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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21:00:51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大邱 地下鐵 工事場 가스 爆發 事故
Daegu Subway Station construction site Gas Explosion Accident
<nopad> 파일:external/photom.imaeil.com/1.2669079936E+130001.jpg
발생일 1995년 4월 28일 금요일 7시 52분
[dday(1995-04-28)]일
발생 위치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상인역 공사중)
유형 폭발
원인 가스관 파손
인명피해 사망 101명
부상 202명
재산피해 차량 150여대 파손
건물 80여채 파손
약 540억원

1. 개요2. 전개3. 원인4. 대책5. 사회 반응6. 갈팡질팡 정치판7. 미비했던 언론보도8. 기타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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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후진국형 참사가 계속돼야만 합니까?"
- 엄기영 당시 MBC 뉴스데스크 앵커의 첫 멘트#[1]
"어른들이 미워요. 부주의 때문에 내 친구가 죽었잖아요."
- 사고 당시 영남중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모군의 합동 분향소에서의 인터뷰


1995년 4월 28일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상인네거리의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상인역 공사 현장에서 일어난 도시가스 폭발 사고.

2. 전개

1995년 4월 28일 오전 7시,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상인네거리에 들어설 예정으로 한창 터파기 공사가 진행중이던 대구백화점 상인점[2] 공사 현장에서 토목 공사를 담당한 하청업체 (주)표준개발의 직원들이 굴착 행위를 하고 있었다. 당시 이 현장은 바로 옆에 있는 건물측에서 이 공사 때문에 지반이 약화되고 있는 것 같다는 항의를 전달 받은 상태였다. 조사 결과 백화점 공사 현장도 장기적으로 지반이 약화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이에 이들은 표준시방서에 없던 보링 그라우팅(Boring Grouting)[3] 작업을 해서 지반을 보강하기로 결정하고 임의로 천공기 2대를 동원해 현장 지반에 지름 8cm, 깊이 10m의 구멍 40개를 뚫기로 했다.

천공 작업을 하려면 먼저 굴착 허가를 받고 도시가스 등 지하 매설물의 도면 등 안전성을 확보해야 했지만 그런 것 없이 사건 전날인 27일에 22개의 구멍을 뚫었고 나머지 구멍을 뚫기 위해 사고 당일 오전 7시부터 천공 작업을 재개했다. 7시 30분 이들은 천공 작업 도중 지하 1m 70cm 지점에 묻힌 도시가스 중압관에 지름 8cm의 구멍을 내는 사고를 내고 말았다. 잠시 후 가스 냄새를 맡은 현장소장과 천공작업자 2명은 작업을 중단하고 현장사무소에 이 사실을 통보한 후 대구도시가스에도 가스누출 신고를 했다. 이때가 사고 발생 10분 전인 7시 42분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가스관에서 새어나온 고압의 가스가 하필 인근에 매설된 파손된 우수관을 통해 유입되고 있었다. 우수관으로 유입된 가스는 여기에 연결된 하수관을 따라 이동한 후 100m 떨어진 대구 지하철 1호선 상인역 공사장으로 유입되었다. 당시 지하철 공사 현장에서는 인부 100여명이 지하 20~30m 지점에서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가스 냄새를 맡은 공사 팀장 중 한 명이 7시 45분쯤 가스 냄새가 난다며 현장사무소에 연락을 하기도 했지만 불행하게도 이 현장에서는 용접 작업도 진행되고 있었고 결국 20분간 현장에 유입된 가스 1만㎥에 불이 붙고 말았다.[4]

오전 7시 52분, 대량의 가스가 폭발하면서 50m에 달하는 불기둥이 솟아올랐고 400m에 달하는 지하철 건설 현장에 설치된 복공판[5]과 공사자재들, 그리고 그 위에 있던 시민들과 자동차들이 3~4층 높이만큼 튀어 오른 후 한꺼번에 떨어졌다. 이 폭발 사고로 사망 101명, 부상 202명 등 총 300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차량 150대 이상, 건물 80여 채가 파손되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폭발 당시 튀어오른 복공판이나 고열, 공사장에 있던 철근 등의 구조물 때문에 크게 훼손된 시신이 많았다고 한다.[6]

특히 사건 현장이 학교 근처[7]인 데다 등교 시간이라는 점 때문에 학생 사상자가 많이 나왔다. 유품으로 지하철 공사장으로 떨어진 잔해들 중에 피 묻은 책가방, 불에 탄 교과서, 참고서, 그리고 학생들의 시신들이 많아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당시 사진 중에 피범벅이 된 책가방을 수습하다가 울음을 터뜨리는 자원봉사자의 모습도 있었다. 특히 근처 영남중학교 학생들의 피해가 컸는데 사망자 101명 중 절반 가까이에 달하는 43명(교사 1명 포함)이 영남중학교 학생이었다. 그나마 영남중학교를 제외한 나머지 인근 중학교들은 그 날이 금요일이라서 모두 소풍을 나간 덕분에 피해가 적었다고 한다.[8] 사고 1주기인 1996년에 영남중학교 희생자 유족과 교사, 학우들이 쓴 글을 모은 책 <아! 그날 우리는>이 발행되기도 했는데 해당 도서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 중이며 2020년 전자책 형태로 디지털화되어 협약 공공/대학도서관 원문검색용 컴퓨터로 열람 가능하고 영남중학교 세심관 내 추모실에서도 소장 중이다.

폭발 현장에 인접해 있던 상가들은 이 여파로 마치 폐허를 방불케 할 만큼 훼손되었고 근처 아파트 베란다 새시는 강력한 폭발에 의해 모두 깨졌으며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까지도 굉음이 들릴 정도였다.[9] 이로 인해 근처 아파트 주민들이 깨진 유리에 부상을 입기도 했고 재산피해 역시 상당했다.

이 와중에도 여러 의인들이 나타나 많은 생명을 구했다. 교통 정리를 하던 52세의 이용선이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 5명의 목숨을 구하고 공사장의 부상자를 구하기 위해 지하로 내려가다가 복공판이 뒤집어지는 바람에 10여 미터 아래로 추락해 숨졌으며 29세의 버스 기사 임해남이 자신의 버스 승객들은 물론 근처 차량의 8명의 시민들도 구했다. #[10] 다행히 버스의 승객 100여 명을 모두 구출했다고 한다. 사고 소식이 전해지자 2천 명의 대구 시민이 몰려들어 헌혈을 했으며 하루만에 전국 각지에서 40억 원에 가까운 성금이 모였다.

3. 원인

대구백화점 상인점[11] 지하철공사장에 인접한 백화점 신축 공사 현장에서 도시가스 배관을 사전에 확인하지 않고 무단 굴착하는 과정에서 중장비가 가스관을 파손해 발생했다. 신축 공사를 맡은 표준개발 측의 뒤늦은 신고가 사고를 키웠다. 당시까지만 해도 도시가스 배관이 묻혀 있는 구간에서 굴착 공사를 할 시 도시가스사에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공사를 강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를 규제하는 법적 조치도 미흡했다.[12][13]

사실 9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선 지리정보시스템(GIS)이 일반화되지 않은 데다 대다수 도시의 지하 내에 있는 파이프나 전선 등의 정비/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가벼이 여겼기 때문에 발생한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주변에서 상하수관을 실수로 건드려 물이 치솟은 일은 가끔 볼 수 있는데 이 때는 하필이면 건드린 게 상하수관이 아닌 가스관이었던 것이다. 가스관 자체도 규정인 1m보다 얕게 매설되어 있었으며 시공사 측도 가스관 매설 등의 정보를 미리 받고 피해서 공사를 해야 하지만 허가 없이 얼렁뚱땅 막무가내로 진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4. 대책

이 사고는 관계 기관의 안일한 태도로 인해 벌어진 인재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이후 관련법 개정과 구난체계 개혁, GIS 구축 등이 이루어졌다. 법원에서는 시공사 측의 과실을 인정하여 인부를 포함한 회사 관계자 9명에게 업무상 과실치사상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한 후 징역 5년을 선고했다. 한국가스안전공사 사장 임종순도 이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며 사퇴하였다.

하지만 이 사고가 터진 지 고작 2달 하고도 하루 뒤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터지면서 안전불감증에 대한 대대적인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당시 사고 때문에 상인네거리를 지나는 시내버스들은 모두 사고 수습이 끝날 때까지 우회 운행을 했으며 당시 사고로 파손된 121번 버스[14]는 사고의 참혹함을 말해 줬다. 하지만 121번 버스는 버스 기사의 침착한 대응으로 인해 사망자가 한 명도 없었다. 부상자 202명 중 절반 101명은 이 버스에서 나온 것이다.

불과 2년도 채 되지 않은 1997년 4월 서울 마포에서 공덕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사고 경위가 판박이인데 지하철 공사현장 부근에서 하청업체가 무단굴착하다 가스관을 파손시켜 일어난 사고라는 점이다. 가스관 주변 굴착 시 가스공사 관리자가 입회해야 하며 반드시 수작업으로 굴토해야 하는데 이를 깡그리 무시하고 가스공사에 신고도 안하고 굴삭기로 작업하다 벌어진 인재였다. 심지어 가스관 바로 옆에서 용접작업을 하고 있었고 용접 불씨가 화인으로 밝혀졌다. 2년 전에 똑같은 원인으로 대형참사가 발생했는데 이쯤 되면 사고가 남긴 교훈이 전혀 없는 수준이다. 천만다행히도 이쪽 현장에서는 공사장 출입통제 중이었고 인부들이 신속히 대피하여 사상자는 없었다.

5. 사회 반응

당연히 이런 참사에 민심은 안타까움과 두려움이 공존했으며 이 와중에도 정신 못 차리고 "대구 대참사를 보고 너무 무서워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음주운전 단속에 걸린 한 운전자의 변명[15] 등 웃지 못할 얘기도 많았다. 이런 당시 사회 반응을 조선일보는 4월 29일자 사설 <또 대참사>에서 아래와 같이 전했다.
어처구니 없는 대형 철도 사고가 나고, 여객기 추락사고가 일어나더니, 대형 여객선 사고로 온국민이 놀라고 드디어는 한강다리의 붕괴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로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이 있었던 기억들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지하철 공사장의 폭발사고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육-해-공의 모든 부문에서 대참사가 났으니 이제는 지하의 사고만 남았다는 국민들의 자조섞인 탄식이 드디어 현실화했다. 어쩌면 우리가 우리에게는 과분한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마저 들 정도다.
더 나아가 같은 날 한국일보 기사에서도 "끔찍한 사고가 터진 뒤면 으레 벌어지는 정부 당국자들의 법석과 요란한 말장난에 눈길을 돌리거나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고 아래와 같이 말했다.
서해훼리호 사건 뒤에도 똑같은 원인으로 충주유람선 참극이 빚어졌고 수많은 '부실근절' 다짐 속에서 성수대교가 무너져 버렸다. 아현동 가스 폭발 사고 때 온 나라의 위험 요소를 총 점검할 듯한 기세로 대책을 발표한 것이 불과 4개월 전이다. (중략) 국민들은 정부 당국에 대해서는 '그동안 즐비하게 내놓았던 대책이란 것들은 단지 여론 무마용의 국민 기만책에 불과한 것임이 드러났다'고 극도의 불신과 저항감을 표시했다.
세계일보 유럽총국장 주섭일도 다음날 칼럼 <"인재(人災)의 나라" 신한국>에서 이 사건을 정부의 무능, 사회 가치전도 현상, 공직 사회의 복지부동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이것은 문민정부가 '한국병' 치유에 나섰지만, 조금도 개혁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이 존중되고 인간이 최고의 가치로 자리 잡은 사회에서는 '대구 참사' 같은 인재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더 나아가 같은 신문의 5월 3일자 기사에서도 수도권 출신의 한 민자당 민주계 인사의 말을 인용해 "이제는 말이 소용 없게 되었다. 열성 당원들까지 정권을 탓하고 있다. 이성적 설득이 먹히지 않고 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민심은 대구 시민들의 운동권에 대한 보수적인 민심까지 바꿔 놓기까지 했다. 그 증거로 <한겨레21> 1995년 5월 18일자 기사에선 그동안 학생운동 대열이 대백 부근을 지날 때마다 상인들이 욕을 하며 철시했지만 참사 이후 관점이 우호적으로 변했다고 보도했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그 해 5월 1일 노동절 집회에 즈음한 거리 시위에서 시민들은 학생들에게 박수와 격려를 보내기까지 했다. 효성가톨릭대 여대생 A는 "학생들의 시위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이 의외로 좋았다"고 하면서도 "아마 가스 폭발에 대한 항의 시위를 하는 걸로 생각해 호응을 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한 경북대생은 "이런 우호적 분위기에서 시위를 한 건 처음"이라 생각하면서도 "시민들이 검찰의 사건 조기 종결과 언론의 축소 보도에 대해 크게 분개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6. 갈팡질팡 정치판

이 상황에서 여당민주자유당은 우왕좌왕했다. 민주당은 국회를 열자고 했고 민자당은 이를 정치 공세로 일축했다. 5월 1일에 민주당은 의총 성명에서 "과거 군사정권마저도 이보다 훨씬 작은 사고에도 즉각 국회를 소집했었다"면서 "국정 조사만으로 대구 문제를 마무리하자는 민자당의 주장은 국회 문을 아예 닫자는 것"이라 주장했다. 민자당 사무총장인 김덕룡이 "야당이 이번 사고를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하자, 민주당 총재 이기택은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느냐"며 "김 총장이 요즘 이상해졌다"고 개탄했다.

다음날인 5월 2일 김영삼 대통령은 민자당 초/재선 의원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뒤 오찬 자리에서 "대구 사고는 몇 사람의 무책임한 짓 때문에 아까운 많은 희생자를 냈다. 정부도 공동의 피해자다"라고 주장했으며 "미국에서는 아직도 76명의 실종자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16] 우리나라 같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사고에도 불구하고 정부를 비난하기는커녕 오히려 클린턴의 인기가 올라가더라"라고 부정적인 발언을 하였다.[17]

이 발언에 대해 서강대학교 교수 박호성은 5월 25일자 주간조선에서 "누군가는 지금 우리의 김 대통령을 '무면허 운전사'에 빗댄다. 그리고 이른바 문민 체제를 '뺑소니 차량'과 견주기도 한다"고 하여 정부도 피해자로 인식하는 김영삼의 상황 인식이 스스로 무정부 상태를 자초해낼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수사까지 부실했다. 대구의 시민단체들은 축소 수사에 거세게 반발했으며 5월 2일에 대구 내 40여 개 시민단체들은 일제히 항의 성명을 발표했고, 한총련 산하 대경총련 소속 대학생 1,500여 명은 '허구적인 세계화 논리 분쇄와 사고정권 퇴진을 위한 결의대회'를 열기까지 했다.

당시 보수 언론들은 친여적일 망정 독자들이 지켜보는 눈이 있어서인지 정말 너무한다 싶으면 정부 여당까지 비판하기도 했는데 참사 당시 민자당의 태도가 그런 경우에 속했다. 당시의 언론들은 민자당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조선일보 5월 2일자 사설 <비전문가 판치는 세상>에서는 당시 한국가스안전공사의 임원 중 임종순 사장을 비롯한 4명이 청와대나 민자당 출신이고 오직 기술이사 한 명만 본사 부장을 지낸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경향신문 5월 3일자 역시 기사 제목 그대로 <소 잃고 외양간도 안 고친다>고 비판했는데 이는 전날 정부가 내놓은 '가스안전관리체계 기본계획'이 안전 전문가들 사이에서 아현동 사태 당시의 대책이 재탕되었다며 발표된 것일 뿐이다. 같은 날 조선일보도 사설 <민자당 도망가기>에서는 "민자당의 태도가 해괴하고 고약하다"고 하여 "사람이 2백명씩이나 죽임을 당하거나 중상을 입었는데 그것을 국회에서 논의하자는 것을 이 핑계 저 구실로 막으니, 국회는 대체 무엇 하는 곳이며 집권당인 민자당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중앙일보 5월 4일자 사설 <문제있는 여권의 현실인식>에선 "우리는 이미 그저께 왜 이 사고를 국회에서 다루지 못하느냐고 지적한 바 있지만 여당은 며칠씩이나 국회를 공전시키면서까지 이 사고를 회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동아일보는 다음날 사설 <대국 못 보는 집권 여당>에서도 비슷한 비판을 했다. 심지어 국민일보 5월 10일자 <김진규 칼럼> '정부/여당의 잇단 악수'에서 '여당의 한심한 국회 대응'을 지적하며 "2백여 명의 무고한 시민이 죽고 다쳤는데도 '뒤에 국조권 발동...' 운운하며 야당에게 대정부 질의조차 못하게 가로막는 등 임시국회를 공전하는 건 국민을 깔보는 처사"로 간주했다.

결국 이 참사와 문민정부PK에만 신경쓰고 TK를 홀대한다는 여론에 의해[18] 그 해 6월 치러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자유당조해녕 후보는 4위로 낙선했고[19] 무소속 문희갑 후보가 대구광역시장으로 당선되었다.[20]

이듬해 열린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도 대구광역시에서는 신한국당은 2석밖에 건지지 못했으며[21] 자유민주연합이 압승을 거두었다.

7. 미비했던 언론보도

"성수대교 책임자에 대한 처벌은 왜 그렇게 약해요. 그런 식으로 하니 대형 참사가 계속 터지는 게 아니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XX놈이라니까."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북아현동 도시가스 사고 때는 하루 종일 보도하면서 대구에서 발생한 참사에 대해서는 왜 보도를 하지 않습니까?"
- 참사 당시 세계일보에 걸린 독자들의 전화 내용 중 일부.
전술한 대로 정치판의 상황이 최악이었던 데다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텃밭인[22] 대구에서 일어난 사고라 대형 사고임에도 언론이 축소 보도한다는 의혹을 많이 받았다. 지방에서 일어난 일이라 대형 사고임에도 불구하고 취재가 어려웠다는 식으로 둘러대는 경우도 있었는데 당시 대경권 지역방송국은 TV/라디오 통틀어 KBS대구, 대구MBC, 대구CBS 3개가 존재했고[23] 이를 취재했음을 감안하면 납득이 안 가는 변명에 불과하다. 이전에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 사고 당일에는 하루 종일 뉴스 특보를 했던 방송 3사라 국민들의 화는 들끓었다. 그래서인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틀 뒤에 벌어진 그 대형 참사 때는 철야 방송까지 하며 논란을 종식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이것도 서울에서 발생한 사고였기 때문에 이 폭발 사고를 언론이 홀대한 것에 대한 대구 시민들의 분노는 전혀 누그러들지 않았다.

특히 공영 방송 KBS의 태도는 더욱 지탄을 받았는데 1TV가 사고 당일에 10시 15분에 방송을 끝냈고 오후에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준결승 경기를 생중계해서 빈축을 샀다. 당시 공익성을 강화한다고 1TV의 광고를 폐지하고 수신료와 전기료의 합산 징수를 시행한 지 약 7개월 정도 지났을 시점인 데다 시청료 거부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진 지 10년이 안 되었을 시점이니 수신료와 전기료 합산 징수만 아니었으면 수신료 징수율이 다시 한 번 내려가도 할 말이 없었을 수준이었다. 다만 여기에는 뒷사정이 있어서 KBS는 11시부터 공보처에 뉴스 특보 방영 목적으로 방송 시간 연장 허가를 신청했는데도 허가가 나지 않았고, 그럼 자막이라도 내게 해 달라고 사정사정해서 허가받고 자막 속보를 낸 시간이 14시 02분부터였다. 속보 방송 승인은 14시 50분에야 얻어냈고 55분부터 13분간 뉴스 특보를 한 게 전부였다.

이는 당시 공보처의 방송국 허가장 일부 규정 때문이었는데 지상파가 정파 시간에 긴급 속보를 때려야 될 경우에는 사전에 공보처에 얘기를 한 뒤 허락을 받아야 방송을 할 수 있었다. '방송 질서 유지' 명목이었지만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한다는 논란이 일었고 결국 국민의 정부 시절에 이 시책은 없어졌다. 1994년 10월 당시 충주호 유람선 화재 사건 당일에 MBC와 함께 9시 뉴스 시간에 해당 사건을 뒤로 보낸 채 김영삼 대통령의 성수대교 붕괴 사고 관련 담화를 헤드라인으로 내보낸 바 있었고 12월 발생한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 당시에도 오후 방송 개시 5분 전부터 뉴스 속보를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편성 관련자가 징계를 받은 전적이 있어서 KBS는 위에서는 높으신 분들 눈치 보느라, 아래에서는 국민들의 눈치를 보느라 이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1995년 4월 28일 MBC아침만들기 진행 중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자막 속보 소리 [24]

MBC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공보처에 아침 방송 시간 20분 연장[25]을 신청한 게 전부였고 그 날 저녁 인기가요 베스트 50도 정상적으로 생방송했다. 다만 이 프로그램의 당시 MC였던 신은경-김지수가 오프닝에 이번 참사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멘트를 날리긴 했지만... 방송 성격이 성격이다 보니.

여하튼 이 때의 참상으로 방송계에 대한 비난이 하도 일다 보니 공보처에서도 뜨끔했는지 1995년 9월 4일에 오후 방송 시작 시간을 17시 30분에서 17시로 앞당긴 것을 시작으로 1997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지상파 방송 시간을 연장하는 데(6시~12시, 16시~다음날 1시)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도 세계화 명목으로 방송 시간의 연장 계획 자체는 있었지만 지상파 낮 방송을 노동 생산성 저하의 원흉으로 보는 공보처와 방송위원회의 고리타분함과 신문사들의 반발 등을 감안해 1993년 11월 심야 방송 시간을 1시간 늘린 것을 제외하면 제대로 진행된 것이 없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지상파 방송 3사 모두 사고 당일 저녁에 예능 프로그램을 그대로 방송해 욕을 먹었다. 결국 대구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5월 4일에는 방송개혁국민회의 선거방송대책본부가 서울시청 뒤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대구참사 왜곡방송 규탄집회'를 열었고 대구에서도 며칠 동안 시민단체 중심으로 시위를 벌였으며 KBS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까지 걸었으나 1997년 4월에 서울지방법원은 보도가 별로 안 되었던 건 알 권리 침해가 아니었다며 패소 판결을 내렸다. # 신생 진보 언론 <미디어오늘>이 '안기부 언론팀 건재'를 폭로할 당시 해당 참사 축소 보도에 안기부가 개입된 게 아니냐는 주장도 나왔다.
파일:0P1gwcy.jpg
사고 당일 MBC 뉴스 특보 방송 장면. 대구MBC 50년사에서 발췌.
좌측 서울 스튜디오에 나오는 이는 손석희 앵커다.
"선배님 큰일났습니다. 여기에 도시가스가 폭발해 다 날아갔습니다"
"흥분하지 말고 눈에 보이는 거 다 얘기해봐"
"지하철 공사장에서 도시가스가 폭발해 복공판이 50미터까지 튀어올랐답니다. 사람들 시체가 여기저기 있어요. 버스도 불에 타고 트럭, 택시, 승용차 수십 대가 박살났습니다. 지하철 저 아래로 떨어졌어요. 건물도 눈에 보이는 건 죄다 부서졌어요."
- 당시 첫 취재 내용을 보고하던 대구MBC 오태동 기자 - 김세화 기자의 대화 중.
"여긴 지금 상인네거리. 지하철 공사장에서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복공판이 완전 붕괴되었습니다! 사망자, 부상자가 도대체 몇명인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지금 제 옆에도 시신이 있습니다!"
- 사고 지점에 있던 대구MBC <푸른 신호등> 통신원 전화 연결 중.
한편 사건 보도는 MBC가 제일 빨랐다. 사고 당시 방송을 막 끝내려던 참이었던 대구MBC 라디오 <푸른 신호등>[26]에서 후반 CM을 내보낸 뒤 클로징하려는 순간 여기저기서 제보 전화가 걸려왔고 그 중 통신원 1명을 전화로 연결한 것이 사건 보도의 시작이었다. 같은 시간 여러 시민들의 제보를 받은 보도국에서는 마침 사고 지점 근처를 지나가던 취재 기자를 통해 제보 5분만에 사고를 파악해 속보를 내보냈다. 개국 초기이던 케이블 뉴스 채널 YTN도 24시간 동안 뉴스를 내보냈으나 당시에는 서울 지역에만 케이블TV 회선이 설치되어 있어 큰 반향은 없었다.

방송에서는 상당 시간 동안 침묵하고 있었지만 당시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PC통신에서는 사고 현장이 보이는 아파트 등의 사용자, 해당 사고 현장을 지나온 사용자 등을 통해 게시판에 거의 생중계에 가까운 현장 목격담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언론을 통제해도 정보의 전달을 막을 수 없게 된 시대가 온 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의 어마어마한 위력을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피부에 와닿게 현실화시켜 보여준 사건이었다. 2010년대 들어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사건이 터지면 즉시 SNS에 널리 퍼지는 추세다.

8. 기타

언론학자 강준만 교수는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2권에서 해당 참사에 대해 언급하며 당시 온갖 대형 사고들을 겪으면서 드러난 김영삼 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불운 이전에 진정성의 결여였는지도 모른다고 분석했다.

현재 이 사고의 추모 공간으로는 롯데백화점 상인점과 건너편 교복 대리점들이 사이에 있는 횡단보도 중간 지점 고가도로 하단에 고인들의 명복을 비는 위령비가 있다. 달서구 월성1동 학산공원 내부에 위령탑이 있어서 여기서 추모 행사를 벌여 왔으나 공식적인 추모 행사는 2005년 10주기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열지 않았지만 20주기인 2015년에 다시 공식적인 추모 행사를 열었다. 사고로 학생들의 피해가 심각했던 영남중학교에서도 부속 건물에 추모 공간을 마련해 놨다.

대구의 지하철 관련 사고 중 가장 먼저 발생한 인명 사상 사고다. 2000년에 신남네거리 도시철도 공사 현장 붕괴 사고가,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났으며 2011년 11월 8일에는 수성구 범물1동 동아백화점 수성점대구 도시철도 3호선 공사 현장에서 굴삭기가 작업하던 도중 도시가스관을 파손하여 가스가 누출되었다. 다행히 신속히 밸브를 차단하고 복구해서 추가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하마터면 제2의 상인동 참사가 날 수도 있었다. 문제는 도시가스관 등의 지하 매설물의 위치를 정확히 모르고 작업하다 보니 항상 참사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길을 가다 보면 붉은 글씨로 '경고! 이곳은 도시가스관이 매립되어 있으니 이곳에서 공사하려면 아래의 연락처로 연락하시오!'라고 팻말을 설치해 놓은 걸 볼 수 있다.

당시 사고로 대구 영남중학교에서는 교사 1명과 남학생 42명이 목숨을 잃었고 아들을 잃은 부모들 중 12쌍의 부부가 먼저 떠난 자식의 동생을 낳았다. 놀랍게도 태어난 12명의 아이들 중 11명이 남자아이였으며 아이들과 부모들은 매년 만나 우애를 키워가고 있다고 한다. 이 중에는 영남중학교에 다니던 쌍둥이 아들 김준희, 김준형 군이 둘 모두 등교하던 중에 사고로 사망해서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냈던 김상돈 부부의 늦둥이 아들과 당시 대구대 강사였던 유족회장 정덕규의 늦둥이 아들도 있다. 꼬꼬무에서는 해당 사고로 사망한 지한군과 창윤군의 사연도 추가적으로 알려졌다. 영남중학교는 1997년에 추모 공간인 세심관을 건립하여 희생자들의 영정을 모시고 사고 자료를 전시하면서 추모 행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 영정사진 훼손 등이 심해지자 2015년 20주기 추모식 이후 추모 공간을 교육용 시청각실로 리모델링하고 영정을 모시는 공간은 철거하는 한편 희생자들의 얼굴을 동판으로 제작하여 건물 중앙에 모시기로 유족들과 협의했다. 리모델링은 2015년 7월부터 이루어질 계획이라고 했다.[27]

당시 정우진 군은 간발의 차로 학교로 가는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하지만 이후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피해자 사고 이후 유족들이 모여 건설회사를 설립했다. 부실공사 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목적으로 설립한 회사는 직접 세운 단 하나의 건축물을 제외하고 수주가 들어오지 않아 결국 문을 닫게 됐다고 한다. 처음이자 파산할 때까지 직접 만든 단 하나의 건축물은 피해자 위령탑이라고 한다.

대구 출신 중 사고가 일어난 상인동과 그 근방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이 사건과 관련된 다양한 일화와 이야깃거리를 지니고 있다. 당시 영남고등학교의 어떤 교사가 학교를 땡땡이친 학생이 사고에 휘말려 죽은 것으로 여겨 노심초사하다가 건들거리며 늦게 온 것을 보고 한 대 쥐어박았다든가, 평소와는 달리 늦잠을 자거나 차가 밀려서 용케 살아남았다든가, 승용차가 엔진 문제를 일으켜 브레이크를 걸면 시동이 꺼져버려서 어쩔 수 없이 신호를 받지 않게 돌아갔다가 사고를 피했다든가, 앞산순환로에서 내려오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뭔가 커다란 게 바로 앞에 떨어져서 깜짝 놀라 차를 세우고 보니 커다란 복공판으로 추정되는 철판이 있었다든가와 같이 간발의 차로 사고를 면한 이야기들이 대다수다. 특히 영남고등학교나 영남중학교 교사들이 수업 시간에 짬날 때 이런 이야기를 종종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아무래도 사고 현장 바로 옆에 있던 학교인 데다가 사상자도 많이 나왔고 해당 학교가 사립학교라 장기 근무를 하는 교사도 많아서[28] 사고를 직접 본 교사들이 직접 근무하고 있기 때문이다.[29]

전술한 대구MBC 라디오 프로그램인 '푸른 신호등'의 당시 진행자였던 지역 연극배우 겸 MC인 류강국 역시 이러한 해프닝을 증언했다. 그는 방송을 끝낸 뒤 또 다른 공포에 휩싸였는데 사고 지점 근처에 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어린이집을 다니던 5세 딸이 아침에 타는 통학버스가 상인네거리를 통과한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린이집으로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 중이라 혹시나 해서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수화기를 든 이는 바로 딸이었다. "아빠야~ 여기 꽝했어"가 딸이 건넨 첫 마디였다고. 알고 보니 그 날따라 차량 정체로 어린이집 차가 늦게 왔고 차를 타기 전에 폭발 사고가 나서 어린이집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공사 발주처인 대구백화점은 판매점 확대와 외지 업체 방어 차원에서 심혈을 기울여 상인점을 건립했다. 하지만 이 사고로 보상금만 400억 원을 지급하는 등 회사 전체가 큰 위기에 빠져 부지를 내놓아야 했고, 결국 해당 부지가 롯데쇼핑에 낙찰되어 현재의 롯데백화점 상인점이 됐다.[30] 해당 부지를 우선적으로 환매할 수 있었지만 1997년 외환 위기 때문에 끝내 되찾지 못했고 강력한 경쟁자인 롯데백화점을 대구 시내로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관련 기사 여러모로 대백에게는 굉장히 쓰라린 기억이다. 200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롯데백화점에서 참사 희생자들의 유령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심심찮게 나왔는데 2020년대가 되어서는 뜸하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023년 4월 20일 방영분에서 '8cm가 부른 죽음'[31]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고에 대해 다뤘다.

9. 관련 문서

10. 둘러보기

역대 대한민국의 대형 사고 및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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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이천 냉동창고 화재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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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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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0월 30일
56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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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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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8월 6일 228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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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철원 군부대 산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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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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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9월 17일
24 전북 모래재 버스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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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안양 봉제공장 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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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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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대구 초원의집 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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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광주 지하살롱 화재 사고
[ 197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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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7일
26 은성탄광 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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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대한민국 해경 경비정 제863호 침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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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YTL30호 침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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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영동역 유조열차 폭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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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영일 건널목 열차 추돌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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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파크로버호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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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모산 수학여행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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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추풍령 고속버스 추락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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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 196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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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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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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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면 KBS 뉴스 9 앵커 이윤성은 별도의 사견 없이 FM대로 오프닝 멘트를 전했다.[2] 이때의 사고로 보상금 지출 증가 등으로 결국 해당 부지를 롯데에 매각했고 2004년 롯데백화점 상인점이 들어섰다.[3] 드릴로 땅 속 깊이 구멍을 낸 후 그 안으로 시멘트 같은 주입재를 넣어 지반의 강도를 올리는 공법.[4] 사건 당일 매스컴에선 다들 "지하철 공사장에서 터졌으니 당연히 지하철 공사장에서 과실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보도했지만 당일 영남일보 기자가 사건 취재를 하다가 표준개발 쪽에서 "공사 중 가스관을 건드렸다"고 대구도시가스에 신고한 걸 찾아내서 바로 보도했다. 이에 경찰은 수사 방향을 돌려 표준개발 인원들을 사법 처리했는데 이들 측에서는 모함이라고 펄쩍 뛰었다.[5] 지하에서 공사가 있을 경우 지상에 아스팔트 대용으로 덮어두는 대형 강철판을 말한다. 1개당 280kg 나가는데 이것들이 폭발로 튀어 올랐다가 떨어졌다.[6] 당시 현장에 출동한 대구중부소방서 구조대장의 증언에 따르면 철근 위로 떨어져 그대로 꽂혀 버린 참혹한 상태의 시신도 있었다고 한다.[7] 당장 근처에 영남중학교, 영남고등학교, 대구상업고등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 경북기계공업고등학교, 대구달서공업고등학교(현 대구하이텍고등학교), 대서중학교, 효성초등학교, 상인여자중학교(현 상원중학교. 남녀공학으로 바꾸면서 교명이 변경되었다.) 등이 있다. 이 중 영남중, 영남고, 대구상고는 위의 사진에서 보인다.[8] 예외로 그 날 화원유원지로 소풍을 간 성서중학교 학생들 중 일부는 죽전동, 감삼동, 용산동에서 화원으로 가기 위해 사고 현장을 경유할 확률이 컸으므로 사고에 노출될 수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학생들에게 개인 휴대 통신기기(+ 카카오톡 등의 모바일 메신저)가 없었고 삐삐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것도 아무나 다 가지지는 않은 만큼(1995년 기준으로는 삐삐 사용자가 700만 명 정도에 불과하였고 청소년층 중에서도 가지지 않은 경우가 결코 적지 않았다.) 소풍간 자녀의 안위를 확인할 수 없었던 많은 학부형들이 화원유원지로 울며 찾아와 자녀를 찾았다. 정작 교사와 학생 대부분은 사고 소식 자체를 모르거나 알아도 사태의 심각성을 잘 몰랐던 터라 소풍 분위기는 매우 평화로웠다고 한다.[9] 2km 정도 떨어진 구마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 근처에서도 굉음이 들렸고 직선 거리로 3km 이상 떨어진 감삼동 일대에서는 매우 큰 굉음과 더불어 상가의 셔터와 유리창이 흔들릴 정도였으니 훨씬 더 멀리까지도 굉음이 들렸을 것이다.[10] 이 버스 기사는 사고 당시 인명구조에 대한 특별공로로 1996년 대구광역시에서 특별 채용하여 청원경찰로 시청에서 근무하다가 팔공산자연공원 관리사무소 관리팀에서 근무 중이며(KBS2 굿모닝 대한민국 라이브 2021년 11월 8일 방영분) 하술하는 121번의 버스 기사였다.[11] 현 롯데백화점 상인점.[12] 지금은 이와 같은 참사를 방지하기 위해 국토안전관리원이 굴착공사 전 지하안전평가와 굴착 이후 정기적으로 착공 후 지하안전평가를 명령하고 시추업체나 지반설계 업체들은 시추작업 전 지하굴착행위 신고를 통해 이를 관계 지자체에 반드시 신고한 뒤 승인이 난 뒤에야 시공을 할 수 있게 바뀌었다. 동시에 가스공사 및 가스기술공사 또는 지역 도시가스 제공회사 직원을 참관시켜야 하며 경우에 따라 한전과 통신사, 한국석유공사, 그리고 국가기밀 통신망이 있다면 국방부와 정보기관 담당자도 참관한다.[13]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도심은 너무 복잡하게 지하관로들이 얽힌 탓에 지하굴착공사 중 관로를 파손시키는 준사고가 현재도 종종 발생하지만 전술한 안전조치가 선행되어 있기 때문에 준사고가 사고로 번지는 사례는 없어졌다.[14] 지금은 폐지된 646(-1)번 버스의 전신이다.[15] 당시는 지금보다 더 음주운전에 관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윤창호법까지 제정된 2020년대 시점으로 보면 씨알도 안 먹힌다.[16] 같은 시기에 발생한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를 가리킨다.[17] 김영삼은 2달 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도 대국민 담화 후 "이카면 되겠제? (이쯤 하면 되겠지?)"라는 실언을 남겼다.[18] 당시 문민정부의 주류는 상도동계였고 김덕룡 등 극히 일부를 빼고는 대부분 PK 출신이었다. 반대로 졸지에 비주류가 된 민정계는 TK 출신이 많았다. 문민정부는 민정계를 권력의 외곽으로 밀어내는 작업을 본격화했고 TK 출신 의원들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TK 출신 의원 일부가 김종필자유민주연합으로 합류하게 되는데 충청권 지역 정당이었던 자민련이 TK에서 의외의 선전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이 여기에 있다.[19] 보수 정당이 텃밭 중의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대구광역시에서 이 정도로 참패한 사례는 전무후무하다.[20] 다만 문희상은 민선 1기 시장 임기 도중 민자당의 후신이 되는 한나라당에 복당한 후 재선 시장이 된다.[21] 그마저도 서구 을 강재섭은 표 분산으로 30%대 득표율로 당선됐다.[22] 다만 문민정부 출범 이후 민자당 - 신한국당은 상인동 사고 이전에도 대구 지역 선거에서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23] 당시 SBS계 지역민방 TBC는 개국 2주 전이었고 라디오방송사 PBCBBS도 아직 대구지역국을 개설하지 않았다.[24] 위 영상에는 자막이 나오지 않고 소리만 나오지만 당시에는 "*** MBC 뉴스속보 대구지하철 공사장 도시가스 폭발 출근길 시민 수십명 부상 오늘....."이라고 자막이 나왔다.[25] 당시 평일 오전 방송은 10시에 종료하고 정파했다.[26] 대구MBC 라디오에서 지금의 <시선집중> 1, 2부 시간대(당시 시간으로는 7시 20분)에 방송했던 출근길 교통 정보 프로그램. 대구교통방송이 개국한 지 얼마 후에 폐지됐으며 '여론현장'으로 대체됐다. 현재는 평일 8시 35분으로 이동했다.[27] 사실 추모실은 계속 시청각실로 활용되었고 무대에 흰 커튼으로 영정 사진들을 가려 놓아 로비나 건물 외관 정도를 제외하면 추모관이라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일부 방송 장비를 만지는 인원만 방송실 내의 당시 PC통신에 관한 기록물이나 사진 자료를 보면서 추모 공간임을 알 수 있었을 뿐이다.[28] 5년마다 전근을 가는 공립과 달리 사립학교는 본인이 원하고 별 문제가 없으면 한 학교에서 퇴임까지 쭉 근속할 수 있다.[29] 사건을 목격한 일부교사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지게 되었으며 시간이 지난이후 조기퇴임한 것으로 추정된다.[30] 실제로 롯데백화점 상인점은 어딘가 타 시도에 위치한 롯데백화점과 다르게 외형이 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외벽을 손 봐도 뼈대가 대구백화점이 만든 형태라 그런 듯하다. 다만 대백은 삼풍과는 달리 회사는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나 19년 후 이 사고가 아닌 신세계백화점 대구점의 개점으로 풍전등화 신세에 처했다. 결국 적자가 심해지자 본점을 매각 폐점하고 대백프라자점으로 본사를 이전하고 말았다. 사실상 그랜드백화점과 같은 행보가 된 셈이다.[31] 가스관에 뚫린 구멍 크기가 8cm였기 때문에 제목이 '8cm가 부른 죽음'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