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漢和辭典
일본어 : 大漢和辞典(だいかんわじてん, 다이칸와지텐)
1. 개요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 1883~1982)가 편찬하고 다이슈칸쇼텐(大修館書店)에서 발행한 일본 최대 규모의 한화(漢和)사전, 즉 일본어로 풀이한 한자사전.다이슈칸쇼텐의 사장인 스즈키 잇페이(鈴木一平, 1887~1971)가 모로하시에게 집필을 의뢰한 1925년부터 착수하여 1943년에 1권을 시작으로 1960년까지 총 13권을 발간했다. 현재는 총 15권짜리인데 14, 15권은 2000년에 보충 발간된 것이다.
2018년 11월 28일 디지털판이 발매되었다. PV는 9월 14일에 공개되었다. 가격은 10만 엔 정도[1]로, 요구하는 최소 사양은 약간 높은 편이다.
2. 출판 과정
모로하시 데쓰지는 1883년 일본 니가타현에서 서당 훈장 집안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한학을 익혔다. 장성한 뒤 동경고등사범학교 국어한문학과를 졸업하고 1919년 문부성 중국철학 문학연구생으로 선발되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모로하시는 중국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청조 교감학(校勘學)에 관심을 가졌는데, 다음과 같이 당시를 술회하였다. 이것이 대한화사전 편찬의 출발점이 되었다.
중국 유학 시절 하루의 3분의 1이나 4분의 1을 사전을 뒤지거나 원전(原典)을 감고(勘考)하는 일이 일상이었는데, 만일 완전한 원전에 의해서 완전한 해석을 한 사전이 있으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중략) ...중국에 강희자전은 있으나 숙자(熟字)[2]는 없고, 패문운부(佩文韻府)는 성어(成語)는 많으나 해석이 없다. '그러면 내가 한 번 해볼까'하고 막연히 생각한 적이 있다.
다이슈칸쇼텐의 창업자 스즈키 잇페이는 이런 말을 했었다.
출판은 천하의 공기(公器)이다. 한 나라의 문화의 수준과 그 전모를 보이는 출판물을 간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출판업자가 이루어야 할 책무이다. 첫째로 실제로 도움이 되는 편리한 것(검색상 부정확한 것을 바로 잡음), 둘째로 결코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것(정확하고 다른 것보다 우수한 특색을 가진 것), 셋째로 후세까지 남는 것이라는 세 가지를 고려하여 한 권의 한화사전을 출판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전을 집필할 적임자를 찾던 중 모로하시 데쓰지와 만났다.1928년 정식 출판 계약을 한 이후 모로하시는 강희자전을 비롯한 중국의 전적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어휘를 수집하고 원전의 용례를 모아 카드로 작성하기 시작, 1931년에 이 카드가 40만개 정도 되자 출판사가 계획한 한두 권으로 담을 수 없는 양으로 늘어났다.
그 후 스즈키는 사전에 알맞게 정판(整版) 공장을 따로 설치하고, 필요한 활자를 목판 조각사 수십 명을 동원하여 조각하게 하였다.
1941년 마감 단계에 들어가 표제자와 어휘에 일련 번호를 붙이고 최종적인 교정을 행했는데 이 기간에 조수 4명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었고 모로하시도 백내장으로 한 쪽 눈을 실명했다.
1943년 9월 10일 제1권이 간행되었는데 이로인해 모로하시는 아사히문화상을 수상했고 책의 예약 또한 3만 부를 넘었다.
그러나 1945년 2월 25일 도쿄 대공습으로 조판해놓은 1만 5천 페이지 분의 활자와 어렵게 입수한 용지가 모두 재로 변하는 일이 발생하여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하였으나, 모로하시에게 전권의 교정쇄 3부가 있어서 재기의 발판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사전 편찬을 재추진하며 스즈키는 대학 재학 중인 장남과 고등학교 재학 중인 차남을 모두 퇴학시켜 사업에 참여하게 하여 장남은 경영을, 차남은 식자 기술을 익히게 했다. 후에 삼남은 대학 졸업 후 경리업무를 맡게 했다.
또한 목판 인쇄를 위해 사진식자기연구소의 이시이 모키치(石井 茂吉)를 1년간 설득하여 승낙을 얻었고 이시이 모키치는 6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맡은 일의 일관성을 위해 표제자를 모두 혼자서 쓰는 일을 하루에 20자씩 8년간에 걸쳐 수행하였다. 이 작업 덕분에 1960년에 서체 개발의 공으로 기쿠치칸(菊池寬)상을 받았다.
결국 1955년 8월 제1권의 인쇄를 마무리했다. 이때까지 이 작업에 종사한 인원이 22만 2682명, 비용 또한 당시 물가로 환산하여 약 6억 엔을 넘었다.
3. 영향
대한화사전의 편찬은 한자와 한문의 종주국인 중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은 뒤이어 한어대사전을 편찬하게 된다.대만은 국방위원회가 중심이 되고 학술원이 실무작업을 맡아 1962년부터 1968년까지 작업해 4만 9905자를 담은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을 발간했고, 중국은 1975년 덩샤오핑과 저우언라이 등 중국 지도부가 직접 독려하며 국책사업으로 사전 편찬을 시작, 18년 동안 연인원 1천 명을 동원해 단자(單字) 2만여 자, 37만 어휘를 담은 <한어대사전>(漢語大詞典) 13권을 1994년에 완성했다.
한국에서는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가 1978년부터 2008년까지 30년에 걸쳐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 16권을 완간해냈다.
[1] 2019년 3월 말까지, 그 이후부터는 13만 엔[2] 대략 한자어(漢字語)를 말하는 거라고 보면 되는데, 숙자(熟字)는 한자어(漢字語)보단 범위가 넓어서 한자어 같은 단어가 아닌 한문 문장 등 한자들로 이루어진 말 전부를 아우르는 폭넓은 개념이다. 강희자전에 한자 낱자의 뜻은 한문으로 풀이되어 있지만, 한자어의 뜻은 일부 연면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실려있지 않은데 이를 언급한 것이다. 참고로 이 숙자(熟字)를 일본어에서 훈으로 읽은 것이 바로 숙자훈(熟字訓)인데, 예를 들자면 본디 ウゾク라고 읽어야 할 오적(烏賊, 오징어)을 いか로 읽는 따위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