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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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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인구3. 민족4. 언어
4.1. 현지화4.2. 루스화
5. 종교6. 교통

1. 개요

본 문서는 소련의 인문환경을 다룬 문서다.

2. 인구

1991년 7월의 소련 인구는 2억 9,304만 7,571명으로, 당시 중국, 인도에 이어 세계 3위였다. 그러나 그동안 미국의 인구가 폭풍성장하여 3억을 넘어버렸기 때문에 2020년 현재는 옛 소련 구성국들의 인구를 모두 합해도 미국에 밀리는 4위권이다.

소련은 다민족국가로, 민족 수가 수백여 개에 달했었다.[1] 1989년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이 소련 인구의 51.4%인 1억 4,516만명이었으며, 그 다음이 우크라이나인(4,419만명), 우즈베크인(1,670만명), 벨라루스인(1,004만명), 카자흐인(814만명) 순이었다. 별도의 자치지역조차 없었던 독일인유대인[2]도 각각 204만명, 138만명이나 되었다. 참고로 고려인은 약 50만명.

대략적으로 보면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을 포함한 동슬라브 민족이 70%를 차지했다. 12%는 튀르크계 민족, 기타 10%였다. 2011년 통계에 따르면 구소련에 해당하던 15개국 인구 총합은 2억 8,767만 4,254명 가량으로 오히려 줄었다. 소련 해체 이후 구소련 구성국이 모두 경제 파탄을 겪었던 탓이다.

3.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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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언어

소비에트 연방언어 정책은 시기별로 차이가 많이 났는데, 크게 보면 초기의 민족어 평등 정책과 대(大)러시아 주의에 입각한 러시아어 동화 정책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소련의 초기 언어정책은 러시아 제국의 언어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의 문맹률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1879년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9~49세 사이 전체 인구들 중 글을 읽을 수 있는 인구는 24%에 불과했다.[3] 특히 농촌과 비러시아계 민족들의 문맹률 문제는 더욱 심했는데, 농촌은 인구의 19%, 중앙아시아의 경우 남성의 10%, 여성의 3%만이 문맹을 벗어난 상태였다.

일반 대중에게 공산주의혁명의 당위를 설파하려면 당연히 문맹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프롤레타리아니 공산 혁명이니 하는 복잡한 개념들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초창기의 언어 보급 정책의 방향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소련의 국부인 블라디미르 레닌이었다. 레닌은 자신부터가 순수한 러시아계 혈통과는 거리가 멀었고[4] 개별 민족의 자유에 우호적인 사람이었다. 이런 레닌의 사상은 언어 정책에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4.1. 현지화

1918년~1920년은 비러시아 민족에 대한 언어 교육의 평등권이 확립된 시기이다. 레닌은 문맹 퇴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언어 보급 정책을 실시했는데, 그 어떤 언어도 국가 언어의 지위를 가질 수 없다고 선언하고, 모든 민족은 평등하다는 평등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언어 보급 정책의 핵심은 물론 학교였다. 학교 일선에서 민족어의 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소련 영토에 산재한 다양한 언어들은 극히 소수를 제외하면 대단히 막장스러운 상황이었다. 혁명이 일어난 시점에서 약 130개 이상의 언어가 존재한다고 추산되는데 반해 단 13개 언어만이 문어(文語)로서 기능하고 있었고, 19개 언어만이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민족어의 표준화 정책 및 보급은 성공적이어서 1934년에는 무려 104개의 민족언어로 교과서가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의 소련의 민족정책을 일컬어 '코레니자치야(коренизация)'라고 한다. 코레니자치야는 '토착화', '현지화'라는 뜻. 코레니자치야는 그 이전의 대(大)러시아주의 성향의 러시아 제국의 민족정책에 반대되는 정책이었다.

문자 개혁 또한 활발히 진행되어서, 문자가 없는 민족들과 쓸 문자가 없어 자신들 종교의 문자인 아랍 문자를 쓰는 민족에게는 슬라브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표기하기 힘든 문자인 키릴 문자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자를 언어에 맞게 변형하여 제공하고, 고유의 문어 전통이 확립된 지역에는 그들의 문자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키릴 문자 대신 로마자를 보급한 이유는, 로마자가 익히기 쉽고 보다 국제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코민테른이 세계혁명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하고... 또한 로마자의 보급이 꼭 민족어 존중의 측면에서만 이루어진 건 아니라서, 당시 아랍 문자를 사용하고 있는 이슬람계 민족과 몽골 문자를 사용하고 있는 민족들의 경우 이를 계기로 소비에트 영향권 바깥의 외부 세력과 결탁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조기에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5]

결과적으로 소비에트 정권의 문맹 퇴치 정책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1897년 당시 문자 해독률은 24%에 불과했지만 1959년이 되면 97.9%에 이르게 된다.

4.2. 루스화

이오시프 스탈린 이후 소비에트 정권은 일관되게 대러시아주의에 입각한 루스화(Russification)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시작했다.

우선 1920년대 말에 '라티니자치야(Латинизация, Latinization)'라는 이름으로 아랍 문자를 사용하던 언어권(아제리어, 우즈베크어 등)에 라틴 문자를 보급하였고, 라틴 문자를 사용하던 언어들도 1939년경이 되면 키릴 문자로 죄다 전환한다. 그루지야어아르메니아어같이 고유의 문어 전통이 있는 언어나 독일어, 이디시어 같은 언어에는 그렇게까지 못 했지만 나름 유구한 역사를 가진 다른 지역에는 그냥 키릴 문자를 강요한다. 이런 식의 키릴 문자 강요는 상당수 민족언어에 문제를 일으켰는데, 비슬라브계 언어들의 경우 민족어의 음운구조에 정확히 부합하지 않는 키릴 문자로 언어를 표기함으로써 언어 사용에 심각한 문제점이 발생했다.[6]

1938년에는 비 러시아계 학교에서의 러시아어 교육 정책이 의무가 되었다. 사실 1938년 쯤이면 민족언어의 보급과 교육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과는 별개로, 이미 러시아어의 상층언어 지위가 공고해진 상태였으므로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각 가정에게 민족어 교육을 의무화하지 않고, 자녀에게 러시아어와 민족어 중 하나를 선택하여 배울 수 있게하는 정책을 발효했다. 얼핏 생각하면 선택권을 주면 민족어 교육 면에서 좋을 것 같지만 비러시아계 민족 또한 러시아어를 선호하게 되었다. 중앙어와 지방어가 병용되는 상황에서는 중앙권력이 강해질수록 중앙어 구사 능력이 계층의 척도가 되는 경향이 강하며, 소련처럼 중앙정부의 정책에 지방 공화국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고, 정치가 경제를 지배하는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소련의 경제적 자원은 대부분 러시아에 있었다. 요컨대 러시아 민족이 주류로서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소련 정부의 지배를 받는 이상 러시아어 구사 능력 없이는 경제, 사회, 정치적으로 힘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을 받는 청소년들이나, 그 청소년의 부모 세대로써는 당연히 러시아어 교육을 더 중시하게 된다. 전통의 상실을 두려워하는 조부모세대는 오히려 민족어 교육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기 쉽지만, 교육 문제에서는 당연히 러시아어 구사자가 실권을 가질 수 밖에 없다.

1968년에는 소련 교육과학 아카데미 산하에 민족학교에서의 러시아어 교육을 위한 연구소가 설립되어, 교과별 단어 수준 선정에서부터 교사 교육에 이르는 광범위한 러시아어 교육 및 교수법 연구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1975년에는 모든 중등학교 이상에서 러시아어를 선택과목으로 채택하고, 1979년에는 '최소화'라는 슬로건 아래 러시아어 교육 정책이 유치원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런 강력한 러시아어 사용 장려 정책에도 불구하고 민족어를 버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문학이나 언어 교육의 매개어는 여전히 민족어 비중이 높았고, 민족어 교육 시수도 그렇게 낮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1960년대까지는 타타르카자흐, 우즈벡, 키르기즈 같은 튀르크계를 주축으로 대부분의 소수민족이 비동화 그룹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사회/경제적 조건이 급변하기 시작하여 비동화그룹의 인구가 차츰 동화그룹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좀 더 구체적인 데이터를 살펴보자.
연도 UM UB AB AM
1970 51.0 36.7 3.1 9.2
1979 37.6 48.8 3.5 10.1
1989 10.1 59.0 4.3 21.3
1994 6.0 61.6 3.5 22.0

UM은 비동화 그룹으로 민족어만 사용, UB는 비동화 이중언어그룹으로 민족어를 제 1언어로, 러시아어를 제 2언어로 사용, AB는 동화 이중언어그룹으로 러시아어를 제 1언어로 민족어를 제 2언어로 사용, AM은 동화그룹으로 러시아어만을 사용한다. 1970년대 이후 민족어만을 사용하는 비동화 그룹의 비율이 급격히 줄어들고 러시아어만을 사용하는 동화그룹이 늘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소련의 언어 정책은 소련 해체 이후에도 구 소련 국가들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해당국의 모국어가 아닌 러시아어만으로 생활에 큰 무리가 없을 정도이고, 정치적으로도 민족 정체성과 직결되기때문에 예민한 문제로 남아있는 실정이다.[7]

5.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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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가 우선적으로 추진한 조치는 종교에 의해 주도된 제도들의 부정과 종교의 자유 보장이었다.[8] 당시 혁명을 주도했던 레닌은 "을 말하는 자들은 어리석다." 라고 말하면서 무신론을 주장했다.[9] 애초에 마르크스부터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 했으며[10], 공산주의의 주요 철학적 기반인 (변증법적) 유물론부터 관념론인 종교를 완전히 배격하는 이론이다. 이에 따라 소련은 혁명 이후 러시아 제국에서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러시아 정교회의 특권을 박탈했다.

그러나, 영화 등의 일상적인 미디어에서 종교적인 표현이나 연출이 나오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아무리 행정력이 강했던 소련이라도 개개인민의 신앙을 단속할 수는 없었고, 종교를 하나의 '문화'로 보는 시각이 흔했다. 대표적으로, 브레즈네프 집권 당시 공산권에서 대 히트를 친 코미디 영화 "슈릭의 모험" 시리즈는 종교적 표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한다. 한마디로 종교적 목적을 가진 표현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가능했단 얘기.
다만 시기에 따라 종교 탄압의 강도의 차이는 있었는데, 레닌-스탈린 초기 시기까지는 종교에 대해 극심한 탄압을 자행하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대조국전쟁 초반 소련이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국가적 단합을 위해 잠시 정교회를 장려하기도 했다. 물론 정교회 이외에 개신교가톨릭 등 타 종파의 경우는 그런거 없었고[11] 목회자들이나 독실한 신자들을 감옥이나 강제수용소에 가두고 괴롭히는 등 가혹한 핍박이 계속되었다. 또 존립을 허용한 정교회의 경우도 종교성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악의적으로 주일을 노동일로 정하거나(그것도 성찬예배 시간에 맞추어 노동을 부과하는 등의 술책으로 신자들이 종교의식에 가는 것까지 막는 경우도 많았다) 성직자들과 평신도의 접촉을 방해하기도 하고 교회가 운영하는 자선 기관을 폐쇄하거나 기독교 출판물의 발행을 금지하는 등 다양한 탄압책이 동원되었다.

소련의 종교활동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시대에 들어서서야 페레스트로이카가 실시되면서 완전한 종교의 자유가 진정으로 보장되기 시작했다.

6. 교통

소련은 미국에 비해 경제력이 뒤쳐졌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인구 대부분이 중산층이라서 구매력이 있던 것에 걸맞지 않게 자동차 보급률이 비교적 뒤떨어졌던 편이라서 같은 공산권인 동독이나 체코슬로바키아에 비해서도 후달리는 자동차 보급률을 자랑했다고 한다.

이는 소련 자체의 자동차 생산량이 그리 많지 않던 것과 관련이 있었다. 스탈린 시절이야 말할 것도 없는 수준이고 흐루쇼프 이후로 자동차 생산량이 증가하는 추세였다고는 하지만 연간 생산량이 20만대를 겨우 넘기던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소련내 자가용 수요를 감당하기에 터무니없이 적었다. 이후로 1960년대 후반에 라다가 설립되면서 자가용의 생산량이 연간 200만대를 넘어서는 수준으로 수요를 감당할수 있는 수준으로 늘어났기는 했지만 자동차 자체의 가격은 자동차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가장 싼 경차인 자포로저츠의 경우에는 1~2년치 봉급 수준인지라 일반인들도 그럭저럭 탈수있는 수준이기는 하나, 중형차인 라다 쥐굴리는 3~4년치 봉급, 대형차인 가즈 볼가는 구입하려면 5~6년치 봉급에 해당되기 때문에 일반 노동자들이 평범하게 구입하긴 힘들었다.[12] 사실 소련인들의 평균 저축률을 감안하면 보급이 안될 정도는 결코 아니었는데[13] 그럼에도 보급이 늦어졌던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신청을 한 뒤 몇년 정도 순번을 기다려야 했다는 것인데 그러다보니 자가용의 보급이 늦어지는것은 당연지사였다. 공산주의 유머에서 자가용 1대를 구할려면 10년씩이나 걸린다는 식의 농담이 나오는것도 실제로도 어느정도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차를 빨리 구하고싶은 사람은 보통은 중고차를 구입해야했고, 소련 당대에 중고차 매매가 엄청나게 활성화 되었다. 심지어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서방제 중고차나 신차를 구입하는 일도 허다했다. 물론 소련만의 문제는 아니고 대부분 공산권 국가에서도 두루 나타난 문제겠지만, 위에서 언급한 복권 당첨으로도 자동차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 경우 순번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이 있어서 대부분의 당첨자들은 돈보다는 자동차를 받았다.

그래도 오토바이는 일찍이 대중화되어 있어서 1950년대 이래로 서민들의 교통수단 취급받았고, 노면전차지하철, 무궤도 전자같은 대중교통망이 잘 깔려있던 대도시, 중도시와 달리 대중교통망이 빈약한 지방 소도시와 농어촌 지역에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것이 일상적이었고, 별장을 오갈때나 여행을 갈때에도 자동차는 받는데 오래 걸리니 버스를 전세내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1] 오늘날 러시아만 해도 새로 이민 온 인구를 제외하고도 180~200여 가지 민족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2] 독일인들은 소련 초기에 볼가강 유역에 자치구역을 가지고 있었으나 스탈린 시기에 인구의 대다수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되면서 사라졌고, 유대인들은 명목상의 자치구역을 가지고 있었기는 했지만 땅이 척박하고 추워서 정작 유대인들은 얼마 살지 않았다. 그래도 유대인 자치주는 현재까지도 남아있기는 하다.[3] Kaiser(1994), Lewis(1972)[4] 추바시(튀르크계)+칼미크(몽골계)+유대계+러시아계 혼혈이다.[5] 이 당시 사용한 로마자들을 일명 'Soviet Latin'이라고 하는데, 현재까지 유니코드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Proposal은 올라왔는데 몇 년 째 알 수 없는 이유로 무소식. 당시 로마자 표기법이 제정되었거나 프로젝트가 진행된 언어들의 목록은 여기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중에는 연해주에서 사용되는 한국어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1935년에 알렉산드르 홀로도비치(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еевич Холодович)가 만든 표기법이 발표되었으나 실제 사용되지는 않았다.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6] 키릴 문자화 당시 같은 음운도 언어에 따라 다른 글자를 할당하여 일부러 이들이 뭉치는 걸 막았다는 썰이 있다.[7] 이상 소비에트의 언어정책에 대한 내용은 《유승만, 소비에트 언어정책의 이론과 실제, 러시아연구 Vol.18 No.2》을 참고하였음.[8] 로마노프 왕조까지만 하더라도 관혼상제는 러시아 정교회의 주도 하에 진행되었고 혼인의 경우 종교혼주의를 민법상 규정하고 있었다. 또한 종교적 이유로 이교도간 혼인은 금지되고 가문간의 정략혼이 유행하였다.[9] 피의 일요일 사건 당시 주도적으로 민중을 이끈 정교회 사제 '게오르기 가폰(Георгий Гапон)'에게 감명을 받은 레닌은 국내로 돌아와 그와 면담했지만, 가폰이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둥, '사제로써 해야 할 소임' 같은 이야기만 꺼내자 곧 관심을 끊게 된다.[10] 하지만 문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마르크스는 종교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그렇다고 박해할 것 까지는 없다고 하였다.[11]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명작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도 독실한 개신교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강제수용소에서 혹사당하는 동료가 등장한다.[12] 그래서 당시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사람은 대부분 당의 간부거나, 혹은 해외 근무로 돈을 많이 벌어 온 사람들이었다.[13] 사실 한국도 1990년대 초반까지는 고급차 1대가 진짜 아파트 1채 값에 맞먹는 금액이었고, 서민차로 출시한 대우 티코도 첫 출시 당시인 1991년에 약 300만원~400만원대였는데 당대 저임금 노동자들의 1년 봉급보다는 조금 높은 수준이니 그리 큰 차이가 난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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