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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16:51:48

중세/정치사/중기/서유럽 일대

1. 개요2. 서유럽 일대
2.1. 프랑크→프랑스
2.1.1. 필리프 2세 이전2.1.2. 필리프 2세 치세2.1.3. 필리프 2세 이후
2.2. 프랑스의 제후령들
3. 부르군트 왕국 ⇒ 신성 로마 제국령 부르군트
3.1. 사보이아 백국
4. 브리튼 제도
4.1. 잉글랜드 왕국
4.1.1. 11세기4.1.2. 12세기4.1.3. 리처드 1세의 제3차 십자군 원정4.1.4. 섭정기의 잉글랜드4.1.5. 리처드 1세의 귀환과 프랑스 원정4.1.6. 13세기
4.2. 스코틀랜드 왕국4.3. 웨일스4.4. 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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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서유럽 일대

2.1. 프랑크→프랑스[1]

2.1.1. 필리프 2세 이전
카페 왕조가 성립된 후 초반은 단순히 왕령지 내지는 왕국의 영토를 확대하거나 말 안듣는 영주들과 티겨태격하던 상황이었다. 한편 로베르 2세는 두번째 결혼이 근친혼이란 교황의 비판으로 인해 교황청과 갈등을 빗다가 결국 1001년 베르트와 이혼하고 1003년에 어떻게 해도 근친이 될 수 없는 아를 백작 기욤 1세의 딸 콩스탕스와 결혼했다.

세 번째 왕비인 콩스탕스는 1003년 결혼 당시 17세로 당대 기록에 의하면 “허영이 많고 탐욕스러우며 거만하고 앙심을 품는” 성격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에는 그녀가 북부 프랑스와는 전혀 다른 풍속을 지닌 프로방스 지역 출신이라는 편견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문제는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들이 로베르 2세의 측근들에게서 나온 것이었고 이중 보배의 궁정백이었던 위그는 그녀를 멀리하라고 조언했고, 결국 1008년 왕비의 친척중 한 명이었던 앙주 백작 폴크 3세에게 살해되었다.

이사건으로 인해 놀란 로베르 2세는 베르타와 다시 재결합하기 위해 그녀와 함께 로마로 가 콩스탄트와의 결혼 무효와 베르타와의 재결합 및 합법으로 인정해달라고 교황을 설득하나 실패하고 만다. 어쨌든 콩스탕스는 로베르 2세에게 4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선사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콩스탕스는 아들들을 내세우며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자 했고 이는 종종 궁정에서 수많은 충돌과 사건들을 일으키고는 했다.

이러한 왕실 내부와는 별개로 로베르 2세는 부왕처럼 지방의 제후 세력 특히 노르망디 공작을 제어하려 했다. 당시 경제 기반은 전적으로 농토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권력의 기반은 토지와 인민에 대한 장악력에 달려 있었다. 이에 따라 로베르 2세는 조금씩 왕령지를 늘려나가야만 했는데 그는 손강 서편에 위치한 부르고뉴 공국을 주목했다. 부르고뉴의 공위는 로베르 2세의 친족이었던 외드 앙리가 982년까지 통치를 하다가 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자리가 비어진 상태였다. 문제는 외드 앙리는 아들을 두지 못했지만 오토 빌헬름이란 인물을 양자로 두었기에 로베르 2세는 오토 빌헬름과 부르고뉴의 공위를 두고 분쟁을 벌였고, 결과적으로 승리한 것은 로베르 2세였고,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 왕령으로 흡수되는 형식으로 병합하는데 성공한다.

1025년에는 장남이었던 위그가 사망하였고 이에 왕세자로 차남인 앙리 1세가 지명되었다. 곧 1027년 왕비 콘스탕스의 주장에 따라 앙리 1세 또한 공동왕으로 축성식을 거행했다.

이렇게 앙리 1세의 왕위계승이 확실해지자 콩스탕스는 아들들을 부추겨 로베르 2세에게 대항하는 봉기들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결국 1030년경 로베르 2세는 두 아들인 앙리 1세와 로베르, 외드의 저항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로베르 2세의 군대는 아들들과 콩스탕스가 이끄는 군대에 패배하였고 1031년 로베르 2세가 사망하게 된다.

앙리 1세 또한 동일하게 집권기는 영토적 분쟁들을 겪었다. 초창기에, 그는 어머니의 지원과 함께 남동생인 로베르가 일으킨 아버지에 대한 반란에 동참하였다. 이후 아버지가 죽자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1세를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여 왕위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왕의 후계자로 로베르를 지지하였고, 왕이 죽으면서 앙리는 반란을 일으킨 형제들을 상대해야만 했고, 이에 굴복해 왕령지를 나눠주는 선에서 달래줘야 했는데 동생 로베르에게 부르고뉴 공국을 왕자령으로 수여해야 했고, 다른 동생인 외드에게 오를레앙을 수여해야 했다.

1035년 그의 든든한 지원자였던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1세는 예루살렘 순례를 다녀오던 중 사망하고 말았고 그의 뒤를 이어 일곱 살밖에 안된 사생아로서 작위를 상속받았던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가 생전 작성된 유언장에 따르 작위를 승계받았는데 이에 앙리 1세는 기욤 2세를 도와 다른 귀족들의 도발을 제압하였고 1047년에는 이들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기욤 2세의 권력이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하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앙리 1세는 오히려 기욤 2세를 견제하려는 다른 노르망디 귀족들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혈기왕성한 청년 공작이 된 기욤 2세의 기세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054년과 1057년 앙리 1세의 군대는 기욤 2세의 군대와 큰 전투를 두 차례 치렀으나 결국 대패하고 말았다. 다른 한편 앙리 1세는 콘라드 2세의 뒤를 이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오른 하인리히 3세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1056년에 사소한 영토 문제를 두고 충돌하여 그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상실하게 되었다.

앙리 1세의 치세의 봉건제는 그 정점에 달한 상태로 주군과 종신 사이에 충성과 토지를 매개로 한 쌍무적 계약 관계라고 정의될 수 있는 봉건주의에서 권력은 토지와 인민에 대한 실질적인 장악력을 지닌 영주권들로 파편화되었고 수많은 권력의 세포들은 끊임없이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저해해 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앙리 1세는 계속된 전투 속에서 새로운 영지를 획득했지만 동시에 계속해서 또 다른 영지들을 상실하기도 했다.

더욱이 1049년 3월에 열린 랭스 공회의에서 교황 레오 9세가 프랑스 내의 주교들에 대한 서임권을 주장했는데, 당시 프랑크의 국왕이었던 앙리 1세는 왕권이 약화된 터였기에 레오 9세의 주장은 관철되었다.

1059년 7세의 장남 필리프의 축성식을 거행하면서 그를 공동왕을 삼다가 1060년 앙리 1세가 죽자 필리프 1세가 프랑스의 단독왕이 되었지만 겨우 8살에 불과하여 모후 안과 고모부인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5세가 섭정을 실시했다.섭정 기간인 1060년 최초로 대무관장직(Grand Connétable de France)직을 만들어졌으며 그가 직접 통치를 시작한 것은 15세가 되던 1067년부터였다.
그동안 봉건 영주들에 비해 위축해가던 카페 왕조의 권력을 상승시키기 시작한 국왕으로 선대들과 똑같이 봉건주의적인 지방분권적 정치 질서에 직면해 있었다. 하지만 부왕과 달리 필리프 1세는 왕령지를 확장하고 왕권을 강화해 나가는 데 있어서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1069년에서 1077년까지 파리 인근의 베르망두아 일부와 백생 지역을 차지했고 1101년에는 막대한 자금으로 부르주 자작령과 기타 여러 영지들을 사들였다. 확장된 왕령지에서 거두어들인 수입을 관리하기 위한 재정관을 고용하는가 하면 아직 세속적 영향력 아래 있었던 여러 교회의 재정에 개입하여 왕실 재정으로 돌리기도 했다. 하지만 후자와 관련해 필리프 1세는 이 당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던 교회 개혁 세력의 강력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치세 동안 그와 가장 치열하게 싸운 적수는 바로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였다. 필리프 1세 섭정기인 1066년 노르망디 공작령의 내분을 모두 평정한 기욤 2세는 잉글랜드 왕위를 요구하면서 잉글랜드를 공격, 왕위에 올랐다. 잉글랜드에서 노르만 왕조 세워‘정복왕 윌리엄 1세’가 된 기욤 2세는 북부 프랑스 지역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이에 필리프 1세는 앙주 백작 풀크 4세, 그리고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1세와 연대, 견제 세력을 형성했다.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1세는 필리프 1세와 고종사촌 간이었으며 필리프 1세는 이 로베르 1세의 의붓딸이자 프리슬란트 백작 플로렌스 1세의 딸 베르트와 결혼했다.

1076년 필리프 1세는 기욤 2세에게 브르타뉴에서 대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늘 서쪽을 위협하는 잉글랜드-노르망디 세력에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기욤 2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078년 기욤 2세의 아들 로베르 2세(1051년 ~ 1134년)가 기욤 2세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필리프 1세는 그를 도와주었고 1087년 기욤 2세가 사망한 후에도 노르망디 공작령을 물려받은 로베르 2세에게 동생 윌리엄 2세에게 돌아간 잉글랜드 왕위를 빼앗을 것을 부추기기도 했다.

1080년 한때 카페 왕조의 갈갈이 찢어져 있던 왕령지들을 포위하듯 감싸고 있었던 베르망두아 백작령을 통치하던 헤르베르티언 가문의 오도가 백작위를 계승했는데, 정신적으로 쇠약한 상태였기에 프랑스의 바론 이사회에서 다시 지위를 제한하는 안건이 통과되었고, 1085년 베르망두아의 남작들은 백작령의 통치권을 오도 1세의 여동생 아델라이드 드 베르망두아에게 넘겼고, 아델라이드 드 베르망두아는 카페 왕가 앙리 1세의 아들 위그와 결혼하면서 베르망두아는 프랑스 왕자령으로 편입되었다.

1092년 필리프 1세는 자신의 지지 세력인 앙주 백작 풀크 4세의 부인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베르트라드와 결혼하기 위해 필리프 1세는 왕비 베르트와 강제 이혼을 했고 베르트라드 또한 필리프 1세와 결혼하기 위해 풀크 4세 곁을 떠났다. 결국 같은 해 5월 필리프 1세와 베르트라드는 재혼을 감행했다. 이에 1094년 오툉 공의회에 모인 32명의 주교들은 이들의 결혼이 부당함을 선언하고 필리프 1세와 베르트라드에게 파문을 선고했다. 하지만 주교들의 파문령이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파문이라는 치욕스러운 상황을 견디면서 필리프 1세와 베르트라드는 꿋꿋하게 결혼 생활을 이어나갔다.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교회개혁 및 십자군 모집과 관련해 프랑스를 방문한 길에 필리프 1세에게 더욱 강력한 파문 선고를 내렸다. 결국 1096년 가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제1차 십자군에 수많은 제후들이 참가했으나 파문을 선고받은 필리프 1세는 참가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로 필리프 1세는 자신이 참전해야 할 전투에 전처였던 베르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루이 6세를 파견했고 1098년에는 루이 6세에게 축성식을 거행하도록 했다. 교황과의 관계가 개선된 것은 파스칼 2세가 신임 교황이 된 이후였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권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와 관계를 개선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104년 파스칼리스 2세는 필리프 1세의 파문을 철회했으며 1107년에는 프랑스를 방문, 필리프 1세 및 루이 6세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로써 13세기 내내 지속될 신성로마제국에 대항한 프랑스-교황권 사이의 동맹이 그 시작을 알리게 된 것이다. 이듬해인 1108년 7월 29일, 필리프 1세가 사망하고 루이 6세가 단독왕이 되었다.

전처였던 베르트의 소생이었던 루이 6세는 어릴때 생모와도 이별을 한데다가 새왕비와의 다툼을 우려한 아버지 필리프 1세로 인해 어린 시절을 왕실 수도원이었던 생드니 수도원에서 자랐다. 이때 그곳에서 수도사 쉬제를 만났고 둘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이후 쉬제는 루이 6세가 즉위한 이후 그의 정치적·종교적 조언자로 활약을 했다.

이미 공동왕 시절부터 군공을 세운 루이 6세는 서둘러 장례식을 끝낸 후 오를레앙으로 가서 8월 3일 축성식을 거행했다. 축성식은 통상 랭스 대주교가 거행했으나 왕국 서부 지역인 믈룅에서 필리프 1세가 사망하자 루이 6세는 동쪽 끝에 위치한 랭스보다는 보다 가까이 남동쪽에 위치한 오를레앙으로 가서 축성식을 거행했다.

사실 루이 6세는 의붓어머니 베르트라드의 아들인 망트 백작 필리프가 랭스로 가는 길목을 막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때문에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최대한 신속히 축성식을 거행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 바로 오를레앙에서 축성식을 올리는 것이었다. 물론 랭스 대주교 라울은 이에 대해 항의했지만 이미 루이 6세는 상스(Sens) 대주교 댕베르에 의해 오를레앙의 생트크루아 성당에서 축성을 받고난 이후였다. 하지만 다행히 다른 제후들이나 영주들이 그의 왕위계승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도전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루이 6세는 이전의 카페 왕들과 달리 본격적으로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펼쳐나갔다. 그는 전 왕국에 걸쳐 이른바 ‘통치’라는 것을 행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전투와 무력 투쟁을 통해 봉건적인 제후와 귀족들을 제압하는 방법을 지양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왕국의 여러 인민들을 실질적인 국왕의 신민으로 만들어 나갔다. 이러한 ‘통치’를 통해서 그는 봉건주의적 권력 파편화를 극복하고 왕국을 통합, 카페 왕권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이 당시 활기차게 전개되던 각 도시의 코뮌 운동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이들의 자율권과 자치권을 보장하고 봉건 영주들이 도시들을 약탈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저지했다. 즉 도시의 왕권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왕권의 도시에 대한 자치권 부여가 이루어지면서 향후 프랑스 왕국에서 지속될 왕권과 도시의 긴밀한 관계를 만들어 나갔다. 이러한 자율권과 자치권은 또한 여러 수도원과 종교 조직들에게도 부여되었으며 이를 통해 루이 6세는 종교적인 명분을 획득했다. 그리고 비적 집단으로 변해버린 몰락 귀족들의 약탈 행위들을 척결해 나가면서 왕국 내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이렇게 해서 루이 6세는 카페 왕권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왕국 전체에 걸쳐 왕의 권위를 확장해 나갔다. 그의 별칭인 ‘확장왕(le Gros)’은 바로 이러한 그의 왕권의 확장과 확립에서 유래한다.

물론 그의 정책이 순탄하게만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왕권 강화 정책에 저항하는 수많은 봉건 귀족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인 ‘전투왕(le Batailleur)’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유래한다. 어쨌든 이러한 다양한 무력 충돌 상황과 전투에서 루이 6세는 많은 부상을 당하기도 했고 많은 패배를 겪기도 했다. 특히 잉글랜드 왕 헨리 1세는 그 자신이 프랑스 왕의 종신으로서 이러한 프랑스의 분열적 상황을 십분 활용하고자 했다. 더군다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는 헨리 1세의 사위로서 그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 되었고 1124년에는 랭스까지 쳐들어오기도 했다.

이같은 하인리히 5세의 공격은 프랑스에 대한 외부 세력의 침입으로 간주되었고 루이 6세를 중심으로 다수의 제후(베르망두아, 부르고뉴, 플랑드르, 아키텐, 앙주, 샹파뉴, 네베르 , 블루아 등이 공동 전선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의 대제후들은 프랑스 왕의 권력 강화도 원치 않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세력 확장은 더더욱 원치 않았다. 루이 6세는 이 당시 생드니에 보관된 ‘붉은 왕기(oriflamme)’를 내세우면서 이 연합군의 수장을 자처했다. 사분오열을 기대했던 하인리히 5세는 프랑스 제후들의 연합군을 보고 다시 동프랑키아로 후퇴했다. 어쨌든 이후로도 잉글랜드와 신성 로마 제국의 긴밀한 관계는 계속되었고 프랑스 왕은 이를 이용해 프랑스 제후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다.

루이 6세는 또 1127년 플랑드르 백작 샤를 1세가 사망하고 여러 귀족들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자 조정자 또는 중재자의 입장으로 플랑드르 백작위 계승 문제에 개입하여 문제를 조정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같은 활동으로 루이 6세의 권위는 점차 높아졌고 봉건제후들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루이 6세는 사부아 백작 욍베르 2세의 딸 아델라이드와 1115년경 결혼하여 총 8명의 자식을 두었다. 이중 장남인 필리프는 13세가 되던 해인 1129년 공동왕으로 축성식을 받았다. 하지만 1131년 필리프는 갑작스럽게 요절했고 세자와 공동왕의 직위는 왕보다는 성직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던 차남 루이에게 떨어지게 되었다. 어쨌든 루이는 형을 대신하여 1131년 공동왕으로 축성을 받았다. 1137년에는 갑자기 모든 일이 평화롭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 왕 스티븐과의 평화조약이 성립되어 그의 아들인 외스타슈가 노르망디 공작령을 두고 루이 6세에게 봉건신서를 실시했다. 프랑스 왕권이 직접적으로 미치지 않던 남부 지방에서도 낭보가 찾아들었다. 아키텐 공작 기욤 10세가 사망하면서 공작령을 무남독녀였던 엘레오노르 다키텐에게 상속하면서 주군인 루이 6세를 딸의 후견으로 지명했기 때문이었다. 루이 6세는 엘레오느르의 후견인이 된 점을 이용해 자신의 아들인 루이 7세와 약혼시켜 거대하면서도 풍요로운 아키텐 공작령이 추후 프랑스 왕실령에 귀속시키려고 했다.

같은 해 7월 25일 보르도에서 루이 7세는 엘레오노르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 사이 8월 1일 루이 6세는 갑자기 병이 들어 사망하였고 루이 7세가 17세의 나이에 누구의 이의제기도 없이 안정적으로 단독왕이 되었다. 8월 8일에는 엘레오노르의 남편으로서 아키텐 공작도 겸하게 되었다.

하지만 루이 7세의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그는 언제나 장남 필리프가 왕위를 계승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직으로 나아가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그는 왕이 되기 위해 필요한 정치·군사적 활동과 관련해서는 미숙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별명 ‘연소왕(le Jeune)’은 그가 미성년 상태에서 왕위에 올랐다는 의미도 있지만 ‘미성숙’ 또는 ‘미숙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부왕의 절친이었던 생드니 수도원장 쉬제가 여전히 루이 7세 곁에 충실한 조언자로 남아 있었지만 그는 당대인들의 눈에 정치적으로 많은 실책들을 저질렀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루이 6세 당시에 왕권의 기틀이 그나마 잡혔다고는 하나 여전히 프랑스 왕국은 봉건주의적인 지방분권화와 권력 파편화가 심한 곳이었다. 따라서 루이 7세는 쉬제의 조언을 받들며 부친의 정책과 기조를 그대로 유지해 나가야 했다. 즉 그는 난폭한 기사 귀족들에 맞선 도시 부르주아들 및 성직자들의 자치권 확립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 외에도 농민들의 여건 개선과 농촌에서의 생산력 증대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개간 사업을 장려하고 농노들의 해방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물론 이러한 조치들은 어디까지나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었다. 1140년대 초 루이 7세는 왕권과 배치되는 경우에는 교황과의 분쟁도 서슴지 않았으며 파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4년 후 루이 7세는 교황과의 화해 무드를 위해 제2차 십자군 원정에 참전하게 되었다.1146년 루이 7세는 왕비 엘레오노르와 함께 아직 십자군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봉건 제후들을 이끌고 육로를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도중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3세가 이끄는 십자군과 합류하였는데 루이 7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이들과 잘 어울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제는 서유럽 기독교인들에 대한 신뢰를 저버린 동로마 제국 황제와 그 측근들은 십자군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이 교황에게 군대를 요청한 이유는 자신들을 위한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십자군은 아예 눌러 앉아 그 지역을 자신들의 땅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1148년 3월 루이 7세의 십자군은 엘레오노르의 숙부인 레몽 드 푸아티에가 통치하고 있는 안티오크 공국에 도착했다. 큰 위기에 처해 있던 레몽 드 푸아티에는 루이 7세의 원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루이 7세는 오직 예루살렘을 향한 전진만을 고집했다. 남부 프랑스 출신의 레몽은 화려하고 언변 좋으며 과장이 심한 사람이어서 애초에 성직자적인 분위기를 풍기던 금욕적인 루이 7세와 성격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남부 프랑스 출신인 엘레오노르는 곧 숙부와 친근한 모습을 보이면서 루이 7세로 하여금 숙부를 도와줄 것을 요구하였다. 레몽과 알리에노르가 보여준 다소 자유분방한 지중해 지역 사람들의 태도는 곧 북부 프랑스의 경건하고 엄숙한 성직자들에게 양자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를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루이 7세에게는 안티오크 방어보다도 예루살렘으로 전진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렇게 해서 1148년 늦은 봄에 콘라드 3세와 루이 7세, 그리고 십자군이 전열을 정비했다. 하지만 이마드 앗 딘 장기가 점령한 에데사 수복보다도 이들은 1146년 죽은 장기의 새로운 후계자인 누르 앗 딘 마흐무드와의 전투만을 학수고대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 왕국과는 동맹 관계를 맺고 있던 다마스쿠스가 곧 누르 앗딘에 의해 함락될 것이라 추측하고는 어처구니없게도 다마스쿠스를 공격하여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현지에 있던 사람들과의 관계는 안중에도 없었고 오로지 유혈낭자한 전투와 승리, 그리고 여기에서 얻어질 명예와 전리품, 무용담에만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머나먼 이국 땅에서 거대한 도시 하나를 점령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결국 루이 7세와 콘라드 3세가 이끄는 십자군은 점령 실패와 함께 초라한 모습으로 본국으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제2차 십자군은 루이 7세에게 커다란 재앙이었다. 원정에 실패해서가 아니라 원정을 갔다는 그 자체가 루이 7세 통치에 치명타들을 가했다. 먼저 장기간의 원정으로 왕실 재정이 바닥이 났고 이는 루이 7세의 운신의 폭을 크게 제약하였다. 특히 봉건제후 및 귀족들에 대한 그의 장악력이 크게 손상되었는데 그는 이에 대해 대처할 수 있는 재정을 당장 마련할 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원정으로 인해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 간의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위에 상술한 숙부 레몽 드 푸아티에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결혼 생활 동안 딸 둘만 낳으면서 남자 후계자가 절실했기에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와 생드니 수도원장 쉬제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루이 7세는 결국 1152년 엘레오노르와 이혼했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이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엘레오노르는 아키텐 여공작으로서 서남부 지역의 막대한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지니고 있었다. 즉 이혼은 이 영토들이 다시 왕권의 범위에서 이탈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더 안 좋은 점은 이후 엘레오노르가 이 영토들을 가지고 프랑스 왕권의 가장 큰 경쟁자인 잉글랜드 국왕이자 프랑스 왕국에 속한 노르망디 공작이자 앙주 백작이었던 헨리 2세와 결혼한 것이었다. 이 둘의 결합은 루이 7세에게 악몽과도 같았다.

노르망디, 앙주, 아키텐이라는 프랑스 왕국의 대제후령 3개가 통합되어 잉글랜드 왕의 영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루이 6세 때부터 부단히 확장해 왔다고는 하지만 카페 왕조의 왕령지는 왕국의 절반을 차지하는 잉글랜드 왕의 영지에 비하면 극히 보잘 것 없는 크기만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루이 7세는 거대한 헨리 2세에 직접 맞설 수 없었고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헨리 2세 가문의 분열 조장을 끊임없이 꾀했다.

하지만 혈기왕성한 헨리 2세는 1159년 툴루즈까지 장악하는 등 그 세력을 확대해 나갔고 이에 대해 루이 7세는 무력하게 관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루이 7세는 1154년 카스티야 왕 알폰소 7세의 딸 콩스탕스와 결혼했으나 콩스탕스는 딸 둘만을 출산하고 1160년 고향에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에서 돌아오던 중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루이 7세는 샹파뉴 백작과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티보 4세의 딸 아델과 결혼했고 1165년 드디어 왕위를 이을 아들 필리프를 얻었다.

1170년대에 이르러 헨리 2세의 궁정에서는 헨리 2세와 그의 아들들 청년왕 헨리, 제프리, 리처드 사이의 갈등이 심각해졌다. 루이 7세는 이들을 지원함으로써 헨리 2세의 왕권 약화를 도모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이 당장 효과를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1179년 11월 1일 루이 7세는 장남 필리프 2세를 위해 축성식을 거행하고 이듬해인 1180년 9월 18일 사망했다. 이미 공동왕으로 필리프 2세가 왕권을 장악한 상태였던 만큼 그의 공식적인 왕위 즉위는 아무런 문제없이 이루어졌다.
2.1.2. 필리프 2세 치세
단독왕이 된 필리프 2세는 우선 지방분권적인 권력 파편화가 만연한 난관에 봉착한 프랑스에 다시 하나의 질서를 세워야 했다. 카페 왕실 직할지는 일드프랑스와 부르쥬에 그친 상황이었다.[2] 즉위 초기의 변덕스러운 정치 동맹, 반란과 배신, 변절로 얼룩진 소용돌이에서 필리프 2세는 동맹을 정비하고 번복했으며 교활한 실용주의적 노선을 일관하여 동맹을 맺고 끊었다.

불과 14세에 필리프 2세는 자신의 예법 교육을 담당한 플랑드르 및 베르망두아, 발루아 백작 필리프 1세를 외숙인 샹파뉴 가문의 견제책으로 활용하는 데 성공했다. 필리프 1세는 질녀인 에노의 이사벨을 필리프 2세의 배필로 주선했는데 지참금은 플랑드르 백국의 주 수입원인 아르투아 백작령[3]으로 이사벨이 상속하기로 조인했다. 이후 필리프 1세와 클레르몽 백작 라울 1세는 성 하나를 두고 분쟁을 벌였고, 실상은 단독왕으로서 이미 친정을 하고 있었던 소년왕을 둘러싼 연장자로서의 영향력을 두고 필리프 1세가 라울 1세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필리프 2세는 필리프 1세의 단물을 다 빨아먹은 다음 이 분쟁에 개입하여 그에게 엄청난 모욕을 주어 모든 방면에서 결별을 선언했다. 이 사건은 질투와 복수심에 사로잡힌 필리프 1세가 필리프 2세에 대한 흑색 선전을 확산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북프랑스 군벌들을 연합하여 일으킨 향후 7년간 지속된 대규모의 반란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필리프 1세는 적자가 없었고 이는 필리프 2세가 플랑드르 영지 상속 문제에 관여할 빌미가 되었다.

한편 필리프 2세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독실한 기독교 왕의 이미지로 왕권을 굳건하게 해 민심을 얻으려고 하나 그 방향성은 아버지와 달랐다. 유대인들을 보호한 것과 달리 필리프 2세는 유대인들을 재산을 몰수했는데 이는 앞으로 다가올 앙주 제국과의 분쟁에서 필요한 자금이 되었다. 그는 헨리 2세의 아들과도 교류하면서 그들이 아버지 헨리 2세와 싸우도록 내분을 조장했다. 젊은 왕 헨리는 반란을 도모하자는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를 비롯한 수많은 동맹국의 유혹을 뿌리치며 3년 동안 마상창시합에만 몰두하고 있었고, 그런 그에게 다시 야욕의 불을 지핀 사람은 그보다 10세 아래인 15세의 필리프 2세였다.

1181년, 플랑드르와 썽쎄흐가 급습하여 파리 코앞까지 치고 들어온 순간에 헨리 2세의 아들들이 필리프 2세를 구출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헨리 2세가 나서서 필리프 2세의 편을 들었고 젊은 왕 헨리, 리처드, 제프리는 플랑드르 백작과 공모한 군벌들의 권역을 응징했다. 이듬해, 삼형제가 내전을 벌이자 필리프 2세는 젊은 왕 헨리와 제프리에게 뒤에서 은밀하게 용병을 지원했다.

동시대의 연대기 작가들이 회고한 '잉글랜드와 프랑스 전역을 놀라게 했던 젊은 왕의 진심어린 보호와 사랑'을 받던 필리프 2세는 이렇게 되갚았다.

1182년 4월 다시 유대인들의 재산을 몰수하면서 템즈네로 추방시켰고, 다시 7월에 다시 유대인에 대한 추방령을 선포했다. 가을, 젊은 헨리가 이름뿐인 잉글랜드 공동왕 자리를 놓고 부친에게 강하게 항의했으나 합의를 보지 못하여 그 길로 당장 파리로 가 필리프 2세에게 조언을 구하고, 돌아간 즉시 이렇게 선언했다.
"부왕께서 명령하신 비굴한 위치에 있느니, 차라리 추방을 당하거나 십자군 원정을 가리다. 나의 요구 조건들이 무시된다면 이대로 자살을 하겠소!"

필리프 2세는 젊은 헨리가 제프리와 연합하여 리처드의 영지 아키텐을 침공하고, 부왕에게 반란을 일으켰을 때 또 뒤에서 헨리와 제프리에게 용병을 지원했다. 6월 11일, 젊은 헨리가 28세의 나이에 이질로 숨지자 반란이 중단되었다.

이후 필리프 2세는 제프리를 중점적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에게 수년간 지체되었던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을 재촉했다. 헨리 2세는 이 문제를 질질 끌었으나 리처드는 1183년 가을에 아델과의 결혼을 선언하고, 교회의 지지를 얻어냈다. 또한 필리프 2세와의 우정 및 동맹을 두고 리처드와 제프리가 경쟁을 벌였고 리처드의 선언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1183년 12월 6일, 지조흐에서 필리프 2세와 헨리 2세가 만나 회담을 열었다. 청년왕 헨리의 미망인인 마르가리트의 지참금이었던 지조흐와 노르망 벡쌍은 아델의 지참금으로 합의되었고, 헨리 2세는 아델이 리처드가 아니면 존과 결혼할 것이라고 알렸고, 필리프 2세에게 바다 건너 그의 모든 땅에 대해 전부터 결코 바라지 않았던 충성 서약을 했다.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는 샹파뉴 백작 앙리 1세의 미망인인 마리와 재혼을 약속했으나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포르투갈 공주 테레사와 재혼했고, 테레사의 과부산에 질녀 이사벨의 지참금에 속한 영지를 포함시키는 것으로 필리프 2세를 도발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제2대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에게 사절단을 보내 프랑스뿐만 아니라 브르타뉴까지 침공할 것을 설득했다.

필리프 2세는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지지를 일약에 확보하여 그의 계획을 가로막았고, 플랑드르와 에노를 이간질해 그들이 이전투구하도록 만들었다.

1185년 7월, 솜므에서 필리프 2세와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의 군대가 대치했다. 그러나 전투 직전,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가 회담을 제의했는데, 불과 19세의 필리프 2세는 그로부터 아미앵, 몽디디에흐, 후아, 슈아지 오 바끄, 뚜호뜨를 얻고, 베르망두아와 발루아를 상속분으로 차지하는 협정을 체결하는 것으로 플랑드르 영지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1185년 말,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가 반항적인 봉신들을 응징하는 도중 이로 인해 교구의 피해가 막심해지자, 필리프 2세는 이를 명분으로 부르고뉴 내전에 개입하여, 위그 3세의 반항적인 봉신들에게 용병을 지원했다. 12월, 썽쓰에서 필리프 2세가 위그 3세를 소환했으나 그가 이에 불복하자 이듬해 1월, 필리프 2세는 이를 명분으로 출군하여 부르고뉴를 기습, 위그 3세에게 벌금으로 30,000리브르를 요구했다.

1186년 초, 필리프 2세는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와 연합하여 부르고뉴를 침공해, 주요 도시까지 치고 들어가 샤띠용을 점거했다.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는 오흐비에또로 달려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아들이자 이탈리아의 왕으로 막 즉위한 하인리히 6세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프리드리히 1세가 아들의 개입을 금지했다. 4월, 프리드리히 1세의 중재하에 필리프 2세는 위그 3세와 화해하고, 그로부터 거액의 배상금을 뜯어냈고, 이제 필리프 2세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분열로 눈을 돌렸다.

1186년 5월, 필리프 2세와 제프리는 헨리 2세와 리처드를 대적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18세기 역사가들의 추측에 따르면,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던 리처드의 노고를 완전히 망쳐놓고 부친 헨리 2세와의 반목을 악화시키기 위해, 제프리가 필리프 2세에게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 재촉을 귀띔하고, 이 의도를 안 필리프 2세가 흔쾌히 받아들여 헨리 2세에게 공개적으로 압력을 넣었다. 제프리는 부친과 형에게 맞설 낭트 국경의 영주들과 동맹을 맺고, 뉴버그의 윌리엄은 제프리가 앙주를 탐냈다고 기술했다.

에버라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시기 리처드는 제프리와 필리프 2세의 농간에 발목이 잡힌 채, 모후 엘레오노르를 앞장세워 자신과 공동으로 아키텐 통치권을 행사하려는 부친 헨리 2세를 묵인해야 했다.

그러나 1186년 8월 19일, 제프리는 파리에서 27세의 나이로 의문사했다.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에게 자신이 상위 군주이므로 제프리 2세의 딸 엘레오노르 드 브르타뉴의 후견인임을 주장하여 양육권을 청구했고, 툴루즈에서 툴루즈 백작 레몽 5세을 제압하는 리처드를 철수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후 그는 계획을 계속 진행하기 의해 헨리 2세의 삼남이었던 리처드와 같은 해 겨울에 비밀 동맹을 맺었다.

한편 이시기에 파리의 인구 증가와 함께 악취가 심해지면서 포장되지 않는 길 때문이라 판단하고 도로 포장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는 우선 수도 도시의 생활에 가장 중요한 길부터 착수했다. 그러나 그는 도로가 만인을 위한 공공 시설이라는 측면에서 더 이상 민간인에게 이를 위탁하지 않고 공공 사업으로 추진했으며, 공사는 전문가에게 맡겼다. 파리 시장(prévôt des marchands)이 공사의 총책임을 맡았고, 재정 문제는 왕실의 권위로 보증되었다. 출처

그 무렵, 유년기부터 프랑스 궁정에서 필리프 2세와 함께 자랐던 절친 르노 드 다마르탱이 필리프 2세에게 등을 돌리고 헨리 2세에게 붙었다. 1187년 3월 29일, 제프리 2세의 미망인이었던 브르타뉴 여백작 콩스탕스가 그의 아들 아르튀르(아서)를 낳았고, 4월,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에게 아르튀르의 양육권도 청구했다. 누나 마르가리트를 헝가리 왕 벨라 3세와 결혼시키며, 헨리 2세에게 그녀의 지참금이었던 지조흐와 노르망 벡쌍의 영유를 내놓고 누나 아델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헨리 2세가 이 문제를 질질 끌고 양육권 청구를 거절하여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필리프 2세는 리처드를 끌어들이기로 했다.

5월 말, 필리프 2세는 군대를 이끌고 헨리 2세의 영토인 이쑤덩을 점거했다. 봉신 신분이기도 했던 헨리 2세와 리처드가 대군을 이끌고 샤토루에 당도, 필리프 2세에게 통첩했다.
'우리가 상속받은 이 땅을 떠나 그대의 왕국으로 철군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 전쟁에서 우리의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그대에게 주어진 것은 전투 혹은 철군뿐이다.'

중무장한 전군이 전투 대형을 갖추고 대치하여 공격 명령을 기다리는 상황하에, 리처드가 군사 경계선에서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를 대면했다. 이때 필리프 2세의 통수에 당할대로 당해왔던 필리프 1세는 리처드에게 필리프 2세를 경계하라고 경고를 주었다. 이후 전투는 리처드가 이끌던 군대 내부에서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무산되었다.

1187년 6월 13일, 샤토루에서 필리프 2세와 헨리 2세가 만나 회담을 열었다. 필리프 2세는 그로부터 전투 한 번 치르지 않고 이쑤덩과 프레티발을 차지했으며, 2년 간의 휴전으로 협정을 체결했다.회담이 끝나자 필리프 2세와 리처드는 파리로 가서 함께 지냈다. 이기간 동안 필리프 2세는 리처드가 부왕인 헨리 2세를 배신하도록 부추겼다. 그리고 그의 시도는 헨리 2세가 리처드에게 노르망디로 소환하는 서신을 보냈을메도 응하지 않는 것으로 결실이 이루어졌다.

1187년 7월, 서유럽 전역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소식이 전해졌다. 하틴 전투 패배로 인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것이었다. 1187년 9월 5일, 필리프 2세의 첫 왕비 이사벨 드 에노가 왕세자 루이를 낳았다. 가을이 되자 리처드는 헨리 1세에게로 돌아갔으며 이 무렵,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에게 지속적으로 요구해 온 제프리 2세의 자식들에 대한 양육권 청구를 포기했다.

1187년 11월, 리처드는 보베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귀족들과 앞장서서 십자가를 짊어졌다. 아들의 결정을 전해들은 헨리 2세는 5일간 칩거하는 것으로 입장을 표시했다. 이를 알게 된 리처드는 십자군을 불참하는 대가로 부친에게 자신을 상속인으로 지명해 줄 것을 청했으나, 그는 답을 미루었다.

1187년 12월, 필리프 2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회담을 열었다. 둘은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를 견제하는 데 대해 입장의 일치를 확인했고, 필리프 2세는 그에게서 플랜태저넷령을 침공할 시 군사적으로 협력하겠다는 확약을 받아냈다. 그리고 왕비 이사벨의 부친 에노 백작 보두앵과 교섭하여 동맹을 다졌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노르망디 국경 지대의 긴장감이 급격히 고조되었다고 증언했다. 그 후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에게 누나 마르가리트의 지참금이었던 지조흐를 내놓고, 리처드와 누나 아델의 결혼을 요구했다.

1188년 1월 21일, 필리프 2세와 헨리 2세는 티레 주교의 연설에 깊은 감동을 받고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평화의 입맞춤을 나누고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할 것을 맹세했다. 두 왕은 살라딘세를 걷기 시작했으나, 필리프 2세는 원성에 부딪히자 즉각 그만두었다.

1188년 봄, 리처드의 아키텐과 푸아티에의 봉신들이 툴루즈 백작 레몽 5세와 결탁하여 대반란을 일으켰다. 리처드는 그들을 압도적으로 격파하여 수많은 귀족들과 병사들을 포로로 잡아 눈을 뽑고 가죽을 벗겼다. 그들의 친족들이 파리로 와서 필리프 2세에게 탄원하자, 그는 리처드에게 포로들을 석방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툴루즈 영지까지 밀고 들어와 께흐씨를 점유했고, 궁지에 몰린 툴루즈 백작 레몽 5세는 상위 군주인 필리프 2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에게 리처드의 공격 중단을 명령할 것을 요구했으나, 헨리 2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나의 아들 리처드는 나의 바람과 충고로 그러한 일을 한 것이 아니오. 그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는 그러한 일을 한 것이오. 더블린 대주교가 이리 전하였소.'

필리프 2세는 서신을 읽고 격분하여 협정을 깨고 군사를 이끌어 샤토루를 급습했다. 그리고 헨리 2세의 영지인 베리를 점유했다.헨리 2세가 주교들을 사절단으로 보내어 필리프 2세의 분노를 가라앉히려 했으나, 그는 분개하며 요지부동이었다. 필리프 2세가 뚜헨느 부근까지 침공하자, 7월 10일에 헨리 2세가 군사를 이끌고 잉글랜드에서 노르망디로 상륙했으며, 존이 합류했다. 상황을 알게 된 리처드가 필리프 2세와 싸우겠다며 당장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베리로 달려갔다. 하지만 필리프 2세는 병력을 남겨두고 이미 파리로 철수한 후였다.

이후 헨리 2세는 한 발 물러서서 먼저 전쟁이 아니라 외교적인 수단을 선택했다. 루앙 대주교 월터와 윌리엄 마셜을 사절단으로 보내 필리프 2세에게 베리에 대한 배상을 요구했으나, 그는 베리를 차지하고 노르망 벡쌍 전역를 탈환하겠다고 선언했다. 블루아 백작 티보 5세,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가 필리프 2세에게 합류했다.

1188년 8월 31일, 리처드가 부친에게 가세하기로 확약했다. 9월, 그들은 치열한 접전을 벌였고, 10월 6일, 두 왕은 샤티용에서 회담을 열었으나 최종적으로 결렬되었다. 필리프 2세는 이 틈을 타서 온갖 감언이설로 리처드를 구워삶아 부자 사이를 이간질했다. 그리고 헨리 2세가 3남 리처드를 제치고 막내 존을 계승자로 지명할 것이란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1188년 11월 18일, 봉물랭에서 필리프 2세는 리처드를 대동하여 헨리 2세와 만나 회담을 열고,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 및 리처드를 헨리 2세의 계승자로 지명할 것을 요구했다.헨리 2세가 뜸을 들이자 그 자리에서 리처드는 무릎을 꿇고 대륙의 모든 플랜태저넷령에 대하여 필리프 2세에게 충성 서약을 했다.

전세가 기울어지자 헨리 2세의 봉신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필리프 2세와 리처드에게 붙었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를 대동하고 돌아다니며 둘의 동맹을 두려워하는 영주들의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1188년 12월, 두 왕은 다음해 4월 16일까지 휴전에 합의했다. 이 기간에 헨리 2세는 사절단을 보내서 리처드와의 화해를 계속해서 시도했고, 교황의 대사와 주교들이 온갖 외교 수단을 동원하여 부자간의 분쟁을 해결하려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189년 6월, 필리프 2세와 리처드는 전쟁을 일으켜, 르망에서 쉬농까지 헨리 2세를 몰아냈다. 7월 5일, 셋은 콜롱비에르에서 회담을 열었다. 필리프 2세는 제3차 십자군 원정을 마친 즉시 리처드와 아델이 결혼할 것과 그 외 가장 굴욕적인 조건들을 헨리 2세에게 강요하여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리고 앙주와 벡쌍의 일부를 차지하고 마지막으로 헨리 2세의 요청으로 앙주 제국의 배반자 명단을 보냈다. 맨 위에는 헨리 2세가 가장 아끼는 아들 이 있었다.

이것이 헨리 2세가 급사하는 원인이 되었고, 1189년 7월 6일, 그는 적자들을 저주하며 "패배한 왕, 수치, 수치로다"라는 말을 남기며 세상을 떠났다.

헨리 2세의 사망으로 이제 리처드만이 남은 상태가 되었다. 십자군 원정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둘의 사이는 비교적 원만해보였는데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와 그의 아들들의 내전을 부추기면서 리처드의 무위를 옆에서 봐왔기에 리처드를 쉽게 건드리지 못했다. 허나 3차 십자군 결성을 준비하면서 둘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또한 1190년 언제인지 불명이나 필리프 2세는 프랑크라는 국호 대신 프랑스라는 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시기쯤에 영주 세력들을 견제할 수 있는 관료 집단 및 직속 슈발리에들을 육성하였다. 이들 관료들은 자치 도시의 부유한 시민들로 구성된 대관이라 불르는 바이이(Bailiff), 기사 계급으로 구성된 지사로 불리는 세네샬(Sénéchal)이라 하는데, 바이이는 프랑스 북부, 세네샬은 프랑스 남부의 카페 왕령지의 수입을 관할하였으며 그 밖에도 사법권을 행사해 지방 유력자들인 프레보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1190년 2월, 리처드 1세는 나바라 왕국 국경 근처까지 영지를 순회하면서 나바라 왕 산초 6세의 딸 베렝겔라와의 결혼을 준비했다. 지참금은 가스코뉴, 나바라 왕국, 카스티야 왕국과의 외교로 합의하고, 베렝겔라가 3차 십자군 원정에 동행하도록 산초 6세를 설득했다. 리처드 1세가 출정을 한 다음 엘레오노르 다키텐이 나바라를 방문해 그가 있는 곳으로 베렝겔라를 데려 오기로 했고 이 모든 일은 필리프 2세가 알지 못하도록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1190년 3월 15일, 필리프 2세의 왕비 이사벨 드 에노가 쌍둥이를 출산했으나 20세의 나이에 난산으로 죽었다. 3월 16일, 리처드 1세가 노넝꾸흐에서 드회까지 8마일이 넘는 거리를 이동하여 필리프 2세를 만났다. 회담의 목적은 불명이나 두 왕에게 비보가 전해지자마자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와 헤어져 파리로 달려갔으나, 이사벨의 장례식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파리 주교의 주재하에 이미 끝난 후였다. 필리프 2세는 이사벨과 조상들의 영혼을 위해 노트르담 대성당에 성직자 두 명을 두었다. 쌍둥이 아들들인 호베흐와 필리프도 곧 죽자 필리프 2세는 그들을 제프리 2세 옆에 묻은 뒤 제프리 2세의 친우였던 샹파뉴의 트루베르에게 연금을 지불했다. 이때까지 필리프 2세는 리처드와 달리 십자군 원정을 위한 세금을 전혀 걷지 않았다.

필리프 2세는 파리 방어를 목적으로 한 대규모의 성벽 축조를 명령하고, 모후 아델 드 샹파뉴와 외숙부이자 오른팔인 랭스 대주교 기욤 드 샹파뉴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부재 중에 왕국을 다스릴 대법령을 공포하여 이것으로 섭정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구성된 감시단을 세웠으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법령에 추가했다. 법령의 각 행은 필리프가 먼 거리에서도 프랑스를 관리하겠다는 의도를 보여주었다.

6월 24일, 필리프 2세는 생 드니 대성당에서 성직자들의 축복을 받았다. 필리프 2세는 그들에게 2척의 비단과 순금 십자가로 장식된 커다란 깃발 2개를 선물했다.1190년 7월 2일, 두 왕은 베즐레에서 회동했다. 프랑스 깃발은 황금색 백합들이 흩뿌려진 파란색이었고, 잉글랜드 깃발은 두 마리 금색 사자가 마주보고 서 있는 붉은색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보호할 것을 맹세했다. 또한 프랑스 병력은 2,000명이었고, 잉글랜드 병력은 8,000명이었으나 십자군 원정으로 얻은 수익은 50대 50으로 나누기로 조약을 맺었다.

7월 4일, 두 왕이 출정했다. 두 왕은 육로 대신에 해로를 선택하여 필리프 2세는 제노바로 향하고, 리처드 1세는 마르세이유로 가기로 했다. 그들은 리옹까지 동행했고, 갈라지기 직전 리처드 1세의 요구로, 50대 이상인 세탁부를 제외한 모든 여자의 3차 십자군 참여 금지를 약속했다. 1190년 8월 1일, 필리프 2세가 이탈리아의 제노바에 도착했다. 해군이 없어서 함대를 따로 구해야 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상인들을 상대로 수완을 발휘하여 함대와 식량을 확보했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곧바로 출발하지 못했다. 8월 7일,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 해군의 도착이 늦어지자 직접 함대와 식량을 확보하고 14일에 제노바에 도착하여 필리프 2세를 방문해 앓고 있던 그를 위로했다.

15일, 리처드 1세가 제노바로부터 30마일 떨어진 포르트피노로 가서 5일 동안 머물렀다. 이 동안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에게 갤리선 5척을 요구했고, 리처드 1세가 3척을 제안하는 것으로 대신하자 갑자기 화를 내며, 리처드 1세가 주겠다는 모든 것을 거절하면서 둘의 관계가 표면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8월 24일 필리프 2세는 이탈리아 남부의 메시나로 출항했다. 그러나 메시나 해협에서 폭풍우를 맞닥뜨려 포도주 부대를 바다에 버려야 했다. 1190년 9월 16일에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당도했는데 당시 이탈리아 남부는 시칠리아의 왕위를 두고 새로운 왕 탕그레드와 루제루 2세의 딸 쿠스탄차 1세와 결혼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를 두고 다투던 상황이었다. 더구나 시칠리아의 전 왕 굴리엘모 2세의 왕비는 리처드 1세의 여동생 조안이었고, 탕크레드는 조안을 유폐하며 상속분을 돌려주지 않고 있었다.

9월 23일에 리처드의 함대가 메시나에 당도했고, 며칠 후 유폐에서 풀러난 누이 조안을 필리프 2세와 만났는데 이때 필리프의 측근들 사이에서 필리프가 조안과 재혼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리처드 1세는 10월 1일, 조안을 멀리 떨어진 라 바냐라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리고 2주 넘게 십자군들이 메시나에 주둔하는 것에 대해 메시나 주민들이 불안감이 생길 쯤에 10월 2일, 리처드 1세는 메시나 교회의 수도사들을 쫓아내고 병사들을 주둔시켰으며, 탕크레드에게는 사절단을 보내 여동생 조안의 상속분과 지참금 반환을 요구했다.

또한 대규모의 외국 군대와 메시나인들 사이의 갈등이 고조화되자 이 때문에 10월 4일,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가 탕크레드의 사절단, 그리고 메시나의 귀족들과 회담을 열었다. 그 때 메시나인들이 리처드 1세의 동료들의 거처를 공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잉글랜드 군대만 리처드의 지휘 하에 메시나를 점령했다. 이때 필리프 2세는 메시나 성벽에 올려진 잉글랜드 깃발을 발견하자 그걸 빼고 프랑스 깃발로 바꾸라고 요구한 후 나중에 여러 갑질을 시전하면서 둘의 관계가 파탄이 나기 시작했고, 종국에 리처드 1세가 필리프 2세가 아끼는 그리스 출신의 기사를 억류해 그의 눈 하나를 적출하면서 결국 관계가 파탄이 나게 되었다.

이후 메시나 귀족들이 필리프 2세가 평화 협정의 당사자가 되어 줄 것을 청하자 1190년 10월 6일, 필리프 2세, 리처드 1세, 탕크레드가 평화 협정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두 왕이 탕크레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인정할 것, 제프리 2세의 아들 아르튀르(아서)를 리처드의 후계자로 정하고 탕크레드의 딸과 약혼시킬 것이었다. 탕크레드가 메시나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리처드 1세에게 조안의 상속분 금 20,000온스와 딸의 지참금 금 20,000온스를 지불했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에게 베즐레 서약을 근거로 탕크레드로부터 받은 돈의 반을 요구했다. 리처드 1세는 조안의 몫도 챙겨줘야 한다며 그에게 3분의 1을 주었다. 이후 두 번째 서약을 맺으면서 표면적으로 화의는 했다. 또한 두 왕은 식량, 도박, 군사적 행동에 대해 규칙을 수립했다. 메시나의 인구 밀집 때문에 식량값이 치솟자, 필리프 2세는 청년왕 헨리의 아내였던 누나 마르가리트의 두 번째 남편인 헝가리 왕 벨러 3세에게 식량 지원을 요청했다.

허나 십자군은 악천후로 인해 크리스마스가 지날 때까지 메시나에 주둔해야 했다. 1191년 2월 2일 리처드 1세가 필리프 2세의 기사 중 한념이었던 기윰 드 바흐와 일대일로 결투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에게 기윰을 돌려보내라는 요구를 하자 필리프 2세가 분노를 진정시켜서 기욤 드 바흐를 십자군에서는 내치는 일은 막았다.

한편,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과 베렝겔라가 필리프 2세가 통과했던 알프스를 거쳐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리처드 1세의 명령을 기다렸다. 리처드 1세는 함대를 보낼 테니 나폴리로 오라고 서신을 보냈다. 그 후 리처드 1세가 여태까지 숨겨온 결혼 문제를 말하면 아델과의 파혼을 통고했다. 이에 필리프 2세는 속으로 분노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2월 말 메시나 해안에 ,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이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의 호위를 받아 베렝겔라를 데려왔으나 필리프 2세는 탕크레드에게 엘레오노르와 베렝겔라를 결코 메시나에 들이지 말라 경고하고,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를 시켜서 그에게 서신 한 통을 전달했다. 탕크레드는 필리프 2세의 경고를 따라 그들에게 브린디시에 상륙하라고 했다.

이에 리처드는 아델이 자신의 부왕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며 결코 결혼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필리프 2세의 누나 아델의 명예를 짓밟고 나아가 필리프 2세와 카페 왕가를 향한 결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와 귀족들이 두 왕을 중재한 결과,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가 원하는 여성과의 결혼을 허가하는 조약을 받아들여야 했는데 누가봐도 필리프 2세가 열세인 상황이었다.

아델의 지참금인 지조흐와 벡쌍은 리처드 1세가 베렝겔라로부터 남성 후계자를 얻으면 그 지역을 후계자에게 넘기고, 얻지 못하면 필리프 2세가 돌려받기로 협약을 체결했다. 또한 리처드 1세는 꺄오흐와 께흐씨에서 필리프 2세의 영지인 대수도원장 관할 두 구역을 제외한 영유권을 얻고,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로부터 이쑤덩, 그하쎄, 오베르뉴의 영유권 그리고 파혼 배상금 10,000마르크를 받아내기로 했다. 아델은 두 왕 모두가 귀국한 후 한 달 이내에 유폐에서 풀려나기로 했다.

리처드 1세는 지금 당장 베렝겔라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시대 결혼은 가문 간의 동맹이자 평화 협정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리처드 1세가 필리프 2세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나바라 왕국과의 손을 잡은 것이었다.

이후 3월이 되자 필리프 2세가 먼저 아크레로 출항해 4월 20일에 도착했다.이에 아크레에 있던 예루살렘 왕국의 귀족들은 환영 파티를 열어주려 했지만 필리프 2세는 이를 거부하고 지휘권을 이어받아 전시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그는 공성무기 조립에 몰두하며 아크레 성벽의 약한 틈을 찾기 위해 밤마다 직접 성벽 외곽을 정찰했다.

5월 12일 리처드와 베렝겔라가 키프로스에서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필리프 2세는 교황 첼레스티노 3세에게 리처드 1세의 지연을 알리는 서한을 보내고, 키프로스로 사절단을 보내 당장 아크레로 올 것을 통고했다. 허나 리처드는 키프로스의 동로마 제국군과 싸우는데 물두했다.

아크레의 십자군 진지에 지독한 전염병이 돌았고, 루이 7세의 시대를 풍미한 권력자들과 필리프 2세의 가신들이 줄초상을 치렀다.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가 병으로 쓰러져 6월 1일에 죽었다. 6월 6일, 리처드 1세의 함대가 티레에 도착했다. 필리프 2세와 코라도가 도시 입성을 거부하여 리처드 1세는 티레의 성벽 밖에서 야영해야 했다.

6월 7일, 리처드 1세는 아크레 항해길에 올랐는데, 신원불명의 갤리선 2척을 마주쳤다. 그들은 프랑스 왕의 배라고 주장했으나 이를 의심한 리처드 1세가 그들의 신원을 확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갤리선 선원들이 공격을 시작했고 격전 끝에 리처드 1세가 승리를 거두었다. 6월 8일, 리처드 1세가 함대를 이끌고 아크레에 당도해 그날 십자군은 리처드 1세를 위한 환영 파티를 밤새도록 열었다.

6월 9일, 필리프 2세는 공성전 무기를 전선에 투입했다.이 무렵 샹파뉴 백작 앙리 2세가 필리프 2세에게 보급품을 요청했는데, 필리프 2세는 그 요청을 거절하고 대신 리처드가 응해줬다.6월 11일, 필리프 2세가 리처드 1세에게 다시 협공을 제안했으나 리처드 1세는 아크레에 오자마자 병에 걸렸고 해전을 하기에 풍랑이 유리하지 않다는 이유로 공격을 거부했다. 필리프 2세는 더 이상의 공격 지연은 없어야 한다 판단하고, 리처드 1세의 조력없이 아크레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자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가 병사들에게 봉급으로 적정량인 금화 3개를 지급하는 걸 알고 당장 금화 4개로 봉급을 올렸다. 필리프 2세의 병사들이 봉급이 낮다며 항의하자, 리처드 1세가 그들을 가로채 고용하여 필리프 2세의 군세에 제동을 걸었다. 병사들이 리처드 1세를 '남자 중의 남자로다'라고 칭송하고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가 불충을 저지르고 있다며 비난했다. 이 때문에 전선에 투입된 프랑스 공성전 무기가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튀르크인은 '그리스의 불'로 공성전 무기를 불태웠다. 이를 본 필리프 2세는 대노하여 이전까지 하지 않았던 욕설을 퍼부었다.

그 직후 필리프 2세도 병으로 쓰러졌다.이즈음 살라흐 앗 딘이 두 왕과의 회담을 거절하자 리처드 1세는 살라딘과 선물을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해 탐색전을 펼쳤다. 그 기간이 늘어지자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가 살라흐 앗 딘의 동생 알 아딜과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두 왕은 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십자군의 사기를 북돋았다. 필리프 2세는 투석기를 쏘고, 리처드 1세는 침대를 전선으로 옮겨서 누운 채 쇠뇌를 쏘았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보다 먼저 병에서 회복하여 공성전 무기를 재조립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병으로 쓰러졌다. 이후 두 왕은 병에서 회복되었으나 결국 곪을대로 곪아질 갈등이 폭발해 내분이 벌어졌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가 키프로스를 점령하면서 얻은 전리품의 반을 요구하였고, 리처드는 그 요구를 무시했고, 결국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 다른 귀족들까지 나서서 두 왕을 중재하고, 십자군 원정으로 나누는 것은 성지의 영토로 한하기로 합의했다. 허나 7월 초 다시 내분이 발생하자 리처드 1세가 아크레 성벽에 먼저 꽂히는 깃발 주인이 모든 전리품을 차지하자는 내기를 제안하자 필리프 2세와 지휘관들은 이에 응했다. 7월 3일, 필리프 2세가 마샬로 임명한 알베릭 드 클레몽이 성벽을 오르던 중에 전사했다.

1191년 7월 12일, 두 왕이 아크레를 함락했다. 성벽에는 잉글랜드 깃발이 먼저 꽂히고, 코라도가 간발의 차로 프랑스 깃발을 꽂았다. 리처드 1세는 아크레의 전리품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7월 13일 아침,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에게만 아크레의 모든 전리품 반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2년 가까이 아크레에서 참전했던 귀족들이 분노하여 이 같은 분배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다. 두 왕은 원하는 바를 들어주겠다고 답변했으나 차일피일 미루었다. 7월 20일,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가 성지를 떠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21일, 리처드 1세는 왕비 베렝겔라와 조안, 그리고 '키프로스의 처녀'와 함께 아크레 도시로 입성했다. 필리프 2세는 성전 기사단 막사에서 지냈다. 22일, 그는 신하들을 리처드 1세에게 보내어 프랑스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공식적인 이유는 병이었다. 당연히 십자군 내에서 반발이 있었으나 필리프 2세는 십자군의 모든 비난과 설득을 무시하고, 본격적으로 프랑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귀환을 준비하면서 왕은 예루살렘 왕위 계승 문제로 격렬한 언쟁을 벌였다. 그들은 코라도와 기의 주장을 각각 듣고 타협안을 내놓았다. 기의 예루살렘 왕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기가 죽으면 코라도나 코라도의 상속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한 것이다. 또한 티레, 시돈, 베이루트 지역은 코라도가 차지하기로 했다.

그 후 필리프 2세는 병을 이유로 리처드 1세에게 자신을 베즐레 서약에서 풀어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리처드 1세는 무슨 이유에선지 갤리선 중 가장 훌륭한 것으로 두 척을 필리프 2세에게 주었다.

필리프 2세는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에게 전리품 반절과 그의 군 지휘권을 넘기고, 코라도에게는 아크레 땅 반절과 모든 수비대 포로들을 양도했다.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3세의 아들 레몽에게는 기사 100명과 병력 500명을 넘겼다. 느베흐 백작 피에흐 드 꾸흑뜨네가 필리프 2세를 따라 귀로길에 올랐다.리처드 1세는 대륙의 플랜태저넷령을 평화로운 상태로 유지하겠다는 맹세를 요구했고, 필리프 2세는 이에 순순히 응했다.

1191년 7월 30일, 필리프 2세와 코라도가 아크레를 떠났다. 코라도는 왕을 티레로 데려가 송별회를 열어주었다.8월 3일, 필리프 2세가 프랑스 귀환길에 올랐다.중간에 폭풍우를 만낫지만 12월 필리프 2세는 아크레 공성전 승리를 축하 받으며 프랑스로 금의환향했다. 그는 퐁텐블로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면서 이전에도 그래왔듯이 다시 앙주 제국을 붕괴시킬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가 남긴 아르투아를 차지했다. 1192년 1월 20일, 필리프 2세는 1191년 3월 메시나에서의 협약서를, 잉글랜드 왕이 지조흐와 벡쌍을 프랑스 왕에게 넘기겠다는 내용으로 위조하여 노르망디로 가져갔다. 노르망디의 세네샬은 이를 의심하여 영유권을 넘기지 않았는데 이는 필리프 2세가 노린 바였고, 1192년 1월, 필리프 2세는 노르망디의 루앙에 유폐된 누나 아델을 풀어줄 것을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에게 재차 요구했으나 아들 리처드 1세의 승인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즉시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에게 대항할 동맹자들을 모았다. 존, 첫 왕비 에노의 이사벨의 부친이자 플랑드르와 에노 백작 보두앵, 툴루즈 백작 레몽 5세, 앙굴렘 백작 임마흐, 불로뉴 백작 르노 드 다마르탱 등이 가세했다.

또한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남프랑스 봉신들의 충성심을 뒤흔들었다. 아키텐에서는 조프루아 드 랑송을 중심으로 공공연한 반역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스코뉴에서는 툴루즈의 지원으로 반란이 터졌으나, 이곳의 세네샬이 리처드 1세의 왕비 베렝겔라의 오빠이자 훗날의 나바라 왕 산초 7세의 도움을 받아 진압했다.

또한 팔레스타인 지역에 주둔시킨 프랑스군을 이용해 리처드 1세가 유럽으로 귀환하지 못하게끔 공작을 부렸는데 5월 30일 리처드 1세는 전갈로 필리프 2세와 존이 공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받고 9월 2일, 리처드 1세가 살라딘과 라믈라 평화 협정을 체결한 후 10월 9일, 아크레를 떠났다. 이후 폭풍우로 인해 소식이 끊기다가 12월 28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필리프 2세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리처드가 신성 로마 제국에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필리프 2세는하인리히 6세에게 리처드를 계속 구금해달라는 부탁을 한 후 계속 앙주 제국을 붕괴시킬 계획을 진행시켰다. 1193년 1월, 필리프 2세는 존에게 잉글랜드 왕위를 찬탈하라고 충동질했다. 존이 아키텐의 영지 일부와 센 강 동쪽 부근의 땅 대부분, 지조흐와 벡쌍을 내놓고 아델과 결혼한다면 그 대가로 대륙의 플랜태저넷령 전체를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존은 모든 조건을 수락하고, 대륙의 플랜태저넷령에 대해 충성 서약을 했다.

존은 잉글랜드로 건너와 형에 대한 온갖 험악한 소문을 사실처럼 떠들고, 심지어 형이 이미 죽었으니 제프리 2세의 아들인 아르튀르(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잉글랜드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윌리엄 마셜과 필리프 2세의 궁정에 심어둔 첩자 덕에 리처드 1세의 소식을 알게 된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이 아들 존의 계획을 결사적으로 막았고, 런던의 섭정위원회는 존을 지지하지 않았다.

잉글랜드 왕위 찬탈이 실패했단 소식을 들은 필리프 2세는 당장 출군하여 지조흐 요새를 첫 목표로 삼았다. 4월 12일, 성주는 순순히 성문을 열고 필리프 2세에게 투항했는데, 역사가들은 사전 모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이 기세를 몰아 노르망디를 관통하여 순식간에 해안지대인 디에프와 르 뜨헤뽀흐에 다다랐다.

필리프 2세와 에노•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의 군세는 노르망디의 중심지, 즉 아델이 유폐된 루앙을 포위했다. 루앙의 세네샬 레지스터 백작이 도시 방어선을 공들여 구축해 공격이 순탄치 않자, 필리프 2세는 항복을 권유했다. 레지스터 백작은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방문할 수 있고 혼자 성 안으로 들어오면 아델을 보내주겠다고 조롱했다.

이를 본 필리프 2세는 분을 이기지 못해 포도주 부대를 때려 부수고 강에 던지며, 자신의 공성전 무기를 불태우고는 "반드시 루앙을 정복하겠다."라고 외쳤다. 즉시 전략을 변경하여, 일거에 노르망디의 전략적 가치를 자랑하는 요새들을 점령해 루앙을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는 한편, 뚜헨느와 베리 사이의 영지를 차지했다.

1193년 7월 9일, 망트에서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의 사절단이 만나 회담을 열었다. 리처드 1세는 그들을 통해 노르망디 침공을 중단하면 지금까지 얻은 영지를 계속 유지하는 동시에 추가로 다른 영지도 넘길 수 있단 조건을 제시했다. 또한 리처드 1세가 이 영지를 되찾으려면 20,000마르크를 지불하고 조공을 바치겠다는 조항이 더해졌고, 필리프 2세는 정복한 영지들을 잘 통합하여 그의 세력으로 흡수했다.

8월 15일, 필리프 2세는 덴마크 왕 발데마르 1세의 딸 잉에보어와 결혼식을 올리고, 지참금으로 10,000마르크를 받았다. 하지만 어더한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결혼식 첫날밤을 치른 이튿날, 왕비 대관식에서 잉에보어에게 깊은 혐오감을 보이며 대관식이 끝나자마자 덴마크 사절단에게 잉에보어를 돌려보낼 것을 요구했다.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잉에보어는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그는 잉에보어와 첫 왕비 에노의 이사벨의 가계도를 위조하고, 주교들을 설득해 근친혼을 주장하여 일방적으로 혼인을 무효화했다.

1194년 2월 4일 필리프 2세의 지속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치러드 1세가 풀려나자 필리프 2세는 급히 존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
'자신의 몸을 돌보도록 하시오. 사탄이 풀려났소.'

서신을 받아본 존을 곧바로 파리로 도망쳤고, 필리프 2세는 존으로부터 노르망디와 뚜헨느의 영지 일부를 더 뜯어내고, 노르망디 공략에 박차를 가하여 전략적 요충지인 뇌브흑, 에브회, 보드회이를 점령했다. 마침내 루앙에서 10마일 떨어진 뽕드라흑슈로에 이르렀고, 협력의 대가로 존에게 에브회를 주었다.

1194년 3월 13일,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로 귀국하여 존의 지지자들을 숙청하고 4월 17일, 두 번째 대관식을 치렀다. 리처드 1세는 군자금을 모으며 프랑스 출정을 선포했다. 5월 12일, 리처드 1세가 300척의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노르망디에 상륙한 후, 훗날의 나바라 왕 안초 7세가 이끄는 석궁병 부대와 합세했다.

이에 존은 필리프 2세를 배신하고 어머니 엘레오노르의 중재하에 리처드에게 용서를 빌었다.리처드 1세로부터 용서를 받은 후 에브회로 달려가 프랑스 수비대를 죽이고 에브회를 형에게 바쳤다.

이에 필리프 2세가 격분하여 보복으로 에브회를 탈환하고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리처드 1세의 병력이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즉시, 필리프 2세는 병력을 차출해 남겨두고 루앙 남쪽 베흐뇌이로 진군했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다음날, 병사들이 왕이 떠나자 철수했다고만 기술했다.

5월 28일, 베흐뇌이 공성전 승리를 코 앞에 두고 노르망디가 필리프 2세의 수중에 떨어지기 일보 직전, 리처드 1세가 분견대를 차출하여 포위망을 기습하고, 본대를 이끌고 가 필리프 2세군의 보급로를 끊자 이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5월 30일, 리처드 1세가 에브회에 당도하자, 수비대가 투항했다. 6월 5일, 빠씨에서 필리프 2세는 자신을 조롱했던 루앙의 세네샬 레지스터 백작을 생포했다.

리처드 1세가 노르망디의 요새들을 하나씩 탈환하자,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아키텐 봉신들을 선동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 때문에 리처드 1세가 남프랑스로 진군하던 중인 6월 27일, 나바라 왕 산초 6세가 사망하여 그의 아들 산초가 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귀국길에 올랐다. 리처드 1세가 푸아티에로 넘어가려면 필리프 2세가 점거한 로슈를 거쳐야 했기에, 리처드 1세는 공성전을 벌이고 로슈를 탈환했다.

필리프 2세는 이 틈을 타서 북프랑스 공략 대신 군세를 재정비하여 동맹군 지원으로 전략을 변경, 남프랑스로 진군했다. 리처드 1세는 정보를 입수하고 벙돔므 평야에 진을 쳤다. 필리프 2세는 프레티발 부근에 진을 치고 리처드에게 내일 공격하겠다는 서신을 보냈지만 리처드가 이에 기뻐하는 답신을 보내자 그날 밤 막사를 걷고 퇴각했고, 추격까지 받아야 했다.

1195년 3월, 교황 첼레스티노 3세가 필리프 2세와 덴마크의 잉에보어의 혼인 무효화를 다시 무효화했으나, 필리프 2세는 이 결정을 무시했다. 덴마크 사절단이 이 문제로 교황과 회신하느라 부르고뉴를 통과하자 필리프 2세는 즉시 부르고뉴 공작 외드 3세에게 접근했다. 외드 3세는 사절단이 부르고뉴를 지날 때 그들을 감옥에 처넣고 서신을 압수했다.

같은 해 여름 리처드 1세와 하인리히 6세간의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한 필리프 2세는 사절단이 프랑스 영토를 지날 때 필리프 2세가 그들을 억류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필리프 2세는 이것으로 리처드 1세가 띠예흐 협정을 위반했다고 선언하며 노르망디를 기습했다. 필리프 2세가 주요 전략적 요충지인 보드회이를 침공, 공성전을 벌여 요새들을 파괴하자 리처드 1세가 군대를 이끌고 그곳에 당도했다.

1195년 7월, 리처드 1세가 회담을 위해 필리프 2세를 방문했다. 아크레에서 헤어진 후 4년만의 대면이었다. 당시 외교상으로 적이라도 이때는 전투를 중지하는 것이 당대 관례였으나 필리프 2세는 요새 벽 밑에 땅굴을 파게 했다 당연히 이사실을 안 리처드 1세는 분노하고 회당장을 벗어나 동시에 회담장에서 나와 군사들과 함께 탈출하려는 필리프 1세를 추격했지만 잡는데 실패한다.

1195년 8월, 두 왕이 회담을 열었다. 이때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에게 누나인 프랑스의 아델을 돌려주었다. 제프리 2세의 딸 엘레오노르 드 브르타뉴와 필리프 2세의 왕세자 루이의 결혼 협상이 오갔는데, 리처드 1세는 질녀의 지참금으로 지조흐, 부드몽, 노르망 벡쌍, 베흐농, 이브히, 빠씨 등의 영지와 20,000마르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필리프 2세는 오말르, 오슈, 아흑슈와 노르망디 요새 몇 채를 반환하기로 했고, 최종 합의는 11월 1일에 의결하기로 미루어졌다.

8월 20일, 필리프 2세는 누나 아델를 뽕띠유 백작 기욤 3세와 결혼시키고, 지참금으로 아흑끄와 우를 주었다. 허나 전쟁의 승기는 점차 리처드 1세에게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한편 필리프 2세는 다시 재혼 상대를 물색했는데 후보들 중 메라니 공작 베르톨트 4세의 딸 아녜스와 결혼하다. 하지만 선대 교황과 마찬가지로 새 교황 인노첸시오 3세 또한 그가 덴마크의 잉에보어와 혼인 상태로 아녜스와 결혼은 무효라고 주장하며 필리프 2세를 압박했다.

잉글랜드와의 전쟁 또한 후반으로 갈 수록 리처드 1세는 압도적인 국력을 바탕으로 한 맞춤형 뇌물 공세를 펼쳐 북프랑스, 플랑드르, 신성 로마 제국, 남프랑스에 걸쳐 거대한 동맹 연합을 건설하고 필리프 2세가 빼앗은 영지 대부분을 수복하였으며 이 기세에 올라타 선조 바이킹 롤로가 그랬듯 필리프 2세의 본거지인 파리 외곽까지 위협하였다. 이당시 파리의 방어벽은 1190년부터 시작한 증축 공사가 한참이었기에 파리를 방어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궁지에 몰린 필리프 2세가 음모를 총동원해 리처드의 남프랑스 봉신들의 충성심을 휩쓸기 시작했다.

결국 필리프 2세의 부추김을 받은 남프랑스의 봉신들이 리처드 1세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리처드 1세는 반란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남프랑스로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1199년 4월 6일, 리처드 1세가 리모주 자작의 농성을 제압하던 중 석궁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자 존이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

이렇듯 플랜태저넷 왕가를 우환에 빠뜨려 약화시킨 필리프 2세는 형보다 덜 떨어진 존이 왕이 되면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가는 것에 대해 행운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존은 어리석게도 필리프 2세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일을 벌였다.

존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네째 형인 제프리 2세의 아들이자 브르타뉴 공작이던 아서와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프랑스 왕인 필리프 2세는 처음에는 아서를 지지했지만, 존에게 거액의 뇌물과 벡쌍, 에브휴 두 영지 그리고, 왕세자 루이의 결혼 상대 카스티야의 블랑슈의 막대한 지참금을 받고, 존 지지로 입장을 바꿔 존이 즉위하게 되었는데, 이후 존은 조카인 아서를 위험한 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한편 필리프 2세는 추방시켰던 유대인들을 다시 불려들였다.

1200년 존은 첫 번째 부인인 글로스터의 이사벨과 이혼하고, 이미 뤼지냥의 위그 9세와 약혼한 13~15세의 앙굴렘의 이자벨과 재혼한다.사실 배상만 잘 해줬다면 별 문제없이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이었건만 존 왕은 배상조차 생각하지 않았고, 이에 뤼지냥 가 전체가 존 왕에게 반기를 들으나 실패하고 주군이던 필리프 2세에게 제소하였다. 존을 비롯한 앙주 가문과 그들의 모계였던 아키텐과 노르만 가문이 프랑스 왕실의 봉신이었기에 필리프 2세는 존을 프랑스의 법정에 소환했지만 존은 불응했다. 한편 이시기 세번째 왕비였던 아녜스가 포이시 성에서 세번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죽었다. 또한 관료들을 양성하기 위해 1150년에 설립되었지만 정식 인가가 없던 파리 대학을 인정하는 특허장을 내린다.

1203년, 아서는 자신의 조모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를 사로잡아 자신의 숙부와 협상하기 위해 공격하지만, 존 왕은 신속히 역공을 가해 오히려 아서를 포로로 잡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존 왕의 강력한 동맹이던 앙주 지역의 영주를 무시하는 행동을 했다. 거기다 포로로 잡은 귀족들을 가혹하게 취급했는데, 태양빛 한 점 안 들고 침수돼서 썩은 물이 바닥에 흥건한 지하감옥에 가둬두어 굶기고 22명이나 옥사하게 만들었는데, 조카 아서의 경우 어디엔가 구금을 시켰는지 소재조차 밝히지 않았다.

이에 부르타뉴와 앙주의 귀족들은 존에게 등을 돌렸다. 이를 놓치지 않은 필리프 2세는 존이 자신의 봉신으로서 의무를 행하지 않았다는 이유 및 봉건법 위반에 따른 존의 대륙령의 몰수를 선언했으며 이에 노르망디로 상륙한 존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후 앙주, 멘, 푸아투, 투렌 등 대부분의 노르망디 공국과 아키텐 공국의 영토를 점령하여 카페 왕령지로 삼았다. 1208년 인노첸시오 3세가 툴루즈 백작령 안의 영지주의 이단인 카타리 파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십자군 원정을 할 것을 요구했고, 필리프 2세는 귀족들이 알비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알비 십자군은 현대에 많은 분쟁거리를 제공했지만 한편으로 필리프 2세에게 있어서 프랑스 남부의 대영주 중 하나였던 툴루즈 백작령을 제압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이는 카타리 파와 툴루즈 백작이 밀월 관계인 것을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 이후 1213년 마침내 잉에보어를 자신의 왕비로 인정하기로 했다.

1214년 복수의 칼을 갈던 존은 당시 필리프 2세의 계략에 의해 자신의 영역을 왕실 직할지로 빼앗기게 된 페르디낭 드 부르고뉴가 필리프 2세에게 큰 불만을 품게 된 것을 알고, 그와 연계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4세까지 끌어들였으며, 이 외에도 판 플란데런 가, 레히나르 가 등의 여러 영주 세력들을 끌어들여 대규모 연합군을 구성, 약 30,000명에 달하는 전력으로 프랑스를 침공했다.

필리프 2세는 잉글랜드와 플랑드르 연합군에 의해 담 해전에서 패배하기도 했으나, 이후 상륙한 존 왕을 아들 루이 8세가 로슈 오무안 공방전에서 격파하면서 전세를 유리하게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다. 전쟁이 일어나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에 프랑스 남부 지방을 순회 중이어서 자신의 본거지이자 수도인 파리를 비우고 있었던 필리프 2세는 존이나 오토 4세의 예상과는 달리 재빠르게 남부 친국왕파 영주 세력들을 규합하여 15,000여명에 달하는 병력을 구성하고 굉장한 속도로 북쪽으로 진격해, 파리 북부를 제압하고 발랑시엔 인근에나 와있던 오토 4세의 연합군을 부빈 평야에서 맞닥뜨림으로써 결전을 강제했다.

이 부빈 평야에서 필리프 2세의 총지휘하에 유드 드 부르고뉴, 로베르 드 드뢰 등의 영주들이 가세한 7,000여명의 프랑스군이 오토 4세의 총지휘하에 존의 대리로 잉글랜드군을 지휘하는 윌리엄 롱제스피,페르디낭 드 플랑드르, '용기공' 앙리 레히나르, 르노 드 다마르탱 등이 참전한 신성 로마, 잉글랜드, 플랑드르 연합군 9,000명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으며, 연합군은 다마르탱이 인솔하던 장창병들이 마지막 발악에 가까운 용전을 선보인 것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완벽한 졸전을 선보이고, 프랑스군에게 압도당하며 대패했다.

그리고 이전투를 통해 필리프 2세는 프랑스 내에서 앙주 가문의 세력을 아키텐 서남쪽에 위치한 가스코뉴까지 밀어버리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잉글랜드와의 전쟁은 종결되지 않았다. 1215년 존의 무능과 그에 따른 실정 및 폭정에 질려버린 잉글랜드의 귀족들이 서로 협력해 존에게 반기를 들었다. 귀족들은 병력을 이끌고 런던으로 출정, 여기에 런던시마저 가세해 무혈로 입성하게 된었고, 귀족들과 성직자, 도시민들까지 등을 돌린 것을 알게 된 존은 반란을 진압할 병력이 없고 그들의 요구를 거부했다가는 퇴위는 물론이고 처형될 위기라는 것을 깨달아 공포에 질렸다.

이때 봉기군 내의 온건파를 중심으로 왕을 처형하는 것보다는 왕권을 제한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면서 마그나 카르타를 작성했고 템즈 강변의 러니미드(Runnymede) 평원에서 진을 치고 있던 귀족들에게 존 왕이 방문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을 하였으나 나중에 인노첸시오 3세의 반발에 추인을 거부하면서 내전은 더 연장되었는데 이때 남작군의 우두머리인 로버트 피츠왈터는 스스로를 신성교회군 원수라 칭하고 프랑스의 루이에게 잉글랜드의 왕이 될 것을 요구한다. 루이는 이러한 남작들의 지원하에 잉글랜드 왕국의 수도인 런던에 입성했고, 남작군과 런던 시민들에게 환대를 받는다.

존 왕은 도주했고, 스코틀랜드의 지원까지 받은 루이는 길퍼드, 파넘, 윈체스터 등 주요 잉글랜드 도시를 점령하는 등 파죽지세로 존 왕을 추격했다.

이때 루이의 아버지인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루이가 가장 먼저 점령했어야 할 도버 성을 간과한 것에 우려를 표했다. 켄트를 비롯한 잉글랜드의 1/3을 장악했으나 여전히 존 왕을 따르는 휴버트 디 버그가 도버 성에서 루이의 배후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는 뒤늦게 도버 성을 공격했으나 3개월 간의 포위 공격에도 도버 성은 함락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캐싱엄의 윌리엄이 이끄는 장궁병 부대에게 켄트 일대가 습격을 받게 되자 결국 10월 14일에 휴전 조약을 맺은 루이의 프랑스군은 런던으로 회군했고, 또한 루이의 프랑스군이 런던으로 돌아간 상태에서 잉글랜드군에게 포위당한 로체스터 성은 식량난으로 항복하게 된다.

그러나 1216년 10월 18일, 존 왕은 이질에 걸려 급사한다. 존이 사망하자 그의 어린 아들 헨리 3세가 왕위를 계승했고 윌리엄 마셜이 섭정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남작들은 윌리엄 마셜의 회유로 자신들이 잉글랜드로 끌어들인 루이를 배신했고, 루이는 프랑스 본국으로 돌아가 군을 재정비하기 위해 윈 첼시로 철수하다가 이후 람베스에서 평화 조약을 채결한 후 프랑스로 귀국한다. 1223년 필리프 2세가 죽었고 그 뒤를 루이 8세가 잇게 되었다.
2.1.3. 필리프 2세 이후
1223년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한 루이 8세는 이전 카페 왕들과 달리 부왕 생존시 축성식을 받지 않았는데 이는 필리프 2세 이후로 후계자의 축성식을 안 해도 될 만큼 왕위계승에 대한 우려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필리프 2세의 업적으로 카페 왕조는 이제 프랑스 전역에 걸쳐 정당성을 지녀 안정적인 왕위계승을 실시하기 시작했으며 공동왕 제도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루이 8세는 부왕 때 부각되기 시작한 ‘가장 기독교적인 왕’이라는 명성을 그대로 이어가고자 했다. 그는 11월 국가 재정과 관련하여 유대인들에게 돈을 빌리지 말 것을 명령함으로써 국가의 정책을 교회의 교리에 부합하게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샹파뉴 정기시를 통해 샹파뉴를 새로운 경제의 중심지로 만들고 있던 샹파뉴 백작 티보 4세(1201~53년)는 이러한 루이 8세의 정책에 공공연히 반대를 표하기도 하였다.

1225년 루이 8세는 필리프 2세 당시에 정복된 남부 랑그독 지역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감행했다. 이미 시몽 드 몽포르 4세의 정복 직후부터 남부 랑그독 지역에서는 종교와 결합된 정치적 갈등이 크게 확산되고 있었다. 즉 카타르에 대한 십자군은 곧 북부 프랑스 침략군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로도 툴루즈 백작 레몽 7세는 여전히 알비 십자군의 빌미였던 카타르파를 비호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받고 있었다. 결국 1225년 부르주 공의회에서 레몽 7세를 파문에 처하고 다시 한 번 십자군 원정을 천명했다. 루이 8세는 기꺼이 이 결정을 받아들여 툴루즈로 공격에 나섰다. 3개월 동안의 원정으로 툴루즈 백작령 곳곳이 점령당했고 결국 레몽 7세는 포로가 되었다.

루이 8세는 툴루즈 백작령을 왕령지에 편입시키고자 했지만 루이 8세를 견제하고자 하는 티보 4세는 이러한 루이 8세의 시도에 반대를 표했다. 봉신으로서의 원정 의무가 끝났다는 점을 내세우며 티보 4세는 샹파뉴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 루이 8세는 급작스럽게 이질에 걸려 1226년에 사망했고, 12세 밖에 안된 아들 루이 9세가 승계하게 되었다.

루이 9세는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못햇기에 모후 블랑슈가 섭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갑작스러운 왕의 서거와 어린 왕의 즉위로 인해 정국이 불안해 질 수 있기 때문에 축성식은 가능한 한 가장 빠른 날짜인 11월 29일에 거행되었다. 하지만 1227년에서 1228년까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왕과 외국인 왕비가 주도하는 왕정은 이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더군다나 이 반란에는 숙부인 필리프 위르펠은 물론 잉글랜드 왕 헨리 3세까지 개입되어 있었다.

하지만 블랑슈의 선처로 감옥에서 풀려난 플랑드르 백작 페랑과 루이 8세 이후 관계 개선이 이루어진 샹파뉴 백작 티보 4세의 도움으로 루이 9세와 블랑슈는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1230~31년 동안에는 역으로 루이 9세가 직접 원정군을 이끌고 이 반란군들을 진압해 나갔다. 아직 17살의 나이에 불과했지만 군대를 지휘하는 루이 9세의 모습과 모후 블랑슈의 정치력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던 많은 봉건 귀족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이들은 점차 루이 9세와 블랑슈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1234년 20세가 된 루이 9세는 프로방스 백작 레몽-베랑제 4세의 딸 마르그리트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로부터 루이 9세의 권위는 별 탈 없이 프랑스 전역에 걸쳐 인정받았고 더 이상 그에 대한 봉건 귀족들의 도전이 발생하지 않는 듯 보였다. 하지만 1240년대에 들어와 또 다시 루이 9세는 전장으로 뛰어들어야만 했다. 아키텐 지역 귀족들과 툴루즈 백작, 그리고 잉글랜드 왕 헨리 3세가 필리프 2세로부터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서로 동맹을 맺고 봉기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1242년 ~ 1243년 사이 벌어진 이 생통주 전쟁에서 궁극적인 승리는 결국 루이 9세에게 돌아갔다. 툴루즈 백작은 루이 9세에게 무릎을 꿇었고 헨리 3세는 루이 9세에게 5년 동안의 휴전을 요구했다. 하지만 휴전이 지난 이후에 전쟁이 재개되지는 않았고 루이 9세는 관대하게도 헨리 3세가 이제는 프랑스 왕국에 속해 있는 퐁트브로 수도원에 방문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퐁트브로 수도원은 바로 플랜태저닛 왕조의 기원인 앙주 지방에 위치해 있었으며 바로 여기에 헨리 2세와 리처드 1세의 납골당이 있었다. 이후 1년 뒤 몽세귀르(Montségur)의 산성 요새를 근거지로 카타리 파들이 마지막 저항을 시도하자 십자군은 바스크 산악지대 출신의 병사들을 고용하여 요새를 함락시켰고, 농성하던 카타리파 신도 2백 명 이상은 화형에 처해졌고, 베지에 함락과는 다르게 개종을 한 사람들은 무사히 성을 떠날 수 있게 해주면서 알비 십자군 원정은 일단은 마무리 되었지만 이후에도 이단심문관들이 툴루즈 일대에 활동을 하면서 숨어 있는 카타리 파들을 색출해 갔다.

1258년 결국 헨리 3세는 루이 9세에게 과거 조상들의 영토들(노르망디, 앙주, 투렌, 멘, 푸아투 등)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루이 9세와 평화 조약을 맺었고 1259년에 헨리 3세는 일부 남아 있는 아키텐 영지 및 가스코뉴의 영지를 두고 루이 9세에게 봉건신서를 행했다. 사실 이 당시 헨리 3세는 거듭되는 실정으로 시몽 드 몽포르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귀족들의 저항에 직면해 있던 상황이었고 마치 부친 존 1세가 <대헌장>을 제시 받았던 것처럼 그 또한 비슷한 내용으로 왕권을 제약하는 내용의 <옥스포드 조항(Provisions of Oxford)>을 제시 받았다. 프랑스에서 루이 9세의 왕권이 점점 확고해져 가고 있는 시기에 잉글랜드에서 헨리 3세는 결정적으로 의회에 의해 왕권이 제약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1258년에 루이 9세는 아라곤 왕국과의 협상을 통해 남부 프랑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확고히 했다.

이기간 동안의 루이 9세는 내치 또한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선조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기독교 군주로서의 이미지로 민심을 얻으려고 했고, 그러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멱확하게 직시하고 있었다. 당시 루이 9세는 당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기독교적 감수성을 전파한 성 프란체스코의 청빈 사상에 깊이 감화되었다. 그는 옷과 식사에 있어서 왕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검소함과 금욕적 태도를 유지하고자 했으며 몸소 사회적 약자들을 돌봐주는 모습을 보였다.

나병 환자와 맹인들을 왕실에서 세운 구호소에서 직접 돌봐주고 빈민들에게 세족식을 실시하는 등 루이 9세는 동시대인들에게 성 프란체스코의 태도들을 실천하는 이상적인 군주로 비춰졌다. 다만 하지만 이러한 신실한 태도는 역으로 이교도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랑그독 지역의 카타리 파와 유대인에 대한 탄압은 기독교적 이상에 충실한 루이 9세의 행적들과 함께 동전의 양면을 이뤘다.

또한 세속 군주로서의 치적 또한 상당 부분 남겼는데 주로 사법권의 개혁에 집중되었는데 루이 9세는 스스로가 제 2의 솔로몬과 같은 정의로운 재판관임을 내세웠고, 또 지방 행정관들의 문제들을 정화하는 개혁을 실시하고자 했다. 전자와 관련하여 루이 9세는 헨리 3세와 잉글랜드 귀족들 사이에 옥스포드 조항을 둘러싼 분쟁을 중재하기도 했고 플랑드르 백작령에서 발생한 작위계승을 둘러싼 무력 분쟁을 조정하기도 했다.

이 때 분쟁 당사자들 사이의 요구들은 객관적인 제3자인 프랑스 왕의 기준에 따라 중재되고 조정되기 때문에 이러한 분쟁들을 통해 루이 9세의 정치적 위상은 점점 높아져 갔다. 다른 한편으로 루이 9세는 필리프 2세 당시에 세워진 지방 행정관들(세네샬, 바이이)에 대한 실사를 통해 이들의 직권남용과 부정부패의 시정에 나섰다.

아울러 17명의 남작과 7명의 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된 고등법원을 설립했는데 민사 및 형사 항소 법원으로 기능했지만 특정 사건, 특히 귀족에 관한 1심 법원으로도 기능했으며 이를 통해 귀족 세력들을 제어하려 했다. 또한 전혀 기독교적이지도 않으면서도 거의 결투자들의 실력에 의해 좌우되는 결투 재판에 대해서도 정당한 판결이 나오지 않기에 폐지하려는 노력을 했다. 동시에 무죄 추정의 원칙을 도입하는 등 성공을 거둔 이상적인 군주로 평가받았다.

다만 알비 십자군 원정이 종결됨과 동시에 그는 또다른 십자군 원정에 직접 참전해야 했다. 루이 9세가 프랑스를 다스리던 때에 신성 로마 제국시칠리아 왕국에서는 중세 서유럽에서 가장 개성 있는 인물인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교황권과 정면으로 충돌한 때이기도 했다. 그는 프리드리히 1세의 손자로서 분열된 모습을 보인 독일 지역보다 단일한 왕권을 확립할 수 있었던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서유럽 최초의 중앙집권적인 일인지배체제(monarchia)를 구축했고 이는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교황과의 격렬한 충돌을 초래했다. 루이 9세는 최대한 이 둘 사이의 분쟁에 끼어들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교황들, 그 중에서도 인노켄티우스 4세는 프리드리히 2세와의 대립에서 늘 수세에 처해 루이 9세에게 수많은 도움을 청했지만 루이 9세는 중립을 지키기 위해 언제나 신중하게 처신했다.

기어이 1243년 인노켄티우스 4세는 로마의 상황이 불안하다며 프랑스 왕국 내 리옹시로 거처를 옮기고 공의회를 소집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리옹시로 진격하려 했으나 루이 9세의 개입으로 단념하고 말았다. 이렇게 교황과 황제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루이 9세의 모습은 그가 더 이상 조부 필리프 2세처럼 일방적으로 교황의 권위에 매달리는 세속 군주가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루이 9세가 교황을 지원할 수 없었던 현실적인 이유로는 그가 이 당시 헨리 3세와 생통주 전쟁 중이었다는 사실도 있었다.

생통주 전쟁이 끝나고 루이 9세는 1244년 겨울부터 이질로 의심되는 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몇 주 후 루이 9세는 기적같이 완쾌되었고 자신의 쾌유를 신에게 돌리면서 십자군 원정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물론 모후 블랑슈는 물론이거니와 측근들 모두 그의 결정에 반대했다. 이유는 그의 건강이 원정을 떠날 만큼 강건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십자군 원정을 위해 군대와 재정을 장기간 준비해야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결국 루이 9세의 십자군 원정은 훨씬 후인 1248년에 6월에 실행되었다. 그는 모후를 섭정으로 임명하였고 프리드리히 2세의 공격을 피해 리옹에 머물고 있던 인노켄티우스 4세를 만나 잉글랜드의 공격으로부터 프랑스를 보호해 줄 것을 약속받았다.

총 2만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로 향한 루이 9세는 1250년 이집트의 만수라를 공격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많은 봉신들이 이구동성으로 귀국하기를 권했으나 루이 9세는 예루살렘으로 갈 것을 결정했다. 루이 9세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며 4년 가까이 예루살렘 방어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본국에서 모후 블랑슈가 사망했으며 막냇동생인 앙주 백작 샤를이 섭정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 루이 9세는 귀국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십자군 원정은 랑스 왕국에 실질적인 이득을 아무 것도 가져오지 못했고 막대한 재정만을 소비했지만 6년 간의 십자군 원정 기간 동안 프랑스는 비교적 평화로웠고 루이 9세는 그 누구보다 십자군과 성지 회복에 가장 적합한 왕이라는 이미지를 전 유럽에 심어 주었다. 물론 그것은 그 개인의 자질로 끝날 것이 아니라 향후 즉위하는 모든 프랑스 왕들의 이상적 과업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제7차 십자군 원정을 통해 루이 9세는 지중해 세계 저 멀리에 펼쳐진 원나라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루이 9세는 이슬람 협공에 대해 제안하는 서한들과 함께 기욤 드 뤼브룩과 같은 수많은 선교사들을 원나라 조정으로 보냈으나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는 못했다.

이후 1264년 시칠리아 왕국에서는 교황 우르바누스 4세가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 만프레디를 제압하기 위해 루이 9세의 막냇동생인 앙주 백작 샤를을 끌어들였다. 결국 1266년 샤를은 만프레디를 죽이고 시칠리아 왕위에 올라 카를루 1세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동부 지중해에서 십자군의 영향력은 점차 위축되어 가고 있었고 이에 대한 소식을 들은 루이 9세는 다시 한 번 십자군 원정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1267년 루이 9세는 신하들 앞에서 십자군 원정을 제안했다. 하지만 과거의 전우들까지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찬성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루이 9세의 형제들, 즉 푸아티에 백작 알퐁스와 시칠리아 왕이 된 앙주 백작 샤를, 그리고 1259년 파리조약 이후 루이 9세와 화해를 한 잉글랜드 왕 헨리 3세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 의사를 밝혔고 이에 따라 교황의 후원 아래 또 한 번의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하지만 이 십자군의 행선지는 이집트도 예루살렘도 아닌 보다 서쪽에 있는, 시칠리아의 아래에 위치한 북아프리카 도시 튀니스였다. 아마도 시칠리아 왕국의 이해관계와 관련되어 샤를의 입김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였다. 어쨌든 1270년 7월 제8차 십자군이 조직되어 튀니지로 향했다. 그러나 보다 잘 준비되었던 이 원정은 더 어이없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도착한지 한 달도 지나기 전에 많은 기사들이 뜨거운 한여름의 태양 아래 풍토병으로 쓰러져 갔다. 후계자 필리프가 심하기 앓기 시작했고 그의 동생 네베르 백작 장 트리스탕은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8월 25일 루이 9세마저도 풍토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뒤늦게 도착한 시칠리아 왕 샤를은 후계자인 필리프를 대신해 이집트 술탄 무하마드와 협상을 진행했다. 대체로 그 결과는 샤를에게만 유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다만 덕분에 십자군들은 무사히 철군할 수 있게 되었다.

국 도중 필리프 3세는 매형인 나바라왕 티발트 2세의 사망 소식과 부인 이자벨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1271년 5월 21일 파리로 돌아온 필리프 3세는 바로 다음 날 루이 9세의 장례를 치르고 8월 15일에 축성식을 거행했다.

필리프 3세가 즉위할 당시 유럽은 조용한 변화를 준비 중이었다. 잉글랜드에서는 1272년 시몽 드 몽포르 5세 일파를 축출하고 에드워드 1세가 새롭게 왕위에 올랐고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오랜 기간의 대공위 기간이 끝나고 신흥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가 제위에 올랐다. 이제 각 왕국들 및 도시국가들, 제후령들 간의 뚜렷한 경계들이 형성되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서유럽 정치 체제들이 발전해 가면서 십자군과 관련한 이상과 현실의 격차는 더욱 커져만 갔다. 특히 프랑스 왕들에게 루이 9세로 대표되는 십자군은 여전히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화시켜주는 강력한 상징 권력으로 인식되었는데, 문제는 십자군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복잡다단한 현실적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필리프 3세는 당장의 내치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했다.

즉위 후 필리프 3세는 물려받은 왕령지를 더욱 더 확장해 나갔다. 전쟁은 왕국의 평화를 깨뜨릴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상속자가 없는 영지를 다시 왕령지에 통합하거나 국고로 매입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대신 자신에 대한 지지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왕령지의 일부나 다양한 권리들을 양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아르마냑 및 푸아 귀족들에게는 무력을 통한 정복을 행하기도 했다.

아울러 다양한 결혼 정책들을 통해 주요한 지지 세력들을 확보했다. 1274년에는 필리프 3세 스스로가 브라반트 공작의 딸 마리와 재혼했고 사촌동생인 아르투아 여백작 마틸드를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부르고뉴 백작과 약혼시켰다. 또한 자신의 아들 필리프는 나바라 여왕 호아나 1세 약혼시켰다. 특히 이 당시 나바라 왕가는 샹파뉴 백작 가문으로서 아들 필리프와 잔의 결혼으로 필리프 3세는 나바라와 샹파뉴에 이중의 지지 세력을 확보했다.

1282년에는 시칠리아에서 앙주 백작 샤를의 지배에 저항하는 봉기가 발생해 프랑스 귀족들이 모두 축출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른바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사실 새로운 지중해 지역의 패권자로 급부상하고 있던 아라곤 왕 페드로 3세의 사주로 이루어진 대학살 사건이었다. 동시에 그는 시칠리아 왕 만프레디의 딸 콘스탄차와 결혼한 후 스스로를 만프레디의 후계자로 내세우며 시칠리아 왕국의 계승권을 주장했다. 이에 교황 마르티노 4세는 페드로 3세를 파문에 처했으며 1285년 샤를 1세가 사망하자 필리프 3세는 아라곤 십자군을 내세우며 피레네 산맥을 지나 아라곤의 동부지역인 카탈루냐의 지로나(Girona)시를 공격했다. 하지만 역시 무더운 지중해 지역의 풍토병이 프랑스군을 엄습했고 결국 필리프 3세는 제대로 공격도 못해보고 10월 5일 사망하고 말았다.

필리프 3세는 루이 9세와 마찬가지로 십자군 원정 도중 타향에서 사망하고 후계자인 필리프 4세가 뒤를 이었다. 필리프 4세가 즉위할 당시 카페 왕조는 방계 왕족이 타국의 왕이 되거나 유럽의 왕실 및 유력 귀족들과 결혼 동맹을 맺은 상태로 그의 친동생 중에는 발루아 백작이 되는 샤를 드 발루아가 있었고 이복형제로는 에브뢰 백작이 되는 루이, 에드워드 1세와 결혼하여 잉글랜드 왕비가 되는 마르그리트, 합스부르크 루돌프 3세의 부인이 되는 블랑슈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필리프 4세 치세 이후 서유럽 세계 정치를 뒤흔드는 강력한 가문들을 형성하고 있었다.

즉위 초 먼저 한 일은 선조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왕령지 확대로 이미 나바라 여왕기도 한 아내 호아나 1세가 샹파뉴의 여백작이었기에 샹파뉴 지역 또한 장악하던 상태였고, 이후 1284년 샤르트르 백작령을 매입하였다.

또한 필리프 3세는 선조 필리프 2세처럼 부르주아들을 중용한 왕으로 이들의 조력으로 보다 더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추구했으며 법학자인 기윰 드 노가레를 중용해 왕국 전역에 세금을 거둘 수 있도록 했으며, 행정조직조차 정비해 대회의(Grand Conseil), 고등법원(Parlement)과 재무원(Chambre des comptes)과 같은 행정기관들을 파리로 이전하면서 관료제를 확립시켰다.

다만 그의 통치 기간은 프랑스 내부의 봉신들과의 전쟁으로 점철되었다.우선 처음 격돌한 것은 아키텐 공작령으로 필리프 2세때 앙주 제국이 붕괴되었다지만 아킨텐 일부 지역은 가스코뉴와 함께 여전히 잉글랜드 국왕의 왕령지로 남은 상태였고, 잉글랜드 국왕들은 여전히 아키텐과 가스코뉴의 영주로서 프랑스 국왕의 봉신으로 남아 있었으며 동시에 툴루즈 백작의 주군이기도 했다.

문제는 필리프 4세는 툴루즈 백작의 후계자 부재로 툴루즈를 왕실 영역에 복속시키면서 벌어진다. 혈기왕성한 26세의 필리프 4세는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 아키텐 공작이자 영국왕인 에드워드 1세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한편,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정복에 혈안이 되어 프랑스와의 전쟁을 꺼리고 있었다. 1293년 필리프 4세는 아키텐 공작의 종주 자격으로 에드워드를 소집하고, 에드워드는 동생 에드먼드를 대리 파견한다. 필리프는 에드먼드에게 사실상 자치권은 인정할 것이니 왕으로써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 형식적으로만 아키텐으로 가는 길을 열어달라고 요구한다. 1294년에 필리프는 군대로 아키텐을 점령한 이후 전쟁을 선포하고, 로베르 2세 아르투아 백작에게 군권을 준다. 1297년에 아키텐 점령전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난다.

아키텐 전쟁은 프랑스에게 높은 재정 부담을 안겨주었다. 프랑스는 전국의 쌍껑티엠 (성직자를 포함한 모두에게 부과되는 2%의 세금), 그리고 가장 부유한 지방인 플랑드르에 의존한다. 당시 플랑드르는 기 드 당피에르 백작의 치하에 있었는데, 기 드 당피에르는 인근 에노 백국의 도시들에서 일어난 폭동을 왕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압했다는 것 때문에 파리에서 왕의 재판을 받아 벌금을 내고, 플랑드르 도시들에 대한 권한을 잃는다. 모욕당한 기 드 당피에르는 1297년에 영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 왕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다.

2.2. 프랑스의 제후령들

3. 부르군트 왕국 ⇒ 신성 로마 제국령 부르군트

3.1. 사보이아 백국

본래 신성 로마 제국아를 왕국에 속했던 사보이아 백국은 시조 움베르토 1세의 막내 아들 오도네가 토리노 변경백국의 상속녀 수사의 아델라이데와 결혼하여 피에몬테 일대를 상속받으며 프랑스와 이탈리아반도 양쪽에 걸친 독립 군주가 되었다.

1378년 아를 왕국이 사실상 소멸하여 사보이아 백국의 명목상 종주권은 신성 로마 제국 산하 독일 왕국으로 이양되었고 아메데오 8세는 1416년 독일왕이자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지기스문트로부터 공작으로 선임되어 사보이아 공국으로 승격되었다.

4. 브리튼 제도

4.1. 잉글랜드 왕국

4.1.1. 11세기
잉글랜드 왕국은 1000년대에 여전히 바이킹들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리고 이제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들마저 이러한 바이킹들의 활동을 후원과 함께 이들을 지휘해 잉글랜드로 침공했다. 국왕인 애설레드 2세는 바이킹들의 주축을 이루던 덴마크인들에게 강경한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다. 초기인 1001년 덴마크가 침략해서 잉글랜드의 서식스가 털렸으며, 1002년 봄에 애설레드 2세는 돈을 주고 평화 협정을 맺었지만 11월 13일 성 브릭티우스 축일에 덴마크 정착민에 대해 학살을 저질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 1013년 덴마크의 스벤 1세(스벤 트베스케그)에게 잉글랜드를 빼앗겼고, 애설레드는 노르망디로 망명해야 했다. 하지만 스베인이 1014년 2월에 급사하자 추방당했던 에델레드 2세는 그 틈을 타 잉글랜드 귀족들과의 협약을 통해 다시 잉글랜드의 왕위를 차지했다.

미처 준비를 못 마친 크누트는 아무런 전투 없이 잉글랜드를 떠났다. 남아 있던 그의 병력은 애설레드 2세에게 격퇴되었다. 하지만 1015년 8월, 크누트는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당연히 잉글랜드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는 승승장구하여 몇달새 잉글랜드 대부분을 차지했다. 1016년 4월 23일, 애설레드 2세가 사망했다. 왕위는 런던의 시민들과 잉글랜드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아들 에드먼드에게 계승되었다.

그는 다섯 차례나 크누트 대왕의 군대와 싸웠으나, 10월 18일 벌어진 애선던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후 에드먼드 2세는 크누트 대왕과 평화 협약을 맺어 그는 웨식스를, 크누트는 머시아와 노섬브리아를 가지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한 달 반 조금 더 지난 11월 30일에 에드먼드 2세는 모종의 이유로 사망하고 만다. 그에게 아들인 에드워드와 이복 동생인 에드워드, 엘프레드가 있었으나 왕위는 에드워드가 아닌 적이었던 덴마크의 크누트에게로 넘어갔다. 에드먼드의 아들인 에드워드는 헝가리까지 동망쳐 그곳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고, 에드워드 또한 자신의 형제인 앨프레드와 함께 외가인 노르망디로 망명을 떠났고, 잉글랜드 전체는 크누트 대왕에게 귀속되었다. 크누트는 애설레드 2세의 두번째 왕비이자 에드워드의 모친이었던 엠마와 재혼해 하레크누드를 낳았다. 하지만 엠마와의 결합은 이후 잉글랜드를 둘러싼 덴마크 왕가의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정복 이후 크누트 대왕은 직접 웨식스를 통치하면서 덴마크인들과 잉글랜드인들 간의 갈등을 조정했다. 일례로 한 개의 지역의 군사권과 징세권 및 사법권을 담당하던 엘더맨(Ealdorman)을 스칸디나비아의 야를 칭호로 교체하면서도 귀족 회의인 위탄을 그대로 존치시켰다. 또한 야를 자리에 덴마크인뿐만 아니라 자신의 통치에 협력한 잉글랜드인 귀족들을 야를로 임명했다. 1018년 덴마크 국왕인 하랄 2세가 죽으면서 덴마크 국왕위를 이어받게 되자 즉위식을 위해 덴마크로 가면서 고드윈(Godwin)을 백작으로 임명해 통치하도록 했으며, 이후에도 잉글랜드보다는 덴마크에 머물면서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통치와 신성 로마 제국과의 외교 관계에 집중했다.

하지만 말년에 갈 수록 첫번째 왕비 사이에 난 하랄드 대신 자신이 아들인 하레크누트를 후계자로 밀려고 정치 공작을 일삼았다. 그결과 하레크누드가 잠정적으로 후계자가 되었다. 이후 1035년 크누트가 죽으면서 잉글랜드는 덴마크 노르웨이와 함께 하레크누드의 통치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하레크누드는 당시 덴마크에 있었고, 더욱이 독립한 노르웨이의 망누스 1세가 언제 공격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잉글랜드의 통치권에 공백이 찾아오게 되었다.

그러다가 위탄에서 해럴드의 모친인 노샘프턴의 엘프기푸의 로비였는지는 몰라도 왕태후인 엠마와 고드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헤럴드를 섭정으로 지명했다. 이시기 애설레드 2세의 아들들인 앨프레드와 애드워드가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당시 지배층은 그들이 왕위를 뺏기 위해 온 것이라는 의심을 했고, 이미 해럴드 1세 편에 붙었던 고드윈은 앨프리드를 속여 포로로 잡았다. 고드윈은 그를 해럴드 1세에게 넘기기 위해 배에 태웠는데, 고드윈의 부하들은 배 위에서 앨프리드를 장님으로 만들었고, 얼마 후 그는 상처가 덧나 죽었다. 형 에드워드는 별다른 저항을 못했고, 그리고 아무런 소득없이 잉글랜드를 떠났다. 이 사건은 해럴드 1세가 잉글랜드를 지배하던 덴마크계 귀족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사건 이후 1037년 해럴드는 위탄에 잉글랜드 국왕으로 추대하게 되었다. 하지만 실권은 해럴드의 모친인 엘프기푸에게 있었는지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와 달리 무능력하고 방종한 인물로 실질적인 세력은 어머니가 쥐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창기의 해럴드 1세는 잉글랜드 전역을 장악하지 못했고, 템즈 강 북부만을 통치했다. 남부는 강력한 귀족인 고드윈과 하레크누드의 친어머니인 노르망디의 엠마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해럴드 1세의 세력에 눌린 고드윈이 해럴드 1세쪽으로 붙었고, 엠마는 플렌더스로 망명해야 했다.

이후 3년 간 잉글랜드를 통치하다가 갑작스럽게 후계도 남기지 못하고 1040년에 죽자 덴마크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던 하레크누드는 잉글랜드 왕위를 되찾는데 성공한다. 우선 그가 한 일은 교회에 매장된 해럴드의 시신을 꺼내 템즈 강에 버렸다. 일각에선 이부 형인 알프레드의 복수라고 하지만 노르망디의 엠마가 크누트와 재혼한 이후 줄곧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을 외면해온 것을 볼때 하크레누드의 해럴드 1세의 부관참시는 개인적으로 덴마크 왕위와 함께 독점해야 할 잉글랜드의 왕위를 5년 동안 차지하고 있던 증오와 함께 옛 웨식스 왕가의 지지자들을 포섭할 목적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럴드에게 붙은 고드원 또한 처형하려 했으나 80명의 무장한 전사가 가득한 배를 하다크누트에게 선물하고서야 처벌을 면하였다.

즉위 초 하레크누트는 웨일스와의 공격을 받았는데 귀네드의 왕 그리피드는 1040년 무렵에는 잉글랜드를 공격해 웰시풀에서 대승을 거둔다. 이 전투에서 머시아의 백작 레오프릭의 동생 에드윈이 목숨을 잃었다.

다만 그의 잉글랜드 통치는 시작부터 폭정에 가까웠다. 그는 자신을 잉글랜드까지 태워준 서원들에게 임금을 지불하기 위한 세금을 거둬들였는데 볼체스터로 보낸 두 명의 징세관이 폭도들에게 죽음을 당하자 그 지역을 전멸하라는 명을 내렸다. 왕의 이런 폭력성은 민심을 동요시켰다. 하레크누트는 또한 쉽게 사람을 배신했다는 나쁜 평판에도 시달렸다.

당시 노섬브리아의 백작은 시워드(Siward) 백작이었지만, 북부 지역은 버니시어(Bernicia)의 백작 이드울프(Eadwulf)가 다스리고 있었다. 독재주의자인 하레크누드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왔는데... 1041년에 이드울프 백작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왕에게 도발했다가 화해를 청했다. 하레크누드 왕은 쿨하게 그의 안전을 보장해 줬지만, 실은 뒤에서 시워드 백작과 공모를 하여 이드울프를 죽이도록 했다.

하지만 하레크누드는 그 성격과는 달리 오래 전부터 온갖 지병을 앓고 있었고,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는지 죽기 1년 전, 노르망디에 망명 중이던 잉글랜드 왕위의 정통 계승자인 이부형 에드워드를 잉글랜드로 불러들여 입지를 강화시켜주었다. 결국 1042년 6월 8일, 그는 결혼식에 참석하여 신부를 위한 축배를 마시다가 쓰러져 심한 발작을 일으킨 후 죽었다. 그의 죽음을 끝으로 덴마크 왕들의 지배는 끝이 나게 되었다. 이에 많은 잉글랜드인들이 데인족의 치세가 끝나고 정통 왕가가 다시 일어선 것에 대해 환호했다. 다만 즉위 과정에서 반대 세력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바로 죽은 하레크누드의 어머니이자 에드워드의 어머니이기도 했던 엠마가 에드워드의 즉위를 반대로 노르망디 국왕인 망누스 1세에게 잉글랜드 왕위를 넘기려고 했던 것이었다. 이에 많은 야를들이 에드워드를 지지하면서 엠마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려고 했고, 그녀가 망누스에게 군대를 보내달라는 사실이 발각되면서 추종 세력까지 등을 돌리면서 몰락하게 되었다.

에드워드가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할 당시 고드윈과 그의 아들 [[해럴드 2세|해럴드]는 크누트와 그의 아들들을 거쳐 반세기 가까이 웨식스의 야를로서 웨식스를 다스리면서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었고, 이는 다른 야를들을 압도했다.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한 당시 에드워드는 잉글랜드 내의 하레크누드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왕령지가 남부 지역의 야를들의 토지 사이로 월경지로 산개되어 있었고, 재산면에서도 고드원 가문과도 밀리는 편이었다.

1045년 에드워드는 고드원의 딸 에디스와 결혼했으나 에드워드는 1036년의 일을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웨식스를 바탕으로 고드원 일가가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고드원 일가와 부딪쳐야 했다. 1051년 9월, 에드워드에게 그의 프랑스인 손님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의 부하들이 고드윈 백작령의 시민들과 싸움질을 하는 일이 생겼다. 에드워드는 고드윈에게 자신의 손님과 싸운 시민들을 잡아 가두라고 전했으나 고드윈은 에드워드의 손님이 먼저 문제를 일으켰다는 식으로 말하며 방관했다. 격분한 에드워드는 이 기회에 고드윈과 그의 가문을 쳐내기로 했다.

에드워드를 따르던 레오프릭 백작과 시워드 백작은 병력을 소집했고, 고드윈 가의 두 아들도 자신들의 병력을 소집해서 대치했다. 하지만 양측 모두 미적대며 싸우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니 곤란해진 것은 고드윈 쪽이었다. 왕에게 대들었는데 부하들이 싸우려 하지 않으니 왕이 제대로 군대를 끌고 오면 목숨이 위험한 판국이었다. 에드워드는 고드윈에게 신하를 보내 내 동생을 살려내면 용서해주겠노라고 조롱했다. 고드윈은 저항을 포기하고 그의 아들들과 함께 플랜더스와 아일랜드로 도망쳤다. 고드윈을 내쫓은 에드워드는 내친 김에 자신의 아내인 고드윈의 딸도 수도원으로 쫓아버렸다.

하지만 1년 후, 고드윈과 아들들은 상당한 지지를 받으며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전을 두려워한 레오프릭 백작과 시워드 백작도 이번에는 에드워드 왕 편을 들지 않았다. 에드워드 왕은 격노했으나 별 수 없었고, 그들의 백작 지위를 다시 인정해 줘야 했다. 그가 쫓아보냈던 아내도 다시 불러와야 했다.

1053년 그렇게 증오하던 고드원 죽었지만 해럴드를 비롯한 그의 아들들의 세력이 커졌고, 1057년이 되어서는 머시아를 뺀 잉글랜드 전역이 이들 손에 들어갔다. 이 무렵부터 에드워드는 정치를 점차 멀리하고 매일 사냥이나 다니게 되었고, 정치에 간여한 것도 웨일스와 스코틀랜드 관련 문제가 전부였다.

웨일스의 경우 귀네드의 왕 그리피드가 추방된 머시아 백작 리어프릭의 아들 엘프가[4]의 도움으로 잉글랜드 국경 지역을 공격하고 약탈해 반 협박식으로 에드워드를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해 엘프가의 추방령을 풀고 그리피드는 그동안 침략한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이를 통해 그리피드는 1055년 무렵 웨일스 동쪽 국경 지대의 에르건그의 영토를 상당 부분 획득했다. 1056년 이 둘의 동맹에 위협을 느낀 해롤드가 군대를 이끌고 그리피드를 공격했지만 완패 당했다.

이 승리로 왕의 명령을 받은 잉글랜드 귀족들이 그리피드와 화친을 맺기 위해 직접 찾아오는 이례적인 사태가 벌어졌다. 이 회동에서 그리피드는 국경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확실히 인정받았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리피드는 고해왕 에드워드와 군신 관계를 인정하나, 이 관계는 지극히 형식적인 것으로 이전과 다르게 잉글랜드는 웨일스에게 어떤 조공이나 형식적 방문도 강요하지 않았다.

뭔가 요구하기에 그리피드의 세력이 너무 강하다는 사실을 잉글랜드는 해롤드의 패배를 통해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피드의 이런 업적으로 웨일스는 잉글랜드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위협적인 이웃으로 당당히 인정받았다. 또한 웨일스도 잉글랜드와 대등한 위치에서 외교를 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다. 스코틀랜드의 경우 1054년 스코틀랜드의 지배를 받고 있던 스트래스클라이드 침공해 차지했다. 이후 1058년 스코틀랜드의 왕위 분쟁에서 돈카드 1세 아들 말 콜룸 3세가 왕위를 되찾으려하는 것을 도와주었고, 다음 해 말 콜룸 3세는 잉글랜ㄴ드로 직접와 에드워드를 만나고 양국의 동맹을 채결했다.

한편 1055년 헝가리에 에드먼드의 아들인 에드워드와 에드거가 헝가리에 생존에 있다는 사실이 잉글랜드에 알려졌고, 에드원드는 망명지인 헝가리에서 사망했으나 에드거는 그 해에 잉글랜드로 올 수 있었으나 에드워드는 한 번도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공식화하지도 않았다.

1065년 해럴드의 동생인 토스티그가 백작으로 있었던 노섬브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토스티그는 반란을 진압하고 싶었지만, 협상가로 파견된 그의 형 해럴드는 도리어 그를 비난했다. 심지어 반란군을 달래기 위해 그를 백작에서 내쫓고, 모카 백작을 대신 임명하기도 했다. 토스티그는 반란을 진압해 달라고 에드워드에게 요청했으나 해럴드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그의 편을 들지 않았고, 토스티그를 쫓아냄으로서 반란을 무마하는 쪽으로 분위기는 돌아갔다. 토스티그는 왕가와 친했으나, 에드워드 왕은 분위기를 거스르지 못했고, 마지 못해 토스티그의 추방을 명령했다.

1066년 1월 5일, 에드워드 왕은 사망했고, 다음 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되었다. 문제는 누가 왕위를 이을 것인가였다. 에드워드 왕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후계자가 명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누구를 후계로 할지 명확히 지정하지도 않았다. 그가 살아 생전 누구를 후계자로 생각했었는지는 아직도 불명확하며, 당연히 당대에도 논란이 많았다.

외가쪽으로 오촌 조카이기도 한 노르망디 공국의 기윰은 잉글랜드의 왕위가 자신에게 넘기기로 이미 약속했다고 주장했고, 아예 1064년 해럴드 2세가 항해 중에 난파돼서 프랑스 북부에 있는 퐁티외라는 영지에 상륙한 적이 있었다. 해럴드는 상륙하자마자 포로로 잡혔는데, 이 소식을 들은 윌리엄 1세는 그를 풀어주도록 지시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해럴드는 윌리엄의 군대를 따라 전투에 참여했다. 윌리엄은 해럴드의 활약을 칭찬하며 선물도 하사하고 봉신으로 삼아 기사 작위까지 내렸다. 해럴드가 윌리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해럴드 2세는 왕이 죽기 직전에 자신에게 왕국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정통성으로 본다면 가장 적임은 애설레드 2세의 증손자인 에드거 애설링이었다. 하지만 상술한대로 에드워드 왕의 관심 밖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세력 또한 없어서 왕위와는 멀어졌다. 어쨌거나 고드윈 가의 해럴드는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에드워드 왕이 죽은 다음 날, 즉 왕이 매장된 바로 그날이었다.

더구나 노르웨이 국왕인 하랄 3세 하르드라다까지 끼어들었다. 그는 잉글랜드에서 추방된 노섬브리아 백작, 토스티그의 부추김을 받고 같이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하랄은 함대를 일으켜 300척의 선단을 모았다. 그리고 오크니에서 증원군과 합류하고 9월에 잉글랜드 해안에 도착해서 토스티그의 군과도 합류했다. 약 7천에서 9천의 병력을 모은 하랄은 여름 끝자락에 요크를 향해 오즈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9월 20일 요크 외곽. 하랄은 풀포드 전투에서 머시아의 백작, 에드윈과 그 형제 노섬브리아 백작, 모카가 이끄는 잉글랜드 북쪽 군대를 격파하고 요크의 항복을 받아냈다.상륙지인 리칼로 되돌아간 하랄은 노섬브리아와 협상을 하는데 왕위 찬탈을 위한 지원과 요크셔에 더 많은 포로를 요구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해럴드는 허스칼들을 이끌고 주야로 달렸다. 런던에서 요크셔까지 약 298km를 4일만에 주파해 9월 25일에 요크를 지나 적군과 접촉했다. 이때 양측은 코앞까지 와 보일 때 까지 그들의 접근을 인지하지 못했다.

이후 격렬한 전투 끝에 하랄 3세와 토스티그, 그리고 전투 후반에 리칼을 지키고 있던 하랄의 사위인 외스테인 오레가 이끄는 함대가 지원을 와서 반격을 했고,그 반격이 잠시나마 잉글랜드 군을 저지했지만 곧 압도당하고 오레도 죽으면서 종결되었고, 해럴드는 하랄의 아들인 올라프와 오크니의 백작인 폴, 그리고 살아남은 노르웨이 군과 강화했는데, 그들은 떠나서 다시는 잉글랜드를 치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다.

이후 해럴드는 징집된 병력들을 해산시켰다. 하지만 해럴드 2세와 하랄 3세가 스템퍼드에서 전투를 벌이기 동안 노르망드 공 기윰은 9개월 전부터 병력을 준비하고 있었다. 노르망디 및 브르타뉴, 플랑드르 지역에서 대규모 군대를 소집했는데, 그 목적은 당연히 잉글랜드 정복이었다. 윌리엄은 외교적으로도 협조를 구했고, 교황의 지지를 얻었으며, 때마침 핼리 혜성이 지나간 것을 가지고 잉글랜드 왕위 계승에 문제가 있다는 징조라고 하는 등 잉글랜드 침공의 정당성과 힘을 확보하고 있었다.

8월 초에 병력 집결을 마쳤으나 바람의 방향이 따라주지 않아 출발을 차일피일 미룰 수밖에 없었으나 스탬퍼드 전투가 끝난 3일 뒤 9월 28일. 드디어 바람은 노르만 군대를 위해 불었고 해럴드의 해군 병력이 흩어진 틈을 타서 7,000 ~ 12,000 명을 대규모 선단과 함께 마침내 영국 해협을 건넜다. 길을 잃은 몇 척을 빼고 윌리엄의 함대 대부분이 무사히 잉글랜드 남부 서식스의 페번시 만에 상륙했고 해럴드가 요격하기 위해 5,000 ~ 13,000 명의 병력들을 재소집한 후 또다시 달려갔다.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3주가 안된 1066년 10월 14일 잉글랜드 동 서식스의 헤이스팅스 북서쪽에서 접전하게 되었다.

스탬퍼드에서의 전투보다 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치열한 접전이 펄쳐졌고, 한때 기윰이 전사했다는 오보가 전투 중 나돌 정도로 난전으로 번졌으나 이내 기윰이 자신이 무사하다는 퍼포먼스로 노르망디 공국군의 사기를 유지시켰고, 결국 해럴드 2세를 폐사시켰다.

이후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에드거를 왕위에 웅립시켜 저항을 이어나가고자 했으나 이미 전세는 노르망디 공 기윰에게 유리하게 흘려거고 있었다. 기윰은 몇 차례의 교전 끝에 2달 후 버크햄스티드(Berkhamsted)에서 에드거 애설링을 복속시켜 잉글랜드의 왕위를 쟁취해냈으며, 1066년 12월 25일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윌리엄 1세로 즉위한다. 이때를 기점으로 런던이 고정적인 수도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참회왕 에드워드 통치기의 앵글로 색슨 법을 지키고 웨섹스 왕들의 전통에 따라 잉글랜드를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결과 인민법정은 계속 관습법을 시행하였지만 사법권은 대륙의 관습에 따라 성속(聖俗)으로 분리하였다.

다만 즉위식에서 너무 큰 목소리로 선서를 한 나머지 성당 밖에서 대기하던 노르만 경비병들이 놀라 근처 집들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후 그 아수라장 속에서 사람들은 약탈을 하거나 놀라 도망치기만 할 뿐이었고 뒤늦게서야 수습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윌리엄의 재위는 순탄치 않았는데 재위 중 반란이 끊이지 않아 큰 반란만 해도 5번이나 일어났을 정도였다. 윌리엄은 남잉글랜드를 정복한 후, 북부에서 반항하는 앵글로색슨족 및 데인족에 대한 토벌 및 학살을 벌였다. 이 당시 잉글랜드는 6세기에 북독일로부터 이주해 원주민인 켈트족을 몰아내고 정착한 앵글로색슨족, 그리고 8세기부터 스칸디나비아에서 몰려온 데인족들의 소국들이 느슨하게 연합해 있는 왕국이었는데, 왕이 바뀌었다고 해서 순순히 따르진 않았고 당연히 반항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윌리엄은 군사를 이끌고 자신의 지배에 따르지 않는 북부를 초토화했는데, 이를 북부 약탈(Harrying of the North)이라고 부른다. 북부 약탈이 참혹했음은 여러 역사서에 기록되었다. 전근대 사회에서 정복자가 학살을 벌임이 흔한 일이긴 했지만, 북부 약탈은 당시 기준에서도 너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평을 내린 당대인들 중에서 그를 따르던 연대기 작가이자 수도사인 오데릭 비탈리스도 이점만큼은 깠다. 다만 즉위식에서 했던 약조대로 앵글로 색슨족의 제도와 업적을 융화하며 잉글랜드에서 세력을 잡으려고 했다.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 지배를 위해 앵글로 색슨의 제도를 계승하는 온건 정책을 1080년대 중반까지 유지했다. 다만 이때까지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회의였던 위탄을 폐지하고 프랑스 본토의 쿠리아 레지스(curia resis)를 도입했다.

또한 지속적으로 터지는 반란으로 인해 윌리엄은 정복지 잉글랜드를 지배할 군대와 군대들이 머물기 위해 런던 탑을 비롯한 노르만 양식의 성을 계속해서 축조했고 용병을 필요로 했으며, 이를 유지하기 위한 세금을 계속해서 걷어야 했다. 그러나 앵글로 색슨족의 저항은 조직적이지 못하고 산발적이었기 때문에 윌리엄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더구나 1067년 웨일스를 침공하였는데 이중 웨일스의 소왕국 중 하나이자 가장 약했던 구엔트 왕국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고, 당시 구엔트의 왕인 카라도그 압 그리피드는 웨일스 내의 자신들보다 더 강한 왕국들과 경쟁한 것뿐만 아니라 잉글랜드를 장악한 노르만 영주들의 공격을 막아낼 처지가 되었다.

한편 포위스의 왕인 블레딘 압 컨빈은 오랫 동안 잉글랜드를 지배해온 앵글로 색슨 왕가와 깊은 교류를 나눴기에 잉글랜드를 침략해 왕위에 앉은 윌리엄에 대해서 적대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때 블레딘과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노섬브리아의 백작 모카가 1069년 반란을 일으키고, 블레딘은 군사를 지원한다. 이 반란이 성공할 경우 블레딘은 잉글랜드에서의 입지를 세우는 동시에 상당량의 토지와 재산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복왕 윌리엄은 강력하였고, 반란이 시작된 2년 후인 1071년쯤 모든 저항이 진압되자 모카는 모든 재산과 관직을 박탈당하고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블레딘은 불행 중 다행으로 반란에 가담한 죄로 불이익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반란의 실패가 노르만인에 대한 갑작스런 태도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어서, 블레딘은 계속해서 노르만과 반목하였고, 심지어 블레딘의 자손들까지도 반(反)노르만 노선을 반복하게 된다.

교회의 축성으로 정통적인 권위를 획득한 윌리엄은 제일 먼저 웨일스와 스코틀랜드 지역과 인접한 지역을 자신에게 충성했던 대제후의 봉토로 모두 하사하였다. 이는 보상의 뜻 이외에도 켈트족의 소요에 의해 불안한 국경 지역을 완충지대로 삼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윌리엄은 대제후들이 봉토로 하사받은 영지를 그들의 봉신들에게 재분봉할 수 있게 조치함으로써 각각의 기사가 하나의 봉토를 안정적으로 보유할 수 있도록 잉글랜드 왕국 내의 봉건제의 기초를 다져놓았다. 이때 야를은 얼로 발음이 바꿔지면서 대륙의 백작과 동격의 취급되었으나 다찬가지로 윌리엄에 의해 도입된 남작 칭호가 갖는 특권에 비해 약했으며 여전히 앵글로 색슨의 잔재였던 세리프가 이때도 살아남아 백작령에서 재판권, 군사징집권, 징세권을 행했다. 백작은 재판 수입 가운데 일부[5]만을 받는 것과 징집된 군인들을 지휘할 권한 뿐이었고, 백작령은 그저 행정구역일 뿐, 소유한 영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백작령에 백작의 소유토지가 없기도 했다.

또한 윌리엄은 항복한 에드거 2세를 구금했는데 에드거는 왕위를 빼앗기고 감금되었지만 얼마 안 가 감금 생활을 끝내고 스코틀랜드 왕국으로 망명해 복위를 위한 여러 시도를 이어갔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국왕 말 콜룸 3세와 누나 마가렛을 혼인시켜 복위를 위한 지원 약속을 얻었고, 1069년 초 노섬브리아에서 큰 반란이 일어나자 여기에 가세하여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하지만 윌리엄 1세에게 이내 진압당했다. 한편 프랑스의 필리프 1세는 에드거에게 윌리엄 1세의 대륙 근거지인 노르망디를 같이 공략하자는 제안을 했다. 에드거는 이에 호응해 자신의 추종세력과 매형 맬컴 3세의 지원으로 일군의 무리를 이끌고 바다 건너 프랑스로 향했지만 도중에 풍랑을 만나 잉글랜드 해안에 좌초하고 말았다. 적지에서 배가 좌초되어서 많은 군사와 인원을 상실했지만 에드거는 어찌어찌 스코틀랜드로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윌리엄에 대한 공략이 시작도 못 해보고 폭삭 망하자 맬컴 3세에게 더이상 잉글랜드 왕위를 탐내지 말라고 종용받기에 이르렀다.

이외에도 1069년에 에드거 2세의 복위를 돕기 우해 덴마크의 스벤 2세가 군대를 이끌고 침공하여 맞서 싸워야 했지만 거금을 주어 물러나게 했다. 1071년 이후 윌리엄의 잉글랜드 지배는 상당히 안정되었고 그의 관심은 대륙으로 향했고, 그전에 스코틀랜드에 대한 방비를 해야 했는데, 윌리엄은 더럼의 주교 월처에서 백작의 권한을 수여해 더럼을 대스코틀랜드의 사령탑으로 삼는다. 월터 이후 그의 후임들을 주교 군주로서의 지위를 헨리 8세의 종교개혁으로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바뀐 후에도 이어지다가 1836년 윌리엄 반 밀더트 이후 세속 권력이 박탈되었다.

이후 윌리엄과 이웃하고 있던 프랑스의 제후들은 윌리엄의 세력 확장에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 왕과 앙주 백작이 이러한 견제 세력의 중심에 있었고, 노르망디 지역을 탐내고 있었던 큰아들 로버트가 아버지에 대항하여 노르망디 공작으로서의 주군이기도 한 프랑스 국왕인 필리프 1세의 편에 가담했다. 하지만 이일 로 인해 로버트는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사술한 일 및 난폭하고 제어하기 힘든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났다.자연스럽게 후계자는 삼남인 동명의 아들인 윌리엄 2세가 되었다.

1072년 윌리엄 1세는 육해로 스코틀랜드를 침입했다. 두 나라 사이에 전투는 없었으나, 대신 맬컴 3세는 윌리엄 1세에게 에드거를 추방할 것을 약속함과 동시에 충성을 다짐하면서 아들 던칸 2세를 잉글랜드에 인질로 보냈다. 이 약속은 7년간 유지되었으나 1079년 노르만 왕실이 노섬브리아를 침범하면서 동맹은 깨지고 말았다.

1080년 윌리엄 1세는 장남 로버트를 보내 맬컴 3세를 굴복시키려고 했지만 1072년에 맺었던 동맹을 다시 체결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이후 윌리엄은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가 노릴 다음 대상은 웨일스의 소왕국들인 귀네드, 데헤이바쓰와 구엔트, 포위스였다.

데헤이바쓰의 경우 리스 압 테우두르가 귀네드 왕실의 적통이지만 왕권 쟁탈에서 패배해 아일랜드로 추방된 후 그곳에서 바이킹 세력을 모은 그리피드 압 카난과 손을 잡고 1081년 미니른 카른 전투에서 구엔트의 왕 카라도그와 귀네드의 왕 트하하이아른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웨일스의 패권을 손에 쥔 상태에서 갑자기 쳐들어온 윌리엄 1세의 노르만 군대가 웨일스로 쳐들어왔다.

동맹이었던 그리피드는 귀네드로 금의환향 했지만 이미 귀네드를 점령하고 있던 노르만 영주 루들란의 로버트에게 붙잡혀 감금당하면서 웨일스에 강한 왕이 되었지만 이미 강력한 노르만 왕조 하의 잉글랜드를 이길 재간이 없었기에 리스는 웨일스를 대표해 1086년 윌리엄 1세와 회동했다. 리스는 웨일스의 평화를 위해 당시 브리튼 섬 안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던 윌리엄 1세와 우호적 관계를 맺을 필요성을 느꼈다. 마찬가지로 윌리엄 1세는 웨일스를 큰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았으나, 웨일스와의 관계를 확실히 하고 국경 문제도 논의할 필요성을 느꼈다. 회동에서 리스는 웨일스와 잉글랜드의 군신 관계를 인정하고 매년 40파운드의 조공을 지불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잉글랜드와 불가침조약과 보호조약을 맺었다.

구엔트의 경우 왕인 카라도그가 미니른 카른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카라도그의 조부에게 왕위를 빼았겼던 모르가누그 정통 왕가의 후손인 이에스틴 압 구르간트가 왕위를 되찾는데 성공하는데 그는 웨일스의 패권을 쥐게 된 리스 압 테우두르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이를 위해 비밀리에 노르만-잉글랜드와 손을 잡게 되었다.

1085년 덴마크의 국왕인 크누드 4세가 크누드 대왕의 제국을 다시 재현할 야심으로 잉글랜드를 침공하려 했으나 남쪽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와의 분쟁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1086년 앙글랜드드 정복 20년이 되자 잉글랜드 전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음을 감지하고 인구 및 토지장부인 둠즈데이 북을 편찬하면서 기존의 앵글로색슨 및 데인족 귀족들을 2명 정도 남기고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와 인민을 몰수해 자신을 비롯한 노르만 및 프랑스계 귀족들에게 분밸하는 등 강력한 왕권을 일구어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7월 망트 요새의 프랑스 수비대가 노르망디를 급습하자, 윌리엄 1세는 반격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세상을 떠났다. 잉글랜드 왕위는 예정대로 삼남 윌리엄 2세에 물려주으나 이 후계 선정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아버지를 배신하고 선격적으로도 문제가 있어 후계에서 밀려난 장남 로버트가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고, 사남이었던 핸리에겐 영자를 살 수 있는 돈만 주어졌다. 더구나 당시 노르만계 귀족들은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노르망디 내에서도 봉지를 소유하고 있는 이들이 많았기에 이러한 분할 상속에 대해 불만감을 가졌다. 이에 두 형제간 서로의 영지를 먹으려고 전쟁까지 벌어졌다.

그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1088년 권력자인 오도 주교의 주도로 반란이 일어났지만 진압당했고 승자인 윌리엄 2세의 입지는 도리어 탄탄해졌다. 또한 1090년 웨일스의 소왕국 중 하나인 구엔트를 병합하는데 성공했다. 1081년 데헤이바쓰와의 미니드 카른 전투에서 구엔트의 왕인 카라도그가 전사하면서구엔트는 전쟁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노르만 군대의 침공을 막지 못했다. 결국 구엔트는 노르만 영주들의 잦은 약탈과 침략에 시달리며 카라도그 사망 후, 단 10년도 못 버티고 지도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다.

구엔트의 멸망을 초래한 것은 카라도그의 후임자 이에스틴 아프 구르간트의 결정적인 판단 실수였다. 카라도그의 후임자 이에스틴은 노르만인의 침략에 시달리는 한편으로 웨일스의 패권을 움켜쥔 데헤이바쓰의 왕 리스와 대립 관계에 있었다. 이에스틴은 리스를 무찌르기 위해 노르만 군대의 힘을 빌리기로 결정했는데, 이것이 큰 패착이었다. 전쟁에 능한 노르만 군대는 이에스틴의 요청에 따라 데헤이바쓰와 맞붙어 승리를 거두고 리스까지 죽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임무를 다한 노르만 군대는 잉글랜드로 철수하는 대신, 이에스틴의 영토를 공격했다.

노르만 군대에 대항할 실력과 병력이 없던 이에스틴은 결국 구엔트 평야 지대를 노르만인에게 빼앗기고 산악 지대로 쫓겨났다. 이에스틴의 아들 카라도그는 모르가누그의 저지대 영토 확보에는 성공하지만 잉글랜드가 장악한 구엔트 왕국의 옛 영토들을 탈환하지는 못했다. 이후 윌리엄 2세는 1091년에는 노르망디로 쳐들어가 형의 영토를 상당 부분 빼앗았다. 이후 윌리엄 2세와 로베르 2세는 적당히 화해했고 이때부터 윌리엄은 프랑스 카페 왕조로부터 노르망디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같은 해 스코틀랜드의 말 콜룸 3세의 침략을 물리치고 그를 굴복시켰다. 이듬해에는 스코틀랜드인들이 점령한 땅을 되찾아 그곳에 성을 세워 자신의 지배하에 두기도 했다. 물론 맬컴은 복수하려고 다시 쳐들어왔으며 노섬브리아를 잔인하게 발라버리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1093년 11월 13일 매복한 노르만 군대에 공격을 당해 그의 아들과 함께 살해된다. 말 콜룸 3세는 아킬 모렐이라는 뱀버러 성의 시종에게 죽었다. 말 콜룸 이후에는 잉글랜드와의 관계가 좀 나아져서 잉글랜드 왕을 어느 정도 인정하였다.

한편, 웨일즈에 대해서는 윌리엄도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웨일즈를 두 번 정도 침략한 적이 있으나 저항이 심해서 점령에 실패하고 얻은 것은 별로 없었다. 1093년 노르만 영주 버나드의 침공으로 인해 ‘마지막 웨일스의 진정한 왕’ 리스는 사망하였다. 리스의 사망은 웨일스에서의 노르만의 본격적인 세력 확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를 계기로 노르만 영주들은 웨일스 국경을 제 집 드나들 듯 침범하고 침략하면서 웨일스의 왕들에게 시시콜콜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때를 계기로 데헤이바쓰를 포함한 웨일스의 소왕국들이 점차 왕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기 시작했다.

1094년 포위스의 왕인 카두간 압 블레딘은 윌리엄 2세가 가신들을 데리고 노르망디로 잠시 떠나자,기회를 놓치지 않고 귀네드에 자리잡은 노르만인들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한 번 불이 붙은 반란의 불길은 웨일스 남부에 위치한 데헤이바쓰까지 번지며 웨일스 내 노르만인 소유의 영토를 활활 태우기에 이르렀다. 반란의 불길을 끄려는 노르만인의 시도는 귀네드의 코에디스비스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제압되었고, 노르만 영주들의 성채는 글자 그대로 박살이 났다. 결국 1095년 윌리엄 2세는 노르망디로 떠난 지 1년 만에 잉글랜드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나 윌리엄 2세 지휘 하의 잉글랜드군도 반란의 불길을 진압하기 위한 소방수로 역부족이었다. 1096년 구엔트를 비롯한 웨일스 남동부를 제압하며 반란을 진압한 것처럼 보이던 잉글랜드군은 고국으로 회군하던 도중 게흘리 타르바우그에서 웨일스군에게 포위당하여 크게 패배한다. 같은 해, 카두간은 자신과 친족관계에 있는 허웰 압 고로누이와 이히드리드 압 에두인 2명의 귀족을 이끌고 노르만 영주인 윈저의 제럴드 소유이던 펨브로크 성을 공격하였다.

1097년 윌리엄 2세는 2차 진압에 나섰다. 웨일스 남동부를 침공했던 1차 시도와는 달리 잉글랜드군은 귀네드를 위시한 웨일스 북부를 공략했다. 하지만 이번 시도 역시 이미 거세질 대로 거세진 반란의 불길을 잠재우기에는 부족하였다. 오히려 잉글랜드는 웨일스 남부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는데, 1096년 펨브로크 성을 공격당한 펨브로크 성의 영주 제럴드가 보복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1098년에는 반란의 불길이 차츰 사그라들기 시작하였다. 남쪽에서는 펨브로크 성을 완전히 파괴하는 데 실패한 것이 부메랑이 되어 병사들의 사기를 꺾고 있었다. 게다가 반란군의 펨브로크 성 함락 실패로 노르만인 영주는 여전히 거점을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웨일스에게는 불리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북쪽에서는 오랜 기간 갇혀 있다 탈출한 귀네드의 왕가 후손인 그리피드 압 키난과 카두간이 손을 잡았다.

카두간과 그리피드는 체스터의 백작과 슈르즈베리의 백작이 힘을 합친 연합군에게 밀려 웨일스 영토의 끝이라 할 수 있는 앵글시 섬으로 쫓기는 상황에 놓였다. 한때 아일랜드에서 살았던 그리피드는 그곳에 상주하는 바이킹과 친밀한 사이였고, 위기 상황에 놓이자 아일랜드의 바이킹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참고로 앵글시 섬은 웨일스에서 아일랜드와 가장 가까운 영토 중 하나이다.

그러나 카두간과 그리피드 연합군이 바이킹의 협력으로 위기에서 탈출하리라는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카두간과 그리피드를 돕기 위해 앵글시 섬에 상륙한 바이킹 용병들이 더 큰 금액을 제시한 노르만인 영주들에게 넘어가 카두간과 그리피드를 배신했기 때문이다. 바이킹의 배신으로 카두간과 그리피드는 앵글시 섬마저 빼앗기고 아일랜드로 피신하게 된다.

노르만군의 완벽한 승리로 보이던 상황은 또 한 번의 반전을 마주했다. 앵글시 섬 북쪽에 위치한 맨섬은 예전부터 바이킹의 거점으로 유명하였는데, 이 바이킹을 제압하기 위해 맨섬으로 가던 노르웨이의 왕 망누스 3세가 앵글시 섬에 도열하여 있는 노르만군을 보고 공격을 가한 것이다. 이 공격으로 슈르즈베리의 백작인 몽고메리의 휴가 사망하고, 지도자를 잃은 노르만군은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철수하는 노르만군에게 또 하나의 작은 반전이 있었으니, 그동안 그들을 돕던 오와인 아브 에두인이 그들을 배신하고 공격한 것이다.

뜻밖의 행운으로 노르만군은 웨일스 땅에서 물러나고, 1099년 카두간과 그리피드는 아일랜드에서 돌아온다. 이로써 1090년대 웨일스를 휩쓸던 반란의 태풍은 잦아들었고, 윌리엄 2세의 지휘 하에 체스터의 백작과 카두간을 위시한 웨일스의 왕들은 국경을 조정하고 평화협정을 맺는다. 이때 카두간은 포위스와 케레디기온을 그의 통치 지역으로 인정받았고, 어떤 웨일스 영주보다도 많은 영토를 받아 그가 웨일스 최강의 군주임을 다시 한 번 입증하였다. 한편 귀네드 왕국을 차지하고 싶어 했던 그리피드는 앵글시 섬을 받는 데 그쳤다.

웨일스와의 전쟁 중인 1096년에 노르망디를 통치하던 그의 형 로베르 2세가 십자군 원정을 떠나자 윌리엄이 섭정을 맡아 노르망디까지 통치했다. 그의 형은 윌리엄 2세가 죽은 후 한 달 후에나 돌아왔기에 그는 죽을 때까지 노르망디를 통치했다. 섭정 기간 동안 윌리엄 2세는 프랑스와 전쟁을 치렀는데 이때 메인 지역을 얻어냈다.

그러나 윌리엄 2세는 교회와의 사이가 나빴다. 그의 즉위 후에 대주교가 죽었는데 후임을 몇 년간이나 뽑지 않고 방치해 두었고 그동안 윌리엄 2세는 교회의 수입을 가로챘다. 그가 큰 병에 걸렸을 때에야 겁이 나서인지 이탈리아계 노르만족인 앤설름(Anselm)을 새 대주교로 임명했지만 이미 교회와의 사이는 틀어져 버렸고, 새로 임명된 앤설름 또한 윌리엄과의 사이가 매우 나빴다. 대주교 앤설름은 왕과 여러 사안에서 의견 충돌을 벌이다가 결국 국외로 추방되었다. 추방당한 앤설름은 교황에게 가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당시 교황이었던 우르반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와 대립 중이라 잉글랜드마저 적으로 돌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교황은 윌리엄과 정교조약(政敎條約)을 맺고 윌리엄 측 교회 상황을 인정하였으며 윌리엄은 그 댓가로 우르반 2세를 교황으로서 인정했다. 하지만 앤설름의 추방이 풀린 것이 아니었기에 앤설름은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못했고 윌리엄이 교회의 수입을 가로챌 수 있게 된 건 덤이었다.

왕으로서의 윌리엄 2세의 통치는 거칠었고 폭정을 저질렀기에 모두가 무서워하는 왕이었다. 특히 그의 치세에 일어난 잦은 원정으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비 부담이 증가해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기에 귀족들은 물론 백성들에게도 증오를 받았다.
4.1.2. 12세기
그러다가 1100년 8월 2일 윌리엄 2세는 브로켄허스트 근처의 숲에서 사냥 중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었다. 당시 그는 독신이었고, 큰 형인 로베르는 십자군 원정에 참가한 상태였다. 이때 사냥에 동행하던 동생 핸리는 형의 시신을 내팽겨친채 서둘러 원체스터로 달려가 권좌와 보물을 확보한 후 런던으로서 가 윌리엄 2세가 죽었다는 사실을 공포했다. 런던의 많은 귀족들은 십자군 원정에 참전하고 있던 로베르 2세를 정당한 계승자로 생각했으므로 헨리 1세는 로베르가 돌아오기 이전까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해 며칠 후에 대관식을 올려 헨리 1세로 즉위한다.

헨리는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자유 헌장을 선포하였는데 과세를 공평하게 메기고 면세대상이었던 교회의 수입을 금하며 왕실의 권력남용을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였다. 또 애닉 전투 이후 소원해져있던 스코틀랜드와의 관계를 완화시키기 위하여 스코틀랜드 왕 맬컴 3세의 딸이자 에드거 2세의 조카인 마틸다와 결혼함으로써 외교적 안정을 꾀하면서 노르만 왕가의 정통성을 높였다. 그리고 형 윌리엄 2세의 심복이었던 플램바드를 런던탑에 가두고 또한 윌리엄 2세와의 불화로 스스로 캔터베리를 떠난 안셀무스 대주교를 다시 불러들이기도 하였다. 또한 형 윌리엄의 죽음으로 웨일스 내의 영토 분쟁의 불씨가 재점화되면서 영토를 다시 조정할 필요성이 생겼다.

하지만 살아남은 웨일스의 소왕국 중 가장 약소국이었던 포위스의 왕인 카두간 압 블레딘은 단순히 영토를 조금 늘리는 것을 넘어 데헤이바쓰와 귀네드를 넘선 전 웨일스에 영향력을 끼치는 브리튼인의 왕을 원했다. 그는 헨리 1세가 아닌 십자군 원정에 참전 중이었던 로베르 2세를 지지했으며 슈르즈베리의 새로운 영주인 로버트와도 동맹을 맺었다.

이후 십자군 원정에 참전 중이었던 로베르 2세는 윌리엄이 죽었다는 소식에 서둘러 돌아왔으나 이미 왕위는 헨리에게 돌아간 상태였다. 1101년 로베르는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로 침입하여 자신이야말로 정당한 왕위계승자라고 주장하였는데 헨리의 그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귀족들은 대부분 로베르 2세의 편에 섰다. 포위스의 카두간 또한 로베르 2세를 군사력으로 원조하지만 헨리는 수많은 봉건 귀족들과 특히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대주교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확보해 로베르와 대등한 싸움을 벌였으며 결국에는 타협안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또한 헨리는 로베르를 군사력으로 돕던 카두간의 세력을 와해할 목적으로 그의 동생인 르웰스에게 접근하여 웨일스의 영토와 통치권을 미끼로 카두간을 배신하고 로버트에 대적할 것을 부탁하였다. 요르웰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로버트를 공격하였다.

이 타협안으로 로베르 2세는 잉글랜드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모두 포기하는 대신 노르망디 지방의 영토와 2, 000 파운드라는 막대한 연금을 요구하였다. 이후 로베르 2세의 통치는 노르망디 사람들의 불만을 가져왔고 노르망디 귀족들의 부탁을 받은 헨리 1세는 프랑스의 묵인 아래 1106년 노르망디를 공격하여 탱슈브레 전투에서 로베르의 군대를 격멸하고 노르망디를 수중에 넣는다. 이후 패배한 로베르는 포로가 되어 잉글랜드로 압송되었고 엄중한 감시 속에 여생을 보내게 된다.

형과의 분쟁에서 이긴 헨리 1세는 더 이상 자유헌장에서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재정적 억압 정책을 펴며 많은 봉건적 수입과 부조금을 거둬들였다. 사냥을 좋아한 노르만인들은 사슴과 멧돼지 같은 사냥감을 보호하기 위해 이전에는 없었던 삼림법을 잉글랜드에 도입했다. 왕은 왕령에 의하여 어느 지역이나 삼림법의 대상 지역으로 정할 수 있었다. 삼림법은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개인적인 사냥, 특히 사슴사냥을 할 경우 무거운 벌금이 부과되었고, 농민들은 목재와 땔감을 구하거나 딸기나 벌꿀들의 식료품을 숲에서 얻는 것이 금지되었다.

헨리 1세는 1106년 이후 전통적으로 노르망디 공의 적이었던 프랑스 왕 루이 6세와 앙주 백작 풀크 5세에 대항하면서 치세의 절반가량을 대륙에서 보냈다. 이 때문에 그가 부재중일 때 잉글랜드를 다스리고 대륙에서 그의 전쟁 수행을 뒷받침해 줄 정부조직을 발전시키기 위해 대사법관이라는 새로운 관직을 만들어냈다. 헨리의 부재중에는 대사법관의 법정이 재정, 사법, 행정 등 모든 업무를 처리했다. 이 법정은 국왕 회계청 법정이라고 불렸고, 이 회계청은 독특한 업무처리 방식 때문에 유명했다. 또한 순회재판제도를 만들어 자신이 임명한 판사들로 하여금 잉글랜드의 각 주를 체계적으로 순방토록 하면서 재판제도를 서서히 정착시켜 나갔다.

또한 헨리는 윌리엄 2세때부터 안셀름 대주교가 문제를 제기해 교회와 왕과의 불화를 일으켰던 속인성직명령권[6]을 포기함으로써 형인 윌리엄 2세와는 달리 교회와 싸우는 것을 피했다. 하지만 그는 주교를 임명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계속해서 행사함으로써 교회를 지배하는 형식은 포기했지만 실제적으로는 교회를 계속 지배하였다. 헨리는 또한 1109년 복귀한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름이 죽자 5년 동안 캔터베리 대주교직을 공석에 둠으로써 이익을 취했다.

1111년 포위스의 왕인 카두간이 죽고 반잉글랜드 성향을 갖고 있던 그의 아들인 오와인 압 카두간이 승계한다. 이미 왕자 시절부터 반 잉글랜드 성향이었던 오와인은 더욱 반잉글랜드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1114년 오와인은 주변 왕국의 왕들과 연합하여 웨일스 내 노르만 세력을 소탕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오와인과 힘을 합친 자들은 고로누이 아브 오와인과 귀네드 지역을 다스리던 그리피드 아프 키난으로, 그들은 각각 자신의 통치지역 근처 노르만인의 영토를 공격하였다. 오와인은 한때 포위스와 케레디기온 모두를 차지한 카두간의 영토를 수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케레디기온 근방의 노르만인 영토를 집중 공략하였다. 결국 같은 해인 1114년 헨리 1세는 군대를 이끌고 웨일스로 들어왔다.

헨리 1세의 출정에 고로누이와 그리피드는 금세 평화협정을 맺고 화해하지만, 노르만 대항군을 지도하던 오와인은 화해 대신 도피를 택하여 스노도니아로 피신한다. 헨리 1세는 당시 웨일스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자랑하던 오와인과의 전투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오와인의 숙부 마레디드의 중재를 통해 협상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을 오와인에게 전달하였다. 결국 오와인이 헨리 1세의 제안을 승낙함으로써 웨일스와 헨리 1세의 오랜 대립은 일단락되었다. 오와인이 웨일스에서 가장 높은 왕으로 대우받았다는 사실은 협상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데, 헨리 1세는 오와인에게 그의 영토에 대한 자치권을 인정하고 기사 작위를 하사한 반면, 고로누이와 그리피드에게는 상당한 액수의 보상금을 낼 것을 요구하였다. 이전쟁후 오와인이 친잉글랜드 성향으로 바뀌지지만 웨일스 내에 데헤이바쓰의 왕 그리피드 아프 리스가 반잉글랜드 주자로 빠르게 대두되었다.

하지만 1120년 유일한 적자였던 윌리엄이 노르망디에서 잉글랜드로 돌아오는 도중 해상사고로 사망하면서 그의 후계 문제가 복잡하게 되었다. 그에게 윌리엄 외의 적자녀라고는 이제 딸 마틸다 밖에 없었는데 그녀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5세와 결혼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가 되었기에 마틸다와 하인리히 5세에서 자식이 태어나면 잉글랜드 왕위가 자동적으로 넘어가면 그만이었지만 문제는 마틸다와 하인리히 5세 사이에 결혼 후 자식이 없었고, 급기야 1125년 사위인 하인리히 5세가 후사없이 죽게 되면서 결국 딸을 잉글랜드로 데려와 후계자로 선포했다.

또한 오랜 앙숙이었던 앙주 백작 폴크 5세와의 악연을 청산할 겸 당시 폴크의 외아들인 조프루아 5세와 혼인시켰다. 하지만 1135년 칠성장어 요리를 과식하다가 소화불량으로 죽게 되었다. 당시 왕위는 생전에 선포한대로 딸 마틸다에게 돌아가야 했으나 헨리 1세의 조카였던 스티븐이 이의를 재기해 잉글랜드의 왕위를 찬탈, 이후 왕위를 되찾의 새남편의 군대 및 이복오빠인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와 손을 잡은 마틸다 사이의 왕위 계승 내전이 발생했다.

마틸다 본인은 군사적 재능이 있다고 할 수 없었지만 이복형제인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에게 뛰어난 군사적 재능이 있었고 그가 잉글랜드 전장에서 사실상 사령관 역할을 했다. 17년 동안 왕위를 두고 싸우면서 잉글랜드는 자연스럽게 무정부 상태에 놓여지게 되었다. 곳곳에서 강도 귀족들이 창궐하는 등 치안이 약화되었고, 심지어 이때를 틈타 웨일스와 스코틀랜드가 침공했다. 웨일스의 소왕국중 하난인 포위스의 왕 마도그는 마틸다의 편을 들어주면서 링컨 성을 공격하고 있던 스티븐의 군대를 포위한 예가 있으나 데헤이바쓰의 왕인 마레디드 압 그리피드처럼 데헤이바쓰의 옛영토를 차지하고 있던 노르만-잉글랜드 영주들을 몰아냈다. 외부가 이러할진대 내부 상황 역시 이 내전이 길게 유지되는 만큼 쉽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전이 시작될 당시 스티븐은 내전이 진행되는 동안 주도권을 상실했고, 내전 이후에는 왕좌에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통치는 전혀 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한 그는 왕위계승 과정에서 자신을 도와주었던 동생 헨리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지 않아 헨리와도 적이 되었고 여러 가지로 궁지에 몰렸다.

내전 초기 스티븐은 전투에서 승리하며 기세를 올렸다. 그러던 중 1139년 솔즈베리 주교 로저, 링컨의 주교인 알렉산더, 일리의 주교 나이젤 등 3명이 마틸다를 지지했다는 혐의로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교황이 풀어주라고 설득했음에도 무시로 일관하자 동생인 블루아의 헨리는 이 사건으로 교회의 자유가 침해되었다고 주장했으며, 스티븐은 성직 제후들의 등을 돌리고 말았다.

스티븐은 또한 1139년 마틸다가 애런들에 상륙하여 자신의 수중에 놓였음에도 그녀를 유폐하는 등의 비기사도적인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고, 마틸다가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합류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결국 1141년 마틸다 측의 우세로 스티븐은 글로스터 백작의 포로가 되고 폐위되었다. 그러나 1142년 윈체스터에서 열린 성직자회의에서 ‘잉글랜드의 레이디’로 선출되어 왕권을 잡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6월에 대관식을 위해 런던으로 돌아왔지만 하인리히 5세의 황후이자 오만한 선정 탓에 교황이 제안한 평화안을 거부하고, 귀족들에게 거금을 요구하는 등 거만하고 무모한 행동으로 시민들과 귀족들의 분노를 사는 등 마틸다는 런던의 민심을 확보하는데 실패했고, 런던 시민들은 무기를 들고 마틸다를 몰아냈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마틸다는 옥스퍼드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이를 놓치지 않고 스티븐의 아내인 블로뉴의 여백작 마틸다가 켄트에서 군사를 일으켜 글로스터 백작을 포로로 잡고 남편과의 교환을 요구했다. 마틸다는 눈 앞의 승리를 놓치기 힘들었지만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며 전쟁을 이끈 이복형제인 글로스터 백작을 내버릴 수도 없는 처지였기에 포로 교환이 성립되었고 스티븐 왕은 구사일생했다.

결국 스티븐 왕이 마틸다를 잉글랜드 서부와 노르망디로 밀어냈으며 1147년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가 사망하면서 마틸다는 낙담 끝에 잉글랜드 왕위를 포기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1151년 9월 마틸다의 남편 조프루아 플랜태저넷이 사망하고 그 뒤를 아들 앙리가 승계하는 것을 기점으로 왕위 계승 분쟁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앙리는 1153년 1월에 모친 마틸다를 대신해 군을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해 전쟁이 재개되었다. 내전이 계속되던 중 스티븐이 왕위를 물려주려고 생각했던 아들 외스타슈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그나마 남은 아들이었던 윌리엄은 어머니의 영지인 불로뉴 백작위를 계승할 뿐 아버지의 계승권을 거부했다.

이에 양측은 윌링포드 조약을 체결해 스티븐의 왕위 승계는 인정하되 마틸다의 아들 헨리를 공동왕으로 삼아 다음 왕좌를 물려준다는 것이었다. 이듬해 스티븐은 켄트 주의 도버에서 사망하며 파란만장한 생을 끝마쳤고, 윌링포드 조약에 따라 마틸다의 장남인 앙리가 헨리 2세로 정식으로 영국의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 헨리 2세는 어머니의 계승권을 주장하기 전인 1152년에 결혼으로 노르망디와 앙주 외에도 프랑스 본토 내에서 막대한 직활령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그보다 도 더 연상으로 한때 프랑스의 국왕 루이 7세의 왕비였으나 그와 이혼한 아키텐의 여공작이었던 엘레오노르 다키텐이었다.

다만 이결혼은 헨리 2세의 주도하에서도 그의 어머니인 마틸다의 주도하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본디 엘레오노르는 루이 7세와 전형적인 정략혼을 했지만 둘 사이에 아들이 없고 딸만 둘이 있던데다가 제2차 십자군 원정 당시 엘레오노르의 숙부인 안티오키아와의 관계 끝에 결혼 생활이 파탄나면서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게 경우 결혼 무효를 인정받은 상태였다.

전남편인 루이 7세는 엘레오노르가 동격의 대영주와 재혼하는 것을 바랬으나 문제는 엘레오노르가 전남편을 엿맥일 심산으로 자신의 주도하에 앙주 백작이자 노르망디 공작이며 자신의 또다른 친척이기도 했던 9세 연하의 헨리 플랜태저넷과 약혼했고, 1152년 5월 18일, 둘은 푸아티에에서 결혼하였다. 그리고 1154년 10월 25일에 헨리가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2세가 되었고 엘레오노르는 성탄절에 다시 왕비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잉글랜드의 국왕이 잉글랜드는 물론이고 원래부터 갖고 있던 프랑스 내의 노르망디와 앙주, 거기에 결혼으로 아키텐과 푸아티에 등의 방대한 영지를 가지게 되면서 프랑스 왕실의 위협적 존재로 부상하게 되었다.

헨리 2세는 명군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통치 능력이 뛰어난 왕으로 제위 기간 내정으로 1155년 당시 부제였던 토마스 베켓을 대법관(Lord High Chancellor)으로 임명해 행정과 사법 개혁을 실시해 봉건 군주국에서 관료군주국으로 잉글랜드를 탈바꿈시키려 했다. 우선 무정부시대 동안 치안의 골치거리로 전락된 스티븐과 마틸다의 용병부대를 국외로 추방하였다. 또 왕의 성들과 왕령을 되찾고, 방자해진 영주들의 세력을 꺾어 왕의 권위를 강화했다. 또한 최근에 생겨난 백작령을 없애고 스티븐 시대에 축조된 영주들의 성을 허물도록 했다. 그는 이러한 조치들을 통해 내전에 지친 영주들이 점차 그에게 협력하게 만들었다. 그는 평화를 정착시키는 일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해냈다.

특히 재판 제도를 개편는데 외조부인 헨리 1세의 순회재판제도를 대폭 확대했으며, 셰리프들로 하여금 지방 사정에 밝은 사람들을 순회재판관들 앞에 소환시킬 것을 명했다. 소환된 사람들은 서약을 하고, 재판관이 지난번 방문한 이래로 발생한 모든 주요 범죄 사건들을 재판관에게 낱낱이 보고해야만 했다. 이것이 대배심의 기원이 되었다. 헨리는 또한 분쟁 당사자로 하여금 국왕 법정에서 재판받을 수 있는 길을 처음 열어주었다.

헨리 2세가 큰 관심을 기울인 법률문제는 중죄에 대한 소추였다. 중죄는 왕의 평화를 깨뜨린 것이기 때문에 곧 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지방 법정이 아니라 국왕 법정에서 다루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에 따라 헨리는 많은 사건을 지방 법정에서 국왕 법정 관할로 옮겨 모든 자유민들이 국왕 법정을 이용할 수 있게 했으며, 그 결과 국왕 법정의 업무량이 크게 늘어났다. 국왕 법정은 지방 법정보다 우월한 재판을 시행했으며,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사건이 국왕 법정에서 다루어지기를 원하였다.

국왕 법정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했다. 중대한 사건을 대자문회의에서 다루었으나 많은 사소한 사건들은 코람 레게라는 소자문회의에서 다루었는데, 이런 국왕 법정은 전국을 돌아다녔다. 항구적인 재판 장소를 마련하고 늘어나는 재판 업무를 소화하기 위해 헨리는 1178년 5명의 재판관을 웨스트민스터에 상주시켜 국왕 법정을 열게 했다. 이 법정이 바로 민사소송 법정의 전신으로, 국왕을 수행한 소자문회의는 바로 왕실 법정의 전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법정은 큰 사건만 처리했다. 소송사건 수가 급속하게 늘어남에 따라 헨리는 사람들이 국가의 재판을 좀 더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순회재판제도를 개선했다. 그는 전국을 몇 개의 순회재판구로 나누고, 대사법관이나 상서와 같은 고위 관리들이 전국을 돌며 소규모의 소송사건을 다루게 했다. 그리하여 왕의 재판관들이 주재한 순회법정은 일종의 국왕 법정이 되고 웨스트민스터에서의 재판과 동일한 방법으로 재판이 이루어졌다.

헨리와 여러 국왕 법정의 재판관들은 일부 앵글로 색슨법과 노르만법을 활용하고 로마법과 교회법을 차용하여 필요에 맞는 새로운 관행을 만들어냈다. 이런 관행은 영국민들의 관습으로 인정되었고, 여러 법정에서 내려진 판결들로부터 선례와 법의 원칙들이 추출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잉글랜드 전체에 적용되는 하나의 공통적 법체계가 형성되었다.

토마스 베켓의 능력 하에 잉글랜드의 내정이 안정되면서 헨리 2세는 외정으로 눈을 돌렸다. 무정부시대 스코틀랜드 왕국에 의해 빼앗긴 영토들을 되찾는데 주력했다. 헨리 2세는 1157년에 컴버랜드와 노섬벌랜드를 탈환을 시도했고, 정비된 내정을 바탕으로 한 잉글랜드 군대를 이기지 못하자 당시 스코틀랜드의 국왕인 말 콜룸 4세는 헌팅던을 되찾은 대가로 할아버지 데이비드 1세가 획득했던 지역들을 헨리 2세에게 넘겨주었고, 동시에 헨리 2세의 봉신, 즉 봉토(封土)를 받는 신하가 되었다.

같은 시기웨일스에서 잉글랜드 왕의 영향력을 재정비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에 따라 웨일스 진출을 결심했다. 이 과정에서 헨리 2세는 웨일스의 내부 실정을 잘 아는 내부인을 물색했고 귀네드 왕인 오와인의 숙적인 마도그와 동맹을 맺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오와인에게 추방당해 잉글랜드에서 상주하던 오와인의 동생 카두알라드르도 헨리 2세에게 포섭당했다. 1157년 마도그와 카두알라드르의 도움을 받은 헨리 2세는 군사를 이끌고 웨일스로 향했다.

이당시 귀네드는 데헤이바쓰와 전쟁이 끝낸 직 후라 잉글래드에 맞썰 수 있을 전력이 있던 상태였다. 1157년 헨리 2세의 웨일스 침공은 웨일스 왕들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는 목적이었다. 그 때문에 자신과 동맹을 맺지 않으면서도 웨일스에서 가장 강성한 세력을 누리던 오와인은 헨리 2세에게 눈엣가시였고, 1157년 군사 원정의 표적은 오와인이었다. 야심찬 헨리 2세는 육로와 해로 양동 작전으로 오와인을 공격했다. 육지에서 헨리 2세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어 귀네드 동쪽을 황폐화시켰고 루들란까지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헨리 2세는 오와인의 아들인 키난과 다비드와 전투를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귀네드 동부를 점령하고 계속 진군하려는 헨리 2세의 군대와 이를 저지하려는 오와인의 군대가 에울로에서 맞붙었다. 에울로 전투에서 오와인의 군대는 헨리 2세의 병사들을 좁고 숲이 우거진 계곡으로 유인하고 포위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한편, 헨리 2세의 함대는 귀네드의 심장부인 앵글시 섬에 상륙했지만 그곳에서 격퇴당했다. 헨리 2세의 공세를 훌륭히 방어하며 귀네드 정복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보여준 결과, 오와인은 마침내 헨리 2세와 평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평화협정의 조건으로 헨리 2세는 오와인에게 그가 정복한 영토 일부를 포기할 것과 그를 더 높은 왕으로 인정할 것을 제안했다. 오와인이 헨리 2세의 조건을 수용함으로써 귀네드 왕국에 평화가 찾아왔다. 오와인은 이 협정으로 테게인글과 루들란을 노르만 영주에게 내주고 헨리 2세에게 협조했던 카두알라드르에게도 귀네드로 복귀할 문을 열어주었다.

이로 인해 오와인은 승리는 했지만 국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어 잉글랜드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1159년 데헤이바쓰의 리스 아프 그리피드가 헨리 2세에 반기를 들자 오와인은 아들 허웰과 키난, 동생 카두알라드르를 지원군으로 보내 이를 진압하려는 헨리 2세에게 군사 원조를 했지만 이 공조는 오래가지 못했다.

1160년 벡생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던 루이 7세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 다섯살이었던 차남 헨리루이 7세의 딸이자 갓 2살이 된 마르가리트 공주와 약혼시켜 혼수품으로 백생 지역의 통치권을 얻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1161년 티볼드 대주교가 서거하자 헨리 2세는 성 토마스 베켓을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하면서 자신의 총신인 토마스 베켓과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토마스 베켓은 이 대주교직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1162년 그는 수상직을 사임한 후 사제품을 받고서 대주교로 착좌하였다.

이때부터 방탕한 성품이었던 그는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엄격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1164년 영국에서는 성직자의 권한을 제한하는 클래런던 조례를 통과시켰다. 성직자를 교회법정뿐만 아니라, 세속법정에도 세울수 있게 한 법안이다. 교회 법정에서 행해야 할 성직자의 권리와 교황청에 호소하는 권리를 부인하는 악법이었다. 베켓은 처음에는 마지못해 법안을 수용했다가, 대주교로서 교회를 배신하는 행위라고 생각되어 1166년 클래런던 조례를 거부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성 토마스 베켓은 프랑스로 축출되었다.

성 토마스 베켓은 이 사실을 교황에게 상소하였지만 헨리 2세와 반목하기를 원치 않았던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은 그를 지원하지 않았다. 이처럼 헨리 2세와 성 토마스 베켓이 반목하고 있을 때, 성 토마스 베켓은 교황의 제안에 따라 프랑스 퐁티니(Pontigny)의 시토회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1166년 헨리 2세가 자신의 영향권 내에 있는 지역에서 모든 시토회 회원들을 추방하겠다고 위협할 때, 성 토마스 베켓은 상스(Sens) 교외의 성 콜룸바(Columba) 수도원으로 가서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보호를 받았다. 루이 7세의 노력에 의해 헨리 2세와 성 토마스 베켓은 평화 협정을 맺었고, 비로소 그는 잉글랜드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정치적인 사건 때문에 그는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무참히 살해당하였다. 1170년 전후 베켓은 종교재판관을 맡아서 재판을 진행했는데, 이 때 헨리 2세가 원하는 수준보다 온건하게 죄인들을 처벌해서 심기를 건드렸다. 이에 헨리 2세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인지는 직접 명령을 내리거나 아니면 부하들의 '과잉 충성'인지는 불분명하다. 일단 당대 기록에 따르면 헨리 2세가 베켓에게 화가 난 나머지, 부하들 앞에서 "내가 이 궁정에서 (너희들을) 그렇게 먹여주고 승진시켜줬건만, 저 비천한 성직자에게 멸시를 당하는 주군을 보면서도 구출할 생각도 안하는 비참한 밥벌레와 배신자밖에 없구나!"라고 고함을 쳤는데, 이를 지나치게 고지식하게 받아들인 측근의 기사 네 사람이 대성당 안에 매복했다가 베켓이 나타나자 난자해서 죽였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시기 헨리 2세는 그동안 굴복시켰던 웨일스의 소왕들과도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헨리 2세는 웨일스를 대표하는 귀네드의 오와인과 데헤이바쓰의 리스 아프 그리피드에게 옥스퍼드셔의 우드스톡에 모여 자신에게 정식으로 신하의 예를 다할 것을 요구했다. 오와인은 몇 해 전의 평화협정 때, 헨리 2세를 더 높은 왕으로 인정한 바 있으나 이번 요구는 분명히 의미가 달랐다.

이를 수용하는 것은 웨일스 왕들에게 공식적으로 잉글랜드의 속국이 되는 것과 다름없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헨리 2세의 기대와 달리 웨일스 왕들은 재빨리 거부 의사를 밝히며 헨리 2세에 대항하는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헨리 2세의 무리한 요구가 그에 대항하는 범(汎)웨일스 동맹을 출범시킨 것이다.

이듬해인 1164년 말 오와인과 그리피드를 비롯한 웨일스의 대부분의 군주들은 헨리 2세에 대항해 하나로 힘을 합쳤다. 헨리 2세는 신하의 예를 갖추기는커녕 반란 조짐을 보이는 웨일스를 진압하기 위해 오스웨스트리에 대군을 집결시켜 1165년 루들란으로 진격했다. 이를 방어하는 웨일스군은 실로 웨일스 왕국의 총집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오와인과 동생 카두알라드르가 이끄는 귀네드는 물론 그리피드의 데헤이바쓰, 오와인 커베일리오그와 요르웰스 고흐가 이끄는 포위스까지 헨리 2세에 대항하기 위해 전력을 총동원했다.

범 웨일스 동맹과 맞닥뜨린 헨리 2세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웨일스 군대는 내부 배신의 걱정 없이 힘을 하나로 합칠 수 있었고, 웨일스의 지형과 지리에 익숙했던 웨일스 군대는 적재적소의 매복과 기습으로 헨리 2세의 군대를 철저히 괴롭혔다. 여기에 악천후까지 겹치자 잉글랜드 군대의 사기는 바닥을 쳤고, 결국 헨리 2세는 후퇴를 지시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렸다.

군사 원정의 대실패로 격분한 헨리 2세는 잉글랜드로 돌아가자 데리고 있던 웨일스인 포로들을 직접 불구로 만들어버리는 잔인함과 무자비함을 보였다. 반면, 범 웨일스 동맹은 헨리 2세의 후퇴로 더욱 기세등등했다. 오와인은 바싱웨르크 성을 공격해 박살냈고 파괴된 성은 그 후 수도원이 되었다. 리스 아프 그리피드도 카르디간과 킬게란의 노르만-잉글랜드 영지를 유린했다.

하지만 범 웨일스 동맹의 생명력은 길지 않았다. 1166년 이전부터 내부 분열이 극심했던 포위스에서 다시 집안싸움이 벌어져 요르웰스 고흐가 추방당한 것이다. 게다가 1167년 웨일스 동맹의 중추 역할을 해오던 오와인과 리스가 웨일스 중부에서 세력을 키우던 오와인 커베일리오그를 견제해 그를 추방시키고 그의 왕국을 산산조각냈다. 웨일스 동맹에게 배신당한 오와인 커베일리오그는 잉글랜드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가 잉글랜드와 편을 맺음으로써 범 웨일스 동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웨일스 소왕국에 대한 문제를 해결한 후 1169년 헨리는 아일랜드의 라긴 왕국의 디아마트의 요청으로 아일랜드에 군대를 파견한다. 아일랜드에 당도한 잉글랜드 군대는 전 아일랜드를 급속히 잠식했다. 코나흐타는 갑자기 나타난 적과 1169년부터 6년 동안 혈투를 벌였다. 다스부운의 경우 왕인 디아마트 막 카르하는 1171년 아일랜드에 상륙한 잉글랜드의 헨리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평화를 요구하면서 서쪽 절반은 건져서 반독립적 지위를 누렸다. 미데 왕국의 경우 1172년에 멸망하고, 잉글랜드의 헨리 2세는 아일랜드 영지의 내부 영지로서 미스 영지를 설치했다.이와 같은 상황에서 승세가 전쟁에 능한 잉글랜드에 기울어지면서 코나흐타의 왕인 루어리는 결국 항복하고 1175년 헨리 2세와 ‘윈저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1177년 더블린을 중심으로 한 아일랜드 영지를 만들어 이후 잉글랜드의 의한 강점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하지만 외정에 물두한 나머지 처자식들과 사이가 소원했다. 또한 9살 나이 많은 아내에게 염증과 호색함으로 여러 정부들을 두어 사생아들을 많이 봤다. 오죽하면 신하중 한 명이 그가 적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해 유려할 정도였다. 아일랜드를 침공 와중인 1170년 헨리 2세는 적자들 중 살아남은 아들 네명에게 차례대로 자기 소유의 영지를 분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차남이자 사실상 장자였던 헨리공동왕으로 삼아 자신의 사후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앙주를 상속하게 는데 이것이 그의 말년을 비참하게 만든 씨앗으로 작용되었다.

공동왕이기는했지만 아버지 헨리와 달리 무늬만 왕이었지, 실질적인 권한은 여전히 아버지에게 있었으며, 헨리에게 주어진 권한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차라리 고유한 영지를 갖고 있던 동생 리처드가, 영지에 한해서는, 더 자신만의 일을 할 권한이 많았다. 1172년에 어머니의 영지인 아키텐 공작령을 미리 상속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그에게 위안거리는 마상창시합이었는데 헨리는 이를 위해서라면 몸도 돈도 마음까지도 아끼지 않았다. 그를 항상 따르던 기사단장 윌리엄 마셜과 함께 프랑스 전역을 종횡무진으로 다니며 각종 마상창시합을 후원하고, 대회에 참가하였다. 특히 1179년 11월에는 랭스에서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대관식을 축하하는 마상창시합이 라니쉬르마른에서 열리자 500여 명의 수행 인원을 데리고 참가하여 우승을 차지했다.

문제는 마상창시합 참가에는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었고, 헨리의 큰 씀씀이까지 보태져 하룻밤 만에 200파운드씩 지출하는 일까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씀씀이는 헨리의 재정을 갉아 먹었고, 빈약한 재정에 시달리게 된다. 게다가 부왕 헨리 2세는 정사에만 매달려 자녀들을 소홀히 했고 그나마 보이는 관심은 막내 에게만 집중되었다. 불안한 헨리의 심리적 갈등에 프랑스 왕인 필리프 2세의 부추김까지 더해져 결국 헨리는 1173년 아버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어머니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동생 제프리, 리처드, 스코틀랜드의 사자왕 윌리엄 1세와 헨리 2세에게 불만을 품은 여러 영주들까지 반란에 참여한다.

반란의 규모는 순식간에 불어났고, 헨리 2세의 패배는 거의 확정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영주들은 헨리 2세를 확고히 지지했고, 이를 바탕으로 헨리 2세는 반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스코틀랜드의 왕을 포로로 잡고 프랑스의 반란도 진압하기에 이른다. 결국 헨리를 비롯한 패배한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충성맹세를 해야 했으며 영지 중 일부는 막내 존에게 넘겨줘야 했다. 그래도 무늬만 왕이었던 아들이 불쌍했는지 헨리 2세는 헨리에게 지불할 연금을 대폭 늘려준다. 이로써 헨리는 재정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돈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분, 즉 왕으로서 더 많은 권한을 바라던 헨리는 결국 1183년 재차 아버지 헨리 2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은 왕으로서의 권한 확대 및 비옥한 아키텐 지역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반란은 부왕 헨리 2세와 삼남 리처드 VS 청년왕 헨리, 사남 제프리 2세의 구도로 이어졌다. 하지만 반란 와중인 1183년 6월 헨리는 이질에 걸렸고, 이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하지만 남은 두 아들은 헨리 2세에게 있어서 여전히 불안요소였다. 특히 프랑스 국왕인 필리프 2세는 이제 죽은 청년왕 헨리 대신 살아남은 두 아들과 계속 접촉해 앙주 제국의 분열을 지속적으로 획책하였다. 헨리 2세는 슬하에서 양육했던 리처드의 약혼녀인 프랑스 공주 아델과 막내 존의 결혼에 대해 상위 주군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서 동의를 받았고, 프랑스의 플랜태저넷령에 대해 충성 서약을 하는 것으로 아들들에게 상속지와 상속 권한을 꽉 쥐고 있으면서 상속에 대해 새로운 결정을 공포했다.
(1) 리처드는 아키텐을 포기하고 청년왕 헨리의 몫이었던 노르망디, 앙주, 잉글랜드를 상속받을 것.
(2) 아키텐은 막내 존이 양도받을 것.

리처드는 즉시 거세게 반발하여 전쟁을 불사하였고 제프리는 겉으로는 이 결정에 순순히 물러났으나 부왕에게 접근하여 온순한 아들을 가장하고 치열한 물밑 공작을 벌인 끝에, 부왕의 호의를 얻었고 노르망디와 앙주를 자신에게 상속할 것을 심각하게 재고하도록 유인했다. 하지만 뒤에서는 아서 왕 전설을 이용해 브르타뉴를 선동하여 반헨리 2세 감정에 기름을 부었고, 그 자신은 선대 브르타뉴 공작들의 전통을 부분적으로 따르고 브르타뉴인을 기용하는 것으로 브르타뉴인들에게 부왕과의 정치적 분리를 보여주어 확고한 충성심을 얻었다. 이를 통해 지배 권력을 견고히 구축하면서 기존의 제도를 개편하고 위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나머지 브르타뉴인들에게도 복종을 받아내고 마침내 선대 브르타뉴 공작들이 누리지 못했던 권위의 발전을 급격히 이루었다. 또한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의 우정 및 동맹을 두고 형 리처드와 경쟁을 벌였으며 리처드는 약혼녀 아델 공주와의 결혼을 선언하기도 했지만 필리프 2세는 아키텐에서 공포의 존재로 군림하던 그를 외면하고는 죽이 맞았고 상냥한 태도를 갖춘 제프리를 선택했다.

필리프 2세와의 동맹을 질투한 플랑드르 및 베르망두아, 발루아 백작 필리프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에게 프랑스뿐만 아니라 브르타뉴까지 침공할 것을 설득했으나 필리프 2세의 음모로 저지되었다. 제프리는 부왕이 존에게 아키텐 공격 명령을 했을 때 끼어들어 푸아티에를 급습하고 리처드에게 브르타뉴 점거로 보복당하기도 하며 두 형제는 골육상쟁을 벌였다. 가족간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1184년 성탄절에 모후와 10년 만에 재회한 자리에서도 둘은 신경전을 벌였다. 이후 부왕의 명으로 제프리는 드디어 노르망디의 관리로 파견되었다.

이후 리처드가 제프리와 싸우겠다고 대규모 군사를 일으키고 브르타뉴를 침략하기 일보 직전, 신임을 샀던 부왕 헨리 2세가 개입하여 제프리를 편들자 이는 불발한다. 이때 제프리는 부왕에게서 낭트 백작령을 받고 브르타뉴를 완전히 장악하였음을 선언하는 표시로써 브르타뉴 동전을 새로 발행했는데, 카페 가문과 프랑스 왕인 필리프 2세를 상징하는 백합을 동전의 중앙에 새겨 넣는 것으로 그를 향한 우정을 표현하였다. 그 후 파리로 달려가 필리프에게 '대단한 지극정성을 다하며' 끈끈한 우정을 나눴고,

모후 엘레오노르 다키텐을 정치적 볼모로 앞세운 부왕 헨리 2세의 위협에 굴복하여 아키텐 전체를 모후에게 반환하고 분노를 억누르고 있던 형 리처드와 반대로, 제프리는 리처드가 상위 주군 필리프 2세에게 접근할 일말의 길마저 막아버리며 연이어 정치적 성공을 이어나갔다. 반란을 성공적으로 종식시켜 플랑드르 영지 대부분을 집어삼킨 뒤 본격적으로 플랜태저넷 왕가 분열을 꾀하는 필리프 2세에게 제프리는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 재촉을 귀띔하여 부왕과 형을 이간질하였고, 부왕과 형을 대적할 브르타뉴 국경 지대 영주들과 동맹을 다지며 대규모 군사를 모았다. 이처럼 리처드보다 정치적으로 압도적 우위를 점하며 필리프 2세와 다시 부왕 헨리 2세에 대한 반란을 획책하던 중, 1186년 8월 19일 불과 27세의 나이로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이제 남은 불순한 아들은 리처드만이 있었다. 헨리 2세와 리처드의 관계는 먼저 간 청년왕 헨리와 제프리보다도 더 냉랭함을 넘어 거의 외나무다리의 만난 원수와도 같았다. 한때 리처드는 형 청년왕 헨리의 반란 당시 아버지의 편을 들었지만 상술한 약혼녀 및 영지 전봉 문제 등으로 사이가 틀어졌다. 이는 프랑스 국왕인 필리프 2세가 바라던 바였다.

제프리 2세의 급사는 리처드에게 국면을 뒤집을 기회가 찾아오고 거의 30세인 리처드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드디어 동맹을 맺게 되었다. 명운이 다하고 있던 헨리 2세는 가장 총애하는 아들인 막내 존을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아키텐 상속 계획에 박차를 가하며 프랑스 공주 아델과 결혼시키려 했고, 대륙의 플랜태저넷령을 산산조각내어 정복할 야심을 숨긴 필리프 2세는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을 재촉하면서 부자를 이간질하는 가운데 상냥함으로 위장하여 리처드를 구워삶았고, 아키텐의 지배권을 꽉 쥐고 헨리 2세의 후계자 자리에 서고자 한 리처드는 필리프의 술수에 완전히 현혹되면서도 이후 후술할 나바라 공주 베렝겔라와의 약혼에 대해선 철저히 비밀로 부치고 안초 6세 내외에게 신뢰를 주며 제각기 동상이몽을 하고 있었다.

1188년 11월 18일, 항구적 평화를 물색하려는 회담이 교황의 노력으로 열렸지만 헨리 2세가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 리처드를 공식 후계자로 인정하기를 주저하자 그 자리에서 리처드는 무릎을 꿇고 대륙의 모든 플랜태저넷령에 대해 필리프 2세에게 충성 서약을 했다. 이듬해인 1189년, 리처드는 필리프 2세와 협공하여 부왕과 전쟁을 재개하고 전세가 기울어지자 헨리 2세의 봉신들이 배반하여 그들에게 붙었으며 6월에 헨리 2세가 소수의 지지자인 서자 제프리, 윌리엄 마셜, 르노 다마르탱 등과 연합하여 맞서려 했으나 르망에서 대패하고 시농으로 퇴각하였다. 1189년 7월 3일, 리처드와 필리프는 서 있기조차 힘든 헨리 2세를 회담장에 소환하여 3차 십자군 원정을 마친 즉시 아델과의 결혼, 가장 굴욕적인 조건들을 받아냈다. 3일 후 헨리 2세는 서자인 제프리만 남은 상태에서 병사하자 리처드는 대륙의 플랜태저넷령을 모조리 독식하고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였다.
4.1.3. 리처드 1세의 제3차 십자군 원정
아버지 헨리 2세의 왕위를 찬탈한 리처드 1세제3차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면서 이제 필리프 2세와 결별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 둘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던 아델은 헨리 2세의 정부라는 소문이 퍼진지 오래였고, 무엇보다 필리프 2세가 순수하게 도와준 것이 아닌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이익을 위해 부자지간의 다툼을 조장했다는 것을 리처드 또한 모르지 않았다.

1189년 7월 22일, 즉위하기 한 달 전에 필리프 2세와 리처드는 쇼몽 부근에서 회담을 열었는데 필리프 2세는 리처드에게 지조흐와 다른 많은 영토들을 줄 것을 요구했고, 리처드는 거기에 거액의 배상금에 사천 마르크를 얹어주었다. 9월 3일, 리처드가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로 즉위했다. 그는 아버지 헨리 2세를 배반하고, 자신의 편을 든 이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면서 아버지의 편을 든 이복 형제 제프리를 요크 주교로 되는데 추천했다.

리처드 1세가 12월 12일에 노르망디로 건너와, 두 왕이 12월 30일과 이듬해 1월 13일, 두 차례 우정의 맹세를 하고, 4월 1일 베즐레에서 3차 십자군을 위해 회동하기로 했다. 1190년 2월, 리처드 1세는 나바라 왕국 국경 근처까지 영지를 순회했는데, 이때 리처드 1세는 3차 십자군 원정 기간 남프랑스를 비울 동안 전쟁이 다발할 가능성이 농후한, 즉 40년 간 분쟁했던 툴루즈 백작령과 근접한 국경에서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당시 나바라 왕국 국왕 안초 6세의 딸 베렝겔라와의 결혼을 준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필리프 2세와 정면으로 싸우지않으려 했는지 해당 결혼 준비를 비밀로 진행되었다.

이후에도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면서 리처드 1세는 군자금을 마련하며 "구매자만 찾을 수 있다면 런던도 팔아 치울 것이다"라고 농담할 정도로 십자군에 참전할 준비에 대해 열정적으로 임했다. 리처드 1세는 휴 드 퓌제, 기욤 드 롱샴을 잉글랜드 섭정으로 임명하고, 모후 엘레오노르 다키텐을 임시로 다시 푸아티에 백작과 아키텐 공작에 서임했다. 이 잉글랜드 섭정에 전혀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존과 이복 형 요크 주교 제프리에게 자신의 허가없이 3년간 잉글랜드 땅을 밟을 수 없다는 맹세를 요구했다. 또한, 수도를 런던과 푸아티에가 아니라 노르망디의 루앙으로 지명했다.

6월 24일 리처드 1세는 뚜르에 방문하여 순례자의 자루와 지팡이를 받았다. 리처드 1세가 지팡이를 받아 땅을 짚는 순간 지팡이가 부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1190년 7월 2일, 두 왕은 베즐레에서 회동했다. 프랑스 깃발은 황금색 백합들이 흩뿌려진 파란색이었고, 잉글랜드 깃발은 두 마리 금색 사자가 마주보고 서 있는 붉은색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보호할 것을 맹세했다. 또한 프랑스 병력은 2,000명이었고, 잉글랜드 병력은 8,000명이었으나 십자군 원정으로 얻은 수익은 50대 50으로 나누기로 조약을 맺었고, 7월 4일 출정했다.

두 왕은 육로 대신에 해로를 선택하여 필리프 2세는 제노바로 향하고, 리처드 1세는 마르세이유로 가기로 했다. 그들은 리옹까지 동행했고, 갈라지기 직전 리처드 1세의 요구로, 50대 이상인 세탁부를 제외한 모든 여자의 3차 십자군 참여 금지를 약속했다.

8월 1에서 14일 순차적으로 제노바에 도착한 후 병력을 수송할 선단과 물자를 구입했다. 하지만 8월 20일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에게 갤리선 5척을 요구했고, 리처드 1세가 3척을 제안하는 것으로 대신하자 갑자기 화를 내며, 리처드 1세가 주겠다는 모든 것을 거절하면서 두 왕의 불화가 시작되었고, 필리프 1세는 시칠리아 왕국의 메시나로 먼저 떠났다.

8월 24일, 리처드 1세가 포트르 에르콜레에 도착했다. 교황 클레멘스 3세의 사절단이 리처드 1세를 방문하여 교황청에 돈을 헌납할 것을 청했는데 리처드는 이 요구에 욕설을 내밷었다. 9월 23일, 리처드 1세가 메시나에 당도했다. 시칠리아 왕국의 전 왕 굴리엘모 2세의 왕비는 리처드 1세의 여동생 조안이었는데 새로 굴리엘모 2세의 조카 시칠리아 국왕이 된 탕크레드는 조안을 유폐하며 상속분을 돌려주지 않고 있었다. 상륙 후 리처드는 필리프를 만나서 일단은 화해의 모양새를 갖췄다.

이 무렵,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이 베렝겔라를 데려오기 위해 나바라의 수도 팜플로나에 당도했다. 알럼의 말을 빌리자면, 이 모든 일은 필리프 2세가 알지 못하도록 철저히 비밀에 부치기로 했으나 나바라 왕 안초 6세는 대대적인 연회를 열어 서유럽 최고의 부자 신랑 리처드 1세를 사위로 두게 된 기쁨을 보였다.

1190년 9월 28일, 리처드 1세가 유폐에서 풀려나 메시나로 온 여동생 조안과 만났고, 다음날 필리프와 함께 누이 조안을 방문했다. 이에 메시나에서 필리프 2세가 조안과 재혼할 것이란 소문이 퍼졌으나 리처드 1세는 10월 1일, 조안을 멀리 떨어진 라 바냐라 수도원으로 보냈다.

하지만 십자군이 계속 베시나에 주둔하자 메시나인들의 불안과 반발심을 일으켰다. 10월 2일, 리처드 1세는 메시나 교회의 수도사들을 쫓아내고 병사들을 주둔시켰으며, 탕크레드에게는 사절단을 보내 여동생 조안의 상속분과 지참금 반환을 요구했다.

하지만 대규모의 외국 군대와 메시나인들 사이의 갈등이 고조화되자 이 때문에 10월 4일,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가 탕크레드의 사절단, 그리고 메시나의 귀족들과 회담을 열었다. 그 때 메시나인들이 리처드 1세의 부하들의 거처를 공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리처드 1세는 반격에 나섰고, 메시나는 리처드의 군세에 방어하려 했으나 결국 메시나가 함락되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깃발이 계양된 것을 마음에 들지 않은 필리프 2세는 프랑스의 깃발로 바꾸라고 요구했고, 나아가 베즐레 서약을 들먹이고 자신의 몫을 내놓으라고 요구까지 하자 리처드는 그 요구를 받아들여 전리품의 반을 나눠졌다.

리처드 1세는 메시나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 요새를 짓고 "그리스인 킬러"라고 이름을 붙였고,그와중에 필리프의 그리스 출신의 부하 기사가 자신에게 무례한 짓을 한 것에 대해 억류시키면서 관계가 다시 틀어지다가 리처드가 그의 안구 하나를 강제로 적출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후 메시나 귀족들이 필리프 2세가 평화 협정의 당사자가 되어 줄 것을 청하자 1190년 10월 6일, 필리프 2세, 리처드 1세, 탕크레드가 평화 협정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두 왕이 탕크레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인정할 것, 제프리 2세의 아들 아르튀르(아서)를 리처드의 후계자로 정하고 탕크레드의 딸과 약혼시킬 것과 탄크레드가 메시나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리처드 1세에게 조안의 상속분 금 20,000온스와 딸의 지참금 금 20,000온스를 지불했다.

그런데 필리프 2세는 또 리처드 1세에게 베즐레 서약을 근거로 탕크레드로부터 받은 돈의 반을 요구했다. 리처드 1세는 조안의 몫도 챙겨줘야 한다며 그에게 3분의 1을 주었다. 이후 지중해의 악천후로 인해 12월까지 메시나에 머물면서 십자군 내부를 재정비했다.

1191년 리처드는 다시 필리프의 부하 기사인 기욤 드 바흐와 일대일 결투를 하게 되면서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 리처드와 무승부를 할 정도로 무용이 있던 기사였기에 이번엔 필리프 2세가 저자세로 나왔음에도 결국 리처드 1세의 요구에 따라 십자군에서 나가야 했다. 그리고 어머니 엘레오노르와 예비 신부인 베렝겔라가 필리프 2세가 통과했던 알프스를 거쳐 이탈리아의 피사에 돛착해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리처드 1세는 그동안 비밀로 하고 있던 자신의 결혼을 필리프 2세에게 털어놓고 아델을 돌려보내겠다고 밝힌다.

이에 속으로 격분한 필리프 2세는 1191년 2월 말,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이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의 호위를 받아 베렝겔라를 리처드 1세의 새 신부로 데려왔을 때. 탕크레드에게 엘레오노르와 베렝겔라를 결코 메시나에 들이지 말라 경고하고,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를 시켜서 그에게 서신 한 통을 전달했다. 탕크레드는 필리프 2세의 경고를 따라 그들에게 브린디시에 상륙하라고 했다. 또한 리처드에게 서한을 보내 그의 행동 자체가 배신 위라며 비난하며 잉글랜드 군대를 공격할 것이라 협박한다.

이에 3월 5일 탕크레드의 주도하의 회담에서 리처드는 자신의 행위가 배신이 아니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프랑스 내의 봉지를 절반이나 차지하고 있던 앙주 가문을 눈엣가시로 여긴데다가 무엇보다 누이 아델의 명예마저 땅에 떨어질 위기였기에 필리프 2세의 분노는 컸다.

결국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와 귀족들이 두 왕을 중재한 결과,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가 원하는 여성과의 결혼을 허가하는 조약을 받아들여야 했고, 아델의 지참금인 지조흐와 벡쌍은 리처드 1세가 베렝겔라로부터 남성 후계자를 얻으면 그 지역을 후계자에게 넘기고, 얻지 못하면 필리프 2세가 돌려받기로 협약을 체결했다. 또한 리처드 1세는 꺄오흐와 께흐씨에서 필리프 2세의 영지인 대수도원장 관할 두 구역을 제외한 영유권을 얻고,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로부터 이쑤덩, 그하쎄, 오베르뉴의 영유권 그리고 파혼 배상금 10,000마르크를 받아내기로 했다. 아델은 두 왕 모두가 귀국한 후 한 달 이내에 유폐에서 풀려나기로 했다.

리처드 1세는 지금 당장 베렝겔라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시대 결혼은 가문 간의 동맹이자 평화 협정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리처드 1세가 필리프 2세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나바라 왕국과의 손을 잡은 것이었다.

그런데 누가 봐도 지조흐와 벡쌍이 리처드 1세의 차지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는데 정작 리처드 1세와 베렝겔라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이후 3월 30일이 되는 동안 리처드와 필리프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고, 이후 필리프가 먼저 아크레로 출항했다. 그뒤 사순절 기간으로 인해 리처드는 베렝겔라와의 결혼을 미뤄야 했고, 4월 10일 베렝겔라와 누이 조안을 대동한 체로 드디어 아크레를 향해 출항했다.

하지만 그의 함대는 지중해에 폭풍우를 만나 흩어져 표류하게 되었는데 이중 왕비 베렝겔라와 여동생 조안이 탄 배는 키프로스 섬 근처 해안가에서 정체 중이었고, 리처드가 탄 배를 비롯한 대다수의 선단은 리처드의 건강 문제로 인해 로도스에서 10일 간 정박한 상태였다. 그런데 키프로스의 총독인 이사키오스 두카스 콤니노스동로마 제국의 황제 이사키오스 2세에게 반란을 일으킨 상태였고, 몇번이나 동로마의 해군을 격파한 바가 있었다. 그는 그들을 포로로 잡고 재물을 갈취했으나 그러나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아크레로 출항한 리처드 1세가 아내와 누이가 탄 배가 동로마 제국 반란군에게 공격당한 것을 보고 키프로스의 리마솔 해안에 상륙하여, 베렝겔라와 조안을 구출했고, 이사키오스에게 탈취한 재물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지만 이사키오스는 무시했다. 이에 리처드는 키프로스를 공격했다. 이때 예루살렘 국왕이었던 기 드 뤼지냥이 키프로스에 도착하여 리처드 1세에게 가세했는데 공교롭게도 그는 예루살렘 왕국에 오기전 아키텐 공작령의 봉신이었다.

1168년, 기와 그 형제들이 당시 근처를 약탈하고 귀환하고 있던 잉글랜드의 대귀족이자 최강의 세력을 가졌던 솔즈베리 백작 패트릭을 살해하고 그 일행을 납치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이때 포로로 잡혀간 인물 중에는 훗날 잉글랜드의 대귀족이 되는 윌리엄 마셜도 있었다. 게다가 패트릭은 다름아닌 헨리 2세의 왕비이자 가문의 주군이었던 아키텐 여공작 엘레오노르를 호위하고 있었기에 주군이자 왕비의 호위 행렬를 공격한 것 자체가 반역죄가 되었다.

결국 당시 아키텐 공작을 대행하고 있던 사자심왕 리처드 1세는 이 보고를 듣고는 진노하였으며, 당장 기와 그 형제들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프랑스에서 쫓겨난 기는 그의 형 아모리가 있던 예루살렘 왕국으로 건너가 이후 시빌라와 결혼해 1186년보두앵 4세와 의붓아들인 보두앵 5세가 차례대로 죽으면서 아내 시발라와 함께 공동왕으로 즉위했지만 1187하틴에서 뻘짓으로 대패와 함께 살라흐 앗 딘의 포로로 잡혀 있다가 1188년, 석방된 후, 시빌라와 함께 티레로 향하였으나, 이미 그의 무능력함에 실망한 예루살렘 왕국 잔여 세력들에게 외면당하고 1190년 시빌라와 두 딸이 죽으면서 예루살렘 국왕 자리마저 위태롭게 된 상태였다.

연대기엔 리처드가 기에게 동점심을 갖게 되었다고 하지만 평소에 어머니 엘레오노르에 대한 효심이 남달랐던 리처드로서는 기를 동정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그를 내세워 이후 수복될 예루살렘 왕국을 통제할 수단으로 봤다. 사실 보두앵 4세와 그의 누이들은 리처드 1세의 증조부인 풀크 5세의 손자들로 리처드와 보두앵 4세 또한 서로 5촌지간으로 모계족으로 9촌지간이었기에 리처드 1세 또한 예루살렘 왕위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이후 키프로스를 정령한 후 군을 정비한 뒤에 기를 대동한 체 이사키오스의 어린 딸을 볼모로 데리고 다시 출항했다. 1191년 6월 6일, 리처드 1세의 함대가 티레에 도착했다. 필리프 2세와 코라도가 도시 입성을 거부하여 리처드 1세는 티레의 성벽 밖에서 야영해야 했다.

6월 7일, 리처드 1세는 아크레 항해길에 올랐는데, 신원불명의 갤리선 2척을 마주쳤다. 그들은 프랑스 왕의 배라고 주장했으나 이를 의심한 리처드 1세가 그들의 신원을 확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갤리선 선원들이 공격을 시작했고 격전 끝에 리처드 1세가 승리를 거두었다. 이 해전이 바로 아크레 해전이다. 6월 8일, 리처드 1세가 함대를 이끌고 아크레에 당도했고, 그날 십자군은 리처드 1세를 위한 환영 파티를 밤새도록 열었다.

6월 9일부터 필리프 주도 하에 공격이 시작되었고, 리처드는 관전을 하다가 11일에 현지의 풍토병에 걸려 7월 14일 십자군이 치열한 접전 끝에 아크레 성을 점령한 뒤에야 건강이 회복되었다. 이때 필리프 2세 또한 풍토병에 걸렸다.[7]

아크레를 점령하면서 리처드는 무슬림 병사 2700명을 포로로 잡게 되는데 이 포로의 처우에 대해 살라흐 앗 딘과 그의 동생인 알 아딜과 협상을 시작했다. 원래는 성십자가와 포로의 몸값과 그리스도교 포로 1500명을 교환하기로 합의했고 기한은 한 달로 정했다. 이때 리처드 1세는 자신이 보두엥 4세의 5촌 조카이므로 예루셀림 왕국에 대한 상속권이 있다고 주장했다.관련 링크

그런데 이슬람측은 몸값 조달에 어려움을 겪어 기한이 지나도록 저 협의를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회담이 길어지면서 필리프 2세는 리처드가 살라흐 앗 딘 형제와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던 상태였다. 또한 아크레의 십자군 수뇌부 또한 리처드 1세와 기 VS 필리프 2세와 코라도 갈라지고 있었다.

더욱이 아크레를 함락시킬 당시에 십자군에 참전한 신성 로마 제국의 오스티리아 공작인 레오폴트 5세가 잠깐이나마 성벽에 깃발을 올렸는데 두 왕은 이를 오만한 행위로 보았다. 이에 레오폴트 5세의 깃발이 내려지고, 리처드 1세의 부하들이 그의 깃발을 훼손하여 모욕을 주었다. 격분한 레오폴트 5세는 병력을 수습하여 그날 밤 귀국길에 올랐다.

그리고 7월 22일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에게 병을 이유로 프랑스로 돌아가겠다고 통고했다. 7월 26일, 필리프 2세의 충고로 코라도 델 몬페라토가 리처드 1세의 발 밑에 엎드리고 용서를 구했다. 27일, 두 왕은 예루살렘 왕위 계승 문제로 격렬한 언쟁을 벌였다. 그들은 코라도와 기의 주장을 각각 듣고 타협안을 내놓았다. 기의 예루살렘 왕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기가 죽으면 코라도나 코라도의 상속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한 것이다. 또한 티레, 시돈, 베이루트 지역은 코라도가 차지하기로 했다.

그 후 필리프 2세는 병을 이유로 리처드 1세에게 자신을 베즐레 서약에서 풀어달라고 요청했고, 리처드 1세는 갤리선 중 가장 훌륭한 것으로 두 척을 필리프 2세에게 주면서 대륙의 플랜태저넷령을 평화로운 상태로 유지하겠다는 맹세를 요구했고, 필리프 2세는 이에 순순히 응했다.

8월 3일, 필리프 2세가 프랑스 귀환길에 올랐다. 리처드 1세는 그가 떠나자마자 살라흐 앗 딘과 협상을 시작하면서 생각해 둔 바를 행했는데, 협상이 기약업시 지속되자 리처드는 살라흐 앗 딘이 자신을 상대로 일부러 시간을 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코라도를 위협하여 포로들을 빼앗고 8월 20일에 학살하였다. 이 학살은 아크레에서 몇 km 떨어진 언덕에서 일부러 살라흐 앗 딘의 군대가 볼 수 있는 곳에서 진행했다고 한다. 이 참상을 지켜보던 이슬람 군대는 이곳으로 돌격해왔으나 십자군은 이들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

8월 22일부터 25일까지 리처드 1세는 온갖 고생 끝에 부대를 아크레 외곽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행군이 시작되었다. 리처드는 병사들을 위해 행군 속도를 낮췄다가 사흘째가 되어서야 18km로 높였다. 왼쪽에서는 사라센 군대가 그들과 나란히 남하하고 있었다. 살라흐 앗 딘은 걸핏하면 경무장을 한 궁수 부대를 보내어 십자군을 압박해 왔다. 그로 인한 압박감을 덜기 위해 리처드는 보병들을 교대로 위험한 왼쪽과 안전한 오른쪽으로 배치했다.

한동안 사라센군은 육박전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화살을 소나기처럼 쏘아대는 것에 만족했다. 화살은 너무 먼 거리에서 날아와 위력은 없었지만, 십자군의 갑옷과 흉갑에 빽빽이 꽂혀 병사들을 마치 고슴도치처럼 보이게 했다.

서안 해양성 기후의 지역에서 태어나 자란 십자군들은 한낮의 기온은 무려 40도까지 치솟아 무기를 들고 사슬갑옷을 입은 상태에서 갈증과 일사병으로 고생하기 시작했다. 길에는 가시덤불과 잡풀이 무성하고, 독사와 독거미도 요주의 대상이었다. 군사들은 열기로 여러번 정신을 잃었다. 운이 좋으면 배로 옮겨져 회복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하면 쓰러진 자리에서 그대로 죽어야 했다. 다들 참을 수 없는 온갖 불쾌감을 호소했다. 말과 인간의 배설물이 뒤섞여 나는 악취는 도저히 형언할 길이 없었고, 밤마다 끊이지 않는 소음은 참기 힘들었다. 부상당한 자들과 뱀에 물린 자들의 신음뿐 아니라 독거미와 해충을 물리치기 위해 흔들어대는 수천 개의 냄비, 솥, 방패, 투구 소리 때문이었다. 후위를 맡은 군인들의 처지가 가장 심각했다.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은 앞의 주력 부대가 뭉개고 지나간 푸석푸석한 모래와 진흙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리처드는 새벽에 출발하여 정오까지만 행군하고, 하루 행군하면 다음 날은 쉬게 하는 식으로 부하들의 고통을 덜어주려 했다.

1191년 8월 30일, 리처드가 이끄는 프랑크군과 살라흐 앗딘의 정찰대가 맞붙었다. 살라흐 앗 딘이 곳곳에 매복시켜 놓은 병력들이 끈질기게 포위해 공격했지만 리처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썰면서 길을 뚫었다. 그런데 카이사레아 근처에서 당시 후위에 있던 부르고뉴 공작의 프랑스군이 살라흐 앗 딘의 투르크군의 매복에 당했다. 이에 리처드는 프랑스군을 구조하면서 투르크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카이사레아 전투 직후인 9월 5일, 리처드 1세는 살라흐 앗 딘에게 조약을 맺자고 사신을 보낸다. 하지만 조약 내용이 살라흐 앗 딘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는데 "살라흐 앗딘이 이끄는 사라센 군의 전면 철수와 팔레스타인 전역을 프랑크족에게 반환"이었기 때문이다. 협상이 결렬되자 곧바로 양측은 전투를 준비하게 되는데 장소는 인근의 아르수프 근처의 숲이었다.

전투에 돌입한 후 리처드는 십자군을 좌, 중, 우 3갈래로 완벽하게 나뉘며 선두에 선체 직접 지휘해 가며 살라흐 앗 딘의 진형을 향해 돌격해 나아갔다. 이때 리처드는 살라흐 앗 딘을 비롯한 이슬람 군대에게 잊을 수 없는 무용을 보여줬고, 이러한 압도적인 무용하에 본래라면 자신들이 우세할 것이라 생각했던 이슬람 군대는 패배했고, 살라흐 앗 딘을 비롯한 군대 전체에 페닉을 안겨줬다.

하루를 쉰 십자군은 9월 9일 다시 행군을 시작하여 다음 날 정오쯤에는 야파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크레에서 이곳까지의 행군은 대단한 위업이었다. 이 야생마 같은 다국적 부대가 처음으로 한 사람의 지휘자 밑에서 하나로 움직인 것이다. 리처드는 부대를 다독여서 하나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중세 군대에서는 보기 드문 중앙 통제를 어느 정도 달성했다.

리처드는 곧 아스칼론으로 남하했고, 도착 후 리처드는 병사들 사이에서 고된 노동도 마다하지 않으며 아스칼론의 성채 복구에 나섰다.

이후 살라흐 앗 딘이 팔락 알 딘의 상단으로 부터 보급품을 전해받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리처드는 1192년 6월 21일 밤 리처드는 500명의 기사와 1000명의 최정예 보병을 거느리고 23일에 상단을 습격해 막대한 전리품을 얻는다. 이후 승리의 기세를 몰아 아크레 남쪽 60km지점, 현재의 팔레스타인이 위치한 지역까지 내려온 기독교 연합군은 이해 11월 말까지 리처드 왕의 지시 아래 야파의 진지 구축 작업과 일부 요새를 복구하는 것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때 윌리엄 드 프레오라는 기사와 단둘이 매 사냥을 떠났다가 사라센 군의 기습에 포로로 잡힐 뻔한 적도 있었다. 프레오가 그를 아랍어로 왕이라는 뜻인 "말리크"라고 칭하는 모습을 본 아랍 병사들이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고 한다.

아르수프 전투의 승리와 야파의 점령으로 십자군의 눈앞에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 이에 기사들과 병사들은 곧 예루살렘을 탈환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기뻐했지만 리처드의 생각은 좀 달랐다.

예루살렘은 이슬람 세력에 둘러싸인 섬과 같은 도시였고, 그나마 해안가 도시들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해상을 통한 물자의 보급과 병력의 보충이 가능해서 버텨낼 수 있었지만 내륙 도시인 예루살렘을 이런 방법으로 지켜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한 당시 팔레스티나 지역은 이슬람 세력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의 총 병력은 대략 20만 정도로 추산된다. 때문에 총 병력이 35,000명 정도였던 1차 십자군이 성공한 것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슬람 세력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말이다.

문제는 1차 십자군 때의 이슬람 세력은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시는 셀주크 투르크나 파티마 왕조나 아바스 왕조나 맛이 가서 술탄이고 칼리프고 그저 이름뿐이었고 동네 마을 하나까지 영주를 자처하며 서로 자기네끼리 땅따먹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게 어느 정도로 심각했냐면 이슬람 영주가 십자군과 동맹 맺고 옆 동네 이슬람 영주를 공격하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었고, 한번은 이슬람 영주와 동맹 맺은 십자군이 다른 이슬람 영주와 동맹 맺은 십자군과 싸운 일조차 있었다.

때문에 1차 십자군이 안티오키아를 점령할 때도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도, 트리폴리를 점령할 때도 다른 이슬람 영주는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할 뿐이라 하나하나 십자군에게 각개격파당했다. 만약 전 이슬람이 일치단결해서 공격했다면 십자군 국가의 수립은커녕 기껏해야 동로마 제국과 가까운 영토 일부를 수복하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막상 안티오키아 공방전만 해도 가장 가까운 알레포의 대영주인 리드완은 안티오크가 공격받은 것을 보며 박수를 치며 좋아하고 있었고 먼 모술의 대영주인 카르부카가 달려왔을 때는 이미 게임이 끝나가는 상황이었다. 그걸 본 카르부카는 안티오크를 먹어치우려다가 가뜩이나 분열된 에미르들을 더욱 분열시켜 박살이 나고 모술까지 잃어버린다. 각설하고 1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건국된 예루살렘 왕국도 이같은 이슬람 세력의 분열을 이용해 때로는 이슬람 영주들과 동맹 맺고, 때로는 싸우면서 90년의 세월을 버텨낼 수 있었다.

3차 십자군 당시는 1-2차 십자군 때와 사정이 전혀 달랐다. 살라흐 앗 딘이라는 위대한 왕의 등장으로 이슬람 세력은 하나로 통합되었다. 이제 100년 전처럼 이슬람 세력의 분열을 이용해 줄타기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1차 십자군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체스판 너머에 상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설사 리처드가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해도 뒤에 어찌될지는 뻔한 일이었다. 리처드와 십자군 병사들이 유럽으로 돌아가고 나면 물밀듯이 몰려온 이슬람군에 예루살렘을 도로 내주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몇 개월쯤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리처드는 생각한 듯하다. 또 다른 이유로는 마찬가지로 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공성전 때는 어느 영주도 십자군의 뒤를 치지 않았지만, 3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인다면 살라흐 앗 딘이 후방을 공격해 올 것을 염려했다.

그렇기 때문에 리처드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대신 살라흐 앗 딘과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되찾는다면 살라흐 앗 딘이 조약을 어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1192년 봄까지 협상을 했지만 쉽게 살라흐 앗 딘이 예루살렘을 내줄 생각이 없다는 걸 알게 된 리처드는 전략을 바꾼다. 먼저 아스칼론, 가자, 다룸을 점령해 살라흐 앗 딘의 영지인 이집트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후방을 정리했지만 1192년 4월 니자리 아사신에 의해 콘라드가 암살을 당한다.

이때 암살의 배후에 대해 십자군 내부의 인물할 것 없이 용의선상에 올라갔는데 콘라드와 대립 관계였던 리처드 또한 용의선상에 올랐다 하지만 아사신의 지도자인 산의 노인이 서한으로 리처드가 아닌 자신의 단독 범행이라고 하면서 유야무야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예루살렘 왕위는 상파뉴 백작으로 필리프 2세의 친척이지만 리처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앙리에게로 돌아간다. 5월 30알 리처드는 본국으로 전갈을 받게 되었는데 내용은 먼저 귀국한 필리프가 존의 왕위 찬탈을 뒤에서 돕고 있다는 것이었다. 필리프의 선제 공격에 리처드로서 격분했지만 일단 십자군 원정부터 마무리 지어야 했다. 이후 1192년 6월 예루살렘으로 재진격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리처드는 군사력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할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예루살렘으로 전진하는 와중에도 살라흐 앗 딘과 끊임없이 회담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군사력으로 정복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 리처드는 아예 이집트를 공격하기로 생각을 바꾼다. 당시 이슬람 영주들은 살라흐 앗 딘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건 수백 년간의 충성의 결과가 아니라, 살라흐 앗 딘의 그동안 쌓은 군사적 업적과 부유한 이집트의 영주란 사실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약 리처드가 이집트를 공격하는 데 성공한다면 살라흐 앗 딘은 실각할 수밖에 없고 다시 한번 이슬람 세력은 분열할 수 있다. 설사 이렇게 일이 잘 풀리지는 않더라도 이집트를 공격하면 최소한 살라흐 앗 딘을 압박해 협정을 유리하게 이끌어 낼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리처드는 예루살렘 공격에 대해 물 공급이 심각한 문제임을 지적했다. 살라흐 앗 딘이 우물에 독을 풀었으므로 십자군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릴레이식으로 운반해온 물을 말에게 먹여야 한다, 게다가 기병대의 반은 물을 공급받고 있을 때 반만이 근무를 할 수 있다는 것이기에 리처드는 예루살렘 공성전 대신에 이집트 원정을 제의했다.

이에 십자군은 투표를 하자고 했다. 300명의 대배심원이 선정되었고, 그중에서 열 두명이 선발된 후 거기서 다시 세 명이 뽑혔다. 이 세 명의 결정을 최종 결정으로 정하자는 데 다들 동의했다. 세 명 모두 이집트 원정을 선택했다. 프랑스군은 최종 결정에 따르기도 약속해놓고도 즉각 약속을 깨뜨렸다. 예루살렘을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부르고뉴 공은 프랑스인은 아무도 이집트에서 싸우지 않을 것이라고 우회적으로 선언했다. 그러자 리처드는 이집트 원정에 대해 설명했다. 나일강 원정은 살라흐 앗 딘이 예루살렘을 포기하게 함으로써 '순례자들'의 목적을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줄 것이라고 설명했고, 결국 리처드의 의도에 따라 이집트 원정이 개시되었다.

예루살렘 앞에서 십자군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리처드는 베이트누바에서 해안 지역인 아크레까지 물러났다. 살라흐 앗 딘의 첩자들은 리처드가 아크레로 물러난 뒤 체면을 세우기 위해 베이루트 공성전에 나설지도 모르며, 그 다음에는 잉글랜드로 배를 띄울 것이라고 전했다. 살라흐 앗 딘은 여전히 최대의 숙적을 상대로 머리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어디로 나아갈지를 정했다. 아무도 그의 다음 움직임을 예상하지 못했다.

야파에서 아크레까지 엿새 만에 해로로 항해하는 동안 아무런 저항도 만나지 못한 리처드는 사라센인들이 전쟁을 끝낼 준비를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야파에는 수많은 병자 및 부상자와 빈약한 수비대 하나만을 남겨두었다. 그는 알레포와 모슬에서 사라센의 대규모 보충 부대가 도착하여 살라흐 앗 딘이 '긴급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나중까지 알지 못했다.

1192년 7월 27일, 살라흐 앗 딘과 6만 2천여 명의 사라센 군은 야파 요새를 침공한다. 수비대는 리처드에게 전령을 보냈다. 수비대는 이 전투에서 고대 로마식의 거북 대형을 짜서 맹렬하게 저항했지만 사라센 군대가 동원한 망고넬의 투석 공격에 십자군은 모두 성채 안으로 물러나고 이틀 동안을 수성을 했다. 마침내 전황이 불리해졌을 때 예루살렘군들이 살라흐 앗 딘에게 예루살렘이 그리했던 것처럼 자신들도 투항할 수 없겠냐고 하자 살라흐 앗 딘은 그들의 항복을 접수하면서도 그들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요새로 퇴각하고 도시를 포기하라. 지금 무슬림 군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잠시 후 무슬림 군대가 야파 시내로 몰려와 닥치는 대로 약탈을 저지르기 시작했고 수비대 생존자들은 모두 성채에 틀어박혔다. 살라흐 앗 딘은 부대를 수습하여 야파 방위를 위해 성채를 비롯한 주요 거점들을 장악하려 했지만 전리품에 취한 무슬림 군대는 살라흐 앗 딘의 통제를 무시하고 날뛰었다.

새로 선출된 예루살렘의 대주교가 십자군 편의 협상자가 되어 살라흐 앗 딘에게 다음 날인 8월 1일 오후 3시까지 전투 중단을 제의했다. 그때까지 아크레에서 구조대가 오지 않는다면 항복하고, 정전을 허락한 살라흐 앗 딘에게 큰 보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리처드가 그 시간 안에 올 수 없다고 확신한 살라흐 앗 딘은 사라센이 이 제안에 동의했다.

한편 아크레에 있던 리처드 1세는 수비대의 필사적인 구원 요청을 7월 28일에 받았다. 보고를 받은 리처드는 크게 분노하며 "하느님이 살아 계심에 그분의 도움으로 내 할 일을 하고야 말리라."라고 외치며 군대를 소집하여 야파로 달려갔다.

우선 리처드는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 예루살렘 왕 앙리 1세가 이끄는 주력 부대는 템플기사단 및 구호기사단과 함게 내륙을 통해 남쪽으로 갔다. 해로로 출발한 리처드는 상륙 작전을 펼 기습 부대를 선발했다. 하지만 행운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아크레에서 출발한 함대는 카르멜산에서 불어오는 역풍을 맞아 항해 속도가 느려졌고, 작은 돌풍으로 일부 함선은 대열에서 이탈해 버렸다. 그는 8월 1일 새벽까지도 갑판을 초조하게 서성댔고 7척의 배를 이끌고 야파에 도착했다.

살라흐 앗 딘의 병사들은 토요일 아침, 리처드의 갤리선에서 울려퍼지는 나팔 소리에 놀라서 잠에서 깨어났다. 살라흐 앗 딘은 리처드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해안에 군대를 배치하는 한편, 항복한 십자군 수비대에게 성채를 넘겨받아 야파 방어에 쓰려고 했다. 리처드가 도착한 줄 모르던 수비대는 순순히 성채를 넘기려 했다. 그때 살라흐 앗 딘의 부하들 중에서도 인정이 넘치기로 유명한 늙은 영주인 주르디크가 십자군을 지금 보내줬다가 분노한 무슬림 군대가 십자군들을 도륙할 것이니 십자군들을 위해 안전한 퇴로를 마련해주자고 주장함으로 성채를 넘겨받는 일이 늦어졌다.

하지만 무슬림 병사들은 십자군을 위한 퇴로를 마련해주는 일에 매우 불만스러워하며 일을 대충했고 이 때문에 수비대원 49명과 그네들의 49명, 말 49필만이 성채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수비대원들은 해안가로 접근한 리처드의 범선 35척과 갤리선 15척을 발견했다.

마음이 바뀐 수비대원들은 다시 성벽에 틀어박히고 바하 앗 딘에게 자신들의 항복을 철회한다는 매우 정중한 문구를 보낸 다음에 무슬림 병사들을 급습해 도시 밖으로 몰아냈다. 열이 뻗칠대로 뻗친 투르크군과 살라흐 앗 딘은 야파 시내로 몰려가서 수비대를 다시 성채로 몰아넣고 성벽을 맹폭하기 시작했고 성내에 진입까지 성공한다. 성 내는 약탈을 시작한 무슬림 병사들과 성내에 위치한 공성 탑에 모여서 죽음을 기다리는 소수의 병사들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헌데 간신히 나타났던 리처드의 범선은 이상하게 접근을 안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무슬림의 함성 소리와 휘날리는 살라흐 앗 딘의 깃발 때문에 구조 요청을 듣지 못했고, 앙리의 주력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토의하고 있었던 것. 기다리던 자들 입장에서는 속터지겠지만, 이는 리처드가 매우 신중하고 냉정한 지휘관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절체절명의 순간, 수비대가 다시 항복을 구걸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사제 한 명이 바다에 뛰어들어 리처드의 범선까지 헤엄쳐 갔다. 잉글랜드군이 그를 구조하여 갑판에 올리자 그는 리처드에게 부르짖었다.

리처드는 구조 요청을 듣자마자 전속력으로 야파 요새로 돌진한다. 리처드는 배가 정박하기도 전에 아무런 갑주도 차지 않은 채 허벅지까지 잠기는 바다로 뛰어들더니 물을 헤치며 육지로 올라섰다. 보병 부대와 함께 육지로 상륙한 기사는 80명가량이었다. 그들은 제노바 궁수들의 지원을 받아 기슭에 거점을 확보하고 신속하게 기슭을 올라가 도시로 향했다. 그 다음 리처드는 성으로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리처드는 석궁과 함께 자신의 유명한 덴마크제 도끼를 휘둘러 닥치는 대로 약탈에 정신이 팔려 있던 무슬림 병사들을 베어내었다. 함락이 거의 확실시되어 방심을 하고 있던 무슬림 병사들은 난데없는 기습공격에 혼비백산하여 순식간에 와해되어 야파 해안을 잉글랜드군에게 내주었다. 그리고 리처드 1세는 수많은 무슬림 군 사이를 뚫고 지나가 소수의 수비대가 위치한 성전 기사단 건물 내부로 도달하는데 성공하고 뒤이어 도착한 십자군이 성벽 사수에도 성공하며 “지원군이 도착했다.”라는 신호인 잉글랜드 깃발을 꽂게 된다.

야파에서의 첫 번째 교전이 끝난 후, 살라흐 앗 딘이 보낸 의전관 아부 바크르에게 리처드는 야파 전투 때의 일 거론하며 웃으며 비꼬았다.
"당신들의 그 전능하신 술탄은 어째서 내 모습만 보고도 도망치신 거요? 맙소사. 나는 갑옷은 고사하고 싸울 준비도 없이 선박용 슬리퍼만 신고 있었는데 말이오? 대체 살라흐 앗 딘은 왜 도망을 갔던 것이오?"

이렇게 양편 모두 격전을 치른 뒤 잠시 휴식기를 가져야 했다. 어쩔 수 없이 평화 협성이 재개되었다. 문제는 아스칼론이었다. 살라흐 앗 딘은 그곳을 돌려주지 않으면 화평을 하지 않겠다고 했고, 리처드는 그곳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완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리처드는 앙리 1세의 주력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협상을 질질 끌었다. 앙리가 도착하자 십자군은 이제 2천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적지 않은 숫자였지만 살라흐 앗 딘이 전력을 다해 야파를 공격한다면 안심할 수 없었다. 불리함을 타개하기 위해 리처드는 야파의 성벽을 최대한 빨리 수리하게 했다. 리처드와 앙리 왕도 사흘 밤낮으로 성벽에서 일했다.

하지만 야파에서 제대로 한 방 먹은 살라흐 앗 딘의 첫 움직임은 전면전이 아니었다. 리처드와 그의 부하들이 성 밖에서 숙영하다는 소식을 들은 살라흐 앗 딘은 8월 5일 새벽에 리처드가 점령한 야파를 향해 7천의 병력을 동원, 기습 공격을 시도했다. 이때 야파에서의 십자군의 병력은 기사 54명, 기마 기사 15명, 보병 2천 명에 불과했으며 무너진 성벽을 마저 보수하지 못해, 그곳에 목책을 치고 진을 치며 방어를 할 정도로 열세였다.

그런데 하늘의 농간인지 적시에 리처드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즉시 부하들에게 기습에 대비할 것을 지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습 공격이 들통나자 분노한 살라흐 앗 딘은 즉시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전면전을 지시했다. 당연히 잘 자던 십자군의 진영은 난리가 났다. 처음에는 자기 말을 제대로 찾은 기사가 열 명뿐이었다. 하지만 곧 보병대는 대오를 갖추었고, 전투에 앞서 리처드가 연설을 하자 사기는 더욱 올라갔다.

십자군의 사기가 매우 드높아지자 사라센군은 공격을 망설였고, 살라흐 앗 딘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이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자 격분했다. 그는 병사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용기를 복돋우려고 했다. 하지만 사라센군이 망설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리처드가 아주 탁월하게 군사를 배치했던 것이다. 맨 앞줄에는 방패로 몸을 가리고 무릎을 꿇은 병사들이 단창 자루를 땅에 세운 채 창날을 위로 치켜세우고 있었다. 이 밀집대형의 뒤로는 궁수들이 있었다. 궁수들은 무릎을 꿇은 병사들의 머리 위로 활을 잡고 있었다. 한 쌍으로 조를 이룬 궁수들은, 한 사람이 화살을 먹이고 한 사람이 화살을 쏘는 식으로 끊임없이 화살을 쏘아댈 수 있었다. 십자군은 수적으로는 크게 열세였지만 이 수비진으로 사라센 기병들의 공격을 물리쳤다.

리처드는 적의 공격이 약해질 때마다 보병의 엄호를 받던 15기의 기사들을 이끌고 공격에 나섰다. 투르크군이 결국 퇴각을 결정하고 후퇴하자 리처드 1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15명의 기마 기사와 함께 추격, 적을 썰기 시작했다. 게다가 리처드는 사라센 군을 향해 자신과 일대일 결투를 할 자는 앞으로 나오라고 외쳤다. 자신의 부하들이 아무도 나서지 못하자 살라흐 앗 딘은 분노에 차서 몸을 떨었다. 결국 살라흐 앗 딘은 군대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날의 전투로 십자군 측은 단 두 명만이 사망했던 반면에, 살라흐 앗 딘군은 700명 이상이 사망했고 1500+2마리의 말을 잃었다.

살라흐 앗 딘은 야파 전투의 패배로 리처드와 십자군을 쉽게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인정했다. 리처드 입장에서는 필리프 2세의 잉글랜드령 침공으로 인해 한시라도 빨리 유럽에 돌아가고 싶었다. 리처드는 이벨린의 발리앙을 살라흐 앗 딘에게 보내서 "예루살렘을 포기하겠다. 그럼에도 만약 강화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나와 십자군은 여기에 영원히 머무르는 수밖에 없다."라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통첩을 보냈다.

살라흐 앗 딘도 계속 십자군과 리처드가 이곳에 머무는 것이 대단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비록 이슬람 세력을 통합했지만 수백 년간 군웅할거나 다름없던 이슬람 세력은 아직 단단히 통합되었다고는 볼 수 없었고, 이미 54세인 자신이 죽은 뒤 후계자들이 영주들의 병력을 계속 동원해 십자군과 싸우는 것이 새롭게 일으킨 왕조에 크게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것은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살라흐 앗 딘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로써 리처드는 살라흐 앗 딘과의 강화 회담을 진행하고 1192년 9월 2일 3년 8개월간의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십자군은 아스칼론을 되돌려주고 이슬람 세력의 예루살렘 지배를 인정했다. 대신 살라흐 앗 딘 역시 해안가 기독교 도시들을 침공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으며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기독교도들의 안전을 약속했다. 또한 살라흐 앗 딘은 유럽에서 온 십자군들의 성지 순례를 쾌히 인정했으며, 성묘 교회에서 마지막 미사를 보는 것도 흔쾌히 승낙했고, 양쪽 다 무사히 포로들을 반환했다.

리처드는 다른 십자군 병사들이 성지 순례를 하는 도중에도 끝내 성지에 들어가지 않았다. 리처드는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이슬람과의 충돌에 대비해 순례자들을 4무리로 나누고 그 지휘자들에게 어떤 도발 행위에도 대응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 살라흐 앗 딘 또한 기독교 순례자들에 대한 도발 행위를 엄금했으며, 살라흐 앗 딘의 동생 알 아딜과 그의 부하들이 감시의 눈을 번득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서로 윈윈이라서 조약을 맺었는데 재전을 치른다면 기껏 조약을 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충돌 없이 순례는 끝났다.

이 조약은 실제로 효과가 있어서 이후 26년간이나 지켜지게 된다. 리처드는 10월 9일 아크레에서 배를 타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리처드가 떠나고 5개월 뒤에 살라흐 앗 딘은 병으로 숨을 거둔다.

리처드 지휘하의 십자군은 이슬람 군대에 대해 심각할 정도의 교환비를 보일 뿐만 아니라 2차 십자군을 괴멸시킨 주 전법인 유인 전술이나 기만 전술이 거의 통하지 않아 살라흐 앗 딘의 고민이 컸고, 심지어 예루살렘으로 진군해오는 리처드를 막기에는 병력이 집결하는 시간이 부족했을 정도로 그의 십자군이 매우 위협적이고 강력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결국 리처드 역시 프랑스군의 영국령 침공이나 존의 반란을 알면서도 무리하게 예루살렘으로 진격 중이었고, 그러다가 영국의 상황이 점점 위험해지니 더이상 전쟁을 끌고 갈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협상으로 마무리하는 게 양측으로서는 윈윈이었던 셈이다.

리처드는 십자군 원정에서 귀향길에 살라흐 앗 딘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리처드의 부하들이 조금만 더 성지에 머물렀다면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거라고 아쉬워하자, 리처드는 "만약 우리가 계속 남아 있었다면 살라흐 앗 딘은 결코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부하들을 달래야 했다.
4.1.4. 섭정기의 잉글랜드
한편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을 떠난 후 잉글랜드 왕국의 수도는 런던에서 노르망디의 루앙이 되었지만 리처드가 섭정으로 임명한 더럼의 주교이자 수석 판사인 휴 드 퓌제, 대법관으로 영어로 윌리엄 롱챔프로 불리는 엘리 주교인 기욤 드 롱샴이 섭정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또한 루앙에 궁정을 두었다고 했지만 잉글랜드 왕국의 중심지는 여전히 런던이었다. 런던의 경우 앵글로 섹슨 시대때의 게르만족의 대의제인 팅스에서 갈라져 나온 인민총회 격인 폴크무트(folkmoot)와 행정관청격인 후스팅(husting)이 여전히 존치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1130년대 헨리 1세가 런던 시민들에게 부여한 특권과 함께 상공업의 발달과 헨리 2세와 러처드를 비롯한 그의 아들들 간 왕위 분쟁기인 1189년에서 1191년 사이에 런던에도 코뮌이 성립될 기틀이 마련되었다. 즉 리처드 1세는 외부의 위험을 제외한 내부에서 왕권을 위협할 요소들을 배제한 체 안전하게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섭정중 한 명이었던 윌리엄 롱챔프가 문제였다. 그는 능력이 있던 인물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오만한데다가 독선적이었고, 잉글랜드계가 아닌 노르만계라 잉글랜드인들에게 증오를 한몸에 받게 되었다. 이 틈을 타 이 기윰과 런던 시민들의 관계를 악화시키려고 했다. 이에 기윰은 런던 탑을 더 확장하여 안에서 농성하려고 했다. 이후 리처드의 모후인 엘레오노르와 리처드의 왕비인 베렝겔라가 차례대로 도착했다. 베렝겔라는 그대로 루앙의 궁정에 체류했지만 엘레오노르는 갈등을 조젏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결국 존과 결탁한 기윰의 반대파들이 기윰을 내쫓고 그 자리에 루앙의 주교 쿠탕스의 월터로 대체하는데 성공했고, 기윰은 프랑스로 추방되었다.1191년 10월 이들은 길드 홀에 모여 존을 리처드의 사망 시 다음 후계자로 할 것 정했고, 한 편으로 런던에 코뮌을 형성하는 것과 함께 시장직의 신설하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같은 시기 메시나에서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채결한 조약에서 존이 아닌 조카 아서가 후계자가 되기로 결정되었지만 엘레오노르는 프랑스인의 정체성이 강한 손자보다 그래도 막내 아들인 존을 우선시했다.

이후 잉글랜드는 그다지 별일 없이 굴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런던의 경우 코뮌과 관련되어 3개월 분열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디바이지스의 리처드는 코뮌에 대해 '인민의 악성 종양, 왕국에는 충격, 성직자에겐 경멸의 대상'이라 할 정도로 런던 시민들이 참여권과 동의권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더욱이 코뮌 스스로 해산하지 않을 것이 뻔했으며 이미 코뮌에서 요구한 조건들도 수용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1191년 12월 리처드와 함께 십자군 원정에 참전했던 프랑스 왕국의 국왕인 필리프 2세가 자신의 군대와 함께 단독으로 프랑스로 돌아왔다. 1192년 1월 20일, 필리프 2세는 1191년 3월 메시나에서의 협약서를, 잉글랜드 왕이 지조흐와 벡쌍을 프랑스 왕에게 넘기겠다는 내용으로 위조하여 노르망디로 가져갔다. 노르망디의 세네샬은 이를 의심하여 영유권을 넘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문서는 침공을 위한 법적인 명분이었고 수년에 걸쳐 이루어질 대륙내 앙주 제국 멸망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192년 1월, 필리프 2세는 노르망디의 루앙에 유폐된 누나 아델을 풀어줄 것을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에게 재차 요구했으나 아들 리처드 1세의 승인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즉시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에게 대항할 동맹자들을 모았다. 존, 첫 왕비 에노의 이사벨의 부친이자 플랑드르와 에노 백작 보두앵, 툴루즈 백작 레몽 5세, 앙굴렘 백작 임마흐, 불로뉴 백작 르노 드 다마르탱등이 가세했고, 지조흐와 벡쌍의 영주들에게도 압박을 가하여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길링엄의 말을 빌리자면 중립적이던 영주들도 어느 마차던 뛰어들지 않으면 깔려 죽을 판국이었다.

또한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남프랑스 봉신들의 충성심을 뒤흔들었다. 아키텐에서는 조프루아 드 랑송을 중심으로 공공연한 반역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스코뉴에서는 툴루즈의 지원으로 반란이 터졌으나, 이곳의 세네샬이 리처드 1세의 왕비 베렝겔라의 오빠이자 훗날의 나바라 왕위 계승자인 안초의 도움을 받아 진압했다.

이와중에 존은 형의 후계자 자리로는 만족하지 않았는지 필리프 2세와 손을 잡는 미친짓을 저지른다. 필리프 2세는 존에게 잉글랜드 왕위를 찬탈하라고 충동질했고, 존이 아키텐의 영지 일부와 센 강 동쪽 부근의 땅 대부분, 지조흐와 벡쌍을 내놓고 아델과 결혼한다면 그 대가로 대륙의 플랜태저넷령 전체를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존은 모든 조건을 수락하고, 대륙의 플랜태저넷령에 대해 충성 서약을 했다. 이러한 사실은 태후인 엘레오노르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불명이나 팔레스타인에 있던 리처드에게 필리프가 프랑스의 앙주 왕실령을 공격하고 있으며 존이 필리프와 손을 잡았다는 전갈을 보내졌다.

야파 전투 이후 리처드는 살라흐 앗 딘과 정전 협상을 한 후 10월 9일에서야 팔레스타인을 떠났다. . 리처드 1세는 크리스마스에 맞춰 귀국할 것이란 서신을 잉글랜드로 보냈으나 함대가 지중해에서 폭풍우를 만나 불시착을 거듭하였다. 그러다 갑자기 소식이 끊겼다.

리처드 1세는 지중해에서 난항을 거듭하다 동로마 제국령 아퀼레이아 부근에 배가 난파되었다.목숨을 부지한 리처드와 그의 부하들은 반란을 일으켰다지만 무단으로 키프로스를 점령하다가 기 드 뤼지냥에게 넘겨줬기에 이사키오스 2세의 눈 밖에 난 상태였기에 순례자로 위장한 후 비밀리에 유럽 대륙을 횡단해 매형인 하인리히 사자공의 원조를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3차 십자군 원정 중 아크레 함락 당시 모욕을 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의 영지인 빈에서 그에게 붙잡혀 부하들은 고문을 받았고 리처드는 뒤른슈타인 성으로 이송되어 검을 든 병사에게 밤낮으로 감시받는 신세에 처했다.

1192년 12월, 레오폴드 5세의 상위 주군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 리처드의 신변에 대한 서신을 보냈고 루앙 대주교 쿠탕스의 월터가 프랑스 왕궁에 심어놓은 첩자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교황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만을 파문하였다.

1193년 2월, 리처드는 하인리히 6세에게 호송되어 트리펠스 성에 수감되었다. 호송되는 도중에 리처드는 로버츠브리지의 대수도원장들을 잠시 만날 수 있었고, 주교들은 리처드의 표정이 밝았으며 황제에게 앙갚음을 하기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고 전했다. 리처드는 처음에 하인리히 6세에게 왕의 권위에 걸맞은 예우를 받았지만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사주를 받은 보베 주교의 선동에 의해 얼마 동안 형편없는 대우를 받게 되었으며 '말이나 망아지도 옴짝달싹 못할 무거운 쇳덩이를 몸에 달았다.'

3월 23일, 리처드는 슈파이어에서 열린 신성 로마 제국 법정에 기소되었다. 죄목은 시칠리아를 점거하려 한 무력 행위, 키프로스 정복, 코라도 암살 배후였다. 리처드는 "나는 신 바로 아래의 계급에서 태어났다"라고 외치고 하인리히 6세에게 경의를 거부했다. 스스로를 열렬히 변호하여 법정을 감동시켰고 결투 재판을 제의하였으나 모두 몸을 사렸다. 또한 법정에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는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는 여론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도록 유도하였지만 하인리히 6세는 잉글랜드 왕국의 봉신화와 함께 이탈리아 남부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한 군자금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리처드의 보석금으로 십 오만 마르크를 선고하였고, 이는 잉글랜드 연간 소득의 2-3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이 자리에는 리처드의 오랜 충복이자 십자군 군대를 인도하여 복귀시키는 임무를 맡았던 솔즈베리 주교 허버트 월터가 참석했는데 리처드는 그의 어눌한 화술에 가려진 유능함과 충성심을 꿰뚫어보고 그가 잉글랜드로 귀환한 즉각 모후의 권한으로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게 하였다.

한편 존은 용병 부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하여 섭정위원회에게 복종을 요구하였고 형에 대해 여태 퍼뜨렸던 온갖 흉측한 소문들을 다시 일일이 열거하며 설득했다. 심지어 형이 이미 죽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윌리엄 마셜과 필리프 2세의 궁정에 심어둔 첩자 덕에 리처드 1세의 소식을 알게 된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이 아들 존의 계획을 결사적으로 막았고, 런던의 섭정위원회는 존을 지지하지 않았다. 이에 존은 끌고온 용병부대를 앞세워 내전을 일으켰고, 또한 이에 대한 호응인지 필리프 2세가 직접 출군하여 노르망디를 침공하고 리처드의 아키텐 봉신들의 충성심을 휩쓸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로 추방되었던 잉글랜드 대법관 윌리엄 롱챔프가 신성 로마 제국으로 달려가 하인리히 6세와의 협정을 도왔던 덕에 리처드는 독방 감금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트리펠스 성에서 하게나우로 이송되어 이때부터 귀빈에 가까운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 동안 신성 로마 제국의 많은 수뇌부와 친분을 쌓으며 동맹을 다졌고 하인리히 6세의 진짜 목적이 필리프 2세를 복종시키고 동맹을 맺는 것임을 간파하였다. 또 동생의 반란 소식을 듣고도 개의치 않는 등 밝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보석금을 모으는 시간은 길었고 결국 리처드는 모후에게 신성 로마 제국으로 와주기를 청했다. 모후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의 아들과 약혼이 결정된 제프리 2세 딸 엘레오노르와 키프로스 군주 이사키오스의 딸을 데리고, 잉글랜드를 쥐어짜서 모은 십만 마르크를 가져왔다. 모자는 석방일에 교섭을 하였지만 필리프 2세와 존의 뒷공작 때문에 날짜는 뒤로 미루어졌다. 이에 사자공 하인리히를 비롯해 그간 리처드가 동맹을 다졌던 독일 공작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하인리히 6세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2월 4일, 리처드는 자유를 되찾았다.
4.1.5. 리처드 1세의 귀환과 프랑스 원정
1194년 2월 4일 리처드 1세신성 로마 제국에서 풀려났다는 소식에 필리프 2세는 급히 에게 서신을 보냈다.
'자신의 몸을 돌보도록 하시오. 사탄이 풀려났소.'

이에 존은 곧장 파리로 도주했고,필리프 2세는 존으로부터 노르망디와 뚜헨느의 영지 일부를 더 뜯어내고, 노르망디 공략에 박차를 가하여 전략적 요충지인 뇌브흑, 에브회, 보드회이를 점령했다. 마침내 루앙에서 10마일 떨어진 뽕드라흑슈로에 이르렀고, 협력의 대가로 존에게 에브회를 주었다.

1194년 3월 13일 잉글랜드로 귀환한 리처드 1세는 존의 지지자들을 숙청하고 두 번째 대관식을 치렀다. 이때 존과 함께 자신의 섭정 중 한 명이었던 기윰 드 롱상을 프랑스로 추방시킨 런던 코뮌에 아무런 보복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데 이는 시칠리아에 머물 당시 재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리처드 1세는 군자금을 모으며 프랑스 출정을 선포했다. 5월 12일, 리처드 1세가 300척의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노르망디에 상륙한 후, 훗날의 나바라 왕 안초 7세가 이끄는 석궁병 부대와 합세했다.

존이 바로 필리프 2세를 배반하고 형의 발치에 엎드려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도 리처드 1세를 달랬기에 리처드 1세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사악한 동료들의 꼬임에 넘어간 어린아이일 뿐이다. 너의 조언자는 응당 대가를 치를 것이다."라고 말하고 동생을 공개적으로 용서했다. 그 후 존이 에브회로 달려가 프랑스 수비대를 죽이고 에브회를 형에게 바쳤다.

이에 필리프 2세가 격분하여 보복으로 에브회를 탈환하고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리처드 1세의 병력이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즉시, 필리프 2세는 병력을 차출해 남겨두고 루앙 남쪽 베흐뇌이로 진군했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다음날, 병사들이 왕이 떠나자 철수했다고만 기술했다.

5월 28일, 베흐뇌이 공성전 승리를 코 앞에 두고 노르망디가 필리프 2세의 수중에 떨어지기 일보 직전, 리처드 1세가 분견대를 차출하여 포위망을 기습하고, 본대를 이끌고 가 필리프 2세군의 보급로를 끊자 이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5월 30일, 리처드 1세가 에브회에 당도하자, 수비대가 투항했다. 6월 5일, 빠씨에서 필리프 2세는 자신을 조롱했던 루앙의 세네샬 레지스터 백작을 생포했다. 리처드 1세가 노르망디의 요새들을 하나씩 탈환하자,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아키텐 봉신들을 선동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 때문에 리처드 1세가 남프랑스로 진군하던 중인 6월 27일, 나바라 왕 산초 6세가 사망하여 그의 아들 산초가 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귀국길에 올랐다. 리처드 1세가 푸아티에로 넘어가려면 필리프 2세가 점거한 로슈를 거쳐야 했기에, 리처드 1세는 공성전을 벌이고 로슈를 탈환했다.

필리프 2세는 이 틈을 타서 북프랑스 공략 대신 군세를 재정비하여 동맹군 지원으로 전략을 변경, 남프랑스로 진군했다. 리처드 1세는 정보를 입수하고 벙돔므 평야에 진을 쳤다. 필리프 2세는 프레티발 부근에 진을 치고 리처드 1세에게 서신을 보냈다.
'내일 그대를 적대하는 무리를 이끌고 방문할 줄 알게.'

허나 리처드는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하며 답신을 보냈다.
'기꺼이 기다리겠소. 만약 안 오면 내일 아침에 내가 직접 방문하리다.'

답신을 받은 필리프는 그날 밤에 막사를 철거하고 퇴각했다.필리프가 도주했다는 것을 안 리처드 1세는 윌리엄 마셜에게 후발대를 맡기고 직접 필리프 2세를 추격했다. 이전투에서 많은 프랑스군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고, 필리프 2세의 막대한 보물과 함께 프랑스 왕의 인장과 그와 백작 존을 지지한 배반자 명단까지 손에 넣었다.

리처드 1세는 남프랑스로 진군하여 조프루아 드 랑송과 앙굴렘 백작 임마흐의 반란을 단번에 격파하고, 기사 300명과 병사 40,000명을 생포했다. 필리프 2세는 북프랑스로 진군하여 리처드 1세의 봉신들의 군세를 와해시키고, 존과 아룬델 백작의 수하물을 탈취하여 프레티발 전투의 굴욕을 되갚았다.

7월 23일, 교황이 파견한 사절단의 중재로 띠예흐에서 두 왕의 대리인이 만나 다음해 1195년 11월 1일까지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에게 각국의 기사 5명을 결투시켜서 결론을 짓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리처드 1세가 두 왕이 참여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자 포기했다. 1195년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가 시농에 머무를 때 15명의 암살단을 파견했지만 암살은 시도도 하기 전에 실패되었다.

1195년 4월 신원 불명의 은자가 리처드의 불법적인 성관계에 대해 경곡를 하였고, 리처드는 이를 무시하다가 나중에 병에 걸리자 주교들 앞에서 죄를 고백한 후 더 이상 금지된 성관계를 하지 않고 왕비 베렝겔라를 가까이 하였고 콘월과 데번에서 나오는 수익을 왕비 베렝겔라에게 주었고, 르망 근처를 방문하여, 그곳의 영지를 사들인 후 거주할 왕궁을 짓기 시작했다.

1195년 여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6세는 봉신인 리처드 1세에게 대단한 가치를 지닌 거대한 금관을 보냈다. 그리고 그가 한 충성 서약에 대해 프랑스 왕의 영토를 침공할 것을 요청했다. 황제는 그가 프랑스 왕으로부터 입은 피해를 복수하고자 한다면 직접 충분한 도움을 줄 것이라 했다. 그러나 리처드는 신성 로마 제국에 구금되는 동안 황제 하인리히가 어더한 인물인지를 잘 꿰뚫어봤기에 신중하게 결정했고 엘리 주교이자 고문인 기욤 드 롱샴을 황제에게 사절단으로 파견해 신성 로마 제국과의 동맹 혹은 프랑스가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다.

사절단이 프랑스 영토를 지날 때 필리프 2세가 그들을 억류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필리프 2세는 이것으로 리처드 1세가 띠예흐 협정을 위반했다고 선언하며 노르망디를 기습했다. 필리프 2세가 주요 전략적 요충지인 보드회이를 침공, 공성전을 벌여 요새들을 파괴하자 리처드 1세가 군대를 이끌고 그곳에 당도했다.

1195년 7월, 리처드 1세가 회담을 위해 필리프 2세를 방문했다. 아크레에서 헤어진 후 4년만의 대면이었다. 적이라도 이때는 전투를 중지하는 것이 당대 관례였으나 필리프 2세는 요새 벽 밑에 땅굴을 파게 했다. 그러나 요새 벽이 무너지면서 회담이 실상 함정이란 것을 알게 된 리처드는 극도로 분노하여 당장 회담장을 떠났다.

그 틈에 필리프 2세와 그의 군사들이 재빨리 퇴각했다. 리처드 1세는 군사들을 이끌고 프랑스군을 추격했다. 필리프 2세와 그의 군사들은 가까스로 후퇴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리처드는 그 요새로 돌아가 필리프가 남기고 간 많은 것들을 차지했다. 그리고는 바다 양 쪽에 위치한 자신의 모든 영토에서 대규모 군사를 일으켜 프랑스 왕실의 영토로 침입했다.

하지만 1195년 7월 18일, 카스티야 왕 알폰소 8세가 야쿱 알 만수르에게 패배한 알라르코스 전투의 소식이 전 기독교 세계에 전해졌고 리처드와 필리프는 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8월, 두 왕이 회담을 열었다. 이때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에게 누나인 프랑스의 아델을 돌려주었다. 제프리 2세의 딸 엘레오노르 드 브르타뉴와 필리프 2세의 왕세자 루이의 결혼 협상이 오갔는데, 리처드 1세는 질녀의 지참금으로 지조흐, 부드몽, 노르망 벡쌍, 베흐농, 이브히, 빠씨 등의 영지와 20,000마르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필리프 2세는 오말르, 오슈, 아흑슈와 노르망디 요새 몇 채를 반환하기로 했고, 최종 합의는 11월 1일에 의결하기로 미루어졌다.

하지만 다시 십자군 원정 당시 리처드가 예루살렘 국왕이었던 콘라드 1세의 청부 암살의 용의자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해당 소문은 필리프 2세가 산의 노인이 보낸 서찰을 낭독하면서 무마되었던 듯 보였지만 결국 의결일 당시 파토가 나면서 두 왕은 다시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전쟁 후반기인 1196년은 승세가 리처드의 잉글랜드 왕국에게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이는 잉글랜드의 통치를 맡고 있던 최고 사법관이자 캔터베리 대주교인 휴버트 월터가 내정에 탁월한 인재였기 때문으로 주요 치적이 최초로 도량형의 일반 표준 수립(1196), 토지에 대한 과세표준의 재평가(1198), 봉건적인 제도의 수정 등 징세로 치우쳐져 있기는 했지만 리처드의 부재 및 장기간 전쟁에도 잉글랜드가 재정적으로 흔들리지 않게 한 것은 그의 공이 컸다.

아울러 이시기 런던 코뮌 또한 점차 성장을 하고 있었고, 코뮌에서 소속된 참사회원들의 경우 다른 코뮌과 달리 남작 칭호를 인정받았을 정도로 그 영향력 또한 막대해졌다. 다만 이때 런던은 리처드 1세의 석방금으로 과중하게 올라진 세율로 인해 빈곤층의 주도하에 소요사태가 발생했는데, 이때 소요 사태를 일으킨 주도자는 윌리엄 피츠 오스버트로 그는 탁월한 달변가로 과중한 세금으로 고통을 받던 민중들을 선동했다. 초기엔 단순한 불만을 표출한 시위였으나 차츰 주도자인 윌리엄도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유혈사태가 점차 발생하자 윌리엄은 일부 추종자들과 함께 성 메리르바우 성당의 탑으로 도망쳐 은신했지만 1196년 4월 6일에 최고 대법관인 휴버트에 의해 체포되었고, 과격한 시위 또한 런던 인근의 영주들과 함께 진압되었다.

전쟁은 3년을 지속되었다. 상술한대로 후반기의 전쟁의 승세는 리처드에게로 기울어져 갔는데, 처드 1세는 압도적인 국력을 바탕으로 한 맞춤형 뇌물 공세를 펼쳐 북프랑스, 플랑드르, 신성 로마 제국, 남프랑스에 걸쳐 거대한 동맹 연합을 건설하고 필리프 2세가 빼앗은 영지 대부분을 수복하였으며 이 기세에 올라타 선조 바이킹 롤로가 그랬듯 필리프 2세의 본거지인 파리 외곽까지 위협하였다. 궁지에 몰린 필리프 2세가 음모를 총동원해 리처드의 남프랑스 봉신들의 충성심을 휩쓸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처드 1세의 행보는 리모주에서 멈추었다. 과거 리모주는 리처드 1세가 왕위에 오르기도 전 아키텐 공작 시절부터 툭하면 반란을 일으킨 곳이었다. 당시 리모주 자작이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고 리처드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전략적 요충지라, 리처드 1세는 직접 출군했다.

이때 리모주는 앙주 제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에 걸친 지역으로 두 세력에게 중요했는데, 당시 프랑스는 크게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북쪽 영토와 남쪽의 툴루즈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그 사이를 잉글랜드령이 반으로 나누고 있었다. 이렇게 프랑스령을 반으로 쪼개는 잉글랜드령이 바로 리모주 자작령과 그리고 오베르뉴 백작령, 라 마르셰 백작령이 있었다.

리모주 자작이 농성한 샬루-샤브롤 성을 공격한 리처드는 1199년 3월 25일 평상복 차림으로 성벽 가까이 거닐며 상황을 살피다가 성 안의 소년병 구르동(Gourdon)이 쏜 석궁의 볼트에 왼쪽 어깨의 목 가까운 부위를 맞고 치료 중 과다출혈 및 상처가 굶을대로 곪아진지 오래라 결국 후사도 없이 4월 6일 죽게 되었고, 왕위는 동생 존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존은 형을 배신하면서까지 그토록 원하던 왕위에 오르지만 이번에 넷째 형인 제프리 2세의 외동 아들인 브르타뉴 공작 아서와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후계자 계승 정책에 따르자면 아서가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받아야 했다. 그렇기에 제프리 2세와 남다른 우정이 있었던 필리프 2세는 처음에는 아서를 지지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아서는 1196년부터 필립의 왕실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조모인 엘레오노르 다키텐마저 손자 대신 존을 지지했고,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존은 필리프가 아서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 위해 거액의 뇌물과 벡쌍, 에브휴 두 영지 그리고, 왕세자 루이의 결혼 상대 카스티야의 블랑슈의 막대한 지참금을 받고, 존 지지로 입장을 바꿔 존이 즉위하게 된다.
4.1.6. 13세기
어렵사이 겨우 잉글랜드 국왕이 된 은 1200년 첫 번째 부인인 글로스터의 이사벨과 이혼하고, 이미 뤼지냥의 위그 9세와 약혼한 12~15세의 앙굴렘의 이자벨과 재혼한다. 문제는 이결혼이 그간 노르만 왕조에서부터 시작된 거대한 앙주 제국의 붕괴의 서막이 되었다. 상술한대로 이미 약혼자가 있던 여자를 자신의 왕비로 취한 것에 대해 본래 약혼자인 위그 9세를 비롯한 뤼지냥 가문 구성원들이 존의 행실에 대해 분노했고, 무엇보다 이에 대한 배상도 전혀 없었다.

이에 뤼지냥 가 전체가 존 왕에게 반기를 들으나 실패하고 주군이던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게 제소하여 필리프 2세는 존을 프랑스의 법정에 소환했다. 이는 전대 왕조인 노르만 왕조를 포함 앙주 왕조가 가진 치명적인 문제점이었다. 바로 두 가문이 잉글랜드 국왕이기도 전에 각각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다는 봉건적 특징이 아킬레스 건이었다. 이때문에 리처드 1세라면 몰라도 헨리 2세루이 7세와 필리프 2세에 강하게 반발했을지라도 나중에 저자세로 나온 것도 이러한 봉건적 관계에 기인했다.

물론 존은 프랑스의 법정에 갈 마음은 전혀 없었고, 출두 기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필리프는 이를 기회로 존 왕이 가지고 있던 잉글랜드령을 몰수하고 이 영지를 아서에게 내렸다. 물론 몰수령을 내린다고 호락호락 영토를 내놓을 리는 없으니 이는 어디까지나 명분이었고, 실제로는 필리프의 존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할 수 있다.

1203년, 아서는 자신의 잉글랜드 왕위의 계승을 거부한 조모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를 사로잡기 위해 공격하지만, 존 왕은 신속히 역공을 가해 오히려 아서를 포로로 잡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존 왕의 강력한 동맹이던 앙주 영주를 무시하는 행동을 했고, 거기다 포로로 잡은 귀족들을 가혹하게 취급했는데, 태양빛 한 점 안 들고 침수돼서 썩은 물이 바닥에 흥건한 지하감옥에 가둬두어 굶기고 22명이나 옥사하게 만든다. 3차 십자군 때 활약했던 리처드 1세의 부하들도 이때 포로로 붙잡혀서 아사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아서가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행방이 묘연해지자 잉글랜드와 프랑스에는 존이 아서를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이 때문에 전투에서 이겼음에도 브르타뉴와 앙주의 영주들이 전부 프랑스 편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를 놓치지 않고 필리프는 노르망디를 착실하게 하나씩 공략했다. 존은 이런 필리프를 상대하기 위해 노르망디의 가야르 성을 공성 중인 필리프군을 공격했는데 수군까지 동원해 필리프를 양면에서 공격하는 입체적인 작전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이론적으로는 좋아보이는데 실제 수행하기에는 무전기와 시계가 있던 근·현대 기준으로 실행하기 힘든 고난도의 전술인 데다가 조수 계산까지 잘못되는 등 너무 복잡한 작전이라 실패했고 필리프 왕의 프랑스군은 노르망디 전체를 유린하였다. 그 결과 존 왕은 노르망디마저 상실해 아키텐을 제외한 프랑스령 전체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1205년에는 캔터베리 대주교 임명 문제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대립해 1207년에는 잉글랜드 전체에 성무 정지, 1209년에는 존 왕에 대해 파문 선언까지 내려왔다. 이에 분노한 존 왕이 1209년부터 1211년까지 성직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의 소득을 국가에 귀속하기도 했는데, 1213년에는 교황이 아예 필리프 2세의 잉글랜드 침공을 지지하고 나서자, 결국 잉글랜드 전체를 교황에게 봉헌하는 형태로 간신히 용서를 받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프랑스령 상실과 파문 소동 등으로 잉글랜드의 귀족과 평민 특히 한때나마 정치적 동맹이었던 런던의 코뮌마저 존 왕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다.

이기간 존은 웨일스에 점진적으로 나마 무력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귀네드의 왕 흐웰린은 존 왕의 딸 조안나와 결혼해 든든한 우군을 확보했지만 1210년을 기점으로 존 왕과의 사이가 급속히 악화되었다. 1211년 존 왕은 데헤이바쓰 왕 말군을 비롯한 웨일스 왕들 대부분을 포섭해 흐웰린을 공격했다. 흐웰린은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겼지만 존 왕이 자신을 도와준 웨일스 왕들을 홀대한 탓에 웨일스 왕들이 존 왕에게 등을 돌리고 흐웰린에게 돌아왔다. 1212년 흐웰린은 반격을 개시했다. 역습은 대성공을 거두어 존 왕으로부터 대부분의 영토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존 왕은 프랑스령을 빼앗긴 것이 두고두고 억울했던지 1214년 잉글랜드 북부 귀족들의 높은 원성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으로 세금을 거두고, 당시 필리프 2세의 계략에 의해 자신의 영역을 왕실 직할지로 빼앗기게 된 페르디낭 드 부르고뉴가 필리프 2세에게 큰 불만을 품게 된 것을 알고, 그와 연계하였고, 아울러 조카이기도 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4세와 플랑드르 영주 등을 끌여들여 프랑스령을 침공했다.

이론적으로는 존 왕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아키텐에서 프랑스 남부를 공격해 필리프의 발을 묶어 둔 사이, 오토 4세의 신성 로마 제국군이 프랑스를 북부에서 공격하는 완벽한 작전인 듯했다. 그러나 프랑스 왕자 루이가 존 왕의 군대를 격퇴하여 아키텐으로 후퇴했고 신성 로마 제국-기타 영주 연합군이 진격이 늦어지자, 필리프 2세가 북쪽 연합군을 요격에 나서 릴의 외곽 부빈에서 회전이 벌어졌다. 이 회전에서 연합군은 유리한 입장[8]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참패를 당하고 말았다.[9]

비보를 전해들은 존 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불운하다! 이토록 운이 없는 것은 내가 주님과 화해하고 왕국을 로마 교황청에 갖다 바쳤기 때문이다!"
결국 존 왕은 아무 소득도 없이 전쟁 비용과 동맹을 동원하는 데 지불한 막대한 금액만 고스란히 날려먹고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빈손으로 잉글랜드에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이전투를 통해 필리프 2세는 프랑스 내에서 앙주 가문의 세력을 아키텐 서남쪽에 위치한 가스코뉴까지 밀어버리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잉글랜드와의 전쟁은 종결되지 않았다. 1215년 존의 무능과 그에 따른 실정 및 폭정에 질려버린 잉글랜드의 귀족들이 서로 협력해 존에게 반기를 들었다. 귀족들은 병력을 이끌고 런던으로 출정, 여기에 런던시마저 가세해 무혈로 입성하게 된었고, 귀족들과 성직자, 도시민들까지 등을 돌린 것을 알게 된 존은 반란을 진압할 병력이 없고 그들의 요구를 거부했다가는 퇴위는 물론이고 처형될 위기라는 것을 깨달아 공포에 질렸다.

이때 봉기군 내의 온건파를 중심으로 왕을 처형하는 것보다는 왕권을 제한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존이 런의 참사회원들에게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시장을 선출하겠다는 특권을 수여해 조금이라도 여론이 좋게 형성하려고 했다. 이후 봉기군 내의 수뇌부들은 대헌장이라 불리는 마그나 카르타를 작성했고, 템즈 강변의 러니미드(Runnymede) 평원에서 진을 치고 있던 귀족들에게 존 왕이 방문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을 하였다.

대헌장은 본질적으로 봉건 계층의 이익을 보장받기 위한 봉건적 문서였다. 그것은 상속세를 제한하고 후견권의 남용을 금지하며 면역세와 부조금을 부과하는 데 자문회의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고 규정하는 등 봉건 영주들의 권익을 보장하는 조항들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헌장은 봉건적 문서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교회의 제 권리와 도시들의 특권적 자유들을 보장하는 조항이 들어 있었고, 그것은 헨리 2세 시대의 여러 법적 개혁을 인정하고 확인하는 것이었다.

즉 국왕은 정당한 재판권을 어느 누구에게나 매도하거나 거부하거나 지연시켜서는 안 되며, 보통법 법정을 고정된 장소에서 열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자유민은 그와 동일한 신분의 사람들에 의한 합법적인 판결이나 나라의 법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되거나 투옥되거나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추방될 수 없다고 규정했다. 대헌장의 중요성은 당대보다는 후대에 있었다. 당대인들에게 그것은 기존의 법과 관습을 재확인하고 보장한다는 점에 의미가 있었다.

나중에 인노첸시오 3세의 반발에 추인을 거부하면서 내전은 더 연장되었는데 이때 남작군의 우두머리인 로버트 피츠왈터는 스스로를 신성교회군 원수라 칭하고 프랑스의 루이에게 잉글랜드의 왕이 될 것을 요구한다. 루이는 이러한 남작들의 지원하에 잉글랜드 왕국의 수도인 런던에 입성했고, 남작군과 런던 시민들에게 환대를 받는다.

존 왕은 도주했고, 스코틀랜드의 지원까지 받은 루이는 길퍼드, 파넘, 윈체스터 등 주요 잉글랜드 도시를 점령하는 등 파죽지세로 존 왕을 추격했다.

이때 루이의 아버지인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루이가 가장 먼저 점령했어야 할 도버 성을 간과한 것에 우려를 표했다. 켄트를 비롯한 잉글랜드의 1/3을 장악했으나 여전히 존 왕을 따르는 휴버트 디 버그가 도버 성에서 루이의 배후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는 뒤늦게 도버 성을 공격했으나 3개월 간의 포위 공격에도 도버 성은 함락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캐싱엄의 윌리엄이 이끄는 장궁병 부대에게 켄트 일대가 습격을 받게 되자 결국 10월 14일에 휴전 조약을 맺은 루이의 프랑스군은 런던으로 회군했고, 또한 루이의 프랑스군이 런던으로 돌아간 상태에서 잉글랜드군에게 포위당한 로체스터 성은 식량난으로 항복하게 된다.

그러나 1216년 10월 18일, 존 왕은 이질에 걸려 급사한다. 존이 사망하자 그의 어린 아들 헨리 3세가 왕위를 계승했고 윌리엄 마셜이 섭정이 되었고, 이후 윌리엄 마샬의 지휘하에 국왕군이 링컨 전투와 샌드위치 해전에서도 승리하자 반란파의 기세는 크게 꺾였에서 이기게 되면서 남작들은 윌리엄 마셜의 회유로 자신들이 잉글랜드로 끌어들인 루이를 배신했고, 결국 1217년 킹스턴에서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잉글랜드 반란 귀족들은 루이 왕자에게 왕위를 준다는 약속을 백지화하는 대신 몰래 1만 마르크를 지불하는 것으로 프랑스군의 철수에 대한 동의를 받아냈다. 이 조약에는 반란 귀족들의 원상복귀와 존의 아들 헨리 3세가 왕위를 계승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고, 대신 헨리 3세 또한 약간 수정된 마그나 카르타를 추인해야 했다. 루이는 프랑스 본국으로 돌아가 군을 재정비하기 위해 윈 첼시로 철수하다가 프랑스로 귀국한다.

종전과 함께 헨리는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헨리 3세가 되었다. 1219년 펨브룩 백작이 죽자 정부는 대법관인 휴버트 드 버그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헨리는 1227년 성년이 되면서 친정을 시도하여 1232년에는 휴버트 드 버그를 해임하였고, 1236년 16세의 연하의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했는데 그는 아내가 데려온 처가쪽 식구들을 중용했는데 이중에는 나중에 피에트로 2세가 되는 신성 로마 제국 사보이아 백국사보이아 가문 사람들도 있었고 이는 많은 잉글랜드인들의 공분을 샀다.

그녀가 데려온 친정 식구들은 잉글랜드에 발붙여 잉글랜드 귀족처럼 행세하고 다녔다. 또한 엘레오노르는 우유부단한 남편의 정치 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고, 헨리 3세 또한 잉글랜드인 조언자들보다 아내와 그녀가 데리고 온 처가쪽 사람들을 신뢰했다. 또한 헨리 3세가 런던에 없을 때는 섭정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그녀는 다. 외국인 왕비와 외척들의 정치 개입은 잉글랜드 귀족들의 불만을 샀다. 엘레오노르가 마차를 타고 궁 밖에 나오면 사람들은 쫓아가서 돌이나 썩은 야채를 던지며 대놓고 왕비를 욕했다.

헨리는 회계청과 국고보다는 왕실을 통해서 통치하고, 공적인 국새를 놓아두고 왕의 개인용 국새를 새로 만들어 영주들의 불안을 자아냈다. 헨리는 인정 많고 교양 있는 인물이었지만, 이처럼 통치자로서는 때로 비현실적인 면까지 보이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헨리가 친정을 시작한 지 수년이 지난 1237년, 결국 왕과 귀족들 사이에 불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헨리의 여동생 엘리너와 젊은 프랑스인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가 결혼하면서 외국인의 영향력이 커지자 잉글랜드 귀족들의 적개심과 불만이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계속해서 국왕의 고문관들을 뽑을 때 자신들이 의견을 낼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헨리가 이를 무시했던 것도 원인 중의 하나였다.

헨리는 의심 많고 고집 세고, 둔하고 변덕스러웠으며,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무능하여 신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프랑스에서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230년과 1242년 두 번에 걸쳐 헨리는 프랑스로 출병했으나 잃어버린 영국령을 되찾는 데 실패했으며, 1259년 파리 조약으로 가스코뉴를 제외한 프랑스 내의 모든 영국령을 루이 9세에게 넘겨주었고, 프랑스 국왕이 잉글랜드 궁왕의 상위 군주임을 인정해야다. 영주들은 전쟁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의 실패는 왕과 영주들 사이를 더욱 악화시켰다.

또한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면서도 아버지처럼 웨일스 지역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는데 처남인 귀네드 왕인 흐웰린이 사망하고 그의 적장이자 자신의 조카인 다비드가 귀네드의 왕으로 즉위했는데 이과정에서 서형인 그리피드와의 왕위 분쟁을 벌인 끝에 그를 이기고 유폐했느데 헨리는 이를 핑계삼아 1241년 직접 웨일스를 침공했다.

흐웰린의 동맹이던 포위스의 왕 그리피드 압 마도그와 데헤이바쓰의 말군 비칸은 다비드를 도와 헨리 3세에 대적하기는커녕 헨리 3세를 도와 다비드를 공격했다. 반면, 헨리 3세는 이 둘을 비롯한 웨일스 주요 군주들의 도움과 지지를 얻어냈다. 많은 우군을 확보한 헨리 3세의 공격은 그야말로 파상공세였고 다비드는 채 한 달도 못 버티고 백기를 들었다.

웨일스 내 강대국의 뿌리를 뽑겠다는 각오로 쳐들어온 헨리 3세는 항복한 다비드에게 전혀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다비드는 원래 귀네드의 영토를 제외한 모든 땅을 빼앗겼고 그가 후손 없이 사망할 경우, 귀네드는 잉글랜드 왕의 차지가 된다는 데 합의했으며 다른 웨일스 군주들에게 충성 맹세를 받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이 내용은 다비드가 항복한 장소인 구에른 에이그론에서 합의되었고, 장소 이름을 따 이 합의는 구에른 에이그론 조약으로 불린다.

이로써 흐웰린이 사망한 지 1년 만에 웨일스의 맹주 자리는 잉글랜드의 헨리 3세에게로 넘어갔다. 이는 불과 한 세대 후에 벌어질 웨일스 주권 상실의 서막이었다. 이어지는 기간 동안 다비드는 복수의 칼을 갈고 헨리 3세는 수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헨리 3세는 카르디간이나 카마던과 같은 요충지에 성을 새로 쌓고 웨일스에서 잉글랜드의 법을 적용하며 웨일스 군주들과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다비드를 견제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그리피드를 잉글랜드로 데려가 런던탑에 가두었다.

예술을 애호한 헨리 3세는 궁전과 성을 축조하는 데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는 또 신앙심이 두터워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깊은 신앙심은 정치적 행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243년에 새 교황으로 즉위한 인노첸시오 4세의 당면 목표는 강력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인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항하여 전 유럽에서 교황의 우월권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헨리 3세는 잉글랜드와 유럽에서 이 야심 큰 교황의 수족노릇을 자청했다. 그리하여 교황은 이탈리아인들을 비롯한 많은 외국인들을 잉글랜드 내의 여러 성직에 임명했으며, 잉글랜드의 성직자들은 교황의 외교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재정적 부담을 떠안아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이제까지 교황에게 순종해 오던 잉글랜드인들이 로마에 등을 돌리는 한 요인이 되었다. 성직자들 사이에서도 왕과 교황의 결탁에 대한 불만이 공공연하게 표출되고 있었다. 교황은 독일 황제와의 투쟁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과 이탈리아인 부재 성직자들을 위한 성직록을 잉글랜드 교회에 떠맡겼다. 이것은 잉글랜드의 하위 성직자들 사이에 반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들의 불만은 외국인에 대한 적의와 국왕에 대한 불신을 증대시켰다.

그러다가 문제가 발생했다. 1244년 런던탑에 갇힌 그리피드가 침대보 줄을 잡고 탈출하다가 줄이 끊겨 사망한 것이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다비드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견제 세력이 사라지자 다비드는 주변 다른 웨일스의 군주들과 힘을 합쳐 헨리 3세에 대항했고, 성공리에 영토의 상당 부분을 수복했다.

특히 다비드는 몰드의 성과 디세르스의 성을 탈환한 것을 비롯해 귀네드가 있는 웨일스 북부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헨리 3세는 이를 가만히 지켜볼 위인이 아니었다. 1245년 다비드를 진압할 목적으로 출정을 지시했다. 이번 원정은 지난번처럼 쉽지 않아 1245년 헨리 3세의 군대는 대패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헨리 3세는 귀네드의 데가누이까지 진출해 다비드를 위협했다.

치열했던 그들의 영토 쟁탈전은 물리적 싸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다비드는 귀네드의 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 헨리 3세보다 높은 교황과 친교를 맺으려고 했고, 그 결과 통치권을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이 사실을 안 헨리 3세는 즉시 교황과의 외교에 공을 들였고 1245년 교황은 다비드에게 내린 통치권 인정을 철회했다. 이처럼 헨리 3세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던 무렵인 1246년 2월 25일 다비드는 갑자기 사망했다.

새로 귀네드의 왕이 된 자는 다비드의 조카로서 다비드와의 왕위분쟁에서 폐하고 끝내 잉글랜드로 인질로 끌려가 런던탑에서 탈출하려다가 죽은 그리피드의 아들인 흐웰린 압 그리피드였다. 그는 숙부와 헨리 3세가 맺은 조약을 갱신해 귀네드의 왕위 계승을 인정받으려고 했고, 우드스탁에서 헨리는 흐웰린과 평화조약을 채결했다.‘우드스탁 조약’에서 흐웰린은 헨리 3세에게 귀네드 왕국 외의 모든 영토를 몰수했다. 그 결과, 흐웰린의 조부이자 위대한 왕이었던 흐웰린 바우르가 남기고 간 유산은 상당 부분 사라졌다.

더욱이 교황과 가까이 지내던 헨리는 마침내 1254년 정치적으로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와 협약을 체결해 자신의 둘째 아들인 에드먼드에게 시칠리아 왕위를 주는 대가로 교황이 시칠리아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의 비용을 지원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4년이 지나도 재정 지원이 이행되지 않자, 교황은 헨리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다급해진 헨리는 귀족들에게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귀족들은 헨리가 대헌장에 준한 개혁안을 받아들인다면 재정지원에 협조하겠다고 동의했다.

1256년 헨리 3세는 콘라트 4세가 죽은 후 제대로 된 독일왕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던 독일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헨리는 독일의 라인 지방의 제후들에게 로비를 해 자신의 동생인 콘월 백작 리처드를 독일왕을 내웠다. 하지만 독일 내의 반대 진영에서 카스티야 왕국알폰소 10세를 독일왕으로 내세웠고, 또한 1264년 교황 우르바노 4세 프리드리 2세의 서자인 만프레디 섭정의 신분으로 조카 콘라딘에게 가야 할 시칠리아 왕위를 찬탈을 구실삼아 파문한 후 헨리 3세와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형제인 앙주의 샤를 1세에게 시칠리아 국왕으로 인정해줄 테니 만프레디를 토벌해달라고 청했다.

이에 헨리는 차남 에드먼드를 시칠리아 국왕으로 내세우려고 했고, 자신의 둘째 아들인 에드먼드에게 시칠리아 왕위를 주는 대가로 교황이 시칠리아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의 비용을 지원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4년이 지나도 재정 지원이 이행되지 않자, 교황은 헨리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다급해진 헨리는 귀족들에게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귀족들은 헨리가 대헌장에 준한 개혁안을 받아들인다면 재정지원에 협조하겠다고 동의했다. 하지만 1257년 프랑스의 앙주의 샤를이 빠른 행보로 인해 무산되었다.

이와 같은 연이은 실정과 헨리 3세 주변에 둘려싸고 있던 외국인 인척들로 인해 헨리 3세에 대한 민심은 점차 극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결국 헨리 3세의 권력을 제한하기로 했다. 제약하려는 영주들의 반대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헨리와 처남 매부 사이인 프랑스 출신 귀족 시몽 드 몽포르의 주도로 혁명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1258년 여름, 영주들은 시몽 드 몽포르의 지도하에 24명으로 구성된(반은 왕이 지명하고 반은 영주들 자신이 지명하는) 대자문회의의 설치를 요구했으며, 이에 따라 설치된 자문회의의 의원들이 무장을 갖추고 옥스퍼드에 모여 이른바 ‘옥스퍼드 조항’의 승인을 왕에게 강력히 요구했다. 영국 최초의 성문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개혁안은 네 가지 주요한 조항으로 이루어졌다.

첫째, 주로 영주들로 구성된 15명으로 이루어진 회의를 두어, 왕은 국정의 제반사항에 관해서 이들의 권고를 따라야 하고, 또 대법관, 상서경, 재무관을 그들의 지명에 따라 임명해야 한다. 둘째, 종전부터 내려오던 관직들이 회복되고 모든 세입은 왕의 내실이나 그 부속기구가 아니라 국고인 회계청에 납부되어야 한다. 셋째, 셰리프나 다른 국왕 관리들에 대한 불평을 심리하기 위해 주 법정에 4명의 선출된 기사가 참여해야 한다. 넷째, 의회라 불리는 대자문회의를 일 년에 세 차례 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혁 귀족들의 첫 출발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1259년 10월, 이들은 온건파와 과격파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온건파는 왕권이 남용되지 못하도록 제한만 하자고 했지만 과격파는 왕과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에게 강요한 개혁안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과격파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인물이 헨리의 매제이기도 한 시몽 드 몽포르다. 그는 일찍부터 가스코뉴 지방의 통치권을 왕에게 요구했으나, 막상 그 지방의 실질적인 통치권이 에드워드 왕자에게 넘어가자 개혁파 지도자가 되어 헨리 3세에게 대항하게 되었다.

당시 시몽은 프랑스 궁정, 교황청, 신성로마 황궁 등지로 파견되는 중요한 사절단에 참여하면서 많은 유력한 친구들을 사귀었다. 또한 그는 4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면서 예루살렘에 세운 라틴 왕국의 제후들 사이에서도 커다란 신망을 얻었다. 심지어 이들 제후들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시몽을 황제를 대신하는 예루살렘의 부왕으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렇듯 국제적인 명성을 얻다 보니, 시몽은 자기만이 헨리와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자만심을 갖게 되었고, 거만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시몽의 태도에 불만을 갖게 된 온건파들이 국왕 쪽으로 기울어지자, 이제 국왕과 과격파들의 지도자인 시몽의 대결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1261년 10월경, 헨리는 옥스퍼드 조례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선포했다. 헨리의 선포로 인해 시몽은 완전히 고립되었고, 아내와 함께 프랑스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몽을 몰아낸 헨리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워낙 귀족들이 강력하게 요구했기에 일단 승낙했지만, 곧이어 교황 우르바노 4세로부터 옥스퍼드 조례를 지키지 않아도 좋다는 사면을 얻어내 조례를 무효화시켜 버렸다. 귀족들은 헨리의 배신에 격분하기 시작했다. 영주들을 억누른데 성공한 헨리는 다시 시칠리아에 다시 집착하기 시작했지만 웨일스의 패권을 막 장악하게 된 흐웰린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헨리 3세와 협력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헨리 3세가 귀족과의 갈등으로 정신이 없던 탓에 둘 사이의 대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헨리 3세의 무관심에 분노한 흐웰린은 1262년 11월 잉글랜드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국왕과 귀족들을 조율하던 원로 리처드 드 클레어(Richard de Clare)마저 1262년에 사망하면서 점차 내부적으로 고립되고 있었다.

1263년 4월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온 시몽은 옥스퍼드에서 25인 위원회를 열어 자신의 지지 세력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1263년 가을에 이미 국왕과 귀족측의 군대가 대립하기 시작하였고 시몽의 군대는 런던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하급 귀족, 지방 기사들, 런던 및 남동부 5항구 도시의 시민들과 많은 성직자들이 반란에 동참하였고, 귀네드의 왕인 흐웰린 또한 시몽 드 몽포르의 저항군에 합류하면서 제2차 남작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헨리는 진압하려했으나 헨리의 수탈에 불만이 많았던 런던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국왕 부부를 붙잡아 런던 탑에 가두면서 시몽의 반군은 런던에 귀환한다. 시몽은 국왕을 유폐하고 헨리의 이름으로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러던 찰나에 1264년 1월 헨리 3세는 가족과 함께 도시를 탈출하였고 주교들을 압박하는 듯이 설득해 다시 옥스퍼드 조례를 무효화시켰다. 이에 흔들린 일부 귀족들은 헨리에 귀부하였으나 시몽이 이끄는 급진파는 그대로 국왕군과 싸우기로 하였다.

1264년 봄 왕당파는 노스햄프턴을 함락시켰고 시몽파는 켄트의 왕당파 요새인 로체스터 함락에 실패하였다. 이에 기세를 얻은 헨리 3세의 국왕군은 런던을 향해 진군하였는데, 이에 귀족들의 반란군도 남하하여 5월 14일에 서식스 평원에서 마주쳤다. 루이스 전투라고 불린 이전투에서 반에는 수적 우위를 앞세운 에드워드 왕자의 국왕군이 선전하였으나 그가 도주하는 반란군을 추격하느라 주력인 기병대를 이끌고 전선을 이탈하는 바람에 숨겨둔 시몽의 반란군 예비대의 공격으로 헨리의 국왕군이 포위되었다. 이를 알게 된 에드워드가 놀라서 돌아왔으나 매복에 걸려 포로가 되었으며 사기가 떨어진 국왕군 병력이 도주해버리는 바람에 국왕군은 사상자 2700명을 내며 참패했고, 헨리와 그의 아들 에드워드가 사로잡히면서 시몽의 승리로 끝났다.

생포된 헨리는 전장 한가운데서 시몽과 협상하게 되었다. 이 루이스 협약에서 헨리는 옥스퍼드 조례를 재확인하였고 사실상 꼭두각시 왕으로 전락, 시몽 드 몽포르가 잉글랜드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왕권 대신에 대자문회의를 중심으로 잉글랜드의 정치가 이루어졌다. 1264년에 소집된 대자문회의는 9명으로 구성된 개혁위원회가 옥스퍼드 대자문회의의 결의안을 실행하는 통치의 실권을 행사했다. 그리하여 고위 성직자, 귀족들이 국사를 논의하였다. 이처럼 왕을 정치의 한구석으로 몰아낸 시몽은 왕국을 귀족 과두제 체제로 통치할 수밖에 없었다.

시몽은 이런 약점을 메우기 위해 1265년에 개최된 대자문회의에 주와 자치시의 대표들을 불러모아 법적 승인을 받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1265년의 의회는 이전의 자문회(노르만 이전위 위탄과 이후의 쿠리아 레지스)들과 달랐다. 참석자들 중에는 통상적인 영주들, 기사들, 그리고 주교급 이상의 고위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그의 대의에 우호적인 몇몇 소도시의 코뮌에서 보낸 시민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들 가운데 아무도 실제로 선출되지는 않았지만, 이 의회는 영국 사회의 정치세력을 대변하는 존재들을 포함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모임은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는데, 의회가 곧 항구적인 제도로서 발전할 것이고, 결국 잉글랜드의 정체에서 입법부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때의 모임은 몇몇 고위층이 주도한 것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문위원 정도의 자격을 가졌기 때문에 오늘날의 의회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논의한다’는 뜻이 담긴 의회의 가시적인 모습이 드러났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이시기 웨일스에서 잉글랜드의 영향력이 약해졌는데 귀네드의 흐웰린이 끝까지 시몽과 같이 헨리 3세를 축출했기에 시몽인 이에 대한 보답으로 1265년 중순 무렵 자신의 딸 엘리너와 흐웰린의 결혼에 합의했다. 1265년 6월 흐웰린은 핍튼 조약에서 시몽을 도운 대가로 다른 웨일스 군주들보다 높은 지위인 전 웨일스의 왕으로 승인받고 그가 침략한 영토도 그의 소유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시몽이 권력을 독점하게 되자, 불만을 품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는 헨리 3세를 지지하던 변경 귀족들과 연합한 뒤, 헨리의 아들 에드워드 왕자의 탈출을 도왔다. 탈출에 성공한 에드워드는 지지자들의 무리를 규합했다. 시몽과 에드워드의 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에드워드는 시몽의 소규모 군대를 섬멸했다. 시몽은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다시 자유의 몸이 된 헨리 3세는 왕위에 복귀할 수 있었지만 이미 그의 기력은 바닥이 나 있어서 실질적인 통치는 에드워드 왕자가 맡았다. 그럼에도 헨리 3세가 직접 실행한 일 몇 개가 있었는데, 이중 하나는 자신에게 반란을 시도한 런던 시민들에 대한 극단적인 보복정책이었다. 이런 헨리의 보복정책이 시작되자 또다시 반란군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다급해진 왕실에서는 에드워드의 삼촌인 콘월 백작 리처드를 비롯한 온건파들이 나서서 헨리 3세를 설득했다. 헨리는 1266년 좀 더 유화적인 케닐워스 성명을 정책으로 채택했으며, 이에 반란군도 화답 차원에서 항복했다.

이는 웨일스 지역에도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내야 했는데 1267년 9월 29일 흐웰린과 헨리 3세는 몽고메리 부근의 리드 쿠이마에서 정식 회동해 몽고메리 조약을 채결했는데 흐웰린의 힘을 절감한 헨리 3세는 그가 웨일스의 다른 군주들보다 높은 위치인 웨일스의 통치자임을 공식 인정했지만 대신 이전까지 쓰였던 브리튼인의 왕이 아닌 웨일스 공을 공식 칭호로 사용해야 했고 그가 웨일스의 소왕들에게 충성 맹세를 받을 권리가 있음을 승인했다. 그뿐만 아니라 흐웰린은 귀네드 외부의 영토를 상당 부분 그의 소유로 인정받았다.

1271년 에드워드 왕자는 큰조부인 리처드 1세를 본받고자 제8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동행했던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일찍 죽고, 명목상의 예루살렘 왕이었던 키프로스의 위그 3세는 바이바르스와의 휴전을 선언해버렸다. 에드워드 1세는 이 휴전에 반대했지만 이슬람 측에서 사절로 가장되어 보낸 자객이 휘두른 독이 묻은 단검에 배를 맞고 부상을 입어 건강이 크게 악화되자 여러 악조건에 부딪혀 귀국하였다. 이 때 몸은 쇠약해지고 노망기를 보이던 헨리 3세가 1272년 11월 16일 세상을 떠나면서 정식으로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즉위 후 에드워드 1세가 우선적으로 추진했던 일은 중앙정부의 기구를 정비하고 훌륭한 법률제도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에드워드는 상서경과 재무관 같은 고위 관리, 판사, 왕의 일상 업무를 돌보는 서기들, 그리고 중앙행정에 참여하는 몇몇 기사와 영주 등 주요 조언자들과 긴밀히 협조했다. 주요 행정기관으로는 상서청, 회계청, 왕실, 자문회의 네 곳이 있었다. 상서청은 특허장, 영장 등 공문서를 작성하는 부서로서 공식 문서에 날인하는 국새를 보관했다. 회계청은 재무관의 주재 아래 돈의 수입과 지출을 관장했으며, 재정 관리들의 회계를 감사했다. 이 두 기구는 오래되고 권위가 높아져 왕실과 분리된 독립 부서로서 웨스트민스터에 항구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가장 활동적인 행정기관은 왕의 자문회의였다. 이 기관은 왕의 주요 대신들, 그리고 몇몇 대영주들로 구성되었으며, 모든 종류의 국사를 다루었다. 왕은 이곳에서 그의 조언자들로부터 자문을 받아 중요한 결정들을 내렸다. 이처럼 중요한 행정기관인 자문회의는 또한 하나의 법정이기도 했다. 자문회의는 여느 법정들보다 상급의 법정으로 인정되어 특히 중요하고 어려운 사건들을 다뤘다. 이 회의는 다른 법정들의 관할이 아니거나 해결하기 힘든 사건 또는 왕의 이해관계에 직접 관련된 특별한 사안들을 다루었으며, 하급 법정의 일 처리를 점검했다. 그중에서도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칠 공적인 사건은 왕의 주요 봉신들의 모임인 대자문회의에 자주 상정되었는데, 본래 고모부이기는 하나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시몽 드 몽포르가 남긴 제도이나 반란 자체가 아버지 헨리 3세의 실정도 어느 정도 책임을 있었던 것으로 봤는지 그대로 존치시켰다.

그 밖에도 국왕의 권한과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특히 법률의 정비에 관심이 컸던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의 여러 법적 전통을 체계화하는 한편, 과거의 법률을 수정·보완하여 그 기능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원래 잉글랜드의 보통법은 수많은 분쟁에 대한 재판관들의 판례와 상서경이 발포한 영장들에 의해 성립되고 발달해 왔다. 그러나 거기에는 종종 문제가 발견되어 에드워드 1세는 이를 시정하기 위해 새로운 방도를 강구했다. 즉 보통법을 수정·변경 또는 보완하기 위해 제정법을 이용할 길을 찾았던 것이다. 그것은 법을 새롭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법을 성문화하고 적용 범위를 확대하여 그 기능을 봉건적 관계에 맞춰 조정함으로써 왕권강화의 법적 토대를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한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에드워드는 1274년 순회재판관을 지방에 파견하여 지방 정치의 실태를 조사했는데, 이 조사에서 지방관의 수탈, 관리의 부패에 대한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에드워드는 이 같은 악폐를 시정하기 위해 1275년의 웨스트민스터법과 1285년의 윈체스터법과 같은 일련의 총괄적인 법을 정했다. 이 법들은 강도, 살인 등 중죄를 더욱 철저하게 추적하고, 도시에서의 범법행위를 더욱 주의 깊게 감시하고, 범죄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여러 조항들과 지방 관리들의 부패와 비리를 시정하기 위한 조항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악폐는 제도적 결함보다는 사람으로부터 생긴다는 점을 성찰하게 된 에드워드는 1289년 부패한 관리들을 심문할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여 이들의 비리를 단속했다. 그는 또한 치안 유지관이라는 새로운 지방 관리들을 임명했다. 지방의 젠트리층에서 선발된 이들의 임무는 질서를 유지하고 범법자를 체포하여 국왕 법정에 세우는 책임을 지게 했다.

에드워드는 여러 제정법을 통해 봉건법을 정비했고, 기사의 자격과 임무를 새로 규정했다. 영국 사회를 귀족(유력자), 기사, 그리고 상인들과 국왕 자신으로 구성된 공동체로 이해했던 그는 윈체스터법에 연수 20파운드 이상의 토지를 보유한 모든 사람은 누구나 기사로서 말과 무장을 갖춰야 하고 주 법정에서 배심원이나 관리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는 1285년에 발포된 제2 웨스트민스터법에서 장자의 재산상속 원칙을 확립하였다.

에드워드는 또한 웨스트민스터의 법정들과 순회재판제도를 개선했다. 웨스트민스터에서의 최고 법정은 자문회의 내의 국왕과 의회였으며, 그 밑에 세 보통법 법정이 있었다. 법정은 연초, 봄, 여름, 가을 등 네 차례의 시기에 개정되었으며, 이 시기들 사이에 왕의 재판관들이 각 지방을 순회하여 법정을 열기도 했다. 이전에는 사법 업무만이 아니라 갖가지 행정 업무까지도 이들 순회재판관들에게 맡겨져 그들의 업무 부담이 매우 무거워서, 한 지역에 오랫동안 머물러야만 했고 업무의 처리도 더디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에드워드는 한정된 임무를 맡은 재판관을 파견함으로써 좀 더 신속하고 효율적인 순회재판을 시행할 수 있게 했다.

이와 같이 내정을 개혁하면서도 외정 또한 방치하지 않았다. 이미 1259년 파리 조약으로 인해 프랑스에서 세력이 확장이 불가능해진 잉글랜드는 브리튼 섬 나아가 브리튼 제도를 통일하는 것 외엔 더 이상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에 에드워드 1세는 무력에 가깝게 브리튼 제도의 통합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대상은 웨일스였다.

상술한대로 웨일스는 귀네드를 중심으로 번번히 잉글랜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했었다. 무엇보다 귀네드의 왕인 흐웰린이 자신의 불구대천의 원수이기도 한 고모부인 시몽 드 몽포르의 반란을 지원해준데다가 그의 예비 사위가 된 것으로 인해 흐웰린이 시몽의 복수로 군사를 일으킬 것을 염려했다. 그러다가 1275년 르웰린의 약혼녀인 시몽 드 몽포르의 딸 엘리너가 프랑스에서 웨일스로 건너오는 도중 잉글랜드인에게 붙잡혔다. 이런 일들로 인하여 1277년 최초의 웨일스 봉기가 일어나고 전투가 벌어졌다.

에드워드는 많은 변경 영주들의 도움을 얻어 대군을 이끌고 웨일스에 침입했다. 그는 육지와 바다 양면에서 웨일스인들을 협공하는 작전을 펴서 르웰린을 산중으로 몰아넣고 굶주리게 함으로써 그를 굴복시켰다. 이리하여 같은 해 11월 콘웨이 조약으로 르웰린은 변경 영주들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포기하고 많은 배상금과 더불어 에드워드에게 신하로서의 충성을 서약했다. 그는 엘리너와의 결혼을 허락받고 웨일스 공의 칭호를 유지한 채 축소된 그위네드의 지배를 허락받았다.

그러나 콘웨이의 휴전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조약이 체결된 지 4년여 만에 변경 영주들에게 반환한 토지의 분배 문제로 말썽이 일자 이를 둘러싸고 르웰린과 변경 영주들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고 또다시 반란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데이비드가 하와든 성을 점거한 데 이어 곧 르웰린이 여기에 가담하면서 반란이 확대되자 에드워드는 다시 웨일스에 침입했다. 처음에는 웨일스인들이 승리하는 듯했으나 1282년에 르웰린이 불의에 살해되면서 사기가 급속하게 떨어져 전세가 뒤바뀌었다. 마침내 이듬해에 데이비드마저 붙잡혀 처형됨으로써 이 두 번째 반란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284년 러들런법에 의해 르웰린의 공국은 잉글랜드 왕령에 병합되었으며, 잉글랜드의 본을 따라 플린트, 앵글시, 카나번 등의 여러 주로 분할 통치되고, 잉글랜드의 형법이 도입되었다.

에드워드는 웨일스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요지마다 견고한 석성들을 건설했다. 남쪽에는 카필리 성, 북쪽에는 보마리스 · 카나번 · 플린트 · 러들런 · 콘웨이 성, 서쪽에는 할레크 · 에버리스트위스 성 등이 축조되었다. 그러나 정복된 웨일스인들의 동화는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켈트적 문화를 가졌던 공국은 외견상 잉글랜드에 의해 통치되었으나, 그들의 부족적 관습은 유지되었다. 웨일스는 정치적으로는 잉글랜드화했으나 그들의 언어와 문화 역시 크게 침해당하지 않았으며, 사회적으로도 여전히 웨일스로 남아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경우 이미 오래 전 노르만 왕조에 굴복하면서 잉글랜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당시 국왕인 알락산더르 3세 역시 헨리 3세의 봉신으로서 기사로 서임받았다. 다만 알락산더르의 권위는 스코틀랜드에서 굳건하지 못한데다가 헨리 3세 또한 시몽과 프랑스와의 분쟁에 신경을 쓰는 동안 알락산더르를 돕지 못했다.

하지만 1263년 7월 11일, 알렉산더 3세가 헤브리디스 제도로 친정해 그곳에 남아 있던 노르웨이인들을 몰아내면서 점차 잉글랜드와 동등한 관계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알락산더르의 자식들은 그보다 일찍 세상을 뜨게 되었고, 알락산더르 3세 또한 1285년 프랑스 드뢰 백작의 여동생 욜랜드와 재혼 후 1286년 3월 19일, 욜랜드를 보기 위해 킹혼으로 떠났지만 그는 폭풍 속에서 실종되었고, 다음 날 킹혼 해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후 왕위는 3살짜리 외손녀인 노르웨이의 공주인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가 계승하지만 너무 어렸기에 4년 동안 노르웨이에 있었고, 이때 에드워드는 에드워드 1세는 브라이엄 조약을 채결해 마르그레트와 자신의 아들을 혼인시키려고 했다. 이후 1290년 7살 때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오던 도중 배멀미가 심해지면서 배 안에서 급사하면서 둔켈드 왕조는 완전히 단절되고 만다.

스코틀랜드의 왕위가 비게 되면서 존 바리올과 로버트 브루스를 비롯해 여러 명의 왕위 주장자가 나타났다. 자칫 내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스코틀랜드인들은 에드워드 1세에게 조언을 구했다.

스코틀랜드의 종주왕으로서 조종자 역을 자임한 에드워드 1세는 1292년 노럼에 스코틀랜드 영주들을 소집하고 존 바리올을 왕으로 지명했다. 이에 따라 바리올이 왕위에 오르고 에드워드에게 신하로서의 충성을 서약했다. 허나 에드워드는 존을 바지사장으로서 앉힣 목적으로 지목했기에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되었으나 정작 존에게 실권은 전혀 없었고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허수아비 왕에 불과할 뿐이었다.

1293년, 어린 조카를 대신해 파이프 백작위의 계승권을 주장한 스코틀랜드 귀족 맥더프가 잉글랜드 왕의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스코틀랜드인들 사이에 일어난 분쟁을 잉글랜드인 재판관이 심리하게 된 것이다. 이는 스코틀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 1290년 버갬 조약을 에드워드 1세가 멋대로 위반한 것이라고 스코틀랜드인들은 주장했다. 하지만 1292년 존 발리올이 에드워드 1세를 상왕으로 인정하고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스코틀랜드 왕국을 대표하여 그에게 신서를 한 시점에서 이전의 조약은 무효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바리올을 잉글랜드에 소환하여 그의 봉신으로서 가스코뉴의 전쟁에 참가할 것을 요구했다. 에드워드 1세의 외압을 견디다 못한 바리올은 에드워드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고, 에드워드와 적대하고 있던 프랑스와 동맹했다. 이것이 에드워드에게 스코틀랜드 침공의 빌미를 제공했다.

에드워드 1세는 1296년 3월 3만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진하여 베리크 온 트위드를 점령하고 주민을 무차별 도륙했다. 그는 웨일스인들이 사용한 장궁의 도움으로 스코틀랜드인들을 격파하고 바리올을 포로로 잡아 왕위를 내놓게 한 뒤 스스로 스코틀랜드의 왕위에 오르고, 영주들의 신서를 받았다. 그러고는 스코틀랜드 왕이 옛날부터 걸터앉아 왕관을 써오던 이른바 ‘스쿤의 돌’을 가지고 잉글랜드로 돌아와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내의 잉글랜드 왕의 대관식 의자 밑에 두었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스코틀랜드 지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297년 윌리엄 월레스의 지도로 민족적 반항이 일어났다. 5월에 월러스는 스털링 브리지에서 잉글랜드 군대를 무찌르고, 노섬벌랜드와 컴벌랜드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이듬해에 에드워드 1세는 다시 북쪽으로 나아가 폴커크 전투에서 월러스를 패배시켰다. 스코틀랜드인들의 반항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들은 1299년 존 코민의 지도 아래 투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4.2. 스코틀랜드 왕국

4.3. 웨일스

4.4. 아일랜드



[1] 일반적으로는 편의상 위그 카페가 왕위에 선출된 987년 시기부터 프랑스 왕국의 시작으로 카운트하지만, 이는 편의상의 구분일 뿐 서프랑크 왕국과 동일한 정치체였으며 존엄왕 필리프 2세 재위 중인 1190년에 비로소 국명을 '프랑크'의 발음이 변화된 '프랑스'로 칭해지게 된다.[2] 종주권 행사의 가장 큰 장애물이자 당대 최고 정적인 노르망디 공작, 앙주와 멘 및 투렌 백작 앙리 플랜태저넷이 필리프 2세의 부친 루이 7세의 첫 왕비였으나 이혼했던 아키텐과 가스코뉴 여공작, 푸아티에 여백작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과 결혼한 후 잉글랜드 왕 헨리 2세로 즉위하여 강대한 남프랑스의 넓은 영지를 차지하고 서부 브르타뉴까지 잠식하여, 프랑스 문화권 영토의 절반을 넘게 독식하고 있었다. 파일:1154.png[3] 비옥한 도시인 쌩토메흐, 에흐, 아하스, 보켄, 비에이 에스당, 바뽐므 등을 포함하여 수많은 백작령, 자작령에 대한 상위 주군의 권한을 행사케 했던 영지였다. 당시 북프랑스 일대는 물론이고 잉글랜드마저 경악하게 한 결정이었다. 플랑드르 백작령은 영역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프랑스 왕이 종주권을 행사한 이중 봉신이라는 형국에서 여타 군벌들처럼 독자적인 권한을 확립하려는 지속적인 정책을 견지해왔는데 이러한 합의안은 당시의 시대상의 흐름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당연지사 "플랑드르 백작이 플랑드르를 팔아 치운다, 미치지 않았다면 뭔가 우리는 모르는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필시 소년왕을 좌지우지 할 야욕을 실현하기 위한 고도의 교란일 것이다"라는 말들이 광범위하게 돌았고, 당시 필리프 2세와의 관계를 따져도 너무 많은 것을 퍼줬던지라 필리프 1세의 의도에 대해 현재도 갑론을박이 이어진다.[4] 어머니가 그 유명한 레이디 고다이버이다.[5] 벌금형이 나오면 그 중 3분의 1은 피해자, 3분의 1은 왕, 3분의 1은 백작[6] 왕이 성직을 임명할 수 있는 권리[7] 공교롭게도 두 왕 모두 중병에 걸렸음에도 전쟁에 관여했는데, 필리프는 지휘권을 놓지 않았고, 리처드는 병상에 누운 상태에서도 쇠뇌로 적병을 사살했다.[8] 프랑스군 15,000명 vs 연합군 25,000~30,000명 추정.[9] 프랑스군 사망 1,000명, 연합군 사망 1,000명+포로 약 9,000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