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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레이터 런던 소속의 보로는 아니다. | }}}}}}}}} |
첼시 Chelsea | |||
켄징턴-첼시 왕립구(밝은 적색과 노란색 구획 부분) | |||
지역 | 그레이터 런던 켄싱턴-첼시 왕립구 | ||
시간대 | UTC+0(서머타임 준수) | ||
인구 | 41,440명[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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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잉글랜드 런던의 켄싱턴-첼시 왕립구(Royal Borough of Kensington-Chelsea)에 속해있는 템스강북 서남부. 첼시 브릿지에서 첼시 둑방길을 따라 구 롯츠 화력발전소부터 첼시 항구까지를 말한다. 동쪽에 웨스트본 강이 있고 슬로언 스퀘어 역[2]이 중심가다. 켄징턴[3]을 제외한 면적은 약 6㎢, 인구는 약 40,440명이다.2.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한 건 787년 앵글로색슨 7왕국 시기 머시아 왕이 설치한 장원으로서다. 머시아 왕은 첼시에 지방 법원을 설치하고 리치필드 교구를 둬 매년 365냥의 금화를 교황에게 보내도록 했다. 그것이 당시 영국이 교황에 내는 세금이었다고. 웨스트민스터 주교 공관도 첼시에 있었다.노르만 왕조 이후 솔즈베리 백작 겸 켄징턴 백작 오브리 드 베어(Aubrey de Vere)가 봉토를 받은 1086년에 다시 첼시가 등장한다.
헨리 8세는 1536년 산디스 경에게서 첼시를 뺏어 직할로 두고 별궁을 지어 아내들을 차례로 살게 했다. 그의 딸 엘리자베스 1세가 첼시 별궁에서 태어났고 토머스 모어도 첼시를 거쳐갔으며[4] 제임스 1세는 첼시에 신학대학[5]을 지었다.
1694년부터도 부촌이었고 많은 별궁들이 세워져 호화로움을 뽐냈다. 그러나 당시 런던이 크지 않았던 시절이라 텃밭, 과수원이 있기도 한 인구 3천 정도의 교외였다. 본격적으로 인구 붐이 일어나고 번화가가 되기 시작한 건 현재 리틀 첼시로 불리는 지역에 신시가지가 들어서고 현 해머스미스-풀럼 자치구의 풀럼까지 가도가 연결돼 항구가 생긴 1700년대부터였다.
찰스 2세는 현재 킹즈로드라 불리는 거리를 닦았고 해머스미스-풀럼 자치구의 풀럼까지 왕도[6]를 놓았다. 첼시 구청도 번듯하게 들어섰고 공립 도서관도 설치돼 문화적으로도 융성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를 기록한 브리태니커 사전엔 '(첼시의) 동쪽에 더 좋은 거주 조건이 구비돼 있으며 서쪽의 슬로언 거리부터 템스강을 따라 풀럼 가도까지 연결되는 곳 주변은 상대적으로 가난하다'고 기록됐다.
1889년 이전에는 미들섹스주 소속이었다. 링크
셰인 거리에 살던 작가 존 새뮤얼 펜(John S. Phene)은 자택과 정원 곳곳에 오브제를 설치하고 '생강빵의 성'이라 불렀다. 1912년 타계한 후에도 오브제는 거리에 생기를 불어넣다 1924년 철거됐다.
켄싱턴-첼시 왕립구는 본래 켄싱턴으로 불릴 예정이었으나[7] 첼시 지역구 국회의원 존 리치필드(John Litchfield)가 런던 행정구역 개편 담당자 키스 조세프(Keith Sinjohn Joseph)에게 첼시 명칭을 유지하라 압박해 '켄싱턴-첼시 왕립구'란 명칭이 됐다.
2.1. 지명 어원
첼시의 어원은 고대 영어로 석회암이 들어오는 항구란 뜻의 Chelchehithe에서 유래되었다.2.2. 예술가들의 자치구
첼시가 처음 유명해진 건 런던의 전위예술 중심지로서였다. 이 때문에 예술가들의 자치구라는 별명이 있다. 빅토리아 시대부터 첼시 예술대학 졸업생을 중심으로 셰인 워크, 셰인 로우, 소위 라파엘 전파[8]로 알려진 19세기 중반의 전위적 예술 그룹들로 시작해 각종 극단주의자들과 새로운 사조를 모색하는 화가, 문인이 모여들었고 이들의 개혁 성향은 매너리즘에 빠진 영국 연예계를 뒤흔들었다. 미국 등지에서도 새로운 예술을 찾아 방황하던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첼시 공립 도서관에 모여 예술을 논했다.조지 메리디스, 알저넌 찰스 스윈번, 레이 헌트, 조너선 스위프트, 토머스 카일라일이 처치 스트릿 근처에 모여살며 첼시를 빛냈고 리처드 스틸, 토비아스 스몰렛, 버지니아 울프도 첼시에서 작품활동을 했다. 1907년 아서 랜섬이 지은 보헤미아 인 런던은 전위예술가들의 성지 첼시에 대한 동경과 찬사로 가득하다.
1960년대 첼시는 다시 한 번 문화적으로 퀀텀 점프를 하는데 이들이 바로 스윙잉 첼시[9]로 불리던 집단으로 1970년대 초까지 번성했다. 이들은 킹즈로드를 중심으로 전위적인 예술 활동은 물론 자유로운 숍과 펍 등을 열어 트렌드를 주도했다. 가장 유명한 인물이 섹스 피스톨즈를 매니징하고 제작한 종합 공연 제작자 말콤 매클라런과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로, 이들은 'Sex'란 이름의 편집숍을 열고 당대 유명 연예인들과 다양한 문화 이벤트를 열었다. 성공에 성공을 거듭해 특히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영국 왕실로부터 2등 기사 훈위까지 받는 거물로 큰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브라이언 존스, 믹 재거, 키스 리처즈 등의 연예인은 물론 리버풀에서 결성된 비틀즈도 킹즈로드에 살았고, 킹즈로드는 까르띠에, 티퍼니 앤 코, 돌체 앤 가바나 등 명품들이 모이는 곳이 되어 영국 신문의 연예, 사회면은 첼시에서 다 만들어진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1974년 IRA 테러리스트가 벌인 폭탄 테러에 20명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현재 부자만 살 수 있는 곳이 된 첼시는 영국의 하이 컬쳐를 대변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2.3. 역사적 소재 시설
2.3.1. 로열 종합병원
첼시하면 떠오르는 주민층은 로열 종합병원 근처의 레드 코트 출신 은퇴 군인들이다. 로열 종합병원은 1682년 프랑스의 군인 복지 시설 '오뗄 드장빌리드 드 파리[10]'를 모델로 찰스 2세에 의해 설립, 크리스토퍼 렌 경(Sir Christopher Wren)의 설계로 1689년부터 가동을 시작해 476명의 은퇴 군인을 받았다. 2차 대전 때 피해를 입지만 빌딩 본관은 그대로 남아 찰스 2세의 동상과 함께 현존한다. 현재도 입원 경쟁이 치열해 영국 은퇴 군인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라고.2.3.2. 첼시 가마터
첼시 도자기 공작소[11]는 1745년 건립됐다. 니콜라스 스프리몬트(Nicholas Sprimont)가 운영했던 가마 공장은 영국 도자기 산업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그전에도 가내 수공업 형태로 요지(窯址)가 이미 있던 첼시는 런던의 도자기 수요를 모두 감당함은 물론 수출에도 크게 기여했다. 원래 로렌스 스트리트[12]에 있던 가마터는 1784년 더비로 이전돼 현재까지 내려온다.2.3.3. 첼시 피직 가든
현재도 많은 약용 성분이 연구되는 연구용 식물원 단지 피직 가든은 1676년 제약 회사 애포스캐리 컴퍼니[13]가 쉐인 경(Sir Cheyne)의 땅을 빌려 지었고, 1722년 아예 한스 슬로언 경(Sir Hans Sloane)이 애포스캐리 컴퍼니에 기증했다. 여기서 채취된 목화씨가 1732년 신대륙으로 보내져 현 미국의 조지아주의 목화 산업을 일으켰다.2.3.4. 래닐러 가든
Ranelagh Gardens는 1689년 앵글로 아이리시[14]출신 귀족 래닐러 백작(The 1st Earl of Ranelagh)의 소유지에 세워진 예술 정원으로, 실제 건립자 겸 설계자는 이탈리아 출신 유대계 상인 솔로몬 리에티(Solomon Rieti). 그의 누이가 훗날 영국 수상 디즈레일리의 할머니 레베카 리에티다. 원래 로코코 양식의 귀족적 풍취의 정원으로 사유지였으나 1742년 일반에 공개된다. 당시 입장료는 2실링 6펜스로 결코 싸지 않은 가격이었다고. 강건너 케닝턴의 복스홀 가든과 라이벌 관계에 있는 우아한 정원이었다. 정원 중앙의 로코코 로툰다 홀이 유명하다.3. 지리
동으로는 웨스트민스터, 서로는 해머스미스-풀럼, 남으로는 템스강을 마주보는 원즈워스, 북으로는 웨스트민스터와 브렌트와 접한다.주변에 고급 주택과 해외 대사관들이 모여있다.
4. 생활·문화
킹즈로드 쇼핑센터와 피터 존스 백화점, 카도건 홀, 로열 코트 극장(Royal Court Theatre) 등 문화 시설이 많아 예술가들이 많이 거주한다. 주로 킹즈로드 주변에 거주했던 1960년대 예술가들이 '스윙잉 런던[15]'이란 패션 트렌드를 주도했다.킹즈로드는 섹스 피스톨즈가 결성된 곳으로 유명한 'Sex' 숍이 이 거리 430번지에 있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컨셉숍이다.
펫 샵 보이즈가 이곳에서 결성되었다.
레드 제플린이 이곳에 스완 송 레코드를 설립했다.
칵테일 사이드카의 변형인 첼시 사이드카가 있다.
21세기에는 이런 모습이다.
런던의 주요 부촌 중 하나로 옆동네 해머스미스-풀럼 자치구의 풀럼과 함께 비싼 집세를 자랑한다. 집값이 급등하기 시작한 건 1970년 초부터로 당시에도 사회적 이슈였다. 이때 첼시에 급격히 늘기 시작한 영앤리치는 'Sloane Rangers'로 불렸다. 비싼 집값이 문제되지 않는 외국인 부자들도 많이 거주하고 특히 미국인이 많다. 인구 약 6.5%가 본적이 미국이라고.
첼시를 포함한 런던 도심부 행정 구역 지도 | 런던의 양극화를 풍자한 그림(적색 부분이 첼시) |
4.1. 교육
5. 관광지
- 킹스로드(King's Road): 왕의 길이라는 뜻이다. 첼시 지역과 현 해머스미스-풀럼 자치구의 풀럼 지역 사이에 위치해 있다. 번화가이다. 18세기에 발간된 지도에 의하면 당시엔 Stanford Creek라 불리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 개울엔 다리가 두 군데 놓여있었고 그 중 하나가 이쪽에 있었으며 그 다리는 Stanbridge라고 불렸다. 나머지 하나는 스탬퍼드 다리(Stanford Bridge)(혹은 Little Chelsea Bridge)라고 불리며 첼시 FC의 홈구장인 스탬퍼드 브리지가 있는 풀럼 로드쪽에 있다. 오버워치의 맵 왕의 길의 모티브가 되었다.
6. 정치
자세한 내용은 첼시&풀럼 문서 참고하십시오.7. 매체
- 메이드 인 첼시: 이 지역의 젊은 중상류층 주민이 출연한 리얼리티 쇼로 채널 4에서 방영해 인기를 끈다.
8. 출신 인물
자세한 내용은 분류:첼시 출신 인물 문서 참고하십시오.9. 기타
- 첼시 FC의 연고지는 이곳이 아닌, 해머스미스-풀럼 자치구의 풀럼이다. 물론 풀럼도 런던 최부촌[16]이고 첼시 FC의 홈구장 스탬퍼드 브리지가 풀럼과 첼시의 접경지에 위치해있어 첼시 FC의 이름에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한국으로 치면 강남 FC란 팀이 강남역 사거리의, 서초구에 속한 서쪽 블럭[17]에 홈구장이 있는 셈.
- 수도 내의 부촌이라서 대한민국으로 치면 서울특별시의 강남3구(서초구, 강남구, 송파구)와 비슷하다. 종종 첼시를 '런던의 강남'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만 첼시는 템스강 북쪽에 있기 때문에 서울로 치면 강북 지역에 위치해 있다. 사실 선거구인 첼시&풀럼이 서울의 강남3구와 비견되기 때문에 이보다 범위가 좁은 첼시는 서울로 치자면 용산구 한남동이나 동부이촌동에 더 가까운 곳이다.
- 서양에서는 찢어진 입을 가리켜 Glasgow Smile(글래스고 스마일)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글래스고와 첼시의 갱단이 날카로운 유리 조각으로 입을 찢어 놓는 것에서 유래했다. 이 때문에 다른 단어로는 Chelsea grin, Chelsea smile 등이 있다.
[1] 2017년 기준[2] Sloane Square tube station, 1868년 건설[3] 철자(Kensington)만 보면 '켄싱턴'으로 발음될 것 같지만, 실제 발음은 '켄징턴'에 가깝다.[4] 1520년 Beaufort House란 과수원이 딸린 대저택을 짓고 업무에 지칠 때마다 와서 쉬었다고. 보퍼트 하우스는 토머스 모어가 처형된 후 몰수되고 여럿 주인이 바뀌다 1740년에 헐려 1766년 보퍼트 스트리트란 거리 이름이 돼 현재에 전한다. 호주의 퍼스에도 동명의 거리가 있다. 1528년 토마스 모어가 보퍼트 하우스 근처에 지은 작은 가톨릭 예배당은 그의 무덤을 겸하다 1940년 나치 공습에 사라진다.[5] King James' College at Chelsea. 1682년 찰스 2세가 헐고 왕립 첼시 병원을 지었다.[6] 훗날 조지 4세 때까지도 왕만 다닐 수 있는 도로였다.[7] 행정구역 개편 당시 이중명칭이 금지돼 '켄싱턴-첼시'같은 이름은 허용되면 안됐다.[8] Pre-Raphaelite Brotherhood[9] Swinging Chelsea[10] the Hotel des Invalides de Paris[11] Chelsea Porcelain Works[12] Lawrence Street[13] the Apothecaries Company. 영국 약제원[14] 영국에 항복하고 귀화한 아일랜드인. 구한말 친일파들이 일본 황실로부터 화족 작위를 받았듯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등의 항복한 귀족들은 귀족 작위를 받았다. 래닐러의 영국식 이름은 리처드 존스.[15] 메리 퀀트의 미니스커트가 대표적인 이미지.[16] 첼시 FC의 지역팬들은 프리미어리그 팬층 중 가장 수입이 크다.[17] 강남역은 서초와 강남 경계에 있어 서쪽 블럭은 서초구에 속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