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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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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Georg Friedrich Händel
파일:George_Frideric_Handel_by_Balthasar_Denner.jpg
이명 조지 프리더릭 핸들
George Frideric Handel[1]
출생 1685년 3월 5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마그데부르크 공국 할레
사망 1759년 4월 14일 (향년 74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경력 작곡가, 오르가니스트
사조 바로크 음악
신장 181cm
소띠
별자리 물고기자리
상승점 물병자리[2]
종교 루터회
서명 파일: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소년2.2. 본격적인 음악생활2.3. 하노버의 악장 ~ 영국의 음악가2.4. 1차 왕립 아카데미2.5. 2차 왕립 음악 아카데미2.6. 오라토리오와 말년의 헨델
3. 평가4. 작품 개요5. 주요 작품
5.1. 오페라
5.1.1. 파스티초 (도용 작품)
5.2. 오라토리오5.3. 기악음악5.4. 교회음악
6. 바흐와의 비교7. 기타8.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Händel ist der größte Komponist, der je gelebt hat. Ich würde mein Haupt entblößen und an seinem Grabe niederknien.
헨델은 지금까지 살았던 작곡가들 중 가장 위대한 작곡가이다. 나는 모자를 벗고 그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3]
루트비히 판 베토벤
할레를 들리면서 헨델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작곡을 다시 시작할 뻔했다.
요한 마테존의 『개선문의 기초Grundlage einer Ehren-Pforte(1740)』에 실린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의 자서전 中

후기 바로크 음악의 거장.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바로크 후기의 가장 중요한 음악가 중 한 명으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함께 바로크 음악의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진다. 그래서 헨델의 별명도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바흐와 대비되어 '음악의 어머니'로 불린다. 바흐가 주로 기악곡종교음악 쪽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면 헨델은 오페라오라토리오와 같은 극음악 쪽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오라토리오 메시아는 초연 후 지금까지 유럽 문화권에서 한 번도 연주되지 않았던 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소년

파일:Georg-Händel_(Vater).jpg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아버지 게오르크 헨델

이발사 겸 궁정외과 의사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음악에 관심과 두각을 나타냈다. 특기할 것은 프리드리히를 낳았을 때 아버지가 자그마치 63살이다. 게오르크 헨델은 75살까지 장수했으나 이 때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나이는 고작 13살이었다.[4]

아버지가 죽기 전에 아버지의 고용주이자, 작센 바이센펠스 공국의 공작 요한 아돌프 공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오르가니스트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차호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11세 때에는 베틀린 궁정을 찾아가 아틸리오 아리오스티에게서 이탈리아 음악과 프랑스 음악을 익히기도 했다. 하지만 게오르크는 음악을 단순한 위안거리나 오락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음악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1697년 2월 죽기 직전 게오르크는 아들에게 '법관이 되라'는 유언을 남겼기에 할레 대학법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자신의 적성에 따라 할레 대성당의 오르간 주자로 들어가며 음악가의 인생을 시작한다.

2.2. 본격적인 음악생활

그러다 1703년 18살 때 뤼벡으로 가서 당시 오르가니스트의 거장 디트리히 북스테후데를 만나 그에게 음악을 배웠다. 헨델의 천재적인 오르간 연주 솜씨와 작곡 능력이 마음에 들었던 북스테후데는 헨델에게 자신의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다. 당시 북스테후데는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였기 때문에 후임자 선정을 고민해야 했던 것. 하지만 이 제안을 덥썩 받아들이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북스테후데의 자리를 물려받기 위해서는 북스테후데의 딸인 마르가리타와 결혼해야 했던 것. 북스테후데가 헨델과 자기 딸의 결혼을 제안한 이유는 이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는 전임 오르가니스트의 직계 자손 즉, 전임자의 아들이나 사위만 그 자리를 승계할 수 있다는 규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스테후데 또한 전임 오르가니스트인 프란츠 툰더의 딸과 결혼하여 그 직위에 오를 수 있었다.

결국 헨델은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뤼벡을 떠난다. 한편 헨델이 떠난지 2년후에 바흐가 뤼베크에 와서 북스테후데에게 똑같은 제안을 받게 된다. 바흐 역시 북스테후데의 음악에 큰 감명을 받았고 북스테후데 역시 헨델 못지 않은 바흐의 재능에 감탄을 했다. 하지만 바흐 역시 6촌이자 한살 위였던 마리아 바르바라와 한참 연애 중이었으므로 북스테후데의 딸과의 결혼 제안을 거절하고 뤼벡을 떠났다.[5]

자신의 음악성을 알리기에는 할레가 너무 좁다고 느꼈던 헨델은 당시 독일 오페라의 중심지였던 함부르크 등을 다니면서 요한 마테존이나 라인하르트 카이저 같은 작곡가들과 친해져 함부르크 오페라 하우스의 제 2 바이올린 주자로 일하는 동시에 오페라 작곡에 전념하게 된다. 20살에는 오페라 《알미라(Almira, HWV 1)》[6]를 작곡한다.
헨델에 대한 다큐 '방랑하는 마에스트로'(The Wandering Maestro)(2007)의 마테존과 헨델의 결투.
BGM은 《이시스와 갈라테아Acis And Galatea, HWV 49》 중
2막 폴리페모스의 아리아, '오 버찌보다 붉고O ruddier than the cherry'

21살이 되던 1706년에는 본격적으로 오페라와 극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아예 오페라의 본 고장인 이탈리아유학을 갔으며 이듬해에 피렌체에서 헨델이 작곡한 최초의 이탈리아어 오페라인 '로드리고(Rodrigo)'가 성공을 거두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7] 1709년에는 로마에서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를 만나 오르간하프시코드의 경연을 벌이기도 했는데 자세한 것은 스카를라티 문서을 참조하기 바란다.

2.3. 하노버의 악장 ~ 영국의 음악가

파일:젊은 헨델.jpg
1710년경의 헨델.
크리스토프 플라처(Christoph Platzer)

1710년 헨델은 이탈리아에 체류하고 있던 하노버 선제후국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를 만나 하노버 왕국의 왕실 악장이 되었고 휴가를 얻을 때마다 런던으로 갔다. 1711년 2월 런던에서 오페라 리날도가 15회나 상영되는 등 대성공을 거두면서 런던에서도 인기작곡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며 영국 왕실의 관심도 얻게 되었다. 그해 여름에 하노버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다시 영국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청원을 하고, '합당한 시기에 돌아온다'는 조건을 받고 다시 영국으로 간다.

1713년, 핸델은 당시 영국 국왕이었던 앤 여왕을 위해 《앤 여왕의 탄생일을 위한 송가(HWV 74)》 등의 작품을 작곡했다. 앤 여왕은 그에게 연금을 하사했고, 그해 7월에는 위트레흐트 조약을 축하하는 장엄한 《테 데움(Te deum, HWV 278)》과 《유빌라테(Jubilate, HWV 279)》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연주하게 된다. 하노버보다 훨씬 큰 무대인 런던에서의 성공을 확신한 헨델은 결국 하노버로 돌아가지 않고 영국에 정착해 버리는데, 이 배신 행위가 그를 곤경에 빠뜨리게 된다.

즉, 헨델을 적극 후원했던 영국의 앤 여왕이 자녀가 없는 상태에서 1714년 사망하자, 하필 자신이 뒤통수를 때렸던 하노버 선제후국의 게오르크 루트비히 선제후영국 국왕 조지 1세로 즉위하게 된 것이다. 당연하게도 조지 1세는 약속을 어긴 헨델에게 크게 분노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1761년에 출판된 첫 헨델 전기에 의하면 조지 1세의 복수를 두려워한 헨델이 1717년 조지 1세가 영국을 방문하자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음악을 작곡해서 연주했는데, 이 곡이 바로 헨델의 기악음악의 대표작이 된 수상 음악이다. 이 수상 음악은 말 그대로 물 위(水上)에서 연주하기 위해 작곡된 음악으로 헨델은 자비를 들여 악사들을 배에 태워서 배에서 이 음악을 연주시켰다.[8] 다행스럽게도 조지 1세는 악사들에게 세 번이나 더 연주하도록 명령했을 정도로 이 수상 음악을 크게 마음에 들어했고 딱히 헨델을 처벌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즉 자신의 배신행위가 부메랑이 되어 곤경에 빠졌는데 오히려 명작을 만들어 위기를 극복한 것이다.

조지 1세가 수상음악을 듣고 헨델을 용서해줬다는 이야기는 현재 신빙성에 의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헨델이 유람선 행렬에서 연주한 것은 사실이다. 당시 한 일간지에 의하면 조지 1세가 이 음악을 무척 좋아해서 계속 연주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2.4. 1차 왕립 아카데미

파일:20180331_201257.png
영국에 온 후인 1718년. 토마스 허드슨(Thomas Hudson) 작

맘편히 영국 생활을 시작하게 된 헨델은 샨도스 공작 밑에서 일했는데, 웅장한 송가 몇편과 오페라들을 썼다.

이 해프닝 이후 헨델을 비롯한 대륙의 유명 오페라 작곡가들이 런던에 속속 진출하면서 런던에서 오페라 세리아[9] 유행이 일어난다. 그래서 오페라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고 공연을 통한 수익도 얻기 위해 돈과 시간이 남아도는 영국의 귀족들이 주축이 되어 오페라 악단들이 창립된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1719년 유럽 각지에서 가수와 관현악단을 모아 왕립 음악 아카데미(Royal Academy of Music)를 설립하게 되며 전속 오페라 작곡가로는 헨델 외에 조반니 보논치니(Giovanni Bononcini, 1670~1747), 아틸리오 아리오스티(Attilio Ariosti, 1666~1729)가 있었다.[10]

헨델은 이 시기에 라다미스토, 무치오 세볼라, 줄리오 체자레, 로델린다 등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으며 왕립음악원의 엄청난 재력으로 카스트라토 가수인 세네시노(Senenino)를 필두로 소프라노 마르게리타 두라스탄티(Margherita Durastanti, 1700~1734), 프란체스카 쿠초니(Francesca Cuzzoni, 1696~1778), 파우스티나 보르도니(Faustina Bordoni, 1697~1781)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을 거의 사재기 수준으로 데려왔다. 이 시기는 헨델의 오페라인생에서도 가장 황금기였고 런던에서 본격적인 유명세를 타고 돈도 많이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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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의 애증의 소프라노 프란체스카 쿠초니

그런데, 흥행을 위해 비싼 몸값을 주고 모셔온 쿠초니와 보르도니는 음악 외적으로도 (주로 좋지 않은 쪽으로) 갖가지 화제를 뿌렸으며 두 사람의 유명세는 공교롭게도 왕립 음악 아카데미의 몰락에 일조하게 된다. 바로 두 사람의 라이벌의식이 문제였는데, 연배가 비슷한 두 사람의 경쟁의식이 너무 강했던 탓에 헨델을 비롯한 오페라 작곡가들은 두 사람을 같이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 등장시간이나 배역의 비중, 음역 심지어 음표 수까지도 똑같이 맞춰야 했다. 배역 균형을 억지로 맞추다 가뜩이나 지리멸렬한 오페라의 스토리가 아예 산으로 가버리는 것은 덤이었다.

이 부분을 조금 설명하자면, 당시의 오페라(다른 음악장르도 마찬가지)는 일종의 공장 양산형으로 굉장히 빠르게 작곡되었기 때문에 비슷한 음악과 비슷한 스토리가 재탕 삼탕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게다가 당시에는 저작권의 개념도 없었기 때문에 남의 음악이나 대본이 좀 팔린다 싶으면 대놓고 마구 표절했으며 이미 연주되었던 자신의 음악이나 가사를 재활용하는 자기표절도 횡행했다(헨델 본인도 결코 이런 관행에서 자유롭지 못한 작곡가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작곡가나 대본작가들은 자기 작품에 대한 애착이 별로 없었고, 곡과 대본은 작가의 역량과 소신이 아니라 가수나 극장주, 높은 분들, 관객들과 같이 그 방면의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의 요구와 입맛에 따라 제멋대로 변경되기 일쑤였다. 당시 자신의 자존심과 경쟁의식에 눈이 멀어 있던 쿠초니와 보르도니 입장에서는 애초 중요하게 취급되지도 않은 오페라의 스토리 따위는 당연히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여튼 이런 지저분한 관행들은 자연히 오페라장르 자체의 질적 하락을 초래했으며 영국에서 이탈리아 오페라가 몰락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11]

다시 두 가수 이야기로 돌아와서, 더 큰 문제는 런던에서 이 두 가수에 대한 팬덤현상이 일어나 팬들도 두 패로 나뉘어서 심심하면 싸워댔다는 것이다. 이 콧대 센 두 가수의 불화와 두 가수를 둘러싼 팬들의 동요는 결국 보논치니의 아스티아나테(Astianatte) 공연 무대에서 쿠초니와 보르도니가 서로 머리끄덩이를 쥐어뜯고 싸우는 사태로 비화된다. 어찌어찌 당일 공연은 끝냈지만 두 사람은 공연 내내 서로 눈을 흘기고 기싸움을 해댄 데다 여기에 가세하여 두 가수의 팬들까지 싸움이 붙는 바람에 공연장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된다. 설상가상으로 이 공연장에는 캐롤라인 왕세자빈을 비롯한 왕실 인사들이 다수 참석해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의 파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왕립 음악 아카데미의 오페라 공연은 무기한 중단되었고 공연 수입을 얻지 못하게 된 아카데미는 휘청거리게 되었다.
파일:italy-bologna-portrait-georg-friedrich-handel-9500599.jpg
1727년의 헨델 초상화 중 일부분. 발타자르 데너 작

다만 이 사건은 두 가수가 실제로 크게 싸운 것이 아니라 단지 팬들이 소란을 일으킨 것이 와전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 자체도 언론과 팬덤에 의해 과장된 측면이 있다. 오늘날에도 박찬호노모 히데오의 경우처럼 호사가들이 서로 큰 적의가 없는 사람들을 굳이 라이벌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쿠초니와 보르도니의 라이벌 관계에 대한 풍문도 완전 거짓말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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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0년경의 초상화. 필립 메르시에 작

이런 악재도 모자라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몰락에 확인사살을 가하는 일종의 오페라 패러디 작품이 등장하였다. 바로 존 게이(John Gay, 1685~1732)라는 시인이자 극작가의 기획으로 두 가수의 싸움을 모티브로 이탈리아 오페라를 비꼬는 일종의 패러디 음악극인 '거지의 오페라'(The Beggar's Opera)가 상연된 것이다.[12] 이 악극은 무려 62회나 반복 공연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오페라 열풍에 확실하게 찬물을 끼얹어 버렸다. 당시 영국인들은 천편일률적인 내용과 알아듣기 힘든 이탈리아어 가사로 되어 있는 오페라 세리아에 점차 식상하고 있었던 데다 어설픈 애국주의자들이 가세해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비난해 대기도 했다. 그런데 이 거지의 오페라는 영어 가사라서 이해하기가 쉬울 뿐만 아니라 내용도 시사성이 있어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것이다. 얼마나 큰 성공을 거뒀는지, 당시에는 이 '거지의 오페라'의 제작자 존 리치와 극작가 존 게이의 이름을 따서 'Gay got rich and Rich got gay'라는 말도 있었다. 직역하면 '존 게이는 리치해지고(=부유해지고) 존 리치는 게이해졌다(=기분이 즐거워졌다)'라는 언어 유희이다.

헨델 당시에 62회 공연 횟수는 유럽 전역을 통틀어 거의 최고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심지어 이 거지의 오페라는 오늘날에도 종종 상연된다. 당시 오페라나 연극과 같은 극 장르는 양산형으로 빨리 만들어져 공연되다 내려졌던 탓에 대체로 공연횟수가 10회를 넘기기 힘들었다. 청중들로부터 별 반향이 없으면 초연으로 끝나는 경우도 빈번했다. 거지의 오페라가 성공한 이유는 적절한 시사성 뿐만 아니라 패러디 작품치고는 의외로 괜찮은 작품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작품의 제목은 '오페라'이지만 기획자인 존 게이는 전문 작곡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음악의 비중이 그렇게 높지는 않으며 부수 음악도 순수한 창작곡이 아니라 당시에 유행했던 음악이나 민요[13]를 짜깁기한 것들이다. 이런 이유로 학자에 따라서는 이 거지의 오페라를 뮤지컬의 효시로 보고 있다. 전반적으로 딱히 걸작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급한 3류 작품도 결코 아니며 음악극으로서 나름의 독창성과 매력을 갖고 있다.

이 거지의 오페라 덕분에 이탈리아 오페라는 음악 선진국의 고상한 문화장르에서 젠체하는 귀족들이나 즐기는 위선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탈리아 오페라 위상의 추락은 악단의 급격한 수익 감소를 초래하게 되었고 이는 도미노식으로 쿠초니와 보르도니를 비롯하여 몸값이 비싼 연주자들의 이탈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1728년 말 왕립 오페라 아카데미는 문을 닫는다.

2.5. 2차 왕립 음악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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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아카데미의 프리마돈나 안나 마리아 스트라다(1732)
심하게 미화된 그림으로 실제로는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헨델은 좌절하지 않고 소프라노 안나 스트라다(Anna Maria Strada)를 프리마돈나로 영입하고 이듬해에 곧바로 2차 왕립 음악 아카데미(The New or Second Academy)를 창립한다.

헨델은 전술한 두 가수 쿠초니와 보르도니보다 이 안나 스트라다를 훨씬 좋아했다. 쿠초니와 보르도니는 몸값도 비싼데다 지나친 자존심과 라이벌의식 때문에 악단의 분위기를 망치기 일쑤였으며 심심하면 곡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곡을 거부하거나 멋대로 바꿔 부르는 바람에 작곡가들과 다혈질로 악명높은 헨델과도 자주 충돌했다. 반면 안나 스트라다는 두 가수에 비해 훨씬 유순하고 헨델에게 충성했던 가수이다.

실제로 스트라다는 2차 왕립 음악 아카데미의 온갖 풍파 속에서도 헨델의 거의 모든 오페라의 주연을 맡았다. 그녀는 보논치니의 오페라는 수준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연주를 거부했고 귀족극단의 회유에도 꿋꿋이 헨델편에 있었다. 노래실력도 두 가수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당시 안나 스트라다에 대한 기록을 보면 한결같이 노래솜씨는 탁월하지만 뚱뚱하고 못생긴 외모가 몰입을 방해한다고 되어 있다. 한편 그녀는 1738년 홀연 이탈리아로 돌아가버리는데 그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가수로서 자신의 커리어가 얼마 남지 않은데다 런던에서 오페라의 인기가 몰락하자 더이상 성공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스트라다는 이탈리아로 떠난 후에는 활동실적이 그리 많지 않으며 3년만에 은퇴한다.

헨델의 열정과 고집으로 2차 아카데미가 출범한 이후 그는 왕성하게 오페라 작곡에 착수해서 파르테노페(Partenope), 올란도(Orlando), 포로(Poro), 소사르메(Sosarme) 등을 무대에 올린다. 특히 파르테노페는 코믹 오페라로서 헨델의 오페라 중에서도 상당히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기억해둘만 하다. 하지만 이 2차 아카데미도 대항마격으로 만들어진 귀족극단(귀족 오페라단, Opera of the Nobility)에 밀려 1734년에 문을 닫게 된다. 이 귀족극단은 당시 국왕 조지 2세와 사이가 매우 나빴던 프레데릭 왕세자의 주도로 1733년에 창립되었는데, 당시 조지 2세 부부는 명목상이긴 했지만 2차 아카데미의 후원자였기 때문에 왕세자 프레데릭이 아버지와 기싸움을 벌이기 위해 따로 오페라단을 만들어 대립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귀족극단은 음악적인 성취보다는 오직 2차 아카데미와 대립하기 위해 만든 악단이었고 결국 2차 아카데미는 이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와해된다.

이 귀족극단의 행각은 정말 막장이었다. 라이벌 악단으로부터 인기 가수와 연주자들 빼내오기, 관객 빼돌리기, 상대 극단의 공연에 대해 온갖 흑색선전 퍼뜨리기, 인기있는 곡 표절하기 등등 온갖 지저분한 짓을 저질렀다. 헨델은 이 귀족극단의 횡포때문에 엄청나게 마음고생을 해야 했고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단원들과의 불화도 심해진데다 건강까지 해치고 말았다. 헨델과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카스트라토 가수 세네시노도 이 때 헨델과 크게 싸우고 귀족극단으로 적을 옮겨버렸다. 헨델은 당시 기준으로 나름 장수해서 74세까지 살았는데, 이 분이 타고난 건강체질이었던 만큼 이런 고초를 겪지 않았다면 훨씬 오래 살았을 것이다. 이 귀족극단은 철저하게 정치적인 이유에서 만들어진 탓에 음악적으로는 정말 거론할 가치가 없는 악단이었다. 막상 2차 아카데미가 와해되자 자신들도 방향성을 잃고 지지부진하다가 창립 4년만에 문을 닫는다. 그나마 챙겨볼만한 점은 전설의 카스트라토 파리넬리가 귀족극단 소속으로 활동했다는 것 정도.

그러나, 의지의 사나이 헨델은 이런 고초를 겪고 2차 아카데미가 와해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음악활동을 포기하지 않는다. 2차 아카데미가 문닫은 직후, 그는 당시 런던의 여러 극장을 소유한 극장주이자 연출가였던 존 리치(John Rich)와 손잡고 리치 소유의 코벤트 가든 극장(Covent Garden Theatre)을 중심으로 세 번째 오페라 악단을 창립한다. 존 리치는 상당히 뛰어난 연출가였으며 코벤트 가든 극장에는 합창단과 발레리나 겸 안무가인 마리 살레( Marie Sallé)를 주축으로 한 발레단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시절에 작곡된 헨델의 오페라 아리오단테(Ariodante)나 알치나(Alcina)에는 합창과 발레가 포함되어 있으며, 발레단을 위한 음악 "Terpsichore"도 작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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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년경의 초상화. 존 시어도어 헤인즈 작

그러나 이런 리치와 헨델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지의 오페라 이후 급격히 몰락해버린 이탈리아 오페라의 인기는 더 이상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회복이 문제가 아니라 이미 흥행대상으로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수명은 끝난 상황. 헨델도 결국 1741년 자신의 최후의 오페라가 된 데이다미아(Deidamia)를 끝으로 오페라 장르에 대한 미련을 접고 더 이상 작곡에 손대지 않았다. 이 시기에 작곡된 오페라들은 발레를 삽입하는 등의 참신한 시도가 있었고 음악적으로도 헨델 오페라의 정점을 찍은 명작들었지만 정작 흥행에는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1737년 헨델은 급성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졌으며, 중풍과 함께 오른손의 네 손가락에 마비가 왔고 한동안 정신도 오락가락했다. 모두들 헨델의 음악인생은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헨델은 독일의 아헨으로 치료차 휴가를 갔다온 후 정말 놀라울 정도의 회복력을 보였다. 발작을 일으킨지 1년만에 건반악기 연주도 가능해질 정도로 회복이 되었고 오페라 세르세(Serses 또는 Xerxes)도 작곡하였다.

2.6. 오라토리오와 말년의 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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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3년전의 초상화. 토마스 허드슨(Thomas Hudson) 작
이때 이미 헨델의 두 눈은 모두 먼 상태였으나 그림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런던에서 오페라가 몰락하면서 헨델에게 대안으로 새롭게 떠오른 음악장르가 바로 오라토리오.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와 달리 가사가 영어로 되어 있어 청중들이 이해하기 쉽고 장르의 특성상 오페라보다 공연 비용과 준비 시간이 훨씬 적게 소요된다는 장점이 있었다.[14] 헨델은 20대 초반 로마 유학 시절에 이미 시간과 진실의 승리(Il trionfo del Tempo e del Disinganno)나 그리스도의 부활(La resurrezione)과 같은 이탈리아어 오라토리오를 쓴 적이 있었으며[15], 런던 생활 초반인 1718년 영어 오라토리오인 에스더(Esther)를 작곡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한 것은 코벤트 가든 극장의 악단 창립 이후이며[16], 1742년에는 헨델의 대표작이자 당시 최고의 흥행작이었던 메시아가 창작되었다.[17]

이 메시아가 당시부터 얼마나 유명했냐면, 당시의 음악들은 보통 초연 후 5~10회 정도 공연하고 끝나는게 관행이었는데 이 메시아는 더블린 초연 때부터 지금까지도 공연이 중단된 적이 없이 주기적으로 연주되고 있을 정도.[18]

이후 헨델은 죽을 때까지 주기적으로 오라토리오 작품을 내놓았다. 이 작품들은 헨델의 명성을 회복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데, 합창음악의 대가로서 헨델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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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9년 열린 엑스 라 샤펠 조약 기념 당시 불꽃놀이

1749년에는 수상 음악과 더불어 그의 가장 유명한 기악 음악인 왕궁의 불꽃놀이가 조지 2세의 요청으로 작곡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고 엑스라샤펠[19] 조약이 체결된 기념으로 의뢰된 것이다. 이 곡의 초연 때에는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1만 2천 명 정도의 청중이 왕궁 근처에 몰려들었다고 하며 당시 신문에 의하며 이 때문에 마차가 세 시간이나 막혔다고 한다.[20]

헨델의 말년은 불운의 연속이었는데 1750년 독일 여행에서 돌아오던 중 네덜란드에서 마차사고로 큰 부상을 입는다. 설상가상으로 1751년에는 백내장으로 한쪽 눈의 시력이 급격히 나빠지는데 그를 눈을 치료한 의사돌팔이였던 탓에 오히려 반대쪽 눈까지 나빠져서 결국은 실명하고 만다.[21]

하지만 1751년 실명 후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고[22], 8년 뒤인 1759년에 사망하였다. 향년 74세. 사망 후에는 영국에서도 본좌들만 안장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뉴턴다윈 등과는 분야가 달라서 성당 내에서도 안장된 위치가 다르다. 헨리 퍼셀 정도를 제외하면 고전 음악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이름난 음악가가 없으며, 20세기 중반 대중음악의 시대가 시작되기 이전까지 음악 분야에서 언더독으로 꼽히던 영국에서 헨델의 위상은 매우 높다.[23]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뛰어났던 음악가,
그의 음악은 단순한 소리를 뛰어넘은
감성의 언어였고,
인간의 수많은 열정을 표현하는
언어의 힘 마저도
모두 초월한 것이었다.

헨델의 비문

3. 평가

헨델은 타고난 체력과 열정을 바탕으로 일평생 음악에 매진했으며, 어려운 여건에서도 고군분투하며 세 번이나 왕립음악아카데미[24]를 창립했을 정도로 초인적인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정치권과 연루된 협잡배들이나 당시에 잘 나가던 라이벌(니콜라 포르포라, 보논치니 등), 그리고 그를 시샘하던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왕립음악아카데미가 온갖 역경과 수모를 당하며 자신이 파산지경에 여러 번 이르면서도,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몸의 일부가 마비되면서도(1740년대 후반), 돌팔이 의사 때문에 실명을 당하면서도(1751) 결코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음악에 대한 재능과 업적은 차치하고 그 의지력과 굳은 음악적 신념만으로도 음악사에 남았을 수준이다.

이렇게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답게 상당한 다혈질의 소유자였으며 급하고 과격한 성격 때문에 자주 (주먹) 싸움을 벌였고 심지어 결투를 벌인 적도 있었다. 이 결투와 관련해서는 아래 요한 마테존과 벌어진 이야기 참조. 이렇게 남에게 굽힐 줄 모르는 강인한 성격 덕분에 그 풍파 많았던 런던의 음악계에서도 가장 성공한 작곡가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적을 만들었고 그로 인해 상당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사실 그가 음악에 대한 열정이 넘쳤다고 말한 것은 좋게 표현한 것이고,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명예욕, 금전욕이 넘쳤던 사람이었다. 생전의 헨델은 명예욕과 금전욕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이로 인해 많은 비난을 받았다. 전술했다시피 하노버에서 런던으로 야반도주했다가 낭패를 겪은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에도 고쳐지지 않은 그의 출세욕과 물욕은 스스로를 자주 곤경에 빠뜨렸다. 하지만 위기에 처할 때마다 훌륭한 음악성을 가진 작품으로 이를 극복했으니 후세의 클래식 팬들은 오히려 그의 속물근성을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헨델이 단순히 물욕과 출세욕만 넘치는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다. 헨델은 병원을 위해 메시아를 연주해 주고, 가난한 음악가들을 위해 금전적인 기부도 하는 등, 여러 자선활동을 펼쳤다. 야망이 있는 사람이라곤 할 수 있어도, 물욕이나 출세욕 넘치는 속물이라고만 생각하는 건 옳지않을 것이다. 게다가 영국에서의 그는 영국 대중에게 많이 사랑받았고, 실제로 그의 장례식에 3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추모를 왔다는 기록을 보면 인간성이 절대로 악질은 아니었을 거다. 헨델이 다혈질이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만큼 사람을 쉽게 용서하고 화해하는 인물이었다고도 하기도 하니, 이런 대목을 보면 출세욕이 넘치지만 털털한 성격의 인간이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애초에 헨델의 사생활이나 성격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판단할만한 근거가 많지 않다. 헨델은 사생활을 철저하게 숨겼고 결혼도 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증언해줄 사람도 없었다. 때문에 그의 사생활 대해서는 이론과 추측만 난무한다. 다만 그의 식욕만큼은 당시에는 물론 지금도 유명하다.

한편으로 헨델은 작곡 속도가 빠르기로 유명했다. 헨델 시절만 해도 음악이 정형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작곡가들은 모두 다작을 하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헨델은 역대 1,2위를 다툴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작곡 속도를 자랑했다. 메시아도 고작 24일(1741.8.22-9.24) 만에 씌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연주되는 위대한 작품이 되었다. 이처럼 헨델은 음악을 거의 '찍어내는' 양산형 작곡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장르에 매우 수준 높은 명작품들을 남겼다는 점에서 그의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빠른 작곡 속도는 자신의 음악을 재탕 삼탕하거나 남의 음악을 도용해서 사용했던 습성과도 관련이 있다. 실제로 그의 여러 협주곡이나 소나타, 콘체르트 그로소(Concerto Grosso) 등의 작품을 들어보면 분명 다른 작품인데도 같은 작품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닌지 어리둥절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제 친구였던 요한 마테존은 헨델의 작품들을 화성이나 대위적으로는 우수하지만 선율적으로는 빈약하다고 깠다. 이와 같은 그의 표절 성향은 당대에도 악명이 높았다. 당시에는 표절의 명확한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음악이 비슷한 것 같아도 어떻게 따질 수 없었다. 이런 자기복제로 유명했던 작곡가로는 후배 작곡가인 로시니도 있다.

4. 작품 개요

헨델의 작품 번호는 HWV(Händel-Werke-Verzeichnis, 말그대로 헨델 작품 번호)로 표기한다. 헨델의 작품목록

오늘날 헨델의 음악은 메시아, 이집트의 이스라엘인과 같은 오라토리오나 수상음악, 왕궁의 불꽃놀이 같은 기악곡들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사실 헨델이 일평생 심혈을 기울였던 장르는 바로 오페라이다. 그는 평생 46개나 되는 오페라를 남겼다[25]. 하지만 정작 그의 주종목이었던 오페라는 최근까지도 몇몇 아리아나 간주 음악 정도만 연주됐을 뿐 오페라 자체는 잘 연주되지 않았다.[26] 그나마 최근에 이렇게 묻혀 있던 바로크 오페라들이 학구적인 연주자들을 중심으로 다시 발굴되어 공연되고 음반으로도 만들어지고 있는데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헨델의 오페라도 현재 모두 음반이 나와 있다.

5. 주요 작품

5.1. 오페라

5.1.1. 파스티초 (도용 작품)[32]

5.2. 오라토리오

5.3. 기악음악

수상음악(Wassermusik) 中 "Alla Hornpipe" HWV.349. 톤 쿠프만 지휘, 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헨델의 사라방드(Sarabande)[42]

5.4. 교회음악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가톨릭과 차별화되려는 영국국교회[45]의 노력은 예배에 사용되는 성가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이제 막 변화를 꾀하려는 영국의 교회음악에 헨델이 작지 않은 기여를 했던 것.

6. 바흐와의 비교

동갑내기였던 헨델과 바흐는 생전에는 물론 후세 음악계에서도 열띤 비교 대상이 되는 관계인데 흥미롭게도 두 사람의 음악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다. 바흐가 대위법에 기반한 각 성부간의 치밀한 움직임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헨델은 화성을 바탕으로 한 전체적인 울림에 주목하고 있고 특히 선명하고 명쾌한 선율 처리가 특징이다.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음악적 개성의 차이 때문이겠지만 각자 처해있던 음악 환경의 차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 중 하나다. 바흐는 평생 독일 밖을 벗어나지 않았고 주로 도시의 교회나 궁정음악을 담당하였지만[49] 헨델은 30대에 런던에 정착하여 평생 거기서 살았다. 런던은 당시에도 이미 유럽의 손꼽히는 대도시여서 헨델을 비롯한 유럽 각지의 유명 음악가와 연주자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성악 쪽에서는 당대 유럽 최고 수준의 가수들이 모두 런던을 거쳐갔다. 헨델은 활발한 공연 활동 등으로 당대에 인기가 대단했으나 바흐는 그렇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헨델도 최고의 가수들과 일할 수 있었고 오페라를 비롯한 헨델의 성악 작품은 이런 뛰어난 가수들의 역량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작곡되었다.

때문에 헨델의 음악은 바흐처럼 치밀하고 복잡한 구축법 대신 극음악에 맞는 선명한 선율선, 화려한 울림, 극적인 표현을 중시하고 있다. 이런 작곡 수법은 그의 기악곡에서도 잘 나타난다. 헨델의 하프시코드 모음곡과 바흐의 영국 모음곡이나 건반 악기를 위한 파르티타 등과 비교해보면 두 사람의 음악 성향의 차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가끔 헨델과 바흐를 비교하면서 두 사람의 우열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모두 각자의 특성을 지닌 위대한 음악가이므로 이러한 비교는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바흐는 헨델을 높이 평가하여 2차례에 걸쳐 만나고자 하였다. 1번째는 바흐가 헨델이 할레에 잠시 왔다는 소식을 듣자 급히 할레로 갔으나 길이 엇갈려서 만나지 못했고 2번째로 헨델이 할레로 왔을 때 바흐는 감기 때문에 직접 못가고 아들이었던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를 할레로 보내 라이프치히로 헨델을 초대했으나 헨델은 사정상 갈 수 없다는 말을 전했다. 헨델이 바흐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헨델은 후배 작곡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후배 작곡가들이 헨델의 작곡 수법을 응용했는데 특히 고전파 시기의 위대한 작곡가 모차르트베토벤이 헨델의 작곡 수법을 연구해서 자신들의 음악의 진일보를 이루었다. 모차르트는 헨델의 작곡 수법에 큰 감명을 받아서 헨델의 작품을 고전파적인 관점에서 재구성하기도 했고[50] 베토벤도 자신의 작품에서 헨델의 대위법을 많이 응용했다. 특히 베토벤의 중요한 후기 작품에는 헨델식의 대위법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바흐와는 달리 평생 독신이었으며 사생활이 꽤나 어지러운 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다 자신의 사생활을 대부분 비밀로 묻어두어 후세 사람들이 헨델의 일생을 이해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7. 기타

8. 대중매체에서


[1] 영어식 이름이며, 헨델이 영국에서 정착한 후 런던을 제2의 고향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가끔 영어식 이름으로 불릴 때가 있다. 이 문서에서는 출생지가 독일이므로 독일식 독법을 채택하였다. 한편, 어느 정도 유명한 작곡가의 경우 다이어크리틱을 사용한 표기를 검색엔진에서 우선순위로 놓는 경우가 많으며, 헨델은 바로크 음악사의 최중요 인물 중 한 명이기 때문에 움라우트를 표기한 이름이 우선으로 검색된다.[2] 태어난 시간을 모르면 알수없다.[3] 실제로 베토벤은 헨델을 꾸준히 연구하여, 만년 작품들에서는 헨델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베토벤은 괴팍하고 자존심이 세서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릎을 무조건 꿇지 않았던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그걸 생각하면 베토벤이 얼마나 헨델을 존경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4] 참고로 아버지 게오르크는 원래 12살 연상인 아나 카테(Anna Kathe, 1610–1682)과 1643년에 결혼했는데, 그녀가 72세의 나이로 죽자 29살 연하인 도로테아 타우스트(Dorothea Elisabeth Taust, 1651–1730)와 재혼했다. 프리드리히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후처이다. 게오르크의 전처와 프리드리히는 무려 증손주 뻘인 75세나 차이나는 셈이다.[5] 결국 북스테후데가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딸의 결혼이 이루어진다.[6] 그의 최초의 오페라이자 그의 초기 독일어 오페라 가운데 유일하게 악보가 전해지는 작품이다. 알미라 외에도 네로, 플로린도, 다프네 이 3곡의 오페라를 더 작곡했으나 현재는 이 중에 플로린도만 부분적으로 악보가 남아있다. 이 알미라는 음악 자체의 가치보다도 대작곡가 헨델의 초기 작품성향을 엿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료로서 가치가 더 높다.[7] 로드리고 이후 헨델의 모든 오페라는 이탈리아어로 작곡되었다.[8] 이런 이유로 수상 음악에는 당시 관현악에서 반주로 사용되었던 하프시코드가 빠져 있다. 하프시코드는 부피가 커서 배에 싣기 어렵기 때문이다.[9] 보통 정가극이라고 번역하는데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으며 보통 신화나 영웅의 전설 등에서 취한 내용을 주제로 한다. 분위기는 대체로 서정적이고 비극적이지만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세리아보다 좀더 가볍고 우스꽝스러운 내용을 주제로 하는 오페라 장르도 있는데 이를 오페라 부파라고 한다.[10] 보논치니와 아리오스티는 헨델보다 각각 15살, 20살이나 나이가 많았으며 아리오스티는 전술했듯이 소년시절의 헨델을 가르쳤던 적도 있다. 이 세 사람은 명목상으로는 직장동료였지만 명성과 악단 내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은근히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었는데 결국은 헨델이 주도권을 잡았다. 아리오스티는 왕립 음악 아카데미 설립 당시 이미 53세의 고령이었으며 10년 뒤에 사망했다. 보논치니는 안토니오 로티의 마드리갈을 자기 작품이라고 속여서 고음악 아카데미에 제출하는 추태를 벌였다가 발각돼서 영국에서 쫓겨난다.[11] 한편,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헨델의 오페라 상당수가 오늘날에도 상연되기 충분한 퀄리티들을 갖고 있는데 이는 정말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12] 훗날 서사극으로 이름을 날린 20세기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를 바탕으로 작곡가 쿠르트 바일과 함께 '서푼짜리 오페라'를 만들었다. 칼잡이 맥이라는 노래로 유명한 악극.[13] 유명한 영국 민요인 그린슬리브즈도 나온다.[14] 이탈리아 오페라 제작 과정은 이탈리아 가수 섭외, 대본 작성, 홍보와 마케팅 등등의 복잡한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이는 현대의 영화 산업에 비견될 정도로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반대로 오라토리오의 경우는 내용은 모두 성경이기에 관객에게 따로 설명과 홍보를 할 필요가 없으며, 가사가 영어로 돼 있어 영국 가수를 무대에 세우면 되므로 몸값이 비싼 이탈라아 가수를 섭외하는 길고 어려운 과정이 필요 없었다.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경쟁으로 치솟는 오페라 제작비와 이와 거꾸로 곤두박질 치는 퀄리티를 경험해 본 헨델에게 오라토리오는 그러한 비효율성을 극복할수 있는 묘책이었고, 이는 헨델이 작곡가일 뿐 아니라 악단의 단장이자 운영자로서 갖춰야할 안목까지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15] 시간과 진실의 승리는 그의 최초의 오라토리오이면서 또 최후의 오라토리오이기도 하다. 다만 1757년 작곡된 시간과 진실의 승리(The Triumph of Time and Truth)는 당연히 영어 오라토리오이다.[16] 사실 이 코벤트가든 극장 시기에는 오페라보다 오라토리오 창작이 더 활발했다.[17] 너무나 유명한 나머지 이 메시아의 한 부분인 할렐루야가 시작할 때는 기립하는 전통까지 생겨났다. 이 전통은 초연에 참석했던 영국 왕 조지 2세가 이 부분에서 감격에 못 이겨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이래 현재까지 지켜져 오고 있다고 알려져 왔다. 그런데 일부 연구자들에 의하면 사실은 조지 2세가 이 곡의 초연에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고 지각해서 할렐루야 시작할 때 딱 왔다고 한다. 왕이 도착하면 전원 기립을 해야 하는 룰에 따라 극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기립을 했고, 이게 왕의 지각에 대해 실드를 치려다 보니 저런 설로 와전된 것이라 한다.[18] 특히 유명한 할렐루야 코러스는 각 교회나 성가 합창단들의 크리스마스 단골메뉴이기도 하다. 초연 때에는 열댓명 정도의 합창단 규모에 10명 수준의 챔버 앙상블이 반주를 맡았는데, 이게 점점 규모가 커져서 나중에는 연주시에 2,000명에 가까운 합창단이 동원되기도 했다. 현재는 다시 헨델 시절의 단촐한 규모로 돌아가자는 분위기가 생겨서 적은 규모로 연주하는게 대세다.[19] 아헨프랑스어 발음.[20] 당시 불꽃 때문에 누각과 몇 채의 건물이 타버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불꽃놀이 자체는 성공적이었다.[21] 헨델을 장님으로 만든 존 테일러라는 자칭 안과의사는 헨델의 눈을 망쳐놓기 몇 년 전에 바흐도 엉터리 치료로 실명시킨 전과가 있다. 원래 이 존 테일러는 실력도 없으면서 유럽 각지에 영국 왕실의 주치의로 행세하고 다니면서 이 두 위대한 음악가 뿐만 아니라 수백 명을 실명시킨, 말그대로 악질 돌팔이었다. 이 사기꾼이 얼마나 악명이 높았는지 지금까지도 안과 분야에서 돌팔이의 대표 주자격으로 거론될 정도. 우습게도 그런 그도 천벌인지 늘그막에 병으로 인해 두 눈을 못 보게 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음악가인 찰스 번니(Charles Burney,1726~1814)는 테일러가 죽을때 장님이 된 것은 헛소문이며 1770년에 로마에서 죽었다고 증언했다. 다만 런던에서 그를 죽이려던 사람이 하도 많아서 로마로 달아났고 사기당해 가난 속에 고생하던 터라 번니가 밥을 사주자 미치도록 먹던 도중에 체해 죽었다고 증언하면서 이것도 그다지 편하게 죽진 않았던 듯하다.[22] 당시 66세이며 바흐가 세상을 떠난 나이와 비슷하다.[23] 2006 독일 월드컵 개회식과 2012 런던 올림픽 개회식을 보면 유럽 중심에 있는 독일과 섬나라인 영국의 음악의 차이를 엿볼 수 있는데, 독일 월드컵 개회식이 독일의 주(州) 전통 의상을 입은 채 전통 무용 및 오케스트라를 선보이는 예술가들이 주가 된 반면, 런던 올림픽 개회식에서는 비틀즈를 비롯한 근현대 락 뮤지션들과 드라마, 영화를 주제로 한 예술 공연이 주가 된 것을 볼 수 있다.[24] Royal Academy of Music.[25] 악보가 현존하는 것은 42개[26] 헨델의 오페라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바로크 오페라가 이런 대접을 받았다. 몬테베르디, 비발디, 라모,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 등의 중요한 작곡가들의 작품들이 모두 무관심 속에 한동안 완전히 잊혀졌었다. 오페라는 공연에 과 노력이 많이 소요되는 장르인 만큼 유행이 지나서 흥행하기 힘든 과거의 오페라로 수지타산을 맞추기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27] 제목만 알려진 유실된 독일어 오페라 몇개가 더 있는데 모두 초기 작품이다.[28] 영화 파리넬리를 통해 유명해졌다. 그 영향인지 카운터테너들이 부르는 경우도 보이는데 본래 소프라노의 아리아이다. 파리넬리에서 왜 파리넬리가 이 아리아를 부르는지는 알 수 없다. "고정 레퍼토리로 자리잡았다."는 말은 지나친 일반화이다. 여담이지만, 초연 당시 파리넬리는 5~6살이었다.[29] 봉준호감독의 2019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기생충>의 생일파티 장면에 소프라노 아리아 "Mio caro bene"가 연주되는 장면이 나온다.[30] 한국초연은 2003년 대구오페라하우스[31]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 황제를 뜻한다.[32] 헨델이 다른 작곡가의 오페라에서 아리아를 하나씩 빼 와서 짜깁기한 오페라이다.[33] 1711년에 완성한 작품에 레오가 자신과 타 작곡가들의 아리아를 첨부한 파스티초다.[34] 원작은 하세의 오페라 '에우리스테오(Euristeo, 1732)' 중 아리아 "Vede il nocchier la sponda"이다. 이 아리아는 전에도 헨델이 파스티초 오페라 '카토(Catone, HWV A7)'에도 첨부하였다.[35] 합창의 비중이 매우 높은 오라토리오이다. 오페라의 대가답게 감정표현과 극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헨델식 합창법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후배 작곡가인 모차르트나 베토벤도 합창곡을 작곡할 때 이 헨델의 합창곡을 많이 참조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오라토리오는 헨델의 작품 중 가장 심하게 비판받는 작품이기도 하다. 전체 오라토리오의 무려 2/3 가량의 곡을 자신의 이전 작품을 비롯해서 알레산드로 스트라델라요한 카스파르 케를, 디오니기 에르바(Dionigi Erba)와 같은 전세대 작곡가들의 작품에서 대거 차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학들은 도덕적인 비난과 별개로 다른 작곡가로부터 베낀 선율을 어떻게 뛰어난 합창음악으로 변용했는지에 주안점을 두고 이 작품을 공부한다. 원작을 넘어서는 음악성을 보여주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36]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중 그들이 떠나자 이집트는 기뻐했다와 요한 카스파르 케를의 칸초나 4번을 비교해서 들어보자.[37] 오라토리오에 속하기 보다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제우스와 세멜레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오페라에 가까운 음악극이다.[38] 이 작품도 오페라에 가까운 음악극이다.[39] 이집트의 이스라엘인만큼은 아니지만 이 작품 역시 다른 작곡가의 작품이나 본인의 다른 작품에서 많은 곡을 차용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합창곡 See, the Conqu’ring Hero Comes!는 원래 여호수아에 있는 곡인데, 이 곡이 인기를 끌자 1751년경부터 유다스 마카베우스에도 이 곡을 포함시켜서 연주하였으며 이후에 정식으로 연주목록에 포함되었다.[40] 개신교인이라면 익히 들어봤을 '주님께 영광' 은 See, the Conqu’ring Hero Comes!에 미국의 목사가 찬송시를 붙여 만든 것이다. 또한 가톨릭 성가 '주 찬미하라'도 이 곡에 시편 117(116)편을 붙인 것이다.[41] 헨델의 다른 유명 오라토리오에 비해 인지도는 밀리지만 작품성 측면에서는 헨델의 오라토리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헨델 당시에는 그리 인기를 끌지 못하고 겨우 3번 공연된 후 내려갔는데, 초연 1주일전 런던에 지진이 나는 바람에 사람들이 공연을 즐길 여유가 없었던데다 주인공이 순교하는 비극적인 내용이 당시 관객들의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20세기에 헨델 작품이 복권된 후에도 한참동안 묻혀 있다가 21세기에 접어든 후에 재평가를 받았다.[42] 영화 배리 린든, 드라마 야인시대 등에 이 노래를 리메이크한 곡이 삽입곡으로 사용되었다.[43] 리믹스 편곡된 Passacaglia의 원곡.[44] 스탠리 큐브릭의 시대극인 <배리 린든 Barry Lyndon>(1975)에 쓰였다.[45] 현재 성공회의 전신(前身)[46] 앤섬은 성공회의 예배(감사성찬례)에 쓰이는 합창음악으로, 순수하게 합창만 있는 풀 앤섬과 독창 부분이 있는 파트 앤섬이 있다. 가톨릭으로 치면 라틴어 모테트에 해당되는데, 형식이 꽤 많이 다르다. 여담으로 가톨릭 미사곡에 해당하는 성공회 감사성찬례의 예전음악은 서비스(Service)이다.[47] 서두에 나오는 곡인 사제 차독(Zadok the Priest)이 유명하다. 사제 차독은 UEFA 챔피언스 리그의 테마곡인 Ligue Des Champions에서 선율의 일부가 차용되었다.[48] 테 데움은 Te Deum Laudamus(찬미하나이다, 주 하느님)로 시작되는 전통적인 성가를 의미한다. 한국 성공회의 기도서에는 "당신은 하느님"으로 나와있고, 옛 공도문에는 "찬송천주송가"라고 수록되어 있다. 가톨릭 교회의 시간전례에서 쓰이며, 주로 감사드릴 일이 있을 때 불린다. 종교개혁 이후에도 영국국교회(성공회)와 일부 루터교회가 계속 사용한 덕분에 헨델에 의해 작곡될 수 있었다. 데팅겐 테 데움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데팅겐 전투에서 조지 2세가 친정하여 지휘한 영국군의 승전을 기념하여 작곡되었으며, 가사는 전통적인 가사를 그대로 따르지만 라틴어가 아니라 영어다.[49] 바흐가 소도시의 작은 교회의 악장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식의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과는 큰 차이가 있다. 바흐가 1723년부터 칸토르로 있었던 라이프치히는 유명한 라이프치히 대학이 있을 정도로 학문의 중심지이고 결코 소도시도 아니다. 독일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바흐는 독일의 주요 도시에 오르간 감정 등의 이유로 여행을 많이 다녔다.[50] 대표적인 경우가 K. 572의 메시아 편곡[51] 친구로 지내긴 했는데 나이는 마테존이 헨델보다 4살 많다.[52] 이 영화는 당시 생소했던 바로크식 벨칸토 창법이 화제를 끌었으나 정작 영화 자체는 연출 수준이 별로라서 크게 흥행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