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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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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sic thisday라는 사이트가 선정한 "100대 록 음악 최고의 키보디스트"이다. 기술, 창의성, 영향력, 실험정신등을 기준으로 선정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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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에머슨 릭 웨이크먼 존 로드 레이 만자렉 리처드 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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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뱅크스 빌리 프레스턴 로드 아르젠트 스티브 윈우드 알 쿠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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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피셔 부커 T. 존스 이안 언더우드 그레그 올먼[1] 토니 하이마스
<rowcolor=#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얀 해머 니키 홉킨스 그렉 롤리 브라이언 이노 조던 루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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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탠디 데니스 드영[2] 옌스 요한슨 케리 리브그렌[3] 배리 골드버그
<rowcolor=#fff>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티 라비츠 돈 에어리[4] 가스 허드슨 데이비드 샌셔스 이안 맥라건
<rowcolor=#fff>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조지 듀크 앨런 자보드 스티브 니에브 맥스 미들턴 빌리 파웰[5]
<rowcolor=#fff>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케빈 무어 데렉 쉐리니언 지미 그린스푼 존 카린 리 마이클스
<rowcolor=#fff>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켄 헨슬리 벤몬트 텐치 스티비 원더 조나단 케인[6] 척 리벨
<rowcolor=#fff>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제프 다운스[7] 레온 러셀 패트릭 모라즈 위르겐 프리츠 하워드 존스
<rowcolor=#fff>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마이크 핀더 맷 벨라미 알렌 라벤스틴 앨런 프라이스 마이클 맥도날드
<rowcolor=#fff>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존 폴 존스 밥 마요 토니 케이 빌 페인 로이 비탄
[ 각주 ]

[1] 올맨 브라더스 밴드의 키보디스트.[2]스틱스의 보컬 겸 키보디스트.[3] 캔자스의 기타 겸 키보디스트.[4]딥 퍼플의 키보디스트.[5] 레너드 스키너드의 키보디스트.[6] 저니, 베이비스, 배드 잉글리쉬의 키보디스트.[7] 버글스, 예스, 아시아의 키보디스트.
61위부터는 링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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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키스 에머슨
Keith Emerson
파일:1024px-Emerson,_Lake_&_Palmer_05.jpg
본명 키스 노엘 에머슨
Keith Noel Emerson
출생 1944년 11월 2일
영국 잉글랜드 요크셔 토드모던
사망 2016년 3월 10일 (향년 71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 모니카
직업 키보디스트, 작곡가, 프로듀서, 영화음악
장르 프로그레시브 록, 재즈, 클래식
악기 건반 악기, 신디사이저, 피아노
소속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1970~79, 1991~98, 2010)
활동 1964년 ~ 2016년
자녀 2명
종교 불명[1]
링크 공식 사이트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나이스 시절 (1944 ~ 1969)2.2.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시절 (1970 ~ 1978)2.3. 솔로 활동 (1980 ~ 1991)2.4. 재결성과 그 이후 (1991 ~ 2016)2.5. 죽음
3. 디스코그래피
3.1. 스튜디오 앨범3.2. 사운드 트랙 앨범
4. 음악적 스타일 / 평가
4.1. 사용 악기
4.1.1. The Nice 시절4.1.2.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LP) 시절4.1.3. 솔로 활동 / ELPowell, 3 시절4.1.4. ELP 재결합 / 그 이후
5. 기타

[clearfix]

1. 개요

영국키보디스트.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의 멤버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유년기/나이스 시절 (1944 ~ 1969)

1944년 11월 2일, 영국 요크셔 토드모던에서 태어난 키스 에머슨은 당시 가족들이 2차 세계대전 때문에 피신을 가있던 중 태어났다. 이후 종전후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오면서 잉글랜드 남부 웨스트서식스의 Goring-by-Sea라는 곳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 노엘 에머슨은 아마추어 피아니스트 였으며, 키스 에머슨에게 기초적인 피아노를 가르쳤다. 또한 8살때부터 정규 음악 교육 받았으며, 클래식 음악과 재즈, 락엔롤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이 당시에 라디오를 통해 플로이드 크래머와 더들리 무어의 음악을 즐겨 들었고, 이 외에도 데이브 브루벡의 음악이나, 부기우기도 즐겨 들었다고 한다. 에머슨은 Jack McDuff의 Rock Candy를 듣고 하몬드 오르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후 15살때 할부로 훗날 그의 일종에 트레이드 마크가 된 하몬드 L-100 오르간을 구입했다.

학교 졸업 이후 에머슨은 로이드 은행에서 근무 하면서 점심시간과 야간에는 술집에서 재즈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가 얼마 안가 그 은행에선 해고 당했다고 한다. 이 시기 에머슨은 카운트 베이시듀크 엘링턴의 곡을 주로 연주 했으며, 현지에 베이시스트, 드러머와 키스 에머슨 트리오를 형성하기도 했다.[2]

이후 에머슨은 여러 블루스 가수 빅밴드 활동을 거쳐가다가 1967년 소울 싱어 피피 아놀드(P.P. Arnold)에게 빅밴드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으면서 리 잭슨(Lee Jackson, 베이스), 브라이언 데이비슨(Brian Davison, 드럼), 데이빗 오리스트(David O''List, 기타)와 함께 밴드 나이스를 결성한다.
파일:external/cps-static.rovicorp.com/MI0001624086.jpg
나이스의 첫앨범 The Thoughts of Emerlist Davjack 커버
왼쪽부터 브라이언 데이비슨(드럼), 데이빗 오리스트(기타), 리 잭슨(베이스), 키스 에머슨(키보드)
이후 나이스는 피피 아놀드의 빅밴드에서 독립해 독자적인 밴드로 데뷔하였고, 당시 에머슨은 라이브에서 자신의 하몬드 오르간을 가지고 건반에 칼을 꽂거나, 흔들고 올라타는등 여러가지 음향적 시도와 퍼포먼스를 하면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당시 라이브 밴드로 활동했던 나이스는 핑크 플로이드[3] 함께 지미 핸드릭스의 투어에 참여하기도 했고, 얼마뒤 데뷔음반 "The Thoughts of Emerlist Davjack"[4]를 녹음해 1년뒤인 1968년 3월에 발매 했다.

이후 나이스미국베트남 전쟁을 확대시키는 것을 항의하는 의미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의 삽입곡인 "America"를 기악으로만 구성된 록음악으로 편곡하여 싱글로 출시해 영국 차트 21위까지 진입했다. 이후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린 자선공연 Come Back Africa에서 나이스가 America를 연주하던 도중 에머슨은 성조기를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미국을 찬양하는 보수주의적인 사람들에 의해 논란이 되었고, 이후 에머슨은 로열 앨버트 홀에서 평생 공연 금지를 당하게 된다.[5] 같은해 에머슨과 기타리스트 데이빗 오리스트와 관계가 멀어지면서 결국 오리스트가 나이스를 떠났고 밴드는 키보드 중심의 트리오로 재편된다. 이후 "Ars Longa Vita Brevis" 라는 음반을 발매했고, 1년뒤인 1969년 셀프 타이틀 앨범 "Nice" 를 발표 해 영국 차트 3위를 기록 했다. 그후 나이스는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Five Bridges Suite"를 발매했다.

하지만 이후 에머슨은 1969년 미국투어에서 함께 공연한 킹 크림슨의 그렉 레이크와 함께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를 결성해 활동하면서, 나이스는 해체되고 만다.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의 존재로 인해 나이스를 비교적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나이스는 무디 블루스프로콜 하럼과 함께 초창기 프로그레시브 록을 부흥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밴드이며, 이후 70년대 프로그레시브 록음악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대표적인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중 하나인 제네시스의 초창기 음악은 나이스의 음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2.2.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시절 (1970 ~ 1978)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3. 솔로 활동 (1980 ~ 1991)

파일:external/cdn3-www.comingsoon.net/file_748860_Emerson1.jpg
1980년 키스 에머슨, 다리오 아르젠토

1979년 당시 호러 영화 인페르노를 촬영하고 있었던 감독 다리오 아르젠토는 항상 본인의 영화에 음악을 맡던 밴드 고블린(Gobiln)의 음악에서 벗어나 좀더 클래식한 음악을 원했고, 에머슨을 찾아가 영화 음악 제작을 부탁했었다. 에머슨은 주세페 베르디나부코에서 영향을 받은 곡을 작곡해, 고드프리 살몬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과 함께 이탈리아에서 녹음을 진행했다. 그렇게 1980년의 영화, 81년엔 사운드트랙 음반이 발매됐는데, 영화는 아르젠토의 전작인 서스페리아의 흥행을 못 미쳤고, 사운드트랙 역시 평론가들에게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아무튼 인페르노 사운드트랙을 맡은게 인연이였는지 1년뒤에 실베스터 스탤론이 주연을 맡은 액션 스릴러영화 "나이트호크(Nighthawks)"의 음악을 맡게 되었다. 이 영화는 성공적인 흥행을 기록했으며, 음악도 평론가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빌보드 200 183위까지 진입했다. 이 당시 에머슨은 바하마 제도에서 현지인들과 녹음한 레게 / 칼립소 스타일의 음악을 담은 첫 스튜디오 솔로앨범 "Honky"를 발매했다. 여담으로 이 시기 불의 전차 대본을 받기도 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6]

이후 1982년엔 "Best Revenge"의 사운드 트랙을 맡았고, 1983년엔 호러 영화 감독 루치오 풀치가 감독한 영화 "모던락(Murderock)"의 사운드 트랙과, 린 타로가 감독한 SF 애니메이션 영화 환마대전의 사운드 트랙을 맡았다.

파일:2BBF2DFB-4089-4A85-8EA5-028EA8988453.png
1985년부터 에머슨은 그렉 레이크와 코지 파웰과 과거 ELP의 변형 라인업인 에머슨, 레이크 & 파웰을 결성해 활동 했고, 이후 1988년엔 칼 파머와 미국의 젊은 다중악기 연주자인 로버트 베리와 3라는 밴드를 만들어 활동했다. 자세한 내용은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항목 참고.

1988년 에머슨은 크리스마스 캐롤 앨범을 냈고 이후 이태리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고블린(Gobiln)과 함께 미켈레 소아비가 감독하고 다리오 아르젠토가 제작,각본을 쓴 "La Chiesa"(한국판 이름은 데몬스 3)의 음악을 담당 했다.

2.4. 재결성과 그 이후 (1991 ~ 2016)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eith_Emerson_%26_Moog_15May10.jpg
2000년대 키스 에머슨
1992년 공식 해체 후 12년 만에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를 재결성해 활발하게 활동한다.

하지만 1994년 그의 손 건강에 문제가 발생했는데, 오른손에 반복사용긴장성손상증후군과 관절염으로 인해 손목 신경을 전달하는 부분에 큰 압박을 받아 4,5번째 손가락이 잘 움직이지 않게 되고 과거 퍼포먼스 때문인지 손목에도 이상이 생긴 것이다. 그의 담당 의사는 그가 국소성 이긴장증에 걸렸다고 진단했고,[7] 에머슨 같은 경우 희귀한 케이스라고 언급했다. 결국 이것으로 인해 에머슨은 조금이나마 회복되는 1996년까지 휴식을 취해야 했다.

이때 그는 그가 살던 저택에 화제가 일어나고, 오랫동안 함께 했던 아내와 이혼하는 등 힘든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후 에머슨은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미국 산타 모니카로 이사하면서 알코올 중독에 빠지기도 했다. 쉬는 동안 뉴욕과 런던을 오가며 마라톤도 뛰었고, 애니메이션 아이언맨에서 사운드트랙을 맡기도 했고, 자서전인 Pictures of the Exhibitionist를 썼다.

이후 1996년 어느 정도 손목이 회복되면서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의 라이브 활동을 재개했다. 투어는 1998년까지 이어졌고, 그후 에머슨은 주로 솔로 작업에 집중했다. 2002년에는 나이스의 전 멤버들과 함께 오랜만에 공연을 가졌고, 그리고 2004년에는 고지라 파이널워즈스코어를 맡았다.

2005년에는 미국의 기타리스트 마크 보닐라(Marc Bonilla)등 몇몇 세션 연주자들과 함께 "키스 에머슨 밴드"를 결성해 2008년에 정규앨범을 발표했다.

2010년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40주년 기념으로 빅토리아 파크에서 재결합 공연을 했고, 그 이후 에머슨은 주로 오케스트라와 협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2011년에는 키스 에머슨 밴드와 오케스트라의 협연을 녹음한 음반 The Three Fates Project를 발매했다. 또한 간간히 그렉 레이크와 콘서트를 열기도 했으며, 2014년엔 실황음반 Live from Manticore Hall를 발매했다. 이후 잠시 뜸하면서 2015년 말에 에머슨이 페이스북을 통해 2016년에 키스 에머슨 밴드 투어를 연다고 밝혔지만...

2.5. 죽음

2016년 3월 10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에머슨의 오랜 연인인 마리 가와구치가 새벽 1시 30분에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 해안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키스 에머슨이 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에머슨의 머리에서 총상이 발견됐다며 자살이 확실해 보인다고 밝혔다. 연인인 가와구치 말로는 상술한 건강 문제로 연주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관객들을 실망시킬까봐 압박감과 우울증이 심해졌다고 밝혔다.[8]

칼 파머는 "키스는 음악을 사랑하고 키보디스트로서 공연에 열정을 가진 부드러운 사람이었다"며 추모했고, 그렉 레이크도 “그의 음악은 그의 삶이었고, 그가 창조한 음악은 영원히 살아갈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며 추모했다. 레이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를 추모하는 콘서트가 로스앤젤레스 엘 레이 극장에서 열렸다. 콘서트에는 그의 큰아들이자 키보디스트인 아론 에머슨과, 마크 보닐라를 비롯한 키스 에머슨 밴드 멤버들, 동시대 아티스트인 키보디스트 브라이언 오거, 록시 뮤직의 에디 잡슨, 토토의 스티브 루카서, 스티브 포카로와, 평소에 그를 존경했던 드림 시어터조던 루데스, 키보디스트 레이첼 플라워등이 참여했다. 모든 콘서트 수익은 근긴장이상 환자들을 위해 기부되었다고 한다.

그의 묘는 그가 유년기 보냈던 웨스트 서식스 인근인 렌딩에 위치해 있다.

3. 디스코그래피

3.1. 스튜디오 앨범

3.2. 사운드 트랙 앨범

4. 음악적 스타일 / 평가

”역사상 최고의 키보디스트 중 한명.”으로 특히 록음악계의 최고의 키보디스트를 논할때 릭 웨이크먼, 존 로드, 리처드 라이트, 레이 만자렉, 토니 뱅크스등과 함께 항상 거론되는 인물이다.

에머슨은 클래식, 재즈, 초창기 록에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잭 맥더프 같은 재즈 하몬드 오르간 연주자나 데이브 브루벡등 재즈 피아니스트 그리고 프리드리히 굴다, 알베르토 히나스테라 같은 20세기 작곡가들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라는 장르에서 신디사이저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방법론을 제시한 최초의 인물”으로 평가 받는다. 대중음악에서 신디사이저를 활용한 사례는 키스 에머슨이 무그 신디사이저를 사용하기 전에도 웬디 카를로스가 바흐의 음반을 무그 신디사이저로만 연주한 1968년 발매된 음반 Switched-On Bach이 빌보드 10위까지 진입하는등 상업적으로 대박을 터트렸고, 비틀즈Abbey Road의 몇몇곡에 무그 신디사이저를 활용하기도 했지만, 모두 스튜디오에만 서브 개념으로만 국한 되어 있었고, 에머슨은 이 벽을 과감히 깨고 신디사이저를 전면으로 배치한 것이다.

퍼포먼스적으로도 칭송받는다. 나이스 시절부터 콘서트에서 항상 선보였던 하몬드 오르간 L-100에 칼을 꽂거나, 올라타거나 거꾸로 연주하는 등 강렬한 퍼포먼스는 그만에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으며, 그외에도 전성기 시절에는 그랜드 피아노를 공중으로 올려 돌면서 연주하는 과감한 퍼포먼스도 선보였었다. 때문에 종종 그를 “키보디스트계의 지미 핸드릭스”로 불리기도 한다.

1960년대 The Nice나 1970년대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에서 에머슨이 보여준 키보드 테크닉 기법 기량과 퍼포먼스는 기타 없이 피아노, 하몬드 오르간, 신디사이저등 키보드 악기로도 밴드의 기준점이 될수 있음을 보여줬으며, 동시대 아티스트인 존 로드, 릭 웨이크먼 뿐만 아니라 제프 다운스, 코무로 테츠야, 데렉 쉐리니언, 조던 루데스등 후대 수많은 키보디스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그의 영향력 덕분에 최고의 키보디스트를 논할때 키스 에머슨은 항상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4.1. 사용 악기

4.1.1. The Nice 시절

파일:KeithEmerson L100.jpg
초창기 / 나이스 시절에 에머슨는 그랜드 피아노와 하몬드 오르간 L-100 기종을 많이 사용했었다. 특히 이 시절부터 라이브에서 L-100 오르간으로 해온 과격한 퍼포먼스는 이후에 거의 대부분의 그의 공연에서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다. 1968년 L-100의 상위 기종인 C3를 구입하면서 C3와 L-100을 좌우로 놓고 사용했었다. 에머슨은 하몬드 오르간을 연주할때 소리를 살짝 왜곡시키는 기능인 2nd, 3rd 퍼커션 기능으로 음을 강조하는 기법을 자주 활용했다.

4.1.2.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LP) 시절

파일:KeithEmerson Moog.jpg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초창기 에머슨은 거대한 무그 모듈러 신디사이저를 공연 무대에 도입했다. 이 당시 신디사이저는 엄청 거대했기 때문에 스튜디오에서만 사용하는 악기로만 인식됐었는데, 이를 과감히 깬것이다. 이로서 에머슨은 신디사이저를 최초로 무대 퍼포먼스로 활용한 뮤지션이 되었다.

Brain Salad Surgery 음반에서는 폴리포닉 신디사이저 Polymoog프로토타입인 Moog Constellation/폴리포닉 앙상블 신디사이저를 무그 사에서 제공 받아 사용했다. Brain Salad Surgery의 첫 곡인 Jerusalem은 최초로 폴리포닉(다성) 신디사이저를 사용한 대중음악으로 알려져 있다.[10]

1977년 Works Vol.1 시절 부턴 당시에 가장 비싼 신디사이저중 하나였던 Yamaha GX-1을 주로 사용했다.[11] Fanfare for the Common Man은 대표적인 GX-1이 사용된 음악중 하나다. 이후 80년대 중반에 에머슨의 작업실이 트랙터와 충돌하면서 GX-1이 크게 망가져 버리면서, 레드 제플린존 폴 존스에게서[12] 한대를 더 구입해 원래 쓰던 GX-1을 고쳤다고 한다. 이후 1994년 에머슨이 산타 모니카로 이사하면서 가지고 있던 GX-1 두대를 다 팔았다. 그가 오래전 부터 쓰던 GX-1은 이탈리아의 키보디스트 Riccardo Grotto에게 팔렸고, 존 폴 존스의 GX-1은 유명한 영화음악가인 한스 짐머에게 팔았다고 한다.

이시기에 에머슨은 멜로트론 같은 미리 녹음된 형태의 샘플러 악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멜로트론에 대해서도 “단지 테이프 레코더가 울리고 있는 것 같다“며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ELP 공연에서 멜로트론이 사용된 경우는 있지만 모두 에머슨이 아닌 그렉 레이크가 연주 했다.

4.1.3. 솔로 활동 / ELPowell, 3 시절

파일:external/myblogitsfullofstars.files.wordpress.com/soundcraftemerson.jpg
1980년대 들어 에머슨은 KORG의 제품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이미 1978년 ELP의 Love Beach에서 PS-3300과 3100을 광범위하게 사용했으며, 이후 여러 잡지에서 KORG의 악기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었고, 프로모션 비디오도 촬영하기도 했다.

또한 80년대 중반들어 한때 샘플러에 부정적이었던 입장을 접고, Fairlight라던가 커즈와일 K-250, 롤랜드 D-50등 당시에 트랜드 였던 샘플링 방식의 디지털 신디사이저들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전부터 주로 사용했던 하몬드 오르간이나 GX-1을 미디 기능이 가능하게 개조해서 여러가지 신디사이저를 연결해서 사용했다.

4.1.4. ELP 재결합 / 그 이후

5. 기타



[1] 교회에 다녔던 적이 있었으며, 모든 종교를 존경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 Anil Prasad, "Keith Emerson: Meshing Sonorities", innerviews.org[2] 이시절 에머슨이 연주한 음원은 훗날 2014년 음반 형태로 공개 되었다.[3] 이때 핑크 플로이드는 시드 배릿이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해 몇몇 공연에서 이탈하면서, 그때 마다 나이스의 기타리스트인 오리스트가 대신 그의 역할을 해주기도 했다고 한다.[4] Emerlist Davjack는 멤버 4명의 성에 일부를 떼어다가 하나로 합친 거다(Emerson, O' List, Davison, Jackson).[5] 이 금지당한 건은 이후 1992년에 에머슨이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공연을 이곳에 열면서 해제되었다. 참고로 이때도 공연 중간에 America를 연주했다.[6] 출처[7] 손을 스스로 제어할수가 없게 되는 병. 주로 손을 많이 쓰는 연주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며, 원인불명의 희귀병이다.[8] 알려진 바에 따르면, 키스 에머슨은 완벽주의자 성향이 강해서 공연을 앞두고는 실수없는 연주를 보여주기 위해서 엄청난 연습을 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성격상 건강 문제로 더 이상 본인의 기준에 흡족한 연주를 할 수 없다고 느끼자 스스로 크게 낙심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S] 스튜디오 레코딩에서만 사용.[10] 폴리포닉 앙상블 신디사이저 세트엔 이후 출시되어 인기를 얻은 Taurus 폐달 신디사이저도 있었지만, 에머슨은 그다지 많이 사용하진 않았다고 한다.[11] 이 GX-1이 무게가 엄청났기 때문에, 장소를 옮기는데만 로디가 8명씩이나 붙었다고 한다.(…)[12] 존 폴 존스 또한 레드 제플린 말년 시절에 GX-1을 많이 사용했었다. 1979년 넵워스 콘서트/0:41초 참고[L] LIVE 투어에서만 사용.[S] [S] [L] [L] [18] 출시되지 않은 테스트판 모노포닉 신스[19] Polymoog의 프로토타입.[20] 프로토타입.[S] [S] [L] [L] [L] [L] [S] [L] [L] [30] 이 때 부터는 에머슨의 요청으로 Goff Professional이라는 오르간 수리업체가 개조한 검은색으로 도색되고 리버브, 퍼커션/코러스 컨트롤러가 추가되고, 미디기능이 추가된 하몬드 C3 오르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 오르간은 에머슨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 사용했으며, 에머슨 사후 만 달러에서 만5천 달러의 가격으로 다른 곳에 팔렸다.[L] [L] [S] [S] [S] [S] [S] [S] [S] [S] [S] [S] [S] [S] [45] 그랜드 피아노 뚜껑에다가 넣고 사용했다.[46] 그외 당시 키스 에머슨에 장비를 맡았던 윌 알렉산더에 따르면 이 사운드모듈들을 같이 연결해 사용했다고 한다. Alesis QSr, Alesis S4, Korg Wavestation SR, Studio Electronics S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