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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 지역을 가리키던 말
[1]
로마 제국에서 프랑스 지역을 가리키던 말. 지금의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의 전체 지역과 스위스의 대부분 지역, 라인 강 서쪽의 독일과 네덜란드 남부 및 북부 이탈리아의 일부[2]가 이에 해당된다. 지금도 그리스어로는 프랑스를 갈리아라 부른다. 서기 3세기, 한때 갈리아 제국이라는 형태로 독립하기도 하였다.
로마의 갈리아 전쟁 때 마실리아 인근이 갈리아 트란살피나라는 속주였고 알프스 산맥 인근이 갈리아 키살피나라는 속주였다. 이후 속주들을 재정비하면서 200-700년 무렵 위 사진처럼 갈리아는 벨기카, 루그두넨시스, 아퀴타니아, 나르보넨시스,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알페스 포이니나이, 알페스 코티아이, 알페스 마리티마이로 나뉘었다.
2. 갈리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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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프랑스와 북부 이탈리아에 자리잡았던 민족. '갈리아'라는 지역 이름에서 이름을 따왔다. 켈트족의 한 부류로 켈트어파의 한 부류인 갈리아어를 사용했다. 골(Gaul)족이라고도 불린다.[3] 기원전 1200년 무렵 라인강 유역으로부터 남, 서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영토라는 개념이 없이 식량이 있는 곳에 정착하면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정도였고, 식량이 없어지면 식량이 있는 땅을 찾아 이동하는 원시적인 반 유목민 생활을 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 자리에 정착하여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일이 뜸해지자 각 부락은 흩어졌으나 제대로 된 모양새가 갖춘 부락이 나타난 시기는 기원전 2세기였다. 이 시절에는 문화적, 경제적으로 상당히 발전하여 그리스풍을 흉내낸 도자기나 금붙이를 생산하기도 했는데, 족장들이 그리스풍의 패션과 인테리어를 좋아했다고 한다. 남부의 로마나 그리스와 교역도 했다. 그 과정에서 도로도 건설했는데,[4] 나중에 로마가 점령하면서 제대로 포장하였다.
기원전 58년부터 고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공격하여 땅들을 점령하자, 기원전 52년에 베르킨게토릭스가 연합을 편성하여 저항하였으나 끝내 카이사르에게 패배하여 갈리아 지방은 로마의 통치를 받았다. 기원전 51년에는 최종적으로 갈리아의 전후처리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연합을 이루어 여러 부족들이 저항했지만 진압되었다. 이후로 이들은 여러 번 혼혈하며 현대의 프랑스인으로 피가 이어졌다.
아스테릭스의 영향으로 갈리아인들이 멧돼지 고기를 주식으로 했다는 인식이 있는데, 실제 멧돼지는 당대 켈트족들 사이에서 각종 상징으로 쓰였을 정도로 신성한 동물로 여겼기 때문에 식용으로 사냥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실제 갈리아 지역에서 멧돼지 뼈가 소수 발굴되긴 하지만 도살의 흔적은 없고 주로 의식용으로 쓰였을 거라고. 하지만 고대 시대의 의식은 하나가 먹기 힘든 고기를 의식에 제물로 바쳐 다같이 고기를 나누어 일체감을 느끼는 것이 중요한 목적 중 하나였으므로, 제사 의식은 멧돼지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드문 기회였을 것이다. 멧돼지는 주식이나 식용으로 사냥하기에는 힘든 동물이므로, 제사라는 행사를 위해 부족의 전사들이 힘을 합쳐 사냥했을 것이다.
『탐식의 시대』를 집필한 레이첼 로던은 해당 책에서 알프스 이북의 켈트족이 발효시킨 유제품과 보리, 밀 빵을 주식으로 삼고 돼지고기를 즐겼다고 서술하였다. 돼지는 갈리아인들에게 다산의 상징이었으며 전투에서 이긴 후 돼지를 신들에게 바친 후 그 고기로 꼭 잔치를 벌였다. 왕과 왕비가 돼지 다리를, 전차병은 돼지 머리를, 그 외의 사람들이 각자의 지위에 맞는 고기를 나누어 먹었다. 돼지 외에도 소, 말, 양 등을 제물로 바치고 먹었다고 추정한다.
프랑스의 인기 있는 담배 이름이 골루아즈(Gauloises: 골족 여인)이다.
원래 갈리아인, 정확히는 알프스 이남의 갈리아인들은 도시국가 시절의 로마인들에겐 후세의 한니발이나 고트족에 비할만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제정 로마 시대의 그리스인 작가인 플루타르코스가 쓴 영웅전에 의하면, 로마인들은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도 갈리아인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일찍이 갈리아인들에게 대패한 후 일방적인 학살과 약탈을 당한[5] 기억이 있어 다른 어떤 종족보다도 갈리아인들을 겁냈다고 한다. 그래서 병역이 면제되는 공화국 최고제사장조차도 갈리아인의 침공 시에는 징병된다는 법률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의하면 갈리아인들은 기마술에 능숙하여 세상에 당할 자가 없다고 자부했고, 그래서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나 다른 로마 장군들도 갈리아 기병의 용맹함을 인정하여 그들을 로마군의 용병으로 고용하였다.[6] 심지어 로마인들이 카르타고와 그리스를 정복하여 지중해의 패자가 된 이후에도 로마군은 갈리아에게 번번히 패배하곤 했다. 로마는 마리우스가 대규모의 군제개혁과 더불어 알프스 방면 방어선을 재구축한 후에야 갈리아에 대한 확고한 우위를 획득할 수 있었으며, 이후 카이사르의 정복을 통해서 갈리아는 로마에 동화되었지만, 이는 기존 로마의 정치체제로는 불가능한 과업이었기 때문에 결국 장기 독재를 불러왔고 공화정 로마의 몰락을 야기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갈리아인들은 끈기가 없어서 초두공세만 무섭지 시간이 지나면 기가 죽더라' 하며 이들이 로마인들보다 약해빠졌다고 묘사했지만, 이는 사실을 매우 왜곡한 것이다. 당대 갈리아인들에게 부족한 것은 끈기가 아니라 무기였을 확률이 높은데, 갈리아인들의 칼은 제련이 잘 안되어 있어서 몇번만 내려치면 금방 휘어져 쓸모가 없었다는 것은 당대의 역사가인 폴리비오스가 기록할 정도로 널리 공인된 사실이다. 물론 갈리아족의 칼이 다 질이 나쁜 건 아니고 괜찮은 유물도 출토되긴 했는데, 소수 귀족층 무덤에서 나온 걸로 전체를 일반화하긴 무리라고 보이며, 부족별로 이합집산 되어 있던 갈리아족의 사정상 대장장이 같은 고급장인을 유지하기가 힘들고 자연히 복불복이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들이 로마에 편입되어 로마의 무기로 무장을 한 결과물인 서부 유럽의 로마 군단들은 동유럽(다뉴브 전선) 군단들과 함께 로마에서도 최강급이어서, 로마 본토나 아시아, 아프리카 쪽 군단들은 도저히 이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으며, 이후 로마의 혼란기에 벌어진 내전에서는 대체로[7] 이들의 사령관들이 승자가 되곤 했다.
2.1. 갈리아족 관련인물
2.1.1. 룩셈부르크
- 인두티오마루스 (트레베리[8]족)
- 킨게토릭스 (트레베리족)
2.1.2. 벨기에
- 암비오릭스 (에부로네스족)
- 카투볼쿠스 (에부로네스족)
2.1.3. 스위스
- 남메이우스 (헬베티[9]족)
- 디비코 (헬베티족)
- 베루클로티에티우스 (헬베티족)
2.1.4. 오스트리아
- 보키오 (노리툼족)
2.1.5. 이탈리아
- 드라페스 (세노네족)
세노네스족의 사람으로 기원전 52년에 베르킨게토릭스가 갈리아의 민족주의를 부활시키고 갈리아 전역에 총봉기를 주도하자 그에 호응하였다. 알레시아에서 베르킨게토릭스가 패한 이후에도 항복하지 않고 루크테리우스와 함께 도시인 욱셀로두눔을 점령하고 군사를 편입시키고 식량을 확보한 후에 로마군이 당도하자 후퇴하여 욱셀로두눔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진지를 세우고 방어하였으나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의 공격으로 붙잡혔으며 처벌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음식을 거부하다가 사망한다. - 마갈루스 (보이족)
- 모리타스구스 (세노네족)
세노네스족의 족장으로 카바리누스의 형제이며 세노네스족의 내부에서 카바리누스를 죽일 것을 공모한 아코에 의해 카바리누스가 도망가자 세노네스족의 족장이 된다. 그러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주최한 갈리아 부족 회의에 세노네스족의 원로들이 참석하지 않게 되자 카이사르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며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에 없다. - 브렌누스 (세노네족)
- 비르도마누스 (인스부레족)
- 아코 (세노네족)
- 엘리토비우스 (세노만족)
- 카바리누스 (세노네족)
세노네스족의 족장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세노네스족의 족장이 되었지만 기원전 53년에 세노네스족의 내부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를 눈치채고 도망친다. 그러나 내부의 반란군의 추격으로 국경까지 추격을 받게되자 왕위를 빼앗기고 추방되었다. 그는 불 같은 성미를 가졌다고 하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소집한 갈리아 부족 회의에 세노네스족, 카르누테스족, 트레베리족이 참석하지 않자 이를 반란의 조짐이라 여긴 카이사르가 세노네스족을 먼저 평정하였고 부족민들에 대한 복수로 충돌을 염려한 카이사르에 의해 카르테누스족과 트리베리족과의 전쟁에 참전한다.
2.1.6. 프랑스
- 갈바 (수에시오네스족)
- 고반니티오 (아르베르니족)
아르베니족의 귀족으로 베르킨게토릭스의 숙부로 그가 갈리아인의 민족주의를 부활시키고는 갈리아 전역의 총봉기를 주도하려고 하자 다른 귀족들과 함께 그를 추방하였다. - 구트루아투스 (카르누테스족)
카르누테스족의 사람으로 기원전 52년에 베르킨게토릭스가 갈리아의 민족주의를 부활시키고 갈리아 전역에 총봉기를 주도하자 부족 내부에서 로마군에 저항할 것을 선동하여 카르누테스족도 베르킨게토릭스에게 호응하게 된다. 로마군이 카르누테스족의 영토에 당도하자 카이사르가 부족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전쟁의 주도자를 붙잡으라고 요구해서 부족민들에 의해 사로잡혔다. 카르누테스족이 로마군에게 대항하게 만든 전쟁의 주동자였기 때문에 카이사르에게 처형된다. - 두라티우스 (픽토네스족)
- 둠나쿠스 (안데스족)
안데스족의 족장으로 픽토네스족의 영토로 집결하여 레모눔을 공격하였으나 가이우스 카니니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패배하였으며 결국엔 부족 사람들에 의해 추방되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떠돌다가 갈리아에서 가장 외진 곳에 숨어들었다고 한다. - 둠노릭스 (아이두이족)
- 디비키아쿠스 (아이두이족)
갈리아족의 한 부류인 아이두이족의 족장인 둠노릭스의 형으로 로마가 오자 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브리타니아 지방까지 통치할 정도 세력이 강했던 인물이다. 기원전 58년에 카이사르에 의해 동생인 둠노릭스가 곡물 징수를 지연한다는 혐의를 받아 카이사르에게 구금되자 그에게 용서를 요청하여 둠노릭스는 무사하였고 카이사르가 헬베티족을 진압한 이후에는 갈리아 전체에는 켈트계 부족인 아이두이족와 아르베니족이 편을 갈라 대차게 치고 박기 시작하였다. - 로우킬루스, 에구스 (알로브로게스족)
- 루크테리우스 (카두르키족)
- 리스쿠스 (아이두이족)
아이두이족에서 베르고브레트라 불리는 판관으로 카이사르가 기원전 58년에 헬베티족과의 전쟁 때 아이두이족의 보급을 제대로 하지 않자 카이사르의 소집령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카이사르에게 아이두이족 내부에서 판관보다 더 세력이 강력한 자가 있음을 말하면서 디비키아쿠스의 동생인 둠노릭스가 사람들을 선동하여 아이두이족이 보급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음을 얘기한다. - 리타비쿠스 (아이두이족)
아이두이족 사람으로 기원전 53년에 판관이 된 콘빅톨리타비스의 매수와 선동으로 자신의 기병들을 이끌고 아이두이족의 사람들을 선동하여 로마군에 대항하였으나 카이사르가 신속하게 아이두이족을 공격하여 패하자 도망친다. - 발레티아쿠스 (아이두이족)
아이두이족 사람으로 기원전 54년에 아이두이족의 최고 판관을 지냈다고 하며 그의 뒤를 이어서는 2명의 판관이 선출되었다고 한다. 그의 동생이 상당한 세력을 지니고 있는 것과 동시에 최고 판관으로 지냈을 것으로 볼 때 아이두이족에서 세력이 상당한 자였음을 알 수 있다. - 베르킨게토릭스 (아르베르니족)
- 베르카시벨라우노스 (아르베르니족)
- 베르티스쿠스 (레미족)
레미족의 족장으로 기원전 52년에 알레시아 전투가 끝난 이후 기원전 51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전후 처리를 하는 것과 동시에 일시에 연합을 구축한 부족들을 복속시키고 있었는데 벨로바키족의 코레우스와 아트레바테스족의 콤미우스가 수에시오네스족을 침공하려고 한 것을 카이사르에게 알렸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과 함께 레미족을 이끌고 벨로바키족과 아트레바테스족과 싸웠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사하였다. - 벨레베수스 (비투리게스족)
- 보두오그나투스 (네르비족)
네르비족의 족장으로 벨가이 지방의 다른 종족들과 연합하여 지금의 살레 강 북쪽 기슭에서 로마군을 급습하여 손실을 급습하여 손실을 입혔으나 카이사르가 부대의 전멸을 막아내고 재정비하여 우회 전술로 네르비족의 본진을 공격당하자 패배한다. - 비리도마루스 (아이두이족)
- 세고베수스 (비투리게스족)
- 아드부킬루스 (알로브로게스족)
알로브로게스족의 족장으로 여러 해 동안 족장을 지냈다고 하나 그 외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기병대 장교였다가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카이사르를 배신한 로우킬루스와 에구스의 아버지였다고 하며 이들이 기병대 장교였던 것으로 볼 때 아드부킬루스는 친 로마파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 암비가투스 (비투리게스족)
- 에파스낙투스 (아르베르니족)
아르베니족의 사람으로 가이우스 카니니우스에 의해 도망가서 갈리아의 부족들을 전전하고 있던 루크테리우스를 붙잡아 카이사르에게 끌려오게 한 사람이다. - 에포레도릭스 (아이두이족)
- 카바릴루스 (아이두이족)
아이두이족 사람으로 기원전 52년에 일어난 베르셍게토릭스가 갈리아의 민족주의를 부활시키고 갈리아 전역에 총봉기를 주도하자 그에 호응하였으며 알레시아 전투에서 리타비쿠스를 대신해서 보병 지휘권을 맡아 참전하였으나 로마군에게 패하면서 붙잡히며 이후의 기록은 없다. - 켈틸루스 (아르베르니족)
아르베니족의 족장으로 그 유명한 베르킨게토릭스의 아버지로 전 갈리아의 지배권을 획득하여 갈리아의 왕이 되려고 하였으나 부족민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 코레우스 (벨로바키족)
- 코투스 (아이두이족)
- 코투아투스, 콘콘네토둠누스 (카르누테스족)
카르누테스족의 사람으로 세노네스족 내부에서 로마군에 저항할 것을 공모하던 주모자인 아코가 처형되고 세노네스족, 카르누테스족, 트레베리족, 에부로네스족 등을 평정하자 다시 로마에게 저항하였는데 케나붐이라는 곳을 공격을 할 때 지휘를 맡았다. - 콘빅톨리타비스 (아이두이족)
- 콤미우스 (아트레바테스족)
- 크리토그나투스 (아르베르니족)
아르베니족의 귀족으로 부족 내에서도 대단한 세력가였으며 알레시아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병사들에게 연설을 하여 사기를 복돋았다. - 타스게티우스 (카르누테스족)
카르누테스족의 족장으로 원래는 조상 대대로 카르누테스의 족장을 지낸 귀족이었으나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원정할 때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에 카이사르에 의해 기원전 57년에 카르누테스족의 족장이 된다. 그러나 기원전 53년에 로마에 반기를 든 카르누테스족의 사람들에게 살해된다.
2.2. 창작물에서
- Eluveitie: 멜로딕 데스 메탈 밴드로, 스위스로 넘어간 켈트족(헬베티)을 비롯한 켈트 역사를 주제로 삼는다. 켈트어 중에서도 사어가 된 골어(Gaulish)를 언어학자의 도움을 받아 재구성해서 가사에 사용한다.
- 문명 시리즈: 문명 3과 문명 4 켈트 문명의 고유 유닛인 "갈리아 검사", "갈리아 전사" 로 간접 출연해 오다가, 최신작인 문명 6에서 독립된 문명으로 등장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로.
- 아스테릭스: 갈리아인을 소재로 한 창작물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 전장의 발큐리아: 무대가 되는 국가. 실제 유럽 지도와 비교하면 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 쪽이지만, 어차피 가상 세계라 모든 건 뒤죽박죽이다. 자세한 건 갈리아 공국 문서 참고.
- 제로의 사역마: 갈리아 왕국
[1] 지도에서 론디니움(Londinium)은 지금의 영국 런던이고 루테티아(Lutetia)는 파리이다. 그 외에도 현재 아르겐토라툼(Argentoratum)은 스트라스부르이고, 두로코르투눔(Durocortunum)은 랭스이고, 루그두눔(Lugdunum)은 리옹이며, 부르디갈라(Burdigala)는 보르도이다. 그리고 마실리아(Massilia)와 메디올라눔(Mediolanum)은 현재 각각 마르세유와 밀라노이다. 또한 세콰나(Sequana) 강은 센강이고, 리게르(Liger) 강은 루아르 강, 로다누스(Rhodanus) 강은 론강, 레누스(Rhenus) 강은 라인강, 다누비우스(Danubius) 강은 다뉴브강, 파두스(Padus) 강은 포강이다. 지도에 이름이 나와있지는 않지만 부르디갈라(보르도)를 지나는 강은 가론 강으로 로마 시대 때에는 가룸나(Garumna) 강으로 불렸다.[2] 저 지도를 보면 '북부 이탈리아가 왜 갈리아 땅이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루비콘 강 이북의 북이탈리아도 아우구스투스 재위 시기에 이탈리아 본토로 합병되기 전까지는 갈리아 키살피나라는 이름이 붙은 속주였다. 뜻은 알프스 이쪽의 갈리아.[3] 갈리아(Gallia)와 골(Gaul)의 발음상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명칭은 기원이 다르다. 갈리아라는 명칭은 주로 로마에서 쓰는 표현으로 하얀 피부를 뜻하는 그리스어 갈라타이(Γαλάται)에서 유래한 단어라는 게 현재의 정설이고, 골이라는 명칭은 프랑크 침략자들이 갈리아인들을 이방인이라는 의미의 Walha로 싸잡아 부른 걸 갈리아인들이 프랑스어로 음차하여 받아들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방인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영국의 웨일스는 이미 유명해서 말할 것도 없고 잉글랜드의 콘월, 벨기에의 왈롱 지역, 루마니아의 왈라키아 지역 등도 전부 같은 어원에서 유래되었다.[4] 주로 나무판자를 일렬로 늘어놓는 방식이었다.[5] 기원전 390년 족장 브렌누스가 이끄는 세노네스족에게 로마市가 함락당한 사건[6] 출처: 플루타르크 영웅전 전집 1권 492~495쪽/ 현대지성사/ 이성규 번역[7] 아우렐리아누스에게 패배하여 멸망한 갈리아 제국 정도가 예외라고 할 수 있는데, 아우렐리아누스는 동유럽 전선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8] 로마인들은 후에 라인 강 좌안에 이 부족의 이름을 딴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였고 이는 지금의 독일 트리어이다.[9] 스위스를 헬베티카, 헬베티아라고도 하는데 이 부족명이 그 유래이다. 현재 스위스의 공식 국명 자체가 콘페데라치오 헬베티카(Confoederatio Helvetica) 즉 헬베티 연방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