 만드는 요소이다. 카렌민족해방군은 정부군과의 대립을 멈추고 정부군과 독자적인 협상을 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카렌군 소 모뚜 사이 포 사령관은 6월 9일 "지금은 전투보다 대화로 풀어나갈 때"라며 지난 2015년 체결된 NCA협정[51]을 분명하게 준수할 것을 명분으로 삼아 정부군과의 교전을 반대했다. 카친 반군은 카친 지역내에서 독자적인 지휘권을 가지겠다고 하는 등 역시 통합을 거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미얀마군이 반군을 상대로 졸전[52]을 벌이면서 약해진 틈을 타서 쿠데타에 반대했던 군인들이 무더기로 탈영한 것이 그나마 통합정부측에 희소식이다.

초창기만 해도 미얀마 군부의 변수 없는 압승이리라는 예상이 우세했으나, 친주와 민닺을 중심으로 국민통합정부 휘하의 시민군 방위군들의 선전으로 전선이 고착화되고 있다. 의의로 친주 방위군, 따무 인민방위군, 카레니 국민방위군 부대들의 지휘권이 국민통합정부에 일원화되고 있고 탈영장교들이 방위군에 합류하면서 시민군을 지휘하고 훈련시킬 양질의 장교층을 국민통합정부가 확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카친 독립군 같은 소수민족 반군들이 시민 방위군들을 훈련시키는 것도 큰 힘이 되기도 했다.

5.1. 미국-중국 패권 경쟁과의 연관성

냉전에서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전도사였고, 소련은 공산주의 혁명의 전파자였다. 물론 두 나라 모두 이해관계에 따라 자국이 추구하는 이념과 다소 동떨어진 국가들과도 손잡곤 했지만,[미국][소련] 적어도 명분상으로나마 같은 체제를 지향하고 또 그러한 방향으로 변화를 유도하곤 했다.

예컨대 대한민국만 해도 제1공화국 이래 단 한 차례도 헌법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하지는 못했다. 이승만 정권 시절 전쟁 기간 민간인 학살이 있었지만 언제까지나 전선이 낫질하듯이 왔다갔다하는 혼란 와중에 나라가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시기에나 저지른 짓이고 휴전선 일대로 전선이 확실하게 안정되고 나서는 적어도 대놓고는 못했다. 그 뒤 군사독재가 종식될 수 있었던 것도 대한민국의 기저에 민주공화국으로서의 원칙이 존재했기 때문이고, 한국 정치의 난맥상에 한반도를 수 차례 포기하려 했던 미국 정치인들을 설득했던 것도 바로 그 정신이었다. 물론 독재자들이 그 원칙을 입맛에 맞게 부분적으로 왜곡은 했지만, 냉전의 최전방에 선 위태로운 입지에서 민주주의를 전면 부정하는 순간 들어올 서방의 압박을 감당할 수 있는 지도자는 없었다. 예컨대 지미 카터가 친미 기조를 유지하던 박정희의 대한민국을 군사독재정권이라는 이유만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했으며, 그 뒤 전두환이 시위대를 폭도로 몰아 유혈진압한 5.18 민주화운동과는 달리 6.10 민주 항쟁을 묵인하고 정권을 내려놓은 것도 전국민을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던데다 강경 진압할 경우 1988년 서울 올림픽 재검토 등 일련의 외교적 압박이 따를 것이라는 서방의 경고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호치민처럼 미국에 나름 중립 내지는 우호적이던 정치인들을 공산주의라는 이유만으로 과도하게 경계하여 결국 적으로 돌린 경우도 많았지만, 그의 독립투쟁 업적 자체는 적대국으로 분류한 뒤에도 인정했으며 단지 미국이 직접 호치민을 적대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분명히 했다.

반대편에 선 소련 역시 자국이 주창한 공산주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분주했으며, 이러한 외교 정책은 공산주의의 공동 이익을 위한 주권 제한을 합리화하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으로 실체화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헝가리 혁명이나 프라하의 봄 당시 강경한 진압을 들 수 있는데, 전자야 그렇다 치더라도 체코슬로바키아의 알렉산데르 둡체크바르샤바 조약기구 잔류와 친소정책 유지를 약속했음에도 개입을 피할 수 없었다. 제3세계 국가가 소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선, 실상이야 3대 세습하는 왕조 국가일지언정 적어도 명목만큼은 공산주의 타이틀을 내걸어야 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중국이나 유고슬라비아처럼 친서방적인 정책을 펼친 공산진영 국가들조차 냉전 종식 이전까지는 결코 공산주의의 근본 원칙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2차 냉전의 경쟁자인 현대 중국의 대외정책은 미국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내정불간섭'이다. 이 '내정불간섭'의 의미를 오독하면 곤란한 것이, 중국이 말하는 내정불간섭은 타국의 외교적 주권에 대한 존중이 아니다. 사드 보복에서 드러났듯, 중국은 자국의 이해에 따라 누구보다 악독하게 주변국에 개입한다. 대신, 중국은 자국의 패권을 받아들이면 타국의 내부 의사결정 방식에는 간섭하지 않는다. 냉전기라면 불가능했을 '우파 권위주의 국가 러시아'와 '공산당 일당독재 국가 중국', '이슬람 시아파 신정국가 이란'의 친밀함은 그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쉽게 말해 미국은 타국을 평가할 때 민주주의 국가와의 대화를 선호하며 동맹들이 최대한 인권이나 자유민주적 체제를 유지하도록 암묵적인 압박을 가하지만, 중국은 타국이 공산국가든 자유민주국가든 절대왕정국가든 그 나라에서 어떤 학살극을 벌이든 "내정"으로 간주하고 오로지 중국에 얼마나 이익이 되는지만 계산한다.[55] 즉, 중국의 '내정불간섭'에는 이념과 체제에 구애받지 않고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실리적인 외교를 추구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미국의 직전 정권이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에 맞서기 위해 중국과 동일한 전략을 추구했다. 트럼프는 민주주의의 전도사 내지는 세계 경찰이라는 지위를 포기하는 대신, 중국이 그러하듯 미국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세계 전략을 구상했다. 그 결과물이 러시아튀르키예, 브라질의 권위주의 지도자들에게 접근하는 것이었고, 북한독재자 김정은에게 우호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었으며, 이스라엘의 학살과 시리아의 인권 문제에 눈을 돌리고 쿠르드를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제 와서 내정불간섭이라는 명분을 뺏아오기에는 이미 국제사회에 너무 깊이 관여하고 있었고,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미국민들에게나 어필했을 뿐 국제사회에는 이기적인 행보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게다가 강대국은 세계 질서에 관여하고 동맹국을 결속시킴으로써 얻는 무형의 이익이 크기 때문에, 명확한 비전이 결여된 근시안적인 자국우선주의 행보는 오히려 동맹국들의 불신을 사 잠재적인 패권 경쟁국과의 경쟁에서 손해를 유발하는 제 살 깎아먹기가 된다. 소련의 공산주의 이념은 소비에트 지도부의 속내야 어떻든 세계의 공산주의자들에게 혁명의 고향이라는 각인을 남겼고, 그 인식이야말로 미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국력을 가진 소련이 50여 년 동안 세계를 반분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또한 미국이 때때로 보이는 자국 우선주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럭저럭 세계의 경찰로 인정받는 것은, 어쨌든 필요할 때는 자국이 추구하는 자유·민주·인권 등에 기초한 개입 명분을 억지로나마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반미정권이라도 일단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면 적어도 대놓고 죽이려고는 들지 않는 것이다.[56] 반면 그런 노력 없이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중국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고립된 채 거의 지지받지 못하는 처지이다. 얼핏 보기에 합리적으로 보이는 트럼프식 외교정책의 딜레마가 바로 그것이다.

때문에 새로 취임한 조 바이든 행정부는 '아메리카의 복귀'를 취임 일성으로 내질렀으며, 결과적으로 전임자와의 차별을 위해서라도 민주주의 질서와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렸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미얀마와 친밀한 관계를 맺어왔고, 이번에도 군부가 쿠데타 모의를 중국과 야합했다거나 최소한 사전에 정보를 전달했다는 보도도 존재하기는 한다. 그러나 미얀마 군부는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줄이고자 개혁개방을 선택했고, 이를 위해 서방에 내세울 얼굴마담으로 수 치 여사와 정치적으로 타협했다는 분석까지 있을 정도로 불편한 관계이기도 하다. # 중국 입장에서도 당장 2021년 1월 17일의 정상회담에서 미얀마 민주정부에 힘을 실어줬고 여러 협력 프로젝트에 대한 논의들도 진행 중이었는데,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재집권한 상황이다. 한편 미얀마 군부가 북부 공산반군 문제 등으로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경계했고, 이를 위해 러시아 등에 접근했다.

그러나 중국은 어찌 되었든 일대일로에서 인도양과 중국 본토가 직결되는 육로를 제공해주는 미얀마를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이며, 상대가 문민정부이든 군부이든 긍정적인 스탠스로 접근할 것이라는 평가가 절대 다수이다. 어차피 미얀마의 국력으로는 훗날 진정한 민주화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중국에게 그때 왜 군사정부와 협력했느냐고 따질 여력이 되지 않으며, 냉정하게 말해 그럴 명분도 없다.[57] 그렇다면 중국 입장에서는 미얀마에 민주정부가 들어서든 군사정부가 들어서든 그건 미얀마인들이 판단할 문제이고, 중국은 자국의 이해득실만 따지면 된다. 그게 지금까지 중국이 주장해온 명분이기도 하고 실리에도 부합하는 일이다.

미국에서는 이번 사태가 조 바이든 대통령의 실질적인 외교 데뷔 무대 겸 대중국 견제 외교 정책의 첫 시험대인지라 상당히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미얀마 군부를 제재할 경우 미얀마를 친중으로 경도시켜 대중국 포위망에 구멍이 날 것을 각오해야 하고, 반대로 내버려둘 경우 민주주의 확산은 반미 국가에만 적용되냐는 비판과 더불어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실제로 미국은 2007년 UN 안보리에서 아직 군부가 집권 중이던 미얀마에 제재안을 채택하려다가 중국러시아가 비토하면서, 이후 미얀마의 강경한 친중·친러 노선에 한동안 골머리를 앓아야 했던 적이 있다. 게다가 민주주의 문제와는 별개로 군부든 수 치 여사든 로힝야를 둘러싼 인권 논란에서 역시 자유롭지 않은 만큼, 인권과 민주주의 사이에서 어느 정도 수위를 지키면서 압박을 가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 역시 명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대해 트럼프 행정부의 국방부 인도 태평양 차관보였던 랜달 슈라이버(Randall Schriver)#는 "버마 학살 문제에 도덕적으로 접근해봐야 답이 없으며 실리를 위해서 학살 문제는 외면할 수밖에 없다"는 요지의 인터뷰를 한 바 있다. # 다만 바이든은 개인적으로도 외교안보 분야에서의 전문성을 자부하는 정치인이고, 전임자와의 차별화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운 이상 실리주의적 외교 노선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일단 미국은 민주주의 탄압을 이유로 쿠데타 정부를 비판하며 제재를 예고하되 속도를 조절하는 방향을 선택했다.[58]

21년 5월 현재 미얀마 군부와 중국 간의 연계 정황이 포착되면서 미얀마 민주화 시위대 사이에서 반중 구호가 함께 나오고 있는 만큼 상황이 점차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는 중이다. 미얀마는 중국-인도 중간에 끼어 있다. 중인이 국경문제로 대립 중인 것은 사실이나, 자신의 인접국에 대한 개입을 순순히 허락하지 않을 것임은 명백하다.

그러나 반대로 중국 역시 미얀마에 대한 개입이 쉽지만은 않다. 국민통합정부 시민방위군 카친 독립군 민주화 시위대 같은 반군부 진영이 엄청난 반중정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인데 실제로 민주화 시위대에 의한 반중시위와 중국기업에 대한 공격이 있었고 국경에서는 카친독립군이 중국에서 오는 유조차를 로켓포로 공격하는 일도 있었다.

5.1.1. 다른 해석

내정불간섭이란 자국의 주권이 미치는 영토 내에서 발생하는 정치행위의 자주성에 타국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UN헌장에 명시되어있는 매우 중요한 원칙이며, UN을 창립한 미소 양국이 중시했던 가치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나치 독일의 팽창주의는 '독일어권 지역 내 독일계의 인권과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명분으로 오스트리아나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 다른 주권국가의 내정에 개입하면서 시작된 것이었다.[59] 안슐루스 당시엔 독일 나치당의 지원을 받는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쿠데타가 있었고, 뮌헨 협정에서도 체코슬로바키아는 주변국들의 이해타산에 의해 자국의 주권을 전혀 행사하지 못하고 영토 할양을 강제당했다. 이러한 비극의 재발을 막고자 UN헌장에서 내정불간섭이라는 원칙을 강조한 셈이다.

때문에 미국과 소련은 일단 공식적으로는 내정불간섭을 준수했다. 한국만 하더라도 제헌헌법 제정과정에 있어서 한국인들의 토론과 협의 과정에서 이루어졌지 미군이 개입하지는 않았다. 다만 비공식적으로 그리고 헌법제정에 있어서 미국식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반영할 수 있도록 제반환경을 조성했을 뿐이다.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다. 5.16 군사정변 당시 미국대사관과 주한미군이 공식적으로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압박을 넣었지만 그 이상의 개입은 국내문제라며 선을 그었다. 지미 카터의 경우에도 박정희를 부정적으로 평가했지 실질적인 위협은 하지 않았으며, 전두환5.18 민주화운동에서 대참극을 일으키고 이것이 전세계 방송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상황에서도 묵인했다. 6월 민주항쟁의 경우 레이건 정부의 압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전두환이 진압을 포기하는데 큰 요인은 미국의 압박보다는 군부의 반발이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12.12 군사반란의 주역이었던 고명승 보안사령관과 민병돈 특전사령관이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전두환이 진압을 포기한 것이었다.

물론 내정불간섭 원칙이 곧이곧대로 준수된 것은 아니다. 냉전 극초기에도 이미 소련은 동유럽권 괴뢰국들의 선거에 개입하여 공산당을 집권당으로 만들었고, 미국 역시 점령지의 공산당 활동을 탄압하거나 불법화했다. 시작부터 그러했으니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이 원칙이 더 많은 도전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특히 1960년대에 이르면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였으며[60], 소련도 1968년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발표하며 프라하의 봄을 진압했다. 하지만 양국 모두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미국의 경우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여 막대한 인명피해와 전비 부담을 져야 했고, 소련의 경우도 인명피해는 물론이요 공산권 내분을 촉발시켰다. 물론 이전부터 공산권 내부의 분쟁이 있기는 했지만, 브레즈네프 독트린은 반소 공산 국가들에 대한 개입 의지를 천명한 실질적인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1964년부터 소련과 분쟁 중이던 중국은 이 독트린에 가장 강렬하게 반발했다.[61]

하지만 이처럼 비싼 대가를 치렀기에 미국과 소련은 내정불간섭 원칙을 준수하기로 외교정책을 변경한다. 미국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여 이러한 원칙을 천명했다. 닉슨은 1969년 "이제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 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하며, 미국은 아시아 국가들과의 조약상의 약속을 지키지만 내란이나 침략에 대하여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하여 그에 대처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 독트린은 아직도 유효해서 미국이 이후 아시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사례는 없다.[62] 소련의 경우에는 공산권의 분열로 인해서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브레즈네프 독트린은 고르바초프 이전까지 존속하긴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다시는 발동되지 않았다.[63]

이처럼 미국과 소련은 내정불간섭 원칙을 잘 준수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형식적으로 이 원칙을 준수하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중국은 다르다. 중국의 외교정책의 기본 노선은 중화사상에 기반한 일대일로이다. 이는 한마디로 해당지역을 중국의 세력권 안에 편입시키겠다는 것이다. 냉전시기 소련과 미국도 이렇게까지는 안했다. 대외개입을 선언한 미국의 트루먼 독트린도 전쟁으로 피폐화된 자본주의 나라를 지원하겠다이지 어느 구역을 나누어 미국의 세력권으로 두겠다고 선언하지는 않았다.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중국의 외교정책이 다분히 제국주의적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은 잘 보면 대동아공영권 같이 상당히 제국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이러한 외교 전략은 국제협력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주권보장을 무시하는 행보이기 때문이다. 타국의 주권을 침탈하는 행위는 결국 반발과 분쟁으로 이어지게 되고, 이는 전쟁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강대국이라고 하더라도 타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은 반발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이러한 중국의 외교정책에 의한 반중 정서는 주변국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비록 중국이 내정불간섭을 외치고 있지만 이는 겉모습이지 사실상 제국주의 외교인 것이다. 사드보복에서처럼 중국의 국익에 저해된다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그 나라를 괴롭혀 중국의 요구조건을 들도록 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2000년대 경제성장 이후 강력한 달러파워로 전세계에 이러한 영향력을 펼치려 하고 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내정간섭의 사례는 아프리카에서 잘 볼 수 있는데, 아프리카에 막대한 차관과 지원금을 주면서 해당 국가의 내정에 개입한다. 심지어는 WTO라는 국제기구에도 개입한 상황이다.[64] 그렇기에 중국의 외교정책은 겉으로 내정불간섭이지만 실제로는 제국주의적 성격을 띄고 있으므로 제국주의적 외교라 불러야 한다.

자유주의 국제정치학의 관점에서 중국의 제국주의적 외교전략은 옹호할래야 옹호할 수가 없다. 자유주의적 국제정치학에서는 제국주의적 외교전략이 세계평화를 저해하는 요소이며, 없어져야 하는 행보로 지적한다. 그 이유는 제국주의는 세력균형을 붕괴시키고 국제협력을 저해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는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무력이 필요하는데, 어떤 국가도 그러한 무력을 장기간 유지할 수 없으며, 결국 그 강력한 무력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권좌를 노리기 위한 거대한 충돌과 혼란이 발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쟁의 원인으로 보았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세계 각국이 협력 공조체제를 만들어 강대국에 의한 제국주의의 출현을 막는다면 영원한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시각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 바로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이다.

반면 정치현실주의적 관점에서는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나치의 '레벤스라움', 소련의 '공산권', 미국의 '자유진영', 그리고 현대 중국의 '중화권(sinosphere)' 또는 '일대일로'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튀르키예나 러시아가 주장하는 범튀르크주의나 소위 '역사적인' 동유럽 영향권 역시 근거로 내세우는 명분은 다를지언정 본질은 같다고 본다. 이념은 포장지일 뿐이고 제국의 주변에는 반드시 '영향권(sphere of influence)'이 생긴다. 하지만 정치현실주의의 관점에서도 중국의 제국주의적 외교전락이 까이는건 마찬가지다. 여기서 제국은 사전적 의미의 제국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유의미한 플레이어로 행사할 수 있는 강대국을 말한다. 그런데 중국은 강대국 중에서 자국의 영향권을 주장할 때 타 "제국"에 비해 명분이 부족하다 미국이나 구 소련은 자국의 영향권을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따위 캐치프레이즈를 통해 더 세련된 형태로 포장하는 데 성공했고, 하다못해 다른 열강들도 민족주의처럼 최소한 같은 민족끼리는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명분을 들고 나왔다. 반면 중국은 시대가 더 발전했음에도 전근대적인 자국 중심의 낡은 포장지를 계속 사용하며 빌미를 줬다 물론 중국도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 중국은 과거의 패권국들과는 달리 내세울 만한 가치가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다. 하다못해 일제는 아시아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에 노출된 시대적 배경을 이용해 자신들을 소위 대동아의 보호자로 선전할 수 있었고, 독일은 서구 민주주의의 실패와 대공황의 혼란상 와중에 빠르게 질서를 회복하며 주변국들에게 파시즘의 효율성을 선전할 수 있었다. 소련은 '평등'이라는 인류 본질의 이상과, 불과 20여 년 만에 가난한 농업 국가를 세계 제2의 공업 강국으로 탈바꿈시킨 저력을 통해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홍보했다. 미국 역시 '자유'나 '인권'이라는 보편타당한 가치, 아메리칸 드림으로 상징되는 본토의 무한한 재화, 그리고 대한민국 같은 극적인 성공 사례와 냉전 승리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한마디로 이들은 맞든 틀리든 "저들의 체제는 이러저러해서 실패했다", "우리 질서만 잘 따라오면 부강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줬다. 반면 현대 중국의 경제 체제는 공산주의라 부르기 어려우며, 국가 주도의 개발독재 같은 건 이미 식상해진 레퍼토리이며, 자유도 평등도 인권도 남들에게 선전할 만큼은 되지 않는다. 기술적으로 발전한 국가이긴 하지만 과학기술 자체만으로 이념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범민족주의를 주장하자니 당장 자국 내 소수민족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처지다. 도널드 트럼프고립주의를 제창하자마자 시진핑이 여러 국제기구에서 스스로를 애써 자유무역의 수호자라 강변했던 것도, 그만큼 현대 중국이 가진 독창적인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하나 따져보면 할 수 있는게 없으니 포장지 다 뜯어제낀 채 대놓고 국익우선주의를 내세우는 것이다

흔히 트럼프 정부시절 미국이 세계경찰적 지위를 포기했다고 인식하지만, 실제로는 닉슨 독트린을 기점으로 세계경찰적 지위를 포기했다. 그리고 잘 따져보면 트럼프 정부도 외교정책 기조에는 변화가 없었다. 러시아와 접근하려 했지만 러시아 스캔들로 가까워질 수 없었고, 튀르키예이스라엘은 오랜 우방국이었으며, 이스라엘의 학살은 정말 오랜 기간 문제가 되고 있는 사안이다. 시리아의 인권문제를 눈 감은 것은 트럼프 정부가 아니라 오바마 정부 시절이었다.[65] 굳이 파격적인 행보라면 북한김정은과 만난 것인데 문제는 그저 만났을 뿐이다. 오히려 파격적이고 실리적인 외교를 보여준 것은 오바마 정부였다. 오랜 적국이자 공산국인 쿠바와 외교를 정상화하며, 이란 핵협상을 이뤄냈다.[66]

트럼프의 외교정책은 실리적 외교정책이 아니라 고립주의 외교이며, 이는 중국의 내정불간섭이라 주장하는 제국주의 외교와는 완전히 다른 외교정책이다. 실제 트럼프 정부의 외교정책은 타국문제에 신경쓰지 않겠다는 것이지 중국처럼 타국 내정에 악독하게 개입하여 중국 세력권을 만들겠다는 외교정책이 아니었다.

미얀마는 중국의 입장에서 동남아시아에 있는 중요 우방국 중 하나이다. 동남아시아의 베트남하고는 철천지 원수이다. 다른 동남아 국가들하고의 관계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다. 그렇기에 중국은 문민정부던 군부정부던 그저 우호적인 스탠스만 이뤄진다면 크게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중국은 미얀마에서 이뤄지고 있는 반중여론에 대해서 상당히 당혹해하고 있으며, 그래서 공식적으로 미얀마의 현 상황을 원치 않는다고 발표했다.

홍콩 민주화 운동과 달리 미얀마 민주화 운동은 중국 내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개입할 여지가 있다고는 하나, 닉슨 독트린의 정책적 기조가 아직 유지되고 있으며 베트남 전쟁의 쓰라린 경험이 있는 미국의 입장에서 미얀마에 군사개입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공식적으로 무력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 선언은 이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중국의 무력개입을 방지하는 차원도 있을 것이다. 만약 미국이나 UN군이 미얀마에 개입을 선언한다면 이는 자칫하면 중공군의 개입을 유도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도리어 상황이 더 심각해지는 것이다. 실제로 6.25 전쟁 당시 UN군이 한반도에 상륙하자 중공군은 곧바로 한반도 개입을 구상했다. 그렇기에 이 선언은 미얀마 문제를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중공군의 개입을 방지한다는 차원도 있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 만약 무력개입이 발생한다면 거리상 가까운 중국이 미국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때문이다.

5.2. 인도적 개입 문제

지금 미얀마에서는 사상자가 발생하고 빠른 국제사회의 개입을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개입을 국제학에서는 인도적 개입이라 명명한다. 하지만 쿠데타만으로 개입하기 어렵다. 쿠데타로 개입한 사례는 자칫하다가는 유엔이 특정 정부의 설립을 주장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근거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991년 아이티에서 쿠데타가 발생했었지만, 이에 대해 UN은 바로 개입하지 않았다. 해당 일을 쿠데타로 비난하고 인권보호를 요구했지만 경제제재 정도였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인권침해, 학살과 고문 등이 지속되면서 인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4년 7월 안보리 결의안 940에 따라 군사개입(인도적 개입)이 진행되었다.[67]

인도적 개입은 쿠데타나 유혈 진압만으로는 발동되기 어렵다. 미국이 무력개입을 통해 정권을 전복시키지 않겠다고 주장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인도적 개입과 민주화는 다른 개념이다.

인도적 개입은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겠다는 차원이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겠다는 차원의 개념이 아니다. 그렇기에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이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발생하는 경우에 개입하는 것이 인도적 개입이다. 그러므로 지금처럼 민주화 요구 시위를 한다고 해서 인도적 개입이 발동될 수 없는 것이다. 민주화는 정치의 문제이고, 인도적 개입은 인간존엄의 문제이므로 이 두 문제는 완벽히 다른 문제이다.

한국인의 경우 민주주의를 인간의 존엄과 동일시 여긴다. 이는 한국의 민주화 경험에 기반한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과 민주주의는 같은 개념이 아니다. 꼭 민주주의이어야만 인간의 존엄이 보장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민주주의 체제가 지금까지 나온 체제 중에서 평균적으로 가장 인간의 존엄을 수호하는 체제인 것은 맞지만, 민주주의가 잘못 흘러갈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들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아랍권의 세속주의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주의'가 결국 인간의 존엄을 여느 독재정권 못잖게 침해하는 이슬람 근본주의로 이어졌던 사례나,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가 아돌프 히틀러를 집권시킨 사례가 있다. 반대로 중국이나 북한 같은 독재 국가에서도 국가의 명령만 잘 따르면 얼마든지 떡고물 얻어먹으며 인간의 존엄을 보장할 수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경제 구조 때문에 민주주의 국가든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든 빈부격차가 생기고, 결국 인간의 존엄을 모든 인간이 누리는 건 애당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인도적 개입에 대한 명확한 정의나 발동조건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동의할 수 있는 필요조건은 다음과 같다.이 두 조건이 만족되지 않으면 쉽게 개입을 허용하기 쉽지 않다. 인도적 개입이 발생했던 코소보 사태의 경우 유고군대가 300개의 코소보 마을을 전소시키고 30만 코소보인들을 강제 이주시켰기에 그 범위가 컸고, 군대를 통해 체계적인 학살이 전개되었기에 개입하였다. 리비아 내전의 경우에도 내전 초반에는 상당히 중립적인 태도였지만 민간인에 대한 체계적인 학살이 발생하자 개입하였다. 하지만 시리아 내전의 경우 학살이 발생했지만 그 주체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았으며, 체계적 요소가 없었기에 인도적 개입이 발동되지 못했다.

만약 국제사회가 무력개입, 인도적 개입을 하기 위해서는 군부의 대대적이고 조직적인 학살이 진행되고 이 사실이 명확하게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단순히 개입만 한다고 해서 미얀마군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거라는 것은 전례인 1995년 보스니아 전쟁 당시에 있었던 스레브레니차 학살에서 뼈져리게 느낄 수 있다. 이 경우 네덜란드군은 직접 개입하지 못했고 세르비아계의 스릅스카 공화국 군대는 대놓고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또한 인도적 개입의 근본적인 문제는 바디백(body-bag) 효과다. 바디백 효과란 군사개입으로 인한 사망자 발생 때문에 생기는 국민들의 전쟁 혐오증에 있다. 그렇기에 인도적 개입의 개념이 등장한 이래로 대부분의 개입은 순수한 인도적 개입만으로 이루어진 경우는 극히 드물다. 파병국에는 엄청나게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타국 내정을 안정시키고자 자국민들을 사지에 내모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교적 수사를 쓰자면 타국 시민의 보호책임(생명과 안전 보호)을 준수하기 위해서 자국 시민의 보호책임(생명과 안전 보호)을 위반하겠다는 것이다. 이 효과로 인해 초기에 인도적 개입을 외치지만 개입 이후에는 철수를 외치는 현상이 일어난다.

다른 문제로 인도적 개입이 대중매체에 의해 선택적으로 발현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90년대 내전이 일어난 곳은 북이라크, 소말리아, 보스니아 뿐 아니라 앙골라, 라이베리아, 콩고민주공화국도 있었다. 하지만 인도적 개입은 서구 언론이 주로 다루던 북이라크, 소말리아, 보스니아에서만 이뤄졌을 뿐이다. 반면 그 외 지역에서는 처절한 내전으로 수백만 명이 사망했다.

다만 지금까지 있었던 인도적 개입의 양상을 본다면, 인도적 성격을 띄거나[68] 패권경쟁적 성격을 띄거나[69], 전쟁의 여파를 예방하는 경우이다.[70]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양상과 이러한 인도적 개입의 문제점을 고려한다면, 중국이 아예 군사적 행동을 나서는 등의 큰 변곡점이 생기지 않는 한 미얀마에 국제사회가 개입할 가능성은 없다.

게다가 미얀마에 대한 국제사회 개입 시 유의하여야 할 또 하나의 변수가 있다. 국제사회가 개입해 미얀마 군부가 궁지에 몰리게 되면, 시위대를 와해시키기 위해 아웅 산 수 치를 인질로 잡거나 반역죄를 씌워 사형에 처하는 등 극단적인 선택을 할 우려가 있다.[71] UN 안전보장이사회와 미얀마 소수민족 무장단체 연합은 아웅 산 수 치의 신변보장과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으나 미얀마 군부는 묵살하고 있다. 국제사회가 개입해 군부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아웅 산 수 치의 신변에 이상이 생길 시, 미얀마 소수민족과 버마족을 일시적으로나마 연대하게 한 구심점이 사라지게 되므로 오히려 소수민족 무장단체간의 장기 내전으로 이어져 더 큰 혼란과 인명피해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그 경우 개입한 국가는 상당한 전쟁비용을 지불하고도 정치적 책임까지 떠안게 된다. 설령 당장은 아웅 산 수 치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지 않더라도, 소수민족과 버마족의 완전한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아웅 산 수 치가 병이나 노환으로 사망한다면 그 이후부터는 시기만 늦어질 뿐 혼란 자체를 막지는 못할 수 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소수민족 무장단체 내지는 미얀마 민주화 세력 내 급진파가 제2의 미얀마 군부가 되어 새로운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결정적으로 아무리 인도적 개입이라고 하더라도 사태 해결을 위해서는 결국 미군 등 서방 세계의 군대가 미얀마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중국이 대만이라는 거슬리는 나라도 해결 못한 상황에서 바로 옆에 붙어있는 미얀마에 서방 군대가 들어오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도 순망치한의 논리로 수혈해주어 목숨만은 보전해주는 이유가 그것인데 그게 미얀마 쿠데타로 깨지면 진짜로 중국이 전쟁을 벌여서라도 막을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다. 게다가 중국뿐만이 아니라 중국과 갈등 수위를 높이고 있는 인도조차 서방 군대가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라서 쉽지 않다.

5.3. 사실상 내전 중 및 2021년 9월 경부터 본격적으로 내전 발발

민주정부에서 언급하길 유혈진압이 계속되면 전면적 내전도 불사한다는 내용이 있다. # 즉, 국민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나서 대항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진다는 얘기로 자칫 군부와 시민간의 전쟁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5.18 민주화운동 때 시민들이 무장들을 탈취해서 시민군을 형성한 사례가 엄연히 존재했었기에 미얀마 군부가 계속해서 탄압을 하면서 국제사회에서 아무런 도움조차 못 준다면 시민들이 직접 싸울 수 밖에 없는 처지일테니 상황이 더 나아지지 않으면 내전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미얀마 군부는 이미 시민들을 학살한 경력도 있고 로힝야인을 포함한 소수민족들을 학살한 부대를 시위진압을 위해 투입시킨 상태이며 결정적으로 자신들이 가진 특권을 포기할 생각이 결코 없기에 국민들을 더 죽여서라도 쿠데타를 성공시키려고 하는 이상 시민들도 더 이상 평화적으로 시위를 이어가기 힘들어졌다. 특히 평화적인 시위를 유지하기엔 미얀마 군부가 먼저 대놓고 사격지시를 내려서 2021년 3월 31일 기준 무려 500명 가량이 사망했으며,[72] 계엄령까지 선포하여서 계속적으로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이 현재진행형이다. 게다가 국제사회가 무력하게도 아무런 도움을 못 주고 있고 중국 때문에 규탄성명 외엔 아무런 대응도 못할뿐더러 패권국과 선진국에서 이렇다 할 대응은커녕 말로만 규탄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얀마 시민들의 희망이 바로 국제사회의 참여인 반면,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전혀 쉽지 않은 문제로 자칫 중국이 미얀마 쿠데타에 참여할 여지를 주는 셈이기에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73] 이런 상황으로 인해 미얀마 시민들이 더 이상 가만히 당하고 있을 이유가 없으며, 민주화는커녕 독재정치가 들어올 위기이기 때문에 내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다만 미얀마 시민들이 어떻게 무장을 갖출지가 의문으로 애초에 미얀마 군부가 체계적으로 군인들을 투입 및 진압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장의 어려움과 함께 섣불리 무장했다간 폭도들로 규정되어 시민들을 사살할 명분이 생기기에 사망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미얀마 시민 대부분이 미얀마 군부를 지지하지 않는 상황이라 아무리 미얀마 군부라도 모든 국민들을 학살하기는 어려우며, 계속된 학살은 오히려 군부에 대한 반감을 크게 키우고 국제사회가 들어올 명분이 생길 수 있다.[74] 애초에 내전이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UN이 개입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며, 리비아 내전을 보면 알듯이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국제사회의 개입이 좀 더 원활히 논의될 수 있다. 물론 미얀마 시민들이 R2P를 외치며 국제사회의 개입을 요구하고 있지만, 다른 국가들이 지켜보기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명분 없이 외국의 일에 자국 군인들의 피를 흘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많은 희생을 요구받는 자리인 지상군을 미얀마 시민들이 채우게 된다면, 리비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국제사회에서 해, 공군력만 부담하고 군수품을 지원하면 사상자가 날 부담은 없어진다. 리비아 내전[75] 당시 시민군이 위험에 처하자 바로 국제사회의 지원이 쏟아지면서 우월한 공군력으로 리비아군의 기갑, 항공전력이 모조리 박살이 나버렸고, 군수품들을 지원하면서 전황을 뒤집어버렸다. 다만 문제는 기갑과 항공전력 그리고 군수품을 동원하려면 거의 지구 반 바퀴를 돌아야 한다는 것이다.[76] 리비아가 지리적으로 서유럽 및 남유럽과의 거리가 가깝고 카다피 정권 시절 우방국이었던 러시아와는 거리가 먼 북아프리카 국가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코로나로 경기가 대침체인 상황이고 실질적으로 군대를 움직일 여력이 있는 패권국 미국은 코로나와 사투 중이다. 즉, 막대한 전비가 소모될 것인데 시리아 내전만큼에 이득이 생기냐는 것이다. 시리아 내전은 석유라는 정확한 이유가 있지만, 미얀마는 인도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딱히 얻을 이득이 없다. 미얀마의 지정학적 위치와 자원이 나쁘지 않지만 넘버 투 중국의 눈치와 확실하지 않은 이득을 계산한다면 미국을 제외하고는 딱히 개입할 나라가 없을 것이고 그런 능력을 가진 나라도 없을 것이다. 위치나 국력으로 본다면 인도가 방안이 될만하지만[77] 인도는 비판적인 방관 중이다. 현실적으로 중국의 허락하에 군사적 행동이 가능할 것인데 이를 설득 압박해서 얻는 이득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다. 설령 지원한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서 제2의 내전이 촉발될 수 있다는 문제도 있다. 그나마 중국에서 2021년 미얀마 쿠데타와 비슷한 수준의 혼란이 일어나는 게[78] 서방 세계의 미얀마 민주화 세력 지원이 용이해지는 경우가 되겠지만, 중국은 본래 사회 통제를 아주 잘하는 나라고, 시진핑의 1인독재가 중국의 내전 발발 가능성을 잘 차단하고 있으며 시진핑은 사망하기 직전에도 분명 본인의 뒤를 이을 새 지도자를 임명한 뒤 사망할 것이 분명하므로 중국의 혼란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된다.

현재로서는 내전이 정말로 일어날지는 아직 모르며 단지 민주정부에서 자기 방어를 불사하겠다고 언급하였고 소수민족 반군과도 협력한다고 한 상태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미얀마는 이미 옛날부터 저강도 내전이 진행중이였다. 만일 시민과 군부의 충돌이 내전 수준으로 확대된다면 내전의 발발보단 내전의 확대, 고강도화라 보는게 정확하다.

이 때문인지 소수민족 반군들과 민주정부는 국제사회의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5월에 들어오면서 미얀마 군의 헬리콥터가 카친독립군의 맨패드에 격추되는 등 사실상 고강도를 넘어서 전면 내전 상태로 완전히 진입했다.

7월 들어서는 그나마 휴전 상태에 접어들었다. 6월만 해도 소수민족 반군 국민통합정부 휘하의 시민방위군과 미얀마 군경간의 전투가 치열했지만, 7월 미얀마 내 코로나 바이러스가 심해지자 양측은 현재 전투를 자제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누그러지며, 2023년부터 2024년 3월 말 기준 전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6. 참고 자료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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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하나회 숙청과의 비교

국내에서는 미얀마 쿠데타를 계기로 취임 직후 하나회를 숙청한 김영삼 前 대통령의 정책이 대중들 사이에서 다시금 높이 평가 받고 있으며, 보수-진보 진영이 모두 미얀마의 민주화를 지지하는 동시에 이에 군부에 동조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국가들에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아웅 산 수 치에 비한다면 김영삼의 여건이 훨씬 좋았다. 먼저 하나회는 전두환과 노태우의 갈등으로 전두환계와 노태우계로 양분된 상황이었으며, 실제로 하나회 숙청을 담당한 건 육사 출신의 권영해 국방부장관과 김동진 육군참모총장 등 군부 내 인사들이었다. 또한 대한민국 국군의 통수권자는 언제나 대통령이었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군인 출신 대통령들도 군복을 벗고 대통령에 올랐다. 때문에 군부가 대통령의 권위에 쉽사리 저항하지 못했다.

또한 미국의 압박도 주효했는데, 미국 입장에서는 냉전의 승리로 더 이상 냉전 논리에 따라 독재자의 편의를 봐 줄 이유가 사라진 데다 당선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빌 클린턴의 권력도 막강하던 시절이었다. 반면 미얀마 군부는 아예 헌법 상 독립된 위치에 있어 정치 권력의 견제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자국 내에 큰 영향력을 가졌으면서 민주주의를 지지해 주는 외세가 없다.

그러나 하나회 해체라는 업적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여건이 좋았다지만 상대는 10.26 사건으로 대통령이 죽은 계엄령 상태에서 전방 부대 일부까지 빼돌리며 상관들(정승화, 장태완, 정병주)을 불법으로 붙잡은 하나회였다. 만약 이때 북한이 전방 부대가 비어 있는데다 남한 수도에서 반란이 발생해서 지휘 체계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 즉시 제2차 6.25 전쟁이었다. 본인들을 날려버린다는 소리를 미리 들었으면 본인들한테 불리하고 나발이고 쿠데타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김영삼은 이를 막으려고 숙청 준비를 믿을 만한 비선들과만 논의하며 기습적으로 하나회 고위 장성들을 전부 경질했다.

또한 하나회 숙청은 쿠데타의 싹을 자른 것뿐만 아니라 군의 체질을 정상으로 개혁시켰다는 의미도 있었다. 하나회는 자기들끼리만 인사를 독점해서 군 지휘•인사 체계를 다 망가뜨렸고 5.18 민주화운동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군을 사조직이 독점한 결과는, 국민을 보호하고 전쟁을 예방해야 하는 군인이 도리어 국민에게 총을 쏘고 내전을 일으키는 대참사였다. 하나회가 완전 해체되고 사조직이 사라지자 드디어 군이 정신을 차리고 본분에 충실해졌다. 따라서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은 대한민국에서 쿠데타를 지워버림과 동시에[81] 군대를 비로소 국가와 국민의 군대로 되돌려 놓은 문민정부 최대의 업적이다. 또한 이 업적을 외세에 기대지 않고 성공했다는 사실도 높게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다. 구한말 조선의 고종은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청나라를 끌어들였지만 이로 인해 청나라 군대의 주둔을 허용하고 청나라 군인이었던 위안스카이한테 1882년~1894년까지 12년간 내정간섭을 당하게 되는 처지로 전락했다. 또한 이후 만들어진 신식군대는 청나라와 일본의 영향력을 받게 되는 신세로 전락하여 청일전쟁이 벌어질 때는 서로 총질을 하고 자국백성들을 학살하는데 동원되고 심지어 일본의 영향력에 놓인 조선군 훈련대는 자신들의 왕비를 시해하는데 가담했다.

즉, 김영삼이 아웅 산 수 치보다 여건이 좋다는 뜻은 아웅 산 수치의 여건은 이런 김영삼보다 한참 암울했다는 거다. 미얀마군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고대 스파르타북한과 같은 사회구조 시스템 특성상 非 하나회 장교들이 하나회 숙청에 적극적이었던 것과 달리 군부에서 숙청을 함께하고 대안이 되어줄 군부 세력이 없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보수 진영 중심으로 미얀마 민주세력이 쿠데타 세력에게 저항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중국을 지명하면서, 주로 진보 진영을 겨냥해 "비슷한 맥락인 홍콩 민주화 운동에는 침묵했으면서 여기서만 지지하는 건 이율배반적"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보수 진영에서는 이준석홍콩 민주화 시위에 참석했던 인사들도 있고, 바른미래당당론으로 홍콩 민주화를 지지했다. 자유한국당에서도 나경원 당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등 중량감 있는 인물들이 홍콩의 일국양제 준수를 요구하며 중국을 비판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에서는 박용진 등 일부 의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홍콩 지지를 밝히긴 했지만, 당론은커녕 당 지도부 인사들의 개인적인 지지 표명조차 없었다. # 다만 현 더불어민주당은 집권여당이기 때문에 한중관계 문제에 상대적으로 더 큰 파장을 불러올 수 있어 신중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예컨대 자유한국당국민의힘의 실질적 전신인 한나라당 역시, 집권여당이었던 2008년에는 중국 정부의 탄압이 격화되는데도 티베트위구르의 독립운동을 외면한 적이 있다.

한편, 좌우를 막론하고 미얀마 군부에 대항해 전투부대를 파병하는 조치를 취하기를 주문하는 목소리도 있다. 다만 한국군은 전시 전투 목적의 해외파병을 한 것이 베트남 전쟁 이후로는 없는 상황인데다, 단순히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것과 거기에 한국인들이 직접 가서 피를 흘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기 때문에 파병까지는 반대하는 의견이 지배적이다.[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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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별개로 극우 음모론 지지자 일각에서는 미얀마 쿠데타의 명분이 된 부정선거 주장을 옹호하거나, 더 나아가 국내에서도 쿠데타를 일으켜야 한다며 억지 선동을 벌이기도 한다.[83] 그러나 현대 대한민국은 문민통제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쿠데타 모의를 해 본들 사전에 발각될 가능성이 높다. 당장 2018년에 계엄령을 선포하겠다는 계획이 담긴 문건이 공개된 것만으로도 전국이 발칵 뒤집힐 정도인데 오죽하겠는가?[84] 게다가 민주주의의 과실을 누리며 살아가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시민들이 한 줌도 안 되는 쿠데타 세력의 불법적인 정권 탈취 기도를 묵인해줄 리도 없다.


[1] 군부가 임명한 부통령이다. 현재 신분은 민간인으로 군인은 아니지만 장군 출신으로 군부에 오래 있어 미얀마 군부와의 친분이 깊다.[2] 빵롱(Panglong, 샨어 ပၢင်လူင်)은 미얀마 샨주(Shan States) 남부의 로일램 특별구(Loilem District)의 로일램 (Loilem Township)에 있는 마을로 해발 1300m의 산악지대에 위치해 있다. 미얀마어로는 삥롱(ပင်လုံ)이라고 부른다.[3] 중국과 접한 지역. 이곳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는 소수 민족 반군이 끊이지 않는 것이 미얀마 군부가 반중 감정을 가진 이유이기도 하다.[4] 보통은 조약문보다는 헌법에 적을 문장이다.[5] 만약 거부했다면, 현재의 방글라데시와 접한 아라칸(Rakhine) 지역의 북부 지역이 인도에 귀속되고, 로힝야 족을 여기에 모을 예정이었다. 인도라고 하니 이해가 안 갈 수도 있는데, 당시에는 파키스탄 자치령이 없었고 간디의 요구에 따라 하나의 인도로 독립되는 것으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에 귀속되는 것이다. 하지만 불과 반년 뒤에 다이렉트 액션 데이 사건이 벌어지고, 영국은 무슬림과 힌두교도를 분리해서 독립시킨다. 그러므로 아웅 산이 로힝야를 거부했다면, 이 지역은 인도→파키스탄 자치령→방글라데시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6] 2% 정도로, 버마족에 비하면 작지만 소수민족 치고는 컸다.[7] 총리가 이끄는 양원제 다당제 의회 시스템이다.[8] 네 윈은 우 누의 요청으로 임시 총리를 맡아서 내각을 안정시켜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물러난 이후에 내각의 불안정이 다시 반복되자, 쿠데타로 의회를 날려버리고 버마는 민주주의가 적절하지 않다는 소릴하며 독재자가 된다.[9] 영국이 로힝야 족의 땅으로 예정했던 지역이다. 그렇다고 네 윈이 이 땅을 로힝야에게 준건 아니고, 벵골인은 방글라데시나 인도로 요령것 꺼지라는 의도로 수용한 것에 가깝다.[10] 2021년 미얀마 쿠데타에서 시민을 학살하는 군인들은, 그 전에는 소수민족 반군과 교전하고 로힝야를 학살하던 이들이었다.[11] 형식상으로는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군부가 과반수로 구성된 국방안보위원회가 선택한 사람만 후보자가 될 수 있고, 대통령은 후보자 외 인물을 임명할 수 없다. 사실상 미얀마군 통수권자에 대해 대통령은 '임명이라는 형식'만을 위한 존재인 것.[12]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문민통제가 실질적은커녕 명목상으로조차 존재한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미얀마 군부는 정치권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에 도전할 때마다 반발하고 쿠데타 위협을 가하여 정부를 하수인으로 삼는 등 사실상 군부독재 체제를 끊임없이 유지해오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광경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 정도로 미얀마 군부와 미얀마 국민이 사는 곳은 너무나도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기사[13] 옆 나라 태국도 밥 먹듯이 쿠데타가 일어나 국내외의 많은 지탄을 받지만, 적어도 여기는 왕실이라는 강력하다 못해 군부에서도 신성시되는 권력이 눈에 불을 켜고 쿠데타를 감시하고 있다. 왕실과 군부가 사실상 한 패다 보니 쿠데타가 일어나도 정치가 그럭저럭 돌아가는 태국과 달리 미얀마는 야예 헌법에조차 군대를 통제할 기관이 없음을 못박아놓았기 때문에 수치 민주정권은 집권 당시부터 사상누각에 처해 있던 것이다.[14] 1988년부터 2021년까지, 시민들을 학살하기 위해 군부가 동원하는 부대는 로힝야 학살과 소수민족 반군 토벌을 하던 부대와 동일하다.[15] 군부가 친중 성향이 있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이때 이미 통보가 갔을 거라고 본다.[16] 특히 영국. 애초에 로힝야족 문제가 터진 근본적인 원인이 영국령 버마 시절 영국이 추진한 벵골족 이주 정책이기 때문에 로힝야족 학살 문제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또한 수치 여사와 영국이 꽤 긴밀한 관계이기도 하고.[17] 영국 상원의 보고서는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다. #[18]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쿠데타로 정부를 뒤집겠다고 경고한다. 한마디로 정부에 무력으로 협박한 것. 권력을 순순히 넘길지 얻어 맞고 넘길지 너네가 결정하라는 최후통첩이다.[19] 헌법 제 410조에 따르면 "대통령이 국방안보회의 상의 거쳐 비상사태를 선포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미얀마군은 대통령을 감금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할 권한이 없는 민 아웅 훌라잉이 비상사태를 선포했으니 절차적으로 위헌이다.[20] 미얀마 헌법 420조에 근거, 비상사태가 선언된 경우 사령관은 모든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21] 미얀마는 국민의회, 민족의회, 군부가 부통령 3명을 선출하고, 이 중 한 명이 대통령이 된다. 이번 쿠데타로 군부에서 선출한 민 슈웨 부통령을 제외하면 미얀마 대통령부통령은 모두 연금되었다.[22] 대통령은 국방안보위원회를 통해 1년간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다. 이 경우 대통령이 군 최고사령관에게 권한 이양을 선언하고, 연방의회는 해산한다.[23] 특히 중국-베트남, 중국-인도는 사이가 험악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스트롱맨 지도자 내지 독재자들이 여기서 힘을 합친 것. 다만 인도는 살짝 입장이 애매한데 이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비록 힌두교 근본주의&포퓰리즘 성향이지만 독재자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 크다. 이후 국제사회로부터 맹비난을 받자 곧장 군부를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24] 특히 이집트의 경우는 무함마드 무르시의 이슬람 근본주의 정책에 이집트 국민들이 반발하여 군부가 쿠데타를 할 명분이 충분하기도 했다.[25] 미얀마군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유없이 약탈하고 여고생을 저격해서 죽이거나 탈영한 병사의 가족들을 처형하는 것 등은 이미 군대로서의 도를 넘었다.[26] 다만 한국은 이미 2015년 이후에 최루탄 수출을 하지 않았다.[27] 서방국가가 쿠데타에 대해 강력히 규탄하고 제재를 추진하는 데에 비해 중국은 다소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28] 인터뷰에서 “중국은 미얀마의 우호적인 이웃국가이며, 민주동맹과 군부 양쪽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며 현 상황은 중국도 절대 원하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미얀마 민중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중국의 배후설 및 반중정서를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9] 벵골 만을 통해서 원유 수송하는게 쉽고, 이걸 못 하면 사이가 좀 안 좋은 베트남을 지나거나 남중국해에 있는 미국 해군과 충돌할 수 있다.[30] 미얀마는 과거 인도 제국속한 지역이었다. 단, 이것은 영국이 식민지배의 편의를 위해 임의로 편입한 것이며, 미얀마가 인도의 지배를 받은 적은 없다.[31] 댓글을 보면 "위선자", "쿠데타 세력이 쿠데타 세력을 욕하네" 등의 악플이 심한데, 이들의 주장은 현재 말레이시아 정부국민의 선거로 뽑힌 정부를 뒤엎고 집권했으니 똑같은 쿠데타 세력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 논리 자체가 애초에 말이 안 되는게, 의원내각제인 말레이시아에서 의석 수 변동과 연정 파트너의 이탈로 인한 정권 교체는 명백한 합법이며, 절대로 반민주적이라고 할 수 없다. 말레이시아 트위터가 희망동맹 지지자들로 장악되어 있어서 생긴 문제인데, 이 때문에 만약에 희망동맹이 동일한 방법으로 집권하면 "쿠데타 아니냐?"는 질문에 침묵할 가능성이 높아 비판이 큰 편. 정작 이들은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운운하면서, 세계 최고의 민주국가 중 하나인 독일의 총리를 지내며 통일을 주도한 국부 헬무트 콜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안 하고 있다(콜도 국민의 선거로 당선된 총리가 아니다).[32] 2021년 3월 현재, 미얀마 민주화 운동 시위대가 공식적으로 자기들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한 (명백히 밝힌) 국가가 한국밖에 없다.[33] French President Macron renews calls for end to repression in Myanmar, Reuters, 2021-03-04[34] Italy Condemns Arrests in Myanmar after Military Coup, AA, 2021-02-01[35] 노벨평화상을 수여하는 단체이다. 또한, 아웅산 수치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이다.[36] 석가모니 부처의 머리카락이 모셔져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사찰로 미얀마 최고의 불교 성지이다. 최근 미얀마 군부가 불교 성지인 이곳 지붕의 금박을 벗겨내고 있다고 전해졌다.[37] 아웅산 수 치는 로힝야 뿐만 아니라 카친과 카렌, 샨, 친족 등 미얀마내 여타 소수민족들에 대한 미얀마 군부 세력이 저지른 박해와 억압에 대해서도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묵인해주기도 했다. 다만 군부의 억압을 묵인한 것과는 별개로 이전 타협 없이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으로만 일관하던 군부 정권과는 달리 수 치는 소수민족 반군과도 협상을 하기도 했다.[38] 미얀마는 소수민족 갈등으로 인해 건국 직후부터 쭉 내전상태였는데 4월 초 군부가 시위대를 저격하고, 박격포를 사용하는 시점부터 민주정부가 반군에게 손을 내밀면서 사실상 이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39] 반면 대한민국6월 민주 항쟁이 발생한 1987년 당시 한민족이 전 국민 중 거의 100%를 점유하는 단일민족국가였기 때문에 민족 간의 갈등 같은 내분 요소가 없어서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다.[40] 미얀마의 주변국들은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인 인도를 제외하면 공산당 1당제 국가, 왕정 국가, 문민독재 국가 등 정상적인 민주주의 정치와는 거리가 있는 독재 내지는 반독재 정치의 국가들이고, 서방세계와의 교류는 끊긴 지 오래다. 무엇보다 현재의 군부는 민주진영과 대립하는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이다.[41] 중국 입장에서 지금 미얀마 군부의 태도도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다지만, 그걸 처리하겠다고 자기 앞마당에 서구 연합군이 들어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실제로도 이미 중국은 자국 국경에 적대적인 세력을 들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당대 최강국이 이끄는 국제연합군에 맞서 전면적인 개입을 선택했던 바 있다. 그것도 명분도 없는 전쟁이었고, 국공내전이 끝난 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았던 1950년이었는데도 말이다. 오늘날 중국이 같은 상황에도 훨씬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측 가능한 문제이다.[42] 하나회를 기습적으로 숙청한 김영삼의 사례가 대표적이다.[43] 괜히 악명높은 독재국가인 중국과 북한, 이란이 거짓선동 및 세뇌를 하더라도 국민들을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아니다.[44] 미얀마의 경제성장률은 2000년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진 2007년까지 10% 전후로 가장 높았으며, 그 이후로 조금씩 떨어져 5~6% 전후를 유지하고 있다.[45] 설사 억지 주장에 기초했다 할지라도 일단 치러진 선거는 상당한 명분이 되고, 만약 이 선거에서 군부가 이기기라도 하면 민주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기 때문에 더더욱 골치아파진다. 물론 쿠데타 이전에도 별다른 지지를 받지 못했던 정당이 쿠데타 이후에 갑자기 선거에서 이긴다면 부정선거일 가능성이 높기야 하지만, 군부가 통제하는 현 시점의 미얀마에서 누가 부정선거의 증거를 잡아낼 수 있겠는가? 그걸 알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도 아예 명분을 주지 않으려고 재선거 자체를 틀어막으려 하는 것이다.[46] 태국도 민주화 시위 중이긴 하지만 예전에 비해 매우 뜸해진 상태.[47] 그러나 시리아 내전이 장기화되고 알카에다나 IS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의 테러단체들이 대두되어 내전의 양상이 혼미를 더하게 되고, 러시아의 군사 개입으로 시리아 내전의 전세가 2010년대 후반에 아사드 정부군한테 유리해지자 미국과 유럽 등 서방세계와 친미 아랍 군주국들은 시리아 반군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였다.[48] 한국인의 경우 UN군이 6.25 전쟁에 지원군으로 왔기에 UN이 민주주의 전파자라고 오해하고 있지만 당시 UN군이 개입했던 것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한의 주권을 보장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트루먼의 발언에서도 볼 수 있다.[49] 여담으로 브레즈네프 독트린과 인도적 개입의 논리는 상당히 유사하다. 브레즈네프 독트린은 사회주의 세계의 전체 이익을 위해 국가의 주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입장이고, 인도적 개입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위해 국가의 주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즉 제한의 목적이 다르지만 결론적으로 주권제한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50] 2011년에 벌어진 리비아 내전에서는 코로나도 없었거니와 당시 카다피의 반정부군 지역에 있는 시민들을 학살한 것이 빌미가 되어 시행된 나토의 오디세이 새벽 작전이 전개되고 나서야 카다피 정권이 붕괴된 것을 감안한다면 군사적인 개입이 없으면 힘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독재정권이 붕괴된 리비아 꼴을 본 러시아와 중국이 이를 빌미로 미얀마에 외국군이 들어오려 하는 걸 바라만 볼 리 없다.[51] 미얀마 정부와 교전을 중단하고 평화적 협상을 시작한다는 협정.[52] 카렌민족해방군 제5여단이 미얀마군 기지 2곳을 점령한 것을 계기로 4월 16일에 벌어진 알로범 고지 전투에서 카친 독립군이 미얀마군과의 전투에서 미얀마군 병사 100명을 사살하고 38명을 포로로 잡는 승리를 시작으로, 4월 23일에는 카친 독립군이 미얀마군 기지 10곳을 점령하고 미얀마군 1개 대대를 괴멸시키는 등의 대승을 거두었다.[미국] 미국은 이익을 명분보다 우선시하는 모습으로 비판받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 개새끼는 우리 개새끼라는 명언으로 유명한 소모사부터 칠레아우구스트 피노체트나 현대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수없이 많은 예시가 있다.[소련] 소련 역시 혁명 1.5세대인 브레즈네프 시기에 들어서면 혁명이라는 단어에 감동해서 지원을 쏟아붓는 대신 보다 실리적인 노선으로 전환했다. 사실 소련 체제는 트로츠키의 세계혁명론이 아니라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아래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혁명의 수출보다 소련의 국익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변화해가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리스 내전에서도 인접국이자 이해 당사자인 티토유고슬라비아가 적극 개입을 주장했던 반면, 소련이 이끄는 코민테른은 서방을 자극하기 않겠다는 명분으로 방치했다. 이후 소련은 본심이야 어쨌든 혁명을 수출하는 척이라도 했던 스페인 내전 시절의 국제주의 대신,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리품으로 얻은 소비에트 영향권의 유지로 방침을 전환한다. 냉전이 진행되면서 신생 독립국들에서 터진 사회주의 혁명에도 오히려 중화인민공화국마오이즘의 영향력이 컸고, 소련의 대외정책은 현상유지 선호 정책 때문에 대응이 늘 한 타이밍 늦었다.[55] 실제로 안보리에서도 미국이나 소련/러시아는 자국의 이해관계와 상충되지 않는 한 자국과 크게 관련없는 인도적 위기에도 눈감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중국은 반대로 자국의 이해관계가 걸렸을 때만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 외의 사안들에는 대부분 기권한다. 때문에 중국의 안보리 거부권 행사 횟수는 미국이나 러시아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은 편이며, 그나마도 대만 등 지정학적 인접국들과 관련된 문제에 몰려 있다. 당장 이번 미얀마 사태만 보더라도, 구 냉전이었다면 미국이 미얀마 민주세력을 지지했다면 소련은 군부를 적극 지지하는 식으로 대립했을텐데, 중국은 어느 쪽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고 "미얀마 문제는 미얀마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소극적인 입장만을 표명한다.[56] 대표적인 예시로 베네수엘라도 국민들이 지지하는 정권이라고 판단하고 차베스 시절 대놓고 학살 같은 짓은 안 하자 일단 놔뒀다. 베네수엘라가 망한 건 미국의 경제제재도 있지만, 포퓰리즘으로 망하는 국가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앞날에는 관심없는 국민들과 무능한 정치가들이 미래는 생각 않고 돈을 펑펑 써대서 그런거다. 특히 베네수엘라는 단순히 돈을 펑펑 써대기만 한게 아니라 국가의 미래 먹거리 찾기를 아예 신경 끄고 석유에만 올인해서 그렇다. 심지어 그 석유산업도 스스로 시추/정제할 기술 확보보다는 원유장사와 해외기업 유치에만 열을 올리다 국영화 선언으로 그 사달이 난 것이다. 하다못해 전근대적 왕정이라고 비판받는 중동 산유왕국들조차도 석유가 고갈되거나 가치가 떨어질 미래를 대비해 열심히 대체산업들을 미리 선점하고 키워가는 마당에(당장 사우디아라비아도 무하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더 이상 석유 가지고 먹고 사는건 무의미하다며 여타 다른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는 실정이다) 왕정도 아니고 합리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켰다는 공화국 베네수엘라가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57] 외교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 시점에서 그 국가의 실질적인 주권을 가진 정부와 하는 것이다. 전두환 정부 당시 미국의 대처나 한일기본조약 당시 박정희 정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도 마찬가지고,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국제적으로 일본인으로 간주되던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치를 격렬하게 부정하는 현대 독일연방공화국앙겔라 메르켈 총리조차도 주변국들에게 그때 왜 나치 독일과 외교했느냐고 따지지는 않는다. 나치 독일은 지금의 독일과 다른 나라고 이미 없어진 나라기 때문이다.[58] 하지만 제재의 효과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미얀마는 오랜 군부 독재로 세력이 확고하고 이미 서방의 경제 제재를 견뎌본 경험이 있으며, 서방의 자본보다 러시아와 중국 자본이 더 많이 들어와 있었다. 다소 손해는 있을지언정 군부가 움직일만큼 강한 카드는 없는 셈.[59] 당대에 이는 민족주의에 기반한 범게르만주의로 정당화되었다. 때문에 2차대전 이후 서구 사회에서 민족주의는 사양길로 접어든다.[60] 물론 미국이 베트남 전쟁 당시 제시한 명분은 "통킹만 사건으로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었으며, 그 자체로는 주권국가 대 주권국가로서의 권리행사였지 내정간섭은 아니다. 다만 베트남 분단 자체에 개입하기도 하였으며, 베트남 전쟁을 전후해서는 남베트남 군부에 쿠데타를 사주하는 등 내정간섭으로 간주될 만한 행동은 많이 했다.[61] 당시 중국은 글로벌 패권은 커녕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었고, 노선투쟁이나 국경분쟁으로 소련과도 사이가 틀어진 처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이 '공산권 전체' - 실질적으로는 '소련' - 의 이익을 빌미로 다른 공산주의 국가에 개입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니 반발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실제로 중국은 이후 제3세계의 비동맹주의에도 한 발을 걸쳐놓는 외교노선을 택한다.[62] 물론 비공식적이나 소규모는 있지만.[63] 굳이 따진다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브레즈네프 독트린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지만, 이 전쟁은 소련판 베트남 전쟁이라고 불린 정도로 엄청난 피해만 경험했을 뿐이었다.[64] 웃긴 것은 중국의 보조금은 미국의 보조금에 비해 10분의 1도 안 된다.[65] 2018년 OPCW의 보고서에서는 시리아 정부군이 화학무기를 사용한 것인지 반군이 화학무기를 사용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내용이 있을 뿐이다.[66] 다만, 오바마 정부의 가장 큰 실책이 외교정책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부분 실패했다. 아랍의 봄이나 시리아 내전에서 대응을 잘못하여 상당한 혼란을 주고 있다고 전문가들이 비판하고 있다. #[67] 다만 큰 전투는 없었는데, 아이티군이 해변에 미군이 보이자 항복했기 때문이다.[68] 순수 인도적 동기의 작전으로는 1992년 미국의 소말리아 개입과, 북이라크 쿠르드족 보호개입이 있다. 이라크 정부가 북이라크에 거주하는 쿠르드 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자 이를 막기 위해 미군과 서방국가들이 개입했다. 이 작전은 성공적이었으며 그 이후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쿠르드인들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확보할 수 있었기에 성공사례로 꼽힌다. 반면 소말리아 개입의 경우에는 미군의 개입을 통해 1차 소말리아 내전을 종식시켰다. 하지만 미군이 철수한 이후 안정화는 성공하지 못했으며, 선거 등 서구권의 제도를 식립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로 인해 소말리아는 난장판이 되었으며, 이 난장판을 묘사한 영화가 바로 블랙 호크 다운이다.[69] 프랑스의 르완다 개입이 있다. 르완다 내전에서 영미권의 영향을 받은 세력이 집권하게 되어 르완다가 영어권으로 편입될 것을 우려한 프랑스가 학살이 이미 끝난 시점에 학살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개입했다.[70] 대표적으로 코소보 전쟁이 있다. NATO가 코소보에 개입한 이유는 발칸반도에서 전쟁 장기화될 경우 발생하게 될 난민 문제와 유럽 선진국에 끼칠 사회경제적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71] 미얀마 군부는 이미 지난 3월 22일, CRPH가 임명한 유엔 특사인 살라잉 마웅 타잉 산을 반역죄로 기소하였다. 물론 아웅 산 수치는 군부마저도 존경하는 국부 아웅 산의 딸이라서 군부가 생명의 위협을 가했다가는 역풍을 맞기 때문에 거의 가택 연금 수준에서만 끝내고 있다.[72] 이미 미얀마 군부는 1988년의 8888 항쟁 때 최소 3000명 가랑을 죽인 바 있었다.[73] 무엇보다 미얀마 군부가 외국을 상대로 침략하거나 도발한 적이 없다 보니 패권국과 선진국들도 군사 개입을 하기엔 명분이 없어서 못한다. 킬링필드의 경우는 민주 캄푸치아가 베트남을 선제공격한 것 때문에 베트남의 임장에서 캄보디아를 침공할 명분이 생겨서 베트남에 의해 종식된 것이다.[74] 이미 경찰과 군인들이 대놓고 폭행, 강간, 살인, 약탈을 저지르고 있는 상황이기에 시민들에게서 군부에 대한 반감이 커졌고 UN에서도 무작정 방치만 할 수 없는 상황이다.[75] 실제로 리비아의 경우에는 서구의 막대한 지원품으로 무장한 집단들이 정치적 통합을 이루어내지 못하다가 결국엔 2차 리비아 내전으로 돌입했다. 미얀마의 경우 소수민족 등의 문제가 있어 이러한 지원이 자칫 더 심각한 내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76] 현재 미얀마에 대한 인도적 개입이 결정됐다고 가정했을 때, 그나마 가장 미얀마에 가까운 민주주의 서방 국가의 군대는 대한민국 국군자위대, 호주군, 뉴질랜드군, 그리고 미합중국 인도-태평양사령부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군과 자위대, 호주군은 타국에 투사 가능한 전투항공전력을 보유한 상태가 아니다. 거기다 대한민국 국군은 베트남 전쟁 이후 전시 상황에서의 타국에 전투병력을 파병한 적이 없고, 자위대는 평화헌법으로 인해 전투 병력 파병에 상당한 제약이 있다. 따라서 현재 상황에서 미얀마에 파병이 가능한 것은 미군 인도-태평양통합군 밖에 없다.[77] 특히 인도는 민주주의 국가이고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경제와 군사 강국이다.[78] 지금 중국의 영토와 인구를 감안할 시 내전이 발생하면 미얀마의 상태보다도 훨씬 큰 위진남북조시대 스케일의 혼란이 찾아올 수 있으며 이렇게 되면 근처에 있는 한반도도 위험해진다.[79] 에어로빅 배경음악은 인도네시아 곡으로 동남아에서 일종의 댄스밈 역할을 하고 있다.[80] 1998년(5.8%), 2015년(3.3%), 2017년(5.8%) 제외[81] 하술하듯 2017년에도 친위 쿠데타 시도로 추정되는 계획이 있긴 했지만 당연히 시대상이 너무 변했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82] 다만 민주화 세력이 승리할 경우 미얀마의 재건을 도울 공병부대의무대를 지원하는 방법은 있다.[83] 기사 1, 기사 2, 기사 3, 기사 4(다만 이 기사는 정상적인 댓글들도 보인다.), 기사 5[84] 이 문서가 공개될 당시만 해도 충격을 받은 국민들 사이에서 '군부의 친위 쿠데타 계획이다' '군부가 5.18 마냥 민주화 시위대를 학살하려고 했다'는 말이 돌았지만, 정작 조사 결과 내란음모와 관련된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당시 기무사의 계획도 진리국 건국급으로 실현 불가능한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