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width=400px><table align=right><tablebgcolor=#FFFFFF><tablebordercolor=#CC0000><bgcolor=#CC0000><width=100>
||<-2><:><bgcolor=#CC0000>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
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
| ||
<colbgcolor=#CCC><colcolor=#000>명칭 | <colcolor=#000> 한국어 | <colcolor=#000> 황푸군관학교 |
간체 | 黄埔军校旧址 | |
번체 | 黄埔軍校舊址 | |
영어 | Whampoa Military Academy | |
분류 | 혁명유지 및 혁명건축물 (革命遗址及革命建筑物) | |
시대 | 중화민국 | |
일련번호 | 3-0021-5-021 | |
주소 | 광둥성 광저우시 황푸구 쥔쉐루170호 广东省广州市黄埔区军校路170号 | |
등재 | 1988년 | |
차수 | 제3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 |
국가 지정 명승지 등급 | AAA급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Whampoa-gate2.jpg |
황푸 군관학교 교가. 가오슝으로 옮긴 지금도 쓰이는 중이다. |
[clearfix]
1. 개요
1924년 중화민국 중국국민당 광저우 정부가 광저우 황푸에 세웠던 사관학교다. 정식명칭은 "국민당 육군군관학교".이 학교는 이후 대만 군관학교로 개편되지만, 국민정부가 난징으로 옮겨간 1927년 이전까지 황푸에 있었고 우한에 분교가 있었는데, 분교 재학생들도 황포군관 출신으로 간주한다. 1930년 중앙군관학교로 이름을 개칭할 때까지 7기까지를 "황포군관학교"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1] 이 학교는 황푸의 (영어식) 광동어 표기를 따서 영어권에서는 Whampoa Military Academy라고 표기되기도 한다.
장제스의 북벌의 성공에 절대적으로 공헌했으며[2], 여기에서 배출된 지휘관들은 후에 국공 양당의 핵심 지휘관이 된다. 장제스 교장 재임시절의 황포군교 출신은 국부군에서 "황포계"라고 불리며 장제스 직계로 간주되었다. 대략 국부천대 이후 1960년대까지 이들이 중화민국군(육군)의 수뇌를 이루었다.[3]
공산당의 초기 무장봉기에도 상당한 활약이 있었다. 저우언라이가 정치주임 재직시에 포섭하여 공산당에 가입시킨 황포군교 생도들이 상당수 있었다. 초창기 공산당의 무력은 이들이 다수였으나 난창 폭동-광저우 폭동-초공작전-대장정-중일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전사했다.[4] 특히 1927년의 공산당의 모험주의적인 봉기(난창, 광저우 폭동)는 황포 출신이 주력이었는데, 이때 압도적인 국민당군의 병력에 맞서다가 대부분 전사했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을 때 인민해방군 고위직에서 황포출신들이 다수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5년 계급이 도입되었을 때 원수 10명중 2명, 대장 10명중 3명을 배출했다. 상장도 많이 배출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6.25 전쟁에서 맹활약했던 송시륜.
2. 역사
2.1. 기원
기원은 국공합작으로부터 비롯되었다.신해혁명의 주역 쑨원은 자체군사력이 없었고, 군사적 재능도 없었기 때문에 군벌들에게 군사력을 빌려야 하는 처지였고, 군벌들은 쑨원의 명망을 이용해 세력을 불리다가 쑨원의 뒤통수를 때리기 일수였다. 쑨원은 이런 배신에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계속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이런 쑨원에게 손을 내민 것은 소련이었다. 소련은 1917년 혁명 후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봉쇄되어 있었고, 이를 뚫기 위해 중국과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리하여 쑨원(국민당)의 무력 집권을 돕는 대신 국민당은 집권 이후 소련과 동맹을 맺기로 약속했다.
소련은 이 약속대로 군사 고문들을 파견했는데 이들은 가장 시급한 문제로 국민당의 자체적 군사력을 확보하는 것을 지적했다. 소련 고문들은 국민당과 연합한 양시민, 유전환 등의 군벌들을 언제 배신할 지 모르는 믿을 수 없는 자들이며 그들의 자질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데 이는 매우 옳은 판단이었다. 이들 군벌군을 제외한다면 국민당의 군사력은 쑨원의 호위병력 200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바로 중화민국 군관학교의 전신인 황포군관학교였다.
2.2. 개교
1924년 6월 16일 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라는 정식명칭으로 개학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는 2년 전 예쥐와 천중밍이 쑨원을 습격했던 날짜였다. 쑨원이 개교 당시에 연설문을 낭독했는데 나중에 중화민국 국가의 가사가 되었다고 한다. 초대 교장은 장제스. 랴오중카이, 다이지타오, 저우언라이가 정치부 주임, 당대표로 일했고 허잉친이 교관으로 일했다.소련의 군사학교를 모방해서 설립되었기 때문에 생도들의 사상교육을 담당하는 정치주임이라는 자리가 있었다. 초대주임은 쑨원의 삼민주의의 체계화를 담당한 다이지타오였는데, 이후 국민당으로 돌아갔다. 저우언라이는 부주임으로 부임했다가 다이지타오가 떠나자 다시 주임으로 승진하였다. 장제스와 저우언라이 둘은 국공결렬 이후 서로 적이 되지만, 그래도 저우언라이는 이 인연으로 이후 다시 장제스와 만났을 때는 "장(제스) 교장"이라고 불렀고, 장제스는 교장이라는 명칭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소련은 학교 운영 자금과 소총 8천자루, 탄환 400만발을 보내주었고 파벨 파블로프를 군사 고문으로 보내주었으나 그는 1924년에 사고로 익사했고 그를 대신하여 바실리 블류헤르 장군이 새로 부임했다. 사관 후보생 교육은 장제스가 청나라 군관학교와 일본 사관학교에서 받았던 군사교육, 일본의 군사교범, 중국 전통전략, 장제스가 본 붉은 군대의 전법을 참고했으며 기본 교과과정도 붉은 군대의 것을 상당 수준 반영하였다.
또한 교육에 사용되는 모든 언어는 학교가 있는 광저우에서 쓰이는 광동어가 아니라 표준 중국어였다. 이는 이 학교의 설립 취지가 중국 통일에 기여할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었다.
2.3. 교육과정
황푸군관학교는 군사교육 뿐만 아니라 사상교육에도 힘쓴 고도로 정치화된 학교였다. 장제스는 군관 후보생들을 위해 훌륭한 처우를 마련하는 동시에 군관 후보생들의 기강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고 연좌제와 명령 없는 후퇴를 사형으로 다스리도록 하는 규칙을 확립했다. 장제스는 군관 후보생들에게 혁명에 타협이 없음을 설파했으며 동시에 전선에서 유용할 각종 훈련에도 매진했다. 그리고 이러한 엄격한 규칙을 자기 자신에게도 칼같이 적용했다.하지만 황푸군관학교에서 양성하는 군사들은 소규모 부대에 어울리는 지휘관들이었지 군사 행정, 병참에 어울리는 인재들이 극히 적었다. 만약 대규모 부대를 운용해야 하는 시점이 온다면 지식의 부족함으로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장제스와 러시아 교관들의 충돌도 시작되었다.
당초 러시아 교관들은 18개월 과정을 주장했지만, 단기간에 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싶었던 장제스는 6개월 속성 훈련을 주장했다. 장제스는 이 분쟁에서 상하이나 저장성으로 훌쩍 떠나는 시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켰다. 그리고 황푸군관학교의 정치위원인 랴오중카이로부터 황푸군관학교의 경비를 자유롭게 쓸 권리까지 얻었다. 1924년 4월 21일에 광저우로 돌아온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 교장 겸 광동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기 입학생은 500명이었으나 중간에 편입등이 많아서 최종적으로는 645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1기는 6개월 과정으로 전원 보병과였으나 이후에는 포병과 기병, 공병 등의 여러 병종이 추가되었다. 2기부터는 교육기간이 1년으로 늘어났고, 3기부터는 13개월 등으로 점점 늘어나서 최종적으로 황포에서의 마지막인 7기(1929년 1월~ 1930년 9월)가 되면 20개월의 교육기간이 되었다. 졸업생수는 1기부터 7기까지 각각 645, 499, 1233, 2654, 2418, 3970, 1518명이다.(우한 분교 포함)
2.4. 생도
전국의 국민당 당원들은 18세에서 25세 사이의 중학교 내지 고급소학교 졸업생을 후보로 추천하기 위해. 지원자들은 나라에 봉사하고자 하는 이유를 쓴 글을 제출해야 했고 최소 3년간 복무해야 한다는 조건에 응해야 했다. 총 645명의 1기 생도가 모집되었고 1926년에는 생도의 수가 3천 명에 달했다. 하지만 황푸군관학교의 정치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황푸군관학교는 무산계급의 훈련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도의 75%가 지주와 중농, 관료 집안의 자제였다.상하이의 지원자들은 천치메이의 조카 천궈푸를 비롯하여 우익 조직이나 청방의 조직원들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황푸군관학교 내부에는 소련 고문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쑨원주의연구회를 비롯한 강력한 반공 그룹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황푸군관학교의 생도들은 교장 장제스에게 충성하면서 장제스의 파벌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한편 좌익 성향의 학생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이들은 정치주임 저우언라이를 중심으로 뭉쳤다. 저우언라이는 총명한 학생들을 포섭해 비밀리에 공산당에 가입시켰고, 이들도 황포군교 내에서 무시못할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국부군의 공식 지휘계통보다는 공산당의 명령을 더 따랐기 때문에 공산당을 경계하던 장제스는 이런 상황을 크게 우려했다.
2.5. 출신들의 활약
1924년 광저우 상단 사건으로 첫 실전 데뷔를 했으며 1925년 국민당의 1차 동정, 국민당의 2차 동정으로 군벌 천중밍을 격퇴했고 1926년 중산함 사건 이후 친공세력이 대거 숙청되면서 확고한 장제스의 직계 세력이 되었다. 이후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에 주력인 1군을 형성하여 나섰다.국민당 정부가 광저우에서 우한에 천도하면서 우한에도 분교가 있었다.
1차 국공합작을 계기로 세워진 학교였다 보니, 이후 국공내전과 중일전쟁에서 싸운 중국국민당, 중국공산당 양쪽의 주요 군사 지휘관들은 이곳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국공양당에 퍼쳤던 이곳 출신 지휘관들은 황포출신이라는 것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 특히 국민당은 총수인 장제스가 교장인지라 황포 출신들은 장제스를 교장이라고 부르면서 친분을 과시하였다. 국공내전을 다룬 중국의 선전영화들을 보면, 양군 지휘관들이 서로 안면이 있어서 적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부하들에게 당부할 때, "황포에서도 그놈은 참 특출했다"고 운운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2.6. 조선인 생도
윤봉길 훙커우 공원 의거로 백범 김구와 약산 김원봉의 추천으로 황포군관학교 입교를 했으며 한국독립진영으로서 최초로 근대식 군사교육을 받게 된 계기가 된다.
『황포군교동학록(黃埔軍校同學錄)』에서 확인되는 한인 입교생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수 | 년도 | 명단 |
1기 | 1924 | 김철남[5] |
3기 | 1925. 7∼1926. 1 | 이빈(李彬)[6] · 이일태(李逸泰)[7] · 차정신(車廷信)[8] · 장성철(張聖哲) [9] · 유철선(劉鐵仙)[10] 이상 5명 |
4기 | 1926. 3∼1926. 10 | 강평국(姜平國)[11] · 유원욱(柳元郁)[12] · 박효삼(朴孝三)[13] · 박건웅(朴建雄)[14] · 최림(崔林, 김원봉金元鳳) [15] · 강인수(楊儉, 姜人壽) [16] · 전의창(田義昌)[17]· 이우각(李愚慤)[18] · 권준(權晙)[19] · 이집중(李集中) [20] · 왕자량(王子良)[21] · 윤의진(尹義進)[22] · 최영택(崔泳澤)[23] · 김종(金鐘) [24] · 이종원(李鍾元)[25] · 노일룡(盧一龍)[26] · 이기환(李箕煥)[27] · 오세진(吳世振) [28] · 김홍묵(金洪黙)[29] · 백홍(白紅)[30] · 노세방(勞世芳)[31] · 박익제(朴益濟)[32] · 문선재(文善在)[33] · 노건(盧建)[34] · 이동화(李東華)[35] · 강연권(姜淵權)[36]· 최혁우(崔赫宇)[37]· 이문필(李文筆)[38] |
5기[39] | 1926. 11∼1927. 8 | 신악(申岳)[40] · 안유재(安維才)[41] · 장익(張翼)[42] · 김호원(金浩元)[43] · 장흥(張興)[44] 이상 5명 |
6기[45] | 1928. 4∼1929. 5 | 김정문(金貞文)[46] · 김명산(金明山)[47] · 김은제(金恩濟)[48] · 이춘암(李春岩)[49] · 최문용(崔文鏞) [50] · 오상선(吳尙善)[51] · 노식(魯植)[52] · 신석우(申碩雨)[53] · 최정무(崔鼎武)[54]· 김근제(金槿濟)[55] · 안태(安台)[56] 이상 11명(생존 9명) |
7기 | 이석(李石) | |
8기 | 이근호(李根浩) · 나월환(羅月煥)[57] | |
10기[58] | 왕중량 나태섭(王仲良, 羅泰燮)[59] · 고일명(高一鳴, 高時福)[60] · 왕형(王衡, 安椿生)[61] · 왕신호(王信虎) · 조동윤(趙東潤) · 노태준(盧泰俊, 李無雄)[62] · 김동수(金東洙)[63] · 한대원(韓大源) · 김고두(金高斗) · 왕자인(王子仁)[64] · 이의흥(李義興)[65] · 김동일(金東一) · 진동명(陳東明) · 신계서(申繼瑞) · 진국동(陳國東, 金裕哲)[66] | |
11기[67] | 장병훈(張炳勳) · 조열광(趙烈光) [68] · 이지강(李志剛, 李相勳) [69] · 진낙삼(陳樂三) · 조황(曹晃, 千暻伊) · 최영빈(崔英賓) · 유장환(劉章煥) · 왕수의(王守義) · 유민(劉敏) · 최양성(崔陽成) · 김병화(金炳華)[70] · 이철중(李鐵重) · 이운산(李雲山, 張致文 · 李雲煥)[71] · 관건 김병일(關鍵, 黃載衍)[72] · 엽홍덕(葉鴻德) · 강지산(康志山, 蔣載福) · 이청산(李靑山, 金貞彩) · 오주국(吳柱國, 白贊基) · 이국화(李國華, 韓道源)[73] · 이철부(李鐵夫, 金世雄) · 김해석(金海石, 朴珍守 · 朴景一) · 서홍(徐洪) · 구양군 박기성(歐陽軍, 朴基成)[74] · 이현근(李炫瑾) [75] | |
12기[76] | 노복선(盧福善) [77] · 김용무(金用楙) [78] · 진경성 신송식 (陳敬誠, 申松植) [79] · 김태삼(金泰三) · 김철(金鐵) | |
15기[80] | 유해준(兪海濬) [81] | |
16기[82] | 이규학(李奎鶴) [83] · 김응삼 한도명(金應三, 韓道明)[84] | |
18기[85] | 1940~1943.1 | 송면수(宋冕秀) [86] · 왕영수, 민영수(王永秀, 閔泳秀) |
19기[87] | 이윤장(李允章)[88] | |
20기[89] | 김중진(金重鎭) · 강홍모(姜弘模) [90] · 이건국(李建國) [91] · 장철부(張哲夫)[92] | |
21기 | 조동린(趙東麟) [93] | |
22기 | 김영훈(金英勳) · 박위택(朴胃澤) · 김현규(金現奎) · 박천마(朴天馬) · 이시엽(李時燁) · 김중달(金重達) · 김명규(金明奎) · 안창도(安昌道) · 오용필(吳用弼) · 정기엽(鄭基燁) · 장해덕(張海德) · 박윤호(朴允鎬) · 권필현(權必鉉) · 장정근(張定根) · 김정인(金正仁) · 안수성(安秀成) · 김시구(金是九) · 김치삼(金致三) · 이성만(李成滿) · 박성남(朴成男) · 허지수(許志秀) · 서삼철(徐三哲) · 이학서(李鶴瑞) · 김병철(金炳喆) · 김광진(金光進) · 문시욱(文時旭) · 이원곤(李元坤) · 김로(金露) · 김은석(金銀錫) · 강일영(康一永) · 이학률(李學律) · 조동희(趙東熙) · 백현일(白賢一) · 이시봉(李時奉) · 김대위(金大衛) · 김병선(金柄善) · 문창덕(文昌德) · 박재준(朴在俊) · 나태규(羅泰奎) · 한창섭(韓昌燮) · 최용산(崔龍山) · 김용호(金龍浩) · 문창흥(文昌興) · 김은령(金恩嶺) · 김백운(金白雲) · 김일건(金一鍵) · 배호원(裵豪元) · 오귀성(吳貴星) · 문인준(文仁俊) · 이원경(李元敬) · 양치호(楊致昊) |
1945년 일본이 투항 후, 1949년까지 4년간 국공내전을 치루면서 청두군관학교는 육군군관학교로 개명하고 1949년 12월, 중국공산당이 청두를 점령하여 육군군관학교는 대륙에서 역사를 마치고 대만으로 이동한다.
우한분교
기수 | 년도 | 명단 |
5기 | 1927년 | 박시창(朴始昌)[94] · 진공목(陳公木) · 진갑수(陳甲秀) · 안동민(安東民) · 안자산(安自山) · 사검인(史劍仁) · 왕구(汪炬) · 관추(關秋) · 조국동(趙國棟) · 안동만(安東晩) · 송욱동(宋旭東)[95] · 김준(金俊) · 유광세(劉光世) · 김치정(金致廷)[96] · 이종(李鍾) 이상 정치과 유원도(柳源道) · 박태섭(朴泰燮) · 진용학(陳龍鶴) · 백규(白珪) · 이건(李建) · 최승연(崔承淵)[97] · 김희철(金熙喆) · 박우균(朴禹均)[98] · 이춘식(李春植) · 이벽파(李碧波, 이상 포병과) |
조선인의 황포군관학교 출신들 일부분은 다시 독립군으로 활동하거나 중국 국민혁명군 또는 중국공산당 관련해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 이후에도 계속 되었으며 일부는 남조선 경비사관학교를 통해 국군으로 또 다른 북한군에 기여했다.
조선의용대 출신이라고 해서 반드시 북한군으로 갔던 것은 아니고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된 인원들은 대한민국 국군 군인으로서 복무를 충실히 했었다.
2.7. 조선인 교관
이름 | 출신 | 약력 | 최후 |
김훈 | 평양 | 신흥무관학교,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교관, 교성대 대장, 윈난강무당 제 16기, 황푸군관 제 3~5기 기술주임 교관, 예팅독립단 3연대장, 중국공산당만주성위원회 군사위원/서기, 홍색간부단 참모장 | 옌시산 군대와 교전하는 후 전투장 수습하던 중 전사 |
이용 | 함경남도 북청 | 이준 열사의 장남, 러시아 한인사회당 군사부 교관, 대한국민의회 군사부 총사령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동로군 사령관, 러시아 이만 고려의용군 결성, 황푸군관학교 군사고문 | 1946년 6월 8일, 이승만 남한 단독정부 설립 반대성명 발표하고 1948년 남북연석회의 자진 월북함. 8월 종파사건 숙청됨. |
양달부 | 연해주 | 모스크바 홍군대학 포병 전공, 황푸군관학교 군사고문단, 황푸 4기 포병교관, 상터우 동로군 총사령부 포병고문, 동강공산당학교 설립 | 국민혁명군에서 추방됨. |
강섭무 | 황푸군관 창립시 소련의 정치고문 미하일 보로딘, 군사고문 가룬과 광저우에 와서 소련 고문 통역 겸 포병훈련교관. | ||
김병현 | 모스크바 홍군군관학교 졸업 후, 소련군사고문들과 황푸군관학교 도착, 광저우 폭동 실패, 하이루펑 공산당 학교 교관. | ||
김준섭 | 함경북도 명천군 | 모스크바군관학교 기관총과, 국민혁명군 제 6군 55단 기관총연대 교관, 광둥혁명군 복무, 북벌전쟁 포병 선봉대 | 러화(樂化)역 전투에서 전사 |
손두환 | 황해도 은율군 | 일본 메이지대학,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밀항, 임시의정원 황해도 의원, 임시정부 군법국장, 박은식 내각 경무국장, 황푸군관학교 장제스의 부관, 소련 유학, 한인애국단 활동, 중앙육군군관학교 일본어 교관, 한국독립당,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위원회, 근로인민당 중앙감찰위원장, 남북연석회의 참석, 북한최고인민회의 제 1기 대의원 선임 | 8월 종파사건으로 연루되어 숙청 |
오성륜 | 함경북도 온성 | 봉오동 대한도독부, 다나카 기이치 암살미수, 모스크바 공산주의 노동대학 수학, 황푸군관 러시아어 교수, 노농혁명군 제 4단 참모, 중국공산당만주성위원회 소수민족위원회 실무위원, 홍군유격대 조직, 조국광복회 발족, 동북항일연군 제 1군 2사단 정치부 주임, 만주국 치안부 고문 | 내몽골 자치구에서 지병으로 병사 |
강파 | 평안북도 정주 | 상하이 남화학원 수학, 황푸군관학교 교관 | 북벌전쟁 난창 딩자교에서 전사 |
이검운[99] | 함경남도 함흥 | 의열단 윈난강무당 수학, 허난 펑위샹 국민군 제 2군 교도단 교관, 제2차 직봉전쟁 참전, 황푸군관학교 포병과 교수, 주장(九江)에서 장제스 구출, 공산주의자 혐의로 체포됨,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 교관, 하얼빈에서 재중한인청년동맹 조직 | |
오명 | 미상 | 황푸군관학교 제 5기 훈련부 조교, 한인청년동맹회 감찰위원, 제 19로군 상하이 전투 참전 | |
최용건 | 평안북도 용천군 | 푸젠성 국적 취득, 윈난강무당 17기 보병과 입학, 황푸군관학교 제 5기 구대장 교관으로 취직, 황푸군관학교 특무영 제 2영 영장, 흑룡강 동북구 라오허현 한인소학교 설립, 라오허민중반일유격대 대장,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4연대 참모장, 동북항일연군 제 7군 당서기 겸 군대장, 소련극동방면군 제 88독립보병단 입단, 북한 보안국장, 보위상, 북한 부주석 | 평양에서 병사 |
안응근 | 평안남도 신천 | 안중근의 사촌동생, 임시정부 외교위원, 윈난강무당 17기, 만주 정의부 군사위원, 황푸군관 5기 교관, 한인애국단 조사위원, 김구 경호원, 텐진 영국조계지에서 일본군 군사활동 정보수집,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1948년 남북연석회의 전에 김구를 대신하여 파견 | 북한에서 숙환 |
공주선 | 미상 | 한국노병회 제 4회 결정으로 북경학병단에서 유학, 윈난강무학당 포병과 졸업, 황푸군관학교 제 6기 교관, 상하이 전투 참전 | 1933년 옥관빈 피살사건 혐의자로 평북경찰서로 강제압송 |
채원개 | 평안남도 영원군 | 대한통의부 독립군 대장, 허난성 뤄양강무학교, 직봉전쟁, 만주참의부 군사부부장, 황푸군관학교 독립학생대 대장, 유월한국혁명청년회 집행위원, 한국독립당, 한국광복군 참모, 통위부 근무 | 노환으로 사망 |
운암 김성숙 | 평안북도 철산군 | 불교유신회 활동, 중국 민국대학교 경제과 입학, 광둥 중산대학 법학과 정치학과 입학, 국민혁명군 제2연대 5연대장, 중국공산당 탈당, 조선공산주의자동맹 조직, 조선의용대지도위원 및 정치조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차장 선임, 임시정부 국무위원 | 미군정비판 설화사건으로 체포 구금, 근로인민당 조직, 박정호 간첩사건 누명으로 구금, 5.16 군사정변으로 10개월 구금 집행유예로 석방, 숙환으로 사망. |
김산 | 평안북도 용천 | 평양숭실중학 자퇴, 베이징 협화의과대학 수학, 중국공산청년동맹 가입, 중산대학 경제학과, 하이루펑 소비에트인민위원회 심판위원, 베이싱피위원회 중국공산당 조직부장, 조선민족해방동맹 결성, 옌안항일군정대학 교수 | 일본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처형[100] |
박영 | 함경북도 경흥군 | 대한군무도독부 참모장, 대한북로독군부 군무부장,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참전, 흑룡강주 고려의용군 군사위원, 중국으로 망명 | 국민당 리푸린(李福林) 전지에서 학살당함. |
방우용 | 경상남도 언양 | 경성의학전문학교 1기 졸업, 의민단[101] 조직, 동도독군부 창설,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참전[102], 난징 황푸군관학교 7기 교본부 군의교관, 조선의용대 제 3지대, 백구은 국제평화병원 내과과장, 화북조선독립동맹 연안지부 집행위원, 북한 임시중앙위원, 조선신민당 중앙위원, 조선노동당 검열위원 | 8월 종파사건에 연루되어 숙청 |
김규흥 | 충청북도 옥천 | 대한자강회, 고종의 임명으로 중국망명, 중국동맹회, 광동군 정부 도독 군사고문, 황푸군관학교 군부대 심장(審長) 한국독립당 광둥지부 | 밀정 가능성 있음. 톈진시에서 병사 |
2.8. 난징으로 이전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로 장제스가 사실상 집권하고 기존 우한 국민당 정부를 무시하고 난징에 따로 정부를 세우면서 광저우에서 난징으로 옮겨온다. 이때 우한의 분교도 다 난징 본교로 흡수되었다.4.12 상하이 쿠데타 직후인 1927년 4월 15일 장제스는 공산당 성향의 학생들을 모두 퇴교시켜 수용소로 보냈다.
소련은 이런 장제스의 방침에 발끈하여 황포군관학교의 교관들을 모두 철수시켰는데, 그나마 제대로 군사학을 전공했던 소련인 교관들이 모두 사라짐에 따라서 남경으로 옮겨온 군관학교의 교육의 질은 황포보다 더 떨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일본 육사에서 공부한 탕언보가 부랴부랴 일본 사관학교 커리큘럼을 참고하여 군관학교의 교육과정을 만들었고, 이 과정에 의해 중일전쟁 이전 10년간을 다수의 장교를 배출한다.
1930년 중앙군관학교라고 이름을 개칭한다. 이후의 역사는 대만 군관학교에서 참고.
3. 동문
3.1. 중화민국 국군(국민당군)
국공내전 이후 포로가 되거나 투항하여 대륙에 남은 자는 ★- 계영청 (일급상장, 1기)[103] 제3대 참모총장,
- 팽맹즙 (일급상장, 5기) 제4대 참모총장
- 왕숙명 (일급상장, 1기)
- 두율명 (중장, 1기) ★
- 황걸 (일급상장, 1기)
- 다이리 (중장, 6기 중퇴)
- 마오런펑 (상장, 4기)
- 정동국 (중장, 1기) ★
- 송희렴 (중장, 1기) ★
- 장영보 (중장, 4기) 1947년 국공내전 당시 전사
- 후쭝난 (일급상장, 1기)
3.2. 중국인민해방군
초기 홍군 지휘관중 상당수가 황포군교 출신인데다가 2차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 소속 황포 동문들중 다수가 포로/투항했기 때문에 아예 동문회가 대륙에 생길 정도였다.- 쉬샹첸 (원수, 1기)
- 린뱌오 (원수, 4기)
- 쑹스룬 (상장, 5기)
- 천겅 (대장, 1기)
- 쉬광다 (대장, 5기)
- 뤄루이징 (대장, 우한분교)
- 쭤취안 (1기) 중일전쟁중 팔로군 소속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
- 류즈단 (4기) 공산당 지도부가 장정후 피신해 온 옌안해방구의 건설자. 옌시산군과 싸우다가 전사.
3.3. 한반도 인물
- 김은제 - 국민혁명군 공군 장교
- 권준 - 의열단, 조선의용대 비서장, 한국광복군 제 1지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차장
- 이집중 - 의열단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 제 1지대 총무조장
- 김종 - 조선의용대 편입 한국광복군 제 1지대 제 1구대장, 김승곤의 숙부
- 이소민 - 조선의용대 편입 한국광복군 제 1지대 제 2구대장[104]
- 신악 - 조선의용대에서 편입된 한국광복군 제 1지대 부지대장
- 장흥 - 의열단, 김구계, 대한민국 육군 초대 헌병사령관
- 나월환 - 한국광복군 제 5지대장
- 나태섭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군사학 편찬위원회
- 안춘생 - 한국광복군 제 2지대 제 1구대장
- 노태준 - 한국광복군 제 2지대 제 2구대장
- 노복선 - 한국광복군 제 2지대 제 3구대장
- 김동수 - 한국광복군 제 5지대 부지대장겸 제 1구대장
- 박기성 - 한국광복군 제 5지대 제 2구대장
- 이운한 - 남목청 사건에서 백범 김구 피격범, 탈옥 후 행방불명, [105]
- 신송식 -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 제 6징모분처(=제 3지대)에서 복무
- 유해준 - 한국광복군 제 2징모분처
- 이지일 - 한국광복군 제 3징모분처[106]
- 한도명 - 한국광복군 제 3징모분처, 진화에서 전사
- 최문용 - 한국광복군 제 9전구 공작대
- 송면수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부 통운과장
- 민영수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제 2지대
- 강홍모
- 이건국
- 박시창 - 한국광복군 제1지대, 총사령부 고급참모에 선임되었다. 민족혁명당
- 장철부 - 기병대장
- 박효삼
- 김원봉
- 강인수
- 차일혁
황푸 군관학교 교관 출신
- 오성륜 - 밀정
- 최용건 - 중국공산당 입당 광저우 폭동에 참가, 1928년 만주로 피신, 동북항일연군,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채원개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처장,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제 1지대장(1944)
- 김성숙
- 김산
- 김규흥 - 밀정
3.4. 베트남 인물
본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베트민과 베트남 민주 공화국 인사들 중에도 황포군관학교 출신들이 다수 있다.- 팜반동 -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의 수상이었던 인물이다.
- 브엉 투아 부 -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투입된 308여단 단장이다.
- 풍 찌 끼엔 1941년 호치민, 보응우옌잡, 팜반동과 더불어 베트민을 창설한 인사다. 1926년에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으며, 1927년 광주 봉기에 참가했다.
- 응우옌 썬 베트민 출신이면서, 중국인민해방군 출신 군인으로 베트민에서 소장 계급까지 오른 인물이다. 1920년대 황포군관학교 시절 사용하던 이름은 이영사고, 이후 중국에서 쓰던 이름은 홍수.
- 레 홍 퐁 베트남 공산당 초대 총비서다. 1938년 프랑스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1942년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베트남 공산당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기에, 1950년 베트민이 프랑스군을 상대로 총 반격을 했을 때, 작전 이름을 레 홍 퐁 작전이라 했었다.
4. 매체에서
- 제2차 세계 대전을 다룬 대전략 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선 중국의 장군 지휘력을 향상시키는 중점으로 등장한다.
- 황포군혼
[1] 일부 대만자료를 보면 난징에 옮겨온 6기나 7기 이후에도 황포X기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황포가 미 육사의 또다른 명칭인 웨스트포인트처럼 중화민국 육군군관학교의 별칭이 된 것.[2] 중국의 다른 군벌들은 정규군이라고는 하지만 체계적으로 군사학 등을 교육한 장교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일본 육사 등에 유학해서 신식 교육을 받은 극소수 장교들은 소수의 정예부대에만 배치되었다. 군벌 지휘관들 상당수는 최대 군벌 세력이던 장쭤린이 마적 두목 출신이었듯 질 높은 인재는 아니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일본 육사, 일본해군병학교(사관학교에 해당)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유일한 체계적인 장교 양성기관이었다. 중국 이외에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한국, 북한의 초창기 인재풀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3] 중화민국군(대만군) 국방참모총장은 육해공 돌아가면서 하는데 고괴원(1967-1970) 참모총장(4기, 일급상장)을 마지막으로 황포계는 역사에서 퇴장했다. 이후 참모총장들은 모두 난징이나 대만 시절 재학생들.[4] 다만 2차 국공내전(1946-49) 시절에는 공산당측 황포군교 출신들은 대부분 여단장급 이상으로 승진해 있었기 때문에 유력 인사들 중에 전사자는 거의 없다.[5] 본명 김병두, 황해도 신천 출신, 푸젠성 푸저우로 망명, 1기 졸업생 교도단 교관, 북벌전쟁 참전, 중앙항공위원회 방공감독부 직원/과장, 중앙육군군관학교 8기 일본어 교관, 임시정부 황해도 대표의원, 교통부 차장, 한국공군설계위원, 베이징인민예술극원 입사, 1952년 베이징에서 폐암으로 사망[6]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제 의주 소년선전원, 졸업 후 황푸군관 4기 정치과 대대 구대장 복무, 1927년 광저우 코뮌 기간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7] 3.1운동 후 중국망명, 금문상사 점원, 병인의용대 활동지원, 광둥항공학교 2기 입교, 소련유학, 상하이 영국조계지에서 공산주의 선전하다가 체포 압송, 한독당 난징지부, 중국군 3천명 임솔하는 참장으로 승진[8] 임시정부 광둥비행학교 파견교육, 광동대사두비행학교 황포중앙군사정치학교(黃埔中央軍事政治學校)의 조선인 입학생 모집에 조력, 소련유학 후 차정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음.[9] 레닌그라드 항공학교 훈련, 항주항공학교 교관, 한국혁명당,1943년에는 광복군 총사령부와 협조하여 항공기로 전단을 살포하여 대일선전활동, 한중문화협회 쿤밍분회 설립, 1963년 중국에서 사망[10] 상하이 임시정부로 망명, 북만주 통신연락원, 윈난강무학당 입교 후 퇴학, 광둥항공학교 2기 입교, 소련 유학 후 미귀환[11] 의열단 가입, 졸업 후 1928년 베이징에서 의열활동[12] 의열단 추정, 황푸군관 보병과 1사단 2중대[13] 의열단, 조선의용대 제1지대장, 창사 제 2차 전투 참가 후좌장, 반소탕전, 조선의용군[14] 민혁당 창당,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선전부 부주임, 대한통의부 파견 독립군, 1946년 3월 남한으로 귀국하여 좌우합작운동, 48년 민족자주연맹 중앙집행위원 신분으로 남북연석회의 참석, 6.25 전쟁 중 납북[15] 의열단장, 조선의용대장, 광복군 1지대장[16] 1940년 7월부터는 조선의용군, 조선민족혁명당 특파원, 광둥 광복군 잠편지대, 1946년 중국 국공내전 참전, 1951년 장제스와 대만으로 이동함. 대만군 육군소장 1992년 대만에서 사망[17] 평안북도 선천 천도교 종리원에 봉사하면서 만주 고려공산당과 협력[18] 허난성 중앙군관정치학교 파견유학, 황푸군관학교 전학, 우한 국민혁명군 복무[19] 의열단, 민혁당, 임시정부 내무부차장[20] 의열단, 조선의용대, 광복군 1지대 총무조장, 2대 제 1지대장,임시의정원 의원, 1946년 부산 선상에서 병사.[21] 경남 산청, 황푸군관 보병과 1사단 보병 9중대, 의열단 난창지부 활동[22] 서울 적선동 출생, 백호청년회 위원[23] 독립군 참의부, 펑위샹 군대 장교로 편입, 참의부 복귀, 제 2중대장 대리대장 취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판결받음.[24] 김승곤 숙부, 본명은 김용재, 김준, 의열단, 조선의용대, 광복군 1지대 1구대장[25]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가입, 1928년 신채호와 국제수표가담혐의로 체포됨[26] 충남 홍성, 의열단, 중국 국민혁명군 복무, 우창 의열단 활동, 조선혁명군사학교 교관, 밀정 처단, 정저우에서 피살됨.[27] 황해도 개성, 황푸군관 관리부 직원, 무정부주의자 전향, 샤먼 선전원 양성소 교관, 천영이송민단편련쳐 교관, 샤먼 태백삼상점에서 체포됨, 한국으로 압송[28] 1928년 만주무장단체 국민부[29] 서울 출생, 황푸군관 4기 공병과 입교, 상하이 농민 폭동 지원, 홍군 14군 1사단 유격활동 지휘, 루이진 중화소비에트 홍군학교 교사, 장시 독립4사단장, 1933년 장쑤에서 전사[30] 한성 출생 황푸군관학교 정치과 대대 입교, 대한민국 임시정부 차리석과 관련있음.[31] 황푸군교 정치과 입교, 우한 국민혁명군 복무, 우한한인혁명청년회 조직[32] 정치과 입교[33] 평남 평원, 정치과, 상하이 병인의용대, 국민혁명군 광저의 제 3경비단 배속, 난징 국민당, 총사령부 헌병대 정치부 근무, 중국공산당 입당, 중화소비에트 조선대표[34] 평북 정주 출생, 난징 동명학원, 졸업후 국민혁명군 장교[35] 의열단, 폭탄제조법 습득, 국민혁명군 제 2군 기관총 훈련 교관, 러시아 군사고문 통역, 북벌군 우창 선봉대, 북벌군 난징 선봉대, 조선혁명군사간부학교 군사조 교관, 중국군사위원회 특수경찰학교에서 폭탄사용법 가르치다가 사망[36] 국민혁명군 장교, 병인의용대, 신의주지방법원에서 4년 판결, 애국동지회, 남북협상 입국거부 당함.[37] 양세봉 조선혁명군 출신, 중국군대에 복무[38] 졸업 후, 소련 이만의 한인학교 교원[39] 중국 정국이 국공분열되던 시기이다. 3300명 입교생 중 졸업자가 2418명으로 감소했는데 공산주의로 의심받는 생도들이 스스로 퇴교했기 때문이다. 한인 입교생은 200여명이었으나 6명이 졸업했다. 우한분교 박시창과 오봉환이 졸업한다.[40] 의열단, 한국혁명군 간부양성훈련반 교육주임, 광복군 1부지대장[41] 평양, 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의열단 기관지 '우리 길' 발행, 조선박람회 사건 가담.[42] 보병과 2학생대[43] 강계군 조선일보지국 기자[44] 중국군 헌병사령부, 헌병 제8단 소교단(少校團), 동제2영 소교영장(少校營長) 대일전선통일동맹 후원, 민혁당 감찰위원[45] 1927년 5월,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으로 이전하여 광저우, 우한, 창사 각지 분교생을 모집하여 황푸군관학교 6기로 계승했다. 육군중앙군관학교로 개칭됨. 난징본교. 1928년부터 교사, 숙사, 도서관을 증축하여 건물 70여동 1000여칸의 교실로 확장한다. 중일전쟁발발전까지 6~13기 운영한다.[46] 평양출신[47] 공산당 전향, 상하이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조선은행 평양지점 갈취사건으로 체포[48] 난징 중앙항공학교 1기 입교, 한국혁명당, 의열단 가담, 항공기 추락사고로 사망.[49] 조선공산당재건동맹 만주지부, 레닌정치학교 교관, 난징헌병사령부 우편검열소 주임,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 급진대 정무과 비서부 부주임, 민혁당 특무부 부장, 조선의용대 지도위원[50] 노병회 가입, 중국군 복무, 한국광복군 제 9전구 공작대장 창사전투(3차~4차)[51] 조선공산당 재건동맹 경성지부[52] 김창만, 국제재난구제회 요원, 조선공산당 재건, 강릉적색농민조합결성준비위원회 위원[53] 충남 보은군 입교 당시 26세, 2총대 보병과 3중대[54] 상하이 자동차공장 수리공, 국민당 포위토벌작전 참전, 국민당 군대에 위장 입대, 조선의용대 가입, 항미원조 한국전쟁 참전, 랴오닝성 명예군인 휴양원 부원장[55] 재학중 사망[56] 재학중 사망[57] 광복군 제 5지대장 1942년 3월 1일, 박동운에 의하여 암살됨[58] 뤄양분교로 이전[59] 한인애국단, 한독당, 제 2징모분처 간부, 임시정부 군무부 간부[60] 광복군 제 2징모분처, 군무부원, 임시정부 내무부 총무과장, 민정과장, 심리작전연구실[61] 광복군 제 1징모분처, 광복군 제 2지대 1구대장[62] 광복군 제 2지대 제 2구대장[63]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부대장, 광복군 제 5지대 1구대[64] 조선의용군[65] 안춘생 증언엔 만미터 선수로 달리기를 아주 잘 했으며 조선의용대로 갔다고 전해진다[66]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총사령부 참모, 미 5공군 특파원 선전공작[67] 뤄양분교[68] 조선의용군[69] 조선의용군[70] 1936년 8월 14일, 군관학교 동기생 김순곤(金順坤)·김학무(金學武)·김파(金波) 등과 함께 중국 상해의 일본총영사관을 폭파하기로 계획하고 불란서조계 환룡로(環龍路) 태흥방(泰興坊)에서 폭탄 2개를 완성하고 3개째를 제조하다가 갑작스런 폭발로 순국하였다.[71] 남목청 김구 피격범[72] 조선혁명군, 조선의열단, 민혁당 통신 특파원[73] 이봉창에게 군자금과 권총 전달, 맹혈단(盟血團) 옥관빈 사살, 상해 일영사관 투탄, 일 유길명(有吉明)공사 암살계획 중 체포, 1937년 6월 5일순국[74]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광복군 제 5지대 2구대장[75] 의열단, 중국군 제 6사 제 17여 제 31단 제 2영 제 6연장, 한커우 전선에서 체포 순국[76] 이 기수까지 뤄양분교로 한국광복군 제 2지대 수효원으로 충족된다.[77] 제 1징모분처, 제 2지대 3구대장, 총무조장[78] 귀주(貴州)포병학교 교관, 1942년에는 연합군 사령부 제16연대 소교[79] 민혁당, 조선의용대 제 1지대, 광복군 제 3지대, 한광반 교관, 참모처 제 1과[80] 15기부터 쓰촨성 청두분교.[81] 총사령부 참모, 제 2징모분처[82] 이지일, 한도명 졸업 후 김문호, 신정숙과 함께 1941년 3월 1일 충칭 임시정부 청사에 거행된 광복군 징모(徵募) 제 3분처 성립식 참여하고 중국 저장성으로 가게된다.[83] 제 3징모분처 정보조장, 군무부원, 군무부 군사과장, 내무부 경무과장, 경위과장[84] 한인애국단, 제 3징모분처 훈련조장, 절동전투 란씨역에서 부상 후유증으로 1942년 란씨역 전투에서 전사[85] 청두분교, 교육 중에 1941년 12월 미국 진주만 폭격 소식을 듣기 된다.[86]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 겸 선전부주임 대한민국임시정부 문화부 및 선전부위원 1944. 8. 21 광복군 O.S.S. 정보파괴반[87] 청두분교[88]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제 2지대 산시, 허난지구[89] 청두분교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 이후의 기수이다.[90] 광복군 제1지대 1구대 초모공작대원[91] 광복군 제 3지대 화중지구[92] 광복군 제1지대 제1구대에 입대, 한미전차훈련반 대기 중 광복을 맞이함[93] 광복군 제 3지대, 지하공작원[94] 1932년 상해사변 참전 1943년 8월 광복군 총사령부 고급참모로 활약, 민족혁명당 후보위원, 1944년 10월 임시정부 참모부의 참모, 1945년 8월 한국광복군 상해지대장[95] 광복군 총사령부 근무[96] 1930년 도쿄서 조선공산당재건투쟁협의회朝鮮共産黨再建鬪爭協議會를 결성, 1932년 5월 조선공산당재건투쟁위원회 일본출판부를 결성,1932년에 피체 순국[97] 한국혁명청년당(韓國革命靑年黨)에 가입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지회를 설립하는데 주력하였다. 1928년 10월 26일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붙잡혔다.[98] 북벌에 참전 후 소위로 임관, 중국 반란군 토벌 등에 참전[99] 본명 이철호[100] 1983년 1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국에서 김산이 일본의 간첩과 사상 변절자라는 근거가 없고, 올곧은 인물이었음을 인정받아 사후 45년 만에 공식적으로 명예가 회복되었다.[101] 천주교인 무장단체[102] 의민단 소속으로 전투함[103] 대륙의 대장에 해당.[104] 김용 회고록, 정화암 회고록, 유기석 회고록에 언급이되고 독립운동 문서에는 나오나 황푸군관 몇기인지는 불분명하다. 확실치는 않으나 7기 이석(李石) 8기 이근호(李根浩) 추정된다. 광복 후 행적묘연[105] 박기성의 동기이다. 그의 회고록 '나와 조국'에서는 담배를 피려다 우연히 만난 것처럼 언급이 되어있으나 동기임을 알아보고 일부로 놓아준 것으로 추정된다.[106] 일명 '제 3전구공작대', '한교전지공작대'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