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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5:07:16

영종도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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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개변된 역사 무기
민국인 제너럴 셔먼호 사건 · 오페르트 도굴사건
톈진 사건
· {{{-2 군산포 해전
제2차 한산도 해전
· 영종도 해전 · 안산 전투}}}
갑식 보총 · 강선 조총
1백근 야포
· {{{-2 천갑탄
소포
· 뇌창 · 소이신기전}}}
<colcolor=#000>영종도 해전
永宗島 海戰
날짜
1871년 10월 13일(음력 8월 28일 )
장소
영종도 서쪽 해안과 신도[1], 삼목도[2] 사이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파일:미국 국기(1867-1877).svg 파일:영국 국기.svg 연합함대[3]
지휘관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수사 임상준
전라우수사 이민우(李敏宇)
전라좌수사 류기철(柳冀喆)
경상좌수사 윤영하(尹永夏)
충청수사 이규안(李奎顔)
민국인 김현수
구 남부연맹 봉쇄돌파선 함장 랜돌프 워든
원정군 총사령관 헨리 켈렛 제독
미국 특명 전권공사 프레드릭 로
병력 전군[4] 121척+1척
판옥선 44척
신기전기 장착 방선 37척
활대기뢰 장착 병선 40척
고속 상선[5] CSS 제퍼슨 데이비스함

후군[6] 80척+1척
판옥선 40척
신기전기 장착 방선 40척
북독일 연방 호위함 헤르타함[7]
장갑함이자 기함 HMS 워리어
장갑함 USS 뉴 아이언사이즈 포함 3척
연안포함과 원양포함 총 15척
호위함과 슬루프함, 초계함 15~20척(추정)[8]
피해 규모 정확히 알 수 없음[9] 장갑함 1척[10]과 원양포함 2척[11],
초계함 1척, 슬루프함 2척 이외 전원 전멸
결과
서양 원정 함대 전멸
연합군의 본진인 영종도 탈환
1. 개요2. 전개 과정
2.1. 연합군의 방어계획2.2. 조선군의 공격 준비2.3. D.day
3. 결과4. 여담

[clearfix]

1. 개요

한제국 건국사에 나오는 가상의 해전으로 이 전투로 연합군 해군 전력은 사실상 괴멸된다.

2. 전개 과정

2.1. 연합군의 방어계획

파일:영종도와 신도, 삼목도 수정본.png[13]
새로운 정박지는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사방이 탁 트인 영종도 남쪽 해안보다 어느 정도 막혀 있는 위치이고 정박지로 이어지는 3개의 수로도 엄청 좁고 얕았거니와[14], 거기다 장갑함도 기함 제외하면 딱 3개이었기에 저곳에 배치를 하게 된다.
먼저 조선의 주력 함포인 1백근 야포에 대한 방어력이 약한 프리깃, 코르벳, 슬루프함들은 영종도 해안가에 딱 붙어 원형진을 형성한다.
그리고 무지막지한 함포에 버틸 수 있는 장갑함 3척은 남쪽과 서쪽, 북쪽 입구를 틀어막으면서 수상 장갑포대(Armour Battery)로 만들어 버리고, 그런 장갑함 주변에다 포함 5척씩 엄호를 한다.[15] 덤으로 잠수부를 통한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각 섬마다 1개 수병중대를 배치한다.
이렇게 방어진을 구축하면서 연합군 사령부는 조선군은 1차 방어선조차 뚫지 못하고 설령 뚫게 되더라도 공격 소식을 듣고 전투 준비를 모두 마친 후방 함선들에게 축차격파 당할 거라고 자신한다. 다만 그 정보가 예상치 못한 사람들에게 새나갔다는 게 문제였다...

2.2. 조선군의 공격 준비

2.3. D.day

3. 결과

기함인 HMS 워리어가 격침된 지 30여 분이 지나가 동이 틀 무렵, 연합군 해군에겐 남은 군함이 겨우 6척[28]밖에 남지 않은 처참한 처지만 남게 된다. 한편 주변 바다에는 처참하게 박살나거나 불탄 군함들의 잔해들이 즐비했고 바다 위에는 이미 죽어버린 선원들의 시신들과 폭발한 배에서 튕겨나간 양측 생존 수병들이 허우적거렸고 브와제 섬에서 띄운 구조보트들이 이들을 급히 구조하는 것으로 전투 에피소드가 끝나게 된다.

사실상 모든 가용 전력이 박살난 연합군 해군은 조선 삼도수군에게 항복을 한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주중 미국대사 겸 특명 전권 대사인 프레더릭 로를 포함한 영종도 주둔군의 생존자 전원이 포로로 잡히게 되었으며 본진인 영종도가 탈환된 동시에 재해권마저도 박탈 당하게 된다. 아울러 포로가 된 프레더릭 로는 이미 상륙해서 소식이 끊어진 채 고생 중인 원정 육군에게 13일 정오를 기해서 모든 군사행동을 중단하고 조선에 항복하라는 서한을 보낸다.

4. 여담



[1] 연합군은 클레르(Claire) 섬이라고 부른다[2] 연합군은 자키느와(Jaquinoi) 섬이라고 부른다.[3] 프랑스 해군은 대부분 수송함대로 있었기에 영종도가 아닌 중국이나 먼 바다 지역에 있다고 추정되며, 전투 장면이 나오는 10권에서 프랑스 군함이 터졌다는 이야기가 없기에 여기선 제외함[4] 연합군 남부 방어선 돌파와 화공을 위한 함대[5] 구 봉쇄돌파선[6] 연합군 서부 방어선 돌파와 화공을 마친 전군이 탈출할 항로를 개척할 함대[7] 제퍼슨 데이비스함과 달리 외교문제 때문에 항로 안내 임무만 수행[8] 작중에서 자세한 수를 밝히지 않음[9] 다만 활대기뢰 병선의 전사자가 상당했으리라고 추정됨.[10] 북부 방어선을 지키던 HMS 디펜스[11] 장갑함을 근접 호위한 함선[12] 연합군에서는 브와제 섬(Boisee Island)이라고 부른다.[13] A섬은 영종도, B섬은 삼목도, C섬은 신도이다. 그리고 세 섬들 사이에 희미하게 보이는 초록색 동그라미가 연합군 정박지로 추정되는 곳이다.[14] 폭이 1~1.5해리이고, 깊이는 가운데는 10~14m 정도지만 그 부분을 빼면 겨우 3.6m 밖에 안 된다. 그리고 이건 만조시의 깊이이고, 간조일 때는 가운데를 제외한 모든 곳이 물이 완전히 빠진 갯벌이 된다.[15] 그런데 9권의 정찰 장면이나 10권 전투 상황을 보면 장갑함의 양 옆에 겨우 원양포함 2척 밖에 없었다.[16] 이미 헤르타함은 강화도 연합군 함대 정박지에 위문을 가장한 정찰을 한 적이 있다.[17] 삼목도~영종도 사이에 있는 수로이자 남쪽 방어선[18] 그래도 장교가 아닌 일반 상선 선장이었기에 그도 완전히 알지는 못했으리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19] 이 정보가 향후 모든 전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20] 원래 주둔지는 군산이었지만 10월 6일에 당진으로 주둔지를 옮겼다고 한다.[21] 연합군의 시야가 좁아질 때[22] 연합군 방어진의 이점인 조수간만의 차를 역이용, 상대적으로 얕은 수로가 제일 깊어질 시기[23] 실제 역사에서 뉴 아이언사이즈함은 남북 전쟁중 남부 기뢰선에게 1발의 활대 기뢰를 맞았음에도 격침되지 않았기에 1발이 아닌 3발을 장착하게 된다.[24] "참상이로다..." '그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정말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참상이었다.'[25] 신도~삼목도 사이의 수로이자 서쪽 방어선[26] HMS 헥터함[27] 연합군 포술장 시점을 보면 조선 수군들이 섬 그림자와 어둠에 이중으로 감춰져 희미한 잔상으로 보였기에 제대로 된 조준조차 힘든 모습을 보인다.[28] 참고로 생존 군함 모두 다 영국 군함이다.[29] 그냥 전투 장면만 보는 사람들이 왜 이양선이라 불리던 서양 상선이 제물포에 그냥 올 수가 있냐고 할 수도 있기에 조금 설명을 붙이자면, 이때 무진경장(후에 서술할 예정)이라는 개혁으로 조선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는데, 이 무렵에 문호개방의 준비차원이기도 하고 관세 수입으로 개혁 자금 확보를 위해 민국인들이 대원군에게 건의하면서 유일한 근대 무역로인 제물포~상하이 노선이 개설되었으며 랜돌프 워든은 이 항로를 통해 조선으로 들어갔다.[30] 워든의 집안은 보통 지주들은 노예들을 부린다는 보편적인 인식과 다르게 노예가 아닌 자유 흑인을 고용하면서 운영하는 중소 지주였으며, 워든은 노예제를 지키기 위해 남부에 선게 아니라, 자기 고향의 동포들에 대한 연민 때문에 남부 해군에 종군했으며, 전쟁 말기에는 굶주리는 남부 병사와 평민들을 위해 밀수선을 운용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