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12:33:17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에서 넘어옴
서양 철학사
현대 철학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wiki style="margin:-16px -11px;"<tablewidth=100%> 고대 철학 중세 철학 근대 철학 현대 철학 }}}
<colbgcolor=#545454><colcolor=#fff> 현대철학
현상학 후설 · 슈타인 · 레비나스 · 앙리
철학적 인간학 셸러 · 부버 · 겔렌
하이데거
실존주의 무신론적 실존주의: 우나무노 · 사르트르 · 보부아르 · 메를로퐁티 · 시오랑 · 카뮈 / 유신론적 실존주의: 야스퍼스 · 틸리히 · 마르셀
해석학 가다머 · 리쾨르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레닌 · 루카치 · 그람시 · 마오 · 일리옌코프 / 서구 마르크스주의: 블로흐 · 코르쉬 · 르페브르 · 드보르 / 구조 마르크스주의: 알튀세르 · 발리바르 · 랑시에르 /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제임슨 · 라클라우 · 무페 / 기타: 바디우 · 지젝 · 네그리 · 가라타니
비판 이론 호르크하이머 · 아도르노 · 벤야민 · 마르쿠제 · 프롬 · 하버마스 · 벨머 · 프레이저 · 호네트
구조주의 소쉬르 · 야콥슨 · 레비스트로스 · 바르트 · 라캉 · 푸코 · 부르디외
데리다 · 들뢰즈 · 가타리 · 리오타르 · 보드리야르 · 바티모 · 아감벤 · 버틀러 · 아즈마
21세기 실재론
신유물론: 해러웨이 · 라투르 · 데란다 · 브라이도티 · 베넷 / 사변적 실재론: 브라시에 · 메이야수 · 하먼 / 신실재론: 페라리스 · 가브리엘 / 기타: 바스카 · 피셔
실용주의 퍼스 · 제임스 · 듀이 · 미드 · 굿맨 · 로티
20세기 전반 수학철학 프레게 · 괴델 · 브라우어 · 힐베르트
무어 · 화이트헤드 · 러셀 · 램지
비트겐슈타인
슐리크 · 노이라트 · 카르납 · 에이어
옥스퍼드 학파
라일 · 오스틴 · 스트로슨 · 그라이스
언어철학 콰인 · 촘스키 · 크립키 · 루이스 · 데이비드슨 · 더밋 / 피츠버그학파: 셀라스 · 맥도웰 · 브랜덤
심리철학 · 퍼트넘 · 포더 · 차머스 · 김재권 · 데닛 · 처칠랜드
20세기 과학철학 푸앵카레 · 라이헨바흐 · 포퍼 · 핸슨 · · 파이어아벤트 · 라카토슈 · 해킹 · 카트라이트 {{{#!folding ▼ 비분석적 과학철학(대륙전통)
기술철학
엘륄 · 플로리디 · 보스트롬
미디어 철학
매클루언
정치철학 자유주의: 벌린 · 롤스 · 슈클라 · 노직 · · 라즈 · 누스바움 · 레비 · 호페 / 공동체주의: 매킨타이어 · 테일러 · 왈저 · 샌델 / 공화주의: 아렌트 · 스키너 · 페팃 / 보수주의: 스트라우스 · 푀겔린 · 랜드 · 아롱 · 커크 · 크리스톨 · 후쿠야마
윤리학 규범윤리학: 톰슨 · 네이글 · 레건 · 파핏 · 싱어 / 메타윤리학: 맥키 · 헤어 · 프랭크퍼트 · 윌리엄스 · 블랙번
인식론 게티어 · 골드만
법철학 라드브루흐 · 풀러 · 하트 · 드워킨
종교철학 마리탱 · 니부어 · 하츠혼 · 베유 · · 지라르 · · 월터스토프 · 플란팅가 · 크레이그
탈식민주의 파농 · 사이드 · 스피박
페미니즘 이리가레 · 데일리 · 나딩스 · 길리건 · 파이어스톤 · 오킨 · 맥키넌 · 크렌쇼
환경철학
슈바이처 · 레오폴드 · 요나스 · 네스 · 패스모어 · 북친 · 롤스톤
관련문서 대륙철학 · 분석철학 }}}}}}}}}
<colcolor=#fff><colbgcolor=#000> 장 보드리야르
Jean Baudrillard
파일:보드리야르.jpg
출생 1929년 7월 27일
프랑스 랭스
사망 2007년 3월 6일 (향년 78세)
프랑스 파리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모교 파리 대학교
경력 파리 제10대학 교수
유럽 대학원 (EGS) 교수
학파 대륙철학, 프랑스 니체주의, 허무주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1], 형이상학, 포스트모더니즘[2], 후기 구조주의(논란 있음)[3]
직업 철학자, 사회학자, 시인

1. 개요2. 이론
2.1.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2.1.1. 원본과 복제2.1.2. 해결책2.1.3. 사례들
3. 매트릭스(영화)와의 관계4. 과학계의 비판5.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현대적 사물의 '진짜 모습'은 무엇에 쓰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도구로서가 아니라 기호로서 조작되는 것이다.
《소비의 사회》

프랑스철학자, 사회학자. 주요 저서는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Simulacres et Simulation)》[4], 《소비의 사회 (La Société de consommation)》,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 (Pour une Critique de I'Economie Politique du Signe)》 등이 있다.

보드리야르의 대표적인 이론인 '시뮬라시옹'은 1970년대 이후의 미디어 이론, 예술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미국의 현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2. 이론

2.1.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시뮬라크르란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 시뮬라크르는 참된 것이다.
전도서[5]
《시뮬라시옹》(하태환 역, 민음사)
프랑스어 시뮬라크르(simulacres)는 명사로서 단어 그 자체의 의미로는 모방, 모사의 의미를 가지나[6] 보드리야르는 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시뮬라시옹(simulation)[7] 역시 '모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은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이다. 시뮬라시옹은 시뮬라크르의 동사적 형태로 사용된다. 즉 시뮬라시옹은 '시뮬라크르를 하기'이다.

그의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 개념은 시뮬레이션이라는 단어의 뜻을 확장한 것이다. 이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라는 말로 요약된다. 시뮬라크르는 원본이 없는 이미지로, 이미 존재하는 진짜와 연결이 끊긴 또 하나의 독자적인 현실이다. 다시 말해 전통적인 시뮬라크르는 원본을 복사하는 단순 복제물이었지만, 현대 사회의 시뮬라크르는 오히려 원본을 압도하며, 오히려 그 원본이 시뮬라크르의 이미지를 따르게 된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티비란 매체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중년 남성이 가지는 이미지는 없었다. 하지만 티비가 등장함에 따라, 사람들은 티비 속에서 중년 남성이란 이미지를 보게 되고 그것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결국 중년의 나이층에 해당하는 남성들은 티비가 만들어낸 중년이란 이미지에 따르는 관습을 현실에서 따라하게 된다. 사실은 중년이란 개념과 가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티비 속에서 나오는 중년은 모두 고용된 배우들이 연기한 것이다. 여기까지가 시뮬라크르에 해당하고 여기서 티비를 본 중년 남성들이 그 연기된 이미지, 가상의 이미지를 연극이 아닌 실제에서 따라하게 되는 것이 시뮬라시옹이다.

실제로 현대사회의 면면을 보면 이런사례들이 굉장히 많다. 가령 드라마 연기자의 옷차림을 따라하는 사람들,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따라하는 코스프레어들,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등 가상매체에서 나온 대사들이 유행어가 되어 현실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현상 등등 모두 보드리야르가 제시한 원본과 실제 사이에 역전된 위계 현상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시뮬라시옹은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실재, 즉 파생 실재(hyperréel)[8]를 모델들을 가지고 산출하는 작업이다."[9]

보드리야르는 이를 통해, 어떤 대상을 모델로 만든 복제물, 가상물이 1) 원본과의 연관성을 잃어버리고, 2) 원본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보드리야르가 지적하려 했던 것은 이런 문제였다.

또한 그는 현대 사회가 상품이 아닌 광고를, 상품의 이미지를, 기호를 소비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대중매체가 사람들을 무비판적이 되도록 길들이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보드리야르는 또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뮬라시옹이 특히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으로 이 개념을 가지고 깐 것이 디즈니랜드와 걸프 전쟁.

보드리야르가 진정 비판하고자 했던 부분은 그것의 허상임 자체가 아닌 명백한 실재를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그의 "디즈니랜드는 미국 자체가 거대한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즉, 디즈니랜드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이들조차 자신 주변에 놓인 수많은 미디어 매체들까지 허구 혹은 환상일 것이라고 비판적으로 사고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보드리야르의 가장 중요한 함의이다. 그가 "죄다 가짜이니 이제 진짜를 찾자!"라고 말했다면 구태여 탈근대 담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건 플라톤과 다를 바 없는 주장이다) 그의 철학적 의의는 우리 모두가 떠다니는 기호들에 홀려 있을 뿐임을, 현대 소비 사회 전체가 그러한 시뮬라시옹(=시뮬라크르 하기)임을 까발린 것에 그 발전적 함의가 있다.

2.1.1. 원본과 복제

원본과 복제의 관계는 철학에서 수천년동안 다뤄진 문제였다. 플라톤의 경우 복제물은 원본보다 못하다고 깠다. 플라톤은 이데아(idea) 개념을 주장했는데, 그는 '모든 사물의 원본'인 이데아가 있으며, 이 이데아는 사물세계(물리적인, 우리가 사는 이 세계) 너머 다른 곳(형이상학의 세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즉 플라톤에게는 '원본>복제'라는 부등식의 가치를 가졌던 것.

그러다 르네상스와 과학 발전 이후 원본=복제 등식으로 넘어갔다. 그렇지 않다면 회화나 박물지 삽화 속 이미지는 원본을 대변하지 못했을 테니까. 우리가 흔히 아는, 정교한 사실적 이미지가 르네상스 이후 늘어난 건 이 때문이다. 탐험가들이 먼나라에서 본 동식물을 그림으로 남기거나, 천문학자들이 별들의 위치를 도표로 남기는 등의 활동도 '복제물은 원본을 드러내준다, 복제물은 원본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전제했기 때문이다. 이게 불가능하면 당연히 모든 자료는 믿을 수 없는 게 된다.

반면 보드리야르는 광고 및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현대 사회에서는 원본<복제라고 이야기한다. 이제 소비자는 물건이 아닌 기호를 소비한다. 실재는 없으며, 모든 것은 시뮬라크르이다.

2.1.2. 해결책

적합한 전략적 저항은 의미와 발언을 거부하고, 거부와 비수용의 형태 그 자체인 현 시스템의 메커니즘을 ‘과잉 순응적인’ 방식으로 흉내내는 것이다. 이것이 대중의 저항 전략이다. 그것은 거울의 경우처럼 시스템의 논리를 흡수하지는 않으면서 복사하고 의미를 반영시킴으로써 그 논리를 뒤집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야말로 현재로선 가장 유력한 전략이다(만약 이걸 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보드리야르 : '시뮬라시옹'이란 무엇인가에서 재인용.
체계의 현재 논리는 말의 극대화와 의미의 극대생산이다. 따라서 전략적 저항은 의미의 거부와 말의 거부이다. 혹은 시스템의 메커니즘에 대해서조차 극도로 순응하여 버리는 시뮬라시옹에 의한 저항으로 이는 저항이고 비-접견이다. 이것이 대중들의 저항이다. 이는 체계에게 자기자신의 논리를 다시 배가하여서 되돌려 보내는 것이며, 마치 거울처럼 의미를 흡수하지 않고 되돌려 보내는 것과 등가이다. (우리가 여전히 전략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이러한 전략이 오늘날 우세한데 왜냐하면 과거에 우세했던 것은 바로 체계의 저 극대 단계였기 때문이다.
장 보드리야르, 「매체 속에서 의미의 함열」, 『시뮬라시옹』, 하태환 역, (민음사, 2001), p. 152-53.
Q. 실재가 점차 사라지는 하이퍼리얼한 시대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고 하셨는데, 이런 변화에 대해 우리는 저항해야 합니까? 아니면 순응하고 따라가야 합니까?

A. 저항해야 합니다. 그 길밖에 없습니다. 뒤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전통적인 인간주의, 변증법적 역사, 전통적인 가치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세계화를 통해 이런 것들은 이미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TV는 바보상자? NO 지식상자
체계의 이러한 패권에 대항하여, 사람들은 욕망의 교활함을 고취시킬 수 있고, 일상에 대한 혁명적인 미생물학을 해볼 수 있고, 분자적인 일탈을 고취하거나 요리의 변호조차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체계가 아주 분명히 실패하도록 해야 하는 절대적인 필연성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오직 테러리즘만이 한다.
같은 책, p. 250.

보드리야르의 해결책은 이론적 극단주의, 지적 테러리즘이다.

2.1.3. 사례들

현대사회 곳곳에서 예시를 찾아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보드리야르의 이론이 지금까지도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다.

성상 파괴주의는 비단 정치적 이유뿐 아니라 이미지의 파급력을 우려한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다. 그 파괴 운동은 결국 성상 파괴주의자들이 이단으로 규정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실제 생쥐와 그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미키 마우스의 관계를 보자. 미키 마우스는 본래 생쥐의 한낱 모방일 뿐이었지만, 이제 디즈니의 대표 아이콘이 되었다. 미키 마우스를 본 사람들은 생쥐보다도 디즈니를 먼저 떠올린다. 모방물에 대한 원본의 우위가 전도된 것이다.

디즈니랜드는 또 어떤가? 〈디즈니랜드는 모든 종류의 얽히고 설킨 시뮬라크르들의 완벽한 모델이다.〉(『시뮬라시옹』, p. 39.) 디즈니랜드로 들어가서 즐기는 사람들은 '바깥의 현실 세계'와 '유치한 가상 세계(디즈니)'로 나눈다. 디즈니는 현실의 유치한 모방일 뿐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사실 현실에도 유치함이 곳곳에 있으며, 현실은 엄혹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운 사건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또한 그런 생각은 디즈니랜드에도 엄혹함이 서려 있으며, 디즈니랜드가 미국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기도 하다.(일사불란한 시스템의 통제, 주차장에서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썰렁함, 기타 등등. 미국 사회와 같은 작동방식.)

보드리야르는 CNN의 걸프 전쟁 보도를 보고 '걸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깠다. 보드리야르가 말하고자 했던 건, '보도되는 전쟁 이미지는 실제와는 다른데, 시청자들은 이를 실제 전쟁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보도 화면을 보고 연민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전쟁을 관람했다. 카메라에 비친 건 어디까지나 미국 측 입장일 뿐(미국 함정에서 발사되는 토마호크 미사일, 야간에 바그다드에 떨어지는 미사일 화면 등), 실제로 그 미사일이나 총탄에 맞는 피해자 입장은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됐다.

워터게이트를 스캔들로 받아들인다면 이미 저지전략이 작동한 것이다. 즉 부패한 자본과 권력에 대한 도덕의 승리라는 환상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실은 모두가 패배자이다. 우리 모두는 권력의 작동방식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부패는 재생산될 것이다. 불변한 채로 남아있는 굳건한 자본주의적 권력작동에 의해.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를 정복하더라도 걱정할 것은 없는데,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이 점령한 영토에도 자본주의적 권력작동은 영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은 중국 또한 자본주의의 구두를 은밀하게 핥고 있다.[10]

트루먼 쇼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트루먼 쇼에서 작중 관객들은 트루먼이 인간임을 잊은 채 '연기자 트루먼'을 소비하고 있다. 여기서는 인간 트루먼(원본)은 무시되고 연기자 트루먼(시뮬라크르)만이 소비된다. 그들은 진짜 인간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것이다.

이번에는 네트워크를 보자. 작중 주인공은 반쯤 정신 나간 상태에서 현대 사회에 대한 무차별적인 비판을 늘어놓지만, 방송사는 시청률을 뽑기 위해 그의 장광설을 오락 프로그램으로 편성한다. 매스 미디어가 대중에게 이미지를 떠먹이는 행태에 대한 비판이 대중에게 떠먹이는 또 하나의 이미지가 되는, 즉 시뮬라시옹의 범람에 대한 비판을 또 하나의 시뮬라크르로 만들어버린 기막힌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우리는 당신들이 아는 전부예요. 당신들은 우리가 내뱉는 환상을 믿기 시작하시는 겁니다. TV가 현실이고 당신들의 삶은 가짜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TV가 하라는 대로 따라하고만 있어요! TV 말대로 차려입고, TV 말대로 먹고, TV 말대로 애를 키우고, 심지어 TV가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있어! 이건 집단 광기[11]야, 이 미친놈들아! 하느님 맙소사, 당신들이 진짜라고! 우리가 가짜란 말이야![12][13]
네트워크, 1976, 시드니 루멧 감독

비슷한 예로 보드리야르는 2002년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뒤에 한국민속촌도 깠다.# 정확히 말하면 보드리야르는 한국민속촌에서 재현 공연을 위해 전통혼례를 하는 것을 깐 것이다. (캐릭터 컨셉 알바도 비슷한 범주이겠지만, 캐릭터 알바는 보드리야르 사후에 등장했다.)

3. 매트릭스(영화)와의 관계

Q.일반적으로 '탈근대' 사상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지적 꼬리표를 받아들이는가.

A."'탈근대성'과 관련해 일종의 오해가 있다. 나 스스로 '탈근대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탈근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근대성의 종말과 시뮬라시옹을 연결시키길 원한다. 영화를 예로 들자면, 나는 '매트릭스'같은 영화에 영감을 불어넣은 사람이다. 정말 그로테스크한 상황이다. 탈근대성 논의는 미국에서 왔고, 그곳에서 활발하다. 사람들은 역사의 종언, 정치의 종말 등을 논하지만, 이는 총체적인 단순화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오해의 기초가 되고 지금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분석하는 데 장애물이 된다. 현상속으로 좀 더 섬세하고 미묘하게 들어가면 탈근대성이라는 용어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 그냥 그대로 끝인 것이다."
"질서 과잉의 시대, 글쓰기로 교란"
보드리야르는 자신의 위대한 저서 『시뮬라시옹』을 위와 같은 전도서의 문구로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시뮬라크르를 단순히 '거짓'이나 '가상'으로 치부해버리는 모든 통속적인 보드리야르 해석이 틀렸다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조차도 『시뮬라시옹』에 관해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초월하는 '실재 세계'가 존재하며, 실재세계와 가상세계는 뚜렷이 구분된다. 심지어 실재세계와 가상세계는 빨간 약과 파란 약의 선택에 의해 명료하게 구별되며, 가상세계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벗어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중략) 보드리야르가 이와 같은 유치한 주장을 했을 리가 없다.
김상범, 『보드리야르 연구』, (생각나눔, 2022), p. 95-96.

4. 과학계의 비판

장 보드리야르를 비롯한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 전반은 개념을 원맥락에서 이탈시킨다. 때문에 그들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불평이 자꾸 달린다. 이를테면 "뜻도 모를 용어가 곳곳에 산재해서 이해가 어렵다. 아니 애초에 이해가 거의 불가능하다..." 같은 내용.

특히 소칼 사건과 연관해 비판받는다. 참고로 소칼의 비판에 대해 보드리야르는 "지식인의 비굴함과 나태는 우리 시대의 올림픽 종목이 돼버렸다."라는 코멘트를 했다.[14]

"그 오류들은 전부 일종의 은유이며, 약간의 주의만 기울이면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반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헌데 소칼은 이런 의견에도 반박한다. "그러나 보드리야르의 물리학이 모두 은유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라고.[15] 그 예시로 소칼이 인용한 보드리야르의 〈치명적 혹은 가역적 급박〉의 일부를 보자.
인과적 질서의 이러한 가역성―원인과 결과의 역전, 원인에 대한 결과의 전진 운동 내지는 승리―이야말로 근본적이다. (중략) 이것은 인과율이라고 하는 결정주의적 원리에 달갑지 않은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에 과학을 스쳐지나가는 통찰―여전히 초이성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불확정성의 원리조차도 넘어서는―인데, 바로 우연은 모든 법칙들의 부유 상태라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발견이 아닐 수 없는데, 이제 과학은 다시 현실 과학의 물리학적, 생물학적 한계점에서, 이러한 부유 상태와 불확정성만이 아니라 물리적 법칙의 가역성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절대적 수수께끼는 우주의 초월적 공식이나 메타 방정식(상대성 이론이 여기에 해당한다)이 아니라 어떤 법칙이든지 가역적일 수 있다(입자가 반(反)입자가 되고 물질이 반(反)물질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 법칙 그 자체도)는 생각이다. 이러한 가역성의 가설을 위대한 형이상학 체계들은 항상 인정해왔다. 이것은 시간의 비가역적 질서에 저항하고 법칙과 의미의 비가역적 질서에 저항하는, 모습이 겨루어지고 모습들의 변형이 겨루어지는 놀이의 근본 규칙이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과학이 자신의 논리와 발전 경로에 역행하면서도 이와 동일한 가설에 도달하는 것을 보게 된다(보드리야르, 1990: 162~163쪽, 고딕 강조 원저자).
앨런 소칼·장 브리크몽, 「장 보드리야르」, 『지적 사기』, 이희재 역, (한국경제신문, 2014), p. 179-80.

우선 이 글에서 '가역'과 '불확정성'이 모종의 관련이 있는 듯한 서술, 가역은 과학의 '물리학적 생물학적 한계'에서 확인되는 것이라는 서술이 문제가 된다. 오히려 '약한 상호작용'의 법칙이 보여주는 비가역성이야말로 새로운 것이다. 그는 도대체 어떤 뜻으로 물리학의 '가역'이라는 말을 쓰는 것일까? 그의 또 다른 잘못을 보자. '기하급수적 불안정성, 기하급수적 안정성'이라는 제목이 붙은 글이다.
종말(특히 역사의 종말)에 대한 발언의 총체적 문제는 종말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말하면서 동시에 종말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비선형적, 비유클리드적 역사 공간에서는 종말의 지점을 못 박기 어렵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실제로 이 종말은 인과성과 연속성의 논리적 질서 안에서만 상상할 수 있다. 이제는 인공적으로 생산되고, 발생 시점이 미리 정해져 있고, 어떤 파급 효과를 미칠지까지도 충분히 예견되는 사건들 자신이―언론 매체에 의한 사건들의 변질은 말할 나위도 없고―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억누르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역사적 연속성을 억누른다.
원인과 결과의 이와 같은 왜곡, 결과의 신비한 자율성, 원인과 결과의 가역성은, 무질서 혹은 혼돈의 질서(이것이 바로 우리가 처한 상황이다. 현실과 정보의 가역성은 사건의 영역에서 무질서를 낳고 미디어 효과의 범람을 낳는다)를 유발하면서 우리의 마음속에 카오스 이론을, 나비의 날갯짓과 그것이 지구 반대편에 일으키는 태풍의 불균형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또한 자크 벤베니스트의 물의 기억에 관한 역설적 가설을 떠올린다. (중략)
어쩌면 역사 자체가 카오스의 구조로서 파악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가속 운동이 선형성에 종지부를 고하고 가속 운동에서 생겨난 난류(亂流)가 역사를 그 종착점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비껴가게 만드는 그런 구조로서 말이다. 그와 같은 난류가 결과를 원인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처럼(보드리야르, 1994: 110~111쪽).
위의 책, p. 180-81.

우선 카오스 이론은 결코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뒤바꾸지 않는다. 게다가 카오스 이론은 벤베니스트의 물의 기억에 관한 가설과는 관련이 없다. 이것은 물은 답을 알고 있다와 같은 사이비이며, 이미 학계에서는 유사과학으로 판정이 끝났다. 그런데도 보드리야르는 1997년까지도 이것이 '최신 과학과 아귀가 들어맞는다'며 궤변을 펼친다.[16]

더이상의 인용은 생략하겠다.

앨런 소칼이 세계 최고 수준의 뉴욕대학교 쿠란트 응용수학 연구소에서 테뉴어(정년보장)을 받은 사람이라는 걸 상기하자. 몇몇 국내 철학자들이 비난하는 것처럼 '3류' 따위가 절대 아니다!

소칼의 지적은 타당하다. 『지적 사기』에서 소칼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우리는 보드리야르의 저서에서 과학 용어가 본연의 의미를 철저히 무시당한 채 무엇보다도 너무나 엉뚱한 맥락에서 남용되고 있음을 본다. 그것을 은유로서 받아들이건 받아들이지 않건, 사회학이나 역사학에 대한 진부한 관찰에 심오함을 덧씌우려는 것 외에 그런 용어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위의 책, p. 184.

지적 사기 서평

과학 용어, 전문 용어를 맥락을 무시하고 사용하면서 지적 허세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문학자가 과학 용어를 사용한다고 욕하는 게 아니다. 실속 없는 글에 과학 용어를 치장해, 뭔가 있는 것마냥 허세를 부린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어쨌든 보드리야르의 글이 과학 용어를 오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보드리야르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정작 해설서를 읽고 아는 척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니.과학 용어를 시뮬라시옹한 것이다.

"자연과학에서는 엄밀함이 중요하지만, 인문학에서는 문제 강조와 주의 환기가 중요하기에 비유가 자주 쓰인다. 단어의 뜻을 하나로 고정하면 사고가 단조롭게 되기 쉽기 때문이다."고 반박하더라도 소용없다. 그런 반론은 마치 엄밀한 과학성과 도발적인 정치성이 조화될 수 없다는 거짓 이분법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정치적인' 논문들이 '엄밀하게' 쓰여지며, 객관적인 심사 기준을 통과하고 있다.(움베르토 에코는 『논문 잘 쓰는 방법』에서 이런 거짓 이분법을 비판한 바 있다.)[17]

그래도 배경지식을 알고 읽으면 은근 재밌다. [18] 조언을 하자면, 보드리야르 본인이 만들어낸 개념은 신중하게 읽되, 과학 개념이 나오면 '또 헛소리를 하는구나'하고 유연한 마음을 가지고 읽는 것이 좋다. 어떤 뉘앙스로 말을 하는지 알기만 하면 된다. 어차피 보드리야르는 '물의 기억' 운운 하는, 과학에 문외한인 사람이다. 그의 진정 탁월한 소비사회 분석에 집중하고, 여기 저기 첨언하는 나쁜 버릇은 너그럽게 넘어가자.

5. 외부 링크


[1] Stephen Baker, The Fiction of Postmodernity, Rowman & Littlefield, 2000, p. 64. 보드리야르의 철학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와 뚜렷하게 구별된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유물론, 인간중심주의, 경제결정론, 생산중심주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구분 등을 모두 비판했다.[2] 자신은 부정했다.[3] 영문 위키백과의 분류 (French Nietzscheanism, Post-Marxism,Nihilism, Pataphysics, Post-structuralism (debated), Postmodernism (disavowed))[4] 국내에는 《시뮬라시옹》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어 있다[5] 보드리야르의 저서 《시뮬라시옹》(하태환 역, 민음사)에 제사(題詞)로 인용되어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실제 구약의 전도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인용문 자체가 시뮬라시옹인 것이다.[6] "시뮬라르크"로 잘못 쓰는 예가 왕왕 있다.# 쿠데타를 "구테타"로 잘못 쓰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7] 영어의 시뮬레이션과 같은 스펠링이다.[8] 실재하는 현실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전혀 다른 현실을 말한다. 그러나 파생 실재는 실재가 가지고 있는 사실성에 의해 규제되지 않는다.[9]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하태환 역, (민음사, 2001), p. 12.[10] 보드리야르의 말투를 흉내낸 것이다. "두려워 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비록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더라도 근본적인 자본주의적 매커니즘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시뮬라시옹』, p. 49.)[11] Mass madness. Mass media에 대한 말장난. 초월번역을 하면 대중매체 > 대중이 미친체 정도?[12] 원문: You're beginning to believe the illusions we're spinning here. You're beginning to think that the tube is reality, and that your own lives are unreal. You do whatever the tube tells you! You dress like the tube, you eat like the tube, you raise your children like the tube, you even *think* like the tube! This is mass madness, you maniacs! In God's name, you people are the real thing! *WE* are the illusion![13] 이런 장광설을 늘어놓는 주인공은 심각한 정신 질환에 시달리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프로그램에서는 일종의 선지자처럼 포장되고 있다. 시뮬라시옹에 대한 비판까지도 시뮬라크르가 된 것이다.[14] 아마 전쟁이나 핵 같은 문제는 언급하진 않으면서 지엽적 개념 문제로 말꼬리나 잡는다 생각하고 이런 말을 한 듯하다.[15] "그러나 보드리야르의 물리학이 모두 은유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철학적 색채가 조금 더 농후한 책에서 보드리야르는 물리학을―또는 변형된 물리학을―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가령 우연을 주제로 삼은 〈치명적 혹은 가역적 급박〉이라는 글을 보자. (『지적 사기』, p. 179.)[16] (전략)좀 더 최근에도 보드리야르는 물의 기억은 '세계가 순수 정보로 변형되는 궁극의 단계'이며 '이 효과의 실효성은 최신 과학과도 아귀가 들어맞는다'는 견해를 피력한다(보드리야르, 1997: 94쪽).(앞의 책, 337.)[17] "필자가 일부러 아주 다양한 테마들을 선택한 것은, 과학서의 요건들은 어떠한 유형의 연구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위에서 필자가 언급한 바에 의하면, 〈과학적〉 논문과 〈정치적〉 논문 사이의 대립 관계는 인위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과학성에 필요한 모든 규칙들을 준수하면서도 정치적 논문을 쓸 수 있다." (움베르토 에코, 『논문 잘 쓰는 방법』, (열린책들, 2001), p. 63.)[18] 현재 국내의 『시뮬라시옹』 유일한 역본은, 목차에서부터 (원문을 안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처참한 오역과, 어색한 한국어 구사력을 한 몸에 가진 불성실한 역본이다. 예를 들어 원문에서 7장의 제목인 'Apocalypse Now'는 미국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가르키는 것인데 역본에서는 '세계의 종말 지금'이라고 번역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