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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10:48:29

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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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駙馬, 황제·사위
1.1. 개요1.2. 역할과 지위1.3. 한국사1.4. 여담1.5. 항목이 작성된 부마 목록
1.5.1. 실존인물1.5.2. 가상인물
2. 釜馬, 부산+마산

1. 駙馬, 황제·사위

1.1. 개요

천자의 딸과 결혼남자에서 비롯된 말로서 임금사위, 즉 공주 또는 옹주의 남편을 가리키는 말이다. 동의어 또는 유의어로 국서(國壻), 도위(都尉)[1], 의빈(儀賓)[2] 등이 있다.

1.2. 역할과 지위

어원이 된 관직인 '부마도위'(駙馬都尉)는 천자의 행차 때 갑작스런 암살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 여러 마차 중에 어느 마차에 천자가 탔는지 모르도록 동행하는 예비 마차인 '부거(副車)'를 끄는 말인 '부마(駙馬)'를 관리하던 직책이다. 현대 사회의 직책과 비교하자면 '대통령 경호실 2호차 관리 및 선탑자'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평소에 하는 일이라곤 그냥 아랫사람들을 시켜서 말을 관리하고 왕이 타는 마차를 관리하다가 황제의 행차가 있으면 선탑하는 것이 주요 임무이라서 놀고 먹기 딱 좋은 직책이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직책인데 "황제의 행차 때, 황제가 몇 번째 마차에 타고 있는가?" 라는 초특급 기밀을 관장했기 때문이다.

이런 초특급 기밀이 유출된다는 것은 황제의 목숨이 위험해진다는 뜻이다. 실제로 진나라장자방창해 역사의 시황제 암살기도가 실패했던 것은 박랑사에서 부거를 잘못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부마도위가 하는 일은 고작 왕이 타는 마차와 말을 관리하는 것 정도밖에 없으니 하는 일은 별로 없으면서도[3] 위세 하나는 정말 대단했다. 그런데 난세가 되면 황제의 측근이라고 매수되어 기밀을 발설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서진의 무제 사마염이 이 직책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공주의 남편인 사위를 직접 임명하기 시작했다가 천자의 사위만이 부마도위 직책을 하도록 굳어지면서 결국에는 '부마도위=천자의 사위'가 된 것이다. 그 뒤에는 그나마 맡던 역할도 희미해져서 사실상 명예직에 가깝도록 변하였다.

의미 확대 버전으로 여왕의 남편도 의미하는 '국서'가 있다. 다만 여왕의 남편인 경우 한국사에는 여왕이 신라 시대에 3명 있었을 뿐이고 그나마도 독신이거나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았거나 혼인 여부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한국사에 한해서는 의미없는 용어다. 여왕이 종종 나왔던 서양사에 관련해서 주로 쓰이는데 그나마도 여왕의 남편을 무조건 국서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대개는 그냥 '여왕의 부군'이라는 식으로 풀어쓴다.

참고로 서구권에서 국서에 해당하는 King consort 작위는 여왕과 결혼했다고 해서 무조건 주어지는 호칭이 아니다. 영국에서는 King consort라는 작위가 서임된 사례가 전무하며, King consort의 하위 단계인 Prince consort 역시 전체 칭호가 Prince consort인 인물은 앨버트 공 이외에는 없다. 스페인에서 King consort 작위를 받은 이사벨 2세의 남편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는 애초에 이사벨의 친사촌으로 같은 보르본 왕조 출신이었고, 포르투갈의 경우 결혼 직후에는 Prince consort 칭호를 받고 여왕과의 사이에서 후사를 보면 공동 왕으로서 King이 되었다. 이 법 때문에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2세의 첫 번째 남편 오귀스트 드 보아르네는 자식을 낳지 못한 채로 아내인 마리아보다 먼저 죽어서, 프린스 칭호의 국서에만 머물렀고 2번째 남편 페르난두 2세는 마리아와 슬하에 여러 자식을 낳으면서 포르투갈의 공동 국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한편 한 나라 안의 왕실과 일반 귀족 가문 사이나 천자국의 왕가와 제후국의 왕가 사이처럼 명백하게 급간 차이가 나는 경우가 아니라 일반적인 국가 관계에서 타국의 공주와 결혼했을 때는 부마라고 하지 않는다. 사실 '부마'라는 용어 자체가 위에서 설명된 어원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국내에서 공주가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4] 신하와 결혼한 경우에 사용되는 동아시아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비슷한 급의 왕족끼리 겹겹이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는 것이 다반사인 서양 왕족의 결혼과 관련해서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

1.3. 한국사

신라에서는 적자가 없거나 순서를 양보하는 경우 부마가 왕위를 잇기도 했다.

신라 왕위를 성씨가 다른 박, 석, 김이 번갈아가며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성이 바뀌는 부분은 대부분 전왕의 사위로서 왕위를 이은 형태이다. 최초의 석씨 왕 탈해 이사금은 박씨인 남해 차차웅의 사위였고, 최초의 김씨 왕 미추 이사금은 석씨인 조분 이사금의 사위였으며, 신라 후기 박씨 왕조의 시조인 신덕왕은 김씨인 헌강왕의 사위였다.[5] 국성이 바뀐다는 개념이라 신라 이외 중세 이후의 흔한 동아시아 왕조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형태이기도 하다.

한편 나말여초 후백제의 장수 박영규견훤의 사위이자 태조 왕건의 사돈, 제3대 정종의 장인이 되었다.

한국사에서 부마가 가장 자주 언급되는 시대는 고려 시대이다. 원 간섭기 동안 고려의 왕들은 원나라의 부마[6]였다. 충렬왕제국대장공주[7]와 결혼한 것을 시작으로, 고려 제1왕비는 원나라 공주가 차지했다. 왕위도 원나라 공주가 낳은 아들이 물려받았고, 그 아들 또한 원나라 공주와 결혼했다. 원나라의 입김이 강하다보니 원나라 출신인 왕비와 그 수족들의 힘도 강해서 고려인들은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했다. 고려의 왕비가 된 원나라 공주들은 막강한 친정을 등에 업고 횡포를 부렸으며, 노국대장공주[8]를 제외한 대부분이 남편인 고려 국왕까지 업신여겼다.

다만 이때 몽골인 왕비들은 정략결혼의 희생양이었다는 점은 고려해야 할 것이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시집와서 한번도 가보지 못한 먼 타향까지 왔는데 남편인 왕이 자신보다 후궁들에게 애정을 더 보이면 곱게 보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인격이 미성숙했다고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왕비 입장에선 고려 왕 하나 보고 왔는데 왕은 자길 사랑하지 않으니 밉기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의 행보를 보면 왕비 제국대장공주, 계국대장공주, 복국장공주의 입장에서 탐탁지 않은 일이 많다. 폭군 충혜왕은 아예 자신의 서모인 경화공주강간했다.

부마의 별칭인 '의빈'(儀賓)은 한국사에서는 조선 세종 때 명호를 격하하는 과정에서 처음 실록에 보이며 의빈은 부마를 격하한 것이다. 조선의 경우에는 세조 때부터 '의빈'(儀賓)이라고 하고, 의빈부(儀賓府)에서 관장했는데[9], '예의를 갖춘 손님'이란 뜻으로 사위를 흔히 '(백년)손님'이라 부르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공주의 남편은 종1품 ○○위(尉), 옹주의 남편은 종2품 ○○위(尉), 군주의 남편은 정3품 ○○부위, 현주의 남편은 종3품의 ○○첨위로 봉했다. ○○에는 부마의 본관 내지 그곳에서 따온 칭호가 들어간다. 예를 들어 경혜공주(단종의 누나)의 남편 정종의 봉호 '영양위'(寧陽尉)는 본관인 해주의 별칭인 '대령'(大寧)에서 따온 것이다.

참고로 공주는 왕의 적녀(嫡女)로 무품, 옹주는 왕의 서녀(庶女)로 무품, 군주는 세자의 적녀로 정2품, 현주는 세자의 서녀로 정3품 작위다. 옹주의 남편인 도위나 부위, 첨위도 업적에 따라서 의빈부 최고 품계인 유록대부(정1품)에 오를 수 있었다. 고종 6년에 공주와 옹주의 남편인 위는 정1품으로, 세자의 적녀인 군주의 남편인 부위는 종1품으로, 역시 세자의 서녀인 현주의 남편인 첨위도 종1품으로 승격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왕의 사위인 만큼 그 대우가 각별하고 왕실에서 넉넉하게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편하게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처신을 잘못해서 정쟁에 휘말리거나 배짱이 두둑해져 바람을 피다가 장인에게 걸려 혼쭐나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조선왕조의 경우, 부마는 정책적으로 명예직 외엔 벼슬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가끔 왕명을 받아 공문서를 작성하고 의전을 맡거나, 명나라~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10] 되는 등 실권 없는 얼굴마담 역할만 할 수 있었다. 물론 왕녀와 결혼했다고 자동으로 외교 능력이 생기는 건 아니니까 외교 실무는 부사나 서장관 등이 맡고, 정사는 사신단의 격을 높이기 위한 높으신 분이면 된다.

그리고 아내가 왕녀이다 보니 아내가 살아있을 때는 을 둘 수 없었고, 아내가 죽었다고 해도 후처를 맞이하지 못하고 그대로 홀아비로 살아야 했다.[11] 간혹 왕의 허락을 받아 재혼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숙종효종의 4녀 숙정공주가 요절한 후 숙정공주의 남편 정재륜[12]이 재혼할 것을 청한 것을 물리치면서 이를 계기로 부마의 재혼 금지가 법제화되었다. 만약 왕녀가 일찍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면, 무조건 양자를 들여야 했다. 정재륜도 작은아버지 정치화가 아들이 없어 양자로 들어갔던 사람인데, 공주와의 사이에서 낳은 외아들이 후사 없이 일찍 죽는 바람에 난처하게 되었다. 결국 큰형(법적으로는 사촌) 정재대의 손자인 정석오를 죽은 아들의 양자로 들여 후사를 이었다.

조선 후기에 왕녀들이 단명하면서 어린 나이부터 수절하는 부마가 늘어났다. 혼인하고 3개월만에 아내 영혜옹주가 죽어 홀아비가 된 박영효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부마는 재혼을 못한다는 관념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심지어 조선이 멸망한 뒤로도 후처를 들이지 못했고, 죽어서도 정실부인 영혜옹주의 곁에 묻혔다. 그나마 고종이 그를 배려하여 영혜옹주가 하가할 당시 몸종으로 데려갔던 궁녀들을 으로 삼을 수 있게 해주어 일제가 내린 후작 작위를 계승할 자손은 남길 수 있었다. 그 후손들 중 한 명이 흥영군 이우 공의 부인인 박찬주 여사이다.

공주건 옹주건 왕녀는 품계를 초월한 자가(自家)들이라, 남편과 시부모조차 며느리를 받들어 모셔야 했다. '천지군친사'라는 말대로 '군'은 '친'보다 앞이니 '군'인 왕녀가 '친'인 시부모에 우선하게 되는 것이다.

부마는 실직을 맡을 수 없으니 출셋길도 막히고, 재수 옴 붙으면 정종처럼 정치적 문제에 휘말려 끔살당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부마가 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왕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다는 것은 왕실과 사돈을 맺는 것이니 원래 가문이 어쨌든 간에 순식간에 1등급 명문가로 부상하게 된다. 그래서 부마 본인은 거의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해도 부마의 형제나 가까운 친척은 과거시험이나 조정 내 승진 등에 있어서 알게 모르게 혜택을 받는다. 위의 정재륜 같은 경우에도 그가 부마가 된 것이 친아버지 정태화와 양아버지인 정치화가 정승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된 요인으로도 꼽힌다.[13] 그리고 정재륜이 아들의 양자로 들인 정석오도 정승에 오른다.

또한 왕녀와 부마 사이의 자손은 왕실의 외손이라는 이유로 남자는 벼슬길이, 여자는 혼삿길이[14] 탁 트이곤 했다. 예를 들어 정명공주와 그녀의 남편인 부마 홍주원의 후손이 사도세자의 빈인 혜경궁 홍씨와 정조의 신하인 홍국영이다. 수빈 박씨화평옹주의 남편인 부마 박명원의 추천으로 후궁 간택이 되었다. 자손까지 내내 벼슬할 수 없이 무위도식해야 하는 왕자들[15]보다 오히려 낫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왕의 성향이나 어느 정도로 총애받는 딸이냐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나긴 했어도 왕녀의 지참금이란 일반 양반가 딸들과는 자릿수부터가 달랐기 때문에, 왕녀들이 시집오며 가져온 재산으로 집안을 더 일으키는 경우도 허다했다. 일례로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가 매우 총애하던 딸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는데, 원래도 명문가였으나 화순옹주가 시집오면서 새삼 갑부가 되어 김정희가 그토록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역시 영조의 딸로 총애받던 화완옹주의 경우, 남편이 딸 하나만 두고 요절하여 청상과부가 되자 남편의 사종질(四從姪, 11촌 지간) 정후겸을 양자로 들였는데, 정후겸의 생부모 집안까지 살림이 확 피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실 왕실에서 부마로 찍으면 본인이나 그 부모가 싫다고 맘대로 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조선 제3대 태종후궁 소생인 정신옹주를 시집보내려고 지화라는 점쟁이를 시켜 "사주 좋은 미혼남을 알아보라"고 한 적이 있었다. 지화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주를 알아봤는데, 춘천 군수를 지냈던 이속[16]은 지화를 쫒아내면서 "내 아들을 몸종에게 장가보낼 순 없다. 내 아들은 죽었다. 그러나 상대가 정혜옹주(貞惠翁主)라면 살아있을 수도 있다."라고까지 말한다. 정신옹주신녕궁주(愼寧宮主) 신빈 신씨의 소생인데, 신녕궁주는 태종의 승은을 입기 전에 원경왕후 민씨를 모시던 몸종이었다. 그러나 정혜옹주는 정의궁주(貞懿宮主) 의빈 권씨의 소생인데, 간택받아 후궁이 된 명문가의 규수 출신이었다. 즉 풀어쓰면 "모친의 혈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망언이었다.

다른 왕이라면 "뭐 이런 놈이 다 있나?"라면서 대충 귀양보내고 말았겠지만, 상대는 고려의 마지막 버팀목을 죽이고, 조선의 설계자와 이복동생 2도 죽이면서 창업군주인 아버지도 사실상 쫓아내고, 동복 형대판 싸우고 왕이 된 태종 이방원이었다. 게다가 태종은 자식 3명을 어렸을 때 병으로 잃은지라 자식에게는 물렀다.

그러나 이속 본인 입장에서는 자기 집안인 연안 이씨가 할아버지 이원발부터 고려의 전공판서를 지내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 태조가 몇 번이나 상신으로 초빙을 했어도 끝내 응하지 않고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명신이었고, 아버지는 호조판서와 제조를 지낸 이귀산, 큰아버지인 이귀령은 좌의정을 지낸 명문가이니 왕실과 혼인을 할 때 하더라도 아무 왕녀나 허겁지겁 맞아들여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물론 굳이 말을 그렇게 비꼬듯이 했어야 할 필요는 전혀 없었으므로 이후 인생 망한 것도 본인 책임.

결국 이속은 수 차례의 상소 러시 끝에 노비 신분으로 전락해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로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기록조차 남지 않는 여생을 보내게 된다.

사실 이 시기에는 왕족이건 부마건 관직에 오르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박종우는 세종대왕 대에는 형조판서를 지냈고, 문종 대에는 부친과 같이 찬성 직위까지 오른다. 단종대에는 계유정난에 적극 참여해서 1등 공신에 오르는 등 꽤 호사를 누렸다.[17] 그런데 성종 대에 "서얼들은 관직에 오를 수 없다"고 하자 박종우의 처가 이를 항의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때 신료들 중에서는 "부마의 재혼은 없다. 허락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일도 있었으나, 성종이 "선대에서 허락한 일"이라고 해서 정처로 인정해줬다.

예외적인 경우로 배짱이 두둑하여 아내를 폭행하거나, 공공연히 바람을 피우거나, 홀대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여종과 바람이 나서 도망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는 당연히 난리가 나서 무겁게 응징당한다. 예를 들어, 중종은 딸인 효정옹주가 남편의 홀대를 받다가 요절하자 분노해 그 부마를 처벌하기도 했다.

중종의 딸로 숙원 이씨 소생이던 효정옹주는 남편 조의정의 바람과 무시, 학대를 당하다 난산 끝에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26세의 나이로 죽었다. 심지어는 난산을 겪던 딸을 위해 왕이 보낸 의녀를 조의정이 못 들어가게 대문을 안 열어줬다. 이쯤 되면 아내가 빨리 죽기를 원했던 것이라고 볼 수밖에.[18] 결국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옹주가 사망하자, 격노한 중종이 조의정을 국문에 부쳤다가 직위를 박탈하고 귀양보냈다. 생전의 효정옹주는 그 와중에도 남편을 변호해서 중종은 그런 딸이 답답하고 안타까웠는지 "부녀자로서 질투가 없는 것은 진정이 아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때, 조의정의 상간녀 풍가이도 같이 처벌되었다. 그녀는 원래 효정옹주의 몸종이었으나, 조의정이 그 미모에 반해서 강제로 첩으로 삼았다. 박색이었던 옹주를 몹시 싫어한 조의정은 정실인 옹주를 죽이고, 풍가이를 부마에게는 원칙적으로 금지된 첩으로 들이려 했다. 그래서 중종이 풍가이를 귀양보내라 명했는데, 조의정이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고(!)[19] 풍가이를 숨겨둔 채 계속 정을 통해왔던 것이 발각났다. 그러나 풍가이가 그의 첩이 된 것은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강요에 의한 것이었고, 풍가이가 평소 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효녀라는 점 때문에, 대신들이 극력 옹호한 덕분에 곤장 100대로 끝나고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상궁 은대[20]가 사람을 시켜, 가뜩이나 곤장 100대를 맞아 반죽음이 된 풍가이를 구타하고 수십일 동안 방치하여 죽게 했다. 신하들은 은대를 처벌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중종이 끝까지 비호하여 1년 남짓 귀양을 살고 풀려났다. 이를 볼 때 은대의 배후에 중종이 있었거나, 꼭 그러진 않았어도 딸의 불행한 결혼생활의 원인 중 하나인 풍가이를 죽이고 싶어서 벼르고 있었는데 은대가 그걸 이루어주었으니 잘 죽여줬다고(…) 생각해서 비호해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따지고 보면 풍가이도 조의정의 강요 때문에 그의 첩이 된 피해자였으나, 만악의 근원인 조의정에겐 정치적인 이유+효정옹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중종의 외손자)의 안위 때문에 중종이 유배조차 1년 만에 풀어줄 정도로 약한 처벌만 내린 걸 고려해 보면 만만한 풍가이 쪽에게 화풀이를 한 걸지도.

한국사 최후의 부마는 영혜옹주와 결혼했던 철종의 부마 박영효다. 마지막 왕녀는 고종의 고명딸인 덕혜옹주이지만 그녀가 일본제국 백작 소 다케유키와 혼인한 것은 1931년으로, 이미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였기 때문이다.

1.4. 여담

영어로는 단순하게 king's son-in-law(말 그대로 왕의 사위)라고도 적고, 왕자와 동일하게 prince라고 호칭하기도 하는데, 영어를 번역할 때 부마임이 분명한 캐릭터에 사용된 prince를 왕자로 직역해버리는 경우가 있어 의미가 틀어지곤 한다. 전문 번역가들이 이를 모를 확률은 낮고, 부마라는 단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다 왕자라는 단어가 아무래도 더 간지가 나니 오역인 줄 알면서도 일부러 왕자라고 번역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제일 유명한 케이스인 페르시아의 왕자의 경우,[21] 이 프랜차이즈가 국내에 알려진 것은 1990년경 복제판 PC 게임을 통해서였고 아직 정발조차 되지 않았을 때였기 때문에 공식 번역 명칭 따윈 없었다. 따라서 이는 번역가의 의도가 아니라 그저 "prince=왕자"라는 상식이 작용한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게임 배경이 자세하게 알려진 것도 아니고 타이틀 화면만 볼 수 있었으니 어쩌겠는가.[22] 뭐 결과적으로는 시리즈를 거듭하며 게임의 주인공이 부마가 아니라 진짜 왕자 출신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아무래도 좋지만.

판타지 소설에서는 보통 공작의 상위 개념인 대공으로 칭하는 경우가 많다.

1.5. 항목이 작성된 부마 목록

1.5.1. 실존인물

1.5.2. 가상인물

2. 釜馬, 부산+마산

부산광역시마산시를 묶어서 일컫는 말. 20세기 중후반에는 옛 마산시가 옛 창원시울산시보다 인구가 많았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용어가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남해고속도로제2지선의 초창기 명칭도 부마고속도로였고 부마가 들어간 유명한 사건으로는 제4공화국 말기에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이 있다.

그러나 21세기에는 예전처럼 자주 사용되지 않는 줄임말이 되었다. 먼저 마산보다 울산이나 창원, 김해 등이 더 큰 도시가 되면서 마산을 부산과 양대 도시로 꼽을 이유가 사라졌고[27] 이후 창원시의 2개 구[28]로 통합 재편되어서 마산이란 도시 자체가 소멸했기 때문이다.

부산을 연고지로 한 롯데 자이언츠와 마산을 연고지로 한 NC 다이노스는 두 도시 사이에 낙동강이 흐르므로 흔히 낙동강 시리즈라고 불리지만 다른 별칭으로 부마 대첩으로 부르기도 한다. NC의 창단 때부터 워낙 롯데 구단측에서 노골적으로 창단 반대를 드러낸 것부터 이어진 대립 관계로 빠르게 라이벌이 됐다.

주로 호프집 간판으로 사용되며 대학가 등지에서 보이기도 한다.


[1] 부마(駙馬)와 마찬가지로 부마도위(駙馬都尉)의 약칭이다.[2] 다만 의빈은 황제국이 아닌 제후국의 격식에서 사용되었다. 명나라 왕작의 사위, 류큐 왕의 사위, 조선 왕의 사위가 의빈(儀賓) 칭호였다.[3] 마차를 관리하거나 말에게 먹이 주는 일은 부하들을 시키면 된다.[4] 낮다 해봤자 대다수가 귀족(양반) 계층이지만.[5] 애당초 성골이란 개념 자체가 진평왕대에 왕위계승 정당화를 위해 성립된 개념이란 설이 통설이고, 신라의 국혼은 철저하게 족내혼이 주류였다. 즉, 성씨가 다르느니 해도 기본적으로 다들 몇 겹씩 중첩된 혼인으로 맺어진 근친들이라는 것.[6] 몽골어: 쿠르겐, 페르시아어: 귀르겐[7] 몽골인 왕비들 중 유일하게 황제의 친딸이다. 나머지 몽골인 왕비들은 방계 황족이나 귀족 출신으로 공주 칭호를 받고 고려 왕에게 시집왔다.[8] 공민왕노국대장공주의 금슬이 좋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국대장공주는 이전 원나라 공주들보다 신분이 낮았다. 그래서 이전 몽골인 왕비들보다 권세를 부릴 여지가 적었다.[9] 하지만 부마라는 말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10] 박지원의 유명한 기행문 《열하일기》는 영조3녀화평옹주의 남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이 청나라에 진하사로 갔을 때 동행하면서 집필했다. 참고로 박지원은 박명원의 8촌 동생이다.[11] 다만 홀아비가 되고 나서 첩을 두는 것은 왕실에서도 눈감아주는 경우도 있었다.[12] 영의정 정태화의 5남으로 작은아버지인 정치화에게 양자로 들어갔다.[13] 물론 그 윗대부터 정광필, 정유길, 정창연 같이 정승을 배출한 집안이기도 하고, 능력도 뛰어나기도 했기에 무능한 아버지를 낙하산 태워준 수준은 아니고 날개를 달아준 정도로 볼 수 있다.[14] 이 시대에 여자는 공직에 나설 수 없었으므로[15] 왜 그런지는 구성군 문서를 보면 된다.[16] 간택 제도가 생기게 한 장본인[17] 이 때문에 성삼문의 아내와 딸을 노비로 받기도 했다.[18] 덤으로 보자면 '감히' 왕이 보낸 의녀를 못 들어가게 했으니 이것 역시도 죄가 된다고 할 수 있다.[19] 왕조 시대 임금을 속이는 건 기군망상이라고 해서 역모급으로 간주되었다.[20] 기록에 의하면 은대는 숙원 이씨의 여동생이었다. 즉 효정옹주이모. 이 사람은 예전에도 효정옹주의 동복언니 정순옹주의 남편이 첩을 두어 서자를 만들자 그 첩실과 아이를 죽인 일이 있었다. 단순히 '조카의 불행한 결혼생활에 분노한 이모'로서 행동한 게 아니라 중종의 비호를 받던 궁중 내 해결사였다는 얘기도 있다.[21] 시리즈 1편에서 주인공은 왕족도 아니고 약혼자도 아닌 그냥 공주의 애인이다.[22] 당시에도 스토리 이해를 통해 왕자가 아니라 부마임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지만, 그런 익숙하지 못한 단어까지 사용해야 하냐며 고지식한 사람 취급당하곤 했다.[23] 김용춘이라고도 한다.[24] 오국공주(吳國公主) → 위국공주[25] 월국공주(越國公主) → 조국공주[26] 실사 영화판에서는 자스민이 왕위를 물려받은 뒤에 결혼하여 국서가 되었다.[27] 구 마산 2구의 인구는 2022년 기준으로 약 36만 명으로, 경남 안에서도 양산시진주시와 비슷한 정도다.[28] 마산합포구, 마산회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