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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초창기 (1968년 – 1969년)
2.1. 1965년 - 1968년 9월 : 뉴 야드버즈에서 레드 제플린으로2.2. 1968년 10월 - 1969년 3월 : Led Zeppelin의 발매와 첫 미국 투어2.3. 1969년 4월 - 1969년 11월 : 끝 없는 북미 투어, 2집의 제작
3. 전성기 (1970년 – 1973년)3.1. 1969년 12월 – 1970년 11월 : 통나무 집에서 탄생한 어쿠스틱 포크 앨범3.2. 1970년 12월 – 1971월 11윌 : 이름 없는 앨범의 발매3.3. 1971년 11월 – 1973년 10월 : 그 노래에는 변함이 없다
4. 과도기 (1973년 – 1977년)5. 황혼기 (1977년 – 1980년)5.1. 1977년 2월 – 1980년 12월 : 마지막 앨범의 발매
6. 해체 (1980년)7. 재결성을 위한 노력 (1981년 – 2007년)7.1. 1985년 : 라이브 에이드7.2. 1988년 : 애틀랜틱 레코드사 40주년 기념 공연7.3. 2007년 : Celebration Day7.4. 2007년 이후 재결성에 대한 논의
8. 이후의 이야기 (2007년 – 현재)9. 부록10. 참조 문헌1. 개요
영국의 록 밴드 레드 제플린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2. 초창기 (1968년 – 1969년)
2.1. 1965년 - 1968년 9월 : 뉴 야드버즈에서 레드 제플린으로
▲ 1967년, 야드버즈의 모습. 왼쪽 아래 사람이 지미 페이지이다. |
▲ 야드버즈를 비롯한 영국 음악가들의 소속 밴드들을 정리한 표. 잘 보이지 않으면 링크 참조. |
1965년, 야드버즈의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이 탈퇴하자, 밴드 프로듀서에 의해 클랩튼의 후임 기타리스트으로 지미 페이지가 추천되었다. 지미 페이지는 당시 런던 록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세션 기타리스트였던만큼 매우 바빴기에, 자리를 친구 제프 벡에게 자리를 양보했지만, 1년 뒤인 1966년 폴 샘웰스미스가 탈퇴하자 지미 페이지는 임시 베이시스트로 밴드에 영입되었다. 처음에는 임시 베이시스트였지만 음악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기타리스트였던만큼 얼마 안가 제프 벡과 공동으로 기타를 맡게 되었다. 제프 벡 시기 야드버즈는 이른바 야드버즈 최대의 전성기라고 불렸던 때다. 크림과 함께 늦깍이로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대열에 합류하였고, 이때의 일들은 미국인들에게 지미 페이지라는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는 크림과 플리트우드 맥, 존 메이얼 앤 더 블루스 브레이커스 등을 시작으로 실력 있던 세션 음악가들끼리 슈퍼 밴드를 만드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런 유행에 따라 1967~8년경, 지미 페이지는 더 후의 멤버였던 존 엔트위슬과 키스 문에게 슈퍼밴드 하나를 만드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멤버는 지미 페이지와 제프 벡이 리드/리듬 기타와 보컬을 맡고, 존 엔트위슬은 베이스를, 키스 문은 드럼을 맡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 후에서의 활동에 만족하고 있었고 로저 달트리, 피트 타운젠드와 큰 갈등도 없었던 엔트위슬과 문은 밴드 결성을 거부하고 "만약 너네가 슈퍼밴드를 만들면 납으로 만든 비행선(Lead Zeppelin)처럼 추락할거야!"라고 농담을 던졌다. 이때 나온 "Lead Zeppelin"은 후일 밴드의 명이 된다.
시간이 흘러 제프 벡이 탈퇴하고, 1967년 이후 급작스럽게 록씬의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1] 야드버즈의 인기가 시들해졌다. 시들어가는 밴드의 인기 때문에 대부분의 멤버들은 야드버즈를 탈퇴했고 지미 페이지의 친한 친구였던 크리스 드레야[2]와 지미 페이지만이 야드버즈를 지키게 되었다. 지미 페이지는 5년간 존속된 밴드를 살리고 싶어서 크리스 드레야와 함께 새 멤버를 모집하고 나섰다. 그가 처음 보컬로 고려한 인물은 테리 리드(Terry Reid)였는데, 테리 리드는 밴드 오디션도 보기 전에 리드 싱어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대신 테리 리드는 버밍엄에서 활동하고 있는, 죽여주게 노래를 잘 부른다는 로버트 플랜트라는 가수를 추천했다.
1968년 7월 20일 역사적인 플랜트-페이지의 첫 만남이 성사되었다. 이날 저녁 지미 페이지는 야드버즈의 매니저 피터 그랜트와 함께 버밍엄 사범대학교의 공연장으로 가서 로버트 플랜트의 공연을 감상했고, 로버트 플랜트같은 뛰어난 보컬리스트가 왜 아직까지도 크림과 같은 유수의 슈퍼밴드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지 않는 것인지 의문을 품었다. 페이지는 플랜트가 성질이 몹시 더러운 사람이라 누구도 함께하지 않는 음악가라고 생각해, 로버트 플랜트에게 자신의 보트 하우스[3]에서 며칠 같이 지내자고 제안했다. 며칠 간 동거를 한 이후 페이지는 로버트 플랜트가 성질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사교적이고 유쾌하며, 배려심 넘치는 좋은 친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로버트 플랜트는 아직까지 아무도 발굴하지 못해서 어떠한 메이저 밴드의 리드 싱어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지미 페이지는 로버트 플랜트를 밴드에 영입하기로 결정했다.
로버트 플랜트는 드러머를 찾는데 난항을 겪던 지미 페이지에게 존 본햄을 소개시켜줬다.[4] 버밍엄의 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존 본햄은 버밍엄 일대에서는 꽤 유명한 드러머였다. 그러나 풋풋한 시골 청년이었던 존 본햄은 런던 생활에 익숙하지 않아서 처음에는 밴드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지미 페이지와 밴드의 매니저 피터 그랜트가 내놓은 해결책은 무려 45통이 넘는 편지를 매일같이(...) 버밍엄에 있는 존 본햄의 집에 부치는 것이었고, 로버트 플랜트까지 합세하여 존 본햄에게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다. 결국 지치다 못한 존 본햄은 일주일 뒤 밴드에 가입한다는 전보를 보냈다.
그렇게 보컬과 드럼이 정해진 상태에서, 지미 페이지는 베이시스트로 존 폴 존스를 섭외하기로 결정했다. 지미 페이지는 피아노, 신스, 베이스 기타, 오르간, 하모니카 등을 모두 다룰 수 있는 브라이언 존스나 폴 매카트니 같은 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를 원했지만, 기존 베이시스트였던 크리스 드레야의 피아노 실력은 정말 형편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크리스 드레야는 사진 작가 활동에 더 관심을 보여 야드버즈를 탈퇴할 생각이었다[5]. 존 폴 존스와 지미 페이지는 이미 1960년대 초중반부터 영국에서 꽤 유명한 세션 멤버였기 때문에 서로 친분이 있던 사이였다고 한다. 로버트 플랜트를 만나기 딱 하루 전, 지미 페이지는 존 폴 존스에게 밴드에 가입하라는 전보를 보냈고, 몇 주 이후 존 폴 존스가 이를 승낙함에 따라 레드 제플린의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 라인업 완성 후 극초창기에 찍은 사진. |
라인업이 완성된 직후 "야드버즈"에서 "뉴 야드버즈"로 이름을 바꾼 밴드는 스칸디나비아 공연을 나섰다. 지미 페이지는 홍보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로버트 플랜트에 따르면 완벽한 적자 공연이었다고(...). 하지만 이 스칸디나비아 공연은 뉴 야드버즈라는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크리스 드레야는 "뉴 야드버즈"라는 이름은 너무 밋밋하고 홍보 능력이 떨어진다면서 지미 페이지에게 밴드 명을 바꿀 것을 요구했다.[6] 이때 지미 페이지의 뇌리에 1966년 존 엔트위슬, 키스 문과 나눈 농담이 떠올랐고, 밴드 명은 "Lead Zeppelin"이 되었다. 여기서 Lead는 "납"이라는 뜻인데 영국식 발음으로는 "레드"라고 읽지만, 미국식 발음으로는 "리드"라고 읽기에, 미국 리스너들이 이름을 잘못 읽을 것을 우려한 피터 그랜트 때문에 "Led"로 바뀌었고, 그렇게 우리가 아는 "Led Zeppelin"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2.2. 1968년 10월 - 1969년 3월 : Led Zeppelin의 발매와 첫 미국 투어
▲ 1969년 데뷔 후의 레드 제플린. |
스칸디나비아 공연을 끝낸 레드 제플린의 멤버들은 곧바로 1집의 녹음과 프로듀싱 과정에 착수하였다. 야드버즈를 통해 지미 페이지가 번 수익은 0파운드(...)였기 때문에, 지미 페이지는 세션 플레이어로 활동하며 번 돈을 가지고 1집 녹음을 할 스튜디오를 대여했다고 한다. 이 당시 지미 페이지의 주머니 사정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녹음은 약 30시간만에 끝이 났다. 이후 프로듀싱 과정까지 다 합쳐 앨범을 발매하는데 든 비용은 1,700파운드 정도로 이는 모두 페이지의 사비로 충당되었다.
1969년 1월 12일, 레드 제플린의 역사적인 1집인 "Led Zeppelin"이 미국에서 발매된다. 앨범은 1969년 2월 2주차에 빌보드 99위로 차트에 올랐으며, 이는 그 어떠한 야드버즈의 앨범과 비교해봐도 성적이 준수한 것이었다. 1집의 발매 직후 밴드는 미국 투어에 나섰다.[7] 레드 제플린은 1968년 보스턴에서 첫 공연을 한 뒤, 12월 23일 LA, 1월 초순경 덴버 공연을 한 다음, 동부로 날아가 플로리다와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다시 라이브 연주를 선보였다. 스칸디나비아 공연도 굉장히 훌륭한 연주였지만, 미국에서의 공연은 그야말로 레전드였다고 한다. 당초 공연은 한시간 정도 분량이었지만 흥에 취한 멤버들이 3시간이나 연주를 했고, 연습도 안한 곡을 즉흥 잼 연주하였다. 그것도 2시간 동안이나. 한 멤버가 좋아하는 곡[8]을 연주하면 그 뒤를 따라 다른 멤버들이 아무렇게나 어울리는 연주를 하는 식이었다. 이 공연이 끝난 이후 피터 그랜트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멤버들을 감싸안았다고 하며, 공연을 본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레드 제플린의 헤비한 하드 록 곡들이 입소문을 타게 되었다.
레드 제플린이 입소문을 타며 미국 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되자 3월에는 빌보드 12위에 오르는 엄청난 성과를 냈다. 당시 제프 벡 그룹이 냈던 앨범 "Truth"의 피크 성적이 빌보드 15위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3월 10일에는 Good Times Bad Times 싱글을 발매했는데 이 곡 역시 라디오 시청자들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3월 22일 1집은 영국에서도 발매되었는데, 비슷한 시기 영국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린 레드 제플린의 공연 이후 영국 리스너들 사이에서도 레드 제플린의 입소문이 쫙 퍼진 덕에 UK 앨범 차트에서도 6위의 피크 성적을 기록했다.
Led Zeppelin I에서 멤버들이 보여준 헤비 블루스의 사운드는 미국인들에게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비록 미국만큼의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으나, 영국에서도 하드 록 리스너들을 사이로 흥행하였다. Communication Breakdown 등의 곡은 현대에 들어서는 최초의 헤비메탈 곡이라는 찬사를 받으며[9] 평론적으로 고평가받고 있으며, 사이키델릭한 음악성을 듬뿍 끼얹은 Dazed and Confused, Your Time Is Gonna Come 등의 곡도 큰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미국 평론가들 사이에서 1집은 혹평을 받았다. 특히 롤링 스톤은 레드 제플린을 저평가하며, "로버트 플랜트는 맥락없이 고함을 지를 뿐이고, 지미 페이지의 형편 없는 프로듀싱 능력 때문에 다른 멤버들의 재능이 묻히고 있다"고 근거 없는 비방을 했다. 또 선데이 덴버 포스트는 "블루스에 기반한 짜릿한 기타 사운드는 매력적이나, 로버트 플랜트의 보컬은 특징이 없고 존 본햄의 드럼 구타는 창의성이 없을 뿐더러 섬세하지 않고 클라이막스도 없다"라고 비난했다. 그나마 빌보드 정도가 "레드 제플린이 어디에서나 대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 것은 사실이다"라며 레드 제플린에 비교적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을 뿐이다. 또 앨범의 곡 중 상당수가 표절곡 또는 리메이크 곡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레드 제플린은 상업적인 성공 및 현대에 들어서 받는 평가와는 상반되게도 동료 음악가들과 평론가들에게 있어서 좋지 못한 평을 들었다.[10]
이런 상황에서 레드 제플린을 반겨주는 것은 미국의 수많은 리스너들 뿐이었다. 영국에서는 여전히 레드 제플린의 음악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야드버즈와 크림, 더 후, 롤링 스톤스 등 하드 록, 블루스 밴드들이 소소하게 인기를 끌었던 미국에서는 알래스카와 하와이에서까지 레드 제플린의 팬덤이 생겨나고 있었다.[11] 안그래도 야드버즈가 영국보다 미국에서 더 흥행했기 때문에 미국 중심으로 음악 활동을 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한 지미 페이지와 피터 그랜트, 그리고 다른 멤버들은 밴드 음악의 성적을 두고서 완벽한 미국 선호로 마음이 기울었다.
영국에서는 아무도 저희들에 대해 알아주려하는 것 같지 않아요. 물론 상황은 점점 변해가고 있죠. 하지만 저는 여전히 미국이 가장 큰 시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국 리스너들에게는 더 이상 일말의 희망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전혀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야드버즈는 영국보다 미국에서 더 성공했고, 레드 제플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지미 페이지, "NME" 1969년 4월
지미 페이지, "NME" 1969년 4월
영국은 분명 성공해야 할 곳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성공하는 게 너무 어려워요. 미국인들은 한 번 들어보고 별로 안 좋으면 그냥 다시는 안 오는 것에서 끝이지만, 영국인들은 밴드가 엄청난 노력을 하는 걸 보여줘야만 겨우 노래를 들어줘요.
지미 페이지, "멜로디 메이커" 1969년 9월
지미 페이지, "멜로디 메이커" 1969년 9월
지미 페이지는 이에 대해 1969년 NME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레드 제플린을 만들었다. 영국에서 레드 제플린의 인기가 생기는건 2~3년 걸렸지만 미국은 우리의 첫 투어 직후 바로 엄청난 콘서트 직관 인파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라고 답했다. 미국에서의 인기는 레드 제플린이 영국에서 1집을 발매한 직후인 4~5월경 다시 미국 콘서트에 떠나 밴드의 노래를 홍보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2집인 "Led Zeppelin II"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녹음되었다.
2.3. 1969년 4월 - 1969년 11월 : 끝 없는 북미 투어, 2집의 제작
그 그룹이 기본이 되는 인간적 수준에서까지 그들의 태도를 유지하는데는 처참히 실패했을지는 몰라도 그들은 그 투어에서 매일 밤 멋지게 연주했다. 당시 투어에 나선 영국 로큰롤 밴드중 하나에 불과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미 그중 최고였다. 거의 모든 공연에서 장비, 타이밍, 운송, 조직 문제에서 오는 혼란에도 불구하고 매일 밤 개막 시간이면 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스태미나는 놀랄만한 것이었다. 이번이 두 번째 투어인데, 그들은 시작부터 스타였다.
엘렌 샌더 (Ellen Sander), "Life" 1969년 5월
엘렌 샌더 (Ellen Sander), "Life" 1969년 5월
▲ 1969년 4월 27일, 샌프란시스코 라이브 공연을 녹음한 음원. |
레드 제플린은 1969년 4월 미국과 영국 양쪽에서 투어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들은 1969년 4월 17일 웨스트미들랜즈에 위치한 울버햄튼에서 공연을 가진 뒤, 비행기를 타고 2차 미국 투어를 위해 뉴욕으로 날아갔다. 뉴욕에서 레드 제플린은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 재즈 밴드로만 구성된 셋업에서 유일하게 록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가 되어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다시 서부로 날아가 1969년 2월 24일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공연을 가졌다. 샌프란시스코 공연 이후 하와이 공연까지 돌고, 이어서 뉴욕에 다시 한번 투어를 한 다음, 보스턴과 디트로이트까지 순회했다. 순회 공연은 장장 3개월간 이어져 뉴욕에서 3번째 공연을 한 5월 말에 끝이 났다.
밴드의 라이브 맹활약에 힘입어 Led Zeppelin은 1969년 4월 중순 미국과 영국에서 둘 다 최고 성적을 올렸다. 1969년 2월 12위를 찍은 이후 점점 순위가 내려가던 1집은 빌보드에서 역주행을 시작해 피크 성적인 10위를 기록했고, 같은 시기 UK 차트에서는 6위를 기록했다.
이 라이브 공연은 지미 페이지만이 주목을 받고, 로버트 플랜트와 존 본햄, 그리고 존 폴 존스가 실력 미달로 인해 언론들로부터 난타를 당했던 1차 북미 투어와 달리 이전보다 더 세련된 사운드를 들려준 것이다. 특히 1집에서 멤버중 가장 적은 비중을 기여했던 로버트 플랜트는 2차 투어를 통해 밴드의 핵심 프론트맨으로 우뚝 섰다. 로버트 플랜트는 이 일을 두고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지미 뿐만이 아니라, 모든 멤버들만의 특성을 주목하고 이해한다"며 기뻐했다.
이 시기 레드 제플린 멤버들은 1969년 가을까지 예정된 2집의 제작에 착수했다. 애틀랜틱 레코드가 흥행을 이어나가고자 1969년 가을을 데드라인으로 정해둔 탓이었다. 하지만 멤버들은 지속되는 투어로 인해 3개월째 집에 돌아 가지 못한 상태였고, 5월 미국 투어를 끝낸 이후에는 일주일도 쉬지 못하고 영국 순회 투어를 나섰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지미 페이지는 순회 투어를 하며 동시에 앨범을 제작한다는 초유의 결단을 내렸다. 레드 제플린은 투어에서 방문하는 도시마다 곡을 작곡하고 녹음, 프로듀싱 과정을 동시에 병행했으며, 총 6개의 각자 다른 스튜디오에서 2집을 제작했다. 이 과정을 지켜본 관계자들은 지미 페이지의 프로듀싱 능력과 열정이 거의 정신나간 경이로움이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지미 페이지 역시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스튜디오에서도 기타 연주를 할 때 긴장해서 떨었다고 한다. 리더인 지미 페이지도 이런 상태니 다른 멤버들의 상태는 눈 뜨고 볼만한 것이 못되었다. 그리고 지미 페이지를 비롯한 멤버들은 피로를 떨쳐내기 위해 점점 마약에 중독되어가기 시작했다. 1969년 6월 밴드는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참여하기로 계약했지만, 지나치게 바쁜 스케줄로 인해 앨범 제작에 차질을 줄 것을 우려해 결국 페스티벌 참여를 포기했다. 그러나 비비 킹과의 합동 페스티벌 등 미국과 영국 등 다양한 국가에서 열린 록 페스티벌에는 꾸준히 참가하였기 때문에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참여 취소는 사실상 의미가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레드 제플린은 잠깐 짬을 내서 파리로 날아가 프랑스 TV에 출연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BBC에 2번이나 출연했다. 다행히 이런 활동들은 밴드의 앨범 흥행에 도움을 줬다. BBC는 비틀즈의 페퍼 상사 앨범 대성공 이후, 제2의 비틀즈를 만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며 떡잎이 조금 되는 밴드들을 띄워주려고 안달이었다. BBC 관계자들은 레드 제플린의 연주 실력과 송라이팅이 제2의 비틀즈에 걸맞은 수준이라고 판단하고 온갖 수식어를 붙여가며 레드 제플린을 홍보해줬고, 이런 BBC의 홍보에 영국 내에서도 레드 제플린의 인기가 점점 높아졌다.
1969년 7월 멤버들은 3차 미국 투어에 나섰다. 7월 초 애틀랜타 팝 페스티벌에 참가한 이후, 8월 말 텍사스 록 페스티벌에 참여했고, 샌디에이고와 휴스턴, 뉴욕, 샌프란시스코, 멤피스, 로스엔젤레스에서 추가적인 순회 공연을 했다. 그 외에 20회정도의 미국 순회 공연을 거쳤다. 프로듀싱 과정 역시 미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지미 페이지가 정말 훌륭하게 해냈다. 그리고 지미 페이지의 요청을 받은 데이비드 주니퍼가 앨범 자켓을 제작하고 8월에 최종 믹싱과 오버더빙 작업을 마치면서 이제 그야말로 2집을 발표할 날만이 남았다. 1969년 9월 초, 마스터 테이프가 애틀랜틱 레코드사로 전달되었다. 피터 그랜트는 2집 홍보를 위해 4차 미국 투어를 기획했고 앨범이 발매되기 직전인 10월 말에는 짧은 영국 순회 공연을 돌았다.
▲ 1969년 10월 12일, 2집 발매 직전 런던에서의 공연을 준비하는 멤버들. |
마침내 1969년 10월 22일, 미국에서 2집 Led Zeppelin II가 발매되었고, 일주일 뒤인 31일에는 영국에서도 발매되었다. 반응은 인기 폭발. 앨범 발매 한달 전부터 전미의 록 리스너들이 흥분하여 레드 제플린 2집을 선주문했고, 선주문 양만 40만장을 돌파하며 애틀랜틱 레코드사의 레코드 공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2집의 완성도는 이런 엄청난 기대를 만족시켰다. 2집은 평론가들에게나 대중들에게나 극찬을 받으며 1969년 최고의 앨범중 하나로 우뚝 섰다. NME는 Led Zeppelin II를 두고서 "제플린은 단지 몇 달만에 높은 수준의 연주력에 도달했다. 이처럼 순식간에 관중들을 휘어잡는 능력은 실로 경이롭다", "비범한 밴드의 걸작" 이라며 칭찬했고, 마찬가지로 "디스크" "멜로디 메이커"지도 레드 제플린과 그들의 신보를 칭찬했다.
물론 모든 언론이 2집을 칭찬한 것은 아니었다. 레드 제플린에 날을 갈고 있던 롤링 스톤의 존 멘델손은 "나라면 그냥 통째로 다시 만들겠다. 한 800번쯤 듣고도 이 앨범을 고평가할 수 있다면 나도 그렇게 하겠다. 하지만 잊으면 안될 것은 이 앨범은 멤버들이 거의 졸면서 만든 수준의 졸작이라는 점이다." 라며 레드 제플린을 비난했다. 하지만 미국 평론가들조차 2집의 음악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만큼 앨범의 완성도는 뛰어났다. 일례로 비교적 보수적인 미국 잡지인 "다운 비트"는 "음악에 심취할수록 좋은 면이 보인다. 계속 그런 생각을 가지고 2집을 들어보라"라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 1969년 12월 27일,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를 제친 레드 제플린의 역사적 순간. |
대중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였다. Led Zeppelin II는 사실 발매 시기상으로 그리 좋은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영미권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성공한 두 앨범인 사이먼 앤 가펑클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와 비틀즈의 Abbey Road 사이에서 레드 제플린 2집은 애매하게 끼어있는 경우였다. 그러나 이런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레드 제플린은 비틀즈의 애비로드를 꺾고 빌보드 차트 1위에 당당히 올라섰으며, 이후 4주간 비틀즈와 차트 경쟁을 하였다. 그리고 Led Zeppelin II는 비틀즈의 Abbey Road를 마침내 물리치고 5주 연속 빌보드 1위의 자리를 차지, 총 누적 7주간 빌보드 1위를 기록하는 초유의 기록을 세운다. 이후 2집은 사이먼 앤 가펑클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에 밀려 1위 자리를 내어주나, 미국에서만 1,200만장, 세계적으로 1,500만장 이상이 팔려, 1969년 한해동안 가장 많이 팔린 하드 록 앨범이 되었다. 앨범을 발표한 직후 멤버들은 4차 미국 투어에 나섰다. 4차 미국 투어는 1,2,3차 투어보다도 더욱 성공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레드 제플린의 공연을 보려고 운집했고 공연의 총 수입은 10만 달러가 넘었다. 지미 페이지는 로스엔젤레스 공연 한번에 3만 7천 달러를 챙겼다며,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미국이 좋다고 말했다. 1969년 11월, 이들은 NME의 "올해의 신진 밴드" 투표에서 제쓰로 툴과 블루 밍크에 이은 3위를 차지했다. 전체 밴드 투표에는 9위까지 올랐고, 로버트 플랜트는 올해 최고의 영국 보컬 15위에 꼽혔다.
이렇듯이 레드 제플린은 점차 세계 최고의 밴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던 1970년 4월 8일, 모든 정상급 밴드 중에서도 가장 위에 군림했던 최고의 인기밴드 비틀즈가 폴 매카트니의 탈퇴로 인해 해체된다. 비틀즈의 시대는 저물었으며, 비틀즈의 전 멤버와 롤링 스톤스, 더 후, 핑크 플로이드, 제프 벡 그룹, 레드 제플린 등이 주도하는 록 음악의 춘추전국 시대가 열렸다.
3. 전성기 (1970년 – 1973년)
3.1. 1969년 12월 – 1970년 11월 : 통나무 집에서 탄생한 어쿠스틱 포크 앨범
1969년 11월까지 진행된 4차 북미투어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마지막 셋리스트인 How Many More Times를 연주했을 때는 관객들이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져, 무려 5번(!!!)이나 앵콜을 외쳤다. Led Zeppelin II 역시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12월 27일, 앨범은 비틀즈의 Abbey Road와 롤링 스톤스의 Let It Bleed를 빌보드 차트에서 여유롭게 제쳤으며, 11월 7일 제한적으로 발매된 싱글 Whole Lotta Love도 빌보드 4위를 기록하며 흥행했다.이런 정신 없는 스케줄을 진행한 레드 제플린의 멤버들은 4차 북미투어 이후 1969년 12월부터 막간의 휴식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 짬을 이용해 지미 페이지는 3집의 구상을 시작했다. 3집 앨범의 구상은 포크 록이나 재즈 쪽이 유력했다. 지미 페이지, 존 폴 존스, 존 본햄, 로버트 플랜트 모두 포크 송과 재즈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로버트 존슨 등의 고전 블루스도 즐겨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1969년 이후 지미 페이지가 심취했던 연금술과 흑마법 등은 송라이팅에 있어서도 전반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 1970년 1월 9일,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연주된 "Whole Lotta Love".[12] |
이와중에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에게 3집을 구상할 좋은 기회가 왔다. 1970년 1월 31일, 로버트 플랜트는 고향인 버밍엄에 놀러간 뒤 집으로 돌아가던 중, 그의 재규어 승용차가 미니 밴에 들이 받혀 완전히 파괴되는 교통 사고에 휘말렸다.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부상이 심각했다. 이가 몇 개 부러지고, 얼굴이 찢어져 수술을 받았다. 또 다리에 마비 증세가 와서 한동안 휠체어도 타고 다녔다. 어깨 위로 팔을 올릴수도 없었고 눈가에는 흉측한 상처 자국이 남은 상태였다. 로버트 플랜트는 무리해서라도 공연에 나서겠다고 했지만 피터 그랜트와 지미 페이지가 만류했다. 2월 7일로 예정된 스코틀랜드 공연은 10일 뒤로 연기되었고, 지미 페이지는 로버트 플랜트의 병문안을 가는 참에 3집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다. 지미 페이지는 애틀랜틱 레코드 사에게 조금만 시간을 주고, 조용히 해주면 기깔나는 명반을 내놓겠다는 약속을 했다.
2월 17일, 로버트 플랜트의 부상이 회복됨에 따라 밴드는 7일날 예정되어있던 에든버러 공연에 섰다. 2월부터 3월까지 예정된 유럽 투어 역시 지체 없이 소화했다. 이때 작은 논란이 있었는데, 그라프 체펠린의 손녀인 에바 폰 체펠린이 덴마크 쾨벤하운 공연에서의 레드 제플린 포스터를 본 것이다. 체펠린 백작은 이를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 노발대발하며 밴드에 대한 소송을 불사하겠다고 난리를 쳤다. 지미 페이지는 어쩔 수 없다면서, 그냥 덴마크 한정으로는 체펠린 여사를 고려해 밴드 명을 "The Nobs"(직역하면 "귀족들")으로 잠깐 바꾸겠다며 유머러스하게 대처했다. 그리고 존 폴 존스는 체펠린이 약간 미친 사람 같다며(...) 확인 사살을 했다. 이런 모습에 오히려 많은 대중들이 속 시원한 계급 투쟁[13] 정도로 받아들였다.
유럽 투어를 마친 이후, 밴드는 5번째 북미 투어를 기획했다. 5차 북미 투어는 1970년 3월 21일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밴쿠버에서 시작되었다. 5차 미국 투어를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제플린의 멤버들은 2집이 미국에서 단 몇 달만에 200만장이 팔렸고, 1집과 2집을 합쳐 전세계적으로 700만장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 "디스크"지는 레드 제플린이 1970년 한해에 벌어들인 수익이 이미 200만 파운드 이상일 것으로 추산하였는데, 이는 롤링 스톤스와 더 후를 비롯한 그 어떠한 밴드의 콘서트 수익보다도 많은 것이었다. 밴드의 콘서트마다 수많은 인파들이 몰렸고, 지미 페이지의 즉흥 기타 솔로는 더더욱 길어졌다. Dazed and Confused 같은 곡은 20 ~ 30분이나 늘여서 연주했고, 다른 곡들도 7분에서 8분정도 되는 길이로 길게 연주했다. 이런 북미 투어의 모습을 지켜본 언론들은 3집이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던 프로그레시브 록 성향일 수 있다고 추측했다.
누군가 제게 "레드 제플린은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야?"라고 물어주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전 잘 모르겠어요. 저희가 하는 음악은 그냥 고전 로큰롤을 포장한 것일 뿐이니까요. 저희는 핑크 플로이드 같이 진정으로 프로그레시브한 밴드는 아니에요. 아마 3집에 프로그레시브 록의 색체가 묻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미 페이지, 1970년 1월
지미 페이지, 1970년 1월
많은 곡들을 쓰지는 않았지만 일단 작곡한 모든 곡은 어쿠스틱 록입니다. 이른바 포크 송이죠. 그냥 "레드 제플린이 청중들을 부드럽게 이끌어간다" 이런 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로버트 플랜트, "멜로디 메이커" 1970년 3월
로버트 플랜트, "멜로디 메이커" 1970년 3월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는 프로그레시브 록 성향은 아니고, 3집은 전반적으로 어쿠스틱 기타를 사용한 포크 록이라고 하였다. 또한 5차 미국 투어에는 거의 작곡이 완료된 Since I've Been Loving You와 Immigrant Song이 초연되기도 하였다.
제플린의 5차 미국 투어는 4월 17일 멤피스, 4월 18일 피닉스 투어를 진행했다. 문제는 4월 19일의 라스 베이거스 라이브 공연이었다. 로버트 플랜트가 라이브 공연 이후 목소리가 다 쉬어버리면서 공연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교통사고의 후유증이기도 했지만, 아무렇게나 4옥타브나 되는 발성을 내지르고 다닌 것이 큰 원인이 되었다. 의사는 플랜트가 즉시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영구적인 성대 손상을 입을 수 있다고 경고하며 재활용 휴식을 권했다. 지미 페이지와 피터 그랜트는 어쩔 수 없이 라스베가스 공연을 중단하고 3집에 수록될 트랙들을 다듬고 제작하는데 주력하기로 하였다.
이제 밴드 멤버 앞에게는 천문학적인 돈이 쌓여져 있었다. 런던 중심가의 어느 허름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던 존 폴 존스는 런던의 한적한 교외 지역인 허트포드셔의 고급 주택을 구매해 이사했다. 존 본햄과 로버트 플랜트는 고향이기도 한 웨스트 미들랜즈의 시골에 있는 큰 농장을 사들였다. 한편 지미 페이지는 마술과 흑마법에 심취해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의 대저택을 구매하였지만, 이사하지는 않고 템스 강의 보트 하우스에 계속 살았다.
3집을 쓰기 위한 주 아이디어가 나온 공간은 웨일스의 별장이었다. 웨일스 별장으로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가 단둘이 여행을 가서 푹 쉬고 노래를 만든다는건 북미 투어 이전부터 예정된 일이었지만, 로버트 플랜트의 성대가 맛이 나가면서 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는 애틀랜틱 레코드사의 압박 없이 편하게 쉴 수 있게 되었다. 미국 투어에서 돌아온지 일주일 뒤, 플랜트와 페이지는 페이지의 여자 친구, 플랜트의 부인과 아들, 매니저 2명, 그리고 가사 일을 돌봐줄 친구 2명을 데리고 로버트 플랜트가 어린 시절 여름 휴가를 위해 구매한 산장인 브로니어(Born-Yr-Aur, 웨일스어로 "황금 언덕"이라는 뜻)로 휴식을 취하려고 떠났다. 전기도, 수도도 통하지 않아서 우물에서 물을 떠오고 양초로 불을 밝혔다. 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는 플랜트가 잘 알고 있던 폭포로 유람을 가거나, 물놀이를 했고 이때마다 로버트 플랜트는 음악적 영감을 떠오를 때 잊지 않기 위해 작은 녹음기를 들고 다녔다. 이런 방식으로 브로니어 산장에서 3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언플러그드 어쿠스틱 곡들이 작곡되었다. 또한 곡만 작곡되고 가사는 쓰여지지 않았던 Immigrant Song 역시 로버트 플랜트가 작사하여 1970년 6월 아이슬란드 공연에서 선보였다. 동시에 로버트 플랜트는 지미 페이지의 최측근이자 핵심 작사/작곡 멤버로 부상하여, 1969년 밴드 내에서 가장 적은 입지를 가졌던 것에서 이제는 지미 페이지와 피터 그랜트에 이은 레드 제플린의 3인자가 되었다.
1970년 8월과 9월에 걸친 레드 제플린의 제6차 미국 투어가 시작되었다. 광고와 언론사의 취재가 줄을 이었으며, 이제 레드 제플린은 딱히 신보나 투어를 위해 방송에 출연할 필요가 없었다. 레드 제플린이 떴다는 소문과 동시에 티켓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미어 터졌다. 이미 레드 제플린은 1970년 7월의 서독 프랑크푸르트 공연에서 종전 최고 관중 기록을 깬 이후였다. 보스턴, 크리블랜드, 디트로이트 공연이 8월 초 예정되어있었고, 29일에는 캐나다 위니펙 팝 페스티벌에도 출연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7월에 존 폴 존스의 아버지가 갑자기 시한부 판정을 받으면서 밴드는 공연을 모두 8월 말로 미뤄놓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존스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본 이후, 28일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남은 일정을 수행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인 8월 24일 막간의 영국 귀환동안 지미 페이지는 최종 믹싱을 끝내고 애틀랜틱 레코드사에 마스터 테이프를 전송했다.
9월 4일 로스앤젤레스에서 2만명이 넘는 팬들 앞에서 Led Zeppelin III에 수록될 곡들이 연주되었다. 팬들에게 반응은 엇갈렸으나 대체로 반응은 뜨거웠다. 레드 제플린은 어디에서나 2만 5천달러 이상의 수익을 내고 있었으며, 1970년 9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의 공연은 총 20만불의 수익을 레드 제플린에게 안겨주었다. 이 공연을 지켜본 옛 멤버 크리스 드레야는 "2년만에 판이 바뀌었다. 이런 밴드는 처음 본다"며 레드 제플린 멤버들에게 소감을 털어놓았다. 이후 밴드는 호놀룰루 공연까지 돈 이후 런던으로 돌아와, 10월 5일로 예정된 3집의 발매를 준비하였다. 미국 투어를 끝나지 얼마 않은 1970년 9월, 멜로디 메이커지에서 독자 투표로 선정한 "올해의 영국 밴드" 투표 결과가 발표되었다. 결과는 레드 제플린이, 1964년 이후 한번도 1위 자리를 놓친적 없던 비틀즈를 제치고 근소한 차이로 1위를 차지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이키델릭 소울의 아이콘 재니스 조플린이 죽은 다음날인 1970년 10월 5일, 미국에서 3집이 발매되었다. 강렬한 헤비 메탈 넘버인 Immigrant Song으로 시작하면서 뒷부분으로 갈수록 점점 브리티시 포크 록 사운드가 나는 앨범에 리스너들은 당황했지만, 역시 반응은 뜨거웠다. 평론가들에게서도 반응이 좋았다. 앨범은 1970년 10월 3주차 3위로 빌보드 200에 이름을 올려, 1주만에 1위로 올라섰고, 11월 3주차까지 1위 자리를 지켰다. UK 차트에서도 1위에 올랐다. 선주문량과 발매 당일 판매량도 엄청나게 뜨거웠다. 3집은 현재까지 미국에서만 600만장이 팔리고 세계적으로는 800만장이 조금 되지 않는 인증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추정 판매고로 확실히 1,000만장을 넘었기 때문에 밴드의 앨범 3장 모두가 1,0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앨범을 보유하게 되었다.
물론 롤링 스톤은 아직도 레드 제플린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레드 제플린이 곧 해산될지도 모른다"라는 헛소문을 유포했고, 앨범 자켓의 디자인까지 걸고 넘어가며 레드 제플린을 비난한 것이다.[14] 이에 대해 지미 페이지는 아래와 같은 재치있는 답변을 남겼다.
샌프란시스코는 좋은 곳입니다.(환호) 저는 샌프란시스코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중요한 신문이 있죠. 전 그 신문사를 엄청나게 싫어하는데요, 그건 바로 롤링 스톤입니다.(대중들의 뜨거운 환호)
지미 페이지, 1970년 12월 샌프란시스코 라이브 공연에서
지미 페이지, 1970년 12월 샌프란시스코 라이브 공연에서
3.2. 1970년 12월 – 1971월 11윌 : 이름 없는 앨범의 발매
1970년 10월 Led Zeppelin III를 홍보하기 위한 투어가 모두 끝이 났다. 멤버들은 영국으로 다시 돌아왔고, 더 이상 급박하게 투어 준비를 할 필요는 없었다. 최소한 3개월동안은 투어 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드 제플린의 멤버들은 2년간 누리지 못한 느긋한 휴가를 즐기면서, 4집에 대한 구상을 할 수 있었다.3집의 상업적 실패가 4집의 방향성을 사실상 제시하였다. 3집은 1971년 한해동안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였지만 2집이 너무 크게 성공한지라 묻힌 감이 있었다. Led Zeppelin III는 인증판매고로 총 7,265,000장이 팔렸는데, 객관적으로 본다면 성공했지만 전작인 Led Zeppelin II가 인증 판매고에서 1,500만장 이상이 팔렸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사실상의 상업적 실패였다. 물론 Led Zeppelin III가 상대적으로 흥행성이 낮았던 점은 시기적으로 좋지 않은 시점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조지 해리슨의 All Things Must Pass가 빌보드 200에서 8주 연속 1위를 지켰고, 싱글 My Sweet Lord는 총 1,200만장이 판매되며, 1970년 한해동안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 되었다. 비틀즈의 다른 멤버들인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도 1970년 신보를 발매했다. 설상가상으로 블랙 사바스, 핑크 플로이드,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롤링 스톤스 등 다른 경쟁 밴드들도 1970년 연말에 많은 앨범을 발매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는 2집의 정말 최악이었던 시기[15]와 비교해봤을 때 3집이 특별히 더 안 좋은 시기에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밴드 멤버들은 3집의 지나친 브리티시 포크 감성이 미국 리스너들은 물론이고 영국 리스너들에게조차 생소하게 다가와 상업적 부진을 야기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는 4집은 조금 더 헤비 메탈과 하드 록에 가까운 분위기로 구성하기로 하였으며 이는 전적으로 Led Zeppelin II의 음악적 유산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 1971년의 사진. 지미 페이지가 수염을 길렀다. |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는 머리도 식히고 4집 구상도 할겸 다시 웨일즈의 브로니어 별장으로 떠났다. Stairway to Heaven, Black Dog 등 수많은 4집의 명곡들이 구상된 것도 이 당시의 일이다. 그러나 레드 제플린은 역사상 가장 길게 투어를 하지 않고 있었다. 1971년 3월, 밴드는 5개월 연속 공연을 나가지 않으면서 종전 기록을 갈아 치웠고, 언론들은 레드 제플린 멤버간의 불화설을 거론하며 조만간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가 솔로 앨범을 발매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헛소문을 퍼트렸다.
▲ 헤들리 그레인지의 모습 |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는 짧은 휴식을 거친 뒤 헤들리 그레인지로 스튜디오를 옮기기로 했다. 헤들리 그레인지는 잉글랜드 남부의 시골마을에 위치한 오래된 석조 건물이었는데, 이미 1970년 12월 밴드는 대부분의 시설을 헤들리 그레인지로 옮긴 상태였다. 시설은 난방이 잘 되지 않았고 시설도 좋지 못했지만 레드 제플린은 미국 투어로 벌어들인 천문학적 돈을 18세기에 지어진 헤들리 그레인지를 최첨단 스튜디오로 개조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렇게 헤들리 그레인지는 런던 올림픽 스튜디오와 비교해봐도 손색이 없는 멋진 스튜디오로 개조되었다. 이후 제네시스를 비롯한 몇몇 밴드들이 헤들리 그레인지를 빌려 자신들의 음반을 녹음했다.
사실 1971년 2월경 레드 제플린의 멤버들은 4집에 들어갈 모든 곡을 녹음한것도 모자라 추가적으로 몇 개의 트랙을 더 제작해둔 상태였다. 로버트 플랜트는 곡 수가 너무 많으면 혼란스러울 수 있다며, 이 곡들을 모두 쓰지 않고 가장 좋은 일부만을 간추려 쓰자고 주장했으며, 이 주장이 받아들여서 4집은 1,2,3집이 그랬듯이 1장짜리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그렇게 선택된 8개의 트랙의 오버더빙 작업을 마쳤으며, 믹싱과 프로듀싱 과정만이 남았다. 이제 1971년 봄이나 여름 쯤에 4집을 발매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1971년 3월, 밴드는 영국을 시작으로 투어링을 시작했다.[16] 투어링도 하고 믹싱과 마스터링도 할 겸, 영미권 음악가들에게 최신 장비가 구비되어있던 LA의 선셋 스튜디오에 방문해, 4집의 최종적인 제작을 마무리하려하였다. 존 폴 존스와 지미 페이지는 비용 절감을 위해[17] 규모가 작은 2번 스튜디오를 쓰기로 했다. 그렇게 녹음을 다 마치고 영국으로 귀국한 레드 제플린에게 큰 문제가 닥쳤다. 존 폴 존스가 어느날 테이프를 들어보다가, 믹싱 작업이 처음부터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헤들리 그레인지 스튜디오의 장비와 선셋 스튜디오의 장비가 달라서 선셋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부분의 소리가 더 컸고[18], 설상가상으로 선셋 스튜디오의 테이프는 런던 올림픽 스튜디오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영국 스튜디오가 지원하지 않는 양식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녹음한 테이프조차 영국 내에서 들어볼 수 없었다(...).
지미 페이지와 피터 그랜트는 애틀랜틱 레코드사에 가서 제발 앨범 발매일을 연기해달라고 빌었고 그렇게 4집의 발매일은 가을로 미뤄졌다. 거기다가 유럽 공연이 6월과 7월에 있었고 8월에는 북미 투어도 시작되었다. 자연스럽게 프로듀싱은 차일피일 미뤄졌으며, 2집과 마찬가지로 방방곡곡을 떠돌며 롤링 스톤즈 이동식 스튜디오를 타고 마스터링 일정을 맞추기로 하였다.
유럽 투어도 험난한건 마찬가지였다. 이름은 유럽 투어였지만, 대부분의 공연 장소는 스칸디나비아 5개국이었고, 나머지 한 공연은 밀라노 공연이었다. 밀라노 공연은 7월 5일 비고렐리 벨로드롬에서 열렸는데 이로부터 이틀전인 1971년 7월 3일은 짐 모리슨이 파리에서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인해 욕실에서 숨을 거둔채 발견된 날이기도 했다. 밀라노 시내는 짐 모리슨의 사망에 극도로 흥분한 록 음악 팬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 때문에 이탈리아 공산당의 열성 당원들과, 네오 파시즘 추종자까지 얽혀가면서 점점 혼란해져갔다[19] 이러한 심상치 않은 조짐에 경찰은 2,000여명의 병력을 레드 제플린의 공연장에 배치했다. 레드 제플린이 공연을 30분정도 하고 있을 때, 경찰은 레드 제플린의 공연에 흥분한 팬을 폭도로 착각하고 최루탄을 뿜었으며, 순간 폭력 사태가 발생한 것으로 생각한 다른 경찰들과, 경찰의 과잉 진압에 영문을 모르고 보복을 하던 레드 제플린의 팬간 유혈 사태가 일어났다. 경찰은 최루탄을 공연장 앞 뿐만 아니라 안쪽에서도 뿌려대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있던 로버트 플랜트가 "공연장 안에서 불을 피우지 마세요"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플랜트 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과 밴드 관계자는 이 연기의 정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최루 가스임을 알아챘고, 최루탄이 무대 바로 앞에서 폭발하자 공연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공연을 중단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레드 제플린은 이 사건 이후로 현재까지 이탈리아 공연을 오지 않고 있다.
예정대로라면 8월달에 미국 투어도 나서고 스위스 몽트뢰[20]에서도 공연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의 끔찍한 소요 사태와 4집의 믹싱 대참사로 인해 심신이 지친 멤버는 긴 여름 휴가를 가지기로 했으며, 지미 페이지는 4집의 믹싱을 최종적으로 해낸 이후 앨범 자켓을 결정하는 일을 하였다.
지미 페이지는 3집의 실패 원인에는 허접한 앨범 커버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3집의 정체성은 앨범 커버에 전혀 담겨 있지 않다고 생각하며 지나치게 복잡하지 않고, 정갈한 앨범 커버를 원했다. 그래서 새 앨범 커버를 만들때는 비틀즈의 앨범 커버를 유심히 보고 참고하려고 하였다. 그중 가장 크게 영감을 준 커버는 The Beatles와 존 레논의 Plastic Ono Band로, 지미 페이지는 4집을 화이트 앨범처럼 제목을 붙이지 않는 최소한의 미니멀 커버로 제작하려고 하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일련 번호도 붙이지 않은, 그야말로 그림밖에 없는 커버를 만들려고 했지만, 애틀랜틱 레코드가 그러면 도대체 일련 번호도 없고 상호도 없으니 어떤 수로 앨범을 발매하고 판매할거냐는 현실적인 지적에 이를 철회했다. 그러나 지미 페이지는 여전히 언론사에게 4집의 제목은 완전히 없는 무제라고 강조하며 앨범 커버의 미니멀한 디자인을 구상하고 있었다.
▲ 레드 제플린에게 영감을 준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 (왼쪽)과 4집의 커버 (오른쪽). |
그렇게 제목을 정하지 않는 대신 이른바 "Four Symbols"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처음에 지미 페이지는 하나의 상징만을 넣으려 했지만, 멤버도 4명이고 앨범 순서도 4번째니 이에 맞춰 4개의 심볼을 제작해 앨범 커버에 집어넣었다. 앨범 커버의 사진은 런던의 한 폐가에서 고층건물을 촬영한 것인데, 벽에는 어떤 노인이 뒷짐을 지고 서있는 그림이 걸려있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앨범 커버까지 정하고 이제 발매할 일만이 남게 되었다. 1971년 8월 레드 제플린의 7차 미국 투어와 동아시아 투어가 시작되었다. 투어는 일본 공연으로 종료되었고, 일본 부도칸 공연은 전석이 매진되었으며, 특히 싱글 Immigrant Song은 레드 제플린이 투어를 온다는 소문에 역주행을 시작해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하였다. 이후 멤버들은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들을 위한 특별 공연을 열었다. 이 공연은 해외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 내에서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레드 제플린은 평화주의에 공로한 대중음악 예술가의 자격으로 히로시마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는 4집의 발매를 위해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 인도를 잠깐 여행했다. 뭄바이에 도착해 숨이 턱 막히는 오염된 공기와 끝없이 이어진 빈민가, 힌두교적 사상이 바탕이 되어있음에도 서양 사고를 고수하려는 사람들에 영감을 받은 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는 인도 문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 1971년 9월, 일본 부도칸 공연에서. |
1971년 10월 모든 멤버들이 영국으로 돌아왔다. 9월에서 10월로 넘어가며 주문했던 앨범 커버도 완성되었고 애틀랜틱 레코드의 공장에서는 이미 레드 제플린 4집을 찍어내고 있었다. 11월 8일, 북미 시장에 레드 제플린 4집이 발매되었고 얼마 뒤 영국에서도 발매되었다. 4집은 Led Zeppelin II와 Led Zeppelin III와 마찬가지로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지는 못했고 2위에 머물렀다. 한편 영국에서는 존 레논의 앨범을 밀어내고 잠깐 1위를 차지했으나 이는 잠깐이었고, 다시 2위 밑으로 떨어졌다. 이처럼 4집의 차트 성적은 신통찮았지만 앨범은 빌보드 차트에 다른 어떠한 앨범들보다도 차트에 오래 머물렀다. 몇 개월이 아닌 몇 년을 차트에 머물렀으며, 헤비 메탈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아, 현재까지 총 3,700만장이 팔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역사상 모든 앨범을 통틀어 11번째로 많이 팔린 순위고 특히 블루스, 포크 그리고 헤비 메탈 한정으로는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다. 또한 레드 제플린의 앨범중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기도 하다.
3.3. 1971년 11월 – 1973년 10월 : 그 노래에는 변함이 없다
1971년 10월 앨범을 낸 밴드는 미국 투어가 아닌 4차 영국 투어를 기획했다. 지미 페이지는 2년 전 영국 관중들이 레드 제플린에 아무 관심도 없다면서 냉소적인 관점을 취했지만, 4차 영국 투어는 그 어느때보다도 청중들에 제플린의 노래와 제플린 그 자체에 열광하면서 지미 페이지의 오해를 싹 사라지게 만들었다. 제4차 영국 투어는 11월 11일 뉴캐슬어폰타인에서 시작되어 11월 24일 맨체스터 공연을 마지막으로 종료될 예정이었으나, 지미 페이지와 피터 그랜트의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수요로 인해 1개월간 더 진행되었다.레드 제플린이 방문하는 모든 도시에서 24시간 이내에 콘서트가 매진되었고[21] 1971년 11월 20일의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에서 레드 제플린의 인기는 정점을 찍었다. 서커스단을 고용했고 돼지들에게 경찰관 모자를 씌웠다
1971년 연말 결과적으로 4집이 캐롤 킹의 앨범에 밀려 빌보드 1위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미 페이지와 피터 그랜트는 Rock and Roll과 Black Dog의 싱글 발매를 마지 못해 허락했다. 완벽하게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제플린은 제플린이었기 때문에 1972년 연초 라디오에서는 어느 채널에서나 Rock and Roll과 Black Dog에서 지미 페이지가 내는 신묘한 기타 솔로 소리를 감상할 수 있었다.
아무튼 영국 투어가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둔 탓에 레드 제플린의 멤버들은 특별한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존 본햄은 시골집으로 돌아가서 1966년 태어난 아들 제이슨 본햄에게 드럼을 가르쳤고, 지미 페이지는 보트 하우스를 떠나 에식스주에 위치한 대저택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이 휴식 기간 동안 존 본햄과 지미 페이지는 본격적으로 뭄바이와 인도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스튜디오까지 방문하며, 전문 시타르 연주자들과 만나는 등 인도 음악과 록 음악의 접목에 큰 관심을 가졌다.
1972년 10월 뭄바이를 떠난 밴드는 싱가포르를 거쳐, 일본 투어에 나섰다. 본래 싱가포르에서도 공연을 할 예정이었으나 당국에서 젊은이들에게 안좋은 영향을 줄수 있다면서 머리를 다 깎아버려야 공연을 허가해줄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 바람에, 싱가포르를 바로 떠나 부도칸 공연에 참석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 공연은 대성공이었지만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당시 밴드 멤버들은 여타 록밴드처럼 코카인을 즐겨 흡입했는데, 레드 제플린의 한 관계자중 한명이 일본 투어를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오던 멤버들의 경유지였던 홍콩에서 마약 운반책에게 여느때처럼 코카인을 구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운반책의 실수로 코카인 대신 헤로인이 전달되었고 코카인을 제일 좋아했던 지미 페이지는 코카인 대신 헤로인을 비행기 안에서 정신 없이 흡입하다가 매우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고, 이후 8년간 만성적 헤로인 중독에 시달리게 된다. 사실 헤로인 외에도, 지미 페이지가 흑마술과 알리스터 크로울리의 추종자가 된 것도 1973년 5집 세션 도중이었다.
이렇듯 예상하지 못한 일들은 있었지만 일본 투어에 이은 영국 투어도 대성공으로 끝났다. 본햄은 스리랑카에서 공연하는게 영국에서 공연하는 것보다 나을거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지만 이런 그의 말과 달리 영국에서는 모든 공연이 매진이었고 언론들도 찬사를 쏟아냈다.
5집은 이런 환경 속에서 제작되었다. 사실 5집은 4집이나 1,2,3집에 비해 특별한 스토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4집이 엄청난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멤버들이 4집의 분위기를 그대로 5집까지 끌고가자고 했던 것이다. 몇가지 변경점이 있었다면 이전에 비해 다른 뮤지션들의 조언도 훨씬 많이 수용했다는 점이다. 5집 제작 세션에서는 조지 해리슨의 충고를 받아들여 Something을 오마쥬한 발라드 넘버 "The Rain Song"이 제작되었으며, 영국에서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핑크 플로이드, 예스 등에 의해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던 프로그레시브 록의 요소도 5집에 강하게 반영되었다. D’yer Mak’er 같은 레게 넘버도 존재한다. 또한 페이지와 플랜트, 본햄이 이전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던 인도 음악에서도 강한 영감을 받아 5집은 4집보다도 음악적으로 훨씬 깊이 있는 트랙들을 수록하게 되었다.
한가지 더 나아진 점이 있다면 앨범 커버였다. 지미 페이지는 이미 1972년부터 "5집의 커버는 예술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지미 페이지가 앨범 커버 디자인을 맡은 것은 힙노시스였다. 힙노시스는 케임브리지 출신의 디자인 회사로, 핑크 플로이드의 전담 디자인 회사로[22] 음악계에서는 첨단을 주도하는 디자인 회사라고 잘 알려져있었다. 회사는 이미 1971년 귀를 물 속에 담근 사진을 찍은 "Meddle"의 커버로 유명했는데 지미 페이지도 이 Meddle 커버를 보고 감명을 받아, 5집 커버 제작을 의뢰하게 된 것이다.
원래 커버는 남미에 가서 찍으려고 했지만 돈이 없어서 못갔고, 대신 북아일랜드의 주상절리 지형에서 찍었다.[23] 더욱 큰 문제는 매우 선정적인 커버였는데, 힙노시스는 결국 피터 그랜트의 요구대로 애틀랜틱 레코드사에게서 퇴짜를 맡지 않도록 앨범 커버에 종이 한 장을 덧대어 포장하도록 할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4집에서 있었던 큰 문제 없이 5집 Houses of the Holy가 발매되었다. 앨범 발매는 미국 투어에 맞춘 것이었고 예상대로 빌보드 1위를 2주간 차지했다. 영국에서도 1위에 올랐으며, 2주 연속으로 1위를 차지했는데, 이로 인해 핑크 플로이드 최고의 역작이라고 불리는 The Dark Side of the Moon이 UK 차트 1위에 실패하는 일이 발생했다. 5집은 4집에 비해서는 다소 트랙 구성이 산만하다고 여겨지지만 깊이있는 음악들과 엄청난 상업적 성공으로 인해 레드 제플린의 앨범중 최고 수준의 완성도를 가지고 있는 앨범중 하나로 반드시 꼽힌다.
▲ 1973년. 제9차 미국 투어의 일환인 시카고 공연 당시 모습이다. |
5집 이후 제9차 미국 투어에 나섰다. 새로 영입된 홍보 담당자 대니 골드버그는 음악과 스테이지에만 집중하면 안된다면서 외적인 부분도 신경쓰라고 조언했다. 이미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로 관객 조련에 능했던 페이지와 플랜트였지만 대니 골드버그는 레드 제플린이 너무 히피 밴드 같다면서, 특별 제작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서라고 했으며,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는 그렇게 하였다. 스테이지 이펙트 역시 관심사였다. 골드버그는 핑크 플로이드와 같은 밴드의 시대를 앞서나가는 무대 이펙트에 감명하여[24] 연막탄과 레이저를 무대에 비추고, 포탄을 쏘는 등 대중들에게 레드 제플린이라는 밴드의 거대함을 몸소 느끼는 전략을 추구했다. 마지막으로 골드버그는 멤버들에게 트랙 순서도 배정했는데, Rock and Roll을 맨 앞 순서에, Heartbreaker나 Whole Lotta Love를 가장 뒤쪽에 넣는 것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홍보 전략의 일환으로 밴드 멤버들은 영화 한편도 찍기로 했다. 이름은 "The Song Remains the Same". 1973년 7월 9차 미국투어에서 가장 규모가 클 것으로 예상된 뉴욕 맨해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의 실황 영상을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찍어 75~6년경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1973년 5월 중순 경에 레드 제플린이 세운 또 하나의 기록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의 대흥행을 보장하는 듯 하였다. 밴드의 플로리다 탬파 스타디움에서의 공연은 6만명이 넘는 관객들이 몰렸는데, 이는 1965년 비틀즈가 셰이 스타디움에서 세운 최다 공연 관람객의 기록을 경신하는 것이었다. 영국과 미국에서 이 소식은 모두 호외가 되었고 밴드 멤버들도 신이 나서, 평소 잘 놀줄 몰랐던 존 폴 존스도 여자와 술을 마시고[25] 놀았을 정도다.
밴드는 5월 말부터 7월 초까지 한달간의 휴식을 취했고 지미 페이지는 잃어버린 깁슨 기타에 대한 광고를 롤링 스톤에 실었으나 감감 무소식이었다.[26] 1973년 7월 멤버들은 다시 투어에 나섰으며 마지막 투어였던 1973년 7월 27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는 고대하던 영화 촬영이 있었다. 로버트 플랜트의 보컬 상태는 최악이었고 다른 멤버들 상태도 그닥 좋진 않았으며 피터 그랜트가 계약상 실수로 인해 고생하기는 했지만 촬영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8월에 멤버들은 다시 헤들리 그레인지로 돌아갔다.
4. 과도기 (1973년 – 1977년)
4.1. 1973년 8월 – 1975년 1월 : 스완 송 레코드사의 설립, 6집의 발매
▲ 1974년 연초, 피터 그랜트와 레드 제플린의 멤버들을 담은 사진이다. |
1974년 1월, 애틀랜틱 레코드사의 아흐메트 에르테군과 레드 제플린의 매니저 피터 그랜트는 이름은 미정이지만 레드 제플린을 위한 새로운 레코드사가 설립되고, 이 회사는 애틀랜틱 레코드의 자회사로 배급을 애틀랜틱 레코드가 맡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1974년 4월, 지미 페이지는 새 레코드사의 이름을 "스완 송 레코드"로 정했다. 백조가 죽을 때 노래를 부르는 것에서 착안한 이름이었다. 스완송 레코드는 미국에서 먼저 문을 열었고, 영국에서는 계약상 문제로 조금 늦춰지다가 설립되었다. 스완송 레코드는 비틀즈의 애플 레코드사의 전례를 따라, 레드 제플린 뿐만 아닌 실력 있는 다른 영국 음악가들도 담당하는 중소규모 레이블 회사로 계획되었다.
지미 페이지는 또한 런던 첼시의 빌딩을 사들여[27] 레드 제플린의 관련 서적과 음악 전문 출판사인 "조언라인 뮤직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밴드는 6집을 발매하기까지 약간 투어를 쉬기로 결정한다. 멤버들이 너무 많이 투어를 나가서 힘든 것도 있었고, 영화 제작이 여러 부침을 겪은 것도 있었지만[28], 결정적인 이유는 더 이상 투어를 나가지 않아도 앨범이 날개 돋힌 듯 팔렸기 때문에 굳이 투어를 나가서 홍보를 할 필요가 없었고, 또 로버트 플랜트의 목 상태가 심각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로버트 플랜트의 목 상태는 이미 1970년대 초반부터 안좋아질 조짐을 보였는데 73년 1월 독감에 걸린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연을 진행하다 목이 완전히 맛탱이가 가버렸다. 꾸준한 휴식과 재활이 필요했지만 빡빡한 일정으로 1973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로버트 플랜트는 목소리가 나가버려, Rock and Roll, Black Dog이나 Over the Hills and Far Away같은 곡의 음정을 낮춰 부를정도로 목 상태가 악화되었다.[29] 지미 페이지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투어를 어느정도 쉬기로 결정한 것이다.
제가 생각하기에, 비틀즈의 "The Beatles"를 처음 들었을 때의 그 기분은 엄청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흥미를 가지고 익숙해질때까지는 오래 걸렸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화이트 앨범의 진가를 알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 평론가 여러분들도 신보 발매 3개월 이후쯤에 평론을 시작해주시면 더 좋은 평이 나오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로버트 플랜트, "NME“
로버트 플랜트, "NME“
그래서 멤버들은 6집을 구상할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원래 Led Zeppelin IV가 더블 앨범으로 제작될 소문이 있었던 만큼 멤버들도 더블 앨범에 많은 관심을 가지던 참이었다. 그래서 레드 제플린은 자신들의 커리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더블 앨범 제작을 구상했다. 곡의 대부분은 거의 즉흥적으로 작곡되고 녹음되었으며 몇몇 곡은 1970년부터 쓰여졌다가 버려진 곡들을 짜맞춰 다시 편곡해 녹음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1975년 2월 24일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스완송 레코드사의 첫 앨범인 "Physical Graffiti"가 발매되었다. 점점 늦어졌던 앨범 발매 때문에 멤버들은 특별히 손을 써둬 NME 측에 앨범의 정보를 조금 흘린 참이었다. 예상대로 앨범은 대박이 났고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차트 1위에 올랐다. 이와 거의 동시에 멤버들은 1975년 1월, 제10차 미국 투어를 시작했다. 1975년 1월 투어를 시작하자마자 지미 페이지가 기차에 손가락을 찧어서(...) Dazed and Confused 등 일부 곡이 연주되지 못하는 사태가 있었지만[30], 천재 기타리스트답게 2번째와 3번째 손가락만을 가지고 운지하는(!!!) 기법을 사용해 3달에 걸친 투어를 완벽하게 해냈다. 2년만에 재개된 투어인만큼 인기는 대폭발이었고 500만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게다가 1975년 3월 29일 레드 제플린은 또다른 기록을 세웠다. Physical Graffiti가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가운데, Led Zeppelin IV가 83위, Houses of the Holy가 92위, Led Zeppelin II가 104위, Led Zeppelin이 116위, Led Zeppelin III가 123위를 차지한 것이며, 이는 당시까지 발매된 밴드의 모든 앨범이 빌보드 차트 안에 들어간 것이다. 이 기록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기록이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6집 앨범은 성공 가도에 올랐지만 멤버들은 방탕에 찌들어 점차 망가지고 있었다. 지미 페이지는 헤로인에 완전히 중독되었고 존 본햄도 각종 괴상한 마약들에 빠져들었다. 투어 매니저인 리처드 콜 역시 헤로인 중독 상태였다. 그와중에 존 폴 존스는 레드 제플린 멤버들과 완전히 겉돌면서[31] 팀과 어우러지지 못했고 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는 아랑곳 않고 친목질을 했다. 그중 단연 최악이었던 것은 존 본햄이었는데, 술과 마약을 하지 않았을 때에는 순박한 시골 청년 그 자체였지만 술과 마약을 들이키면 걷잡을 수 없었다. 언제는 전용기를 타고 투어를 위해 이동하다가 스튜어디스에게 자기랑 같이 자자면서 덮치려고 한 강간 미수 사건도 있었다. 다행히 지미 페이지가 스튜어디스에게 사과하고 피터 그랜트가 이 일을 묻기로 합의하면서 언론 보도에는 나지 않았지만 존 본햄의 알코올 중독은 이 당시부터 심각했다. 플랜트-페이지의 과도한 친목질, 언론의 공격, 너무 많은 투어를 돌면서 생긴 향수병 등이 겹치면서 존 본햄은 이때부터 보드카 등의 쎈 술을 들이 마셨다. 그는 1975~6년도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증언이 많다[32]. 사실, 존 본햄 뿐만 아니라 플랜트, 페이지도 모두 마약에 쩔어있었고 마치 "통제력을 잃고 폭주하는 자동차"처럼 헤로인을 투약했었다. 그나마 존 폴 존스만이 마약과 여자들을 멀리했다.
4.2. 1975년 3월 – 1977년 2월 : 세금 회피를 위한 도피
1975년 3월 말 제10차 미국 투어를 성공적으로 끝낸 밴드는 영국으로 돌아갈 일만이 남았지만 세금이라는 문제에 부딪혀[33] 유례가 없는 해외 도피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미국에서도 조세 부담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도피를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멤버들은 영국에 잠깐 들러 공연을 하기로 결정하고, 얼스코트 공연을 기획했다. 3월 중순 레드 제플린은 기습적으로 영국 얼스코트 공연에서 공연할 것이라는 계획을 발표했다. 만 1000명이 입장할 수 있는 얼스코트 공연을 위해 10만명이 넘는 사람이 티켓을 예매했고, 5일간 8만 5천명정도가 입장해 공연을 관람했다. 그리고 이 얼스코트 공연 수익의 대다수는 영국 정부에게 빼앗겼다.제쓰로 툴의 리더 이언 앤더슨은 이러한 레드 제플린의 도피를 "비열한 행위"라며 비판하고, "실제 세금은 75%밖에 안된다. 그리고 음악으로 버는 수익이 세금으로 뜯겨서 적더라도 최소 실력있는 벽돌공만큼은[34] 번다"라고 주장했다. 로버트 플랜트는 이에 맞받아쳐 "이언 앤더슨의 작곡 실력이 벽돌공인건 아니냐"(...)라고 극딜을 날렸다. 여하간 얼스코트 공연 이후 밴드는 다시 스위스로 이동해 몽트뢰에서 공연했다. 존 본햄은 잠깐 웨스트미들랜즈에 있는 농장에 머물렀고 나머지 멤버들은 해외를 떠돌았다. 그리고 이들은 세금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다시 미국 투어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변수가 발생했다. 1975년 8월 4일 , Presence 앨범을 막 준비하던 참에 그리스 로도스 섬에서 휴양을 보내던 로버트 플랜트에게 끔찍한 일이 닥쳤다. 로버트 플랜트의 아내 모린 플랜트가 모는 차가 도로를 이탈하면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차는 수백 미터를 떨어진 뒤 나무를 들이 박으면서야 겨우 멈춰섰다. 뒤에 타고 있던 3명의 아이들은 크게 다치지 않았으나 모린 플랜트는 골반과 다리 하나가 완전히 꺾였고 얼굴이 찢어졌으며 과다 출혈로 빈혈 증상을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희귀 혈액형이었기 때문에 즉각적인 수혈이 없다면 목숨이 위험했다. 로버트 플랜트 또한 두 다리가 크게 골절되고 팔도 꺾였다. 다행히도 지미 페이지와 여자친구, 페이지의 자녀들, 그리고 모린 플랜트의 여동생이 뒤에서 바로 차로 뒤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빠른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페이지는 영국에 있던 투어 매니저 리처드 콜에게 전화를 걸었다. 콜은 영국 최고의 의료진을 플랜트에게 보냈으며, 플랜트는 핑크 플로이드의 리더이자 베이시스트인 로저 워터스의 별장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피터 그랜트는 다음날 미국 투어 일정을 취소했다.
로도스 섬은 인프라가 부족했기 때문에 워터스의 별장에서 아주 조금의 휴양만 취한 뒤 플랜트는 영국 런던의 거대 병원으로 보내졌다. 플랜트 부부 둘 다 몇 주간 입원 신세를 지냈다. 입원 치료가 끝날때 쯤 의사는 로버트 플랜트에게 영구적으로 다리를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이런 악재에도 불구하고 로버트 플랜트는 퇴원하자마자 조세 폭탄을 피하기 위해 곧바로 프랑스 연안의 섬으로 재활을 위해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플랜트와 페이지, 그랜트 모두 부상을 당해 투어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무렇게나 죽치고 앉아있는 것 보다는 앨범 하나를 만드는게 더 나을 것이라는데 의견 일치를 보였다. 1975년 10월 마지막주에 대략적인 앨범 컨셉이 잡히고, 녹음 일정도 잡혔는데, 이는 Led Zeppelin 이후 가장 빨리 앨범 컨셉과 녹음이 진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멤버들은 미국 조세 제도 때문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녹음을 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밴드는 서독의 바이에른에 위치한 아라벨라 호텔 지하층으로 이동해 곡들을 녹음했다. 무엇보다 이 호텔의 최고급 시설이 로버트 플랜트가 재활을 하는데 제격이었다. 플랜트는 휠체어에서 일어나 매일 몇시간씩 보행 연습을 하였다.
스튜디오 사용이 2주일 정도밖에 예약되지 않았기 때문에 밴드는 엄청난 속도로 앨범 제작에 들어갔다. 그래서 앨범의 전체 사운드는 5, 6집에 비해 훨씬 통일성을 갖추게 되었고, 신속한 제작 속도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은 멤버들과 관계자들은 마약에 빠져들었다. 지미 페이지는 헤로인을 하고 곡을 녹음했다.
▲ 1976년 잡지 “피플”에 실린 모습이다. |
1976년 10월에는 The Song Remains the Same의 개봉이 있었다. 동명의 사운드 트랙은 오히려 Presence보다 더 잘 팔려서 400만장이 넘게 팔렸다. 미국에서는 2위에 그쳤지만 영국에서는 1위를 거뒀으며, 아무리 교통사고를 당했더라도 제플린은 제플린이라는 모습을 잘 보여줬다.
5. 황혼기 (1977년 – 1980년)
5.1. 1977년 2월 – 1980년 12월 : 마지막 앨범의 발매
1976년 레드 제플린은 난데없이 펑크 록 밴드들의 난타를 받고 있었다.롤링 스톤스, 더 후, 핑크 플로이드, 레드 제플린... 이런 밴드들은 우리들을 대변하지 않는다. 백만장자 록밴드들은 이제 자기 사랑 얘기나 세금 불평만 하고 있을 뿐이다. 실업자들에게 러브 송 따위는 필요 없는데 말이다. 우리는 부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레코드 시장에 반항할 것이다.
존 라이든[36]
사실 펑크 록이라는 개념이 튀어 나온 것도 레드 제플린과는 무관하지 않았다. 레드 제플린이 길을 닦아놓은 복잡한 블루스 음악의 연주라는 개념은 언더그라운드 음악과 오버그라운드 음악을 완전히 분리시켜버렸다. 록 음악을 "선택받은 자"만이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클래식 음악의 어려운 작곡 요소들을 듬뿍 끼얹어가고 있던 프로그레시브 록과 더불어 레드 제플린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록 음악을 지향하던 펑크 록의 주요 타겟이 되었다.존 라이든[36]
펑크 록 뿐만 아니라 1970년대 중반에 원초적인 로큰롤 사운드로 승부수를 건 브루스 스프링스틴 등의 루츠 록 음악가들도 등장하면서 당시에는 "레드 제플린은 대단하지만 음악적으로는 한물 갔다"라는 인식이 암암리에 퍼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 레드 제플린의 멤버들은 "펑크 록 밴드들은 이제 우리가 그냥 매너리즘에 빠지고 속주 서커스를 울궈먹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우리 밴드의 규모는 이제 투어를 얼마나하고 수익 배분은 얼마인지에 대한 문제를 벗어나 있다는 점을 배려했으면 한다"라고 맞받아쳤다.
이런 펑크 록 음악가들과 리스너들의 비판과 더불어 Presence가 매우 적게 팔린 것도 큰 문제였다. 멤버들은 Presnce 부진의 요인이 홍보 부족에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새 앨범을 발매하기 앞서 홍보를 목적으로 제11차 미국 투어를 돌기로 결정했다.
▲ 1977년. 제11차 미국 투어의 일환인 로스앤젤레스 라이브 당시 모습이다. |
제11차 미국 투어는 그 어느때보다도 큰 규모였고 1,2,3차로 나뉘어 진행될 예정이었다. 록 음악의 주도권이 핑크 플로이드와 섹스 피스톨즈로 넘어간 1970년대 후반에도 레드 제플린의 위상은 대단했고, 매 공연마다 5만명이 넘는 열광적인 관중들을 동원했다. 게다가 미시간주에서는 총 7만 6천명의 공연 관람객 기록을 세우면서 자신들이 세웠던 최대 관객수 기록을 또다시 깨버렸다. 동시에 8집 앨범을 위한 세션 기간에도 들어갔다.
하지만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지미 페이지는 헤로인에 심각하게 중독되어 저체중으로 인해 기타도 제대로 못쳤다.[37] 로버트 플랜트는 다리 재활이 성공적이지 못했는지 몸에 문제가 생겨 진통제를 복용하고 무대에 올라섰다. 공연장 관리인과 레드 제플린측이 서로 오해가 생겨 관리인이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이 때문에 경찰이 레드 제플린 관계자들이 묵고 있던 호텔 방에 들이닥쳐 존 본햄과 피터 그랜트, 리처드 콜을 체포하는 일도 있었다.[38]
이런 음울한 분위기에 정점을 찍은 것은 1977년 7월 26일에 터진 사건이었다. 뉴올리언스 공연을 준비하던 로버트 플랜트 앞으로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그 전화는 로버트 플랜트의 다섯 살배기 아들 캐락 플랜트가 호흡기 질환을 적절히 치료받지 못해 목숨이 위독하다는 전화였다. 두시간 뒤 다시 걸려온 전화에서 로버트 플랜트의 아내는 캐락이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날로 나머지 투어 일정은 취소되었다.
이 시점으로부터 사실상 레드 제플린이라는 밴드는 끝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야심차게 준비한 투어도 망해버렸고, 멤버간 결속도 상당히 약해졌다. 존 폴 존스는 피트 타운젠드, 데이비드 길모어와 함께 폴 매카트니의 신보에 참가했다. 그리고 지미 페이지는 극심한 헤로인 중독으로 생사를 오가는 와중이었고 존 본햄은 끝없는 알코올 중독에, 로버트 플랜트는 아들을 잃은 극심한 슬픔에 잠겼다[39]. 이 때문에 1978년 연초가 되어 언론들은 레드 제플린의 해체 가능성을 점쳤다. 예민해진 지미 페이지가 언론들에게 화를 내며 절대로 팀이 해체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일갈하긴 했지만 말이다.
1978년 11월이 되어서야 로버트 플랜트는 밴드에 돌아왔고, 아들의 죽음을 이겨내고 음악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 1년간 연기된 8집을 제작하는 과정에 들어갔지만 팀의 결속력은 매우 약한 상태였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지미 페이지가 리더로서의 역할을 사실상 방기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플랜트-페이지 간의 음악적 교감도 훨씬 적어졌고, 무엇보다 음악에 집중하지 못하고 헤로인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모습이었다.[40]
▲ 1979년. 네브워스 공연 직후의 모습이다. |
그래서 3주간 완성된 8집은 특별한 음악적 요소 없이 당시 유행하던 뉴 웨이브의 기조를 받아들여, 레드 제플린의 음악중 가장 끈적하고 헤비하지 않은 음반이 된다. 흥행은 Presence보다는 성공했으나 이도 저도 아닌 음악성으로 인해 발매 직후 안좋은 평을 받았다. 그래도 팬들과 멤버들 모두 네브워스 공연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레드 제플린을 반겼고 이후 8집 홍보를 위해 유럽 투어가 진행되었고, 동시에 1980년 투어도 기획되었다. 독일 투어 중간에 바나나 23개와 보드카 40잔을 마신 존 본햄이 제정신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간 것을 제외하면 투어는 전반적으로 제11차 미국 투어에 비해 흥행했다.[41]
6. 해체 (1980년)
1980년 9월 25일 존 폴 존스는 존 본햄을 깨우려고 윗층에 올라갔다가, 아무리 몸을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는 것에 이상함을 느껴 코에 손을 가져가대고는 존 본햄이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레드 제플린의 멤버들은 지난 밤 1980년대를 맞아 새로 준비한 미국 투어 일정을 위한 리허설을 한 뒤, 지미 페이지의 집에서 파티를 열었다. 존 본햄은 늘 그랬듯이 보드카를 말 그대로 폭음하였고 정신 없이 침대에 골아 떨어졌다. 과음을 한 상태였던 존 본햄은 자면서 구토하였지만 자신이 구토를 했다는 사실도 모른채 의식을 잃었고, 결국 토사물이 목을 막아 그대로 질식사하게 된 것이다.존 폴 존스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이 당시 흑마법에 심취해있던 지미 페이지는 존 본햄을 살려보겠다고 흑마법 주문을 읽기도 했으나 당연히 통할리 없었고 이후 지미 페이지는 흑마법에 관심을 완전히 끊었다고 한다.
처음에 이 상황에서 든 생각은 분노였어요. 모든게 허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생각이 들고, 본조의 죽음을 받아들였어요. 아무튼간에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존 폴 존스
존 폴 존스
레드 제플린을 유지하기 위해 존 본햄의 대타를 구한다는건,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그냥 존 본햄에 대한 모욕일 뿐이었어요.
지미 페이지
지미 페이지
▲ 존 본햄의 부고 소식을 담은 기사. |
존 본햄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이후 존 폴 존스는 밴드 탈퇴를 통보하였다. 존 본햄 없는 레드 제플린은 의미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언론에서는 필 콜린스, 카마인 어피스 등 존 본햄을 대신할 드러머를 예상하고 있었지만 지미 페이지는 이런 언론에게 불쾌감을 드러내며 존 본햄을 대신할 드러머를 찾는건 망자에 대한 모욕이라면서, 레드 제플린의 음악은 존 본햄 없이는 완성되지 않기 때문에 레드 제플린을 해체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이 1980년 12월 4일의 일이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물욕과 명예욕에 의한 이전투구와 배신이 넘치는 음악계에서 보기 드문 의리있고 깨끗한 결단이라며 칭송했다.
레드 제플린은 애틀랜틱 레코드 및 스완송 레코드와의 계약을 맞추기 위해 1982년 마지막 정규 앨범인 Coda를 발표했다. 이후 레드 제플린 명의의 정규 앨범은 발매되지 않고 있으며, 컴필레이션 앨범 몇장과 라이브 앨범 몇장만이 발매되었다.
7. 재결성을 위한 노력 (1981년 – 2007년)
7.1. 1985년 : 라이브 에이드
▲ 1985년, 임시 재결성 당시의 레드 제플린. |
사실 두 드러머 필 콜린스와 토니 톰슨 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의 상태도 엉망이었다. 우선 로버트 플랜트는 해체 이후 목 관리를 아예 안한건지, 최악의 보컬을 보여줬다. 지미 페이지는 공연 전 튜닝조차 되지 않은 기타를 받아 멘붕 상태였다. 다른 라이브 공연에서도 그랬지만 페이지는 라이브 에이드 공연에서 긴장했는지 잔실수도 엄청나게 했었다. 화룡점정으로, 밴드의 음악을 받쳐줘야 할 베이시스트 존 폴 존스는 사전에 그 어떠한 지시조차 받지 못한 상태였고, 그야말로 즉흥 잼을 하는 수준이었다. 이러니 공연이 잘 될 리가 없었고 주요 언론과 팬들로부터 최악의 공연이라는 타이틀을 받으며 난타를 당했다.[45]
▲ 1985년 라이브 에이드 미국 공연에서 연주된 "Rock and Roll". 그 처참함을 잘 볼 수 있다. |
레드 제플린이 재앙급의 공연을 보여준것과 달리 대서양 건너편에서는 수많은 밴드들이[46] 완벽한 공연을 해냈기 때문에 레드 제플린의 공연은 당초 예상과 다르게 완전히 파묻혀버렸다. 이에 대해 존 폴 존스, 로버트 플랜트, 지미 페이지 세 멤버가 만장일치로 1985년 라이브 에이드 공연을 최악중의 최악인 공연으로 꼽았으며, 이 일로 인해 레드 제플린의 재결성 논의가 완전히 쏙 들어가버리는 계기가 된다.
7.2. 1988년 : 애틀랜틱 레코드사 40주년 기념 공연
▲ 1988년 애틀랜틱 레코드 40주년 공연에서 연주하는 레드 제플린. |
1988년은 애틀랜틱 레코드사가 설립된지 40년이 되던 해였다. 포리너, 비 지스, 필 콜린스, 제네시스, 예스 등 유명한 뮤지션들이 모였는데 그중 가장 주목받던 밴드는 레드 제플린이었다. 레드 제플린은 1974년 애틀랜틱 레코드를 떠나 스완송 레코드를 설립했지만 전성기중 전성기였던 1~5집을 애틀랜틱 레코드와 한솥밥 먹던 시절 만들었던 만큼, 애틀랜틱 레코드사에서 40주년 공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다.
사실 애틀랜틱 레코드 사에서조차 레드 제플린 재결성에 대한 확신이 없었는데, 멤버들이 순순히 받아들여서 놀랐다고 한다. 공연 하루 전에 느닷없이 로버트 플랜트가 노래를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다된 밥에 재를 뿌릴 뻔 했지만, 지미 페이지가 사정 사정해서 겨우 무대에 섰고, 그렇게 3년만에 다시 레드 제플린의 공연이 이뤄졌다.
물론 100% 만족스러운 공연은 아니었고 85년 라이브 에이드만큼은 아니어도 실망스러운 공연이었다는 평이 있었다. 그러나 존 본햄의 아들인 제이슨 본햄을 드러머로 내세우고 악기 연주나 보컬에 있어서도 흠잡을데는 있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공연이 끝나고 멤버들도 만족하였는지,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도 공연이 끝난 이후 함박 웃음을 지으며 행복해했다고 주변 사람들이 증언했다. 특히 플랜트의 지인들은 플랜트가 “지미가 있었으면 이랬을텐데, 저랬을텐데”라며 폴 매카트니를 떠나보낸 존 레논처럼 행동했다며 거의 가족 같은 분위기였는데, 이번 공연으로 어느정도 그 그리움이 해소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이 이후 레드 제플린은 아주 오랫동안 재결성 공연을 하지 않았다. 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사이가 나빠진 것이 원인이었다.
7.3. 2007년 : Celebration Day
1995년 1월 12일 밴드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지금이야 로큰롤 명예의 전당이 그야말로 개나 소나 다 들어간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있긴 했지만 레드 제플린은 자격 연도가 되자마자 바로 입성한 것으로 그 의미가 남달랐다. 이는 70년대 초반 헤비메탈 3대장중 가장 빨리 헌액된 것으로, 나머지 두 밴드인 블랙 사바스는 2006년에, 딥 퍼플은 2015년(...)에 헌액되었다.[48]존 폴 존스는 "니들이 내 전화번호 기억해주다니 고맙다"라
그러던 2005년 자선 공연 라이브 8이 열렸다. 여러 아티스트들이 참여했지만 그중 가장 주목받던 뮤지션은 핑크 플로이드로, 무려 55억명이 인터넷 등으로 바라본 공연에서 열정적인 공연을 펼쳤다. 핑크 플로이드의 공연 직후 핑크 플로이드 주요 앨범들의 판매량은 무려 1,000%가 넘게 상승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집에서 TV로 한때 자신들의 라이벌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핑크 플로이드의 공연을 지켜본 로버트 플랜트는 매우 큰 감명을 받아, 레드 제플린의 재결성을 결정하게 된다.
▲ 2007년 Celebration Day에서의 공연. |
2007년 9월 12일 애틀랜틱 레코드사의 공동 창립자이자, 레드 제플린을 비롯한 많은 록 음악가들을 발굴해내 데뷔하는 것을 도와준 아흐메트 에르테군(Ahmet Ertegun)이 사망했다. 당연히 에르테군 추모 콘서트가 열렸는데 여기에 레드 제플린이 참여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는 사실로 드러났다. 로버트 플랜트는 지미 페이지와 존 폴 존스에게 재결성 콘서트에 참여할것이냐고 물었고 이 둘은 흔쾌히 승낙하며[49] 1995년 1월 명예의 전당 헌액 이후 근 13년만인 2007년 12월 10일 재결성 공연이 이뤄졌다.
12월 10일의 재결성 공연에서는 2,000만명[50]이 레드 제플린의 공연을 위해 예매를 시도했다. 이는 당시 전세계 인구의 0.3%(...)가 예매를 시도한 것이며, 동시에 기네스북이 인증한 역사상 가장 많은 콘서트 예매량으로 기록되게 된다. 공연은 레드 제플린의 재결성 공연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20년동안이나 묵혀온 희귀성도 있었지만 지미 페이지의 기타도 잔 실수가 적은 편이었고, 특히 로버트 플랜트는 목소리가 거의 완전히 회복되어서 Kashmir나 Rock and Roll 같은 곡들을 훨씬 웅장하게 불렀을뿐만 아니라 1970년대 중반보다도 더 높은 음정으로 불렀다.
7.4. 2007년 이후 재결성에 대한 논의
이후 2008년, 지미 페이지가 레드 제플린의 "Greatest Hits 'Mothership'"의 홍보를 위해 도쿄에 방문한 자리에서 '새로운 월드투어'를 계획중이다.'라고 발표하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레드 제플린의 공식적인 재결성을 기대하게 되었고, 이후 재결성은 거의 확정적인 듯 싶었으나, 2008년 중순에 로버트 플랜트가 GQ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재결성 투어 및 2007년 공연에서 그가 느낀 불쾌감을 이야기하면서 뭔가 엇나가게된다.결국 플랜트와의 재결성 협상이 결렬된 페이지와 존스, 본햄은 '뉴 레드 제플린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플랜트 없이 새로운 레드 제플린을 꾸려가려 했으나, 팬들의 적잖은 비난 여론 때문이었는지, 2008년 말에 "프로모터", "하비 골드스미스"와 지미 페이지는 이 계획이 '레드 제플린과 관계없는 새 프로젝트'라고 언급했다. 허나, 이 프로젝트마저 지미 페이지의 매니저 로버트 맨쉬가 "'몇몇 보컬들을 불러 테스트를 해봤지만 밴드는 프로젝트에 적합한 보컬을 찾을 수가 없었다.'라는 말이 나오면서 계획은 완전히 끝났다. 현재 그들은 어떠한 향후 계획이 없는 상태다."라고 밝힘으로서, 재결성에 관한 모든 것들은 현재 완전히 없었던 일이 되어 버린 상태이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페이지와 존스가 새 보컬로 염두에 뒀던 후보들 중에는 에어로스미스의 스티븐 타일러와 얼터 브릿지의 마일즈 케네디가 있었다고.
8. 이후의 이야기 (2007년 – 현재)
로버트 플랜트, 지미 페이지, 존 폴 존스 모두가 자신만의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중에서 로버트 플랜트가 가장 성공한 편이다. 로버트 플랜트는 상업성과 음악성에서 전성기가 지난 만큼, 레드 제플린만큼의 성과를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소소한 팬층들도 많이 확보했고 언론들로부터 발매한 앨범마다 찬사를 받았다. 음악에 대한 아이디어가 떨어질법한 60대에 들어서도 음악적 아이디어가 샘솟는지, 늙어서는 아메리카나와 포크 록, 컨트리는 물론이고 익스페리멘탈 록도 섭렵하였다. 그러면서도 상업적으로도 빌보드와 UK 차트에 꾸준히 앨범을 10위권 안에 랭크 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2007년 로버트 플랜트는 Raising Sand 앨범을 발매했으며, 이 앨범은 컨트리 부문 올타임 명반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2009년 그래미 어워드의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하는 등의 쾌거를 거뒀다.존 폴 존스와 지미 페이지는 별 다른 솔로 활동 없이 조용히 집에서 칩거하며, 레드 제플린과 관련된 정보들을 정리하고 가끔씩 TV에 출연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지미 페이지는 1980년대 초반 존 본햄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헤로인을 끊었지만, 코카인 중독을 끊지 못해 경찰에 체포되어 소식이 뉴스에 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재활에 성공하여 마약의 유혹을 이겨내고 건강한 삶을 되찾았다. 또 자신의 신비주의 이미지를 깨기 위해 2000년대 이후로는 TV에도 꾸준히 출연하고 있고, 2014년에는 버클리 음악대학의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2년 레드 제플린의 멤버들은 미국 문화에 대한 공헌을 했음을 인정받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케네디 센터 공로상을 수여받았다. 2013년에는 Celebration Day 앨범이 그래미 록 어워드에서 최고의 록 앨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레드 제플린의 멤버중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는 그들의 음악적 성취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영국 왕실 훈장을 수여받았다. 지미 페이지는 2005년 OBE 훈장을, 로버트 플랜트는 2009년 CBE 훈장을 수여받았다. 존 폴 존스는 아직 영국 왕실 훈장을 수여받지 못했다. 2011년 보수당 소속의 초선 서민원 의원인 루이스 멘시(Louise Mensch)의 주도로 레드 제플린 멤버들에 대한 기사 작위 수여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루이스 멘시 의원이 현재는 각종 논란들로 인해 의원직을 사퇴하고 사실상 정계를 은퇴한만큼 난항을 겪었고 결국 현재까지 어떤 멤버도 기사 작위를 받지 못했다. 최소한 지미 페이지는 브라이언 메이[52], 에릭 클랩튼과 더불어 도박 사이트에서 가장 기사 작위 수여 가능성이 높은 음악인으로 매년 꼽히고 있지만, 언제쯤 받을지는 미지수다.
마지막으로, 2019년 퀸의 전기영화인 보헤미안 랩소디와, 엘튼 존의 전기 영화인 로켓맨이 대박을 치면서 레드 제플린에 대한 전기 영화 제작 여부도 점쳐지고 있다. 지미 페이지는 이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의견을 드러냈다. 그러나 생각보다는 어려운 모양이며, 예전부터 레드 제플린을 소재로 한 영화 제작 문의는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의견차로 인해 번번히 무산되었다고 한다. 이번에도 지미 페이지는 진짜 나올지 말지는 알 수 없다고 답했고 아직 새 소식은 없는 만큼 조금 더 기다려야 구체적인 방안을 알 수 있을 듯하다. 롤링 스톤스에 맞먹는 난잡한 사생활과 멤버간의 불화로 인해 영화화가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도 있지만, 레드 제플린의 몇배는 되는 막장성을 보여준 글램 메탈 밴드 머틀리 크루[53]의 전기 영화도 2019년 개봉하여 팬들은 물론 멤버들에게도 찬사를 받았으니, 레드 제플린의 팬이라면 희망을 품고 영화를 기대해볼만하다.
9. 부록
9.1. DVD 영상 목록
<rowcolor=#333> 영상명 | 코드 | 발매일 |
The Song Remains the Same | Warner DVD 7321899 113892 | 1999년 12월 21일 2000년 6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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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d Zeppelin DVD | Warner 0349 70198-2 | 2003년 5월 26일 2003년 5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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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공연 목록
<rowcolor=#333> 투어명 | 기간 | 비고 |
제1차 유럽 투어 | 1968년 9월 7일 – 1968년 9월 24일 | [54] |
영국 공연 | 1968년 10월 | |
제1차 미국 투어 | 1968년 12월 26일 – 1969년 2월 15일 | |
1집 Led Zeppelin 발매 | ||
영국 공연 | 1969년 3월 | |
제2차 유럽 투어 | 1969년 3월 14일 – 3월 17일 | |
영국 공연 | 1969년 3월, 4월 | |
제2차 미국 투어 | 1969년 4월 18일 – 1969년 5월 13일 | |
제1차 영국 투어 | 1969년 6월 13일 – 1969년 6월 29일 | |
제3차 미국 투어 | 1969년 7월 5일 – 1969년 8월 31일 | |
파리/런던 공연 | 1969년 10월 | |
2집 Led Zeppelin II 발매 | ||
제4차 미국 투어 | 1969년 10월 17일 – 1969년 11월 8일 | |
제2차 영국 투어 | 1970년 1월 7일 – 1970년 1월 24일 | [55] |
제3차 유럽 투어 | 1970년 2월 23일 – 1970년 3월 12일 | |
제5차 미국 투어 | 1970년 3월 21일 – 1970년 4월 18일 | |
아이슬란드/영국 공연 | 1970년 6월 | [56] |
독일 공연 | 1970년 7월 | |
제6차 미국 투어 | 1970년 8월 15일 – 9월 19일 | |
3집 Led Zeppelin III 발매 | ||
제3차 영국-아일랜드 투어 | 1971년 3월 5일 – 1971년 4월 1일 | [57] |
영국/유럽 공연 | 1971년 5월 3일 – 1971년 8월 8일 | |
제7차 미국 투어 | 1971년 8월 19일 – 1971년 9월 17일 | |
제1차 일본 투어 | 1971년 9월 23일 – 1971년 9월 29일 | [58] |
4집 Led Zeppelin IV 발매 | ||
제4차 영국 투어 | 1971년 11월 11일 – 1971년 12월 15일 | |
제1차 오세아니아 투어 | 1972년 2월 16일 – 1972년 2월 29일 | |
유럽 공연 | 1972년 5월 | |
제8차 미국 투어 | 1972년 6월 6일 – 1972년 6월 28일 | |
제2차 일본 투어 | 1972년 10월 2일 – 1972년 10월 10일 | |
몽트뢰 공연 | 1972년 10월 | |
제5차 영국 투어 | 1972년 11월 30일 – 1973년 1월 30일 | |
제4차 유럽 투어 | 1973년 3월 2일 – 1973년 4월 2일 | |
5집 Houses of the Holy 발매 | ||
제9차 미국 투어 | 1973년 5월 4일 – 1973년 7월 29일 | [59] |
유럽 공연 | 1975년 1월 | |
제10차 미국 투어 | 1975년 1월 18일 – 1975년 3월 27일 | |
6집 Physical Graffiti 발매 | ||
얼스코트 공연 | 1975년 5월 17일 – 1975년 5월 25일 | [60] |
7집 Presence 발매 | ||
제11차 미국 투어 | 1977년 4월 1일 – 1977년 7월 24일 | |
덴마크 공연 | 1979년 7월 | |
네브워스 페스티벌 | 1979년 8월 4일 – 1979년 8월 11일 | |
8집 In Through the Out Door 발매 | ||
제5차 유럽 투어 | 1980년 6월 17일 – 1980년 7월 7일 | |
밴드 해체 | ||
9집 Coda 발매 | ||
라이브 에이드 | 1985년 7월 13일 | |
애틀랜틱 레코드사 40주년 기념 공연 | 1988년 5월 14일 | |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기념 공연 | 1995년 1월 12일 | |
Celebration Day | 2007년 10월 10일 |
9.3. 주요 부틀렉 목록
<rowcolor=#333> 제목 | 녹음일 | 녹음 위치 |
Live on Blueberry Hill | 1970년 9월 4일 | 잉글우드 로스앤젤레스 포럼 |
Burn Like a Candle | 1972년 6월 25일 | |
Destroyer | 1977년 4월 29일 | 크리블랜드 리치필드 콜리시엄 |
Listen to This, Eddie[61] | 1977년 6월 21일 | 잉글우드 로스앤젤레스 포럼 |
For Badgeholders Only | 1977년 6월 23일 |
10. 참조 문헌
- 키스 셰드윅 <레드 제플린> 2011 (한종현 역)
- 존 브림 <세상에서 가장 헤비한 밴드 레드 제플린에 대한 모든 것> 2009 (장호연 역)
- 로버트 다이머리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팝송 1001> (이문희 역)
- 사은국 <헤비 메탈 계보도> 2021
- 남무성 <Paint It Rock: 만화로 보는 록의 역사/1> 2010
- 정일서 <팝 음악사의 라이벌들> 2011
- 영어/독일어 위키백과의 Led Zeppelin 문서와 하위 앨범 문서들
- Fandom의 Led Zeppelin Wiki
- NME, Ultimate Classic Rock, uDiscover Music, Rolling Stone, Louder Sound, Farout Magazine 등의 음악 잡지들 1968-2020
[1] 1966년 비치 보이스와 비틀즈에 의해 시작된 사이키델릭 록 전쟁은 1967년 여름 이후 롤링 스톤스,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더 후, 크림, 제퍼슨 에어플레인, 도어즈, 핑크 플로이드, 서틴스 플로어 엘리베이터스 등 각종 밴드들이 끼어들어 혼잡한 양상을 보였다.[2] 그는 밴드의 창립 멤버이기도 했다.[3] 런던의 집값이 비싸서 배를 산 다음 배를 개조하여 집으로 만들어서 살았다고 한다. 이 집은 현재까지 보존되어있는데, 생각보다 엄청나게 크다. 피아노, 기타 연습실은 물론이고 오르간까지 넣어뒀고 개인 수영장까지 있었다.[4] 당시 존 본햄은 "본 조"라는 가명을 써서 지미 페이지는 처음에 존 본햄을 본 조라는 사람으로 알았다고 한다. 본 조비? 본명을 안 이후에도 제플린의 멤버들은 존 본햄을 본명보다 "본 조"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불렀다.[5] 레드 제플린 결성 초기에 찍은 사진들 중 그가 찍은 사진들이 많다.[6] 지미 페이지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도 "뉴 야드버즈"라는 이름을 싫어했다고 한다. 게다가 제프 백 등 야드버즈 전 멤버들 또한 더 이상 원년멤버도 없으니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했다.[7] 원래 스케줄은 스칸디나비아 투어 직후 미국 투어를 가는 것이었지만, 지미 페이지가 독감에 걸리는 바람에 쉬어야했다.[8] 대체로 비틀즈의 곡이었다고 한다.[9] 이 곡은 연주법 때문에 프로토 펑크로도 평가받는 곡이다.[10] 극단적으로 1집에서 레드 제플린이 직접 만든곡은 3곡밖에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머지 6곡은 리메이크 곡인데 이 중 일부 곡이 원작자 표기를 누락하여 표절 논란이 일었다. 이후에도 2집과 3집에서도 일부곡이 같은 이유로 표절 논란이 일었다.[11] 1967년 지미 헨드릭스의 하드 록이 미국보다 영국에서 더 큰 인기를 끌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약간 재미있는 일이다.참고로 지미 헨드릭스는 미국인이고 레드 제플린 멤버들은 전부 영국인이다. 1960년대 후반 레드 제플린의 등장 이후 뒤집어진 영국과 미국의 음악 선호 차이는, 1980년대 미국 글램 메탈의 인기 폭발 이후 완전히 갈라졌다. 이 때문에 하드 록과 헤비 메탈의 인기가 아직도 엄청난 미국에서는 레드 제플린을 고평가하는 평론가들과 리스너들이 많다.[12] 이 날 관객으로 존 레논, 에릭 클랩튼, 제프 백, 로저 달트리가 왔다고 한다.[13] 정작 레드 제플린 멤버들은 존 본햄을 제외하면 다들 꽤 잘사는 집안의 자제들이었다.[14] 다만 지미 페이지도 3집의 커버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15] 3,200만장이 팔린 Abbey Road와, UK 차트에서 누적 33주간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한 Bridge Over Troubled Water 사이에 끼어있었으며, 중간에는 롤링 스톤스의 Let It Bleed와도 경쟁해야했다.[16] 이 때부터 조만간에 발매될 4집을 홍보할 겸 신곡인 Black Dog, Rock and Roll, Stairway to Heaven, Going to California를 공연 셋리스트에 포함시켰다. 물론 후술할 문제로 인해 이 노래들은 대중들에게 공개된지 8개월이나 지나서 정식발매되었다.[17] 헤들리 그레인지 개조에 돈을 많이 써서 돈이 얼마 없었다고 한다(...).[18] 그나마 When the Levee Breaks는 상태가 준수해서 8개의 트랙중 유일하게 선셋 스튜디오 녹음본으로 발매되었다.[19] 1970년대 초반은 이탈리아 공산당과 네오 파시스트들의 위세가 가장 강력했던 시점이었다. 후일 전직 이탈리아 총리인 알도 모로를 납치해 살해한 붉은 여단이 활동하던 것도 1970년대 초반이다.[20] Smoke on the Water에 나오는 그곳이 맞다. 만약 예정대로 진행되었다면 프랭크 자파의 공연 도중 조명탄으로 스테이지가 홀라당 타버리기 전 레드 제플린이 그곳에서 공연을 했을 것이다.[21] 이 당시에는 개인 컴퓨터는 고사하고 인터넷 같은 것도 없었기 때문에 100% 실물 판매였다. 24시간 내 매진은 정말 대단한 기록인 것이다.[22] 원래 앨범 커버를 제작하는 회사가 아니었지만, 회사 창립자 두명이 핑크 플로이드 멤버들의 부랄친구였고, 이 인연으로 앨범 커버 전담 회사가 된 것이다.[23] 이 역시도 힘든 작업이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난 것이 1970년대의 북아일랜드로, 가톨릭 교도와 성공회 교도 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때였다. 이때는 거의 대부분의 음악가들이 정치적 불안정을 이유로 북아일랜드 투어를 취소했었다. 로리 갤러거가 아일랜드의 국민 기타리스트로 대접받게 된 것도 1973년 벨파스트 투어를 유일하게 취소하지 않은 아티스트였기 때문이다.[24] 아닌게 아니라 핑크 플로이드는 모형 비행기에 불을 붙여 스테이지에 추락시키는 등 각종 첨단 기술을 동원해 유행을 선도하고 있었다.[25]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에 따르면 이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여장 남자였다고 한다.네?[26] 참고로 이 기타는 1970년 3집 발매 전에 잃어버린 것으로, 지미 페이지의 기타에 대한 애정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27] 여담이지만 첼시는 런던 내에서도 가장 집값이 높은 지역이다. 한국으로 치면 일개 밴드가 강남 삼성동에 있는 건물을 통째로 사서 자신만을 위한 출판사를 만드는 격으로, 이 당시 레드 제플린의 규모를 짐작케한다.[28] 촬영 과정에서 미스가 있었으며 매니지먼트상의 문제, 페이지의 감정 싸움까지 섞여서 그야말로 개판이었다.[29] 심지어 Immigrant Song은 이때를 기점으로 셋리스트에서 완전히 빠졌다.[30] 물론 그 대신 How Many More Times를 다시 셋리스트에 포함시켰다.[31] 존 본햄도 플랜트-페이지의 친목질로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플랜트나 페이지와는 매우 친한 사이였다.[32] 이외에도 갑자기 여성 기자의 옷을 찢어버리는 등 매우 좋지 않은 술버릇을 갖고있었다고 한다.[33] 이게 그냥 세금도 아니고, 무려 수익의 95% 이상을 뜯어갔다. 이런 말도 안되는 고소득자 조세 제도를 비판한 곡이 조지 해리슨의 곡인 "Taxman"이다. 이 제도는 1980년대까지 이어지다가, 마거릿 대처가 집권한 이후 사라진다.[34] 이언 앤더슨의 조상은 중세 시절 대대로 벽돌공이었다.[35] 폴 매카트니와 롤링 스톤스가 이 앨범이 발매된것과 거의 동시에 같이 앨범을 냈다(...). 다만 당시 롤링 스톤스도 레드 제플린과 마찬가지로 침체기였으나, 두 밴드 전부 빌보드 200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침체기 맞냐[36] 다만 후에 본인은 가장 좋아하는 앨범 중 하나로 Physical Graffiti를 꼽았으며, Kashmir도 자주 들었다고 한다.[37] 이 당시 위경련으로 인해 공연도중 무대에서 쓰러지기도 했다. 공식적인 이유는 식중독이었지만 헤로인 부작용이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38] 실제로 레드 제플린이 투어도중 경찰이 찾아오는 경우는 꽤 많았다고 한다. 하루는 한 남자가 공연장에서 대놓고 커다란 마이크와 녹음기를 들고와서 설치하는데 이를 부틀렉 제작으로 오해한 피터 그랜트가 그자리에서 장비를 그 남자에게 집어던져 부숴버렸다고 한다. 근데 알고보니 이 사람은 밴드 공연 시에 발생하는 소음을 측정하러온 공무원이었고 바로 그자리에서 경찰에 공무집행방해로 신고했으나 피터 그랜트가 사죄하고 장비도 전부 배상해주면서 넘어갔다고 한다.[39] 여담으로 지미 페이지와 존 폴 존스는 개인사정을 빌미로 로버트 플랜트 아들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는데 이게 큰 상처로 남았다고 한다. 장례식이 끝나고 존 본햄과 대화하며 "난 지금까지 그들을 존중했지만 그들은 날 존중해주지 않았어, 그들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만큼 나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아."라며 실망감을 드러냈다고.[40] 이 때문에 8집은 지미 페이지의 작곡 스타일이 상대적으로 덜 묻어나며, 존 폴 존스의 작곡 비중이 매우 커졌다. 또한 All My Love처럼 지미 페이지가 작곡에 일절 참여하지 않은 곡도 존재한다.[41] 참고로 레드 제플린이 마지막으로 공연한 날이 1980년 7월 7일인데 이날은 밴드의 전신인 야드버즈가 마지막 공연을 한지 12년째 되는 날이었다.[42] 오히려 라이브 에이드의 최대 수혜자였던 퀸은 음악적 침체기, 멤버간 갈등 등으로 인해 라이브 에이드 참가 여부조차 불확실했다. 반면 레드 제플린은 라이브 에이드에 참여할 것이라는 소문이 쫙 돌던 상태였다. 둘의 운명이 완전히 바뀐거다.[43] 당대 최고의 세션 드러머로 이름높던 시크, 파워 스테이션의 드러머 토니 톰슨이었고 공연 당시 필 콜린스와 같이 드럼을 맡았지만...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와의 합의 하에 공연당일 잼과 리허설까지 마쳤으나 만만치 않게 실수를 많이 했다.[44] 원곡의 드러머인 존 본햄을 발탁한 로버트 플랜트와 솔로시절 같이 활동한 경험도 있고, 장르를 가리지 않는 최고의 파워 드러머로 유명한 필 콜린스였지만 라이브 에이드에서도 레드 제플린의 공연에서만 유독 실수를 많이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로 인하여 라이브 실력 논란까지 터지기도 했으나 토니 톰슨 수준의 베테랑도 헤맬 정도였으니 필 콜린스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었던 셈. 둘 다 같은 날에 치러진 파워 스테이션의 무대나 에릭 클랩튼의 무대에서는 흠잡을 데 없는 기량을 보여줬던 것을 감안한다면 그냥 레드 제플린과의 공연에서만 손발이 안 맞았었는지도...?[45] 그래도 이 건으로 서로간에 크게 뒤끝은 없었는지 토니 톰슨, 필 콜린스와 레드 제플린 멤버들의 친분은 계속 이어졌다.[46] 퀸이 가장 유명하지만 다이어 스트레이츠, U2 역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47] 실제로 레드 제플린의 전기영화가 개봉한다면 대미를 장식하는 공연은 2007년의 Celebration Day 라이브일 가능성이 크다. 상징성으로 보나 공연의 퀄리티로 보나 라이브 에이드 공연보다 월등하다. 물론 그냥 존 본햄의 사망과 함께 밴드가 해체하며 끝날 수도 있다. 아무래도 퀸의 경우와 다르게 밴드가 아예 해체했다가 재결합하는 공연인데 그 전에 재결합 공연이 없던 것도 아니기 때문. 그렇다고 중간에 있던 공연들을 전부 무시하고 27년을 갑자기 건너뛰면 전개가 이상해질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전에 했던 재결합 공연들은 하나같이 라이브 상태가 좋지 않다. 그게 아니라면 1979년 네브워스 공연으로 끝내는 방법도 있긴하다.[48] 딥 퍼플과 블랙 사바스는 멤버들이 너무 많아서 어떤 멤버를 헌액시키고, 어떤 멤버를 헌액시키지 말지에 대해 논의가 엄청났으며 그중에서 특히 딥 퍼플은 멤버들까지 치고 받고 싸우는 안좋은 모습을 보였다. 2015년 겨우 겨우 헌액을 받았을 때도 이안 길런과 브루스 페인(딥 퍼플의 매니저)이 리치 블랙모어를 축하 공연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해프닝이 있었을 정도다.[49] 사실 레드 제플린의 재결성 역사를 보면 지미 페이지는 언제나 재결성을 바라고 있는데, 로버트 플랜트는 지미 페이지와의 사적인 이유라던가 독창적인 솔로 활동을 하고 싶다는 음악적 이유 등 많은 이유들로 번번히 재결성을 거부해왔었다. 즉 로버트 플랜트만 준비되면 레드 제플린의 재결성은 사실상 확정인 것.[50] 2,500만명이라고 하는 곳도 있는데, 일단 기네스북은 2천만명으로 기록한다.[51] 이에 대해 멤버들의 친구인 믹 재거는 이들이 재결성 공연 이후 어느 투어도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레드 제플린의 팬으로서 실망했다고 밝힌 바 있다.[52] 2023년 기사 작위 수여.[53] 보컬이 마약+음주 운전으로 동료 뮤지션을 교통사고로 죽이고, 베이시스트가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2분간 사망 판정을 받았다가 되살아난 그 밴드 맞다. 사실 이들에게는 더 떨어질 이미지가 없었기 때문에 비교적 이런 어두운 부분도 잘 묘사할 수 있었다고(...).[54] 뉴 야드버즈로 홍보[55] 로버트 플랜트의 교통사고로 인해 실질적으로는 17일부터 시작[56] Immigrant Song과 Since I've Been Loving You의 초연 공연[57] Stairway to Heaven의 초연 공연[58] 멤버들이 히로시마 평화상을 수상[59] The Song Remains the Same 촬영[60] 로버트 플랜트의 교통사고로 인해 투어 잠정 중지[61] 여기서 Eddie가 지미 페이지의 라이브 연주를 비판한 에디 밴 헤일런을 가리킨다는 소문이 있으나 근거 없는 루머임이 거의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