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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31 16:01:58

제2차 한산도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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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개변된 역사 무기
민국인 제너럴 셔먼호 사건 · 오페르트 도굴사건
톈진 사건
· {{{-2 군산포 해전
제2차 한산도 해전
· 영종도 해전 · 안산 전투}}}
갑식 보총 · 강선 조총
1백근 야포
· {{{-2 천갑탄
소포
· 뇌창 · 소이신기전}}}
<colcolor=#000>제2차 한산도 해전
第二次 閑山島 海戰
날짜
1871년 9월 5일
장소
통영 앞바다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파일:사츠마 시마즈 가문 문장.svg 일본[1]
지휘관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수사 임상준
전라좌수사 류기철(柳冀喆)
경상좌수사 윤영하(尹永夏)
민국인 김현수[2]
해군고문관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3]
일본 해군경 사이고 다카모리
코테츠 부함장 쓰보이 고조[4]
병력 전라좌수영 판옥선 15척
경상우수영 판옥선 35척
경상좌수영 소속 판옥선[5]
장갑함 코테츠(甲鐵)[6]
호위함 가스가
포함 4척[7]
피해 규모 전라좌수영 전선 3척 침몰
경상좌수영 전선 2척 침몰
경상우수영 전선 1척 침몰
수병 800여명 전사
기함을 비롯한 일본 함대 궤멸
결과
일본 해군력을 완전히 말살
경상도, 전라도 연해의 제해권 회복
1. 개요2. 전개3. 전투 결과

[clearfix]

1. 개요

대체 역사소설 한제국 건국사에 나오는 해전으로 사쓰마 번 해군과 조선 경상우수영, 경상좌수영, 전라좌수영 수군 사이에서 벌어지며 이 전투로 일본 해군이 괴멸당한다.

2. 전개

출정한 이래 근 8일이 지나도록 일본 해군은 아무것도 찾지 못해 무기력해진 채로 부산으로 되돌아 오던 9월 5일, 한산도 방면에서 전라좌수영 수군과 마주친다. 이에 조선 수군은 후퇴하고 처음으로 적을 만나 들뜬 일본군은 그 뒤를 거세게 추적한다.[8] 조선 함대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한산도와 통영이 보이는 바다 사이로 들어가자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부함장 쓰보이 고조 대위가 손자병법에 근거하여 해군경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철수할 것을 건의하나 사이고는 이는 자신도 간파했고 조선군이 유리하다 생각하는 지형에서 이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보아[9] 그대로 진격한다. 그것이 일본군의 결정적인 실책이 되었다...

그렇게 해협으로 일본함대가 진격하자 후방에 매복중인 조선 경상우수영 함대의 일제 포격[10]으로 다이이치데이보, 가스가[11]가 순식간에 굉침한다. 이렇게 되자 장교진들을 비롯한 모든 일본군은 당황하기 시작하고 급하게 철수하려고 하지만 상황은 이미 늦었다. 교전이 격화되자 일본군 앞에서 달리던 전라좌수영은 물론이고 일본군의 후퇴로에 매복한 경상좌수영 함대까지 합류해 싸우면서 처음엔 강갑함(장갑함)쪽으로 화력을 집중하다가 다른 군함에 장전+발사 속도가 빠른 선회포가 있는게 확인되자 바로 그 포함을 공격한다. 그 와중에 가데츠 함장과 사이고 다카모리가 가데츠 1차 피격에 전사하고 살아남은 부함장 쓰보이 고조가 지휘권을 넘겨 받아 접근하는 판옥선을 한 척씩 터트리면서 코데츠라도 살리기 위해 탈출을 시도하나 압도적인 화력을 받은 나머지 선수의 장갑이 깨지게 되고 얼마 안가 선수가 터지면서 결국 굉침한다. 아직 코테츠 뒤에서 포함 2척이 남았으나 장갑함을 격침시킨 뒤 모든 화력을 즉시 집중시켜 바로 격침한다.

3. 전투 결과

이 전투를 기점으로 일본 해군이 전멸하면서 남해안 지역의 제해권은 조선 수군이 장악한다. 또한 조선은 일본의 위협에서 거의 벗어난다.[12]
이 전투에서 일본 해군의 생존자는 각 함선들이 폭발할 때 바다로 튕겨나가거나 폭발 직전 바다로 도망친 선원 50여명과 폭발한 코테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부함장 쓰보이 고조가 전부였다.
이 생존자들은 모두 포로로 잡혀 통영과 진주를 거쳐 충주로 압송되었고, 거기서 육군 포로들과 합류해서 연합군과의 협상 겸 경고를 위해 제물포로 끌고 간다. 이런 대승을 거두었지만 조선 수군도 1백근 선재포가 장착된 전선 6척이 격침당하는 피해를 입었으며 거문도[13]를 거점으로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영국 타격편대가 수색 중이었기에 군산포 해전으로 영국 함대가 강화도로 재배치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질 때까지 숨어 지내야 했다.


[1] 정확히는 사쓰마 번[2] 처참한 상태의 조선군이 그나마 맞서 싸울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3] 직접적인 참여는 안하고 전라좌수사 전선에 탑승하여 해전을 참관함[4] 작중 일본 해군 시점이 이 인물로 고정되어 있으며 전투 후반에 몰살당한 지휘부를 대신하여 장갑함 탈출작전을 주도했기에 지휘관 목록에 적음[5] 정확히 몇척인지는 언급되지 않음[6] 작중에는 '가데츠'라고 불리고 있다.[7] 함명: 다이이치데이보, 묘순, 다이니데이보, 후지야마[8] 그러나 이는 전라좌수사 류기철의 계략으로 적들을 한산도 깊이 끌어들여 섬멸하려는 것이었다.[9] 조선군 배 대부분이 정크선이라 자신들의 근대 전함으로 이길 수 있다, 아니, 그냥 장갑함 가데츠의 충각으로 몰아붙여도 그냥 이겼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그들의 화력이 자신들을 능가함은 몰랐다는 게 함정.[10] 작중에 잠시 나온 우수영의 훈련 당시, 명중률이 10%나 되는 근대 함포치고는 매우 높은 명중률을 보였다고 평가하고 있다.[11] 1차 사격에 이미 한두발을 맞아 대파상태에서 2차 피격을 당했는데 이때 날아간 모든 포탄이 모조리 명중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12] 아직 육군 4000명이 있었기에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그러나 해군이 전멸되어 이들은 미래가 전혀 없는 사실상 고립 상태였고, 그나마 위협을 느껴 대구 공격을 포기하고 부산으로 후퇴하다가 삼량진 전투를 기점으로 부산에 남아있던 일본 주둔군을 제외하면 전원 조선군에게 토벌 당한다.[13] 영국명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