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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1 13:20:24

8888 항쟁

파일:8888 uprising pagoda.jpg
슈웨다곤 파고다 앞에 모여 항쟁을 진행하는 시민들
1. 개요2. 전개3. 참고 자료4.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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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버마어: ၈၄လုံး 또는 ရှစ်လေးလုံး

1988년 8월 8일부터 9월 16일까지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에서 네 윈 정권에 반대하여 일어난 민주화 운동. 명칭의 기원은 1988년의 88과 8월 8일의 88을 합친 것이다.

2. 전개

1962년 버마 군사반란 이래 버마는 네 윈 장군이 이끄는 군부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네 윈은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성립시키고 이른바 '버마식 사회주의'를 이룩하자며 경제를 국유화시키고 화교, 인도인 상인까지 추방시켜가며 경제적 자급자족 정책을 펼쳤으나 결국 버마는 세계경제에서 고립되었고 대신 아편 밀거래를 묵인했다. 게다가 네 윈이 1985년과 1987년에 두 차례에 거쳐 어설픈 화폐개혁을 하면서 나라의 전체 화폐의 75%가 무용지물이 되었던 만큼 버마의 경제는 1980년대에도 1인당 GDP가 50$도 넘기지 못할 정도로 막장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리하여 1987년에 유엔측은 버마를 '세계 최빈국'으로 지정했다.[1] 1950~60년대만 해도 비록 정치적으로는 혼란스러웠을지언정 동남아에서 가장 부강했던 나라가 30여 년 사이에 가장 빈곤한 나라로 추락해 버린 것이다.[2] 1987년 9월에 군부는 버마의 일부 통용지폐를 회수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했고 이에 대학생이 군부의 정책에 반대하면서 군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된 가운데 버마의 경제는 곧바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반정부 시위는 뜻밖의 계기에서 시작되었다.

1988년 3월 12일에 술에 취한 청소년들이 양곤 기술 대학교의 학생들과 찻집에서 재생되는 음악에 대해 논쟁을 벌이다가 싸움이 일어나 청소년들이 대학생 3명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때 여당인 버마 사회주의 계획당(BSPP) 당원의 아들이 학생을 폭행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곧 풀려난 것에 대해 양곤 기술 대학교 학생 500명이 지역 경찰서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의 발포로 폰 마우(Phone Maw, 1965~1988)라는 학생이 총에 맞아 숨지면서[3] 이를 촉진제로 산발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1988년 6월에는 매일같이 시위가 벌어져 랑군에서 지방으로 시위가 퍼지게 되었는데 군인과 경찰들은 최루탄과 총격으로 시위를 진압하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특히 1988년 8월 8일에 총파업이 시작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행군하며 반정부 민주화 시위는 정점을 맞이했다.

그러자 네 윈 정권은 중국천안문 6.4 항쟁처럼 군대를 동원해서 잔혹하게 비무장 시위대를 진압하였으며 9월 18일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고 9월 19일에 시위가 중단될 때까지 정부가 축소해 발표한 수치로만 350여 명, 실제로는 3천여 명[4]의 시민들이 군의 발포로 사망했다.[5] 특히 1988년 7월 27일부터 8월 12일까지 아주 짧게 대통령으로 집권한 셩 룬[6](Sein Lwin, 1924~2004) 대통령 때 더 강경해져 이 참상이 세계 외신을 타고 보도되면서 네 윈 군사정권은 국제사회에서 비난 대상이 되었다. 사실 네 윈은 반정부 시위가 격렬해진 것을 보고 1988년 7월 23일에 당 의장에서 사임했으나 사임하기 직전에 국회에서 "만약 시위가 계속된다면 군대를 부를 수도 있으며 나는 확신하는데, 만약 군대가 발포한다면 허공을 향해 쏘지는 않을 것이며, 정확하게 사람을 겨냥하겠다"는 연설을 했다. 참고로 8888 항쟁 당시 실제 발포 명령을 내린 사람은 바로 셩 룬 대통령이었다.[7]

하지만 네 윈도 무사하지 못했는데 소 마웅 장군 등이 조직한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 세력이 군부 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네 윈을 강제 퇴진시켰고 민중항쟁은 1988년 9월 18일 종료됐다. 그러나 군사정권을 퇴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는데 이들도 막상 총선에서 친군부 세력이 참패하자 총선결과를 무효화하는 추한 모습을 보이면서 정권을 독차지하였고 결국 이들은 새로운 군사정부로 이름만 바뀐 군부독재를 시작하였는데 쿠데타 직후 단 1주일 만에 1천 명을 살해했고[8] 9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3천 명(랑군에서 살해된 1천 명 포함)[9]이 군에게 살해되었고 사망자 수만 해도 이러다 보니 부상자와 실종자는 대략적 수치조차 집계되지 않았다.

이 때의 피바다는 그나마 33년 뒤 벌어지기 시작한 참사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축이었는데 이때는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긴 해도 서방의 압박으로부터 군부를 보호할 만한 후원 세력이 전혀 없었다. 소련도 상황이 좋지 않았던 데다 애초에 버마는 소련의 영향권도, 큰 이해관계가 걸린 곳도 아니었고 중국은 당시에도 문화대혁명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제 한몸 건사하기 바빴다. 심지어 이쪽은 아예 내전으로 번져서 시작 3년이 지난 2024년 현재까지도 미얀마의 비극은 끝나지 않고 있다.

3. 참고 자료

4. 같이 보기


[1] 사실 이는 군부 정권이 자진해서 최빈국 지정을 유엔에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스스로 최빈국 지정을 요구한 것은 불어나는 외채 부담을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워 최빈국 지정을 통해 외채 탕감을 받기 위해서였다.[2] 물론 버마는 세계적인 쌀 생산국이라 식량이 부족하지는 않아 고난의 행군 시기의 북한처럼 대규모 아사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3] 고 소 나잉(Ko Soe Naing)이라는 또 다른 학생도 총상 후유증으로 며칠 후에 사망했다.[4] 심지어 최대 수치로는 무려 1만 명이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5] 특히 시위가 시작된 8월 8일 단 하루에 군이 인정한 수치로만 95명이 죽고 240명이 다쳤다.[6] 한국 언론이나 문헌 등에 따라 영어식으로 '셰인 르윈'이라고도 한다.[7] 사실 셩 룬은 1950년에 소수민족 반군 지도자를 직접 죽인 전적이 있고 이후에도 1962년 7월 7일에 있던 대학생들의 반정부 시위와 1974년 12월 11~15일에 있던 우 탄트 UN 사무총장의 장례식에 대한 정부의 푸대접에서 비롯된 폭력 시위의 진압을 현장에서 지휘하는 등 반정부 시위 진압에 누구보다 앞장선 인물이라 군부에서도 강경파로 분류될 정도였다.[8] 심지어 이들 중에는 초등학생도 있었다고 한다.[9] 이들 중 500명은 미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살해된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