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문의 주된 사용시기는 서주시대이므로 일반적으로 서주금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상나라청동기에도 족휘(族徽, 부족을 상징하는 문양)를 비롯한 문자가 주조되어 있는데, 딱딱한 거북껍데기나 뼈에 새겨야 하는 갑골문보다 거푸집을 빚는 게 조형을 더 자유롭게 나타낼 수 있어서 상형성이 더 농후하다. 또한 서주이후에 춘추전국시대의 청동기에도 많은 금문이 주조되거나 새겨져 있다. 그러나 자체상으로 금문은 일반적으로 서주의 금문을 말한다.
금문은 주로 청동기물에 주조되어 있기 때문에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하고, 이기명문(彛器銘文)이라고도 하며, 당시에 청동을 길금이라 하였기 때문에 길금문자(吉金文字)라고도 한다. 금문은 갑골문과는 달리 고대부터 세상에 전해져 내려온 것이어서 이에 대한 연구도 일찍부터 진행되었다. 금문은 정벌(征伐)·책명(冊命)·상사(賞賜)·사전(祀典)·계약(契約) 등 당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내용을 풍부하게 반영하고 있다.
원래 예악기·생활도구 등으로 사용된 청동기는 한편으로는 왕권의 상징으로 대표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하나라에서 제작한 정(鼎) 아홉 개, 즉 구정(九鼎)은 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천자의 상징이 되었다. 천하를 도모하는 것이 "구정의 무게가 얼마인지를 묻는다(問鼎)"로 대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1] 칼로 새긴 갑골문이 날카롭고 각이 지며 가느다란 것에 반하여, 동기에 주조된 금문은 굵고 둥글어서 중후한 풍격이 있다.
[1] 당시의 왕은 제정일치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낼 의무가 있었다. 여기에 쓰이는 것이 정인데, 이것의 무게를 물음은 그것을 사용할 날이 있으리란 뜻이다. 쓸 일도 없는 물건의 무게가 궁금할 리 없으니... 주 천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던 초나라에서는 심심할 때마다 그것을 물어보아 주나라와 그를 따르는 제후들을 약올렸고, 자기 나름대로 구정을 만들어 쓴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