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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7:31:04

안스바흐의 카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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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2세 조지 3세 조지 4세 윌리엄 4세
안스바흐의 카롤리네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 브라운슈바이크의 카롤리네 작센마이닝겐의 아델하이트 공녀
에드워드 7세 조지 5세 조지 6세 찰스 3세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테크의 메리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카밀라 파커 보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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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FAFB9><colcolor=#000000> 영국 조지 2세의 왕비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카롤리네 공녀
Prinzessin Caroline von Brandenburg-Ansbach
파일:Caroline of Ansbach.jpg
이름 독일어 빌헬미나 샤를로테 카롤리네
(Wilhelmina Charlotte Caroline)
영어 윌헬미나 샬럿 캐롤라인
(Wilhelmina Charlotte Caroline)
출생 1683년 3월 1일
신성 로마 제국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국 안스바흐
사망 1737년 11월 20일 (향년 54세)
런던 세인트 제임스 궁전
장례식 1737년 12월 17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배우자 조지 2세 (1705년 결혼)
자녀 프레더릭, 앤[1], 아멜리아, 캐롤라인, 조지 윌리엄, 윌리엄, 메리, 루이자
아버지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요한 프리드리히
어머니 작센아이제나흐의 엘레오노레 에르트무테
형제 레오폴트, 크리스티안 알베르트, 도로테아 프리데리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샤를로테 조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빌헬름 프리드리히
종교 루터교회
서명 파일:안스바흐의 카롤리네 서명.svg
1. 개요2. 작위3. 생애
3.1. 유년기3.2. 결혼3.3. 왕비3.4. 말년
4. 가족관계
4.1. 자녀
5. 여담

[clearfix]

1. 개요

영국 국왕 조지 2세의 왕비.

프로이센 왕국을 통치한 호엔촐레른 가문의 방계 출신으로,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카롤리네로 불리며 모데나의 마리아 이후 39년만에 나타난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이 통합된 영국의 왕비이다.

2. 작위

파일:Coat_of_Arms_of_Caroline_of_Brandenburg-Ansbach.svg.png
<colbgcolor=#7FAFB9> 문장

3. 생애

3.1. 유년기

1683년 안스바흐에서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2] 요한 프리드리히와 작센아이제나흐의 엘레오노레 에르트무테의 장녀로 태어났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외가댁인 아이제나흐에서 살았다. 1692년부터 어머니 엘레오노레가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4세[3]와 재혼하면서 작센 선제후의 궁정이 있는 드레스덴에서 살게 되었다. 요한 게오르크 4세는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으며 자신의 애인과 결혼하기 위해 정략결혼한 엘레오노레를 칼로 찔려 죽이려고까지 했다.[4] 어머니의 불행한 결혼 생활은 결혼 2년 만에 요한 게오르크 4세가 정부에게 천연두가 옮아 죽으면서 끝이 났다. 과부가 되고 2년 뒤 엘레오노레 또한 병으로 사망했다.

카롤리네와 어린 두 명의 동생들에게는 보호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카롤리네보다 나이가 많은 형제들은 배다른 동생들을 외면했다. 카롤리네와 동생들은 어머니의 친구이며 당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부인이었던 하노버의 조피 샤를로테[5]에게 맡겨졌다. 조피 샤를로테는 베를린에 온 카롤리네를 잘 대해줬으며 카롤리네도 그녀를 어머니처럼 따랐다. 혼란스러운 어린 시절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던 카롤리네는 지적인 조피 샤를로테 밑에서 교양과 학식을 쌓아갔다.

3.2. 결혼

아름답게 성장한 카롤리네는 유럽 왕실에서 꽤 괜찮은 신붓감으로 알려졌다. 조피 샤를로테의 어머니 팔츠의 조피는 카롤리네를 자신의 손자 게오르크 아우구스트의 신붓감으로 눈여겨보게 되었다. 1705년 6월에 게오르크 아우구스트의 아버지 게오르크 루트비히 또한 카롤리네를 만나보고 그녀를 마음에 들어했다. 1705년 8월 22일, 카롤리네와 게오르크 아우구스트는 하노버에 있는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금슬좋은 부부였으며 죽을 때까지 이상적인 부부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오르크 아우구스트는 카롤리네가 병에 걸려 격리되어도 곁을 떠나지 않을 정도로 아내를 아꼈다. 그러나 당시의 신체 건강한 귀족 남성들이 다 그랬듯이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또한 정부를 뒀다. 카롤리네는 질투하지 않고 남편의 정부들에 대해 알려고 노력했다. 그중에서 서퍽 백작부인 헨리에타 하워드는 자신의 시녀로 두며 보호하기도 했다.

1714년에 시아버지가 영국의 조지 1세로 즉위하면서 부부는 영국으로 향했다. 게오르크 아우구스트는 웨일스 공이, 카롤리네는 웨일스 공비가 되었다. 이때부터 본명인 카롤리네가 아니라 영국식 이름인 캐롤라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캐롤라인의 남편과 시아버지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정치적으로도 대립되는 입장이었다. 두 사람은 자주 어긋났는데, 캐롤라인이 둘째 아들인 조지 윌리엄을 낳은 뒤 아이의 이름과 대부모를 정하는 일로 갈등이 폭발하게 되었다. 크게 화가 난 조지 1세는 아들 부부를 손자의 곁에서 떨어뜨려놓고 아들을 가택연금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조지 윌리엄이 병이 나면서 아들 부부가 아이를 돌보는 걸 허용했다. 하지만 조지 윌리엄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고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사망했다. 웨일스 공 부부는 아들의 죽음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가 부모랑 떨어져서 생긴 일이라고 믿으면서 조지 1세를 원망했다.

3.3. 왕비

1727년에 조지 1세가 사망하면서 남편이 조지 2세로 즉위했다. 캐롤라인은 남편을 적극적으로 도우며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다. 그녀는 당시 수상이었던 로버트 월폴을 굉장히 신뢰했으며 로버트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던 남편과 수상의 사이를 중재했다.

캐롤라인은 자신의 어머니의 친구이자 시고모인 프로이센의 조피 샤를로테 왕비의 정치적 견해를 통해 스스로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졌다.

캐롤라인은 남편의 부재시에 남편의 공석을 대신했다. 그녀는 모두가 자유롭게 의견을 내는 것을 선호했기에 국왕의 반대파나 자코바이트의 의견도 경청했다. 국왕 대리로서 캐롤라인은 외교 분쟁과 같은 국외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했다. 반면 국내문제는 성공적으로 처리하지 못했기에 국민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3.4. 말년

1724년에 막내 루이자를 낳을 때 탈장에 걸리면서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캐롤라인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린 끝에 마취없이 수술을 해야했다. 그럼에도 상태는 크게 호전되지 않았다. 말년에는 통풍으로 고생해 제대로 걷지 못했다. 죽기 직전에 캐롤라인은 사이가 나빴던 큰아들을 용서하고 남편에게 재혼할 것을 권했다.

1737년 11월 20일에 캐롤라인은 숨을 거두었고 한 달 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조지 2세는 아내를 안장하면서 그 옆에 훗날 자신이 들어갈 관을 같이 준비했다고 한다.

캐롤라인의 장송곡은 국왕 부부와 가까운 사이였던 헨델이 직접 작곡했다.


4. 가족관계

4.1. 자녀

파일:George_II,_Queen_Caroline,_and_children.png
조지 2세와 캐롤라인, 그리고 일곱명의 자녀들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웨일스 공 프레더릭
(Frederick Louis, Prince of Wales)
1707년 1월 31일 1751년 3월 31일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아우구스타 공녀
슬하 5남 4녀[6]
1녀 오라녀 공비 아나
(Anne, Princess of Orange)
1709년 11월 2일 1759년 1월 12일 오라녀 공 빌럼 4세[7]
슬하 1남 2녀
2녀 아멜리아 공주
(Princess Amelia)
1711년 6월 10일 1786년 10월 31일
3녀 캐롤라인 공주
(Princess Caroline)
1713년 6월 10일 1757년 12월 28일
2남 조지 윌리엄 왕자
(Prince George William)
1717년 11월 13일 1718년 2월 17일
3남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왕자
(Prince William, Duke of Cumberland)
1721년 4월 26일 1765년 10월 31일
4녀 메리 공주
(Princess Mary)
1723년 3월 5일 1772년 1월 14일 헤센-카셀 방백 프리드리히 2세[8]
슬하 4남
5녀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왕비 루이세
(Louisa, Queen of Denmark and Norway)
1724년 12월 18일 1751년 12월 19일 프레데리크 5세
슬하 2남 3녀[9]

조지 2세와 캐롤라인은 8명의 자녀를 두었다. 요절한 조지 윌리엄을 제외한 7명의 아이가 모두 성인으로 자랐다. 그중 하노버의 궁중에서 자란 장남 프레더릭과 사이가 안 좋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조지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프레더릭은 영국으로 와 웨일스 공의 직위를 물려받았다.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지냈던 프레더릭은 부모와 잘 지내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이 적은 것을 불평하면서 아버지를 반대하는 세력인 토리당 인사들과 어울렸다. 조지 2세는 궁을 비울 때 방종한 큰아들이 아닌 지적인 아내를 국왕 대리로 세웠다. 이는 프레더릭의 부모에 대한 불만을 키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프레더릭은 결혼 후 어머니가 첫 손자가 태어나는 자리에 참석하고 싶어하자 일부러 출산 예정일을 속이고 출산이 임박한 아내를 다른 궁으로 옮기기까지 했다. 캐롤라인이 사망한 후 조지 2세는 프레더릭이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였다.

5. 여담



[1]네덜란드의 국왕 빌럼알렉산더르의 조상 중 하나이자 초대 국왕인 빌럼 1세의 조모.[2] 호엔촐레른 가문프랑켄계 방계.[3]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인 아우구스트 2세의 형.[4] 프로이센 왕국 프리드리히 대왕의 고문이었던 카를 루트비히 폰 푈니츠(Karl Ludwig Wilhelm von Pöllnitz)에 따르면 이때 요한 게오르크 4세의 동생인 아우구스트 2세가 달려와 비무장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엘레오노레를 지키기 위해 맨손으로 칼을 잡아 막아줬고 이로 인해 아우구스트 2세는 평생 손에 장애를 얻었다고 기록했지만 푈니츠는 거의 전기 작가 수준의 저질 공신력이었고, 아우구스트 2세의 취미는 동물 던지기였는데 손에 장애가 있었으면 그렇게 동물들을 던져대지 못했다. 현대 사학계에서는 그냥 낭설 정도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5] 하노버의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의 딸이며 조지 1세의 여동생.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어머니다.[6]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부인 아우구스타, 조지 3세, 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 윌리엄 헨리 왕자, 컴벌랜드와 스트래선 공작 헨리 왕자,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비 카롤리네 마틸데[7] 네덜란드의 초대 국왕인 빌럼 1세의 할아버지.[8] 1754년 이혼[9] 스웨덴의 왕비 소피아 막달레나, 크리스티안 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