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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 | |
화산 용주사 花山 龍珠寺 | Yongjusa | |
<colbgcolor=#B9A26A><colcolor=#fff> 위치 |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 (송산동) |
설립 | 854년 (문성왕 16년)[1] |
주지 | 지현 |
등급 | 제2교구의 교구본사 |
링크 |
홍살문과 삼문. 용주사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 |
용주사 (龍珠寺) Yonjoos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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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 (송산동)에 위치한 조선시대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이다.[2]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그리고 이들의 아들인 정조가 묻힌 융건릉 근처에 있다.
정조가 아버지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직접 세운 대표적인 왕실원찰이자 조포사였다.
2. 역사
본래 이곳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할 때 무덤을 돌보는 '능침사찰'로 용주사를 같이 창건하였다. 용주사에서는 사격(寺格)을 높이기 위해 근처에 있던 갈양사(葛陽寺)라는 절을 이었다고 말하지만, 실질적인 창건은 정조 임금이 하였다. 조선 전기의 세조랑 비슷한 이미지.갈양사는 '갈양사사적기'란 기록으로 보건데 고려시대(10세기)에 확장된 듯하다. 문제는 이 기록이 이능화의 조선사찰전서에 남은 내용이라 원본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고승들이 지방의 사찰을 산소(山所)로 정하고 거기에서 말년을 보낸 전통이 있었는데, 갈양사도 그러한 절이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고려의 고승인 혜소가 갈양사를 자신이 거처할 장소로 삼아 후대로 내려왔으나 언제인가 망해서 폐사지가 되었다.
그러던 중 18세기 조선 시대에 뒤주에서 죽은 비운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정조가 명을 내려 용주사가 창건되었다. 정조가 재위 13년(1789)에 옛날 수원부 읍치(현재 화성태안3지구)를 현재의 수원 화성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사도세자의 묘를 새로 조성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이름 붙였다.
이듬해 정조 14년(1790)에는 현륭원에서 가까운 갈양사의 옛 터에 새로이 절을 지었다. 특기할 점은 용주사 창건이 정조가 직접 명하여 국가공사로 이루어졌으며, 비용도 각 궁가와 중앙 및 지방의 관가로부터 충당하였다는 것이다. 숭유억불이 기본인 조선시대에는 상당히 이례적인 사례이다. 전설에 따르면 절 건물이 낙성되던 날 밤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입에 구슬을 물고 하늘로 승천했다고 한다. 정조는 (용은 임금의 상징이므로) 왕이 되지 못하고 죽어 구천을 떠돌던 아버지가 비로소 한을 풀었다고 생각하고, 절 이름을 용 용(龍) 자에 구슬 주(珠) 자를 써서 용주사(龍珠寺)라고 지었다 한다.
정조는 재위 19년(1795) 윤 2월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행궁으로 행차하여 아버지가 묻힌 현륭원(현 융건릉)에 참배하였다. 이튿날에는 화성행궁에서 어머니를 위하여 회갑연을 크게 지냈다.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는 동갑이었으므로, 먼저 아버지 무덤에 참배한 뒤 다음 날 어머니의 육순잔치를 한 것이다. '용주사대웅전후불탱화'(경기도유형문화재 제16호)[3]에는 "자궁저하 수만세(慈宮邸下 壽萬歲)"라는 글귀가 있는데, 여기서 자궁(慈宮)이란 임금의 어머니를 뜻한다. 따라서 "자궁저하 수만세"는 '임금님의 어머니께선 만수무강하십시오.'라는 뜻이다. 정조는 용주사를 통하여 죽은 아버지의 명복과 살아계신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동시에 빈 것이다.
일반적으로 절을 창건할 때에는 승려들이 시주받아 승려장인들이 설계와 시공을 전적으로 담당하였지만, 용주사를 창건할 때에는 관아 주도로 비용을 전국에서 모았을 뿐만 아니라 관청에 속한 장인과 승려장인들이 모두 참여하였다. 2006년쯤에 인왕 벽화가 있던 일주문이 천왕문으로 개조되면서 사천왕상이 안치되었다.
2020년 8월 20일 호성전에서 화재가 발생해서 전소했다. 이 호성전은 사도세자, 정조, 혜경궁 홍씨, 효의왕후 김씨의 위패를 봉안하던 곳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인명피해는 없었다. 위패들도 진품들은 용주사 내 효행박물관에 따로 보관하였거니와 특히 정조의 위패는 전시를 위해서 불교중앙박물관으로 옮겨놓았고 호성전에는 복제품을 전시했다. 그래서 진품 위패들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3. 조포사
조포사(造泡寺)라 말은 두부를 만드는 절이란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두부를 포(泡)라고 하였으며, 왕릉이나 원에 딸려 제사에 쓰는 두부를 만드는 절을 조포사라고 불렀다.[4] 즉, 능침사찰을 조포사라고 한다.조선시대 조포사로는 신덕왕후 정릉에 딸린 흥천사와 봉국사, 경국사가 있으며, 성종 선릉에 딸린 봉은사, 세조 광릉의 봉선사, 그리고 용주사 등이 있다. 이러한 절들을 위축전, 자복사라고도 불렀다.
흥선대원군의 삼각산 화계사나 태조의 회암사처럼 조포사는 아니어도 왕실인물이 개인적으로 후원하여 번창한 왕실원찰도 있었다.
4. 가람
숭유억불이 기본정책인 조선시대지만, 왕이 세운 조포사였기 때문에 절의 규모나 문화재 등이 온전하게 남았다. 또한 거의 산으로 들어간 절과 달리 비교적 평지인 곳에 넓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회암사처럼 본격적인 궁궐 형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절과 다르게 궁궐, 관아 건축의 양식이 섞였다.- 일주문과 사천왕문: 여느 절이라면 세속과 절의 경계를 나타내는 일주문이 있어야 하지만, 용주사에는 원래 일주문과 사천왕문이 없었다. 오늘날 용주사에 있는 사천왕문은 현대에 세워진 것이다.
- 홍살문: 국가에서 효심이 지극한 인물에게나 내렸던 홍살문이 있다. 다른 절에는 찾기 힘든 요소로, 사도세자와 정조의 위패를 모신 능침사찰이기 때문이다.
- 삼문과 돌길: 홍살문을 지나 만나는 삼문 역시 궁궐양식이다. 좌우 행랑 7칸인 문으로, 문이 3개가 있다고 해서 삼문이라 부른다. 돌길 역시 다른 절에서 찾아보기 힘은 것으로, 마치 궁궐에 있는 어도를 연상케 한다.
- 천보루: 삼문 안쪽의 5층 석탑을 지나면 누각인 천보루가 보인다. 누각이야 다른 절에도 있지만, 천보루에는 궁궐 형식이 섞여있다. 목조기둥 아래에 높은 돌로 만들어진 석조기둥을 볼 수 있는데, 경회루 등 궁궐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또한 천보루 좌우로 행랑을 만들어 대웅전을 보호하듯이 둘렀는데, 조선시대의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참고로 천보루는 창건 당시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1층 돌기둥 옆의 공간을 막아 방으로 쓰는 것은 현대에 한 개조이다.
- 대웅보전: 크기는 그리 크지 않지만 몇 가지 요소에서 격식이 높음을 드러낸다. 자연석이 아니라 다듬어진 장대석을 기둥 밑에 두어 초석으로 삼았는데, 조선시대에는 아무 건물이나 이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 외에도 연화무늬 대신 삼태극 등 무늬를 쓴 모습이나 지붕에 작은 용두를 올린 것 등 여느 절과 다른 점이 좀 있데, 관아 건축을 담당한 인력들과 왕의 후원이 있었으리라 추정되는 점이다. 조선 후기 건축답게 공포가 다포식이며 팔작지붕이다. 편액 좌우로 조각된 용이 인상 깊다.
정조가 아버지를 위해 지은 절답게 장려한 감로탱화[5]가 있다.
5. 교통
대부분 산 속에 틀여박힌 절들과 달리 대중교통과 연결되는 몇 안 되는 절이다.- 지하철
6. 곤장 한 대 맞고 죽은 스님
정조가 워낙 아꼈던 절인지라 이런 야사도 전해져 내려온다.효심이 워낙 깊었던 정조는 현륭원을 곧잘 찾았는데, 당연히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어줄 용주사도 자주 찾게 되었다. 무려 왕이 자주 오는 곳이다 보니 여러 가지 어드밴티지가 실리게 되고, 용주사의 권세가 커지자 스님들은 점차 오만한 마음을 품고 행패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어느날 한 용주사 스님이 탁발 온 척 아녀자를 희롱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수원 부사 조심태(趙心泰)는 스님들에게 함부로 손도 못 대고 있던 차에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자 엄벌에 처해야겠다고 다짐하고 그 스님을 잡아들였다. 그러나 스님들은 일찌감치 위에다 로비를 넣어두었고, 이내 훈방으로 매조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조심태도 만만치 않아서 강력히 어필했고, 결국 조정에서는 조심태의 체면을 차려주자는 차원에서 곤장 1대에 처하라고 명령한다.
훈방보다 더 어이없는 처벌 내용에 분통을 터뜨리던 조심태, 그러나 한참 고민한 끝에 방법을 찾아낸다. 형틀에 묶어놓은 스님을 때리는 척하다가 안 때리기를 아주 오랫동안 반복하다가, 스님이 '이제 안 때리겠지'하고 방심할 때 전력으로 때리는 것. 과연 스님은 일격필살 곤장 어택을 맞고 이내 죽어버렸다. 그 이후로 용주사 스님들의 행패는 싹 사라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용주사 스님이 현륭원 관리인으로 바뀌어 나오는 버전도 있다. 맹꽁이 서당에서는 이걸 채택했다.
7. 기타
2005년에 효행 박물관 및 효행문화원이라는 템플스테이 건물을 지어 열었다. 용주사 템플스테이는 도시 근처에 있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조계종 템플스테이 수익 목록에서 순위권이라고 한다. 사천왕문을 만드는 등 삽질도 많이 하였다. 기존 가람의 특성을 이해하지 않고 건축물을 신축하여 그 뜻을 훼손한다는 측면에서 곱게 봐줄 수 없는 일. 나름 역사적 가치가 큰 절인데 주변에 자꾸만 콘크리트 건물들이 늘어나기 보기에 좋지만은 않다. 대웅보전이 2011년 집중호우로 기와가 유실되어 보수공사하여 2012년 5월에 마무리하였다.용주사와 융건릉 사이 토지 6천 평이 태안3지구로 지정되었다. 2007년에 태안3지구가 발주하자 용주사 前 주지 정호스님과 경기문화연대라는 시민단체가 막았지만, 이들이 영 보수적 마인드로 투쟁한다고 난리쳐서 결국은 새누리 성향과 새누리 성향이 싸우는 이상한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이 단체에 수원 화성 오산의 정치적으로 지역주민에게 잘 보이려는 분들이 오셨다 가시는 뭐랄까 느낌으로 변질되어서 결국 이 단체는 진만 다 빼고 나중에 정조대왕문화진흥원으로 이름을 변경하려 하였으나...
화성화산동 유적을 구제발굴[6]해보니 조선 정조의 무덤이 이장되기 전, 원래의 건릉 자리에 있던 재실터와 정자각 터가 그대로 있었다. 더군다나 융건릉은 고려시대 수원 읍치[7]가 있던 곳이기 때문에, 땅 속에서 고려시대부터 통일신라 건물지까지 떼거지로 발굴되었다. 이런 곳인데도 불구하고 여기에 택지지구를 짓겠다고 하니.
결국 짓는 듯하다. 이미 도로가 나는지 융건릉과 용주사를 잇는 산은 이미 다 파헤쳐졌다. 한국의 개발근성을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가 되었다. 덤으로 2016년 현재 이러한 토지구역사업에 각종 이권단체에 용주사까지 엮여 절 주변이 항상 시끄러운 상황.
박지성 선수와 그의 부모가 주로 출석하는 법당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불가에서는 특정 신도가 어느 절에 출석하건 별로 신경을 안쓰는데다 제대로 신도 등록을 하려고 한다면 아예 종단 소속 신도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공식적인 건 아니다. 당장 그의 프로필에도 대한불교 조계종까지만 쓰여있다. 단지 박지성의 은사스님이 용주사에 있다는 걸로 이해하자.
8. 말사 목록
9. 같이보기
[1] 병자호란 때 소실됐으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음.[2] 제2교구 말사는 석남사(안성)이다.[3] 이 탱화를 김홍도가 그렸다는 구전이 있지만, 탱화의 기풍이 김홍도와 차이가 있으므로 김홍도 그림이 아니라고 보는 시선이 우세하다. 또한 이 탱화는 서양화 기법이 가미된 점으로도 주목할 만하다.[4] 정약용의 저서 아언각비에는 "두부란 숙유(菽乳)다. 이름은 본래 백아순(白雅馴)인데, 이를 방언이라고 생각해 따로 이름하여 포(泡)라고 하였다. 여러 능원(陵園)에는 각각 승원(僧院)이 있어 여기서 두부를 만들어 바치게 하였으니 이 승원을 조포사(造泡寺)라고 하였다." 라는 내용이 있다.[5] 영가의 극락왕생을 비는 그림[6] 건설하기 전에 문화재조사를 하여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면 실시하는 발굴을 뜻한다.[7] 본래 수원향교나 수원읍성 등이 안녕동과 와우리 인근에 있었다. 수원의 중심지가 현재 팔달구 쪽으로 이전된 것은 정조 때 수원화성을 건립하면서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