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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도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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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州 都氏
성주 도씨
}}}
<colcolor=#ece5b6><colbgcolor=#000> 관향 경상북도 성주군
시조 도순(都順)
집성촌 대구광역시 군위군 의흥면 이지동
대구광역시 달성군 서재리
대구광역시 달서구 용산동
경상북도 울진군 원남면 덕신리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외기리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교동
경상남도 고성군 회화면 삼덕리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덕계리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석천리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충청남도 논산시 벌곡면 대덕리
함경남도 홍원군 홍원읍 남당리
인구 56,850명(2015년)
링크 성주도씨대종회

1. 개요2. 역사3. 항렬4. 인명
4.1. 24세손4.2. 25세손4.3. 26세손4.4. 27세손4.5. 28세손4.6. 29세손4.7. 30세손4.8. 32세손4.9. 33세손4.10. 34세손4.11. 미상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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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성씨 집단으로, 대한민국에 있는 도씨의 98%는 도읍 도(都) 자를 사용하며, 都씨는 단일 본이므로, 성이 都라면 무조건 성주 도씨다. 시조는 고려 원종(元宗) 때 전리상서(典理尙書)를 역임한 도순(都順)이다.

「성주도씨족보(星州都氏族譜)」에 의하면 고려 원종 때 전리상서를 지낸 도순(都順)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팔거현(八莒縣)(현 경상북도 칠곡군)을 중심으로 벼슬지에 따라 여러 곳에 분거(分居)하여 전서공파(典書公派)ㆍ판서공파(判書公派)ㆍ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ㆍ시승공파(侍丞公派)ㆍ찬성공파(贊成公派)ㆍ시중공파(市中公派)ㆍ봉차령공파(奉車令公派)ㆍ청송당공파(靑松堂公派) 등 크게 8파(派)로 갈라져서 세계(世界)를 계승하고 있으며, 이후 32개 분파를 형성하였다.

경상좌도 병마우후를 역임한 도흠조(都欽祖)(1515~1563)가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에 이주하면서 대구에 정착하여 주로 본관지를 위시로 한 대구광역시/경북 지역에 많이 살고 있으며, 이보다 앞서 문하첨의찬성사를 역임한 도응(都膺)(?~?)이 무진피화로 말미암아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읍 노은리에 낙향하면서 충청남도 천안시, 논산시, 홍성군 등에 청송당공파 후손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간조선에 따르면 都의 한자 표기는 者(사람 자)에 점이 없는 글자가 맞지만 일제 때 '놈 자'라는 비하의 의미로 者에 점을 넣었다고 주장하고 있다.보기 행사 때 현수막은 점이 없는 都를 쓰지만보기 성주 도씨 대종회의 한자표기는 점이 있는 都를 쓰고 있다. 변(성씨) 문서도 참조.

2. 역사

『경술보(庚戌譜)』 「수성시조(受姓始祖)」에 따르면 도씨의 유래로는 전한 무제(전한) 시기, 기주(冀州) 위군(魏郡) 여양현(黎陽縣)(현 중화인민공화국 허난성 허비시 쉰현) 출신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도계(都稽)가 남월의 반란군 여가(呂嘉)의 반란을 평정하여 임채후(臨蔡侯)에 책봉되고 도(都)씨를 수성(受姓)한 것이 시초이며, 그의 아들 도양(都襄)이 임채후(任蔡侯)로 대를 이었다.

이후 도계의 후손 도조(都祖)가 한성제(漢成帝) 홍가시(B.C 20~17년)에 장안으로부터 고구려로 왔으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도조는 동명성왕 19년, 옥지(屋智)·구추(句鄒)와 함께 유리명왕과 함께 부여를 탈출하여 졸본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1]

유리명왕이 부여에서 탈출하는 과정은 주몽의 탈출 신화와 흡사한 면이 많고, 유리명왕 이후 모본왕까지의 왕성이 해(解)씨로 나타나는 등의 문제로 인해 유리명왕의 왕위 계승을 찬탈이나 개국의 형태로 보는 해석이 있는데, 어떠한 형태든 유리명왕의 왕위 계승을 하는데 기여한 개국공신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도씨는 문헌에 남아있는 만주 지역과 고구려 뿐 아니라 백제신라로도 내려 간 것으로 보이는데 간간히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문헌에서 도씨를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삼국사기』, 『동사열전』에 등장하는 도미 부부 설화의 주인공인 도미(都彌)[2]성왕(백제)을 전사시킨 신라의 장군 도도(都刀) 등.

남북국 시대 말기에 이르러 도진(都陳)은 지방호족으로써 고려 태조를 보좌하여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웠다. 이 때 개국공신으로써 성산 부원군(星山 府院君)[3]으로 봉해지고 식채(食埰) 800경(약 [math(12.4km^2)])과 현재의 본관인 성주(星州)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관향으로 삼게 되었으나, 이후 고려 명종 때 전리상서를 지낸 도순(都順) 이전의 세계(世係)를 분실하여 도순을 시조로 삼게 되었다.

이후 고려 왕조가 이어지는 동안 자주 재상을 배출하는 문벌 귀족이 되었다. 도순의 아들 도충박(都忠朴)이 전리상서(典理尙書)를 역임했고, 그의 두 아들 도유도(都有道)와 도유덕(都有德)은 각각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으며, 종부시판사(宗簿寺判事)에 추증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도순의 현손(玄孫)인 도홍정(都洪正)은 공민왕 때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보국문하시중(三重大匡輔國門下侍中)에 오르고 칠곡부원군(漆谷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도길부(都吉敷)(?~1388)는 우왕이성계의 부장(副葬)으로 충청도와 전라도에 침입한 왜구를 황산(荒山)과 운봉(雲峰)에서 격퇴시켜 문하첨의찬성사(門下僉議贊成事)를 지낸 후,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이인임의 측근으로써 권력을 누리다 무진피화 중 이인임의 실각 과정에서 처형되었으며 그 처와 도희경, 도간, 도운달 등 친인척과 자손들도 참수되며 큰 화를 입었다.

도길부의 아들 도응(都膺)(?~?)이 이 때 중대광문하시중찬성사를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시국이 시국인지라- 그 또한 상술한 무진피화로 인하여 화를 입을 뻔 하였으나 그가 이성계와 절친한 관계였으며[4] 장인이 문하평리를 지내던 우인열[5]이였기에 죽음을 면하고 충청남도 홍성군 노은동 닭재산 인근으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이후 이성계가 조선 태조로 즉위한 직후 상장군(上將軍)에 임명하였으나 사퇴하여 받지 않았고, 태조 2년부터 6년까지 왕이 새로운 수도자리를 놓고 한양과 경쟁했던 명당 계룡산 일대의 땅을 하사하며 5년 간 다섯 차례나 녹봉과 직첩[6]을 내렸다.

그러나 도응은 ‘개천이나, 구덩이에 던져져 죽는 분수를 지켜 초목과 함께 썩겠다.’는 뜻을 밝히며, 다섯 차례의 소명(召命)을 모두 거절하고 한 달 동안 아홉 끼의 식사를 하는 삼순구식(三旬九食)으로 응수하며 이를 완강히 거절[7]함으로써 끝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고 두문동 72현 전설의 일원이 되었으며, 두문동이 아닌 홍성군으로 낙향한 두문동외 제현으로써 항절실 항절반에 배향되었다.

이에 태조가 “도응의 절개는 실로 옛 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도다. 내 차마 도응의 곧은 절개를 꺾지 못하는 도다.”라고 말하며 하교하기를 “자손만은 곧 나의 신하로 삼아 마땅히 대대로 음직을 주어 기용 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와 함께 청송당이란 호를 내리고 운천서원(雲川書院)과 경양사(景良祠)에 제향되었으며, 왕이 몸소 절구시를 지어 특별히 중국 비단에 금으로 글을 써서 하사하며 도응은 청송당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당시 태조가 도응에게 내렸던 왕지(王旨) 4매와 녹패(祿牌) 1매는 지금까지 남아 성주도씨 종중 문서 일괄(星州都氏 宗中 文書 一括)로써 1981년 대한민국 보물 제724호로 지정되었다.[8]

이렇게 이성계의 죽마고우였던 도응이 고려의 재상으로써 역성혁명을 반대하고 낙향, 말 그대로 두문불출하면서 조선 초에 이르러 가세가 기울게 되었다. 그는 자손(子孫)들에게 과거(科擧)에 임하지 말고 자기 몸을 닦고 가정을 올바르게 다스려 성명(性命)을 보전할 것이며, 제사 의식은 『가례(家禮)』에 따라 행하고, 가장(家狀)이나 묘도문(墓道文)에는 고려의 작호(爵號)를 쓰도록 가르쳤다.

이러한 가문의 친고려적 성향은 조선 중기까지 계속 되었고 이에 이성계의 하교와 달리, 당연히 조선 초기 왕실의 눈밖에 나게 되면서 고려 시대에 수많은 재상을 배출하던 명문가의 영광을 뒤로하고, 고위 관직은커녕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수도 눈물 나게 적어지게 되었다.

이후 약 60년 간 중앙 관직에 진출한 인물이 없다가, 도하(都夏)(1418~1479)가 1458년 장원 급제하면서 사관원정언을 지냈고, 조선 중종 대에 이르러 현량과가 실시되면서 도형(都衡)(1480~1547)이 학행으로 천거되어 3등으로 급제한 뒤 전적·공조좌랑·형조좌랑·호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11월 기묘사화로 인하여 파직당하고 향리로 물러나 학문에 전심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년) 8월 인종의 유언으로 현량과의 동료들과 함께 복관되어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달에 을사사화가 일어나 다시 파직되었다.

이후 광해군~숙종 대에 도성유, 도응유, 도경유, 도신수, 도신징 등이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여전히 본관인 성주나 대구, 경북, 논산 일대에서는 이름 높은 선비 집안이였다.[9]

조선 후기에는 다시 왕실의 신임을 얻고 고종 초기에 장원 급제자도 배출하며 정계에 재진출하기도 했으나 흥선대원군서원철폐령 등의 제재로 인하여 몰락하였다. 다만 고종 중기 이후에는 과거 시험의 결과 마저 사고 팔며 모든 관직에 대한 매관매직이 성행하였으며 이후 관료들은 친일파로 전향하거나 또는 일제에 반대하여 몰락할 수 밖에 없었으므로 큰 의미는 없다고 할 수 있겠다.

광복 이후에는 성주군, 대구광역시 인근에서 문중의 서원등을 복원하여 정기적으로 향례를 치르고 있으며 현재도 집성촌이 대구, 경북 지역 위주로 있다.

3. 항렬[10]

25세○규(珪)
26세진(鎭)○
27세○호(浩)
28세상(相)○
29세○환(煥)
30세기(基)○
31세○종(鍾)
32세법(法)○
33세○격(格)
34세혁(爀)○
35세○숙(塾)

4. 인명

4.1. 24세손

4.2. 25세손

4.3. 26세손

4.4. 27세손

4.5. 28세손

4.6. 29세손

4.7. 30세손

4.8. 32세손

4.9. 33세손

4.10. 34세손

4.11. 미상

5. 기타

손씨와는 과거 혼인을 금하였는데, 병자호란 당시 낙음공파의 시조인 도경유가 경상감사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전투에서 머뭇거린다는 이유로 휘하에 있던 박충겸이란 자를 참하였는데, 이에 그의 아들이 앙심을 품어 손씨 자객에게 암살을 의뢰하여 살해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로 중재가 있기 전까지 가문들간의 앙심을 품은 암살과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반남박씨와 청송심씨들처럼




현재 대한민국의 모든 시스템망이 전산처리화가 되면서 행정상의 오류로 점을 찍은 '놈 자'가 등본을 통해 간간히 보이는데 수정을 요청해도 법원에 소원서를 내라는 문제가 발생하는 중이다.(가족관계증명서는 문제없음) 성주 도씨 대종회에서 이 사실을 확인하여 법원에 전체 소원서를 낼 필요가 있어보인다.

사람 자에 점이 없는 글자설 또한 다소 의아한데, 애초에 이 한자는 약자(약어)인데 족보가 만들어진 시기에는 약어를 차용했던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점을 뺀 약어가 언제부터 쓰였는지, 성주 도씨 대종회에서 그렇게 판단한 근거가 무엇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1] ... 유리는 그 말을 듣고 곧 산골짜기로 가서 그것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피곤하여 돌아왔다. 하루는 아침에 마루 위에 있는데 주춧돌 사이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주춧돌에 일곱 모가 있었다. 이에 기둥 아래를 뒤져서 부러진 칼 한쪽을 찾아냈다. 마침내 그것을 가지고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등 세 명과 함께 떠나 졸본에 이르러 부왕(父王)을 뵙고 부러진 칼을 바쳤다. 왕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을 꺼내어 이를 합치니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다. 왕이 이를 기뻐하며 〔유리를〕 태자로 세웠는데, 이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2] 복파장군(伏波將軍) 도계(都稽)의 7~8대 손으로 추정[3] 후작.[4] 아버지인 도길부가 이성계의 부장이였으며, 비슷한 나잇대 였을 것이므로 자연스럽게 친하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5] 황산대첩에도 참여한 인물이다.[6] 조봉대부전의소감(1393), 선절장군흥위위좌령장군(1394), 선절장군용우무위사좌령장군(1395), 보공장군호용순위사간대장군(1397)[7] 이 때 관직을 거절하며 무진피화에서 가문에 씌워진 무고가 밝혀진 데 대해 감사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무진피화에서 쓴 역적의 누명을 이 때 이미 벗었음을 알 수 있다.[8] 죽마고우였던 이성계이인임을 숙청하며 도응을 제외한 모든 일가족을 몰살시켰고, 결국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며 함께 이인임을 숙청했던 동지 최영마저 숙청하고 고려 왕조를 멸하는 와중에 도응이 이를 끝까지 비난하면서, 고려 왕조에서 재상을 자주 배출하던 성주 도씨 일가로서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성계가 내린 교지는 가보가 되었으며 족보 외 정사에 자세한 행적이 남은 유일한 사건이 되었다.[9] 애초에 조선 건국 이전부터 대대로 성리학을 연구하는 집안이었다. 다만 조선 시대에는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보다 지역 유지로써 유학을 공부하려는 성향이 강했다.[10] 다만 항렬자는 파마다 다르다. 즉 대동항렬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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