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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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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의 주요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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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문 대상
제39회
(2003년)
제40회
(2004년)
제41회
(2005년)
집으로... 강우석
(실미도)
말아톤
제44회
(2008년)
제45회
(2009년)
제46회
(2010년)
추격자 강우석
(강철중: 공공의 적 1-1)
윤제균
(해운대)
영화 부문 감독상
제29회
(1993년)
제30회
(1994년)
제31회
(1995년)
박종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강우석
(투캅스)
정지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white 역대}}} 파일:bluedragonfilmawards_logo.png
파일:bluedragonawards3.png
감독상
제24회
(2003년)
제25회
(2004년)
제26회
(2005년)
박찬욱
(올드보이)
강우석
(실미도)
박진표
(너는 내 운명)
제30회
(2009년)
제31회
(2010년)
제32회
(2011년)
김용화
(국가대표)
강우석
(이끼)
류승완
(부당거래)

역대 파일:daejongfilmawards_logo.png
파일:daejongawards.png
감독상
제46회
(2009년)
제47회
(2010년)
제48회
(2011년)
김용화
(국가대표)
강우석
(이끼)
강형철
(써니)

}}} ||
파일:attachment/Kang_u_suck_2016.jpg
이름 강우석(康祐碩)
출생 1960년 11월 10일 ([age(1960-11-10)]세)
경상북도 경주시
학력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 / 중퇴)
가족 형 강용석(康容碩)[1]
배우자 박정은[2], 슬하 2남 1녀
병역 방위병 복무만료[3]
데뷔 1989년 달콤한 신부들

1. 개요2. 생애3. 영화감독 경력4. 작품 성향5. 필모그래피6. 수상 경력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영화감독.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 영화계의 최고의 흥행을 이끈 감독이자 강제규 감독과 함께 충무로 최강 파워맨으로 불리웠다. 실미도를 통해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1000만 관객을 넘긴 감독이기도 하다.

2. 생애

1960년 11월 10일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지역 유지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황해도 출신으로 6.25 전쟁 때 월남했고, 성냥을 만드는 화학제품 공장을 경영해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고향 경주시에서 수학경시대회에서 암산왕을 차지할 정도로 촉망받는 인재였으나[4][5] 취미로 시작한 조조영화 보기에 빠져서[6]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마음을 잡게 된다.

국민학교 5학년 때이던 1971년 상경해 서울특별시에 있던 학교로 전학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이던 1976년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났다. 이후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지만 가정 형편으로 인해 학비를 스스로 벌어야 했고, 이에 알바로 영화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상황이 되지 않자 2학년 때 대학교를 중퇴한 뒤 국방부 국군홍보관리소(現 국방홍보원)에 취직해 국군 홍보영화를 만들었다.

이어 애마부인 시리즈의 조감독으로 영화판에 본격적으로 입성한다.

3. 영화감독 경력

평소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강우석은 농촌총각이 결혼을 못해 자살을 택하는 뉴스기사를 접하고 1988년 농촌총각이 도시여자와 결혼하려는 내용의 '달콤한 신부들'로 감독으로 데뷔한다. 제목이 이상야릇한 제목인지라 제작자가 역시 에로영화 조감독 출신답구만 하고 웃었다고 한다. 주연은 최재성이 맡았다. 하지만 서울관객 21,000여명으로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다음 영화인 시험 성적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학생들의 기사를 접하고 학생의 유서에 써져있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글귀를 모티브로 동명의 영화를 만든다. 서울 15만 관객으로 흥행에 성공하며 주연이었던 이미연은 단숨에 하이틴 스타가 된다.[7] 이후에도 사회문제에 관한 여러 작품들을 연이어 내놓지만 개봉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그나마 1992년 영화인 최진실 주연인 미스터 맘마가 서울 22만 관객으로 흥행에 성공하여 영화 제작을 계속 이어나가게 된다. 그리고 다음해인 1993년에 투캅스 1편이 서울 86만이라는 대성공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 그 돈으로 영화사 시네마 서비스를 열게 된다. 당시 어머니의 소원이었던 전셋집을 사드리기 위해 어머니에게 돈을 내밀었지만 어머니가 강우석의 재능을 인정하고 그 돈으로 영화사를 차리라고 했다고. 연출보다도 다른 감독들을 키우려는 방향도 노려보지만, 그의 연출작 외에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어 위기를 겪는다. 그래도 제작을 꾸준히 하여 2000년대 와서 제작투자한 신라의 달밤이라든지 흥행 성공작도 나왔다.

또한 동시에 흥행작인 투캅스와 이후 작품인 1994년작인 마누라 죽이기가 각각 해외영화 표절 시비에 휘말리게 된다. 투캅스는 1984년작 프랑스영화 마이 뉴 파트너, 마누라 죽이기는 동년도에 개봉했던 역시 프랑스 영화 탱고의 표절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여하튼 비난을 받았어도 서울관객 34만으로 흥행만은 성공했다.

당시 한국 영화계의 가장 큰 권력자이던 곽정환 서울극장 회장과 손을 잡았다. 이 둘은 성균관대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다. 이 곽정환-강우석 체제는 당시 여러 편의 히트작들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강우석 감독은 흥행 영화를 제공하고 곽정환 회장은 전국적인 극장 배급망을 제공했다.

2000년대 들어 만든 공공의 적의 불량형사 강철중설경구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각본의 힘을 얻어, 그의 작품 세계를 넘어 한국 영화계에서도 기억될 만한 명 캐릭터로 남게 된다.

충무로에서 거의 수십년째 떠돌아 다니던 실미도의 시나리오를 강우석 사단이라 불리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모두 총출동 시켜 거액의 제작비를 들여 제작, 흥행에 성공시켜 멀티플렉스 극장의 도래와 함께 한국영화 최초로 천만을 돌파한다.

실미도의 성공 때문인지 21세기 들어 내놓은 그의 영화인 공공의 적 속편, 한반도 등이 이어질수록 점점 영화 완성도가 촌스러워진다, 구려진다, 마초적이고, 국가주의적이다라는 평단의 비난을 맞게 된다. 과거 그의 영화에 우호적이었던 분위기와 급변해버린 상황이다.[8]

이에 감독으로서 전력을 쏟아넣겠다는 각오로 만든 2010년 작 이끼가 340만명을 기록하여 흥행 성공했으나 연출 방향성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기존의 마초스러움을 버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평을 듣는다. 이끼는 원래 다른 영화처럼 강우석 본인은 제작자로서만 기능하고 연출은 다른 사람으로 하려는 작품이었으나, 계획이 바뀐 경우. 본인은 '(억지로 잡고 했지만) 이런 스타일에는 안 맞고 지쳤다'라며 다음 이야기는 야구를 소재로 한 밝고 감동적인 영화가 될 거라고 언급했다. 그 공언대로 청각장애인 학교 야구팀을 소재로한 글러브가 개봉했는데 그럭저럭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역시 흥행은 실패했다.

공공의 적 2012를 만든다는 이야기가 들렸는데 2013년까지도 나오고 있지 않다. 2012년에 크랭크인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일각에서는 설경구가 타워에 집중한 탓에 늦어지는게 아니냐는 말도 있다. 결국 공공의 적 2012 대신에 "전설의 주먹"이라는 영화를 만들어서 2013년 4월에 개봉했다. 여담으로 전설의 주먹은 강우석 감독의 20번째 장편 영화로 임권택 감독 이후로 많은 장편 영화를 만든 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평생 목표가 50편 정도의 영화를 감독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2013년 작인 전설의 주먹은 평은 나쁘지 않으나 흥행이 완전 기대이하이다. 다시 공공의 적 1편의 작가를 재영입하여 강철중의 속편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다.

2016년 고산자, 대동여지도를 감독했는데 역사 왜곡이라느니 재현 오류라느니 개봉 전부터 말이 많다.[9] 개봉일인 9월 7일 SBS 나이트라인 초대석에 출연하여 홍보했지만 결국 흥행도 실패했다. 자세한 건 항목 참고.

2019년 10월 곽경택 감독의 인터뷰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은퇴 선언을 한 것이 알려졌다. 아무래도 최근 영화들의 연이은 흥행 실패가 상당한 영향을 끼친 듯 하다.[10]

4. 작품 성향

그의 영화들은 한국적인 소재와 배경을 취하며, 대중적이고 오락적인 경향을 띠곤 한다. 데뷔 후 90년대까지 내놓은 영화들이 평적으로나 대중적으로나 높은 평가를 받았다면, 그 이후로 나오는 그의 영화들에 대해서는 낮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중에서 국가주의적이다 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자신은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그의 영화에서는 "이래야 마땅하다"라는 정서보다는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라는 정서가 더 드러난다.

그리고 그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결코 선하지만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이 특징이며, 그런 주인공들의 소시민적이거나 구질구질한 면모, 혹은 그런 자기 안위 위주였던 인물들이 "그래도 이런 것까지는 두고 볼 수 없다"는 최소한의 상식선의 무너짐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 것이 일종의 공식화된 경향이 있다. (예: 투캅스안성기박중훈, 공공의 적의 설경구) 예를 들어 강철중뇌물도 받고 이런저런 자잘한 위법행위나 월권행위도 꽤 많이 저지른다. 물론 거기까지는 캐릭터라고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문제는 그러면서 은근슬쩍 "큰 악행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교로 봐줘라"는 듯한 뉘앙스가 언뜻언뜻 묻어난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사회의 잘나가는 지배계층, 인텔리들에 대한 불신과 위선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예: 공공의 적 시리즈에 나오는 모든 악역들)

영화마다 은근히 러닝타임이 길다. 공공의 적이 138분, 공공의 적2가 148분, 이끼163분, 전설의 주먹153분 등으로, 웬만하면 130분이 넘어간다.[11] 보통 배급사에서는 상영횟수를 늘려 관객수를 더 모으는 것을 선호하여 상영시간이 짧은 것을 선호하는데 반해, 충무로에서 기획/제작자로서 영향력이 커서 그런지 상영시간에 대한 제약이 크게 없다.

5. 필모그래피

강우석 감독 장편 연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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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89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로고.png 파일:1992 미스터 맘마 로고.png 파일:1993 투캅스 로고.jpg
마누라 죽이기 투캅스 2 생과부 위자료 청구 소송
파일:2002 공공의 적 로고.png 파일:2003 실미도 로고.png 파일:2005 공공의 적2 로고.png
파일:2006 한반도 로고.png 파일:2008 공공의 적 강철중 로고.png 파일:2010 이끼 로고.png
파일:2011 글러브 로고.png 파일:2012 전설의 주먹 로고.png 파일:2016 고산자 대동여지도 로고.png }}}}}}}}}

<rowcolor=#ffffff> 연도 제목 역할 관객수
1988 달콤한 신부들 연출 서울관객 2만명
1989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연출 서울관객 15만명(성공)
1990 나는 날마다 일어선다 연출 서울관객 2만9천명
1991 열 아홉의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 노래
연출 서울관객 6천명(실패)
1991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연출 서울관객 4만2천명
1991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연출 서울관객 2만4천명
1992 미스터 맘마 연출, 제작 서울관객 22만명(성공)
1993 투캅스 연출, 제작 서울관객 86만명(성공)
1994 마누라 죽이기 연출, 제작 서울관객 34만명(성공)
1994 손톱 기획
1995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 제작
1996 투캅스 2 연출, 제작 서울관객 63만명(성공)
1996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가지 이유 연출[12] 서울관객 9만명(실패)
1997 올가미 제작
1997 홀리데이 인 서울 제작
1998 투캅스3 제작
1998 생과부 위자료 청구 소송 연출, 제작 서울관객 14만명(손익분기)[13]
1998 실락원 기획, 제작
1999 자귀모 기획, 제작
2000 불후의 명작 제작
2000 순애보 기획
2000 주노명 베이커리 제작
2001 킬러들의 수다 제작
2001 신라의 달밤 기획
2001 선물 기획
2002 광복절 특사 기획
2002 밀애 기획
2002 재밌는 영화 기획
2002 피도 눈물도 없이 기획
2002 공공의 적 연출, 제작 303만명(성공)
2003 실미도 연출 1108만명(성공)[14]
2003 천년호 기획
2003 불어라 봄바람 제작
2003 거울 속으로 기획
2003 나비 기획
2003 선생 김봉두 기획
2004 꽃피는 봄이 오면 공동투자
2004 귀신이 산다 기획
2004 달마야, 서울가자 공동제작투자
2004 아라한 장풍대작전 기획
2004 바람의 전설 기획
2004 그녀를 믿지 마세요 기획
2005 공공의 적2 연출 391만명(성공)
2005 오로라 공주 기획
2005 사랑니 제작
2005 혈의 누 기획
2006 한반도 연출 388만명(실패)[15]
2006 거룩한 계보 기획
2007 싸움 기획
2007 궁녀 기획
2007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기획
2007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 기획
2007 황진이 기획, 제작
2007 아들 기획
2008 강철중: 공공의 적 1-1 연출 430만명(성공)
2008 모던 보이 제작
2008 신기전 제작
2008 뜨거운 것이 좋아 제작
2009 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 제작
2009 김씨 표류기 기획
2009 용서는 없다 제작
2010 이끼 연출 340만명(성공)[16]
2010 퀴즈왕 기획
2010 주유소 습격사건 2 제작
2011 글러브 연출 188만명(실패)
2011 로맨틱 헤븐 제작
2012 주리 제작
2013 깡철이 기획
2013 전설의 주먹 연출 174만명(실패)
2016 고산자, 대동여지도 연출 97만명(실패)

기획, 제작으로 참여한 영화가 상당한데 이것은 그가 1993년 강우석 프로덕션(시네마 서비스) 설립 후 꾸준히 영화 기획, 제작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영화계 최고의 파워를 가진 인물로 '강우석 혼자 충무로를 돌리고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6. 수상 경력

수상 연도 시상식 부문 작품
1990년 제1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감독상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1993년 제17회 황금촬영상 감독상 미스터 맘마
1994년 제30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감독상 투캅스
2002년 제5회 디렉터스컷 어워즈 올해의 제작자상 취화선, 광복절특사
2004년 제25회 청룡영화상 감독상 실미도
제12회 춘사영화상 심사위원특별상
제40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대상
2006년 제14회 춘사영화상 감독상 한반도
최우수 작품상
2008년 제45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대상[17] 강철중: 공공의 적 1-1
2010년 제31회 청룡영화상 감독상 이끼
제18회 춘사영화상 감독상
춘사대상작품상
제47회 대종상 영화제 감독상
2011년 제20회 부일영화상 유현목영화예술상

7. 관련 문서



[1] 제18대 국회의원을 지낸 그 강용석과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이다. 영화배우 출신으로, 대구광역시에서 아카데미극장과 중앙시네마를 경영한 바 있다. 처남은 배우 강성진.[2]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했다.[3] 평발 사유[4] 현재에도 암산 실력은 어디 안 가서 영화제작비 경비(무려 몇십억 단위.)를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계산해 낸다고 한다.[5] 영화를 찍을 때도 머리 속에 이미 영화가 완성되어 있어서 원하는 장면을 찍으면 배우의 요구에 상관없이 다음 촬영 장소로 카메라를 옮겨 놓는다고 한다.[6] 조조영화를 다 보고 학교등교했다고 한다.[7] 그리고 얄궂게도 이미연은 여고괴담 1편에서 여교사로 나와 그 학생이 선생이 되었다는 우스개가 나왔다.[8] 거기다가 2010년도 이후에는 본인의 최대 대표작이였던 실미도마저 사실은 실제 사건과 엄연히 다르다는 영화적 허용을 방패 삼아 실미도 사태를 전형적인 신파극 영화로 만들었다는 비판도 여럿 나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영화 평론가들과 리뷰 유튜버들이 한국 영화계의 최전성기인 2003년~2006년 동안 개봉된 명작 영화들을 리뷰할 때 유독 실미도가 자주 빠지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였냐는 의견이 나온 것도 덤.[9] 단순 오류, 왜곡이 아니라 아예 다른 내용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인건 김정호가 지도를 만들었다 이거 하나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거짓이다. 사실상 픽션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10] 사실 영화 글러브전설의 주먹은 관객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어도 작품성과 2차 판권 등으로 손익분기를 넘겼다. 아무래도 최근작 고산자, 대동여지도가 흥행 및 작품성면에서 완전 참패를 겪다보니 더 이상 영화판에 미련이 없는 듯 하다. 불행하게도 그가 설립한 영화사 시네마 서비스도 2020년부로 기업회생절차에 돌입했다.[11] 2015년, 러닝타임이 140분에 가까운 상업영화는 암살대호가 유일했다.[12] 7명의 감독이 만든 옴니버스 영화[13] 강우석 본인이 인터뷰에서 증언.[14] 한국 영화 최초의 천만 영화[15] 손익분기는 450만, 게다가 영화 특성상 국내 관객들에게만 어필이 되는 영화였다.[16] 강우석 감독 본인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경상비도 못찾았다고 인터뷰했지만 인터뷰 성향상 우스개소리일 가능성도 있다. 일단 언론에 손익분기를 넘긴건 물론이고 흥행에 성공했다고 되어있고 무엇보다도 현재 강우석 영화들 중에서 극장 흥행만으로 순익분기점을 넘긴 마지막 작이다.[17] 이준익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최다 대상(영화감독 및 영화배우 한정)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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