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다리오 아르젠토 Dario Argento | |
본명 | 다리오 아르젠토 Dario Argento |
출생 | 1940년 9월 7일 ([age(1940-09-07)]세) |
이탈리아 로마 | |
국적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73cm |
직업 | 영화감독 |
활동 | 1970년 – 현재 |
파트너 | 다리아 니콜로디 |
자녀 | 아시아 아르젠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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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호러 3대 거장 |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지알로[1] 장르 영화의 전문가다. 또한 지알르 장르에 온 평생을 바친 감독이기도 하다. 마리오 바바(1914~1980), 루치오 풀치(1927~1996) 와 함께 이탈리아 호러 3대 거장으로 손꼽기도 한다.[2][3]
이탈리아 호러 3대 거장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이기도 하다.[4]
대표작으로는 이른바 마녀 3부작으로 불리는 《서스페리아》(1977), 《인페르노》(1980), 《눈물의 마녀》(2007)가 있다. 그 외에 이른바 동물 3부작의 첫번째 작품이자 감독 데뷔작인 《수정 깃털의 새》(1969) 및 《딥 레드》(1975), 《페노미나》(1985) 등도 그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작품들이다.
2. 생애
2.1. 청년기
1940년 9월 7일 이탈리아 왕국 로마에서 영화 제작자인 아버지 살바토레 아르젠토와 패션 모델 겸 사진 작가이기도 했던 어머니 엘다 루자르도[5]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를 따라 패션 사진촬영 현장에 자주 드나들면서 아름다운 외모의 패션 모델들과 마주치는 일이 잦았으며, 또한 조명과 메이크업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당시의 경험이 훗날 다리오 아르젠토로 하여금 지알로 장르에 심취하게 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10대 시절부터 영화광이었던 아르젠토는 잠시 고등학교 학업을 중단하고 1년 동안 프랑스 파리에 체류하였다. 이탈리아로 돌아운 후에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영화 비평가이자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66~1969년 사이에는 각종 영화의 각본 집필에 참여하면서 영화계에 데뷔하게 되었다. 당시 그가 각본에 참여한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스파게티 웨스턴 전성기의 명작 중 하나인 《옛날 옛적 서부에서》(1968)였다.
2.2. 영화감독
1969년, 다리오 아르젠토는 아버지와 함께 영화사를 설립하였고, 1970년에는 감독 데뷔작으로 지알로 계통의 호러 영화인 《수정 깃털의 새》를 공개했다. 이 작품에서 다리오 아르젠토는 특유의 미장센과 촬영기법을 확립하였으며,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고무된 다리오 아르젠토는 이듬해인 1971년에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고양이》, 《회색 벨벳 위의 네 마리 파리》 등을 연달아 내놓았다. 당시 제작된 다리오 아르젠토의 초기작들은 이른바 동물 3부작으로 불리운다. 이 작품들이 모두 큰 성공을 거두면서 아르젠토에게는 "이탈리아의 히치콕"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이후 1970~1980년대에 걸쳐 다리오 아르젠토는 이탈리아 호러영화의 거장으로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이후 발표된 그의 작품은 시대극인 《밀라노에서의 5일》(1973)을 제외하면 모두가 스릴러 및 호러 장르였다. 이 시기에 발표된 《딥 레드》(1975)와 마녀 3부작 중 첫번째 작품인 《서스페리아》(1977)는 그의 미장센 감각이 절정에 달한 작품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아르젠토의 대표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시기에 밴드 고블린과의 협업을 시작해 강렬한 프로그레시브 록을 OST로 채택하는 과감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시기에 아르젠토는 조지 로메로의 대표작인 《시체들의 새벽》(1978)을 재편집하여 《좀비》라는 제목으로 이탈리아에 개봉시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6] 다리오 아르젠토의 라이벌로 거론되던 루치오 풀치는 제작사와 배급사의 강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작품의 가짜 속편을 연출해야 했는데, 아르젠토는 이에 대해 상당히 불쾌감을 느끼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에도 마녀 3부작 중 두번째 작품인 《인페르노》를 제작했고, 이후 한동안 초자연적 호러영화 보다는 현실적인 스릴러에 치중하여 《쉐도우》(1982), 《페노미나》(1985), 《오페라》(1987) 등을 발표했다. 이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다리오 아르젠토는 활발한 작품활동을 이어나갔다.
1990년대에는 조지 로메로와 공동감독을 맡아 《검은 고양이》(1990)를 발표하기도 했고, 미국 영화계에 진출하여 《헤드헌터》(1993)[7]를 감독하기도 하였으며, 《스탕달 신드롬》(1996), 《오페라의 유령》(1998) 등을 감독했다. 90년대 중후반기의 다리오 아르젠토는 자신의 딸이기도 한 배우 아시아 아르젠토에게 주연을 맡겼다.
2.3. 쇠퇴기
다리오 아르젠토는 2000년대에 접어든 후에도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이탈리아 호러영화 산업은 이미 1980년대부터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고, 왕년의 거장이었던 아르젠토도 이런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 채 침체기에 빠져들었다.2000년대 초반의 작품인 《슬립리스》(2001)와 《카드 플레이어》(2004) 등의 경우에는 평작 정도의 평가를 받았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 아르젠토는 더이상 전성기에 보여줬던 미장센을 유지하지 못하고 도리어 특유의 단점이 두드러지는 등 페이스가 무너지고 있었다. 마녀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눈물의 마녀》(2007)는 전작들과 비교되는 바람에 평가가 더욱 나빴다. 《지알로》(2009)의 경우에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2012년에는 《드라큘라 3D》를 연출하며 호러영화계 복귀를 시도했으나 싸구려 TV영화보다 나을 것이 없는 형편없는 영상미와 목버스터를 방불케하는 저질스러운 CG 효과로 인해 굉장한 혹평을 받았고 흥행에도 실패했다. 아르젠토는 이로 인해 커리어에 대단한 타격을 받아 한동안 감독 활동을 접어야 했다.
2022년에는 10년 만에 《다크 글래시스》라는 스릴러 영화를 감독하였지만 이마저도 좋은 평을 받지 못하는 등 영화감독으로서의 인생은 거의 끝났다는 평을 듣고 있다.
3. 작품 세계와 평가
컨저링처럼 갑툭튀가 많은 공포영화들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아르젠토의 영화를 보면 실망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가 공포영화의 거장으로 떠오른 가장 큰 원인인 화려하고 감각적인 화면의 색감, 아름다운 디자인, 즉 종합해서 미장센은 그야말로 일품이다.[8] 단지 배경만 찍었을 뿐인데도 한편의 건축 예술품을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낼 정도의 미적 센스를 자랑한다. 아름다운 배경물과 잔혹한 살해 장면이 어우러지도록 만드는 아르젠토의 능력은 가히 천재적이다.기괴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음악을 적절히 삽입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아르젠토가 감독한 대부분의 영화들은 음악을 밴드 고블린에게 맡겼다. 감독 본인이 음악 제작에 참여하거나 엔니오 모리코네에게 음악감독을 맡긴 사례도 있다.
그러나 특유의 미적 센스와 연출력 등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탓에, 영화 내러티브의 전반적인 완성도가 시들하다. 냉정히 말해, 아르젠토의 감독작들에서 봐줄 만한 수준의 개연성이라도 갖춘 각본을 접하기가 힘들 지경이다. 참고로, 그의 데뷔작은 그래도 개연성이라고 부를 만한 뭔가를 지니기는 했다. 영화 스타일이 발전할수록 각본 완성도가 날림이 된 괴상한 케이스. 이러한 점 때문에 수십 년 동안이나 사람들에게 까인다. 그런데 이 양반은 애초에 각본가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4. 그 외에
아르젠토의 외모는 본인이 즐겨 만드는 호러 영화의 조연처럼 생겼는데, 쾡한 눈에 핏기 없고 생기 없는 모습이 마치 유령과도 같다. 반대로 그의 딸인 배우 아시아 아르젠토는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다.키가 173cm라고 한다.
근친상간의 혐의를 받곤 한다. 본인의 영화에 딸을 출연시켜 극단적인 노출씬을 연출하는 등의 행위가 원인인 모양. 하지만 다른 감독들 중에도 자신의 가족을 영화에 출연시켜 험하게 다루는 경우는 더러 있다.[9] 아르젠토로서는 억울할 부분. 각설하고, 근친상간까지는 몰라도 자기 딸 괴롭히는 취미는 있는 듯하다. 그가 영화 <지알로>를 작업할 때 처음으로 캐스팅한 사람이 딸의 전 남자친구였으니...
참고로 다리오 아르젠토의 영화에서는 살해씬마다 살인자가 손에 검은 장갑을 낀 채 칼을 들고 희생자에게 접근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때 그 검은 장갑을 낀 손은 대개 아르젠토 본인이라고 한다.[10][11]
호러 영화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 거장인 만큼 전세계에 팬들을 거느리고 있다. 국내에도 일찍이 그의 영화가 소개되어 [12] 그의 이름이 많이 알려진 편이다. 하지만 최근작들이 과거에 비해 실망스러운 퀄리티 및 열화된 자기복제에 지나지 않아서 예전만큼의 포스는 없다.(...)
데드 스페이스 이탈리아어 판에서 테런스 카인 역을 맡았다고 한다.
항상 영화 엔드 크레딧에 '당신은 (영화 제목)~을(를) 보셨습니다.'가 뜬다.
NEW 러브 플러스+의 학원제에서 영화 연구회의 주제로 조명받았다. 다만 나오는 이름은 아리오 다르젠토.
서스페리아 리메이크를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작품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겟 아웃과 유전은 아름다운 영상미와 플롯을 보고 반했다고 밝혔다.
1987년에 찍은 피아트 크로마 광고 #
2002년에 찍은 에리다니아 제피로 설탕 광고 본인이 직접 나와서 귀엽게 연기한다. #
가스파 노에의 2021년 작품 <소용돌이>에서 주연을 맡았다. 영화와 연기는 호평을 받았다.
루치오 풀치와는 앙숙이었다. 하지만 루치오 풀치가 몰락한 이후[13] 뒤늦게 그의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된 후 그와 화해했으며, 루치오 풀치가 다시 영화계에서 활동할 수 있게 돕고[14] 풀치의 딸도 영화판에서 일하게 주선해 주는 등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풀치 사망 후 장례식 비용도 아르젠토가 부담을 했다.
5. 작품 목록
- 옛날 옛적 서부에서 (1968) - 각본
- 수정 깃털의 새(1969)
동물 3부작의 첫번째 작품. 같은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비명지르는 미미(1958)라는 느와르 작품도 있지만 평은 그럭저럭이다.
- 회색 벨벳에 파리 4마리(1971)
- 딥 레드(1975)
원제목은 프로폰도 로쏘. 서스페리아의 인기가 너무 좋아서 후에 서스페리아의 속편인 것처럼 국내에 비디오 출시되었다.[16] 그런데 이것은 일본이 먼저 하던 짓이라 박찬욱을 만난 코지마 히데오가 이 영화음악을 중얼거리자 박찬욱이 서스페리아 2냐고 묻자 그렇다고 답변한 일도 있다.(...) 그리고 영화 초반에 범인의 얼굴이 잠깐이나마 나오는 영화이기도 하다. 워낙 빠르게 지나가서 그렇지...
- 서스페리아(1977)
다리오 아르젠토의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인지도가 높은 영화들 중 하나. 한국 비디오 표지에 의하면 한국에 개봉 당시 50만 관객이 보았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지 알 수 없다. 그 시절 제대로 된 흥행 기록 조사가 안되었기 때문. 평가도 대체로 좋으며 마녀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 아르젠토의 미장센 능력이 극한에 달한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초반부 아파트 살인장면은 명장면중에 명장면.
- 인페르노(1980)
- 섀도우(1982)
- 페노미나(1985)
당시 청춘스타였던 제니퍼 코넬리가 주연을 맡았다.
- 오페라(1987)
- 검은 고양이(1990)
- 헤드 헌터(1993) (원제목은 트라우마)
- 스탕달 신드롬(1996)
- 오페라의 유령(1998)
- 슬립리스(2001)
다리오 아르젠토의 영화 속 음악 대부분을 맡은 록밴드 고블린이 <페노미나>이후 16년 만에 다시 손잡은 작품으로, 강렬한 폭력성이 드러난다. 영화 초반 야간열차에서의 추격전이 가장 인상적인 씬으로 뽑힌다. 촬영 감독은 <간디>, <의혹의 침입자> 촬영을 맡은 로니 테일러.[17] 전작들에 평은 못 미치지만 괜찮은 평을 받았으며, 아쉽게도 이 작품 이후로 내리막 길을 걸었다. 자신의 딸 아시아 아르젠토가 쓴 시가 중요한 단서로 나온다. 이 양반이 찍은 영화 중에서 최후의 고점을 찍은 영화로 이후부터는 그냥 하향곡선이다. 이후 작품 중 그나마 괜찮다는 다크 글래시스도 슬립리스에 못 미치는 졸작이다.
- 카드 플레이어(2004)
- 히치콕을 좋아하세요?(2005)
- 눈물의 마녀(2007)
서스페리아, 인페르노에 이은 마녀 삼부작의 세번째 작품. 무려 30년 만에야 마녀 삼부작을 끝내게 되었지만 평이 전작들에 비해 안 좋은 편이다.
- 지알로(2009)
평생을 지알로 장르 영화를 찍어온 사람이건만, 지알로를 제목으로 삼은 건 이 영화가 처음이다. 다만 평은 안 좋은 편.
- 드라큘라(2012)
다리오 아르젠토의 생애 최악의 졸작이라는 악평을 받고 있다. 특유의 미장센은 거의 다 죽어버리고 얼마 되지 않는 저예산에다가 싸구려 연출 및 조잡한 특수효과 때문에 흥행에도 참패했고, 다리오 아르젠토의 영화 경력을 모두 망칠 정도의 타격을 입혔다.
- 샌드맨 (제작 취소)
이기 팝 주연 공포영화로 데이비드 튤리가 다리오 아르젠토를 위해서 각본을 썼고 크라우드 펀딩 형식으로 2014년 중순 부터 진행중이었지만 아직도 제작이 보류 중이다. 하지만 2022년에도 소식이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엎어진 것으로 보인다.
- 다크 글래시스 (2022)
교통사고로 시력을 잃은 맹인 여성 다이애나와 살인마에게 쫓기던 중 다이애나의 의도치 않은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중국인 소년 친을 주인공으로 한 지알로 영화. 2002년 프랑코 페리니[18]와 함께 각본을 썼었는데, 유명한 이탈리아 제작자 비토리오 세치 고리[19]의 파산으로 제작 못했던 각본을 기초로 만드는 작품이다. 슬립리스의 후속작 격 작품이라고 한다. 스테이시 마틴 주연, 다프트 펑크가 음악으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하차하고, <지그라 불린 사나이>에 출연한 일레니아 파스토렐리가 주연, <120BPM> 및 여러 영화 음악을 맡은 테크노 음악가 아르노 레보티니가 음악을 맡았다. 제72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초청되었으나, <지알로>와 <드라큘라 3D> 보다는 낫다고 하지만 평이 안 좋다.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다.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 인사말 이 영화를 보면 아르젠토의 영화인생이 진짜 끝났다고 느껴지는 게, 그나마 지알로, 드라큘라보다 좀 나을 뿐 이 영화도 평작 수준에도 못 미치는 졸작이기 때문이다.
[1] 살인자가 아름다운 여성을 상대로 잔혹한 가혹 행위와 살인 등의 범죄를 저지른다는 내용[2] 이는 이탈리아 현지에서 부르는 명칭은 아니며, 일본 및 그 영향을 받은 한국에서 주로 쓰인다.[3] 이탈리아에선 루치오 풀치는 별로 평가가 안 좋은데, 마리오 바바나 아르젠토와 달리 막가파로 단기간에 찍어내듯이 여러 장르의 영화를 만든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을 때도 이탈리아 언론은 작게 언급하여 마리오 바바가 죽을 때와 대조적이었다. 오히려 해외에서 루치오 풀치를 높게 더 평가하는데, 쿠엔틴 타란티노가 대표적으로 풀치의 영화 비욘드(1981)를 타란티노가 미국으로 배급하여 1998년에서야 미국 개봉할 정도였다. 사실 이 비욘드는 1983년 미국에서 아주 잠깐 개봉하고 사라진 바 있다.[4] 2000~2010년대까지도 작품을 발표했으나 기술발전과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탓에 평가는 그리 좋지 않았으며 그 대신에 블루레이 엑스트라에 꾸준히 출연하고 있다[5] 참고로 브라질인이다. 고로 아르젠토는 브라질계 이탈리아인.[6] 아르젠토는 이 작품의 편집에 큰 공을 들였는데, OST 조차도 밴드 고블린으로 하여금 자체 제작하기도 했다.[7] 이는 국내 출시명으로 원제는 《트라우마》였다.[8] 아르젠토의 미장센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같은 후대의 영화들을 연상시킨다.[9] 브라이언 드 팔마만 해도, 캐리에 본인의 아들을 출연시켜 자전거를 타다가 크게 넘어지는 스턴트를 시킨 바 있다.[10] 비슷한 경우로 루치오 풀치도 자신의 호러영화에 엑스트라로 자주 나오더니만 늘그막 영화인 나이트메어 콘서트(1990)에선 아예 살인마(그것도 호러전문 감독으로 나오다가 영화가 망하고 영화에 미쳐있다가 살인마다 된다는 설정!)로 나와 고어를 총집결하는 명연기를 보여준다. 여자를 사지절단해 죽이고 팔다리를 구워 먹는 장면까지(...) 열연했다.[11] 유일하게 감독의 손이 안 나온 게 슬립리스(2001)인데, 이유는 촬영 당시 맞는 장갑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12] 무엇보다도 서스페리아와 페노미나의 히트가 가장 컸다. 당시 한국은 일본 영화 트렌드에 영향을 많이 받던 편인데, 서스페리아가 일본에서 상당히 인기를 많이 얻었다.[13] 심한 당뇨병을 앓는 등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고, 또 불치병에 걸린 부인이 절망해 자살하고 자녀 한 명은 교통사고로 잃는 등 개인적인 비극이 겹쳐 10여년 간 최악의 슬럼프를 겪으며 커리어가 거의 재기불능으로 치달았다.[14] 안타깝게도 루치오 풀치는 아르젠토의 도움을 받기 시작한 후 불과 2년 뒤에 사망했다.[15] 채찍의 한종류를 뜻하기도 한다.[16] 25분 정도 잘렸다. 잔인한 장면뿐 아니라, 독일어나 여러 언어를 쓰는 장면이 잘렸는데 번역자 여럿 구하기 싫었다는 소문이...[17] 이 작품이 유작이다.[18]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 각본으로 참여하고, <데몬스 1~3>, <페노미나> 등 다리오 아르젠토 작품을 많이 맡은 각본가다.[19] <일 포스티노>, <사일런스> 등의 제작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