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마추어 시절
1976년 5월 27일 출생의 충청북도 청주시 출신으로, 청주중학교 1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을 정도로[1] 일반적인 야구선수들에 비해 야구 입문이 조금 늦은 편이다.청주중 졸업 후 원래는 청주고로 진학할 예정이었는데, 하필 그가 중학교 3학년이던 1991년, 청주고 야구부 사건이 터지면서 야구부가 공중분해됐다. 이 사건으로 청주고 진학이 막히면서 야구를 그만두기 직전까지 갔으나, 다행히 당시 세광고 감독과 야구부장이 사정을 알고 그를 불러들여서 세광고로 진학해 선수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2]
세광고 선배인 송진우 이후 배출한 최고의 좌완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렸고, 전국 대회에서도 대활약해 초고교급 선수 평가를 받았다. 특히 1994년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는 휘문고 김선우와 원투펀치로 한국을 우승시켰다. 세광고 시절 활약 덕분에 여러 대학 팀은 물론이고 연고 팀 한화 이글스도 박정진을 주목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교 졸업반 시절 대학과 프로 사이에서 이중등록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원래 세광고 졸업 후 한화 이글스에 입단하기로 되어 있었다가 연세대학교와 한화 이글스 양쪽에 이중등록을 하는 바람에 이중계약으로 물의를 빚었다.[3][4] 결국 본인과 부모님이 직접 한화 구단을 찾아가 단장에게 죄송하다며 사과를 했고 대학 졸업 후 꼭 한화에 입단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마무리됐다.
1995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였고, 연세대 재학 시절에도 세광고 시절 못지않게 150km/h대의 강속구를 던지는 좌완 투수로 활약했다. 다만 프로 입단 직전이던 4학년 때는 어깨 부상으로 주춤한 모습을 보였다.[5] 연세대 재학 시절 활약으로 인해 구대성과 함께 막강 좌완 라인을 이루어 줄 것이라 기대한 한화 이글스에 1999년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2. 프로 시절
2.1. 데뷔 후~2009 시즌
1999년 연고 팀 한화 이글스 1차 지명을 받아 계약금 2억의 조건으로 입단했다. 사실 이 때 한화는 박정진의 대학 시절 활약과 좌완 파이어볼러라는 희소성을 감안해 계약금을 최대 4억까지 생각하고 있었고, 박정진 본인은 내심 5억까지 바랬으나, 하필이면 IMF 사태로 인해 구단 재정이 어려워지며 그가 입단할 때 즈음 계약금이 2억으로 줄어버렸고, 이에 박정진도 어쩔 수 없이 그 조건을 수락한 것이다.
대학 시절 보여준 모습 덕분에 입단 당시만 해도 송진우와 구대성에 이어 이글스의 좌완 투수 계보를 이을 걸로 기대를 받았으나, 정작 프로 데뷔 후에는 기대치와 다르게 심각한 제구난으로 10여 년의 세월 동안 딱히 나아지는 것 없이 꾸준히 시망 상태였다. 심지어 고의사구를 폭투로 연결시키는[6] 황당한 플레이를 선보이는 바람에 '한화 개콘스'의 명성을 널리 드높인 적도 있다.
연세대 시절 발생한 어깨부상 때문에 2년차까지는 재활군 신세를 졌고[7], 몇 번 출장하긴 했으나 나오는 족족 털리며 첫해인 1999년에만 8.03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그러다가 2001년 4월 14일에 첫 승을 선발승으로 거두면서 무언가 보여주는가 했더니, 이후 몇 번의 선발경기에서 폭투를 계속 저지르면서 불펜으로 강등도 되고 2군도 갔다온다. 그러다 그해 9월 29일에 롱 릴리프로 나와 7⅓이닝 동안 1피안타 무실점으로 구원승을 거두었는데, 이는 박정진 터지기 전 인생 경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경기 중반에 삼성의 중심 타자들인 이승엽-마해영-김한수를 3연속 삼진으로 잡고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무리한 것이 백미. 당시 KBS 인터뷰 영상 이 경기는 TV 중계까지 탔던 경기라서 아는 올드 팬에게는 간간히 회자되었던 명경기였다.
이후 2002년에는 마무리로 시작했으나 5월 5일 LG전에서 선발로 나와 QS+를 기록하고, 그 덕에 로테이션에 편입되어 몇 경기 선발로 나오고는 자취를 감추고(...) 후반기 불펜으로 기용되었다.
2003년에는 리빌딩에 맞추어 5선발로 시작했지만 거하게 털리고 불펜 강등. 그나마 불펜 주축으로 기용되며 57경기에 올라와서 100이닝을 던졌다. 혹사... 긴 한데 이 때가 박정진 각성 전 커리어하이였고 유일했던 풀타임 시즌이었다. 가능성은 보여주었지만, 고질적인 제구난은 여전했던데다 2003년 당시 불펜기용이 무리로 작용했는지 공이 가벼워지고 먼지나게 털리면서 만년 유망주 테크트리를 타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조규수, 김창훈 등과 함께 한화 1차 지명 잔혹사의 사례로 거론될 지경까지 갔다.
이렇게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된 원인은 바로 부상과 투구 폼이었다. 연세대학교 시절에 몸에 무리가 와서[8] 부상에 시달리기 시작한 박정진은 부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구 폼을 전면적으로 개조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나온 것이 2010년부터의 특이한 투구 폼이었다.
그러나 그는 공익근무요원 복무를 마친 후에도 2009년까지 부상을 떨치지 못한 상태였고, 강속구를 가지고 있음에도 어깨 통증을 호소하면서 전력에 도움이 되지 못한 그를 고치려고 했던 코치들은 모두 "네가 부상이 있는 이유는 투구 폼 탓"이라고 하면서 그의 투구 폼을 고치려고 했다. 사실 워낙에 특이한 투구 폼이라 일반적인 관점으로 그렇게 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허나 희한하게도 고친 투구 폼으로 던질 때마다 오히려 고통이 더 심해져서 부상 노이로제에 시달리던 박정진은 결국 코치들의 말을 거역하고 원래 투구 폼을 돌아오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4년에는 병역비리 사건까지 연루되어 30세가 된 이듬해부터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했다. 소집 해제된 후에는 이게 더 심각해져서 구속도 줄어들었고, 수술도 하지 않았음에도 몇 년간 재활군에서만 머무르면서 세월을 보냈다. 소집 해제되어 팀에 복귀한 후에는 2009년까지 1군에서 2홀드만 기록한 게 전부였다.
그렇게 긴 10년 간을 고통과 투구 폼 변경으로 보내게 되면서 사이버 투수로 전락한 그는 2009년 시즌이 끝나고 한화의 방출자 명단에 올랐으나, 좌완 불펜 투수라는 점 때문에 한대화 감독의 지시로 살아남았다.
만약 2010년 시즌을 앞두고 당시 박정진을 방출했다면 그 후 한화의 불펜은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2.2. 2010 시즌
한때 본인도 은퇴를 생각했었고, 한화 구단에서도 그를 2009 시즌 후 방출자 명단에 올렸으나 좌완 불펜 투수가 부족하다고 판단한 한대화 신임 감독이 그의 방출을 저지했다. 교육리그 파견이 확정된 날 그는 구단 관계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방출 통보인 줄 알았다가 교육리그 파견 통보에 환호했다고 한다. 미국 교육리그에서 마지막 테스트가 주어졌고, 이 교육리그에서 괜찮게 던지면서 기회가 주어졌다고 한다.
이후 훈련을 시작했고 새로 부임했던 성준 투수코치는 그에게 투구 폼을 고칠 것을 권유했지만, 다시 한 번 투구 폼을 변경하느냐 마느냐는 갈림길에서 1년차로 은퇴 후 코치로 첫 해를 보내게 되는 정민철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에 정민철은 너는 네 폼으로 던졌을 때가 공이 제일 좋았었던 것 같다. 네가 던지고 싶은 폼으로 던져라라고 용기를 주었고, 그것에 용기를 얻은 박정진은 성준의 조언으로 투구 폼을 보완하기만 하고 시즌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0년의 인고의 세월을 거친 박정진은 드디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잠재력을 터뜨리면서 한화의 불펜 에이스로 우뚝 섰다.
그가 각성하기 시작한 2010년의 최종 성적은 1군 56경기 79⅓이닝 2승 4패 10세이브 6홀드, 평균자책점 3.06이다.
시망스런 한화 불펜에서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2010 시즌 한화 내의 세이브 1위 투수이고 개인 통산 처음으로 두자리수 세이브였으니... 게다가 박정진이 소화한 이닝 수와 경기 수도 많기에 평균자책점이 무조건 많이 높다고는 볼 수 없다. 당시 한화 불펜의 상황은 이기고 있으면 무조건 박정진 아니면 윤규진이었다.
어쨌든 이러한 활약으로 2011 시즌의 마무리 후보로 올라섰으며 2010 시즌 3,500만 원이던 연봉이 2011시즌에는 114.3% 인상된 7,500만 원으로 올랐다. 그래도 프로 13년차였음에도 여전히 연봉 1억이 되지 않았다.
비단 필승조 역할뿐만이 아니라, 정민철, 구대성, 송진우가 모두 은퇴를 선언하고, 최영필까지 부진하다가 FA 신청 후 방출되면서 한화의 투수 최고참 자리까지 맡게 되었고 이 역할도 잘 해냈다.
2.3. 2011 시즌
한화가 마무리 전문 용병 오넬리 페레즈를 사와서 필승조의 셋업맨으로 보직이 바뀌어 4월 3일 첫 등판해 무난하게 막았다. 그러나 언제든지 마무리도 가능하다고 했다.그리고 결국 오넬리가 제대로 망하고 웨이버 공시되었으며, 다른 불펜진도 분식집 사장 유원상에 제구가 무너진 정재원 정도밖에 없던 터라 한화 불펜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던 자원이었다.
5월 18일 두산전에서는 양팀의 난타전 속에 6회 2아웃 1, 2루 상황에서 등판해 혼자 3⅓이닝 동안 분식회계도 없이 60개의 투구수, 2피안타 2볼넷 5K 무실점으로 승리를 기록했다. 그 이전 경기에서도 만만찮게 던져서 혹사가 우려되었지만 믿을 놈 하나 없는 한화 불펜진을 보면 답이 없었다.
온몸 부서져라 던지는 노장의 혼신을 다한 역투가 야구팬들의 감성을 자극했는지 네이버 검색어 1위 등극! 가장 위기였던 8회말 1사 주자 2, 3루에서 그가 두산의 중심타선 김동주, 최준석을 연속 삼진으로 해결하고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은 정말 한화 팬들에게 최고의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5월 21일 KIA전에서도 3이닝을 완벽 그 자체로 틀어막으며 팀의 4연승(!)을 이끌었다. 이 때까지 10게임에서 17이닝을 던졌는데 무실점. 삼진도 24개나 잡아냈다. 피안타율과 이닝당 출루율도 매우 훌륭한 성적.
하지만 리드 상황에서 박정진 말고는 올릴 투수가 없는 한화의 불펜진 상황으로 인해 제대로 쉴 틈도 없이 연일 등판을 이어가며 점점 구위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5월 27일 경기 당시 7회 등판했으나 스트라이크를 거의 집어넣지 못하면서 체력이 떨어졌다는 것을 증명했고, 6월 5일 경기에 시즌 첫 피홈런을 기록했다. 다행이라면 2군에서 콜업된 신주영이 괜찮은 모습을 보여 주면서 2일 연속 세이브를 올렸다. 만약 신주영이 이대로 마무리 투수로 자리 잡는다면 박정진의 체력 안배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다.
결국 박정진은 2011 시즌 전반기의 눈부신 활약으로, 선수 데뷔 후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하게 되었다.
전반기 막바지에 바티스타라는 확실한 마무리가 들어오면서 부담을 덜고 셋업맨으로 고정되었다. 2011 후반기 한화 필승공식은 선발 6이닝-박정진 1~2이닝-바티스타 마무리인데, 선발은 뚫려도 박정진-바티스타는 못 뚫을 거라며 한화 팬들이 자부하기도 했다.
허나 시즌 마지막 롯데 3연전에서 결국 뚫렸다. 수비진의 구멍과 행운의 내야안타가 만들어낸 역전극이라지만 벤치에서 너무 안일하게 대처했던 것도 문제라면 문제. 사실 아무리 롯데가 1군 주요멤버들을 2~3명 남기고 거의 백업으로 나왔다고 해도 롯데의 타선은 살인적이라는 것을 간과했다. 게다가 이대수의 공백을 한상훈 혼자서 막는 데다가 나머지 수비 곳곳에서 구멍이 발견되어서 수비 때문에 역전당해도 뭐라 말 못할 상황.
설사 수비가 아니라 박정진의 잘못으로 뚫렸다 해도 시즌 내내 보여준 그의 헌신적인 활약을 생각한다면 아무도 그에게 뭐라 할 수는 없었다. 박정진은 당시 지칠 대로 지쳤을 테니까.[9]
그리고 그 헌신의 대가로 커리어 최초로 연봉 1억대에 진입했다.
한화팬이 직접 만든 2011년도 박정진 탈삼진 스페셜
2.4. 2012 시즌
송신영과 함께 좌, 우완 필승계투로 활약할 것이 기대되었으나 스프링캠프 막바지에 어깨 염증이 발견되어 일찍 귀국하여 불안감을 주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많은 공을 던지지 않았더라고 해도 지난 2시즌 동안 너무 많은 이닝을 소화한 후유증인 듯했다.
4월 후반 재활을 마치고 복귀하여, 4월 22일 청주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전에 스코어 3:3인 7회초 2사 2루 상황에서 등판하여 이승엽을 유격수 땅볼로 잡아내고 이닝을 마쳤다. 그리고 여전히 스코어 3:3인 8회초에도 등판하여 2사 후 강봉규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주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는데, 다음 투수인 바티스타가 볼넷과 2루타를 허용하며 스코어를 5:3으로 만들었고 팀이 8:4로 패하는 바람에 박정진은 패전 투수가 되고 말았다.
박정진의 이날 기록은 1이닝 17투구수 1볼넷 1K 1실점 1자책점 패전.
4월 28일 청주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넥센 히어로즈전에서는 팀이 스코어 1:5로 앞선 7회초에 등판했다. 선두 타자 오재일에게 볼넷을 내준 뒤 김민우를 중견수 플라이로 잡아냈으나 허도환에게 스트레이트 볼넷, 지석훈에게 쓰리런 홈런을 맞고 스코어 4:5를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다음 타자 정수성에게 볼넷을 허용하고 장기영을 좌익수 플라이로 잡아내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다음 투수인 송신영이 첫 타자 이택근에게 1타점 2루타를 맞고 블론세이브를 작렬하는 바람에 박정진의 실점과 자책점이 늘어나고 말았다.
박정진은 이날 ⅔이닝 26투구수 1피안타 1피홈런 3볼넷 4실점 4자책점으로 거하게 불을 질렀으며, 간만에 호투한 양퐁당의 첫 승을 송신영과 함께 날려버렸다. 완벽하게 몸 상태를 끌어 올리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콜업시켰다가 난 참사라는게 중평.
그리고 문제의 5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한대화와 정민철이 미친듯이 등판시켰다. 몸이 성치 않은 노장을 21경기 중 무려 18경기에 등판시키는 모습은 혹사를 넘어 광기마저 보였다. 당연히 나올 때마다 계속 털리며, 5월 말이 되자 나오는 족족 홈런을 맞으며 평균자책점은 두자리까지 치솟았다. 한대화와 정민철의 백정 짓은 아무도 납득하지 못하는 수준이었고 2년 동안 팀의 불펜을 든든하게 지켰던 한화의 노망주, 박정진은 몸과 멘탈이 한꺼번에 붕괴되었다. 이대로라면 이번 시즌을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질 듯했다.
한화 팬들은 잘 던지는 선수를 혹사로 망가뜨리는 것도 아니고 누가 봐도 상태가 정상이 아닌 노장을 혹사시켜 내보내는 족족 쳐맞게 함으로서 몸과 멘탈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짓거리는 킬인식 시절에도 보지 못했다고 경악하였다. 그리고 타팀 팬들 역시 박정진이 한대화나 정민철이랑 같이 술 먹다가 수정펀치라도 날린 거냐고 역시 경악했다. 한대화나 정민철은 백정을 넘어 그냥 미친 거 아니냐고 정신상태까지 의심받았다. 그동안 박정진을 봐온 한화 팬들이라면 누구도 박정진을 비난할 순 없었다.
결국 2군으로 내려갔다 6월에 다시 콜업되었고, 2011년처럼은 아니지만 준수히 활약했다.
6월 18일 SK전에서 시즌 첫 세이브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6월 방어율 2.00을 기록하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부활했다. 한화 팬들은 그저 노망주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7월 이후로도 승리 상황이 많지는 않지만 변함없이 한화의 승리조로 분투하였다.
9월 19일 삼성 라이온즈전에서 스코어 5:5 상황에서 6회 구원 등판하여 승계주자 1명의 득점을 허용했지만 6회말 3득점한 타선의 도움을 받아 시즌 4승(4패 12홀드 2세이브)째를 기록했고 평균자책은 5.68로 시즌 초반에 비하면 많이 낮아졌다.
이날 박정진은 수훈선수 인터뷰를 하며 자신을 다시 살려 낸 은사 한대화 전 감독에 대한 죄송한 마음을 토로했다.
2.5. 2013 시즌
송창식과 함께 필승조로 꼽혔지만, 부상으로 훈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고 개막전 1군 엔트리에도 들지 못했다.
이후 재활에 전념하다가 7월 9일 두산 베어스전에서 시즌 첫 1군 등판. 팀이 5:0으로 지던 8회말 등판하여 1이닝 무피안타 무사사구 1K 무실점 무자책점으로 복귀를 알렸다. 복귀 직후 예상외로 폼이 빠르게 살아나며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역시나 감독의 무절제한 마당쇠 등판으로 다시 폼이 무너지는 모습이었다.
2.5.1. 매우 늦은 1차 FA
우선협상기간 막판까지 협상에 난항을 겪으며 팀 선배들의 전철을 밟지 않나 우려되었지만, 협상 종료를 4시간여 앞두고 팀 동료들 한상훈, 이대수와 함께 2년간 총액 8억원(계약금 3억 + 연봉 2억 + 옵션 1억)에 계약에 성공하였다. 이로서 영원한 한화맨으로 남을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2.6. 2014 시즌
스프링캠프 동안 컨디션을 잘 끌어올려 개막전 엔트리에 포함되었다. 3월 30일 롯데와의 시즌 개막전에서 팀이 4:2로 앞서던 7회 등판해 아웃카운트 두개를 깔끔하게 잡아내면서 홀드를 기록했다.
하지만 개막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이후로 2경기 연속으로 더 등판하면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3월 31일 경기에선 불펜진이 털릴때 같이 3실점하며 털렸으며 다음날에도 1실점을 하며 결국 팀이 역전패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4월 10일 NC와의 경기에서 8회 윤근영으로부터 마운드를 넘겨받아 타자 두 명을 범타로 처리하며 컨디션이 어느정도 회복된 듯한 모습을 보였다. 9회에 결승점이 나오면서 이날의 승리투수로 기록.
4월 19일 LG전에서 5점차로 앞선 9회초 등판하여 첫 타자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주고 연속안타와 희생플라이, 포수 이희근의 실책 등으로 4실점(2자책점)을 내주며 다 잡은 경기를 내주는 원인을 제공했다. 결국 연장 10회말 고동진의 끝내기 안타로 승리하긴 했지만.
4월 22일~24일 두산과의 3연전에서는 첫날과 셋째날 등판해서 각각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5월 7일 LG전에서는 연장 10회말에 등판해 선두타자 안타와 2볼넷 등으로 한 점을 내줘 세이브를 날렸지만, 팀이 11회초에 송광민의 적시타로 앞선 상태에서 11회말 수비는 삼자범퇴로 막으며 결과적으로는 승리투수가 되었다.
5월 15일 삼성전에서 8회 등판해 아웃카운트 두 개를 잡았으나 박석민에게 2루타를 허용하고, 이후 이승엽을 고의사구로 내보낸 후 윤규진에게 마운드를 넘겨주고 내려갔다. 윤규진은 1사 1,2루 상황에서 깔끔한 병살타로 이닝을 마무리.
5월 16일 SK전에서는 팀이 5:3의 불안한 리드를 지키고 있던 9회 등판해 김강민을 삼구삼진으로 잡아내는 등 삼자범퇴로 막아내며 세이브를 기록했다.
가장 믿을 만한 불펜 윤규진이 2군으로 내려간 뒤. 좋은 모습을 보여 김응룡 감독의 교시에 따라... 팀의 마무리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7월 이후에는 2군에서 돌아온 윤규진, 안영명과 함께 한화의 필승조를 맡고 있다. 사실상의 중무리로 활약하는 윤규진과 더블 스토퍼를 이루고 있다. 직구 구속을 149km/h까지 끌어올리는 등 나이를 거꾸로 먹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8월 11일 현재 팀내 홀드(6홀드)와 세이브(8세이브) 모두 1위에 올라 있다. 7월부터 8월 11일까지의 성적은 14경기 1패 6세이브 2홀드 14.1이닝 4자책, ERA 2.51의 호성적이다.
2.7. 2015 시즌
스프링 캠프에서 오키나와 재활조로 분류 되었다. 훈련 중 조부상을 당해 김성근 감독이 잠시 귀국해도 좋다고 하였으나, 국내에 있던 아버지와 할머니의 만류로 계속 남아있게 되었다. 1월 29일 재활을 마치고 고치현에 합류하여 개막 직전까지 훈련을 소화하였다.
개막 직후부터 윤규진이 부상으로 빠지고 안영명이 선발로 합류하며 이탈한 필승조를 권혁과 함께 굳건히 떠받치고 있다. 4월말 기준 박정진과 권혁의 동반 출장시 승률은 11승 2패, 81.8%에 이른다. 팀의 22경기중 14경기에 나와 16.2이닝을 소화하는 투혼을 선보이며 방어율 2.70, 3승 1패 1세이브로 리그 다승 공동 선두에 올라, 두 번째 FA를 향해 순항중이다.
2015년 5월 1일, 롯데와의 경기에서 7회 초 등판했는데, 한화가 야수 엔트리를 소진한 상황에서 전타석 대타로 9번 타석에 들어간 김태완이 수비로 들어가지 않으면서, 지명타자였던 최진행이 좌익수를 보게 되었고, 7회 말 2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투수 박정진이 나이 마흔 살에 9번 타자로 타석에 들어서게 되었다.
고교 시절 이후로 처음 타격을 해본다는 박정진은 타석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용규에게 속성 원 포인트 강의를 들으며 팬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한화 팬들의 환호 속에 타석에 들어선 박정진은 까마득한 연세대 후배인 이인복을 상대로 커트(!)를 해내는 등 나름대로 집요한 승부 끝에 투수 강습 타구를 쳤는데, 롯데 내야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1루에서 세이프될 뻔했다![10] 1루를 밟지는 못했지만 쳤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마운드에선 이날도 ⅔이닝 무실점으로 홀드를 추가했고, 팀은 5:7 대역전승을 따냈다. 영상
2015년 5월 2일, 롯데와의 경기에 7회 말 2사 1, 2루 상황에서 등판하면서 역대 30번째이자 개인통산 500경기 출장을 기록하였다.
5월 27일 경기에서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듯이 2.2이닝 무실점 5K를 잡아내는 동안 단 30구로 틀어막았고 경기가 끝난 뒤 팬들에게 생일축하 송을 받았다.
6월 들어서는 더욱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6월 9일부터 11일까지의 삼성전에서 2, 3차전에 등판해 삼성의 타자들을 상대로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7월 2일까지 기준으로 노 블론.
이런 화려함 속에 있는 것은 KBO 혹사왕 권혁에 그다지 뒤지지도 않는 혹사. 박정진은 2015년 한화 승리조 권정진의 정이 되었기 때문에, 엄청난 경기 출장과 이닝 소화를 자랑하고 있다. 7월 2일 현재, 같은 팀 투수인 권혁과 송창식,[11] 그리고 동기간 불펜투수 이닝 순위 3위 조상우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 | 경기수 | 이닝 | 상대타자 | 투구수 |
권혁 | 44 | 65⅓ | 290 | 1199 |
박정진 | 48 | 63⅔ | 258 | 1020 |
송창식 | 32 | 55⅔ | 241 | 1006 |
조상우 | 38 | 52⅔ | 212 | 845 |
그리고 7월 15일 롯데전에서 쓰리런 포함 1이닝 동안 4실점하고 ERA도 2.56에서 3.09까지 치솟았다.
8월 들어 연투도 2번밖에 없고 3연투는 아예 없는 나름의 관리를 받는건지, 지옥의 7월보단 나아졌다.
한화의 5강싸움이 치열한 가운데 윤규진이 이탈했고 권혁이 퍼져버려서 박정진에게 부담이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9월 초, 계속된 연투에도 불구하고 95이닝 ERA 2.84라는 경이적인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어째선지 9월 1일 KIA전에 나온이후 등판 기록이 없다. 부상이라도 있는 건지...
9월 8일 LG전에 오랜만에 등판하였다. 9회 말 1아웃상황에서 나왔는데 1루수 권용관이 히 드랍 더 볼을 시전한 이후 흔들리면서 폭풍 3실점하고 동점을 허용, 시즌 첫 블론 세이브를 기록하고 말았다. 결국 팀도 연장 12회 말에 권혁이 박지규에게 끝내기 안타를 허용하면서 7:8로 졌다. 1주일 만의 등판이었으나 권혁과 마찬가지로 혹사의 여파로 체력 저하가 이제서야 나타난 듯하며, 권혁보다 관리받았을지언정 엄연히 40대의 노장이기에 힘에 겨운듯 보인다.
그리고 9월 9일 이런 기사가 실렸다.
"박정진은 시즌 초였던 지난 4월 부산 원정 중 김성근 감독에게 크게 혼난 적이 있다. 김성근 감독은 "공 하나 던지고 아프다 그러길래 '그런 식으로 할 거면 그만두라'고 무지하게 혼냈다. 그 이후 본인이 먼저 '저 오늘 안 되겠습니다'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자기 속의 한계를 하나씩 올려가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런 박정진이 지난주에는 안 되겠다는 의사를 전하며 일주일을 쉬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즉 박정진이 9월 2~6일 결장한 것은 도저히 본인이 안 되겠어서 빠진 것인데, 9월 5일 경기가 끝나고 김성근 감독은 이런 인터뷰를 했다. "5일 경기에서 나서지 않았던 투수들은 자신이 없이도 팀이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봤을 것이다."
이것이 9일 박정진 기사와 맞물려 김성근이 박정진을 저격한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9월 10일 이후로 10일 넘게 원인 불명으로 계속 등판하지 않고 있던 차에 21일 배지헌 블로거가 페이스북에 의미심장한 글과 함께 박정진의 사진을 올렸고, 최민규 기자 역시 본인의 페이스북에 "권혁과 박정진 중 한명은 내년에 공 못던진다."[12]라는 댓글을 달았다. 확인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추측들만 무성한 상황.
9월 22일 기사를 통해 어깨 통증으로 등판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 몸상태를 걱정하던 팬들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같은 날 박동희의 기사에서도 적어도 올 시즌은 공을 더이상 던지지 못한다는 것이 간접적으로 확인되었다.
결국 프론트 측에서 박정진과 윤규진이 부상 상태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감독님과 불화로 내년 시즌 쉰다고요?" 11월 24일. 오랜만에 근황을 알리는 기사가 하나 등록됐는데, 기사 제목이 제목이다보니... 자세한 내용은 기사 참조.
2.8. 2016 시즌
개막전 대(對) LG전에 송은범, 송창식 뒤를 이어 3번째 투수로 나온다. 실점하긴 했는데, 이게 하주석의 실책으로 생긴거라 비자책처리. 1⅔이닝 무자책으로 첫 등판을 마친다.4월 6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홈 경기에서 그야말로 똥볼을 던져대며 탈탈 털렸다. 이날 기록은 ⅓이닝 2피안타 1사사구 1실점.
혹사 여파가 없지 않은지 구위가 전 같지는 않은 듯 하다.
4월 17일 LG전 8회에 등판해 2이닝 투구수 36개 3K로 비록 팀은 졌지만 무실점으로 내려갔다.
4월 19일 롯데전 10회말에 등판했지만 선두 타자에게 3루타 및 볼넷을 내준 후 강판당했다 그리로 후속 투수 송창식이 끝내기 볼넷을 내주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
4월 28일 기아전 4회초 송은범의 뒤를 이어 등판해 1⅔이닝 23구 1피안타 3K 무실점 투구하고 송창식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5월 들어서도 연투가 잦아졌다. 이미 기량의 노쇠화와 노예로 굴려젔기에 점점 부진에 늪에 빠지고 있다.
5월 20일 경기부터 22일 경기까지 3연투를 당했다. 이쯤 되면 김성근 감독이 부진을 핑계로 2군에 내리려고 한다는 말이 많다. 5월 말부터 승계주자 실점율이 급격히 상승하고 있다.
3일을 푹 쉬고 나온 6월 1일 SK전 2⅓이닝 동안 2피안타 2K 투구수 41개로 오래간만에 좋은 호투로 방어율도 8.37에서 7.62로 내려갔다.
3, 4일 경기 등판 후 역시 3일을 푹 쉬고 6월 8일 기아전에 2이닝 2K 무실점을 기록하며 팀 승리의 밑거름이 됐고, 팀이 승리하며 시즌 3승을 달성하게 되었다. 방어율도 6.83으로 떨어뜨렸다. 어쩌면 그 동안 부진했던 원인이 충분한 휴식이 없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6월 19일 놀랍게도 선발 투수로 예고되었다. 1회초 서건창에게 안타를 맞았으나 김하성을 병살처리하며 이닝 교체를 이끌었다. 하지만 2회초 윤석민에게 볼넷을 주고 대니 돈에게 안타를 맞은 후 아웃카운트 하나 못잡고 불과 이틀전(6/17)에 불펜으로 4⅓이닝 던진 장민재로 교체되었다. 이후 강경학의 수비로 전세가 완전히 기울었고 그대로 패전투수가 되었다.
6월 23일 NC전 4회 무사1루 상황에서 마운드에 올라 3이닝간 43구 5K 무실점 투구를 하였다.
6월 29일 넥센전 송창식이 김민성에게 백투백 홈런을 맞고 마운드를 떠나고 오르자마자 채태인에게 백투백 홈런을 허용해줘버리고 박동원에게 볼넷, 박정음을 병살처리하고 7회 심수창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7월 9일 대전 삼성전에 등판하여 통산 600경기 등판을 달성하였다.
7월 10일 삼성전 7회말 2사 1, 2루 마운드에 올라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이후 7월 내내 꾸준히 등판하며 7월 평균자책점 7.62, 시즌 평균자책점 6.79를 기록했다.
8월 3일 KIA전 6회에 마운드에 올라 3이닝 49구 3K 무실점 투구를 하며 이태양의 승리를 지켜냈다.
8월 5일 NC전 7회에 마운드에 올라 1이닝 2실점을 기록했다.
8월 18일 LG전 2회말 2사 1, 2루 위기에 등판해 양석환을 유격수 땅볼로 처리해 불을 껐다. 3회말과 4회말, 여섯 타자 연속 범타 행진을 만들며 안정감이 돋보인 투구를 펼치며 승리투수가 됐다. 성적은 2⅓이닝 29구 3K 무피안타 1볼넷 무실점.
8월 26일 NC전 5회 1사에 등판해 37구 2⅔이닝 6K 무실점으로 올 시즌 한경기 최다 탈삼진을 잡으며 인생투를 던지고 내려갔다.
9월 13일 삼성전 9회말 4:3 무사만루에 등판, 타자 배영섭을 땅볼 유도하는데 성공했으나 3루수 송구 실책으로 1점을 내주며 동점을 허용하며 블론세이브를 범했다. 하지만 구자욱 삼진, 최형우 인필드 플라이, 이승엽을 우익수 플라이로 세타자를 내리 잡으며 위기를 넘겼고 10회 윤규진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9월 14일 삼성전에는 전날의 호투와는 달리 3이닝 3실점 60구 투구수를 기록하며 탈탈 털렸고, 패전투수가 될 위기에 처했다가 이양기의 홈런으로 인해 겨우겨우 패전은 면했다.
9월 27일 NC전에 7점 앞선 상황에서 5⅔이닝을 던진 이태양의 뒤를 이어 등판하여 조영훈, 지석훈, 박광열, 이재율까지 4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잡아내는 엄청난 피칭을 선보였다. 8회 다시 나와 2루타 하나를 제외하면 또다시 범타 처리로 이태양의 무실점 승리를 지켜냈다. 그러나 심수창이 3연속 안타를 맞으며 0이닝 1실점하여 무실점 승은 일단 날아갔다.
10월 8일 5대 0 상황에서 구원으로 나와 1⅓이닝을 던지고 에릭 서캠프와 교체되었다. 다행히 정우람이 2이닝을 책임지고 정근우가 끝내기 안타를 치며 이기기는 이겼다...만 순위가 결정된 시점이라 기아의 주전들이 다 빠졌고 지고 있는 상황에서 또 노장 승리조가 다 투입되었기에 마냥 좋아할만한 경기는 아니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많은 이닝을 소화하며 끝에 가서는 힘이 딸리는 모습을 보였다. 2015년 셋업맨의 모습까지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필승조로 자신의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또한 2016시즌 출전 경기 수 1위를 달성했다.[13] 84이닝을 던져 85개의 높은 삼진을 잡아냈지만 방어율이 2015년 보다 2점대가 더 올랐다.[14]그나마 정우람-권혁 다음으로 믿을만한 불펜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접전 상황을 막아낸 적이 19번, 불을 지른 상황이 18번으로 윤길현(20/18)보다 성적이 좋지 않다. 그만큼 마구잡이로 굴려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승계주자 수 및 분식회계 주자 수에서 70명/28명으로 양 부분 1위를 기록하는 불명예를 떠안게 되었다. 물론 한화의 불펜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이에 대해 욕하는 한화팬은 거의 없는 편.
2.9. 2017 시즌
믿을만한 외인 선발 2명의 영입과 재활조 투수들의 귀환으로 투수진 걱정이 줄었다는 평도 있지만, 당장 선발진에는 좌완이 아예 없고 구원진에는 믿을만한 좌완 투수가 정우람 외에는 없어서 올해도 살려조 편입이 유력할 것으로 보인다.[15] 일단 훈련에서의 성실한 태도와 체력적인 면에서는 확실히 좋은 평을 듣는 듯 하다. 문제는 전전년도와 전년도의 소화 이닝과 나이. 조인성 다음으로 노장이다 보니...
두산과의 개막 3연전을 모두 등판했다. 하지만 3경기 모두 한 타자만 잡고 바로 교대하는 원 포인트 릴리프로 나와서 작년보다 부담은 아주 조금 덜었다. 그리고 1, 2차전은 아예 아웃 카운트를 못잡고 강판당한 거라...
4월 4일 NC와의 홈 경기에 배영수가 6이닝 무실점으로 승리요건을 만들고 내려간 7회에 등판해 2이닝을 소화하고 송창식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당연히 6점 차에 필승조를 낸 감독이 까이는 중.
4월 8일 KIA와의 원정 경기에 8회 주자 둘을 출루시키며 흔들리는 송창식의 뒤를 이어 구원등판했으나 희생번트-볼넷을 허용해 1사 만루를 만들고 윤규진에게 마운드를 넘겨주었다.
4월 9일 KIA전에서 이태양이 주자 하날 남기고 내려간 뒤 구원등판했으나 버나디나에 KBO 데뷔 첫 홈런을 허용해 이태양을 패전투수로 만들었다.
4월 13일 삼성전에서 송창식의 뒤를 이어 등판했으나 만루를 만들고 심수창에게 폭탄을 넘겼다. 조인성의 개떡같은 리드[16] 끝에 심수창이 싹쓸이 안타를 맞아 그대로 패전투수가 되었다.
이후 선발진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아 5회 이전부터 등판하는 일은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송창식과 최다 출전 기록을 다투며 출전하였다.
그러던 5월 4일 1대 2로 뒤지던 5회 1사에 등판해 삼진 2개를 잡고 6회 1구 뜬공 후 다시 삼진을 2개 잡아 1.2이닝 4K 퍼펙트를 기록했다. 원래대로라면 송창식이 나왔어야 하나 선발이 죄다 5이닝도 못먹자 롱릴리프로 2연투를 해서 대신 나왔는데 전날 쉬어준 덕에 역시 휴식이 보장된 박정진은 어디 안간다는 평을 들었다.
5월 6일 3대0으로 뒤지던 5회 2사 3루에 등판하여 실점없이 한타자를 투구수 2개로 요리하였다. 벌써 17경기째 출장...대부분 원 포인트 릴리프로 등판한 거라 소화 이닝이 12.2이닝으로 많지 않은 편이라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다.[17]
5월 10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홈경기에서 무려 6번째 투수로 올라와서 0.2이닝 1실점을 기록, 시즌 평균자책점은 7.43을 찍고 말았다. 결국 11일 장민재와 함께 2군으로 내려갔다.
16년에 이어 한화 팬들이 모두 박정진이 2군에서 휴식을 많이 취하기를 고대했지만, 김성근 감독은 열흘이 지나자마자 박정진을 바로 콜업시켰고 21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홈경기에서 3번째 투수로 투입해 0.2이닝 3실점을 기록하게 만들어 이날의 패전투수가 되었고 시즌 ERA는 7.71을 기록하였다.
5월 24일 한화가 크게 지던 9회 초 등판해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5월 25일 KIA와의 홈경기에 등판해서 4-1로 뒤지던 8회 초에 등판하여 2아웃을 잘 잡아놓고 갑자기 나지완을 사구로 맞추는 것을 시작으로 무너져버려서 0.2이닝 2실점을 기록하였다. 이날의 투구로 시즌 ERA는 8.04을 기록하였다.
6월 7일 윤규진의 뒤를 이어 6회 2사에 등판하였으나 윤규진이 남겨놓은 주자를 버나디나에게 맞은 쓰리런으로 깔끔히 분식해버렸고, 0대 5로 경기가 기울어 윤규진이 패전투수가 되었다.
6월 9일 최영필이 은퇴하면서 현역 최고령 투수가 되었다.
6월 15일 SK전에 7회 말 등판해 무실점으로 1이닝을 막았다. 평균자책점도 6.04까지 내려갔다.
6월 16일 kt전에 전 이닝을 잘막고 안타를 맞은 장민재의 뒤를 이어 7회 등판하였으나 자신의 번트 송구 실책을 허용해 무사 2, 3루를 만들었고 2타점 적시타와 투런포까지 허용해 15대 10에서 15대 14까지 점수 차를 좁히고 말았다. 그럼에도 자책점은 없었고 평균자책점도 5.79로 내려갔으나 결국 권혁-정우람까지 필승조를 모조리 소모해야 했다.
18일 10대 3으로 크게 앞선 kt전에서 7회 등판해 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20일 5대5로 동점이던 넥센전에서 7회 등판했으나 안타-사구 이후 겨우 외야 플라이 하나만 잡고 내려갔다. 송창식이 2아웃을 잘 처리해주어 자책점은 없었다.
21일 또 등판해 6회를 KKK로 지워버리고 내려갔다. 1이닝 3K 퍼펙트.
조인성이 6월 22일 방출당하면서 18시즌에도 현역 생활을 할 시 KBO 리그 최고령 현역 선수가 될 듯 하다.[18]
26일 팔꿈치 염증이 재발한 비야누에바와 차일목, 장민석과 함께 1군에서 말소되었다. 무릎 통증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7월 28일 그간 부진하던 좌완 이충호, 우완 장민재의 부진으로 송창식과 다시 1군에 복귀했고, LG전 8회에 등판해 1피안타를 허용했지만, 무실점으로 이닝을 막았고, 타선의 역전과 정우람의 세이브로 첫승을 챙겼다.
8월 9일 두산전 6회부터 등판하여 적은 투구수로 두이닝을 깔끔하게 무실점으로 막았다. 1점차에도 흔들리지않고 두산의 강력한 타선을 막아낸 베테랑의 모습.
8월 18일 NC전에 등판해 2.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승리투수가 되었다. 이후 정우람이 1.1이닝 세이브를 하며 경기도 14-9로 승리. 후반기 들어 10.1이닝째 무실점을 하며 안정된 모습을 보이는 중이다.
9월 15일 넥센전에 등판해 1과 3분의 2이닝을 피안타 없이 막아내면서 승리투수가 되었다.
9월 16일 LG전에도 9회말 등판하여 1이닝 무실점으로 막아 시즌 첫 세이브를 따냈다. 정우람이 부상으로 빠져있는 상황에서, 사실상 마무리 역할을 맡고있다.
그러나 9월 26일 사직 롯데전에서 6회 2사에 등판했으나 안하던 볼질을 하다 볼넷을 내준 후 앤디 번즈에 쓰리런을 헌납하며 강승현의 주자를 분식한 것은 물론 본인도 실점해 0.1이닝 2실점을 기록하고 말았다.
2년동안 김성근 치하에서 153게임 180이닝을 굴렀음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살아남아서 장민재와 권혁과 송창식이 완전히 무너지고 초토화된 후반기 한화의 불펜진에서 그나마 정우람 다음으로 믿을만한 불펜으로 활약해주었다.
2.9.1. 2차 FA
2018년에 나온 선수들 중 최고령 FA로 나왔다. 동시에 역대 최고령 FA였던 조인성의 기록도 갱신.한화 박정진, 2년 7억 5000만원에 FA 계약
2017년 12월 29일 한화 이글스와 2년 총액 7억 5천만 원(계약금 3억 원, 2018년 연봉 2억 5천만 원, 2019년 연봉 2억 원)에 계약을 맺었다.[19] 이제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
2.10. 2018 시즌
조인성, 이호준의 은퇴로 인해 2018년 KBO 리그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1군 스프링캠프에 합류하였으나 2월 22일 컨디션 저하로 조기 귀국했다. 이후 계속 재활군에만 있다고 한다. 어깨 통증이 있고 좀처럼 컨디션이 올라오지 않고 있는 듯. 한용덕 감독은 원래 슬로우 스타터이니 무리시키지 않겠다고 밝혔다.
약간의 부상이 있으며, 회복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용덕 감독은 정말 우리가 힘들 때 복귀해 달라는 인터뷰를 했다. 팀 내 최고참으로써의 부담감이나 책임감을 덜어주려는 인터뷰로 해석된다.
5월 후반이 되어서야 가벼운 캐치볼 단계에 들어섰다고 하니 전반기 복귀는 어려울 듯. 이미 은퇴할 나이여도 무방할 최고령 선수이고, 어린 선수들의 멘토 역할도 같이 겸하고 있으니 한용덕 감독의 말처럼 정말 위기 상황이 터지지 않는 이상 올리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9월 12일 기사에 따르면 아직도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은 듯하다. "박정진이 아직.." 한용덕 감독의 짙은 아쉬움
결국 이 해 등판을 아예 못하면서 박정진은 팀의 암흑기 동안 불펜 마운드를 지켜준 버팀목이었지만 팀이 암흑기를 벗어났을 땐 그는 마운드에 없게 되었다.
이후 남은 계약기간이 있음에도 은퇴를 선언했다.
[1] 박정진 본인에 의하면 그 전에는 테니스공을 가지고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재미로 야구를 했다고 한다.[2] 2011년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청주고 선배들이 큰 사고를 치는 바람에 야구부가 해체됐고 갑자기 오갈 데가 없어졌다" 라면서 이 사건이 짤막하게 언급된다.[3] 박정진 본인에 의하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연세대학교 출신이라 자기까지 연세대에 진학하면 3대째 연세대 출신이 될 수 있어서 연세대 진학으로 진로를 틀었다고 한다. 만약 다른 대학에서 입학 제의를 했으면 대학 진학 대신 곧바로 프로 직행을 선택했을 것이라고.[4] 실제로 90년대에는 고교야구 유망주들을 두고 대학과 프로 구단 간 스카우트 경쟁이 가장 치열하던 시기였다. 당시 대학 쪽에서 고교 졸업반 선수들을 대상으로 장학금 지원 및 동기들을 몇 명 데리고 입학할 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한 뒤 코치나 선배들을 동원해 합숙을 명분으로 지방에 있는 여관 등에 감금(?)시켜 놓으면, 이걸 또 프로 구단 스카우터가 뒤를 밟아 그 선수를 도로 빼돌린 뒤 거액의 계약금을 제시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박정진과 동갑내기이자 1년 늦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진만 역시 고려대 진학이 거의 확정적이었다가 막판에 현대 유니콘스 스카우터의 회유 끝에 계약금 3억을 받고 프로행을 선택했다.[5] 여담으로 프로에 지명받아야 했던 해에 어깨를 아껴야 한다며 연고전에서 설렁설렁 던지며 볼넷 8개나 주는 짓을 터트려 많은 연세인에게 공분을 사기도 했다. 정작 프로 와서는 어깨부상으로 초기 커리어를 날려먹었다는 게 함정... 참고로 결국 박정진의 부진으로 인해 그 해 연고전 야구는 고려대가 승리했다. 다만 전체 종합으로는 연세대가 아이스하키-럭비-축구를 연이어 이기며 기적의 역전승을 거두었다.[6] 2003년 5월 8일 LG와의 더블헤더 경기에서 2:1로 앞선 7회초 2사 2,3루에서 고의4구 도중 폭투를 저질러 송진우의 승리를 날린 적이 있다.[7] 그래서 1999년 우승 당시 엔트리에 없었다.[8] 혹사 때문이라는 말이 있는데 박정진의 대학 시절 기록을 보면 1학년 때는 기록이 없고 2학년 19 2/3이닝(339개), 3학년 16 2/3이닝(346개), 4학년 27이닝(477개)으로 딱히 혹사당한 적은 없다.[9] 2011년 박정진이 소화한 이닝은 86이닝인데, 이건 살려조로서 2016년에 소화한 이닝 84이닝보다도 많은 이닝이다.[10] 이후 본인 인터뷰에서 전력질주 하지 않았다고 직접 밝혔다. 사실 공수교대하자마자 마운드에 올라야 했기에 전력질주를 할 수 없었다. 만약 원 아웃 상황이었다면 내야 안타의 가능성이 높았던 상황이었다.[11] 송창식은 4번의 선발등판 경기가 있다.[12] 어떤 근거로 한 말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사실 둘 다 2016년에도 공을 던졌다. 권혁이 시즌 막판에 수술대에 올라서 문제지.[13] 72경기 출장으로 2일에 하루는 무조건 공을 던진 셈이다.[14] 2015년-3.09 92삼진 2016년-5.57 85삼진[15] 마무리캠프에서는 김경태를, 스프링캠프 개최 후에는 김범수를 믿을맨으로 꼽았는데 김경태는 제구를 잡는답시고 2000구를 던졌고, 김범수 역시 16 시즌 종료 후 수술 경력이 있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는 편이다.[16] 1볼 2스트에서 잘던지던 투수의 투구 흐름을 깨고, 파울팁을 못잡는등 난리가 났다.[17] 참고로 현재 등판 기록을 144경기로 환산하면 79경기 등판 59이닝이 된다.[18] 현재 최고령 선수는 1976년 2월생인 이호준. 하지만 그 이호준도 2017년 시즌 후 은퇴할 예정이다.[19] 첫 번째 FA와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보장금액이 단 5천만 원밖에 차이가 안 난다. 이런 케이스는 박정진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