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이슬람 공화국 라흐바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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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홀라 호메이니 | 알리 하메네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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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이슬람 공화국 제3대 대통령 | |||
<colbgcolor=#239f40><colcolor=#fff>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제2대 라흐바르 세예드 알리 호세이니 하메네이 سید علی حسینی خامنهای | Sayyid Ali Hosseini Khamenei | |||
출생 | 1939년 4월 19일 ([age(1939-04-19)]세) | ||
이란 제국 호라산 주 마슈하드 | |||
재임기간 | 제3대 대통령 | ||
1981년 10월 13일 ~ 1989년 8월 3일 | |||
제2대 라흐바르 | |||
1989년 6월 4일 ~ 현직 | |||
서명 | |||
링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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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호라산 종교학교 나왑 종교학교[3] (졸업) (? ~ 1955년) 나자프 신학교 (법학, 철학 / 중퇴) (? ~ 1957년) 콤 신학교 (법학, 윤리학, 철학 / 졸업) (? ~ 1964년) | ||
부모 | 아버지 자바드 하메네이 (1895~1986) | ||
배우자 | 만수레 코자스테 바게르자데 (1947 ~, 1964년 결혼) | ||
자녀 | 장남 무스타파 하메네이 (1965 ~) 차남 모즈타바 하메네이 (1969 ~) 삼남 마수드 하메네이 (1975 ~) 사남 메이삼 하메네이 장녀 호라 하메네이 차녀 보쉬라 하메네이 | ||
종교 | 이슬람교 (시아파) | ||
소속 파벌 | [[원칙파| 원칙파 ]] | ||
소속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약력 | 이란 마줄레스 의원 지도력 전문가 회의 의장 국정조정위원회 위원장 이란 제3대 대통령 (1981년 – 1985년) 이란 제4대 대통령 (1985년 – 1989년) 이란 제2대 라흐바르 (1989년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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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란의 제2대 라흐바르(최고지도자)이자 독재자.제3대 대통령이기도 했으나 초대 라흐바르 루홀라 호메이니가 1989년 6월 4일 사망한 후 종신직인 이란의 라흐바르 자리를 [age(1989-06-05)]년째 유지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이란의 주류 민족인 페르시아인이 아니라 소수민족인 아제리인[4]이다. 아제리인은 튀르크족의 일파로 옆나라 아제르바이잔의 주 민족이지만 사파비 왕조, 카자르 왕조를 아제리인이 세운 역사가 있다 보니 이란은 페르시아인 이외의 무슬림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 탄압이 크지 않은 편이다.[5]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제리인, 혹은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아제리인이라 보아도 크게 틀릴 것은 없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 특유의 신정 체제에서는 라흐바르가 국가원수로서 정부수반에 불과한 대통령보다 높은 지위에 있으며 국가 내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따라서 이란의 최고권력자는 대통령이 아니라 그다. 그도 (간선제) 선거로 선출된 인물이지만 이란의 선거제도는 중간에 최고지도자가 인사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헌법수호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개혁파 후보들을 다 떨구고 이것을 견제할 수단이 별로 없기 때문에 민심 반영이 잘 안 된다.[6]
2. 생애
2.1. 어린 시절
1939년 이란 북동부 호라산 주의 마슈하드에서 아버지 자바드 하메네이(1895년 ~ 1986년)와 어머니 카디제 미르다마디 사이에서 8자녀 중 둘째로 태어나 4세 무렵부터 막탑(maktab)이라고 불리는 종교 초등학교에 다녔다. 졸업 후 마슈하드의 호라산 종교학교에 진학하였고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Soleiman Khan 종교학교와 Nawwab 종교학교를 5년만에 수료하면서 이슬람 법학, 철학, 논리학 등을 모든 학문의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저명한 이슬람 학자들에게 darse kharij로 불리는 고급 교육을 받은 뒤 1957년 이라크 나자프로 떠나 대학교에 해당하는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인해 이란으로 돌아왔고 이란에서 가장 큰 신학교인 콤 학교에서 1964년까지 공부했다.2.2. 이란 이슬람 운동의 2인자
졸업 후에는 여러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한때 무명의 성직자로서 돈을 받고 기도를 해 주거나 코란을 읽어주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세속주의를 표방하는 팔레비 왕조 치하에서 그는 이란이 이슬람 국가로 거듭나야 한다며 이슬람 근본주의를 강조, 이슬람 사원, 대학 학생 모임 등에서 설파했는데 이로 인해 경찰에 체포, 구금되기도 했다. 그렇게 1960년대 초반부터 호메이니를 추종하며 이란 이슬람 혁명에 참여했고 이란-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1981년 당시 대통령 모함마드알리 라자이가 인민전사기구의 테러로 암살당하자[7] 대선에 출마해 대통령을 지냈다.대통령 시절의 알리 하메네이
2.3. 라흐바르 시절
그렇게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이란의 3, 4대 대통령을 지내다가 1989년 호메이니가 사망하자 이슬람 성직자 회의를 통해 호메이니의 뒤를 계승하며 라흐바르로 추대되었고 이때부터 명실상부한 이란의 최고지도자로 등극했다.본래 호메이니의 후계자로는 호세인 알리 몬타제리(1922 ~ 2009)라는 이란의 대 아야톨라이자 시아파 이슬람의 최고위급 성지자가 자리매김하고 있었지만 호메이니가 독재국가를 세우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것에 반발해 스스로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 죽을 때까지 가택연금을 자처하였다. 이후 상대적으로 정통성이 낮았던[8] 그가 집권한 뒤 자신의 취약한 권력 기반을 샤리아 폭정으로 메우려고 하였다.
2009년 선거에서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압승했다는 개표 결과가 발표되었고 몇 시간 뒤에 그는 “신의 뜻”이라며 아마디네자드의 당선을 추인했는데 이러한 신속한 추인은 이란 내부에서도 뜻밖이라는 반응이 많았는데 왜냐하면 선거관리위원회는 패배한 측에 3일간 반론 기한을 주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이를 무시했기 때문이였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6월 12일은 하메네이가 이란의 역사를 결정한 날로 기록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문제는 이 선거가 부정선거라는 의혹이 일었다는 거고 결국 반발한 시민들이 무효를 주장하며 시위에 나섰는데 이 시위가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다.
그러자 2009년 6월 19일 그는 부정선거 의혹을 강력히 부인하며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개혁파에도 사실상 최후 통첩을 보냈다. 그는 테헤란대에서 열린 금요예배에서 “지난 대선에서 이란 국민은 자신들이 원하는 인물을 뽑았다”, “이란의 법은 결코 투표 조작을 허용치 않는다”고 말했으며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이번 대선에서 전체 40,000,000표 중 24,500,000표를 얻어 당선됐다"고 아마디네자드를 옹호하며 시위대를 비난했고 결국 이 시위는 어찌저찌 마무리되었다.
웃기는 건 이렇게까지 해가며 당선시켜준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과 하메네이는 2011년 정보장관 인사를 둘러싸고 대판 충돌했고, 그 이후로 별의별 일에 날세우고 대립할 정도로 관계가 파탄났다는 것. 그래서 2012년에는 그가 하도 짜증난 나머지 “아예 대통령제를 없애야 한다”는 말을 했을 정도다. 사실 아마디네자드는 대외 부문 한정으로 강경파였고 대내적으로는 개혁 성향이었는데 하메네이가 그동안 신임했던 부하라 그런지 이를 캐치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2013년 선거에서는 그가 사실상 선거를 좌지우지하며 자신의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2013년 선거에 후보로 나온 마샤이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2009년 대선 당시 야당 후보를 지지하고 미국 등 서방사회와의 관계 회복을 주장했으며 종교의 정치 개입이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에 그는 마샤이를 자신의 신정체제를 흔들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로 판단했고 마샤이를 비롯한 당선이 유력시됐던 주요 후보들이 대선 후보에서 줄줄이 탈락하면서 그와 가까운 보수파 인사들이 최종 후보들만 명단에 들어갔는데 결국 그와 가까운 사이인 성직자 출신 하산 로하니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데 친분과는 별개로 로하니도 개혁파라 자주 대립했으며 결국 이후에는 초강경파인 에브라힘 라이시가 대통령에 올랐다.
그는 외교에서 현실적이라 계속 적으로 선포했던 미국과도 화해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란 핵 협상 과정에서도 그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 간의 물밑 서신외교가 이란 핵 협상 타결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2014년 10월 제네바에서 핵 협상이 시작될 시점에 오바마는 그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협상 타결에 최선을 다하자는 뜻을 전했으며 그도 답신을 보내는 등의 물밑 교감을 이어왔다고 한다. 기사
2015년 9월 4일에는 이란 핵 합의안의 의회 승인 절차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기사
메카 인근 미나에서 성지순례(하지) 도중에 발생한 압사 사고에 대해 “사우디 당국의 실수와 부적절한 대응이 재앙을 낳았다”면서 “참사의 책임은 사우디아라비아가 반드시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고로 이란은 자국민 131명이 사망하고 6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기사
2014년 9월 6일에는 그가 전립선 수술을 받았다는 기사가 나왔다. 수술은 잘 끝났고 평범한 수술이었다고 그가 연설도 했다. 기사
하지만 2015년 12월 14일에는 그의 후계자에 대해 “이슬람 성직자 회의 내에 후보자를 검토할 그룹이 설치됐다”며 후보자 인선을 시작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기사 사실 체력에 무리가 갈 정도로 나이가 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미 75세를 넘긴 고령이며 2019년에 그의 나이가 80세가 되기 때문이다. 건강도 좋지 못해 수술을 받을 정도가 되었다.
2016년에는 시아파의 지지를 받던 알님르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처형당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이란 분쟁이 발생했는데 시아파의 맹주인 그는 "탄압받았던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신의 분노가 사우디 정치인들에게 내려질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이란 외무부도 "사우디가 테러리스트와 극단주의자를 지원하면서도 국내에선 압제와 처형으로 비판 세력에 대응한다. 이런 정책은 큰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서로 국교를 단절했다가 2023년에 중국의 중재로 일단 관계를 정상화했다. 사우디는 수니파[9]의 종주국, 이란은 시아파의 종주국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서로 원수지간이지만 실리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사우디보다 더 적대해야 할 적대국들이 많기 때문에 실리적으로는 그나마 사이가 덜 나쁜 사우디와 관계개선을 한 것. 하지만 이것도 적대적인 태도를 푼 수준이고, 종교적인 문제를 내려놓고 보면 이란은 왕정을 뒤엎고 세워진 체제이기 때문에 여전히 절대왕정을 유지 중인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 왕국들과 일정 수준 이상 관계가 좋아지기는 힘들다.
2.4.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2020년 3월 24일 그의 사돈(인척)인 그의 넷째 아들 메이삼의 장모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에 감염되어 사망했다고 발표하였다. 이란 정부가 코로나19 확산을 막으려고 이동 제한과 모임 최소화에 총력을 기울이던 가운데 3월 23일 테헤란 도심에서 열린 혁명수비대 사령관 호세인 아사돌라히의 장례식에 수백 명이 모여 비판에 휩싸였다. 기사드디어 마스크를 착용하고 연설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사돈댁이 감염되어 사망한 것도 그렇고 국민들에게 마스크를 써서 감염을 방지하라는 차원에서 쓴 것으로 보인다. # 사실상 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 봤을 때 코로나19가 사람 간의 접촉으로 인한 대규모 감염이라는 것을 이란의 정치와 종교를 아우르는 최고 지도자인 그도 결국 대놓고 인정한 셈이다.
2.5. 2022년 이란 시위 이후
2022년 9월 마흐사 아미니가 이란 도덕경찰에 의해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가 사흘 후 의문사하자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나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2022년 이란 시위에서 두문분출했는데 2022년 9월 28일에 이미 사망해서 장례식이 혁명 수비대 국장으로 치러졌고 이라크 나자프에 관이 도착했다는 설[10]이 떠돌았다. 그러나 10월 3일 연설장에서 아주 정정하게 연설하는 모습을 보이며 뜬소문을 불식시켰다. 이후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국외 시위 지지층의 관심이 떨어진 데다 2022년 연말에는 시위대 측의 승기가 보였다지만 2023년 들어 시위대 측의 내부 분열과 이란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화가 겹쳐 시위는 공식적 종료 판정은 받지 않았지만 사실상 종료되면서 그와 이란 당국의 승리가 되었다.2024년 4월 이스라엘군이 시리아의 이란 영사관을 공습하자 이스라엘에 대해 공습을 명령했다.
2.6. 후계 예측
초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너무 늦은 나이에 집권해서 종신직임에도 겨우 10년 정도[11] 집권하다가 1989년 노환으로 사망했지만 그는 50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집권해서 현재까지 [age(1989-06-04)]년째 장기집권하고 있다.허나 나이는 못 이겨서인지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그리 좋지는 않은 것으로 보여 일찌감치 후계자감을 물색해 왔다.
-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외교적으론 강경파이지만 내부적으론 온건파라 임기 내내 하메네이와 충돌했고 결국 그의 눈 밖에 나서 탈락했다. 애초에 성직자 출신도 아니었고.
- 하산 로하니는 성직자 출신에다 이란 대통령까지 당선될 정도로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12] 정치적으로는 개혁파[13]에 속하다 보니 보수파의 거두 포지션인 라흐바르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며, 1948년생이라 하메네이와 9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 가셈 솔레이마니 2020년 사망는 혁명수비대 출신에 강경파로 제일 주목 받았지만 트럼프 행정부에 의해 공습으로 피살 되었다. 제일 마음에 들어하던 후계자여서 그런지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보였을 정도였다. 이란의 핵개발에서 이란 대통령을 제치고 알리 하메네이와 솔레이마니 둘이서만 정보를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으며, 정치적으로 알리 하메네이가 가장 신임했던 최측근 중 하나로 알려져 있던 인물이다. 2021년 이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것으로 점쳐질 정도로 유력 대권 후보였다. 허나 이슬람 율법학자 출신이 아닌 만큼, 처음부터 그가 라흐바르가 될 가능성은 없었다. 다만 하메네이가 급사할 경우 차기 라흐바르 지명 전까지 하메네이의 유지를 이어갈 2인자로서의 입지는 충분했다.
- 에브라힘 라이시 2024년 사망는 나이도 그렇게 많지 않고 율법학자로서도 정치적으로도 하메네이 본인과 같은 극강경파여서 그의 마음에 든 듯 하나 2024년 5월 19일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하메네이보다 먼저 사망하였다.[14]
- 알리 하메네이의 차남[15] 모즈타바 하메네이도 후계자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모즈타바가 후계자가 되면 주변 세속 국가들[16]이나 팔레비 왕조처럼 최고지도자를 세습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우며, 모즈타바가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신학적 지위는 아직 없다는 약점이 있다.2015년 기사 그러나 이란 내외에선 모즈타바를 유력 후계자로 보는 입장도 제기되고 있다.#
- 마수드 페제시키안: 개혁파 성향 정치인으로, 2024년 이란 대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페제시키안은 성직자 출신이 아니라서 애초에 라흐바르가 되지 못한다. 다만 1939년생인 하메네이의 건강이 서서히 적신호를 켜고 있는 모양새라 페제시키안 임기 내[17]에 사망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어서 아직 지켜볼 필요가 있다. 페제시키안이 재선에 성공할 경우 더욱 가능성이 커지며, 때문에 임기 중 라흐바르 유고 시 정치적 1인자가 될 가능성은 꽤 있다. 페제시키안의 정치적 행동반경이 제약을 받는 건 그 위에 하메네이가 있기 때문이므로 더 나아가 하메네이가 죽으면 그 기세를 몰아 차기 라흐바르에 자기와 비슷한 개혁파 성향의 율법학자를 올릴 수도 있다.[18]
단 초대 라흐바르였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팔레비 왕조와의 차별화를 위해 라흐바르 세습을 반대해온것은 물론, 이란 내에서 국민의 지지를 받고 인정받는 율법학자가 라흐바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대통령 당선을 통한 국민적 지지 + 율법학자로서 인정받기 이 두가지 조건중 하나라도 충족시키지 못한 이가 후계자로 선택된다면 이란의 체제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보니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알리 하메네이 본인도 율법학자 출신이고 국민적 지지도 받은 것은 물론 호메이니가 인정하는 인물이였지만 라흐바르가 되자마자 자신을 비판하거나 위협하는 다른 율법학자들을 축출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에브라힘 라이시가 차기 라흐바르로 점쳐진 이유도 원칙파 율법학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것은 물론 개혁파 율법학자들과도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율법학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개혁파 후보를 모두 축출하는 초강수까지 둬서 대통령에 당선시켰지만 임기 한 번 제대로 못 마쳐보고 사고로 사망했다.
결국 후계자 문제는 다시 안갯속으로 빠진 상황이다.
라이시의 사망으로 인해 치러진 2024년 이란 대통령 선거에서 원칙파가 아닌 개혁파 마수드 페제시키안이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나면서, 하메네이의 후계자 물색은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스마일 하니예가 자국의 수도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것이 이스라엘의 소행으로 밝혀질 시 하메네이가 개혁파인 마수드에게 노선을 바꾸라고 종용할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페제시키안은 사망한 하니예를 순교자로 칭송하면서도 경호를 맡았던 혁명수비대에게는 '개혁파인 내가 대통령이 된 게 아니꼬워서 이 사태를 방치했느냐'며 엄청난 비난을 퍼부은 걸 보면[20] 페제시키안은 서방과 화해하려던 구상이 취임 직후부터 틀어진 것에 대해 상당히 분노해 있을뿐더러, 노선을 바꿀 의사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오히려 페제시키안이 온건 개혁파에서 강경 개혁파로 노선이 더 강해진 결과를 만들어냈다.
3. 영향력
이란은 명목상 삼권분립이 확립된 민주정이지만 그는 라흐바르(최고지도자)로서 3권 위에 군림하여 정부가 통과시키는 어떠한 법에 대해서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대통령 인준과 군사령관 임명권 등을 갖는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및 라흐바르를 선출하는 율법 전문가 회의의 후보를 심사하는 헌법수호위원회의 인사에 절대적 영향력을 미친다. 따라서 이란의 대통령도 하메네이가 승인하지 않으면 대통령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사실상 이란의 실제 통치자로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2009년 초에 선정한 각국의 최고 권력자 명단에서도 이란의 권력자로 뽑힌 인물은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아니라 그였다. 뉴스위크는 선정 기준을 "국가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로 삼았다고 한다.현재 신정 체계인 이란의 최고 권력자인 그는 직접 정책을 입안하거나 추진하지는 않지만 이슬람 율법 전문가 회의(Assembly of Experts)에서 선출된 그의 승인 없이는 어떤 결정도 집행되지 않는다. 그의 글과 연설은 이란의 국내외 정치 목표와 행동을 가장 정확하게 반영한다. 그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로 2000년 8월에 하메네이가 보낸 서한 한 통에 의회에서 논의되던 언론개혁법안이 철회됐으며 2003년 6월 개혁파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자 "적(미국)의 사주를 받는 용병들에게는 일말의 동정의 여지가 없다"면서 시위 진압을 지시했는데 고작 한마디만에 모든 이란 내의 정부조직들이 긴밀하게 움직인 적이 있다.
2020년 1월 3일 미국의 공격으로 암살당한 가셈 솔레이마니가 그의 수제자이며 이슬람 혁명 수비대의 유력 인사였다. 그가 죽은 후 장례 예배에서 하메네이는 매우 슬퍼하였고 진행 도중 오열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4. 샤리아를 앞세운 폭정과 독재
그는 이란의 언론 자유를 탄압하며 이란의 반(反)정부 기자들을 고문하도록 명령하며 강력한 독재를 펴고 있는데 실제로 현재 이란에는 수많은 언론인과 수많은 학생과 민간단체 회원들이 감옥에 들어가 있다. 2009년에 경제난과 실업, 신정정치로 인한 억압에 분노한 이란 국민들이 벌인 시위를 잔혹하게 진압하여 전 세계에서 비난을 받았다. 독일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 도이칠란트(FTD)에서도 장기 집권으로 인권을 탄압하는 2012년에 물러나야 할 지도자로 북한의 김정은과 함께 그를 지목했으며 2008년 워싱턴 포스트에서도 세계 최악의 독재자로 선정될 정도였다. 한편 2014년 들어 이란에서는 하루에 3명 꼴로 처형이 이뤄질 정도로 사형이 늘었는데 그 중에는 범죄자도 있지만 상당수가 양심수이거나 정치범이라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 시린 에바디가 증언했다. 현재 이란에서는 샤리아로 인한 인권 유린이 가장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다.게다가 이란 대통령들이 아무리 개방적이라고 해도 실권자인 그가 워낙 수구꼴통이다 보니 그의 결정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란 대통령들은 실권이 적다. 특히 정책 결정을 두고 대통령들과 갈등이 심했기 때문에 짜증나서 대통령 직책도 총리 직책처럼 개헌해서 아예 없애 버리거나[21] 대통령과 최고지도자를 겸직해서 통치하겠다는 발언까지 했다. 물론 측근들의 만류와 완강한 반대로 이 생각을 단념했다. 특히 그는 악명 높은 광신도라서 뭐든지 신의 이름을 팔아서 폭정을 정당화시킨다. 그의 친위대라고 할 수 있는 이슬람 혁명 수비대[22]와 종교경찰들은 광신과 인권침해 범죄를 저질러 대는 것으로 악명높다.
이스라엘을 돕는 미국을 증오하지만 미국은 워낙 초강대국이라 비난만 하지 함부로 대항할 생각은 하지 않으나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만은 포기하지 않아 틈만 나면 이스라엘을 도발하는 언행을 한다. 특히 팔레스타인에게 우호적이라서 파타와 하마스 대표가 오면 성대하게 대접하며 이스라엘의 골칫거리인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과 레바논 헤즈볼라의 공식 후원자다.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의 하마스와 싸울 때도 그가 앞장서서 하마스와 가자지구 주민들을 도와준다. 그러다보니 미국은 테러단체 후원자라고 비난하고 이스라엘에게선 악의 세력 통치자로 증오받는다.
2019년 11월에는 반(反)정부 시위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으로 최소 180명, 최대 450명이 나흘 사이에 학살된 것도 그의 명령에 의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시위자들을 미국 제국주의의 사주를 받은 폭도로 규정한 바 있다.
2021년 경제난과 물 부족 사태의 미해결과 각종 문제를 일으켜 놓고 자기가 스스로 2022년 식량·에너지 위기 와중에 독단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등의 행보를 보여 결국 그동안 쌓여 왔던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2021년과 2022년 연쇄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테헤란에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하여 군을 배치하고 다른 도시에서는 심지어 군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기도 하는 등 피해가 커졌다.
5. 가족
아들들은 모스타파(1965년생), 모즈타바(1969년생), 마수드, 메이삼이 있고 딸들은 호라, 보쉬라가 있다. 아버지 자바드(1895 ~ 1986) 역시 성직자였고 형 모하메드(1935년생)는 혁명 이후 잠시 국회의원을 지내기는 했다.팔라비 왕조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극심한 인권탄압 독재국가이지만 명목상으로는 그래도 이슬람 민주 공화국 정부인 만큼 자녀들이나 가족들에게 직접적인 라흐바르 세습은커녕 어떤 요직에도 앉히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비밀기업 세타드의 사실상의 경영권은 자식들에게 넘기겠지만. 이란 대통령 헬기 추락 사고 후 유력 라흐바르 후계자이던 에브라힘 라이시가 사망한 후, 모스타파가 후계자 후보로 거론되고 있긴 한다.
가족들 중 남동생 하디(1948년생)는 개혁주의 성향의 정치가였고 여동생 바드리 호세네이는 오빠 알리와 다른 성향을 지닌 인물로, 남편(매제)이 1979년 이란 혁명에 반대한 성직자 알리 테라니[23]이며 슬하 자식(조카)들도 반(反)정부 행보를 보이고 있다. 특히 딸 파리데가 2022년 11월 25일 유튜브를 통해 현 정권을 살인 정권이라고 규탄하다 구금당했고 바드리 자신은 12월 현 정부를 규탄하는 서한을 아들로 하여금 트위터에 공개했다.#
6. 기타
- 국제 테러단체인 알카에다 등의 사상적 기초를 마련한 이슬람 극단주의자 사이드 쿠틉의 저서를 페르시아어로 번역하기도 했는데 물론 지지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이런 위험한 사상이니 조심하라고 하기 위해서다. 대부분의 반근대 국가 지도자들이 그렇듯이 여러 언어를 구사하고 교육도 충분히 받은 엘리트임은 확실하다.
- 독재자들이 항상 그렇듯이 약 100조 원대에 달하는 거대 비밀기업 ‘세타드’를 운영하며[24]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돈을 바탕으로 권력을 유지해온 것으로 드러났는데 금융 석유 통신 등을 주 사업원으로 운영 중인 세타드의 총자산 규모는 약 950억 달러[25]으로 이는 한 해 이란 석유 수출액의 40%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라고 한다.기사
- 1994년에는 아슈라 때 자신도 앞장서서 헌혈할테니 헌혈 방식을 빼고 피 흘리며 자해하는[26] 걸 금지하는 파트와를 발표했다.# 이란에서는 이 파트와가 잘 지켜지지만 이란 밖 시아파들은 잘 지키지 않는 편이다.참조
- 2020년에 아이폰을 금지시키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전 세계 정치인들 중에서 도널드 트럼프와 함께 헤비 트위터리안이다. 그러나 트위터에 트럼프에게 솔레이마니의 복수를 암시하는 이미지를 올려 2021년 1월 22일부로 영구정지를 먹었다. # 물론 그는 트위터가 미국 기업이라 미국 편을 들어주어 자신을 영구정지시켰다고 주장했다.
- 2016년에 당시 이란 국빈 방문 중이던 박근혜 대한민국 대통령과 만나 면담한 적이 있다.[27] # 둘 사이에서는 좋은 이야기가 오갔으나 대한민국에서는 "김일성도 만나 본 하메네이를 왜 만나냐", "미국이랑 척 질 일 있냐"며 부정적인 반응이 많았다.
- 2020년 3월 3일 그의 정치자문인 모하마드 미르모하마디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사망했는데 대한민국 언론은 이것을 하메네이 본인이 병사한 줄 알고 오보를 낸 바 있다.
7. 소속 정당
<rowcolor=#fff> 소속 | 기간 | 비고 |
[[이슬람공화당| 이슬람공화당 ]][28] | 1979 ~ 1987 | 정계 입문 |
[[전투적 성직자회| 전투적 성직자회 ]] | 1977 ~ 1989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89 ~ 현재 | 탈당 |
8.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81 | 이란 대통령 선거 | 이란 | [[이슬람공화당| 이슬람공화당 ]] | 16,007,072 (95.01%) | 당선 (1위) | 초선 |
1985 | 이란 대통령 선거 | 12,203,870 (87.90%) | 재선 |
[A] 메타 측의 삭제[A] 메타 측의 삭제[3] 한국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학교.[4] 다만 페르시아인과 아제리인의 유전적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은데 오늘날의 이란 북서부와 아제르바이잔 땅에서 살아가던 페르시아계 주민들이 튀르크족 치하에서 튀르크화된 게 오늘날의 아제리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튀르키예 서부(아나톨리아 반도 서부 및 동트라키아) 주민들이 유전적으로 그리스인과 차이가 크지 않고 오늘날 스페인 남부(특히 안달루시아)의 주민들이 유전적으로 모로코인들과 차이가 크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정체성은 구분되어 튀르크 어 계열인 아제리 어와 인도유럽어 계열인 페르시아 어는 뚜렷이 차이가 있다. 아제리 어의 어순은 오히려 우리말과 가깝다고 한다.[5] 다만 몽골 계통의 하자라족에 대한 인종차별은 심각한 수준이다. 하자라인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그리고 파키스탄에 정착한 몽골 제국 군인의 후손인데 몽골 제국의 페르시아권 침략에 따른 역사적 악연 때문에 하자라인이 세 나라에서 인종차별을 당한다. 파키스탄은 무굴 제국의 후예를 칭하는 만큼 몽골 제국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이는 주로 인도계 민족인 펀자브인과 힌두인에게 해당될 뿐더러 이들 사이에서도 몽골 제국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별개로 하자라인에 대한 인식은 영 좋지 않으며 몽골 제국에 대한 인식이 나쁜 페르시아계 민족들(파슈툰족, 타지크족 등)은 특히 하자라인을 싫어하는 경향이 강하다.[6] 히잡시위의 영향으로 개혁파였던 하산 로마니가 후보가 당선된 7대 대통령 선거도 알리 하메네이는 에브라임 라이시를 대놓고 지지했던 일화도 있을정도이다. 그리고 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에브라임 라이시의 당선을 위해 개혁파 후보를 모두 떨어트렸다.[7] 이때 하메네이 본인도 오른팔에 중상을 입었고 이후 오른팔이 마비되어 지금도 잘 움직이지 못한다. 하메네이의 평소 사진들을 자세히 보면 늘 오른팔을 옷으로 가리고 있거나 보이더라도 늘어져있는데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8] 초기 이란 헌법에서는 대 아야톨라만이 라흐바르로 선출될 자격이 있었지만, 하메네이가 라흐바르로 선출되기 직전에 이슬람 시아파 신학자라면 누구나 라흐바르로 선출될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되어 하메네이가 라흐바르로 선출될 수 있었다.[9] 정확히는 수니파의 한 분파인 와하브파. 수니파는 숫자가 많은 만큼 여러 파가 있어서 와하브파와 철천지원수지간인 파벌도 많다.[10] 이때 하메네이는 83세였는데 어지간한 국가들의 평균 수명에 이미 도달한 나이다.[11] 심지어 집권 기간의 거의 대부분이 전시 상태였다.[12] 심지어 당시 하메네이의 지지를 받고있더 에브라힘 라이시를 압도적인 표차로 이겼다!![13] 개혁파 중에서도 온건파에 속한다.[14] 하메네이도 에브라힘 라이시에 대해 마음에 들었는지, 그가 사망한 후 개혁파 성향의 마수드 페제시키안이 당선되자 라이시 대통령을 극찬하면서 라이시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권유하는 한편 라이시를 영웅이자 순교자로 묘사하고 있다. #[15] 장남은 모스타파 하메네이로 1965년생이다.[16] 시리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17] 일단 페제시키안의 임기가 2028년까지 확정되어 있으나 이란 대선은 중간에 탄핵당한 바니사드르, 암살당한 라자이, 임기 중 사고사한 라이시를 제외하면 전부 재선에 성공한지라 별 탈이 없으면 재선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재선에 성공하면 2032년까지 재임하게 되는데 그러면 하메네이는 93세가 된다.[18] 다만 종교 지도자인 라흐바르 직위 자체는 호메이니 때부터 시작된 신정 체제의 정체성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쉽게 폐지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19] 그의 후임 대통령인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는 2017년 이미 사망했고, 후후임 대통령인 모하마드 하타미는 개혁파인데다 그보다 불과 4살 어린 1943년생이라 일찌감치 후계자감에서 탈락했다. 어쩌면 이란 대통령이 아닌 이슬람 율법학자 중에 차기 라흐바르 후계자감을 고를 가능성도 있다. 일단은 2024년 전문가 회의 선거에서 라흐바르를 선출하는 전문가 회의 의석을 원칙파가 압도적으로 장악한 상태이고 다음 선거는 2032년에나 열릴 예정이기 때문에, 하메네이가 그 때까지 생존한 상태에서 차기 전문가 회의 선거에서 개혁파가 승리하거나 큰 이변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원칙파 계열의 율법학자 중 누군가가 차기 라흐바르로 선출될 가능성이 높다. 라흐바르는 법적으로는 선출직이기 때문에 반드시 후계자를 미리 내정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내정된 후계자가 없더라도 전문가 회의에서 적당히 합의해서 다음 라흐바르를 뽑을 수는 있다.[20] 개혁파의 경우 언제나 국민적 지지를 받고있지만 원칙파와 보수파가 이란 종교회의에서 주축이고 무엇보다 최고종교지도자의 의중에 따라서는 후보도 못내는 상황이다.[21] 1989년 전임 최고지도자였던 호메이니 사후 헌법이 개정되어 이슬람 공화국 정부 초기에 존재했던 총리직이 폐지되었다.[22] 나치의 SS와 비슷하게 기존 군부를 믿지 못해 창설된 일종의 사병이다.[23] 본명은 알리 모라드카니 아랑게, 생몰년도는 1926년 ~ 2022년[24] 이슬람 교리상 성직자는 재물을 탐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에 대놓고 사업을 할 수는 없다.[25] 약 101조7450억 원[26] 아슈라 축제 자체가 알리의 아들인 후세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목적인데 문제는 그 애도 방식이 피를 흘리는 자해라는 것이다. 그것도 피를 철철 흐르게 할 정도로 매우 잔혹한데 심지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한테 강요하기도 하여 이전부터 문제가 많았다. 오죽하면 시아파에서도 이전부터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을 정도다. 물론 금지한 후에도 자해가 없어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슴을 치는 정도로 끝나며 정 피를 내도 헌혈을 하고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 음료(예로 토마토 쥬스 같은거)를 나눠 마시고 붉은색이 들어간 음식을 나눠먹으며 추모하지 자해는 하지 않는다.[27] 신정 체제인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된 후 이란 최고지도자를 만난 대한민국 대통령은 현재까지 박근혜가 유일하다.[28] 1979년 혁명을 주도한 인사들이 혁명 성공 직후 호메이니의 지시에 따라 이슬람공화당을 창당했고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란이 아무것도 얻지 못하자 내분이 일어나 해체됐다. 호메이니와 하메네이를 위시한 지도부는 전투적 성직자회라는 정당을 창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