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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15일 | 1991년 9월 24일 | 1993년 9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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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리스 노보셀릭 Krist Novoselic | |
본명 | |
크리스 안토니 노보셀릭[1] | |
Krist Anthony Novoselic | |
출생 | |
1965년 5월 16일 ([age(1965-05-16)]세) | |
미국 캘리포니아 주 콤프턴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장 | 200.7cm[2] |
활동 | 1982년 ~ 현재 |
소속팀 | 너바나 (1987년 ~ 1994년) |
사용 악기 | 베이스 기타 |
배우자 | |
셸리 딜리 (1989년 ~ 1999년) | |
Darbury Stenderu (2004년 ~ 현재) |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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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너바나의 베이시스트. 너바나의 리더인 커트 코베인과 고등학생 때부터 매우 친한 친구였기도 하다.2. 생애
- 크리스 노보셀릭은 1965년 5월 10일, 캘리포니아 주 콤프턴에서 태어났다. 그는 크로아티아, 당시에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서 온 이민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크리스가 태어날 당시 부부는 미국으로 이민한 지 채 1년도 안 되고 영어도 거의 할줄 모르던 상태였다. 크리스(Krist)라는 이름은 북유럽, 동유럽에서 많이 쓰이는 이름 Kristian의 줄임말이다.
- 1979년, 크리스의 가족들은 캘리포니아의 살인적인 집세를 감당하지 못해 시애틀에 있는 애버딘으로 집을 이주하였다. 이민 2세대가 흔히 그렇듯 크리스 역시도 크로아티아와 미국의 정체성 사이를 두고 상당히 방황했다. 그의 부모는 미국에 살면서도 크로아티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했으며 자녀들에게 고향의 언어를 가르쳤다. 그래서 크리스와 형제들은 세르보크로아트어를 제법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 그는 처음,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척 베리의 음악을 듣고 자랐다고 한다. 처음으로 배운 악기는 의외로 아코디언이었으며, 이후 기타와 베이스 기타의 연주법도 배웠다. 그는 커가면서 블랙 사바스, 더 후, 레드 제플린, 에어로스미스 같은 고전 하드 록 밴드들의 음악에 빠져있었다고 하며, 훗날 자신의 연주 스타일에 큰 영향을 끼친 연주자로 기저 버틀러, 존 엔트위슬, 진 시몬스 등의 하드 록 베이시스트들을 꼽기도 했다.
- 크로아티아인으로서의 정체성, 심한 부정교합, 내성적인 성격에 올드한 록 밴드를 듣는 취향 등으로 인해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으며 학창 시절 대부분을 아웃사이더로 지냈다. 때로는 집단 괴롭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크리스가 미국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자 부모는 1980년 그를 크로아티아의 친척에게 1년간 얹혀살게 했다. 이 시기에 그는 크로아티아 라디오를 들으며 정치, 사회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3] 펑크 록을 처음 접하고 이내 푹 빠지게 되었다.[4] 크로아티아 학교에서 딴 학점이 미국 학교에서 인정되지 않아 1년 유급한 것은 덤이다.
-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동생인 로버트는 자신의 친구를 집에 데려왔는데, 그 친구가 바로 너바나를 결성하게 될 커트 코베인이었다. 이를 계기로, 크리스와 커트는 서로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크리스와 커트 둘 다 악기를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을 알자 밴드를 짜서 마을 축제에서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을 커버해서 공연비를 벌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는 참여할 사람이 안 나와서 결국 중단됐지만 이 둘이 같이 음악적 활동을 한 첫 번째 사례였다.
- 그리고 몇 년 후, 커트는 크리스에게 자신의 데모 테이프를 건네주고는 밴드를 결성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을 하였다. 크리스는 데모 테이프를 들은 뒤, 밴드 결성을 수락하였고, 이것이 바로 너바나의 시작이 되었다.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이 문서를 참고하자.
- 밴드가 인기를 누리고 있던 1994년, 커트 코베인은 유럽 투어 중 로마에서 심각한 마약 중독으로 인하여 쓰러지게 되고, 결국 이걸 볼 수 없었던 크리스와 데이브 그롤은 커트를 재활소로 보내게 된다. 그러나, 커트는 치료를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였고, 1994년 4월 8일에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 너바나가 커트 코베인의 사망으로 해체된 후, 크리스 노보셀릭은 정치 활동에 뛰어들었고 음악 분야에서는 너바나 관련을 제외하면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치 성향은 자유당 지지자인 리버테리안에 가깝다.
- 다만, 완전히 음악을 그만둔 것은 아니다. 정치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던 1995년에 Yva Ras Vegass라는 여성 뮤지션과 함께 Sweet 75라는 밴드를 결성하기도 했다. 2000년, Sweet 75가 해체된 후 크리스는 정치인 활동에 몰두하면서 중간중간에 데이브 그롤과 합동 공연을 하였다. 2011년에는 데이브 그롤과 팻 스미어, 그리고 폴 매카트니와 같이 합동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 2020년, '더 도어즈'의 자선 공연에서 베이스 세션으로 참여하는 등 다시 뮤지션으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3. 기타
- 키가 200cm의 장신으로 175cm로 평균 키인 커트 코베인은 물론이고 183cm로 작지 않은 체구인 데이브 그롤도 머리 하나는 더 차이가 난다.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 사람들의 평균신장이 유럽 지역에서 가장 큰 것을 생각한다면 노보셀릭의 큰 키가 이상하지는 않다.
- 사용하는 베이스 기타는 대부분 깁슨제이다. 친구 커트 코베인이 펜더제[5]를 썼던 것과 대조적. 썬더버드를 쓴 적이 많고, 같은 회사의 리퍼(Ripper)와 RD 베이스도 연주했다. 특히 RD 모델은 시그니처까지 나왔다. 현재는 생산 중단으로 추정.
- 라이브에선 보컬과 기타에 바쁜 커트를 대신해서 뛰어다니는 등 퍼포먼스를 도맡는 편. 그런데 이러는 과정에서 베이스를 던져올리다 받질 못해 머리에 들이받은 적이 있어 허당스러운 면모도 자주 보여주곤 한다. 해당 영상 이때 머리에 난 상처는 마침 옆에 있던 브라이언 메이가 응급처치를 해줬다. 이후 데이브 그롤이 크리스를 찾아 대기실로 뛰어 갔을 때는 브라이언 메이와 웃으며 샴페인을 마시던 상태로 그롤을 맞이했다.참조
-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당시 도널드 트럼프 발언을 칭찬했다가 먼지 나게 까인 흑역사가 있다.
[1] 여담으로, 폴 매카트니의 공연에 너바나가 게스트로 나왔을 때, 폴은 크리스의 성씨를 살짝 '노보셀리치' 비슷하게 읽기도 했는데, 크리스가 크로아티아계 이민 2세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틀린 발음은 아니긴 하다. 실제로 세르보크로아트어를 쓰는 미국 이민자들 중에는 -ć에 해당되는 부분을 철자만 남겨 /k/ 발음이 나게 하거나 아니면 'chi'로 표기를 해 발음을 살리는 방법을 취한다.[2] 농구선수를 방불케 할 정도로 키가 엄청 크다. 너바나 활동 때 찍었던 Heart shaped box 뮤비를 보면 세트 천장에 머리가 닿는다.[3] 이 시기 유고 연방은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죽음 이후 서서히 국가의 기반이 무너지기 시작하던 때였다.[4] 의외일 수도 있지만 당시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나름 팝 음악 시장이 구축되어 있었고 뉴웨이브와 펑크 록 신도 제법 발달되어 있었다. 파켓 아란즈만처럼 당대 유고 언더그라운드 음악에 영향을 준 컴필레이션 음반도 발매됐을 정도.[5] 대표적으로 머스탱[6] 사실 해체 후 데이브 그롤은 푸 파이터즈 리더로 대성했지만 노보셀릭은 전형적인 세션 커리어로 보냈기에 어쩔 수 없긴 하다. 오히려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이 많은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