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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에 대한 여담을 정리한 문서.2. 비틀즈 vs. 롤링 스톤즈
1968년, 존 레논과 믹 재거 |
이 두 밴드가 라이벌로 꼽혔던 이유는 인기뿐만 아니라 대조되는 이미지와 특성 탓도 있었다. 먼저 비틀즈가 신사나 모범생의 이미지로 유명했다면 롤링 스톤스는 악동이라는 대조되는 이미지로 유명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비틀즈는 노동 계급 출신이지만 롤링 스톤스는 유복한 중산층 출신이다. 특히 스톤스의 보컬인 믹 재거는 그 유명한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의 경영대학 출신으로, 브라이언 메이, 존 디콘, 로저 테일러와 더불어 록 아티스트 중에서 학력이 가장 높은 사람이다. 그렇기에 실제로 당시 비틀즈는 ‘모범생인 척하는 악동들’로, 스톤스는 ‘악동인 척하는 모범생들’로 불렸었다. 그리고 비틀즈가 다소 팝적인 음악을 발매하거나 스튜디오에서의 실험에 집중한 반면, 롤링 스톤스는 블루스와 로큰롤에 기반한 정통 하드 록 및 블루스 록적인 음악을 발매하거나 라이브 투어를 중시했다.
이렇게 라이벌리가 유명하지만 밴드 멤버들끼리는 서로 음악적인 영향도 자주 주고받고 서로 교류도 자주하는 친한 사이이다. 사실 70~80년대 영국 음악계는 매우 좁아서 웬만한 뮤지션들은 서로 다 안면이 있거나 친한 사이였기도 하다. 하지만 라이벌답게 서로 은근히 디스를 주고받은 적도 많은데, 몇 가지 사례로 존 레논이 믹 재거의 춤이 Faggot스럽다고 디스를 한 적도 있고, 키스 리처즈는 페퍼 상사가 똥같다고 디스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인 2020년에도 폴 매카트니가 롤링 스톤스는 블루스 커버 밴드라는 묘한 말을 남겼고, 이에 대응해 믹 재거는 비틀즈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같은 큰 규모의 공연장에서 공연한 적이 없고 투어 비즈니스가 자리를 잡기 전에 해체를 했기 때문에 롤링 스톤스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묘한 말을 남겼다.
팬들끼리의 관계는 두 밴드의 음악을 같이 향유하는 팬들이 가장 많지만, 가끔 나이가 지긋이 든 팬들끼리는 서로 싸우기도 한다. 국내 록 커뮤니티에서 나이 지긋한 레드 제플린 팬과 딥 퍼플 팬의 키배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된다.
이렇듯 이들의 라이벌리가 너무 유명하다보니까 현재에도 라이벌을 표현할 때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 같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3. 음악적 성향
3.1. 변천 과정
초기 (1963, Love Me Do) | 중기 (1966, Rain) | 후기 (1968, Helter Skelter) |
들어보면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음악의 스타일이 확연하게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비틀즈는 한국에서는 평범한, 인기 많은 로큰롤, 팝 밴드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현실과 매우 동떨어진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로큰롤 밴드로서의 비틀즈의 정체성(머시 사운드)은 1965년까지만 국한되는 것이며 중기와 후기의 비틀즈는 사이키델릭 록, 하드 록, 아방가르드 등 과격한 노래들이 주를 이룬다. 보통 시대별로 나누어 성향이 두드러지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비틀즈는 핑크 플로이드만큼이나 음악적인 성향에서 많은 변화를 거친 록 밴드였다. 다만 핑크 플로이드는 활동 기간만 30년이 넘고, 시드 바렛 체제 / 로저 워터스 체제 / 데이비드 길모어 체제로 나뉘어 음악적인 성향이 변했던 반면, 비틀즈는 데뷔부터 해체까지 겨우 8년 동안에 한 명의 리더도 교체되지 않았음에도 변화무쌍한 음악적 성향을 보였기에 매우 특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상술한 핑크 플로이드를 비롯해 라디오헤드,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 플리트우드 맥, 피쉬만즈 등 극소수를 제외한다면 이렇게 다양한 변화를 거친 밴드는 찾기 어렵다.
<rowcolor=#000> 구분 | 음반 | 주요 장르 |
<rowcolor=#000> 초기 (1962 - 1964) | | 로큰롤 |
<rowcolor=#000> 과도기 (1965) | | 포크 록 |
<rowcolor=#000> 중기 (1966 - 1967) | | 사이키델릭 장르 |
<rowcolor=#000> 후기 (1968 - 1969) | | 당대에 가능했던 대부분의 장르 |
비틀즈의 연대 구분은 흔히 위의 표와 같이 나타난다.
더 간단하게는 1966년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는데, 1966년에 일종의 인식론적인 단절이 일어났다고 보는 시각에 기초한다. 이러한 구분법의 가장 큰 근거는 이 해에 비틀즈가 무대 생활을 그만두었다는 점이다. 투어밴드로서의 생명을 포기하고 스튜디오 밴드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는 1966년을 기점으로 잡은 것. 또한 Revolver와 페퍼상사 이후 비틀즈의 앨범이 통일성과 자기완결성을 지니게 된 것을 근거로 삼기도 한다. 각 나라마다 중구난방으로 발매되던 음반들도 점차 동일한 규격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구분은 1973년 발매된 컴필레이션 앨범인 1962-1966과 1967-1970이 발매되면서 공식적으로도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Love Me Do와 Tomorrow Never Knows를 같은 시기로 묶는 것은 누가 봐도 무리기 때문에 사이키델릭 록 성향이 짙게 드러나는 1966년부터 1967년까지의 시기를 중기로 새롭게 분류해 초기-중기-후기라는 시대 구분을 만들어 냈다. 실제 비틀즈의 음악을 들어보면 Revolver와 초기 비틀즈 음반의 성향은 매우 다르고[3] 마찬가지로 The Beatles의 곡들도 사이키델릭한 성향이 매우 옅어지고 블루스 록과 하드 록 등 다양한 시도들이 이뤄져 페퍼상사 음반과 같은 시기로 묶기 어렵다. 또, 멤버들의 음악적 관계 역시 초기와 후기로만 묶기에는 중기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비틀즈는 초기에는 엘비스 프레슬리나 척 베리, 리틀 리처드, 버디 홀리의 영향을 받은 로큰롤 및 팝 음악 밴드로 시작했다. Please Please Me 음반과 With the Beatles 등 비틀즈의 초기 앨범에서 팝과 로큰롤의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편이며, 이후 이런 경향은 5집 Help!까지 이어졌다.
여기까지가 한국인들이 비틀즈에게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이미지이지만, 1965년 이후로는 비틀즈의 팝, 로큰롤 성향이 거의 사라졌다. 1965년 미국의 시인이자 포크 뮤지션이었던 밥 딜런의 영향으로 마약을 접하고, 작사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으며, 또 밥 딜런의 포크송 성향에 감명을 받게 되었다. 조지 해리슨은 밥 딜런과 사적으로도 친한 관계가 되었고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도 밥 딜런의 영향을 받아 작사에 신경을 쓰게 되었고 이후 나온 작품이 Rubber Soul이었다. 러버 소울은 전 앨범을 통일된 구성으로 채운 최초의 "명반"[4]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때문에 러버 소울 이후로 비틀즈의 중기 음악이 시작된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다만 비틀즈의 사이키델릭한 사운드에 중점을 두는 사람들은 Revolver를 중기 음악의 시작으로 보기도 하는데, 어차피 공식화된 기준은 아니기 때문에 Rubber Soul은 보통 과도기 앨범으로 여겨진다.
러버 소울 앨범 발매 이후 마약의 영향을 받은 록 장르, 즉 사이키델릭 록이 비틀즈 내에서 적극적으로 시도됨에 따라 사이키델릭이 주를 차지하는 비틀즈의 중기 음악이 시작되었다. Revolver 음반의 발매로 비틀즈는 기존의 로큰롤 아이돌 밴드에서 벗어난 가장 실험적인 록 밴드로 거듭났다. 리볼버 내에서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는 단 3개뿐이었고, 현대인의 고독함,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등을 다룬 심오한 주제가 음반의 주를 이뤘다. 또 Yellow Submarine과 같은 동요나, Taxman 같은 사회 비판적인 음악, Love You To 등의 인도 음악도 수록되었다. 기존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에 밀려 많은 노래를 작곡하지 못했던 조지 해리슨은 이 앨범에 처음으로 3곡을 수록하면서 밴드의 주요 작곡가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1967년 발매된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은 320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비틀즈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고, 클래식부터 진보적인 록 음악가까지 거의 모든 평론가들에게서 호평을 받으며 록 음악의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의 갈등으로 사이키델릭 록이 주가 되던 성향이 무너졌고, 영화 Magical Mystery Tour의 실패로 폴 매카트니 주도 체제가 붕괴하면서 이후로는 각 멤버들이 자유분방하게 거의 모든 장르를 시도하는 가장 실험적이고 진보적인 밴드가 되었다. 사이키델릭 록에서 탈피해 각 멤버들이 자유롭게 만든 곡을 컴필레이션 앨범마냥 꽉꽉 집어넣은 앨범인 The Beatles은 바로크 팝부터 하드 록까지 기존에 존재했던 거의 모든 대중음악 장르들을 수록했으며, 또 후기의 음악들에도 영향을 줬다. 헤비 메탈, 펑크 록, 프로그레시브 록, 심지어는 30년 뒤에야 주류를 차지하는 얼터너티브 록의 시초가 되는 등[5] 대중문화 역사상 전무후무한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 앨범 발매 직후부터 1990년대까지는 산만한 구성 때문에 혹평이 주를 이었으나, 얼터너티브 록의 부상 이후 The Beatles 앨범이 가진 혜안이 재평가를 받으면서 점점 평가가 상승했다.
그러나 이토록 자유롭고 다양했던 음악적 성향은 그만큼 비틀즈 멤버들간의 음악적 교감이 떨어지고 있었던 것을 의미했고 결국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은 각각 솔로 앨범들을 준비하면서 밴드가 와해되게 된다. 1969년 마지막 역작인 Abbey Road를 완성한 이후 비틀즈는 1970년 4월 해체되었다.
<rowcolor=#000> 초기 |
<rowcolor=#000> 중기 |
<rowcolor=#000> 후기 |
후기의 악기 사용도 주목할만한데, 초기에는 베이스 기타, 어쿠스틱 기타, 드럼에 가끔 피아노를 치거나 하모니카를 부르는 수준이었지만 1966년 이후로는 현재 기준으로도 매우 혁신적인 다양한 악기를 시도하였다. Revolver 음반에서 역재생과 같은 신기술과, 갈매기 우는 소리 등 다양한 사운드를 시도한 이후, 1967년에는 트럼펫에 리코더, 시타르 등 다양한 악기를 들고와 곡을 만들었다. The Beatles 세션때에는 일부러 망가진 어쿠스틱 기타를 사용하는가하면 새소리, 구두소리까지 음악에 포함시켜 다채로운 악기 성향을 보여줬다.
곡의 구성에서도 비틀즈는 매우 혁신적인 성향을 보였다. 페퍼 상사와 The Beatles 앨범에서 한두곡 정도를 바로 이어지는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애비로드 앨범에서는 아예 여러곡을 이어붙여 하나의 음악으로 만드는 메들리 구성을 보여줬다. 이는 당대 대중문화에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고 핑크 플로이드 등 수많은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3.2. 시도한 음악 장르
자세한 내용은 비틀즈/시도한 음악 장르 문서 참고하십시오.3.3. 레논-매카트니
자세한 내용은 레논-매카트니 문서 참고하십시오.4. 저작권 논란
많은 노래가 저작권 문제랑 직접 맞물리기 때문에[6] 2010년 말까지 전 세계적으로 합법적인 온라인 다운로드가 매우 어려웠다.[7] 곡들의 저작권은 비틀즈 멤버 4명뿐만 아니라 곳곳의 기업, 개인이 나누어 갖고 있다. 마이클 잭슨도 비틀즈 곡 저작권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오노 요코와 폴 매카트니는 이 저작권을 되찾기 위해 손잡고 법정 투쟁까지 벌였으나 결국 판결은 마이클 잭슨의 손을 들어줬다. 이 일 때문에 폴과 마이클의 관계가 나빠지기도 했다고.[8]사실 마이클 잭슨도 저작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볼 여지가 있었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이클 잭슨은 비틀즈 곡 그 자체의 저작권은 가지고 있었지만, 곡의 음원의 저작권은 차마 구매할 엄두를 못 냈던 것. 곡과 음원의 저작권자가 다른 사례는 대중음악 역사상 전무후무할 것이다. 참고로 현재 비틀즈 음악들의 음원은 대부분 애비 로드 스튜디오가 가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비틀즈 음악을 사용하려면 복잡한 방식으로 처리를 해야 한다. 더군다나 마이클 잭슨이 가지고 있던 비틀즈 곡의 저작권은 결국 마이클 잭슨이 나중에 모두 팔아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2016년 2월 22일 유니버설 뮤직에 따르면 29일부터 한국 음원사이트에서 비틀즈의 음반을 스트리밍하거나 다운로드할 수 있다고 한다.
칼 세이건이 보이저에 관련해서 밝힌 일화에서 보이저 호에 실으려고[9] 조지 해리슨이 작곡한 곡인 'Here Comes the Sun'의 저작권을 사러 멤버 4명에게 문의했더니 4명 모두에게 저작권이 없었다고. 물론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법률적 문제를 해결하려니 골치가 아파져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지구를 대표하는 곡이 될 수도 있었음에도 결국 저작권 때문에 못 넣은 것인지라 팬들의 아쉬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대신 NASA는 2008년 북극성으로 존 레논이 작곡한 곡인 Across the Universe를 쏘아올렸다.
이 저작권료는 현재 엄청나게 비싸진 상태로, 대한민국 최초로 광고 음악에 비틀즈 음악 'I Will'을 사서 쓴 결과 4개월에 4만 달러를 지불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건 특별히 싸게 준 거라고 한다. 저작권료가 보편화된 현재는 한 곡당 기본 1억 원 이상으로 저작권료를 줘야 하는데, 이 당시는 저작권 초창기였던지라 저작권료가 낮을 수밖에 없었다.
비틀즈의 첫 싱글 Love Me Do는 사정상 링고 스타가 아닌 앤디 화이트라는 사람의 드럼이 들어갔는데, 이 사람이 저작권료를 받지 못하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 한꺼번에 몰아서 받았는데, 그 사람이 평생동안 번 돈보다 노래 하나 참여해서 나온 저작권료가 더 많았다고 한다.이런 막대한 저작권료 때문에 위에서 설명한 두 영화에서도 모두 커버 곡을 사용했다. 커버 곡이 훨씬 싸서 원곡을 넣으면 제작비가 몇 배로 늘어난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비틀즈의 트리뷰트 밴드인 'The Mentles'의 커버 곡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5. 관계자
- 스튜어트 서트클리프 - 비틀즈의 전 베이시스트.
- 아스트리드 키르헤 - 스튜어트의 애인이자, 비틀즈의 초기 모습을 찍었던 사진가.
- 피트 베스트 - 비틀즈의 전 드러머.
- 브라이언 엡스타인 - 1967년까지 비틀즈의 매니저.
- 앨런 클라인 - 브라이언 엡스타인 사후 비틀즈의 매니저. 비틀즈의 해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있다. 보통 사람들은 오노 요코가 비틀즈 해체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하나, 비틀즈의 팬들은 입을 모아 앨런 클라인을 가장 큰 이유라고 언급한다.[10] 기존 매니저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사망한 이후, 돈을 제대로 만져본적도 없던 비틀즈 멤버들이 너무나도 많은 돈을 잃자, 새로 매니저를 선임해 재산 관리를 하게하자고 합의했다. 그런데 폴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이 앨런 클라인을, 폴 매카트니가 리 이스트먼[11]을 새 매니저로 지지하면서 곯아있던 밴드 멤버간의 갈등이 폭발하였다.
- 오노 요코 - 존 레논의 부인. 일본계 전위예술가. 비틀즈 말기 녹음까지 관연하고 존 레논과 함께 음반까지 발표. 존 레논이 밴드 활동보다는 좌파운동 등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만드는데 영향을 미쳤고, 여기에 인종차별적인 편견이 덧붙여져 비틀즈 해체의 원흉으로 일컬어기도 하였다. 물론 어느 정도는 영향을 끼쳤겠지만, 그녀가 비틀즈 해체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 패티 보이드 - 모델. 조지 해리슨의 전 부인. 에릭 클랩튼까지 포함된 3각관계가 유명.
- 린다 매카트니 - 폴 매카트니의 아내로 비틀즈 해체 이후 매카트니와 함께 윙스의 멤버로 활동하였다.
- 조지 마틴 - 프로듀서. Let It Be를 제외한 모든 비틀즈 음반을 프로듀스했다.
- 필 스펙터 - 프로듀서. 'Let It Be' 음반에서 오케스트라 위주의 사운드를 만들었지만 폴 매카트니와 마찰이 심했다. 2000년대 들어서 폴 매카트니는 필 스펙터가 덧입힌 사운드를 모두 제거한 'Let It Be...Naked'라는 음반을 발매하였다.
- 빌리 프레스턴 - Get Back 세션에 키보디스트로 참여했던 흑인 키보디스트. 원래 비틀즈 곡들의 키보드 연주 녹음은 주로 폴 매카트니가 맡았었지만, Get Back 세션에선 라이브 연주를 원했기 때문에 베이스기타를 연주해야 하는 폴 매카트니 대신 키보드를 연주할 세션맨이 필요해서 선택된 뮤지션이었다. 프레스턴의 키보드 연주에 만족한 비틀즈는 그를 세션맨 이상가는 대접을 해주어 싱글 Get back에서는 비틀즈와 함께 공동 뮤지션으로도 이름을 올려주었다. 이 뮤지션의 솔로 대표곡으로는 'Outa-Space', ‘Nothing from nothing’ 등이 있다. 훗날 링고 스타의 백밴드인 올스타밴드의 일원으로 링고 스타의 순회 공연에 자주 참여하기도 했다.
- 글린 존스 - 프로듀서. 필 스펙터가 프로듀싱을 하기 전에 발매를 거부당했던 'Get Back'(Let It Be)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았다.
- 알란 파슨스 - 페퍼 상사 앨범의 사운드 엔지니어였다. 앨범에 표기는 안돼있지만 'White Album'과 'Abbey Road' 음반에도 참여하였다. 이런 중요한 명반들의 작업에서 얻는 노하우와 실력을 바탕으로 핑크 플로이드의 The Dark Side of the Moon에서 혁신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내었고,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라는 독자적인 프로젝트 음악 활동도 하였다.
- 에릭 클랩튼 - 조지 해리슨과 친구였다. 조지 해리슨이 작곡한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에서 기타를 치기도 하였으며 Here Comes the Sun의 작곡의 동기부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패티 보이드라는 여자를 두고 개막장 사랑싸움을 벌인 적이 있다.
- 롤링 스톤즈 - 비틀즈와 함께 60년대 락음악계의 쌍두마차. 언론에 의해 라이벌 관계가 부각됐었고 실제로도 서로 라이벌 의식도 어느 정도는 있었던 걸로 알려졌으나, 사적으론 꽤 친한 사이였다. 롤링스톤즈의 첫 히트곡인 I Wanna Be Your Man은 레논-매카트니가 써 준 곡이고, 그 후로도 서로의 레코딩에 게스트로 우정 참여하기도 했었다.
- 밥 딜런 - 밥 딜런과 비틀즈는 서로 창조적인 영향을 주고 받은 사이였다. 원래는 어쿠스틱 포크 뮤지션이었던 밥 딜런은 비틀즈의 로큰롤 음악이 가진 활력에 매료되어 기존의 포크에 락을 접목시킨 포크락으로 음악 인생을 전환하게 된다. 비틀즈도 밥 딜런에 자극을 받아 자의식이 강하고 보다 깊이 있는 가사를 쓰기 시작한다. 마리화나도 밥 딜런이 선물로 준걸 계기로 접하게 된다.
- 브라이언 윌슨 - 비치 보이스 역시 비틀즈와 서로 창조적인 영향을 주고 받은 관계다. 특히 폴 매카트니와 브라이언 윌슨이 그러한 관계였다. 초창기엔 서프음악 전문이었던 비치 보이스는 비틀즈의 러버소울 앨범을 듣고 그 완성도와 예술성에 감명과 자극을 받아 자신들도 단순한 서프음악을 넘어선 그러한 명작을 만들어 보겠다고 작정하고 만든게 바로 명반 Pet Sounds 앨범이다. 이 앨범은 다시 비틀즈에 영향을 줘서, 폴 매카트니가 주도한 앨범인 Sgt. Pepper앨범의 사운드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또한 비치 보이스의 불운의 명작 SMiLE에 관한 사연도 비틀즈와 얽힌 것이 많다.
- 마하리시 - 비틀즈가 인도 여행을 하면서 만난 인물. 비틀즈는 명상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고 싶어 했지만, 마하리시는 이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The Beatles 앨범의 Sexy Sadie는 마하라시를 까는 곡이다. 마하라시는 UV의 뮤직비디오에 나왔던 요기 다니엘의 스승이기도 했다.
- 클라우스 부어만 - 함부르크 시절 만난 동료 뮤지션. Revolver 앨범 표지 드로잉이 이 사람의 그림이다. 비틀즈 해체 이후 존, 조지, 링고의 솔로 작업에도 참여했다.
- 빌 해리 - 존 레논의 예술학교 친구로 'Mersey Beat'란 음악 잡지를 만들었다. 비틀즈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만든 잡지였고, 이걸 읽은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연결되어 비틀즈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비틀즈의 탄생과 해체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지켜본 증언자로서 비틀즈 관련 다큐멘터리나 영상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살아 있는 비틀즈 사전이다. 학교서 남들과 전혀 다른 차림새와 행동거지로 다니던 존 레논이 마음에 들어 친해졌다고 한다.
- 마크 채프먼 - 존 레논을 암살한 인물이며 이로 인해 비틀즈의 완전체 재결합을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6. 국내 인식
록 음악이 비주류인 한국에서도 비틀즈는 모든 분야의 본좌로 평가받는 뮤지션이기에 밴드 이름 자체는 매우 유명하다. 국내에서는 록의 입지가 굉장히 좁기에 전 세계적으로 대성공한 레드 제플린, AC/DC 등의 밴드들과, 비틀즈와 동시대에 활동하여 이들의 라이벌이라고 평가받는 롤링 스톤스의 인지도는 매우 낮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퀸[12]과 함께 세대를 막론하고 가장 유명한 록 밴드로 꼽힌다.그런데 한국 대중들은 비틀즈를 록 밴드가 아니라 올드 팝 그룹으로 받아들이는 면이 강하다. 사실 비틀즈에 대해 이름만 알지 제대로는 알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전술했듯이 한국인들은 누구나 비틀즈를 알고 있기는 하지만, 정작 비틀즈의 곡은 소프트한 몇 곡만 알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틀즈가 록 밴드인지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은 편.[13] 중기~후기 비틀즈의 사이키델릭 록, 블루스 록, 하드 록 넘버들은 록덕후들을 제외하면 인지도가 극히 낮다. 게다가 페퍼 상사와 화이트 앨범에 수록된 여러 곡들을 들어도 이게 록이냐고 묻는 사람들도 많다. 이는 대한민국에서의 록 음악의 인식이 헤비 메탈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은 비틀즈가 미국과 전세계에 문화충격과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며 역사를 다시 쓰는 동안 군사정권이 생존을 위한 경제성장에 올인하여 바깥의 일에 귀를 막고 온 국민이 밤낮없이 일만 하던 시절이라 비틀즈가 얼마나 당시에 문화충격이었는지를 체감하지 못한다. 68혁명같은 전세계적인 문화적 격변도 비껴갔으니까.
그래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대 최고의 록 밴드로 꼽히는 밴드답게 록덕후들은 뼛속까지 자세히 알고 있는 밴드이며, 이들 사이에서는 비틀즈 중후기의 곡들을 안 들어봤으면 간첩 취급을 받는 밴드이기도 하다.
보통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비틀즈의 곡은 'Let It Be', 'Yesterday', 'Hey Jude', 좀 더 덧붙이자면 'Ob-La-Di, Ob-La-Da'[14], 'I Will', 'All You Need Is Love'[15] 정도라서 예전에 KBS '신발장'에 비틀즈 신동(하영웅군)이 나왔을 때 비틀즈 곡이 200곡이 된다고 하자 "그렇게 많아?"라고 하는 패널도 있었다. 냉정히 말해 대한민국 일반 대중들이 인식하는 비틀즈는 '옛날에 유명했던, 달달한 선율의 러브송을 부르는 서양 팝송 밴드' 딱 여기까지다. 비틀즈가 록 음악을 한다는 사실에도 어색해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16][17]
한국 케이블 방송사에서 HBO '밴드 오브 브라더스'라는 제목으로 이들을 재현한다는 주제의 방송을 한 적이 있는데, 'Hey Jude'를 부르면서 'Hey Jude ~ 나나나나 ~ 나나나나 나나나나나 ~' 등의 가사만 읊는다든지, 멤버 이름으로 존 매카트니를 댄다든지, 초기 프로필만을 참고해 '폴 매카트니는 구운 돼지고기를 좋아했다고 한다'는 내용을 방송했다든지(폴 매카트니는 현재 채식주의자이다.), 전혀 사전 조사를 하지 않은 듯한 내용만을 내보내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한 마디로, 비틀즈라는 이름과 대표적인 히트곡 몇 곡 정도는 유명하지만 정작 비틀즈 음악의 핵심인 정규앨범들을 알고 찾아 들을 정도의 진짜 팬은 별로 없는 것이 실정이다. 근데 이건 비틀즈뿐 아니라 다른 60년대 뮤지션들도 비슷한 상황이다. 한국에서 서양 록/팝 음악이 본격적으로 들어와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게 70년대부터였기 때문에 그 전인 60년대의 밴드들은 한국의 음악 팬들에게 상대적으로 간과되어 왔다.
애초에부터 한국이 록의 불모지라고 불릴정도로 록의 인기가 없는 나라다. 한국 내에서 록 밴드/록 뮤지션은 퀸, 50년대 대중 문화의 상징인 엘비스 프레슬리 정도만이 인지도 있는 편이고, U2, 레드 제플린, 엘튼 존, 척 베리, 블랙 사바스, 핑크 플로이드, AC/DC, 너바나, 지미 헨드릭스, 섹스 피스톨즈, 롤링 스톤스 등 전설적인 록 아티스트들의 인지도는 밑바닥을 치는 게 한국 음악계의 현실이다. 그나마도 비틀즈는 록 밴드가 아니라 팝 밴드로 사실상 인지도가 더 높고, Helter Skelter 같은 노래를 듣기 전까지는 비틀즈가 락 밴드라는 사실도 어색해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렇기 때문에 비틀즈의 곡중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록 음악이 인기를 얻지 못한 것은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다.
디시인사이드에서는 왜인지 남자 연예인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래도 남자 연예인은 거시적 관점에서는 맞으니까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음악으로 분류된 건 잘못. 비틀즈는 영국 밴드이다. 비틀즈 갤러리에서도 가끔씩 나오는 불평이다.
비틀즈 멤버 중에서 공식적인 내한공연을 한 멤버는 아무도 없었으나, 2014년 5월 28일 폴 매카트니의 내한이 결정되면서 처음(이자 사실상 마지막)으로 비틀즈 멤버가 내한을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건강문제로 2014년 내한공연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2015년, 다시 내한 소식이 들려왔고 내한공연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자세한건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20 폴 매카트니 문서로. 이듬해인 2016년 11월 5일 링고 스타도 내한공연을 가짐으로써 한국은 비틀즈 멤버의 공연 불모지에서 완벽히 벗어났다. 원래는 JTBC 뉴스룸에도 출연해 인터뷰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촛불집회 열기가 한창일 때라 인터뷰는 무산되었다.
비틀즈 곡의 무지막지한 저작권으로[18] 인해 한국에서는 아이튠즈를 빼고는 음원 스트리밍&다운로드 서비스가 불가능했다. 2015년 크리스마스부터 iTunes, Spotify를 비롯한 여러 음원 사이트에서 비틀즈의 음반을 스트리밍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한국에서는 어떤 서비스도 지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먼나라 이야기인줄만 알았다...였는데 하지만 2016년 2월 29일부터 한국의 주요 음원 사이트에서 비틀즈의 17개의 앨범을 서비스 시작한다고 한다. 포함되는 음반은 정규 음반 13개를 포함하고 1, 1962-1966, 1967-1970, Past Masters 이렇게 17개의 음반이라 한다. 비틀즈 커뮤니티는 당연히 흥분모드에 들어갔고, 많은 젊은 층에게 비틀즈를 홍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단, 음원 서비스가 풀리면서 유튜브에 있던 비틀즈 노래들과 라이브 영상들 대부분이 유니버설 뮤직의 요청으로 삭제되는 큰 단점도 생겼다.
그런데 2018년 6월 17일, 유튜브 공식 채널에 모든 앨범이 무료 스트리밍으로 업로드되었다. 이로 인해 비틀즈에 대한 접근성이 훨씬 높아지게 되었다.
2018년 4월부터 2020년 5월 11일까지 MBC 라디오를 통해 조PD의 비틀즈 라디오가 방송했다. 이 프로그램은 비틀즈 전문 방송으로 비틀즈 노래는 물론 비틀즈 멤버들이 개인 활동으로 발표한 곡이나, 다양한 버전의 비틀즈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곡들 혹은 비틀즈에 영향을 받은 곡 등을 소개하는 방송이었다.
여담이지만 폴 매카트니의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비틀즈는 한국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고 한다. 투어를 못한 것은 프로모션을 할 대행사의 부재였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2023년 비틀즈의 신곡 Now and Then이 발표되자 X(구 트위터)에 실트에 오르기도 했다.
7. 기타
-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공식적으로 Beatles[bi:tlz]를 비틀스라고 표기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s[z]는 '스'로 적는다.'라는 규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20] 존 레논도 "존 레넌"이라고 적는다. 그러나 팬들 사이에서는 비틀"즈"와 존 레"논"이 압도적으로 더 많이 쓰인다.
- 특유의 바가지 머리가 비틀즈 초창기의 아이덴티티라고 할 수 있는데, 바가지 머리를 영어로 하면 Mop(대걸레) Top였기에 헤어스타일로 인해 종종 개그 소재가 되곤 했다.
존 : (대걸레를 흔들며) 폴, 너 어떻게 된거야? 뼈만 남아버렸잖아!
폴 : 그건 대걸레야. 나 여기 있다구!
폴 : 그건 대걸레야. 나 여기 있다구!
- 본의 아니게 영국 재정에 보탬이 되었다. 당시 영국이 고세율 정책을 취해 수익의 96~97%를 세금으로 냈다고. 이 점을 리볼버 1번 곡인 'Taxman'에서 깠다. 이 덕분에 1965년 영국 왕실로부터 훈장을 받기까지 했는데, 당사자나 보는 사람들이나 여간 고깝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받은 이유가 외화를 많이 벌어서였다. 즉 문화 활동(음악) 때문에 준 게 아니란 얘기. 게다가 영국의 높으신 분들은 "망나니같은 대중 음악 가수에게 훈장이 웬 말이냐"라며 반발했다고.[21] 존 레논은 반전 운동 등 사회 활동을 하던 중 이 때 받았던 훈장을 반납했다. 전쟁이나 지원하는 왕실이 준 거라서 싫다고 했다.[22] 여왕을 알현한 자리에서 서로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서 여왕을 당황스럽게 하고 존 레논은 '요즘 바쁘지요?'라는 질문에 '아뇨, 쉬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물론 비틀즈 해체 후에도 음악 활동을 계속했으니 그런 것이겠지만, 그 3~4%인 수익이 지금 가치로 수천억에 달한다.
- 의학계에도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CT를 만든 사람(Godgrey Hounsfield, 후에 노벨상을 탄다.)이 비틀즈의 레코딩 회사인 EMI 소속이었다. EMI는 Electric and Music Industries의 약자로, 전자제품 및 음악관련 사업을 영위하고 있었다. 당시 비틀즈로 인해 돈이 넘쳐나는 EMI가 CT 만드는데 자본 투자를 했고, CT는 1960년 경에 연구를 시작하여 1970년대 초에 시제품이 나왔으니 비틀즈가 활동한 시기와 일치한다.#
- 시그니처라기보단 대부분 리켄배커 혹은 에피폰 기타와 베이스를 애용하였는데 투어 시기에는 존 레논은 리켄배커의 325 모델을, 폴 매카트니는 호프너의 바이올린 베이스를 조지 해리슨은 그레치의 듀오 모델을 링고 스타는 블루 옥토퍼스 색상의 루딕 드럼세트를 메인으로 사용했다.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은 1964년 미국 방문 시 리켄배커 사로부터 선물받은 기타를 사용하기도 했다. 폴 매카트니가 공연 때 바이올린 베이스를 애용한 것은 여타 베이스들 보다 무게가 가벼워서 휴대가 간편하고 왼손잡이인 자신에게 좌우 대칭인 바디 모양이 연주하기에 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러버 소울 레코딩 시점 부터 존 레논은 에피폰의 카지노 모델을 폴 매카트니는 리켄배커의 베이스 4001S를 메인으로 사용하였다. 메탈리카의 클리프 버튼이 애용한 것도 같은 모델. 그러나 렛잇비/애비로드 시점의 후반기에는 폴은 호프너 바이올린 베이스로 돌아가고, 현재도 호프너 베이스를 가지고 투어한다.
- 사진은 체코의 관광지로도 유명한 프라하의 레논 벽. 민주화의 상징으로 레논 벽은 유명하다. 1980년 존 레논이 암살당했을 때,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화가와 음악인들이 벽에 초상화와 그의 노래 가사 일부를 그리면서 이후 이 벽은 존 레논, 평화, 서구 문화, 정치 투쟁 등과 관련된 주제의 그림들로 장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혁명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민주화 운동의 근거지가 됐다. 공산당 정부는 철거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은 레논 벽에서 출발하여 웬체슬라스 광장(現 바츨라프 광장)으로 이어지는 인간 띠 시위를 진행했고, 1989년 11월 27일 후사크 공산정부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다. 이런 레논 벽은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에도 등장한다. 홍콩 전역에 십여 개가 넘는 레논 벽이 생겨나고,# 홍콩 외에 토론토, 밴쿠버, 서울, 도쿄, 베를린, 런던, 시드니, 맨체스터, 멜버른, 타이베이, 오클랜드 등 세계의 여러 주요 도시에 응원의 레논 벽이 등장했다.## 그야말로 민주화의 상징이 아닐 수 없다.
- 워낙 유명한 존재이다 보니 비틀즈와 관련된 음모론 및 황당한 루머들도 많다. 대표적인 게 비틀즈의 업적들이 믿기지가 않아서 "딥스에서 만든 조직"이라는 음모론이다. 국내외로 비틀즈가 활동했던 과거부터 유행했던 음모론이며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의 Lucy가 '루시퍼'를 뜻한다고 주장하며 여러가지 헛소리를 늘어놓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존 레논 살해 배후설"과 "폴 매카트니 사망설"이 있다. 전자의 경우 극우파 세력이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한때 좌파성향이었던 존 레논 살해를 조종했다는 건데, 명확한 증거가 있는 얘기가 아니라 단지 몇몇 호사가들의 상상에 불과하다. 후자의 경우 비틀즈 곡들 사이사이에 흩어진 실마리를 모아 짜맞추면 "폴 매카트니는 1966년 말에 이미 죽었고, 지금 그의 자리는 폴 매카트니 닮은 꼴 찾기 콘테스트에서 우승을 거두었던 윌리엄 캠벨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란 말인데, 당연히 뻥이다. 음모론자들은 몇몇 증거도 들이밀지만 어거지성 말장난에 불과하다. 이외에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와 연관이 있다는 둥 요상한 밑밥이 많다.
- 비틀즈 멤버들 주연으로 반지의 제왕이 영화화될 뻔했었다. 반지의 제왕을 인상깊게 읽은 존 레논의 제안으로 1969년에 계획된 프로젝트였다. 존은 골룸, 폴은 프로도, 조지는 간달프, 링고는 샘 역할로 나올 예정이었고 감독은 스탠리 큐브릭으로 정해졌으나, 원작자인 J. R. R. 톨킨이 자기 작품을 영화화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계획단계에서 무산됐다. 또한 큐브릭 감독도 반지의 제왕을 읽은 뒤 영화화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고,[23] 비틀즈와 만남을 가져 그들에게 영화화가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하여 멤버들 역시 이 프로젝트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 존 레논을 제외한 나머지 비틀즈 멤버들은 심슨 가족에서 각자 본인 역할로 목소리 출연을 한 적이 있다. 존 레논은 심슨 가족이 나오기 전에 사망했기에 안타깝게도 그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다. 만약 그가 생존해있었다면 심슨에서 존 레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 영화 아이 엠 샘과 'Across the Universe'는 비틀즈 곡으로 OST 전곡을 채운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Across the Universe'는 작중 등장하는 인물 이름까지 전부 비틀즈 음악 관련으로 해놓아서 비틀즈 팬들을 설레게 했다.
- 세상에서 가장 많이 커버된 아티스트로 현재까지 총 11,600회가 넘는다. 2위가 전통 민요로 7,400회, 3위인 프랭크 시나트라가 2,200회, 4위 엘비스 프레슬리가 1,890회, 5위 스티비 원더가 1,550회인데, 비틀즈의 Yesterday 하나만으로도 2014년 CBS 뉴스 기준, 3,000명 이상의 아티스트가 커버했다고 나온 것으로 보아서 다른 아티스트들의 비틀즈 노래 커버 기록이 가히 압도적이다.#
- 뮤지션들에게 워낙 영향력이 큰 밴드이다 보니 어느 시대의 뮤지션들간에 비틀즈 팬들이 엄청나게 많다. 오아시스같은 경우는 단지 팬 수준을 넘어서 빠돌이 느낌이 날 정도다. 아이러니한 것은 조지 해리슨이 오아시스를 30년 지나면 잊힐 밴드라고 혹평하자 리암 갤러거도 지지 않고 조지 해리슨을 깠다.
- 1967년 페퍼상사 세션 당시 한 무명 사이키델릭 밴드와 EMI 스튜디오에서 잠깐 만나서 대화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밴드가 다름 아닌 핑크 플로이드. 그런데 비틀즈 멤버들은 데뷔조차 하지 않았던 당시의 핑플에 별로 큰 호기심을 가지지 못해서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만나지는 않았다고 한다. 비슷한 사례로 1969년 1월 비틀즈 멤버들이 스튜디오 내에서 데뷔도 안 했던 한 록 밴드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다만 이는 지미 페이지가 야드버즈의 기타리스트로서 이미 음악계에선 유명인사였고, 존 폴 존스 또한 음악계에서 유명한 세션맨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굴된 최초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AL 288-1에게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에서 따온 '루시'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루시를 발견한 날 고인류학자들이 이 노래를 반복적으로 들었다고 한다. 1993년에는 새롭게 발견된 삼엽충 종들에게 비틀즈의 멤버들의 이름을 딴 학명이 지어졌다.
- 현재 비틀즈 멤버 4명의 이름을 딴 소행성이 소행성대의 궤도를 돌고 있다. 2008년 2월 4일에는 NASA가 "Across the Universe"를 전파 형태로 바꾸어 우주로 쏘아올리기도 했다.
- 2021년 10월에 시작된 NASA의 프로젝트 Lucy도 비틀즈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에서 따온 것이다.비틀스 명곡 싣고 우주 탄생 비밀 찾아나선 '루시'# 탐사선 Lucy는 다이아몬드 원반을 싣고 있고, Starship 패널에는 아인슈타인, 칼 세이건, 비틀즈 멤버들의 인용구가 포함되어 있다. 자세한건 비틀즈/평가와 영향력
- 2009년 3월, 리버풀 호프 대학 석사 과정에 '비틀즈 학과'가 개설됐다. 또한 리버풀 알버트 독에는 The Beatles Story라는 비틀즈 박물관이 있다.
-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의 파텍필립 Ref. 2499는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시계 중 하나로 유명하다.# 파텍필립 Ref. 2499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시계로 불리는 모델으로 1년에 10개 미만만 생산되었으며, 35년간 오직 349개만 만들어진 한정판 아닌 한정판이다. 37mm의 사이즈, 최상의 혈통을 가진 이 시계는 첫 번째 시리즈는 경매를 통해 2012년에 약 30억원에 판매되었고, 플래티넘 모델은 1989년에 당시 가격으로 무려 30억원에 판매된 적도 있다. 2023년 4월자 물가로 환산한다면 대략 96억원 5천만원이다. 더군다나 존 레논이 착용한 이 모델은 파텍필립 Ref. 2499 모델 중에서도 2499/100 이라는 레퍼런스를 달고 나온 Ref. 2499의 네 번째 시리즈로 추정된다. 여기에 존 레논 프리미엄까지 붙었으니 그 가치는 상당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미국 드라마 등에서도 자주 보인다. 미드 루시퍼에서는 주인공 루시퍼 모닝스타의 스포일러의 가명이 Penny Lane이었고, 멘탈리스트에서는 주인공 패트릭 제인이 "내가 좋아하는 비틀즈 멤버가 누구인거 같나요?"라는 대사.[24] 2022년 아마존 프라임에서 방영한 "잭 리처" 시즌1 스포일러의 단서가 비틀즈였다.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의 Nobody was really sure if he was from the house at all 대사는 A Day in the Life 가사에서 따왔다. 화이트 칼라에서는 주인공 닐 카프리와 피터 버크의 침묵 씬에서 비틀즈의 곡들이 나오는 등등.. 다양하다.
- 그 외에도 CSI에서 그렉의 오노 요코 발언, 프렌즈에서는 결혼식 축가로 쓰이는 등, 이외에도 Hey Jude의 화음을 따라하며 "이봐, 지미~ 나쁘게 생각마, 더 좋게 만들어 보자", Yesterday의 화음을 넣으며 "Oh, XXXXX came suddenly",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에서 따온 "그녀는 다이아몬드랑 하늘에 있어" Carry That Weight 가사에서 따온 "Fucxxx, you're gonna carry that weight, carry that weight a long time" 이런 대사 등등.. 대중음악의 클래식이다 보니 여러 방식으로 언급되는 듯 하다. 비틀즈 멤버들의 솔로곡도 간혹 나온다. 그러나 국내에선 일반적으로 모르는 편이므로 화음까지 넣으며 가사 그대로가 나와도 뭐가 뭔지 모른다. 한국이 기이할 정도로 비틀즈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 2019년,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실시한 80,000개 이상의 다양한 화음을 포함하는 과학적 연구에서 Ob-La-Di, Ob-La-Da를 과학적으로 가장 완벽한 팝송으로 선정했다. 연구를 위해 연구원들은 1958년에서 1991년 사이에 녹음된 시대의 대표적인 700개의 노래를 수집하고 지원자들에게 그들의 음악과 가사를 제외한 다양한 코드 진행을 연주했다.#
- 비틀즈의 트리뷰트 밴드 중 하나가 내한 공연을 한적도 있다.
- 레고에서 비틀즈 가수들의 얼굴을 담은 레고 아트 비틀즈 31198를 출시했다. 무려 2,933조각이다.
- 1974~1982년까지 일본에서도 비틀즈 아류 밴드 '즈틀비(ずうとるび)'가 활동했는데, 쇼텐 방석 나르미 야마다 타카오가 데뷔해 1977년까지 활동했다. 애니 <마루코는 아홉살>에도 언급되었다.
- 몬티 파이선의 에릭 아이들과 닐 인스가 The Rutles라는 이름으로 비틀즈를 패러디한 개그 소재를 사용 한 적이 있는데 이것을 계기로 실제로 러틀즈라는 밴드를 만들게 되었고 앨범도 여러장 발매했다. 특히 조지 해리슨이 좋아해서 러틀즈의 Roof Top Concert 촬영에 BBC 기자 역할로 까메오 출연했다.
- 죠죠의 기묘한 모험의 동인게임인 디아볼로의 대모험에 등장하는 스탠드 중 착용시 비틀즈의 음악이 나오는 스탠드는 화이트 앨범, 데스 13, 옐로 템퍼런스, 허밋 퍼플의 4개이다. 참고로 이 스탠드들은 메이드 인 헤븐을 합성하는 데 필요하다.
- 명탐정 코난 극장판 '칠흑의 추적자'에서도 후반부에 중요한 밑밥의 단서가 되었다. 앨범 커버까지도 저작권료가 비쌌는지 비틀즈 앨범 커버의 등장인물들을 몽땅 소년 탐정단 멤버로 바꿔치기했다. 이 사진은 아가사 히로시 문서에서 볼 수 있다.
-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에서 신문 기사로 짤막하게 언급되는데 이름은 모두 독일식으로 바뀌어 있다. 밴드 이름도 '디 케퍼'(Die Käfer, 독일어로 딱정벌레라는 뜻)로 바뀌어 있다. 나치가 공연을 허가해주려고 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이름을 개명했다고. 작중에서 Mond Mond ja ja와 Change over day가 디 케퍼의 인기 곡으로 등장하는데, 그중 Mond Mond ja ja는 A Hard Day's Night와 비슷한 느낌이 나게 작곡한 것이라고 한다.[25] 다만 수집 요소에 따르면 앨범에 이스터 에그 형식으로 저항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들어가있다는 소문이 있다고 한다.
- 호주 멜버른에서 나치식 경례를 한 적이 있다.
- 비틀즈를 소재로 한 더 비틀즈: 락 밴드(The Beatles: Rock Band)라는 게임이 2008년에 발매되었다. 하모닉스가 제작하고 MTV가 배급을 맡았다. 비틀즈의 곡을 연주할 수 있는 리듬 게임이다. 적절한 비틀즈 곡 선곡[26]과 전기 영화 같은 현실적인 풍경에서 몽환적인 스타일로 넘어가는 인트로가 인상적이다. 비틀즈가 추구한 음악세계의 변화를 따라가는 듯하다.
- BBC 드라마 닥터 후의 11대 닥터는 이들 중 하나가 되고 싶어 했다. 비틀즈에 들어가야 되니까 죽을 수 없다나?
- 2013년 5월 23일, 링고 스타의 Ringo 2012 앨범 문서화를 끝으로 비틀즈 모든 멤버들의 솔로 정규 앨범이 문서화되었다. 그에 따라 모든 멤버의 음반 목록 문서가 분리되었다.
- 프로필을 보면 알겠지만 비틀즈 멤버 전원의 혈액형이 RH-이다.
-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 중에 비틀즈의 노래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애니메이션이 있다. 이름은 비트 벅스.
- 존 레논의 집에 모인 비틀즈 멤버들이 할일이 없자 다같이 집단자위(!)를 한적이 있다고 한다. 자위하면서 영감을 주는 사람을 서로 외치는데 존 레논이 윈스턴 처칠이라고 외쳤다고한다.#
- 침착해! 스쿠비 두에서는 비틀즈의 폰트로 이루어진 팀 비들스의 보석상이라는 가게가 시즌 1 9화에서 등장했으며, 25화에서는 섀기와 스쿠비가 역관광을 시전하는데, 해체 과정이 섀기가 존 레논 포지션, 스쿠비가 음반 회사 사장, 오노 요코 포지션을 맡아 제대로 역관광을 시전한다.
<rowcolor=#000> 4인조 팝 밴드 비틀즈의 모습.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얼마나 품위 있게 생겼는가? 하지만 그들이 비틀즈를 결성했을 때는 반바지 수영복을 입고 변기를 목에 건 채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그들은 친절한 천사인 런던의 사업가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만났다. 그는 이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그에게 돈이 될 것임을 알았다. 정신병에 걸린 듯한 팬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히스테리, 비명... 사람들은 완전히 사로잡혀 있고, 반달리즘과 폭동은 공연의 말미를 흔히 장식한다. 긴 머리를 한 4명의 사진으로 벽의 4면을 도배하기도 한다. 그래, 춤춰라, 계속 춤춰라! 사회 문제는 다 잊어버리고! 팬들은 세상에서 뭐가 일어나는지 관심조차 없다. 더 빠르고 더 시끄럽게! 다른 사람들은 신경쓰지도 마라! 1966년 소련의 선전 영화 中 |
- 공산권에서 전무후무한 현상을 이끌었던 밴드인지라 소련 정부에서 비틀즈를 비난하는 프로파간다 영화를 만들 정도였다. 내용은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음악으로 돈 버는 장사꾼 취급하고 비틀즈 팬들을 사회 문제에 전혀 관심 없는 정치적 무관심의 극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27] 그러거나 말거나 소련 팬들이 너무나도 열광적으로 비틀즈를 사랑한 덕분에 자유주의, 히피 물결이 소련에 많이 유입되었다는 게 아이러니다.
롤링 스톤 선정 비틀즈 100대 명곡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fff> 2020년 롤링 스톤지가 '100 Greatest Beatles Songs'를 선정. | |
<colcolor=#fff><colbgcolor=#D32531> 1위 | A Day in the Life | |
2위 | I Want to Hold Your Hand | |
3위 | Strawberry Fields Forever | |
4위 | Yesterday | |
5위 | In My Life | |
6위 | Something | |
7위 | Hey Jude | |
8위 | Let It Be | |
9위 | Come Together | |
10위 |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 |
11위 | A Hard Day's Night | |
12위 | 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 | |
13위 | Revolution | |
14위 | She Loves You | |
15위 | Help! | |
16위 | I Saw Her Standing There | |
17위 | Ticket To Ride | |
18위 | Tomorrow Never Knows | |
19위 |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 |
20위 | Please Please Me | |
21위 | All You Need Is Love | |
22위 | Eleanor Rigby | |
23위 | Abbey Road Medley | |
24위 | Happiness Is a Warm Gun | |
25위 | Here, There and Everywhere | |
26위 | If I Fell | |
27위 | You're Going to Lose That Girl | |
28위 | Here Comes the Sun | |
29위 | Can't Buy Me Love | |
30위 | We Can Work It Out | |
31위부터는 롤링 스톤지 참조. | ||
같이 보기 : 비틀즈 10대 명반 |
롤링 스톤 선정 비틀즈 10대 명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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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롤링 스톤지가 독자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를 토대로 'Top 10 Beatles Albums'를 선정. | }}}}}}}}} |
- 롤링 스톤에서 비틀즈 100대 명곡과 10대 명반을 선정한 적이 있었다. 비틀즈 입문자라면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10대 명반은 독자 투표로 치러졌는데 Revolver가 1위를, Abbey Road가 근소한 차이로 2위를 기록했다. 최고의 명곡은 A Day in the Life가 차지했다. 그런데 명곡 리스트는 롤링 스톤의 취향대로 브리티시 인베이전 초기의 로큰롤 음악들이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 한계라고 할만하다. 나무위키에 개별 문서도 만들어지지 않은 If I Fell이나 You're Going to Lose That Girl 등이 Penny Lane, I Am the Walrus, Helter Skelter 등 비틀즈 중후반기를 대표하는 명곡들보다도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레딧 r/indieheads 이용자 투표 Our top ten Beatles songs | |||
순위 | 곡명 | 작사/작곡 | 표수 |
1위 | A Day in the Life | 존 레논, 폴 매카트니[A][B] | 1,167표 |
2위 | Strawberry Fields Forever | 존 레논[A] | 609표 |
3위 | Tomorrow Never Knows | 존 레논[A] | 499표 |
4위 | Happiness Is a Warm Gun | 존 레논[A] | 496표 |
5위 | In My Life | 존 레논[A] | 437표 |
6위 | Something | 조지 해리슨 | 431표 |
7위 | Eleanor Rigby | 폴 매카트니[A] | 369표 |
8위 |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 조지 해리슨 | 341표 |
9위 | Across the Universe | 존 레논[A] | 289표 |
10위 | I Want You (She's So Heavy) | 존 레논[A] | 286표 |
출처 |
- 레딧의 r/indieheads에서 사용자들이 뽑은 "최고의 비틀즈 곡" 순위에서는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비틀즈 초기의 음악은 In My Life 단 한곡밖에 순위에 못올렸고, 중후반기의 음악들이 9곡을 차지했다. 또 롤링 스톤에서는 18위에 그쳤던 Tomorrow Never Knows가 이 투표에서는 3위로 올랐다는 점 역시 주목할만하다. 1위와 2위는 롤링 스톤과 비슷한 결과가 나왔는데, 그중에서도 A Day in the Life는 2위와 2배에 가까운 차이로 1위를 차지했다. 비틀즈 팬들과 평론가들에게서 암묵적으로 A Day in the Life가 최고의 비틀즈 곡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조지 해리슨이 폴 매카트니보다도 더 많은 곡을 10위권에 올렸다는 것 역시 놀라운 점이다.
TheTopTens 투표 Best Beatles Songs | |||
순위 | 곡명 | 작사/작곡 | 득표율 |
1위 | Hey Jude | 폴 매카트니[A] | 10% |
2위 | A Day in the Life | 존 레논, 폴 매카트니[A][B] | 9% |
3위 | Let It Be | 폴 매카트니[A] | 7% |
4위 | Here Comes the Sun | 조지 해리슨 | 6% |
5위 | Yesterday | 폴 매카트니[A] | 6% |
6위 | Strawberry Fields Forever | 존 레논[A] | 5% |
7위 |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 조지 해리슨 | 4% |
8위 | In My Life | 존 레논[A] | 4% |
9위 | Eleanor Rigby | 폴 매카트니[A] | 4% |
10위 | Something | 조지 해리슨 | 3% |
출처 |
- TheTopTens라는 인터넷 투표 사이트에서 진행한 투표도 있는데, 이것은 비틀즈 팬들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청취자들도 투표한 것이기 때문에 레딧의 팬층 중심 투표 결과와는 또다른 결과가 나왔다. 대체로 일반인들에게도 유명한 곡들이 많은 표를 얻었으며, 팬층들에게 잘 알려진 매니악한 노래들은 순위가 다소 떨어졌다.[45] 그럼에도 불구하고 A Day in the Life는 근소한 표차로 2위를 차지했다. 또 특기할만한 점은 바로 조지 해리슨인데, 조지 해리슨은 10개 곡중 무려 3개의 곡을 랭크시켰다.
- 한국에서는 Let It Be가 대체로 가장 인기가 많고, 그 다음을 Yesterday, Hey Jude, All You Need Is Love 등이 잇는다. 한국에서는 폴 매카트니의 팝송이 인기가 많은 대신 비틀즈 중후반기 대부분을 차지하는 록 음악들은 인지도가 매우 낮다.
- 남성 보이밴드라는 점과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에서 방탄소년단과 비교되기도 한다. 다만 BTS와 비틀즈는 음악적 성향[46]은 물론 상업적인 성공, 음악적 업적 등에서 비틀즈가 워낙 넘사벽이라 진지하게 비틀즈와 BTS를 비교하는 사람은 일부 극성 아미를 제외하면 없다. 비틀즈가 "성공한 대중음악 밴드"의 지표가 되면서 발생한 일일 뿐이다. [47]
8. 관련 문서
[1] 보통 1970년대의 레드 제플린 VS 핑크 플로이드, 1980년대의 마이클 잭슨 VS 프린스, 1990년대의 투팍 VS 비기와 함께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라이벌리로 꼽힌다.[2] 당시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이끌었던 밴드 중 비틀즈만큼 빌보드와 UK 차트 1위를 밥 먹듯이 차지했던 밴드는 롤링 스톤스밖에 없었다.[3] 조지 마틴이 리볼버의 데모 버전을 들어보고 깜짝 놀라 아무말도 못했다는 일화도 있다.[4] 러버 소울 이전까지만 해도 히트곡 위주 감상이 일반적이었으나 이후로는 앨범 위주의 감상이 새로운 감상 방식으로 떠올랐고, 후일 핑크 플로이드, 더 후 등의 뮤지션들에게도 큰 영향을 줬다.[5] 커트 코베인도 Nevermind 앨범 제작 당시 이 앨범을 듣고 감명을 얻었다고 한다.[6] 한 예로, 비틀즈의 흩어진 저작권 중 하나를 가지고 있는 소니뮤직은 비틀즈와 메탈리카를 카피/패러디 한 밴드인 비탈리카가 데뷔앨범을 발매할 즈음에 거액의 저작권 소송을 걸기도 했다. 다행히 메탈리카가 나선 덕에 이 문제는 원만하게 해결하긴 했지만 앞으로도 비탈리카 같은 사례가 반복될 것이라는 건 뻔한 사실이다.[7] 그래서 음원 파일을 가지려면 직접 음반을 사다가 Windows Media Player 등의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CD를 복사한 뒤 음원을 추출해내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8] 80년대말에 폴과 찍었던 사진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완전히 나쁜 사이는 아니었고 간간이 투어 공연을 관람하고 사진을 찍을 정도사이는 되었다는 것이다.[9] 먼 미래에라도 보이저호를 발견하게 될지 모르는 외계인에게 지구의 소리를 알려주려고 보이저 호에 탑재된 오디오 속의 음반에 지구의 각종 자연음과 여러 나라 사람들의 말소리 등과 함께 음악도 넣었는데, 주로 클래식 음악들이었고 대중음악 중에선 비틀즈의 곡을 넣으려고 했던 것. 척 베리의 명곡인 Johnny B. Goode도 골든 디스크에 수록된 바 있다.[10] 물론 이 외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폴 매카트니의 독재, 밴드 내 싸움으로 지친 링고 스타, 레논-매카트니에 밀려 자기 곡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던 조지, 점점 달라졌던 존과 폴의 음악 세계, 헤로인 중독에 빠진 존과 요코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중 가장 큰 원인이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사망과 그로 인한 후임 매니저 선임 과정에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팬들이 부정하지 않는다.[11] 폴의 아내인 린다 매카트니의 아버지, 즉 폴 매카트니의 장인이다.[12] 보헤미안 랩소디 영화의 흥행 이후 인기가 특히 높아지긴 했지만 영화 이전에도 한국 포함 동아시아에서는 매우 인기 있었던 밴드였다.[13] 그렇기에 한국의 음악 관련 커뮤니티들에서는 비틀즈가 록 밴드냐고 묻는 사람들도 꽤 있으며, 이러한 사람들에게 Helter Skelter를 들려주면 바로 납득한다는 후문도 있다.[14] 무한도전 식객 특집에서 나온 사과송의 원곡이다.[15] 이마저도 비틀즈 버전이 아니라 커버 곡인 러브 액츄얼리 버전을 많이 안다.[16] 소위 '록 스타' 하면 생각나는 반항적이고 과격하게 소리지르는 이미지와 국내에서 인식되는 비틀즈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17] 사실 강력한 비트와 디스토션 잔뜩 걸린 사운드로 대비되는 하드 록이나 헤비 메탈은 록의 하위장르이다. 록의 뿌리가 로큰롤에 기원한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헤비 메탈/하드록의 대부급 뮤지션 중 하나인 로니 제임스 디오만 해도 초창기에는 부드럽고 달달한 음악을 하던 사람이었다. 50년대를 휩쓴 로큰롤이 격동의 60년대를 겪으면서 비틀즈처럼 원형에 가까운 소프트 록, 반항적인 하드 록으로 분기되었고 당시만 해도 저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없어 비틀즈도 하드록 계열의 음악인 Helter Skelter같은 음악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소프트록과 팝, R&B 등 다른 장르 사이 구분이 희미해지면서 현재 하드록 계열 음악이 록 음악의 주류가 된 것이다. 록의 역사를 보면 마이클 잭슨처럼 팝 아티스트들도 디스토션 기타와 강력한 드럼비트를 활용하며 소프트록과 구분이 없어지는 동안, 하드록 아티스트들은 헤비 메탈, 스레쉬 메탈, 데스 메탈 등 더욱 강렬해지거나 그 와중에 팝 메탈이나 프로그레시브 메탈 등 다양하게 분기되고, 그 외에도 너바나로 대표되는 그런지, 펑크 락 등 굉장히 많은 하위장르가 생겨난다. 물론 비틀즈 자체도 수도 없이 다양한 장르의 록 음악을 해온 밴드이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곡들이 하필이면 초창기 소프트록에 가까운 장르의 곡이 대부분이라 저런 인식이 생긴 것.[18] 이에 대해 +N.EX.T가 표절 시비에 휩싸였을 때 신해철은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음악의 역사에서 오선지에 적을 수 있는 모든 좋은 멜로디는 비틀즈가 싹 긁어가서 더 이상 좋은 멜로디가 나올수 없다."라는 발언까지 한 적 있다.[19] 전 멤버였던 스튜어트 서트클리프와 피트 베스트는 제외.[20] 관련 사이트[21] 1960년대 당시 영국 상류계층 사회는 굉장히 보수적이었다. 얼마나 보수적이었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면 당시 엘리자베스 2세가 가나를 방문하여 외교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폐하께서 어찌 감히 흑인하고 손을 잡고 춤을 춘다는 것인가?'라며 반발하거나 부왕 필립 공이 BBC를 활용하여 왕실의 일상을 보여주고자 했을 때에도 신성함이 없어진다!라며 내각의 극렬한 반대를 받았다. 특히나 당시 영국 사회에서 훈장을 받는 다는 것은 군사적 혹은 외교적 공을 세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양복을 입고 노동자계층에서나 즐기는 시끄러운 음악을 연주하며 귀족들이 지키던 사교 예는 밥말아 먹은 듯한 비틀즈에게 그저 돈 많이 벌었다고 훈장을 주는 것은 상류계층 사회에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총리가 노동당 해럴드 윌슨이었던 점도 작동했다.[22] 참고로 존 레논은 1963년 11월 4일 엘리자베스 2세의 어머니 보우스라이언이 참석한 공연에서 Twist and Shout를 연주하기 전 ' 값싼 좌석에 앉은 분들은 손벽을 치시고, 그렇지 않은 분들은 보석을 흔들어주세요'라고 말하는 패기를 보인적이 있다.[23] 이 당시는 1960년대다. 2000년대 그 반지의 제왕을 생각하면 안 된다. 그때는 변변한 그래픽조차 없었으며, 따라서 일반인보다 훨씬 작은 호빗들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24] 서양 심리학에서 쓰이는 문답법이라고 한다.[25] 참고로 작중에는 The comet tails가 작곡한 Weltraumsurfen(벨트라움서펜, 우주 서핑)이라는 곡도 인기 곡으로 등장하는데, 곡 이름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비치 보이스의 Surfin USA를 패러디한 것이다.[26] 순서대로 A Hard Day's Night(1964), Paperback Writer(1966), Here Comes the Sun(1969), I Am the Walrus(1967). 초반에 지나가듯 Maxwell's Silver Hammer가 옷 드라이 가게 이름으로, Back in the U.S.S.R.가 노래 안의 비행기 구동음으로 등장한다. 초반 연출은 영화 A Hard Day's Night의 장면을 그대로 오마쥬하였다.[27] 정작 비틀즈 멤버들은 정치, 환경, 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의 사회 운동으로 유명하다. 특히나 존 레논은 현재까지도 아나키즘과 평화주의의 대명사로 꼽힐 정도다.[A] 레논-매카트니 명의.[B] 존 레논의 비중이 크다.[A] [A] [A] [A] [A] [A] [A] [A] 레논-매카트니 명의.[A] 레논-매카트니 명의.[B] 존 레논의 비중이 크다.[A] [A] [A] [A] [A] [45] 가령 Tomorrow Never Knows는 레딧에서는 3위였지만 여기서는 22위로 떨어졌고 Happiness Is a Warm Gun은 순위권에조차 들지 못했다. 반면 Penny Lane, I Am the Walrus 등 해외에서 유명한 비틀즈 곡들은 높은 표를 받았다.[46] 비틀즈는 로큰롤 밴드에서 시작해 포크 록, 사이키델릭 록을 거쳐서 하드 록, 헤비 메탈, 펑크 록 등 매우 많은 록 장르를 시도한 반면 BTS는 상대적으로 한정된 장르에 집중되어 있는 모습을 보인다.[47] 다만 동양인으로서는 미국에서 전례 없는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매우 주목받는 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