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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16:20:02

문제(유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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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송 제3대 황제
문제 | 文帝
파일:attachment/유의륭/36.송문제.jpg
출생 407년
동진 양주 진양군 단도현 경구리
(現 장쑤성 전장시 단투구)
즉위 424년 9월 17일
유송 양주 단양군 건강현
(現 장쑤성 난징시)
사망 453년 3월 16일 (향년 46세)
유송 양주 단양군 건강현 황궁
(現 장쑤성 난징시)
능묘 장녕릉(長寧陵)
재위기간 유송 제3대 황제
424년 9월 17일 ~ 453년 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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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F51BA><colcolor=#ece5b6> 본관 팽성 유씨
의륭(義隆)
부모 부황 고조 무황제
모후 문장태후
형제자매 부황 기준 7남 9녀 중 3남
모후 기준 외아들
배우자 문원황후, 효무소태후, 명선태후
자녀 19남 12녀
아명 거아(車兒)
작호 팽성현공(彭城縣公)
→ 의도군왕(宜都郡王)
묘호 중종(中宗) → 태조(太祖)
시호 문황제(文皇帝)
연호 원가(元嘉, 424년 ~ 4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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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즉위 이전2.2. 치세2.3. 비참한 최후
3. 평가4. 가족관계5.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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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남북조시대 유송(劉宋)의 제3대 황제.

시호는 문제(文帝). 휘는 유의륭(劉義隆).

묘호는 처음에 중종(中宗)으로 추존되었으나, 사실상 2년밖에 재위하지 못한 아버지 무제 유유와 막장으로 살다가 폐위되고 비명횡사한 흑역사 큰형 소제 유의부를 제외하곤 초대 황제나 다름없었으므로 묘호를 다시 고쳐서 태조(太祖)[1]로 개정하였다.

개막장과 인간 말종들이 철철 넘치는 유송 왕조에서 초대 황제인 아버지 무제와 함께 그나마 제대로 된 정치를 한 유일한 황제로 연호를 딴 원가(元嘉)의 치(治)명군으로서 유송의 전반기 29년(29년 4개월)을 다스렸다. 그의 치세는 유송이 존속했던 59년 가운데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그나마 문제가 있었기에 59년이나마 버틴 것이다.

중국의 주요 역사서 중 하나인 후한서도 그가 황제일 때 범엽이라는 신하가 쓴 것이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의희 3년(407년), 경구에서 유유와 호도안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거아로 4살 때 자의참군 유수의 보좌를 받아 경구에 주둔했고, 팽성공과 의도왕이 되었는데 진서장군, 형주자사도 겸했다. 유의륭은 키가 7척 5촌이었고, 어려서 총명하여 경서와 사서를 즐겨 읽었으며 예서에 능했다. 유유는 즉위 초에 그에게 죄수를 심문하도록 했는데 그의 판단이 이치에 맞아서 무척 기뻐했다.

의희 7년(411년), 겨우 4세였던 유의륭을 데리고 유유는 전방으로 가서 사기를 고양시키기도 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큰형 유의부가 황음무도하여 폐위되었다가 결국엔 살해되고, 무제의 둘째 아들 여릉왕 유의진도 여기 휘말려 살해되었다. 원래 유의부를 폐위시킨 서선지 등은 유의진을 황제로 세우려고 했으나, 서선지가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불만을 품고, 적합하지 않다는 핑계로 그냥 죽이자고 했고 결국 유의진도 죽였다.

유의진은 아버지 유유가 북벌하던 시절에 같이 종군했다가 아버지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철수할 때 북벌군 총사령관을 맡은 적이 있었다. 물론 당시 12세였던 나이는 둘째치더라도 이렇게 어린 애한테 제대로 된 지휘력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문제는 이놈이 약탈을 마구하고 가렴주구에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등 막장이었다. 이런 놈을 황제로 세우지 않은 것은 진짜 잘한 것이다.

2.2. 치세

서선지부량은 유의륭을 강릉에서 맞아들여 황제에 옹립했고, 사마 왕화가 수도 건강으로 갈 것을 강하게 주장하자 유의륭은 건강으로 갔다. 유의륭이 부량을 불러 형님들이 살해당한 전말을 듣고 오열하자 좌우 신하들도 모두 슬픔에 젖었고, 군사들은 감히 그 광경을 지켜 보지 못했으며 부량은 식은 땀이 나서 한마디도 말을 못했다. 8월에 유의륭은 건강 중당에서 즉위하여 이듬해 정월부터는 친히 정사를 다스렸다.

원가 3년(426년), 정월에 유의륭은 서선지, 부량, 사회가 형님들을 죽인 죄행을 공개하고, 그들을 주살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 정북장군, 남연주 자사 단도제를 파견하여 사회를 토벌하게 했는데 결국 서선지는 자살하고, 부량은 피살되었으며, 사회는 형주군을 이끌고 저항했으나 결국 연두에서 사로잡혀 멸족되었다. 유의륭은 유유의 중앙집권정책을 계승하여 호족들을 압제하고, 호적을 정리했으며 부세를 경감하고 몸소 적전을 경작했다. 또 농업 생산을 격려했으며, 유가 학술을 제장하고 현학, 사학, 문학을 제창하여 경제와 문화가 모두 발달하니 이를 '원가지치'라 불렀다.

원가 6년(429년), 유의륭은 대중정 배송지를 시켜 정사 삼국지의 주석을 달게 했다. 정사 삼국지는 워낙 간략하여 읽기에 답답했는데 배송지는 당대에 남아있던 여러 사서들을 인용해 원전을 본디 분량의 2배 분량으로 늘려 서술하였고, 올바른 평가와 역사관으로 명작을 탄생시켰다.

이렇게 국력이 부강해지고, 문화 산업도 장려했지만 북위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크게 소모되어 송나라는 점점 국력이 약해졌다. 이전에 북위가 유유가 사망하고 유의부가 뻘짓을 하는 틈을 타서 낙양, 허창, 활대, 호뢰관, 금용성을 점령하자 유의륭은 북벌을 꿈꿨다. 하지만 내란과 국력의 한계로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원가 7년(430년) 3월, 우장군 도언지를 파견하여 북위를 공격하게 했다. 도언지는 확오, 활대, 호뢰관, 금용성 등의 요충지를 차례로 수복했지만 8월에 북위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대패를 당하여 배를 태우고 수레와 물자를 모두 버린 채 도망쳐야 했다. 도언지는 사실 능력이 아니라 유의륭의 심복이라서 북벌군을 이끌었는데 담이 작아서 멀리서 들려오는 북위군의 함성과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 소리를 듣자 후퇴해 버렸다.

원가 13년(436년), 유의륭이 병들어 자리에 눕자 유유의 5남이자 그의 아우였던 팽성왕 유의강에게 정사를 맡겼다. 유의륭은 이 동생의 말을 듣고 명장 단도제를 죽이는 병크를 저지른다. 그런데 유의강의 부하들이 병든 유의륭을 죽이고 유의강을 옹립하려다가 발각되자 역적들은 토벌하고 아우 유의강은 옹립된 죄밖에 없었으므로 유배를 보냈다.

원가 22년(445년), 그런데 또 유의강의 부하들이 유배된 유의강을 황제로 옹립하려다가 발각되었는데 이번에도 부하들만 죽이고, 유의강은 아예 서민으로 만들었다.

원가 27년(450년) 3월, 북위가 현호를 공격해오자 북위군을 막는 사이에 혹시 유의강을 옹립하려는 세력이 나타나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던 유의륭은 결국 유의강을 죽였다. 북위의 군대는 42일이나 현호를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갔다. 6월에 유의륭은 다시 북벌을 감행했다. 그러나 군수 물자가 부족하여 왕공, 비빈, 조정과 지방 관리, 부호, 승려들에게 황금과 비단, 잡물을 헌납하게 하고, 자금을 빌렸다. 또 병력을 채우기 위해 여러 주에서 장정들을 징발했다. 7월, 북위를 쳐서 확오, 낙안을 점령하고 활대를 포위했다. 그러나 9월에 북위는 대군을 이끌고 활대를 구원했으며, 10월에 다시 송나라는 대패를 당하고 오히려 북위군이 다섯 갈래로 나누어 대규모적인 반격을 개시했다. 이때 북위군이 송군의 거점인 팽성, 우이를 피하고 장강 북쪽의 과보를 공격하자 건강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북위군은 송나라 깊숙이 들어와서 양식과 말먹이를 가지고 오지 못했기 때문에 약탈에 의존해야 했는데, 회수를 건너자 백성들이 도망치는 바람에 약탈할 게 없어서 결국 낙타와 명마를 송나라에 선사하면서 화친을 하자고 했고 송나라도 산해진미를 주며 화답했다. 결국 이듬해 정월 북위군은 물러나면서 농지에 불을 지르고, 백성들을 붙잡아갔는데 이 전쟁에서 두 나라 모두 막대한 손실을 봤다. 북위는 6주를 공격할 때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데, 장정들은 허리를 잘랐고 어린 아이들은 긴창에 꿰어 휘두르면서 장난을 쳤다. 하지만 북위의 군사들과 말도 과반수가 살상되어 그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이렇게 '원가지치'는 점차 쇠락해져 갔다.

2.3. 비참한 최후

원가 30년(453년) 정월, 유의륭은 장남이었던 태자 유소를 폐하고, 둘째 아들 시흥왕 유준의 과실이 많아서 유준을 죽일 생각을 했다. 원래 이들은 모두 이복 형제들로 유소는 원씨(원제규), 유준은 반숙비의 소생이었다. 또 3남 유준(劉駿)은 노혜남의 소생이었는데 그래서인지 가족 간의 정이 없었고 평소에도 과실이 많아서 추궁과 책망을 자주 당했다. 사실 시흥왕 유준은 그의 이복 동생이자 유의륭의 넷째 딸이었던 해염공주(장미인 소생)와 사통한 적이 있었다. 해염공주는 조천에게 시집갔는데 이 불륜이 조천에게 알려지자 조천은 해염공주를 욕하며 때렸다. 이에 유의륭은 조칙을 내려 두 사람이 이혼하도록 하고, 공주를 낳은 장미인을 공주 교육을 제대로 안 시켰다는 이유로 죽였으며, 조천의 아버지인 조백부는 이 사건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하지만 유의륭이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들에게 알려지게 됐고, 이에 분노한 유소와 시흥왕 유준 형제는 원가 29년(452년) 7월, 무당 엄도육 등과 함께 으로 유의륭의 모습을 조각하여 함장전 앞에 묻고 저주했다. 결국 이게 발각되어 땅에 묻었던 옥인형과 저주 편지들이 발견되자 유의륭은 대단히 노했다. 이듬해 정월, 도망친 엄도육이 유준의 집에 숨어있다는 걸 알고 그를 내놓으라고 했으나 거절당하자 그들을 처리할 결정을 세웠는데, 오랫동안 미루며 매일밤 상서복야 서담지(徐湛之)[2]와 의논만 했다. 그러나 반숙비가 이를 유소 일당에게 알리는 바람에 그들은 이것을 알게 되었고, 2월에 유소는 조서를 위조하여 1,000여 명을 이끌고 황궁에 쳐들어갔다.

그날 밤도 유의륭은 서담지와 날이 밝을 때까지 폐립에 관한 일을 의논하느라 잠자리에 들지 않았는데 유소의 심복 장초지가 칼을 들고 오는 것을 보자 책상을 들고 막았다. 그러나 칼에 맞아 다섯 손가락이 모두 절단되었고 서담지와 함께 살해되면서 한고조 이래로 역대 황제들 중에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비참하기로 따지면 친정을 꾀하다가 신하들에게 사실상 배신당하고 횡사한 조위 전폐제 정도가 비슷한 사례일듯. 비참하다고 하기는 애매하지만 어이없이 죽은 인물로는 베개에 눌려 죽은 효무제도 있다.

이때 유의륭은 태자로 6남인 유탄을 세우기로 하고 부르려 했을 때이니 아슬아슬하게 실패했다. 유의륭은 3남인 유준을 싫어했고, 5남은 일찍 요절했다. 4남인 유삭을 불러와서 면접을 진행했지만 탈락해서 6남인 유탄을 세우려고 했던 것.

그의 뒤를 이어 패륜아 유소가 3개월 정도 태초(太初)라는 연호를 쓰며 황제 노릇을 했다. 그러나 그는 재위 기간이 짧았고 무엇보다 아버지를 시해했기에 정통성이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유의륭의 3남 유준에게 죽었으므로 시호와 묘호가 없다. 참고로 그 혼란 속에 유준의 어머니 반숙비는 유소의 군사들에게 죽었다.

3. 평가

유의륭은 총명하고 너그러웠으며 검소했다. 또 정사에 부지런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문학과 유학을 매우 존중했다. 그러나 결점들이 있었는데 일단 그는 남의 일까지 모두 대신했다. 유의륭은 북벌시 장수들에게 계율을 지시했고,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자신의 지시가 없으면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게 원격 조종을 했다. 즉, 자신은 수도 건강에 가만히 앉아서 아주 멀리 있는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린 것인데 정작 위기가 닥치자 송군은 유의륭의 명령을 기다리는 사이 공격도, 퇴각도 하지 못해 대패하고 말았다. 또 인재를 보는 능력이 뒤떨어져 자신이 총애한다는 이유로 심복 도언지를 북벌군 수장으로 삼고 명성이 있다는 이유로 명장 단도제를 죽여버렸다가 훗날 후회한다.

개국 공신인 단도제는 지용을 겸비하고 이미 예전부터 공이 높아 위망이 높았으며 그의 부하들도 백전노장으로 유능했다.[3] 단도제는 최후를 맞으면서 "너희들의 만리장성을 스스로 무너뜨리는구나!(壞汝萬里長城:괴여만리장성)"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부하로 설융과 고진지라는 맹장이 있었는데 용맹이 관우, 장비에 비견되었지만 이들도 단도제의 죄에 연좌되어 처형되었다.

그러나 도언지는 운빨로 성과를 약간 거뒀지만 원래 담이 작고 무능해서, 정작 북위군은 1,000리 밖에 있는데 바람 소리를 듣고 북위군이 온다며 간담이 서늘해져 주변 권고도 듣지 않고 배를 불태우고 무기와 수레, 물자를 버린 채 퇴각했다.

마지막으로 결단력이 부족했다. 유의륭의 태자였던 유소와 시흥왕 유준은 과실이 많고 성품이 좋지 못해 유의륭이 그들을 자주 추궁하고 책망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두 아들은 옥으로 유의륭의 형상을 만들어 황궁 뜰에 묻고 저주했는데 이게 발각되었다. 이에 유소는 폐위하고 유준은 죽이려고 계획은 대충 세웠으나, 실행하지 않고 매일 밤 서담지와 의논만 했다. 결국 이걸 알게 된 유소와 유준은 조서를 위조하여 군대를 동원해 황궁을 습격하고 유소의 심복 장초지는 유의륭을 죽여서 결국 중국 역사상 최초로 황제 아버지를 태자 아들이 죽여버리는 패륜이 발생하게 되었다. 물론 군주인 아버지를 아들이 죽이는 일은 이미 춘추전국시대 때는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진시황이 황제로 칭하고 나서 이후로는 처음이었다.[4]

4. 가족관계

5. 둘러보기(계보)

송서(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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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권 「무제기(武帝紀)」 4권 「소제기(少帝紀)」 5권 「문제기(文帝紀)」
유유(劉裕) 유의부 유의륭
6권 「효무제기(孝武帝紀)」 7권 전폐제기(前廢帝紀)」 8권 「명제기(明帝紀)」
유준(劉駿) 유자업 유욱(劉彧)
9권 「후폐제기(後廢帝紀)」 10권 「순제기(順帝紀)」
유욱(劉昱) 유준(劉準)
※ 11권 ~ 40권은 志에 해당. 송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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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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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안종 · 소문수 · 장애친 · 장궐 · 사마무영 · 호도안 · 원제규 · 노혜남 · 왕헌원 · 하영완 · 심용희 · 왕정풍 · 진묘등 · 강간규 · 진법용 · 사범경
42권 「유목지등전(劉穆之等傳)」 43권 「서선지등전(徐羨之等傳)」 44권 「사회전(謝晦傳)」
유목지 · 왕홍 서선지 · 부량 · 단도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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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진악 · 단소 · 상정 · 유회신 · 유수 조륜지 · 왕의 · 장소 유회숙 · 맹회옥 ,맹용부, · 유경선 · 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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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권 「종실전(宗室傳)」
유도린 · 유도규 · 유준고
52권 「유열등전(庾悅等傳)」 53권 「장무도등전(張茂度等傳)」 54권 「공계공등전(孔季恭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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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 · 저거몽손 유소(劉劭) · 유준(劉濬)
100권 「자서전(自序傳)」
심약
(1) 본명이 사유(謝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인(景仁)으로 표기되었다.
(2)본명이 저유지(褚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숙도(叔度)로 표기되었다.
(3) 본명이 장유(張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무도(茂度)로 표기되었다.
(4) 본명이 왕유지(王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홍(敬弘)으로 표기되었다.
(5) 본명이 왕욱(王彧)으로 유욱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문(景文)으로 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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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송본기상(宋本紀上)」 2권 「송본기중(宋本紀中)」 3권 「송본기하(宋本紀下)」
유유(裕) · 유의부 유의륭 · 유준(駿) · 유자업 유욱(彧) · 유욱(昱) · 유준(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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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 11·12권 「후비전(后妃傳)」 ||
조안종 · 소문수 · 장애친 · 장궐 · 사마무영 · 호도안 · 원제규 · 노혜남 · 왕헌원 · 은숙의 · 하영완 · 심용희 · 왕정풍 · 진묘등 · 강간규 · 진법용 · 사범경 · 진도정 · 유지용 · 배혜소 · 왕보명 · 하정영 · 왕소명 · 유혜단 · 저영거 · 왕순화 · 장상유 · 치휘 · 왕영빈 · 정영광 · 완영영 · 서소패 · 장요아 · 심묘용 · 왕황후 · 유경언 · 심무화 · 장여화
13·14권 「송종실급제왕전(宋宗室及諸王傳)」
유도린 · 유도규 · 유의경 · 유준고 · 유의진 · 유의강 · 유의공 · 유의선 · 유의계 · 유소 · 유준(濬) · 유삭 · 유굉 · 유탄 · 유위 · 유창 · 유혼 · 유휴인 · 유휴우 · 유휴무 · 유휴업 · 유휴천 · 유이부 · 유휴범 · 유휴약 · 유자상 · 유자훈 · 유자방 · 유자욱 · 유자란 · 유자인 · 유자진 · 유자원 · 유자우 · 유자맹 · 유자운 · 유자사(劉子師) · 유자소 · 유자사(劉子嗣) · 유찬 · 유우 · 유홰 · 유숭 · 유희
15권 「유목지등전(劉穆之等傳)」 16권 「왕진악등전(王鎮惡等傳)」
유목지 · 서선지 · 부량 · 단도제 왕진악 · 주령석 · 모수지 · 부홍지 · 주수지 · 왕현모
17권 「유경선등전(劉敬宣等傳)」
유경선 · 유회숙 · 유수 · 손처 · 괴은 · 상정 · 유종 · 우구진 · 맹회옥 · 호번 · 유강조
18권 「조륜지등전(趙倫之等傳)」 19권 「사회등전(謝晦等傳))」
조륜지 · 소사화 · 장도 사회 · 사유 · 사방명 · 사령운
20권 「사홍미전(謝弘微傳)」 21권 「왕홍전(王弘傳)」 22권 「왕담수전(王曇首傳)」
사홍미 왕홍 왕담수 ,왕훈,
23권 「왕탄등전(王誕等傳)」 24권 「왕유지등전(王裕之等傳)」 25권 「왕의등전(王懿等傳)」
왕탄 · 왕화 · 왕혜 · 왕욱 왕유지 · 왕진지 · 왕소지 · 왕열지 · 왕준지 왕의 · 도언지 · 원호지 · 장흥세
26권 「원담전(袁湛傳)」 27권 「공정등전(孔靖等傳)」 28권 「저유지전(褚裕之傳)」
원담 공정 · 공림지 · 은경인 저유지
29권 「채곽전(蔡廓傳)」 30권 「하상지전(何尙之傳)」 31권 「장유전(張裕傳)」
채곽 하상지 장유 ,장승,
32권 「장소전(張邵傳)」 33권 「범태등전(范泰等傳)」 34권 「안연지등전(顔延之等傳)」
장소 범태 · 순백자 · 서광 · 정선지 · 배송지 · 하승천 안연지 · 심회문 · 주랑
35권 「유담등전(劉湛等傳)」 36권 「양흔등전(羊欣等傳)」 37권 「심경지등전(沈慶之等傳)」
유담 · 유열 · 고침 · 고기지 양흔 · 양현보 · 심연지 · 강이 · 강병지 심경지 · 종각
38권 「유원경전(柳元景傳)」 39권 「은효조등전(殷孝祖等傳)」 40권 「노상등전(魯爽等傳)」
유원경 은효조 · 유면 노상 · 설안도 · 등완 · 종월 · 오희 · 황회
41권 「제종실전(齊宗室傳)」
소도도 · 소도생 · 소요광 · 소요흔 · 소면 · 소경선 · 소적부 · · 소탄 · 소탄지
42·43권 「제고제제자전(齊高帝諸子傳)」
소억 · 소영 · 소황 · 소엽 · 소고 · 소장 · 소삭 · 소감 · 소봉 · 소예 · 소갱 · 소구 · 소현
44권 「제무제제자·제문혜제자·명제제자전(齊高帝諸子·文惠諸子·明帝諸子傳)」
소장무 · 소자량 · 소자경(卿) · 소자향 · 소자경(敬) · 소자무 · 소자륭 · 소자진 · 소자명 · 소자한 · 소자륜 · 소자정 · 소자악 · 소자문
소자준 · 소자림 · 소자건 · 소자하 · 소소수 · 소소찬 · 소보의 · 소보현 · 소보원 · 소보인 · 소보유 · 소보숭 · 소보정
45권 「왕경칙등전(王敬則等傳」 46권 「이안인등전(李安人等傳)」
왕경칙 · 진현달 · 장경아 · 최혜경 이안인 · 대승정 · 환강 · 초도 · 조무 · 여안국 · 주산도 · 주반룡 · 왕광지
47권 「순백옥등전(荀伯玉等傳)」 48권 「육징등전(陸澄等傳)」
순백옥 · 최조사 · 설연 · 우종 · 호해지 · 우완지 · 유휴 · 강석 육징 · 육혜효 · 육궐
49권 「유고지등전(庾杲之等傳)」 50권 「유환등전(劉瓛等傳)」
유고지 · 왕심 · 공규 · 유회진 유환 · 명승소 · 유이 · 유규
51·52권 「양종실전(梁宗室傳)」
소경 ,소매 소발 소앙 소욱, · 소의 · 소부 · 소창 · 소융 · 소굉 ,소정인 소정의 소정덕 소정립, 소수 · 소위 · 소회 · 소담
53권 「양무제자전(梁武帝諸子傳)」
소통 · 소종 · 소적 · 소속 · 소윤 · 소기
54권 「양간문제자·원제제자전(梁簡文帝諸子·元帝諸子傳)」
소대기 · 소대심 · 소대관 · 소대림 · 소대련 · 소대춘 · 소대성 · 소대봉 · 소대아 · 소대장 · 소대균 · 소대위 · 소대훈 · 소대구 · 소대흔 · 소대지 · 소대원 · 소방등 · 소방제 · 소방구 · 소방략
55권 「왕무등전(王茂等傳)」
왕무 · 조경종 · 조의종 · 석천문 · 하후상 · 길사첨 · 채도공 · 양공칙 · 등원기 · 장혜소 · 장징 · 풍도근 · 강현 · 창의지
56권 「장홍책등전(張弘策等傳)」 57권 「심약등전(沈約等傳)」 58권 「위예등전(韋叡等傳)」
장홍책 · 유역 · 정소숙 · 여승진 · 악애 심약 · 범운 위예 · 배수
59권 「강엄등전(江淹等傳)」 60권 「범수등전(范岫等傳)」 61권 「진백지등전(陳伯之等傳)」
강엄 · 임방 · 왕승유 범수 · 부소 · 공휴원 · 강혁 · 서면 · 허무 · 은균 진백지 · 진경지 · 난흠
62권 「하창등전(賀瑒等傳)」 63권 「왕신념등전(王神念等傳)」 64권 「강자일등전( 江子一等傳)」
하창 · 사마경 · 주이 · 고협 · 서리 · 포천 왕신념 · 양간 · 양아인 강자일 · 호승우 · 서문성 · 음자춘 · 두즉 · 왕림 · 장표
65권 「진종실제왕전(陳宗室諸王傳)」
진의 · 진상 · 진혜기 · 진창 · 진담랑 · 진백무 · 진백산 · 진백고 · 진백공 · 진백인 · 진백의 · 진백례 · 진백지 · 진백모
진숙릉 · 진숙영 · 진숙견 · 진숙명 · 진숙경 · 진숙헌 · 진숙제 · 진숙문 · 진숙달 · 진숙탄 · 진숙표 · 진숙웅 · 진숙중 · 진숙엄 · 진숙신 · 진숙우 · 진숙평 · 진숙오 · 진숙흥 · 진숙선 · 진숙목 · 진숙검 · 진숙징 · 진숙소 · 진숙광 · 진숙순 · 진숙모 · 진숙현 · 진숙륭 · 진숙영
진심 · 진장 · 진윤 · 진억 · 진언 · 진경 · 진건 · 진념 · 진지 · 진전 · 진번
66권 「두승명등전(杜僧明等傳)」
두승명 · 주문육 · 후진 · 후안도 · 구양위 · 황법구 · 순우량 · 장소달 · 오명철
67권 「호영등전(胡穎等傳)」
호영 · 서도 · 두릉 · 주철무(1) · 정령세 · 심각 · 육자륭 · 전도집 · 낙문아 · 손창 · 서세보 · 주부 · 순랑 · 주경 · 노실달 · 소마하 · 임충 · 번의
68권 「조지례등전(趙知禮等傳)」
조지례 · 채경력 · 종원요 · 한자고 · 화교 · 유사지 · 사기 · 모희 · 심군리 · 육산재
69권 「심형등전(沈炯等傳)」
심형 · 우려 · 부재 · 고야왕 · 요찰
70권 「순리전(循吏傳)」
길한 · 두기 · 신념 · 두혜도 · 완장지 · 견법숭 · 부염 · 우원 · 왕홍궤 · 심우 · 범술증 · 손겸 · 하원 · 곽조심
71권 「유림전(儒林傳)」
복만용 · 하동지 · 엄식지 · 사마경 · 변화 · 최령은 · 공첨 · 노광 · 심준(峻) · 공자구 · 황간 · 심수 · 척곤 · 정작 · 전완 · 장기 · 고월 · 척곤 · 왕원규
72권 「문학전(文學傳)」
구영국 · 단초 · 변빈 · 구거원 · 왕지심 · 최위조 · 조충지 · 가희경 · 원준 · 유소(昭) · 종영 · 주흥사 · 오균 · 유협 · 하사징 · 임효공 · 안협 · 기소유 · 두지위 · 안황 · 잠지경 · 하지원 · 서백양 · 장정견 · 완탁
73·74권 「효의전(孝義傳)」
공영 · 유유(瑜) · 가은 · 곽세통 · 엄세기 · 오규 · 반종 · 장진지 · 구걸 · 사각수 · 왕팽 · 장공 · 서경 · 손법종 · 범숙손 · 복천여 · 허소선 · 여제인 · 손극 · 하자평 · 최회순 · 왕허지 · 오경지 · 소예명 · 소교처양 · 공손승원 · 오흔지 · 한계백 · 구관선 · 손담 · 화보 · 해숙겸 · 한영민 · 유풍 · 봉연백 · 오달지 · 왕문수 · 악이지 · 손법종 · 유도민 · 등담공 · 도계직 · 심숭소 · 순장 · 길분 · 견염 · 조발호 · 한회명 · 저수 · 장경인 · 도자장 · 성경준 · 이경서 · 사린 · 은불해 · 사마고 · 장소
75·76권 「은일전(隐逸傳)」
도잠 · 종소문 · 심도건 · 공순지 · 주속지 · 대옹 · 적법사 · 뇌차종 · 곽희림 · 유응지 · 공기 · 주백년 · 관강지 · 어부 · 저백옥 · 고환 · 두경산 · 장영서 · 오포 · 서백진 · 심인사 · 완효서 · 등욱 · 도홍경 · 제갈거 · 유혜비 · 범원엽 · 유선 · 장효수 · 유승선
77권 「은행전(恩倖傳)」
대법흥 · 서원 · 완전부 · 기승진 · 유계종 · 여법량 · 여문현 · 여법진 · 주석진 · 육험 · 사마신 · 시문경 · 심객경 · 공범
78·79권 「이맥전(夷貊傳)」
임읍 · 부남 · 중천축국 · 사자국 · 고구려 · 백제국 · 신라 · · 부상국· 하남왕국 · 탕창 등지 · 무흥국 · 형옹주·예주만 · 고창 · 쿠처 · 우전국 · 파사국 ·연연
80권 「적신전(賊臣傳)」
후경 ,왕위, · 웅담랑 · 주적 · 유이 · 진보응
(1) 본명이 주철호(周鐵虎)로 당태조로 추존된 이호(李虎)를 피휘하여 무(武)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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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 유유는 57살에 즉위해 59살에 죽었다. 환갑만 넘겨도 기적으로 여길 정도의 전근대 시대임을 감안하면 거의 80대에 즉위한 것이다. 소제는 폐위되었기에 유송 왕실 입장에선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2] 무제 유유의 사위로 유유의 장녀 회계공주의 남편이었다. 회계공주와 유의륭은 이복 남매지간이었으나, 어쨌든 서담지는 유의륭의 처남이었던 셈이다.[3] 단도제가 병법 36계의 창안자라는 설도 있는데 확실한 것은 아니다. 36가지 계략을 다 창안했다기보다는 이전부터 전해지는 여러 계략이나 책략들을 36계로 정리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4] 태자는 아니지만 북위에서 도무제의 아들이 도무제를 시해한 일이 있긴 했다. 그 아들의 어머니가 도무제의 이모였다는 사실과 같이 보면 춘추시대에 많이 나온 막장 가정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