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출신의 미국 군인에 대한 내용은 존 폴 존스(군인)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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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폴 존스 John Paul Jones | |||
<colbgcolor=#DBC9B7><colcolor=#333> 개명 전 이름 | 존 리차드 볼드윈 John Richard Baldwin | ||
출생 | 1946년 1월 3일 ([age(1946-01-03)]세) | ||
잉글랜드 켄트 시드컵[1]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음악가 | ||
소속 | (1968 – 198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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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모린 존스(1967년 결혼~현재) | ||
자녀 | 딸 재신다 존스 딸 타마라 존스 딸 키에라 존스 | ||
신체 | 173cm | ||
재산 | 약 $90,000,000[2] | ||
활동 기간 | 1961년 – 현재 | ||
사용 악기 | 베이스 기타, 건반, 만돌린, 기타, 콘트라베이스 등 | ||
장르 | 하드 록, 블루스 록, 헤비 메탈, 포크 록, 프로그레시브 록, 사이키델릭 록, 레게, 로큰롤[3] |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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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록 밴드인 레드 제플린의 베이시스트이자 키보디스트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동시대의 존 엔트위슬, 후대의 존 디콘 등 여러 베이시스트들처럼 뒤에서 묵묵히 밴드를 받쳐주는 스타일의 베이시스트였다.
또한 그는 베이스와 건반 외에도 수많은 여러 악기들을 수준급으로 다루었기에 레드 제플린의 음악이 더욱 다채로워지고 화려해지는 데에 상당 수준 기여하였다. 그렇기에 해외 팬들은 존 폴 존스가 없었다면 레드 제플린도 없었다고 회자하기도 한다.
레드 제플린 해체 이후 현재까지 록 음악에 국한하지 않고 재즈나 클래식 등 여러 장르들도 다루면서 솔로 활동을 하고 있다. 2019년에는 솔로 활동 투어의 일환으로 레드 제플린 멤버 중 최초로 내한 공연을 개최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2. 생애
존 폴 존스는 1946년 켄트 주 시드컵에서 태어났다. 존스의 어렸을 적 이름은 존 폴 존스가 아닌 ‘존 리처드 볼드윈’이었다.[4] 그의 아버지는 악단 뮤지션으로, 레드 제플린의 다른 멤버들처럼 존스도 중산층 출신이었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나중엔 저음에 매력을 느껴 베이스를 잡게 된다. 일찌감치 여러 악기를 배웠기 때문에 그가 다룰 줄 아는 악기는 10개가 넘는다고 한다.[5][6]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는 16살이라는 어린 나이때부터 세션뮤지션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존 폴 존스는 18살에 데카 레코드의 전속 세션 뮤지션이 된 후 1968년까지 활동하면서 영국 음악계의 1류 세션맨으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그는 롤링 스톤스, 더 후 등 수많은 밴드들의 세션 연주를 해 주면서 지미 페이지, 제프 벡, 키스 문 등의 유명한 뮤지션들과 친분을 맺기도 했다. 1966년 키스 문이 더 후에서 잠깐 탈퇴했을 때는 이들과 함께 음악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1968년, 존 폴 존스의 아내는 지미 페이지가 새 밴드 멤버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존스에게 밴드 활동을 할 것을 권유했고, 같은 세션 뮤지션 시절 때부터 존스와 음악 활동을 같이 하는 등 친분을 유지하던 지미 페이지는 존스의 능력을 높이 사[7] ‘뉴 야드버즈’로 영입하게 된다.
이후의 행적은 문서 참조.
3. 음악적 역량
3.1. 베이시스트로서
Ramble On 베이스 섹션 | 1999년 베이스 솔로 |
존 폴 존스는 세션 출신답게 음악 장르에 따른 연주 스타일의 변화를 정확히 이해하고 적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레드 제플린처럼 여러 장르를 시도한 밴드에서는 이러한 능력이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Communication Breakdown, Whole Lotta Love 같은 헤비 메탈 스타일에선 화려한 기타 연주가 더욱 부각되도록 근음 위주의 비교적 단순한 연주를 보여준다. 하지만 Ramble On같은 포크 록이나[9] You Shook Me같은 블루스 록처럼 기타의 역할이 한정된 경우[10] 여러 스케일을 이용한 멜로디 라인을 얹어서 곡의 다이나믹을 살려내는 센스를 보여준다. 특히나 The Lemon Song 등의 노래에서는 아예 기타가 아니라 베이스가 곡을 주도해 나가기도 한다.[11] 이 외에도 레게, 파워 발라드, 사이키델릭 록 등 레드 제플린이 시도했던 모든 장르들 속에서도 그의 베이스는 항상 부족함 없이 음악을 지탱하고 있었다.
레드 제플린 해체 이후, 그는 이전의 밴드 지향적인 연주 스타일에서 약간씩 벗어나는 시도를 몇차례 보여줬다. 특히 솔로 활동 중에는 5현 복현 베이스[12]를 이용한 화려한 솔로 연주를 보여준 적도 있다.솔로앨범 Zooma에 수록된 곡 Tidal
이런만큼 존 폴 존스에게서 영향을 받거나 그의 팬인 베이시스트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퀸의 존 디콘, 러시의 게디 리, 너바나의 크리스 노보셀릭, 크리스 드레야,[13] 밴 헤일런의 마이클 앤소니, 에어로스미스의 톰 해밀턴 등이 있다.
3.2. 키보디스트로서
딥 퍼플의 존 로드 등과 더불어 하드 록 계열의 키보디스트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중 하나다. 실제로 록 음악의 팬들이 꼽는 "최고의 키보디스트" 순위에서 10위권 안에는 꼭 들어가고, 프로그레시브 록 키보디스트들을 제외하면 거의 다섯손가락 안에 꼽는 수준이다.2집 이후 레드 제플린의 음악적 스펙트럼이 넓어지면서 키보디스트로서의 비중이 높아졌는데, 존 폴 존스는 키보디스트로서의 자질도 높게 평가받는다. 베이스를 연주할 때의 얌전한 스타일과 달리 솔로연주에서는 화려한 테크니션을 뽐내며 기타 중심으로 돌아가던 레드 제플린의 곡들 중에서도 지미 페이지 대신 곡의 전개를 이끌어가는 곡이 많다.[14] 8집 In Through the Out Door에서는 지미 페이지가 마약으로 쇠약해져 로버트 플랜트와 존 폴 존스가 주도권을 잡고 작업했었는데, 그렇기에 All My Love 등 8집의 여러 곡들에서는 존 폴 존스의 키보디스트로서의 역량이 아주 잘 드러난다.
키보드 연주도 훌륭하지만 키보드에서 나오는 여러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적재적소에 적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Kashmir에서 들려주는 오케스트라 못지않은 웅장한 현악 사운드, No Quarter에서 들려주는 깊은 울림을 지닌 사이키델릭 사운드, Trampled Under Foot에서 들려주는 펑키하고 신나는 사운드, Hot Dog에서 들려주는 컨트리 사운드 등 지미 페이지의 기타보다 앞에 나서서 곡의 진행을 이끌어가는 특출난 사운드적인 안목을 보여준다.
3.3. 그 외
2000년 Going to California의 만돌린 연주 |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Going to California에서 사용한 만돌린일 것이다. 이 곡같은 경우에는 베이스 때와 달리 곡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데, 만돌린 특유의 청량하고 맑은 음색을 십분 활용해낼 수 있는 멜로디와 코드를 지미의 기타 반주 위에 얹어 캘리포니아에서 만난 여성을 찾아 떠난다는 곡의 낭만적인 주제를 더욱 부각시켰다.
이렇게 악기라면 모두 다룰 것 같은 그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보컬. 예시를 들자면 The Battle of Evermore 라이브가 있을 것이다. The Battle of Evermore는 원래 페어포트 컨벤션의 샌디 데니가 피쳐링한 곡이다. 하지만 라이브로 부를 땐 폴이 샌디 데니의 파트를 대신 부르는데, 맥없고 힘빠지는 목소리의 불안정한 보컬을 보여주었다.[15]
3.4. 작곡가로서
존 폴 존스는 다른 레드 제플린 멤버들처럼 작곡과 편곡에도 일가견이 있기에, 대다수의 레드 제플린의 히트곡들은 플랜트-페이지, 존 본햄뿐만 아니라 존 폴 존스의 손을 거쳐서 나왔다. 특히 상술했듯이 8집에서는 존 폴 존스가 작곡 주도권을 잡고 앨범을 작업했는데, 8집 또한 평론적으로는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듯이 작곡 능력또한 매우 출중했다.4. 여담
청년기의 폴 |
- 청년기의 레드 제플린 멤버들이 다 그렇지만 준수한 외모를 보유하였다. 그럼에도 가정을 꾸린 폴은 그루피를 피하며 향락적으로 생활하지 않았다. 폴처럼 가정을 꾸리고도 그루피들과 어울리고 마약을 복용한 로버트와 비교되는 부분. 그리고 성격도 내성적이어서 앞으로 잘 나서지 않았다. 레드 제플린의 인기가 절정이던 시절에는 드물게 여성들과 어울렸다고 하지만 지미와 로버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폴과 놀았던 여성들의 정체는 여성이 아니라 여장남자라고. 그루피를 멀리한 것과 마찬가지로 레드 제플린 멤버들 중에서 술과 마약을 멀리한 유일한 멤버 역시 폴이다.
- 한창 레드 제플린이 잘 나갔을 때,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헤어 스타일을 자주 바꿨다고 한다.[16] 그는 당대 초인기 록밴드의 멤버라는 셀럽으로서의 삶과, 도시 거리를 마음 편하게 산책할 수 있는 일반인으로서의 삶 모두를 즐겼다고 한다. 여러모로 굉장히 영리했던 인물.[17]
- 레드 제플린의 멤버들은 장난치는 걸 좋아하고 즐겼지만 폴에게는 장난을 삼갔다. 레드 제플린 멤버들이 폴이 자는 방에 물을 틀어놓아 물바다로 만들었는데 옷이 모두 젖은 폴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그 후로 멤버들은 폴에게 장난을 삼갔다.
- 위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내성적 성격이 많다는 베이시스트의 스테레오타입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한 성격이다. 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야 당대에 가장 화려한 스타였고, 그 둘에 비해서는 다소 조용한 편인 존 본햄 역시 친구들과 장난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는걸 보면 단연 레드 제플린 멤버 중에서 가장 과묵한 인물이라 할수 있다. 또한 한 인터뷰에서는 멤버들이 라이브 때 무대 앞 쪽으로 나와서 조명도 좀 받으라며 애정어린 농담을 했었고, 자기도 시도해 봤지만 공연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게 되고 거기가 가장 좋다고(...) 한것을 보면 애초에 스타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것에 관심이 없는 듯 하다.
- 70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임에도 동안을 유지하는 중이다. 그리고 로버트와 마찬가지로 금발에 벽안이다.
- 1960년대 유명했던 세션맨답게 여러 음악가들과 친분을 맺었다. 대표적으로 폴 매카트니, 피트 타운젠드, 믹 재거, 키스 문, 제프 벡 등이 있다. 특히 폴 매카트니와는 최근에도 같이 공연을 할만큼 돈독한 사이인 듯하다.
- 힘든 투어 스케줄과 가족과 오래 떨어져있어야 한다는 스트레스, 그리고 서로 가까웠던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 사이에서 소외되어 지미가 자신을 그냥 세션맨으로만 취급한다는 섭섭함 때문에 1973년과 1976년에 비공식적으로 그룹을 탈퇴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존 본햄의 설득으로 복귀하여 계속 남게 되었다. 만약 존 폴 존스가 공식적으로 탈퇴를 선언했다면, 존 본햄이 사망하자 의리를 택해 해체를 선언한 지미 페이지였기에 레드 제플린은 더 일찍 해체됐을 수도 있었다는 의견도 일부 있지만, 실제로 해체되진 않았을 것이다. 지미 페이지가 레드 제플린 연주에서 존 폴 존스를 존 본햄만큼 대체 불가능 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중요하게 여기진 않았고[18], 사실 존 본햄이 사망한 1980년은 레드 제플린이 이미 창작력도 예전같지 않고 음악계에 디스코, 펑크, 뉴웨이브 등 새로운 세대의 음악이 득세하며 레드제플린은 하락세였던 반면, 존 폴 존스가 일시 탈퇴했던 1970년대 중반경은 제플린의 한창 전성기여서 상황도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 2021년 현재까지 레드 제플린 멤버 중 유일하게 내한 공연을 한 뮤지션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1] 현재는 런던 벡슬리 소속.[2] # 한화 약 1,200억원.[3] 소속 밴드였던 레드 제플린이 워낙 많은 장르를 다루었다보니 존 폴 존스 또한 수많은 장르의 곡들에서 베이시스트 및 키보디스트 등으로 활약했다.[4] 존스는 자신의 이름에 음악가로서의 카리스마가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밥 딜런 처럼 세션맨 시절에 존 폴 존스로 개명했다. 존 폴 존스는 그가 감명깊게 본 영화제목에서 따온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존 폴 존스는 실존인물로 미국 독립전쟁 당시 영국과 싸운 미국의 독립영웅이다.[5] 실제로 라이브를 보면 여러 개의 악기를 세워놓고 연주하는 존스를 볼 수 있다.[6] 뒤에 언급되겠지만, 이로 인해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를 꼽을때 존 폴 존스의 이름이 항상 거론된다.[7] 여러개의 악기를 수준급으로 다루는 존스가 밴드의 사운드 지원에 탁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8] 다만 너무 조용하고 묵묵하게 연주해서 녹화 카메라에도 안 잡히던 존 디콘과는 달리, 존 폴 존스와 존 엔트위슬은 기교가 많이 들어간 과격한 속주도 자주 연주하였기에, 카메라에 자주 잡혔다. 이를테면 1970년 로얄 알버트 홀에서 한 라이브에서 지미 페이지와 마주보고 리듬타면서 연주하던 장면이 있다.[9] 사실 Ramble On은 Stairway to Heaven처럼 파트별로 장르가 다른 곡이다. 이러한 레파토리는 레드 제플린이 꽤나 많이 써먹던 구조이다.[10] 코드 연주가 대부분이거나(Ramble On) 블루스 스타일의 멜로디 연주가 대부분이거나(I Can't Quit You Baby)[11] 이 곡은 블루스 베이스의 교과서와 같은 곡으로 수많은 베이시스트들의 찬양을 받고 있다.[12] 5개의 현에 옥타브 간격으로 한줄씩 더 겹친 형태. 사실상 10현 베이스라고 보면 된다.[13] 야드버즈의 멤버였다.[14] 레드 제플린의 No Quarter와 The Rain Song, Kashmir, Carouselambra 등은 그의 환상적인 키보드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명곡이다.[15] 다만 해당 곡의 음이 높다는 점과 샌디 데니가 상당한 미성의 보컬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잘 소화하지 못한 것이 당연했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2001년에는 That's the Way의 보컬을 수준급은 아니더라도 꽤 괜찮게 커버하기도 했다.#[16] 그래서 레드 제플린의 연도별 활동 사진을 보면, 다이나믹한(...) 존스의 스타일 변화가 눈에 띈다.[17] 이와는 대조적으로 퀸의 베이시스트 존 디콘은 한때 기차를 이용해서 스튜디오로 출퇴근했는데, 외모에 아무 변화를 주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디키 옹의 외모가 많이 평범한 탓이기도 하지만...[18] 같잖게 여겼다는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존 본햄 "만큼"은 아니었다는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