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진저 로저스 Ginger Rogers | |
본명 | 버지니어 캐서린 먹매스 Virginia Katherine McMath |
출생 | 1911년 7월 16일 |
미국 미주리주 인더펜던스 | |
사망 | 1995년 4월 25일 (향년 83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랜초 머라지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64cm |
직업 | 배우, 가수, 무용가 |
활동 기간 | 1925년 ~ 1995년 |
종교 | 크리스천 사이언스 |
배우자 | 잭 페퍼(1929년~1931년 이혼) 루 에어즈(1934년~1940년 이혼) 잭 브리그즈(1943년~1949년 이혼) 자크 베르주라크(1953년~1957년 이혼) 윌리엄 마셜(1961년~1969년 이혼) 자녀 3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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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배우, 가수, 무용가.
2. 위상
프레드 어스테어와의 콤비 작업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대중문화 아이콘이다. 대공황의 여파로 고통 받던 1930년대 미국 대중 전체를 위로해주었다고들 한다. 1930년대에 명실상부한 RKO 라디오 픽쳐스의 간판 배우였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만큼 연기력으로도 인정 받았다.3. 상세
15살 때 찰스턴의 춤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있다.활동명 진저는 어린 사촌이 버지니어라는 본래 이름을 발음하는 걸 어려워해 이를 대신해 부르던 애칭에서 따왔다.
주말과 휴일을 구분하지 않고 매일같이 자정을 넘겨 일했다. 라저스는 본인이 어려서부터 오래 훈련해온 배우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독실한 크리스천 사이언스 신자였으며, 종교적 신념에 위배되는 역할들은 촬영을 거부했다.
1930년 조지 거쉬윈이 작곡하고 아이러 거쉬윈이 작사한 뮤지컬 "Girl Crazy"의 초연에서 주연을 하며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프레드 어스테어와 처음 만난 건 바로 이 뮤지컬에 출연할 때의 일로, 무용감독 앨릭잰더 레프트위치[1]가 태업을 하자 제작자 앨릭스 애런즈[2]와 빈튼 프리들리[3]가 어스테어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 계기였다. 춤동작을 다듬는 과정에서 어스테어가 라저스의 파트너 역을 해서 역사적인 첫 듀엣을 추기도 했다. 그러나 라저스는 이땐 어스테어를 인상 깊게 느끼지 못해 곧 잊어버렸다.
1932년 영화계 데뷔 3년만에 왐파스 베이비 스타즈[4]에 뽑혔다.
1933년 <Flying down to Rio>에 조연으로 나오면서 프레드 어스테어와의 첫 공동 출연작이 생겼다. 그리고 1934년 첫 공동 주연작 <게이 디보시>가 나왔다.
1942년에 출연료를 가장 많이 받는 여배우로 등극했다.
어스테어와 사귄다는 소문만큼이나 실은 서로 죽이고 싶어할 만큼 싫어함에도 돈을 벌어야 하니 할 수 없이 어울린다는 소문도 많았는데, 이 역시 사실이 아니었다. 라저스는 이 루머를 가쉽을 통한 홍보효과를 노린 제작사에서 일부러 퍼트린 것으로 추측했다.
다만 당대에 춤실력에 있어 라저스보다 어스테어를 고평가하는 경향성이 있어[5] 라저스가 이를 불쾌하게 여겨 때로는 어스테어 본인과 서먹해지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 이는 어떨 수 없던 일이었다. 어스테어가 배우이기 이전에 무용수였다면[6] 라저스는 정체성이 배우였고 무용은 한 번도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없었다. 둘의 첫 협업작 전에 라저스는 이미 스무 편 이상의 장편 영화를 찍은 상태였지만, 어스테어에겐 경력상 겨우 두 번째 영화였다. 배우인 라저스가 업계의 정점을 찍었던 무용수 어스테어에게 뒤지지 않고 합을 맞출 수 있었다는 것 자체를 높이 사야한다는 평도 있다.
어스테어는 라저스와의 협업이 끝난 뒤 기술적으로는 라저스보다 훨씬 뛰어난 상대역들을 만났지만, 라저스와 일으켰던 마법같은 효과는 다시는 벌어지지 않았다. 평론가들은 춤을 추는 가운데 감정표현 처리까지 해낼 수 있었던 라저스의 연기력이 어스테어의 부족한 연기력을 잘 보완해줬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두 사람은 평생 서로에게 존경을 표했다.
4. 주요 출연 작품
<rowcolor=#ffffff> 연도 | 작품 | 배역 |
1931 | 연인들의 명예(Honor Among Lovers) | 도리스 브라운 |
The Tip-Off | 베이비 페이스 | |
Suicide Fleet | 샐리 | |
1932 | Hat Check Girl | 제시 킹 |
1933 | Broadway Bad | 플립 데일리 |
브로드웨이 42번가 | 앤 "애니타임 애니" 로우얼 | |
Gold Diggers of 1933 | ||
Professional Sweetheart | 글로리 이든 | |
Chance at Heaven | 마저리 "마지" 해리스 | |
Sitting Pretty | 도러시 | |
1934 | Finishing School | 시실리어 "포니" 페러스" |
1935 | Romance in Manhattan | 실비어 데니스 |
1938 | Vivacious Lady | 프랜시 모건 |
1939 | Bachelor Mother | 팔리 패리쉬 |
Fifth Avenue Girl | 메어리 그레이 | |
1940 | 향락의 길(Primrose Path) | 엘리 메이 애덤스 |
키티 포일(Kitty Foyle) | 키티 포일 | |
1941 | Tom, Dick and Harry | 제이니 |
1942 | Roxie Hart | 락샌 "락시" 하트 |
운명의 향연(Tales of Manhattan) | 다이앤 | |
메이저와 마이너(The Major and the Minor) | 수전 캐슬린 애플게이트 | |
1944 | Lady in the Dark | 라이저 엘리엇 |
다시 만날 때까지(I'll Be Seeing You) | 메어리 마셜 | |
1945 | 위크-엔드 앳 더 발도르프(Week-End at the Waldorf) | 아이린 말번 |
1946 | Heartbeat | 아를레트 라프롱 |
Magnificent Doll | ||
1947 | It Had to Be You | 빅토리어 스태퍼드 |
1950 | Perfect Strangers | 터리서 "테리" 스캇 |
스톰 워닝(Storm Warning) | 마셔 미철 | |
1952 | We're Not Married! | 러모너 그래드윈 |
Dreamboat | 글로리어 말로우 | |
몽키 비즈니스(Monkey Business) | 에드위너 풀튼 | |
1954 | Black Widow | 칼라터 "라티" 매런 |
1955 | 최후의 증인(Tight Spot) | |
1956 | Teenage Rebel | 낸시 팰런 |
1964 | 결혼특급(Quick, Let's Get Married) | 마담 리날디 |
1965 | 할로우(Harlow) | 마마 진 벨로 |
4.1. 프레드 어스테어와의 콤비작
프레드 어스테어와의 콤비가 워낙 유명해 평생 함께 한 것 같은 착각을 주지만 이들은 6년 동안 9편만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몇 년 뒤에 한 편을 더 만든 게 전부다.어스테어와 라저스는 같이 출연한 작품 전체를 다 합쳐 딱 한 번 키스했다. 라저스는 그 이유를 대본 내 애정 장면까지 간섭하려 들 정도로 자신을 경계하던 어스테어의 아내 탓으로 추측했다. 평론가들은 대신 둘의 춤 장면 다수가 성관계에 대한 은유로 기능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1950-60년대에 TV에서 이 영화들을 틀어주면서 다음 세대들에게도 이들 콤비의 명성은 이어졌고 1976년 RKO에서 이중 8편을 재공개하면서 또 한 번 붐이 일었으며, VHS, DVD 등 신종 매체들이 등장하면서 이들의 전설은 계속 전해지고 있다.
<rowcolor=#ffffff> 연도 | 작품 | 배역 |
1993 | Flying down to Rio | 허니 헤일 |
1934 | 게이 디보시(The Gay Divorcee) | 미미 글라섭 |
1935 | 로베르타(Roberta) | |
탑 햇(Top Hat) | ||
1936 | 폴로우 더 플릿(Follow the Fleet) | |
스윙 타임(Swing Time) | ||
1937 | 쉘 위 댄스 | |
1938 | Carefree | |
1939 | The Story of Vernon and Irene Castle | 아이린 풋 캐슬 |
1949 | The Barkleys of Broadway |
5. 사생활
다섯 번 결혼하고 다섯 번 이혼했다.첫 번째 결혼은 1929년 17살 때 무용수 잭 페퍼(Jack Pepper)와 했다. 결혼생활은 몇 달만에 무너졌다. 라저스는 페퍼와의 이혼 전부터 첫 번째 아내와 별거 중이던 감독 머빈 러로이[7]와 만나기 시작했지만 헤어지고 평생 친구로 남았다. 1931년 페퍼와의 이혼이 성립됐는데, 우호적으로 마무리해 역시 친구로 지내게 됐다.
두 번째 결혼은 1934년 배우 루 에어즈[8]와 했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1930)로 유명한 에어즈는 특히 의사 킬데어(Dr. Kildare) 연작을 통해 193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주연급 배우였다. 두 사람은 자주 부부싸움을 했으며 라저스는 외박을 일삼다가 급기야 집에 아예 들어가지 않게 되었고 이혼 신청조차 하기 전부터 여러 남성들을 만났다.
그중엔 <스윙 타임>(1936)을 찍으면서 사랑에 빠지게 된 유부남 감독 조지 스티븐스도 있었다. 그러나 라저스는 <스윙 타임> 촬영을 마친 직후인 1936년 여름부터 하워드 휴즈와도 동시에 만나기 시작했는데, 이때 휴즈는 캐서린 헵번과 사귀고 있었으며 도중 베티 데이비스까지 만났다. 1940년, 휴즈는 데이비스와는 헤어졌으나 헵번과는 그대로 만나고 있었으며 헵번과 동거하던 저택들도 그대로 유지 중이었음에도 스티븐스와 헤어진 라저스에게 청혼한 뒤 거물 변호사 닐 S. 머카시[9]까지 빌려주며 라저스와 에어즈의 이혼을 추진했다. 둘은 그해 이혼했다.
휴즈는 약혼의 증표로 5캐럿 짜리 에메랄드 반지를 주었다. 라저스와 살 집을 짓기 위해 커웽거 피크[10]에 138 에이커, 즉 약 170 평의 땅도 사놓았었다. 그러나 휴즈의 연애들이 흔히 그러했듯이 파국으로 끝났다. 휴즈가 다른 여배우들과 바람피는 걸 알고 마음 정리를 시작한 라저스는 치과 진료에 함께 가달라는 휴즈의 부탁을 거절했다. 휴즈는 홧김에 운전 도중 다른 차를 고의로 박아버리곤 이를 라저스의 탓으로 돌렸다. 병문안을 온 라저스는 휴즈를 차면서 약혼 반지를 포함해 그간 받았던 보석들을 전부 돌려주었다. 바로 직후 병원에 찾아왔던 측근 노우어 디트릭[11]에 따르면 휴즈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통곡했다고 한다.[12]
세 번째 결혼은 1943년 단역 배우였던 잭 브리그즈[13]와 했다. 1949년에 이혼했다. 브리그즈는 1952년 TV 드라마에 조연으로 나온 것을 마지막으로 배우 활동을 그만두었다.
네 번째 결혼은 1953년 16살 연하의 프랑스인 자크 베르주라크[14]와 했다. 프랑스에 휴가를 갔다가 우연히 만난 무일푼의 법대생이었다. 라저스는 결혼 직후 베르주라크를 MGM의 각종 영화 오디션에 꽂아넣었고, 함께 <Twist of Fate>(1954)에 출연하기도 했다. 라저스가 강력히 밀어주기도 했지만, 낭만적인 프랑스인 역에 대한 수요가 꽤 있던 시기라 대형 영화사들의 작품에 조연으로 꾸준히 나올 수 있었다. 1957년 이혼했다. 베르주라크는 1959년 유명 여배우 도러시 멀로운과 재혼했다가 1964년 다시 이혼했고, 1966년을 마지막으로 연예계를 떠났다. 이후 사업가로 변신해 대형 미국 화장품 회사인 레블론(Revlon)의 파리 지사장이 되었고, 몇 년 뒤 남동생은 레블론의 CEO가 되었다.
다섯 번째 결혼은 1961년 윌리엄 마셜[15]과 했다. 마셜은 1940년대에 배우로 활동했지만 라저스와 결혼할 시점엔 배우 활동이 거의 끊겨있었다. 1961년엔 SF 영화 <The Phantom Planet>을 연출했고, 1964년엔 라저스, 레이 멀랜드, 엘리엇 굴드 등을 기용해 <The Confession>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둘 다 크게 실패했다. 이로 인한 경제 문제가 원인이 되어 1969년 이혼했다.
영화 속 커플로 유명했던 프레드 어스테어하고는 정작 업무상 친구에 가까웠다고 한다. 1930년에 딱 한 번 진한 키스를 해본게 전부라고.
6. 여담
- 전기영화 <The Story of Vernon and Irene Castle>(1939)에서 아이린 캐슬을 연기했는데, 전에 캐슬이 유행시켜서 캐슬 밥("Castle Bob")이란 이름이 붙은 단발을 재현한 장면이 있다. 그러나 라저스는 고집을 부려 실제 그대로 모방하길 거부했다. 라저스는 의상 재현에서도 비슷한 태도를 보여 아이린 캐슬과 마찰이 있었다.
- 1926년에 공연했던 장소인 오리건의 크레이티어리언 시어터(Craterian Theater)가 훗날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을 때 대대적인 모금으로 이를 되살려준 적이 있다. 메드퍼드시는 이를 기려 한동안 극장을 크레이티어리언 진저 라저스 시어터(Craterian Ginger Rogers Theater)로 개명했었다.
- 어머니 릴러 E. 라저스[16]는 파테 등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때 해병대에 들어가 영상 제작을 통해 여론전에 기여했다. 딸이 데뷔한 뒤 매니저 역할을 하면서 딸이 출연한 영화들의 제작 관리를 겸했다.
30년대 말에서 40년대 초까지 RKO 부회장 찰스 커너[17]의 조수로 일하며 신인들을 관리하기도 했다. 한때 RKO 촬영장에서 연기교실을 운영했는데, 제자 중에 루실 볼과 베티 그레이블이 있다. 루실 볼은 해당 연기교실을 통해 여배우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1944년 세워진 '미국의 이상을 보호하기 위한 영화동맹'(MPAPAI; MPA)[18]의 창립멤버로, 1947년 할리우드 내 공산주의를 색출한다는 목적으로 마녀사냥을 자행한 '하원반미(非美)활동조사위원회'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소위 '우호적인 증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외 MPAPAI의 회원으로는 클래런스 브라운, 게리 쿠퍼, 세설 B. 드밀, 월트 디즈니, 아이린 던, 빅터 플레밍, 존 포드, 클라크 게이블, 헤더 하퍼, 리오 맥캐리, 아인 랜드, 로널드 레이건, 바버라 스탠윅, 로버트 테일러, 핼 B. 월리스, 킹 비더, 존 웨인, 그리고 딸 진저 라저스 등이 있었다.
- 이종사촌 필리스 프레이저[19]도 배우였다.
- GINGER: MY Story(진저: 나의 이야기)라는 자서전이 있다.
- 2018년 한 부부가 어머니 릴러 E. 라저스가 진저 라저스를 출산하고 길렀던 집을 구매해 두 사람을 기리는 박물관으로 조성했으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의 여파로 2020년 문을 닫았다.
[1] Alexander Leftwich.[2] Alex Aarons[3] Vinton Freedley.[4] WAMPAS Baby Stars. 영화 광고주 서부 연합(Western Association of Motion Picture Advertisers)이 1922년부터 34년까지 매해 13명씩 뽑던 여배우 유망주 명단.[5] 심지어 "라저스는 어스테어가 조종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쓴 평론가도 있었다.[6] 실제로 배우로서 어스테어는 무난했던 편이다. 훗날 <타워링>(1977)로 연기상도 받았을 정도로 발연기는 아니지만 다른 고전시대 스타들과 견주면 비교 우위에 있다고 말하기 힘든 편.[7] Mervyn LeRoy. <작은 아씨들>(1949), <쿠오 바디스>(1951) 등을 연출했다.[8] Lew Ayres. 1908 - 1996.[9] Neil Steere McCarthy. 1888 - 1972. 주요 고객으로 루이 B. 메이어, 세설 B. 드밀, 조운 크로퍼드, 라나 터너, 에바 가드너, 조운 베닛 등이 있었다.[10] Cahuenga Peak.[11] Noah Dietrich. 1889 - 1982.[12] Seduction: Sex, Lies, and Stardom in Howard Hughes's Hollywood.[13] Jack Briggs. 1920 - 1998.[14] Jacques Bergerac. 1927 - 2014.[15] William Marshall. 1917 - 1994.[16] Lela E. Rogers. 1891 - 1977.[17] Charles Koerner.[18] Motion Picture Alliance for the Preservation of American Ideals.[19] Phyllis Fraser. 1916 - 2006. 이모(Verda Virginia Owens)의 딸.[20] Jean Hayworth. 1905 -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