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22:23:56

저우언라이/생애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저우언라이

1. 전반기(1898~1924)
1.1. 유년기(1898~1912)1.2. 난카이 중학교 진학과 일본 유학(1912~1919)1.3. 난카이 대학 시절(1919~1920)1.4. 프랑스 유학 시절(1920~1924)
2. 혁명가의 길(1924~1949)
2.1. 1차 국공합작 시기(1924~1927)2.2. 지하 혁명 활동(1927~1931)2.3. 부전사변(1930~1932)2.4. 중화소비에트공화국(1931~1934)2.5. 대장정(1934~1936)2.6. 서안사건(1936)
3. 신중국의 2인자(1949~1976)
3.1. 국공내전 시기3.2. 대약진 운동3.3. 문화대혁명과 미중수교3.4. 사망(1976)
4. 치상위원회 구성

1. 전반기(1898~1924)

1.1. 유년기(1898~1912)

1898년 3월 5일 청나라 장쑤성 화이안의 가난한 하급 관료 출신 집안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의 할아버지 저우판룽(주반용)은 지방 관리 출신으로, 1870년대에 장쑤성에 정착했다. 정작 저우언라이는 할아버지의 고향 저장성 사오싱시를 자신의 고향으로 여겨 태어난 곳인 장쑤성보다 저장성에 더 애착을 가졌다.

할아버지 저우판룽의 대에는 집안이 윤택하였으나 저우판룽의 네 아들들 중 둘째인 저우언라이의 아버지인 저우이넝(주이능)은 과거에 낙방하였고, 인자하지만 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다. 저우이넝은 과거에 낙방했을 뿐만 아니라 가산을 모으는 데도 능하지 못하여 한에비징, 산둥, 안후이, 선양, 몽골, 쓰촨 등을 떠돌며 가족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 완둥얼은 현 지사의 딸로 태어나 전통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저우언라이는 자신의 외조모는 단순한 농부 집안인 것을 강조하여 자신이 무산 계급 출신이라고 강변하였다.

저우언라이가 태어날 무렵에 저우언라이의 작은 삼촌인 저우이간(주이감)이 결핵에 걸려 앓고 있었는데 저우이넝은 저우언라이가 태어난 지 4개월 후에 병환으로 아들을 낳을 가능성이 없는 동생에게 저우언라이를 양자로 내주었다. 저우이간은 1899년 사망했고 저우이간의 아내 천 씨[1]는 저우언라이를 매우 정성스레 키웠다.

천씨는 문학에 능통해서 저우언라이에게 시, 서예, 회화 등을 교육하여 저우언라이는 이미 4세에 당시와 송사를 암송할 수 있었다. 자신을 잘 키워준 숙모에 대해 저우언라이는 1936년 "숙모야말로 나의 진정한 어머니였다"고 에드거 스노우에게 말했다.

이후 저우언라이의 친동생인 저우언보와 저우언서우가 태어났고 1904년 저우언라이 가족은 화이인현 칭장푸로 이사했다. 이때부터 저우언라이는 외가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이미 문학에 능통했던 저우언라이는 외조부가 소장한 서유기, 삼국지연의, 설악전전, 홍루몽 등의 고전을 읽으며 지냈다. 이때 유교 경전 등을 공부했는데 "저우언라이 평전"을 쓴 바르바라 바르누앙은 훗날 마오쩌둥에게 충성했던 저우언라이의 모습이 여기서 기인한 것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1907년 저우언라이의 생모가 사망했고 1908년 숙모 천 씨도 결핵으로 죽었다. 저우이넝은 아들들을 버리고 후베이로 떠나버렸고 저우언라이는 동생들을 데리고 화이안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숙부들이 보내주는 부정기적인 송금에 의지해서 살아야 했다. 저우언라이는 매우 어렵게 살았고 실질적인 가장이 되어야 했다. 결국 저우언라이는 1910년 만주의 선양에서 거주하던 큰아버지 저우이겅(주이갱)의 집으로 떠나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저우이겅 역시 자식이 없었기에 그는 조카를 잘 돌봐주었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공립학교를 다니며 현대 교육의 영향을 받았다.

1.2. 난카이 중학교 진학과 일본 유학(1912~1919)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고 1912년 선통제가 퇴위함으로 청나라가 멸망하자 저우언라이는 학교의 정치적 선생들의 영향으로 캉유웨이, 량치차오, 쑨원 등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이런 영향으로 저우언라이는 14세에 중국을 강하게 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공부를 한다고 쓰는 등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장차 '나라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겠다는 뜻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13년 저우이겅이 톈진의 소금 운송 회사에 취직하면서 저우언라이는 톈진으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위안스카이의 독재, 2차 혁명, 호국전쟁, 호법전쟁, 일본의 21개조 요구 등을 접한 저우언라이의 정치적 의식이 각성되었고 난카이 중학교에 다니면서 헉슬리, 루소, 몽테스키외, 애덤 스미스, 찰스 다윈의 저작을 접했다. 여기서 저우언라이는 책 돌려보기 운동 등에 참여했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았다.

1914년에는 <경업>이라는 잡지를 내기도 했는데 저우언라이 졸업 이후 그를 대체할 사람이 없어 폐간되었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학교에서 연극 활동을 하며 잠시 배우를 하기도 했는데 잘생긴 외모와 연극을 민중의 사회적, 정치적 수단으로 인식한 저우언라이의 열정적인 연기 덕분에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1917년 난카이 중학교를 졸업한 저우언라이는 학생들을 대표해 고별사를 발표하고 한해 전에 돌아가신 큰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당대에 많은 중국의 뜻 있는 학생들이 그러했듯이 일본을 중국의 현대화의 모델로 생각하고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에 1917년 7월 저우언라이는 도일했는데 도쿄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삼촌인 저우이쿠이(주이규)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일본어를 빨리 익히지 못해 언어 문제 때문에 생계와 학업에 모두 고난을 겪었다. 특히 일본어가 안되어 2번이나 입학시험에서 낙방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놓친 적이 없는 정부 장학금을 놓칠 위기에 처하자 저우언라이는 가장 싼 숙소에서 지내며 1년간 입시를 준비했고 호세이대학, 메이지대학 등에서 수학하기도 하였으나 일본인들의 국수주의적인 태도에 크게 실망하여 이때부터 군국주의와 엘리트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이 터졌고, 저우언라이는 사회주의 이론을 접하게 되었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존 리드의 글 <세계를 뒤흔든 열흘>[2]과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연구자 가와카미 하지메의 잡지 <사회문제 연구> 등을 탐독했고 천두슈의 <신청년>을 읽고 감탄하게 되었다.

저우언라이는 "옛것을 때려부수고 독립정신으로 노예근성을 대체해야 한다"는 천두슈의 주장에 자신이 과거에 생각하고 행동하고 배운 모든 것이 쓸모없다고 여겨 1919년 봄 19개월 간의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중국 톈진으로 귀국했다. 중국공산당은 저우언라이가 1919년 4월 귀국하여 5.4 운동을 주도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5.4 운동 시기의 기록에서 저우언라이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1.3. 난카이 대학 시절(1919~1920)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remier_Zhou_1919.jpg
1919년 21세의 청년기.

톈진으로 돌아와 난카이대학에 등록했으나, 당시 중국은 5.4운동을 비롯하여 학생들의 애국운동으로 들끓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저우언라이도 학업보다는 정치활동에 주력하게 되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공산당의 미화처럼 5.4 운동을 주도하지는 않았으나 5.4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톈진 학생운동의 일간 신문인 톈진 학생연합회보의 편집을 맡았다. 이 회보는 하루에 2만부 이상 발간되었으며 저우언라이는 과거에 학교신문을 발행했던 경험을 살려 이 일을 매우 열정적으로 하면서 학생 운동을 관찰했다. 1919년 8월 6일 저우언라이는 산둥성 계엄사령관 마량이 항일시위를 탄압한 것을 비판하는 사설인 '어둠의 세력'을 발표했고 이 무렵부터 베이징으로 원정 시위를 나가는 등 학생 행동주의에 빠져들었다.

9월 16일 저우언라이는 베이징으로 원정시위를 가는 기차 안에서 21명의 학생지도자들과 함께 각오사를 설립했는데 이때 16세의 덩잉차오와 만나게 되었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5호라는 비밀이름을 썼고 이후에 이것이 저우언라이의 필명이 되기도 했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각오사 회장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각오사는 차이위안페이, 리다자오 등을 초청하여 강연회를 가졌고 초창기에는 다양한 정치사상을 섭렵했으나 리다자오의 영향으로 얼마 안가 75% 이상의 회원이 공산당이나 사회주의자로 채워지게 되었다.

1919년 12월 20일 저우언라이는 푸젠성에서 일본영사관 경비대가 중국 학생들을 공격한 사건을 항의하기 위해 2만 1천명의 톈진 시민들과 함께 항일시위와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벌였다. 1920년 1월 23일 학생들이 외국 상품을 판매하는 가게에서 일본제 램프갓을 대량으로 발견하면서 충돌이 벌어졌는데 학생들이 램프갓을 압수하려 하자 상점주인이 일본 깡패들을 불러 보호를 요청한 것이다. 깡패들은 학생들을 공격한 다음에 일본 조계지로 달아났고 이에 반발하는 학생시위를 정부가 진압하면서 여러 학생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톈진 학생연합회는 폐쇄되었다.

저우언라이는 톈진 학생연합회의 폐쇄와 학생 지도자들의 체포에 항의하여 1월 29일 일본 깡패들의 처벌과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며 즈리 성장의 사무실로 행진했는데 저우언라이는 평화시위를 주장하며 시위대를 진정시키고 성장에게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사무실로 찾았지만 사무실을 침입했다는 이유로 바로 체포되고 대학에서 제적되었다. 그리고 경찰들의 무력진압으로 인해 8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때 투옥된 저우언라이는 6개월의 옥고를 치렀는데 감옥 안의 대우가 관대했기 때문에 마르크스 사상에 대해 토론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저우언라이가 감옥에 있는 동안 각오사는 개혁연맹이라는 전국적인 연합기구 결성에 참여했고 저우언라이도 석방된 후 이를 지지했다. 8월에 저우언라이는 베이징으로 가서 다른 진보단체 대표들과 개혁연맹 결성에 대해 논의했고 이때 리다자오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 저우언라이가 옥고를 치르는 동안 안직전쟁이 일어나 베이징의 지배자가 돤치루이의 환계에서 우페이푸의 직계와 장쭤린의 봉계의 연합으로 바뀌었다.

한편 자신이 제적당했다는 것을 안 저우언라이는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유럽 유학을 준비하게 된다. 중국-프랑스 교육위원회와 협력하던 진보인사 엔시우의 도움으로 장학금 수혜자로 뽑혀 197명의 다른 학생들과 함께 1920년 11월 7일 프랑스 우편함 포르토스 호를 타고 프랑스 유학을 떠나게 되었고 12월 13일 마르세이유에 도착했다.

1.4. 프랑스 유학 시절(1920~1924)

파일:external/news.shm.com.cn/000d878845bb0ade7c3637.jpg
1920년 22세의 청년기.

당시 프랑스의 중국 유학생들은 리스쩡, 우징헝, 차이위안페이, 장쥐 등 무정부주의자들이 주도한 '근공검학'이라는 프로그램에 따라 노동과 학업을 병진해야 했는데 저우언라이는 장학금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생계 걱정이 없었다. 게다가 톈진의 신문 익세보가 저우언라이에게 프랑스 특파원 자리를 제안한 터라 저우언라이는 일본 유학 시절과 달리 먹고사는 문제에는 큰 걱정이 없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덕분에 혁명 활동에 투신할 수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1920년 1월 프랑스 파리를 경유하여 영국을 방문, 영국의 광부 파업에 대해 공부하고 익세보에 영국의 파업 관련 기사들을 투고하며 광부들을 지지했다. 런던에서 5주를 체류했는데, 영국보다 프랑스의 물가가 낮아 살기 좋았다고 한다. 다시 파리로 돌아가 처음에는 무정부주의와 페이비언에 끌렸으나 그 방법이 소용없다고 등을 돌렸고 프랑스 공산당의 활동을 지켜보면서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블라디미르 레닌 등이 저술한 다양한 사회주의 저작물들을 섭렵하게 되었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러시아식의 폭력 혁명과 영국식의 점진적 개혁 모두에게 호의를 보이면서 이 둘을 절충하여 중국의 병폐를 고치자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공산당 선언>과 카를 카우츠키의 "계급 투쟁"을 읽고 나서 저우언라이는 점점 더 러시아 혁명 쪽에 기울게 되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계급 혁명을 외치게 되었다. 게다가 본국 창사에서 방직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 벌어지고 그의 친구 황정핀이 참여하다가 군벌들에게 체포ㆍ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공산주의의 길로 완전히 마음을 먹게 되었다. 1921년 3월 저우언라이는 파리에서 공산당에 가입했다.

한편 유학생들의 좌경화를 우려한 북양정부는 1921년 유학생들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고 리용의 중국-프랑스 대학에 앞으로 기존의 학생들을 배제하고 새로 오는 학생들만 받으라고 훈령을 내렸다. 이에 반발한 학생들이 중국공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프랑스 경찰과 충돌했다. 9월 20일 저우언라이는 여러 공산주의자들을 조직해 대학을 점령하라고 9월 20일 리용으로 파견되었으나 프랑스 경찰은 이들 대부분을 구금하고 1921년 10월 중국으로 추방했다. 이때 추방된 인물 중 한명이 리리싼이다. 저우언라이는 추방을 모면했고 프랑스에서 여전히 학생운동을 진행했다.

이제 저우언라이는 22명의 다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중국공산당 지부인 유럽 중국소년공산당을 창립했고, 이때 저우언라이는 선전 위원이 되었다. 1923년 2월 중국소년공산당은 유럽 중국 공산주의청년단으로 바뀌었다. 유럽 중국공산주의청년단은 1922년 5월 중국에서 세워진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의 지부로 활동했고, 저우언라이는 총서기가 되었다.

1923년~1924년에 걸쳐 1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자 쑨원은 왕징치를 프랑스로 보내 국민당 지부를 설립했고 11월에 리용 지부가 설립되었다. 저우언라이는 훈령을 받고 왕징치와 협조했으며 개인 자격으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했다. 이때부터 저우언라이는 완전히 학문을 접고 혁명에 매진하였으며 <소년> 등 당잡지를 출판하고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담은 저작물도 출판했다. 저우언라이는 파리 고드프루아 17번가의 고드프루아 호텔에 사무실을 열고 업무를 보았는데, 이때 19세의 덩샤오핑이라는 유학생을 만나게 되었고 저우언라이는 그에게 등사기 돌리는 일을 맡겼다.

1924년 쑨원의 국민혁명 운동에 더 많은 인재가 필요로 하자, 공산주의청년단은 "프랑스의 학생운동 지도자들을 귀국시켜 쑨원을 돕자"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이에 따라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모스크바로 보내져 훈련을 받고 중국으로 귀국했다.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리푸춘, 녜룽전 등 일부 중요 지도자들은 모스크바를 경유하지 않고 바로 중국으로 귀국했다. 이로써 저우언라이의 3년 8개월 간의 프랑스 유학은 끝이 났다. 1924년 7월 중국공산주의청년단의 저우언라이 평가는 다음과 같다.
"저우언라이, 26세, 저장성 출생. 성실하고 온화한 성품. 활동적이고 정력적이며 웅변적임. 재치 있고 글쓰기에 빠름. 사상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 결과 전적으로 프롤레타리아화되어 있음. 영어에 능하고 프랑스어독일어를 읽을 수 있음."

2. 혁명가의 길(1924~1949)

2.1. 1차 국공합작 시기(1924~1927)

파일:주은래1.jpg
1924년 26세. 황푸군관학교에서

저우언라이는 중국에 돌아온 지도 얼마 안 되었고 나이도 젊었지만 공산당 내부에서 평가가 높았기 때문에 조직 전문가로서 공산당을 이끌어 내부로부터 국민당을 잠식해간다는 전략을 이끌어갈 적임자로 판단되었다. 이에 따라 양광 지역의 공산당 서기 겸 황포군관학교 정치 위원으로 임명되어 국민혁명군을 양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황포군관학교 교장은 장제스였는데 장제스는 저우언라이에게 호감을 가지고 자신의 심복으로 영입하기 위해 매일 아침 같이 식사를 하는 등 그를 회유했다. 저우언라이의 아침식사 메뉴는 평생을 두고 거의 일정[3]해서, 노년기에 영양 부실을 걱정한 담당 의사가 저우언라이에게 아침 식단을 바꿀 것을 건의하자 그는 "황포군관학교에 있을 때 매일 장개석 교장과 아침 식사를 함께 했는데, 그때 먹은 음식이 바로 달걀을 풀어 넣은 콩국과 압맥이었소."라면서 바꾸지 않았다.

장제스가 회유를 했지만, 저우언라이는 이 시점에서 확고한 공산주의자라서 큰 소용은 없었다. 오히려 저우언라이는 장제스가 좌익이 아니라 우익같다고 의심하면서 그를 경계하였다. 중화민국 측에서도 저우언라이에 대한 평가는 높았다. 대만으로 도망 간 국민당의 한 고위관리는 "그 당시 저우언라이가 우리 측에 있었다면 지금 쯤 마오쩌둥이 여기 와 있었을 것이고, 우리가 베이징에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고 리처드 닉슨의 자서전에 적혀 있다.

당시 저우언라이는 제1군 정치위원이자 황포군관학교의 정치주임이었다. 개교 당시에는 부주임이었지만 주임을 맡았던 다이지타오(戴季陶. 국민당 우파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그)가 2달 만에 그만두는 덕에 주임으로 승진했다. 이런 직위에서 저우언라이는 교내에 공산주의를 널리 퍼뜨렸다.

1924년 영국의 사주를 받은 상인단이 국민당을 전복시키려는 광저우 상단 사건을 일으키자 혁명위원회에 참여하여 이를 진압했다. 공산주의 전파를 위해 화성사, 혈화극사를 비롯한 비밀조직들을 조직하여 공산당원들을 충원하고 내부에서 국민당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사보타주 공작을 진행했다.

1925년 2월과 3월에 걸쳐 진행된 국민당의 1차 동정에서 천중밍의 군대는 저우언라이가 육성한 교군에게 무참히 박살났고 국민당은 광둥 전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는데 이 과정에서 교군은 전의 군벌 병사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기강과 사기를 보여주었다.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과 군민재정 통일선언에 반발하여 1925년 객군 반란을 일으킨 전계와 계계군벌 양시민, 유진환 숙청을 틈타 천중밍이 광동군벌 등본은과 결탁하여 다시 광저우를 위협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한 국민당의 2차 동정에서도 총정치위원으로 참전했고 이 시기에 저우언라이는 군사적 경험을 축적하게 되었다.

저우언라이는 2차 동정 이후 동강 각속 행정위원에 임명되어 행정사업을 지도했고 광동 지역에 공산당과 공청단 조직을 건설했다. 1925년 994명에 불과했던 공산당원은 1927년까지 5만 8천명으로 급증하였다. 전교생의 30%가 공산당 입당을 자원할 정도였다. 저우언라이는 '중국공산당 황포특별지부'를 설립하고 이들을 조직한다. 이 조직은 후에 '청년군인연합회'로 확대되는데 린뱌오, 저우이췬(周逸群), 쉬지신(許繼愼) 등 훗날 홍군의 지휘관이 되는 인물들도 참여한다.

이런 공산주의의 급속한 확산에 위협을 느낀 국민당도 '쑨원주의학회'를 조직하여 반공, 우익 학생들을 결집하는 데 이때문에 교내 좌우의 대립은 극심해졌다.

1925년 5월 30일, 일본인에게 중국인 노동자가 살해된 사건이 터지자 이에 분노한 학생과 노동자들이 봉기하여 5.30 운동이 발생했고 저우언라이는 황푸군관학교의 교사, 생도, 군인들을 인솔하여 참여했다. 이때 덩잉차오가 광저우로 오는데, 1925년 1월 4차 당대회에서 저우언라이가 중앙위원회 위원 펑수즈에게 결혼을 허락받은 결과였다. 프랑스 유학 내내 덩잉차오와 서신을 주고받았던 저우언라이는 결혼 허락을 받자마자 덩잉차오에게 연락했고 덩잉차오는 7월 톈진에서 배를 타고 8월에 광저우에 도착했다. 둘은 8월 8일에 결혼했는데 결혼했다는 사실 자체가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고 혁명 때문에 사생활도 거의 없었다.

한편 국민당 내부에서 너무 크게 자라는 공산당의 세력에 국민당 우익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고 장제스 역시 서산회의파처럼 즉각 공산당과 연을 끊어야 한다는 강경파는 아니었지만 공산당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가 쑨원이 사망한 후, 국공합작과 국민당 개조를 주도했던 국민당 재정부장 랴오중카이가 괴한의 총격에 암살당한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을 구실로 보로딘과 왕징웨이가 자신에게 거슬리는 후한민, 쉬충즈, 린썬을 비롯한 국민당 우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공산당원들을 중용했다.

이에 공산당의 노골적인 국민당 장악에 불만을 품은 국민당 우파들이 반발을 일으켜 서산회의를 열어 서산회의파를 결성하여 따로 상해 당 중앙을 설립하는 등 국민당 우파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장제스는 1925년 10월 공산주의자들의 명단을 저우언라이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26년 "중산함 사건" 발생 이후 장제스도 우익 정체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장제스 조작설도 있고, 공산당이 정말로 납치하려 했다는 설도 있고, 장제스와 공산당이 짝짝꿍하다가 장제스가 공산당을 토사구팽해버린 것이란 설도 있고, 장제스완 별로 친하지 않았던 서산파를 비롯한 다른 우익들의 음모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정치적 위기에 처해있던 장제스가 중산함 사건을 계기로 자신을 견제하던 왕징웨이 같은 국민당 내 반장세력과 공산당원을 한 번에 날려버린 것은 맞다.

이 때 장제스는 황포군관학교에 있던 공산당원을 반란혐의로 모두 추방하거나 체포했다. 저우언라이는 당시 국민당군을 지휘하여 산터우의 군벌을 토벌하고 있었기 때문에 체포되지는 않았다. 원정에서 돌아와서 이런 사건을 알게 된 저우언라이는 이런 장제스의 공산당원 추방에 대해 매우 항의했으나, 장제스는 이를 씹었고 저우언라이는 황포군관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일단 공산당이 국공합작을 유지하기로 결정하면서 양당의 합작은 유지되었지만 황포군관학교 등지에서 공산당 세력이 일소되었기 때문에 저우언라이는 공산당이 장악한 제4군 독립여단과 광저우 군사위원회에서 일하면서 공산당의 군사적 기반을 닦기 위한 일에 주력했다.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었고 국민당은 우한, 난창을 잇달아 점령하고 북상했다. 저우언라이는 상하이에서 지하혁명 활동을 통해 상하이 폭동을 조직, 군벌들을 몰아내고 상하이를 공산당의 근거지로 삼으려고 했으나 역시나 상하이와 난징을 차지하려 했던 장제스와 충돌하게 되었다. 고조된 양자간의 충돌 끝에 장제스는 국공합작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청방 깡패들과 광서파와 연합하여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앙드레 말로의 실존주의 소설 '인간의 조건'에서 상해혁명의 브레인으로 묘사되는 지조르 기요시가 바로 상하이 쿠데타 당시의 저우언라이를 모델로 한 것이다. 생전에 본인에게 직접 질문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장제스의 선제공격으로 인하여 공산당은 대타격을 입었고 저우언라이 본인 역시 체포되어 죽음의 위기에 처했으나 어찌어찌 풀려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장제스 평전의 저자 조너선 펜비는 장제스가 옛정을 생각해서 풀어주라고 했다고 적었고 저우언라이 평전의 저자 바르바라 바르누앙은 저우언라이를 체포한 26사단의 대표인 자오서가 저우언라이를 잘못 체포한 줄 알고 착각해서 풀어줬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장개석비록을 비롯한 대만자료들은 저우언라이가 자신의 필명인 5호의 명의로 거짓전향서를 쓰고 풀려났다고 주장한다.

저우언라이는 장제스를 규탄하는 시위를 조직했지만 장제스는 이를 단호하게 진압해버렸고 광동, 광서, 복건을 비롯하여 국민당 우익이 장악한 지역에서 공산당원을 상대로 한 대대적인 사냥이 시작되었다. 장쭤린도 이를 기회로 여기고 베이징의 소련대사관 수색을 허락하여 소련대사관에 숨어있던 리다자오와 여러 소련 외교관들이 처형되었다. 이후 공산당이 계속 폭동을 일으키자 우파 장령들이 반발하여 마일사변을 일으켰고 친공, 좌익 성향인 우한 정부에서조차 공산당원들의 입지는 좁아지게 되었다. 여기에 스탈린이 난데없이 공산당원들이 독자적 무장을 갖추고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를 장악하라는 지령을 내림에 따라 경악한 왕징웨이마저도 더 이상 공산당과 합작할 수 없다고 여기게 되어 국공합작은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2.2. 지하 혁명 활동(1927~1931)

1927년 8월 7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긴급회의에서 총서기 천두슈가 위기를 초래한 책임을 물어 사직하고 취추바이가 그 뒤를 이었으나 취추바이 역시 코민테른 노선을 추종하는 인물이라서 농민들을 선동해 동시다발적인 폭동을 기획한다는 방침은 바뀌지 않았다. 이 회의에서 저우언라이는 공산당을 '강하고 비밀스럽고 투쟁적인 기구'로 전환한다는 방침에 따라 조직부 책임자가 되어 조직, 선전, 군사, 조사, 기밀 취급, 통신, 출판을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가 전선위원회 서기를 맡고 주더, 예팅, 허룽, 린뱌오 등이 참여한 난창 폭동은 국민당의 반격 속에 엄청난 병력만 잃고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생존자들은 마오쩌둥과 합류하여 정강산에서 투쟁을 전개했고 저우언라이는 상부의 훈령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농민, 노동자들의 호응에 지나치게 기대한 자신의 노선이 실패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난창 폭동 후반기에 저우언라이는 말라리아에 걸려 심하게 앓고 있었는데, 비몽사몽 속에 자신이 전투를 지휘하고 있다고 착각하여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고 한다. 이를 보다 못한 녜룽전과 예팅은 저우언라이를 이씨 성을 가진 사업가로 위장시켜 홍콩으로 보내 치료를 받게 했다. 이때 저우언라이를 경호할 무기라곤 권총 2개밖에 없었고 광둥어를 하는 사람도 없어서 큰 고생을 했으나 지방 당 기구 책임자 양스훈이 도와준 결과 겨우 홍콩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후 마오쩌둥이 지휘한 추수폭동(중추절 폭동)도 실패했고 이 때문에 폭동을 지휘했던 공산당 지휘부는 리더십의 부족을 추궁당했다. 마오쩌둥도 비난을 받았으며 저우언라이도 책임을 지고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강등되었다. 하지만 중앙지휘부는 폭동에 계속 목을 매며 성공할 리 없는 폭동을 자꾸 지시했고 1927년 12월 광저우 폭동이 자행되었으나 이 역시 3일 만에 참혹하게 실패했다. 이 시기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초공작전 문서의 배경 부분을 참조.

1928년 6월 18일부터 7월 11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6차 당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저우언라이는 골동품 수집상으로 변장하여 덩잉차오와 함께 1928년 5월 상하이를 떠나 소련으로 향했다. 6차 당대회는 그간 중국공산당의 노선에 대한 검토와 비판, 스탈린의 중국공산당에 대한 통제권 확보를 위한 자리였는데 84명의 대표와 34명의 후보 위원들이 참여했다. 저우언라이는 이 자리에서 혁명적 폭동을 성급하게 주장하는 것에 반대하고 "대중의 지지 확보와 혁명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우언라이의 견해는 모호한 것이었으나 농촌을 기반으로 한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언급함으로 많은 지지를 받았다. 일단 총서기로서는 샹중파가 선출되었으나 저우언라이는 6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중앙위원회 위원 겸 조직부장의 지위에 올라 중국공산당의 실질적인 영도자로서 활동하게 되는데, 그의 나이 30세였다.

중국으로 귀국한 후, 저우언라이는 국민당 세력권에 공산당 기구를 재조직, 농촌 지역에서의 기지 확장, 홍군 성장에 주요 초점을 맞추었다. 1928년 11월 중국공산당은 국민당 첩보기구에 대응하기 위해 중앙위원회 중앙특과를 설립했고 저우언라이가 책임을 맡았다. 저우언라이는 첸좡페이, 리커눙, 호디 등의 유능한 스파이를 국민당 중앙조사위원회에 잠입시켜 국민당 내부 조지에 스파이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들은 장제스가 계획한 초공작전 등의 기밀을 빼내어 공산당에 바쳤다. 국민당의 압박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으로 1930년까지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의 2차 북벌반장전쟁으로 국민당의 지방 통제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다시 7만 명의 병력과 10여개의 근거지를 확보했다.

그러던 중 1929년 세계 경제대공황이 불어닥치자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붕괴가 목전에 닥쳤다"는 믿음이 퍼지게 되었다. 코민테른중국공산당에 "지주와 부르주아 연합 체제를 혁명적 수단에 의해 뒤엎을 수 있도록 대중을 준비시켜야 하며, 소비에트 모델에 따라 노동자, 농민 독재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라고 지령했고 새로운 폭동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저우언라이는 공식적으로는 지지했으나 좌경적 모험주의를 경계하며 이를 실행하는 것에 굉장히 신중하게 나섰다.

그런데 1930년 저우언라이가 이오시프 스탈린 및 코민테른과 회담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떠나자 그 틈을 타서 역시 6차 당대회에서 실세로 떠오른 선전부장 리리싼이 공산당을 장악하고 공세적인 혁명 전략을 수립했다. 리리싼은 혁명 고조기가 왔다고 주장하면서 1930년 6월 상하이에서 정치국회의를 소집, <새로운 혁명의 고조와 1개의 성, 또는 수개의 성에서의 우선적 승리>라는 테제를 통과시킴으로 새로운 폭동, 파업, 무장봉기를 결의했다. 하지만 우한과 난창에 벌어진 공산당의 봉기는 이전의 봉기들과 마찬가지로 처참하게 실패했고 기대와 달리 노동자와 농민들의 호응도 없었다. 코민테른은 입장을 바꿔 리리싼 노선을 좌경 모험주의 노선으로 비판했다.

1930년 8월 귀국한 저우언라이는 중앙의 명령을 듣지 않는 지역 공산당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중앙위원회 소비에트지역국의 설립을 제안했다. 8월 26일 저우언라이는 중앙국 총서기로 임명되었다. 저우언라이는 9월 말에 리리싼이 전술적인 잘못을 저지르긴 했으나 근본적으로 코민테른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고 코민테른과 리리싼의 화해를 주선했다. 하지만 12월 중국에 부임한 코민테른 동아시아부 책임자 파벨 미프는 리리싼 노선과 저우언라이의 '회유적 노선'을 동시에 비판했고 1931년 1월 저우언라이는 리리싼과 코민테른의 화해를 주선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정치국과 상무위원회에서 사직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미프는 리리싼과 취추바이 등은 물러나게 했지만 저우언라이는 '엉덩이에 매는 맞아야 하지만' 내쳐져서는 안 된다면서 업무를 통해 행실을 고치라고 지시했다. 저우언라이는 이때 이미 공산당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 인물로 인식된 것이다. 1931년 1월 중앙국은 장시성 닝두에 설치되었으며, 당중앙은 상하이에서 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위기도 닥쳐왔다. 1931년 4월 저우언라이의 핵심적인 보안담당 측근인 구순장이 국민당에 체포된 것이었다. 구순장은 혹독한 고문 끝에 당무조사과장 천리푸의 설득으로 전향하여 수많은 기밀 정보를 실토했다. 상하이의 공산당 본부 전체가 사로잡힐 위기에 처했으나 첸좡페이가 제때 이를 알아차리고 경고를 준 덕분에 본부는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하이와 장쑤성에 설치된 공산당 네트워크 전체가 노출되어 윈다이잉을 비롯한 수많은 공산당 간부들이 국민당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는데 이는 4.12 쿠데타 이후 최대의 손실이었다. 저우언라이는 기밀엄수 차원에서 구순장의 당시 각각 8세와 12세였던 구순장의 딸과 처남을 제외한 가족들을 모조리 처형하였다. 구순장의 가족들도 핵심 기밀에 참여한 바가 있고, 일부는 비협조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입막음을 선택하게 된 것. 또한 당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국민당 비밀경찰 간부들에 대한 암살작전을 지시, 비밀경찰 간부 왕빙을 암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상하이 본부가 소멸되면서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들은 체포를 피해 뿔뿔히 흩어져야 했다. 장궈타오는 장시성의 허룽의 근거지로 피신했고 왕밍은 모스크바로 떠나 코민테른에서 중국 공산당을 대표했다. 1931년 6월에는 샹중파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들이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사실에 저우언라이는 구출을 계획했으나 장제스의 측근 슝스후이가 재빨리 개입하여 샹중파를 심문하여 고문 끝에 많은 정보를 얻어낸 후 처형했다. 저우언라이는 총서기인 샹중파마저 국민당의 고문 끝에 배신한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거처마저 국민당의 수중에 들어왔으나 간발의 차이로 아파트를 떠난 덕분에 가까스로 체포를 피할 수 있었다. 기존의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흩어짐에 따라 이를 대체하기 위한 중국공산당 임시중앙정치국이 1931년 9월 수립되었다. 총서기는 보구(박고)였고, 장원톈(장문천), 리주성(이죽성), 캉성(강생), 천윈(진운), 루푸탄(노복탄)이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저우언라이는 이미 국민당에게 정체가 노출된 리커눙, 첸좡페이, 후디, 천겅 등을 정체가 드러내지 않은 판한녠과 교대시키고 그들을 이끌고 12월 장시성의 중앙 소비에트 근거지로 피신했다.

2.3. 부전사변(1930~1932)

한편 국민당의 조여오는 수색과 탄압, 그리고 계속되는 초공작전과 실패한 봉기 등에 공산당 내부에서는 갈등이 고조되었다. 계속되는 위기감 속에서 공산당은 국민당의 스파이가 침투하여 소비에트를 붕괴시킬까봐 우려하였고 소위 AB단이라 불리는 반공조직을 대상으로한 대규모 숙청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당시의 마오쩌둥은 소비에트 내부에서 자신의 권력을 위해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상하이의 저우언라이도 동조, 가세했다.

결과적으로 장시성에서는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남녀노소할 것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잔인한 심문, 고문이 이어졌고 한번 체포되면 자신이 AB단이라고 자백하기 전까지는 풀려날 수 없었다. 거짓자백이 이어졌고 더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숙청과 심문은 공산당과 홍군에까지 번졌고 수많은 공산당 간부들까지 국민당 스파이로 몰려 처형되었다. 1930년 12월 홍20군 숙청에서 비롯된 부전사변은 정치위원인 천이까지 국민당 스파이 혐의를 받는 등 엄청난 규모로 번졌다.

앞선 1931년 2월 저우언라이는 중앙기지 혹은 중앙소비에트라 불리던 장시성 소비에트에 편지를 보내 "반혁명분자들에 대한 투쟁을 강화하라"고 지시했고, 상하이의 임시중앙정치국 인사가 완료되자 저우언라이는 직접 장시성의 숙청에 가담하게 되었다. 저우언라이는 푸톈 사건을 AB그룹에 의한 반혁명 활동으로 규정짓고 3월 28일 마오쩌둥이 반혁명에 대한 올바른 투쟁을 하고 있다고 칭찬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그리고 런비스, 왕쟈상, 구줘린 등을 파견하여 마오쩌둥을 돕게 했다. 1931년 내내 장시성 전체에 걸쳐 대대적인 숙청이 진행되었고 10만명이 처형되었다.

학살의 규모가 정도를 넘어서자 저우언라이는 이에 대한 우려를 표하기 시작했다. 1931년 8월 어우양친의 보고를 받은 저우언라이는 중앙소비에트에 편지를 보내 '무절제와 공포, 과도한 단순화'를 비판했다. 상하이 본부의 소멸 이후 12월 저우언라이는 루이진으로 향하며 푸젠성의 소비에트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AB단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과오가 자행된 것을 확인했으며 숙청 범위가 지나치게 부풀려졌다고 인정했다. 저우언라이는 매우 위험한 사고방식이 만연하고 반혁명분자 색출이 일의 모든 것인 것처럼 생각되고 있다며 지적, 고문을 이용해 자백을 받아내는 방식을 비판했다. 저우언라이의 개입으로 인하여 1932년 1월 7일 AB단을 색출한다는 반혁명투쟁은 사그라들었다. 자세한 것은 부전사변 문서 참조.

2.4. 중화소비에트공화국(1931~1934)

한편 마오쩌둥과 주더는 장시성 서남부의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여 가장 큰 소비에트 중 하나를 이끌고 있었다. 1931년 9월, 제3차 초공작전까지 격퇴한 중국 공산당은 1931년 11월, 루이진에서 의기양양하게 마오쩌둥을 주석으로 추대하여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주더가 이끄는 홍1방면군의 숫자는 8만에 달했고 홍군은 계속 증강되어 1933년에는 30만에 달했다.

저우언라이는 상하이에서 영국 증기선을 타고 홍콩에 도착, 홍콩에서 산터우로, 산터우에서 광둥, 푸젠, 장시를 거쳐 국민당의 감시를 피해 12월 말 수주일의 여행 끝에 루이진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오쩌둥을 만나게 되었다. 둘은 1927년에 잠시 마주친 적이 있었으나 그외엔 접점이 없었다. 마오쩌둥은 일찍이 농촌을 근거지로 하는 비정통 이론을 고수하였으며 모스크바로의 초청도 거부하고 스탈린의 강의보단 현장에 있는 것을 중시했다. 그리고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이면 코민테른의 당중앙의 지시도 씹는 반골형의 인물이었다.

저우언라이는 몇가지 이유 때문에 마오쩌둥의 입장을 조금씩 지지하기 시작했는데, 1930년 2월 저우언라이가 내렸던 간저우 공격에 대해서 마오쩌둥은 실패를 예상했고 이는 사실로 드러났다. 그리고 저우언라이가 회의적으로 보았던 마오쩌둥의 장시성 동북부 지역의 기지 확보는 초공작전에서 국민당 공격에 대한 효과적인 섬멸로 돌아왔다. 이 때문에 저우언라이는 차차 마오쩌둥의 군사이론을 지지하게 되었다.

당시 상하이 임시중앙을 비롯한 다수파는 국민정부의 제4차 초공작전에 대응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푸저우, 난창과 같은 강력한 국민당 도시들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고 마오쩌둥, 주더, 왕자샹 등의 소수파는 적이 약한 곳에서 적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2년 8월 난창 공격에서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주장을 지지했다가 준비만을 강조하는 소극적인 행태를 보인다고 비난을 받았고 마오쩌둥을 옹호한 것에 대해서는 리리싼도 그런 식으로 옹호하지 않았냐고 비난 받았다.
베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신중성을 인정하면서도 공산당이 국민당을 과소평가하고 있으며 마오쩌둥을 과하게 공격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마오쩌둥을 군사분야의 전문가로 일선에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회의 끝에 실각하여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명목상 지도자로 물러나게 되었고 저우언라이가 제1야전군 총정치위원에 임명되었다.

1933년 1월 상하이의 임시당중앙도 장시성으로 이동했으며 1933년 10월 코민테른 대표 오토 브라운(이덕)도 장시성으로 옮겨왔다. 보구는 오토 브라운을 군사고문 책임자로 임명했다. 5월의 지휘계통 개편으로 군사위원회는 루이진으로 이전했으며 저우언라이는 총정치위원직을 유지했으며 주더가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로 인하여 당중앙이 최전선을 통제하게 되었다.

2.5. 대장정(1934~1936)

그러던 중 제1차 상하이 사변열하사변이 정리된 1933년 9월, 장제스는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상대로 한 제5차 초공작전을 발동시켰다. 인력, 화력에서 홍군에 비해 압도적인 국민혁명군은 독일 군사고문단의 조언에 따른 토치카 전술로 홍군의 반격을 격퇴하면서 조금씩 숨통을 조여나갔고 홍군의 거점들은 차례로 함락되었다. 이에 오토 브라운은 정면 공격으로 국민당을 공격해서 거점을 탈환하기로 결정했다. 단촉돌격이라 불리는 이 전략에 대해서 저우언라이는 반대했으나 결정이 내려진 이상 따를 수밖에 없었고, 당연하지만 참패했다. 저우언라이도 패전에 책임을 지고 비난받았지만 그것으로 끝났다.

1934년 1월 루이진에서 6차 중국공산당 5차 전체회의가 소집, 중국이 소비에트화될지 식민지로 전락할지를 보여줄 것이라는 결의안을 통과시키켰고 저우언라이는 정치국 위원이자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시각에도 국민당군은 차례로 거점들을 함락하고 있었다. 4월이 되자 루이진의 관문 광창이 국민당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브라운은 정면공격으로 국민혁명군을 패퇴시키려 했지만 당연히 실패했고 10월에 홍군은 완전히 격파되어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심장부까지 국민당이 진출했다. 루이진까지 위기에 처하자 상무위원회는 대피를 결정했다. 저우언라이는 군사 계획 실행을 담당, 철수 계획을 수립, 실행했다. 1만 6천명의 후방 병력이 국민당의 눈길을 끄는 사이 8만 4천명의 주력은 1934년 10월부터 피난길에 올랐다.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저우언라이는 1935년 1월 쭌이회의에서 마오쩌둥의 편을 들면서 본격적으로 마오쩌둥의 편에 합류했고 이후 마오쩌둥을 따라서 섬서성에 정착할 때까지 대장정을 수행했다. 이것으로 1976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유지되는 마오쩌둥-저우언라이 연합이 결성된 것이다. 자세한 것은 대장정 문서 참조.

2.6. 서안사건(1936)

파일:attachment/yanan1940.jpg
1930년대 옌안 게릴라 시절. 관운장 닮은 풍성한 수염을 자랑한다.

3. 신중국의 2인자(1949~1976)

3.1. 국공내전 시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Zhou_Enlai_MeiyuanXincun17_Nanjing_1946.jpg
1946년 48세의 중년기. 중국벤 스틸러?

3.2. 대약진 운동

파일:FB_IMG_1474745580535.jpg
1954년 10월 1일, 베이징 톈안먼에서 열병식을 관람하는 저우언라이(왼쪽), 오른쪽에는 김일성마오쩌둥

내전 종료 후에는 총리와 외교부장을 역임하여 사실상 중국 정부의 수반으로 활약, 외교통으로서도 수완을 인정받았다. 1954년 자와할랄 네루와 함께 평화 공존 5원칙을 발표했고 그가 1955년 반둥 회의에서 제시한 "구동존이(求同存異: 다름을 인정하면서 공통점을 구함. 중국인들의 영어 번역 - To put aside minor differences so as to seek common ground;To seek common ground while reserving differences를 참고)"라는 명제는 지금까지도 명언 대접을 받고 있다. 1956년 9월, 8차 당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1972년 닉슨 방중 시에는 논어의 첫 장 구절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도 나옴)라는 환영사를 시작한 일화도 있다. 그 외에도 중국을 방문한 각국의 국가 원수나 외교 사절들을 위해 만찬을 열 때도 "먹는 데 정신이 팔리면 중요한 주제들을 토의할 수 없다."면서 미리 요리사에게 국수 한 그릇을 청해 배를 채워두고 만찬장으로 향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렇게 외교 일선에서 진두 지휘를 나서기도 했는데, 유학 중 익힌 그의 어학 실력이 여기서 빛을 발휘한다. 영어와 프랑스어, 일본어는 굉장히 유창했고, 독일어, 러시아어까지 말할 정도였다니... 이 점만 봐도 먼치킨급. 업무량도 엄청나서 그를 걱정하는 측근들에게 "나처럼 역사의 무대에 내던져진 인간의 몸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란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파일:external/gb.cri.cn/cb060106012.jpg
1954년 56세의 장년기.

이처럼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음에도 저우언라이에게 쥐어진 권력이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다. 때문에 마오쩌둥이 대약진 운동문화대혁명을 실행하려 했을 때 반대하다가도 결국에는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였고, 그래서 류사오치덩샤오핑 등 동료 당원들이 숙청되거나 하방당하는 신세가 되었을 때 마냥 지켜보는 신세가 되었다. 물론 그 이후의 혼란상을 수습하려고는 했지만 당연히 역부족. 이처럼 마오쩌둥이 강하게 나가면 몸보신을 하는 행보를 보였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 등 여러 인사에게 악평을 듣기도 했다.

1964년 12월 21일에 진행된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 개막식에서는 농업, 공업, 국방, 과학 기술 등 4개 분야의 현대화를 국정 목표로 제시했다. 그러나 2년 후 본격화된 문화 대혁명으로 인해 실행되지 못했고, 그의 사후 집권한 덩샤오핑에 의해 1978년부터 비로소 정책화될 수 있었다. 이 '4대 현대화'는 1980년대 중국의 개혁, 개방 정책에서 단연 핵심 과제로서 오늘날 중국을 세계적 강대국으로 도약시키는 기틀을 마련했고, 지금까지 덩샤오핑의 주요 치적으로 남아있지만, 본래는 저우언라이의 기획이다.

3.3. 문화대혁명과 미중수교

60여 년의 공직 생활에서 저우언라이보다도 더 강렬한 인상을 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 헨리 키신저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홍위병들의 만행이 극에 달하자 파괴위험에 몰린 각종 문화유산 보호 및 반동으로 몰릴 뻔한 인물들을 비호했다. 마지막 황제 푸이도 저우언라이의 도움으로 문혁의 화를 피했고 막고굴의 고문서 역시 화를 피했다. 그 외 자금성, 포탈라 궁(달라이 라마의 거. 현재는 비어있다.), 사찰, 문화유적, 고서 등 그의 지시로 간신히 화를 피한 게 한두 개가 아니다. 중국 사학계와 미술계의 은인인 셈. 또 중요한 산업 시설들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사태가 그럭저럭 진정될 즈음에는 경제 재건을 위해 서구 국가들에 원조를 요청하거나 대규모 개발 계획 등의 수주를 의뢰하기도 했다.

1967년 2월 정치국 회의에서 군과 문혁소조를 중재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2월 역류에서 군부가 숙청당했다. 실권을 쥐고 있던 4인방들에게는 '양놈들의 노예'라는 둥 까였으나 인민들에겐 오히려 더 지지를 받았다. 4인방은 저우언라이를 비판하고 싶었지만 저우언라이를 직접 비판했다가는 역풍이 불까 우려해서 이름이 비슷하게 연상되는 주공단(周公旦)을 대신 깠다고 한다.

1971년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를 만나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을 개최했으며 1972년에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을 초청, 닉슨-마오쩌둥 회담을 개최하였다. 9.13 사건으로 린뱌오가 사망한 이후 마오쩌둥의 지원 하에 내부를 정리하려 했으나 마오쩌둥이 다시 4인방에게 권력을 실어줌에 따라 1973년부터 4인방이 집권, 비림비공운동을 전개했다.

3.4. 사망(1976)

하지만 도와주는 이도 별로 없이 문화대혁명의 혼란을 수습하려다 보니 건강이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고, 방광암 발병 판정을 받은 뒤에는 덩샤오핑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업무 인계에 들어갔다. 한편 문화대혁명이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1975년 2월, 4인방은 마지막 승부수로 저우언라이 공격에 나섰다. 물론 실제 표적은 저우언라이 대신 사실상의 실세였던 덩샤오핑이었다. 원래 상당히 경과한 후에야 증세가 나타나는 다른 암과는 달리 방광암은 혈뇨라는 증상이 조기에 나타나기 때문에 치료가 쉬운 암에 속하고, 빨리 치료했다면 아마도 나을 수 있었겠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치료가 늦어졌다.

문제는 여기서 마오쩌둥이 자신보다 저우언라이가 장수할 것을 우려해 치료를 방해했다는 설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이거야말로 토사구팽의 극치. 마오쩌둥의 주치의가 쓴 '모택동의 사생활'이란 책이 있는데 문제점이 여럿 제기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마오쩌둥과 그 당시의 중국에 대한 A급 원사료다. 이 책에는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의 방광암 치료를 허락해주지 않아 오랜 기간 저우언라이가 고생했고 아내인 덩잉차오가 사정사정해 겨우 허락을 얻어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다만 모택동의 사생활은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의 장수를 우려해서 암치료를 방해했다기보단 마오쩌둥 본인이 암을 전문 의사들이 치료한다는 행위 자체를 불신했기 때문에 막은 것으로 기록한다. 마오쩌둥은 암을 일종의 불치병으로 여겼기 때문에 치료가 오히려 환자의 수명을 앞당긴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토사구팽 차원에서의 치료 방해는 장융의 주장에 더 부합하다. 아무튼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의 건강에 도움이 안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여담으로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에게 침상 보고를 할 때 무릎을 꿇고 보고를 한 점 등 좋게 보면 충성심이 높은 거고, 나쁘게 보면 굴욕적인 얘기도 나온다. 하긴 그 정도 처신했으니 마오쩌둥의 숙청을 피해 장수했던 걸지도... 사실 보통 장수하는 2인자들은 이러한 성향을 가진 자들이 많다. 김영남과 비슷한 부류라고 볼 수 있을 듯. 다르게 보면 그 정도 굴욕도 감내하면서 마오쩌둥의 재앙적 실책들을 수습한 걸지도 모른다.

결국 문화대혁명의 피해가 컸기 때문에 그것을 수습하러 격무를 하느라고 몸이 악화되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혈뇨가 나올 때까지 정상 업무를 수행했는데, 수 차례 수술을 받았음에도 병실에서 계속 집무를 수행할 정도였다. 당연히 건강이 점점 나빠질 수밖에...

1976년 1월에 죽은 뒤에는[4] 집권층으로부터 생전보다 더 격렬한 비판을 받았지만, 오히려 일반 대중들은 자발적으로 천안문 광장에 모여서 몇 개월 동안이나 계속 추모 집회를 개최했다. 이때 등장한 구호 중 하나가 "저우 총리를 반대하는 자는 누구든지 타도하라!". 또 이때 대놓고 등장한 다른 구호가 "마오는 물러가시오!"였다. 당시 중국 민중들이 문화대혁명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 수 있다. 이 후폭풍은 덩샤오핑이 집권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그가 죽었을 당시 그의 시신 앞에서 장칭이 오만방자하게 굴자 주더는 "당신은 인간도 아니오!"라고 소리쳤다는 일화가 있다.

4인방과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저우언라이 추모 열기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집회에서도 집권층에 대한 불만이 공개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하며 점차 반정부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정부는 4월 5일에 군대를 동원해 집회를 무력으로 진압해 버렸고, 동시에 그 책임을 덩샤오핑에게 떠넘겨 실각시켜 버렸다.(4.5 운동(1차 천안문 사태) 참조.)

장례식에서 추도사는 덩샤오핑이 읽었으며,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덩샤오핑이 비행기를 타고 유언대로 중국 각지에 뿌렸다. 이때 장례식에서 4인방 중 한 명인 장칭이 장례식에서 뻣뻣한 태도를 보이자 사람들이 분노해서 "저 여자를 두들겨 패라!!"라고 말하는 사건도 있었는데, 장칭이 문화대혁명의 주 실행 담당 중 한 명으로 인민들의 증오를 산 자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의 아내 덩잉차오도 죽은 후 시신을 카데바로 기증하고 용도가 다 되면 화장하라고 했는데, 이 유언이 생전에 남편과 함께한 약속이라고 누차 측근에게 상기시켰으나, 결국 그녀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녀의 유골은 팔보산 혁명묘지에 봉안되어 있다.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UN은 이례적으로 조기를 내걸었는데, 당시 냉전의 험악한 분위기를 고려할 때 이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파일:attachment/저우언라이/6457e1.jpg
최후의 모습

저우언라이의 사망으로 중국 전체가 패닉에 가까운 슬픔에 빠져들었다. 당시 중국에 있던 영국 외교관 로저 가사이드를 비롯한 외국인들의 기록에서조차 당시 기록을 생생히 전하고 있는데, 몇달 후 마오쩌둥의 죽음조차도 저우언라이의 죽음 당시의 추모 분위기에 비하면 냉랭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3월 19일, 베이징 우가소학 학생들의 추모 화환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인민들이 상경하여 추모 화환을 바쳤으며, 군대까지 합류했다. 4월 4일 청명절 추모인파는 무려 200만을 헤아렸다.
그는 재산도 남기지 않았고, 아이도 없었으며, 무덤도 없었고, 유해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유골은 조국 강산에 뿌려졌다. 그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나라 전체가 그의 것이고, 수억의 자손이 있으며, 중국의 모든 땅이 그의 무덤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남겼다. 그는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그는 누구인가? 그는 누구인가? 그는 우리의 총리이다!
저우언라이를 추모하는 익명의 화환
당신의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감히 우리의 총리를 반대하는 자는 누구든지 태양을 향해 짖는 미친 개와 같다. 현실을 각성하라!
저우언라이를 추모하는 익명의 화환

4. 치상위원회 구성



[1] 1878년생으로 학자이자 의사인 천웬의 딸이었는데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2] 러시아 혁명을 다룬 르포. 레닌이 추천사를 써 준 책[3] 달걀을 풀어 넣은 콩국, 압맥 빵에 잼과 버터[4] 정확히 8개월 뒤 마오쩌둥도 같은 해에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