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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BC9B7><colcolor=#333> Plant and Page 플랜트-페이지 | ||||||||||
▲왼쪽부터 로버트 플랜트, 지미 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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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owcolor=#333> 1970년대, 레드 제플린 시절의 사진. | 1998년, Page and Plant 시절의 사진. | |
<rowcolor=#333> 2012년, 재결성 후의 사진. |
비틀즈의 레논-매카트니, 롤링 스톤스의 재거-리처즈와 함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사-작곡 콤비이자, 사실상 최초의 보컬-기타 콤비이다.[1] 레드 제플린이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인기 밴드 중 하나가 된 데에는 존 폴 존스나 존 본햄의 역할도 컸지만, 이 두 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흔히 플랜트-페이지라고 하지만 재거-리처즈나 레논-매카트니와 다르게 이들은 공동 크레딧이 없다.[2] 또한 존 본햄이나 존 폴 존스 역시 밴드의 작사/작곡에 많은 기여를 한 것이 특징이다. 이 둘의 비중은 조지 해리슨이 비틀즈에서 한 역할[3] 혹은 찰리 와츠가 롤링 스톤스에서 한 역할보다 훨씬 컸다. Rock and Roll이나 Moby Dick 등과 같은 레드 제플린의 수많은 명곡들은 플랜트-페이지뿐만 아니라 존 본햄과 존 폴 존스의 손을 닿으면서 탄생한 것이기 때문에, 플랜트-페이지는 레논-매카트니나 재거-리처즈와 1:1로 대응되는 콤비는 아니다.
플랜트-페이지는 단순한 음악 콤비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각자의 분야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능력자들이라는 점에서도 고평가받는 콤비다. 또한 이 둘은 레드 제플린 해체 이후 1994년부터 1998년까지 4년동안 Page and Plant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2. 음악성
자세한 내용은 레드 제플린/평가와 영향력 문서 참고하십시오.Immigrant Song 라이브. | Going to California 라이브. |
음악적으로는 블루스를 기반으로 하여 다양한 음악을 선보였다. 특히나 플랜트-페이지의 특징이라고 하면 블루스의 음압을 빡세게 올려서 블루스를 더 하드하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 작업의 결과물들은 이후에 등장한 헤비 메탈의 시초가 되었다.
플랜트-페이지가 작사한 곡들의 가사는 문학적이기로 유명하다. Stairway to Heaven부터 시작해서 Kashmir, Immigrant Song 등 플랜트-페이지의 대표곡들의 가사는 수많은 평론가들과 팬들에게 ’로버트 플랜트가 아니면 쓸 수 없는 가사‘라며 호평을 받았다.[5]
3. 음악적 영향력 및 평가
플랜트-페이지는 롤링 스톤스의 재거-리처즈, 더 후의 달트리-타운젠드와 더불어서 보컬과 기타를 분리해 히트를 친 거의 최초의 듀오였다. 물론 앞서 서술한 재거-리처즈나 달트리-타운젠드는 각각 데뷔 년도가 1963년과 1965년으로, 플랜트-페이지의 데뷔 년도인 1968년보다[6] 시기적으로 앞서기는 한다. 그러나 재거-리처즈나 달트리-타운젠드 콤비에서는 기타리스트도 메인 및 배킹 보컬을 맡거나, 보컬리스트도 세컨 기타를 맡는 경우도 꽤 많았다.[7] 즉 아예 보컬은 보컬대로 기타는 기타대로 각자의 역할만 분담하게 완전히 분업시키고, 이러한 방식을 훗날에 대중화시킨 듀오는 플랜트-페이지였다. 그래서 후에 퀸이 처음 데뷔하였을때, 보컬과 기타가 철저하게 분리된 퀸의 음악을 보고 평론가들이 플랜트-페이지의 짝퉁이라고 많이 깠다.[8]음악사적으로도 보컬과 기타를 분리해 내세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기도 하지만, 각 세션을 플레이하는 능력에 있어서 플랜트-페이지를 따라가는 콤비가 거의 없다는 점 역시 이들이 고평가를 받는 이유다. 잘 모르겠으면 1970년 로얄 알버트 홀 라이브나 1973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 라이브[9]를 보도록 하자. 4옥타브까지 내지르는 로버트 플랜트의 보컬과, 난폭한 메탈 사운드의 대부분을 정립한 지미 페이지의 환상적인 기타 실력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팬들이 열광할 만하다. 이렇게 플랜트-페이지가 정립한 강력한 보컬과 난폭한 메탈 사운드는 후대의 수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퀸, AC/DC, 밴 헤일런, 에어로스미스, 본 조비 등 하드 록 및 헤비 메탈 밴드의 대다수는 이들의 창법 및 연주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10] 심지어 얼터너티브 록의 선구자로 알려진 커트 코베인도 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기타를 치면서 실력을 쌓았다고 한다. 또한 국내에서는 김종서, 김경호, 김태원 등의 록스타들은 물론이거니와,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이적 등의 아티스트들 또한 자신의 음악적 뿌리는 레드 제플린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후 이와 같은 작사-작곡, 보컬-기타 콤비는 밴 헤일런의 데이비드 리 로스-에디 밴 헤일런, 더 스미스의 조니 마-모리세이 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특히나 건즈 앤 로지스의 액슬 로즈-슬래시는 거의 플랜트-페이지의 재림에 가까울 정도로 흡사했는데, 슬래시가 레스폴 성애자인 점과 액슬 로즈가 4옥타브까지 내다지르는 금발 장발 보컬의 소유자였다는 점 때문에 플랜트-페이지와 많이 비교되는 편이다.[11]
플랜트-페이지는 프론트맨으로서의 평가도 매우 높다. 이 둘은 콤비가 아주 잘 맞았는데,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수만 명이 모인 라이브 공연에서도 두 명이서 관객들을 아주 잘 조련해나가면서 후대 록 뮤지션들의 퍼포먼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롤링 스톤스, 더 후와 더불어 대다수의 록 뮤지션의 퍼포먼스들에 영향을 끼쳤을 정도. 특히나 브라이언 메이의 인터뷰에 따르면,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프론트맨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프레디 머큐리도 라이브에서 언제나 로버트 플랜트를 따라하려고 했다고. 그렇기에 역대 최고의 프론트맨을 꼽자면 플랜트-페이지는 반드시 거론된다.
4. 그 외의 특징
1975년 얼스 코트에서 |
- 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는 핑크 플로이드의 워터스-길모어와 더불어 영국 록 밴드 내에서 드문 중산층 출신 콤비이기도 하다. 로버트 플랜트는 밴드 보컬이 되기 전에 문법 학교를 나온 뒤 공인회계사 공부를 했고 지미 페이지는 아버지가 공장의 인사관리자였다고 한다. 여담으로 레드 제플린에서 존 폴 존스도 중산층 출신 음악가[12]라서, 밴드 내 워킹 클래스라고 부를만한 인물은 학교를 중퇴하고 목수로 일했던 존 본햄뿐이다.
- 어릴적에 친분이 없었음에도 둘의 사이는 정말 친했다. 사실 대부분의 록 밴드 콤비들은 어릴때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 사이가 대부분이다. 유치원 동문인 재거-리처즈는 말할것도 없고 고등학생때 다른 친구들의 소개로 만난 레논-매카트니, 초등학교 동문 길모어-워터스, 고등학교 동문 로저 달트리-피트 타운젠드, UCLA 영상영화학과 동문인 짐 모리슨-레이 만자렉 등 모두가 초등학교, 못해도 대학교 때부터 친구 사이로 지내다가 음악 활동을 한 경우다. 태생적으로 거의 슈퍼밴드에 가까웠던 레드 제플린의 특성상 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는 비교적 늦게 친해진 경우인데 그런데도 그렇게 끈끈한 우정을 보여줬다는게 놀라운 점이다.
- 이 둘은 잘생기기까지 해서 엄청난 수의 그루피들을 몰고 다녔다. 당시 그루피들을 가장 많이 끌고다니던 밴드는 롤링 스톤스와 레드 제플린이었다고. 이에 대해 신해철은 "그리스 신화에서 튀어나온것 같은 금발의 로버트 플랜트와 동양적인 외모와 신비로운 스타일의 지미 페이지가 대조를 이루며 인기가 치솟았다"라고도 한다.
- 레논-매카트니, 재거-리처즈, 액슬 로즈-슬래시, 스티븐 타일러-조 페리, 로저 워터스-데이비드 길모어 콤비가 현역 시절 치고 받는 애증의 관계였지만[13] 플랜트-페이지 콤비는 매우 끈끈했다고 한다. 둘만 여행을 가서 곡을 작업하는 일도 있었다고. 이 애정 행각 때문에 존 폴 존스가 밴드에서 잠깐 탈퇴하는 등의 사건도 있었다. 참고로 Led Zeppelin III의 곡 대다수는 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가 웨일스에 있는, 수도도 안통하는 깡촌의 통나무집에 가서 둘이 작곡한 것이다.[14]
그러나 현재에는 사이가 멀어져 상술한 것은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2007년 임시 재결합 공연에서 로버트 플랜트는 지미 페이지에게서 불쾌함과 불편함을 느꼈다고. 그러다가 2013년 즈음 다시 사이가 좋아져서 방송에도 같이 출연하는 등의 활동을 했으나 현재는 모종의 이유로 다시 사이가 멀어진 상태다.[15]
5. 여담
- 둘의 관계가 얼마나 좋았는지 가끔씩 플랜트와 페이지가 성적인 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는 소문이 왕왕 나돌기도 한다.
- 이 둘이 처음 만났을 때 지미 페이지는 본인만 남고 모두 탈퇴해버린 야드버즈의 보컬을 뽑고 있었는데, 야드버즈의 매니저의 권유로 로버트 플랜트의 공연을 보러 갔었다고 한다. 당연히 로버트 플랜트는 그 특유의 초고음을 질러대며 지미 페이지의 마음에 쏙 드는 보컬을 보여줬고 당장 로버트를 영입하려고 했는데, 이때 지미 페이지는 '이렇게 노래를 잘하는데 아직도 무명일 리가 없다. 이거 인성에 문제가 있나?' 싶어져서 로버트더러 본인과 며칠 같이 살아보자는 제안을 했고, 로버트 플랜트는 이를 수락해서 며칠 동안 지미 페이지의 집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그런데 로버트 플랜트는 매우 유쾌하고 친절한 성격이었으며, 심지어 본인과 음악에 대한 이상향이 비슷하기도 해서 그 며칠 동안 베프를 먹었고, 그대로 오디션에 합격했다고 한다.
[1] 왜 ‘사실상’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는지는 하단의 음악적 영향력 문서 참조.[2] 해외에서도 Plant-Page라고 안하고 그냥 Page and Plant 또는 Page & Plant라고 한다. 참고로 지미 페이지가 리더였기 때문에, 플랜트가 아닌 페이지를 앞에 기재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즉 플랜트-페이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건 오직 한국 뿐이다. 이는 핑크 플로이드의 워터스 -길모어도 마찬가지.[3] 1960년대 당시 존 폴 존스는 영국에서 꽤 유명한 세션 멤버였고, 존 본햄과 로버트 플랜트는 무명이었으니 존 폴 존스가 부리더 격이었다. 막내 라인 조지 해리슨과 비교하기 미안한 수준이다.[4] 물론 로버트 플랜트도 작곡을 하기도 했다.[5] 로버트 플랜트는 머리도 좋았을 뿐더러 어린 시절 여러 문학 작품들을 읽는 등 문학과 역사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당장 로버트 플랜트는 영미권에서 톨키니스트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인물이다.[6] 야드버즈의 데뷔 시점인 1963년이 아닌, 지미 페이지가 로버트 플랜트를 야드버즈에 영입한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7] 예를 들면, 롤링 스톤스에서는 믹 재거가 기타를 잡는 일도 많았고, 키스 리처즈가 메인보컬인 곡도 꽤 있었다. 대표적으로 Happy가 있다. 더 후 또한 피트 타운젠드는 거의 서브 보컬에 가까울 정도로 보컬에 많이 참가했으며, 직접 리드 보컬을 맡은 곡들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A Quick One, While He's Away가 있으며, 로저 달트리 또한 원래 더 후의 전신인 디투어스에서 기타리스트를 맡았던 만큼 기타를 들고 무대에 서는 경우도 많았다.[8] 물론 프레디 머큐리는 애초에 밴드의 시작점부터 다르다면서 평론가들의 억지 주장을 반박했다. 이와 별개로 프레디 머큐리와 브라이언 메이도 플랜트-페이지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레드 제플린 풍의 곡들을 많이 발표했으며, 1991년에는 레드 제플린에게 바치는 곡인 Innuendo를 발표한 바 있다. 또한 퀸 멤버들은 레드 제플린의 열렬한 팬으로 유명하다.[9] 다만 이때는 로버트 플랜트의 전성기가 지난 시기라 Black Dog, Rock and Roll 등의 히트곡들을 낮추어 불렀다. 로버트 플랜트 보컬의 진가를 느끼고 싶다면 BBC Sessions를 들어보자.[10] 블루스가 아닌 클래식 음악을 기원으로 삼은 메탈 아티스트인 잉베이 말름스틴조차 “지미 페이지는 정말 아름다운 앨범에서 아름다운 노래들을 쓰셨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기 때문에, 기타리스트로서는 아니더라도 송라이터로서는 레드 제플린의 영향을 받았다고 간접적으로 말한 바 있다.[11] 레드 제플린처럼 다양한 음악들을 한다는 점 또한 비슷했는데, 액슬 로즈는 건즈 앤 로지스가 레드 제플린, 퀸처럼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활동을 했다고 밝혔다.[12] 아버지가 오케스트라 악단의 피아니스트였다고 한다.[13] 이중에서 레논 매카트니는 약간 애매하다.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존 레논이 정신적으로 폴 매카트니에 의지한 면이 있어서 단순한 음악적 교감을 나눈 친구 이상의 무언가로 여겼다고 한다.[14] 그래서 Led Zeppelin III의 곡 대다수는 어쿠스틱, 포크 록 느낌이다. 전기가 안통하니 일렉트릭 기타를 못쓸 수 밖에.[15] 앞서 거론된 4개의 콤비중 지금도 사이가 좋은건 재거-리처즈, 달트리-타운젠드 단 두개다. 사실 그 외에도 1960~90년대를 주름잡던 작사/작곡 듀오중 현재까지 살아남은건 재거-리처즈와 더 후의 로저 달트리/피트 타운젠드 정도이다. 나머지는 전부 한 명이 죽거나 앙숙 관계가 되어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