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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럽
1.1. 프리미어 리그
- 노팅엄 포레스트 FC: 1970년대 후반. 괴짜 감독 브라이언 클러프의 지도하에 전성기 시절의 포스가 리즈시절 못지않은 구단으로, 항목을 보면 노팅엄 시절이란 말이 나올법하다. 이후 2부리그에 강등과 동시에 브라이언 클러프 감독은 은퇴를하고 이후 잠시 1부리그에 승격 되기도했지만 1998-1999 시즌 이후 계속 2부리그에 있다가 2004-2005 시즌에는 3부리그로 강등을 당하기도 했으며 2008-2009 시즌부터 2021-2022 시즌까지 2부리그에 터줏대감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2022-2023 시즌부터 23년만에 1부리그로 복귀한다.
-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00년대 초중반, 1926/27 시즌, 1968/69 시즌, 2000년대 초반
- 리즈 유나이티드 FC: 1970년대 초반 '더티 리즈' 시절[1], 1991-92 시즌 우승~2001년 데이비드 오리어리 시절. 당시 로비 킨, 마크 비두카, 해리 키웰, 앨런 스미스, 리오 퍼디난드, 조나단 우드게이트 등 걸출한 선수들이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앨런 스미스의 리즈 시절이 바로 이 시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리즈시절의 장본인 앨런 스미스의 마지막 시즌인 2003-2004 시즌 2부리그 강등을 당하고 급기야 2006-2007 시즌에는 3부리그까지 강등당하는 수모를 당했지만 2018년부터 부임한 아르헨티나 출신 명장 비엘사 덕분에 2019-2020 시즌 2부리그 우승으로 16년만에 1부리그인 EPL로 승격을 이루어냈고 EPL 승격 첫 시즌 2020-2021 시즌 9위라는 준수한 순위로 EPL에서 나름 괜찮은 출발을 보였고 경기력도 호평을 받았다.
- 리버풀 FC: 1963~1985년 유러피언컵 결승 이전, 2017-18 시즌~2021-22 시즌. 풋볼 리그 시절에는 붉은 제국으로 불리며 UEFA 유로피언컵 4회 우승(UEFA 챔피언스리그 전신)에 리그 18회 우승으로 빛나는 팀이었으나 헤이젤 참사를 겪은 이후 잉글랜드 리그의 유럽 대항전 출전 금지와 더불어 몰락의 길을 걸었었다. 특히 EPL 출범 이후로는 2019/20 시즌에서야 드디어 우승했다. 하지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기록은 리버풀의 확실한 자부심.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 시절에 리그 2~3위권에 진입하고 챔스 결승전에도 몇차례 출전하는등 중흥기를 이어갔으나 이후 감독들의 잦은 교체와 세대 교체 실패와 더불어 하락세를 겪다가 브렌던 로저스 2년차인 2013/14 시즌 오랜만에 리그 최상위권으로 도약했다. 한동안 1위를 기록하며 우승까지 노렸으나 막판에 미끄러지며 최종 성적은 2위. 2014/15 시즌부터 다시 하락세를 타고있었지만, 위르겐 클롭 부임 이후 유로파 리그 준우승,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을 기록하고 리그에서도 챔스권에 복귀하는 등 살아나고 있으며 2018/19 시즌에는 선두를 달리며 우승 경쟁을 하는 중이다. 그리고 리그 우승은 맨시티에 밀려 아쉽게 놓쳤지만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우승까지 했다! 그리고 2019/20 시즌에서는 7게임을 남기고 조기 우승을 거두면서 다시 전성기를 달리는 듯 했으나 20/21 시즌 주축 선수들의 줄부상에 신음하며 챔피언스 리그 진출이 위태로운 상황까지 내몰렸다가 가까스로 치고 올라와 3위로 마치는 저력을 과시했다. 전성기가 더 이어질지 끊어질지는 21/22 시즌을 통해 지켜볼 일이다. 21/22 시즌에 카라바오컵 우승, FA컵 우승을 하였으나 프리미어 리그 1점차로 준우승,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을 하였다. 결국 다음 시즌인 22/23 시즌에 챔스 진출에 실패하며 전성기가 끝났다.
- 아스날 FC: 1925년~1934년 허버트 채프먼 감독 집권기, 1996년 ~ 2006년 아르센 벵거 감독 집권기 초, 중반부. 그 유명한 무패 우승도 벵거 집권기에 나왔다. 하지만 2006년 이후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건축, 대주주 스탄 크뢴케의 무관심 등으로 재정이 악화되며 16/17~21/22 시즌까지 챔스에 못나가는 부진을 겪고 있었으나 22/23 시즌 드디어 챔스 진출권을 확보, 암흑기 종결을 선언했다.
- 아스톤 빌라 FC: 1890년대 후반(1893/94, 1895/96, 1896/97, 1898/99, 1899/1900 V5) 및 1980년대 초반(1980/81 리그 우승 및 81/82 유러피언컵 (현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2000년대 와선 그래도 도깨비팀 모습을 보여주지만 중위권에 머물고 있고 마틴 오닐 감독 시절에는 빅4를 위협하는 강력한 후보로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노려보기도 했지만 이후 성적이 점점 떨어져 2016년에 강등당했다. 이후 2019년에 다시 올라오고 하위권에 머무르다가, 22/23 시즌 컨퍼런스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맷 버스비, 알렉스 퍼거슨 감독 시절. 이 목록의 가장 극적인 사례 중 하나다. 이 둘이 맨유에서 이룬 업적은 여기 적기에는 너무 많다. 그리고 퍼거슨 이후 맨유는 단 한차례도 리그 우승을 기록하지 못했다.
- 맨체스터 시티 FC: 1960년대 중반 조 머서 감독 시절, 2017년~현재. 잉글랜드 국내 4개 대회인 리그, FA컵, 리그컵, 커뮤니티 실드를 모두 우승하고 구단 최초의 유럽 대항전 우승인 UEFA 컵위너스컵까지 제패하며 잉글랜드 구단 최초 국내 대회와 유럽 대항전 동시 우승을 기록하였다. 이후 2008년, 만수르가 구단주로 부임한 이후 2011-12, 2013-14 시즌 리그 우승을 거두었으나 본격적인 전성기가 시작된건 펩 과르디올라 감독이 부임하고 2년차인 2017-18 시즌부터로, 프리미어 리그 최다 승점 우승이자 최다 승점차 우승을 필두로 6년 간 리그 우승 5회, 2018-19 시즌 도메스틱 트레블, 카라바오 컵 4연패 등 국내의 수많은 기록을 갈아치웠고, 2022-23 시즌에는 잉글랜드 클럽 역사상 두 번째로 트레블을 달성했다. 다만 2022-23 시즌 이후 주장 일카이 귄도안이 바르셀로나로 이적했고 알 아흘리에서 리야드 마레즈도 데려가게 되었으며, 주축 선수들의 이적 문제로 인한 전력 누수와 빡빡한 일정으로 인한 스쿼드의 체력 문제 등으로 팀의 침체가 시작될 수 있다... 허나, 이런 예측을 비웃듯이 한 번 더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 첼시 FC: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 부임 이후 석유 자본 오일머니로 신흥 강호로 부상한 2003-04 시즌~2021-22 시즌. 그 중 주제 무리뉴, 카를로 안첼로티, 토마스 투헬 이 세 감독 시절이 손에 꼽히며, 첼시 팬들에게 있어서 큰 이견 없이 첼시에서 큰 업적을 남기고, 전성기를 이끈 TOP 3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로만이 물러나면서부터 아귀가 안 맞기 시작하더니 새 구단주 토드 볼리의 어마어마한 투자에도 불구, 갑작스러운 투헬 경질과 그 후 감독들과 그 어마어마한 투자로 영입한 선수들의 부진으로 현재는 암흑기를 겪는 중.
- 토트넘 홋스퍼 FC: 1960년대 초반 빌 니콜슨 감독 시절. 20세기 잉글랜드 구단 최초 더블 달성, 잉글랜드 구단 최초 유럽 대항전 우승을 기록하였다.
1.2. 라리가
- 레알 마드리드 CF: 1930년대 초중반, 1950년대 저승사자 군단 ~ 1960년대 'ye-ye 마드리드' 시대, 1985/86~1989/90 V5 시절, 2000년~2003년[2], 2013년~2018년[3]
-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1999-2000 프리메라리가 우승 및 2003-04 UEFA 챔피언스리그 유벤투스, AC 밀란을 잡으면서 4강에 오르는 돌풍을 이끌었지만 10-11시즌 라리가에서 강등되었다. 그나마 12~13시즌에는 다시 프리메라리가로 승격했으나 25라운드까지 20위 꼴찌로 추락하여 또 강등위기에 처했고 결국 강등당하면서 13~14시즌은 2부리그 세군다리가에서 경기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14-15시즌 다시 프리메라리가에 승격함.
- FC 바르셀로나: 1958/59 ~ 1960/61 시즌[4], 1973/74 ~ 1974/75 시즌[5], 1990/91 ~ 1993-94 시즌[6], 2004-05 ~ 2005/06 시즌[7], 2008/09 ~ 2011/12 시즌[8], 2014/15 ~ 2015/16 시즌[9]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스페인 내전 직후,[10] 1995-96 시즌[11], 2013-14시즌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양강 체제를 무너뜨리고 리그 우승을 하고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을 차지한 시즌.
- 레알 소시에다드: 1980/81~1981/82 백투백 우승 시절.
-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1934/35 시즌
- RC 셀타 데 비고: 에우로셀타 시절 (1997/98~2003/04 시즌)
- 비야레알 CF: 2005~06 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에도 오르며 2010~11시즌 리그 4위를 거두기도 했으나 단 1년만인 2011~12 시즌에 2부리그로 강등당했다. 그나마 2부리그 2위로 다시 1시즌만에 1부리그인 프리메라 리가로 돌아와 13-14 시즌은 리그 7위를 기록.
- 발렌시아 CF: 1940년대, 1970년대, 1999/2000~2003/04 시즌
- 세비야 FC: 1940년대 중후반, 2005/06~2006/07 시즌, 2013/14~2015/16 시즌 유로파 3연패 시절
1.3. 세리에 A
- AC 밀란: 밀란 제너레이션 시절. 특히 아리고 사키, 파비오 카펠로, 카를로 안첼로티 세 감독 때가 손꼽히며, 역대 최고의 축구팀중 하나로 꼽힌다. 2000년대 중반에도 안첼로티 시절 화려한 선수진을 바탕으로 강팀으로 군림하였으나 2010년대 이후 세리에가 칼치오폴리로 침체기를 걷게 되고 AC 밀란은 급기야 13/14와 14/15 시즌에는 7위권에도 못듬으로서 유로파리그도 진출 못하는 중위권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21/22 시즌에 11년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하면서 몰락했던 명가가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엘레니오 에레라 및 로베르토 만치니~주제 무리뉴 감독 재임기.
- SS 라치오: 1999/2000 시즌. 이후 재정난으로 예전만한 모습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 SSC 나폴리: 1980년대 후반. 당대를 넘어 펠레와 함께 최고의 선수로 추앙받는 디에고 마라도나의 영입 이후 두번의 스쿠데토, 코파 이탈리아, UEFA 컵을 따내며 전성기를 보냈다.
- 파르마 칼초 1913: 1990년대 초~중반 '파르마 AC' 시절. 이후에도 이른바 세리에 7공주로 불리며 위세를 떨쳤으며 94/95, 98/99 시즌에는 UEFA컵(현재 UEFA 유로파리그 전신)을 들어올렸다. 2000년대 중반부터 재정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결국 클럽이 파산하고 인수되어 '파르마 FC'가 되고 한 차례 세리에 B에 다녀온 후에는 그저 그런 중위권 팀이 되었고, 2013/14 시즌 6위를 기록해 살아나나 싶더니 UEFA 라이선스가 발목을 잡아 유로파리그도 못나갔고 결국 다음 시즌 심각한 재정문제가 터지며 리그 최하위+구단 파산+인수 실패로 팀이 재창단되고 아마추어 단계인 세리에 D로 강등되는 굴욕까지 맛봐야했다. 이후 3년간 논스톱 승격으로 곧바로 세리에 A로 복귀하며 그래도 클래스는 살아있음을 보여줬다.
- 엘라스 베로나 FC: 1984/85 시즌
- 토리노 FC: 일 그란데 토리노 시절 (1942~1949). 당시만 해도 이탈리아 최고의 팀이었으며, 같은지역 팀인 유벤투스 FC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최상위 구단이었다. 그러나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주력 선수들을 잃으면서 순식간에 몰락해버렸고, 현재는 오히려 유벤투스가 리그를 대표하는 명문이 된 상태.
- UC 삼프도리아: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70년대만 해도 세리에 B까지 밀려났던 팀이 로베르토 만치니의 등장 이후 강팀으로 도약해 80년대 중반 이후 코파 이탈리아를 세번이나 들어올렸고 90/91시즌에는 세리에 A 우승을, 91/92시즌에는 유러피안 컵 준우승을 일궈냈다.
1.4. 분데스리가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90년대 중반[12]
- FC 바이에른 뮌헨: 1968년~1976년, 1998년~2001년, 2010~2013년, 2019년 11월~2021년 2월. 1964-1965 시즌에 분데스리가 무대를 밟은 이후, 1968-69 시즌에서 첫 리그 우승과 더블을 달성하면서 상승세를 탄 바이에른 뮌헨은 1970년대 초중반에 클럽 역사상 최전성기를 맞는다. 이 8년동안 분데스리가 4회 우승 및 리그 3연패, DFB-포칼 1회, 유러피언 컵 3연패 및 빅이어 영구 소장 권리 획득[13][14], UEFA 컵 위너스컵 1회, 인터컨티넨탈컵 1회를 수상했다. 게다가 바이에른 뮌헨의 전성기를 이끌던 서독 국적 선수들 중 게르트 뮐러, 프란츠 베켄바워, 제프 마이어, 울리 회네스, 파울 브라이트너,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벡, 유프 카펠만은 같은 시기에 서독(현재의 독일) 축구 국대에서도 대활약하여 1970 월드컵에서 3위를 한 것을 시작으로, 1972년에 벨기에에서 열린 유로와 1974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을 우승하면서 유럽 최초의 메이저대회 2연패를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다만 이때는 리그와 포칼, 유러피언컵 세 대회 중 꼭 한 대회씩은 우승하지 못 하는 바람에[15] 트레블을 달성하지 못했는데다가 2013년 이후처럼 리그를 계속해서 제패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 했다.[16] 이후 최전성기가 끝난 1970년대 말에는 구단의 확실한 암흑기였으나 선수 은퇴 후 구단의 경영진으로 들어온 울리 회네스의 활약으로 80년대에 바이에른은 분데스리가 7회 우승과 포칼 3회 우승을 기록하면서 독일 내부 대회에서만큼은 예전보다 더 좋아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만 유럽대항전에선 우승하지 못 하고 유러피언컵 준우승 2회(그것도 레알이나 리버플과 같은 강호가 아니라 아스톤 빌라나 노팅엄 포레스트와 같은 상대적 약체들에게 밀렸다.) 70년대보다 위상이 떨어진 모습을 보여줬다. 그래도 이때의 성적 덕분에 1990년에 열린 이탈리아 월드컵에 나간 독일 국대 선수의 1/3~1/4에 가까운 6명이(슈테판 로이터, 클라우스 아우겐탈러, 라이몬트 아우만, 한스 퓔글러, 위르겐 콜러, 올라프 톤) 명단에 들었다.[17] 하지만 9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FC 할리웃이라고 조롱받을 정도로 팀의 성적과 위신이 추락했다. 그러다가 오트마어 히츠펠트 감독 부임 이후에 치렀던 1998-1999 시즌에서 리그 우승 및 포칼/챔스 준우승과 1999-2000 시즌 리그 및 포칼 우승을 하면서 팀의 세 번째 더블을 가져오며 상승세를 탔다. 그리고 2000-2001 시즌에는 올리버 칸, 사무엘 쿠포르, 슈테판 에펜베르크, 비셴테 리사라수, 카르스텐 얀커, 토마스 링케 등의 활약으로 챔스 결승에서 발렌시아와의 승부차기에서 승리하며 우승을 거두며 4번째 빅이어를 들어올렸다. 또한 해당 시즌 챔스 결승전 경기 이전에 치러진 분데스리가 마지막 라운드였던 함부르크전 당시 후반 4분에 파트리크 안데르손이 간접 프리킥 골을 성공시켜 극적인 동점을 이뤄냄에 따라 당시 2위팀인 샬케에게 4분 챔피언이라는 굴욕을 안겨주고 우승하면서 더블을 차지했다.[18] 그러나 해당 시즌 이후로는 또다시 분데스리가와 포칼에서만 강한 팀으로 돌아가는 듯 했으나, 루이 판 할 감독과 그 후임인 유프 하인케스가 팀을 재정비한 끝에 2011-2012 시즌에는 팀 쇄신의 효과과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만 2011-12 시즌에는 리그와 포칼을 돌문에게 내준데다 챔스는 홈 구장인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첼시와의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며 트리플 러너업이라는 비극을 맛보기는 했으나, 바로 다음 시즌인 2012-2013 시즌에는 지난 시즌에 기록한 트리플 러너업의 아픔을 딛고 리그, 포칼, 챔스 트레블 달성에 성공함과 동시에(심지어 지난 시즌에 리그와 포칼 1위를 내준 돌문을 챔스 결승에서 만나 2:1로 이겨서 복수했다.) 현재의 바이에른 뮌헨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12-13 시즌에 바이에른을 정상으로 올려놓은 선수들 중 필립 람,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마리오 고메스, 마누엘 노이어, 제롬 보아텡, 토마스 뮐러, 토니 크로스, 홀거 바트슈투버는 자국 월드컵 3위, 남아공 월드컵 3위, 브라질 월드컵 우승, 유로 2008 준우승, 유로 2012와 유로 2016 4강이라는 대기록을 세웠고[19], 클럽 역시 이때부터 리그 6연패와 3번의 더블을 달성했다. 다만 챔스만큼은 번번히 고배를 마셨는데다 하인케스 이후 부임한 감독들인 펩 과르디올라, 카를로 안첼로티, 니코 코바치 체제에서는 상당히 저조한 성적을 받아들였으나, 2019년 11월에 경질된 코바치의 자리를 한지 플릭의 능력 덕분에 이전의 부진을 탈출하면서 환골탈태한 덕분에 구단 역사상 두 번째 트레블과 챔스 역사상 전승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해당 시즌에 정식 감독이 된 한지 플릭은 2020년이 끝나기 전에 각각 DFL과 UEFA가 주관하는 두 슈퍼컵에서 우승했고, 2020 FIFA 클럽 월드컵 카타르에서도 트로피를 들어올리며[20] 구단 최초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전관왕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2020-2021 시즌에서 보여준 수비 불안과, 빡빡한 일정에 비해 얇은 스쿼드, 구단 수뇌부와 보드진들의 무능한 행보, 제대로 된 영입의 부재 및 신입 자원들의 부진, 지도부와 대립하던 플릭 감독 사임 등의 악재가 겹치고 만 끝에 포칼 32강 탈락 및 챔스 8강 탈락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맞이했다. 그나마 리그는 우승했기 때문에 9연패 및 우승 기록 누적 30회 달성하는 동시에 최종전 당시 팀의 주포였던 레반도프스키가 1골을 추가함에 따라 게르트 뮐러가 1971-72 시즌에 40골을 넣고 달성한 단일 시즌 최다 득점 기록을 경신하면서 마무리했으나 팀에 오랫동안 헌신한 선수인 보아텡, 하비, 알라바, 감독 한지 플릭과 수석코치 미로슬라프 클로제와 헤르만 게를란트가 떠난 데다가 챔스에서 경쟁할 클럽들인 맨시티나 PSG, 첼시 등의 빅클럽들이 거액을 지불하면서 스타들과 실력이 검증된 자원들을 모을 때 뮌헨의 보드진은 사실상 제대로 된 영입을 하지 않음에 따라 네 번째 전성기가 사실상 끝나버릴 위기에 처했다. 결국 2021-2022 시즌 전반기에 포칼 32강에서 묀헨글라트바흐에게 졸전을 펼치다가 5:0 탈락하고, 후반기에 가졌던 챔스 8강 당시 비야레알과의 경기에서도 졸전을 벌이다가 홈&원정 합산 2:1로 밀려버리며 탈락하면서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리그에서는 우승하면서 분데스리가 10연패를 달성하기는 했으나 2012-13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 이후 기록한 승점 가운데 제일 낮았던 데다 중하위권 팀들이나 강등권에 있는 최하위권 팀들에게 승리나 무승부를 헌납하는 일이 잦아졌으며, 설상가상으로 내용 측면에서도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거기에 돌문을 상대로 홈 경기를 가졌던 31라운드에서 이긴 후에 치러진 32~34라운드에서는 1패와 2무를 기록하면서 시즌을 마감했다. 게다가 보드진의 막장 행각과 성찰 부재, 2020-2021 시즌 영입생들의 부진, 새 감독 나겔스만이 후반기에 보여준 삽질, 쥘레의 이적, 레반도프스키의 재계약 무산 및 판매 대상화[21], FA로 나가는 선수를 대체할 자원 부재 등으로 인하여 차기 시즌에는 챔스나 포칼 트로피는 고사하고 리그 우승도 걱정해야 할 판이며, 심하면 DFL-슈퍼컵 패배와 유로파권 이하 순위 확정으로 인해 무관이라는 최악의 결과와 암흑기의 시작이라는 결과까지 올 수 있다. 다만 보드진들도 2021-22 시즌의 결과와 경기 내용을 보고 각성을 했는지 사실상 분노의 영입 모드에 돌입하면서 사디오 마네, 마테이스 더리흐트, 라이언 흐라번베르흐, 마티스 텔 등을 영입했다. 이후 레반도프스키의 부재 및 세간의 우려 속에서 치러진 전반기에서는 2022 DFL-슈퍼컵에서 이기고 챔스 조별리그와 포칼에서 순항하였으나, 리그에서는 초반 3연승을 제외하면 너무나도 많은 무승부를 거두면서 난항을 겪었다. 그러나 레반도프스키의 백업 스트라이커었던 에릭 막심 추포모팅이 꾸준히 득점한데다 무시알라와 같은 나머지 공격진도 활약하면서 리그 1위, 챔스 조 1위 및 포칼 16강 진출까지 이뤄냈으며, 카타르 월드컵에서 조별리그 탈락한 독일 국대의 수문장을 겸하는 노이어가 스키를 타다 부상으로 이탈하는 비상사태에도 불구하고 좀머와 블린트, 칸셀루 등을 겨울에 영입하여 스쿼드를 보강하고 16강 상대인 파리 셍제르망을 홈과 원정 경기 합산점수에서 3-0으로 이기고 포칼도 마인츠를 이기며 8강에 올랐다. 그러나 리그에서는 잇다른 무승부를 거두자 보드진들이 나겔스만을 갑작스레 해임하고 투헬을 선임하여 트레블을 노렸지만 갑작스런 감독 교체로 인한 혼란과, 추포모팅이 장기 부상으로 빠진 후 재앙과도 같은 활약을 보이는 공격진[22], 다요 우파메카노를 비롯한 수비진들의 잦은 수비 실수와 투헬이 구사한 전술의 실패로 인해 포칼과 챔스 8강 탈락이라는 굴욕을 얻은 데다가 리그도 도르트문트에게 1위를 빼앗길 처지에 놓여 있었으나... 2022-23 시즌 분데스리가 34라운드 당시 1등이었던 도르트문트가 PK 실축 등으로 인한 득점 기회를 놓친 데다 되려 상대인 마인츠에게 일격을 당하고 무승부에 그친 반면, 쾰른을 상대한 뮌헨은 코망의 선제골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가 쾰른에게 동점을 허용했으나 후반 89분에 자말 무시알라가 역전골을 터트리고 나서는 실점 없이 경기를 끝낸 덕분에 극적으로 순위를 뒤집고 마이스터샬레를 차지하면서 무관을 면할 수 있었다. 또한, 같은 날 잘못된 영입과 구단 운영으로 인해 뮌헨의 전력을 약화시킨 주범인 하산 살리하미지치 단장과 올리버 칸 CEO가 해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향후 쇄신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알폰소 데이비스의 재계약 추진이 하산의 해임으로 인해 불투명해진데다 핵심 수비진인 뤼카와 파바르의 이적 요청, 정상급 스트라이커와 수비형 미드필더 영입 등의 난항과 같은 극복할 사안이 남았다. 만일 2023-24 시즌 돌입 전에 해당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채 2022-23 시즌에 보여준 모습과 성과보다 못한 채로 차기 시즌을 끝낸다면 그때는 정말로 암흑기가 시작될 지도 모른다. 결국 2023-24 시즌에 챔스 4강 탈락, 포칼 32강 탈락, DFL-슈퍼컵 패배, 리그 3위[23]를 거두며 12년 만의 무관을 맞이한 데다 팀이 치른 다수의 경기에서 보여준 내용과 기량이 하락하거나 아예 수준 미달의 모습을 보여준 몇몇 선수들, 막장 전술과 선수진과의 잦은 갈등, 상식을 벗어난 인터뷰 등으로 팀 분위기를 말아먹은 끝에 시즌 종료 이후 자진사임한 투헬과 그의 코치진들, 시즌 내내 속출한 부상자들, 감독 선임과 선수 영입 면에서 최악의 판단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차기 시즌을 이끌 감독 선임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두고 단장 막스 에벨과 프로인트는 없는 사람 취급한 채 똥고집을 부리고 있는 명예 회장 울리 회네스와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등 여러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암흑기의 시작을 열고 말았다. 만일 바이에른 뮌헨이 2024-25 시즌 시작 이전까지 자신들의 눈 앞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 한다면 2010년대의 양 밀란이나 현재의 유벤투스처럼 완전 무관이라는 결과를 매년 5월마다 받는 암흑기가 지속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70년대. 현재까지 클럽이 기록한 분데스리가 5회 우승 및 포칼 1회 우승, 유러피언 컵 준우승, UEFA컵 2회 우승이 모두 이 시기에 나왔다.[24] 게다가 이때 같이 최전성기를 누리던 바이에른 뮌헨이 리그에서 독주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팀이었다.[25] 그리고 이 때 팀에서 뛰던 귄터 네처, 유프 하인케스, 울리 슈틸리케, 베르티 포크츠, 알란 시몬센과 같이 당시 클럽에서 활약하던 서독 국적 선수들은 바이에른 뮌헨 소속 독일 국적 선수들과 함께 국대에서 대활약을 펼치면서 독일 최초의 유로 우승- 자국에서 치른 첫 번째 월드컵 우승이라는 메이저대회 연승 기록과 1976년 유로 준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로는 서서히 팀의 전력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바이에른 뮌헨은 회네스를 필두로 한 구단 수뇌부와 경영진들이 정신을 차리고 시행한 대대적인 개혁 덕분에 1980년대 이후부터 분데스리가의 강호로 돌아온데다, 1990년대 말~2천년대 초반의 두 번째 전성기와 2000년대 후반 이후에 실시된 대대적인 팀 리빌딩을 통해 리그/포칼/챔스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보여주면서 지금도 강등 한 번 없이 독일을 대표하는 최강의 팀으로 군림하고 있는데 반해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는 팀 내부 문제 해결에 실패한 바람에 두 번 다시 전성기 시절로 돌아가지 못 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1990년대 이후 현재까지 두 번의 강등을 경험하기까지 했다.
- 살케 04: 1934~1942년의 9년간 6번의 독일 챔피언십 우승을 맛보았다. 그 이후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에는 우승을 아직 못 해보고 있다. 그나마 포칼은 7번이나 우승했으며, 오랫동안 리그의 명문팀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2018-2019 시즌 이후 팀이 망가지기 시작하더니 2019-2020 시즌 후반기부터 시작된 팀의 연패가 2020-2021 시즌에도 계속되었고, 결국 해당 시즌 30라운드에서 빌레펠트에게 1:0으로 패배함과 동시에 리그 최하위 순위인 18위로 강등을 당하고 말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러나 강등된 지 단 한 시즌 만에 분데스리가 승격을 확정지었다! 이제 샬케는 2022-23 시즌 잔류가 최소한의 목표가 될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해당 시즌이나 차기 시즌에서 리그 상위권 및 유럽대항전 진출이라는 유의미한 성과를 거둔다면 암흑기에서 완전하게 탈출했다고 할 수 있다... 고 할 수 있었으나 2022-23 시즌 분데스리가 전반기에 연속된 패배와 대량 실점을 동시에 거두면서 꼴찌까지 추락했으며, 후반기에는 개선된 경기력을 바탕으로 강등권이나마 탈출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최종 17위를 기록하며 다시 2부로 강등되었다. 같은 시기에 강등당하고, 같은 시기에 다시 승격한 SV 베르더 브레멘이 2022-23 시즌 분데스리가에서 최종 13위를 기록하면서 2023-24 시즌 분데스리가 잔류를 확정한 것과 대조되는 모습.
- 1.FC 카이저슬라우테른: 1950년대, 1997-98 시즌. 특히 해당 시즌의 카이저슬라우테른은 2. 분데스리가에서 막 승격했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해당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의 주인공이 되었다. 분데스리가 창설 이래 2. 분데스리가에서 승격한 승격팀이 승격한 시즌에서 우승까지 차지한 사례는 카이저슬라우테른 단 한 팀 밖에 없다. 그러나 홈 구장인 프리츠 발터 슈타디온 개보수 과정에서 져버린 고액의 빚과 선수 영입의 실패가 구단이 분데스리가에서 내는 성적에 큰 타격을 주었고, 결국 2005-06 시즌에 2부로 강등되었다가 2010-11 시즌에 다시 승격했으나 2011-12 시즌에 또 강등된 이후에는 3부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현재는 다시 2부로 올라온 후, 2.분데스리가에서 뛰고 있다.
- 함부르크 SV: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반. 1978년부터 1983년까지 분데스리가 3회 우승 및 유러피언 컵 우승 1회 및 준우승 1회, UEFA컵 1회 우승 등을 경험했다. 1986/87 시즌 이후부터는 메이저 대회에서 어떠한 컵도 들어올리지 못했다. 그래도 분데스리가 모든 시즌에 참가한 유일한 팀[26]이라는 자존심이 있었으나 13-14시즌 강등위기에 처했다가 살아남았고 14~15시즌도 극적으로 겨우 잔류했다. 15-16시즌도 잔류는 성공했지만 강등권과 고작 3점밖에 안 나는 차이로 겨우 잔류에 성공하면서 중하위권 노릇하다 17-18시즌에 강등됐다. 이후에는 1부로의 승격 시도가 계속해서 좌절되고 있는 상황.
1.5. 리그 1
- AJ 오세르: 1995/96 시즌.
- AS 모나코: 2003/04시즌. UEFA챔피언스리그 준우승까지 거두면서 이름을 알렸으나 이후로 하위권으로 밀려났고 강등까지 겪었다. 다행히도 러시아 부호의 투자를 받아 재승격을 이뤄낸 후에는 리그 상위권을 유지하고 챔스에서도 8강까지 올라가는 등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했다. 헌데 주전 선수들이 연달아 팔려나가더니 18/19시즌 현재 다시 강등 위기...
- AS 생테티엔: 60년대 리그앙 4연속 우승, 70년대 리그앙 3연속 우승에 75-76 시즌 유러피언컵(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같이 프랑스 최강 구단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80년대 이후 재정문제로 2부리그 강등과 승격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2000년대들어 1부리그에 안착한 이래 리그 중상위권에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2013년에는 리그 컵을 우승하고 2013-14시즌 리그 4위, 2014-15시즌 5위를 기록하는 등 조금은 살아난 모습을 보이는 중.
-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88/89 ~ 1992/93 시즌
- 올랭피크 리옹: 2001/02 ~ 2007/08 V7 시절
- 파리 생제르맹 FC: 1990년대 초~중반.2011년 이후~현재 이후에는 올랭피크 리옹,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지롱댕 드 보르도 등에 밀려있었으나 카타르 구단주의 전폭적인 투자를 받기 시작하며 2011년 이후에는 리그에서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사실상 현재가 리즈 시절.
1.6. 기타
- 던디 유나이티드 FC: 1980년대
- 레인저스 FC: 2012년 파산 이전까지
- AFC 아약스: 1968년~1973년, 1991년~1996년까지 여기도 리즈시절에 제대로 들어가는 팀이다. 원래부터 에레디비시의 강호였던 팀이긴 하지만 감독인 리누스 미헬스와 슈테판 코바치의 뛰어난 전술적인 능력과 훗날 펠레와 마라도나 바로 아래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선수로 자라난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선수들이 구사하는 토탈 풋볼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아약스는 1968-1969 시즌 유러피언 컵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유럽과 세계에 자신들이 강호가 되었음을 본격적으로 알렸고, 뒤이어 나간 1970-1971, 1971-1972, 1972-1973 시즌 유러피언 컵 대회에서는 모두 우승을 거두는 데 성공하면서 빅 이어를 영구히 소장할 자격을 얻었다. 이는 제일 먼저 유러피언 컵 3연패를 달성한 레알 마드리드 CF와 훗날 자신들과 같은 기록을 세운 FC 바에이른 뮌헨, 그리고 AFC 아약스 3팀만 가지고 있는 기록이다. 그 뿐만 아니라 국내 1부 리그와 KNVB 베이커(네덜란드의 FA컵 대회)에서도 압도적인 모습을 보인 덕에 수 차례의 더불을 기록한데다가 1971-1972 시즌 당시에는 축구 역사상 두 번째(첫 번째는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셀틱 FC가 1966-1967 시즌에 달성하였다.) 트레블을 달성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 당시에 크루이프와 함께 아약스에서 뛰던 네덜란드 선수들인 요한 네스켄스, 피트 케이저르, 빔 쉬르비르, 아리에 한, 뤼트 크롤 등은 그대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발탁된 후에 1974년 서독 월드컵과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준우승, 그리고 1976 유로 4위를 달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크루이프가 떠난 뒤에 아약스는 UEFA 컵 위너스 컵에서 딱 한 번 우승한 거 이외에는 유럽대항전에서 약세를 보였던데다[27], 그동안 잘만 우승하던 리그나 베이커컵조차도 1980년대 중후반에는 우승하지 못 하는 등 난항을 겪었다. 그러나 1991년에 부임해온 신임 감독인 루이 판 할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UEFA 컵에서 우승한 것을 시작으로 부흥을 알렸으며, 그 다음 시즌에는 팀에 오랫동안 헌신해온 선수들이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밀란산 에이스 프랑크 레이카르트와 핀란드의 골 폭격기 야리 리트마넨의 합류와 팀을 떠난 다수의 구세대 선수들을 대신한 젊고 유망한 선수들이 적절하게 세대교체를 해주면서 활약한 것이 시너지를 내준 덕분에 1994-95 시즌 에레디비시와 챔피언스리그 우승, 그것도 무패 우승으로 더블을 달성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도 결승전에 올랐으나 유벤투스에게 패배하면서 팀의 5번째 우승이 좌절되었다. 그리고 이 다음 시즌부터 팀이 대회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두기 시작한데다가 주축 선수들의 은퇴 및 이적으로 전성기가 끝나버리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2000년대 이후에 일어난 축구계의 지각 변화[28] 때문에 아약스를 비롯한 에레디비시 팀들이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으면서 부활을 할 기회조차 날아가버렸다. 결국 이때부터 아약스는 챔피언스리그 우승은 커녕 유로파리그 32강만 가도 잘하는 처지로 떨어졌다. 물론 리그에서야 여전히 강호지만 유러피언컵 클럽 대회에서는 리즈시절에 대하여 가장 까마득한 좋은 추억을 가진 팀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2018-19 시즌, UCL 4강에 진출하며 다시 추억을 되살리는... 것 처럼 보였으나 바로 다음 시즌 챔스 조별리그에서 3위를 거둔 바람에 치렀던 유로파리그에서는 32강 탈락, 그 다음 시즌 챔스 예선 탈락 및 유로파리그 8강 탈락으로 또 다시 부진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 FC 안지 마하치칼라: 2011년~2013년. 사실 리즈 시절로 보기에는 아리송하지만 역대 성적이 2부리그 우승 2번뿐인 팀에서 사무엘 에투와 호베르투 카를로스를 거액으로 영입하고 거스 히딩크를 감독으로 앉히며 리그 성적 3위를 거둬 팀 역사상 아주 짧은 리즈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3년도 안가 구단주 자본 문제로 리그 꼴찌로 강등당하고 승격하고 도로 옛 하위팀으로 돌아왔다. 2015-16 시즌도 강등권인 18라운드까지 16위에서 맴돌고 있다.
- 애버딘 FC: 알렉스 퍼거슨 감독 시절 견고한 스코틀랜드 리그 양강체제를 제대로 무너뜨리면서 신흥 강호로써 명성을 드높였었다. 클럽의 70년대 ~ 80년대 황금기는 정확히 알렉스 퍼거슨 감독 시기와 궤를 같이하는데, 리그 3회 우승, FA컵 4회 우승, 리그컵 2회 우승을 모두 퍼거슨의 지휘하에 기록하면서 스코틀랜드의 최강으로 잠시나마 우뚝 섰었다. 특히 1982-83 시즌 컵대회 우승 자격으로 나간 UEFA 컵 위너스 컵에서 우승을 해버리며 일약 유럽 최강 클럽으로도 등극한다. 특히 결승전 상대가 그 레알 마드리드 CF였으니 임팩트는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물론 이게 슈퍼 감독의 공이 절대적이었으므로, 퍼거슨이 1986년 11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로 떠나면서 귀신같이 애버딘은 원래의 중상위권 클럽으로 되돌아갔다.그래도 이 당시 짐 레이튼, 알렉스 맥리시, 고든 스트라칸 등 스코틀랜드 국대급 선수들이 팀을 이끌어 선수층 자체도 나쁘진 않았다.[29]
- FC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1985-86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것도 결승 상대가 FC 바르셀로나. 이는 동유럽 축구 역사상 첫 클럽대회 우승. 하지만 2000년대 와선 챔피언스리그 16강 진출도 겸사겸사하는 신세이다. 뭐 그렇긴 해도 적어도 루마니아 리그에선 여전히 최강급으로 군림하며 리그 최다 우승을 기록 중이고 2010년대 와서도 리그 우승 후보이자 리그 우승을 여럿 거두고 있으니...리즈 시절의 그 유래가 된 팀보다야 낫긴 하다.
-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2000년대 중반까지. 기존에는 에레디비시 빅 3로 불렸지만, 재정난으로 2005/06 시즌 이후 리그에서 중위권 수준으로 전락했다. 다만 2011~12 시즌은 오랜만에 리그 2위를 차지하면서 다음 시즌을 기약하게 됐다.
- 오첼툴 갈라치: 한국에서 인지도는 없는 루마니아 리가 I 팀. 1964년에 창단되어 2~4부리그를 오르락내리락하던 팀인데 바로 김길식이 두 시즌을 여기서 뛰었다. 나름 활약이 좋았음에도 연봉도 제대로 못 줘 법정투쟁을 벌인 김길식이 6달이나 무직신세로 만들게 하던 팀인데 열악한 재정에서도 2010~11시즌 리가 I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승하고 슈퍼컵도 우승하는 더블 우승이라는 이변(종전 우승컵이 2~4부리그 우승컵 뿐이다....)을 낳으며 아주 짧은 리즈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이후 순위가 바닥나더니만 5년도 안가 2부리그로 강등당하고 팀이 아예 해산되어버렸다. 그나마, 열혈팬들이 돈모아서 재창단하여 2020-21 3부 리그에서 새롭게 시작했으며, 꾸준히 승격을 거듭하여 2023-24 시즌부터 다시 1부 리그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2. 리그
- 라리가: 2013-14 시즌~2017-18 시즌
- 리그 1: 2011-2012 시즌~현재 진행형
3. 국가대표팀
자세한 내용은 황금 세대(축구) 문서 참고하십시오.- 그리스 축구 국가대표팀: 유로 2004 한정. 그 뒤로도 그 이전에도 다른 축구대회에서는 예선 또는 1라운드를 통과한 적이 없나 했는데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첫 16강 진출이란 기염을 토했다.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1972년~1976년, 1986년~1992년, 2006년~2018년 러시아 월드컵 이전[30].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매직 마자르로 불렸던 헝가리를 꺾고 우승한 것을 신호탄으로 한 이후, 자국 축구계가 클럽 및 국가대항전에서 몇 번의 부침을 겪으면서도 성장한 끝에 마침내 1972년에 벨기에에서 개최된 유로와 1974년에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우승하면서 유럽 최초로 메이저대회 연속 우승이란 기록을 세우고, 1976년 유로 준우승을 차지하며 독일 축구의 최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전성기가 끝난 1970년대 말기 이후에는 1980년에 열린 유로에서 우승한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성과를 못 내고 있었다.[31] 그러다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제대로 된 실력으로 준우승을 거두며 독일이 옛 명성에 걸맞은 강호로 복귀했음을 알렸고, 마침내 1990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14번째 월드컵 결승전에서 86년 월드컵 결승전 당시에 자신들의 무릎을 꿀리게 했었던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에게 복수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유로 1992에서도 준우승(당시 우승은 해당 대회에서 돌풍을 일으킨 덴마크)을 거두었다. 그러나 독일 통일의 부작용으로 발생한 재정난과 세대 교체 실패로 인한 선수단의 노쇠화, 로타어 마테우스, 마티아스 잠머, 슈테판 에펜베르크 등 당시 유럽 무대에서 활약하던 주전 선수들의 부상으로 인한 메이저대회 낙마와 현역 은퇴로 인해 독일 축구계는 1994년부터~2004년까지 10년 동안 암흑기를 맞이했다.[32][33] 그러다 루디 푈러 감독 사임 이후에 국대 감독으로 임명된 위르겐 클린스만이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제대로 된 실력으로 3위를 차지하며 길었던 암흑기의 종지부를 찍었고, 해당 대회 이후에 사임한 클린스만 대신 감독으로 임명된 뢰프 아래에서 본격적으로 부활하기 시작하여 유로 2008 준우승과 남아공 월드컵 및 유로 2012에서 3위를 찍으며 상승세를 타더니 마침내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미네이랑에서 준결승 상대로 만난 브라질을 7:1로 학살하며 2002년의 복수를 함과 동시에 마라카낭의 비극 이후 최악의 참사를 안겨주었고, 결승전에서는 메시가 이끄는 아르헨티나를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1-0으로 이기고 우승했다. 브라질 월드컵 이후에 열린 유로에서는 프랑스에 밀려 4강에서 그치기는 했으나 이탈리아를 승부차기에서 잡으면서 독일이 가진 아주리 징크스를 절반이나마 깨버렸고, 2017년에 열린 컨페더레이션스컵 러시아에서는 1.5군급의 신예들만 투입하고도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러시아 월드컵 예선에서도 10전 전승에 43득점 4실점, 승점 30점에 득실차 +39라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며 재빨리 본선에 안착하는 등 승승장구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본선 조별리그에서는 1차전인 멕시코전에서 1:0 패배하며 조별리그 통과에 적신호가 켜졌고, 2차전인 스웨덴전에서는 간신히 2-1로 승리하며 조기 탈락만은 면했으나 다음 경기에서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3차전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2-0으로 패배하는 바람에 16강행이 물거품이 되어버림과 동시에 자국 축구 최초로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결과와 함께 전성기가 완전히 끝냈다. 게다가 러시아 월드컵 이후에 열린 18-19 UEFA 네이션스리그 조별리그 탈락 및 리그 B 강등[34], 다음 시즌에 치러진 네이션스리그에서는 조별리그 통과에 유리한 고지를 점해놓고도 스페인에게 6-0으로 패배하면서 결선 토너먼트 진출 실패, 카타르 월드컵 예선에서는 약체 북마케도니아에게 졸전 끝에 2-1패배, 유로 2020 16강 탈락[35]이라는 악재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뢰프 감독이 사임하는 지경까지 가며 전성기의 독일 축구 국대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뢰프 사임 이후에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새 감독은 뢰브 아래 수석코치 자격으로 월드컵 우승을 차치하였고, 바이에른 뮌헨의 트레블을 이끈 감독 한지 플릭이 선임 되었다. 이후 지휘 아래 남은 예선 경기 모두 다득점을 기록하고 승리한 것은 물론, 홈에서 자신들에게 치욕을 안겨주었던 북마케도이나 축구 국가대표팀을 예선 8라운드인 스코페 원정에서 4-0으로 격파함과 동시에 개최국 카타르를 제외한 국가들 중에서 제일 먼저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티켓을 따냈다. 향후 카타르 월드컵 본선에서 거둔 성적에 따라 부활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2022-23 시즌 UEFA 네이션스 리그에서 결선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하였으며[36], 카타르 월드컵 직전에 치렀던 오만과의 평가전에서는 1:0으로 신승하는 데 그쳤다. 결국 불안한 경기력과 잘못된 스쿼드 선발로 인해 본선 조별리그 첫 경기부터 일본 상대로 역전패를 당하며 또 망신을 당했고 결국 또다시 32강에서 탈락하고 만다. 암흑기 연장은 덤.
-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잭 찰튼 감독시절. 특히 UEFA 유로 1988 ~ 1994 미국 월드컵까지
- 불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월드컵에서도 1승도 거두지 못하던 나라(다만 항목 참고하면 알겠지만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에서 1승도 못 거두고도 무재배로만 16강에 오르는 행운을 누리긴 했다)가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 그야말로 폭발하며 전 월드컵 대회 준우승팀(90 월드컵 우승은 서독) 격인 독일까지 제치고 4강에 올라가는 쾌거를 이뤘다. 그리고 그 뒤로 유럽에서 동네북급.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펠레가 자신의 인생 첫 월드컵에 나가서 1958년부터 마지막 월드컵을 든 1970년이 1차 전성기였다.[37] 지금도 펠레가 국대에서 뛴 기간에 우승한 월드컵 대회 횟수(3회)가 펠레가 뛰기 전이나 은퇴 후에 개최된 월드컵 대회에서 우승한 횟수(2회)보다 많다는 걸로 설명이 끝날 정도니 말 다했다. 이 시기는 브라질 하면 축구라는 이미지가 전세계적으로 형성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펠레 은퇴 이후에는 명성에 비하면 부족한 성적만 내다가 호마리우, 호나우두, 베베투, 둥가, 카푸 등의 스타들이 이끄는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승부차기에서 꺾으며 인류 최초로 4번의 월드컵 우승이라는 기록을 얻은 것을 시작으로 1995년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 1997년과 1999년에 열린 CONMEBOL 코파 아메리카 연속 우승,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준우승을 거쳐 2002년 한일 월드컵 결승에서 독일을 꺾고 월드컵 최다 우승 기록을 세우는 데 성공하면서 2차 전성기를 누렸다.[38] 그러나 2006년과 2010년 월드컵에서는 8강, 코파 아메리카는 2011년에 8위를 기록함으로써[39] 전성기가 끝나더니 2014년에 열린 자국 월드컵에서는 독일에게 7-1로 학살당하면서 마라카낭의 비극 이후 최악의 참사인 미네이랑의 비극을 겪으며 브라질 축구의 위상이 땅바닥에 처박히는 수모를 겪었다. 뿐만 미네이랑의 비극을 겪고 난 이후의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은 전력이 많이 약해졌고, 심지어 코파 아메리카 센테나리오에서는 월드컵 최다 우승국이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그룹 스테이지에서 광탈하는 수모를 겪었다. 다만 동년에 자국에서 열린 올림픽 축구 결승전에서는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2년 전 자신들에게 수모를 안긴 독일을 상대로 승리함과 동시에 올림픽 축구에서 첫 금메달을 받으며 그 동안의 부진을 어느 정도 만회하기 시작했고, 2018 러시아 월드컵 8강, 2019 코파 아메리카 우승, 2021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 2020 도쿄 올림픽 축구 금메달 및 해당 종목 2연패에 성공하면서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프랑스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평가받았지만 8강에서 크로아티아에게 승부차기로 패배하며 유럽 상대 토너먼트 5연속 탈락을 기록하고 말았다.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월드컵이라는 것이 창설되기 직전인 1920년대~1950 FIFA 월드컵 브라질까지.[40] 이후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 4강을 끝으로 추락했으나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4강에 오르고, 2011 코파 아메리카 아르헨티나 우승으로 다시 살아났다. 그 후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은 대륙간 플레이오프까지 치렀다가[41] 16강으로,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선 8강으로 올라가서 그래도 나쁘지 않은 성적을 이어가고 있던 것처럼 보였었다.[42] 하지만 자국 축구 대표팀의 부흥을 이끈 루이스 수아레즈, 에딘손 카바니, 디에고 고딘 등의 황금세대가 출전하는 마지막 월드컵이었던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한국에게 0:0으로 비기면서 불안한 출발을 하더니 포르투갈에게 2:0으로 패배하면서 탈락 위기에 몰렸었다가 마지막 상대인 가나를 2:0으로 누르면서 16강에 진출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미 가나전에서 2골을 득점한 대한민국이 포르투갈에게 2:1로 역전승을 거두며 조별리그 경기를 모두 마치자 다득점에서 밀려 떨어질 위기에 처한 우루과이는 남은 시간 동안 온갖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남아공 월드컵 당시 수아레즈가 벌인 신의 손 사건의 피해국이자 16강 진출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진 가나는 우루과이의 공세를 모두 막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결국 조별리그 경기 종료 이후 한국에게 다득점에서 밀려버린 우루과이는 조 3위로 탈락함에 따라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의 부흥은 초라하게 끝나고 만다.
-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1982년~1986년까지 1차 전성기를 지냈고 이후 자국에서 열린 1998년 월드컵 우승 ~ 2002 한일 월드컵 개막전 세네갈 쇼크전까지 최전성기를 보냈는데, 이때 지단을 주축으로 프랑스 대표팀의 축구 스타일은 '"아트 사커'"라 불리며 그 명성을 드높였다.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 뿐만 아니라 2년뒤 열린 UEFA 유로 2000 대회 우승, 2001 컨페더레이션스컵 우승을 차지했다. 지금도 프랑스 국대를 응원하는 축구팬들은 이 시기를 함께하지 못 한 팬들을 가엾게 여기는 풍조가 있을 정도. 하지만 이후로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허무한 1라운드 광탈, 이후 UEFA 유로 2004, 2008, 2012에서 고전했다. 그나마 지네딘 지단이 투혼을 불사른 2006 월드컵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하긴 했다. 최근에도 유로 2016 대회에서 개최국으로써 황금 세대를 앞세워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로 평가받았으나 결승전에서 우주의 기운이 모인 포르투갈에게 통한의 패배를 하며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적절한 세대교체를 통해 앞에서 말한 황금세대를 앞세워 정확히 20년만에'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서 결승까지 진출해 다시 타이틀을 되찾았다. 그러나 3년 뒤에 열린 유로 2020에서는 조별리그 1차전 1:0 신승[43], 2차전 1:1 무승부, 3차전조차 2:2 무승부로 끝내는 졸전을 치르며 16강에 올라갔으나 상대인 스위스와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배하며 탈락했다. 더 심각한 것은 단순히 탈락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팀 내부의 선수들의 내분이 계속해서 터지는 바람에 전성기가 끝날 위기에 처했으나... 2020-2021 네이션스리그 결선 토너먼트에서 벨기에와 스페인을 격파하고 우승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다만 선수단 내부의 분쟁이 아직 잦아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차후에 열릴 2022 카타르 월드컵 본선 진출 여부 및 해당 대회 본선에서 거둔 성적에서 전성기 지속/종료 여부가 결정날 것이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디펜딩 챔피언 징크스를 보기 좋게 박살내며 결승까지 진출했으나 승부차기에서 아르헨티나에게 패해 준우승을 했다. 비록 월드컵 연속 우승에 실패하긴 했어도 카타르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이며 득점왕에 오른 음바페가 아직 24세밖에 안 된 점과 유럽의 상위 리그와 빅클럽 및 명문 클럽에서 활약하는 선수층이 매우 두껍다는 사실 덕분에 차기 유로와 월드컵에서 우승할 대표적인 국가로 꼽히고 있다.
-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1950년대.[44]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와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에서 각각 준우승을 차지했으며, 특히 1950년대에는 매직 마자르라고 불리며 당시 세계 최고의 팀으로 군림했다. 특히 푸스카스를 주장으로 해서 1952년부터 54년 스위스 월드컵 준결승까지 A매치 34연승이란 대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1956년 반소 민주화운동 이후 주축 선수들이 1960년대 이후 서유럽으로 망명하면서 하향세를 보였다. 유로 1964 3위와 UEFA 유로 1972 4위 이후 유로컵이고 월드컵이고 각종 메이저 대회에서 별다른 성과를 도통 거두지 못하고 있다.
-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2008년~2013년. 2008년 전까지 우승후보는 커녕 성적이 안 좋아서 샴페인, 뻥페인, 필페인이라 불었었다. 유로 2008에서 두번째로 유로에서 우승 이후에도 월드컵 성적이 1950년 월드컵 4강 1회가 최고기록이라서 2010년에도 놀림받고 있었으나 1950년 60년 이후 4강에 진출하고 처음으로 결승에 진출한 후, 네덜란드를 꺾고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게다가 유로 2012에서 우승하면서 대회 2연패를 달성한데다 다음 해에 나간 컨페드컵에서의 준우승, 지역예선 당시 2포트에 들어온 프랑스를 플레이오프로 밀어내고 조1위를 차지함에 따라 차기 월드컵의 강력한 우승 후보 가운데 하나몄다. 하지만 브라질 월드컵 본선에서 네덜란드에게 1:5로 대역전패를 당한데다 칠레전에서 2실점을 허용하는 굴욕을 전 세계인에게 보여주면서 광탈했다. 미후에 나간 러시아 월드컵에선 자신들보다 몇 수 아래인 개최국 러시아와 가진 경기에서는 선제골을 넣었으나 전반전 종료를 앞두고 PK 찬스를 내주면서 동점골을 허용한데다 이후에는 단 한 번도 러시아의 수비를 뚧지 못하는 바람에 승부차기 가버렸고, 여기서 패배하는 바람에 16강으로 마감했다. 그나마 유로 2020에서는 4강까지 진출했으나 해당 대회 우승국과 준우승국인 이탈리아와 잉글랜드, 전 유로 대회 우승국인 포르투갈, 러시아 월드컵 우승국이자 해당 대회 우승 후보로 가장 유력했었던 프랑스 등의 무게감에 가려진데다가 본인들 역시 조별리그 3차전과 크로아티아전을 제외하면 저조한 득점을 보인 끝에 해당 대회에서 우승한 이탈리아에 밀려서 탈락했기 때문에 아직 암흑기를 탈출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래도 도쿄 올림픽에서 자국 U-23 대표팀이 준우승을 차지한데다 2020-2021 시즌 UEFA 네이션스리그에서 독일을 6-0으로 관광보내고 결선 토너먼트에 진출하는 데 성공한 것은 물론, 준결승전에서 이탈리아에게 복수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결승에서 프랑스에게 패배하며 우승이 좌절되었다. 그래도 유로 2020 이전의 부진한 성적을 낸 것과 유로 2020에서 거둔 성적에 비해 경기 내용이 안 좋았던 것을 생각하면 나름대로 부활했다고 볼 수도 있었으나 카타르 월드컵 16강에서 또다시 승부차기에서 패배하여 탈락하는 바람에 말짱 도루묵이 될 위기에 처했다. 다만 2022-23 시즌 네이션스 리그에는 결선 토너먼트까지 올라간 데다 준결승에서는 이탈리아를 2:1로 이기고 결승에 올라갔으며, 대회 마지막 상대였던 크로아티아와의 경기에서는 승부차기까지 끌고 간 끝에 승리하며 11년만에 메이저 국가대항전에서 우승함에 따라 아직 유럽 내부에서는 아직 저력이 살아있음을 입증하긴 했다.
-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1920년대 ~ 1930, 1966 ~ 70년. 초창기에는 우루과이와 극강의 팀이었다. 오죽하면 1930, 1934, 1938년 월드컵도 수준에 안맞아서 출전을 거절했다. 이때 많은 나라를 a매치로 학살해서 초기의 별명이 비공식 챔피언이었다. 그러다가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다양한 국적의 이민자들로 급조했던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1:0으로 패배하며 해당 별명의 수명이 끝나버렸다. 그러나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우승하면서 전성기를 열기는 했으나 해당 대회가 판정 등의 사항에서 논란이 많은 대회 였고 심판의 덕택 때문에 우승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여론이 안 좋았다.[45] 때문인지 1966년에 우승한 이후로는 단 한번도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없다. 당장 2년 뒤에 열린 유로 1968에서 3위를 한 것을 시작으로,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때 24년만에 4강에 진출했으나 독일에게 승부차기에서 패배하며 탈락. 그리고 유로 1996에서 3위를 기록했다. 게다가 잉글랜드 축구가 성장한 것과는 별개로 잉글랜드 국적 선수들이 대표팀에 왔다 하면 벌어지는 문제점이 생겼는데, 바로 국대에 나온 선수들이 가진 클럽 라이벌리가 국대에서까지 발현된 바람에 단합이 잘 안 되었고, 이는 2014 브라질 월드컵 때는 1994년 지역예선 광탈 이래 20년만에 16강 진출에 실패하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하긴 했다. 마침내'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 4강까지 진출하였으나 덴마크와 러시아랑 연장전을 치르고 온 크로아티아에게 패배한데다 프랑스전에서 패배한 벨기에와의 '3.4위 결정전' 역시 패배하여 대회 4위로 마감했다. 그나마 유로 2020에서는 대부분의 경기를 자국에서 치른 덕분에 홈 이점을 않고 사상 최초로 유로 결승에 오른 동시에 55년만에 메이저 대회 결승전을 치렀으나 이탈리와의 승부차기에서 패배하며 또 우승이 좌절되었다. 즉, 전성기를 맞이할 조건은 거의 대부분 갖췄는데 그 시기를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순간마다 번번히 고배를 마시면서 방점을 찍지 못 하는 것이 반복되는 케이스. 거기다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프랑스와의 맞대결에서 패배해 8강에서 탈락했으며, 그 전에 치렀던 2022-23 시즌 네이션스 리그에서는 헝가리에게 홈에서 4실점하고 원정에서 1실점을 거두는 추태를 보인 채 리그 B로 강등당하고 말았다.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1934년~1938년, 1968년~1970년, 1978년~1982년. 물론 자국에서 열린 첫 월드컵은 꼼수로 우승했기 때문에 논외로 친다. 하지만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는 당당히 실력으로 우승했고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서 깜짝 우승을 차지하더니 그 다음 월드컵에서는 계속 죽을 쑤고 있다.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서는 지역예선부터 스페인에게 밀려 플레이오프로 밀려나더니 플레이오프에서는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도 없는 스웨덴에게 밀려 60년만에 본선 진출에 실패하는 바람에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해당 참사의 주범인 벤투라 감독이 쫓겨난 이후에 임명된 로베르토 만치니가 감독이 된 이후에는 A매치 34경기 무패 및 13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완벽하게 부활했음을 알렸고, 그렇게 리빌딩 된 팀은 유로 2020 예선 전승과 본선 우승을 차지하면서 암흑기를 탈출하는 신호탄을 쏨과 동시에 차후에 열릴 카타르 월드컵의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올랐다. 다만 2020-2021 시즌 네이션스리그에서는 결선 토너먼트에 올라가긴 했으나 준결승전에서 스페인에게 패배하며 우승이 좌절되었다. 그나마 3,4위 결승전에서 벨기에를 꺾고 유종의 미를 거둔것이 위안이라면 위안. 그러나 이후 이탈리아는 카타르 월드컵 예선 당시 불가리아전 무승부와 조르지뉴의 PK 실축으로 인한 스위스전 2무, 그리고 마지막 경기였던 북아일랜드전 무승부로 스위스에게 밀리면서 플레이오프로 떨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이탈리아의 플레이오프 상대는 포르투갈도 끼여 있었으며, 결승에서 이기지 못 한다면 바로 탈락이었던 상황이다. 그러나 포르투갈과 맞붙기 이전에 가졌던 플레이오프 첫 경기에서 FIFA 랭킹 67위에 불과한 약체인 북마케도니아와의 홈 경기에서 1:0으로 패배함에 따라 그대로 탈락하게 되면서 카타르 월드컵 진출에 실패하게 되었다. 결국 2010년부터 시작된 이탈리아 축구가 월드컵에서 맞은 암흑기는 2020년대에도 끊어내는 데 실패한 것은 물론, 더욱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자세한 것은 이탈리아 축구의 저주받은 세대 항목 참조.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1993 코파 아메리카 에콰도르, 2021 코파 아메리카 브라질~현재진행형 아르헨티나는 1978년에 월드컵에서 첫 우승을 차지하였으나, 이는 당시 아르헨티나를 통치하던 군사독재정권의 부정과 비겁한 술수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논외. 이는 1982년 월드컵 스페인에서 아르헨티나가 16강에서 탈락한 것으로 증명된다.[46] 그러나 해당 대회에서 참가했던 선수들 중 한 명인 디에고 마라도나는 다음 월드컵인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개인의 실력과 리더십만으로 팀을 결승으로 올려놓았고, 마지막 상대인 서독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후에 벌어진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또 결승 무대까지 올라갔으나 4년 전에 상대했던 서독에게 1:0으로 패배하는 바람에 우승을 놓치고 말았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의 은퇴와 경제난과 같은 사유로 인해 여러 대회에서 거둔 성적이 초라해져버린 것은 물론, 오랜 기간 동안 부진과 무관이라는 결과에 빠지게 된다. 이후 2010년대에 황금세대가 결집해 2014 월드컵 브라질에서 준우승을 차지했으며, 지역 대회인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2015년과 2016년에 준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2018 러시아 월드컵 16강 탈락과 코파 아메리카 2019 3위를 차지하며 명성에 걸맞지 않은 실적만 냈다. 설상가상으로 이 시기에 메시와 함께 국대 경기를 함께 하였던 선배 선수들과 아구에로가 나이와 질병 등으로 인해 국대나 프로 선수에서 은퇴함에 따라 전력이 약화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젊은 감독인 리오넬 스칼로니가 정식 감독이 된 이후에 로드리고 데 파울, 에밀리아노 마르티네스, 곤살로 몬티엘, 크리스티안 로메로처럼 실력을 갖춘 신예들의 발탁과 부상과 국대 경험이 적거나 없던 중견급 선수들이 클럽에서 보여준 활약을 바탕으로 국가대표에서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하자 상황은 달라지게 되었다. 여기에 자국이 낳은 세계 최고의 슈퍼스타이자 자신들의 우상인 메시에 대한 충성심으로 무장한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선수 생활이 얼마 남지 않은 그를 위해 무조건 코파와 월드컵 우승을 해내겠다는 명확한 동기부여를 가지고 경기에 임하기 시작했다. 결국 코파 아메리카 2021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28년간 이어진 무관 신세를 끝냈으며, 이후 25경기 연속 무패를 달리는 동시에 유로 2020의 우승국이자 자신들이 상대 전적에서 열세를 보이던 이탈리아를 2022 피날리시마에서 3:0으로 격파하고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면서 카타르 월드컵의 강력한 우승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그리고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 첫 경기 당시에 사우디에게 일격을 당하며 조별리그 탈락을 걱정하는 처지가 되기도 했지만 어려운 상황을 모두 이겨내고 결승에 올라 프랑스를 승부차기로 꺾고 통산 3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2024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면서 메이저 대회 3연패를 달성하면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다만 현 시점에서 메시의 나이가 3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는데다 다가올 2026 북중미 월드컵에는 출전 여부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그의 빈 자리를 메꿔줄 대체자를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1970년대, 1980년대 후반. 2010년대 초반. 1970년대에는 희대의 대스타 요한 크루이프를 앞세운 토탈 풋볼 전술로 월드컵 결승에 2회 연속 진출했고, 유로 1988에서 오렌지 삼총사의 활약으로 네덜란드 역사상 첫번째 메이저 대회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후에는 2010년 월드컵과 2014년 월드컵에서 각각 준우승과 3위를 기록했으나 러시아 월드컵 유럽예선 탈락, 2020-2021 시즌 네이션스리그 리그A 조별예선 탈락[47]유로 2020 16강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보이며 암흑기에 머무르는 상태. 다만 2018-2019 네이션스리그에서는 프랑스와 독일을 누르고 결선 토너먼트에 올라간 것은 물론, 해당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긴 했다.
-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1974 FIFA 월드컵 서독에서 주포 그제고시 라토와 중원 사령관인 카지미에시 데이나, 브와디스와프 즈무다, 즈비그니에프 보니에크 등을 앞세워 통산 월드컵 최대 성적인 4강에 진출했으며 라토는 그해 월드컵에서 득점왕을 수상했다. 그 이후 4연속으로 월드컵 본선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시들해졌다가 그 이후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때 본선에 진출했지만 한국에 일격을 당하면서 일찌감치 탈락했다. 그렇지만 그 이후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를 필두로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서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었으나, 권토중래는 커녕 1승 2패로 광탈해 버렸는데, 광탈도 광탈이었지만 특히 최종전이 상당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 2010년대의 폴란드는 이름값은 좋은 선수들이 포진해있는 것에 비해 성적이 안나오는 팀으로 각인이 되어 있는데 이는 그 선수들의 전성기가 맞물리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미 노쇠화로 인해 기량이 하락한 선수들[48]과 전성기가 매우 짧았던 선수들[49]이 주축으로 포진되어있고, 이 선수들이 있을 시기에 폴란드가 피파랭킹 상위권으로 올라섰을 시기여서[50][51] 더 그러한 인식이 박혀버린 감이 있다. 사실상 도금세대..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예선부터 본선 전까지의 차범근호: 예나 지금이나 살얼음판인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그야말로 깡패와 같은 위용을 자랑하였다. 심지어 이 당시는 5개팀으로 이루어진 조에서 1위를 해야만 월드컵 직행이던 시절인데도 잔여경기를 2경기나 남겨두고 월드컵 직행을 확정지어버린다. 홈에서 차례로 카자흐에게 3-0 승, 우즈벡에게 2-1 승, 도쿄 대첩 2-1 역전승, 이어 홈에서 UAE에게 3-0 완승한 후 악명높은 카자흐 원정을 1-1 무승부로 선방하고 곧바로 우즈벡 원정 5-1 대파, 8경기 중 6경기를 치른 시점에 5승 1무(16득 4실)로 승점 16점이라는 무시무시한 성적을 기록해버리며 1위 확정.[52] 이렇게 아시아 예선을 완전히 압살하며 여유 넘치게 진출을 조기 확정한 때는 이 때가 유일하다. 바로 직전 월드컵 예선 때 얼마나 힘들게 월드컵 진출했는지만 생각해봐도 이는 고무적인 일임은 확실했다. 진출이 확정된 차범근호는 곧바로 사생결단의 일본에게 잠실 홈경기에서 0-2로 패하였지만 워낙 대표팀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고 1위는 이미 확정된 상태였기 때문에, 가위바위보도 져선 안된다는 한일전에서 패배하였음에도 당시 크게 비판받지는 않았다.(공동개최국인 일본에게 적당히 져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UAE측에서 제기되기는 하였다.) 이리하여 최종예선의 성적은 6승 1무 1패(19득 7실)라는 압도적 성적이었으며 대표팀의 인기는 당시 기준 역대급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고, 과하다 싶을 정도의 전국민적 기대를 받게 되지만 이후 본선에 가서의 현실은 모두가 알다시피 좋지 않았으며, 그렇게 짧았던 전성기가 마무리되었다. 세계대회에서의 호성적과 별개로 아시아 예선에서 이와같은 압도적인 모습은 이후에 다시 볼 수 없었다.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홈이라는 이점이 있었지만 이전까지 단 1승도 못거두던 팀이 별안간 승승장구하여 조 1위로 2라운드에 진출하지 않나... 날고기는 유럽의 강호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차례차례 꺾고 4위를 기록했었다.
-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상 최초로 원정 첫 16강을 기록했었다.
- 2012 런던 올림픽/축구(남자) 동메달: 자세한 건 2012 런던 올림픽/축구(남자)/동메달 결정전 문서 참조.
-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8강. 마찬가지로 유럽의 강호 이탈리아를 꺾었고, 8강에서 포르투갈을 상대로 3:5로 패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영광이었고, 이후 2010 남아공 월드컵을 통해 44년만에 FIFA 월드컵에 이름을 올렸는데, 첫상대였던 브라질을 상대로는 1-2로 석패해 다시 부활할거라 예상이 되었지만, 포르투갈을 상대로 치른 44년만의 리매치에선 0-7로 박살이 나면서 완벽하게 침몰하였고, 자연히 탈락이 확정되고 말았다.
-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2000 AFC 아시안컵~2006 FIFA 월드컵 직전, 2010 FIFA 월드컵~2014 FIFA 월드컵 직전, 2018 FIFA 월드컵~2024 AFC 아시안컵 직전.
4. 개인
- 아드리아누 레이치 히베이루: 2004~05 인터밀란 시절. 이 때만큼은 제2의 호나우두로 불릴만큼 독보적인 스트라이커였으나 그 이후로는 독보적인 민폐로 각성(...)
- 안드리 셰브첸코: AC 밀란 시절. 이 시절 셰브첸코는 무결점의 스트라이커로 칭송 받으면서 2004년에는 발롱도르까지 수상한다. 그리고 2006년, 첼시로 떠나게 되는데...
-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09~10 시즌 바이에른 뮌헨 부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기 직전까지. 이 기간 동안 슈바인슈타이거는 12~13 시즌에 바이에른 뮌헨 및 분데스리가 사상 최초의 트레블과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전차군단의 통일 후 첫 월드컵 우승에 일조했다.
- 베슬리 스네이더르: 09~10 시즌 인터밀란 ~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이 시절 스네이더르는 인테르의 세리에 A 최초 트레블 달성과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의 전승준을 이끌었다. 선수 본인은 2010년에 받은 개인 수상이 09-10 UEFA 챔피언스 리그 어시스트왕, 2010 UEFA 올해의 클럽 미드필더상, 2010 남아공 월드컵 대회 실버볼과 브론즈슈까지 수상하고 이후 발롱도르에서도 4위를 차지했다.
- 카카: AC 밀란 시절. 이 시기 카카는 이적하자마자 팀의 주축으로 자리잡았고, 특히 2007년에는 팀을 챔피언스 리그 우승으로 이끌고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까지 차지했다.
가만히 서 있다가 월드컵 우승그리고 2009년, 레알 마드리드로 떠나게 되는데... - 파트리크 비에이라: 아스날 FC 시절. 이 시기 비에이라는 97-98 시즌 더블, 01-02 시즌 더블, 03-04 시즌 EPL 무패 우승, 레 블뢰의 유로 2000 우승에 크게 공헌하여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의 아이콘으로 여겨졌던 시기였다.
- 페르난도 토레스: 리버풀 시절. 특히 2008년에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리오넬 메시의 뒤를 이어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가만히 서 있다가 월드컵 우승2그리고 2011년, 첼시로 떠나게 되는데... - 호나우두: 1996~1999년,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4년. 그 이후에도 수준급의 스트라이커였으나 축구황제로서의 호나우두의 명성은 이 시절과 월드컵에서의 활약 덕분이다. 이후 2000년부터는 부상으로 고생하다 2002 한일 월드컵을 기점으로 다시 부활하여 03~04 시즌까지 맹활약하였다.
1994년 월드컵 한정 가만히 서 있다가 월드컵 우승3 다만 2002년은 실력으로 우승했다. - 호나우지뉴: 2004~2006년. 이 시절에는 화려하면서도 실속있는 개인기와 연계 플레이
그리고 독특한 외모로 외계인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축구계 정점을 찍었다. - 라다멜 팔카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시절. 이 때의 팔카오는 라리가 최고의 인간계 공격수라는 칭호와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9골이나 넣으며 콜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넘어 남미 최고의 공격수로 인정받던 시기였다.
- 로빈 반 페르시: 11-12 시즌 아스날, 12-13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일명 '풀 페르시' 시즌. 부상만 없다면 월드 클래스라는 칭호를 받던 반 페르시가 건강하다면 얼마나 좋은 스트라이커인지 증명했던 기간. 11-12 시즌에는 주축 선수들의 이탈로 인해 초반에 강등권 언저리까지 순위가 추락했던 아스날을 거의 혼자 힘으로 이끌다시피 하면서 38경기에서 30골을 넣으며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고 2011-12 PFA 올해의 선수, 2011-12 PFA 올해의 팀, 2011-12 FWA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었다. 이후 우승을 하고 싶다는 야망으로 인해 아스날과의 재계약을 거부하고 여름 이적시장 때 라이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면서 많은 구너들의 속을 쓰리게 하였다. 12-13시즌 맨유에서도 이전보다 약해진 맨유의 전력 속에서도 부상 없이 맹활약하며 2년 연속 리그 득점왕과 함께 염원하던 프리미어리그 우승까지 차지하였다.
- 마이클 오언: 리버풀 FC 시절. 이 시기 오언은 팀의 미니 트레블을 비롯한 엄청난 활약을 바탕으로 2001년에는 발롱도르까지 수상하였다.
- 데쿠: FC 포르투 ~ FC 바르셀로나 시절. 이 시기 데쿠는 FC 포르투의 2002-03 시즌 UEFA 컵 우승과 2003-0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FC 바르셀로나의 2005-06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포르투갈의 유로 2004 준우승과 2006 FIFA 월드컵 독일의 4위를 이끌었다. 특히 2004년에는 발롱도르 2위와 UE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였다.
- 네마냐 비디치, 리오 퍼디난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 두 선수 모두 2000년대 후반 축구사에 길이남을 중앙수비조합인 퍼디치 조합을 이루어 EPL과 UEFA 챔피언스 리그를 비롯한 수많은 트로피들을 팀에 안겨준 시기였다.
- 이케르 카시야스: 2006/07 시즌 레알 마드리드 ~ 유로 2012. 이 시기의 카시야스는 성 이케르라 불리며 라 리가를 넘어 세계 No.1 골키퍼의 자리를 확고하게 지킨 시기이자 굳이 레알팬이나 스페인팬이 아니어도 타팀, 타국대 팬들에게도 호감을 얻던 시기였다. 또한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에게는 세 번의 라 리가 우승과 한 번의 코파 델 레이 우승 트로피를 안겨주고, 2010/11 시즌에는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를 2002/03 시즌 이후 오랜만에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에 올려놓으면서 팀의 16강 징크스 극복에 크게 일조하고 다음 시즌에도 2회 연속 4강 진출에 일조한다. 그리고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부동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며 유로 2008,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유로 2012를 차례대로 우승하는데 크게 일조하며 조국의 메이저대회 3연패를 이끌고, 개인으로서는 세 대회 모두 대회 베스트일레븐에 골키퍼 자리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고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FIFA 월드컵 골든 글러브까지 수상하는 영광을 누린다. 그리고 이 시기의 카시야스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FIFA FIFPro 월드 XI 5회 연속 선정, 2007년부터 2012년까지 UEFA 올해의 팀 6회 연속 선정 되는 등 역대 각 베스트일레븐 최다 선정 기록을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2012/13 시즌부터 기량의 저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하향세를 겪게 되고,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는 32강 네덜란드전에서 1:5 패배를 경험하고 그 다음 벌어진 칠레와의 경기에서도 0:2로 패하며 조국 스페인의 조별리그 광탈을 겪고만다. 동시에 이 시기 동안 여러 루머들과 구설수들까지 엮여버리면서 카시야스의 호감 이미지는 많이 벗겨지게 된다.
- 마이콘: 2008/09 시즌 ~ 2010/11 시즌 인터밀란 . 이 시기의 마이콘은 그야말로 라이트백이라는 포지션을 상징하는 존재이자 우측면 지배자고 여겨질 만큼 뛰어난 평가를 받았고, 심지어 The Right라는 별명까지도 생길 정도였다. 특히 2009/10 시즌에는 소속팀 인터밀란의 구단 및 세리에 A 사상 최초의 트레블 달성에 크게 일조하면서 UEFA 올해의 수비수상을 수상하였고, 얼마 안 있어 개최된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비록 조국 브라질은 8강에서 탈락했지만 마이콘 개인으로서는 이 대회에서도 엄청난 맹활약을 펼치며 대회 올스타팀에 선정되었다. 결국 2010년 엄청난 활약을 펼친 마이콘은 FIFA FIFPro 월드 XI과 UEFA 올해의 팀의 라이트백 자리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린다.
- 앙헬 디 마리아: 2013~14 시즌 레알 마드리드 ~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이 시기의 디 마리아는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의 10번째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크게 일조하며 라 데시마를 달성하였고, 얼마 안가서 개최된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치며 조국 아르헨티나의 준우승에 크게 일조한다. 이 2014년의 활약으로 디 마리아는 FIFA FIFPro 월드 XI과 UEFA 올해의 팀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린다.
- 송종국: 2001년 ~ 2002/03 시즌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이 시기 송종국은 2001년 K리그 신인상에, 2002년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히딩크호의 4강 신화의 주역이자 대회에서 687분을 뛰고 조별리그 포르투갈 전에서는 당대 최고의 윙어였던 루이스 피구를 막아내는 활약을 보이고, 3/4위전 터키 전에서는 마지막 골까지 넣는다. 이후 2002/03 시즌에는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으로 이적하여 조별리그 유벤투스 전에서 팬들에게 회자될만한 엄청난 활약을 비롯해 팀내 붙박이 주전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 다음 시즌부터는 감독과의 불화, 현지 부적응, 사생활 문제 등으로 인해 하향세를 겪는다.
- 고종수: 1997년~2001년. 이 때의 고종수는 안정환, 이동국과 함께 K리그의 흥행을 이끄는 트로이카였고, 심지어 히딩크로의 황태자로 불린 시기였다.
- 설기현: 2000년 로얄 앤트워프 시절 ~ 레딩 FC 시절. 이 시기의 설기현은 처음 로얄 앤트워프에 입단해 첫 시즌 25경기동안 11골(리그 10골,컵 대회 1골)을 넣고 차범근 이후 역대 두 번째 유럽리거 시즌 10골을 기록한다. 이후 2001년에 벨기에의 명문팀 RSC 안데를레흐트로 이적해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이고 이후 2002 한일 월드컵 16강 이탈리아전에서 극적인 동점골을 넣으며 4강 신화의 주역 중 한 명이 되고 2002년 발롱도르 후보자 1차 리스트에 오르게 된다. 2002~03 시즌에는 시즌 13골을 기록하고, 2003~04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하여 예선라운드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한 한국인 기록을 세우고 마찬가지로 예선 라운드이긴 하지만 한국인 첫 챔피언스리그 골도 기록한다. 이후 잉글랜드의 2부리그인 챔피언십 리그 팀인 울버햄튼 원더러스로 이적하고, 이 팀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친다. 그 다음 2006 독일 월드컵에도 출전하여 32강 조별리그 2차전 프랑스전에서 박지성의 골로 연결되는 조재진의 헤딩을 크로스 패스를 날리면서 귀중한 무승부에 일조하고, 곧바로 레딩 FC 이적하면서 골과 어시스트를 꾸준히 기록하는 등 좋은 활약을 이어간다. 하지만 그 다음 시즌 풀럼 FC로 이적하면서 조금씩 부진에 빠지기 시작하고, 이후 중동 무대를 거쳐 K리그에 오지만 K리그 무대에서 영 좋지 먹튀급의 활약을 펼치게 된다.
- 잔루카 잠브로타: 유벤투스 FC 시절. 이 시기 잠브로타는 당대 최고의 라이트백 중 한 명이었을 뿐만 아니라 소속팀 유벤투스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활약하며 최고의 풀백 중 하나로 꼽힌 시기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소속팀 유벤투스의 여러번의 세리에 A 우승 뿐만 아니라 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조국 이탈리아의 유로 2000 준우승, 2006 FIFA 월드컵 독일 우승에도 크게 일조하였고, 2006년 월드컵에서의 맹활약을 통해 2006년 FIFA FIFPro 월드 XI과 UEFA 올해의 팀에 모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 하비에르 사비올라: 1998년 리베르 플라테 ~ 2001년 FIFA U-20 월드컵. 이 시기 사비올라는 2001년 FC 바르셀로나에 이적하기 전까지 86경기에서 45골을 터트리며 디에고 마라도나 이후 10대 시절 가장 완성된 기량을 선보인 선수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였고, 2001년 FIFA U-20 월드컵에서는 두 번의 해트트릭을 포함한 11골을 넣으며 득점왕과 MVP를 독식하고, 이 11골은 역대 FIFA U-20 월드컵에서도 단일대회 최다골 1위 기록을 유지하고 있다.
- 후안 마타: 2011/12 시즌 ~ 2012/13 시즌 첼시 FC 시절. 이 시기의 후안 마타는 처음 첼시로 이적한 데뷔시즌인 2011-12 시즌에는 구단의 사상 첫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크게 일조하며 빅 이어를 안겨주고, 그리고 팀의 통산 7번째 FA컵 우승 트로피를 안겨주면서 시즌 더블을 기록하고 본인은 그 시즌에 통산 52경기 12골 20도움을 기록하며 첼시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유로 2012에서는 비록 후보였지만 결승전에 교체출전하여 스페인의 우승을 이끌었다. 그 다음 시즌인 2012-13 시즌에는 구단의 사상 첫 UEFA 유로파 리그 트로피를 안겨주고 본인은 그 시즌에 시즌 통산 19골 35도움을 기록하고 리그에서만 17도움을 기록하며 그 시즌 EPL 도움왕을 수상하면서 첼시 올해의 선수상을 두 시즌 연속 수상하였다.
- 사무엘 에투: FC 바르셀로나 ~ 인터밀란 시절. 먼저 FC 바르셀로나 시절의 에투는 당대 최고의 스트라이커이자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한 명이었고 04-05 시즌 24골, 05-06 시즌 26골, 08-09 시즌 30골에 라 리가 우승 3회, 코파 델 레이 우승 1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2회, 08-09 시즌 트레블을 팀에 선물하였고, 국가대표에서도 2008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에투 본인도 2005년에는 FIFA 올해의 선수상 2위, FIFA FIFPro 월드 XI, UEFA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고, 2006년에도 라 리가 득점왕, UEFA 챔피언스 리그 도움왕, UEFA 올해의 클럽 공격수,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득점왕에 FIFA FIFPro 월드 XI, UEFA 올해의 팀에도 2년 연속으로 선정, 2008년에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득점왕 등 개인 커리어와 팀 커리어 모두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던 시기이다. 그리고 인터밀란 시절에도 주전으로 활약하면서 09~10 시즌 인터밀란의 세리에 A 클럽 최초의 트레블을 포함하여 세리에 A 우승 1회, 코파 이탈리아 우승 2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1회를 팀에 선물하였다. 또한 에투 본인도 10-11 시즌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을 차지하였다.
- 디에고 밀리토: 2005/06 시즌 레알 사라고사 ~ 2009/10 시즌 인터밀란, 2011/12 시즌 인터밀란. 2005/06 시즌 사라고사에 이적한 밀리토는 15골을 넣었고, 그 중에서도 코파 델 레이 준결승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4골을 넣는 활약을 선보인다. 2006-07 시즌에도 통산 23골을 기록하면서 소속팀 사라고사를 UEFA 컵 출전으로 이끈다. 2007-08 시즌은 여러 대내외적인 악재속에서도 부상당하기 전인 2008 4월 전까지는 15골로 득점 랭킹 2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2008-09 시즌 다시 복귀한 제노아 CFC에서는 리그 24득점으로 세리에 A 득점 2위, 팀은 리그 5위로 UEFA 유로파 리그 출전에 기여하였다. 2009/10 시즌에 이적한 인터밀란에서는 팀의 주전 스트라이커로 세리에 A, 코파 이탈리아, UEFA 챔피언스 리그를 가리지 않는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면서 팀의 세리에 A 클럽 최초의 트레블 달성의 일등공신이 되었고[53] 밀리토 개인으로서도 리그에서는 22골로 득점 2위,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6골을 넣으며 득점 4위를 기록하는 것과 동시에 UEFA 올해의 클럽 최우수 선수상과 최우수 공격수상,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상, 올해의 외국인 선수상 등 클럽에서 받을 수 있는 상들은 거의 다 휩쓸었다. 이후 2011/12 시즌에서는 리그에서 24골을 넣으며 세리에 A 득점 순위 2위를 기록하면서 잠깐 부활하게 된다.
- 디에고 포를란: 비야레알 CF ~ 2011 코파 아메리카 아르헨티나. 비야레알 시기부터의 포를란은 이적 첫 시즌부터 리그 38경기 25골로 라리가 득점왕과 유러피언 골든슈를 수상하고. 두 번째 시즌에도 모든 대회를 통틀어 45경기 13골, 마지막 세 번째 시즌에는 리그에서 36경기 19골을 넣는 활약을 선보인다. 그 다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시절에는 이적 첫 시즌에는 모든 대회를 통틀어 53경기 23골 5도움을 기록하고 두 번째 시즌에는 리그에서만 33경기 32골 10도움이라는 무시무시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생애 두 번째 라리가 득점왕과 유러피언 골든슈를 수상한다. 세 번째 시즌에도 모든 대회를 통틀어 56경기 28골 10도움을 기록하고 특히 UEFA 유로파 리그에서는 9경기 6골의 활약으로 팀의 사상 첫 유로파 리그 우승을 이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을 월드컵 4위로 이끄는 것과 동시에 포를란 본인은 5골을 넣는 활약상과 함께 대회 골든볼 수상, 대회 베스트 XI에 선정되었다. 아틀레티코에서의 마지막 네 번째 시즌은 이전 시즌들과는 다르게 모든 대회 통틀어 42경기 10골 5도움이라는 아쉬운 성적이었지만 그래도 10골은 넣어주었다. 바로 이어진 2011 코파 아메리카 아르헨티나에서도 결승전에서 두 골을 넣으면서 루이스 수아레스와 함께 우루과이의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이끌었다.
- 세스크 파브레가스: 아스날 FC 시절. 이 시기 파브레가스는 아스날의 2005-06 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을 포함하여 주전 미드필더로 엄청난 활약상을 보여주었고,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도 주전 미드필더로 활약하면서 UEFA 유로 2008과 2010 남아공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파브레가스 개인으로서도 2007-08 시즌 EPL 도움왕 수상, UEFA 올해의 팀에서도 2006년과 2008년, PFA 올해의 팀에서도 2007-08 시즌과 2009-10 시즌에 미드필더 한 자리에 선정될 정도였다. 그러나 FC 바르셀로나 이적 이후 플레이스타일에서의 문제점이 극대화되면서 점점 기량이 하락하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 클럽에서의 활약상은 2014-15 시즌 EPL 도움왕을 차지한 첼시 FC 때를 제외하면 제대로 없었고, 스페인 대표팀에서도 UEFA 유로 2012 우승 이후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면서 20대 후반에 빠르게 기량이 하락해 버렸다.
- 조지 베스트: 1963/1964 데뷔시즌 ~ 1970/1971 발롱도르 3위.
- 야리 리트마넨: 아약스 시절 초중기시절 1993~1996. 아약스 첫 시즌이였던 1993-94 시즌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우승 및 득점왕 그 다음시즌인 1994-95 시즌엔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2연패 및 챔피언스리그 우승 그리고 발롱도르 3위 그리고 그 다음인 1995-96 시즌엔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3연패 및 챔피언스리그 준우승 및 챔피언스리그 득점왕때까지 그 뒤 1996~1997시즌 부터는 잦은 부상에 시달렸고, 바르셀로나 이적 이후부터는...
- 앨런 스미스 - 2000~2001 시즌. 리즈 시절의 어원이 된 인물.
[1] 전성기 당시 멤버였던 빌리 브렘너는 홈구장 엘런드 로드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2] 은하 군단 초기.[3] 챔피언스리그 4회 우승 및 3연패.[4] 루이스 수아레스 미라몬테스와 라슬로 쿠발라, 졸탄 치보르, 산도르 코츠시스가 활약하던 시절[5] 요한 크루이프가 활약하던 시절[6] 요한 크루이프 감독의 드림팀 시절[7] 프랑크 레이카르트 감독 하에 호나우지뉴와 사무엘 에투가 활약하던 시절[8] 모든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며 전관왕(트레블)을 달성한 펩 과르디올라 감독 시절[9] 다시 한 번 더 5관왕(트레블)을 달성한 루이스 엔리케 감독 시절[10] 1935-36 시즌 직후 강등 예정이었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레알 오비에도가 안방 구장 파괴로 복구하느라 참가하지 못해 오사수나와 1939-40 시즌을 앞두고 강등 플레이오프전을 펼치고 구사일생으로 잔류했다. 스쿼드의 질이 수직상승하여(이 과정에서 프랑코 군부와 결탁했다는 논란이 있다.) 2연패를 거두며 발렌시아, 바르셀로나와 함께 1940년대를 주름잡은 주요 구단으로 발돋움했다. 한편 레알 마드리드는 주축 선수들이 프랑코 정권으로부터 추방당하며 최악의 암흑기를 맞이했다.[11] 라도미르 안티치 감독의 더블 시즌[12] 이 시기의 도르트문트는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워 정상급 선수들을 놓고 독일 안팎의 구단들과 쩐의 전쟁을 벌여 수 차례 승리하였고. 같은 기간에 오트마어 히츠펠트 감독이 이들을 지도하여 1994-95, 1995-96 시즌 연속 분데스리가 우승과 1996-97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했다.[13] 빅이어를 영구 소장할 권리를 가질 조건은 유러피언 컵/챔피언스리그(단, 유러피언 컵이 챔피언스리그로 개칭된 이후에 3연패를 한 팀은 이미 유러피언 컵 창설 직후 다섯 시즌 연속 우승한 레알 마드리드밖에 없다. 따라서 다른 구단이 챔스 3연패를 했을 경우, UEFA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미지수. 그리고 과거형을 쓴 이유는 후술.) 3시즌 연속 우승을 하거나 유러피언 컵 및 챔피언스 리그에서 다섯 번 째 우승했을 때에만 주어진다.(그러나 UEFA는 빅이어를 영구히 소장할 수 있는 제도를 폐지하기로 했고, 이는 2014-2015 시즌에서 FC 바르셀로나가 구단의 5번째 빅이어를 들어올리면서 영구 소장 조건을 갖춤과 동시에 발효되었다.) 현재 UEFA 소속 클럽들 중에서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라도 만족시킨 구단은 FC 바이에른 뮌헨을 포함해서 레알 마드리드(13회 우승), AC 밀란(7회 우승), 리버플 FC(6회 우승), 레알 마드리드, AFC 아약스(4회밖에 우승하지 못 했으나, 유러피언 컵 시절 대회 3연패 달성), FC 바르셀로나(5회 우승) 5팀 뿐이다. 이들 중 유러피안 컵 3연패는 FC 바이에른 뮌헨(1973-1974, 1974-1975, 1975-1976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과 레알 마드리드(1955-1956, 1956-1957, 1957-1958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 AFC 아약스(1970-1971, 1971-1972, 1972-1973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 세 팀 밖에 없다. 그리고 빅이어를 소장하기 위한 두 조건 모두 달성한 팀은 FC 바이에른 뮌헨(1974~1976년 유러피언 컵 3연속 우승 및 챔스/유러피언 컵 6회 우승)과 레알 마드리드(1956년~1958년 유러피언컵 연속 우승 및 챔피언스리그 최다 우승 횟수인 14회 우승.), 단 둘 밖에 없다.[14] 또한 빅이어를 영구히 소장할 자격을 얻은 구단은 UEFA 영예의 배지를 달 자격 역시 갖춘다. 즉, FC 바이에른 뮌헨은 UEFA 소속 프로축구 클럽들 중에서 단 6팀밖에 없는 UEFA 영예의 뱃지를 수여받은 클럽들 중 하나이다.[15] 주로 포칼 탈락이 원인이었다. 게다가 분데스리가에서는 뮌헨과 같은 시기에 전성기를 맞았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게 밀린 것도 있다.[16] 오히려 1974-1975 시즌 분데스리가에서는 최종 10위까지 내려가며 구단이 차지한 리그 순위 중 뒤에서 공동 2등으로 기록되었을 정도.(바이에른 뮌헨이 최종 10위를 차지한 또 다른 시즌은 1991-1992 시즌. 참고로 뒤에서 1위는 1977-1978 시즌에 기록한 최종 12위.)[17] 다만 로이터와 콜러는 월드컵이 끝나고 약 1년 후에 유벤투스로 갔다가 1992년에 도르트문트로 이적한 후에 거기서 10년 넘게 뛰다가 은퇴한데다가 이 시기에 챔스 우승까지 경험했기 때문에 도르트문트 레전드로 보는 경향이 더 강하며, 톤은 1994년에 샬케로 돌아간 뒤에 8년동안 뛰다가 은퇴하였다. 다만, 톤은 샬케에서 유스 시절을 보낸 후에 프로데뷔까지 했기 때문에 당연한 선택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나마 아우겐탈러와, 아우만, 퓔글러는 선수시절의 전부 내지 절대다수를 바이에른 뮌헨에서 보내긴 했다.(아우겐탈러는 프로선수로 지냈던 기간 전부를 뮌헨에서 보냈고, 아우만은 선수 말년에 터키로 이적해서 1년간 뛴 것을 제외하면 프로선수 기간 거의 전부를 뮌헨에 바쳤다. 그리고 퓔글러는 SE 프라이징 시기와 공백기를 포함한 7년을 제외하면 나머지 16년을 바이에른 뮌헨과 리저브 팀인 바이에른 뮌헨 II에서 뛰었다.)[18] 다만 포칼은 32강에서 만난 마그데부르크와의 승부차기에서 패배하면서 탈락했다. 두 가지 아이러니한 사실은, 해당 시즌의 포칼 우승팀은 샬케 04였으며, 8강까지 올라간 마그데부르크를 떨어뜨린 팀도 바로 샬케였다.[19] 다만 1970년대에 열린 메이저 대회들에서 독일에게 우승을 안겨준 바이에른 뮌헨 출신 국대 멤버들은 1974년 월드컵 당시에 벤치멤버로만 나온 카펠만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국가대항전에서 뛰던 시기와 소속 클럽에서 뛰던 시기가 대체로 같았던 반면(적어도 이들은 1972년과 1974년에 열린 두 메이저대회의 우승 멤버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2006년에 열렸던 자국 월드컵과 유로 2008 당시 당시에 뛰던 독일 국대 선수들 중 훗날 바이에른 뮌헨의 트레블에 공헌했던 선수는 람과 슈바인슈타이거가 전부였다. (당시 바이에른 뮌헨에서 뛰던 선수로 범위를 넓힌다면 미로슬라프 클로제와 미하엘 발락도 포함되기는 한다. 참고로 저 둘은 한일 월드컵에 출전한 경험이 있었으며, 심지어 발락은 유로 2000에서도 뛰었다. 다만 발락은 자국 월드컵 종료 이후 첼시로 가서 뛰다가 다시 독일로 돌아와서 레버쿠젠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은퇴했으며, 클로제는 2011-2012 시즌부터 라치오 소속으로 뛰다가 은퇴하였다.) 람과 슈바인슈타이거가 2006 월드컵에서 뛰던 당시에 고메스는 VfB 슈투트가르트 소속이었으며, 해당 대회가 끝난 이후에 국대에 첫 소집되었다. 노이어는 이제 막 샬케 성인팀에 데뷔하던 때였으며, 뮐러와 크로스, 보아텡, 바트슈투버는 모두 자국에서 개최한 2번째 월드컵이 끝난 이후에 클럽과 국대 성인팀에 데뷔하였다. 이후에 열린 남아공 월드컵 당시 보아텡은 맨시티, 노이어는 샬케 소속이었다. 그리고 크로스는 브라질 월드컵 이후에, 슈바인슈타이거는 2015년에 각각 레알과 맨유로 이적해버리는 바람에 유로 2016부터는 바이에른 뮌헨의 선수가 아니게 되었다. 또한 람은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을 끝으로 독일 국대를 떠났다.(참고로 람처럼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 이후 독일 축구 국대팀을 은퇴한 선수가 바로 그와 함께 바이에른과 국대에서 뛴 동료이자 해당 대회에서 호나우두를 제치고 월드컵 득점왕으로 등극한 미로슬라프 클로제였다.) 그나마 이 6명은 월드컵에 나가서 우승이라도 해봤지, 트레블 이후 바이에른을 떠나 피오렌티나로 이적했던 고메스는 브라질 월드컵에 참여하는 독일 국대 선수 명단에서 제외되고 말았던데다 본인이 선수 시절에 유일하게 참여했던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비극을 몸소 겪고 말았다.그래도 얘는 장기 부상으로 브라질에 못 간 데다가 국대에 복귀하자마자 또 큰 부상을 당해서 2015년 이후 국대로 선발되지 못 한 홀거슈투버 보다는 사정이 낫다 다만 두 명 모두 축구 선수로 뛰던 기간에 딱 한번 나갔던 월드컵에서 고메스는 험한 꼴을 당하고 돌아온 반면, 그가 못 나간 남아공 월드컵에서 교체 자원으로 출전한 바트슈투버는 3위를 찍고 돌아왔던 것이 함정 그리고 2013-14 시즌부터 바이에른 뮌헨에 합류한 마리오 괴체는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어 독일을 우승으로 이끌긴 했으나, 정작 뮌헨에서의 커리어는 남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 한 채 타 팀으로 떠나고 말았다.[20] 단, 2020년 클럽 월드컵 대회는 코로나로 인해 2021년 2월에 개최되었다.[21] 결국 시즌 후 열린 이적시장에서 FC 바르셀로나에 판매되면서 구단을 떠났다.[22] 특히 두 윙어인 자네와, 그나브리, 새로 영입한 마네의 부진이 후반기에 더욱 두드러졌다. 또한, 뮐러는 노쇠화와 연계 플레이를 해줄 스트라이커의 부재로 득점력이 줄었으며, 무시알라도 전반전과 같은 득점력을 뽑아내지 못 하고 있다.[23] 2023-24 시즌에 돌풍을 일으키면서 무패 우승을 거둔 레버쿠젠에게 패배한 것은 이해한다고 쳐도 2위로 끝낼 수 있었던 기회조차 호펜하임 홈에서 2:4로 참패를 당하는 바람에 같은 시즌의 레버쿠젠처럼 돌풍을 일으킨 팀이자 최종전에서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4:0으로 이긴 VfB 슈트트가르트와의 준우승 경쟁에서 승점 1점 차이로 밀려서 3위로 내려갔다.[24] 단 포칼은 60년대와 90년대에 한 번씩 우승하기도 하였다.[25] 실제로 1970년대에 보루시아 묀헨글라트가 리그에서 우승한 횟수가 바이에른 뮌헨이 리그에서 우승한 횟수(3회)보다 더 많다. 바이에른 뮌헨이 리그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2013년 이후 같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26] 바이에른은 강등된 적은 없지만 통합리가 창설 멤버에 들지 못했다. 통합 분데스리가가 63년 시작됐지만 DFB가 1부리가 기준을 충족하더라도 같은 연고지의 2팀을 넣는 것을 거부함에 따라(당시에는 바이에른보다 TSV 1860 뮌헨이 더 강팀이었다. 남부 오베르리가에서 1860은 우승, 바이에른 뮌헨은 3위를 해서 참여 자체는 문제가 없으나 연고지가 같아서 거부되었다.) 참여하지 못하였고, 2년 후인 65-66시즌부터 분데스리가에 군림했다.[27] 그것도 크루이프가 감독으로 다시 돌아오고 난 뒤에야 달성했다.[28] 이때부터 시작된 거대 자본을 가진 구단주들이 5대 리그에 쓰는 돈이 많아지면서 모든 상황이 이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고, 자연히 중소 규모의 에레디비시는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기존의 방식과는 달리, 빅클럽 관계자들이나 거대 자본을 가진 구단주들이 중소규모 리그의 선수들을 해당 국가에서 유망주 취급을 받는 시절부터 찜해놓고 데려가는 방식으로 바뀌는 바람에 에레디비시가 중계무역으로 얻는 수입이 크게 감소하였다. 그렁다고 해서 에레디비시가 내수 시장만으로 버틸 수 있는 규모는 아닌데다가 리그의 소속된 선수들의 질적 저하로 인해 경쟁 동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29] 이 중 고든 스트라칸은 후에 퍼거슨 감독을 따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한다.[30] 다만 우승 자체는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결승에서 축구 역사상 최강의 팀들 중 하나인 매직 마자르를 상대로 혈투 끝에 이기는 베른의 기적을 쓰면서 처음으로 이루긴 했다. 허나 이때는 독일 축구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 때로 봐야 맞다. 그 전까지 나간 월드컵 대회의 수는 딱 두 번 뿐이었으며 그마저도 각각 3위 및 1라운드 탈락으로 그쳤으며(무엇보다 독일이 처음으로 출전한 1934년 월드컵은 무솔리니가 자국과 파시스트 사상으로 무장한 동맹국인 독일이 우승과 준우승을 나눠먹도록 조작을 시도한 대회였으나 준결승에서 체코슬로바키아한테 패배한 탓에 이렇게 된 것이고, 4년 뒤에 열린 월드컵에서는 안슐루스로 인해 해당 월드컵에 오스트리아가 강제로 나오지 못 한 것도 모자라 자신들을 합병한 독일 소속으로 뛰어야 한다는 구 오스트리아 국대 출신 선수들이 불만을 갖고 벌인 태업으로 저런 결과를 맞이한 것이다.), 무엇보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는 자신들이 일으킨 2차대전으로 인해 국제대회가 중지되어 버린데다 그에 대한 벌로 전후 메이저 대회 출전 금지라는 제제를 받아 1954년 월드컵까지 국제 대회에 나갈 수 없었기 때문. 실제로 스위스 월드컵 우승 이후에 열린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3위를 했는데,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 뒤에 열린 칠레 월드컵에서는 8강이라는 충격을 겪었다. 이는 당시 국대 축구의 근간이 되는 리그 축구를 개혁해야 할 필요를 느꼈고,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분데스리가였다. 결정적으로 스위스 월드컵 결승전 당시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이 메스엠페타민을 먹고 뛰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963년까지는 약물 관련 규정이 없어서 넘어갔을 뿐, 지금 같았으면 우승 취소는 기본에 최소 몇 년간 메이저 대회와 A매치 출전 금지 처분을 받는 것이 확정될 게 뻔하다. 그리고 위법성 여부와 도의적인 비난은 차지하더라도 결국 약물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상대를 정당한 방법으로는 이기지 못 한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과 다름없다.(실제로 해당 대회 조별리그에서 무려 3-8로 졌었다. 다만 해당 대회의 대진이 특이했던 것을 파악한 제프 헤어베어거 감독이 일부러 헝가리에게 패배하고자 2군 정도의 선수들만 내보내서 치르게 한 것. 자세한 건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항목과 베른의 기적 항목 참조. 물론 이것도 약물을 사용한 것 만큼 비난받아야 할 사안이 아닐 뿐, 스포츠 정신을 위배한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잘한 행동은 아니다.) 따라서 저 때를 전성기로 봐줄 이유는 더더욱 없다.[31] 그나마 1982년에 열린 월드컵에서는 준우승을 하기는 했으나 히혼의 수치로 인해 의미가 크게 퇴색되었다.[32] 그래도 1996년 유로 우승, 2002년 한일 월드컵 준우승이라는 기록을 세우긴 했다. 그러나 후자는 월드컵 유럽예선에서는 PO까지 밀리며 탈락할 위기에 처하다가 간신히 한국행 티켓을 얻는 추태를 보였으며, 무엇보다 본선에서는 조별리그부터 준결승까지 자기네보다 훨씬 약한 팀들만 상대하다 결승전에서 브라질을 만나 침몰한 거기 때문에 암흑기를 끝냈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2년 뒤에 열린 유로에서는 조별리그에서 광탈하고 만다.[33] 심지어 이들이 아시아 원정을 와서 경기를 치렀던 2004년 당시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1-3으로 패배하는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 게다가 해당 경기에 나섰던 독일 선수들은 분데스리가에서도 정예로 꼽힌 이들이었던 반면, 상대였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박지성이나 이영표와 같은 유럽파가 빠진 1.5군급 전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사단이 난 것이다.[34] 이 될 뻔 했으나 규정 변경으로 인해 다음 시즌에도 리그 A 소속으로 나오게 되었다.[35] 이마저도 포르투갈을 2-4로 털지 않았다면 프랑스전 패배와 헝가리전 무승부에 발목이 잡혀 탈락할 뻔 했다.(게다가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헝가리전에서 독일이 패배했다면 탈락 확정이었다.), 그리고 16강 상대인 잉글랜드는 역대 전적에서 우위를 가지고 있는데다 경기 장소인 웸블리 스타디움에서는 독일이 수십 년이나 패배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경기 내내 한 골도 못 넣은 채로 졸전만 펼치다 후반전에 두 골을 내리 얻어맞고 패배하면서 탈락했다.[36] 게다가 같은 조에 배속된 잉글랜드 상대로 이탈리아가 1승을 거두고 헝가리는 아예 2승을 거둘 때 독일 혼자 2무를 거뒀으며, 해당 조에서 제일 약체로 예상되었던 헝가리 상대로는 원정에서 비긴데다 홈에서는 아예 패배하는 바람에 결선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한 최대 원인이 되고 말았다.[37] 단 1962년 월드컵에서는 펠레가 대회 초반에 부상당했으나 가린샤와 같은 국대 동료들이 그의 빈자리를 잘 메워준 덕분에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자국을 우승시키려는 잉글랜드의 계략에 제일 큰 걸림돌 중 하나인 브라질에게 온갖 태클과 편파판정을 시전한 끝에 조기탈락을 당해서 제외. 오죽했으면 펠레가 선수 보호 제도를 만들지 않으면 다음 월드컵은 불참하겠다고 했을 정이며, 실제로 잉글랜드 월드컵 이후 국가대표를 은퇴했다가 주변의 설득과 제도 정비 덕분에 간신히 돌아왔을 정도.[38] 다만 2001년 코파 아메리카 콜롬비아에서는 8강 온두라스전에서 0-2로 패배하는 바람에 11개국 중 6위라는 중위권 성적으로 대회를 마쳤으며, 이를 증명하듯 한일월드컵 남아공 예선에서는 부진했다. 게다가 본선에서 만난 팀은 잉글랜드와 독일, 벨기에를 제외하면 죄다 브라질보다 한 두 수 이상 처지는 팀들이었다. 그래도 7전 전승으로 우승하는데 성공하면서 전성기의 정점을 찍었으며, 한일 월드컵이 끝난 이후에 열린 2004년 코파 아메리카 페루에서는 또 한 번 더 우승컵을 들어올리면서 전성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2006년 이전까지는 말이다.[39] 그래도 2007년 코파 아메리카 베네수엘라에서는 우승을 차지함과 동시에 연속 우승 기록을 또 세웠다.[40]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의 마크에 별이 4개인 이유는 월드컵이 생기기 이전에 치른 올림픽 축구종목에서 2번 우승했기 때문이다. 우루과이만 유일하게 올림픽 우승도 월드컵 우승과 동급으로 치는데 당시 우루과이의 실력을 인정하기 때문에 월드컵 우승 경험은 2번인데 별이 4개인 것에 대해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이다. 문제는 1950년 월드컵을 끝으로 4강이 최대성적이라는 게 문제. 그나마도 지역예선 광탈이 더 많았고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당시에는 플레이오프에 떨어져서 코스타리카와 맞붙어서 겨우 올라오는 바람에 지역예선을 포함해서 월드컵 역사상 최다경기 기록팀(총 27경기)이라는 기록에 오르기까지 했다. 그나마도 에콰도르가 칠레를 이기면 플레이오프의 기회조차 없었다. 위의 프랑스는 2006년 월드컵에서 준우승이라도 했다.[41] 근데 이 대륙간 플레이오프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부터 4대회 연속이다.[42] 단 조별리그 2경기 만에 탈락한 코파 아메리카 센타나리오는 예외.[43] 그 1골도 1차선 상대인 독일 소속 선수 마츠 후멜스가 자책골이었다. 즉, 프랑스는 해당 경기에서 자력으로 필드골을 넣기는 커넝 프리킥이나 페널티킥 골 조차 없었다.[44] 정확히는 헝가리 인민 공화국 성립~1956년 헝가리 혁명 이전.[45] 하지만 그렇다고 1934년 이탈리아, 1978 아르헨티나 대회만큼 막장은 전혀 아니었고, 잉글랜드가 오심의 피해를 본 부분도 많았다.[46] 해당 월드컵이 개막한 다음 날 아르헨티나는 영국과 벌인 포클랜드 전쟁에서 마지막 방어선인 포트 스탠리의 텀블다운이 함락되며 패전하였다. 이러한 소식은 군사독재정권이 통제하던 아르헨티나 본토에서는 언론의 보도제로 인해 차단되고 조작되어 자기들에게 유리한 내용만 전달되었으나, 월드컵이 열리던 스페인에서는 당연히 언론의 보도통제 같은 건 전혀 없이 제대로 된 전황이 송출되고 있었다. 문제는 조국의 패배라는 진상을 알게 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사기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된 실력 발휘를 할 수 없었고, 결국 탈락으로 이어진 것. 그리고 월드컵 중계를 통해 전쟁 결과를 알게 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고, 결국 군인이 아닌 민간인 출신인 라울 알폰신의 당선으로 인해 군부독재정권은 붕괴하고 만다.[47] 단, A조 2위로 강등은 면했다.[48] 우카시 피슈체크, 야쿠프 브와슈치코프스키 등[49] 아르카디우스 밀리크, 크시슈토프 피옹테크, 그제고시 크리호비아크 등[50]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톱시드를 차지했을 당시 폴란드의 피파랭킹은 6위였고 월드컵 직전까지는 8위였다.[51] 당시 폴란드가 파피랭킹 상위권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로 2016에서 8강 진출과 러시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비교적 쉬운 조에 편성되어(덴마크를 제외하면 딱히 경쟁력 있는 팀이 없었다.) 승승장구 하게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52] 이 시점 2,3위인 UAE와 일본은 서로 비겨버리면서 겨우 승점 8점과 7점에 그치고 대한민국 자력 1위를 확정시켰다.[53] 특히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는 혼자서 두 골을 넣으면서 결승전 공식 MOM에 선정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