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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고 다카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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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일본의 방송국 닛폰 테레비가 일본인을 대상으로 투표한 '가장 위대한 일본인' 명단이다.
<rowcolor=#ffffff> 1위 2위 3위 4위 5위
오다 노부나가 사카모토 료마 도요토미 히데요시 마쓰시타 고노스케 도쿠가와 이에야스
<rowcolor=#fff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노구치 히데요 히지카타 토시조 사이고 다카모리 미소라 히바리 후쿠자와 유키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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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고 다카모리
西郷隆盛[1] | Saigō Takamori
파일:Saigo_Takamori.jpg
<colbgcolor=#000><colcolor=#FFF> 출생 1828년 1월 23일
에도 막부 사쓰마국 가고시마군 가지야초
(현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가지야초)
사망 1877년 9월 24일 (향년 49세)
가고시마현 가고시마부 야마시타초
(현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시로야마초)
묘소 난슈 신사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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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본명 다카나가(隆永) →
다카모리(隆盛)
아명 고키치(小吉)
통칭 기치노스케(吉之助)[2]
산스케(三助)[3]
기쿠치 겐고(菊池源吾)[4]
오시마 산에몬(大島三右衛門)[5]
오시마 기치노스케(大島吉之助)[6]
아호 난슈(南洲)
부모 부 사이고 기치베에
모 마사
형제자매 여동생 고토
남동생 사이고 기치지로
남동생 사이고 주도[7]
남동생 사이고 고헤에
배우자 전처 스가
아리카나[8]
후처 이토코
자녀 장남 사이고 기쿠지로[9][10]
장녀 기쿠소
차남 사이고 도라타로
삼남 사이고 우마지로
사남 사이고 유조
친인척 사촌 오야마 이와오
학력 조시칸(造士館)[11]
신체 약 180cm | 약 116kg
위계 정3위(正三位)[12]
군사 경력
복무 일본 제국 육군
1872년 ~ 1873년
최종 계급 대장[13][14]
주요 보직 근위도독
참전 금문의 변
제1차 조슈 정벌
보신 전쟁
세이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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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정한론자에 대한 논란
3.1. 아니다3.2. 맞다
4. 여담
4.1. 일본 좌우익의 공조상4.2. 생존설4.3. 외모와 동상4.4. 기타
5. 대중매체
5.1. 드라마5.2. 그 외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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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천애인(敬天愛人).[15]
사이고 다카모리의 좌우명.

일본 에도 시대 ~ 메이지 시대의 군인이자, 정치가. 한자어로 서향융성. '세고동(西郷, どん)'[16]이라는 애칭으로 일본인들에게 불리기도 한다.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17]와 더불어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유신삼걸(維新の三傑) 중 한 명이다.

2. 생애

가고시마시 출신으로 사쓰마 번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사쓰마 번을 지배하던 시마즈 가문의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나리아키라의 양녀 아쓰히메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와 결혼할 때는 혼수품을 준비했다.[18]

주군 나리아키라가 에도 막부 14대 쇼군 후계자 다툼에서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지했다가 최종적으로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쇼군이 되었는데, 이 과정에게 이이 나오스케가 주도한 이른바 안세이 대옥에 연루되어 아마미 오시마로 유배형을 받았다. 3년 만에 귀환하였지만 반년도 안 되어 주군의 명[19]을 거역한 죄로 또 다시 유배되었다.

이후 복귀하여 같은 사쓰마 번의 중심 인물로써 토막(討幕) 운동(= 막부 토벌)을 벌이게 된다. 이후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에 응하여 조슈 번삿초 동맹을 맺고 에도 막부를 멸망시킨 후 메이지 유신을 달성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앞서 언급했듯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와 함께 유신삼걸로 알려져 있다. 200년 넘게 유지되던 도쿠가와 막부를 끝내고 메이지 시대를 여는 데 큰 공로를 세워 신정부의 요직에 있었으나, 정한론 논쟁에서 패배하여 귀향하였다. 이후 개혁 과정에서 실권을 잃은 무사들과 함께 세이난 전쟁을 일으켰고, 패색이 짙어지자 할복하였다. 사실 전쟁 개시 과정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끌려들어갔다는 분석도 자주 나오며, 전쟁 기간에도 건강 문제 때문인지 적극적으로 지휘에 나선 경우는 드물었다. 부검 결과 질환으로 인해 고환이 비정상적으로 거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자세한 내용은 서남전쟁 항목 참조.

3. 정한론자에 대한 논란

한국에는 정한론의 대표주자로 알려져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의 대표주자인지 아닌지는,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다. 왜냐하면 사이고가 정한론자이고, 메이지 정부에서 사이고의 주장을 반대했다는 것은 일본의 메이지 정부가 한국을 침략할 야욕이 없었다는 강력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이고가 정한론자가 아니라면, 메이지 정부가 조선을 침략할 야욕이 있었다는 정황 증거가 될 수 있기에 논의가 분분하다.[20]

결론적으로는 정한론자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결국 사이고는 실제로 조선 침략을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같은 일본인을 상대로 칼을 겨눴다.

3.1. 아니다

사실 메이지 정부 내에서 대조선 정책에 있어 거의 유일한, 그리고 (에도 막부 공무합체파로의 활동 시기부터) 매우 온건한 외교주의자였다. 오히려 참의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초량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 보호를 명분으로 1개의 대대를 파병하자고 주장하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갑자기 군대를 보내면 조선을 자극해 최악의 경우가 나올 수 있다."며 반대했다. 또한 "우리가 외무성 하급 관리를 보내는 등 대조선 외교를 성의없이 처리했는데, 저쪽이 하급 지방관으로 대응하고 우리의 요구를 수용 안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조선의 요구대로 외교관에게 전통 복장을 입히고 조선에 공손히 응대하여 그들의 진중한 반응을 끌어내자. 내가 사절로 가서 조선에서 죽임을 당하면, 그때 쳐들어가도 늦지 않다."라고 발언했고, (견한론) 그나마 마지막 문장은 공식 발언도 아닌 편지에서 외교론을 거부하는 정한론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타협책이었다.

그의 주장이 각의에서 받아들여져 특명전권대사로 파견될 뻔했으나, 다수의 각료가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에 일단 유보한 상태였다. 이후 사절단으로 갔다가 귀국한 이와쿠라 도모미[21] 등의 주도로 사이고의 의견이 묵살당해서 가고시마로 귀향한다. 관련 글

그리고 이런 주장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드라마에서는 사이고는 대화와 타협이 먼저고, 그래도 안 되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외교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는 식으로 그려진다.

3.2. 맞다

하지만 위와 같은 발언[22]을 한 것 때문에 정한론자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다.

지금 당장 침략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해서 정한론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메이지 정부는 조선 침략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사이고를 반대한 것"이라는 투의 왜곡주장에 반박하자고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막연한 감정으로 "사이고는 정한론자가 아니다."라는 것은 전자보다도 잘못된 판단이다.

게다가 당시에 서구 열강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있었으며,[23] 유교 질서 유지를 중시한 흥선대원군의 반감을 샀기 때문에 결국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라든가 제너럴 셔먼호 사건,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이 일어나는 지경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칭 "황제국"의 신하가 "근대 외교를 하자"고 찾아오는데 수용할 도리가 있겠는가. 그를 친한파라거나 평화주의자로 볼 여지는 없다.[24][25]

그리고 사이고 다카모리 본인이 무력 침략에 찬성했는지 아닌지는 별개로, 일본 중학교 역사 수업에서도 사이고를 정한론자로 가르친다. 그 이유는 메이지 6년(1873년)에 일어난 정한론 논쟁에서 시작된 정쟁에서 지고 신정부의 공무원직을 버리고 낙향한 약 600여 명의 정한론자들이 무력으로 조선을 치자는 주의였다. 사이고는 그 대표였다.[26]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고, 보신 전쟁으로 내란이 끝나고 일본이 통일되고, 근대국가처럼 국민개병제로 일반 평민을 징병해서 상비군을 갖추면, 가장 쓸모가 없어지는 계급이 지금까지 군인 신분으로 특권을 누렸던 사무라이 계급이었다.

정한론의 지지자들은 이런 사무라이 계급(士族)의 젊은이들이었다. 이들 사족들의 몰락은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예정되어 있었고, 전쟁이 일어나면 힘을 가지는 것은 무사 계급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임진왜란 때처럼 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해서라도 자신들의 계급을 유지하기를 바랐다. 이런 시도가 정한론 논쟁에서 패하고 낙향한 후로, 메이지 신정부가 사족 계급을 박대하자 사족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 사가의 난[27]을 시작으로 하는 사족들의 반란과 세이난 전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과 전쟁을 할 돈이 없다는 이유로 정한론을 반대했는데, 내전으로 지들끼리 싸워서 더 큰 피해와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또, 높으신 분들을 보내자는 것과 조선에 대한 존중 여부를 결부짓는 견해가 있는데, 사실 일본은 결과적으로 보면 저 조언을 따른 건 맞다. 예를 들어서 당장 강화도 조약의 일본측 당사자인 구로다 기요타카는 대략 20년 뒤 일본의 내각 2대 총리대신은 물론이고 원로가 될 정도의 거물급 인사인 점도 그렇고, 설사 이것이 20년 뒤의 일이니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치더라도, 대표적으로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토와 동급으로 대접받는 조슈 3존 중 하나다. 이노우에 이전 사람인 오토리 게이스케도 그 급은 아니라도 나름 중량급 인사였고.

여하간, 내막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배경 지식이 필요하므로 일단 당시 상황을 어느 정도 알아보자. 내용이 제법 길기 때문에 이 부분은 건너 뛰고 다음 문단부터 읽어도 상관은 없다.

우선, 1868년 막부가 소멸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메이지 신정부가 수립되어 조선에 왕정복고를 알리고 새로운 국교 관계 수립에 대한 사절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일본 측에게 받은 '서계'에 천황과 관련된 '황(皇)', '칙(勅)' 등과 같은 문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기존과 형식이 틀리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수차례 변경을 요구했다.[28]

그러나 일본은 "조선 국왕이 에도 바쿠후의 역대 쇼군과 대등 관계에 있었고, 바쿠후의 쇼군은 천황의 신하이기 때문에 조선 국왕은 일본 천황에게 신하의 예를 갖춰야 한다."며 조선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메이지 신정부는 1869년 외무성 관원 사다 하쿠보 등을 조선에 파견에 외교 교섭을 계속 진행했다. 결국 모든 국교 교섭에 실패하자 1870년 3월에 돌아온 사다 하쿠보는 일본의 입장대로 조선과 국교를 수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을 정부에 건의하게 된다. 이처럼 일본과 조선 간의 외교 갈등은 점차 고조되어갔고, 일본에서는 정계나 민간할 것 없이 정한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그런데 1873년 4월 쓰시마 상인이 아닌 자가 왜관에서 적발되어 금지령이 반포되는 사건을 계기로 일본 측이 폭발했다. 원래 기유약조에 따르면, 이건 일본 쪽에서 조약을 위반한 것이고, 조선 정부가 일본 정부에 공식적으로 입장을 표명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동래부가 별 생각없이 "이런 일이 일어난 건 일본이 무법지국(無法之國)이 되어서임"이라는 문구를 집어넣은 탓이었다. 문제는 외국에게 강제 개국 당하고, 지지고 볶다가 에도 막부가 멸망할 정도로 나라 사정이 영 불안스러웠던 일본 입장에선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이 문구가 실려 있었다는 문서를 일본 쪽에선 동래부 전령서라고 부르며 1873년의 정한론 소동의 주요 원인으로 보고 있지만, 한국 쪽은 일본의 트집 중 하나 정도로 여기며 이 문서가 실존하는지조차 별 관심이 없다.[29]

어쨌거나, 이게 원인이 되어서 일본 조정에 비상이 걸렸는데 21세기 이후 대중들도 1차 사료를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사이고가 주장한 내용 거의 그대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1차 사료들만 봐도 사이고가 어떤 입장이었는지, 지나가던 유치원생도 해석 가능할 정도로 이해가 쉽다는 점이다. 일단은 사이고가 조선 정벌문제가 최초로 논의될 때 각료 회의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출처는 일본 쪽 공식 기록인 메이지 천황기다. 한국사로 치면, 정조 실록 비슷한 것이다.
지금 갑자기 육해군을 파견한다면 조선 인민은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을 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조정의 의사에 반하는 일이다. 우선 전권사절을 파견해서 일본의 참뜻을 전하고 조선 측을 설득해야 할 것이다. 조선이 이를 듣지 않고 계속해서 무례하게 군다면, (그때) 그 죄를 천하에 알려 조선을 치면 된다. 전권사절로는 내가 가겠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럴 듯하다. 실제로 사이고 반정한론자를 주장하는 세력들도 딱 여기까지만 얘기한다.

이때 메이지 신정부에서는 이와쿠라 도모미를 위시한 내치파와 사이고 다카모리를 위시한 정한파가 싸우고 있었다. 일단 이와쿠라가 서양에 나가 있던 탓에 사이고의 요구가 회의에서 통과되지 못하고 잔류하게 된다. 사소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와쿠라 쪽 사람들이 이와쿠라가 귀국할 때까지 결정을 미루자며 시간을 끌면서 사이고는 이들에게 발이 묶이는 신세가 되었던 것. 그리고 조급해진 사이고가 서한문을 보내거나 직접 방문하거나 하면서 자기 속내를 다 털어놔 버린다.

《메이지 천황기》[30]에 따르면, 마음이 급해진 사이고가 태정대신인 산조 사네토미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와쿠라의 귀국을 기다리다가는 시기를 놓치게 된다. 사절이 간다면 조선에서는 반드시 사절을 죽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때야말로 그 죄를 물어 군대를 파견할 명목이 선다. 지금의 국내 정세에는 내란 발생을 바라는 조짐이 팽배해 있다. 이럴 때 그 분노의 화살을 밖으로 돌려서 국위를 해외에 떨치자.

즉, 즉각 정벌을 반대하고 선외교사절을 주장한 게 맞긴 맞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한 까닭은 "내가 외교 사절로 가서 국교 수립해도 이득이고, 수립 못해도 십중팔구 조선인들이 날 죽일텐데, 그러면 전쟁각이 서지 않겠냐? 그때 조선을 치면 된다."였던 것이다.

사실 일본 쪽에서 그동안 사이고 = 정한론, 외워라 외워! 수준으로만 교육하고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이와 같이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 보아도 기존의 통설이었던 사이고가 정한론자임이 너무 명백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냥 쳐들어가는 것이나 본인이 죽어줘서 핑계거리를 만든 뒤 쳐들어가는 것이나 대체 당하는 입장에서 뭔 차이가 있겠는가?

그러니 일본 쪽에서 위와 같은 사정을 자세히 밝히기지 않고 "그냥 사이고가 정한론자였는데, 지가 갑자기 반란을 일으켜서 그냥 죽어버렸네요?" 정도로 떼우고 넘어왔었고 그래도 문제가 없던 건 이런 연유가 있던 것. 사실 일본 정부나 민간이나 정한론이 지독하게 구린 얘기라는 건 다들 인정하는 바인데, 일본 지배 계급 중에 이런 주장이 횡횡했던 것. 그러니 나라를 위해 죽겠다던 사이고를 결과적으론 오명을 혼자 뒤집어쓰고 죽어 버린 것처럼 만드는 건 좋은 상황일 수 밖에 없는 것.

이런 상황에 틈타서 애매한 증거 몇몇으로 근래[31] 들어 사이고 추종자들이 지들 입맛에 맞는 지엽적인 부분[32]만 골라내서 "사이고는 정한론자가 아니라 외교론자였다."는 해괴한 주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왜 이들이 사이고 반정한론자 주장을 들고 나왔냐면... 이런 인간들조차 정한론이 나쁜 얘기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다.

그런데 이거, 위에서 논했듯이 1차 사료들, 심지어 사이고 본인이 작성한 증거들이 빼도박도 못하게 잔뜩 남아있다. 무엇보다도 핵심이 되는 것은 사이고가 이타가키 다이스케[33]에게 빚 독촉이라도 하는 사람마냥 편지 다섯 통을 보냈다.

어쨌거나, 사이고의 계획을 저지한 것은 이와쿠라였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이와쿠라가 자리를 비운 탓에 이 문제에 대한 결정이 늦춰졌는데, 남아있던 정한파 정부 인원들이 멋대로 사이고 다카모리를 조선에 사절로 파견하기로 결정해버린다. 그리고 이와쿠라가 귀국한 뒤에는 이 문제가 이와쿠라 vs 사이고의 문제가 되어 버려, 그야말로 조정이 양분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내치파가 정쟁에서 승리해 사이고의 조선 파견을 저지하고 메이지 천황이 조선과의 전쟁을 불허한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사이고 일파는 전원 참의(參議)직을 내놓고 사표를 제출했다. 그리고, 사이고가 귀향한 후 그동안 쌓여왔던 사무라이 계층의 불만이 슬금슬금 폭발하면서 이와쿠라 암살시도라던가, 사이고 암살설의 소문이 돈다던가 하는 식으로 정국이 불안해진 끝에 세이난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참고로, 서남전쟁에서 사이고 세력은 개전 이유 중의 하나로 정한을 들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 이전에 사가현에서 일어난 정한당의 봉기[34]에서도 사이고를 지도자로 모시려는 시도가 있었다.[35] 사정이 이러니 어떻게 왜곡을 해도 사이고는 정한론자가 맞다.

한편, 사이고의 정한론에 반대한 사람들이 전부 평화주의자여서 전쟁에 반대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당시에 조선 정벌을 포기한 까닭은, 조선 문제 말고도 다른 중요한 문제거리들이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36]따지고 보면 조선 침공(정한론)에 반대했던 파도 일단 국내 부국강병을 외쳤지만, 그 내막을 보면 이와쿠라 도모미가 이끄는 이와쿠라 사절단이 해외에 나가서 시찰하고 있는 동안에는 국가의 중요정책은 결정하는 것을 보류하기로 약조를 맺었는데, 사이고 일파가 이것을 무시하고 여러 행정적 중요사항을 지들 맘대로 결정했고, 오쿠보 도시미치가 이에 분노한 정치적 암투였다.[37] 결론적으로 메이지 정부의 관료들 간의 파벌 싸움이 정한론 논쟁으로 정쟁화된 것.[이후로도]

4. 여담

4.1. 일본 좌우익의 공조상

일본 사상사학자 마쓰모토 겐이치의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를 일본 우익과 좌익의 공조상이라고 진단한다.

여기에 관해서는 마쓰모토가 일본 좌우익을 세계보편적 좌우익과 구분되는 특수한 집단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점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들어선 삿초 번벌정부, 즉 오쿠보 도시미치 일당의 지상 목표는 조국 근대화, 부국강병이었다. 그들은 제국주의자, 팽창주의자였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당대 문명국이 모두 하는 짓거리이기도 했다. 욱일기제1차 세계 대전 시절에는 연합군 깃발이었음을 상기해 보자. 이런 자들의 사상적 시조는 후쿠자와 유키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급속하고 인위적인 근대화는 소외되고 낙오되는 사람들과 가치들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메이지 신정부의 근대화에 반발하는 반체제의 기치를 처음 올린 것이 '사이고'였고, 세이난 전쟁이었다. 마쓰모토의 진단에 따르면 오쿠보와 그 후예들은 결코 우익이 아니었고, 일본에 우익과 좌익은 사이고 이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사이고 이후 메이지 번벌정부에 대해 저항한 세력들도 분화하는데, 이타가키 다이스케로 대표되는 자유민권운동 우파 세력은 오쿠보의 후계자인 이토 히로부미와 결탁하여 헌정 리버럴 세력을 형성한다. 마쓰모토는 이 리버럴 세력이야말로 메이지 시대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쳐 현재까지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수권단괴 세력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 논리에 따르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요시다 시게루부터 현재의 기시다 후미오까지 이어지는 자민막부 역시 훌륭한 리버럴 세력이 되어버리는데, 마쓰모토는 실제로 그렇게 주장한다.

한편 반체제 성향을 잃지 않은 것이 나카에 초민 같은 자유민권운동 좌파 세력 그리고 도야마 미쓰루현양사(玄洋社)였다. 이 두 세력이 각각 일본 좌익과 우익의 중시조가 된다. 나카에 사상은 고토쿠 슈스이평민사 세력에 계승되어 사회주의, 아나키즘으로 완성되었고, 도야마 사상은 우치다 료헤이미야자키 도텐 같은 대륙 낭인들의 혁명 수출 사업으로써 완성되었다.[39][40]

요약하자면, 후쿠자와의 사상에 의거해 오쿠보와 이토, 이타가키로 이어지는 일본의 근대화 노선에 "민중"과 "계급"으로서 반발한 것이 좌익이고, "민족"과 "전통"으로서 반발한 것이 우익이었다.[41] 그리고 그 반발의 시초가 사이고였다는 것이다.

사이고에서 파생된 일본 좌, 우익들이 아직 완전히 분화되지 않은 메이지 초기(조선 멸망 이전) 시대의 사상적 혼란상은《왕도의 개》라는 만화를 보면 그 맥을 어느 정도 짚을 수 있다. 동양의 루소 나카에 초민과 야쿠자의 창시자 도야마 미쓰루가 함께 김옥균을 배웅하고, 우치다 료헤이가 주인공 카노 슈스케에게 합기도 참교육을 당하는 반면, 우치다와 마찬가지로 현양사 소속인 미야자키 도텐은 카노와 함께 쑨원의 혁명을 돕는 동지다. 그리고 이 만화의 악역인 무쓰 무네미쓰가 바로 마쓰모토 겐이치가 지목하는 "근대화주의자 리버럴"의 표상이다.

4.2. 생존설

워낙 인기가 많아서 실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생존설이 러일전쟁 때까지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그중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이 훗날 니콜라이 2세가 되는 니콜라이 황태자가 일본에 방문할 때 전국적으로 설이었는데, 구로다 기요타카유럽 각지를 순방할 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와 기리노 도시아키를 만나 훗날 일본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결의했고, 실제로는 사이고와 기리노, 무라타, 벳푸 같은 서남전쟁의 수뇌가 시로야마산에서 탈출해 러시아 군함을 타고 도주해 살아있으며 니콜라이 황태자와 함께 일본으로 귀환하여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일본 전역에서는 난리가 났고 환호와 의심이 뒤범벅이 된 가운데 신문사들은 검증도 안 된 소문을 사실인 양 마구 남발하여 혼란을 가중시켰다. 사이고의 출신지인 가고시마규슈에서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환영무드가 조성될 정도였다. 여기에 메이지 덴노가 시중에게 "사이고가 돌아온다면 메이지 10년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자들의 훈장을 박탈하고 그를 맞이하겠다."고 말했다는 미확인 소문도 있어 경관인 쓰다 산조가 이를 두려워하여[42] 니콜라이 황태자를 칼로 베는 황태자 암살미수 사건이 벌어지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생존설의 근거로는, 메이지 정부의 검시 결과에는 사이고의 시신이 발견되었을 때 머리가 잘린 상태에서 고환이 부풀어오른 것을 보고 '사이고 다카모리'라고 판단했다. 잘린 머리는 며칠 후에 발견되었다. 다만, 고환이 부풀어오른 것은 이 지역의 풍토병의 후유증으로 당시에는 10명 중에 한 명이 이런 증세가 있어서, 사이고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학설이 있다.[43] 하지만, 사이고라고 판단한 것은 고환이 부풀어 오른 것만 본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 싸우다가 오른쪽 팔꿈치에 칼 맞은 흉터도 확인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서, 그 시체는 사이고 다카모리 본인일 확률이 높다.[44]

둘째, 동상이 우에노 공원에 있는데, 우에노 공원은 메이지 정부가 조성한 곳으로 사이고는 '정부에 반란을 일으킨 역적'인데 사후 사면되고 동상이 세워진다. 그 친동생과 아들도 메이지 정부의 고위 관료로 임명되었다. 이런 것에서 서남전쟁은 불만을 가진 사족(士族) 세력을 처단하기 위해 반란을 부추기고, 사이고는 이를 알면서도 협조했다는 주장이다. 즉, "메이지 정부와 사이고 다카모리가 미리 짜놓은 시나리오였다."는 음모론이다. 그래서 사이고는 죽지않고 러시아시베리아로 갔고, 메이지 정부는 그가 죽은 걸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생존설 중 가장 막나가는 것으로 사이고 다카모리가 "암암리에 안중근을 지원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했다."는 소위 사이고 다카모리 = 김두성 설도 있다. 안중근이 자신의 상관이라고 밝힌 김두성이 워낙 미스터리한 인물이라 이런 설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으나,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학자는 없다.

4.3. 외모와 동상

4.4. 기타

5. 대중매체

5.1. 드라마

막말을 소재로 다루는 드라마라면 사카모토 료마가 십중팔구 토사 벤을 쓰면서 등장하듯이, 사이고 역시 막말의 최고 중요인물로 반드시 등장한다. 그리고 그가 등장하면 반드시 오쿠보 역시 사이고의 콤비로 등장한다. 사이고가 등장하는 매체물에서는 전부 가고시마 벤을 쓰는데, 가고시마 벤은 억양이나 말투가 매우 특이한 사투리라[53] 처음 듣는 사람들은 매우 난해해 할 정도.

5.2. 그 외

6. 관련 문서



[1] さいごう たかもり, 구자체는 西鄕隆󠄁盛󠄁[2] 사이고가 사용했던 수많은 이름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름이다. 고향 친구들도 주로 기치노스케라고 불렀다고 한다. 대하드라마에서도 기치노스케라고 주로 불린다.[3] 안세이 대옥 당시 사용했던 이름[4] 아마미 오시마 유배 당시 사용했던 이름. 사이고의 본적이 키쿠치시에 있다는 뜻이다.[5] 아마미 오시마에서 유배 생활을 끝내면서 자칭했던 이름. 아마미 오시마에서 삼 년 살았다는 뜻이다.[6] 오키노에라부 섬에서 유배 생활을 마치고 썼던 이름으로 추정[7] 일본 해군의 최초 원수 해군대장[8] 아마미 오시마 유배생활 당시에 만났던 섬 현지인. 소설이나 드라마 등에서 농민의 딸로 묘사되곤 하지만 사실은 딴판이다. 류큐 왕국의 왕가를 시조로 하는 카사리 씨로부터 이어받은, 아마미 오시마 제일의 명가인 타바타 씨 일족이다.[9] 도라타로(虎太郞)보다 먼저 태어났는데 이름이 왜 기쿠지로(菊次郞)냐면 기쿠지로의 생모인 아이카나는 사이고가 아마미 오시마에서 잠거할 때 만났던 첩이었다. 즉 기쿠지로는 서출이기 때문에 정실의 첫째 아들에게 붙이는 이름인 '타로'를 쓸 수가 없었다. 기쿠지로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 하였으며, 외무성, 궁내성 등을 거쳐 청일전쟁 이후 대만 식민지의 신베이시 지청장, 이란현 장관 등을 역임, 귀국 후에는 6대 교토 시장에 취임하였다.[10] 일본에서는 보통 장남에게는 타로(太郞), 차남에게는 지로(次郞)를 붙였다. 그 외에 삼남은 사부로(三郞), 사남 시로(四郞), 오남 고로(五郞), 육남 로쿠로(六郞), 칠남 시치로(七郞), 팔남 하치로(八郞) 등등..[11] 사쓰마 번의 번교[12] 1877년 2월 25일 정3위 박탈
1889년 2월 11일 대일본제국 헌법 공포에 따른 사면으로 정3위 재추증.
[13] 사이고는 육군원수로 임관했으나 원수 계급이 폐지 되면서 육군대장이 되었다. 즉, 칭호가 아닌 계급으로서의 일본군 원수는 육,해군 통틀어 사이고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14] 1873년에 정부의 모든 요직에서 사퇴했으나, 육군대장 직급은 1877년 세이난 전쟁 직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15] ‘하늘을 숭배하고 인간을 사랑한다’는 뜻을 가진 사자성어이다. 한국에서는 이미 조선 시대 선비들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으로 정착되었으며, 미토학의 슬로건이기도 한데, 19세기 일본 히타치 국의 미토 번을 중심으로 형성된 미토학은 존왕사상, 국가주의 사상을 담고 있다고 평가되며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 미토학에 심취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실사구시와 더불어 이 성어를 일생 동안 숙고했다고 하며. 2002년 3월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이 사자성어를 적은 붓 글씨를 선물로 건네기도 하였다.[16] '사이고 님'에 해당하는 '사이고 도노'의 가고시마 사투리 발음이다.[17] 바람의 검심에서 '카츠라 코고로'로 등장한 그 인물이다. 실제로 진짜 이름부터가 여럿 있었고(정식 성만 해도 와다에서 가쓰라, 기도로 바뀌었다.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도망다니면서 가명을 다수 만들어 다녔다. 본명은 기도 다카요시지만 가쓰라 고고로라는 이름이 가장 유명하다. 은혼의 등장인물도 이 이름에서 딴 가츠라 고타로고, 바람의 검심에서도 상술한 대로 '카츠라 코고로'다.[18] 훗날 사이고 다카모리의 증손녀는 시마즈 가문의 시마즈 노부히사와 혼인했다.[19] 국부(國父) 시마즈 히사미츠의 교토 상경을 반대했다. 히사미츠는 막말 4현후 가운데 한 명이자 사이고가 평생 마음의 스승으로 삼았던 시마즈 나리아키라이복동생으로, 히사미츠는 사이고의 전국적인 인지도를 이용하여 본인의 중앙 정계에서의 영향력을 넓히려고 하였으나, 사이고는 그를 그릇이 작다 여겨 뜻을 같이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당시 히사미츠는 무위무관(無位無官)이었기 때문에 상경하기도 적절치 않았다.[20] 물론 침략할 야욕이 없었다고 해도 결론적으로 일제강점기는 시행되었고 식민통치에서 일어난 일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21] "현재 우리 일본에 산적한 문제도 많고, 지금 시점에 조선을 상대하다간 서구의 압력을 피할 수 없다."면서 메이지 덴노의 재가를 받았다.[22] "나 죽거든 공격하라!!"[23] 도굴꾼 오페르트조차 처음에는 단순히 통상을 요구했을 뿐이었다.[24] 이 주장이 국내 사학계에서 주류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함의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단 결과적으로 봤을 때 일본은 끝내 조선을 병합해버렸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을 강행하려다 메이지 정부의 반발을 샀다"는 기존의 주장을 고수할 경우, 이는 "20세기 초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건 선한 제국이 못난 조선을 계몽한다"는 식의, 전형적인 식민지 근대화론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는 거나 다름없다. 안병직도 이런 소린 안한다.[25] 결정적으로, 고작 40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동양학계는 일본의 연구성과를 유의미한 변형 없이 그대로 답습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26] 여기에는 여러 해석이 있는데, 군인이라는 신분을 잃게되는 사무라이 계급에게 같은 사무라이 출신이자 군인이었던, 그리고 정에 약한 사이고가 동정했다는 설도 있고, 당시 출범한 지 얼마 안된 메이지 정부는 심각한 재정적 시련을 겪고 있었는데, 내치를 우선해서 부국강병을 하자는 반대파 오쿠보의 주장에 대해, 가장 쉽게 부국강병하는 방법은 영국, 미국, 서양 열강이 했던 것처럼 남의 땅 쳐들어가서 굴복시키고 빨대 꼽고 꿀 빨아들이는 것이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라는 제국주의 논리(정한론파의 주장)를 편들었다고도 하지만 그 진위는 불분명하다.[27] 사가의 난의 주도 세력인 정한당(征韓黨)은 조선을 쳐들어가면 자신들이 선봉대가 될 것이라고 모여든 놈들이었다,[28] 황(皇)은 왕(王)보다 높은 사람이다. 이러니 기분이 좋을 수 없는 것[29] 다소 지엽적이긴 한데, 좀더 얘기해보자면 이 동래부 전령서라는 게 일본 쪽에서 극대노해서 전쟁까지 들먹일 정도로 무례한 표현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동래부 전령이라는 것이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 쪽 기록에는 이 전령서라는 게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무리 동래부사가 인근 지방관 중에서는 품계가 높고, 당대 지방관들이 권한이 막강했다고는 해도 지방관들에게 외교권은 없었다. 게다가 표현도 너무 거칠고 경박해서 이게 외국인들에 대한 공문서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 일본이 호들갑 떨었던 거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이게 정식 포고문이라고 하더라도 조선 정부가 일본 정부에 공식적으로 보낸 것도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30] 일본 궁내성에서 편찬한 메이지 천황의 전기이며, 메이지 천황과 메이지 시대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한 기본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31] 대놓고 말하면 일본애들이 위키피디아를 작성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사이고 평화론자' 주장이 최초로 나온게 20세기 후반이긴 한데, 증거가 있는 상황에서 이걸 인정한 학자의 수는 많지 않다.[32] 예를 들면 위의 사이고 발언 중 "갑자기 육해군을 파견하면 안 된다."라는 것이나, "궁중 의상을 입고 가야 된다."는 등의 중요하지 않은 부분.[33] 이 사람은 외교고 나발이고 일단 쳐들어가자는 쪽이었다. 한마디로 사후 왜곡도 불가능할 정도의 정한론자.[34] 대놓고 조선 정벌 안 해서 우리 반란 일으킴이라고 표명했다.[35] 지도자였던 에토 신페이가 도주 중에 사이고와 접촉한 기록이 남아있다.[36] 당장 메이지 신정부가 세워진 것은 68년이다.[37] 다만 사이고가 중요 사항을 맘대로 결정한건 나름의 이유가 있다. 사이고는 당초에는 약속을 지키고자 했으나 이와쿠라 사절단이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기일을 너무 넘겨버린 것. 이에 정부의 몇몇 인물들은 언제까지고 이와쿠라를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다고 주장했고 결국 사이고도 동조한 것이다. 참고로 이와쿠라 사절단이 약속을 넘겨서 유럽에 계속 체류했던건 외교적 목적도 있지만 관광도 함께 즐기기 위해서였다.[이후로도] 조슈와 사츠마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고 종래에는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으로 이어지며 사이좋게 공멸했다.[39] 좌익과 달리 우익은 태생적으로 치명적 약점이 있었는데, 그들의 가치인 민족과 전통의 상징인 천황이 근대화 리버럴 세력의 꼭두각시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익은 아무리 노력해도 리버럴 세력의 손바닥 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장기말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리버럴 세력은 그런 우익을 도구화, 노예화하여 자신들의 근대화, 제국주의화의 첨병으로 이용해 먹는 동시에 그렇게 써먹을 수도 없는 좌익은 탄압했다.[40] 그리고 탄압으로 지리멸렬해진 좌익과 정부의 개로 타락한 우익을 통섭, 재편하려 시도했던 것이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천황에 대한 숭배심을 이용해 천황을 사회변혁의 장기말로 전락시키려 했던 희대의 괴인 기타 잇키였다.[41] 메이지 유신존황양이에 근거한 일본식 국수주의화혼양재에 근거한 근대화에 있었다.[42] 쓰다는 서남전쟁에 종군하여 맹활약하여 훈7등을 수여받았으며 이것을 평생의 자랑으로 삼았는데, 훈장을 박탈당한다는 소문을 굳게 믿고 이에 대한 불안과 절망을 주변인들에게 한탄했다고 한다.[43]풍토병이 뭔지는 일본 만화 타임슬립 닥터 진 문서 인물 항목 참조.[44] 국내 기생충 학계에서는 기행충 감염이 고환 비대화의 원인이었을 것으로 보는 의견이 우세하다. 풍토병이라는 것도 모기에 의한 전파가 많기 때문이다. #[45] 뿐만 아니라 암살을 피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막부 말기 당시에는 좌막파와 도막파 간의 암살이 많았다.[46] 메이지 덴노 본인 역시도 사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에 천연두를 앓아 죽을 뻔했는데 그때의 흔적으로 얼굴이 얽었기 때문. 즉위식할 때 전통 관복을 입은 사진을 자세히 보면 하관에 천연두 곰보 자국이 보이며 수염을 기른 것도 이걸 가리기 위해서였다. 여관들에게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궁중에서 양장을 입는 것을 허락할 정도였고 메이지 본인도 공무가 아니면 양장을 입지 않았다. 신정부의 교육제도를 정할 때에도 서구식 학제를 따르자는 메이지 신정부 인사들의 주장과는 달리 유교 사상을 토대로 교육제도를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서구적 근대화를 추구하던 유신정부의 개혁군주라고 하기에는 매우 전근대 지향적이고 극보수적인 스탠스를 취한 인간이었다.[47] 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 9권 1장 굽씨의 오만잡상에 따르면 사이고 동상이 세워지기 5년 전인 1893년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 최초의 서양식 동상으로 세워진 오무라 마스지로의 얼굴이 아래서 보기에 너무 높아 제대로 볼 수 없어서 사이고 동상 얼굴은 아래에서도 보기 쉽게 큼지막하게 만들었다고 한다.[48] 사실 사이고는 근대 일본 최초이자 유일한 계급으로서의 육군 원수기도 하다. 더군다나 이 때의 일본 육군 원수는 20세기 즈음과 달리 서구 각국과 마찬가지로 계급으로서의 육군 원수였다.[49] 가난한 하급 무사 집안이라서 낚시하고 사냥하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그 날 그 날 하루 먹을거리를 조달하는 방책이었다[50]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 기준으로도 상당한 거구였다.[51] 예산과 관리 문제로 슬쩍 생가의 다다미를 플라스틱 다다미로 교체했다가 지역 언론에서 성토당하고 다시 전통 다다미로 바꾸기도 했다. 다른 지역에서 위인의 생가에 까는 다다미를 뭘 쓰든 관심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고시마에서 사이고의 입지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52] 2011년에 있었던 큐슈 신칸센 전면 개통이라든가...[53] 안 와닿으실 분들을 위해 극단적으로 설명드리자면, 북한 사람들이 동북 방언의 억양으로 구사하는 일본어처럼 들린다. 그밖에 세세한 부분도 일본 표준어와는 전혀 다르다. 애초에 가고시마벤(사쓰마벤)은 일본사람도 못 알아듣는 사투리라 2차 세계대전때 군사 암호로도 쓰였다.[54] 사진 왼편. 오른쪽은 오쿠보 도시미치(카가 타케시 분)이다.[55] 보신 전쟁에서 구 막부군 측에 섰던 아이즈 번은 막부 타도의 선봉이던 사쓰마,조슈번에 가장 강하게 반발하였으며, 유신 후에는 괘씸죄로 인해 변방 중에 변방으로 강제이주 당하는 등 무지막지한 탄압을 받았다.[56] 참고로 니시다는 야에의 벚꽃에서도 사이고의 방계 가문 인물인 아이즈 번의 사이고 타노모도 연기했으며, 세고돈에서는 다카모리의 아들 기쿠치로를 맡았다. 즉 NHK 대하드라마에서만 3명의 사이고를 연기했다는 말이다.[57] 여기서는 이토 히로부미의 아랫 사람으로 나오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정반대로 이토 히로부미가 사이고 다카모리의 아랫 사람이다. 연배도 그렇고 유신의 공로, 정치적 입지 등에서 사이고와 이토는 엄청난 격차가 있다. 고증이 잘못되었거나, 동명이인의 가상 인물이거나, 동생인 사이고 주도이거나 셋 중의 하나로 보인다.[58] 특히 고구마.[59]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무진전쟁에서 패해 오키나와로 도망가 그곳의 정권을 뒤엎고 공화국을 자처하나 대한제국에게 잡혀 해적으로 처형되며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조선의 선의빔에 제대로 얻어맞아 일이 뜻대로 안풀려 실의에 빠져 낙향한다. 그래도 여기선 반란자로 죽지 않고 평화롭게 죽었기에 그나마 대우받은 편이다. 효명조선에서는 아예 아편 중독자(...)가 되어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