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9:56:05

김영삼/여담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김영삼
{{{#!wiki style="margin:-10px"<tablebordercolor=#003990> 파일:YS투명.svg김영삼
관련 문서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03990,#ddd> 일생 일생 · 평가
공약 금융실명제 · 역사바로세우기(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 하나회 숙청
발언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 · 대도무문
가족 조부 김동옥 · 아버지 김홍조 · 아내 손명순 · 아들 김은철, 김현철 · 손자 김인규
역대 선거 제13대 대통령 선거 · 제14대 대통령 선거
사건사고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 YH 사건 ·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 김영삼 단식 농성 사건 · 김영삼 보름달 사건 · 3당 합당 · 1997년 외환 위기
기타 문민정부 · 상도동계/YS키즈 · 삼김시대/양김 ·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 사고 공화국 · YS는 못말려 · YS는 잘맞춰 · 사상과 신념 · 여담 · 어록
별도 문서가 없는 평가 및 논란은 해당 주제 관련 문서를 참고
문민정부와 관련된 문서는 틀:문민정부 참고
}}}}}}}}} ||

1. 그의 인기2. 인재 발굴3. 각종 타이틀4. 그 외

1. 그의 인기

집권 초반[1]에는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도입, 부정부패 사정[2] 및 공직자 재산 공개 제도화[3] 등으로 초반 지지율이 90%를 상회했었다. 이러다보니 집권 첫 해인 1993년에는 방송국 코미디 프로에서 뜬금없이 도우미 복장[4]을 한 김영삼 전 대통령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했다.[5]
파일:external/www.younglock.com/1041581400-3.jpg
파일:external/www.burimbook.co.kr/1231840899RUntitled-20.jpg
덕분에 그를 소재로 한 유머집 YS는 못말려도 발간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원래 이 'YS는 못말려' 시리즈는 유머 1번지 작가 출신인 장덕균이 세간에 떠돌던 유머를 모으고 그 자신도 여러 개를 창작하여 1993년 대전 엑스포에 맞추어 펴낸 것이다. 상단 사진의 2권은 장덕균이 아닌 다른 편집자가 PC통신 유머를 끌어모아 엮어낸 것이다.[6] 그와 관련된 여러 유머 시리즈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다시 회자되기도 했다.

김영삼을 주인공으로 한 무협소설도 나왔다. 그것도 팬픽처럼 대충 쓴 게 아니라 무협 1세대 작가 중 손꼽히는 사마달이 쓴 작품으로 전 12권 분량의 대하소설이다. 대도무문 문서로.

파일:external/c4493247386995d86c9471aac81b4567b6e276064eff486aa05e84c7e31c4a6e.jpg
[7]

그 외에도 심지어 PC용 게임(메인 게임은 퍼즐, 보스전은 대전 격투 게임형식이라기엔 스트리트 파이터 2를 베낀 수준)까지 등장할 정도였으며 양종철이 '김용삼' 역으로 나온 정치풍자 코미디 영화 'YS! 안녕하십니까?'도 있다.

물론 단순히 인기가 많았기 때문만은 아니고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김영삼 본인이 자신을 소재로 한 풍자작품 등을 만드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농담이 아니라 만화 한 번 그렸다고 사람을 잡아가던 이승만 시절은 물론이고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만 해도 풍자 한번 잘못하면 코렁탕을 먹을 수 있던 시대였기도 했고. 전임인 노태우는 그래도 '물태우'라는 별명도 쓰였듯 6월 항쟁의 결과로 제도적 민주화가 이뤄졌기에 이전 정권들보단 많이 유연해졌지만 노태우 역시 근본은 군인 출신이었고, 전두환과 달리 자신을 비판했다고 잡아가서 고문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노태우 정권 때는 너무 심한 풍자를 할 경우 안기부에서 연락이 온다거나 고발하여 조사하거나 하는 경우는 있었다고 한다.

다만 'YS는 못말려'를 비롯하여 당시 나온 풍자작품들의 경우 김영삼을 희화화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고, 김영삼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위 대도무문만 해도 사상 초유의 가상정치무협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왔지만 주인공 곡운성(김영삼을 모티브로 한 인물)은 부정적인 면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인간형이다. 이런 점은 시대적 한계로 볼 수도 있다.

2. 인재 발굴

1968년에는 정치학을 지망하던 서석재를 발탁하여 자신의 비서로 채용하여 정계에 입문시켰고 1970년에는 서울대학교 운동권 출신 김덕룡을 발굴하여 정계에 데뷔시켰다. 1971년 유신 선포 이후에는 김동영, 최형우도 측근으로 발탁하였다. 이들은 김영삼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김동영과 최형우의 활동은 두드러져 '좌동영 우형우'라는 별칭이 생겼다. 그의 휘하에는 수많은 반군정, 반독재 성향의 정치 지망생들이 모였다.

1988년에는 인권 변호사로 이름이 알려지던 김광일, 노무현을 정계에 입문시켰다.[8] 그러나 민주정의당과 3당 합당을 하는 과정에서, 노무현은 김영삼과 갈라섰다.[9] 1992년 이명박민주자유당으로 정계에 입문시킨것도 김영삼 본인이었고, 문민정부들어서고는 이재오, 손학규, 이회창, 정형근, 홍준표, 김문수 등 여러 사람을 민주자유당신한국당에 넣었다. 이와 같은 인물들을 주축으로 역사상 가장 성공한 개혁 공천으로 평가 받는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공천을 통해 사실상 보수 내부에 새로운 분위기를 불어넣었고, 한국의 보수주의 사상이 단순히 반공 안보만을 울부짖던 수준에서 벗어나 시장주의, 자유주의, 세계화를 지향하는 이념을 탄생시켰다.

3. 각종 타이틀

이 문서는
이 문단은
토론을 통해 일부 타이틀을 삭제하기로 합의되었습니다. 합의된 부분을 토론 없이 수정할 시 편집권 남용으로 간주되어 제재될 수 있습니다.
아래 토론들로 합의된 편집방침이 적용됩니다. 합의된 부분을 토론 없이 수정할 시 편집권 남용으로 간주되어 제재될 수 있습니다.
[ 내용 펼치기 · 접기 ]
||<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ffffff,#1f2023><bgcolor=#ffffff,#1f2023><(>토론 - 일부 타이틀을 삭제하기
토론 - 합의사항2
토론 - 합의사항3
토론 - 합의사항4
토론 - 합의사항5
토론 - 합의사항6
토론 - 합의사항7
토론 - 합의사항8
토론 - 합의사항9
토론 - 합의사항10
토론 - 합의사항11
토론 - 합의사항12
토론 - 합의사항13
토론 - 합의사항14
토론 - 합의사항15
토론 - 합의사항16
토론 - 합의사항17
토론 - 합의사항18
토론 - 합의사항19
토론 - 합의사항20
토론 - 합의사항21
토론 - 합의사항22
토론 - 합의사항23
토론 - 합의사항24
토론 - 합의사항25
토론 - 합의사항26
토론 - 합의사항27
토론 - 합의사항28
토론 - 합의사항29
토론 - 합의사항30
토론 - 합의사항31
토론 - 합의사항32
토론 - 합의사항33
토론 - 합의사항34
토론 - 합의사항35
토론 - 합의사항36
토론 - 합의사항37
토론 - 합의사항38
토론 - 합의사항39
토론 - 합의사항40
토론 - 합의사항41
토론 - 합의사항42
토론 - 합의사항43
토론 - 합의사항44
토론 - 합의사항45
토론 - 합의사항46
토론 - 합의사항47
토론 - 합의사항48
토론 - 합의사항49
토론 - 합의사항50
||

4. 그 외

파일:external/ppss.kr/%EA%B9%80%EC%98%81%EC%82%BC3.jpg}}}||
서법에 따르지 않고 독창적인 글씨체를 구사했다고 한다. ‘大道無門’(대도무문)은 그의 필체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붓만 왔다 갔다 한 듯 필획이 약하다는 평. 여백을 거의 두지 않고 굵은 체로 종이 전체를 메우고 있는 것에서 ‘통 큰’ 사람임을 드러낸다고 한다. 또한 글씨 속도가 매우 빠른 편이라 실제로도 일을 빠르게 결정하고 좌고우면하지 않았을 성격으로 보인다고 한다. 글씨의 기교가 거의 없고 정확한 정사각형 형태로 쓰고 있는 것은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고 올곧은 사람임을 드러낸다는 분석이다. 나름 마니아층이 있어서 그의 글씨는 한 점당 300~400만 원까지 꾸준히 경매에 낙찰된다고 한다. 최고 기록은 560만 원이었다.
파일:external/ilyo.co.kr/1378255197627740.jpg}}}||
파일:external/www.kyosu.net/25823_12014_2647.jpg
||
생전에 칼국수를 매우 좋아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칼국수 집 단골이었다. 단골 국숫집으로 알려진 모 점포에 매년 연하장을 보낼 만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2013년 뇌졸중 증세가 악화되기 직전에는 고생 많이 했다고 따로 돈을 주고 갔는데, 이게 마지막 만남이었다고. 대통령 재직 당시에도 칼국수가 청와대 주력 메뉴로 완전히 자리잡은 바 있었다. 이 시절 청와대에 초청받은 손님들은 꼭 칼국수를 대접받았으며, 때문에 면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니은 초청받기를 꺼렸고, 또 국수의 특성상 먹어도 밥보단 배가 빨리 꺼지는 편이라 YS와 함께 칼국수를 먹었던 사람들 중에는 식사가 끝나면 몰래 다른 식당에 가서 또 식사를 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는 후문이 전해지기도 했다.[45] 나중에 문재인 전 대통령청와대에서 곰탕을 메뉴로 내놓은 부분을 이와 관련해서 개그로 연결시키기도 했다. "청와대에서 칼국수 먹고 나온 사람들은 다 배고파서 곰탕집에 모여서 2차를 했는데, 그런 일이 없도록 곰탕을 차렸습니다!" 라고 페북에 적은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당시를 겪은 사람들에게는 감회가 남다르다고 한다. 칼국수 외에 설렁탕비빔밥도 자주 차려냈는데,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외국 귀빈들이 방문했을 때도 칼국수와 비빔밥을 먹였다. 이는 김영삼 개인 취향도 있지만 자신이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청와대에서도 검소하게 먹는다는 과시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 이 때문에 와인을 내줘도 가장 저렴한 마주앙 와인을 내놓았는데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왔을 때도 마주앙을 내놓으라고 지시했다가 비서실장 박관용이 와인에 환장하는 프랑스인들에게 저렴한 와인 내놨다간 국제망신이라고 길길이 날뛰어서 고급 와인으로 막판에 바꾼 일화도 있다.

김영삼 관련 유머에도 칼국수가 단골로 등장한다. 당시 유행하던 김영삼 시리즈에는 칼국수 관련 유머가 하나씩은 들어 있었다. 임기 말에 터진 IMF 사태로 인해 인기가 바닥을 찍었을 땐 '먹으면 먹을수록 머리가 나빠지는 음식'이라는 조롱도 돈 적이 있었다. <고바우 영감> 만평에서 자꾸 먹으면 머리가 나빠진다면서 '4년 동안의 임상 실험 결과'라고 확인사살을 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 원래 김영삼은 서울대 출신이지만 머리 나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보니 더더욱 그랬다. 칼국수 애호에 대해서도 '일부러 청렴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조작한 거 아니냐?'라는 비난도 없지 않았다. 물론 이런 이미지 구축의 의도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김영삼이 칼국수를 좋아한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김영삼의 단골 칼국수 식당들마다 김영삼이 남긴 휘호나 기념사진들이 걸려 있을 정도. 다만 김영삼이 생전에 가장 즐겼던 칼국수멸치 육수나 바지락으로 국물을 낸 해물 칼국수가 아니라 쇠고기사골 육수로 끓인 형태의 안동식 칼국수, 일명 안동국시로, 시중에서 먹으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해물 칼국수에 비해 좀 더 비싼 물건이다. 그렇다고 아주 사치스러운 음식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고, 보통 서울 시내의 매장에서 한 그릇에 1만 원 안팎 수준으로 판매하는 편이니 일반인들도 쉽게 먹을 만한 가격대이다. 즉 일반인들이 먹는 음식 중에서 좀 비싼 물건 정도다. # 따라서 결론을 내리자면 '이미지 메이킹을 할 필요가 있었는데 마침 좋은 소재가 김영삼 본인에게 있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스케일은 다르지만, 이명박은 배고픕니다를 비롯한 각종 이명박의 먹방처럼 이해하면 될 듯 하다.

당시 청와대칼국수 대접에 대해 정치적인 전략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는데, 3당 합당 이전까지는 김영삼을 열렬히 지지했다고 밝힌 시사평론가 이동형은 팟캐스트 이이제이 김영삼 편에서 "김영삼은 거제시의 아버지 선단에서 잡은 멸치를 자주 선물로 보냈다. 멸치라는 게 금방 먹는 것도 아니고 두고두고 먹는 식재료이기 때문에 선물받은 사람은 먹을 때마다 YS를 생각하게 된다. 칼국수 육수 또한 멸치로 우려내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이유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낸 바 있다. 다만 YS 임기 당시 청와대에서 나왔던 칼국수는 당연히 평소 대통령이 선호하는 안동식 칼국수, 즉 '육수를 멸치로 우려내지 않은 칼국수'였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진짜 저런 의도가 있었을지는 미지수.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단골로 찾아 안동국시를 즐겼던 곳 중 한 곳인 성북구 성북동의 '국시집'이라는 음식점은 역사성을 인정받아 김영삼 사망 한 달 뒤인 2015년 12월에 서울특별시 미래유산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기사. 그 외에도 서민 음식을 많이 좋아했다고 하며 설렁탕을 먹는 사진이 사후 포털에 올라온 적도 있었다. 신사동에 위치한 '봉희설렁탕'(새절역 인근)이라는 음식점 역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골 식당 중 한 곳이었다고 한다.

김영삼이 칼국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을 때 당시의 대학가에서는 YS를 폄하할 때 칼국수가 아니라 차라리 보름달빵을 먹으라는 대자보가 돌기도 했다고 한다. 그 외 김영삼의 정치적 정적이던 박철언의 처제이자 올림픽 탁구 금메달리스트기도 했던 현정화인터뷰에서 "땀 흘려 뛰고 온 운동 선수들한테 칼국수가 뭡니까?"라고 툴툴거린 적도 있었다.[46]

5월 5일 어린이날에 초등학생을 청와대에 초청하여 간담회를 가지던 중 한 초등학생이 YS에게 "청와대에서 매일 칼국수를 드시냐?" 고 물으니 "매일 먹는 건 아니고 자주 먹는다" 고 답하자 그 초등학생이 "그러면 우리도 청와대 칼국수를 먹어볼 수 있느냐?"고 다시 물어보니 "먹게 해주겠다"고 흔쾌히 답하였다. 그러자 다시 초등학생이 "정말이냐?" 고 물어보니 YS가 껄껄 웃으면서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거짓말을 해서야 되겠느냐?" 고 답하자 초등학생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후 그 초등학생들이 진짜 청와대 칼국수를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는 보도자료가 나오지 않아 확인이 불가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54%EB%85%84_%EC%97%AC%EC%95%BC_%EA%B5%AD%ED%9A%8C%EC%9D%98%EC%9B%90_%EA%B8%B0%EB%85%90%EC%82%AC%EC%A7%84.jpg}}}||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김두한, 두 번째가 김영삼.
야인시대에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등장했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김두한이 3김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해하기도 했다.[51] 위의 사진은 국회의원 야구대회 사진이고, 김영삼이 나중에 퇴임 후 2010년대에 김두한 이야기를 인터뷰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야인시대에서 나왔던 것처럼 김두한은 부하들 끼니를 챙겨주고자 김영삼을 포함한 동료 의원들에게 돈을 빌리곤 했고, 김영삼은 김두한을 '머리랑 언변은 좋은데 글은 못 읽는 사람' 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52] 김두한 의원은 자신에게 온 편지들을 읽을 줄을 몰라 김영삼을 찾아와서 좀 읽어달라고 한 적도 많았다고 하는데, 이는 평소 김두한에게 "이렇게 작고 예쁜 손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느냐?"며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김영삼에게 호감을 느낀 김두한이 YS를 만나고자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1] 임기 2년 차 4분기부터는 직무수행 평가에서 긍정 비율이 30%대로 떨어진데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후에도 41% 밖에 얻지 못했기 때문에 중반도 인기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2] 사회 곳곳에 부정과 부패가 만연화되어 있던 상황이라 사회 전방위로 하루가 멀다하고 비리로 잡혀가고, 공직을 사퇴하는 기사가 1면을 장식했다. 공직자의 의심스러운 과다한 재산, 율곡 사업과 같은 방위 사업의 비리, 사행산업과 연관된 검경 등. 이러한 부정부패 관련 기사가 1면을 차지하는 것은 9월말까지 지속된다.[3] 이전 버전에 있던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는 집권 3년차 시점이라 초기도 아니었고, 지지율도 많이 떨어진 상태라 제외한다.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시점에는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지방선거의 참패로 인기가 많이 떨어져 있던 시기다. 갤럽 자료에 의하면 1995년 3분기의 업무수행에 관한 긍정 지지율은 29%다.해당 그래프[4] 지금은 널리 쓰이게 된 단어가 되었고 어떤 판촉행사의 행사 진행자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지만, 도우미는 원래 93 대전 엑스포 행사의 접객원으로 새로 창설한 단어였다. 방송에서 엑스포의 상징 중 하나로 굉장히 많은 홍보를 했다.[5] 참고로 이 코너가 등장한 당시 MBC 토요일 저녁 6시대의 코미디 프로그램은 후대의 무한도전-1박2일 같은 양강구도가 아니라 아예 MBC의 독주시대였으며 기본적으로 시청률 40%는 깔고 가던 시대였다.[6] 저자의 말로는 노태우 정부 당시 노태우를 주인공으로 한 풍자 유머집을 냈다가 안기부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군사정권 시절같은 고문이나 밤샘 조사까지는 없었지만 출판사까지 압력이 들어가서 광고도 못하고 증쇄도 못했다고 한다.[7] 위 사진의 인물들은 시계 방향으로 사담 후세인, 보리스 옐친, 빌 클린턴, 호소카와 모리히로, 덩샤오핑, 프랑수아 미테랑, 마거릿 대처.[8] 원래는 문재인까지 영입을 시도했으나 문재인 본인은 당시 정계입문을 거절하면서 무산됐다.[9] 이후 15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이 분열한 상태에서 노무현의 신한국당 영입설이 뉴스로도 나왔으나, 결국 흐지부지된 바 있다.#[10] 83%[11] 6%[12] 655.61→540.89로 17.5% 하락했다.[13] 박근혜황교안 권한대행 체제였던 2017년 3월 31일 구속되었으며, 문재인 정부에서 구속된 대통령은 이명박 1명이다.[14] 2022년부터 대통령을 제외한 공직선거 출마 연령 하한선이 만 18세로 완화된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시행됨에 따라 이 타이틀은 깨질 가능성이 커졌다.[15]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고향경상남도 통영시(현 거제시)인데, 손명순 여사의 고향 또한 경상남도 김해시로, 같은 경남 지역 출신이다.[16] 두번째는 노무현 전 대통령. 경상남도 김해시 출신이며, 아내인 권양숙 여사는 경상남도 창원시 출신으로 역시 같은 경남 지역 출신이다. 여담으로 손명순 여사와 권양숙 여사는 초등학교 동문이다. 세번째는 윤석열 대통령이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 출신이며, 아내인 김건희 여사는 서울특별시 강동구 명일동 출신이다.[17] 6개의 당적을 가지고 총선과 대선에서 당선되었다. 6개의 당적은 문재인 전 대통령과 동률이지만, 문재인 전 대통령의 역대 당적 중에서 당선된 당적은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2개 뿐이다.[18] 2호는 1927년생인 전임자 김영삼 전 대통령보다 연장자인 1924년생인 김대중 전 대통령. 3호는 1946년생인 전임자 노무현 전 대통령보다 연장자인 1941년생인 이명박 전 대통령.[19] 두 번째는 윤석열. 김영삼은 철학과 출신이고 윤석열은 법과대학 출신이다.[20] 실제로 김영삼 덕분에 대다수 하나회 간부들이 정치적인 실각을 겪고, 하나회 숙청 덕에 그들이 날뛰지 못해 최종적으로 김현집, 최익봉 둘 정도만 남게 되었다. 한명은 불미스러운 사건, 그리고 한명은 임기를 못 채우고 예편하면서 하나회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후 몇 년 뒤 2017년을 기점으로 우병우, 김관진 등이 키워 주었던 알자회 출신들은 문재인 정부에서는 대다수가 강제 전역되어 실각했고 사실상 회장이나 마찬가지였던 조현천 장군은 미국에서 잠적하다 귀국 후 체포되며 사실상 국내의 대형 군내 사조직들은 최근의 여군 사조직이나 일부 사조직, 학연파벌 등을 빼면 큼직한 뿌리가 끊겨 군내 주류 활동 무대가 공식적으론 없어진 상태이다. 이 점에선 김영삼의 공이 큰 셈. 거기다 동향 인생후배인 김진영 전 육군참모총장 역시 그대로 숙청되었다. 당시 항상 언급되는 타이틀 중 하나인 지연조차 개의치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21] 이승만은 법률이 없어 예우 자체가 없었고, 박정희는 임기 중 사망,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는 실형 선고, 탄핵 등으로 예우 박탈. 무소속이나 민주당 계열에서는 사망한 전직 대통령 전원이 예우를 끝까지 받았으므로 국민의힘 계열에서 사망 시점까지 예우를 받은 대통령은 김영삼이 유일하다. 윤석열이 임기 만료 후 사망까지 예우가 제공된다면 유일 타이틀이 깨지게 되나 2024년 현재 명태균 게이트를 비롯해 예상치 못한 계엄령까지 터지면서 탄핵소추안이 발의된 상태이기 때문에 이 타이틀은 유지될 가능성이 생겼다. 참고로 국민의힘은 공식적으로는 자당 출신 대통령으로 이승만, 박정희(이상 연금수령 기록 없음), 김영삼만을 사진으로 걸어놓고 인정하고 있으며 나머지 국민의힘 계열은 전부 예우가 박탈당했다.[22] 2002년 당선자 노무현 - 2004년 탄핵소추안 발의, 2012년 당선자 박근혜 - 2016년 탄핵소추안 발의, 2022년 당선자 윤석열 - 2024년 탄핵소추안 발의[23] 다만 그가 처음 정치를 시작한 자유당은 점점 타락하다 4.19 혁명으로 망했기에, 1990년대 민주자유당과 계보가 직접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사실 YS가 사사오입에 반발해 7개월만에 자유당을 탈당해서 기간도 짧긴 했다.) 이념적으로도 사실 군부 색채가 일부 끼어든 민주자유당은 (점차 우경화되긴 하지만) 자유당과 결이 다르다. 이는 일반인들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모두 독재자로 싸잡아 보지만, 일부 학자들은 민간인 출신 이승만과 군인 출신 박정희, 전두환은 좀 구분지어 보기도 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을듯.[24] 첫 번째 진영 변경은 사사오입 개헌에 항의하는 뜻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두 번째 진영 변경은 본인이 주체가 된 3당 합당이다. 어찌됐든 군인 출신 대통령의 시대를 마치고 본격적인 (실권을 가진) '문민 대통령'의 시대를 연 인물이라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적지 않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임은 분명하다.[25] 영상.[26] 다만, 김영삼이 육사 자체를 마냥 까기만 한 건 아니다.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해서 축사로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잘못된 것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아 주는 일에 앞장설 것을 여러분에게 다짐합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27] 여담으로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일본육사(편입) 출신이다. 다만 여기서 한 발언은 육사와는 관련이 없고, 독재자 박정희가 10.26 사건으로 암살당했을 때 죽어도 싸다고 느낀 소회를 말한 것.[28] 심지어 일부 극우 세력은 김영삼을 김대중과 같이 묶어서 '좌파'로 평가절하하고 전두환을 치켜세우기도 한다. 김영삼이 보수정당의 대통령보다는 야당 민주운동가로서 인식되고 있다는 근거.[29] 1982년생으로 당시 만 11세가 될 무렵이었다.[30] 취임 년도 김영삼의 만 나이에 맞춘 것.[31] 다만 이후의 근황은 2003년 11월에 한 번 나왔고 이후의 소식은 알 수 없다.[32] 2022년 5월 10일에 윤기중이 아들인 윤석열의 대통령 취임식을 보게 되면서 두번째 사례가 되었다.[33] 당시 중앙정보부나 안기부 등의 도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추측도 있다. 건물 안이나 평지에 비해 미행이 붙거나 전자 도청을 하기가 어려운 높은 산에서 정치 전략을 짜기 위해 등산을 자주 하였다는 것이다.[34] 교통사고로 무릎이 불편하게 된 DJ는 몸 운신이 비교적 편한 수영을 택했으며 또한 부인인 이희호가 헌신적으로 음식 내조를 해주었다는 후문이 있다.[35] 철저한 건강관리도 있지만 아버지 김홍조도 100살 가까이 살았으니 유전의 영향도 없잖아 있는 듯 하다.[36] 영화 투캅스 2에서도 이와 관련된 대화가 나온다. 이제 더 이상 대놓고 지역 유지들에게 보호세를 걷을 수 없게 되어 툴툴거리는 강형사(박중훈)를 파트너인 이형사(김보성)가 "용기를 내십쇼. 대통령도 월급받으면서 일하는 세상인데요"라 위로하자, 강형사는 "마! 대통령은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멸치어장이라도 있지"라고 되받아치고 이형사가 전혀 몰랐다는 듯이 "멸치어장이요?"라 반문하자 "넌 신문도 안 보냐?"라고 한심해하는 강형사에게 이형사는 "전 가쉽란은 안 읽습니다"라고 대꾸한다.[37] 김경진의 첫 군사소설 동해에서도 짤막하게 나오는데, 그 유명한 멸치어장 소유자를 장문휴의 함장이 떠올리는 대목이 등장한다.[38] 물론 박근혜는 원래부터 금수저는 아니었고, 부친이 대통령+독재자 크리를 타면서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게 된다. 육영재단 항목도 참조. 결국 부친이 멸치 사업을 한 민간인 출신 진짜 금수저는 김영삼 뿐이라는 소리.[39] 그래서 1980년대까지는 조건(삼대독자)을 총족시켜야했지만 외동아들일 경우에는 일종의 병역특례를 받을 수 있었다.[40] 당시 한글로만 기사를 싣던 신문으로는 한겨레 등이 있었다. 다만 한겨레신문 창간 초기에는 김영삼이 대표적인 야당 정치인이던 시절이었고, 상당수 언론의 친정부적인 색채가 빠졌다고는 하지만 뒷돈을 받는 등 이런저런 거래를 했던 것은 여전해서 진보언론이 생기는 것이 김영삼 입장에서 나쁘지는 않았기에 직접 한겨레 신문의 주식을 사는 등 후원을 했다. 다만 오래가지 않아 3당 합당으로 틀어졌다.[41] 재미있는건 조갑제는 김영삼 생전에는 '좌파숙주'라면서 그를 비난한 인물이란 점이다.# 그러나 YS 사망 후 조문할 때에는 김영삼이 독재와 싸운 챔피언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42] 이는 정적이기도 했던 박정희가 한자 사인을 쓰다가 한글 사인으로 바꾼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43] 김영삼이 기득권층과 타협하지 않고 여러 개혁을 성공시킨 이유로 그의 무대포 성격에 비유해 "무식하니 용감했다"는 평을 쓰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 김영삼의 이미지와 달리 학력은 초엘리트였다(...).[44] 영어에도 거의 똑같은 표현이 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Look who's here!"라며 못 알아보겠다는 척을 하는 것.[45] 김대중 전 대통령도 야당 총재 시절 영수회담을 하면서 칼국수를 대접받았는데, 한그릇으로 성이 차지 않아 회담을 마치고 나서 돌아와 당사 지하 식당으로 내려가 혼자서 해물탕 3인분을 해치우고서야 포만감을 느꼈다고 한다. 물론 이건 일반인 수준을 넘은 대식가긴 하다만. 사실 대식가 이명박에 가려져서 그렇지 DJ도 미식가+대식가 기질이 상당했다고 한다. 다만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식사량을 많이 줄였다고.[46] 다만 인터뷰 링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진짜로 현정화가 이 건으로 열받았던 건 아니고 그냥 이런 일도 있었다는 식으로 웃으면서 황당한 에피소드라는 느낌으로 언급한 수준이다. 현정화의 사촌형부가 김영삼의 정적 박철언이라 오해할 수 있는 부분.[47] 애초에 냉정하게 보면 과거 스캔들을 일으켜 대중의 공분을 산 당사자를 다시 정치판에 공천한다는 것 자체가 법 논리를 떠나 이미지도 중요한 정치판에선 쉽게 할 수 있는게 아니다. 차라리 본인 대신 자식을 정치판에 밀고 본인은 킹메이커나 하는게 더 나았을듯.[48] 2021년 국민의힘 입당 직전 윤석열이 김영삼도서관을 찾아 김현철과 대담한 바 있다.[49] 파일:김영삼 관공서사진.jpg 참고로 이 사진이 기존의 근엄하게 입을 굳게 닫은 사진에서 웃는 사진으로 바뀐 1995년 ~ 1996년경에 실제로 관공서에 걸렸던 사진이다.#[50] 원래 노태우 전 대통령 때부터 "'각하' 대신 '대통령님'이라 호칭하자"는 말이 나왔고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각하란 말이 사용되지 않았지만, 관습이란게 은근 무서워서 여전히 비공식적으로 대통령을 대면할 땐 각하란 호칭이 김영삼 전 대통령 때까지 사용되었다.[51] 야인시대에서는 자유당 정부 시절 젊은 YS가 유진산, 조병옥, 김두한 및 야당 의원들과 함께 원탁에 앉아 시국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52] 김두한은 원래는 완전한 문맹이었고, 정치인이 된 이후에는 한자는 못 읽지만 한글은 읽을 수 있는 수준까지는 되게 됐지만 당시 신문이나 식자층, 서적들 상당수가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했음을 고려하면 여전히 반문맹 상태에 가까웠을 것이다.[53] 다만 정재계의 쟁쟁한 인사들이 모인 자리다 보니 불편해서 오래 있진 못했다고 한다.[54] 당장 김영삼 뿐만 아니라 김대중, 김종필 등도 그 당시에 태어나서 일본어에 상당히 능숙했다.[55] 김영삼은 단임제 국가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인만큼 당연히 첫 임기밖에 없지만, 처칠은 두번째 임기도 재임했다.[56] 물론 영국은 노동당이 그렇다는거고, 노동당에 지지층 내주고 몰락하기 이전 20세기 초까지 보수당과 경쟁한 자유당은 이미 여러번 집권 경험이 있었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3675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3675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