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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경북대학교 총장 계철순 桂哲淳 | |
<colbgcolor=#DB1F26><colcolor=#fff> 출생 | 1912년 12월 20일 |
평안북도 선천군 | |
사망 | 2003년 6월 11일 (향년 90세) |
서울특별시 | |
창씨명 | 가쓰라 테츠오(桂哲雄) |
호 | 월파(月坡)[1] |
본관 | 수안 계씨[2] |
학력 | 신의주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법학 / 학사) 고려대학교 (법학 / 명예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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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법조인, 법학 교수, 경북대학교 제4대 총장.2. 생애
1912년 12월 20일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아버지 계용전(桂龍銓)과 어머니 하동 정씨[3]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930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같은 해 경성제국대학 예과 입학 시험에 합격하여 문과 A조에 배정받았다. 그는 입학 후 반제동맹에 관계하던 동기생 홍필선(洪必善)이 '독일어 공부를 같이 하자'는 권유를 받고 교내 독서회 예과반에 소속되어 좌익서적을 교본으로 공부했는데, 이 때문에 1931년 10월 당시 법학과 선배 신현중·조규찬 등이 관계하고 있던 마르크스-레닌계 조선공산당 재조직 사건에 연루되어 경성부 본정경찰서에 검거되었으나 11일만에 불기소처분으로 석방되었다. 1932년 4월 예과를 제7회로 수료하고 같은 해 5월 본과 법문학부 법학과에 입학했다.
1934년 8월 27일 선천유학생회에서 동아일보 선천지국의 후원을 받아 학술대강연회를 열었을 때, 「法律上(법률상)으로 본 貞操(정조)」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1935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학사시험에 합격하여 졸업하였다.[4]#
그는 대학 재학 중에 얻은 폐결핵을 요양하기 위해 졸업 후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 상원금융조합에 이사로 취임하여 1939년까지 역임했으며, 1939년 4월에는 약방을 경영하던 친구 김태봉(金泰鳳)[5]과 함께 평안북도 신의주부 노송정에 일독약업(日獨藥業)합명회사 본점을 설립했는데, 이후 일덕화학공업(日德化學工業)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가 1940년 11월 30일 폐업했다.
1940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그는 1941년 경성지방법원의 사법관시보로 발령받아 관료생활을 시작했고, 1943년에는 대구지방법원 판사에 발령받아 8.15 광복 직전까지 근무했다.
광복 직후에도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근무했으며 그 해 10월 초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 절도사건에 대한 재판을 담당했는데, 이 재판은 해방 이후 최초로 열린 재판으로 한국어를 사용한 최초의 재판이기도 하다. 이 재판에는 고재호 당시 대구지방법원장이 참석하여 방청하기도 했다.
이후 1946년 대구고등법원 판사로 근무하다가 1946년 대구변호사회 소속 개인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다. 1948년 3월 24일 국회의원선거위원회 경상북도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12월 자유신문사 후원, 조선사진예술연구회 주최의 제2회 전조선예술사진전람회에서 입선하기도 했다.
1950년 대한민국 육군본부 법무관으로 임관되어 1954년까지 근무하였는데, 육군 소령 법무사로 재직 중이던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의 2차 재판에 재판관으로 출석하기도 했다. 1954년 대한민국 육군 중령으로 예편한 그는 경북대학교 법정대학 교수에 채용되어 1959년까지 재직했고, 재직 중에 법정대학 학장을 맡기도 했다. 1959년부터 변호사 활동을 재개했는데,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뒤 그 해 7월 혁명재판소 상소심 심판관에 선임되어 12월까지 재직했다.
1961년 12월 7일 경북대학교 제4대 총장에 임명되어 1967년까지 재임했으며, 경북대학교 총장에 재직 중이던 1963년 고려대학교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총장 재직 중 생산기술연구소를 설립하고 두 차례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대면하여 막대한 연구비 지원을 받았고, 1966년 국내 최초로 강의계획표 제도를 도입하고, 어학연습교실을 만들었다. 입학시험 또한 기존의 OX퀴즈 중심에서 주관식 시험 및 작문 시험을 도입했다. 또한 당시 경북대학교 교정을 통과하는 도로는 포장이 채 되어 있지 않아 비만 오면 진흙탕이었는데, 당시 강원채(姜琬埰) 대구시장에 요청하여 경북대학교 정문에서 대운동장까지의 폭 5m의 포장도로를 정비했다. 이때 공병대대의 도움을 받아 벚꽃길 등과 같은 가로수길도 만들었다.
한편, 학교 조경에도 관심을 가져 원로교수의 제안을 받고 캠퍼스에 연못을 만들었는데, 이 연못이 바로 당시 기금을 지원한 하영수(河泳洙)의 호를 따서 이름한 '일청담(一淸潭)'이다. 또 원예학과와 함께 본관 앞에 꽃시계를 만들고, 경북대학교 박물관 주변에 자신의 호를 따서 이름한 '월파원(月坡園)'을 조성했다.
은퇴 후 우석대학교 관선 이사에 취임했다가 1977년부터 1996년까지 경상북도 안동군에서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서민 법률구조 사업을 하기도 했다. 이때 취미였던 사진촬영에 더욱 더 흥미를 가져 1986년 한국사진작가협회 초대 안동지부장 및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초대 안동지부장에 취임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1996년 노령으로 변호사업을 은퇴한 그는 가족들이 있는 서울로 가서 여생을 보내다가, 2003년 6월 1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사후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사법 부문에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