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국권 피탈 과정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1875년 9월 20일 | 운요호 사건 | 일본의 근대적 군사 도발 |
1876년 2월 27일 | 강화도 조약 |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 체결 | |
1882년 7월 23일 | 임오군란 | 군란을 제압한 청군 주둔 | |
1882년 8월 30일 | 제물포 조약 | 군란을 이유로 일본공사관 경비 병력 주둔 | |
1884년 12월 4일 | 갑신정변 | 일본의 지원을 받은 급진개화파의 정변, 청군에 의해 진압 | |
1885년 1월 9일 | 한성조약 | 갑신정변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하는 일본의 함대 무력 시위. 이로 인한 조선과 일본의 협상 제물포 조약에 의거한 경비 병력 주둔 재확인 | |
1885년 4월 18일 | 톈진 조약 |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일 양국의 논의 파병된 청일 양국 군대 철수 및 향후 조선 출병시 상호 통지 | |
1894년 7월 23일 | 갑오사변 | 동학 농민 운동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파병 요청, 제물포 조약과 톈진 조약을 빌미로 일본이 파병 전주 화약 후 조선의 양국 군대 철수 요청 이를 무시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갑오개혁 추진 | |
1894년 7월 25일 | 청일전쟁 | 서해 아산만 풍도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기습하며 전쟁 발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반발한 동학의 2차 봉기 | |
1895년 4월 17일 | 시모노세키 조약 |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상실 | |
1895년 4월 23일 | 삼국간섭 |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압력으로 일본이 요동반도 반환 친일내각의 붕괴와 친러파의 대두 | |
1895년 10월 8일 | 을미사변 | 일본이 명성황후 살해 후 친일내각을 재구성 하고 을미개혁 추진, 이에 항거한 을미의병의 발발 | |
1896년 2월 11일 | 아관파천 | 고종이 감금돼 있던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 친일 내각 몰락, 친러 내각이 구성되고 근대화 추진과 대한제국 구상 | |
1896년 5월 14일 | 베베르-고무라 각서 | 일본제국이 한반도 세력권은 러시아 제국에 포함됨을 공인함. 러일 양국이 각국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동의함. | |
1896년 6월 9일 |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 | 일본제국과 러시아제국은 조선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차관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합의하에 제공하고, 러시아와 일본에 한반도 내 전신선의 보호권이 있음을 명시. 양국은 한반도에서 소요사태 발생시 군대를 투입할 권한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함. | |
1897년 10월 12일 | 대한제국 선포 | 경운궁으로 환궁했던 고종이 황제에 오르고 제국을 선포, 광무개혁 추진 | |
1898년 4월 25일 | 니시-로젠 협정 | 러시아와 일본 간 협정.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대한제국의 군사적 지원 요청 시 상호협상 없이는 응하지 않을 것, 한일 양국 간 경제적 교류에 대해 러시아가 저해치 않을 것을 약속 | |
1902년 1월 30일 | 1차 영일동맹 | 일본이 대한제국에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 |
1904년 1월 21일 | 대한제국 중립선언 | 대한제국은 러·일간 전쟁 시 중립임을 세계 각국에 선언 | |
1904년 2월 8일 | 러일전쟁 | 일본군의 러시아군 기습 공격으로 전쟁 발발. 일본군의 인천, 부산, 마산, 원산 상륙과 서울 및 경운궁 점령 | |
1904년 2월 23일 | 한일의정서 | 일본군의 대한제국 거점 주둔 | |
1904년 5월 31일 | 대한시설강령 발표 |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이권 강화 | |
1904년 8월 22일 |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차 한일협약) | 외국인 고문을 두어 일본이 국정에 간섭(고문정치) | |
1905년 4월 1일 | 한일통신기관협정서 | 대한제국의 통신 주권 침해 | |
1905년 4월 16일 | 대한제국군 감축 | 일본의 강요로 친위대 해산, 시위대와 진위대 감축 | |
1905년 7월 29일 | 가쓰라-태프트 밀약 |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종주권, 외교권을 대행할 것을 미국이 승인 | |
1905년 8월 12일 | 2차 영일동맹 |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정치상⋅군사상⋅경제상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 |
1905년 8월 13일 | 한국 연해 및 내하의 항행에 관한 약정서 | 대한제국의 연근해 주권 침해 | |
1905년 9월 5일 | 포츠머스 조약 |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할 것을 러시아가 승인 | |
1905년 11월 17일 | 을사조약 (제2차 한일협약) |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일본인 통감이 외교권 행사(통감정치), 한국의 보호국화 을사의병 발발 | |
1907년 7월 20일 | 고종 황제 퇴위 |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 황제가 이토 히로부미의 협박으로 강제 퇴위, 순종 황제 즉위 | |
1907년 7월 24일 | 정미 7조약 (제3차 한일협약) | 일본인 차관의 내정 간섭(차관정치) 부속각서에 대한제국군 해산 명시 | |
1907년 8월 1일 | 대한제국군 해산 |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8~9월 진위대 해산 남대문 전투, 정미의병 발발 | |
1909년 7월 12일 | 기유각서 | 대한제국의 사법권⋅교도 행정권 박탈, 일본이 대행 한국의 속령화 | |
1909년 9월 1일 | 남한대토벌 | 10월 말까지 두달에 걸친 일제의 남한 내 모든 의병 소탕, 항일의병의 만주 이동 | |
1909년 9월 4일 | 간도협약 | 조선과 대한제국의 간도영유권 시도 전면 수포화, 일본의 만주 철도부설권 확보 | |
1910년 6월 24일 | 한일약정각서 | 대한제국의 경찰권 박탈, 일본이 대행 | |
1910년 8월 29일 (체결일 8월 22일) | 경술국치 (한일병합조약) | 대한제국 멸망, 한반도의 식민지화 | |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 (a)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
경술국치 | |||
{{{#!wiki style="color:#FFF; 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555; margin:-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배경 | 대한제국의 국권피탈과정 | |
전개 | 운요호 사건 · 강화도 조약 · 청일전쟁 · 시모노세키 조약 · 을미사변 · 영일동맹 · 러일전쟁 · 한일의정서 · 가쓰라-태프트 밀약 · 포츠머스 조약 · 을사조약 · 정미 7조약 · 대한제국군 해산 · 기유각서 · 한일약정각서 · 경술국치 | ||
관련 인물 | <colbgcolor=#000><colcolor=#FFF>을사조약 관련자 | 이지용 · 박제순 · 이근택 · 이완용 · 권중현 · 민영기 · 이하영 · 이재극 · 이토 히로부미 · 하야시 곤스케 | |
정미7조약 관련자 | 이완용 · 임선준 · 고영희 · 이병무 · 조중응 · 이재곤 · 송병준 · 이토 히로부미 | ||
경술국치 관련자 | 이완용 · 박제순 · 고영희 · 조중응 · 민병석 · 이병무 · 윤덕영 · 조민희 · 데라우치 마사타케 | ||
기타 인물 | 조선 총독 · 왕공족 · 이왕 · 조선귀족 | ||
영향 | 순국 지사 | 민영환 · 박승환 · 이범진 · 조병세 · 황현 · 홍범식 | |
저항 | 을미의병 · 을사의병 · 정미의병 (최익현 · 신돌석 · 임병찬 · 이인영 · 허위 · 이강년 · 홍범도) · 13도 창의군 · 헤이그 특사 (이상설 · 이준· 이위종) ·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안중근) · 오적 암살단 (나철) · 황제 대리 의식 집행 거부 & 관료 암살 시도 (남정철 · 박영효 · 이도재)* ·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 | ||
기타 | 한일병합 (일제강점기 · 한국통감부 · 조선총독부 · 무단 통치 · 친일반민족행위자 · 토지 조사 사업) · 일본어 잔재설 · 식민사관 · 식민지 근대화론 · 한일 무역 분쟁 | ||
관련 문서 | 식민지 · 강점기 · 병합 | ||
* 박영효 등이 고종의 퇴위에 협조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처벌된 사건은 이완용이 고종 퇴위를 반대하던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음 | }}}}}}}}} |
영일동맹 | 英日同盟 | |||||||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 일본 제국 | ||||||
영어 | Anglo-Japanese Alliance. | 일본어 | 日英同盟 (にちえいどうめい)[1] | ||||
일본 미쓰코시 오복점에서 만든 영일동맹 기념엽서.[2] |
[clearfix]
1. 개요
영국에서 제작된 영일동맹 풍자화, 그림 밑에 적힌 글은 러디어드 키플링의 시 <The Ballad of East and West>의 문장이다. | 일본에서 제작된 영일동맹 풍자화, 크게 그려진 일본과 영국의[3] 앞에 작게 그려진 대한제국과 청나라가 놓여 있다. |
아,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라, 절대 서로 어울릴 수 없을지니,(Oh, East is East, and West is West, and never the twain shall meet,)
천지가 하느님의 위대한 심판의 옥좌에 설 때까지 그러하리라.(Till Earth and Sky stand presently at God's great Judgment seat;)
그러나 동서양도 국경도, 인종도, 계급도 없으리라.(But there is neither East nor West, Border, nor Breed, nor Birth,)
세계의 끝에서 온 두 강자가 서로 대면할 때에는!(When two strong men stand face to face, though they come from the ends of the earth)!
러디어드 키플링의 영일동맹 헌시 <동양과 서양의 노래(The Ballad of East and West)>
20세기 초,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과 일본 제국이 맺은 동맹. 20여 년간 지속되었으며, 한일병합을 포함한 일본 제국의 세력 확대에 큰 도움을 준 동맹이다. 당시 대제국이며 '영광스러운 고립'을 관철하고 있던 영국이 처음으로 동맹을 체결했다는 점[4]과 그 상대가 아시아의 신흥 강국인 일본 제국이었다는 점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천지가 하느님의 위대한 심판의 옥좌에 설 때까지 그러하리라.(Till Earth and Sky stand presently at God's great Judgment seat;)
그러나 동서양도 국경도, 인종도, 계급도 없으리라.(But there is neither East nor West, Border, nor Breed, nor Birth,)
세계의 끝에서 온 두 강자가 서로 대면할 때에는!(When two strong men stand face to face, though they come from the ends of the earth)!
러디어드 키플링의 영일동맹 헌시 <동양과 서양의 노래(The Ballad of East and West)>
크게 제1차 영일동맹(1902년)과 제2차 영일동맹(1905년), 제3차 영일동맹(1910년)이 있다.
2. 제1차 영일동맹
2.1. 배경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은 대영제국과의 1세기 가까이 끌어온 그레이트 게임으로 남하 계획이 번번히 막히자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었다. 러시아는 기존의 튀르키예, 흑해 및 중앙아시아 방향으로의 진출을 사실상 포기하고 대신 만주와 한반도라는 새로운 거점 확보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실제로 당시 러시아는 베이징 조약으로 청나라로부터 연해주를 획득했고 이어 만주에 15만 대군을 파견하여 만주의 군사적 점령을 시도했으며 요동 반도에서 다롄과 뤼순 항 및 동청철도(東淸鐵道 - 하얼빈 철도의 예전 이름)를 건설하여 남하를 시도했다. 또한 한국에서도 마산포, 용암포, 절영도[5]를 조차(租借)하려 하거나 조선에서 제주성 위협사건, 아관파천 사건과 같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노골적으로 친러 세력을 침투시켰다.
한편 일본은 반대로 메이지 유신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숙원이었던 '대륙 진출'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한다. 당시 일본 제국은 본토가 전쟁터가 되는것을 막겠다는 명분으로 한반도 점령을 시작으로 만주까지 진출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일본 제국이 청일전쟁의 승리로 한반도에서 청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데에 성공한 시점부터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려 하는 또 다른 세력인 러시아의 도전을 받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당장 러시아 주도하의 삼국간섭으로 인해 일본은 청일전쟁의 전리품인 요동반도를 내뱉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을 겪은 일본제국 내각은 아직 러시아 제국과의 체급과 군사력 차이를 인정하고 힘을 기르기 위해 '만주의 이권은 러시아가 차지하고 한국의 이권은 일본이 차지한다'는 기존 입장을 러시아에 표명하였으나 당연히 러시아 제국은 "니들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임?"이라는 반응과 함께 거부한다.[6]
한편 영국은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당연히 러시아가 눈을 돌려 동아시아를 노리자 동아시아의 팽창을 저지하려 했다. 이전에 러시아가 지중해로 진출하려고 하자 영국은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고 크림전쟁을 통해 진출을 저지하는 데에 성공한 적이 있으며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 거문도를 점령하기까지 하였다. 따라서 러시아의 만주, 한반도에 진출하려는 욕심을 알아챈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견제를 위해 지역강국인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한편, 1900년 미국의 헤이 국무 장관 역시 문호 개방을 주장하여 당시 열강 가운데 어느 한 나라가 만주와 중국에서 경제적 이권을 독점하려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었다. 1903년 1차 영일동맹 뒤 러일전쟁이 발생하여 1905년 일본이 승리를 거두자 미국은 운빨이든 뭐든 러시아를 이긴것이 맞고 자신들의 식민지인 필리핀까지 쳐들어올까봐 계산기를 두들긴 결과, 일본과 협력하기로 선회했고 일본도 미국과의 대러 협조를 위한 각서를 체결한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이것이다. 그러나 1907년 일본이 끝내 감당하기 벅찬 러일전쟁 전쟁 비용[7]의 충당을 위해서 만주에서 철도, 광산 등의 이권을 독점하는 조치를 취하자, 미일 협력 관계는 무산되었다.
2.2. 내용
1901년 일본의 입장은 러시아의 만주에 대한 단독 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여타 제국주의 열강과의 협조 하에 한반도 지배 뿐만 아니라 중국의 이권 분할에도 참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하여 영국과의 제휴를 모색하였다. 두 나라의 이해가 결부되어, 그 해 12월 양국은 일본 대표로는 주영 일본 공사 하야시(林董), 영국 대표로는 외무대신 랜스다운이 협상 교섭을 하였고, 1903년 1월 30일 런던에서 영일동맹을 체결하였다. 동맹 협약문은 전문 6개조로 되어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1. 영·일 양국은 한(韓)·청(淸) 양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영국은 청나라에, 일본은 한국에 각각 특수한 이익을 갖고 있으므로, 제3국으로부터 그 이익이 침해될 때는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2. 영·일 양국 중 한 나라가 전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제3국과 개전할 때는 동맹국은 중립을 지킨다.
3. 위의 경우에서 제3국 혹은 여러 나라들이 일국에 대해 교전할 때는 동맹국은 참전하여 공동 작전을 펴고 강화(講和)도 서로의 합의에 의해서 한다.
4. 본 협약의 유효 기간은 5년으로 한다.
2. 영·일 양국 중 한 나라가 전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제3국과 개전할 때는 동맹국은 중립을 지킨다.
3. 위의 경우에서 제3국 혹은 여러 나라들이 일국에 대해 교전할 때는 동맹국은 참전하여 공동 작전을 펴고 강화(講和)도 서로의 합의에 의해서 한다.
4. 본 협약의 유효 기간은 5년으로 한다.
영일동맹의 체결에 대항해 러시아는 '중국과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강조하면서 같은 해 3월 프랑스와 함께 러시아 - 프랑스 공동 선언을 발표하였으나, 러일전쟁에서 입은 타격 덕분에 국제 외교에서 크게 수세에 몰리는 입장이 되었다.
2.3. 결과
영국 국내의 반응은 충격이었다.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 후 오랫동안 초강대국 자리를 유지하며 어느 나라에 대해서든 도도한 외교적 태도를 고수하던 국가였다. 14세기 잉글랜드 왕국 시절부터 오랜 동맹 관계였던 포르투갈을 제외하고는,[8] 근대 최강국이었던 영국이 섣불리 동맹관계를 맺는 경우는 없었다. 그렇게 고고한 태도를 유지하던 자국이 동맹을 맺은 대상이 고작 극동의 신흥국이라는 사실에, 한동안 자조적인 분위기가 언론을 맴돌았다. '왕자가 방앗간집 딸과 결혼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여기서 나왔다.반면 일본에서는 세계를 지배하는 대영제국이 자국과 군사적 및 외교적으로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에 전국이 축제 분위기가 되었고, 자국이 열강의 반열에 들어섰다는 분위기에 들떴다. 이는 당시로서는 김칫국이었지만, 영일동맹 이후 가장 부유했던 다이쇼 시대로 넘어가면서 점차 현실이 되었다.
영일동맹의 결과, 영국은 러일전쟁 기간 동안 일본의 국채 등을 매입하는 등 전비를 간접적으로 지원했다.[9][10] 이에 그치지 않고 전함 미카사를 비롯한 최신예 영국제 군함을 일본이 발주하면 빠르게 수령하도록 허용했다. 당시에는 군함 제작국이 보유한 함선보다 더 좋은 군함을 타국이 구매하게 되면 당장 제작국의 해군이 태클을 넣는데, 이런 방해가 전혀 없었으며 바가지도 씌우지 않았다.
이런 도움에 힘입어서 일본은 러일전쟁(1904~1905년)을 시작하면서 만주 진출의 길목에 위치한 대한제국에서 안정적인 보급로 확보를 위해서 한일의정서를 강요했고, 결국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한반도와 만주로부터 러시아 세력을 축출하였으며, 한반도에 독자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3. 제2차 영일동맹
러일전쟁이 사실상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대다수의 불평등 조약이 사라짐에 따라 열강 중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1905년 8월 12일에 체결하여 일본의 한국 지배를 외교적으로 보장받았고 대신 영국은 일본으로부터 인도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받는다.또한, 영국은 만주벌판에서 벌어진 수차례의 정규야전에서 러시아군을 잇달아 패배시키는 일본군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는 한편, 만주에서 철수할 러시아가 인도로 진출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동맹의 적용 범위를 종래의 '극동'에서 '동아시아 및 인도'로 확대하였다.
그 결과는 바로 앞에서 언급한 내용의 상호 동맹 조약을 겸하여 그 해 3월 봉천 회전과 5월 쓰시마 해전에서 최종 결정된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의 과실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1905년 9월 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일본의 한국 지배가 공식 승인받았으며, 같은 해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된다.
4. 제3차 영일동맹
미국은 처음에는 이 동맹을 대(對)중국 문호 개방 정책으로의 지지와 방어 또는 극동에서의 러시아의 남하에 대한 방벽이 된다고 생각하여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러일 전쟁 후 만주의 철도 중립화 문제와 포츠머스 협정의 성립,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의 일본 이민 제한 문제 등을 둘러싸고 미일간 관계가 점차 미묘해지자, 긴밀한 영미 관계가 영일동맹과 모순되지 않도록 영국과 일본 양국에 강하게 요구했다. 간단히 말해서 영국과 일본이 편 먹고 미국을 양면 공격하는 사태를 불러오지 말라는 것이다.따라서 6년 후에 영일 양국은 미국을 그 동맹 협약에서 말하는 '제3국'에서 제외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제3차 영일동맹을 1910년 7월 13일에 체결했다. 그리고 독일이 팽창주의를 내세움에 따라 영국과 러시아는 1907년, 영러협상을 체결하여 그레이트 게임을 종식시킨 바가 있다. 그래서 영일동맹의 목표를 러시아 견제에서 독일 견제로 바꾸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제1차 세계 대전 때 당시 일본은 연합국의 편에 선다. 1914년 8월 1일, 영국은 주일대사관을 통해 일본에게 독일에 선전포고할 의무가 없다며 처음에는 일본의 참전을 요청하지 않았으나 동년 8월 4일 영국 외무부는 독일의 동양함대가 홍콩과 웨이하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일본에 독일령 교주만을 공격할 것을 요청했다. 처음에 영국이 일본에 참전을 요청하지 않은 것은 일본이 독일의 태평양 식민지를 점령할 경우, 호주와 뉴질랜드 입장에서 일본군이 코 앞에 오는 상황이고 미국 입장에선 필리핀과 하와이가 위협받을 수 있었기에 미국, 호주, 뉴질랜드를 배려한 행동이었다. 실제로 일본에 영국이 참전을 요청한 다음날인 8월 5일에 미국은 일본의 참전에 우려의 뜻을 표현했다.
일본 해군 내에서도 참전에 대해 찬반은 갈렸으나 8월 4일 독일의 엠덴급 경순양함[11]이 쓰시마 앞 바다에서 러시아 선박을 임검한 사건이 일어나자 독일의 동양함대의 존재가 일본의 통상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려 참전을 결정했다. 영국은 호주와 미국의 반발로 인해 일본에게 전선을 태평양 방면으로 확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일본의 참전을 인정했다. 즉, 초기 영국은 일본군을 통해 칭다오 지역의 독일군은 궤멸할 것을 목적으로 했다. 하지만 일본도 독일령 뉴기니를 노리고 있었고 끝내 점령해버리나 식민지가 아닌 위임통치령의 형태로 점령이 인정되었다.
이후 일본은 영국 등 연합국의 군사지원요청[12]에도 불구하고 칭다오 전투에서 승전한 일본은 유럽의 서부전선에 가담하지 않았다. 일본 육군은 친독 성향이 강한 편이었기에 파병에 더 부정적이었던 반면 영국 해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일본 해군은 영국을 도와주자는 분위기가 강한 편이었다. 이런 분위기의 차이로 인하여 일본은 육군 대신 해군 함대를 파견하게 되는데 주로 구축함이었고 기함으로 사용할 소수의 순양함이 더해졌다.[13] 유보트 때문에 꽤 고생하던 영국 입장에서는 구축함이 더 필요했기에 잠수함을 상대할 구축함이 오는 게 반가울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을 절호의 기회로 삼아 유럽 열강에게 군수품을 공급하고 구축함 파견의 대가로 아시아 등지에서 독일이 누리던 이권을 그대로 챙기는 것을 인정받았으며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거두어 산업화 도약에 성공한다. 사실상 일본으로서는 동맹국인 영국을 조금만 지원하고서는 막대한 이득을 얻은 셈이었다.
5. 파기
그러나 제3차 영일동맹 이후에도, 계속 미국과 일본간의 관계가 더 안 좋아지는 등 그 후의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둘러싼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그로부터 10년 후인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1921년 ~ 1922년)에서 조인된 영국·일본·미국·프랑스간의 4국 조약에 의해 파기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해당 비준서 기탁이 1923년 8월 17일에 이루어지면서 함께 실효되었다.동맹이 파기된 원인은 크게 다음과 같다:
1. 자국이 태평양에서 일본 제국과 충돌할 경우 영국이 영일동맹에 따라 일본의 편에 서는 상황을 경계한 미국이 동맹 파기를 압박함. 2.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성립되었는데, 당시 소련 해군은 제국 시절과 달리 연안 해군으로 축소되었기에 소련과 해양 패권을 두고 충돌할 여지가 사라진 영국 입장에선 일본의 지정학적 가치 및 중요도가 하락함. 3. 재정 상태가 악화된 영국이 불필요한 전쟁에 강제 개입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동맹 관계를 정리하려고 함. |
6. 영향
결국에는 폐기가 되었다고는 하나 해당 동맹을 바탕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세력 균형이 일본 쪽으로 기울어, 일본의 조선 점령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그 이후 만주 장악까지도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일본으로서는 득을 다 본 뒤, 1차 대전에서 전시 호황을 통해 채무를 완전히 청산하는 행운까지 뒤따랐다. 아직 산업화의 기초가 부족했었던 일본에게 하늘이 도운듯 지나칠 정도로 순조로운 사태 전개[14]는 제2차 세계 대전시 일본 제국의 추축국 가담에 이르는 과도한 자만심을 낳았다.여기에 더해서 일본군의 양대 축인 일본 해군을 세계 제3위의 해군으로 급성장시키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앞서 설명했듯이 러일전쟁에서 최신예 영국 군함을 판매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일본 해군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적 기반은 영국 해군이 기준이 되었으며, 이런 관계는 사실상 일본의 초드레드노트급 전함의 초석이 되는 공고급 순양전함의 판매와, 항공모함에 적용되는 많은 기술을 입수하는 것까지 진행되었다. 만일 영일동맹이 없었다면 이렇게 단시일 내에 일본 해군이 급성장을 하기 어려웠다.
1931년 만주 사변 때까지만 해도 영국은 일본을 비호했지만 1935년의 방공협정과 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양국의 관계는 빠르게 악화일로를 걸었고 결국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직후, 폭격을 퍼부은 뒤 홍콩 섬에 해군 육전대를 상륙시켜 구룡반도를 통해 5만 대군을 투입, 현지에 주둔한 영국군을 패퇴시키고 홍콩을 점령했다.[15] 그리고 더 나아가 싱가포르, 말라카 등의 말레이 연방 식민지들도 모두 점령함으로써 영국과 일본은 적으로 돌아섰다. 이후 아시다시피 영국도 종전까지 일본군을 신나게 두들겨 팼다.
그러나 전후 처리 문제에 있어서 영연방 측은 한일합방 과정이 당시 절차적으로는 적법적이었다고 보며, 조선의 독립운동 영향력을 부정하며 연합국, 추축국, 중립국도 아닌 제4분류인 특수지위국으로 분류하자는데에 일조했다. 상세는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2차 세계 대전/참전국 참조. 이렇게 된 건 당시 냉전의 격화와도 무관치 않았지만, 더 멀리 보면 이것도 일제강점기를 보장했던 영일동맹의 잔향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의 색부호 전쟁 계획에는 이 영일동맹을 고려한 계획이 있다. 적색-주황색 전쟁계획 (War Plan Red-Orange)이라 하여 영국-일본과 양면전쟁을 벌인다는 시나리오이다. 당시 영국은 미국에겐 해양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잠재 적국이 명백했고 일본에 대해서도태평양의 패권을 두고 일본 제국과의 전쟁을 펼칠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으므로 미국으로선 이 영일동맹까지 고려하면 영국-일본과의 양면전쟁의 가능성을 절대로 무시할 수 없었다.
7. 둘러보기
[[영국|]] 영일관계 관련 문서 [[일본|]] | ||
{{{#!wiki style="color: #fff; 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000><colcolor=#fff> 역사 | 영일동맹 · 러일전쟁 ·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 플라자 합의 |
사건사고 | 나마무기 사건 · 사쓰에이 전쟁 · 시모노세키 전쟁 · 귀축영미 · 태평양 전쟁 · 린지 앤 호커 살인사건 · 마리아 루스 호 사건 | |
외교 | 영일관계 · 미영일관계 · G7 · G20 | |
기타 | 일본계 영국인 |
[1] 모든 국가가 그렇듯 자국의 이름을 앞에 명시한다.[2] 왼쪽의 영국 소녀는 일본 황실의 꽃인 국화(菊花)를 들고 있고, 오른쪽의 일본 소녀는 잉글랜드의 국화인 장미를 들고 있다. 일본은 정해진 국화(國花)가 없고, 영국도 연합왕국 차원에서 정해진 국화가 없다.[3] 왼쪽 일본 측 인물은 일본 신화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른쪽 영국 측 인물은 영국 의인화 캐릭터인 브리타니아이다. 단, 그림에는 야마토히메라고 적혀있는데, 스이닌 덴노의 딸로 이세 신궁을 세운 야마토히메노미코토는 아니고 (참고로 이세 신궁은 아마테라스를 받드는 신궁으로, 야마토 시대에 세워졌다), 당시 일본제국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야마토 왕권에서 찾았는데 한국 민족을 배달의 민족이라 부르듯이, 야마토 조정의 주신이자 천황가의 조상신이 아마테라스이므로,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야마토히메라고 적어놓았을 공산이 크다. 외형은 누가 봐도 아마테라스니까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4] 영국이 외교상 동맹을 맺은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찔렀을때 네덜란드 독립군과 힘을 합쳐 싸우기도 했지만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속국이었기에 네덜란드 독립군은 비정규군이었다. 이후 초강대국이 된 영국의 인근 국가들은 전부 식민지를 누가 더 많이 얻나에 가까운 경쟁 관계였고 영국은 동맹조약에 비관적에 가까웠다.[5] 지금의 부산광역시 영도구[6]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내 연줄을 이용해 어떻게든 만주는 러시아가 한반도 통치권은 일본이 가지겠다며 딜을 걸었지만 러시아측은 한반도는 절반으로 나누자는 답변만 내놓으며 결렬되었다.[7] 일본 정부 예산이 2억 5천만 엔에 불과했을 때, 전쟁 비용은 무려 8년치 예산에 달하는 20억 엔이었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에 진 빚은 1985년에 다 갚았다.[8] 영국-포르투갈 동맹은 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군사동맹이다.[9] 단순히 간접지원이 아니라 사실상 일본은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끌어온 차관에 전비를 의존했다. 러일전쟁이 끝났을 때 일본은 이미 파산 직전의 상황이었으며 국력 이상의 힘을 끌어다 쓴 상태였다. 때문에 정작 "패전국"인 러시아로부터 조선과 만주에서 물러나게 하는 전략적 이익 이외에 아무런 배상금을 받아내지 못했는데 오히려 일본이 종전에 더 아쉬운 형편이었기 때문이다.[10] 단, 전비의 대부분을 차관으로 조달한 것은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에 있어서 러일전쟁의 여파는 정치적 측면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심각하여 러시아에도 금융공황이 닥쳤다.[11]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독일 전쟁해군 함정과는 다른 배다.[12] 영국 정부는 일본 육군 50만 명의 유럽 전선 투입을 거듭 요청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13] 영국 측에서는 공고급 순양 전함을 빌려주기를 요청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기준으로는 공고급도 충분히 1급 전력이고 애진코트같은 구식 전함도 갈취해서 써야 했을만큼 여유가 없었으니 가능성은 있다.[14] 영일동맹과 러일전쟁은 러시아에서 피의 일요일이라는 대형사고만 안 터졌더라면 러시아는 병력을 계속 투입할 여력이 있었다. 러일전쟁 승리 후 일본은 중일전쟁까지 시작, 중일전쟁에서는 무장이 더 좋은 중국 국민당군을 상대로 우세를 점하며 이기고 있었으니 자만심은 하늘을 찔렀다.[15] 중일전쟁 때는 중국과 일본 양측 모두 전시 물자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일부러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정식 전쟁이 아닌 사변으로 교전을 진행했다. 진주만 공습 직후인 1941년 12월에 가서야 중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 때문에 전시 규제를 받지 않고 모든 물자가 중국에 자유롭게 수입될 수 있어서, 일본은 중국의 물자 보급 루트인 홍콩을 점령할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