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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파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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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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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파인만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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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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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뢴트겐 헨드릭 로런츠 피터르 제이만 앙투안 베크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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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퀴리 마리 퀴리 존 라일리 필리프 레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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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톰슨 앨버트 마이컬슨 가브리엘 리프만 굴리엘모 마르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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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브라운 요하너스 판데르발스 빌헬름 빈 닐스 달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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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커 오너스 막스 폰 라우에 헨리 브래그 윌리엄 브래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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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바클라 막스 플랑크 요하네스 슈타르크 샤를 기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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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로버트 밀리컨 만네 시그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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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프랑크 구스타프 헤르츠 장 페랭 아서 콤프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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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윌슨 오언 리처드슨 루이 드 브로이 찬드라세카라 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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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하이젠베르크 폴 디랙 에르빈 슈뢰딩거 제임스 채드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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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코 페르미 어니스트 로런스 오토 슈테른 이지도어 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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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 체렌코프 일리야 프란크 이고르 탐 오언 체임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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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턴 릭터 새뮤얼 팅 필립 앤더슨 존 밴블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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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빌 모트 표트르 카피차 아노 펜지어스 로버트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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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피치 니콜라스 블룸베르헌 아서 숄로 카이 시그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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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윌슨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 윌리엄 A. 파울러 카를로 루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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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판 데르 메이르 클라우스 폰 클리칭 에른스트 루스카 게르트 비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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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빈 슈워츠 잭 스타인버거 한스 데멜트 볼프강 파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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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 프리드먼 헨리 켄들 리처드 테일러 피에르질 드 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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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샤르파크 러셀 헐스 조지프 테일러 버트럼 브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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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퍼드 슐 프레더릭 라이네스 마틴 펄 데이비드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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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르뒤스 엇호프트 마르티뉘스 펠트만 조레스 알표로프 허버트 크뢰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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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트 괴델 줄리언 슈윙거 리처드 파인만 에드워드 텔러
<rowcolor=#cd9f51> 1959 1960 1961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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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셜 로젠블루흐 유발 네이만 유진 위그너 스티븐 호킹
<rowcolor=#cd9f51> 1979
툴리오 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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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ddd> 리처드 파인만
Richard Feynman
파일:리처드 파인만의 모습.jpg
본명 리처드 필립스 파인먼
Richard Phillips Feynman[1]
출생 1918년 5월 11일
미국 뉴욕주 뉴욕시 퀸스
사망 1988년 2월 15일 (향년 69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83cm
직업 이론물리학자, 이학 교수
분야 입자이론(양자장론)
핵물리학
이론 컴퓨터 과학(양자 정보 과학)
나노 공학
서명 파일:리처드 파인만 서명.png파일:리처드 파인만 서명 다크모드.png
링크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2] | 파일:구글 스칼라 아이콘.png | 파일:IEEE 심볼.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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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ddd> 학력 파 라커웨이 고등학교 (졸업)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물리학 / 1939년 학사)[3]
프린스턴 대학교 (물리학 / 1942년 박사)[4]
경력 LANL (이론 부서 / 박사후연구원)
코넬 대학교 (이론 물리학 / 조교수)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이론물리학 / 교수)
지도교수 존 아치볼드 휠러
지도학생 제임스 맥스웰 바딘[5]
로버트 배로
피터 쇼어
스티븐 울프럼[6]
형제자매 조앤 파인만[7], 남동생[8]
배우자 알린 그린바움 (1942년 ~ 1945년, 사별)[9][10]
메리 루이스 벨 (1952년 ~ 1958년, 이혼)
귀네스 파인만 (1960년 결혼)[11]
자녀 칼 파인만[12](1962년~)
미셸 파인만(1968년~)
종교 유대교무종교(무신론)[13] }}}}}}}}}

1. 개요2. 출생 배경과 성격3. 물리학자로서의 특이한 행적
3.1. 장난3.2. 개성3.3. 재능
4. 업적5. 활동6. 저술과 구술서 등7. 애처가에서 카사노바로8. 철학에 대한 경멸9. 노벨상에 대한 일화10. 여담11. 참고 자료12.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미국이론 물리학자.

10대 이전부터 물리학에 재능을 보여 신동이라 불리고, 1988년 사망할 때까지 끊임없이 물리학을 연구해 이론 물리학 및 응용 분야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양자 역학에서 입자 상호 작용의 자취를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경로 적분과 직관적 표기인 파인만 다이어그램, 이 두 가지 방법론을 토대로 한 양자 전기 역학의 정식화 및 재규격화 이론, 함수 해석학에서 확률 편미분 방정식의 해법인 카츠-파인만 공식과 측도론에서의 파인만-트로터 공식, 그 외에도 쪽입자 모형의 제안, 과냉각된 액체 헬륨의 초유동성 연구, 헬만-파인만 정리, 양자 교란 등으로 물리학계에 알려졌다. 1958년에 이미 나노머신의 등장을 예견하고 개념을 정립하였으며, 양자 전기 역학의 기초론을 정립한 공로로 줄리언 슈윙거, 도모나가 신이치로와 함께 1965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81년에 쓴 논문[14]에서는 양자 컴퓨터의 기초 작동 원리를 고안하기도 했다.

영화드라마 같은 것에서 나오는 천재처럼[15] 특유의 유머러스한 성격과 활발한 활동으로 인해 대중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문학, 운동, 예술 분야에 걸치는 다양한 취미 활동으로 유명하고, 그에 못지않게 사회적인 쟁점이나 비(非)과학 분야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널리 알려 본인의 유명세에 기여하였다.

2. 출생 배경과 성격

뉴욕 퀸스의 파 라커웨이(Far Rockaway)에서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2살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그런 파인만의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파인만을 과학자로 만들고 싶어 해 적극적으로 가르치는 한편 자식을 유대교 주일 학교에 보내 히브리어까지 배우게 했다. 파인만은 이렇게 주위의 열성적인 의지하에 유대교 학교에 다녔으나 13살 이후로 종교에 대해 거부하고 유대인들이 선택받은 자라는 선민의식을 버렸다.# 어렸을 적 이후 파인만은 줄곧 무신론자였으며 자신에게 유대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거나 남을 유대인 등의 인종으로 분류하는 것을 싫어했다.[16] 또한 유대인들이 자연 현상보다 토라 해석에 더 열을 내는 모습을 보고 실망감을 느끼기도 했다.[17] 그럼에도 기독교의 정신적 유산까지는 거부하지 않은 그였기에 칼텍 런치 포럼에서 기독교와 과학의 싸움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 서구 문명은 두 가지 위대한 유산을 고수하고 있다. 하나는 모험을 추구하는 과학 정신-언젠가는 밝혀질 미지의 세계 또는 여전히 불확실한 미스테리로 남을 세계를 향한 모험-말하자면 지적인 겸손함이다. 다른 하나의 위대한 유산은 기독교 윤리-사랑과 형제애, 개인의 가치에 관한 기초-말하자면 정신적인(spiritual) 겸손함이다.

이 두 가지 유산은 논리적으로, 완전히 일관된다. 하지만 논리만이 전부는 아니다. 어떤 발상에 따르려면 마음이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종교로 돌아가자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근대의 교회가 신의 존재를 회의하고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위로를 주는가? 오늘날의 교회가 그런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제공해 주고 있는가? 이 두 가지 유산들은 지금까지 서로를 상처 내오는 데만 주력하지 않았는가? 이런 것들은 정말 피할 수 없는 일인가? 이 두 가지 유산, 서구 문명의 두 기둥이 서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완전한 활기를 가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번역 출처 / 원문
어린 시절[18] 그는 라디오 수리에 많은 관심을 뒀으며 동네의 라디오 수리를 도맡아 하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생각만으로 라디오를 고치는 소년이라고 불렀다.[19] 기계를 다루는 데에 재능이 있어 초등학교 때 그는 부모님이 집을 나간 사이 집에 강도 경보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는 15세 때(한국 나이 16 ~ 17세) 삼각 함수, 대수, 무한급수, 해석 기하학, 미분과 적분[20]을 익힌 상태였는데,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도 스스로 고안해 낸 수학 기호들을 사용하여 문제를 풀었다.[21][22]

그의 직설적인 화법은 때때로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는데, 고양이신경계에 대한 발표를 준비하기 위해 도서관에 가서 사서에게 "고양이 지도(a map of the cat)에 관한 책이 있으면 빌려주세요."라고 물었다가 큰 웃음을 들었다고 한다. 웬 이상한 생물학과 학생이 고양이 지도를 찾는다는 소문이 돌았다고.......[23][24]

파 라커웨이 고등학교를 1935년에 졸업하고 그해에 MIT에 입학하여 1939년에 졸업하였다. 입학하던 시기의 전공은 수학이었으나, 너무 추상적이라면서 전기 공학 전공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물리학으로 졸업했다.[25] 졸업할 당시 파인만은 두가지 업적을 성취하게 된다. 한가지는 전미수학경시대회에 참가해서 퍼트넘 펠로우를 획득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전자기 해밀토니언의 섭동을 다룬 “분자내의 힘들“이라는 논문이 피지컬 리뷰라는 미국 최고의 물리학술지에 게재되었다.[26] 1942년 5월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을 때 그의 나이는 24세였다.[27] 한편 파인만이 대학원에 입학하자마자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박사 학위를 받고 수개월 뒤에야 미국의 원자폭탄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일하였으며 이후 코넬 대학교 이론 물리학 조교수로 재직하였고, 1950년쯤부터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계속 재직하였다.

기존의 틀을 깨는 타입인데, 강연을 해주는 조건이 '사인을 13번만 하겠다.'[28]라고 말하거나, 노벨상 수상 자리에서 왕에게 뒷면을 보이면 안 된다는 관례에 '그러면 뒤로 깡충깡충 뛰면서 입장해야지!'라고 결심하거나[29], 로스 앨러모스에서는 편지 검열 제도에 도전하는 등[30] 이런 탈권위적인 태도를 평생 보여주었다. 천재들이 모인다는 멘사도 매우 싫어해서 자신의 IQ 검사 결과가 125로 나왔을 때 멘사의 가입 권유를 자연스럽게 거절할 수 있어서 매우 만족했다고 한다. 반면, 학생들이나 물리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관대했던 듯하다.

상당히 겸손했다.[31] 노력과 실력에 대해 말하면서도 자신은 운이 좋았다고 한다. 운에 대한 생각이 깊은데 보통 로또 같은 그런 행운들을 말하고, 좀 더 깊게 생각하는 사람은 노력하는 것도 운이라고 보는데, 리처드 파인만은 흥미 갖는 것 자체도 운의 일종으로 보았다.[32] 아마 과학계에서 인간의 존재는 단지 우연한 존재라는 의견에 동감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물리학자가 된 것은 어쩌다가 과학에 흥미 생겨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남다른 재능으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같은 거물에게 세미나할 때 보통 사람처럼 손이 덜덜 떨렸지만[33] 물리에 집중하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세미나를 무사히 끝낼 수 있었는데, 이런 집중력도 행운의 일종으로 보았다. 그런 집중력이 삶에서 여러 번 있었는데 자신이 정말 행운아라고 하였다. 또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고 맞는 것을 맞다'고 말하는 것을 행운아였기에 누릴 수 있는 행복이었다고 하였다.[34]

또 권위는 별거 아니라는 태도를 평생 가졌다. 이것은 아버지의 직업인 제복 세일즈맨에서 유래한다. 대통령이나 교황도 결국엔 옷 입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왈, "교황이 평신도와 다른 것은 그가 쓰고 있는 모자뿐이란다." 또한 대학원 시절이나 로스앨러모스 시절 물리학계의 거장들과 '권위 따위는 모르겠고'라는 태도로 치고받고 싸우거나, 맨해튼 프로젝트 시절의 로스앨러모스에서도 비밀을 유지하려는 정부나 군에 맞서 노동자나 계산원에게까지 이것이 어떤 프로젝트인지 알려서 근로 의욕을 고취시킨 일화가 좋은 예다.[35]

파인만의 업적은 물리학 분야에서 지대한 족적을 남겼고, 파인만이 남긴 학술적 유산들은 현재에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으나 정작 그가 아인슈타인 이후 대중에게 가장 유명한 물리학자 중 한 명이 된 것은 그의 유머러스한 성격 덕이 컸다. 사실 파인만의 연구 분야나 주요 업적들은 대중들이 이해할 만한 게, 설명할 만한 게 아니다. 애초에 자신의 연구를 대중에게 설명한다는 것 자체에 파인만 스스로도 부정적이었다.[36][37]

3. 물리학자로서의 특이한 행적

과학자들이 가장 존경하는 과학자가 아인슈타인이라면, 가장 사랑하는 과학자는 리처드 파인만이다.
경희대학교 물리학과 김상욱 교수

3.1. 장난

대중들이 파인만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그의 친구 랄프 레이튼이 펴낸 그의 일화에 대한 책과 비슷한 몇몇 책의 영향이 크다. 실로 악마적인 장난을 고안해 내는 데에도 천재적인 인물인데, 몇몇 일화를 들면 다음과 같다.

3.2. 개성

3.3. 재능

You asked me if an ordinary person, by studying hard, would get to be able to imagine these things like I imagine — of course! I was an ordinary person who studied hard. There's no miracle, people.
여러분이 제게, 평범한 사람이 열심히 공부해서 제가 상상하는 것들을 똑같이 상상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물론이죠! 저도 공부를 열심히 한 평범한 사람이에요. 기적은 없어요, 여러분.[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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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들 또한 다양하여 봉고 연주, 마야 문자 해독, 회화, 금고 따기, 그림 그리기, 춤추기 등의 취미를 갖고 있었으며, 전부 보통 이상은 한 모양이다.

4. 업적

그의 과학적인 성취도 그의 접근 방식이 특이한 데서 얻어진 것이 크다. 노벨상을 수상하게 한 양자 전기 역학도 다른 공동 수상자들은 정준 교환 관계를 사용한 방정식으로 철저히 접근했다. 하지만, 그는 단위 영역당 입자의 가능한 경로를 모두 합쳐보자라는 것에서 착안하여 경로 적분이라는 수학적인 표기를 창안했다. 이를 직관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파인만 다이어그램'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양자 역학 항목에서도 나오듯 골때리는 양자 역학을 나름대로 이해하기 위해 만든 개념이라는 듯하다.

두 창의적인 도구인 경로 적분, 파인만 다이어그램을 활용하여 세운 업적이 바로 양자 전기 역학(QED; Quantum ElectroDynamics)을 완성한 것이다. 이걸 다르게 표현하자면 양자 역학으로 기술되는 전자기학을 완전하게 만들었다는 정도. 의외의 사실로, 전자기 상호 작용이 제대로 양자 역학적으로 기술되기까지는 양자 역학이 태동하고 나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나야 했다. 심지어 처음 '양자화'가 시도된 대상이 빛의 알갱이, 즉 광자인데도 말이다. 사실 막상 알갱이로 놓긴 했어도 이에 대한 이론적인 배경은 굉장히 부실했었다. 일단 왜 [math(E = h\nu)]가 성립해야 하는가 하는 것도 모르고. 그리고 전자를 기술하는 양자 역학적 방정식은 슈뢰딩거 방정식, 디랙 방정식이 있긴 해도 막상 빛을 포함한 보손과 전자를 포함한 페르미온 모두 양자 역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방정식은 없었다. 사실 후에 밝혀지기로 맥스웰 방정식이 그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긴 하지만 이 방정식에 대한 제대로 된 양자 역학적인 접근 방식이 등장하려면 파인만, 슈윙거, 도모나가 등이 QED를 완성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결국 이 업적을 인정받아 이 세 사람은 1965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다.

1948년 3월 30일 포코노산에서 이루어진 학회에서 파인만과 슈윙거가 처음 QED를 발표하는 자리가 있었다. 슈윙거는 엄청나게 어려운 수학을 동원해 가며 발표를 하는 통에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거의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반면에 파인만은 자신의 직관이 서린 파인만 다이어그램 방식으로 '쉽게' 설명하려고 했는데 이때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진지한 계산이 아니라 장난이라 여기고 이에 대해 엄청 따졌다고 한다.

1940년대 후반, 코넬 대학교에서 근무하던 마크 카츠(Mark Kac)이라는 학자가 파인만의 경로 적분 프레젠테이션을 듣고, 위너 범함수의 분포를 설명하기 위해 분포 함수에 경로 적분 방법론을 도입한 것을 1949년 미국 수학회지에 게재했다.[59] 1951년 일본의 수학자 이토 기요시가 확률에 관한 이토 과정과 이토의 보조 정리를 미국 수학회지에 발표[60]하면서, 이토 과정의 해를 풀 수 있는 방법론 중 하나로 제기되었고, 1973년 유럽형 주식 옵션 가치를 설명하기 위한 블랙-숄즈 모델 구성에 이토 과정이 사용되면서 최종적으로 경로 적분은 확률 미적분학 및 금융 공학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쿼크 모델이 창안되는 과정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사실 쿼크 모델의 단순화된 모델을 제시한 셈인데, 이 모델에 따르면 양성자를 비롯한 강입자들은 '파톤(parton)'이라고 불리는 어떤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쿼크 모델과 비슷해 보이지만 이쪽은 좀 더 뭉뚱그린 느낌.[61] 이 모델을 통해 양성자에 전자 같은 더 작은 입자를 부딪혔을 때 어떤 걸 볼 수 있는지 제시하기도 했다. 나중에 실험으로 양성자가 내부 구조를 가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파톤 모델이 아닌 쿼크 모델이 정설로 여겨지고 있지만 '파톤'이라는 이름은 살아남아 학계에서 여전히 쓰이고 있다. 사실 쿼크와 글루온들을 한데 묶어 부를 일이 많은데, '파톤'이라는 이름이 이럴 때 적절하기 때문에. 실제로 주어진 강입자(거의 대부분의 경우 양성자) 내부에 있는 쿼크와 글루온의 분포를 가리켜 파톤 분포 함수(PDF; parton distribution function)라고 부른다.

또한 나노머신 이론을 최초로 제창한 사람도 이 사람이다. 1959년 12월 29일 디너 모임에서 '바닥에는 풍부한 공간이 있다'며 어떤 책 한 쪽을 2만 5천분의 1로 축소해 전자 현미경으로 읽을 수 있게 하는 첫 번째 사람과 한 변이 0.4mm인 정육면체 크기의 모터로 외부에서 제어할 수 있는 회전 전기 모터를 처음 만드는 사람에게 각각 1천 달러를 주겠다고 내기를 걸었다. 내기를 건 지 1년도 지나지 않은 1960년 Caltech 졸업생 윌리엄 H. 매클레런이 두 번째 내기에서 요구한 모터를 만들어 상금을 받았고, 25년 후인 1985년 스탠퍼드 대학교 학생 톰 뉴먼이 전자 빔으로 찰스 디킨스두 도시 이야기를 축소시켜 상금을 받았다.#

또한 양자 컴퓨터의 고안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동기도 심히 물리학자답다. 양자 역학을 다루기 위해 보통 파동 함수를 계산하든가 시뮬레이션을 하든가 하는데, 그 방식은 지금도 그렇지만 슈뢰딩거 방정식 같은 걸 일일이 직접 풀어서 수행하는 식이다. 그리고 파인만이 이 문제를 고민한 1980년대도 그렇고 심지어 지금도 양자 역학 문제에서 나타나는 방정식이라든가 확률 분포 문제를 쉽게 푸는 방법은 없다. 파인만이 깨달은 건, 결국 우리가 쓰는 계산기가 고전적인 탓에 이런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계산기를 양자 역학적으로 구동하도록 만든다면 양자 역학 문제들이 훨씬 더 쉽고 빠르게 풀릴 것으로 파인만은 기대했다. 이런 식의 아이디어로 양자 컴퓨터가 등장하는 동기 중 하나를 파인만이 마련하게 된 것이다.[62]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파인만은 과학자로서의 명성도 엄청나지만 교육자로서의 명성도 엄청나다. 사실 연구를 이끄는 능력과 강의를 이끄는 능력은 아무리 저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정비례 관계가 성립하지는 않는다. 아예 '별개의 관계'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이게 무슨 말인가 싶으면 대학 시절 강의를 들었던 교수들을 떠올려 보면 된다. 누가 봐도 학력과 경력, 업적은 능력자인데 막상 강의하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교수 자리에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드는 교수가 한 명쯤은 있을 것이다. 특히 프라이드만 강하고 아날로그에만 고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실제로 업적만 따져도 백과사전 수준인 아이작 뉴턴이나 요하네스 케플러도 강의력 자체는 의외로 별로였다고 한다. 그러나 파인만은 연구만큼이나 강의를 이끄는 능력도 뛰어났다.

사실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이공계의 공부는 딱딱하고 어렵기로 악명 높은데, 파인만은 그렇게 생각되는 물리학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심도 있을 뿐만 아니라 유머러스하게 학생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강의가 담긴 빨간 책은 수많은 물리학도와 공학도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 파인만 본인도 주입식 교육을 싫어하고 스스로 깨치는 교육을 좋아했다고 한다.[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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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단순한 빨간색 표지는 원래 드럼을 좋아하는 파인만이 자신만의 신조인 과학과 실생활을 결합을 뜻하게 드럼을 그려두고 그 위에 음파나 수식을 뜻하는 여러 가지 과학 기호 등을 넣고 싶었으나, 출판사에서 현재와 같은 표지로 정하고 저자 소개란에 봉고를 치는 파인만 사진을 넣어서 '드럼'을 좋아하는 저자의 취향을 조금 살리는 디자인으로 완성하였다.

5. 활동

파일:리처드 파인만 로스 앨러모스 시절.jpg

앞서 말했지만, 로스 앨러모스에서 핵무기 개발 계획인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가하며 닐스 보어 같은 여러 거장들을 만나게 된다.[64] 파인만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닐스 보어는 이미 물리학의 거두였던 자신의 앞에서 어떤 반대 의견도 내놓지 않는 다른 물리학자들에게 크게 실망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파인만은 그런 권위 따위는 모르는 천성을 지닌지라 물리학에 대해 토론할 때만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으면서 계속 치고받았다는데,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보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보어에게 '건방지게' 굴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보어가 생각(파인만이 보기에 이상한 의견)을 내놓으면 그걸 들은 파인만은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에요!"라고 말했다. 이때 보어는 이름만 동료일 뿐 자신의 권위를 두려워하는 작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에 이런 파인만의 태도를 아주 신선하고 흡족하게 여겼다.[65]

당시 일화. 후에 닐스 보어는 역시 물리학자인 그의 아들(오웨 보어[66], Aage Bohr)에게 "저 녀석은 나중에 정말 크게 될 놈이니 잘 지켜보라."고 했다고 한다. 물론 보어라고 까지 않는 건 아니다.[67] 아무튼 그는 맨하탄 프로젝트에서 한스 베테와 같이 현재도 기밀에 속하는 베테-파인만 방정식을 만들어냈다.

파인만은 핵에 대해 죄책감을 가졌던 아인슈타인과는 달리 그다지 죄책감 같은 건 안 느꼈다고 한다. 이 부분은 로스 앨러모스에서 만났던 존 폰 노이만의 영향이 크다고 자서전에서 썼다. 폰 노이만과 함께 산책을 하면서 "자기가 사는 세상에 자기가 책임을 느낄 필요는 없다."는 폰 노이만의 사상에 물들어 버렸다고 한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그의 책에서 나타난 히로시마 원폭 투하 순간의 행동이다. 파인만은 레스토랑에 앉아 '지금쯤 터졌을 거야' 짐작하고 신나게 폭발 반경을 계산하면서 들뜨는 것은 물론 봉고도 쳤다. 일부 과학자들이 투하 자체에 정신적 충격을 받거나, 최소한 작전 관련자들이 대규모 파괴 무기의 사용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

그래도 파인만도 아주 충격을 안 받은 건 아니었는데, 죄책감보다는 허무감을 느껴서 잠시 멍~ 해졌다고 한다. 일본을 방문했을 때 전후 복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어차피 핵 한 방이면 다 터지는데 다시 만들어서 뭐 하나." 같은 생각이 들었고, 자서전에 따르면 '그것에 대한 생각을 그만둔' 부류가 되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생각을 더하던 부류는 핵이 성공리에 터지고 연구원들 파티할 때 구석에서 '궁상을 떨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다가 대부분은 반전, 반핵 운동으로 빠졌다고 한다. 더불어 아직까지 그런 일(핵폭발 때문에 기껏 복구한 것이 허사가 된 것)이 다시 없어서 다행이라고도 썼다.

그가 이렇게 핵에 대한 태도를 일찌감치 자기 완결을 지은 것은 평상시의 캐주얼한 태도와도 연결된다. 파인만은 명쾌한 결론과 끝맺음이(설사 그것이 제3자나 피해자가 보기엔 도덕적 책임감을 외면한 것처럼 보여도) '쿨'한 것을 선호했고, 계속해서 되짚어 보거나 큰 판단을 재검토, 재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핵에 대해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는 동료들을 '궁상'으로 표현한 것을 보아도 그가 신속하게 결론 내리지 못하는 행동을 부정적인 눈으로 보았음이 묻어난다.

또한 육안으로 핵폭발을 보면 눈이 먼다는 통념이 거짓말임을 직접 증명했다. 일반적으로 핵 실험을 현장에서 실시할 때는 이런 모양의 고글을 끼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도록 한다. 그러나 파인만은 자동차 안에서 맨눈으로 보았고 정말 멀쩡했다. 이는 핵폭탄이 터질 때 발생하는 빛 중 가시광선보다 자외선이 더 해롭기 때문인데, 이를 알았던 파인만은 자외선만을 막기 위해 차 안에서(자외선은 유리를 통과하지 못한다) 실험을 참관했다.[68] 남들이 10km 거리에서 얼굴도 못 들고 후폭풍이랑 싸울 때 자신은 30km 밖에서 저 앞에선 머리도 못 들고 있겠지~ 하면서 구경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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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엔 환각 탱크를 이용한 환각 체험을 하는 등 신비스러운 것들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과학과 합리적인 생각이 그의 습관이기에 인과 관계를 무시하고 맹신하는 말도 안 되는 것은 화물 신앙(Cargo Cult)라고 부르며 별로 안 좋아했다. 그런 사고방식을 고수하면서 철학계의 뻘짓도 깠는데, 이는 당시 상대성 이론을 두고 (특히 유럽 쪽) 철학계가 뻘짓한 게 좀 크다. 쉽게 말해서 상대성 이론을 제목만 보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것이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고 생각하여 막 써먹었다.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에서는 상대성 이론을 설명하면서 이에 대한 철학계의 오해를 비판하는 데 제법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포스트 모더니즘 그룹은 훗날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 사건으로도 한 방 물을 먹기도 했다.

로스 앨러모스 시절에 피폭된 방사능으로 인해 투병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런 때에도 과학적인 생각은 죽지 않아서 1986년 1월 발생한 STS-51-L 챌린저 우주 왕복선 폭발 사고의 조사 위원회에 초청되어 활동했으며, 혼자서 나머지 조사 위원 11명을 올킬하는 위엄을 보인다.[69] 폭발이 물리적으로는 저온 상태에서 탄성이 저하된 O 자 형태의 고무 링(줄여서 O 링이라 부른다.) 때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보신주의 문화와 관료 체계에 쩔어있는 NASA의 문화에 있음을 밝혀냈다.[70] 이때 조사 결론 발표장에서 간단하게 입증했던 실험이 O 링 테스트다. 고무 링을 꼬아서 고정시킨 뒤 얼음물에 넣으면 탄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해 보인 것이다. 실험 영상 단, 알려진 것처럼 파인만 혼자서 이 사실을 알아낸 것은 아니다. 파인만 본인이 나중에 말했지만, 이미 나사의 현장 엔지니어들은 O 링이 문제였을 거라는 심증을 굳히고 있었지만 쓸데없이 입을 열었다가 보복을 받기 싫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파인만의 자서전이나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챌린저: 마지막 비행 등에 다르면 당시 조사 위원회는 로널드 레이건의 지시를 받은 위원장의 영향으로 최대한 나사의 입장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 중 친정부에 속하지 않았던 한 명이었던 공군 소장 도널드 쿠티나에게 샐리 라이드가 비밀리에 O 링과 낮은 기온 간의 문제 가능성을 쪽지로 전달했고, 쿠티나는 샐리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의심을 받지 않을 방법을 고심한 끝에 매우 교묘하게 파인만에게 정보를 흘린다. 파인만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아끼는 자동차 보러 오시겠음?'라는 식으로 넌지시 파인만을 초대했고[71] 파인만에게 '엔진에 쓰이는 O 링이 날씨가 추우니까 문제가 생기는지 엔진이 자꾸 새더라'식으로 암시를 흘렸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파인만은 이후 O 링을 붙들고 늘어지며 이게 문제였음을 사람들 앞에서 알리게 된다.[72] 2013년 BBC에서 제작한 TV 영화 <The Challenger Disaster>에서 이 모습이 교묘히 나타난다. 작중 배경을 잘 모르던 사람은 막판 반전을 깨닫고 무릎을 탁 칠 정도.

파인만은 신장 투석까지 받아가며 사건의 규명에 매달렸다. 쿠티나 장군의 조교 행각은, 나쁘게 말하면 파인만을 이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게 보는 건 너무 삐딱한 시각이고, 자신의 업무에 충실하면서도 친구를 곤란하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까 고민한 사람의 현명한 결정 정도로 생각하자. 파인만 본인 역시 이 장교의 합리적인 사고방식, 검소한 생활 등을 매우 좋아했고 그와 친하게 지냈다.

여담으로 이 조사 위원회 위원 중에는 달 착륙으로 유명한 닐 암스트롱도 있었는데, 파인만은 암스트롱에게 굳이 사인을 얻으려 했다. 주위 사람들은 파인만의 성격을 알아서 파인만이 사인을 딸아이에게 주기 위해 저런다고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다른 사정이 있었다. 한 택시 기사가 파인만에게 암스트롱의 사인을 받아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 택시 기사는 파인만이 노벨상 받은 슈퍼스타 과학자인지도 모르고 그냥 높으신 분이라고만 알았다.[73]

6. 저술과 구술서 등

그의 이야기를 구술한 책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Surely You're Joking, Mr.Feynman!)'[74]이나 '남이야 뭐라 하건!(What Do You Care What Other People Think?)'은 물리학자의 일대기를 쓴 책답지 않게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75]

강의를 좋아했지만 그의 강의 관련 자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학부생을 위해 물리학을 정리한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Lecture on Physics)'만 알려져 있는 편이다. 표지가 빨개서 일명 빨간 책. 원래부터 학부생 대상의 강의록을 편집한 것이고[76] 국내의 모 대학은 1학년 물리 교재로 쓰기도 했으나 첨단 과학을 접하기 전에 잡다한 것만 해서 물리에 질려버리는 학부생 기준[77]이라 일반적인 학부생에게는 쉽지 않은 책.[78] 그가 여기서 사용한 그만의 이론적으로도, 실제로도 의미가 있는 비유들은 현재 사용되는 교재들에도 영향을 줬다. 물론 유머를 제외하고. 본인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던 업적은 바로 저 빨간 책을 낸 것이라고 한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 가면 파인만의 빨간 책 원문을 무료로 볼 수 있다.1권2권3권

42와 관련된 이야기도 이 책에 나온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두 개의 전자가 서로 적당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을 때, 전자기력은 이들을 서로 밀쳐내고 중력은 이들을 서로 잡아당기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 두 가지 힘의 상대적 비율은 전자 사이의 거리와 무관하며, 자연계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상수이다. 중력을 전기력으로 나눈 값은 1/(4.17 X 10^42)밖에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전기력의 세기가 중력의 4.17 X 10^42배라는 뜻이다. 이렇게 큰 숫자는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것은 벼룩의 부피를 지구의 부피로 나눈 것처럼 우연히 나타난 숫자가 아니다. 우주의 근본을 이루는 전자의 두 가지 성질을 비교하면서 얻어진, 필연적인 숫자인 것이다. 이 환상적인 숫자는 자연에 내재된 근본적인 상수이므로, 무언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훗날 우리가 범우주적인 방정식을 찾아낸다면, 이 방정식의 근들 중 하나가 4.17 X 10^42 일 것이다'라며 낙관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괴물 같은 숫자를 근으로 갖는 방정식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다른 가능성도 있다. 그중 하나는 이 숫자를 우주의 나이와 연관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영역에서 엄청나게 큰 숫자를 또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주의 나이를 '연(year)' 단위로 헤아리는 것이 과연 옳은 발상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1년이라는 시간은 오직 지구라는 행성에서만 통용되는 단위일 뿐, 결코 범우주적인 시간 단위가 될 수 없다. 이보다 좀 더 자연적인 시간의 척도로서, 빛이 양성자를 가로지르는 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해 보자. 이것은 약 10^(-24)초이다 현재 알려진 우주의 나이는 대략 2 X 10^10년[79]인데, 이 값을 10^(-24)초로 나누면 그 결과 역시 10^(42)이다. 0의 개수가 42개로 같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중력 상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해가야 한다.

왜냐하면 우주는 지금도 계속해서 나이를 먹고 있으므로, 우주의 나이를 10^(-24)초(빛이 양성자를 가로지르는 데 걸리는 시간)로 나눈 값도 점차 커져갈 것이기 때문이다. 중력 상수가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물론, 이 변화는 엄청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에 수십 년 사이에 확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80]
-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CHAPTER 7 중력

유튜브에 가서 파인만을 치면 실제 강의가 몇 개 나온다.

그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감독 크리스토퍼 시케스가 1994년 쓴 ‘No ordinary genius(평범한 천재가 아닌)[81]’도 괜찮다고 한다. 과학동아의 관련 기사

7. 애처가에서 카사노바로

파일:리처드 파인만&알린 그린바움.jpg

결혼은 여러 번 했지만, 처음 결혼했던 부인 알린 외의 부인들에 관해서는 비중 있게 언급되지 않는다.

첫 아내인 알린은 13살 때부터 파티장에서 만나 사귀었고 대학교 즈음에 결혼했지만, 로스 앨러모스에서 일할 때쯤에 폐결핵으로 사별했다.[82][83]

여동생인 조앤 파인만의 진술에 따르면, 결혼할 때에 알린이 폐결핵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파인만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병이 전염될 것을 우려한 파인만의 어머니가 결혼을 거세게 반대했다. 그럼에도 결혼에 골인했으나 끝내는 사별했으니, 파인만이 유독 슬퍼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때 남들에게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아내는 죽었어. 자, 일이나 하자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주변 사람들 역시 파인만이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해하지 않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구나'라는 걸 깨달은 뒤 그 주제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의 사망 한 달 후 옷 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진열되어 있는 옷 중 하나를 보고 '알린이 저 옷을 좋아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자 길거리에서부터 집에 갈 때까지 미친 듯이 울었다고 한다.
(…) I have met many girls and very nice ones and I don’t want to remain alone — but in two or three meetings they all seem ashes. You only are left to me. You are real.
(전략) 난 여러 여자를 만났고 그중에는 멋진 아가씨들도 있었지. 나도 계속 혼자이고 싶은 건 아냐. 하지만 두세 번 만나면 다들 가 돼 사라지는 것 같아. 내게는 당신만이 남아 있어. 당신만이 진짜야.
(중략)
PS Please excuse my not mailing this — but I don’t know your new address.
추신. 이 편지를 부치지 못한 걸 용서해 줘. 하지만 난 당신의 새 주소를 알지 못하는걸.
아내가 죽고 16개월 뒤, 1946년 10월 17일에 쓴 편지

그 반동인지 아내 사망 후에는 물리학계의 카사노바로 진화했다.[84] 본인이 스스로 인증했을 정도다. 술집카지노에서 라스베가스의 유명 선수와 어떻게 친분을 쌓게 되었는데, 그가 여성을 꼬시는 기술을 적극적으로 전수해줘서 그걸 몇 번 써먹었다고 한다.

비결은 별거 없고, 그냥 나쁜 남자가 되라는 것인데, 절대로 같이 자기 전에는 밥 사달라고 해도 사주지 말고, 영화표도 사주지 말고, 뭐 해달라고 해도 거절하면, 너와 잘 거고 그다음은 니가 알아서 하세요 식 조언. 사실 아래에도 나와있지만 진짜 있던 일인지도 의심스러운 일화이고, 진짜 있던 일이라 하더라도 파인만의 잘생긴 외모와 사회적 배경을 보고 다가오는 여자들에게 당하지 않도록 했던 조언이라는 추정도 있다. 파인만의 끊임없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에게 다가간다면 정말로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누누이 말하지만, 진위가 의심스러운 일화이므로 가볍게 넘어가도록 하자.

나중에 남부 여성에게도 한번 써먹은 뒤 자신과는 안 맞아서 그만뒀다고 하지만 12명 넘는 여자에게 프러포즈받았다는 소문이 있기도 하다. 뭐 그런데 저 라스베이거스에서 선수에게 사사한 일화는 조금 의심스럽기도 한 게[85] 사진을 보고 일화를 보면 알겠지만 애초에 잘생긴 외모와 유머를 타고난 사람이었다. 여자 꼬시는 데에 굳이 선수의 가르침까지 얻을 정도로 쑥맥이지는 않았다.

여하간 일단 라스베이거스로 여름 휴가를 매번 떠나거나 토플리스 댄스 클럽(한마디로 스트립 클럽)에 자주 가는 등 호색한이 아닐까 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86] 그를 존경하는 로렌스 크라우스가 쓴 퀀텀맨이라는 책에서는 아예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술과 섹스에 탐닉했다'라고 묘사하기까지 한다. 여하튼 간에 여자 좋아한 건 사실인 듯.

두 번째 아내 메리 루이스 벨과는 결혼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이혼했다. 파인만 스스로 '사람이 외로워지면, 예전에 만났던 사람이 그리워지고, 그 사람을 만나서 몇 번 만남을 가지고 잠을 자고 하다 보면 명백히 성격이 안 맞고 오래갈 수 없다는 게 분명해도 이 사람과 사는 게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질 때가 있다. 그녀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라고 말한 걸 보면 어지간히 성격이 안 맞았던 모양이다. 메리 루이스 벨의 이혼 소송 중 발언도 재미있는데 '그 사람은 눈을 뜨자마자 계산을 시작하고, 차를 몰면서도 계산하고, 거실에 앉아 있을 때도, 침대에서도 계산한다'라는 말이었다.

이런 배경을 알고 보면 당혹스러운 일화는 1954년 엔리코 페르미가 죽은 직후 시카고 대학교에서 있었다. 시카고 대학교는 마침 빈 교수 자리를 Caltech의 파인만으로 채우려고 엄청난 급여를 제안했다.[87] 하지만 파인만은 이렇게 쿨하게 답했다.
"그 돈이면 저는 멋진 정부를 하나 얻어서 아파트랑 비싼 물건도 살 수 있겠군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뻔합니다. 밖에선 그 여자를 생각하고 집에서는 아내와 다투겠죠. 그럼 저는 당연히 불행해질 테고, 물리 연구는 전혀 못 하게 되겠죠.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될 겁니다."

처음엔 파인만의 순애보나 성실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 일화가 전혀 다르게 읽히는 걸 볼 수 있다. 여하간 아내에겐 비밀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카고 대학의 오퍼를 거절한 일화를 당시 부인에 대한 순애보로 해석하는 것은 앞뒤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오독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파인만은 시카고 대학에서 페르미의 자리를 이어가 주기를 요청받은 것인데, 파인만이 이걸 하기 싫어서 거절하면서 그냥 재치 있는 농담을 했던 것뿐이다. 미국에서도 저 정도 좋은 오퍼(손꼽히는 명문대 정교수 자리, 엄청 높은 연봉)를 거절하려면 그 이유를 정중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속마음을 밝히기 싫었던 파인만이 평소 스타일대로 저런 개그성 발언으로 이유를 대신했던 것이다.

파인만이 페르미의 후임 자리를 거절한 이유를 직접 밝힌 적은 없지만, 그의 성향으로부터 유추할 수는 있다. 아마도 첫 번째 이유는 날씨 탓일 것이다.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에 보면 코넬 교수 시절에 추운 날씨 때문에 애를 먹다가 다른 날씨 좋은 지역의 대학 교수 자리를 찾아 옮긴 이야기가 나오는데 [88], 시카고는 코넬대 있는 북부 뉴욕주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겨울에 춥고 날씨가 안 좋기로 악명이 자자한 곳이기 때문. 두 번째 이유는 시카고에서 오퍼했던 자리가 그냥 단순히 돈 많이 주는 교수 1명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페르미는 시카고 대학 물리학과에서 단순히 유명한 교수 하나가 아니었으며 수많은 제자들을 지도하고 후배 교수들을 이끌어서 하나의 학파를 형성한 리더였다.[89] 즉, 시카고 대학은 이런 페르미의 역할을 이어받아 달라고 그 많은 보수를 제안했던 것이다. 그런데 파인만은 일생에 걸쳐 제자를 여럿 키워내거나 학파를 형성하는 데 무관심했던 학자였다.[90] 따라서 파인만은 아무리 연봉이 높아도 시카고대가 기대하는 역할을 자신은 할 수 없다 또는 하기 싫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꽤 높다(더구나 이 오퍼가 왔을 때 파인만은 연구가 잘 안되어 의기소침해 있던 상태였다). 그래서 거절했던 것이다. 파인만의 성향으로 봤을 때 어디 날씨 좋고 놀기 좋은 곳의 대학에서 "우리 대학에 와서 아무것도 안 해도 좋으니 노벨상 수상자라는 이름값만 빛내 주십시오. 그래도 연봉은 왕창 드리겠습니다"라고 제안했다면 응했을 가능성도 높다. 연봉 많이 받으면 정부를 들이고 어쩌구 하는 소리는 그냥 우스개 핑계인데 이걸 당시 아내에 대한 순애로 해석하는 것은 개그를 다큐로 해석하는 오류다.

결국 스위스에서 세 번째 아내를 맞았다. 미국에 와서 가정부 해주면 돈 좀 주겠다고 했단다. 마침 세계여행을 계획 중이던 귀네스 하워드는 솔깃한 제의에 혹했고, 그것에 낚여서 가정부 일을 하다 결혼하게 되었다. 처음 왔을 때 옷이 한 가지 종류밖에 없어서 놀랐다고 한다.

8. 철학에 대한 경멸

파인만은 물리 철학(philosophy of physics)에 매우 뛰어났다.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입자와 장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이후 양자장론의 철학적 토대가 되었다), 반물질이 시간을 역행하는 입자일 수도 있다는 설을 제시하는 등(사차원주의, 시간 여행 등에서 중요한 논제이다) 물리적 실재에 대한 조예가 깊다. 또한 여러 인터뷰에서 교육에 대한 깊은 통찰을 드러내는 등 실용주의적 통찰이 있었다. 많은 물리 철학자들은 파인만이 물리 철학에 조예가 깊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극단적인 실재론자로서 이들을 제외한 모든 철학을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폄하했다.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나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등의 저서를 보면 파인만이 철학, 특히 형이상학적 탐구에 대한 철학을 거의 경멸에 가깝게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종교에 대한 경멸도 드러내며, 비실용적 가치 탐구 전반에 대해 '그까이 거'에 가깝게 경시하고 있다. 패러다임이라도 존재하는 과학에 비하여 기본적 근간 자체를 항상 재정의하려고 드는 철학은 태생적으로 실용적 혹은 합리주의적 카테고리로 묶는 것이 '진보했다'라고 간주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이는 영미(과학) 철학계와 유럽 철학계의 성향 차이에도 기인한다. 특히 미국은 철학계도 기존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강화, 심화시키는 이른바 '깊이'에의 천착이 현저한 편이라, 일상 언어의 재정의를 통한 낯설게 하기까지 마구 쓰는 유럽, 특히 프랑스 철학계와는 양극단과도 가깝다.

핵에 대한 입장에서도 이러한 성향이 드러난다. 일본에 핵이 투하되어 도시가 궤멸하는 도중 봉고를 두들겼다는 일화나, 핵무기에 대해 되돌아보았지만 금방 머릿속에서 지우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는 양심의 정리 이야기 등에서 특정 가치 여부를 결정한 후(노력과 지성을 쏟아부은 연구의 결과물이 성공적으로 작동했다, 앞으로는 핵이 사용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 이상 재고하지 않고, 자꾸만 다시 돌이키는 동료들을 궁상 떤다고 표현한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재적 지식을 생산하지 않는 모든 것을 배척했다.

인문학계에서 소칼[91]의 경우 충분한 근거와 결정적 열쇠를 쥐고, 비판 대상을 특정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행태로 삼음으로써 인문학자들 충분한 공감대를 불러일으켰지만 파인만의 경우에는 그저 '철학 싫어하는 한 개인' 이상으로 고려되지 않았다.

9. 노벨상에 대한 일화

1965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는데, 사실 그는 노벨상을 받는 것을 매우 귀찮아했다. 유명해지는 것과 권위를 얻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노벨상을 안 받으려 했지만, 타임지의 기자에게 오프 더 레코드로 '안 받고 싶은데 어쩌면 좋겠냐'라고 상담하자, 그 기자가 "노벨상을 안 받으면 그걸로 더욱 유명해질 겁니다."라고 충고해 줘서 마지못해 받았다고 한다.[92] 게다가 스위스 대사관에서 노벨상 수상을 알리기 위해 파인만에게 전화해서 "축하합니다! 이번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되셨습니다."라고 말하다가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파인만은 "지금이 몇 신지 아시오!"[93]라며 끊었다. 그 뒤로도 유명세 때문에 갖은 홍역을 치러서 꽤나 피곤했던 듯하다. 그 외에도 노벨상 시상식에 가서 자신에게 무엇으로 상을 탔는지 물어보는 스웨덴 공주를 골탕 먹이기도 했다(...).

노벨상 수상 후에는 학생들을 위한 강연에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죄다 몰려오는 게 너무 싫어 일부러 전혀 유명하지 않은 교수 이름으로 강연회 등록한 후 본인이 나타나서 강의를 하는 방식을 취했다. 물론 나중에 들통나고, 학교에서는 '파인만 선생님이 오시는 거면 더 큰 데를 빌리고 했어야지!' 하며 담당 학생들을 쪼고, 파인만은 결국 학생들을 변호해야 하고... 뭐 이런 후폭풍을 겪은 듯. 후에 BBC 인터뷰에서 자신은 이미 상을 받았으며 그 상은 바로 발견하는 즐거움이라고 이야기했다.

10. 여담

11. 참고 자료

12. 관련 문서


[1] /ˈfaɪnmən/[2] 기념 계정.[3] 학술 논문: Forces in Molecules = 분자들 내 힘들(1939).[4] 박사 학위 논문: The principle of least action in quantum mechanics = 양자 역학의 최소 작용의 원리(1942).[5] 존 바딘의 장남[6] 정확히 말하면 박사 학위 논문의 심사 위원이었다. 울프럼의 박사 학위 논문 제1 지도 교수는 리처드 필드다.[7] 여동생으로 1927~2020. 7. 21. 리처드 파인만이 준 천문학 책 덕분에 천문학에 관심이 생겨 천문학자가 되었다.[8] 이름과 출생 연도 및 사망 연도는 알려진 바 없고 조앤 파인만이 태어나기 전 수막염으로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9] 리처드와는 다르게 기독교 신자이다[10] 1941년부터 앓아오던 임파선 결핵이 호전되다가 갑자기 악화되어 1945년에 사망했다[11] 1934년생. 슬하 2남매 미셸 파인만, 칼 파인만을 두었다. 1989년 사망, 남편과 합장됨.[12] 네트워킹 분야 컴퓨터 과학자. 석사 학위 논문[13] #. 13세 이후로 종교를 거부하기 시작.[14] R.P. Feynman, Simulating Physics with Computers, International Journal of Theoretical Physics, VoL21, Nos.6/7, 1982.[15] 천재들 또한 자신이 특출난 분야를 제외하면 평범하고 단점도 많은, 천재가 아닌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대중 매체에서 묘사되는 다재다능하고 매력적인 초인의 모습을 기대했다가는 실제 천재들을 목도하고 나서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16] 그의 유대인 인종과 관련되어서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그가 처음 교수에 임용되었을 때 한 교수가 자신들의 모임에 들어올 것을 제안했다고 하는데 그 모임이 무엇인고 하고 들어보니 '나치가 생각보다 나쁜 놈들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사회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잘못되었다'라고 주장하는 모임이었다. 이에 파인만은 '오 근데 그거 아쇼? 나 유대인임!' 하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뭐 그가 유대인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로스앨러모스에서 나치를 척결하기 위해 열심히 연구했던 파인만이라 당연히 돌려보냈을 것이겠지만.[17] 한번은 앨리베이터를 탔는데 자신이 유대인인 것을 안 사람이 대신 버튼을 눌러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것이 왜인고 하고 알아보니 유대인들이 전기를 쓰면 안 되기 때문에 버튼을 못 눌러서 그렇다고 하자 파인만은 토라를 공부하는 유대인들을 만나 자신의 논리로 골탕을 먹여주고 나온다.[18] 1918년 출생했으므로 1920 ~ 1930년대.[19] 이것도 깊은 사정이 있는데 자신의 이웃이 라디오를 고쳐달라고 부탁했는데 분해도 안 하고 라디오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 자신을 보고 계속 쫑알거렸다고 한다. 한데 파인만이 무엇이 문제인가 생각한 이후 순식간에 라디오를 고쳐내자 그 이웃이 동네에 '파인만은 라디오를 생각만으로 고친다니까요!'라고 떠들고 다니면서 '생각만으로 라디오를 고치는 소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20] 한국의 수학 교과 과정으론 대수는 중학교 수학 ~ 고교 수 1, 2. 미적분 및 급수는 미적 1, 2. 해석 기하학은 기하와 벡터 정도 되므로, 15세 때까지 고교 수학을 모두 끝마쳤다 보면 된다. 일종의 선행 학습이라고 보면 될 듯.[21] 하지만 곧 자신의 기호를 사용해 설명하면 남들이 이해하지 못한단 걸 깨닫고, 어쩔 수 없이 일반적인 수학 기호를 사용했다.[22]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베르누이 방정식이다. 파인만은 독학으로 일종의 베르누이 방정식을 이해하고 있었고 이를 친구들에게 장대하게 설명했는데 아무도 못 알아들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것을 베르누이 방정식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23] Feline neuroanatomy(고양잇과 신경 해부학)에 대해 물었어야 한다. 그 정도로 세분화된 책이 없다면 veterinary anatomy(수의 해부학)에 대해 물었어야 하고.[24] 책 정보를 왜 굳이 사서한테 물어보는지 의문이 드는 사람이 있을 텐데, 저 당시에는 도서 검색용 컴퓨터는커녕 애니악조차 나오기 한참 전이다.[25] 물리학은 지나치게 추상적인 수학과 지나치게 실용적인 전기 공학의 사이에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26] 이후, 이 논문의 의의인 전자기 해밀토니언의 섭동은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헬만-파인만 정리로 정의된다.[27] 원래는 대학원도 MIT에서 다니려 했으나 슬레이터 교수의 조언으로 타 대학원을 가기로 했고, 그래서 정한 곳이 프린스턴이었다고 한다.[28] '각종 서류를 읽고 도장 찍는 게 귀찮다.'라는 말이다. 사인회가 아니다. 그리고 열세 번째 사인은 수표에 사인해야 한다. 결과적으로는 '진짜로 내가 강연을 했음.'이라는 서류에 13번째로 사인해야 해서 파인만은 '사인 안 하고 돈도 안 받겠음!'이라고 선언해 버렸다. 알다시피 정부든 학교든 이미 책정된 예산을 지급하지 않으면 그것대로 문제라... '교수님 돈 안 드리면 안 된답니다.' → '그럼 그냥 주시면 되죠.' → '서명하셔야 하는데요.' → '안 합니다!'라는 실랑이가 오갔다고. 결국 어찌저찌해서 열세 번째 서명은 현금 찾을 때 수표에 했다고 한다.[29] 그런데 사실은 뒷면을 보여도 상관없었다고 한다. 그때 바뀌었다고 한다.[30] 자서전 "남이야 뭐라 하건!"을 읽어 보면 관련 에피소드를 읽을 수 있다. 편지를 죄다 암호로 만들어버려서 검열관들이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못 알아먹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 장난을 칠 땐 자기 아내와 합작했다고 한다. 어쩔 땐 아내가 더 적극적이었던 정황도 있다. 이 아내가 그의 첫 아내인 알린이다.[31] 다만, 자서전에서는 자신의 일화에 대한 생각을 알려줘서 겸손함을 느낄 수 있지만, 그가 암산 대결을 해서 이길 때, 사실은 그런 숫자 미리 알고 있어서(알고 있더라도 암산을 더 유추해야 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복잡한 암산이긴 했다.) 이겼다고 자서전에서는 이야기하는데, 대결한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겸손함을 못 느꼈을 수도 있다.[32] 학교를 가지 않아서 대수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어 이 부분도 운이 좋았다고 한다.[33] 손이 떨리는 게 선명하게 기억난다고 할 정도.[34] 아버지에게 모든 걸 배웠다고 말했으니 좀 이상한 표현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런 환경과 교육까지도 운의 영역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35] Richard P. Feynman,《발견하는 즐거움》, 승영조 옮김, 승산, 2001[36] 디랙과 나눴던 대화가 있는데 한 잡지에서 디랙을 취재하고 싶었는데 파인만과 디랙을 헷갈려 파인만에게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들은 디랙은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은 매춘'이라며 경기를 일으켰고, 파인만은 나중에 자신도 그의 말이 맞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 적 있다.[37] 4일간 일반인 대상으로 진행했던 양자 전기 역학 강의에서 이해 못 하는 것을 배경으로 깔고 시작한다. 그저 이런 것이 있다더라 정도만 알아가면 성공한 것이라고 했다.[38] 사실 물이 든 컵은 물의 굴절률 때문에 자세히 보면 빈 컵과 어렵지 않게 구별할 수 있다. 하지만 평소 그딴 짓을 당해본 적이 없는 웨이트리스가 그런 것에 신경을 썼을 리가 없다.[39] 공교롭게도 파인만의 문 소동 전에 다른 사람들이 문을 훔쳐 간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어서, 파인만의 문 도둑질도 이들이 한 짓이라고 오해한 부원들에 의해 이들은 심한 꼴을 당했지만, 기적적으로 파인만이 처리한 문은 자신들이 한 것이 아니라는 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40] 그것도 파인만 자신이 직접 알려준 거다. 참고로 문 숨긴 곳은 그날 밤에 쪽지를 남겼고, 그다음 날 보니 달아놨더라고.[41] 이때 번호는 자연로그의 밑 [math(e)], 즉 27-18-28이었다. 비서의 책상에 314159라는 숫자(원주율)가 적혀 있는 것을 보았는데 왜 비서가 이걸 알아야 하는지 의심이 들었고, 자물쇠 번호가 아닐까 시도했다. 그리고 실패하자 다른 과학적 숫자를 시도한 것.[42] 파인만이 찾던 서류는 두 번째 서랍에 있었다.[43]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 중이었던 만큼 이 금고들에 들어있던 정보는 원자 폭탄 관련 정보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44] 하나 그 보안 개선이라는 게 무작위 번호를 사용하거나 하는 정석적인 개선이 아니라, 파인만이 금고가 있는 방에 왔다 갔으면 번호를 바꾸라는 미봉책에 가까웠다.[45] 메인 게이트 경비원한테 인사까지 했다.[46] 검열 대상 문구에 검은색 펜으로 글자를 삭제했다고 하는데, 구입해야 하는 물품 품목을 아내에게 편지로 보냈더니 검열원들은 이것이 연구 기밀과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하여 지워버렸다. 아내가 이를 가지고 '검열당한 것 같아요' 하고 편지를 보내자 검열 단어를 검은 펜으로 지웠다고 한다.[47] 원자력 잠수함은 이미 다른 사람이 특허를 신청해서 할 수 없었다.[48] 당시의 1달러는 현재 가치로 약 9~10달러 정도 되는 금액이었다.[49]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에 수록된 내용에 따르면 파인만은 시비를 건 남자에게 강하게 대응하며 허세를 부렸으나 속으론 진짜로 싸우게 될까 봐 겁이 났다고 한다. 그러다가 취한 남자가 먼저 파인만을 한 대 때렸는데, 그에게 맞은 순간 자기 팔이 자동적으로 움직여 그 남자를 갈기고 있었다고 한다. 그 남자에게 맞은 것보다 자기 몸의 '방어 메커니즘'이 저절로 작동한 것에 더 놀랐다고.[50] 자세한 내용은 동영상의 뒷부분 참조[51] 책을 보면 키워드가 될 만한 기념일, 숫자를 조합하는 것만으로도 금고를 쉽게 열 수 있었다고 한다. 추가적인 정보는 일명 '사회 공학'이라고 불리는 요즘 해커들이 자주 쓰는 간단한 말발로 알아냈다고 하니(이런 피싱 사건은 요즘에도 가끔 벌어진다. 우리나라에서도 자신이 청와대 고위 관료라고 주장하며 은행에 정부 계좌 비밀번호를 초기화할 것을 지시해서 성공한 범죄 사례가 있다.) 철통 보안 되는 군사 기지 안에 있다고 안이하게 생각하던 금고 주인이 얼마나 놀랐을지는 상상에 맡긴다.[52] 이상 모두 Richard P. Feynman, '발견하는 즐거움', 승영조 옮김, 승산, 2001[53] 가명으로 친구가 '다 했다'라는 뜻의 프랑스어인 오 페(Au Fait)를 추천했는데 그걸 변형해 오페이(Ofey)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파인만은 나중에 알았는데 사실 이건 흑인들이 백인들을 비하해 흰둥이라고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걸 알고도 '어쨌든 나도 흰둥이니까 상관없다'라고 했다.[54] 원문에 의하면 브라질 관계자가 '교육 체계에 문제가 있는 수준이 아니라 암이 자리 잡은 정도'임을 깨달았다고 한다.[55] 한 명은 독일 출신이라고 했다.[56] 정황상 제2차 세계 대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57] 사족으로 브라질의 노벨상 수상자는 1960년 생리의학상의 피터 메더워(영국 복수 국적) 단 한 명뿐이다.[58] 약 57도.[59] Kac, M., Transactions of the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 65, no. 1 (1949): 1–13.[60] Ito, K. Mem. Amer. Math. Soc., 1951(4):51, 1951.[61] 실제로 강입자들은 쿼크로만 이루어졌다기보단 쿼크들과 글루온들의 덩어리로 보는 편이 더 맞다.[62] 다만 파인만이 최초로 양자 컴퓨터를 고안한 건 아니다. 파인만이 이 문제를 다루기 몇 년 전에 찰스 베넷에 의하여 양자 컴퓨터의 아이디어가 등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베넷의 동기도 굉장히 골 때리는데, 컴퓨터의 발열 문제를 고민하다가 사실 발열은 컴퓨터의 연산이 비가역적인 탓에 생기는 것이고, 따라서 연산을 가역적인 방식으로 바꿔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게 그 동기다. 그리고 연산을 가역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양자 역학적인 방식으로 연산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으로부터 양자 컴퓨터의 아이디어가 시작된 것이다.[63] 이는 그의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Richard P. Feynman,'발견하는 즐거움',승영조 옮김,승산,2001 참고[64] 파인만은 프로젝트에 참가한 학자들 중 막내뻘이었다. 어지간한 주요 멤버들과 한 세대가 차이 났을 정도.[65] Richard P. Feynman, '발견하는 즐거움', 승영조 옮김, 승산, 2001[66] 오웨 보어 역시 뛰어난 물리학자였으며 1975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67] 해당 글이 서술되어 있는 부분에서 보어가 아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표현하는데, 자신에게 무언가 말은 하는 거 같은데 파이프 담배를 물고 웅얼웅얼 중얼중얼거리느라 그러한 단어들은 아들인 오웨 보어가 해석해 주어야 했다며 대차게 깐다.[68] 물론 장거리에서 참관했으며 차량 유리를 통해 자외선을 막았기에 그런 거지, 두 조건 중 하나라도 만족하지 못하면 당연히 좋은 꼴은 보지 못한다.[69] 당시 조사 위원 중 닐 암스트롱도 있었다.[70] 그의 자서전을 보면 정말이지 사정없이 들러리용 조사 위원들을 까댄다.[71] 권위를 싫어하던 파인만은 위원회 초창기 다른 조사 위원들이 리무진을 제공받아 출퇴근하는 동안, '난 투스타니까 지하철이나 타고 다니겠음. 지하철역은 어딘가요?' 하던 쿠티나를 좋게 여겼다고.[72] 그 익명의 제보자가 NASA 최초의 여성 우주 비행사 샐리 라이드 박사였다는 건 샐리 라이드 박사가 2012년 7월 세상을 떠난 뒤에야 쿠티나 장군이 이 사실을 공개했다. 생전에 공개되었다면 험한 꼴을 당했을 것이라는 게 불 보듯 뻔했으니.... 아무튼 이 시절의 경력 덕에 샐리 라이드 박사는 21세기 STS-107 컬럼비아호 참사에서도 진상 조사단에 참여하기도 했다.[73] 파인만이 스타 과학자이긴 했지만, 미국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영웅'으로 인류의 마지막 순간까지 영원히 기록될 암스트롱의 인지도에는 못 미쳤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적절하다. 당장 어린이용 과학 만화 펼쳐보면 둘 중 어느 이름이 많이 나오는가?[74] 자서전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은 자기가 봉고를 치며 구술한 내용을 같이 봉고 치던 친구의 아들 랄프 레이튼이 책으로 엮은 것이다.[75] 중간중간 물리학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지만, 애써 이해하지 않아도 파인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76] 파인만이 녹음기를 착용한 상태로 수업을 하고, 이 녹음된 내용을 듣고 옮겨 적어서 만든 책이다. 그래서인지 구어체로 적혀져 있는 특징이 있다.[77] 어디까지나 Caltech 학부생 기준이다.[78] 그런데 1권부터 상대성 이론이 튀어나오고, 연습용 문제는 제책 방식상 별도로 구해야 한다. 때문에 강의 당시 학부생보다는 대학원생이나 교수들이 많이 찾는 책이 되었고, 파인만은 서문에서도 반쯤 실패로 보고 있다.[79] 현재 수정된 숫자로는 1.35 * 10^10년(135억 년)쯤 되겠다.[80] 실제로 최근 연구에 따르면 중력 상수도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81] 부제 : 삽화로 보는 리처드 파인만(illustrated Richard Feynman)[82] 이때 의사들의 바보짓이 <남이야 뭐라 하건!>에 잘 나와 있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본래 호흡기의 희귀병에 걸린 줄 알고 두 사람 모두 크게 낙심했는데 자세히 알고 보니 희귀병은 개뿔, 단순 폐결핵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때문에 모든 것을 직접 확인하자는 결심을 다지게 했다고 한다.[83] 참고로 파인만이 아내의 사망을 확인하러 가기 위해 평상시 알고 지내던 로스 앨러모스의 어느 직원의 차를 빌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직원의 정체가 소련스파이클라우스 푹스였다고 한다.[84] 사실 안 알려져서 그렇지 너드처럼 보이는 학자들 중 카사노바가 꽤 있는 편이다. 일단 '학자 = 너드'는 아닌 데다가 다들 머리도 좋고 지적인 이미지에 말발을 갖추게 되면 대표적으로 이 분야의 전설인 에르빈 슈뢰딩거가 있다. 해당 항목 참고. 리처드 도킨스칼 세이건의 여성 편력 역시 유명하다.[85] 물론 파인만이 거짓말을 했다기보다 친구들에게 허풍이나 과장을 좀 했을 수도.[86] 단, 토플리스 클럽 출입은 세 번째 아내에게 허락받은 일이었고 아내는 오히려 너드가 사람같이 살려는구나라는 생각에서 좋아했다고 하지만, 물론 본인 주장이다.[87] 역시 로스 앨러모스에서 알게 된 여성 과학자 리오나 우즈(Leona Woods, 링크에서는 리오나 마셜로 등장#)의 제안이다.[88] 그게 바로 평생 봉직했던 Caltech이다. 캘텍은 로스 앤젤레스 근처에 있어서 다른 건 몰라도 날씨 하나만큼은 끝내주게 좋은 곳이다.[89] 시카고대 경제학과에서 프리드먼 교수가 시카고학파를 이끌었던 것이나 물리 분야에서 오펜하이머가 버클리 대학을 기반으로 제자를 많이 키워 학파를 형성했던 것과 마찬가지다.[90] 아인슈타인이 이런 스타일이었다. 이론 물리학자들 가운데 이런 스타일이 꽤 있다.[91]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 사건 참조.[92] 아내가 충고하는 판본도 있다.[93] 시차 때문에 파인만이 전화를 받았던 시간이 새벽이었기 때문이다.[94]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아직 양자 역학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과감한 이론도 괜찮다는 조로 답했다. 후에 파인만은 아인슈타인의 이 말이 자신의 평생에 가장 멋진 No였다고 회상했다.[95] 러시아어에서 쓰이는 키릴 문자 ы는 모음이지만 이를 전사한 y는 언어학적 관점에서 자음, 모음 둘 다 되는 글자이다. 그러나 기초 교육에서는 자음이라고 가르치는 경우가 많아 그냥 자음으로 알고 사는 사람이 많다.[96] 다만 아무리 파인만이라도 아예 걱정이 안 되지는 않았던 건지 폭발 직전에는 표정이 굳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였으며, 자동차 창문이 깨지면 어쩔 거냐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