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응상 桂應祥 | |
자 | 준옹(俊翁) |
출생 | 1893년 12월 27일 |
평안도 정주목 아이포통 일리[1] | |
사망 | 1967년 4월 24일 |
본관 | 수안 계씨[2] |
학력 | 경성부 오성학교 (졸업) 우에다점사전문학교 (졸업) 규슈제국대학 (농학 / 학사) 규슈제국대학 (농학 / 박사) |
묘소 | 애국렬사릉 |
1. 개요
북한의 농학자, 유전학자, 잠사학자.본관은 수안(遂安)[3], 자는 준옹(俊翁). 북한 내에서는 저명한 유전학자이며, 트로핌 리센코의 학설에 배치된 학설을 펼쳤고, 실제 리센코와 유전학 분야에 대해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2. 생애
1893년 12월 27일 평안도 정주목 아이포통 일리(現 평안북도 정주시 석산리)에서 화전민이던 아버지 계시경(桂時慶)의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4] 유년기에는 아버지를 따라 화전을 일구었으나 10대 후반 무렵 마을의 서당을 다니게 되었고, 서당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18세가 되는 해에는 공부를 해야 겠다는 일념 하나로 무작정 상경하여 경성부 오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각종학교였던 오성학교를 1916년 졸업하고, 일본의 제국대학에 입학하겠단 생각에 무작정 도일하였다.하지만 일본의 관립 구제전문학교와 제국대학에선 오성학교 학력이 인정되지 아니하였고, 그나마 오성학교 학력을 어느 정도 인정해준 사립 우에다(上田)잠사전문학교에 1917년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1910년에 설립된 신생 사립전문학교였기에 입학생을 폭넓게 받았다 한다. 이 전문학교에서 2년간 수학한 계응상은 규슈제국대학 농학부에 선과생으로 입학(1919)하였다. 계응상이 이 대학에 입학하던 해 농학부가 신설되어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선과생[5]을 선발했고 계응상은 수월히 규슈제국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이 농학부 본과에서 3년간 더 수학한 후 차석으로 졸업(1922)하고 지도 교수의 권유로 대학원 연구생으로 입학하였다. 연구생 재학 당시 누에유전학, 생리학, 해부학을 공부하고 국제 학회에 논문을 발표하였으나 학위를 취득하진 못하고 연구생 수료에 머물렀다.
그가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기 가계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을 수 없었기에 고학을 했고, 이 때 굉장한 고생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신문배달, 식당 종업원, 청소부, 경마장 청소 등 온갖 잡일을 해 돈을 모아 학비를 댔다. 하지만 그는 기업체나 관청에 들어가기보단 학자가 되겠단 일념뿐이었지만 어려움 때문에 결국 연구생 수료에 그쳤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대학원(연구원) 연구생 수료만으로도 상당한 고학력자였기 때문에 1929년 동경고등잠사학교에서 겨우 임시교원(현대의 시간강사) 자리를 구하긴 했다. 하지만 이 학교에서 강의 시수를 거의 주지 않아 생계가 여전히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당시 조선 내에도 고등 농업 교육기관이라곤 수원고등농림학교나 숭실전문학교 농과 정도였는데, 이곳에선 남는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계응상은 아예 중국 쪽으로 눈을 돌리는데, 1930년 5월부터 1938년 10월까지 광동중산대학 유전학과 교수를 지낸다. 여기서 그는 서구의 현대적 유전학과 중국의 민족주의, 공산주의 등을 접하며 일본의 폐쇄적인 학풍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1938년 중일전쟁의 전황이 심각해지자 그는 중산대학의 강단을 떠나 베트남 하이퐁, 하노이, 사이공 등을 전전하다 중국의 홍콩을 거쳐 결국 1939년 조선 내로 들어오게 된다. 조선에 귀국한 그는 경기도 농사시험장, 재령잠업연구소에서 근무했고 1940년부터 수원고등농림학교 교수 자리를 얻게 되고 여기서 식민지인텔리로서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잠사학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계응상은 수원고등농립학교 교수로 근무하던 1942년 일본의 농림성에 출장을 갔다가 규슈제국대학 연구실에서 같이 연구생 생활을 했던 동기를 만났고, 동기가 대학에 신원보증[6]을 해줄테니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유를 해서 이를 받아들였다. 다행히 연구생 수료 경력이 전부 인정되어 1943년부터 규슈제국대학 농학부에서 강사 생활을 하며 박사 학위 취득에 매진한다. 그 결과 1945년 3월 23일 규슈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박사논문 제목은 '누에나방의 고치 및 난형의 유전에 관한 연구'(家蚕の繭色及卵形の遺伝に関する研究)이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링크(일본어)
사실 이정도 스펙만 보더라도 계응상은 당시로서 주목받는 신성 농학자였고, 남과 북 모두에게서 러브콜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단 이유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낙인 찍혀 많은 비판을 받았고[7], 이를 교묘히 활용한 북한 당국에 설득되어 1946년 5월 월북하게 되고, 그가 평양역에 도착하는 날 김일성이 직접 역 플랫폼에 나와 계응상을 맞이한다.
계응상은 월북한 직후인 1946년 7월 김일성종합대학 농학부 교수에 임용되었다. 이는 북한의 두 번째 대학 교수 임용이었다. 김일성종합대학 농학부 교수 재직 시절 의학부에서도 생리학 강의를 하기도 했다. 또한, 1948년 2월 김일성은 계응상에게 농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계응상은 1945년 이미 규슈제국대학 농학부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김일성은 북한 명의의 학위가 있어야하지 않겠냐며, 해당 학위를 수여하였다. 김일성이 학위증서를 직접 결재하고, 계응상에게 친수하였다.
원산농업대학 강좌장(학과장)에 임명되었고, 얼마지나지 않아 중앙잠업시험장의 기관장을 겸직하게 된다. 계응상은 자신의 학설에 대한 강한 신념이 있었기에 1930년대 중엽부터 1960년대까지 세계 유전학계에 파란을 일으킨 트로핌 리센코의 환경유전설과 혼합유전설을 부정했다. 일견, 관점에서야 학자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리센코와 계응상의 지위는 하늘과 땅이었다.
리센코는 소련의 국가 과학원 원사, 국가 유전학연구소 소장, 국가농업원 원장 타이틀을 모두 쥐고 있고, 또 소련 내의 정치력까지 쥐고 있는 어마어마한 인물이었고 계응상은 일개 농업대학의 촉망받는 학자에 불과했다. 즉, 리센코의 학설에 반기를 든 계응상의 앞날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사회주의권 농학계의 비난과 북한 농업 당국의 행정적 박해를 받게 되었다.
북한 농학계 내에서 리센코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점점 높여가자 소련의 언질을 받은 북한 농업 당국에서 칼을 빼들고 중앙잠업시험장의 기관장 자리에서 계응상을 해임하고 곧이어 교육성에서도 계응상의 교수직을 박탈했다. 이러한 소식이 김일성에게까지 들어갔고, 김일성이 어디서 뭘 잘못 먹었는지 왜 학자의 신념을 짓밟으려 하냐면서 계응상을 원래 직책에 복직시켰다.
당시 계응상이 비판 받은 명목은 소련 내에서 부르주아농학이라 규정한 서구유전학을 따르며, 모건 유전학 실험의 주요 소재였던 초파리 유전학 강의를 진행했다는 것이었는데, 여기에 김일성이 제동을 건 것이다. 만일 여기서 김일성이 제동을 걸지 않았으면 북한 내에 리센코의 학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농업이 더 빨리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김일성의 옹호를 받은 계응상은 리센코의 학설을 더 강도 높게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베이징 세계유전학대회에서 아예 대놓고 리센코의 농업 이론을 따르면 소련 농업은 붕괴될 것이란 발언을 하기도 했고, 소런의 국가 과학원에서 이 문제를 놓고 리센코와 직접 학문적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학술적 업적을 거둔 후에 67세의 나이로 조선로동당 입당을 신청하여 당원이 되었다.
1957년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62년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당선되는 등 북한 정권의 대우를 받았으며 1960년 9월 9일에 인민상을 수상하였다. 1963년 12월, 김일성이 농업과학원을 현지지도한 후에 그 자리에서 정치위원회 회의를 열고 그에게 70세 생일선물로 로력영웅 칭호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1967년, 4월 24일에 사망하였다. 북한은 공식사인을 '장기간의 중환'으로 발표했으나 남한에선 교통사고로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과학원과 농업과학원은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해방후 우리 당 과학정책을 관철하는데 온갖 정력과 재능을 바쳤으며 우리나라 잠업 및 잠학을 발전시키며 후대들을 교육하는 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라고 칭송해주었으며 후일 애국렬사릉이 조성되자 과학원 잠학연구소 소장, 원사, 교수, 박사 직함으로 안장하였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은 계응상을 위해 묵념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1990년 사리원농업대학의 명칭을 계응상농업대학으로 개칭했고, 이 대학은 2010년에 김일성종합대학의 단과대학으로 편입되었다가 2019년에 평양의학대학, 평양농업대학과 함께 계응상사리원농업대학으로 다시 분리되었다. 이후 김정은의 지시로 북한 과학기술전당에는 계응상의 밀랍상이 설치되었다.
뜬금포로 암살설이 돌지만 북한에서 누가 죽을 때마다 상투적으로 나오는 근거 없는 음모론이며 정말로 북한에서 일개 과학자에 불과한 계응상을 죽이고 싶었으면 반동분자 따위로 몰아 바로 목을 따면 그만이다. 실제 비슷한 시기 남한에서도 케임브리지대 국제법 교수였던 박노수 씨를 유럽 간첩단 조작 사건으로 대놓고 처형시켰다. 하지만 계응상은 사후 그 처우가 완전히 다르다.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지만 김일성의 지시로 조선혁명박물관에 전용 전시실이 편성되어 있는데, 이는 사실상 대성산혁명렬사릉의 최상단에 안장된 이들과 동일선상의 인물로 보겠단 의미다. 김정은 시대에서도 계응상은 반동 리센코에게 맞선 과학적 신념이 투철한 과학자로 선전하고 밀랍상까지 만들어서 국가 대표 과학자로 숭상[8]하고 있다. 즉, 이러한 음모론은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이다.
3. 여담
-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22세부터 금연, 금주하였고 26세에 채식주의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 아들 계중삼도 과학자가 되어 박사 학위를 받고 김일성종합대학 학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 북한에서 수염은 친일파, 부르주아의 상징으로 매우 안좋게 보는데도 불구하고 해방 후에도 수염을 기르고 활동한 몇 안되는 인물 중 한명이다.
- 황해북도 사리원시의 계응상대학의 시설은 다음과 같다.
- 시설: 실험실, 표본실, 종합실습농장, 농업생물공학연구소, 작물재배학연구소, 잠학연구소, 수의축산학연구소, 경제식물학연구소, 농업공학연구소, 도서관, 출판소
- 교육분야: 농학부, 수의축산학부, 농업생물학부, 농업화학학부, 과수학부, 잠학부, 산림하천학부, 농업기계화학부, 농업경영학부, 연구원, 박사원
- 채널A 프로그램인 성적을 부탁해 티처스에서 잠깐 언급되었다.
[1] 現 평안북도 정주시 석산리[2] 선천장파 22세 응(應)O 항렬[3] 선천장파 22세 응(應) 항렬.[4] 아버지 계시경은 양천 허씨 허옥(許玉)의 딸과 연일 승씨 승범(承範)의 딸 등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계응상이 누구 소생인지 확실치 않다.[5] 일각에선 편입생으로 설명하지만, 현대의 편입생과 완전히 똑같진 않다. 구제 고등학교나 제국대학 예과 출신과 동등한 대우를 받진 못했으나, 본과 1학년에 정식으로 입학하기 때문이다.[6] 이 동기는 연구생으로 근무하던 도중에 고등문관시험을 합격을 해서 나갔고, 계응상이 다시 만났을 때는 직급이 꽤 높은 고관으로 근무중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사 학위를 받지 못한 것에 대해선 미련이 컸다고 한다. 태평양전쟁의 영향으로 일본 본토의 분위기가 매우 좋지 않았음에도 이 친구의 추천이 있어서 박사 학위 과정을 재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7] 실제로 이 시기 조선 내에서나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단 이유로 비난 받는 학자들이 많았다. 문제는 이런 학자들은 권력이나 돈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누군가의 비호를 받지 못했고 그러한 비난을 그대로 받아야했다. 이러한 비난은 반민특위가 조직되자 더욱 거세졌고 리승기, 리경식, 려경구, 채희국 같은 이들은 끌려가서 고초를 겪기도 했다. 결국 이런 무분별한 비난에 빡돈 당시 학자 계층 상당수가 1946년부터 한국 전쟁 직전까지 북한으로 넘어가버린다.[8] 북한에서 계응상처럼 김씨일가 이외에 특정 인물의 밀랍상을 만든 사례는 극히 드물고, 마찬가지로 "조국과 인민의 기억 속에 '영생'하는"이나 "투철한 신념, 백옥같은 양심" 등 김일성, 김정일급에나 붙일 말이 따라 붙는 인물은 계응상이 사실상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