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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9:45:34

차오관화

파일:중국 국장.svg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외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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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인민정부 외교부장
초대
저우언라이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장
초대 제2대 제3대
저우언라이 천이 지펑페이
제4대 제5대 제6대
차오관화 황화 우쉐첸
제7대 제8대 제9대
첸치천 탕자쉬안 리자오싱
제10대 제11대 제12대
양제츠 왕이 친강
제13대
왕이 }}}}}}}}}}}}}}}

파일:교관화.jpg
중화인민공화국 4대 외교부장
정체 喬冠華
간체 乔冠华
한국식 독음 교관화
영문 Qiao Guanhua
출생 1913년 3월 28일
중화민국 장쑤성 옌청현
(현 중화인민공화국 장쑤성 옌청시)
사망 1983년 9월 22일 (향년 70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학력 칭화대학 졸업
도쿄대학 석사학위
튀빙겐 대학교 철학박사 학위
직업 언론인, 정치가, 외교관
종교 무종교 (무신론)
가족관계 아내 궁펑 (1943~1970)[1]→장한지 (1973~1983)[2]
외교부장
재임기간
4대 1974년 11월 ~ 1976년 12월 2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이력2.2. 문혁시기2.3. 말년
3. 기타4. 참고문헌5. 주요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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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외교관. 제4대 외교부장을 역임했다.

2. 생애

2.1. 초기이력

1913년 중화민국 장쑤성 옌청현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부유했던 덕분에 칭화대학 졸업 후 일본 도쿄대학에 유학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독일로 다시 유학을 떠나 튀빙겐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일전쟁 중 귀국하여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1942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신화일보 기자로 근무하였다. 충칭에 머물며 언론전을 주도하던 저우언라이 밑에서 일하며 우커젠과 함께 정기 간행물인 <군중>을 발행했다. 전쟁 종식 이후 저우언라이를 따라 상하이에 파견, 신화통신 홍콩 지국장에 임명되었다. 국공내전 이후 정부판공청 부주임, 정보국장을 역임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면서 저우언라이가 1대 외교부장에 취임하자 저우언라이의 신임을 받던 왕빙난, 천자캉, 커바이녠, 궁펑 등과 함께 중용되었다. 1950년 외무부 아시아국장대리에 임명되어 유엔 안보리에 출석, 타이완 문제를 논했다. 6.25 전쟁 정전협상에서도 중국측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출석하였다.

2.2. 문혁시기

1961년 제네바 회의에 중국 대표단원으로 출석하여 라오스의 중립 문제를 논했고 1964년 지펑페이, 왕빙난, 천자캉 등과 함께 외교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이후 홍위병들이 주도한 외교부 탈권 현상에 휘말려 1967년 지펑페이 등과 함께 감금당하는 등 박해를 받았으나[3] 마오쩌둥이 왕리, 관펑 등 중앙문혁소조의 급진파들을 숙청한 후 다시 업무에 복귀할 수 있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는 마오쩌둥의 지시로 1971년 11월 15일 유엔 총회에 중국 수석대표로 출석,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표권을 인정받았다. 차오관화는 중국 정부를 대표하여 중국의 우호국들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중국정부의 원칙과 입장에 대해 설명하며 결의안 통과가 중국 외교사업에서의 한차례 중대한 돌파이며 평화를 사랑하고 정의를 주장하는 모든 국가들의 공동 노력의 결과라고 밝혔다.
파일:vdTM9us.jpg
1971년 10월, 2758호 결의안이 통과되는 순간의 차오관화. 오른쪽 인물은 후임 외교부장이 되는 황화다.

1972년 닉슨-마오쩌둥 회담 이후 헨리 키신저와 함께 공동성명의 초안을 작성했다. 1973년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의 관계가 악화되자 11월 21일 인민대회당에서 소집된 회의에 지펑페이, 중시둥, 황전 등과 함께 외교부 대표초 참석하여 저우언라이를 규탄해야 했다. 하지만 차오관화는 문혁이 종식된 후 자신은 저우언라이가 잘못한 것을 믿지 않았으며 회의에서 저우언라이를 규탄해야 했던 것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1974년에 외교부장에 임명되었고 1974년 3월 유엔 6차 특별회의 대표단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수행원이 덩샤오핑이었는데 실질적인 대표단장은 당연히 덩샤오핑이었다. 차오관화는 1주일만에 덩샤오핑의 유엔연설문을 준비했다. 마오쩌둥은 차오관화의 원고에 대해 동의를 표했고 덩샤오핑은 2세계와 3세계가 연합하여 미국과 소련 두 초강대국에 대항해야 한다고 연설하여 큰 갈채를 받았다.

차오관화는 1974년 10월 "UN이 더 이상 한반도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되며 모든 주한 외국군이 철수해야 한다.", "한반도 문제의 책임은 남조선의 탓이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것은 한중수교 전까지 중국의 공식입장이었다. 하지만 북한이 남침을 하면 즉각적인 중공군 개입은 없을 거라고 한발 빼긴 했다. 1976년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미국 연락사무소 소장 조지 H. W. 부시와 함께 일정을 정리했다.

2.3. 말년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4인방이 숙청되는 과정에서 1976년 10월 2일 <중국 대표단 단장의 국제연합 제31회 회의에서의 발언> 초고를 제출하였는데 여기에 마오쩌둥이 임종 직전에 장춘차오의 손을 잡고 뒷일을 부탁하였다고 하는가 하면 마오쩌둥의 유언이 "기정 방침대로 하라."라고 되어 있는 것이 적발되어 화궈펑의 비판을 받았다.

4인방 숙청 후 4인방 지지자로 몰려 12월에 황화에게 외교부장 자리를 내주고 실각했다. 1983년 대외우호협회 고문에 초빙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암으로 사망했다.

3. 기타

아내는 2명이었다. 1남 2녀를 두었으나 딸 하나는 둘째 부인과 전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아들은 스위스, 스웨덴, 핀란드, 북한의 특명전권대사를 거쳤고 외교부 부부장을 맡기도 했다. 친딸은 군의관이다.

4. 참고문헌

5. 주요경력

중화인민공화국 역대 외교부장
파일:중국 국장.svg
3대 5대 5대
지펑페이 차오관화
(1974년 11월 ~ 1976년 12월 2일)
황화

[1] 1970년 과로사[2] 마오쩌둥의 전속 통역관이었고, 천카이거의 전 부인 훙황의 어머니이다.[3] 이때 다른 부부장들도 부르주아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등 비판을 면치 못했고 홍위병들은 급기야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을 일으키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