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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1세(신성 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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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였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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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호엔슈타우펜 왕조 초대 황제
프리드리히 1세
Friedrich I
파일:Barbarossa.jpg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제호 프리드리히 1세 (Friedrich I)
출생 1122년
독일 왕국 슈바벤
사망 1190년 6월 10일 (향년 67세)
아르메니아 왕국 살레프강
재위기간 신성 로마 황제
1155년 1월 2일 ~ 1190년 6월 10일
이탈리아 국왕, 부르군트 국왕
1155년 ~ 1190년 6월 10일
로마왕
1152년 3월 4일 ~ 1190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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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20><colcolor=#000> 배우자 보부르크의 아델하이트
부르고뉴 여백작 베아트릭스
자식 베아트릭스,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6세, 콘라트, 오토, 콘라트, 필리프, 아그네스
아버지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어머니 바이에른의 유디트
형제 베르타
종교 가톨릭 }}}}}}}}}
<colcolor=black> 독일어 Friedrich I. (프리드리히 1세)
이탈리아어 Federico I (페데리코 1세)
라틴어 Fridericus I (프리데리쿠스 1세)
1. 개요2. 생애3. 평가4. 여담5.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신성 로마 제국황제.

붉은 턱수염 때문에 별명은 바르바로사, 즉 붉은 수염이라 불렸고 후대 프로이센 왕국의 동명 국왕인 프리드리히 1세와 오인하지 않기 위해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라고 더 많이 불린다.

2. 생애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의 아들로 1152년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연 작은 아버지 콘라트 3세의 지명으로 로마왕[1]으로 선출되었다. 황제 대관식은 1155년. 즉위하자마자 신성 로마 제국 국내의 안정에 주력해 "국내 평화령"을 발표해 치안안정에 주력하는 한편, 대립관계에 있던 벨프 가문하인리히 사자공에게 바이에른을 양보한 후 일단 화해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오스트리아 공국 등을 신설했고 폴란드 왕국, 헝가리 왕국을 굴복시켰으며 부르군트 왕국의 왕위를 획득하여 위세를 전 유럽에 떨쳤다.

특히 프리드리히 1세는 이탈리아 경략에 적극적이어서 1154년부터 여섯 차례에 걸쳐 대규모 이탈리아 원정에 나서 롬바르디아를 장악하여 롬바르디아 왕위에 오르는 한편 옛 부르군트 왕국에서 출발해 롬바르디아 옆 피에몬테를 장악한 사보이아 백국움베르토 3세를 제압하고 더 나아가 교황까지 억눌렀다. 그러나 교황과 대립하여 롬바르디아 지역에서 구엘프[2]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쳤고 1176년, 레나노 전투에서 결국 패배하여 화의를 맺으면서 전 유럽에서 망신을 샀다.

1180년에는 자신을 원조하지 않던 하인리히 사자공을 추방하고 그 영지를 부하들에게 분할하여 나누어 주었고[3], 1186년에는 아들인 하인리히 6세를 위해 시칠리아 왕국의 배부르다 왕위계승권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의 중앙집권적 봉건주의식 통치는 의도하지 않게 영방국가들의 발전으로 이어져 후에 황제권 약화의 길을 열고 만다.
파일:external/www.bryanhoey.com/richard_dramatic.jpg

십자군 전쟁 3차 원정(1189 ~ 1191)에서 유럽 국가들 중 가장 많은 병력[4]을 이끌고 참전했으나 아나톨리아의 살레프강을 건너던 중 사망했다. 사인으로는 심장마비 혹은 익사가 거론된다. 아마도 고령에 찬물에 입수한 것이 원인인 모양.[5]미디블2: 토탈 워 - 킹덤즈》에서도 <십자군 캠페인>을 하다보면 이 이벤트가 떠버리며《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의 <바바로사 캠페인>에서도 무덥고 고된 행군끝에 십자군 일행에 합류한 이후 살레프강이 보이자 신이 나서 고령의 나이로 쇠사슬 갑옷을 입고 뛰어들다가[6] 십자군들이 보는 앞에서 사망한다. 이때 그의 부하들은 쇠갑옷 무게에 눌려 수영을 못하고 익사했다는 설과 갑작스러운 찬물에 심장마비가 발생해 죽었다는 설을 거론한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시신을 예루살렘에 매장하기 위해 염을 해야 했는데, 문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급사였고 야전에서 제대로 준비를 할 수가 없었다는 점. 장기간 시체를 보존하려면 소금으로 부패를 막아야 하는데 당시엔 소금이 매우 귀했으므로 야전에서 이를 구하기 힘들었고, 할 수 없이 식초에라도 절여서 부패를 막아보려 했다. 하지만 식초는 단백질을 변형시켜 무르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1세의 시신은 뼈와 살이 분리되어 초절임 비슷하게 되어버리고 만다. 결국 살은 안티오키아의 대성당에, 뼈는 티레 대성당에, 심장과 다른 장기들은 타르수스에 각각 매장했다.

3. 평가

서임권 투쟁 이후 황권이 약화되고 있던 상황에서 즉위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카롤루스 대제 시절의 강력한 제국을 꿈꾸며 적극적인 황권 강화와 영토 확장을 추구했다. 그 결과 그는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강력한 황권을 행사했고, 영토도 확장했다. 당대 유럽엔 프리드리히를 능가하는 권력자는 보기 힘들었다.[7]

그러나 한편으로는 중세 시대의 여느 왕들의 전설처럼 바르바로사의 활약도 낭만적인 전설이 되어 과장된 감도 있다. 그의 황권 강화는 그의 개인적 역량과 카리스마에 힘입은 바도 컸지만,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벨프 가문 출신이라는 막강한 백그라운드가 큰 힘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전 어느 황제보다도 화려하고 강력했던 출신 배경 덕분에 손쉽게 제후들을 결집할 수 있었다.

그는 황권신수설을 주장하며 교황에 대한 황권의 우위를 주장했고, 실제로도 강력한 황권을 구축했지만, 역설적으로 후대의 황제권 약화에는 기여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프리드리히 1세가 실시한 제국제후 정책은 당시엔 프리드리히의 강력한 황제권의 밑바탕이었으나[8], 영방국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며 후대에 황권 약화의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제국제후 정책을 통한 중앙집권적 봉건제는 오늘날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프리드리히 1세는 전쟁에서 전설적인 무공으로도 유명하다.[9] 중세 전설과 결부된 그의 활약은 후대인들의 숭배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무공, 특히 그가 많은 공을 들였던 이탈리아 경략에 대해서는 그가 들인 많은 노력과 희생에 비해서 실제로 거둔 성과는 크지 않다는 냉정한 평가도 존재한다.

매우 긴 기간 동안 제위에 있었으며, 이러한 긴 치세가 그의 업적과 위대함을 이루는데 무엇보다도 큰 보템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프리드리히 1세의 사제였던 자는 그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그의 인격은 그의 힘을 시기하는 자조차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균형잡힌 사람이다. 그는 매우 큰 키의 사람보다는 작지만 보통 키의 사람보다는 더 크고 고귀하다. 그는 금발이고 이마에서 웨이브가 있다. 그의 눈은 날카롭고, 그의 수염은 붉고, 그의 입술은 곱다. 그의 모습은 밝고 기운차다. 그의 이빨은 눈 같이 희다. 분노 대신 겸손으로 그는 얼굴을 붉힌다. 그의 어깨는 넓은 편이고, 건장한 체격이다."

무장으로서의 완전한 자질과 예리한 웅변술을 갖추었고, 인재 등용에도 뛰어나 라이날트 폰 다셀(Rainald von Dassel)[10], 오토 폰 프라이징(Otto von Freising)[11] 등의 성직자를 등용하였다. 중세 말기 이후에는 곤궁과 오욕에서 사람들을 구해내는 영웅으로서 황제 전설 속에 오래도록 살아 있었다.

본인의 능력과 업적도 대단하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화려한 기사도적 전설로 채색된 인물 중 한 명이다. 이는 황제로서 십자군 전쟁에 참전한 거의 유일한 사례였기 때문. 이런 탓에 전설과 역사를 분리해 살피는 일에 주의해야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해외에서는 이탈리아의 군주들 및 교황들과 대립했고, 독일 내에서는 특히 하인리히 사자공과 평생에 걸친 라이벌이었다. 사자공은 황제가 아니었을 뿐 작센바이에른이라는 막강한 배경을 가졌고 뛰어난 역량을 보유한 인물로 전쟁 및 영토 확장 성과, 도시 건설, 문화 장려 등 여러 면에 있어서 프리드리히 황제에 필적하는 인물이었다. 사자공은 특히 동방식민운동의 대표적인 군주로 엘베 강 동쪽으로 가장 넓은 땅을 확장한 독일 군주이기도 했다. 허나, 바르바로사가 평생에 걸쳐 매진한 이탈리아 공략의 마지막 단계에서 군을 보내지 않았던 탓에 황제가 패배하자 분노한 황제에 의하여 제국 밖으로 추방되고 말았다. 이런 관계 탓에 역사의 승자인 바르바로사는 위대한 인물, 사자공은 보잘것 없고 오만한 인물로 묘사되거나 역으로 사자공 재평가에 들어가 프리드리히가 별다른 성과도 없는데 전설 탓에 미화된 군주처럼 여겨지는 기풍도 있으나 이는 다소 과장된 평가로 프리드리히는 당대는 물론 신성 로마 제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황권을 휘둘렀던 군주 중 한 명이며, 그의 치세 하에서 제국은 어마어마한 경제적 발전을 거듭했다. 또한 1,600개 이상 존재했던 당시 독일 내부의 국가에 하나된 독일이라는 개념과 열망을 제시한 건 틀림없이 프리드리히였다. 애초에 남독일과 북독일의 상이한 문화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통틀어 하나의 독일을 이끄는 영웅 전설의 대표로 프리드리히가 꼽힌 건 프리드리히 자신에게 그런 의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설 속 영웅처럼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 절대적인 정복군주, 전술적 천재는 아니었으나 적어도 당대의 모든 이들이 프리드리히가 패배했다는 사실에 놀랄 정도로 어마어마한 업적을 세운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가 이탈리아를 장악하지 못 한 건 분명하지만, 반대로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투사하거나 제국 내에서의 황제권이 교권보다 명확한 우위를 차지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군주인 점도 부정할 수 없다. 패배는 있었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그 패배가 하인리히 사자공의 불참으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 하인리히 사자공 또한 황제에게 숙청당하고 몰락할 만큼 어마어마한 권세를 자랑했던 건 사실이다. 가끔 사자공을 패배시키고도 그 휘하의 영주들에게 충성을 받지 못 했다거나 오히려 덕분에 황권을 약화시켰다는 평가를 붙이기도 하는데 이건 신성 로마 제국 내지 봉건제의 특징이다. 사자공과 연결된 영주들의 최고 상사는 어디까지나 사자공이지 프리드리히와 봉건 계약을 맺은 게 아니며, 때문에 황제에게 충성할 의무는 발생하지 않기 때문. 오히려 프리드리히는 당대에 어마어마한 황권을 누렸으며, 이를 가문의 후광 덕분이라 말하는 자들도 있지만 애초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는 가문의 후광이 없으면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며, "그 가문의 후광을 얻고도 프리드리히 수준의 황권은 커녕 제대로 된 황권을 세운 황제가 얼마나 되느냐?" 물으면 대답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애초에 그가 황권을 약화시켰다는 말조차 애매한게 그의 후계자인 하인리히 6세는 당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황권을 휘둘렀다. 굳이 따지자면 프리드리히가 신성 로마 제국에서 권위의 몰락 비슷한 걸 경험했다면 프리드리히 1세의 황권과 하인리히 6세로 세습된 제위 등 지나치게 안정화된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집권 탓에 주변 가문들의 견제를 산 탓이지 후대의 황권 약화 빌미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하기는 힘들다.

어느 쪽이든 프리드리히 1세는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고 그런 삶에 어울리는 업적을 세웠다. 그러나 전설 속 모습처럼 무적의 군주나 어떤 불만 하나 없이 독일 민족 전원을 이끄는 기수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업적을 깎아내릴 이유도 없다. 프리드리히 1세의 업적을 살펴보기 위해선 그 업적의 과장된 면이나 깎아내린 면에 호도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4. 여담

파일:Frederick_Barbarossa_Portrait.jpg* 위의 그림을 보면 프리드리히 1세가 판금 갑옷을 입은 것으로 묘사되지만 사실 판금 갑옷은 잔 다르크가 살았던 15세기에 등장한 갑옷으로,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3번 문단에 나오는 사슬 갑옷을 입은 모습이 실제 모습에 가깝다. 하지만 간지나 보이는 그림이어서인지 대중매체에서 묘사할 때 자주 표현되는 편이다. 문명 6에서도 이 모습으로 나왔다.

5. 대중매체에서

"바바로사는 대식가에다 야망도 크고, 빨간 턱수염이 멋있는 사람이였지... 하지만 자네가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닐꺼야. 고작 그정도인가 싶겠지?"
"한 사람의 의지만으로 대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가능한지 궁금하겠지?"
(중략)
"어떤 이들은 바바로사의 통치가 실패작이였다고 말하지.
하지만 한 사람의 의지로 제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인류에게 훌륭한 유산이라고 생각되지 않나?"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에 대한 스포일러의 평가
파일:attachment/프리드리히 1세/프리드리히1세.png
징기스칸 4 일러스트


[1] 로마인의 왕. 혹은 독일인의 왕으로 독일왕도 있는데, 둘 다 혼용되어 사용했다.[2] 교황 지지자들[3] 여담인데, 이때 중세 유럽사상 가장 황당무계한 사건 중 하나가 터졌다. 자세한 건 에어푸르트 변소 사고 문서를 참조하기 바란다.[4] 상당수의 책들이 10만, 혹은 이를 전후하는 규모로 묘사했으나 현대의 학자들은 이것이 과장된 숫자라고 여기며, 실제로는 3~4천명의 기사를 포함한 12,000~15,000명 선의 군대였다고 여겨진다. 다만 이것도 단일 십자군 영주로서는 많은 병력이다.[5] 소설가 시오노 나나미의 표현에 의하면 "분명 더운 날씨였을 거고(아나톨리아 반도가 더운 지역인지는 차치하더라도) 막대한 군장은 군사들을 지치게 했다. 그런데 강이 나타났다? 식수다! 피서지다! 프리드리히 1세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체통은 지켜야겠지만 강도 건너면서 그 짓도 할 겸 들어갔다 군장에 나이가 나이라 그대로 꼬르륵......(즉위한 당시 나이 33살 추정, 이미 사망할 당시 68살로 70에 가까운 나이였다.)", "늙은이의 냉수"(나이에 걸맞지 않는 행동, 경거망동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볼 수 있겠다.)라는 일본 속담을 덧붙였다.[6] 아래 문단에서 설명하듯 고증적으로 훌륭한 것이다. 정작 게임상에서는 대장간에서 풀업시 판금 갑옷 사용이 가능하다.[7] 이에 필적하는 군주로는 동로마 제국의 마누일 1세 정도가 있었고, 이들은 강한 라이벌리를 형성했다.[8] 후대에 제위를 독점하는 합스부르크 가문도 이때는 프리드리히의 눈치를 보는 한낱 백작 가문이었다.[9] 한 예로 3차 십자군 원정에서 그가 이끈 독일 십자군은 룸 셀주크 술탄국의 수도인 이코니움 외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셀주크 군대를 상대로 대승리를 거두었으며, 이후 이코니움을 공격해 함락시켜 엄청난 전리품을 얻었다. 셀주크와 훨씬 가까운 비잔티움도 성공시키지 못했던 이코니움 함락을 훨씬 멀리 독일에서 온 원정군이 성공한 것이다. 이로 인해 룸 셀주크 술탄국의 군주인 쿠틉 알 딘(Qutb al-Din)은 독일 십자군이 자신의 영토를 통과하도록 허용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인질로 보내야 했다.[10] 프리드리히 1세 재위 시절 쾰른대주교(Archbishop of Cologne)이자 신성 로마 제국재상(= 정확히는 이탈리아의 대재상(Archchancellor of Italy)이다.)을 맡은 인물로, 프리드리히의 정치조력자였다. 당시 이탈리아의 구엘프(=교황 지지자들)와 기벨린(=황제 지지자들)의 분쟁 속에서 제국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바우돌리노》에서도 등장한다.[11] 신성 로마 제국주교이자 역사가. <성속(聖俗) 두 나라의 연대기>라는 연대기를 저술한 저자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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