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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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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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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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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수나무 계)2. (끝 계)3. 인물
3.1. 실존 인물3.2. 가상 인물3.3. 기타
4. 여담

1. (계수나무 계)

계(桂)씨는 중국대한민국, 북한[1], 일본[2]에서 쓰이는 성씨이다. 본래는 수안(遂安, 현 황해북도 수안군)을 비롯해 전주, 초산, 연안 등 12본이 전했으나 현재는 수안으로 합본하여 단본이 되었다. 시조는 명나라 홍무제 때 조선에 왔다가 귀화한 계석손(桂碩遜)이다. 계석손은 명나라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내다가 홍무제의 명으로 조선에 예학(禮學) 전수를 위해 파견되었고, 조선에 귀화하여 수안백(遂安伯)에 봉해졌다고 한다. 수안계씨족보에 따르면, 계석손은 명나라 성양태수(城陽太守)를 지낸 계경횡(桂炅橫)의 셋째 아들이었다 한다.

2015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수안 계씨는 6,056명이 있다.

1930년 국세조사 당시 전체 계씨의 대부분이 북한 지역에[3] 살았고 남한지역에 거주한 가구수는 미수복 경기/강원 지역을 포함하더라도 166가구로 전체 계씨의 고작 6%였다. 남한 지역 내에서는 대부분 서쪽 최북단에 몰려있는데 그마저도 절반이 미수복 북한 지역에 거주하였기에[4] 이 비율은 약 97%로 증가하게된다. 남한이 통치한 지역의 집성촌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딱 한 곳 밖에 없다. 현재 남한 내의 계씨는 대부분 부, 또는 조부가 실향민 출신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통일이 된다면 인구 비율이 약간 상승할 것이다.

2. (끝 계)

계(季)씨는 2015년 인구조사 때 나타난 성씨다. 국내에 5명밖에 없으며 귀화성으로 보인다. 또는 李(이) 씨의 오탈자일 가능성도 있다.

3. 인물

3.1. 실존 인물

3.2. 가상 인물

3.3. 기타

4. 여담

하이텔 시절 유머글인 우리들의 아름다운 '성'이야기가 계씨를 소재로 한 글이다.

계백[6] 장군과는 무관하다. 관련 농담으로 영화 두사부일체에서 정준호가 학교 일진들이 계씨 중에 유명한 사람 있냐고 비웃자 불현듯 "계백장군?"이라고 말했다가 역으로 "똘이장군은 똘씨냐?"며 갈굼당하는 내용이 나온다.


[1] 후술하겠지만, 계씨는 남한보다 북한에서 훨씬 주류인 성씨다. 남한에서 계씨는 희귀하지만 북한에서는 은근히 많이 보이는 성씨. 정반대로 절대다수가 남한사람인 성씨로는 권씨가 대표적이다.[2] 카츠라 참조.[3] 평안북도 선천군에 대대적으로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인구가 많은 지역 순대로 보아도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순으로 대체로 이북 지역이였다.[4] 강원도 거주 계씨의 총 44가구가 모두 평강군을 중심으로 미수복 북한지역에 거주하였고, 경기도 거주 계씨의 82가구 중 절반이 미수복 북한 지역인 장단군, 개풍군과 인근 도시인 개성시에 거주하였다. 현재는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어 있지만 남한 내 유일한 집성촌이 있는 강화군에서는 분단 전인 당시 인천시 생활권이 아닌 개성시 생활권이었다. 지리상으로도 인천보다는 개성이 더 가까웠기 때문.[季] [6] 한자로 階伯이다. 그리고 계백의 경우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라 성만 빼고 이름으로만 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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