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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125><colcolor=#ffffff> | |||
출생 | 1432년 3월 30일 | ||
오스만국 에디르네 (現 튀르키예 마르마라주 에디르네도 에디르네) | |||
사망 | 1481년 5월 3일 (향년 49세) | ||
오스만 제국 휜캬르차으르 텍푸르 궁전 (現 튀르키예 마르마라주 코자엘리도 게브제시) | |||
묘소 | 튀르키예 마르마라주 이스탄불도 이스탄불 광역시 파티흐 모스크 | ||
재위기간 | 오스만 술탄 | ||
1444년 8월 ~ 1446년 9월 | |||
오스만 술탄 (복위) | |||
1451년 2월 3일 ~ 1453년 5월 29일 | |||
오스만 파디샤 | |||
1453년 5월 29일 ~ 1481년 5월 3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70125><colcolor=#fff> 아버지 | 무라트 2세 | |
어머니 | 휘마 하툰 (출신: 이탈리아인 / 북마케도니아 추정) | ||
형제자매 | 셰자데 아흐메트, 셰자데 알라에딘, 셰자데 이스판야르, 셰자데 휘세인, 셰자데 오르한, 셰자데 하산, 셰자데 아흐메트, 셰자데 셀축, 셰자데 유수프, 하티제 하툰, 파트마 하툰, 셰자데 하툰, 에르훈디 하툰 | ||
후궁 | 에미네 귈바하르 하툰 (출신: 알바니아인 / 프랑스인 추정) | ||
뮈크리메 하툰 (출신: 둘카디르 왕조)[3] | |||
치체크 하툰 (출신: 튀르크인) | |||
자녀 | 바예지트 2세, 셰자데 무스타파, 젬 술탄, 게르베르한 하툰 |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
이명 | 승리의 아버지(ابو الفتح / Ebû'l-Feth) 정복자 (فاتح / Fâtih)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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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결코 사랑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인기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지닌 지성, 에너지, 단호함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가 한번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을 포기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과업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이었다.
스티븐 런치만(Sir James Cochran Stevenson Runciman, CH, FBA, 1903년 6월 7일 ~ 2000년 11월 1일),《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오스만 제국의 제7대 술탄이자 초대 파디샤이며 자칭 로마 제국의 황제.[4]스티븐 런치만(Sir James Cochran Stevenson Runciman, CH, FBA, 1903년 6월 7일 ~ 2000년 11월 1일),《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오스만 제국의 대표적인 정복군주 중 하나이며[5]이며 특히 동로마 제국과 그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오늘날의 이스탄불)를 정복하여 정복자(Fatih, 파티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오스만 역사상 최초로 카이사르와 칼리파의 칭호를 사용하였다.[6] 몇몇 튀르크계 귀족 가문들이 운영하던 왕국 오스만국을 다문화, 다민족 전제군주국 오스만 제국으로 발전시킨 인물이다.
2. 생애
오스만 궁정 화가 낙카쉬 시난 베이가 유럽 화풍으로 그린 젊은 시절 메흐메트 2세의 초상화.[7]
2.1. 유년기
무라트 2세가 좋아하지 않던 하렘 후궁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며, 그 때문에 처음에는 부황은 그로 하여금 제위를 잇게 할 생각이 없었다. 5세 때 아마시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아버지 곁을 떠나게 되면서 사실상 버린 자식 취급이었으나 형들이 모두 죽어 제위계승자가 된 이후부터 부랴부랴 제왕 교육을 받게 되었다. 가정교사로는 무라트 2세의 절친한 친구이자 당시 오스만국 대재상을 5명이나 배출한 찬다를르 가문의 할릴 파샤가 임명되었고, 무라트 2세는 아들에게 할릴을 스승님이라 부르게 하였다.참고로 오스만 베이국 초기에는 술탄 계승권자들을 지방의 총독으로 보내는 전통이 있었다. 자세히 설명을 하자면, 이런 식으로 지방의 총독으로 내려간 황자들은 각자의 지방에서 제왕교육을 받는 한편 힘을 쌓아서 자신들의 아버지 즉, 술탄이 사망하면 서로 내전을 벌여서 가장 먼저 수도에 입성하는 쪽이 후임 술탄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현재 술탄이 아들들의 부임지를 재조정하는 등으로 사실상 후계자를 간택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으며, 셀림 1세의 경우에는 황자 시절에 멀찌감치 떨어진 변방으로 나가게 되자 그에 불만을 품고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유년기에 교과서에 한 낙서들이 발견되어 2004년 출판되기도 했다. 자기 서명을 연습한 낙서가 있는 걸 봐선 즉위 이후의 것으로 보인다.
2.2. 술탄이 되다
아버지 무라트 2세가 돌연히 은둔생활에 들어가는 바람에[8] 12살 나이로 1444년부터 1446년까지 2년간 임시로 술탄의 자리에 오른 경험이 있다. 당시 메흐메트 2세는 후녀디 야노시가 이끄는 헝가리를 위시한 기독교 연합세력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겠다고 주장하게 된다. 군대는 이에 반발했고, 군사반란을 막기 위해 할릴 파샤는 공개적으로 무라트 2세의 복귀를 간청해야 했다. 여기서 무라트 2세의 복귀를 청하기 위해 편지를 보냈다. 신하들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Eğer padişah siz iseniz, devletimizin bu zor gününde ordumuzun başında olmamanız törelerimize uymaz.
Yok, eğer padişah ben isem, size emrediyorum, geliniz ve derhal ordularımın başına geçiniz!
만약 당신이 파디샤이시라면, 이 어려운 시기에 당신의 군대를 이끄는 것이 우리 전통에 맞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내가 파디샤라면 그대에게 명하노니 즉시 돌아와 나의 군대를 이끌도록!
메흐메트 2세는 무라트 2세가 돌아온 뒤 파디샤직에서 물러났다가, 5년 뒤인 1451년 무라트 2세가 사망하면서 다시 파디샤의 자리에 올랐다.Yok, eğer padişah ben isem, size emrediyorum, geliniz ve derhal ordularımın başına geçiniz!
만약 당신이 파디샤이시라면, 이 어려운 시기에 당신의 군대를 이끄는 것이 우리 전통에 맞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내가 파디샤라면 그대에게 명하노니 즉시 돌아와 나의 군대를 이끌도록!
2.3.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스탄불 군사박물관 소재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기록화[9] (그림 왼쪽에 백마를 타고 있는 사람이 메흐메트 2세이다.) |
그의 가장 유명한 업적이라고 한다면, 술탄이 된 지 2년 후인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면서 2천년동안 이어진 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일이다. 불과 나이 21세의 일이다.
통칭 3중 성벽으로 유명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성의 공략을 위해 전통적인 방식 외에도 최초로 우르반 거포로 알려진 공성포를 비롯한 화기를 공성전에서 사용하여 성벽을 향해 쏘고, 산에 통나무를 깐 다음 기름을 칠해 미끄럽게 만들고 사람들이 끌어 육지를 통해 함대를 금각만으로 옮겨 양방향 공격을 가하는 과감무쌍한 전법을 동원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라는 속담이 이루어진 셈. 실제로도 사공이 많았다 하며, 이 에피소드에 충격을 받아 쓰인 소설도 있다. 다만 이때로부터 10여 년 전에 베네치아가 이미 육지로 배를 옮긴 바가 있으며, 그리스 신화의 영웅 가운데 하나인 이아손의 이야기에도 아르고 호를 등에 짊어지고 북아프리카를 횡단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바이킹도 필요한 경우 배를 육지로 끌고 가기도 했다. 즉 참으로 적절한 때에 알맞은 전술을 쓰기는 했지만, 메흐메트 만의 창의적인 발상은 아닌 셈. 헌데 이 배를 옮긴 지형이 사람이 배를 옮기기에 호락호락한 지형은 아니다. 2016년 현재 그 길을 안내판으로 표시하고 있는데, 오늘날의 베식타쉬 항구 근처에서 당시의 갈라타 성벽을 빙 돌아서 쉬쉬하네까지 간 다음 거기서 배를 띄웠는데 거리만 2km에 거의 200m의 언덕을 넘어야 한다.
동시에 엄청난 물량을 아낌없이 퍼붓는 오스만 특유의 전법을 썼는데, 물량공세라고만 하면 숫자만 믿고 될 때까지 쏟아 붓는 무식한 전법을 떠올리기 쉽지만, 당시 오스만군의 공성 전법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일단 대포 자체가 당시로서는 최첨단 병기였고, 성벽 아래로 갱도를 판 다음 화약을 매설하여 폭파하는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는 오스만의 마지막 영토 확장 시도라고도 평가 받는 제2차 빈 공방전에 이르기까지 오스만군의 기본적인 공성 전법으로 자리잡는다. 이를 동원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도의 대도시를 불과 7주 만에 공략하는 위업을 세우게 된다. 이후 그리스는 400년간 튀르키예의 지배를 받게 되고, 이를 계기로 발칸반도의 여러 국가들은 오스만의 칼날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 공방전에서 동로마가 서방 의용군을 포함하여 7천 명을 동원했지만, 현재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오스만 군은 대략 8만의 병력을 동원했다. 목격자들은 최소 10만에서 최대 30만까지 병력을 부풀려 기록했다.
2.4. 정복군주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함께 메흐메트 2세는 이곳을 수도로 삼은 뒤[10], 메흐메트는 로마는 멸망하지 않았다며 자신을 로마의 새로운 카이사르(황제)와 로마의 계승자라 칭하였다.[11] 이를 위해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을 통제하고[12], 기존에 존재하던 성당 등의 시설물을 성원(모스크)으로 개조[13]하는 동시에 기존 주민들 중 엘리트들의 신앙의 자유를 제한적으로 허용하여 반항을 무마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여, 자신이 무너뜨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새로운 대제국의 수도로 다시 재건하는 원대한 작업을 개시했다.참고로 이전까지 오스만의 수도는 부르사와 에디르네였다.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전까지는 오스만 베이국의 영토가 콘스탄티노폴리스 때문에 유럽과 아나톨리아로 양분될 수밖에 없어서, 어느 한쪽에만 수도를 두었다간 통치가 어려웠기 때문. 따라서 아나톨리아 반도의 중심 도시이자 수도는 부르사, 유럽 지역의 중심이자 수도는 에디르네라는 식으로 운영해야 했고,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여기에 있다. 실제로 에디르네를 새로운 수도로 삼은 무라트 1세와 그 아들인 바예지트 1세는 에디르네보다 부르사 많이 머물렀으며, 에디르네가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메흐메트 1세 때부터다.
그 뒤 계속된 발칸 반도의 동로마 제후국 정벌로 오스만의 세력은 현재의 세르비아 공국(1459)과 보스니아 왕국(1462)을 합병하여 발칸 반도 서부 깊숙이에 미쳤고, 드라큘라 공작으로 유명한 왈라키아 공작 블라드 가시공과 전투를 해서 초반에는 고전했지만 가시공의 아우 라두 3세를 포섭해 적의 분열을 유도, 결국 제후국으로 복속(1462)시켰다.
그 외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 이전에 흑해 연안의 제노바 식민지를 평정하며 흑해를 오스만의 세력권으로 만들고 오스만 제국과 마찬가지로 룸 술탄국에서 떨어져나온 여러 튀르크계 공국들을 마지막 하나까지 멸하고 그 과정에서 카라만 후국,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있던 백양 왕조 샤한샤 우준 하산의 군대를 사실상 궤멸시켜 배후지를 안정시켰다.
이것이 1473년의 오틀룩벨리 전투(Otlukbeli Savaşı). 실제로 이후 오스만 제국이 동쪽 국경을 걱정하게 되는 것은 1501년에 백양 왕조의 뒤를 이어 사파비 제국이 들어선 다음의 일이다.
또 크림 반도의 몽골계 왕조인 크림 칸국을 굴복시켜(1476) 이후의 제후국으로 만들어, 연공을 받는 대신 군사적 지원을 주었다. 이후 크림 칸국의 기병대는 몽골의 피를 이어받은 만큼 대단한 활약을 보이며 오스만 제국의 각종 군사 원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대가 되기에 이르렀으며, 이 관계는 이후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으로 관계가 단절될 때까지 이어진다.[14]
군사적 업적들 외에도 정복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한 각종 법률을 마련해 운영하도록 했고, 오스만 제국 건국 이래로의 튀르크계 귀족가문[15] 대신 데브시르메 제도로 징집된 자들을 재상으로 임명함으로써 전제군주제를 확립했다. 한편 1470년 이후 베네치아 영토에 대한 공세를 시작해 에게 해에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세력을 몰아냈다. 그 결과 오스만 제국의 패권은 동지중해까지 확장되었다. 베네치아가 이에 대항해 오스만 동부의 강국인 백양 왕조를 끌어들이자 1473년 친히 공격하여 대파하고 동부 방면의 패권을 확립했다. 또 1479년 알바니아 정복을 완료했으며, 이듬해에는 이탈리아 남부의 오트란토까지 군대를 보내기도 했다.
2.5. 1481년, 사망
1481년 아시아로 건너가 이집트 원정을 꾀했다고 했는데 너무 무리를 해서였는지 그해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그가 죽자 제위 계승 전쟁에 들어갈 위기에 빠진 오스만 군대는 대부분 제국 영토로 철수했고, 유럽인 특히 이탈리아인들은 성당의 종을 울리고 축제를 열면서 기뻐했는데 교황도, 로마에 머물고 있던 각국 사절들을 빠짐없이 초대하여 사흘 동안 먹고 마셨다고 한다. 얼마나 메흐메트 2세가 유럽인들에게 공포의 존재로 군림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6. 실패한 경우
상기한 기록만 보면 정복전이 승리 일색이지만, 1480년에 이탈리아 반도 공격의 사전 작업이었던 로도스 섬 공략을 비롯해 패한 적도 많다. 1456년[16]에는 헝가리의 명장 후녀디 야노시 (당시 50세)에게 대패하여 라이벌 헝가리가 차지한 벨그라드를 점령하는 데도 실패했으며 이 전투 여파는 패배에 충격을 받은 메흐메트 2세가 음독 자살을 시도할 정도였다. 1479년 (당시 48세)의 브레드필드 전투 (또는 케니에르메즈 전투)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 헝가리를 공격했으나 줄줄이 실패했다. 왈라키아 공국도 블라드 가시공에게 유격전술과 기습을 당해 크게 패하고 나서야 물량 공세와 블라드의 동생 라두를 장군으로 보내면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몰다비아 공국을 공격했다가 슈테판 3세에게 승리는 했으나 큰 타격을 입어 결국 차지하지 못하기도 했다. 알바니아 공략도 20년 이상이나 계속된 알바니아인들의 유격전에 골치를 앓았다.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워낙에 떠오르는 강국이라서, 결국 저 지역들은 전부 오스만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왈라키아 공국은 메흐메트 2세 당대에[17], 로도스 섬과 헝가리는 쉴레이만 1세 때에 함락되었다. 몰다비아 공국과의 전쟁은 아들 바예지트 2세가 1484년 복속시키는 것으로 마무리짓는다. 알바니아도 스컨데르베우가 사망한 뒤에는 오스만 제국을 막을 상대가 없었다. 메흐메트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 추진하다가 실현하지 못한 이집트 원정도 손자 셀림 1세 때 완수된다.
3. 평가
1451년 무라트 2세 사망 후 2차 즉위 시의 영토[18] | 1481년 사망 시의 영토[19] |
실제 정복한 영토는 셀림 1세나 쉴레이만 1세 시대보다는 작으나, 후대 술탄들이 3대륙[20]으로 뻗어나갈 수 있게 확고한 세력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것이다. 당시만해도 그저 강력한 군대를 기반으로 한 지역 강국 정도 위상의 오스만 베이국을 동지중해 전체의 패권국으로 발돋움하게 한 기틀을 마련한 명군으로서 쉴레이만 1세와 함께 술탄들 중 가장 유명한 군주이다. 만약 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지 못하고 아나톨리아 반도에서의 패권에 만족했다면 오늘날 그리스와 튀르키예의 혈통적, 문화적 공통점은 실제 역사보다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21]
다른 민족에 비해 동방정교회 신자들과 정교문화에 대해 많은 우대를 해줬는데 정교도에 대한 우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빠르게 수도로서 기능하길 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전에 동로마 황제가 하던 총대주교 임명은 자기가 하고 십자가 휘장도 직접 하사했다. 또한 동방 정교회, 유대교 등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사회 공동체인 밀레트 제도(Millet Sistemi)[22]를 창설하기도 했는데, 이후 이 제도는 오스만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형식상으로나마 존속했다. 여담이지만 위 사진속의 이콘 같은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은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직후 친 오스만파 주교였던 예나디오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임명하는 모습을 담고있다. 동로마 시절의 글씨체로 각각 Ο σουλτανος Μωάμεθ ο Β΄ (술탄 메흐메트 2세), Ο πατριάρχης Γεννάδιος Β΄ ο Σχολάριος (총대주교 예나디오스 2세 스홀라리오스)라고 쓰여있으며 메흐메트 2세의 손에는 총대주교 임명장이 들려있다.
메흐메트 2세는 26세의 청년으로, 건장하고, 키는 중간보다 크며, 무기에 정통하고, 덕망이 있어 보이기보다는 무섭다. 거의 웃는 일이 없으며, 매우 신중하고, 대단히 너그러우며, 계획을 고집스럽게 추진하고, 일을 할 때는 용감하다. 또한 그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만큼이나 열렬히 명성을 추구한다. 그는 매일 '안코나의 치리아코'라고 불리는 친구와 또 다른 이탈리아인에게 로마와 다른 역사적인 저작들을 읽게끔 했다...그는 튀르크어, 그리스어, 슬라브어 등 3개 국어를 한다...그는 아주 많은 수고를 들여서 이탈리아 지도를 익혔고...교황과 황제의 의자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유럽에는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있는지 공부했다. 그는 국가와 주가 그려진 유럽 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지배하려는 욕구로 가득 찬 메흐메트는 세계 지도와 군사 문제들에 특히 큰 관심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공부했다. 그는 기민하게 상황을 탐구하는 사람이었다. 우리 기독교도들이 다루어야 하는 건 그런 사람이다. 오늘날 그는 말한다. 시대가 변했다고. 그리고 그는 이전 시대에 서구인들이 동방으로 진출했듯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말한다. 세상에는 반드시 하나의 제국, 하나의 신앙, 하나의 군주만 존재해야 한다고.
베네치아 공화국 외교관 지아코모 드 랑구시의 보고서에서.[23]
베네치아 공화국 외교관 지아코모 드 랑구시의 보고서에서.[23]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호쾌한 무인으로서의 성향이 강했던 선제 무라트 2세와는 정반대로 어느 쪽으로나 조금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듯, 군사와 외교 정책에 있어서도 신의를 지키는 경우는 그 자신에게 이로울 때뿐이었으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사적으로도 방종과 검소의 극단을 달렸다고 하는데, 남색가로 유명한 것도 그중 하나. 때이른 죽음도 통치로 인한 과로 외에도 그런 극단적인 생활 태도 때문이라는 견해가 많다.
일반적인 이슬람 군주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르네상스 군주로서 문화에 대해 관용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어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많은 예술가들을 우대하고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도 하였다. 한편 베네치아 공화국과 휴전한 뒤 베네치아의 저명한 화가 젠틸레 벨리니(Gentile Bellini)를 초청하였고, 자신의 초상화[24] 등 궁중 화가 업무를 맡겼다. 그가 한 일 중에는 술탄의 개인 공간에 춘화를 그리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베니치아의 화가 겸 작가인 카를로 리돌피(Carlo Ridolfi)의 주장에 따르면 하루는 메흐메트 2세가 벨리니의 그림 중 세례자 요한의 참수 일화를 소재로 한 그의 그림을 보고 "다 좋은데, 목을 잘린 모습이 사실과 다르다."면서 목이 잘리면 그 충격으로 신경과 혈관이 수축되는데, 문제의 그림에서는 그것이 그대로 축 쳐져 있었고, 곧 바로 노예 하나를 불러오더니 그의 목을 베어 화가의 그림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다만 출처가 벨리니 본인이 아니고 미켈란젤로가 거쳐서 말한 거라 신빙성이 떨어지고, 예니체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궁중 노예는 그리 함부로 다룰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후 질려버린 벨리니가 베네치아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메흐메트 2세는 아쉬워하며 황금 사슬과 제국의 귀족 작위를 주었다.
그리스에서는 지금의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지금까지 튀르키예 영토로 남게 만든 원수로 여겨진다. 그리스 내 튀르키예계 무슬림들은 메흐메트 2세에 대한 평가가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정교회를 믿는 토착 그리스인들의 눈치 때문에 대놓고 메흐메트 2세를 찬양하지는 못하고 있다. 알제리인들을 제외한 아랍인들의 경우 오스만 제국의 아랍권 정복이 메흐메트 2세 사후에 일어난 일이라서 메흐메트 2세에 대한 평가가 그리스인들만큼 냉혹하지는 않지만, 메흐메트 2세라는 선례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팽창주의가 더욱 심해져 결과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아랍권 정복으로 이어진 후대의 역사 탓에 메흐메트 2세를 대놓고 좋게 평가하지는 않는 편이다. 이란인들 또한 오스만 제국이 이란에 맞서 싸울 수 있을 만큼 강성하게 만든 인물이 메흐메트 2세인 것 때문에 메흐메트 2세에 대한 평가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25]
4. 여담
- 그가 정복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가지, 즉 오늘날의 이스탄불 구시가지 지역은 그를 기념해 파티흐(Fatih, 정복자) 구역으로 불린다.
- 젊은 시절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26]가 메흐메트 2세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갔다가 레오나르도 특유의 질질 늘어지는 제작기간에 질려 도중에 취소되고 돌아갔다는 설화가 있다.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 양성애 성향이 있었다고 하는 썰이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후 동로마 제국의 재상이었던 루카스 노타라스의 14살짜리 막내 아들 야코보스 노타라스가 용모가 빼어난 미소년이라는 말을 듣고[27] 아들을 하렘에 바치라고 명했는데 노타라스가 이를 거부하자 노타라스와 그의 두 아들[28]을 참수 해버렸다는 일화가 바로 그것. 소년 시절에는 오스만 제국에 볼모로 와 있던 블라드 가시공과 그의 동생 라두를 희롱했다는 썰도 있다.[29]
- 노타라스의 처형에 관해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한참 전에 딸과 누이를 베네치아로 피신 보냈다는 것이 빌미가 되었다거나, 정복자로 입성한 메흐메트 앞에 국고에서 빼내 온 금은보화를 싸 들고 나타났는데 "그런 게 있었으면 방위비로 썼어야지. 너 같은 놈을 두고 반역자라고 하는 거다." 라는 이유로 처형되었다고도 한다. 사실 음흉한 생각으로 부른게 아니라 소년을 총애해 고관대작으로 키워주려고 했던 건데 루카스 노타라스는 메흐메트 2세가 남색하려고 아들을 부른다고 확대 해석하는 바람에 술탄의 명령을 거부, 졸지에 쇼타콘으로 몰린 술탄이 열받아서 노타라스를 죽였다는 설도 있다.
- 이렇게 메흐메트를 양성애자로 묘사하는 기록은 두카스나 라오니코스 할코콘딜리스 등 그리스측 역사가들의 기록에 보이는데, 현대 튀르키예의 역사가인 할릴 이날즉(Halil İnalcık)은[30] 동시대 오스만 제국의 기록 어디를 살펴보아도 황제가 남자를 가까이했다는 기록은 없다며 그리스 측의 기록은 사실무근이라고 강력히 주장한 바가 있다.
- 미소년썰과 더불어 수박을 훔쳐먹은 범인을 찾겠다고 하인들의 배를 갈랐다는 썰도 전해진다. 이 썰은 유럽인들의 흠집내기성 가십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 무술 실력도 꽤 뛰어났던 모양인지, 헝가리의 기사와 일대일 결투를 벌여 죽인 기록이 남아있다. 바로 벨그라드 전투인데 헝가리 왕국군이 성문을 열고 돌격하는 바람에 오스만 측의 전열이 무너져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도 퇴각하지 않고 맞서 싸웠던 것으로, 무용에 어지간히 자신감이 있지 않으면 벌이기 힘든 일이다. 단, 이 과정에서 화살에 맞고 혼수상태에 빠져서 오히려 오스만군의 붕괴가 가속화되었다.
-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후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정복 후 10년이 지난 해에 메흐메트 2세는 흐리스토둘로스[31]라는 이름의 그리스인 건축가에게 모스크를 하나 짓되, 돔 크기를 아야소피아보다 더 크게 지을 것을 지시했다. 흐리스토둘로스는 자신이 만든 모형을 보여주면서, "폐하 그렇게 하면 지진으로 돔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메흐메트 2세는 막무가내였고, 흐리스토둘로스는 자기 고집을 꺾지 않은 채 아야소피아보다 돔의 크기를 작게 해서 모스크를 세웠다. 그러자 메흐메트 2세는 노발대발하여 이 불충한 건축가의 손을 자를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흐리스토둘로스는 자기 주장을 꺾지 않고 증거를 제시하며, 메흐메트 2세의 제안대로 모스크를 만든다면 작은 지진에도 모스크가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고, 졸지에 손을 잃어버린 흐리스토둘로스는 자신이 처하게 된 억울한 상황에 항의하여 메흐메트 2세를 법정에 세우게 된다. 당시 이스탄불의 대법관은 흐즈르 베이(Hızır bey)였다. 흐즈르 베이는 흐리스토둘로스의 고발장과 그가 가져온 증거들을 보고 그의 주장이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도 법정에서 정당한 판결을 내리지 않은 채, 황제 독단적으로 사람의 손을 잘라버렸다는 점을 들어 흐즈르 베이는 메흐메트 2세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샤리아에 따라 메흐메트 2세의 손도 자를 것을 판결한다. 그러자 흐리스토둘로스는 놀라서 재판관 흐즈르 베이에게 간청하여 소를 취하해달라고 요청하는데, 결국 흐즈르 베이는 메흐메트 2세에게 유죄인 건 변함이 없지만 손을 자르는 대신 벌금으로 흐리스토둘로스에게 정당한 배상을 할 것을 판결한다. 이후 16 ~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풍물학자이자 여행가인 에울리야 첼레비(Evliya Çelebi)의 기록에 따르면 판결 직후, 메흐메트 2세는 칼을 뽑으며 흐즈르 베이에게, "만약 그대가 알라의 법을 무시한 채 짐의 손을 자르라고 판결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대의 목을 쳤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흐즈르 베이는 감추어두었던 단검을 꺼내들며, "만약 폐하께서 제 판결에 동의하지 않으셨더라면 저 또한 폐하를 이 칼로 찔렀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상당히 유명한 일화로 이슬람교에서 황제가 되었든 그 누가 되었든 법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교훈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메흐메트 2세도 상당히 대인배였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 흐리스토둘로스가 세운 그 모스크는 1766년에 지진으로 무너지고,[32] 현재 그 자리에는 파티흐 모스크 단지(Fatih Külliyesi)가 세워졌으며 메흐메트 2세가 재판을 받았던 그 법정도 2006년에 복원되었다.
- 어린 시절부터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동경했다고 한다. 실제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젊은 나이에 제위에 올라 비슷하게 정복자로 불리는 업적을 이루었다.
5. 관련 미디어
- 학습용이라면 스티븐 런치만 경의《1453년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을 참조할 것.
* 2012년작 튀르키예 영화《정복자 1453(Fetih 1453)》이 국내에 알려져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전을 영화화한 것으로, 영화 자체는 수작이지만 메흐메트 2세를 300의 레오니다스 1세처럼 묘사하고[33], 상당히 훌륭했던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를 찌질이 암군으로 왜곡하여 비판을 받았다. 오스만군과 메흐메트 2세를 관대한 해방자로 묘사하는 등 왜곡이 있다. 또한 우르반에 대한 것도 동로마 제국도 우르반을 포섭하려고 했으나 자금 지불을 못 해서 우르반이 가격을 더 부르는 오스만으로 간 것으로 영화처럼 노타리스가 동로마 병사들을 보내서 체포하려고 했다거나 우르반이 거절한 것은 아니다. 단지 동로마 제국 국고로써는 감당이 안 됐을 뿐. 이 밖에 해군으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 방어에 적극 협력했던 베네치아군의 모습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거나, 일개 시파히 부대장에 불과했던 울루바틀르 하산(Ulubatlı Hasan)이 메흐메트의 절친으로 나온다거나, 오래전부터 시망 직전이라 강렬한 위기감을 느끼거나 절망해야 하는 동로마 황제와 신하들이 지나치게 여유를 부리는 등[34][35] 고증 오류가 많다. 우르반의 수양딸 정도로 등장하는 여주인공은 아예 가공 인물. 그냥 킬링 타임용으로 볼 정도.
- 시오노 나나미의 책《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도 메흐메트 2세의 행적이 묘사되고는 있으나 일부 왜곡이 있기 때문에 소설로 생각하고 읽기를 추천.
- 문명 4에서 증손자인 쉴레이만 1세와 함께 오스만 문명을 이끈다. 노동자의 작업 속도를 빠르게 하고 도시에 위생을 추가로 제공하여 인구를 보다 수월하게 불릴 수 있게 해 주는 확장적 특성과 사회 제도의 유지비를 반으로 깎는 조직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확장적은 충분히 쓸 만 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조직적은 문명의 규모가 어느 정도 커진 이후에나 체감될 만한 보너스를 제공하는데다 사회 제도 중에는 유지비가 아예 없는 것도 있어서 하급으로 취급된다. 다만 자신보다 이른 시기의 유닛들을 상대로 모두 우위를 점하는 예니체리를 고유 유닛으로 받는데다 고유 건물인 함맘은 행복을 추가로 제공하여 인구를 더 많이 확보할 수 있게 해 주어 직접 써 보면 의외로 강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선 에덴의 조각 중 선악과의 소유주였던 것으로 나온다. 에덴의 조각을 이용해 자신이 점령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키는데 사용하고 있었다. 사후에 바예지트 2세와의 왕위 계승에서 패배한 젬이 이용한다.
- 《Europa Universalis IV》에서 오스만으로 1444년에 시작 시 이 왕이 통치 중인데, 행정/외교/군사 6/4/6[36]에 나이 12살[37]로 앉아 있다. 초반에 최소한 40여 년 동안 이 능력치로 엄청난 군주 포인트를 빨아먹을 수 있다. 오스만이 받은 수많은 수혜[38] 중에서도 독보적.
- 2014년 개봉한 영화《드라큘라: 전설의 시작》에서 도미닉 쿠퍼가 그의 역할로 분했다. 작중 악역으로 정복 전쟁을 위해 블라드에게 아들을 비롯한 소년병 1,000명을 요구하지만 블라드가 이를 거절하고 보복으로 왈라키아를 정벌하려다 뱀파이어가 된 그에게 반격당하고 마지막엔 아들을 미끼로 뱀파이어의 약점인 은화로 가득한 막사에서 결투를 치르다 결국 그에게 죽임당한다. 당연히 오스만 제국의 후예 국가인 튀르키예에서는 이 영화에 치를 떨었다.
- 일본 만화 소녀전쟁 후속 외전《불을 잇는 자들》에서 등장한다. 전작 주인공의 딸인 클라라와 사랑에 빠진다.
- 2020년 넷플릭스 오리지널을 통해 공개된《오스만 제국의 꿈(Rise of empires: ottoman)》이 바로 메흐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다루고 있다. 총 6부작으로 위에 있는 튀르키예 영화 정복자 1453의 메흐메트 2세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청년군주로 묘사되었고, 거의 완벽한 존재처럼 나오는 영화와 달리 상당히 성급하고 급진적인 면모도 있던 것으로 나온다. 또한 모친을 비잔티움 제국의 여인으로 추정[39]하여 메흐메트 2세의 외모도 우리가 생각하는 튀르크인보다 유럽백인의 모습에 가깝다. 어린 시절의 모습도 나오는데, 답정너로 유명한 일화와는 정반대로 아버지가 용퇴한 덕에 어린 나이에 술탄에 올라 너무 막나가는 군사작전을 벌이다가 "니가 후녀디를 감당할 수 있것어?"라며 아버지가 대뜸 컴백하자 전형적인 부모 속 썩이는 중딩(...)의 모습으로 부들부들하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도 묘사된다. 신하들이 또한 메흐메트 2세의 숙적을 콘스탄티누스 11세보다 당시 수비대장인 "조반니 주스티니아니"로 보이게 연출하고 있어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드라마 내내 전투에 신중한 모습이나 주스티니아니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마지막 전투에서 카이사르, 콘스탄티누스, 유스티니아누스 같은 조상들에게 부끄러운 후손이 되지 말자는 연설을 한뒤 장엄한 최후를 맞이한다.
-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쓴《술탄과 황제》에서도 당연히 주인공이다.
-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선 최종보스로 분류되었고 실제 등장이후에도 여러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가 주인공이 아닌 덕에 술탄좌에 오를 때는 이미 오스만이 거의 망하기 직전의 상태였고 최종보스 직위도 맘루크에게 넘어간지라 독자들은 좋은 꼴은 못 볼 것이라 생각 했고 결국 능력을 제대로 꽃피우지 못한 채 맘루크 전쟁에서 토마스와의 일기토에서 패해 전사한다.
- 《근육조선 1부》에서 등장하며 약간 살집이 있는 젊은 나이지만 술탄으로서의 위엄이 충분하고, 냉혹하고 독선적이며 교활하지만 언제나 나라의 이득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명군. 수양대군의 탄탄한 육체와 자신의 친위대인 예니체리와 호각인 조선의 호위병들을 보더니 이들을 영입하거나 기술을 빼내려 한다. 그러나 수양대군도 이를 예상하고 있어 기존 조선에서 사용하던 최신식 보총은 베트남에 넘겨 주고 구형 화포를 받아 온 상태였으며, 군사 전술 대신 참호격투 정도만을 가르쳐 준다. 메흐메트는 수양대군의 행동을 보고 답례로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약속하는데, 수양대군은 단순한 금은보화 대신 학자와 작물의 종자들을 요청해 메흐메트를 감탄시킨다. 티무르 제국을 견제하기 위한 방책으로 인도에서 몰래 빼돌린 후추 종자를 수양대군이 귀국할 때 제공해주었다. 이후 조선과 유럽을 잇는 홍삼 중개무역으로 큰 이득을 얻으며 유럽 전체에 위협을 가하는 강대한 세력으로 부상하는데, 자신의 행적을 숨기느라 피렌체 등에서 보내 온 편지를 위조하고 주변국에 홍삼 광고를 대대적으로 해 조선에 대한 감정을 악화시키지만 아프리카 항로를 개척한 한명회가 스페인 관리를 통해 이를 알고 편지도 위조임이 들통나 조선에 의해 견제와 보복을 당한다. 조선의 함대에 의해 항구가 작살나자 메흐메트는 화병을 얻어 사망하고, 아들 바예지드 2세가 예상보다 빨리 술탄이 된다.
- 《내가 바로 세종대왕의 아들이다》에선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겪는다.
- 《Fate 시리즈》에서도 등장한다. 생전 적장이었던 블라드 3세, 콘스탄티노스 11세와 관련되어 몇 번 언급되었고, 외전작인 히무로의 천지 Fate/school life 7인의 최강 위인편에서 아처 클래스로 등장. 물론 개그 외전작의 콜라보 단편 외전(...) 이니만큼 정식 작품 등장은 아직도 요원하다. 안경을 쓴 것으로 나온다.
- 《이탈리아에서 살아남기》에선 오트란토 침공이 언급된다. 이후 원역사대로 오트란토 침공 후 얼마 안 가 사망하며 원정군은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털린다. 사후에 동로마 제국이 부활하며 본인의 최대 업적이 삭제되어 버렸고 거기다 그 동로마 제국이 마케도니아 지방까지 되찾으며 자신의 아들까지 포로로 잡아버린 것에 이어 후반부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마저도 잃게 되며 그가 이룩한 모든 것들이 사라져버렸다.
- 해병문학에서는 메흐메드 2세를 패러디한 '메 흐흑메트 2세(...)'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1] Mehmed-i Sânî[2] 아랍어로는 무함마드(محمد)가 된다. 영어권의 영향을 받은 이름인 메메드 2세로도 불린다. 오스만 제국 당대에는 "정복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ابو الفتح(에불 페트흐)라고도 불렸다.[3] 둘카디르 왕조 6대 군주 쉴레이만 베이의 딸.[4] 실제로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은 루스 차르국-러시아 제국의 차르-황제와 더불어 동로마 정복 이후 자신들이 그 자리를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는 제3의 로마 항목 참고. 이 로마 황제(Kayser-i Rum) 호칭에 대해 서유럽은 그러려니 말려니하고 냉담한 반응을 보였지만, 동로마 제국의 정신적 지주였던 정교회에서는 이를 인정했다. 애초에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세워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모두 오스만 파디샤의 승인을 받았다. 오스만 제국에는 당시에는 로마인(Ρομαίοι)이라 불렸고 오늘날에는 그리스인이라 불리는 민족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고, 오스만 제국은 기존의 정교회 교구를 몇몇 교구를 조정한 것을 빼고는 거의 그대로 인정해 이들을 통치했다. 심지어 정교회 자치구였 아토스 산에 대한 정교회의 권한까지 그대로 인정해주었다.[5] 지명도 면에서는 메흐메트 2세가 최고라고 할 만 하지만, 영토를 확장한 정도나 군사적 역량에 있어서는 셀림 1세가 최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예로 마키아벨리는 정략론의 1권 19장에서 "사실 그(셀림 1세)는 조부(메흐메트 2세)의 명성을 능가할 만한 인물인 것 같다."라고 평했다.[6] 이 시절의 칼리프 호칭은 당시 맘루크 왕조에 망명 중이던 압바스 왕조의 후예도 가지고 있었고 이쪽이 더 정통에 가깝기 때문에 참칭에 가깝다. 진정으로 오스만 제국이 칼리프 타이틀을 가져온건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압바스 가문으로부터 칼리프 타이틀을 정식으로 넘겨받은 셀림 1세의 일이다.[7] 당시 부와 권위의 상징이던 장미를 음미하는 이 포즈는 15세기 오스만 술탄들의 초상화들에 종종 등장한다.[8] 당시 무라트 2세는 무라트 1세 이래로의 적국이었던 헝가리 왕국에 맞서 전쟁을 벌였지만 밀리고 있었고, 거기에 아나톨리아의 또다른 튀르크계 공국이었던 카라만 공국이 헝가리의 편에서 참전할 움직임을 보이게 되자 불리한 내용의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무라트 2세는 이에 따른 책임을 스스로에게 묻는다는 이유로 퇴위를 선언했다.[9] 그 후에 2009년 이스탄불에 '파노라마 1453'이라는 박물관이 개관했는데 이름부터 이날의 정복을 기념하는 박물관이다. 이 그림보다 엄청나게 큰 그림으로 이 전투를 생생하게 벽화로 그려냈다.[10]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자마자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이스탄불로 개명했다는 것이 상식처럼 알려져 있는데, 오스만 제국이 멸망한 1923년까지 가장 널리 쓰인 이름은 '코스탄티니예'였다. 이스탄불도 안 쓰인 건 아니지만 코스탄티니예와 함께 쓰이는 여러 이름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으며, 이스탄불로 명칭이 통일된 것은 튀르키예의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서였다.[11] 이때 내건 명분은 크게 두 가지인데, 자신이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도시를 수도로 하는 제국을 통치하고 있다는 것과 선대 술탄인 오르한과 동로마 황녀가 결혼한 일이 있다. 즉, 동로마 황실과 오스만 황실은 서로 남남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가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딸인 조이(Ζωή Παλαιολόγια)와 결혼한 것에 근거하여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내세운 적이 있다.[12] 금지한 게 아니라 통제된 약탈로써 금전적 갈취와 노예화, 강간 등은 메흐메트 2세가 허락한 사흘 동안 엄청나게 자행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노예는 약 5만 명 정도이고, 하느님이 보호해 줄 거라 생각해 성당으로 피난간 사람도 엄청 많았지만 오스만 병사들에게는 그저 먹을 게 한곳으로 몰린 것뿐이다. 수녀나 아이라도 강간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한다. 다만 약탈 이후의 도시를 보고 메흐메트 본인도 약탈을 허락한걸 후회하며 단 하루만에 더 이상 털게 없기도 하고 해서 금지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13] 현재 이스탄불의 대표적 문화재인 아야 소피아도 이때 성원으로 개조되었다.[14]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을 원했던 러시아는 처음 한동안은 발트 해를 주목했으나 이후 흑해로 눈을 돌렸고, 결국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1774년의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Küçük Kaynarca Antlaşması)으로 크림 칸국의 독립을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후 독립국일 터인 크림 칸국의 내정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고, 비록 독립은 시켜주었으나 여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이에 항의. 결국 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벌어졌으나, 이번에도 오스만 제국이 패배했다. 결국 오스만은 크림 칸국의 영토는 러시아 영토임을 인정해야 했고, 러시아는 즉시 크림 칸국을 멸하고 그 땅을 '타우리다 주(州)' 라는 이름으로 합병했다. 참고로 1688년의 빈 패배, 18세기 초반의 헝가리 상실로서 대 유럽 전선이 다시 벨그라드로 내려왔어도 오스만 제국 지도층이나 관료들은 애초에 헝가리까지 영구적으로 영유하는건 무리였다며, 살다보면 질 수도 있지정도로 인식하고 오스만 제국이 다른 유럽 국가와의 경쟁력에서 밀리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고,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나머지 유럽 국가들도 18세기에는 전반적으로 오스만 제국이 전반적으로 약해지긴 했으나 여전히 강국 중 하나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 입장에서는 한때는 크림 칸국에게 수시로 털리던 러시아가 이렇게 커서 자신들을 패배시켰다는 점에서 대단히 충격을 받아 상술한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 이후부터 제국의 약화에 전국가적인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실제로도 이후 오스만 제국은 쇠퇴일로를 건기 시작했다.[15] 이 귀족 가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메흐메트가 ‘스승님’으로 불러야 했던 할릴 파샤의 가문인 찬다를르 가문(Çandarlı family). 1364년에 처음으로 재상을 배출한 이래 할릴이 처형당하는 1453년까지 네 명의 재상을 배출했고, 그들의 임기를 모두 더하면 64년에 이른다. 오스만 제국이 창건된 때부터 헤아려도 대략 150년 가운데 60년을 이 가문이 해먹은 셈으로, 학자들 가운데에는 찬다를르 가문의 재산이 오스만 황가의 것보다도 더 많았으리라 보는 경우도 있다.[16] 당시 메흐메트 2세는 25살이었다.[17] 1462년, 당시 메흐메트는 31세였다.[18] 자세히 보면 보스포루스 해협 쪽에 작게 녹색빛이 칠해지지 않은 구역이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저기가 바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위치다.[19] 발칸반도 + 소아시아를 장악한 판도가 바실리오스 2세부터 만지케르트 전투까지의 로마와 비슷하다. 단, 오스만에게는 다뉴브 강 너머의 트란실바니아에 속국이 있었고, 크림 반도의 속국의 지역이 케르손과 그 주변 일부 뿐이었던 로마와 달리 꽤 넓었던 한편, 그 대신 로마에게는 크레타, 안티오키아와 주변의 북부 레반트, 아르메니아 지역 일부, 이탈리아 남부 지역 일부가 있었다는 차이가 있다.[20]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21] 당대의 기록화가 아닌 현대의 작품이라는 점에 유의할 것.[22] 각 종교 별로 서로 다른 공동체를 이루며, 조세의 의무 등 국가의 요구에만 응한다면 각 종교의 관습에 따라 결혼, 이혼, 재판, 교육 등을 할 수 있는 제도.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동방 정교회의 수장으로 하고 이슬람이나 유대교도 각기 수장을 두었으며, 이들은 종교에 대한 일에 한해서라면 황제에게 직소할 수도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소수민족자치구 정도에 해당하나, 영토나 민족이 아니라 철저히 종교에 따라 구분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23] 《부의 도시 베네치아》(로저 크롤리 저, 다른세상 출판사, 2012)에서 인용.[24] [25] 외국에서 악평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오스만 제국을 강성하게 만들어 자신들을 괴롭혔다는 말이니 원망의 시선인 셈이다.[26] 1452년 생, 20대~30대 추정[27] 참고로 스프란체스라는 인물의 딸과 아들이 유명한 미소녀와 미소년이었다고 하는데, 둘 다 하렘에 끌려갔다. 딸은 어릴 때 죽었고, 소년은 술탄의 욕망을 거부했다가 살해당한다고 한다.[28] 혹은 한명은 사위. 막내 아들은 처형 당하지 않고 하렘으로 보내졌다가 20대 초반에 이탈리아로 탈출했다는 전승도 있다.[29] 가시공은 죄수의 항문에 말뚝을 박아 죽이는 잔인한 형벌로 유명한데 오스만 궁정에 볼모로 잡혀있던 시절 메흐메트에게 항문성교를 당해 생긴 트라우마가 항문에 말뚝을 박아 죽이는 형벌로 발전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30] 현대 튀르키예 역사학계의 실질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거물 대접을 받는데, 물론 학문적 성과도 성과지만, 아직까지도 비교적 정정하신 영감이 출생 년도가 1916년, 즉 오스만 제국이 아직도 살아 있었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학회나 강의 등을 경험한 다른 젊은 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노트에 필기를 문자 개혁 이후의 라틴 알파벳으로 하는 게 아니라 아랍 문자로 적힌 오스만어로 했다고 할 만큼 후덜덜한 연륜을 자랑하는 사람이다. 2016년 7월에 딱 100세 채우고 타계.[31] 다른 출처에서는 이 건축가의 이름이 아틱 시난(Atik Sinan)이라고도 전하는데 역시 그리스인이라는 기록은 똑같다.[32]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지만 메흐메트 2세가 흐리스토둘로스에게 지시해서 세운 모스크가 있던 자리는 옛 동로마 황제들의 영묘가 있던 성 사도 성당 자리이다. 이미 영묘들은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십자군들에 의해 깡그리 털려서 속빈 강정이었지만, 메흐메트 2세는 이미 낡아서 붕괴 위험에 처한 사도 성당을 헐고 그 자리에 모스크를 세웠다. "다만 이전 황제들에 대한 존중의 차원 + 기초공사 비용 절감을 위해 지하 영묘는 건드리지 않고, 그 위에다가 건물을 올렸는데, 지진으로 이 모스크가 무너진 이후 지금의 파티흐 모스크를 건설할 당시까지도 지하 영묘가 남아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후대에도 "선황의 뜻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발굴 조사 없이 그대로 모스크를 올려서 현재도 땅 속에 남아있다고 한다.[33] 레오니다스 1세와 비슷한 처지였던 군주는 오히려 콘스탄티노스 11세다. 레오니다스 1세와 비슷하게 그리스를 침략한 외세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34] 아예 "형편없는 튀르크놈들ㅋㅋㅋ" 하며 연회까지 열 정도.[35] 실제로는 오스만군의 봉쇄로 동로마는 성안에서 물자가 고갈되어 물자난이 심각했고,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조차 조촐하게 식사를 할 정도로 절망적이었다.[36] EU4의 군주 능력치는 6점 만점이다. 즉 행정, 군사는 만점, 외교도 평균 이상인 것. 능력치 총합으로 치면 세종대왕(6/5/5)과도 같다.[37] 1432년생이니.[38] 실제 오스만이 이때 명나라와 함께 세계 최강이 맞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하다. 아나톨리아 기술그룹은 초반 최강의 병종이고, 말도 안 되게 좋은 이벤트들이 하늘에서 쏟아지며, 중동 전체가 같은 문화권에 들어가서 문화 페널티도 없다시피하고, 게임 내 최고의 꿀땅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조금만 버티면 그냥 자기 손에 들어가며, 국가 아이디어도 하나같이 사기다. 전쟁 피로도 감소는 빼고[39] 맨 위에 적혀있지만 메흐메트 2세의 어머니 휘마 하툰은 이탈리아인 노예 출신이었다고 추정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북마케도니아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