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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0:42:23

인민혁명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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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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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인민혁명당 사건(1964년)3.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1974년)
3.1. 불공정한 재판3.2. 사법살인3.3. 시신탈취와 불법 화장3.4. 평가3.5. 사건 이후3.6. 연좌제에 묶여 살아왔던 유가족들3.7. 재심 청구와 무죄 선고3.8. 무죄 선고에 대한 박근혜의 입장3.9. 배상금 논란3.10. 그 외
4. 관련 자료5. 관련 단체6. 인민혁명당은 실존했다?7. 여담8. 둘러보기

1. 개요

인민혁명당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건은 크게 두 개의 사건이 있다. 하나는 1964년에 일어난 "인혁당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1974년에 민청학련 사건과 관계되어 일어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다. 후자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사법살인으로도 유명하다.

대한민국 정부가 무고한 사람들에게 고문을 한 것도 모자라 누명을 씌워 사법권으로 살인을 저지르며 유가족들까지 연좌제로 괴롭힌 사건이다. 민혁당 사건과는 전혀 관련 없으며 박근혜 당시 대통령 후보가 연설 도중에 두 사건을 혼동한 적이 있다. 다만 민혁당 사건은 진짜 공안사건이다.

2. 인민혁명당 사건(1964년)

1964년 8월 14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등은 좌익 계열 정당인 인민혁명당(인혁당)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적인 지하조직으로 국가를 변란하려던" 사건을 적발해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을 전국에 수배 중이라고 발표했다.

김형욱이 발표한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간첩 김영춘은 1962년 1월 북한으로부터 특수 사명을 띠고 남하하여 인혁당 조직을 주도했다. 통일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장이었던 우동읍과 동 간사장 김배영, 김영광, 민주민족청년동맹 간사장이던 김금수, 동 경북도 간사장 도예종, 사회대중당 간사였던 허표, 전 진보당원 김한득, 빨치산 출신의 박현채 등이 참가하여 창당 발기인 대회를 갖고 외국군 철수와 남북서신, 문화경제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을 골자로 한 강령과 규약을 채택하여 발족했다. 이후 조직을 확대해 오다가 1964년 4월 북한 중앙당의 지령을 받고 중앙상임위원 도예종, 정도영, 박현채 등이 한일협정 반대 데모를 유발토록 획책하며 동시에 학생 데모를 4월 혁명 같이 발전케 하여 현 정권을 타도할 것을 결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 사건으로 8년 간 옥고를 치른 정만진 씨 등은 '인혁당은 실체가 없으며 피고인들의 법정 진술까지 변조할 만큼 철저히 조작된 사건'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이 인혁당 사건은 그 해 8월 18일 서울지검에 송치되었다. 그러나 중정의 발표와 달리 송치받은 검찰은 18일간의 철야 수사에도 기소할 만한 증거와 혐의점을 찾지 못했으며 사건 관련자들이 중정의 조사 과정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음을 밝혀냈다. 결국 사건 담당 검사 중 최대현 검사를 제외한 부장검사 이용훈, 김병금, 장원찬 검사는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다"라는 이유로 기소 거부와 함께 사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검찰과 중정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김형욱은 숙직 담당 검사에게 압력을 넣어 서명토록 해 간신히 기소했다. 사건은 국회로 비화되었고 관련자들의 전기고문, 물고문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자 검찰은 서울 고검 한옥신 검사에게 재수사를 지시했다. 그 결과 당초 국보법 위반혐의로 구속, 기소된 26명 중 학생 등 14명에 대한 공소를 취하했고 도예종 등 나머지 12명의 피고에 대해서도 국보법 위반에서 반국가단체 찬양, 고무 등의 반공법 위반 혐의로 공소장을 변경했으며 법원은 이들에게 최고 3년에서 1년까지 가벼운 형량을 선고했다.

한편 사건 관련자 김배영은 이전 1962년 10월에 일본으로 밀항하여서 일본 경시청에서 그를 수배하자 1964년 11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를 통하여 월북했다. 그는 1967년 10월 대한민국에 북한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가 1971년에 대한민국에서 체포되어 사형이 집행되었다. 또 "김형욱 회고록"에 따르면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주범인 金培永(김배영)은 체포된 후 일단 무혐의로 풀려난 틈을 타서 또 다른 공범인 체포되지 않은 禹東邑(우동읍)과 이북으로 도주하였고 지령을 받고 다시 남하하였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 당시 그는 공작금과 난수표,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고 북한으로부터 지령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민혁명당(1964년) 사건에 연루된 도예종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1974년)으로 사형이 집행되었고 우동읍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우홍선과 동일인물이다.

김배영 같은 경우는 1950~60년대에는 종종 있었다. 동백림 사건에서 볼 수 있듯 당시는 분단이 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던 만큼 이북도 이전까지만 해도 같은 민족 같은 나라였던지라 "뭐 좀 이따 통일 되겠지"하고 월북 행위에 큰 문제의식이 없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방 이전부터 사회주의에 대해 거부감이 없는 인물이라면 북한을 그냥 그런 사회주의 국가로 생각하고 적대시하지 않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3.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1974년)

1972년 10월 17일10월 유신으로 시작된 유신 정국이 가속되었다. 1974년 4월 3일 학생들의 대규모 반유신 저항 운동을 분쇄하고자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그리고 4월 25일 당시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학생 데모의 배후에는 공산당의 조종이 있었다는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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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4월 3일, 유신정권 당국이 발표한 민청학련 사건 명단

발표 요지에 따르면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 단체인 인민혁명당 재건위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 및 일본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1974년 4월 3일을 기해 현 정부를 전복하려 획책했다는 것이다.

법무부장관 황산덕을 통해 인민혁명당이 학생 시위를 배후 조종했다고 새로운 주장을 발표했다. 신직수김형욱의 부하 출신이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재임 초기시절에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냈다. 중앙정보부의 발표와 더불어 이전 인민혁명당 연루자들은 19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의 검찰부에 의해 국보법, 반공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의 혐의로 기소된다. 6월 15일부터 시작된 재판은 비상보통군법회의, 비상고등군법회의를 거쳐 대법원 확정까지 10개월이 걸렸다. 3심을 거치는 동안 피고인들의 형량은 변함이 없었고 특히 후술할 8인의 사형수들의 형량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형이었다.인민혁명당 판결(74도3323)

사형 확정으로 끝난 이 재판에 참여한 대법관(당시 대법원 판사)은 민복기(재판장), 홍순엽, 이영섭, 주재황, 김영세, 민문기, 양병호, 이병호(주심), 한환진, 임항준, 안병수, 김윤행, 이일규다.

이들 중 민문기, 양병호, 임항준, 김윤행 대법관은 훗날 김재규 판결때 정태원, 서윤홍과 함께 내란목적 살인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소신을 지킨 소수의견을 개진했다. 그리고 모조리 대법관직을 사퇴했다. 특히 양병호 대법관은 저 판결 이후 서빙고분실로 끌려가 고문까지 당했으며 대법원장실로 갔을 때 정말 별다른 일이 없었다고 말하면서 커피를 질질 흘렸는데 눈이 풀린 채 그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정신이 나가 있었다고 한다.

또 민문기 대법관은 대법원 1977. 9. 28. 선고 77다1137 전원합의체 판결의 소수의견에서 '한 마리의 제비로서는 능히 당장에 봄을 이룩할 수 없지만 그가 전한 봄 젊은 봄은 오고야 마는 법, 소수의견을 감히 지키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소신을 지키고 소수의견을 많이 낸 사람이다. 저 정도로 소신을 지킨 사람들이 왜 인민혁명당 사건에서 저런 판결을 내렸는지 의문이다.

이들 중 유일하게 이일규 대법관이 반대하여 반대의견을 냈다. 이일규 대법관은 항소심에서 피고인 신문을 생략하고 항소이유에 관한 변론만을 진행한 것은 제대로 변론 절차를 거쳤다고 볼 수 없다며 재판 절차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원심을 파기하고 다시 재판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다.
1. 비상군법회의의 설치에 관한 대통령긴급조치제2호는 2 「11」에서 그 조치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한 군법회의법을 준용하고 있으므로 아래에서 단순히 법이라함은 군법회의법을 가리키면서 나의 의견을 기술하겠다. 군법회의의 항소심은 원칙적으로는 사후심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법 제415조, 제416조에서 변론의 방식이나 피고인의 출석에 관하여 제1심과 다른 규정을 들고 있으나 그렇다고 전혀 복심 내지 속심 즉 사실심으로서의 기능이 없는 것도 아니다. 법 제425조에 따르면 고등군법회의(따라서 비상고등군법회의)는 원심판결을 파기하는 경우에 그 소송기록과 원심군법회의 또는 고등군법회의에서 조사한 증거에 의하여 판결하기 충분하다고 인정한 때에는 피고사건에 대하여 직접 판결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바 이는 원심판결에 사실의 확정에 영향이 없는 법령적용에 잘못이 있는 경우와, 원심판결에 사실오인 또는 양형부당이 있는 경우를 포함하여 제1심에의 환송 또는 이송하는 번잡을 피하기 위하여 소송경제상 자판을 하도록 인정된 제도로서 후자의 경우 즉 사실인정을 다시 하거나 새로운 형의 양정을 할 때는 사실심으로 심판하여야 함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할 것이다. 군법회의에서 판결은 특별한 규정이 없는한 구두변론에 의하여야함은 법 제71조에 명백히 규정되고 있는 바로서 항소심에 있어서도 법 제420조와 같은 특별규정이 없는한 판결은 반드시 변론을 거쳐서 하여야하며 여기서 말하는 변론을 거친다함은 군법회의의 면전에서 당사자가 공격방어한 소송자료에 터잡아서하는 심리과정을 거쳐서 하는 직접심리주의(법 제349조)를 말하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소심이라 할지라도 다시 사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양형을 할때에는 위에서 말한 의미에서의 변론을 거치지 아니하고서는 본안판결을 할 수 없다 할 것이며 이는 소송경제때문에 직접심리주의가 변질될 수 없고 또 헌법 제24조에서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보장되어 있는 점에도 합당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의 항소심인 원심판결은 검찰관의 공소사실의 진술도 없이 또 제1심에서의 신문과 중복된다하여 피고인의 신문을 생략한다하여 항소이유에 관한 변론만을 시행하여 결심하였는바 이는 공소사실에 대한 변론을 거쳤다고 할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피고인 E, 같은 F, 같은 G, 같은 H, 같은 L, 같은 M, 같은 N, 같은 O, 같은 Q, 같은 R, 같은 임규명, 같은 C, 같은 D, 같은 T, 같은 U, 같은 AB, 같은 W에 관한 제1심의 양형이 부당하다하여 제1심판결을 파기하여 사실인정을 다시하고 양형을 달리하는 판결을 하였으니 이는 변론 즉 사실심리를 아니하고 재판을 한 재판절차에 위법이 있다고 아니할 수 없고, 이 위법은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할 것이므로 이 부분 원심판결은 파기를 면할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당원 1963.10.10. 선고 63도256 판결이 군법회의의 항소심에서 사실인정과 양형에 관한 자판을 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직접심리를 아니하여도 위법이 아니라는 뜻이라면 폐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일규 대법원장은 훗날 2007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민혁명당 사건이) 내가 있던 3부로 배당됐다. 3부 구성원은 주심이 이병호 판사였고 주재황·김영세 판사, 그리고 나였다. 나 혼자 소수의견을 내서 전원합의체로 갔다. 통상 막내 판사가 먼저 의견을 말하는데 내가 의견을 말하자 일순 침묵이 흘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민복기 대법원장 주재로 다수결을 통해 2심 판결이 확정됐다. 피고인들의 ‘고문으로 그렇게 진술할 수 밖에 없었다’는 상고 이유에 대해 ‘그렇게 볼 만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상고기각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그리고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질 때 ‘아이고, 이렇게 생명이 사라지는구나’ 싶었다. 안타까운 마음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당시 우리 대법원이 군법회의가 내린 1심, 2심의 ‘잘못된 판결을 잘한 재판’으로 잘못 판단한 책임이 있다”고 거듭 말했다.

다만 유족들에 대한 사과 여부를 묻자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며 사법부의 책임이나 뒤늦은 사과에 대해서는 과거는 과거로 놔두자고 했다. 그러면서 “이미 지난 제도 아래서 내려진 판결이다. 이번 재심판결 역시 이번 제도 아래서 내려진 판결이다. 제도가 바뀌고 나서 판결이 달라졌다고 사과한다면, 제도 바뀔 때마다 예전 판결을 가지고 일일이 사과해야 하는가.” 라고 다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인민혁명당 연루자들은 가족 면회도 거부당하고 변호인과의 면회도 불법적으로 제한당한 채[1] 중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당시 피고인석에 자리했던 피해자들 중 8인의 사형수 중 한 명이었던 하재완은 혹독한 전기고문에 장이 항문으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이 사실을 폭로한 조지 오글(George.E.Ogle, 1929~2020) 목사[2]와 제임스 시노트(James.P.Sinnott, 1929~2014) 신부[3]는 강제 추방당했다. 시노트 신부는 동아일보 등에 인민혁명당 재판에 대한 부당함을 알리는 광고를 싣느라 무일푼 신세가 되었다. 그는 인민혁명당 사건 재판정에서 재판을 히틀러 재판에 비유하면서 "이것은 정의를 모독하는 당치 않은 수작이다! 공산주의 재판보다 더 나쁘다!"고 외쳤다. 법정에서 조용히 해 달라는 말에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싸여 노골적으로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외쳤다. "법정이라고? 여긴 그저 오물들이 쌓여 있는 곳이라고!" (천주교인권위원회 2001) 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2014년 12월 23일에 선종, 조지 이글 목사는 2020년 11월 15일에 사망했다.

3.1. 불공정한 재판

국제앰네스티1975년 한국 참관단 보고서[4]에 따르면 재판 과정도 굉장히 불공정했다. 공소장과 진술서는 증거능력이 정식으로 입증되지 않았음에도 증거로 채택되었던 것은 물론, 고문을 통한 자백 외에는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전혀 제시되지 않았으며 피고측 변호인들은 공판 2~3일 전까지 진술서를 전혀 볼 수 없었던 데다[5] 변호인측 증인은 한 사람도 채택되지 않았고 검찰 측의 증인에 대한 반대 신문을 하는 것도 금지되었다.[6]

그리고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고문 혐의를 제기해도 판사나 검찰이 강압적으로 제지한 것은 물론[7] 피고인들의 진술과 피고측 변호인이 요구한 증거가 재판에 전혀 반영되지 않도록 했고 가족 중 한 명만 재판에 참석할 것을 허용했으며 이렇게 통제된 재판을 외신기자들이 방청하는 것은 금지되었다.[8][9] 뿐만 아니라 관계당국은 공식적인 재판기록의 공개를 거절했다. 심지어 공판조서도 피고들이 (공소사실에 대해) '아니오'라고 분명히 말한 것이 모두 '예'라고 변조되는 등 터무니없이 변조되었다.[10][11]

물론 피고인들에게는 재판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사형 선고가 내려진 상태였으며 1심, 2심, 최종심 모두 피고인들이나 변호인들에게 변론이나 상황을 설명할 충분한 시간도 없이 '각본에 짜여진 극을 하듯' 진행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최종심에서는 피고인들도 없이 재판관들만 출정하더니 재판관들이 군법회의 공판조서만 보고 단 10분 만에 항소 기각 판정을 하며 사형을 확정지었다. 최종심도 두 차례나 담당 재판부가 바뀐 끝에 이례적으로 당시 민복기 대법원장을 재판장으로 하는 13명의 대법원 판사들로 구성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외압 논란이 있다. #

3.2. 사법살인

파일:2차 인민혁명당 사건 피해자들.jpg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당한 8명의 희생자들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여정남, 우홍선, 이수병, 하재완

1975년 4월 8일 오전 10시에 대법원에서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관련 피고인 36명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원심대로 형이 확정됐다.[12] 그런데 선고 바로 다음날인 4월 9일 새벽 4시 30분부터 아침 8시까지 서울구치소에서 이들 8명에 대한 형이 집행되었다. 사형 집행이 시작된 것은 형량이 확정된 지 겨우 정확히 18시간 30분 만이었다.[13]

이날 구속 이래 1년 가까이 피해자들을 보지 못했던 가족들은 '형이 확정되었으니 면회가 가능하겠지'라고 위로차 아침 일찍 피해자들이 수감되었던 서울구치소에 면회하러 왔던 유족들은 이미 형이 집행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졸도했다고 한다. 사실 다음날 바로 형이 집행되지 않고 좀 있다가 집행해도 면회는 유신 정부가 필사적으로 막았을 것이기 때문에 못볼 확률이 매우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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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희생당한 사형수 8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프로필의 직업은 체포 당시 기준이며 시신은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는 현대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참고로 이들 중 하재완과 우홍선은 6.25 전쟁 참전용사였다.[14]

3.3. 시신탈취와 불법 화장

유신 정권은 사형당한 8인의 시신을 유가족들에게 돌려주려 하지 않았으며[15] 특히 송상진, 여정남 2명의 시신은 유족의 동의 없이 멋대로 시신을 탈취하여 화장해 버렸다. 피해자들이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이 폭로될까 두려워했던 데다[16] 유족들이 한데 모여 억울한 죽음을 호소할까 봐 그랬다고 한다. 이 중 우홍선, 이수병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정식으로 인수됐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집이 서울이 아니어서 바로 인수되지 못했다. 이때 경찰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남은 시신들을 빼앗기고 남은 송상진의 시신만이라도 가족들에게 보내기 위해 천주교 사제들이 응암동 성당으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경찰들은 크레인까지 동원해 시신을 강탈해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해 버렸다. 이 과정에서 경찰에 맞서 저항했던 이들 중 문정현 신부는 추락하여 장애를 얻었다.

이들에 대한 고문과 전격 처형, 화장 등의 잔혹성과 의혹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에서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3.4. 평가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고 사법 살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스위스의 국제법학자협회는 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사법 역사상 암흑의 날(Dark day for the history of jurisdictions)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엠네스티에서도 판결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8~90%가 영남 출신이었고 사형당한 8명 역시 모두 영남 출신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4명은 본적을 대구경북에 두고 있었다. 때문에 이 사건을 당시 TK 민주 세력의 씨를 말려 버리려고 기획한 사건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1995년 4월 25일 MBC의 설문조사[17]에서 판사들이 뽑은 "우리나라 사법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으로 꼽혔다.

3.5. 사건 이후

전격 처형된 8명을 비롯해 이 사건으로 전창일, 김한덕, 나경일, 강창덕, 이태환, 이성재, 유진곤 씨가 무기징역을, 김종대, 정만진, 조만호, 이재형 씨가 징역 20년을, 이창복, 황현승, 임구호, 전재권 씨가 징역 15년을, 장석구 씨 등이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이들 중 장석구 씨가 1975년 10월 1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1982년 3월 2일 형집행정지로 유기수 석방, 8월 15일 무기수 20년으로 감형, 12월 24일 형집행정지로 20년형 유기수 석방 등의 조치를 통해 출소했다. 그러나 출옥 후 전재권, 유진곤 씨가 지병으로 병사했으며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박현채 전남대 교수가 95년 사망했다.

사건의 발단에서 진행, 결과에 이르기까지 석연치 않은 일 투성이었다. 정치적 득보다는 해가 많은 사건으로 도대체가 왜 이런 악수를 두었는지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 이후 반정부 세력에서 강경파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 관계자들은 '아무리 독재자라 해도 없는 죄를 만들어 죽이지는 못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사형 선고를 받아도 영광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인혁당 관계자 8명이 사형당하는 걸 보고 독재자가 누명을 씌워 멀쩡한 사람을 정말로 죽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국제적으로 완전히 찍힌 사실만 봐도 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설령 이들이 실제 간첩이었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성급한 형 집행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다. 생포한 스파이를 죽이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행동이다.[18] 살려서 가지고 있는 정보를 있는 대로 짜내고 나중에는 인질로서 적국과 거래용으로 이용하는 것이 정보전의 정석이다. 당시 중정이 발표한 대로 그들이 고위 간첩이었다면 당장 죽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지나치다시피 한 형 집행이 자신이 조작한 사건임을 입증하는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공안정국을 만들려고 했다고 봐도 달리 같은 해 일어난 장준하 의문사 사건과 함께 국내 여론의 반발만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논란이 일면 항상 언급되는 사건이며 사형제 존폐 논쟁에서도 인천 일가족 살인사건과 함께 반대의 예시로 자주 언급된다. 한국에서 사형 제도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이 확산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이 사건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후폭풍도 컸다. 해외의 비난 여론은 긴 기간 외교적 짐으로 작용했다. 미국의 감리교 목사 조지 오글(George E. Ogle, 한국명 오명걸)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이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다가 중앙정보부의 심문을 받고 추방당했다. 그는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한 이후 주로 노동, 인권분야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당연히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민주화 이후 2020년 제33주년 6월 민주항쟁 기념식에 '민주주의 발전 유공 포상' 국민포장을 수여받고 2020년 11월 15일 9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당시 미국으로 추방당했던 조지 오글 목사는 미국에 인민혁명당 사건을 폭로했으며 이는 미국 정계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보수언론조차도 이 사건의 부당성을 강도 높게 비난했을 정도였다. 다음 해 미국지미 카터 정권이 도덕/인권 정치를 외치며 들어섰을 때 한미관계가 급격하게 냉각되게 만드는 간접적인 원인으로 열거될 정도다.

박정희도 이후 이 사건을 크게 후회하였다는 증언이 있다. 그러나 이후 중정 요원들이 늘 유가족들을 사사건건 감시하고 연좌제로 묶었던 행태 등에 비추어 봤을 때 동정의 여지는 없다.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후회했다기보다는 해외의 비난 여론과 어려워진 외교 관계, 요동치는 민심 때문에 후회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불미스러운 사법살인으로 인해 대구광역시경상북도 지역의 진보 세력과 적은 숫자로 남아 있던 좌파 세력들이 완전히 뿌리가 뽑혔다는 진단도 있다. 대구 10.1 사건을 비롯해서 대구/경북 지방은 해방 직후 좌파의 성지로 유명했고 진보 세력도 상당히 강했기에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후에도 1960년대까지 경북 지방은 굉장히 진보적인 사회운동가들이 많은 지역이었지만[19] 이 사건 이후 1979년 남민전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보수화되어 버렸다. 얼마 후 밑의 부산, 마산 등지에서 민주 항쟁이 벌어질 때도 큰 소요는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시기 이후 대구/경북 지역에서 일어난 공안사건의 숫자와 타 지역의 숫자를 비교해 보면 대구/경북에서는 진보적 사회운동의 뿌리가 아예 뽑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6. 연좌제에 묶여 살아왔던 유가족들

유가족들의 삶은 정말 비참함 그 자체였다. 중정 요원들이 화장실까지 따라와 감시하는 등 그림자처럼 붙어다닌 건 물론이고 더욱 가혹하게도 가는 곳마다 '간첩의 집안'이라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다녔다. 사형당했던 희생자 하재완의 막내아들은 4살 때 동네 아이들이 자신의 목에 새끼줄을 매어서 끌고 다니며 당산나무에 묶어 놓고 '빨갱이 새끼는 총살해야 한다'며 놀리는 이른바 '총살놀이'를 했다고 한다. 소풍날에는 반 아이들이 몰려와 '간첩의 자식'이라며 도시락에 개미를 넣고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인혁당 희생자 송상진의 가족의 경우 아내가 죄책감에 자식들과 함께 쥐약을 먹고 죽으려고까지 했다. 그 모습을 친정 어머니가 우연히 보고 말렸지만 친정 어머니는 당시 깊은 충격에 빠져 몇 년 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송상진의 아들 송철환은 '정말 학교 가기 싫었을 정도로 끔찍한 기억의 나날'이라고 증언했다.

이런 식으로 인혁당 사건의 유가족들은 수십 년 동안 사회로부터 멸시와 수모를 겪은 채로 살아 왔다.

진상규명 후인 2000년대 이후에도 우파 단체나 그 성향 가진 네티즌 등 극우 세력들이 이들을 홍어, 종북좌파, 빨갱이 등 심각한 발언과 함께 조롱하고 있으며 아래서 얘기할 언론인 심원택의 예처럼 '인혁당 사건은 공안조작 사건이나 실정법을 어긴 건 명백하다'는 식의 잘못된 양비론을 지니는 경우도 일부 있다.

3.7. 재심 청구와 무죄 선고

1998년에는 천주교인권위원회 등을 중심으로 '인민혁명당 사건 진상 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진상규명 운동을 시작했고 유족 등 관련자들의 증언과 사연이 여러 언론매체를 통해 점차 보도되면서 점차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이 사건이 재조명되었고 유족들은 12월 서울중앙지법에 재심을 청구하였다. 사법부에서도 고문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결국 2005년 다시 재판이 시작되어 2007년사형 선고가 내려진 8명에게 증거 불충분에 의한 무죄 선고가 내려졌다. 30년이 지났다고 증거 불충분이 된 게 아니다. 법원의 증거는 서류로 남는다.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선고가 내려진 것은 당시 택도 없는 증거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는 소리가 아니라 고문으로 인한 증거의 증거 능력이 효력이 없음을 재심하였기 때문이다. 법원은 증거 능력이 있는 증거를 통해 범죄가 확실히 증명되었을 때만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다. '위법하게 수집되었으리라는 심증은 있지만 철저하게 조작되어 조금의 꼬투리도 잡을 수 없는 증거를 법원은 외면할 수 없다'고 옹호하는 의견도 있지만 당시 피고인들이 검찰에서의 자백이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라고 재판 과정에서 항변했던 점 등을 생각할 때 받아들이는 이들이 알아야 할 점이 있다. 고문은 허위 자백과 진술의 심증의 여부를 판단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런 논란 속에서 이명박 정부제성호 인권대사가 "인혁당 사건의 무죄 선고는 재고를 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논란이 되기도 했다.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인혁당을 조직했다는 주범으로 주목됐던 김영춘은 남파 간첩이 아니라 애초에 위장 월북을 한 북파 간첩이었고 본명은 김상한이었다고 과거사진실위원회를 통하여 밝혀졌다.(경향신문 기사).

몇몇 언론에서는 인혁당은 실제로 존재했다며 사형 판결과 집행을 합리화하는 듯한 기사를 썼는데 이건 이 사건의 본질을 잘못 짚은 기사다.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인혁당이 실제로 존재했는지의 여부가 아니다. 이 사건의 문제는 충분한 증거 없이 법원이 판결을 내리고 사형 선고를 했으며 그 사형 집행 또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법원이 유죄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적법하게 수집된 증거 능력이 있는 증거를 바탕으로 범죄가 확실히 증명되었을 때만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으며 사형 판결이 확정되어도 실제 사형 집행에는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 정도 간격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백 번 양보하여 인혁당의 존재 여부가 중요하다고 해도 당시의 검찰은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적법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법원도 재판을 신속하게 진행하고 판결을 진행했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은 40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인혁당이 존재했다고 주장하는데 기사의 주장대로 인터뷰에 응한 사람이 실제로 인혁당에 가입하여서 활동하였고 인혁당이 실제 북한의 지령을 받은 반국가단체였다면 이 사람은 살아남지 못했거나 감옥살이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문은 선고 직후 판례공보를 통해 일반에 공개되는 것이 원칙인데도 인혁당 사건의 판결문은 '1975년 4월 21자 법률신문 제1104호에 전문게재 되었음'이라는 이유를 들어 법원 판례공보에 실리지 않았다. 결국 판결문은 약 30년간 '사실상 비공개'였던 것이다. (출처 : 대법원 1975. 4. 8. 선고 74도3323 판결 [대통령긴급조치위반·국가보안법위반·내란, 예비, 음모·내란, 선동·반공법위반·뇌물공여] > 종합법률정보 판례) 물론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문제의 신문을 찾아볼 수는 있지만 절차가 복잡하다고 한다. 관심 있는 사람은 대법원 1975. 4. 8. 선고 74도3323 판결을 보자.

2013년 11월 28일,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의 재심에서도 무죄가 선고되어 1, 2차 인민혁명당 사건 모두 무죄가 확정되었다.

단 1차 사건의 13명 중 9명만 무죄가 확정되었고 4명의 재심 청구는 기각됐다.#

3.8. 무죄 선고에 대한 박근혜의 입장

나에 대한 정치공세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2007년 1월, 인혁당 무죄 판결에 대한 의견을 묻자
2004년 8월 29일 당시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에게 인혁당 사건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자 박근혜 대표는 "이미 충분히 사과했다. 헐뜯기에 불과하다. 법적으로 이미 끝난 일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2005년 12월 8일 국가정보원에서 인혁당 사건이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공안 사건이라는 사실을 발표하자 "한마디의 가치도 없는 모함이다.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인사들이 모여 역사를 왜곡하고 헐뜯는 수작에 불과하다."며 정부를 비난하였다.

2007년 6월 19일 대선 경선의 통일·외교·안보 분야 정책비전 대회에서 원희룡 후보가 박근혜 후보에게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의향이 있냐고 묻자 박근혜는 친북의 탈을 쓰고 국가의 전복을 기도한 자들에겐 사과할 수 없다며 사과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2012년 9월 10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근 5년만에 출연한 새누리당 대선 후보 박근혜는 인혁당 사건에 관한 진행자의 질문에 아래와 같이 인터뷰했다.
☎ 손석희 / 진행 : 예를 들면 말이죠. 사실 그동안에 특히 유신 피해자한테 그동안에 정치과정에서 나름 깊이 생각하고 사과한다는 말도 일부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예를 들면 유신의 가장 어두운 부분이라고들 얘기하는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에 대해서 혹시 사과할 생각이 있으신 건지요?

☎ 박근혜 : 그 부분에 대해선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도 또 어떤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답을 제가 한번 한 적이 있습니다.

☎ 손석희 / 진행 : 거기서 특별히 더 진전된 것은 없다.

☎ 박근혜 : 예, 왜냐하면 다른 판단이 나왔기 때문에, 똑같은 대법원에서.
 
참고로 박 후보가 말한 "대법원의 두 가지 판결"은 박정희 통치 기간의 대법원과 2007년의 대법원의 판결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인혁당 유족 재단에서는 박 후보의 위 발언에 격하게 반응하였다. 법조계에서도 박 후보가 형사사법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입장을 표했다. 박 후보가 1차 인혁당 사건과 2차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혼동해서 오해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이 1차 인혁당 사건과 2차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헷갈렸다는 점은 변명거리가 될 수 없다. 미국에서 사라 페일린이 부통령 후보로써 언론과의 인터뷰나 공식석상에서의 실언 때문에 엄청난 비판이 가해졌던 사실을 주목하자. 그리고 인혁당 사건은 1차와 2차 모두 정권 차원에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조작한 사건이므로 1차와 2차를 헷갈려서 저런 실수를 한 거라는 해명 자체는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일으켰다.

결국 후보 본인이 후속 발언을 했다. 바로 사과로 받아들여 달라는 발언을 시작으로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민생이 우선인데 과거나 붙들고 늘어지는 걸 보니 배가 부른가보다"라는 발언을 하여서 비판을 받았고 역시 새누리당 소속 김병호 공보단장은 한 발 더 나가서 "박근혜 후보가 사과를 해야할 대상은 사형을 당한 당사자들인데 죽었으니 사과를 할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논란을 더 일으켰다.#

결국 박근혜는 전방위적인 비판에 본인의 역사관을 정리하겠다는 선언 후 5.16과 유신의 피해자들에게 죄송하다는 연설을 하긴 했다. 근데 연설 도중 "인"혁당을 "민"혁당이라고 해서 또 욕을 먹었다. 이후 인혁당이라고 써야 하는 것을 민혁당이라고 오타가 났기 때문이라고 해명했지만 유족 재단에선 두 번 죽였다며 그냥 가만히나 있으라고 성토했다. 게다가 오전에 사과하고 오후엔 대학생 지지자들과 퍼포먼스로 말춤을 춰 진정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결정적으로 새누리당의 대변인으로 임명 절차를 받고 있었던 김재원이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박근혜의 사과는 베드로가 예수를 부정한 것처럼 억지로 몰려서 하는 거다"는 식으로 이야기한 것이 기자들에 의해 실시간으로 퍼지며 박 후보의 사과 퍼포먼스에 진정성이 없다고 비판받았다.#

이에 대해 박지원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는 '프롬프터 놓고 몇 분 읽고서 사과를 다 끝냈다고 하는 것은 진정성이 없으며 단 하루라도 인혁당 사건 유가족들에게 (사죄의) 마음을 가지지 않고 사과를 발표한 날 오후에 말춤 추고 다니는 것은 국민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라며 박근혜 후보를 비판하였다. 박근혜의 최측근이었던 전여옥 증언에 따르면 박근혜는 인혁당 사건에 대한 사과 요청을 거부하면서 "당시 법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변명했다고 한다.

3.9. 배상금 논란

국사, 근현대사가 친숙하지 않은 대부분의 현대인에겐 아예 잊힌 사건이었지만 국가가 배상금 600억원을 지급하기로 한 판결이 나온 후 다시 관심을 끌었다.

인혁당 사건은커녕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대다수의 네티즌들에게는 당연히 "배상금이 600억이나 되다니 무슨 일이야!"일 수밖에 없었다. 판결 당시 네티즌 반응

이 600억이라는 큰 배상금 액수 때문에 화제가 되었다. 산출 기준은 배상액 230억 + 30년간의 이자와 기타 잡비를 합친 금액이라고 한다. 2007년 당시 정부는 30억의 배상금이 책정되었을 때에 정부가 반환금 소송을 진행하겠다는 의사를 비추었지만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법살인의 사례이자 인권 탄압이라는 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여론에 밀려서 반환금 소송은 진행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후 정부는 부당이득금 청구소송을 조금씩 진행하여 배상금을 너무 주었으니 돌려달라는 소송을 진행했고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연이어 배상금을 반환하라는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해 당시 집권 1년차였던 박근혜가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위하여 퍼주기식 배상금을 남발해 "나는 아버지의 잘못을 안다."는 언론플레이를 벌인 후 과잉 배상과 부당 이득금이라며 소송을 걸어 돌려받는 치졸한 수법이라는 비난 여론이 일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시기였던 2011년부터 대법원을 통해 지연 손해에 대한 과잉 배상 문제에 대해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과 소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즉 이것은 박근혜 정부 이전인 이명박 정부 시기부터 진행된 소송이며 박근혜 정부의 행보와는 관련이 없다...고 하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박근혜 정부도 피해자들을 법을 무기로 괴롭힌 게 아니냐는 의혹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박근혜는 소위 2개의 판결 운운하면서 인혁당 사건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였고, 박근혜 정부 내내 박근혜의 심기만 살피던 행태로 본다면 국가 공권력 피해자들에게 가혹한 2차 가해를 가한 현실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배상금을 돌려달라는 정부의 주장의 골자는 30년 간 붙은 이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600억을 지급하기로 정한 원심은 일반적인 불법행위 손해배상채무의 지연손해금 계산 방식대로 불법행위가 있던 1975년부터 지연손해금을 계산하였으나 대법원은 해당 사건과 같이 불법행위 시점과 소송 시점 간 통화가치가 심하게 차이 나는 예외적인 경우에는 사실심 변론종결 시(해당 사건의 경우 2009년)를 기준으로 지연손해금을 계산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정부의 손을 들어주었다.[20]

2017년 3월 24일 방영된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 인혁당 사건 유족들과 피해 가족들의 고통을 방영했다. 2011년부터 정부가 부당 이득금 반환 소송을 제기하면서 무려 210억에 달하는 소송이 제기되었고 피고인 측이 모두 패소했다. 더욱 황당한 건 이 사건의 주범인 국정원(중정의 후신)이 소송 주체로서 피해자들에게 이중으로 고통을 줬다는 것이다. 한 투옥 피해자는 지급된 배상금을 모두 채무 변제와 일부 기부로 다 지출한 탓에 소송 패소로 국정원 측에서 집의 모든 가재도구에 가압류를 걸었으며 다른 피해자 가족은 오랫동안 거처한 집을 압류로 빼앗길 처지에 내몰렸다.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난 이상 법적인 구제 방법은 없고 오직 대통령의 지시로 압류 집행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측은 법과 원칙을 내세워서 피해자들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겼다.

문재인 정부 역시 “딱한 사정 알고 있다. 해결 방안을 검토해 보겠다”는 원론적 수준의 대답만 나왔다. 문재인 정부로서는 자칫 위험한 것이, 전 정권인 박근혜 정권 당시 청와대와 국정원 간의 은밀한 연결이 재현되는 것처럼 보여서 정치적으로 상당한 위험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원고는 국정원이다.

그러나 다행히 2018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에서 과거사 피해에 대한 대법원 판결 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인혁당 사건 유족들도 배상금 반환과 관련된 재심을 청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판결의 조건이 참으로 까다로운데, 재심 뒤 6개월 내에 청구할 것, 그리고 명백한 과거사위 조사서 등을 첨부할 것 등이었다. 문제는 과거사위가 이미 10년도 더 지난 때에 이루어졌고 이미 재심을 받아서 무죄 판결을 받긴 했지만 배상과 관련한 재판은 아직 진행조차 하지 못한 사건들도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해당 판결은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삼청교육대, 대구 희망원 사건 등의 가해자들이 줄줄이 위헌 판결 또는 살인, 고문, 폭행, 강간을 저지르고도 무죄로 풀려난 것 때문에 분노한 국민들이 다시 한 번 역사의 심판을 요구한 사건들이 줄줄이 주목받고 다시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됨에 따라 주목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대법원이 위헌 결정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는 미지수이므로 좀 더 지켜봐야 한다. 하지만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농단 중 과거사 배상에 대한 편파적 판결이 있었던 만큼 이 사안과 결부된다면 해결 방안이 보일지도 모른다. 물론 위의 사건들이 이미 연관된 거나 마찬가지이고 수많은 법들이 개정되면서 사실상 해결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사건은 진도 가족 간첩단 사건에게 영향을 주는 사례가 될 가능성이 생겼다.

인혁당 피해자 중 한명인 이창복의 경우 수령받은 배상금의 절반을 반환해야 한다는 판결을 받아 원금 4억 9천여만원 외에 연 이자 20% 때문에 눈덩이처럼 액수가 불어나 10억원에 육박한다. 2022년 5월 4일 서울고등법원은 2심 화해권고로 올해 말 까지 먼저 5천만원, 내년 상반기까지 나머지인 4억 5천만원을 상환하라고 하였고, 정부에서는 5억원을 갚지 않으면 이자도 15억원을 갚도록 명시하라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런 식으로 정부의 배상금 낚시에 당한 피해자가 무려 39명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6월 20일 법무부는 이창복의 과다 배상금의 지연 이자 납부를 면제하기로 한다고 발표했다.#

3.10. 그 외

내가 죽는 이유는 민족민주운동을 한 죄뿐이다.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의 사형수 이수병 씨의 유언장

1988년 극단 '연우무대'가 만든 연극 <4월 9일>은 바로 이 사건을 소재로 했다. 극본 겸 연출은 이상우이며 중간에 나오는 히틀러풍으로 그려진 박정희 초상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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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징역을 받은 유진곤의 당시 13살의 아들이였던 유동민 군[21]지미 카터 대통령[22]에게 당대의 인권유린을 폭로하는 편지를 보낸 바 있다.
[편지 전문(펼치기/접기)]
>카터 대통령님께 보냅니다.
카터 대통령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의 어린이지만 카터 대통령이 당선되셔서 아주 기뻐요.
카터 대통령님은 누구보다 민주주의를 잘 아시고, 힘없고 약한 국민들을 사랑하신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1974년 4월 대통령 긴급조치 제4호 위반형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중인 유진곤의 아들 유동민입니다.
우리 아빠는 훌륭한 사람이며 절대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아빠는, 비밀군사 재판에서 말한마디도 못 한채, 중형을 받았어요.
그 동안, 저는 박 대통령께 호소문도 보내었고, 엄마랑 같이 중앙정보부 6국에 붙잡혀가서, 33시간 동안 의자에 꼬박 앉아서, 밤을 새우며 중앙정보부 아저씨들에게 무서운 말을 많이 듣기도 했으며, 3년동안 주님께 날마다 기도도 하였읍니다만, 우리 아빠는 아직도 석방되지 못하고, 어둡고 추운 독방에서 운동도 치료도 못 받고, 고통받고 계십니다.
지금은, 한달에 단한번 5분동안 면회를 시켜주지만, 어둡고 두꺼운 유리벽이 막혀 아빠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고, 인사외에는 다른 아무 말도 못하게 교도소 아저씨가, 3사람 씩이나 지키고 있으면서, 호통을 쳐서 면회하기도 무서워요.
아빠는,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고, 몽둥이로 어깨를 몹시 두들겨서, 온몸에 신경통이 생겨서, 밤잠도 못 주무시지만 치료도 못 받고 있답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라고, 학교에서 배웠읍니다.
그런데, 왜 우리 아빠는 비밀군사재판을 받아야 했고, 저렇게 억울하게 고통을 받는지, 저는, 알수가 없읍니다.
그런데, 대통령 긴급 조치가 너무나 무서워서, 제가 잘 아는 변호사 님은, 아빠가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서워서 말을 못하신답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하면,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고, 중앙정보부에 잡혀 간답니다.
제가 좋아하는, 목사님도 신부님도 다 붙들려갔고 다른 어른들은 무서워만 하니까, 저는 정말 슬퍼요.
박대통령은 무서워서 편지도 못 보내겠고,
그래서, 한국이 아닌 미국이지만, 민주주의를 가장 잘아시고, 우리아빠처럼 힘 없고 약한 사람을 동정하시는, 카터 대통령님께 부탁드립니다.
우리 아빠가 석방되게 도와주십시오.
아빠를 기다리다가, 할머니는 병이나서, 곧 돌아가시게 되었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빠가 석방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제가 이 다음에 커서, 어른이 되면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카터 대통령님 은혜에 꼭 보답하기로 약속드리겠읍니다.
카터 대통령님, 안녕히 계십시오.

1976.11.24
국민학교 6학년, 유동민


올드보이의 감독 박찬욱의 평생 프로젝트가 바로 이 사건을 소재로 한 리얼리즘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2차 인혁당 사건 재심 판결 이후 EBS 지식채널e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개요의 동영상 참조) 영상 본편이 끝나고 프로그램을 제작했던 김진혁 PD는 정치적 압력에 대한 묘한 여운을 주는 글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이후 정권이 교체되면서 지식채널e 팀에서 하차하여 논란이 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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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앞에 가면 '여정남 공원'이 있는데 이곳에 인혁당 희생자 여정남[23]을 기리는 추모비와 흉상이 있다. 여정남은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장 출신이다. 정치외교학과 출신인지라 사회과학대 앞에 공원이 생긴 것. 1991년 총학생회가 모금운동을 벌여 건립했으나 1995년 경찰이 이를 '이적표현물'이라고 보면서 추모비를 압수하려 했지만 이를 사수하려는 운동권 학생 1,000여명과의 대치 끝에 안내판만 압수했고 비석은 미리 숨겨두어 낮에만 설치했다. 1996년 6월 18일 경찰 측은 전의경 3개 중대와 중장비를 동원해 비석 및 안내판을 철거하자 이에 운동권 측이 이를 '공안탄압'이라고 규정하며 집회 및 시위를 벌였지만 비석은 결국 폐기되었다. 참고로 비석 철거는 군사정권[24]도 아닌 문민정부 시기 있던 일이다.[25]

2000년 5.18 민주화운동 20주년을 기념해 총학 측이 모금운동을 벌여 원본과 비슷한 크기의 추모비와 안내판을 대강당 앞에 다시 세우고 추후 공권력에 의한 탈취를 막고자 땅속 깊이 박았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경찰 측은 이를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간주하며 강제철거 입장을 밝혔으나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보류되었다.(연합뉴스 기사) 이곳은 공원이긴 하지만 다들 담배 피우러 나오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더불어민주당이해찬 의원은 이 사건의 영향으로 사법살인이 남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공식적으로 사형 제도를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관련 자료

5. 관련 단체

6. 인민혁명당은 실존했다?

이 사건은 당시 재판에서도 제대로 된 증거가 나오지 않은 사건이다. 이 사건이 국제적으로 사법 역사 치욕의 날로 각인된 것은 인혁당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여부 때문이 아니라 충분한 증거 없이 법원이 판결을 내리고 사형 선고를 했으며 그 사형 집행 또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졌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아래의 발언들은 첫째, 인혁당의 실존만을 주장할 뿐 그것이 어째서 국가 권력으로 18시간만에 사형 집행을 마친 행위의 정당성으로 이어지는지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를 하지 않고 있고 둘째, 인혁당 실존 여부에 대한 발언마저도 발언의 진위 여부에 관해 일체의 교차검증이 이루어진 적이 없는 이야기들이다. 사실상 뉴라이트 사관 측의 주장들인데 설령 뉴라이트 사관을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이 주장들을 국가의 사법 살인 행위를 옹호하는 근거로 써선 안된다.

더구나 아래 주장들은 모두 1차 인혁당이 실존했다고 주장하는 것들이지 인혁당 "재건위"가 실존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26] 하술할 안병직도 2011년 7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판결은) 사법적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정치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설사 인혁당이 재건됐다 하더라도 그렇게 큰 희생을 치를 만한 활동은 없었을 겁니다.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사형시킬 명분은 없었습니다."고 밝혔다.

[인혁당 사건 옹호자들의 주장 펼치기•접기]
* 박범진 전 국회의원은 대학 재학 시절 제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고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석방된 전력이 있다. 그는 "4·19 이후에 이미 대학에서 친북좌파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선배들 가운데는 누구도 자기 과거에 대해 입을 여는 사람이 없고 선배로서 부끄럽다", " 대한민국에서 국회의원을 했던 사람으로 국가에 충성을 해야 하는데, 과거가 있는 사람이 침묵을 한다는 것이 괴로웠다" 등의 발언을 하며 인혁당이 실재했다고 주장했다. #

* 최초의 위장취업 노동운동가로 1960년부터 1980년까지 좌파 운동권의 전설적 이론가로 알려진 김정강(金正剛)은 인혁당 사건의 주범으로 기소된 도예종과 친밀했던 인물이다. 김정강이 도예종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 놓은 것이 실마리가 되어 도예종이 검거됐다. 그는 <자유공론> 1995년 1월호와 1996년 8월호에 실린 회견기사에서 “인혁당은 제1차 사건 때부터 실제로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1차 인혁당 사건으로 투옥된 도예종과 교도소에서 만났을 때 도예종이 그에게 “이번에 검거되기는 했으나 법정투쟁에 의해서 승리적으로 넘어왔고 당은 노출되지 않았으므로 전략적으로 승리라고 봐야 한다”고 말하면서 앞으로 당이 재건되면 입당하라고 권유했다는 것이다.[27]
김정강은 이후 다른 인터뷰에서도 도예종이 형기를 마치고 나가면 전위당(前衛黨: 노동자 계급의 전위대로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을 선도하는 정당)을 다시 추진하자고 자신에게 권유했다고 회상하면서, 당시 피고인들의 검찰에서의 부인(否認)작전이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출판한 서적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인민혁명당(인혁당)은 당시 법정투쟁에서 성공했습니다. …검사들은 좌파사건들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일제히 부인하니까, 처음에는 당황했죠. 나중에는 이 사람들이 엉뚱하게 걸려들었구나 하고 착각을 한 거지요. 그래서 그 때 검찰파동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결국에는 조직으로서가 아니고 고무 찬양 조항으로 유죄가 돼서 (교도소로) 넘어 왔단 말입니다.”[28]
  • 뉴라이트 재단 이사장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교수로 재직할 당시 좌익운동 이론가로 활동했기 때문에 각 조직의 세부운동에 대해 비교적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밝혔다. 안 교수는 1964년 8월 수사기관이 발표한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을 4·19 이후 최초의 좌익운동으로 평가했다. 증언에 따르면 안 교수는 1962년 대학원에 진학해 빨치산 출신의 인혁당 가담자인 박현채를 만나 교육을 받았다.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의 저술을 탐독했고 한용운과 신채호의 사상에 따라 결국은 민족주의를 중심축으로 하는 사회주의자가 됐다. 안 교수는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통혁당 사건, 제2차 인혁당 사건,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 김정강(金正剛) 그룹 등 5대(大) 좌익운동 사건에 대해 듣고 경험했던 일들을 김수행(金秀行ㆍ現 성공회대 석좌교수), 신영복, 박성준 등 관련자의 실명과 구체적인 장소를 언급해 가며 공개했다.

    안 교수는 “당시 수사기관에 발각돼 조사ㆍ발표된 보도내용들은 기본적으로 대개 사실”이라며 “한 다섯 번 정도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으며 얻어맞기도 하고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수사기관이 가능하면 법적 테두리를 지키려고 애쓰는 것으로 느껴졌다[29]”고 주장했다. 안병직 교수 증언록을 통해 본 ‘5대 시국사건’

7. 여담

2012년작 다큐멘터리 영화 <유신의 추억: 다카키 마사오의 전성시대(감독 이정황)>에서 해당 사건이 언급된 바 있는데 개봉을 1달여 앞둔 10월 23일에 국회도서관 및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시사회에 인혁당 재건위 사건 유가족들이 참관한 바 있다. 이 행적은 동월 28일 MBC <시사매거진 2580> '정치, 극장에 가다(김지경 취재)'에도 다뤄졌으나 심원택 당시 시사제작2부장의 간섭으로 인해 인혁당 관련자인 우홍선의 유족 인터뷰 및 신문광고 공개 장면, 국회도서관 시사회 부분 등 일부가 삭제된 채 방영됐다. 이에 동월 31일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가 민주방송실천위원회 보고서를 통해 이를 비판하자 심 부장은 사내 게시판을 통해 "인혁당 사건은 두 가지 팩트가 존재한다"며 "고문에 의해 진술한 내용은 증거의 효력이 없어 무죄이나, 인혁당 관련자들은 당시의 법을 무시하고 친북활동을 했다"는 식으로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11월 2일에는 4.9통일평화재단 등 61개 재야단체가 참여한 '유신잔재 청산과 역사정의를 위한 민주행동' 측이 이를 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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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24일 대구 달성군 사저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박근혜에게 누군가가 소주병을 투척하는 소동이 있었다. 투척한 남성은 자신이 인민혁명당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범인이 40대라서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아기일 때 벌어진 사건일 텐데 어찌된 거냐면 간접적인 피해자(유족)라서 그렇게 주장한 거라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범인이 HR.인민혁명당 홈페이지를 홍보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범인은 과거 박근혜의 "인민혁명당 관련 재판은 2개" 발언을 언급하며 (박근혜가) 인혁당 사건을 부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사죄를 하지 않아서 화가 났다고 진술했다.

다음날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의 추모 기관인 4.9통일평화재단에서는 HR.인민혁명당 페이지가 피해자들의 사진을 무단으로 이용하고 있고 이 모 씨 또한 피해자들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인민혁명당 사건 피해자들의 입장은 안전기획부에서 존재하지 않는 인민혁명당을 날조했다는 것인데, 피해자나 그 관련 인물이라면 '인민혁명당 가입'을 요구할 이유가 전혀 없다. 범인이 만든 홈페이지가 각종 허무맹랑한 내용으로 범벅이 된 것을 고려하면 관계망상 성향을 가진 정신질환자로 추측된다.[30]

8. 둘러보기

대한민국의 사법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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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분류:수사기관의 사건 사고 / 분류:징계 관련 사건 사고 }}}}}}}}}


대한민국의 국가폭력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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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판 시작 직전까지 변호인과의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2] 1954년 한국에 와서 도시산업선교회 활동을 한 미국 개신교 연합감리교회 선교사다.[3] 1960년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에서 한국으로 파송한 천주교 사제다.[4]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해 당대 해외 인권단체가 어떻게 바라봤는지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5] 이후 접할 수 있었던 진술서도 검찰측이 가진 것이었으며 변호사측은 자신만의 진술서 사본을 만들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6] 심지어 검찰측 증인 42명이 증언을 했을 때 피고측 변호인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하는데 이때 피고측 변호인들이 검찰측 증인이 증언하는 날에는 모두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검찰측 증인이 '증거'라고 제시한 것은 전부 고문을 통한 자백이었으며 피고측이 검찰측의 '증거'를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고 했는데도 재판부는 이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7] 실제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재판에 참여한 문호철(1938?~1978) 검사는 법정에서 피고인이 고문 사실을 폭로하자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고문을 당하지 않은 증거'라고 소리를 지르고 욕설까지 섞으며 말했다. 그리고 별을 단 재판장은 피고인들이 검사의 질문에 반박하려 하면 예, 아니오로만 답하라고 말하고 답변을 끊었다.[8] 실제로 1974년 10월에 김종필 당시 대한민국 국무총리는 국회에 출석해 "외신기자들이 법정에서 진행되고 있는 내용을 잘못 이해하여 잘못 전할 위험이 대단히 크다"고 말한 바가 있으며 김동조 외무부장관은 한술 더 떠 1975년 5월 1일에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반체제 인사에 대한 '승인되지 않은' 고문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미국, 서독, 영국보다는 나쁘지 않다."는 상상을 초월하는 망언을 남겼다.[9] 그나마 국방부 출입기자의 방청은 허락되었으나 아무도 수첩을 꺼내 취재하지 않았기에 재판 과정은 신문과 방송에 보도조차 되지 않았다.[10] 참고로 공판조서에서 특히 변조된 부분은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공산비밀조직을 구성하자는 회합결의를 한 사실" 등 반국가단체 결성과 관련된 부분이었고 8명이 사형을 당한 결정적인 혐의가 바로 이것이었다.[11] 물론 피고들이 고문수사에 항의하는 내용들은 의도적으로 누락되었으며 피의자신문조서, 진술조서에서 경찰과 검찰이 피고인들을 조사했다는 장소가 겉으로는 '서울구치소&서울중부서/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소'로 기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중앙정보부 6국'에서 대부분의 조사가 이루어졌고 경찰관이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와 경찰관 입회 하에 피의자들이 자필로 작성한 진술서의 일시도 기소 후에 조사된 것이 기소 전에 조사했다는 등 허위로 기재되었으며 심지어 공판조서가 몇 쪽 차이로 내용이 전혀 맞지 않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12] 이 당시 대법관들이 판결 내리기를 거부하자 해임과 선임을 반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3] 참고로 형이 집행된 것은 대법원의 선고통지서가 서울구치소에 도착하기도 전이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인혁당 사건의 현장 지휘자였던 이용택 중앙정보부 6국장에 따르면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 집행 명령을 내려라"는 박정희의 지시가 국방부에 이미 전달돼 있었을 것이라고 하며 덤으로 박정희는 1975년 2월 21일에 있던 문공부 순시에서 '격앙된 목소리로' "합법 정부를 뒤집어엎으려 한 자들은 어느 나라 법에서든지 극형에 처하도록 돼 있다"고 말한 바가 있다고 하고# 이용택으로부터 인혁당 사건에 대한 수사에 대해 일주일에 두 번 꼴로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 그리고 2005년에 공개된 인민혁명당 사건 희생자의 사형 집행 관련 문서에 따르면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장과 서울구치소로 발송된 형선고통지서는 1975년 4월 8일 오전 10시에 있었던 대법원 선고보다 7시간 앞선 이날 오전 3시에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에 접수됐다는 소인이 찍혀 있었다고 한다. # 참고로 인혁당 사건 사형 집행 명령서에 최종 결재를 한 사람은 황산덕 법무부장관이 아니라 서종철 국방부장관이었다.[14] 이와 비슷하게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정권의 사법살인 사건인 슬란스키 재판에서는 한 술 더 떠 NKVD 스파이로 일했던 사람을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몰아 죽였다.[15] 우홍선과 이수병의 시신은 사형 당일에 유족들에게 인수되었고 후술할 2명을 제외한 나머지 4명은 대구로 운반된 후 가족에게 인계되었으며 후술할 2명은 화장된 후 그 재를 가족에게 인계했다.[16] 실제로 이수병의 시신은 등이 시커멓게 탄 데다 양쪽 발뒤꿈치가 시커멓게 움푹 들어가는 등 전기고문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손톱과 발톱이 모두 뽑혀 있었다.[17] 1995년 4월 25일 MBC가 사법제도 1백주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판사 315명에게 실시한《근대 사법제도 100주년 기념 설문조사》[18] 실제로 진짜 간첩이었던 김현희사형 선고까지 받았음에도 대통령의 권한으로 사면을 받았으며 여전히 살아서 활동하고 있다.[19] 4.19 혁명의 시작점이 된 2.28 학생민주의거도 이곳에서 일어났다.[20] 대판 2011. 1. 27. 2010다1234[21] 2020년 들어 거의 환갑이 되었다.[22] 당시에는 당선인 신분이었다.[23] 2008년 명예졸업장 추서.#[24] 노태우 정부도 포함[25] 김영삼김대중과 함께 민주화운동의 양대 거두로 꼽힌 인물이었지만 정적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 탄압 사례에 대한 추모비 철거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26] 인혁당 재건위 실존설을 주장한 사람이라고 하면 지만원이 있는데, 지만원은 5.18 민주화운동은 물론이고(?!)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심지어 4.19 혁명에도 북한 간첩이 개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즉슨 인혁당 재건위 실존설은 극우 중에서도 아주 극단적인 사람 아니면 하지 않는 주장이란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셈.[27] 출처: 정행산(1996), 「인혁당 과연 조작인가」, <자유공론>[28] 출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2001), 《내가 겪은 민주와 독재》, 선인출판, 90~91페이지) http://factfinding.kr/social_events/2[29] 구타 등의 고문은 헌법에서도 금지되어 있는 민주주의 국가의 형법 체계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심각한 범법 행위로, 법적체계를 무너뜨리는 방법으로 법적 테두리를 지킨다는 주장은 말도 안 된다.[30] 전술한 링크에 건 글도 거의 해독이 불가능한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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