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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1:34

기경량/비판 및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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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태도 관련3. 과거 학설에 대한 평가 관련
3.1. 쓰다 소키치 등 일제 학자에 대해3.2. 정인보, 김석형 등 민족주의 사학자에 대해
4. 조선구마사 옹호 논란
4.1. 1차: 신문 인터뷰
4.1.1. 의견4.1.2. 의주의 무역과 관련된 오류
4.2. 2차: 페이스북 발언4.3. 3차: 만인만색 역사공작단 팟캐스트
5. 설강화 옹호 논란

1. 개요

역사학자 기경량에게 제기된 비판과 논란을 정리한 문서.

2. 태도 관련

기경량이 역사해석에 입장이 다르고 기존 관점에 의문들 던지는 연구자들에게 비웃음이나 조롱 등으로 일관하는 태도를 유튜브나 TV 방송에서 보인 바 있다. 이러한 행동은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아니지만, 애초에 교양 시민강좌를 지향하는 프로그램들의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 오히려 일반인들에게 냉소적인 반응을 유도하는 역효과만 부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만인만색 역사공작단 에서 무령왕릉의 붕어라는 표현을 두고
기경량: 이게 무령왕릉 지석에 붕자가 써져 있어요. 그거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펴는 분이 있어요. 백제의 왕은 황제였다.

아라: 아, 근데 이거는 실제로 연구의 수준에서도 백제는 그 당시 외왕내제 상태다 하는 경우도 있어요. 실제로

탕수육: 대외적으로 왕이지만

아라: 안에서는 황제질 했다.

기량: 저는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만

아라: 연구사에는 있어요

“백제는 황제의 국가였다라고 상상의 나래를 펴는 사람들이 있다”는 발언을 하였으나 바로 백제 전공자 위가야에게 반박 당하고 백제가 그 당시 외왕내제를 칭했다는 연구가 선학 연구자에 의해 있다고 발언하자 기경량은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일축했다.[1] 그냥 '그렇구나', '그런 연구도 있구나'라고 넘어갈 수 있는 상황에서 자신은 아무런 근거도 내세우지 않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등의 발언을 하며 방송의 맥을 끊는 것이다. 또한 단순히 위가야가 선학 연구자들에 의해 있다라고 발언했음에도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몰입감과 흥을 깨며 일방적으로 우기는 멘 트를 한 것으로 받아들여 질수 있다.

사실, 위가야가 말한 바와 강이 무령왕 시절과는 시간적 거리가 좀 있기는 해도 주보돈근초고왕이 황제를 칭했다는 주장을 2011년 <한국고대사연구>에 쓴 적이 있다.[2] 또, 물론 프로파간다적 성격이 짙은 기록이지만 예군묘지명에서 백제 의자왕이 참제(僭帝)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므로 기경량이 바득바득 우기는 것과는 다르개 백제 제2의 전성기, 한성 제2시대를 열었던 무령왕이 외왕내제를 칭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비슷한 예로, 기경량은 위와 같은 팟캐스트에서 같은 패널 중 한명인 안정준이 고려 - 송나라 - 금나라 간의 삼각외교에 대해 조명한 에피소드에서도 지나치게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안정준이 고려의 외교정책을 칭찬했을 때 국제 학술대회에서 말할 수 있는 내용이냐며 반문한 것이다. 이처럼 기경량은 다른 패널들이 열심히 설명하면 일언지하에 일축하거나 비아냥대고 "제가 보기엔 그냥 ~인거 같아요" 라며 그 의견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많이 낸다. 물론 방송 컨셉이 그러한 것일 수는 있으나 호감이 가는 모습은 아니다. 또한 이 밖에도 신용하를 조롱하고 이도학 등의 학설에 비웃음으로 일관하기도 했다.

또한 기경량이 차이나는 클라스에 출연해 # 김병기의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조작설'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며 학계의 통설을 소개하면서[3] 이후 만인만색 역사공작단에서 전문가가 아닌 한문 연구자의 의견을 편집과 자문 없이 내보냈다며 김병기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또 후에 기경량은 역사공작단에서도 문재인 정부의 인사에 대해 '전문성이 없다', '환빠스틱한 도종환을 문교부 장관에 임명했다' ‘창조과학론을 믿는 사람을 과학계 수장으로 앉히려고 한다‘는 등의 발언을 했으며 '인문학 전문가라고 포장한 최진기가 큰 사고를 쳤다' '생태학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사학자가 아님에도 사학계에서 통용되지 않는 논지를 개진했다' 식의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본인 역시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닌 동해/일본해 분쟁을 외교적 관점으로 분석하며 모순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특히나 기경량의 평소 언행을 반추 했을때 학계의 통설이나 연구성과에 반하는 이덕일 등으로 대표되는 반지성주의와 사이비 역사학자들의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학계 안팎에서 큰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 신랄히 비판하는 평소의 행실과 완전히 상반된다.
(이덕일의 발언을 비판하며) 근대학문의 전문성을 무시하는 발언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학자들한테 뭐 뭐에 대해 물어봤을때 ‘아 저는 그 분야 전공이 아니라서 정확히 답변을 못드리겠습니다’라는 대답을 많이해요. 그리고 실제로도 우리 방송도 우리들이 되게 걱정을 많이 하잖아요. 우리가 자기가 전공하는 분야가 아닌 다른 시대나 혹은 주제에 대해 얘기할때 되게 조심조심 한단 말이에요. 왜냐하면 연구자들이 생각할 때 내가 그 분야에 대해서 알고 있고 발언 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허들이 굉장히 높아요. 그니깐 최소한 그 분야에 대해 연구사 한번 쫙 훑어보고 거기에 대해 나름대로 관점 하나 잡아야지 한마디 할수 있지 이런 생각이거든요. 공부하는 사람들의 결벽증이에요. (중략) 이덕일씨는 다들 아시다시피 전시대에 다 글을 쓰잖아요. 이게 이 사람이 천재라서 그런게 아니에요. 그냥 책임감이 없는 거에요.

만인만색 역사공작단에서 태도는 보는 사람 중에서는 몰입감과 흥을 깨는 멘트를 한 것으로 받아 들여질수도 있다.

다만 기경량도 학계의 거물들이나 주류 학자인 이익주, 노태돈에게는 상당히 호의적이고 깍듯하다.

이 밖에도 말투는 자체는 상당히 공손하지만, 사용하는 언어나 제스쳐는 다분히 과격하고 폭력적이기 까지하다.

3. 과거 학설에 대한 평가 관련

3.1. 쓰다 소키치 등 일제 학자에 대해

기경량은 쓰다 소키치[4]에게는 '제국주의 병폐에 찌든 시대상에서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일본서기를 비판 했으니까 최소한 양심적인 학자였다', ‘신공왕후의 삼한정벌 자체를 허구라고 발언했다’ 등의 평가를 했던 바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의 식민사학자들에 대해 시대적 한계[5]를 고려하면 그래도 꽤 과학적인 사료비판과 현대 역사학 이론과 방법론을 기반으로 학설을 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기경량이 "삼국사기 초기기록 뿐만 아니라 일본서기에 대해서도 불신론을 제기했기 때문에" 양심적인 학자라고 평가한 쓰다 소키치는 인종주의적 편견으로 가득한 학자로, 중국을 매우 혐오했으며, 유교라면 폄하하고 보는 폭력적인 탈아론자이자 과격 근대론자였다. 덧붙여 쓰다 소키치가 천손강림의 일본 창세기 신화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 기저에는 한반도 및 중국 대륙과 고대 일본의 관계를 부정하고 싶었던 맥락이 숨어 있다. 따라서 그의 학설 역시 '대화(大和)민족은 특별하다', '다른 아시안들과는 인종적으로 다르다'라고 주장하기 위해 만든 탈아론의 토대에서 생산된 학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6]

실제로 쓰다 소키치의 발언과 저서들을 보면 러일전쟁 이후로 팽창주의적이며 국수주의적인 색채를 띄며, 단일민족론을 내세우며 고대로부터 이어진 한중의 일본에 대한 영향력을 축소 시키려는 면모가 보이고, "일본 민족은 대륙에 있는 중국민족과도 인종이 다르며 조선, 만주, 몽고 방면의 여러 민족과 다르다"라고도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191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학계에서는 그 저의가 무엇이든간에 한일동족론이 팽배했었으나, 쓰다 소키치의 이러한 주장 이후에는 일본학계에서 일본서기의 신화적 요소들을 신라가야에서 찾으려는 연구가 단절되었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에 기록된 건국 창세기에 대한 불신론은 도래인의 영향을 부정하기 위해서 당위성이 되어버린, 연구자로써 양심을 저버린 상태에서 관제역사에 봉사 하겠다는 요량으로 만든 학설이다. 쓰다 소키치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동시에 비판한 것은 같은 방법론과 잣대로 사료 비판을 한 것도 아니므로 그가 삼국사기, 일본서기를 모두까기 했다고 일관성 있는 학자라는 주장은 부적절하다.

게다가 쓰다 소키치는 진구황후의 신라 정벌 기사에 대해서 "오랜 기간의 사실이 잠재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단편적인 사실일 것이다"라며 조심스럽게 긍정한 바 있다. 즉, 팟케스트에서 기경량이 "쓰다 소키치는 진구황후 삼한정벌이 허구였다고 말했다"라고 주장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

결국 기경량이 말하는 쓰다 소키치에 대한 내용은 피상적이며 필화사건을 언급하면서 ‘기존의 일본학자들과는 결이 다르다’라고 평했던 것은 쓰다소키치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무지의 소치이다. 기경량이 사이비 사학자들이 신채호의 이름과 학설을 빌어 생산하는 무리한 주장을 낡은 학설이라고 비난하듯이 기경량이 이해하는 쓰다의 제국주의 시절 한일 관계 연구사 또한 매우 낡은 학설이고 왜곡 되어 있다고 볼수 있다.

3.2. 정인보, 김석형 등 민족주의 사학자에 대해

또한 기경량은 식민사학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광개토대왕릉비 신묘년조 기사에 대한 정인보김석형의 학설에 대해서는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했다', '해석이 작위적이다'는 식으로 조롱투의 발언을 했다.[7] 이들의 연구에도 시대적 한계가 적용되는 것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쓰다 소키치의 경우와는 달리 선택적 엄밀함을 보여준 것이다.

게다가 김석형의 신묘년 기사 고구려 주체설도 완전히 황당한 해석은 아니다. 적어도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의 기록을 보면 분명 수군으로 백제 관미성을 공격한 것이 391년의 기록에 나오며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도 수록되어 있다.[8] 그래서 관미성 함락 기사는 일본학계에서 조차도 이 기사는 고구려 전승기사이며 391년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는게 일반적이다. 물론 이것을 인용해 고구려 주체설로 확대하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지만, 최소한 정인보가 완전히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백제 신라 사이에 있는 결자(缺字)에 가야까지 끼워넣으며 릉비를 해석하던 20세기 초 일본의 학설은 이미 백제와 신라 사이의 결자를 '東'(동)으로 보는 시점에서 학계의 대세에서 벗어난 논파된 학설이다.

정인보김석형은 쓰다 쏘키치와 같은 20세기 초반 인물로 임나일본부설과 제국주의 체질에 최적화된 일본사학자들의 학설에 민족주의로 대응한 학자이다. 물론 이들은 일본 사학자들처럼 체계적인 교육도 받지 못했고 장비나 연구 여건도 미약했었다. 또한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인물인 것도 맞다. 하지만 지적, 반박까지는 몰라도 조롱은 적절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기경량은 그들이 무리하게 민족사학을 강조했던 시대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기경량뿐 아니라 만인만색 역사공작단 자체가 신채호에 대해 상당히 국뽕에 한심한 학자 취급하는 경향도 있다.[9] 물론 그의 논리가 전부 맞다는 것도 아니고, 지금에서야 그의 학설 상당수가 틀렸다고 입증되고 있지만, 식민주의 학자들에게는 상당히 호의적이면서 그에 대한 반발 심리로 민족주의 사학에 연구를 매진 했던 구세대 학자들에 대해 상당히 냉소적인 혹평을 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4. 조선구마사 옹호 논란

4.1. 1차: 신문 인터뷰

기경량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조선구마사 사태에서 나타난 광고주 압박 등의 행태를 두고 중국과 다르지 않다고 비판했다. 링컨도 흡혈귀됐다... 조선구마사 폐지, 中과 뭐가 다른가

다음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 중에 나온 기경량의 발언과 그에 대한 논의이다.
Q. 왜 역사왜곡이 아니라고 보는가?

A. '조선구마사'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의 배경을 조선 초로 잡았는데 소품 등의 디테일을 판타지라는 장르 뒤에 숨어 대충 느낌만 나게 얼버무렸다. 하지만 '조선구마사'가 실수한 여러가지 요소들은 결정적인 건 아니다. 예를 들어 국경 지역에서 중국 음식이 나온 것은 제작진의 해명이 이해된다. 의주는 한반도와 요동을 잇는 교통과 무역의 거점이었다. 외국인 왕래가 잦은 접경 지역에 외국 음식이 나오는 건 이상하지 않다. 짜장면도 근대 중국인 부두 노동자들이 모인 인천에서 생겨났다. 놀이패의 대사도 신분 차별에 대한 분노 때문에 최영 등 고려 지배층 전체를 싫어한다는 건데 여기에 '최영 모독'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황당하다. 세종에 대해서도 '감히 우리 세종대왕을?'이라며 위대하고 성스러운 모습 외에 어떠한 재구성이나 재해석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Q. 실존 인물을 두고 실제로 하지 않은 언행을 넣은 게 문제라는 지적이 있다.

A.미국에서 링컨은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받는다. 하지만 그가 실은 흡혈귀 사냥꾼이고, 도끼로 이들을 때려잡고 다니다가 심지어 나중에는 흡혈귀가 된다는 설정의 소설과 영화도 만들어졌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런 것을 ‘역사왜곡’이라고 비판한다면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예전에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는 신윤복을 여성이라고 설정했다. 실제 역사와는 다른 말도 안 되는 왜곡이다. 그런데 당시 이를 폐지시켰나? 영화 '천군'에선 무과에 낙방한 이순신이 방탕하게 살다가 나중에 각성해서 영웅적 인물이 됐다. 창작물에서 이 정도 캐릭터 설정도 못 하면 그게 더 문제다.
' Q. 조선구마사'에서 폭발한 이유는 뭐라고 보나?

A. 중국에 대해 쌓인 것들이다. 김치와 한복이 중국 것이라는 둥 고구려가 중국 역사라는 둥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뺏어간다는 인상을 줬다. 또 할리우드에서도 보이는 현상이지만 중국 자본이 콘텐트에 투입되면서 PPL 등 중국의 영향력이 간헐적으로 나타나는데 콘텐트 질을 하락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사람들이 사극에서 기대하는 좋은 모델은 '킹덤'이라고 생각한다. 좀비에 대한 연기도 좋았지만, 많이 화제가 된 것이 조선의 갓 등 복식이다. 외국에서 다양하고 예쁘다고 하니 한국인들도 좋아했다. 우리가 만든 콘텐트에 한국의 좋고 아름다움을 담아 뽐내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조선구마사'에서도 그런 것을 기대하고 봤는데 중국 음식을 먹고 중국식 소품이 나온 것이다. 한국의 음식과 문화를 선전해야 하는데 이런 게 나오니 논리적이진 않지만 '중국이 관여했고 우리 콘텐트를 망가뜨렸다'는 프레임이 짜여졌고, 모든 것이 다 마음에 안 들게 된 것이다.

4.1.1. 의견

다음은 기경량의 행보에 대한 비판 의견과 그에 대한 반론이다.
왜냐하면 재료 본연의 맛으로도 충분한데 쓰잘데기 없는 잔재주를 많이 부려서 재료 본연의 맛을 해친 케이스라서 저는 사실 명량 보면서 처음부터 맘에 안들었어요. 조선 군들이 입은 갑옷이 시커먼 정체 불명의 갑옷을 입고 있잖아요. 아니 조선시대 갑옷은 충분히 고증 되어있고 똑같이 만들수 있거든요. 근데 굳이 뭐 이상한.. 더구나 이순신은 그중에 대장이라고 노란색으로 용무늬 같은게 가슴팍에 있어요. 저는 그걸 봤을때부터 굉장히 하아…(한숨) 몰입이 안됐어요. 저는 그래서 명량이라는 영화를 사실 안좋아해요 안좋아하지만 그건 별개로 이순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던 것 같고..
역시공작단 중 명량에 대한 평
따라서 기경량은 이전의 입장[13]과는 달리 누가 봐도 중국풍이라고 할수 있는 조선구마사의 소품 의복에 대한 비판을 쇼비니즘적이다, 침소봉대한다는 식으로 비판하였으므로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미스터 션샤인의 고증에 대한 비판은 조선구마사와 같이 가시적이고 노골적인 복색이나 소품에 대한 고증이 아닌, 시나리오 상의 고증[14]으로 역사재현물에서는 당연히 어느정도 용납 가능한 서사이다.[15] 이러한 시나리오상의 트위스트는 역덕 수준이 아니라면 지적할 수 없는 디테일인데 반해, 조선구마사의 경우에는 일반인들조차도 지적할 만큼 가시적인 고증 실패가 만연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경량은 이에 대해 다른 작품들에 가했던 고증에 대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조선구마사의 고증에 대한 지적을 '국수주의적 발로', '뽐내고 싶은 욕구'로 매도했다.
이런 식으로 일관성 없고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한다면 결국 기경량 본인은 일침병에 걸린 반골 내지는 역사학자로써 자의식이 강한 쿨병걸린 사람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 다만 이는 기경량의 주장을 잘 살펴보면 다르게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다. 기경량은 분명 위 인터뷰에서 "'조선구마사'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선구마사'가 실수한 여러가지 요소들은 결정적인 건 아니다."라고 언급하였다. 이는 미스터 션샤인안시성에 대한 이전의 발언들과 모순되지 않는다. 조선구마사에 고증실패가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지적하는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성토와 폐지 운동은 과도하다고 의견을 낸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경량이 '고증을 실패했으므로 방영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말한 적은 없으며, 오히려 "이런 식의 창작물들은 우리가 100% 고증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위 인터뷰상에서 기경량이 국수주의라고 직접적으로 말을 한 부분은 없으며, '뽐내고 싶은 욕구'라는 표현은 한국 시청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사실을 말한 것으로 '한국인들은 한국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널리 알리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지 비하적인 맥락은 아니다. 물론 기경량이 예전과 달리 조선구마사의 고증실패를 적극적으로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조선구마사에 대한 비판이 과도하다고 지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당시에는 이미 고증실패에 대한 비판이 사방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 기경량은 과거 고증실패를 지적할 때에도 "이런 고증을 지적하는게 그 해당 작품에 대해 폄하하는 방향으로 가는게 아니"어야 한다고 언급했으므로 조선구마사 폐지에 반대하는 것은 그의 원래 생각에 부합한다. 참고로 고증실패와 역사왜곡에 대한 기경량의 생각은 아래의 글을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요컨대 역사 창작물은 상상력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받아야 한다. 결과물에 대한 평가는 비평의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이 지점에서 고증의 부정확함을 이유로 역사 왜곡의 혐의를 씌우는 것은 부적절하다. 다만 역사를 소재로 한 창작물이 기존의 역사상을 비판하거나 대체하고 스스로 역사가 되고자 표방한다면, 창작물이 아닌 역사학적 검토의 대상으로 전환된다. 검토 과정에서 논거의 미비나 자료의 편향적 이용, 의도적 불성실함이 특정한 욕망과 목적성에 입각해 이루어졌음이 확인된다면 비로소 '역사 왜곡'의 혐의를 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역사 창작물의 유형과 역사 왜곡의 조건 중.


물론 의주 기생집과 무당에서 엉터리 고증을 했으므로 비판할 일인 것은 확실하고 이것이 문화공정의 빌미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충분히 일리가 있지만, 기경량의 입장은 그렇다고 드라마를 방영중지시키는 것은 지나치다는 것이고 이 역시 얼토당토않은 의견은 아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을 고려해 보면, 중국 공산당이나 할 법한 대중문화 검열을 한국인들 스스로 자행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은 충분히 제기할 수 있다. 한국인들이 중국을 비판하는 이유 중 하나가 황금방패로 대표되는 과도한 통제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구마사 사태에서의 강경 대응에 긍정적인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결국 정리하자면 기경량의 조선구마사 변론에 대한 비난 여론은 지나친 측면이 있고, 기경량이 옳은 부분을 지적한 것도 있다. 그러나 시기상으로도 혐중 정서가 고조되는 와중이라 조선구마사에 대한 논란들이 심판 여론을 부추겼으며 결과적으로 제작진 및 해당작품을 옹호하던 기경량이 과대한 뭇매를 맞은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더욱 논쟁을 심화시켰고 의주 지역에서 연출된 고증실패의 낙인 효과로 네티즌들이 '이 잡듯이' 뒤지며 고증에 대해 시시비비를 다퉜기 때문에 다른 역사재현물 컨텐츠라면 그냥 넘어갈수 있는 점에서도 조선구마사가 과도하게 비난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싸가지 없이 한다면 대중들의 반감을 사기 마련이다. 예를들어 하술할 기경량의 "(조선구마사를) 역사 연구자들도 역사왜곡으로 볼 수 없다는데, 그간 고증 엉망인 역사 드라마 잘만 보던 사람들이 단체로 달려들어 호통을 치고 욕을 한다. 기이한 현상이다." 발언과 태도는 자칫 대중들에게 도발적이고 엘리트주의 적인 제스쳐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한마디로 ‘원래 엉망이었고 역사학자들도 가만히 있는데 니까짓것들이 뭔데 갑자기 우르르 몰려와 훈장질 이냐’라는 식의 발언은 논란만 가중 시킬수 있는 발언이다. 기경량의 발언은 마치 이전의 역사 컨텐츠들에서도 고증문제가 있었는데 대중들은 알면서도 묵인 하였다고 넘겨 짚는 것이다. 덧붙여 과거에 지적하지 않았다고 해서 현재에서도 묵과 할수 있다는 다분히 비아냥 섞인 논리도 공격적이고 대중들을 업신여기며 정제되지 않는 표현이다. 또 이러한 사태에 대해 그동안 기경량이 견지해오던 고증에 대한 잣대와 일관성을 모조리 소거하고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점도 문제다. 만일 고증실패는 고증실패대로 비판하고 그래도 폐지는 심한 것 같다고 자신의 생각을 뒤에 실었다면 보다 긍정적인 반향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4.1.2. 의주의 무역과 관련된 오류

한편 위 인터뷰 중에는 "작중 시대에는 의주에서 무역이 발달했다"는 식의 실언이 나왔다. 의주가 무역이 흥하게 된 건 조선 후기 인삼 재배[17], 가공기술 발달 및 수출이 이루어지면서부터이다. 평소에 이덕일 류의 환단고기 유사역사학을 냉철하게 비판하던 해당 인물답지 않은 실수이다.[18]

이후 위 서술을 기경량이 팟캐스트 만인만색 역사공작단 방송을 준비하며 읽었고 이에 반박했다.# 이에 따르면 의주 지방은 조선 중기는 물론 조선 초기를 거슬러 고대부터 교통의 요지로 미천왕, 동천왕이 장악하려고 노력했던 곳이었으며, 의주 건너편이 서안평(현재의 단동 지방)으로 요동과 왕래하며 무역이 발달한 곳이었고, 그 중요성은 조선 초기에도 인식되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문종 때의 기록도 있지만 태조 때의 기록에서도 무역의 중심지라는 인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17년(1417년) 5월 18일 2번째 기사에는 박표라는 관료를 제주 대신 의주에 임명하려하자 신하들이 반대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의주지방은 국경이 연접하여 왕래가 끊이지 않아 돈이 많이 유통되는 곳인데 천성이 청렴하지 못한 그가 임명되면 문제가 될 것이다'라는 주장이 실려있다. 어느날 갑자기 무역의 중심지가 된 것이 아니라 고대부터 그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경량의 해당 반박에도 문제가 있다. 조선 초기 상업은 수도의 육의전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주로 5일장, 7일장[19], 즉 시장 바닥에 상인들이 돗자리 깔고 모여서 물건을 거래하는 형태였고, 같은 시기 의주 무역보다 규모가 결코 적지 않았을 명나라와 몽골 오이라트 사이의 대규모 말 무역 역시 허허벌판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드라마에 나오는 건물형 점포가 들어섰을 것이라고 보기 여려우므로 기경량이 옹호했던 조선구마사 제작진의 해명과는 맞지 않는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거상, 전국의 상권을 장악하다.’의 설명에 따르면 의주가 그냥 길바닥에서 물건 파는 수준을 넘어 국제 무역도시가 된 계기는 임진왜란이라고 한다.[원문발췌]

4.2. 2차: 페이스북 발언

기경량은 위 기사가 나간 이후 네티즌들이 이를 비판하자 본인의 페이스북에 추가 입장을 밝혔다. (기경량의 페이스북 발언)

그런데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물의 "(조선구마사를) 역사 연구자들도 역사왜곡으로 볼 수 없다는데, 그간 고증 엉망인 역사 드라마 잘만 보던 사람들이 단체로 달려들어 호통을 치고 욕을 한다. 기이한 현상이다."라는 문장은 일종의 스노비즘으로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한국사 연구자들 상당수가 조선구마사가 역사왜곡으로 보지 않는다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사람에 호소하는 오류에 불과하다. 얘기하고 싶으면 대중들을 "평소에 고증 엉망인 역사 드라마를 잘만 보던 사람들"이라고 단순하게 매도하지 말고, 조선구마사가 역사왜곡이 아니라는 더 많은 증거를 모아 제시하면 된다.

또 전술했다시피 링컨: 뱀파이어 헌터와 비교한 것은 부적절하다. 해당 작품에서 링컨은 시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뱀파이어를 때려잡는 일방적인 선인으로 묘사되었다. 반면 조선구마사는 태조최영 등 양민 학살이 증명되지 않거나 애민 정신을 가졌던 것이 분명한 역사 인물들에 대해 실제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묘사를 한 게 문제였다. 적절히 비교하려면 링컨이 사실은 흑인에 대해 인종차별적인 생각을 가졌다거나, 흑인 등 미국 국민들을 학살하고 피해를 입히는 흡혈귀였다는 식으로 묘사했어야 한다. 만일 그랬다면 미국 사회와 대중들이 기 조교수의 바램대로 가만 보고만 있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게다가 해당 작품에 대해서도 미국에서 반발이 없었던 게 아니다. 링컨: 뱀파이어 헌터에 대해서도 학자와 평론가들 중에 격렬하게 비난한 사람들이 존재했으며, 링컨: 뱀파이어 헌터나 이순신을 희화화한 천군 등에 대해 대중이 가볍게 받아들이는 것은 기본적으로 해당 인물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각색하며, 창작을 '실제 사회에 해악이 될 수 없는 선'에서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당 작품도 링컨에 대한 존경을 가지고 링컨의 실제 행적의 큰 틀을 훼손하지 않은, 유머성 컨텐츠로 받아들여진 것이다.[21] 조선 왕들이 덤벨을 들고 헬스를 하건 거북선 주둥이에서 불이 뿜어져 나가던 세종이 철퇴를 들고 강시를 때려잡건 이 정도로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은 없다. 가장 중요한 건 중국의 한국 문화 예속화 시도가 지속되고 조선구마사의 왜곡이 의도적이라는 정황이 여럿 발견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구마사가 한국 사회에 큰 문제가 될 것으로 보여졌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우려를 단순히 혐중 감정에 의한 트집 잡기로 치부할 수는 없다.

기경량이 주장한 사극의 고증 강화가 사극 컨텐츠 약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 역시 근거가 부실하다.(더 자세한 비판은 조선구마사/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 참조) 해당 주장의 반론 사례로 프랑스 영화를 들 수 있다. 프랑스의 경우 1960년대부터 프랑스어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 프랑스 영화 등등에서도 프랑스어를 좀 더 정제된 형태로 사용하자는 운동을 정부 차원서 시행하고 있다. #[22] 그 결과 프랑스 영화가 부실해졌냐고 묻는다면 답은 "아니오"이다. 해당 정책 덕분에 프랑스 문인들과 프랑스 영화계가 좀 더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프랑스 영화가 외국 자본에 종속되는 것을 막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고증 강화가 콘텐츠 약화로 이어진다는 해당 논리대로 따지면 "프랑스 영화계를 순순히 중국에 다 팔아먹지 않아서 프랑스 영화계의 경쟁력을 저하시켰다."는 황당한 궤변도 성립한다. 굳이 프랑스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얼음과 불의 노래, 밴드 오브 브라더스, 터키 드라마 등 훌륭한 반례들이 여럿 존재한다. 일본의 대중매체가 온갖 위인들을 적극적으로 각색하면서도 기모노, 일본 갑옷 등 일본 문화의 큰 틀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그 특색을 철저히 살렸기에 세계적인 문화 컨텐츠로 자리잡았던 사실을 생각한다면 기 조교수의 생각과는 달리 아무리 판타지를 표방하더라도 사극/시대극의 잘못된 묘사는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오히려 한국 문화의 발전과 전파에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23]

4.3. 3차: 만인만색 역사공작단 팟캐스트

이후 팟캐스트에서 조선구마사를 다루게 되자 공자 한국인설을 언급하며 한국도 역사왜곡을 한다는 식의 양비론성 주장을 하여 또다시 문제가 되었다.

기경량은 한국 또한 공자가 한국인이고 한자가 동이(東夷)에서 파생 되었다는 등의 주장을 했다고 발언하며 물타기를 시전하였다. 하지만 공자가 한국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국내에서도 극소수, 쉽게 말하자면 "UFO가 인간을 창조했다"는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만큼 대중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소수 중에 소수일 뿐이다. 애초에 공자 한국인설은 주류 언론에서는 다룰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수준이다. 반면 중국의 한국 역사 왜곡이나 한국 문화 예속화 시도는 소분홍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관제 속[24]에서 벌어지는 등 규모 자체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양자를 은근슬쩍 동일 선상에 놓는다는 자체가 비논리적이다.

다만 본 논란은 이미 조선구마사가 조기종영되어 대중의 관심이 식은 영향에다가, 기경량이 평소에는 환빠, 국정교과서를 비판하던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져 있었던 이유로 심각한 논란으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5. 설강화 옹호 논란

"의도성 발견하기 어려워" 기경량 교수, '조선구마사' 이어 '설강화' 옹호

조선구마사 이후에 역사왜곡으로 논란이 된 드라마인 설강화에도 역사왜곡으로 보기 어렵다며, 마음에 안 들면 비평만 하면 된다는 옹호 의견을 밝힌 바 있다. 그래서 이 역시 논란이 되었다.

다만 설강화의 경우 폐지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극이 진행되면서 역사왜곡 주장이 대부분 논파되어 결과적으로 기경량의 주장이 맞은 셈이 되었다.

[1] 역사공작단 333화 14:29 이후부터 들으면 된다.[2] 4세기 한성 백제 전성기 시절에 삼국사기에서 근초고왕이 한산 근처에서 황금기를 들고 사열 했다는 기사가 있고, 칠지도에 쓰인 연호를 백제 독자 연호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3] 사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 없으며, 학계의 주류 해석에 맞는 설명이다.[4] 쇼토쿠 태자의 실체를 의심하는 등 당시 금기시되던 삼한정벌 등 일본서기에 실린 기사를 문헌비판을 했고 이로 인해 옥고를 치른 사람이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을 긍정하여 식민사학자로 평가받기도 한다.[5] 당시 일본학자들의 학설은 한반도를 두고 치닫는 러시아, 청나라와의 해게모니 게임과 조선을 두고 식민지화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일본 당대 조야의 정치적 논쟁, 그리고 일본의 입장에서 한반도 정벌을 관철 시키겠다는 관제 역사학의 분위기 속에서 연구되고 계승된 측면이 있다.[6] 천황의 권위에 도전 한것으로 비춰질수 있는 필화 사건 이후에도 이러한 발언을 이어갔다.[7] 만인만색 역사공작단 더 클래식이라고 유튜브에 올라오던 컨텐츠에서 나온 발언이며, 해당 동영상은 유튜브에서 오래전에 삭제 되었다.[8]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해당 기사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겨울 10월에 … 빼앗았다 :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즉위년(391)조에는 고구려군이 일곱 방향으로 나누어 관미성을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시켰다고 하여 보다 상세하게 나온다. 관미성이 함락된 시기는 본 기사에 진사왕 8년(392)으로 나오나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왕 원년(391)으로 나와 1년의 차이가 난다. 이는 즉위년 칭원법과 유년칭원법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동일한 기사이다. 「광개토왕릉비」에는 관미성이 광개토왕이 영락(永樂) 6년(396)에 백제를 쳐서 함락시킨 58성 중의 하나로 나와 본 기사와 5년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광개토왕릉비」에서 광개토왕의 백제 정복을 영락 6년(396)조에 일괄적으로 기록한 것에서 빚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광개토왕의 정벌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즉위년인 신묘년(391) 기사가 전치구로 강조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된다(武田幸男, 271~273쪽; 李基東, 49~52쪽).
[9] 다만 전부는 아니고 위가야의 경우 신중한 태도로 신채호를 평가하고 있다.[10] 박계옥 집필본은 채택되지 않았고 그냥 이름만 올렸다는 설도 있다. #[11] 심지어 조선구마사 이후에 방영한 달이 뜨는 강은 사극도 아닌 아스달 연대기의 세트장을 사용하기도 했다.#[12] 박계옥이 쟈핑코리아와 계약을 체결했던 사실을 근거로 불순한 의도가 입증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박계옥과 쟈핑코리아 모두 모두 조선구마사 집필 당시에는 계약관계가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아직 확실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쟈핑코리아와 박계옥 간의 관계는 쟈핑코리아와 인민일보 사이의 관계에 비해 훨씬 덜 파헤쳐졌으며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13] 미스터 션샤인 관련 발언 외에도, 영화 안시성의 경우 복장이나 무기 등에서 시대상을 반영하지 않았다고 전문가로써 몰입감이 너무 저하된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14] 물론 자질구리한 PPL이나 가상광고로 파리바게뜨가 나오기도 했다. 물론 기경량은 본 방송에서 이 또한 지적했다.[15] 예를 들면 계몽론에 입각한 안창호의 독립운동을 각색해 총을 들고 싸우는 독립투사적 면모를 만들어낸다던가, 개항기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측 인사들을 보면 이미 한일병탄을 기정사실화 하는 언사를 한다던가.[16] 최근에 판타지 드라마 환혼에서 중국식 복색과 비슷한 부분이 나오자, 네티즌들이 몰입감이 떨어진다며 비판하기도 했다.[17] 조선 중기 홍삼을 증포하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홍삼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18] 참고로 기경량이 비판했던 이덕일은 한국 근현대사 쪽에서는 전공자이지만 고대사 해석에서 물의를 일으킨 경우이고, 이번에는 고대사 전공 기경량 조교수가 근세사 부분에서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기초적인 부분을 틀렸다. 한국 고대사 분야는 사료 부족으로 인해 상상력이 많이 필요한 분야이고, 한국 근세사, 근현대사는 사료가 말 그대로 썩어넘쳐서 상상력보다는 다양한 사료에서 필요한 부분을 잘 추출해서 연구, 분석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즉 연구 방식 하나만큼은 서로 180도 다른 분야이다. 이러한 연유로 한국 고대사 전문가가 근세사에서 엉뚱한 얘기를 하는 경우도 있는 듯 하다.[19] 세종실록에서 3남 지방에 가뭄이 들자 백성들이 생계를 위해 5일장, 7일장을 열고 농사 대신 장사를 해서 우려스럽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원문발췌] 중강 무역(中江貿易)은 국경 도시 의주를 국제 무역 도시로 바꾸는 중요한 요소였다. 중강은 어디를 말하는가? 중강(中江)이란 명칭은 압록강이 세 가닥으로 갈라져 흐른 데서 기인한다. 압록강은 그 강물이 오리의 머리(鴨)처럼 푸르다(綠)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백두산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강물은 의주 북쪽 경계에 이르러 몇 갈래 길로 나뉘었다가 합치기를 반복한다. 강에 위치한 크고 작은 섬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섬들은 여름과 가을에는 강물이 불어나 잠기기도 하고 섬이 육지와 연결되기도 하는 등 변화가 많았다. ... 중강 개시는 조금은 엉뚱하게도 임진왜란이 계기가 되어 시작되었다. ... 이것이 1593년(선조 26) 중강에 무역 시장을 연 배경이었다. 중강 개시를 통해 조선은 곡식, 나귀, 노새 등을 명나라에서 수입하고 그 무역 대금을 은화, 말, 면포 등으로 결제하였다. 또한 조선은 중강 개시에서 화약을 밀수입하는 한편 인삼, 수달 가죽 등을 밀수출하였다. 이 중강 개시는 두 나라 무역 상인에게 상당한 이익을 주었는데, 이때 참여한 조선 상인은 서울의 경상, 개성의 송상, 의주의 만상 정도라고 생각된다. 전통적으로 중국과 무역해 재부를 축적해 왔던 이들에게 임진왜란은 또 다른 치부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명나라와의 중강 개시는 밀무역 활동과 국가 기밀 누설 등을 이유로 여러 차례 혁파가 논의되었고, 광해군 때 후금이 성장하면서 사실상 중단되었다. ... 중강 개시는 중국에서 명청이 교체된 이후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조선은 1646년(인조 24) 전례에 따라 연 2회 개시를 열기로 하였다. 청나라가 압록강 북쪽 야인들의 생활을 위한 방편으로 중강에서 무역 시장을 열도록 압력을 행사한 데 따른 것이었다. 중강 개시를 위해 의주부는 개성부와 황해·평안 감영에 소, 소금, 종이 등의 물자를 나누어 배정하였다. 그리고 별장(別將)을 따로 뽑아 압록강변에 물건을 모아 두고 기다렸다가 개시일 에 상인을 거느리고 중강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봉황성의 통관(通官) 장경(章京)과 더불어 값을 정하고 서로 교역하게 하였다. / 제3장 평양 상인과 의주 상인[21] Andrew J. Salvati (2016) History bites: mashing up history and gothic fiction in Abraham Lincoln: Vampire Hunter, Rethinking History.[22] 물론 프랑스는 성, 폭력 관련 묘사는 매우 관대한 편이다. 그러나 해당 정책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 이후 국민의 영어 실력을 떨어트린다 등등의 지적이 나왔고 90년대 한 차례 더 개정이 이루어졌다.[23] 이미 일본 매체는 조선구마사보다 창작과 왜곡이 심한데 어떻냐는 옹호가 간간히 있으나 말했듯이 창작이 문제가 아니라 창작하는 방식이 문제다. 그리고 일본 문화와 한국 문화는 세계적인 인지도와 중국의 문화 침탈의 수준이 다르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며, 사극이나 시대극에서 조선구마사식 중국풍 왜곡을 저지른다면 조선구마사 못지 않은 논란이 일 것이다.[24] 적어도 이러한 선동들을 중국 정부가 방관하고 더 나아가서는 방조하는 것은 한한령등으로 대표되는 중국 정부의 프로파간다임에는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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