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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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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eoul Berlin Wall Vandalism 1.jpg
2018년 베를린 장벽 훼손 사건
파일:20231216_Dxdpvk.jpg
2023년 경복궁 영추문 및 담장 훼손 사건

1. 개요2. 특징3. 사례
3.1. 고대3.2. 중세3.3. 근대3.4. 현대
3.4.1. 한국
3.4.1.1. 문화재 파괴를 부추기는 한국의 문화재보호법
3.4.2. 중국
4. 처벌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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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달리즘(Vandalism)이란 문화재, 문화적 예술품, 종교 시설, 넓게 보면 타인의 재산 등을 파괴, 훼손하려 하거나 낙서로 더럽히는 활동을 말하는 단어며, '훼손 행위(毁損行爲)'라고도 한다.

역사적으로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를 기점으로 이 행위의 척도와 정도가 명확히 구분되는데, 최근에는 스마트폰을 통해서 일어나는 반달 행위도 일어나고 있다. PC에서 일어나는 반달과는 차이가 있다.

2. 특징

사전적 정의로는 '고의 또는 무지에 의한 공공물 등의 오손'을 의미한다. 특히 범죄학 및 형사정책학에서는 '정신적 성숙이 신체적 성숙을 따르지 못하고 나타나는 부적응적 심리 상태에서 나타나는 문화 거부와 폭력적 반항 행위'를 말한다. 이유 없이 남의 기물을 손상시키거나 오토바이 폭주 따위의 행위도 반달리즘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강력범죄보다는 경미한 소년 비행 현상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며 해결책으로는 조직적인 레크리에이션을 들 수 있는데, 또래 집단과의 적응도를 사회적 적응성으로 승화함으로써 그 성향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 출간된 단편집 종말문학걸작선 2권에 보면 \'반달맨'으로 부르는 부류가 나온다. 핵전쟁 이후 지구에 남겨진 모든 문화예술을 철저히 파괴하는 자들로, 그 정체는 식량이 부족하자 어른들이 어린 애들을 잡아먹는 참화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다. 눈 앞에서 친구가 잡아먹히고 자기들도 잡아먹힐까봐 숨어다니던 시절을 보냈기에 기성세대에 대한 증오심은 팽배해 있고, 그래서 기성세대가 남긴 유산의 흔적을 철저히 말살하고 있었던 것.

반달리즘은 5세기 초 반달족의 활동에서 유래되었다.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은 서기 429∼534년에 훈족을 피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갈리아의 일부를 침입해서 국토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455년에는 로마를 침입하여 약탈하고 로마인 지주들에게서 땅을 빼앗았다. 반달족은 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 를 열성적으로 믿었으며 후네리크(477∼484년 재위) 치세 말기에는 한동안 아프리카의 가톨릭 교회를 심하게 박해하였다.

하지만 '문화유적 파괴'에 반달족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억울한 것이, 그들의 문화재 약탈은 다른 수 많은 이만족의 침공이나 전쟁 동안의 문화재 파괴에 비해선 매우 온건한 편이었다. 반달족은 로마 문화의 우수성을 인정하였고, 라틴어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당장에 가이세리크 왕의 로마 약탈도 당시 교황과 협정을 통해 저항하지 않는 사람을 죽이거나 고문하지 않고 건물에 불을 지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문화재를 때려 부수기보다는 재물을 약탈하는데 집중했다. 오히려 북아프리카에 자리를 잡은 반달 왕국은 533년 동로마 제국의 장군 벨리사리우스에게 의해져 멸망하면서 흔적도 없이 불태워지고 말았다. 그래도 로마가 털렸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에 반달족은 문화파괴자로 기억되고 말았다.

현재 사용되는 '반달리즘'이라는 단어는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 세력이 교회를 때려 부수는 모습을 반달족에 빗대면서 등장한 단어이다. 근년에는 미국이나 유럽의 대도시에서 약탈과 살인, 공공시설의 파괴, 방화 등의 도시범죄가 급증하는 세태를 이르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인류의 반달리즘의 사례는 기원전 4세기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356년 그리스 에페소스의 헤로스트라투스란 사람이 악행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생각으로 아르테미스 신전불을 질렀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그리스 최초의 순대리석 신전으로 파르테논 신전의 두 배 규모에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건축물이었다.

한국사에서 자행된 반달리즘은 삼국전쟁 당시 당군에 의해 행해진 고구려와 백제 지역에 대한 대규모 파괴가 있었고,[1] 백제의 문화재인 정림사지 오층석탑에는 당나라 장수인 소정방이 비문을 새겼다. 신라 또한 후삼국시대에 견훤에 의해 조직적인 파괴공작을 겪었다. 고려시대에는 요나라의 침공에 수도가 함락당해 장서를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불탔던 적이 있으며, 특히 몽골 제국의 대규모, 장기침략 동안에 어마어마한 파괴가 일어났다. 조선시대 초에는 세종대왕이 1426부터 1428년까지 역대 고려왕과 왕비의 어진과 기록을 불태워 버리고, 조각상과 유물을 파괴한 사건이 대표적이다.지도자가 아닌 국민들로 말미암아 자행된 파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백성들의 파괴가 대표적이며, 근대에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귀중도서 등 문화재를 약탈하고 불을 지른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리고 사례로는 탈레반바미안 석불 파괴,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크 전쟁 후 문화유산 약탈 등이다. IS의 문화재 파괴도 이에 해당된다.

부동산 등 이권(돈)이 얽혀 있어서 저지르기도 한다. 돈이 되는 문화재는 지키되 돈이 안 되는 문화재는 개발에 도움이 안 되니 때려잡자는 식. 문화재를 복원하기 어려운 까닭이기도 하고, 계획적 구식화 전략이 생긴 까닭이기도 하다.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면, 전쟁 와중에도 상대방의 문화재를 파괴하는 행위는 하지 않는 것이 전쟁에서 나름대로의 최소한의 예의이다. 상대방의 문화재를 멋대로 파괴하는건 반대로 나의 영토 내에서 상대방도 똑같이 문화재를 파괴해도 좋다고 빌미를 주는것이기 때문. 이 때문에 상부에서 공격 명령이 내려와도 일선의 장군들이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것은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아돌프 히틀러가 프랑스 주둔군 보병대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에게 파리를 파괴하라고 지시하자 콜티츠가 거부한 사례가 유명하며,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교토부만큼은 건드리지 않은 것도 이러한 이유인데 당시 육군 장관이었던 스팀슨이 신혼여행지로 다녀온 교토의 문화에 감격하여 폭격 후보에서조차 그의 명령으로 제외되었다. 한편 6.25 전쟁 당시 빨치산을 제거하기 위해 팔만대장경이 모셔져있는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거부하여 사형당할 뻔했다가 항명죄를 묻지 않고 기사회생한 김영환 공군대령도 그랬다. ISIL이 민간인 학살 다음으로 매우 많은 비난을 듣는 이유가 바로 이 반달리즘이다.

21세기부터는 여러 국가들의 평균 교육 수준이 이전에비해 많이 상승했기 때문에 문화재의 가치를 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풍조가 널리 정착된만큼 무지에 따른 반달리즘은 많이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반달리즘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건 아닌데 이제는 그것이 문화재임을 알기에 특정한 목적을 겨냥하여 일부러 저지르는 고의적인 반달리즘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물론 숭례문 방화 사건처럼 무지와 이기심으로 인한 반달리즘의 사례가 여전히 일부 등장하고는 있다.

3. 사례

3.1. 고대

3.2. 중세

3.3. 근대

3.4. 현대

3.4.1. 한국

3.4.1.1. 문화재 파괴를 부추기는 한국의 문화재보호법
문화재보호법 제92조(손상 또는 은닉 등의 죄) ① 국가지정문화재(중요무형문화재는 제외한다)를 손상, 절취 또는 은닉하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그 효용을 해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②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는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1. 제1항에 규정된 것 외의 지정문화재 또는 가지정문화재(건조물은 제외한다)를 손상, 절취 또는 은닉하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그 효용을 해한 자
2. 일반동산문화재인 것을 알고 일반동산문화재를 손상, 절취 또는 은닉하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그 효용을 해한 자
③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는 2년 이상의 유기징역이나 2천만원 이상 1억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1. 제35조제1항제1호에 따른 현상변경의 허가나 변경허가를 받지 아니하고 천연기념물을 박제 또는 표본으로 제작한 자
2. 제1항·제2항 또는 제1호를 위반한 행위를 알고 해당 문화재를 취득, 양도, 양수 또는 운반한 자
3. 제2호에 따른 행위를 알선한 자
④ 제1항과 제2항에 규정된 은닉 행위 이전에 타인에 의하여 행하여진 같은 항에 따른 손상, 절취, 은닉, 그 밖의 방법으로 그 지정문화재, 가지정문화재 또는 일반동산문화재의 효용을 해하는 행위가 처벌되지 아니한 경우에도 해당 은닉 행위자는 같은 항에 정한 형으로 처벌한다.
⑤ 제1항부터 제4항까지의 경우에 해당하는 문화재는 몰수하되, 몰수하기가 불가능하면 해당 문화재의 감정가격을 추징한다. 다만, 제4항에 따른 은닉 행위자가 선의로 해당 문화재를 취득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문화재보호법 제12조(건설공사 시의 문화재 보호) 건설공사로 인하여 문화재가 훼손, 멸실 또는 수몰(水沒)될 우려가 있거나 그 밖에 문화재의 역사문화환경 보호를 위하여 필요한 때에는 그 건설공사의 시행자는 문화재청장의 지시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 이 경우 그 조치에 필요한 경비는 그 건설공사의 시행자가 부담한다.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매장문화재법> 제7조(지표조사 절차 등) ③ 지표조사에 필요한 비용은 해당 건설공사의 시행자가 부담한다. 다만,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사업의 규모 및 성격 등을 고려하여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건설공사에 대하여 예산의 범위에서 그 비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지원할 수 있다.

위헌 소지가 있는 해당 법률에 대해 이미 2001년부터 관련된 논의가 이어진 바 있고,# 2007년에는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 또한 해당 법률은 악법이라고 표현한 바가 있다.# 그리고 해당 법률에 대한 문제 제기는 해당 법률의 제정 이후 계속 이어져 온 바 있다.#또한 여러 차례 해당 법률과 관련된 헌법소원 또한 여러차례 진행되었고, 이에 헌법재판소는 해당 법률 조문에 대해 지속적으로 합헌이라고 판결하고 있는 중이다.헌법재판소 2008헌바74헌법재판소 2009헌바244

해당 법률에 대한 개정은 제대로 추진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2024년 1월에 와서야 '매장문화재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

이 법률 조항에 따라 밭을 갈다가 자신의 땅에서 청동기 유물을 발견했던 한 농민은 이를 신고했다가 자신의 밭에서 지표 조사를 한답시고 한 달 넘게 자신의 밭에서 농사를 짓지 못하는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지만, 이에 따른 문화재 신고 보상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던 바가 있다. #

또한 해당 법률 조항 때문에, 건설현장에서 또한 공사 과정에서 문화재가 출토됨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로, 사업자와 정부 간 마찰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학계의 전문가 또한 건설현장에서 문화재가 발굴될 경우 발굴조사 현장에서는 발굴조사 비용 일체를 사업 시행자가 부담하게 하면서 법원과 헌법재판소에선 대부분 정부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

이렇게 어느 건설현장에서 문화재가 나온 경우 해당 법률 조항을 따라 사업자가 정부에 이 사실을 신고하게 되면, 정부가 문화재 발굴 조사를 시행하면서 비용까지 사업자에게 부담시키고 그 동안 공사는 진행되지 못하여 공사 일정은 밀리는 등 정부가 사업자의 재산권을 강제로 제한하게 되지만 이에 따른 정당한 보상은 지불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실제 공사현장에서는 유물이 발견되면 문화재청이나 지자체에 신고 하지 않고 유물을 훼손하거나 은폐하는 등의 불법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경우가 생기며, 실제 사례로도 여러 번 나타났다.'유물 나오면 덮는다?'…개발현장 문화재 파괴 '심각' [MBN 종합뉴스]

3.4.2. 중국

4. 처벌

문화재보호법 제 92조에 의해 3년 이하의 유기징역에 처하게 되나, 이 중 하나[7]에 해당되는 자는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문화재청이 도난공고를 낸 문화재라면 공소시효가 배제된다. 사실은 외부에 그 존재가 드러난 시점부터 새로 시작이다. 다른 예지만 탈영 군인의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대신 참모총장의 복귀명령에 따른 명령불복종으로 영구히(물론 죽기 전이라면) 처벌 가능한 것과 비슷하다.

5. 관련 문서



[1] 특히 당의 고구려에 대한 증오는 상당하여 수도를 완전히 초토화시켜 버렸고, 평양은 남북국시대 내내 변경지역으로만 남았다. 그나마 고려시대에 가선 다시 복구가 진행되어 대도시로 다시 기능하게 되었다. 백제의 경우는 당군에 의한 반달리즘으로 생긴 도끼자국이 왕가의 무덤에 남아 있다.[2] 태형 10대를 맞느니 차라리 징역 10년을 살고 말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물론 미국과의 관계가 틀어지기 싫어서 특별히 몽둥이가 아닌 회초리로 엉덩이를 4대 때리고 추방하는 것으로 끝냈다. 물론 아프긴 하지만 몽둥이보다는 약한 편이다.[3] 아브젝트(abject)는 더럽다고 여겨지는 것, 배제되고 추방되는 대상, 기성 체제나 관념에서 배제하려 하는 존재, 나아가 이런 이질적이고 위협적으로 여겨지는 어떤 것들을 거부하고 추방하려는 심리적 현상을 지칭하는 개념이다.[4] 당시 진압군중에 불가리아군도 있었기 때문[5] 코끼리 대변에는 섬유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황토집처럼 움막을 지을때 코끼리 똥을 사용하기도 하고, 연료로 사용하기도 한다.[6] 불행히인지 다행히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때려부수는식이 아닌 하나씩 자재들을 빼는 해체식 철거였고, 이후 다른곳에 옮겨져 복원되었다. 단, 일부 자재들이 파손된것도 있어서 새걸로 교체했기 때문에 완벽 복원은 아니다.[7] 제 1항에 규정된 것 외의 지정문화재 또는 가지정문화재(건조물은 제외)를 손상, 절취 또는 은닉하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그 효용을 해한 자, 일반동산문화재인 것을 알고 일반동산문화재를 손상, 절취 또는 은닉하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그 효용을 해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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