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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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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카페 왕조 제7대 국왕
필리프 2세
Philippe II
파일:Sceau_de_Philippe_Auguste._-_Archives_Nationales_-_SC-D157.jpg
1180년 필리프 2세를 묘사한 직인.[1]
출생 1165년 8월 21일
프랑스 왕국 고네스
사망 1223년 7월 14일 (향년 57세)
프랑스 왕국 망트라졸리
재위기간 프랑크인의 왕 (공동 재위)
1179년 11월 1일 ~ 1180년 9월 18일
프랑크인의 왕 (단독 재위)
1180년 9월 18일 ~ 1190년
프랑스 국왕
1190년 ~ 1223년 7월 14일
아르투아 백작[2]
1190년 3월 15일 ~ 1223년 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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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가문 카페 가문
아버지 루이 7세
어머니 샹파뉴의 아델
배우자 에노의 이자벨 (1180년 결혼/1190년 사망)
덴마크의 잉에보어 (1193년 결혼)
메라니아의 아그네스 (1196년 결혼/1200년 무효)
자녀 루이 8세, 로베르, 필리프, 마리, 필리프, 피에르 (사생아)
종교 가톨릭
별칭 존엄왕(Auguste)
신이 주신 자(Dieudonné)
}}}}}}}}}

1. 개요2. 생애3. 급변하는 동맹
3.1.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3.2. 헨리 2세청년왕 헨리3.3. 조프루아 2세3.4. 리처드
4. 리처드 1세와 대립
4.1. 3차 십자군 결성4.2. 제노바에서4.3. 메시나에서4.4. 아크레에서4.5. 전쟁 준비4.6. 전쟁의 시작4.7. 4년 만의 재회4.8. 그 후
5. 존 왕과의 대립6. 내정7. 평가8. Rex Francorum et Rex Franciae9. 금발? 흑발?10. 그 외11. 가족
11.1. 자녀
12. 대중문화에서

[clearfix]

1. 개요

아우구스투스, 정복자, 신이 주신 자
P. Contamine, 'L'Armee de Philippe Auguste'.
왕을 사랑하는 만큼 왕도 그들을 사랑하는지를 아무도 모른다. 그들은 왕의 사랑을 두고 흥미진진한 싸움을 벌였고, 어떤 이는 누가 가장 왕과 사랑이 깊은지 궁금해 했는데 이로써 사랑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브르타뉴 사람' 기욤(Guillaume le Breton)[3]

프랑스 왕국의 국왕.[4] 카페 왕조 제7대 왕으로 루이 7세와 샹파뉴의 아델 사이에서 여성 형제뿐인 외아들로 출생했다.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서 유래한[5] 별칭인 존엄왕(Auguste, 오귀스트)에서 짐작할 수 있듯, 플랜태저넷 왕조앙주 제국에 눌려 국가 자체가 희미해진 나머지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프랑스음모와 술수, 전쟁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중앙집권화하고 강국으로 올려놓은 명군이다. 왕권을 야금야금 확대해나갔던 중세 프랑스와 카페 왕조의 상황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인물이다.

2. 생애

필리프 2세가 태어나기 전 카페 왕가는 정통성 결핍과 관련된 세간의 비난에 시달렸고, "카페 왕가가 카롤루스 왕조의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신의 저주를 받아서 루이 7세에서 단절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루이 7세는 카롤루스 왕가의 후손인 블루아 백작 티보 4세의 딸 아델 드 샹파뉴와 세 번째로 결혼했고, 이 사이에서 필리프가 출생하여 "신이 주신 자"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그의 탄생이 알려지자 파리 전체가 불바다에 휩쓸린 것처럼 보였고, 파리 신민들은 온 성당의 종을 울리며 거리로 뛰어나와 횃불을 키고 잉글랜드인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이 아이가 플랜태저넷 왕가의 망치가 될 것이라고 소리쳤다.

파일:Sacre_de_Philippe_Auguste.jpg
즉위하는 필리프 2세. 1370년대 상상화.

1179년 11월 1일, 14세에 공동왕으로 즉위하여 두각을 드러내며 친정을 펼치기 시작했고, 1180년 9월 부왕이 죽자 단독왕으로 등극했다.

3. 급변하는 동맹

3.1.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필리프 2세가 즉위했을 때 프랑스는 지방분권적인 권력 파편화가 만연한 난관에 봉착해 있었고, 카페 왕실 직할지는 일드프랑스와 부르쥬에 그친 상황이었다.[6] 즉위 초기의 변덕스러운 정치 동맹, 반란과 배신, 변절로 얼룩진 소용돌이에서 필리프 2세는 동맹을 정비하고 번복했으며 교활한 실용주의적 노선을 일관하여 동맹을 맺고 끊었다.

불과 14세에 필리프 2세는 자신의 예법 교육을 담당한 플랑드르 및 베르망두아, 발루아 백작 필리프 1세를 외숙인 샹파뉴 가문의 견제책으로 활용하는 데 성공했다. 필리프 1세는 질녀인 에노의 이사벨을 필리프 2세의 배필로 주선했는데 지참금은 플랑드르 백국의 주 수입원인 아르투아 백작령[7]으로 이사벨이 상속하기로 조인했다. 이후 필리프 1세와 클레르몽 백작 라울 1세는 성 하나를 두고 분쟁을 벌였고, 실상은 단독왕으로서 이미 친정을 하고 있었던 소년왕을 둘러싼 연장자로서의 영향력을 두고 필리프 1세가 라울 1세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필리프 2세는 필리프 1세의 단물을 다 빨아먹은 다음 이 분쟁에 개입하여 그에게 엄청난 모욕을 주어 모든 방면에서 결별을 선언했다. 이 사건은 질투와 복수심에 사로잡힌 필리프 1세가 필리프 2세에 대한 흑색 선전을 확산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북프랑스 군벌들을 연합하여 일으킨 향후 7년간 지속된 대규모의 반란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여겨진다.[8]

3.2. 헨리 2세청년왕 헨리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의 아들들과 가까이 지내며 헨리 2세와 그의 아들들간의 내분을 교묘히 이용했다. 젊은 왕 헨리는 반란을 도모하자는 아라곤 왕 알폰소 2세를 비롯한 수많은 동맹국의 유혹을 뿌리치며 3년 동안 마상창시합에만 몰두하고 있었고, 그런 그에게 다시 야욕의 불을 지핀 사람은 그보다 10세 아래인 15세의 필리프 2세였다.

1181년, 플랑드르와 썽쎄흐가 급습하여 파리 코앞까지 치고 들어온 순간에 헨리 2세의 아들들이 필리프 2세를 구출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헨리 2세가 나서서 필리프 2세의 편을 들었고 젊은 왕 헨리, 리처드, 제프리는 플랑드르 백작과 공모한 군벌들의 권역을 응징했다. 이듬해, 삼형제가 내전을 벌이자 필리프 2세는 젊은 왕 헨리와 제프리에게 뒤에서 은밀하게 용병을 지원했다.

동시대의 연대기 작가들이 회고한 '잉글랜드와 프랑스 전역을 놀라게 했던 젊은 왕의 진심어린 보호와 사랑'을 받던 필리프 2세는 이렇게 되갚았다.

1182년 가을, 젊은 헨리가 이름뿐인 잉글랜드 공동왕 자리를 놓고 부친에게 강하게 항의했으나 합의를 보지 못하여 그 길로 당장 파리로 가 필리프 2세에게 조언을 구하고, 돌아간 즉시 이렇게 선언했다.
"부왕께서 명령하신 비굴한 위치에 있느니, 차라리 추방을 당하거나 십자군 원정을 가리다. 나의 요구 조건들이 무시된다면 이대로 자살을 하겠소!"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의 표현을 따른 바, 아들의 이같은 선언은 사악한 남자들 중 제일의 부추김 탓이었다.

필리프 2세는 젊은 헨리가 제프리와 연합하여 리처드의 영지 아키텐을 침공하고, 부왕에게 반란을 일으켰을 때 또 뒤에서 헨리와 제프리에게 용병을 지원했다. 6월 11일, 젊은 헨리가 28세의 나이에 이질로 숨지자 반란이 중단되었다.

3.3. 조프루아 2세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에게 수년간 지체되었던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을 재촉했다. 헨리 2세는 이 문제를 질질 끌었으나[9] 리처드는 1183년 가을에 아델과의 결혼을 선언하고, 교회의 지지를 얻어냈다. 또한 필리프 2세와의 우정 및 동맹을 두고 리처드와 조프루아가 경쟁을 벌였고 리처드의 선언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1183년 12월 6일, 지조흐에서 필리프 2세와 헨리 2세가 만나 회담을 열었다. 청년왕 헨리의 미망인인 마르가리트의 지참금이었던 지조흐와 노르망 벡쌍은 아델의 지참금으로 합의되었고, 헨리 2세는 아델이 리처드가 아니면 존과 결혼할 것이라고 알렸다. 이때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헨리 2세가 필리프 2세에게 바다 건너 그의 모든 땅에 대해 전부터 결코 바라지 않았던 충성 서약을 했다고 기술했다.[10]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는 샹파뉴 백작 앙리 1세의 미망인인 마리[11]와 재혼을 약속했으나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포르투갈 공주 테레사와 재혼했고, 테레사의 과부산에 질녀 이사벨의 지참금에 속한 영지를 포함시키는 것으로 필리프 2세를 도발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제2대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에게 사절단을 보내 프랑스뿐만 아니라 브르타뉴까지 침공할 것을 설득했다.

필리프 2세는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지지를 일약에 확보하여 그의 계획을 가로막았고, 플랑드르와 에노를 이간질해 그들이 이전투구하도록 만들었다.

참고로 이 시기에 아주 아름다운 일화가 전해진다. 북프랑스 군벌들에 대한 각종 분열 공작을 본격화하기 이전의 필리프 2세가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의 동맹국이자 장인인 에노 백작 보두앵에게 일언반구없이 왕비인 이사벨과 이혼하겠다며 선언하고, 여러 동맹국이 그를 지지했을 때, 궁지에 몰린 14세의 이사벨은 이렇게 분투했다.
이혼 당일, 이사벨 왕비가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고, 촛불을 든 채 맨발로 거리를 걸어다니며 교회들을 방문했다. 그리고 재단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자신을 파멸시키려는 사악한 이들의 조언으로부터 구원해주십사고 신께 기도했다. 곤경에 처한 왕비를 보고, 나병 환자들과 빈민들이 왕궁으로 몰려가 이혼 반대를 크게 부르짖었다.

... 수많은 군중이 왕과 고관들과 대치하여 길을 막아세우고 침묵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왕이 그녀에게 말했다.

"내 왕국에 그대가 남편으로 삼고 싶은 봉신이 있다면 말하시오. 내가 어떤 대가를 치르든 그대가 그 자를 얻을 것이오."

왕비가 아주 상냥히 대답했다.

"하느님은 그대가 잠들던 침대에 다른 이가 잠드는 걸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서 왕비는 흐느껴 울었고, 마음이 움직여진 그가 말했다.

"..잘 말했구려. 그대를 보내지 않으리다."

그리고 그는 왕비를 품에 끌어안았다.

후일담은 링크 참고[12]

1185년 초,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리처드가 제프리를 극심하게 적대했다고 기술했다.

또한 B. B 브로턴의 연구에 따른 1185년 초, 리처드의 가까운 친우이자 리무쟁의 유명한 트루바두르가 작곡한 노래가 성행했다.
참으로 타락한 사람들! 공성전을 하고, 몇 주 몇 달간 성대한 선물을 퍼부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며, 용병과 트루바두르에게 돈을 쓰던 남자들은 어디에 있단 말이오? 어디서 그 유일한 남자를 볼 수 있소? 내가 용기내서 말해 보리오?

프랑스 왕이 아름답고 고귀한 땅 지조흐[13]를 리처드 공께 준다면, 그는 너무 많이 고마워 할 것이네. 그러나 프랑스 왕이 내 마음 같다면, 리처드 공이 그를 만나지 않고도 그를 슬프게 하려는 충동이 치솟지 않을 것이네. 그리고 그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 자신을 억누른다오.

리처드 공께 어서 전해주게나! 내 눈에 리처드 공은 사자요, 필리프 왕은 어린 양으로 보인다오.

'리처드는 우두머리 수컷이요, 필리프는 사냥감이다.'정도가 되나, 필리프 2세의 반응은 알려진 바 없다.

이 무렵, 리처드가 아라곤 왕 알폰소 2세와 나바라 왕 산초 6세 사이의 분쟁을 중재한 뒤 산초 6세가 딸 베렝겔라 나파로아코아에게 몬레알의 일부 영지를 주었다. 몇몇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1185년부터 리처드가 신붓감으로 베렝겔라를 점찍고 비밀리에 약혼 절차를 밟았다고 주장했다.[14]

그 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15]
프랑스 왕이 피리를 손에 들고 풀밭에 앉아서 깊은 명상에 잠겼다. 그가 눈물을 흘리자, 궁정에 있는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 한 남자가 다른 이들에게 말했다

"왕의 생각을 말할 수 있다면 그자에게 기꺼이 나의 최고의 말을 주겠다."

한 탐욕스러운 이가 벌떡 일어나 왕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생각을 터놓는다면 마치 그가 선물하는 것마냥, 그러한 조건으로 약속된 말을 그에게 주겠다는 것을 애원했다. 그를 모르고 있지 않은 왕이 마음의 비밀을 터놓았다.

"한 가지 생각이 나오."

그가 말했다.

"신께서 샤를마뉴 시대의 영광을 프랑스가 되찾을 수 있는 은총을 내게 주실 것인지, 아니면 나의 후계자 중 한 사람에게 주실 것인지 알기 위함이었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그의 시대의 역사》

1185년 7월, 솜므에서 필리프 2세와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의 군대가 대치했다. 그러나 전투 직전,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가 회담을 제의했는데,[16] 불과 19세의 필리프 2세는 그로부터 아미앵, 몽디디에흐, 후아, 슈아지 오 바끄, 뚜호뜨를 얻고, 베르망두아와 발루아를 상속분으로 차지하는 협정을 체결하는 것으로 플랑드르 영지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그 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플랑드르 백작과 전쟁 도중 프랑스 왕이 랭스 성직자들에게 군자금을 요구하자, 그들은 "왕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고 있으니 더이상 줄 것이 없다"고 했다. 주는 것을 그들에게 손해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후에 백작과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도래했을 때 몇몇 영주들이 랭스 교회들을 약탈하고 황폐화시키자, 왕은 그들의 구원 요청에 이렇게 말했다.

"한때 그대들이 기도만으로 날 구원했으니, 이제 돌려주겠소. 기도는 기도로 갚겠다."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1185년 겨울, 필리프 2세는 병을 앓고 있던 헨리 2세를 방문하여 3일간 머물며 그를 돌보았다.[17]

1185년 말,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가 반항적인 봉신들을 응징하는 도중 이로 인해 교구의 피해가 막심해지자, 필리프 2세는 이를 명분으로 부르고뉴 내전에 개입하여, 위그 3세의 반항적인 봉신들에게 용병을 지원했다. 12월, 썽쓰에서 필리프 2세가 위그 3세를 소환했으나 그가 이에 불복하자 이듬해 1월, 필리프 2세는 이를 명분으로 출군하여 부르고뉴를 기습, 위그 3세에게 벌금으로 30,000리브르를 요구했다.

1186년 초, 필리프 2세는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와 연합하여 부르고뉴를 침공해, 주요 도시까지 치고 들어가 샤띠용을 점거했다.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는 오흐비에또로 달려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아들이자 이탈리아의 왕으로 막 즉위한 하인리히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프리드리히 1세가 아들의 개입을 금지했다. 4월, 프리드리히 1세의 중재하에 필리프 2세는 위그 3세와 화해하고, 그로부터 거액의 배상금을 뜯어냈다.

조흐덩의 말을 빌리자면, 북프랑스와 동프랑스를 어느 정도 안정화한 필리프 2세의 목표는 본격적으로 플랜태저넷 왕가로 향했다.

1186년 5월, 필리프 2세와 제프리는 헨리 2세와 리처드를 대적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18세기 역사가들의 추측에 따르면,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던 리처드의 노고를 완전히 망쳐놓고 부친 헨리 2세와의 반목을 악화시키기 위해, 제프리가 필리프 2세에게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 재촉을 귀띔하고, 이 의도를 안 필리프 2세가 흔쾌히 받아들여 헨리 2세에게 공개적으로 압력을 넣었다. 제프리는 부친과 형에게 맞설 낭트 국경의 영주들과 동맹을 맺고, 뉴버그의 윌리엄은 제프리가 앙주를 탐냈다고 기술했다.

에버라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시기 리처드는 제프리와 필리프 2세의 농간에 발목이 잡힌 채, 모후 엘레오노르를 앞장세워 자신과 공동으로 아키텐 통치권을 행사하려는 부친 헨리 2세를 묵인해야 했다.

그러나 1186년 8월 19일, 제프리는 파리에서 27세의 나이로 의문사했다. 호버든은 제프리가 병에 걸렸으며, 마상창시합에서 낙마 사고로 죽었다고 기술했다. 캔터베리의 저베이스와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마상창시합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제프리가 병으로 죽었다고 기술했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 또한 마상창시합을 언급하지 않았고, 제프리가 도시에서 필리프 2세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중 병에 걸렸다고 기술했다.[18] 이 뒤는 다음과 같다.
잉글랜드 왕 헨리의 아들이자 저명한 브르타뉴 공작 제프리가 병석에 누웠다. 그를 상냥하게 지극히 사랑한 프랑스 왕은 파리의 모든 의사를 불러모아 공작을 살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고 8월 19일,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작은 죽음을 맞이했다. 프랑스 왕이 성모 마리아 대성당(노트르담 대성당)에 도착할 때까지 그의 육신에 파리 신민들과 기사들이 존중과 경의를 바쳤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에서 수사와 성직자들이 가장 엄청난 헌신을 다하여 장례를 치렀다.

다음날, 프랑스 왕은 블루아 백작 티보와 파리로 와서 석관에 있는 그의 육신에 방부 처리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주교와 성직자들이 있는 가운데, 파리 주교와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가장 높은 제단 앞에 공작을 묻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프랑스 왕은 블루아 백작 티보, 누이인 샹파뉴 백작 부인 마리와 그녀의 아들 앙리, 그리고 잉글랜드 젊은 왕의 미망인 누이 마르가리트와 함께 자신의 궁정으로 돌아갔다. 그가 애도한 위대한 왕자가 죽은 운명으로, 몹시 비통해했다.

그들이 우정어린 위로를 하는 동안, 친절하고 자비로운 눈으로 바라보던 부왕 루이처럼 왕자의 마지막 순간들은 그의 마음에 항상 다시 나타나고 항상 그의 마음을 차지했다. 프랑스 왕은 심지어 부왕의 영혼을 위해,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브르타뉴 공작의 영혼을 위해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성직자 넷을 두었다.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제프리의 장례식에서 필리프 2세의 반응을 기술했다.
프랑스 왕은 그의 죽음으로 몹시 깊은 슬픔과 절망에 시달렸다. 그를 향한 사랑과 존중을 증명하기 위해 축복받은 처녀에게 바쳐진 파리 대성당의 높은 제단 앞에 공작을 묻으라 명령했다. 장례식이 끝날 무렵에 그가 열려진 무덤 속에 안치된 공작의 관을 향해 뛰어들고자 발버둥치는 것을 주위에서 겨우 말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부친의 슬픔은 그 이상이었다. 젊은 왕의 죽음을 다시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오페라》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에게 자신이 상위 군주이므로 제프리 2세의 딸 엘레오노르 드 브르타뉴의 후견인임을 주장하여 양육권을 청구했고, 툴루즈에서 툴루즈 백작 레몽 5세을 제압하는 리처드를 철수시킬 것을 요구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노르망디 국경 지대에 긴장감이 고조되었다고 기술했다.

3.4. 리처드

그해 겨울, 필리프 2세는 리처드와 동맹을 맺었다.

그 무렵, 유년기부터 프랑스 궁정에서 필리프 2세와 함께 자랐던 절친 르노 드 다마르탱이 필리프 2세에게 등을 돌리고 헨리 2세에게 붙었다.[19]

1187년 초,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프랑스 왕의 기사 리샤르 드 발이 지조르와 트리 사이에 있는 발에서 그의 구역의 성을 요새화했다. 지조르의 콩스타블인 앙리 드 베르가 이를 불쾌히 여기고, 가능한 한 그 일을 방해하는 것을 소망하여 그의 부하들과 함께 그곳으로 갔다. 리샤르 드 발의 군사들이 나가서 그를 만나고 교전이 벌어졌다. 이 때 리샤르의 아들이 살해당하고, 그의 많은 군사들이 부상을 입었다. 그 후, 앙리 드 베르와 그의 부하들이 달아났다. 그러나 앙리 드 베르는 지조르로 감히 돌아가지 않고, 푸아투 백작 리처드에게 갔다.
《호버든의 연대기》

1187년 3월 29일, 제프리 2세의 미망인이었던 브르타뉴 여공작 콩스탕스가 그의 아들 아르튀르(아서)를 낳았고, 4월,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에게 아르튀르의 양육권도 청구했다. 누나 마르가리트를 헝가리 왕 벨라 3세와 결혼시키며, 헨리 2세에게 그녀의 지참금이었던 지조흐와 노르망 벡쌍의 영유를 내놓고 누나 아델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헨리 2세가 이 문제를 질질 끌고 양육권 청구를 거절하여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필리프 2세는 리처드를 끌어들이기로 했다.

5월 말, 필리프 2세는 군대를 이끌고 헨리 2세의 영토인 이쑤덩을 점거했다. 헨리 2세와 리처드가 대군을 이끌고 샤토루에 당도, 필리프 2세에게 통첩했다.
'우리가 상속받은 이 땅을 떠나 그대의 왕국으로 철군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 전쟁에서 우리의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그대에게 주어진 것은 전투 혹은 철군뿐이다.'

중무장한 전군이 전투 대형을 갖추고 대치하여 공격 명령을 기다리는 상황하에, 리처드가 군사 경계선에서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를 대면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이 때 필리프 1세가 필리프 2세의 편에 서서 리처드에게 충고했다고 증언했다.
"후일을 생각하시오. 왜 프랑스 왕이 그대를 상냥하게 대하고 그대가 기대하는 바에 대해 확신을 주고 있겠는가? 어리다고 그를 얕봐서는 아니되오. 그는 어리긴 하나 정신이 원숙하고 통찰력과 결단력이 뛰어나며 옳고 그름에 밝고 자신이 베푼 것은 잊지 않는 위인이오. 내가 바로 산증인이오. 프랑스 왕 때문에 귀중한 많은 것을 잃었고 지금도 후회하고 있소이다. 여기서 그를 지지한다면 필시 그대에게 이익이 될 것이오."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이 사이에 벌어진 하단의 사건을, 많은 이들이 불경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신의 경고로 믿었다고 기술했다.[20]
푸아티에 백작 리처드의 부하들이 샤토루의 교회 앞에 모여서 주사위 놀이를 했다. 그들 중 사악한 이가 도박에서 돈을 잃자 사탄에 사로잡혀 성모 마리아와 신께 신성모독을 퍼부었다. 주여. 오, 비참하도다! 이 새로운 이스카리옷 유다가 돌을 들더니 모두가 보고 있는 가운데,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상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녀의 팔이 부수어지고 아기 예수가 땅으로 떨어졌다.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목격자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즉시 그 상처에서 붉은 피가 솟구치며 땅을 적셨다고 했다. 잉글랜드 왕이 가장 어린 아들인 존을 그곳으로 보내 이 사태를 수습하라고 명령했다.

1187년 6월 13일, 샤토루에서 필리프 2세와 헨리 2세가 만나 회담을 열었다. 필리프 2세는 그로부터 전투 한 번 치르지 않고 이쑤덩과 프레티발을 차지했으며, 2년 간의 휴전으로 협정을 체결했다. 대부분의 현대 역사가들은 이 협정에 대해 앙주 제국의 전력이 카페 왕가를 압도한 시점에서, 하단의 호버든의 기록을 근거로 리처드가 필리프 2세의 편에 서자 헨리 2세가 아들의 배반을 두려워하여 수긍한 결과로 보았다.[21]

회담이 끝나자 필리프 2세와 리처드는 파리로 가서 함께 지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둘을 다윗요나단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때, 필리프 2세는 21세, 리처드는 거의 30세였다.
Ricardus dux Aquitaniae, filus regis Angliae, morum fecit cum Philipo rege Franciae, quem ipse in tantum honoravit per longum tempus quod singulis diebus in una mensa ad unum cantinum manducabant, et in noctibus non seperabat eos lectus. Et diliexit eum rex Franciae quasi animam suam; et in tantum se mutuo diligebant, quod propter vehmentem delictionem quae inter illos erat, dominus rex Angliae nimio stupore arreptus admirabatur quid hoc esset.
잉글랜드 왕의 아들이자 아키텐 공작 리처드가 프랑스 왕 필리프와 함께 머물렀다. 프랑스 왕이 너무 깊이 그를 존중하여 매일 같은 식탁에서 같은 접시로 음식을 먹었고 밤에는 침대가 그들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를 자신의 영혼으로 사랑했다. 그들의 열정적인 사랑 때문에 잉글랜드 왕이 깜짝 놀라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놀라워했다. 앞일에 대비하여 그가 이 갑작스러운 사랑이 어떤 불길한 음모의 전조인가 알아낼 때까지 잉글랜드로 돌아갈 계획을 미루고, 아들 리처드를 소환하는 서신을 프랑스로 보냈다. 리처드는 잉글랜드 왕의 명령을 평화로이 따르는 시늉을 하다 시농으로 가서, 부친임에도 불구하고, 왕의 많은 보물을 약탈하고, 푸아투 성들을 방비케 하며, 왕의 부름을 거절했다.
《호버든의 연대기》

C. 재거는 '사랑이 정치적 유대감을 뜻할 때도 쓰이는 표현'이며, 헨리 2세의 반응은 분노한 아버지가 아니라 배신당한 자의 것이고,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가족의 명예가 아니라 위험에 처한 군사적 행동이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헨리 2세의 유일한 대응이 계획의 변화이며, 그가 발견한 건 동성애가 아니라 불길한 음모임을 강조했다. 길링엄은 '당시 침대를 나누는 행위는 정치적 동맹의 표명'이고, 둘의 행위는 정치적 이해를 위한 동맹의 과시라고 분석하여, 리처드의 성적 성향에 관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최근에는 '열정적인' 원문이 그 당시 성이 수반된 사랑이 지나침을 비판하는 의미로 쓰였다고 분석하여 둘이 단순한 우정은 아닐 것이란 의견이 있다.

참고로, 하단의 기록은 1187년 6월 12일로 돌아가 샤토루 협정을 다룬 동시대 다른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의 기록이다.[22]
리처드 백작이 프랑스 왕의 막사를 방문했다. 많은 이들 앞에서 그가 프랑스 왕에게 말했다.

"그대의 사랑을 받을 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맨발로 성지까지 걸어갈 것이오."[23]

이것을 들은 한 백작이 말했다.

"어떤 차림이든 걸어서 성지까지 가는 건 시간이 아까울 것이오. 하지만 그대가 훌륭한 갑옷을 입고 말에 오르면, 신이 보우하사, 그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그리하여 리처드 백작이 잉글랜드 왕과 일언반구 상의 없이 군사 경계선에서 프랑스 왕과 사적인 대화를 나눈 후, 그에게 평화로이 이끌려 군사들을 이끌고 부왕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잉글랜드 왕이 이 일을 들었을 때, 다른 의중을 의심하고, 격렬하게 괴로워하며, 즉시 프랑스 왕의 신하들에게 가능한 속히 회담을 열자고 서신을 보냈다. 이에 랭스 대주교와 블루아 백작 티보를 비롯한 많은 여러 귀족이 잉글랜드 왕에게 왔다. 그들에게 잉글랜드 왕이 이렇게 말했다.

"나의 친우들이여! 나의 영주들이여! 그대들도 알다시피 나는 죄 많은 남자일세. 살면서 온갖 사악한 죄를 저질렀소. 이제 남은 생은 죄를 씻어 없애고 신과 화해하고 싶소. 하지만 돈과 군사가 있으니 그로 하여금 프랑스 왕을 기쁘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이교도를 무찌를 것이오. 그러니 부디 나의 주군에게 가서 2년 간의 평화를 내게 베풀어 달라고 간곡히 청해 주오. 만일 그가 평화를 베풀지 않으면 신 앞에서 내 영혼의 구원에 대해 답해야 할 것이오. 그대들도 그에게 내 진심을 전하지 않으면 어김없이 신 앞에서 답해야 할 거요."

그는 이런 식으로 구구절절 더 말했다.[24] 모두가 지켜보며 불가사의한 광경으로 생각하는 가운데, 심지어 그는 흐느껴 울었다. 귀족들은 프랑스 왕에게 돌아가 잉글랜드 왕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프랑스 왕은 미소를 띄고 말했다.

"그가 한 말을 믿소?"

하지만 귀족들이 잉글랜드 왕이 그의 뜻을 프랑스 왕에게 전해 주길 애걸복걸했다고 증언하며, 평화 협정을 체결할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이에 프랑스 왕이 승낙했다. 그들이 잉글랜드 왕에게 가서 프랑스 왕의 뜻을 전했을 때, 잉글랜드 왕은 평화 조약의 상세 내용에 대해 마음이 벌써 달라져 있었다. 그는 조약에 대해 엄중하고 예리하게 숙고하여 엄청난 위험을 발견했으니 목전에 닥친 불행을 좇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귀족들이 프랑스 왕에게 돌아가 들었던 것을 스스럼없이 전했다. 프랑스 왕은 분노하여 새벽에 전투 준비를 할 것을 명령했다. 이 일이 잉글랜드 왕에게 보고되자, 그는 급히 리처드 백작을 불러 상의했다. 그가 답했다.

"아버지께서 어제 청하신 평화도 거부한 마당에 무슨 조언을 하리까? 염치 불구하고 휴전이나 합시다."

하지만 부왕이 고뇌하는 것을 보더니, 리처드 백작이 어제 부왕이 청했던 평화를 이루고 오겠다고 말했다. 왕이 그리하라고 했다. 그러더니, 리처드 백작이 프랑스 왕에게 무장을 하고 갔다. 그는 왕에게 자신의 검을 주고, 투구를 벗으며, 무릎을 꿇고는, 나의 이 요동치는 영혼을 달래 주오 애원했다. 부왕에게는 평화를 베풀어 줄 것을 간청했다.[25] 그리고 이렇게 제의했다.

"부왕이 어떤 형태로든 평화를 위반하면 나는 그대의 처분에 온전히 맡겨질 것을 약속하오. 날 파리로 데려가시오."

여러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프랑스 왕은 친우와 귀족들을 따로 불러 리처드 백작의 제의를 오랜 시간 동안 심사숙고했다. 마침내 왕은 내키지 않아하며 그를 승낙하고 파리로 데려갔다. ... 리처드 백작은 파리를 평화로이 방문했다.
《Historiae anglicanae scriptores: Adjectis variis lectionibus Glossario X》

윌리엄 마셜의 역사 작가는 샤토루 협정 체결 후 헨리 2세가 파리에서 지내는 리처드에게 노르망디로 소환하는 서신을 여러 번 보냈으나, 리처드가 응하지 않고 충복 기욤 드 롱샴으로 하여금 사절단을 상대하게 했다고 기술했다.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이 시기 프랑스 왕이 리처드 공작의 심장에 부친을 향한 불신의 씨앗을 심었다고 기술했다.

참고로 기욤 드 롱샴은 동성애자로 결론이 났고,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는 체구가 왜소하고 생김새가 추하며 원숭이를 닮았다. 여자를 지독하게 혐오하고 시도 때도 없이 여리고 아름다운 소년들만 게걸스럽게 탐닉했다. ... 그는 궁정을 동성애 소굴로 만들고 이성애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심지어 동성 간 성행위가 충격적일수록 기뻐했다.
《오페라》

또한 리처드는 동시대 최고의 군사적 천재성과 용기, 그리고 성정과 관련해 '또 다른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평을 받았다.[26] 대부분의 학자들은 군사적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로 보았고, 케임브리지 교수 엘 빌도 이를 인정했다. 그러나 리처드의 성적 성향 연구에서 당대의 교본을 리처드에 대한 역사가의 평가와 트루바두르의 노래와 비교 분석, 리처드가 동성애 성향이 있다는 가정하에 성적 위치 측면에서 카이사르 평판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상스러운 기록에서 나왔다는 지적이 있다.[27]
아우구스투스의 수치스러운 소문은 그의 숙부 카이사르의 육욕에 복종하여 후계자 자리를 꿰찼다는 것이었다. 이는 카이사르가 직접 아우구스투스에게 깊이 빠져들었다고 마지못해 시인했다는 소문에서 나왔다. ... 몇몇 이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조롱했다.
《현자의 발자취와 궁정인의 경거망동》

1187년 7월, 서유럽 전역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소식이 전해졌다. 하틴 전투 패배로 인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것이었다.

1187년 9월 5일, 필리프 2세의 첫 왕비 이사벨 드 에노가 왕세자 루이를 낳았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프랑스 왕이 대단히 기뻐했고, 파리 신민들이 밤새도록 축하했다고 기술했다.

인용 삭제.[28]

1187년 가을,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하단과 같이 기술했다.
리처드 공작이 부왕에게 돌아가 모든 일에서 복종했다. 그리고 부자간에 불화를 심으려 애쓰는 이들의 사악한 조언을 따랐던 것을 참회했다. 그래서 그들은 앙제로 모였고, 그곳에서 아들은 부왕의 온순한 신하가 되었다.

이 무렵,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에게 지속적으로 요구해 온 제프리 2세의 자식들에 대한 양육권 청구를 포기했다.[29]

1187년 11월, 리처드는 보베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귀족들과 앞장서서 십자가를 짊어졌다. 아들의 결정을 전해들은 헨리 2세는 5일간 칩거하는 것으로 입장을 표시했다. 이를 알게 된 리처드는 십자군을 불참하는 대가로 부친에게 자신을 상속인으로 지명해 줄 것을 청했으나, 그는 답을 미루었다.

1187년 12월, 필리프 2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회담을 열었다. 둘은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를 견제하는 데 대해 입장의 일치를 확인했고, 필리프 2세는 그에게서 플랜태저넷령을 침공할 시 군사적으로 협력하겠다는 확약을 받아냈다. 그리고 왕비 이사벨의 부친 에노 백작 보두앵과 교섭하여 동맹을 다졌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노르망디 국경 지대의 긴장감이 급격히 고조되었다고 증언했다. 그 후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에게 누나 마르가리트의 지참금이었던 지조흐를 내놓고, 리처드와 누나 아델의 결혼을 요구했다.

1188년 1월 21일, 필리프 2세와 헨리 2세는 티레 주교의 연설에 깊은 감동을 받고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평화의 입맞춤을 나누고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할 것을 맹세했다.
연설을 마친 티레 주교가 프랑스 왕과 잉글랜드 왕에게 성지를 어떻게 도울 것인지 물었다. 겨우 소년이었던 탓에, 프랑스 왕이 잉글랜드 왕에게 먼저 말해볼 것을 상냥하게 채근했다. 왕이 답했다.

"내 제안하리다. 이참에 나와 함께 성지와 성묘를 방문하세. 내 결정했소. 힘이 다하는 데까지 기필코, 성지를 도울 것이오. 이번에 거액의 돈을 모금해서 보내리다."

... 프랑스 왕은 그토록 대단히 절정에 달한 말을 듣고도, 감히 어떤 약속도 하지 않고 묵묵부답이었다.
《궁정인의 자질구레한 것들에 관하여》

두 왕은 살라딘세를 걷기 시작했으나, 필리프 2세는 원성에 부딪히자 즉각 그만두었다.

1188년 봄, 리처드의 아키텐과 푸아티에의 봉신들이 툴루즈 백작 레몽 5세와 결탁하여 대반란을 일으켰다. 리처드는 그들을 압도적으로 격파하여 수많은 귀족들과 병사들을 포로로 잡아 눈을 뽑고 가죽을 벗겼다. 그들의 친족들이 파리로 와서 필리프 2세에게 탄원하자, 그는 리처드에게 포로들을 석방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툴루즈 영지까지 밀고 들어와 께흐씨를 점유했고, 궁지에 몰린 툴루즈 백작 레몽 5세는 상위 군주인 필리프 2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에게 리처드의 공격 중단을 명령할 것을 요구했으나, 헨리 2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나의 아들 리처드는 나의 바람과 충고로 그러한 일을 한 것이 아니오. 그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는 그러한 일을 한 것이오. 더블린 대주교가 이리 전하였소.'

필리프 2세는 서신을 읽고 격분하여 협정을 깨고 군사를 이끌어 샤토루를 급습했다. 그리고 헨리 2세의 영지인 베리를 점유했다.

헨리 2세가 필리프 2세의 돌발 공격에 대한 이유부터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와 툴루즈 백작에게 준 피해에 대해 리처드 백작에게 복수한 줄 알라."[30]

헨리 2세가 주교들을 사절단으로 보내어 필리프 2세의 분노를 가라앉히려 했으나, 그는 분개하며 요지부동이었다. 필리프 2세가 뚜헨느 부근까지 침공하자, 7월 10일에 헨리 2세가 군사를 이끌고 잉글랜드에서 노르망디로 상륙했으며, 존이 합류했다. 상황을 알게 된 리처드가 필리프 2세와 싸우겠다며 당장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베리로 달려갔다. 하지만 필리프 2세는 병력을 남겨두고 이미 파리로 철수한 후였다.

참고로, 그 해 리무쟁의 트루바두르가 하단의 노래를 작곡했다.
리처드 백작은 토끼로 사자를 사냥한다네. 그래서 평원과 숲 속에 남아 있는 사자가 없다오. 그래서 그는 솔개로 거대한 독수리를 잡으며, 참매를 풀어 놓고 해리어 사냥개를 달리게 한다네.

필리프 왕은 매로 참새와 조그만 새를 사냥한다네. 그의 신하들은 그가 조금씩 언덕을 내려가고 있다는 진실을 감히 말하지 못한다오. 올해 리처드 백작은 앙굴렘을 차지하고, 그곳과 필리프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낚아챈 툴루즈에서 강해지고 있다네.

하지만 필리프가 분노하지 않으니, 필리프가 그의 누이, 그리고 그녀를 저버리는 지나치게 자만하는, 그녀의 약혼자를 떠올리도록 해보세. 리처드가 그녀를 취하는 것을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오. ㅡ내 눈에 이 죄는 혐오스럽구려!ㅡ 그는 계속해서 위증하는 중이라네. 나바라 왕이 딸에게 그를 남편으로 주었기 때문이오.[31]

아스브리지의 말을 빌리자면, 헨리 2세는 한 발 물러서서 먼저 전쟁이 아니라 외교적인 수단을 선택했다. 루앙 대주교 월터와 윌리엄 마셜을 사절단으로 보내 필리프 2세에게 베리에 대한 배상을 요구했으나, 그는 베리를 차지하고 노르망 벡쌍 전역를 탈환하겠다고 선언했다. 블루아 백작 티보 5세,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가 필리프 2세에게 합류했다.

1188년 8월 31일, 리처드가 부친에게 가세하기로 확약했다. 9월, 그들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것은 대대적인 전쟁이었다. ... 땅이 초토화되고, 수치스럽게 황폐해졌다. ... 그들은 파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치닫고, 망트까지 시골 지역을 불태웠다. 나이 많은 왕은 남쪽으로 더 멀리 내려가 모든 것을 불태우고, 가는 곳마다 귀중하고 좋은 전리품을 차지하며, 어떤 행동도 자제하지 않았다.

... 플랑드르 백작이 이렇게 충고했다. "적을 멸하고 땅을 철저히 파괴하라. 모든 것을 불태워 적들에게 아무 것도 남기지 마라. 아침 식사를 하는 곳인 나무와 초원도 불태우라."
《윌리엄 마셜의 역사》

1188년 10월 6일, 두 왕은 샤티용에서 회담을 열었으나 최종적으로 결렬되었다.
그곳에서 동의되어야 할 평화 조약은 다음과 같았다. 프랑스 왕은 잉글랜드 왕으로부터 점거한 영토를 무엇이든 반환하고, 리처드 백작은 툴루즈 백작으로부터 무력으로 점거한 영토를 무엇이든 반환해야 했다. 그 자신의 표리부동함으로 자극받은 프랑스 왕이, 잉글랜드 왕에게 빠씨의 요새를 약속의 증표로 줄 것을 요구했다. 잉글랜드 왕이 이를 거절했기 때문에 그들이 불쾌해진 채 갈라졌다. 그리고 프랑스 왕이 그 장소를 떠나며 빨뤼의 요새를 차지했다.

그러더니, 프랑스 왕이 고용한 브라반트 용병대에게 부르쥬까지 행군하면 그곳에서 넉넉한 보수를 지급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부르쥬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들로부터 말, 무기, 그리고 모든 돈을 빼앗고 옷까지 벗겨서 알몸으로 내쫒았다.

그런데 리처드 백작이 프랑스 왕에게 제의했다.[32]
"부디 나의 궁정으로 와 주오. 툴루즈 백작과의 문제에 대해 그대의 판결을 달게 받겠소."
《호버든의 연대기》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리처드의 제의가 헨리 2세를 노발대발하게 했다고 기술했다.

필리프 2세는 이 틈을 타서 온갖 감언이설로 리처드를 구워삶아 부자 사이를 이간질했다. 그리고 헨리 2세가 3남 리처드를 제치고 막내 존을 계승자로 지명할 것이란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1188년 11월 18일, 봉물랭에서 필리프 2세는 리처드를 대동하여 헨리 2세와 만나 회담을 열고,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 및 리처드를 헨리 2세의 계승자로 지명할 것을 요구했다.[33] 헨리 2세가 뜸을 들이자 그 자리에서 리처드는 무릎을 꿇고 대륙의 모든 플랜태저넷령에 대하여 필리프 2세에게 충성 서약을 했다.

전세가 기울어지자 헨리 2세의 봉신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필리프 2세와 리처드에게 붙었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를 대동하고 돌아다니며 둘의 동맹을 두려워하는 영주들의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1188년 12월, 두 왕은 다음해 4월 16일까지 휴전에 합의했다. 이 기간에 헨리 2세는 사절단을 보내서 리처드와의 화해를 계속해서 시도했고, 교황의 대사와 주교들이 온갖 외교 수단을 동원하여 부자간의 분쟁을 해결하려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189년 6월, 필리프 2세와 리처드는 전쟁을 일으켜, 르망에서 쉬농까지 헨리 2세를 몰아냈다. 7월 5일, 셋은 콜롱비에르에서 회담을 열었다. 필리프 2세는 제3차 십자군 원정을 마친 즉시 리처드와 아델이 결혼[34]할 것과 그 외 가장 굴욕적인 조건들을 헨리 2세에게 강요하여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리고 앙주와 벡쌍의 일부를 차지하고 마지막으로 헨리 2세의 요청으로 앙주 제국의 배반자 명단을 보냈다. 맨 위에는 헨리 2세가 가장 아끼는 아들 존이 있었다.

이것이 헨리 2세가 급사하는 원인이 되었고, 1189년 7월 6일, 그는 적자들을 저주하며 "패배한 왕, 수치, 수치로다"라는 말을 남기며 세상을 떠났다.

4. 리처드 1세와 대립

4.1. 3차 십자군 결성

1189년 7월 22일, 필리프 2세와 리처드는 쇼몽 부근에서 회담을 열었다.
프랑스 왕이 노르망디 공작 리처드에게 지조흐와 다른 많은 영토들을 줄 것을 요구했다. 보는 사람들이 진저리가 날 정도였다. 하지만 공작은 그렇게 한다면 영원한 불명예와 손실임을 알았다. 대신 그의 부왕이 지불해야 할 거액의 배상금에 사천 마르크를 얹어주었다.
《호버든의 연대기》

9월 3일, 리처드가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로 즉위했다. 그는 헨리 2세를 배반하고, 자신의 편을 든 이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11월,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그대의 우정은 우리가 성지를 돕고자 하는 소망으로 불타고 있으며 신을 섬기는 가장 열렬한 맹세를 한 것을 알게 될 것이오.'

참고로 이 무렵, 역사가들이 3차 십자군과 관련하여 거론하는 리처드 1세의 건강 상태에 대한 기록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신중함보다 너무 이르고 과도한 군사적 행동이 왕의 건강을 망가뜨리고 기력을 달리게 하여, 동방 원정대가 그를 급속히 지치게 하리란 말이 돌았다. 몇몇 이들은 그가 나흘마다 앓는 오한으로 말미암아 육체가 오염되어 그 엄청난 중노동을 버티지 못하고 오래 살 수 없을 것이라 떠들었다. 이 주장의 논거는 그가 안색이 창백하고 지나치게 비만인 것 말고도 확실하고 추한 증상이 있다는 것이었다.
《잉글랜드 국정의 역사》

리처드 1세가 12월 12일에 노르망디로 건너와, 두 왕이 12월 30일과 이듬해 1월 13일, 두 차례 우정의 맹세를 하고, 4월 1일 베즐레에서 3차 십자군을 위해 회동하기로 했다.
그 때 리처드 왕이 프랑스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젊은 남자이자 새로 왕위에 오른 왕임을 그대에게 반드시 말해야 하오.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그대와 함께 같은 길로 타지에 가기로 약속했소. 만약 이 일이 그대를 기쁘게 한다면 내가 귀환할 때까지 결혼을 미룰 것을 간절히 청하오. 나는 귀환한 후 40일 내에 그대의 누이와 결혼하겠다는 맹세에 묶여 있을 것이오."

... 프랑스 왕은 그의 간청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결혼 연기를 허가했다.
《십자군 역사에 관한 수록본》

이 시기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후에도 필리프 왕을 향한 사랑이 확고부동하였다. 그리고 그를 주군으로 깊이 존중하였다.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힐턴의 표현을 빌리자면, 리처드 1세는 양다리 게임을 이어갔다.

1190년 2월, 리처드 1세는 나바라 왕국 국경 근처까지 영지를 순회했다. 길링엄의 추측에 의하면, 이 시기 리처드 1세는 나바라 왕 산초 6세의 딸 베렝겔라와의 결혼을 준비했다.[35] 지참금은 가스코뉴, 나바라 왕국, 카스티야 왕국과의 외교로 합의하고, 베렝겔라가 3차 십자군 원정에 동행하도록 산초 6세를 설득했다. 리처드 1세가 출정을 한 다음 엘레오노르 다키텐이 나바라를 방문해 그가 있는 곳으로 베렝겔라를 데려 오기로 했고 이 모든 일은 필리프 2세가 알지 못하도록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E.A.R 브라운은 엘레오노르가 헨리 2세와 불륜을 저지른 아델을 싫어하여 베렝겔라를 밀어붙였고, 모후를 극진히 사랑한 리처드 1세가 이 결혼을 수긍했다고 본 반면,[36] 길링엄과 힐턴은 상술된 행적을 바탕으로 결혼을 주도한 건 리처드 1세로 추측했다.

1190년 3월 15일, 필리프 2세의 왕비 이사벨 드 에노가 쌍둥이를 출산했으나 20세의 나이에 난산으로 죽었다. 3월 16일, 리처드 1세가 노넝꾸흐에서 드회까지 8마일이 넘는 거리를 이동하여 필리프 2세를 만났으나, 디스의 랄프는 이 만남의 목적을 기술하지 않았다.[37] 두 왕에게 비보가 전해지자마자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와 헤어져 파리로 달려갔으나, 이사벨의 장례식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파리 주교의 주재하에 이미 끝난 후였다. 필리프 2세는 이사벨과 조상들의 영혼을 위해 노트르담 대성당에 성직자 두 명을 두었다. 쌍둥이 아들들인 호베흐와 필리프도 곧 죽자 필리프 2세는 그들을 제프리 2세 옆에 묻은 뒤 제프리 2세의 친우였던 샹파뉴의 트루베르에게 연금을 지불했다.[38]

리처드 1세는 군자금을 마련하며 "구매자만 찾을 수 있다면 런던도 팔아 치울 것이다"라고 농담했다. 잉글랜드 연대기의 표현을 따른 바, 그는 돈이 짐이 되는 이들의 짐을 아주 강제로 벗겨주었다.

필리프 2세는 원정을 위한 세금을 여전히 한 푼도 걷지 않았다. 역사가들의 표현을 따른 바, 그는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리처드 1세는 휴 드 퓌제, 기욤 드 롱샴을 잉글랜드 섭정으로 임명하고, 모후 엘레오노르 다키텐을 임시로 푸아티에 백작과 아키텐 공작에 서임했다. 이 잉글랜드 섭정에 전혀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존과 이복 형 요크 주교 제프리에게 자신의 허가없이 3년간 잉글랜드 땅을 밟을 수 없다는 맹세를 요구했다. 또한, 수도를 런던과 푸아티에가 아니라 노르망디의 루앙으로 지명했다.[39]
우리는 모든 어떤 경우에서도 서로의 삶과 명예를 보호할 것이나이다. 어느 이도 위험의 시간에 상대방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나이다. 프랑스 왕 필리프는 소유한 도시 파리를 보호하는 것처럼 잉글랜드 왕 리처드의 권리를 소중히 하고 보호할 것이나이다. 잉글랜드 왕 리처드는 소유한 도시 루앙을 보호하는 것처럼 프랑스 왕 필리프에게 동일한 일을 할 것이나이다.

필리프 2세는 파리 방어를 목적으로 한 대규모의 성벽 축조를 명령하고, 모후 아델 드 샹파뉴와 외숙부이자 오른팔인 랭스 대주교 기욤 드 샹파뉴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부재 중에 왕국을 다스릴 대법령을 공포하여 이것으로 섭정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구성된 감시단을 세웠으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법령에 추가했다. 법령의 각 행은 필리프가 먼 거리에서도 프랑스를 관리하겠다는 의도를 보여주었다.

6월 24일, 필리프 2세는 생 드니 대성당에서 성직자들의 축복을 받았다. 필리프 2세는 그들에게 2척의 비단과 순금 십자가로 장식된 커다란 깃발 2개를 선물했다.

같은 날, 리처드 1세는 뚜르에 방문하여 순례자의 자루와 지팡이를 받았다. 리처드 1세가 지팡이를 받아 땅을 짚는 순간 지팡이가 부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1190년 7월 2일, 두 왕은 베즐레에서 회동했다. 프랑스 깃발은 황금색 백합들이 흩뿌려진 파란색이었고, 잉글랜드 깃발은 두 마리 금색 사자가 마주보고 서 있는 붉은색이었다.[40] 그들은 서로를 보호할 것을 맹세했다. 또한 프랑스 병력은 2,000명이었고, 잉글랜드 병력은 8,000명이었으나 십자군 원정으로 얻은 수익은 50대 50으로 나누기로 조약을 맺었다.

7월 4일, 두 왕이 출정했다.
장미가 향기로 가득하고 바야흐로 때가 왔다네. 두 왕은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는 군대의 앞머리에 나란히 섰다네. 두 왕은 서로를 너무나 깊이 존중하여 군대는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조화 속에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네. 온 천지가 진동했다네! 이 젊은이들이 어디서 왔던가. 그들의 분홍빛 뺨을 보아라!
《앙브루아즈의 노래》

두 왕은 육로 대신에 해로를 선택하여 필리프 2세는 제노바로 향하고, 리처드 1세는 마르세이유로 가기로 했다. 그들은 리옹까지 동행했고, 갈라지기 직전 리처드 1세의 요구로, 50대 이상인 세탁부를 제외한 모든 여자의 3차 십자군 참여 금지를 약속했다.
두 왕이 리옹의 도시에 도착했을 때, 병사들이 강을 건너기 위해 다리를 건너는 도중 그들을 따라다니는 수많은 구경꾼으로 인해 다리가 무너졌다. 여기서 두 왕이 갈라졌다. 같은 장소에서 지내는 것이 인파로 인한 혼란을 초래했기 때문이었다.
《호버든의 연대기》
프랑스 왕과 그의 군사들이 제노바로 출발했을 때,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과 (리옹까지)단거리를 동행했다. 그를 향한 우정과 존중 때문이었다. 두 왕이 베즐레에서 서약했던 대로,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먼저 도착한 이가 상대방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 리옹에서 무너진 다리를 다시 지은 건 잉글랜드 왕이었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4.2. 제노바에서

파일:philippeauguste.jpg
필리프 2세 오귀스트(아우구스투스)를 묘사한 미니어처

1190년 8월 1일, 필리프 2세가 이탈리아의 제노바에 도착했다. 해군이 없어서 함대를 따로 구해야 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상인들을 상대로 수완을 발휘하여 함대와 식량을 확보했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곧바로 출발하지 못했다.[41] 8월 7일,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 해군의 도착이 늦어지자 직접 함대와 식량을 확보하고 14일에 제노바에 도착하여 필리프 2세를 방문해 앓고 있던 그를 위로했다.

15일, 리처드 1세가 제노바로부터 30마일 떨어진 포르트피노로 가서 5일 동안 머물렀다. 이 동안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에게 갤리선 5척을 요구했고, 리처드 1세가 3척을 제안하는 것으로 대신하자 갑자기 화를 내며, 리처드 1세가 주겠다는 모든 것을 거절했다.[42]

이 사건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불화의 시작이었다.

8월 24일, 리처드 1세가 포트르 에르콜레에 도착했다. 교황 클레멘스 3세의 사절단이 리처드 1세를 방문하여 교황청에 돈을 헌납할 것을 청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리처드 1세가 분노하여 그들에게 온갖 욕을 들이퍼부었다고 증언했다.

같은 날, 필리프 2세가 이탈리아 남부의 메시나로 출항했다. 그러나 메시나 해협에서 폭풍우를 맞닥뜨려 포도주 부대를 바다에 버려야 했다.

4.3. 메시나에서

영화 <킹덤 오브 헤븐> 中 메시나 항구 묘사 장면

배경은 시칠리아의 새로운 왕 탕크레드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와 시칠리아 왕위를 놓고 싸움이 붙었던 때였다. 시칠리아의 전 왕 굴리엘모 2세의 왕비는 리처드 1세의 여동생 조안이었고, 탕크레드는 조안을 유폐하며 상속분을 돌려주지 않고 있었다.

1190년 9월 16일, 필리프 2세가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당도했다.
프랑스 왕이 메시나에 도착하자, 모든 시칠리아인들이 기뻐하며 프랑스 왕과 그의 군대를 반겼다. 탕크레드 왕의 궁정에서 프랑스 왕이 명예로운 환영을 받았다. 탕크레드 왕은 그에게 식량을 비롯해 심지어 엄청난 돈을 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프랑스 왕세자 루이와 자신의 딸 중 하나를 결혼시킬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필리프 왕은 하인리히 황제와의 우정을 생각하여, 이를 거절했다.[43]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9월 23일, 리처드 1세가 메시나에 당도했다.
다가오는 군대의 위용이 대단했고, 갑옷의 찬란함이 위대했으며,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자, 온 도시가 와들와들 떨며 대경 실색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이 잉글랜드 왕의 위세를 보고 들었고, 잉글랜드 왕의 힘은 프랑스 왕의 힘을 능가했다. 프랑스 왕이 메시나 성벽 안에 군사들을 주둔시키고 도심의 궁정에서 머물었기 때문에, 잉글랜드 왕은 도시 밖에 막사를 세웠다. 프랑스 왕은 자신의 형제인 잉글랜드 왕을 맞이하고, 포옹과 입맞춤은 그들이 얼마나 기뻐하는지를 충분히 표현할 수 없었다.
《스티븐, 헨리 2세 그리고 리처드 1세의 연대기》 3권
리처드 왕이 육지로 가까워지자 프랑스 왕이 보이는지부터 찾았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궁전에서 머물고 있었고, 시칠리아 왕이 프랑스 왕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 궁전을 비우게 한 덕분이었다. ... 두 왕 모두가 서로 만나게 되어 기쁨으로 넘쳤다. 일찍이 그들이 충실한 친우가 되어 서로 좋은 신의를 지킬 것을 함께 맹세했던 것처럼, 두 왕 사이에 엄청난 사랑이 있었다.
《십자군 역사에 관한 수록본》
프랑스 왕과 그의 신하들, 그리고 메시나의 모든 주요 인사들이 해안가에 서서, 잉글랜드 왕과 그의 위상을 보고 듣고 감탄했다. 리처드 왕이 하선하자마자 프랑스 왕과 대면했다. 회담이 끝나자 프랑스 왕은 당장 예루살렘 땅으로 출항했다. 하지만 그가 항구를 떠나자마자 갑자기 바다가 악천후로 바뀌었다. 그는 크게 실망하고 마지못해 메시나로 돌아왔다.
《호버든의 연대기》

최근들어 역사가들은 상단의 호버든의 기록과 당대 사가 디스의 랄프의 "이 회담 후, 프랑스 왕이 승선하고 악천후 때문에 돌아왔다." 기록을 근거로 들어, 필리프 2세의 진짜 속내는 리처드 1세가 달갑잖았다고 추측한다. 과거에는 이 기록들을 주목하지 않고 상단의 첫 번째, 두 번째 기록과 하단의 호버든의 기록을 다루어, 메시나 정박 초기에는 두 왕의 사이가 원만했다고 고수했다.

9월 24일, 리처드 1세가 필리프 2세의 숙소를 방문하고 25일에 필리프 2세가 그의 숙소를 방문했다. 그들의 만남에 대해 호버든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두 왕의 사랑의 애착이 너무나 강하여 그것이 깨질 수 없고 서로를 결코 배반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C. 재거는 두 왕의 정치적 동맹에 대한 지속적인 신의를 경외하는 어조라고 해석했다. 어떤 연대기에서도 이 만남의 목적에 대한 기술이 없으나 몇몇 역사가들은 원정 진행과 관련하여 표면적으로 상호 합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이 무렵, 엘레오노르 다키텐이 베렝겔라를 데려오기 위해 나바라의 수도 팜플로나에 당도했다. 알럼의 말을 빌리자면, 이 모든 일은 필리프 2세가 알지 못하도록 철저히 비밀에 부치기로 했으나 나바라 왕 산초 6세는 대대적인 연회를 열어 서유럽 최고의 부자 신랑 리처드 1세를 사위로 두게 된 기쁨을 보였다.

1190년 9월 28일, 리처드 1세가 유폐에서 풀려나 메시나로 온 여동생 조안과 만났다.
리처드 왕이 그의 누이인 시칠리아 왕비 조안을 만나러 가자, 그녀는 형제의 도착으로 매우 기뻐했다. ... 그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정직하지 않고 탐욕스러운 리처드 왕이 그의 누이에게 과부산을 팔아 치우고 순례길을 동행하자고 청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잉글랜드로 귀국한 즉시 그녀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상환할 것이며 충분히 영향력있고 부유한 남편과 재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십자군 역사에 관한 수록본》

29일, 리처드 1세가 필리프 2세와 동행하여 조안과 만났다.
그녀가 구호소로 오자 두 왕의 사이가 급격히 좋아지고 프랑스 왕이 이 만남을 행복해하며 얼굴이 기쁨으로 달아올랐다. 프랑스 왕의 신하들이 그가 조안과 결혼할 것인지 궁금해 했다.
《호버든의 연대기》

메시나에 둘이 결혼할 것이란 소문이 퍼졌으나 리처드 1세는 10월 1일, 조안을 멀리 떨어진 라 바냐라 수도원으로 보냈다.[44]

한편 대규모의 외국 군대의 존재는 메시나인들의 불안과 반발심을 일으켰다.
잉글랜드 왕은 막사 밖에 교수대를 세우고 그곳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도둑과 강도를 처형했다.[45] 외국인과 그리스인들은 이것이 법과 형벌과 같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왕은 그의 군사들이 범죄를 저지르든 혹은 범죄를 당하든, 전혀 신경쓰지 않고 평화를 유지했다.[46] 그런 까닭에 그리스인들이 잉글랜드 왕은 사자요, 프랑스 왕은 어린 양이라 불렀다.

... 그 땅의 위대한 모든 남자보다 더 강한 리처드 왕이 당도한 후, 그리스인들은 알프스 산맥 남쪽 사람들을 더욱 증오했다. 그들은 프랑스 왕과만 평화를 유지하고 잉글랜드 왕과 그의 군사들은 꼬리달린 놈이라고 불렀다.
《스티븐, 헨리 2세, 리처드 1세의 연대기》 3권

10월 2일, 리처드 1세는 메시나 교회의 수도자들을 쫓아내고 병사들을 주둔시켰으며, 탕크레드에게는 사절단을 보내 여동생 조안의 상속분과 지참금 반환을 요구했다.

또한 대규모의 외국 군대와 메시나인들 사이의 갈등이 고조화되자 이 때문에 10월 4일,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가 탕크레드의 사절단, 그리고 메시나의 귀족들과 회담을 열었다. 그 때 메시나인들이 리처드 1세의 동료들의 거처를 공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두 왕이 평화와 안보를 다루기 위해 시칠리아의 법관, 그리고 주요 시민들과 회담을 열었다. 보라. 그리스인들이 이미 리처드 왕의 부하들을 살해하고 있다는 외침이 터졌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이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했기 때문에, 왕은 이를 신경쓰지 않았다.

두 번째 전령이 와서 그리스인들이 순례자들을 공격하고 있다고 알렸다. 같은 상황에 처한 그리스인들이 그 또한 사실이 아니라고 리처드 왕을 설득하며, 거짓으로 왕을 속여 넘길 것을 생각했다.

세 번째 전령이 황급히 난입하여 그러한 평화는 칼이 그들의 목을 내리칠 때를 찬성하지 않을 것이라 외쳤다. 그 때, 리처드 왕이 다툼을 중단하고 평화를 만들기 위해 회담장을 떠나 지체없이 말에 올라탔다. 조흐덩 뤼빵과 마르가리트라는 몹시 간사하고 기만적인 그리스인 두 명이 그곳에서 도시 군중을 선동하여 순례자들을 향한 악감정을 일으킨 후였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거짓말로 숨기고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우겼다. 잉글랜드 왕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싸우는 이들은 이미 말다툼을 넘어서 주먹과 몽둥이로 싸우고 있었다. 분노로 격앙된 그리스인들이, 싸우는 이들을 떼어놓으려는 왕의 노력에 복종하기는 커녕 그에게 오만불손하고 신성 모독적인 욕짓거리를 퍼부었다. 이로 인해 분노한 리처드 왕은 군사를 일으키고 공성전을 시작했다.

한편 프랑스인들은 그들의 주군인 프랑스 왕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지 못해 그를 찾아 바삐 뛰어다녔다. 이 때 그는 재빨리 자신이 머무는 궁전으로 피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잉글랜드 왕은 이 난동에 흥분하여 가장 맹렬한 사자처럼 분노하고, 고결한 영혼에 걸맞은 방식으로 화를 터뜨렸다. 그의 분노는 가장 가까운 친우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의 유명한 군 지휘관들이 각자 계급에 따라 왕좌에 둘러 앉았다. 만약 누군가 감히 용기를 내어 눈을 들고 왕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이 지배자의 안색에서 말없이 숙고하는 바를 읽는 것이 쉬울 것이다. 길고 깊은 침묵이 흐르고 왕이 연설을 했다.

... 잉글랜드 왕의 용맹한 전군이 그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산과 놋쇠로 만들어진 벽을 뚫을 준비가 되었다. 왕의 눈썹을 움직이게 하라. 그가 지휘하면 시칠리아 전역이 그의 것이 되리라. 그가 원하면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피로 물들이리라. 수많은 군사들의 함성이 멈추고 왕의 진지함으로 인해 만귀잠잠해졌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내가 들은 것은 나를 기쁘게 한다. 수모를 씻고자 하는 그대들의 준비태세는 나의 기운을 북돋는다. 지연은 준비된 이들에게 항상 해롭다. 더 이상의 지체는 없다. 먼저 메시나를 정복한다. 계집애같은 그리스인들은 몸값을 지불하거나 팔릴 것이다. 마음껏 약탈하라. 완전한 평화는 오직 나의 주군 프랑스 왕이 머무는 도시만이 누릴 수 있다."

... 갑자기 프랑스 왕이 재빨리 자신의 모든 신하들을 거느리고 거처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가 자신의 허리에 찬 칼을 발견하자, 이에 대해 짤막하게 말했다.

"나는 모두의 증인이 되겠네. 그대가 저 괘씸한 그리스인들을 응징하고자 한다면 결과가 어떻든 그대는 결백하오."

그리고 그가 떠났다. 그의 신하들이 뒤를 따라 도시로 들어갔다. 잉글랜드 왕은 군사들을 이끌고 나아갔다. 태양이 황금빛 방패로 밝게 번쩍이고, 산들은 환한 빛으로 눈부시게 빛났다.
《스티븐, 헨리 2세, 리처드 1세의 연대기》 3권
리처드 왕은 프랑스 왕과 함께 있었다. 리처드 왕이 말에 올라타 이 난동을 끝내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그러나 그가 가는 중, 도시 군중이 그의 뒤를 따라 욕을 퍼붓고 매도하자 왕은 서둘러 무장하여 바다와 육지 사방에서 그들을 공격했다. 이 세상 어디에도 그런 전사는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도다.

소동이 어마어마하고, 소음과 혼란이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들었다. 프랑스인들이 리처드 왕의 숙소로 와서 프랑스 왕을 찾았고, 그는 그들과 숙박하고 있는 왕궁으로 돌아갔다. 그 때, 프랑스 왕은 도시에 남아줄 것을 간청하는 그리스인들로부터 선물과 약속을 받아냈다. ... 그리스인들이 프랑스 왕을 믿었기 때문에 프랑스인들은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며 도시에 있었으나, 우리 군대는 이를 신경쓰지 않았다.

도시 성문이 닫히고 그리스인들이 무장하여 방어하기 위해 도시의 성벽 위로 올라갔으나, 그들은 내려와야했다. 그리고 위그 르 브항의 거처로 의기양양하게 몰려가 습격한 이들이 리처드 왕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모두 싸우고 있었다. 나는 그가 처음부터 부하 20명을 이끌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인들이 리처드 왕을 보자마자 위협을 중단하더니 몸을 돌려 도주하고, 왕이 그들을 추격했다. 양 떼가 늑대를 피해 도망치는 것처럼 보였도다. 왕은 그들을 앞으로 내몰고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을 칼로 베어 살해했다.
《앙브루아즈의 노래》
회담에서 평화 조약 내용이 오가고 결론이 나려할 때, 메시나의 도시 군중이 의심스럽게 벌 떼같이 모여서 산을 올라 잉글랜드 왕을 기습할 준비를 하고, 다른 무리는 위그 르 브항의 거처를 공격했다. 가라앉지 않은 함성이 잉글랜드 왕의 귀에 다다르자 그는 프랑스 왕과 다른 저명한 귀족들과 함께 당장 회담장을 떠나 전군 무장을 명령했다.

잉글랜드 왕이 몇몇 부하들을 이끌고 아무도 그가 해내리라 생각치 못했던 가파른 고지 정상에 악착같이 도달했다. 그러자 도시 군중이 혼신의 힘을 다해 도주하여 도시로 다시 들어가고, 왕이 칼끝을 겨누며 그들을 추격했다. 이 때 잉글랜드 왕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도시 성문과 성벽에서 용감하게 도시 군중을 공격했다. 도시 성문으로 진입하려던 순간, 다른 구역에서 병사들이 내몰리고 투석기에서 날아오는 돌을 맞았다. 여기서 잉글랜드 왕의 기사 다섯 명과 병사 20명이 포로로 잡혔다.

반면 프랑스 왕은 순례의 맹세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않고 구경만 했다. 프랑스 왕에 관해 말하자면, 그와 그의 군사들은 도시로 들어가서 완벽하게 안전한 곳에 있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의 군사들은 엄청난 노력으로 힘을 발휘하여 도시 성문을 부수고, 사방으로 벽을 오르며, 도시로 진입하여 마침내 메시나를 정복했다. 그리고 즉각 잉글랜드 왕의 깃발을 성벽에 꽂았다.
《호버든의 연대기》
잉글랜드 왕은 병력 손실이 거의 없이 도시에 승자로 입성했다. 승리의 영광의 기쁨이 그의 복수심을 절제하고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평온한 상태에 든 왕은 성급한 언동을 자제하고 위협을 중단했다. 그 후 프랑스 왕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 왕과 그의 군사들 앞에서 기꺼이 물러나고 도시 밖으로 행군했다.
《스티븐, 헨리 2세, 리처드 1세의 연대기》 2권

필리프 2세는 메시나 성벽에 올려진 잉글랜드 깃발을 발견하자 그걸 빼고 프랑스 깃발로 바꾸라고 요구했다.[47] 프랑스 왕이 메시나인들에게 평화를 보장할 것이란 믿음을 모독했다는 것이 공식적인 이유였다.

리처드 1세의 대응에 대해 호버든은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의 뜻을 따르고 싶지 않아서 다른 기사단의 깃발을 올렸다고 한 반면, 앙브루아즈는 프랑스 왕과 다투고 싶지 않아서 두 왕의 깃발을 성벽에 꽂았다고 증언했다. 리처드 왕 편력기의 저자도 두 왕의 깃발이 성벽에 꽂혔다고 증언했다.

필리프 2세의 요구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리처드 왕이 메시나 도시를 함락했을 때 차지한 전리품에 대해 프랑스 왕이 이러니저러니 말하기 시작하며, 베즐레 서약을 들먹이고 자신의 몫을 내놓으라고 했다. 리처드 왕이 이것에 동의하지 않으려 하자, 프랑스 왕이 잘난 체하며 그에게 을 퍼부었다. 프랑스 왕은 계속해서 자신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빗댐과 거만한 비웃음으로 리처드 왕을 극도로 분노케 하려 했다. 심지어 리처드 왕이 우정을 저버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말에 슬픔보다 분노로 더욱 휩싸인 리처드 왕은 이 기만적인 남자와 절교하기로 결심하여 자신의 모든 함대를 소환하고 짐을 옮기라고 지시했다. 자신의 힘으로만 순례를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나쁜 친우와 함께 있느니 차라리 혼자 있는 편이 더 낫다."

프랑스 왕이 리처드 왕의 결정을 전해들은 즉시, 중재자들을 통해 리처드 왕과 가까스로 화해했다. 두 왕은 앞으로 차지할 모든 것을 반으로 나누기로 했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리처드 1세는 메시나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 요새를 짓고 "그리스인 킬러"라고 이름을 붙였다.[48] 앙브루아즈는 세 왕의 평화 협정이 체결되기 전 이미 요새를 완공했다고 기술했고, 호버든은 평화 협정 지연 중 완공했다고 기술했다.
그리스인들이 리처드 왕의 군대에게 가능한 한 모든 종류의 식량 판매를 금지했으므로, 함대가 가져온 식량에 의존할 수 없었다면 군대가 곤경에 처했을 터였다. 그리스인들이 리처드 왕의 군대를 몹시 증오하고, 전력을 다해 해치려고 들었다. 밤에 수비대들이 그 도시를 경계하고, 반대편에서 순례자들이 그들의 공격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며 경계했다.

한편, 리처드 왕과 프랑스 왕이 또 서로 다투었다. 이것은 좋지도 명예롭지도 않았다. 영향력 있는 귀족들이 두 왕 사이에 합의와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왕궁과 요새(그리스인 킬러)를 계속해서 오갔으나 끝이 없었고 결국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앙브루아즈의 노래》
두 왕이 상대에게 비난을 퍼붓고 상대가 약속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프랑스 왕은 하등한 존재의 판단에 동조한다면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으로 여겼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 왕은 오만하며 그 자신은 걸핏하면 화를 잘 내는 것을 알았다.
《십자군 역사에 관한 수록본》

필리프 2세가 총애했던 그리스인 기사 문제도 있었다.
필리프 왕이 리처드 왕을 매몰차게 싫어했던 이유가 더 있었다. 메시나에서 필리프 왕을 주인처럼 따르던 매우 뛰어난 그리스인 기사를 리처드 왕이 강제로 억류했다. 그가 리처드 왕의 명령을 거부했을 때 갑자기 리처드 왕이 그의 눈알 하나를 적출했다.[49]
G. Waitz,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Scriptores, 22

메시나 귀족들이 필리프 2세가 평화 협정의 당사자가 되어 줄 것을 청하자 1190년 10월 6일, 필리프 2세, 리처드 1세, 탕크레드가 평화 협정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두 왕이 탕크레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인정할 것, 제프리 2세의 아들 아르튀르(아서)를 리처드의 후계자로 정하고 탕크레드의 딸과 약혼시킬 것이었다.[50] 탕크레드가 메시나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리처드 1세에게 조안의 상속분 금 20,000온스와 딸의 지참금 금 20,000온스를 지불했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에게 베즐레 서약을 근거로 탕크레드로부터 받은 돈의 반을 요구했다. 리처드 1세는 조안의 몫도 챙겨줘야 한다며 그에게 3분의 1을 주었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왕이 평화를 위해 이에 만족했다고 기술한 반면,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만족하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참고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수많은 무슬림이 탕크레드 왕에게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고 가족들과 함께 산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탕크레드 왕이 잉글랜드 왕과 조약을 체결했단 소식을 들었을 때, 당장 돌아왔다.
《호버든의 연대기》

10월 8일,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는 베즐레에서의 서약에 이어 두 번째로 서약했다.
프랑스 왕과 잉글랜드 왕이 백작과 남작들, 그리고 성직자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순례 동안 상대방과 양측 군사들에게 신의를 지킬 것을 성물에 대고 맹세했다. 또한 백작과 남작들도 같은 서약을 굳게 맹세했다. 그리고 무장한 모든 순례자의 선의와 충고에 따라 두 왕은 도중에 죽을 수 있는 순례자들이, 모두 그들의 바람대로 각자 개인 장비와 말들을 처리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재산 반에 대해 항상 아무것도 집에 보내지 않았다.

성당의 수도자들은 성당의 유물과 모든 서적을 신중하게 처리해야 했다. 나머지 반은 루앙 대주교 월터,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의 단장, 부르고뉴 공작 위그, 드회 드 멜로, 호베흐 드 사블랑, 엉드헤 드 쇼비니, 그리고 질베흐 드 갸스낄에게 전해져야 했다. 이것들은 성지 탈환을 돕는 목적으로 쓰일 예정이었다.

그리고 두 왕은 이 서약을 신의있고 굳건하게 지킬 것을, 바다 양 쪽이 훤히 보이는 곳에서 개인적으로 맹세했다.

같은 날, 두 왕은 식량, 도박, 군사적 행동에 대해 규칙을 수립했다. 메시나의 인구 밀집 때문에 식량값이 치솟자, 필리프 2세는 청년왕 헨리의 아내였던 누나 마르가리트의 두 번째 남편인 헝가리 왕 벨라 3세에게 식량 지원을 요청했다.
덕망 있는 루앙 대주교 월터의 충고로, 그 영광스러운 힘이 교회의 저주를 각오하고 도시 군중으로부터 약탈했던 모든 금과 은, 그리고 모든 종류의 돈의 반환이 선포되었다. 그리하여 리처드 왕이 도시 군중에게 모든 전리품을 반환하고, 적어도 겉으로는 평화가 만들어졌다. 그 도시 군중이 평화롭게 대단히 기뻐하고, 순례자들이 안심하여 평온하게 대단히 기뻐했다. 그 도시가 위해를 받지 않도록 보장받았다. 그리고 평화를 교란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법령이 제정되었다. 그 도시 군중과 순례자들이 범죄와 다툼없이 나왔다 들어갔다 했다. 모든 것이 평화로운 조화를 향해 복구되었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그러나 편력기 저자는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의 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후술했다.
두 왕의 우정이 다시금 꽃피고, 정의로운 중재를 통해 선의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왕이 리처드 왕에게 겉으로 애정 표현을 위장함에도 불구하고, 경쟁 의식이 그의 심장에 남겨져 있었다. 리처드 왕의 위대한 업적을 시기하여, 그가 얼굴은 눈부시지만 부정한 가슴 안에 간사한 여우을 숨겼다.

여전히 두 왕이 메시나에서 체류한 이유를, 학자들은 악천후 때문이라고 보았다.
12월, 프랑스 왕 필리프와 잉글랜드 왕 리처드가 시칠리아의 메시나에서 머무는 동안, 메시나에서 어마어마한 천둥 소리가 울리고, 끔찍하고 수많은 섬광이 번쩍였다. 벼락이 잉글랜드 왕의 갤리선 중 하나로 떨어져 침몰시키고, 메시나 성벽을 내리쳐 거대한 부분을 완전히 파괴했다. 잉글랜드 왕의 보물이 있는 그리스인의 수도원을 호위하고 있던 기사들과 무장한 군사들이 폭풍이 분노하는 동안 수도원의 첨탑에서 불덩어리가 타오르는 게 아니라 빛을 뿜었고, 폭풍이 잦아들자 불덩어리가 사라진 것을 목격했다고 확언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신을 섬기는 그리스인들이 폭풍이 일어날 때마다 이런 현상이 항상 벌어진다고 일제히 답변했다.
《호버든의 연대기》

1190년 크리스마스 직전에 다음의 사건이 있었다.
레지날드 드 모약의 교회에서 메시나의 모든 주교들과 고위 성직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잉글랜드 왕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했다. 그는 알몸으로 자신을 세 번 채찍질하고, 자연을 거스른 죄와 과거의 사악함을 인정하고 다시는 금지된 성행위에 빠지지 않겠다고 참회했다.

길링엄은 리처드 1세가 이성애자임을 고수하여, 메시나 여자들과 방탕한 성관계를 맺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플로리는 '자연을 거스른 죄'를 동성애로 규정하여, 리처드 1세가 메시나 남자들과 동성애를 했을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플로리의 연구가 선뜻 동의하기 힘든 논증 방식을 거쳤다는 지적이 있다. 당시 성적으로 '자연을 거스른 죄'는 동성애만이 아니라 동성애를 포함한 성적인 죄를 의미했다.

확실한 점은 당대 선례로 왕의 이 같이 공개적이고 채찍질하는 고해가 이루어진 적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20년 전 헨리 2세의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켓 살해 혐의 때문이었다.[51]

하단은 1190년 크리스마스의 기록이다.
나는 본 것만을 말하고 있다네. 크리스마스에 리처드 왕이 모두가 연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외쳤다오. 그리고 그는 프랑스 왕을 데려왔다네. 이때 그는 대단히 지극정성을 다했다오! 나는 홀에서 식사했다오. 하지만 그곳에서 단정치 못한 옷차림, 나무로 된 컵과 스푼을 보지 못했다네. ... 나는 리처드 왕이 누군가에게 그렇게 많은 선물을 주는 것을 이제껏 보지 못했다오. 그가 프랑스 왕에게 막대한 금은보화를 선물했기 때문이라네.
《앙브루아즈의 노래》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여 리처드 왕이 프랑스 왕을 저녁식사에 정중하게 초대했다. 그리고 이 위대한 날을 프랑스 왕과 함께 기쁨과 환희로 보내기 위해서 거리의 포고꾼이 모든 영혼을 부르게 했다. 프랑스 왕이 그의 간청에 응하여 많은 수행단을 이끌고 왔다.

무엇을 더 말해야 하는가! 리처드 왕의 연회에 불참할 사람이 누가 있으랴! 그들은 리처드 왕이 세운 요새(그리스인 킬러)에서 명예롭게 대접받고 그들의 계급에 따라 테이블에 앉았다. 그 누가 수많은 종류의 음식과 음료, 그리고 귀하게 차려입은 하인들을 일일이 나열할 수 있으랴. 리처드 왕의 숭고한 인격을 헤아려 이 연회가 얼마나 성대하고 화려하고 훌륭한지 상상해 보아라. 모든 것이 사치스럽고 경이로웠다. 음식과 음료가 담긴 그릇과 컵들은 금과 은으로만 제조되었다. 그것들은 놀랄 만큼 복잡한 양각이 새겨지고 인간과 짐승의 형태로 세밀하게 조각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행복한 얼굴들이 초대받은 자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무엇을 더 말해야 하는가! 모든 사람들이 다양하고 많은 음식과 음료, 그리고 하인들의 발랄한 재치를 매우 즐거워 했다.

연회가 끝날 무렵 리처드 왕이 대단히 귀중한 보물들을 펼쳐놓았다. 그는 프랑스 왕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프랑스 왕이 그것들 중 최고의 것을 직접 선택하도록 친밀한 방식으로 강제했다. ... 리처드 왕이 말했다. "지난날 아무것도 선물하지 않고 하루를 허비한 걸 후회하곤 했소."[52]
《리처드 왕의 편력기》

그러나 1191년, 평화는 짧았다.
... 군사들이 속이 비고 단단한 나무 줄기[53]를 무기로 사용하여 모의 전투를 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우연히 잉글랜드 왕이 기욤 드 바흐와 일대일 결투를 하게 되었다.[54] 그는 프랑스 왕의 매우 용맹한 기사 중 하나였다.[55]

그들은 나무 줄기가 산산조각이 날 때까지 결투를 벌였다. 그러다 그것이 부수어지면서 잉글랜드 왕의 모자가 망가졌다. 왕이 격분하여 기욤에게 엄청난 적개심을 드러냈다. 기욤과 그의 말이 놀라서 휘청일 정도였다. 왕이 기욤을 땅으로 던지려 하려다가 안장이 틀어졌다. 그는 굉장한 속도로 말에서 내리고 더 강한 전투마로 바꿔 탔다. 그는 기욤에게 흉포하게 돌진하여 그를 땅으로 던지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떨어지려는 순간 그가 재빨리 말의 목을 붙잡고 매달렸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때 레지스터 백작의 아들이 자신의 주군을 돕기 위해 기욤 드 바흐를 치려고 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이건 나와 저 놈과의 결투다."

잉글랜드 왕과 기욤은 긴 시간이 지나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 승부를 다투었다. 말싸움도 오고 갔다. 그리고 왕이 말했다.

"다신 내 눈 앞에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금 이 순간부터 네놈은 내 평생의 적이다."

... 다음날, 프랑스 왕이 잉글랜드 왕을 방문했다. 그는 겸허히 애원하며 잉글랜드 왕이 기욤 드 바흐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풀 것을 청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거절했다. 다음날, 기욤은 메시나 도시를 떠나야 했다. 프랑스 왕이 더 이상 기욤 드 바흐와 교제할 수 없었고 잉글랜드 왕이 그것을 강력히 원했기 때문이었다.[56]
《호버든의 연대기》

하지만 필리프 2세가 리처드 1세의 분노를 진정시켜서 기욤 드 바흐를 십자군에서는 내치는 일은 막았다.[57]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이 사건 직후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에게 갤리선을 나눠 주었다고 기술했다.

한편,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과 베렝겔라가 필리프 2세가 통과했던 알프스를 거쳐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리처드 1세의 명령을 기다렸다. 리처드 1세는 함대를 보낼 테니 나폴리로 오라고 서신을 보냈다.

그 후 리처드 1세가 여태까지 숨겨온 결혼 문제를 말했다.
아아! 부정한 선동자의 모든 간계가 사람을 유혹할 때, 사람의 마음이 어찌 이리도 쉽게 바뀌는가! 얼마나 많은 다양한 변화가 내게 보이는가! 이것은 사람들이 상호간 사랑으로 맺어져 있을 때, ... 헤어지게 하는 방법으로, 정복할 수 없는 그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항상 사랑과 전쟁을 하며 증오를 일으키고, 친구간의 불화의 씨앗을 뿌리고, 상냥히 단결된 이들을 간계로 반목케 한다. ... 이곳에 같은 애착과 정신과 신념을 품은 두 왕이 있도다. 그들은 서로 굉장히 친밀하고 서로를 깊이 사랑하였다.

하지만 두 왕의 엄청난 다정함은 오래갈 수 없었다. 잉글랜드 왕 리처드가 적절한 기회를 엿보다가 심장 깊숙이 숨긴 것을 털어놓았다. 그는 프랑스 왕 필리프에게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왕이시여. 그대에게 프랑스가 복종하고 나는 그대의 왕국의 기사요, 나의 맹세는 그대의 군대로 날 결속하오. 나의 주군인 그대에게 내가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오. 그대의 이름은 살라딘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두려움에 떨게 하오. 그대에게 간곡히 청하오. 그대를 분노케 하려는 것이 아님을 말하려 하오. 나는 그대에게 그대의 누이를 돌려줄 것이오. 그대에게 간절히 비오. 이제서야 나를 인도한 비밀스러운 동기를 묻지 말아주오. 나는 그대의 누이와 결코 육신의 일을 하지 않았소이다. 그러나 베렝겔라, 나바라 왕의 딸인 베렝겔라와 일찍이 침대를 나누었고 우리는 신성한 결혼 서약을 확인하였소. 하지만 단지 육신의 결합이었을 뿐이오. 나는 육신의 일과 법도에 메여있기 때문이지, 결코 다른 어떤 의도도 없다는 걸 알아주오. 하지만, 오! 존경하고 사랑하는 왕이시여. 그대의 누이가 더 깊은 관계를 맺을 백작과 남작들이 있소."[58]

프랑스 왕이 깜짝 놀라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엄청난 분노를 숨긴 채 곧 그는 답했다.

"그대가 나의 누이를 돌려 보내면 마찬가지로 누이의 지참금을 돌려 주어야 하오. 그 땅은 그녀의 지참금이니 마땅히 회수되어야 할 몫이오. 나는 그대를 탓하지 않소. 그리고 그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리다. 우리는 대업을 목도하고 있소. 그러니 이 문제를 다툼 없이 해결하세. 그대는 주저 없이 십자가를 짊어졌고 우리는 타지에서 순례의 맹세를 하였소. 나는 그대에게 평화를 주었으니 그대는 십자가를 짊어진 의무를 다 하는 데 힘쓰시오."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1191년 2월 말,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이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의 호위를 받아 베렝겔라를 리처드 1세의 새 신부로 데려왔다. 필리프 2세는 탕크레드에게 엘레오노르와 베렝겔라를 결코 메시나에 들이지 말라 경고하고,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를 시켜서 그에게 서신 한 통을 전달했다. 탕크레드는 필리프 2세의 경고를 따라 그들에게 브린디시에 상륙하라고 했다.
탕크레드 왕의 사절단이 브린디시에서 잉글랜드 왕의 모후와 나바라 왕의 딸을 명예롭게 맞이하고 모든 존중과 배려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플랑드르 백작은 나폴리로 와서 잉글랜드 왕의 갤리선에 승선하여 메시나로 왔다. 그리고 많은 문제에서 잉글랜드 왕의 충고와 의도를 따랐다. 그러자 프랑스 왕이 플랑드르 백작에게 잉글랜드 왕을 떠나 그에게 돌아오도록 설득하여 따르게 했다.
《호버든의 연대기》

과정은 이랬다. 필리프 2세가 리처드 1세에게 탕크레드와 회담을 열 장소로 카타니아를 권했고, 리처드 1세는 그곳에서 탕크레드와 회담을 열었다. 3월 5일, 탕크레드는 리처드 1세에게 서신을 보여 주었다.
'잉글랜드 왕은 배신자요, 평화를 유지할 마음이 없다. 그대가 잉글랜드 왕과 전쟁을 벌이고 야전을 일으키겠다면 나와 나의 신하들이 가세하여 잉글랜드군을 격파하겠다.'

리처드 1세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배신자라니, 당치도 않소. 내가 살아있는 한 평화 협정은 지켜질 것이오. 하지만 나의 주군이자 순례의 맹세를 한 프랑스 왕이 그대에게 이 서신을 보냈다는 것은 쉽게 믿기지 않소이다."

탕크레드 왕이 답했다.

"그대에게 이 서신의 사본을 주겠소이다. 부르고뉴 공작이 프랑스 왕의 서신을 전해준 것을 부인한다면 나는 사절단을 보내서 이것을 증명하리다."

리처드 1세는 당장 메시나로 돌아갔다. 이 때 필리프 2세는 태베르니에서 탕크레드와 밤중 내내 있었다. 그는 3월 6일에 메시나로 돌아가서 리처드 1세를 대면했다.
잉글랜드 왕의 안색은 어떤 선의와 평화도 없고 오직 험악함과 분노만이 있었으며, 그는 그의 기분처럼 사납게 날뛰었다. 하지만 프랑스 왕이 있는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프랑스 왕은 잉글랜드 왕이 왜 저러는가 물었고, 플랑드르 백작이 시칠리아 왕이 잉글랜드 왕에게 그에 대해 말했던 한 마디 한 마디 모두 알렸다. 그리고 그 증거로 그 서신을 보여주었다.

프랑스 왕이 서신을 읽고 우선 평온한 안색을 유지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고 도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는 곧 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 잉글랜드 왕이 나를 음해하려한 진실을 알았다. 이 서신은 거짓이고 위조되었다. 그는 사악한 혐의를 지어냈고 결혼을 맹세한 아델을 저버릴 것이다. 하지만 명심하라. 내 누이를 배반하고 다른 여인과 결혼한다면 그와 그의 아내는 내 평생의 적이다."

듣자마자 잉글랜드 왕이 답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델과 결혼할 수 없다! 내 부친이 그녀와 사통하고 아들까지 얻었다!"

그러더니 그가 그 사실을 모든 방식으로 입증할 준비가 된 많은 증인들을 세웠다. 그들이 증언하고 플랑드르 백작과 다른 충실한 신하들이 프랑스 왕에게 조언하자, 그가 찍을 수 있다는 것과 그가 잉글랜드 왕을 누이와의 결혼과 관련된 약속, 맹세, 그리고 모든 성약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리처드 1세의 이 같이 공개적인 주장은 필리프 2세의 누나 아델의 명예를 짓밟고 결혼으로 이용할 가치를 훼손시키는 것이었으며[59] 필리프 2세와 카페 왕가를 향한 결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1148년 필리프 2세의 부왕 루이 7세와 리처드 1세의 모후 엘레오노르가 부부였던 시절, 둘이 참여한 2차 십자군 원정 중 안티오키아 공작 레몽 드 푸아티에와 엘레오노르가 단순한 숙질 관계가 아니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고 이 역시 루이 7세와 카페 왕가를 향한 엄청난 모욕이었다.[60] 당시 교황청에 머물렀던 솔즈베리의 요한은 이렇게 기술했다.
레몽의 왕비를 향한 관심과 그들의 끊임없는 대화는 루이 왕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왕이 떠날 채비를 하는 중에도 불구하고 왕비가 남기를 원했을 때 크게 굳혀졌고, 레몽은 왕이 허락하는 한 왕비를 잡아두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왕이 급히 왕비를 무리하게 떼어 놓으려 하자, 그녀가 그들의 친척 관계를 언급하며 5촌 내 친척이기 때문에 남녀로 함께 지내는 것은 적법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들이 동방으로 원정을 가기 전부터 프랑스에서는 그런 취지의 말이 들렸고, 라옹 주교가 촌수를 계산해 보았으나 그 계산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실치 않았다. 이것을 듣고 왕은 심히 동요했다. 이성을 잃을 지경으로 왕비를 사랑했으나, 그는 그의 고문과 프랑스 귀족들이 허락한다면 이혼하기로 동의했다. 왕의 고문 중 하나인 티에리 갈랑이 더 이상 안티오키아에서 꾸물대는 것 때문에 왕비를 괴롭히지 말라고 왕을 설득했다. 그래야만 친척이라는 허울 아래 벌어진 죄가 감춰질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또한 다른 모든 재앙과 더불어 왕이 왕비에게 버림받았다거나 왕비를 빼앗겼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프랑크 왕족의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치욕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왕비가 미워서였든 혹은 널리 퍼진 소문을 실제로 믿었기 때문이었든, 그렇게 말했다.

... (2차 십자군 종군 후)여전히 루이 왕은 이성을 잃을 지경으로 왕비를 사랑했고, 왕의 넘치는 애정은 소년의 그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교황청에서의 회상》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와 귀족들이 두 왕을 중재한 결과,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가 원하는 여성과의 결혼을 허가하는 조약을 받아들여야 했다.[61] 아델의 지참금인 지조흐와 벡쌍은 리처드 1세가 베렝겔라로부터 남성 후계자를 얻으면 그 지역을 후계자에게 넘기고, 얻지 못하면 필리프 2세가 돌려받기로 협약을 체결했다. 또한 리처드 1세는 꺄오흐와 께흐씨에서 필리프 2세의 영지인 대수도원장 관할 두 구역을 제외한 영유권을 얻고,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로부터 이쑤덩, 그하쎄, 오베르뉴의 영유권 그리고 파혼 배상금 10,000마르크를 받아내기로 했다. 아델은 두 왕 모두가 귀국한 후 한 달 이내에 유폐에서 풀려나기로 했다.

리처드 1세는 지금 당장 베렝겔라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시대 결혼은 가문 간의 동맹이자 평화 협정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리처드 1세가 필리프 2세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나바라 왕국과의 손을 잡은 것이었다.

그런데 누가 봐도 지조흐와 벡쌍이 리처드 1세의 차지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는데 정작 리처드 1세와 베렝겔라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62]

1191년 3월 초, 하단의 기록에 따르면 두 왕의 반목만 악화될 뿐이었다.
며칠 후 프랑스 왕이 잉글랜드 왕을 방문하여 3월 중순이 되면 출항 준비를 하라고 알렸다. 하지만 잉글랜드 왕은 8월 전까지 떠날 수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프랑스 왕이 자신의 신하들처럼 잉글랜드 왕을 소환하여 그가 했던 맹세에 따라 함께 바다를 건너자고 명령했다. 그리고 나바라 공주와의 결혼은 아크레에서 하고, 만약 출항을 거절한다면 아델과 결혼하라고 했다. 잉글랜드 왕은 모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때 프랑스 왕이 그 맹세를 보았던 증인들을 불러냈다. 그들을 대신하여 조프루아 드 랑코뉴와 샤토덩 자작이 프랑스 왕이 소망하는 언제나 그 맹세를 기꺼이 따르겠다고 말했다.[63]

이를 본 잉글랜드 왕이 극도로 분노했다. 그는 조프루아 드 랑코뉴와 샤토덩 자작에게 그들이 상속받은 모든 것을 빼앗겠다고 위협했다. 이 순간부터 두 왕의 깊은 불화와 시기가 싹트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참고로, 당대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가 기술한 베렝겔라가 3차 십자군에 동행한 이유는 리처드 1세의 적자 생산과 그의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지독한 죄의 처방이었다.
전쟁 준비 중에 그가 기쁨을 생각하여 아내를 데리고 참전하는 것은 지극히 나태한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은 유용함뿐만 아니라 신중함에서도 젊은 왕을 일시적으로 억제했다. 왜냐하면 심지어 이 중대한 시점에도 그의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고, 그를 사악한 행위로 이끄는 기쁨을 추구하는 성향 탓이었다. 또한 그는 현명하게도 이 지독한 죄에 적격인 처방(결혼)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스티븐, 헨리 2세, 리처드 1세의 연대기》 2권

반면, 앙브루아즈와 편력기의 저자는 리처드 1세가 3차 십자군 원정 기간 베렝겔라와 시간을 거의 보내지 않았음을 우호적으로 기록했다. 몇몇 역사가들은 이에 대해 당시 교회가 삼손데릴라의 일화로부터 읽어낸, 십자군 원정을 비롯한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동안의 성관계는 전사를 약하고 무력하게 만든다'는 널리 퍼진 교훈에서 기인했다고 해석했다.

1191년 3월 30일, 필리프 2세는 아크레를 향해 출항했다. 리처드 1세는 그를 배웅한 후 즉각 엘레오노르와 베렝겔라를 메시나로 오도록 했으나 사순시기라서 결혼식을 미뤘다. 그는 4월 10일에 출항했다.

4.4. 아크레에서

파일:GBGFGF.jpg
아크레에 도착한 필리프 2세

아크레 공성전의 전반적인 설명은 링크 참고

성지의 상황은 복잡했다. 기 드 뤼지냥과 후작 코라도 델 몬페라토가 예루살렘 왕위를 두고 대립하고 있었다. 기는 하틴 전투에서 대패해 예루살렘 왕국을 사지로 몰아넣었단 비난을 들었고, 권력 기반이었던 그의 부인 예루살렘 왕국의 시빌라가 전염병으로 죽어서 위신이 꺾인 상황이었다.

코라도는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여 티레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공적이 있었고, 시빌라의 여동생이자 다음 왕위 계승자인 이사벨과 1190년 11월에 결혼식을 거행한 후였다.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를 비롯한 대부분의 십자군은 코라도가 예루살렘 왕국을 이끌 희망이라 보았다.

필리프 2세는 지중해를 건너서 티레로 향했다.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 클레르몽 백작 라울 1세, 블루아 백작 티보 5세가 필리프 2세를 따라 코라도를 지지하자 기는 리처드 1세에게 도움을 구하기로 했다.

1191년 4월 20일, 필리프 2세가 아크레에 당도했다.
아크레에서 오랫동안 공성전을 벌이던 모든 병사들이 프랑스 왕을 엄청난 기쁨으로 맞이했다. 사방팔방에서 프랑스 왕을 향한 찬사와 칭송이 울려퍼지고, 그의 모습은 마치 지상으로 내려온 신의 천사와도 같았다.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기억들 총서》
프랑스 왕이 아크레 도시로 상륙하고, 이 신성한 땅과 거룩한 날을 축하했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자크 드 아벤이 프랑스 왕보다 먼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그곳에 가서 용감하게 공성전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 왕이 그를 믿자 자크 드 아벤이 프랑스 왕에게 상냥한 방식으로 가장 귀중한 도움을 적시에 주었다.

배에서 내린 이들이 마른 모래를 밟는 감각을 즐기고, 모래 위에서 껑충껑충 뛰고 몸을 뒹굴었다. 길고 고된 항해가 끝나자 기뻐하며, 그들은 열정적으로 해안을 차지하고 건강을 주는 순수한 공기를 마셨다.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아크레에 있는 귀족들은 오랫동안 프랑스 왕의 도착을 기대하고 고대하고 있었다. 도착한 즉시 그는 고결하고 참으로 아름다운 환대를 받았다. 수많은 이들이 그의 도착으로 크게 용기를 얻고 무척 기뻐했다. 그는 식량과 많은 다른 보급품을 실은 거대한 함대를 이끌고, 프랑스 왕관에 걸맞게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부르고뉴 공작 위그를 포함하여 많은 남작들과 기사들을 데리고 왔다.
《십자군 역사에 관한 수록본》
그 해, 프랑크 원군이 바다를 건너 아크레에서 공성전을 하는 프랑크인들에게 왔다. 가장 먼저 도착한 이는, 강대한 왕국의 주인은 아니지만 그들의 왕 중 가장 고귀한 프랑스 왕 필리프였다. 그가 도착한 날은 1191년 4월 9일이나, 그들(3차 십자군)이 염원한 수많은 배들을 이끌지 않았다. 거대하고 인상적인 대형 선박을, 그가 여섯 척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크레에서 그들의 마음이 고무되고 무슬림에게 공격을 계속했다.
《알리 이븐 알 아시르의 연대기》
바다가 다시 항해할 수 있게 되고 날씨가 맑아지자, 양 쪽 모두 싸움터로 돌아갈 때가 도래하였도다. 가장 먼저 도착한 무슬림은 술탄의 아들 알 아크 자히르의 아미르 중 하나이자 알레포 영주인 알람 앗 딘 술레이만 이븐 쟌다르였다. 나이가 지긋하고 위엄있는 이 남자는 많은 전투의 베테랑이자 현명한 고문이며, 수년간 함께 전쟁터를 누빈 술탄으로부터 존중받고 존경받았다. 그가 온 후, 바엘베크 지배자 마드 앗 딘 이븐 이즈 앗 딘 파루크샤와 다른 무슬림 분견대가 사방팔방에서 당도했다.

적군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이 우리의 전초 기지에 접근하여 프랑스 왕의 도착이 임박함을 위협적으로 알렸다. 프랑스 왕은 그들 중 위대한 지배자이자 용기와 위엄이 다른 모든 왕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모든 기독교 세력이 최고의 지휘관인 이 결정권자에게 복종했다. 왕이 당도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대형 선박 여섯 척과 보급품, 말들을 가져왔다. 이 사건은 1191년 4월 20일에 일어났다.

... 그리고 플랑드르 백작이 당도했다. 그는 대단히 저명한 귀족이자 라믈라 해 동안 하마와 하림 공성전을 한 전적이 있는, 그들 중 주목해야 할 남자다.
《살라딘의 진귀하고 위대한 역사》

십자군이 환영 파티를 열어주려 했지만 필리프 2세는 이를 거부하고 지휘권을 이어받아 전시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그는 공성무기 조립에 몰두하며 아크레 성벽의 약한 틈을 찾기 위해 밤마다 직접 성벽 외곽을 정찰했다.[64]

한편 지중해를 건너고 있었던 리처드 1세는 폭풍우를 만나 3차 십자군에 동행한 약혼자 베렝겔라와 여동생 조안이 탄 배들과 뿔뿔이 흩어지고 갤리선 20척의 행방을 잃었다.[65] 그들의 소식을 찾아야 하고 건강도 나빠지기까지 해 로도스 섬에서 10일간 정박했다.[66]
5월 1일, 날씨가 맑아지자 잉글랜드 왕이 눈을 들어 항상 움직이고 있는 바다 저 멀리 거대한 배 한 척이 접근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 배의 정체는 소식통 역할을 하는 배들 중 하나였다. 잉글랜드 왕은 급히 전령을 보내 아크레 상황에 대한 정보를 요청하고 그것을 애타게 기다렸다.

선원들은 프랑스 왕이 무사히 아크레에 도착했으며, 분주히 공성전 무기를 조립하며 잉글랜드 왕을 기다리고 있다 전했다.[67] 프랑스 왕이 아크레 항구에 상륙한 날은 부활절 이후 토요일이고, 대단한 각오로 아크레를 점령하기 위해 주의와 노고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그는 아크레 성벽을 마주보도록 투석기와 공성전 무기를 세웠다. 도시 주변의 도랑이 흙으로 매워지고, 공성전 무기가 투입되며, 끊임없이 투석기를 쏘자 벽이 부분적으로 허물어졌다. 그러나 튀르크인들이 반격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공성전 무기를 불태우는 데 성공했다.

지나가는 그 배의 선원들로부터 이 모든 것을 들었을 때 잉글랜드 왕이 비관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원기를 되찾았다. 그리고는 다른 긴급한 문제(베렝겔라와 조안의 행방)에 관심을 돌렸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왕비 베렝겔라와 여동생 조안이 탄 배는 키프로스 섬 근처 해안가에서 정체 중이었고, 이 섬의 지배자였던 이사키오스 콤니노스가 그들을 포로로 잡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곧 리처드 1세가 키프로스의 리마솔 해안에 상륙하여, 베렝겔라와 조안을 구출했다. 뒤이어 기 드 뤼지냥이 키프로스에 도착하여 리처드 1세에게 가세했다. 리처드 1세는 기로부터 그간의 일을 전해들었는데,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왕이 기를 동정했다고 기술했다.

1191년 5월 12일, 리처드 1세는 키프로스에서 베렝겔라와 결혼식을 올리고, 3일 간 성대한 연회를 치렀다.

한편 필리프 2세는 교황 첼레스티노 3세에게 리처드 1세의 지연을 알리는 서한을 보내고, 키프로스로 사절단을 보냈다.
보베 주교와 저명한 귀족 드회 드 멜로가 프랑스 왕 사절단 자격으로 파마구스타로 와서 리처드 왕에게 지체 없이 바다를 건널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그가 도착하기 전까진 프랑스 왕이 아크레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다. 그리고 그들은 책망의 말을 덧붙였다. 그가 중대한 의무를 무시하고 헛된 일에 힘을 쓰고 있으며, 수천에 달하는 사라센을 제쳐두고 무엄하게도 선량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있다고 했다. 왕은 여기 기술하기에 결코 적합하지 않은 성난 말로 답했다. 그들은 모든 논거로 왕을 설득하려고 시도했으나 소용없었다. ... 프랑스 왕의 사절단을 무시하고 리처드 왕은 니코시아로 진군했다.

기가 이사키오스의 딸을 생포하자 이사키오스가 딸을 걱정하여 즉시 리처드 1세에게 항복했으나, 잉글랜드군이 키프로스를 완전히 정복하느라 지체 기간이 길어졌다.[68]

아크레의 십자군 진지에 지독한 전염병이 돌았고, 루이 7세의 시대를 풍미한 권력자들과 필리프 2세의 가신들이 줄초상을 치렀다.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가 병으로 쓰러졌는데 6월 1일, 그는 생을 마감하기 직전 필리프 2세를 찾았다.
플랑드르 백작이 병으로 사경을 헤매면서도 프랑스 왕을 부르며 간절하게 보고 싶어했다. 그러자 프랑스 왕이 백작이 병으로 누워있는 곳을 방문하고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백작은 왕에게 경고했다.

"그대는 호위를 삼엄히 해야 하오. 이 군에는 그대의 죽음을 바라는 이들이 있소이다."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프랑스 왕은 그 또한 전염병으로 쓰러질 때까지 그들을 심장에 새기고 몹시 걱정하고 분노했다.
《십자군 역사에 관한 수록본》

저자는 필리프 1세 드 알자스가 언급한 자가 리처드 1세일 것이라고 암시했다.[69]

랭스의 트루베르는 하단과 같이 기술했다.
리처드 왕이 프랑스 왕의 봉신들에게 접근하여 흉모를 획책했다. ... 죽음을 직감한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가 프랑스 왕을 찾았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아름다운 분. 내 목에 밧줄을 묶고 매달아 아크레의 모든 길바닥에서 끌려 다니게 하시오. 나는 그런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오."

이것을 듣고 왕은 백작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백작이 말했다.

"신께 맹세코, 나는 망령된 말을 하는 게 아니라오. 내 말을 들어 주오, 아름다운 이여, 나는 그대의 죽음을 맹세했소."

1191년 6월 6일, 리처드 1세의 함대가 티레에 도착했다. 필리프 2세와 코라도가 도시 입성을 거부하여 리처드 1세는 티레의 성벽 밖에서 야영해야 했다.

6월 7일, 리처드 1세는 아크레 항해길에 올랐는데, 신원불명의 갤리선 2척을 마주쳤다. 그들은 프랑스 왕의 배라고 주장했으나 이를 의심한 리처드 1세가 그들의 신원을 확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갤리선 선원들이 공격을 시작했고 격전 끝에 리처드 1세가 승리를 거두었다. 이 해전이 바로 아크레 해전이다. 호버든의 연대기는 이 배가 프랑스 왕의 배라고 주장했지만 편력기와 알리 이븐 알 아시르의 연대기는 이를 명백하게 부인한다.

6월 8일, 리처드 1세가 함대를 이끌고 아크레에 당도했다.
축복받은 사도 바르나바스의 축제 전 토요일, 오순절 주간에 리처드 왕이 수행단과 아크레로 상륙했다. 격앙된 기독교인들의 응원으로 천지가 흔들렸다. 리처드 왕이 아크레 항구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 왕과 모든 지휘관들, 모든 귀족들 그리고 위대한 군사들이 기뻐하며 그를 환영했다. 잉글랜드 왕의 도착을 열렬히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배에 탄 그의 모든 군사들이 축하를 외치고 나팔을 불었다. 반면, 튀르크인들은 왕의 수많은 갤리선으로 말미암아 떠나고 돌아오는 모든 것이 끝장날 것을 인지했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낙담하였다.

두 왕이 함께 항구에서 내려오고 가장 정중한 태도로 서로를 존중했다. 그리고 리처드 왕은 미리 마련된 막사로 물러가 즉각 공성전 준비를 시작했다. 시간 낭비없이 책략과 기계로 도시를 함락하는 것이 그가 가장 열망하는 관심사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펜도 왕의 도착에 대해 백성들의 기쁨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 말 또한 이를 묘사할 수 없다. ... 어두운 밤을 밝히기 위해 밀랍 횃불과 새빨간 불꽃이 풍부하게 반짝였다. 그날 밤은 밝은 낮으로 인해 휘몰아 치는 것처럼 보이고, 튀르크인들은 계곡 전체가 불타고 있다 생각했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프랑스 왕과 아크레 앞에 있는 모든 이들이 리처드 왕이 온 것을 아주 기뻐했다. 그는 그곳에 있는 귀족들로부터 큰 열의과 대단한 존중을 받았다. 리처드 왕의 아내가 해안가로 올 때, 프랑스 왕은 그녀를 아주 예모있게 맞이했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팔로 안아들고 그의 갤리선에 태운 후 육지로 데려다 주었다.[70] 그는 리처드 왕이 저지른 행동으로 말미암은 분노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도록 조심했다. 리처드 왕이 나바라 왕의 딸 베렝겔라와 결혼하기 위해 그의 누이를 저버렸기 때문이었다.
《십자군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그날 십자군은 리처드 1세를 위한 환영 파티를 밤새도록 열었다.

6월 9일, 필리프 2세는 공성전 무기를 전선에 투입했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두 왕 사이에 잉글랜드 왕의 협공을 청하는 중재 시도가 있었으나 잉글랜드 왕이 이를 거절했다고 기술했다.

이 무렵 샹파뉴 백작 앙리 2세가 필리프 2세에게 보급품을 요청했는데,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가져온 군자금이 모두 바닥난 샹파뉴 백작 앙리가 프랑스 왕에게 왔다. 그는 보금품을 요청하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샹파뉴에 대하여 충성 서약을 할 준비가 될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 왕이 도리어 돈을 요구하자, 이에 백작이 답했다.

"이제껏 내 모든 걸 걸고 임했고, 지금은 어려운 처지에 처했소. 나는 그대를 위해 싸우길 갈망했건만 그대는 이런 날 거부하는구려. 날 위하지 않겠다면 다른 이에게 가리다. 받는 것보다 줄 줄 아는 위인에게 말이오."

샹파뉴 백작 앙리에게 막대한 식량과 거액의 돈을 준 이는 잉글랜드 왕이었다.
《스티븐, 헨리 2세, 리처드 1세의 연대기》 3권

6월 11일, 필리프 2세가 리처드 1세에게 다시 협공을 제안했으나 리처드 1세는 아크레에 오자마자 병에 걸렸고 해전을 하기에 풍랑이 유리하지 않다는 이유로 공격을 거부했다. 필리프 2세는 더 이상의 공격 지연은 없어야 한다 판단하고, 리처드 1세의 조력없이 아크레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자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가 병사들에게 봉급으로 적정량인 금화 3개를 지급하는 걸 알고 당장 금화 4개로 봉급을 올렸다. 필리프 2세의 병사들이 봉급이 낮다며 항의하자, 리처드 1세가 그들을 가로채 고용하여 필리프 2세의 군세에 제동을 걸었다. 병사들이 리처드 1세를 '남자 중의 남자로다'라고 칭송하고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가 불충을 저지르고 있다며 비난했다. 이 때문에 전선에 투입된 프랑스 공성전 무기가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튀르크인은 '그리스의 불'로 공성전 무기를 불태웠다. 이를 본 필리프 2세는 대노하여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부었다.[71]

그 직후 필리프 2세도 병으로 쓰러졌다.

이즈음 살라흐 앗 딘이 두 왕과의 회담을 거절하자 리처드 1세는 살라딘과 선물을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해 탐색전을 펼쳤다. 그 기간이 늘어지자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가 살라흐 앗 딘의 동생 알 아딜과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리무쟁의 트루바두르는 하단과 같이 작곡했다.
코라도 경, 나는 그대를 돕지 못하는 두 왕을 알고 있소. 그들이 누구인지 들어보게나. 필리프 왕은 리처드 왕을 의심하고, 리처드 왕도 도로 그를 의심한다오. 차라리 두 왕 모두가 살라딘에게 잡히는 것이 낫겠구려!

두 왕은 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십자군의 사기를 북돋았다. 필리프 2세는 투석기를 쏘고, 리처드 1세는 침대를 전선으로 옮겨서 누운 채 쇠뇌를 쏘았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보다 먼저 병에서 회복하여 공성전 무기를 재조립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병으로 쓰러졌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왕이 위독하여 독이 의심스럽단 말이 돌았다고 기술했다. 이때 리처드 1세는 회복기에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프랑스 왕이 병으로 쓰러져 누워있는 동안 잉글랜드 왕이 병문안을 했다. 그는 도착한 즉각 프랑스 왕의 상태에 관해 여러 번 물었다. 프랑스 왕은 여전히 심하게 앓고 있음에도, 신의 보살핌에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잉글랜드 왕이 물었다.

"그리고 그대의 아들 루이에 관해서는 자신을 어떻게 위로할 것이오?"

그 때 프랑스 왕이 물었다.

"나의 아들 루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길래 위로가 필요해야 하오?"
"내가 온 건 바로 이 때문이오."

잉글랜드 왕이 말했다.

"그대를 위로하기 위해서요. 그가 죽었으니까!"

그러자 프랑스 왕이 말했다.

"반드시 마음을 강하게 먹으리다. 내가 이 땅에서 죽으면 프랑스 땅은 상속인이 없을 테니 말이오."

... 잉글랜드 왕은 하고 싶은 대로 했으나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그가 떠난 후, 프랑스 왕이 부르고뉴 공작과 기욤 드 바흐 그리고 측근들을 불렀다. 루이의 죽음의 진위를 알고 있다면 자신에게 알려야 한다고 충성 서약을 요구했으나 아무도 그의 상태를 몰랐다. 이 때 부르고뉴 공작이 답했다.

"그대가 아크레로 온 뒤 바다 너머로 그런 소식을 전해 줄 배는 아직 오지 않았소이다. 잉글랜드 왕이 악의를 품고 흉악하게 그대의 아들에 대해 그런 말을 한 걸 보면 그대를 몹시 슬프게 해서 병을 낫지 못하게 하려나 보오."
《십자군 역사에 관한 수록본》

실제로 이 시기 5세인 왕세자 루이가 이질 증상을 보이며 위독했다는 프랑스 연대기 작가의 기록이 있다. 이 사건을 두고 아크레의 프랑스 진지에서 '잉글랜드 왕이 흉악하며 사악한 마음을 품고, 프랑스 왕을 해치려 한다'는 말이 파다하게 퍼졌다.

두 왕이 병에서 회복하자마자 내분이 이어졌다.
프랑스 왕 필리프가 잉글랜드 왕 리처드에게 이렇게 제기했다.

"이사키오스의 보물과 키프로스 반을 내게 넘기시오. 순례의 맹세에 따라 우리의 모든 수익을 응당 나누어야 하오."

잉글랜드 왕이 대답했다.

"이사키오스는 누이와 부인을 위협하였소. 또한 그가 군사를 약탈했기에 마땅한 복수를 한 것이오. 조약을 언급한 건 그대이니, 그대가 플랑드르 백작과 다른 전사들의 상속분을 나눌 권리를 내게 준 것이오. 그러니 먼저 그대가 그것들을 넘기시오!"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악마의 농간으로 잉글랜드 왕과 프랑스 왕 사이에 불화의 씨앗이 자라났다. 프랑스 왕이 얻은 모든 것을 똑같이 나누기로 한 엄숙한 조약에 따른 권리로 키프로스 반과 그곳에서 얻은 전리품 반을 그의 것인 양 요구했다.

이에 잉글랜드 왕이 그 조약에 대해 공동의 노력으로 얻은 것만을 프랑스 왕이 차지할 수 있다고 응수했다. 키프로스를 얻은 건 자신의 노력이었고, 그는 조금도 보탠 것이 없다고 했다. 또한 이 원정의 유일한 목적은 사라센을 공격하고 신의 도움으로 최선을 다해 그들과 싸우는 것이며, 이 목적으로 분배 조약이 성립된 것임을 분명히 했다. 게다가 그는 의도적으로 기독교 섬에 간 것이 아니라, 극악무도하고 파렴치한 행위를 복수하기 위해 돌발적으로 옆길로 틀었다고 했다.

이와 같이 두 대실력자가 다투었다. 그리고 잉글랜드 왕은 그가 차지한 전리품을 프랑스 왕과 나누는 것을 완강히 거절했다. 반면 프랑스 왕은 잉글랜드 왕이 조약을 위반하고 어겼다고 비난했다.
《잉글랜드 국정의 역사》

결국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 다른 귀족들까지 나서서 두 왕을 중재하고, 십자군 원정으로 나누는 것은 성지의 영토로 한하기로 합의했다.
기 왕이 코라도 후작이 불법적이고 부당하게 예루살렘 왕의 권리와 이익을 박탈했다고 항의했다. ... 또한 기 왕의 형제인 조프루아 드 뤼지냥이 코라도 후작을 기 왕과 기독교 왕국의 군대에 반한 충성 서약, 위증죄, 반역죄로 고소했다. 그리고 훌륭한 고소가 되리라 맹세했다. 후작이 그의 재판을 수긍하는 것을 거부하고 군중을 헤치고 나아가 궁정을 떠났다. 사람들이 그를 불러 세우고 말했다. "자네는 재판에 불응한 반역자일세!" 그러나 아무도 그를 직접 붙잡지 못했다. 훗날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가 티레로 간 후 즉각 프랑스 왕과 잉글랜드 왕이 불화를 일으켰다. 프랑스 왕은 힘 닿는 데까지 코라도 후작을 지지하고, 잉글랜드 왕은 기 왕을 지지했다. 그 결과 프랑스 왕과 잉글랜드 왕이 빈번하게 말싸움을 벌이고 다투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프랑스 왕이 코라도 후작을 곁에 두고 군의 수장과 주요 고문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영혼의 구원과 신을 저버린 많은 짓을 저질렀다. 코라도 후작 때문이었다. 게다가 프랑스 왕은 살라딘에게서 선물을 받기까지 했다.
《호버든의 연대기》
프랑스 왕이 코라도 후작이 예루살렘 전왕 기에 대항하여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도왔다. ... 프랑스 왕은 기독교 왕국의 파괴자보다 기독교 왕국의 잔해가 더 낫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은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고 기의 편을 들었다. 기가 잉글랜드 왕을 주군으로 모시는 아키텐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왕은 기가 기독교 신념을 잃거나 배신한 적이 없다고 했다. 기는 적에게 항전하며 이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 자신의 잘못 혹은 방치와 나태함이 아니라, 그것(하틴 전투)은 다른 이들이 수치스럽게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확언했다. 그러므로 기의 책임이 아닐 뿐더러 그의 왕국처럼 배신당하고 파멸되었다고 했다.

또한 가장 극악무도한 건 믿는 이의 배신이라고 했다. 기가 믿는 이가 그를 적의 손에 넘겼지만 신의 은총으로 해방되었다고 덧붙였다. 잉글랜드 왕은 기의 책임을 명명백백히 밝히던지, 그렇지 않으면 그가 잃어서는 안될 존엄이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 코라도 후작이 티레에서 그의 지지자들을 대동하여 돌아왔다.
《잉글랜드 국정의 역사》

잉글랜드 연대기의 표현을 따른 바, 리처드 1세는 코라도를 살라딘만큼이나 적대했다.
기욤 드 바흐를 두고 프랑스 왕과 리처드 왕이 한동안 개인적으로 격렬한 말다툼을 벌였다.
《십자군 역사에 관한 수록본》

랭스의 트루베르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72]
기욤 드 바흐 공이 말을 타고 길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리처드 왕도 그곳에서 말을 타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마주치자, 리처드 왕이 들고 있던 긴 창으로 매섭게 공격했다. 그를 안장에서 떨어뜨리기 위함이었다. 기욤 공은 위대한 기사였기 때문에 말에 박차를 가해 재빨리 달리게 하여, 리처드 왕을 붙들고 짐승같은 힘으로 안장에서 떨어뜨렸다. 리처드 왕이 몹시 고통스럽게 땅으로 떨어진 것 때문에 분노로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어떤 움직임도 없이 있었다. 기욤 공이 당장 그곳을 떠나 필리프 왕에게 가서 리처드 왕의 상태를 말했다. 필리프 왕이 리처드 왕이 올 것을 걱정하여 불안에 시달렸다.

... 리처드 왕이 그 상태에서 벗어나자마자 필리프 왕의 숙소로 쳐들어갔다. ... 그러나 그는 필리프 왕의 깜짝 놀란 모습을 보지 못했다. ... 앙리 백작과 많은 다른 남작들이 도착하여 그들을 중재했다.

1191년 7월 초, 3차 십자군이 아크레 성벽을 공략하는 와중에도 두 왕의 내분이 이어졌다.
잉글랜드 왕의 군사들이 아크레 성벽의 주춧돌을 빼냈다. 그곳에 있는 이교도들을 무시한 채 벽 밑에 장작을 깔고 불을 지피자 벽의 큰 부분이 무너졌다. 반면 프랑스 왕의 군사들과 성전 기사단은 저주받을 탑 옆 벽에 커다란 균열을 냈다. 프랑스 왕의 군사들이 도시에 입성하고자 전력을 다해 그 틈으로 달려갔지만 이교도들이 그들을 제압하여 후퇴케하고 그 길이 가파르고 좁아서 프랑스 왕의 많은 병사들이 살해당했다.

그러나 이 때 잉글랜드 왕과 그의 군사들은 기독교와 살라딘의 군세 사이를 가로지르는 참호 경계를 삼엄히 했다. 일전에 두 왕의 군사들 중 한 쪽이 도시를 공격할 경우 다른 쪽이 살라딘의 군대가 후방을 칠 것을 대비하여 참호를 수비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이 합의는 두 왕 사이에서도 이루어졌고, 이유인 즉슨 두 왕과 그들의 군사들이 연합한 모든 일에서 그들이 각자 행동한 것보다 덜 성공적이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프랑스 왕과 그의 신하들이 잉글랜드 왕과 그의 신하들을 경멸하여 바라보고, 후자도 똑같이 했기 때문이었다.
《호버든의 연대기》
아크레 공성전을 하는 동안 리처드 왕이 카살 임베르트를 향한 도시 옆에서 야영한 반면, 프랑스 왕은 반대쪽에서 야영했다. 프랑스 왕은 그가 있는 곳에서 군사들이 그 도시 성벽을 향해 가차없이 공격을 퍼붓게 하고, 리처드 왕 또한 성벽을 맹렬히 공격하여 투석기로 인해 부수어지도록 했다.

사라센들은 그들이 심하게 공격받는 것을 보고 살라딘이 그들을 구원할 수 없으리라 여겼다. 그들은 서로 자문을 나누어 더 이상 그 도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기독교인들에게 넘길 것을 결심했다. 프랑스 왕의 공성 무기가 도시 성벽을 몹시 허물어뜨려 접전이 가능하고, 리처드 왕의 명성과 업적이 사라센들을 아주 겁먹게 하여 그들을 절망케 했다. 아크레 도시의 사라센 지휘관들이 살라딘으로부터 어떤 도움이나 원조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완전히 포기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이 이 도시를 완전히 포위하고 맹공을 퍼부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프랑스 왕에게 서신을 보내 공격을 중단할 것과 안전 통행권, 그리고 회담을 간청했다.

그는 조언을 구하고 그들의 안전 통행권을 동의했다. 사라센 사절단이 회담을 위해 왕의 막사로 오고 그들의 아내, 자녀, 재산과 함께 무슬림 땅으로 안전하게 갈 것을 허가받는 조건으로 도시를 그에게 넘길 것을 제의했다. 왕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 도시와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을 그의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그의 자비에 항복한다면 목숨은 보전토록 하겠다고 했다. 그들이 프랑스 왕과 회담하는 중 리처드 왕은 이를 통보받지 않았기에 프랑스 왕에게 앙갚음하기 위해 도시를 향한 공격을 강화했다. 회담장에 있는 사라센들이 이를 목격하자, 격노하여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이시여. 우리는 그대의 보호 하에 이곳으로 왔나이다. 돌아갈 때까지 우리는 그대의 보호가 우리와 도시 안의 이들에게도 보장될 것이라 착각했나이다. 이제 우리는 잉글랜드 왕이 도시 안에 있는 이들에게 심각한 해를 끼치고 있는 것을 보나이다. 그대가 저 공격을 금지할 권한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 우리를 떠나게 해줄 것을 청하나이다."

프랑스 왕이 그들에게 준 안전 통행권에도 불구하고 리처드 왕이 도시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극도로 분노했다. 그는 사라센 사절단을 돌려보내 도시까지 호송케 하고, 분노로 말미암아 그의 부하들에게 무장하여 잉글랜드 왕을 공격할 것을 명령하기까지 했다. 그가 무장하는 도중 현명한 이들이 개입하여 그를 진정시켰다.

사라센들이 도시로 돌아가 리처드 왕으로부터 전력을 다해 방어하고 이 때문에 그는 이날 어떤 명예도 얻지 못하고 그의 많은 병사만 잃었다. 그 후, 프랑스 왕과 리처드 왕은 서로 화해한 다음 그 도시를 중단 없이 맹렬히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십자군 역사에 관한 수록본》

리처드 1세가 아크레 성벽에 먼저 꽂히는 깃발 주인이 모든 전리품을 차지하자는 내기를 제안하자 필리프 2세와 지휘관들은 이에 응했다. 7월 3일, 필리프 2세가 마샬로 임명한 알베릭 드 클레몽이 성벽을 오르던 중에 전사했다. 4일, 리처드 1세가 그를 죽인 튀르크 병사를 석궁으로 쏘아 죽여 대신 보복했다. 1191년 7월 12일, 두 왕이 아크레를 함락했다. 성벽에는 잉글랜드 깃발이 먼저 꽂히고, 코라도가 간발의 차로 프랑스 깃발을 꽂았다. 리처드 1세는 아크레의 전리품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도 잠깐이나마 성벽에 깃발을 올렸는데 두 왕은 이를 오만한 행위로 보았다. 이에 레오폴트 5세의 깃발이 내려지고, 리처드 1세의 부하들이 그의 깃발을 훼손하여 모욕을 주었다. 격분한 레오폴트 5세는 병력을 수습하여 그날 밤 귀국길에 올랐고, 보복할 기회를 노렸다.

7월 13일 아침,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에게만 아크레의 모든 전리품 반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2년 가까이 아크레에서 참전했던 귀족들이 분노하여 이 같은 분배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다. 두 왕은 원하는 바를 들어주겠다고 답변했으나 차일피일 미루었다.

7월 20일,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가 성지를 떠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성녀 마르가리타 동정녀 축일을 기념하여 열린 연회에서 잉글랜드 왕 리처드가 프랑스 왕 필리프에게 제의했다.

"그대와 나는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3년 간 이 땅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함께 있겠다고 맹세를 해야하오."

그러자 프랑스 왕이 답변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맹세도 하지 않겠소."
《호버든의 연대기》

21일, 리처드 1세는 왕비 베렝겔라와 조안, 그리고 '키프로스의 처녀'와 함께 아크레 도시로 입성했다. 필리프 2세는 성전 기사단 막사에서 지냈다. 22일, 그는 신하들을 리처드 1세에게 보내어 프랑스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공식적인 이유는 병이었다.

이 시기를 다룬 호버든의 로저, 당대 세인트올번스의 수사, 디스의 랄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 왕의 말을 전한 이들에게 잉글랜드 왕이 말했다.

"나의 주군이 여기까지 온 임무를 완수하지 않고 떠난다면 수치와 불명예일 따름이다. 하지만 몸이 아프고 건강이 나쁘다고 이 땅에서 죽는 게 두렵다면 그의 신하들이 충고한 대로 하라 내버려 두게."

... 모든 군사들이 구름같이 몰려와 대성통곡을 하며 프랑스 왕을 뜯어 말렸다. 이 때 프랑스 왕이 신하들을 보내어 잉글랜드 왕에게 키프로스 섬 반을 또 요구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이 일은 두 왕 사이에 극심한 불화를 일으켰으나 현명한 이들의 중재로 화해했다.
《호버든의 연대기》
아크레 도시를 함락한 후 ... 몬페라토 후작에 관한 문제로 두 왕 사이에 비밀스러운 다툼이 벌어졌다.[73] ... 프랑스 왕이 군자금 부족을 구실로 삼아 더 이상 여기서 머물 수 없다고 했다. 리처드 왕이 이것을 듣고 프랑스 왕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금과 은뿐만 아니라 식량, 말, 무장, 선박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롤스 시리즈》 7권
이를테면, 그 도시를 함락한 후 프랑스 왕이 귀국하겠다 선언했다. 잉글랜드 왕이 이것을 듣고, 얼마가 들든 상관없이 프랑스 왕이 머물기만 한다면 금과 은, 식량, 군사, 말 혹은 함대를 그와 반으로 나눌 것을 새로이 확고하게 약속했다. 그러나 이는 귀국하고자 하는 프랑스 왕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역사의 상들》

필리프 2세는 십자군의 모든 비난과 설득을 무시하고, 본격적으로 프랑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7월 26일, 필리프 2세의 충고로 코라도 델 몬페라토가 리처드 1세의 발 밑에 엎드리고 용서를 구했다.

27일, 두 왕은 예루살렘 왕위 계승 문제로 격렬한 언쟁을 벌였다. 그들은 코라도와 기의 주장을 각각 듣고 타협안을 내놓았다. 기의 예루살렘 왕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기가 죽으면 코라도나 코라도의 상속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한 것이다. 또한 티레, 시돈, 베이루트 지역은 코라도가 차지하기로 했다.

그 후 필리프 2세는 병을 이유로 리처드 1세에게 자신을 베즐레 서약에서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우디끄의 말을 빌리자면, 리처드 1세는 무슨 이유에선지 갤리선 중 가장 훌륭한 것으로 두 척을 필리프 2세에게 주었다.

필리프 2세는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에게 전리품 반절과 그의 군 지휘권을 넘기고, 코라도에게는 아크레 땅 반절과 모든 수비대 포로들을 양도했다.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3세의 아들 레몽에게는 기사 100명과 병력 500명을 넘겼다. 느베흐 백작 피에흐 드 꾸흑뜨네가 필리프 2세를 따라 귀로길에 올랐다.[74] 리처드 1세는 대륙의 플랜태저넷령을 평화로운 상태로 유지하겠다는 맹세를 요구했고, 필리프 2세는 이에 순순히 응했다. 역사가들은 필리프 2세에게는 더 이상 리처드 1세와의 옛 우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보았다. 리처드 1세는 용병대 대장을 귀환시켰지만 그곳은 필리프 2세와의 분쟁 지역이 아니라 툴루즈와 아키텐의 국경 지대인 베냑이었다.

1191년 7월 30일, 필리프 2세와 코라도가 아크레를 떠났다. 코라도는 왕을 티레로 데려가 송별회를 열어주었다.
수치스럽도다! 너무도 충격적이도다! 아직도 여기서 할 일이 많은데 떠나버리다니! ... 무얼 더 말할 수 있으랴? 프랑스 왕은 병 탓이라 주장하고 순례의 의무로부터 해방되었다. 그가 순례의 맹세를 했을 때만 해도 그는 특별히 순결하고 무탈해 보였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믿을만한 어떤 증거도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왕의 명예는 완전히 더럽혀지지 않았다. 아크레 공성전에서 그가 대단한 노력과 돈을 아끼지 않았고, 바로 그의 권위가 그 위대한 임무의 완성을 더 빠르고 수월하게 해내며 수많은 이들을 원조하고 지원했기 때문이다.[75]

... 프랑스 왕의 봉신들이 신께 온갖 고초와 불행을 주군에게 내려주십사고 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왕은 지체 없이 아크레를 떠났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필리프 왕이 아크레를 떠난 후 앙리 백작이 직접 고기잡이배을 타더니 그를 뒤쫒았다. 왕이 아주 멀리 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름다운 왕이시여, 아름다운 필리프! 날 이 타지에 두고 그대는 영영 떠나겠단 것이오?"

그러자 왕이 답했다.

"그렇소. 성인께 맹세코, 이 사악한 배신자! 영원히 샹파뉴로 돌아오지 말게."
《랭스 트루베르의 노래》
8월 3일, 필리프 2세가 프랑스 귀환길에 올랐다. 리처드 1세는 그가 떠나자마자 코라도를 위협하여 포로들을 빼앗고 8월 20일에 학살했다. 9월 7일, 성지에 남은 기욤 드 바흐는 아르수프 전투에서의 용맹한 활약으로 리처드 1세와 쌍방 화해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들은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가 죽자 프랑스 왕이 그가 남긴 광대한 영지를 차지하기 위해 귀환을 결정했다고 주장하며, 프랑스 왕이 잉글랜드 왕에게 부담감을 짊어지게 했다고 비난했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들은 고문들이 먼저 병으로 고생하는 왕에게 귀환을 건의하자 그가 이를 수용했다고 기술하며, 플랑드르 영지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신성 로마 제국의 연대기 작가는 잉글랜드 왕의 오만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라고 기술했다.

학자들은 필리프 2세가 필리프 1세 드 알자스가 급사할 것을 우려했던 점을 미루어 (1) 플랑드르 영지 승계 문제 해결을 위해 귀국을 서둘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또한 필리프 2세는 (2) 왕국을 장기간 비우는 행위가 초래할 위험을 인지하고 있었고, 리처드 1세가 전한 (3) 왕세자 루이의 소식으로 인한 상속인 문제를 걱정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필리프 2세와 루이가 죽는다면 프랑스 왕국의 큰 혼란으로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프랑스에 필요한 (4) 앙주 제국의 영지를 차지할 야심을 실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과거에는 필리프 2세에게 적대적인 서술을 주저하지 않는 잉글랜드 출신 뉴버그의 윌리엄의 기록을 고수하여 필리프 2세가 리처드 1세에게 단순히 열등감을 느꼈다는 설이 퍼져있었지만, 최근에는 아크레 공성전에서 필리프 2세의 활약을 평가절하한 주장에 의해 여태까지 3차 십자군에 한하여 의도적으로 논외 취급을 받았던 프랑스 연대기들도 반영하여 불안감을 갖고 불신이 깊었으며 경계했다는 분석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팔레스타인을 떠나기 전 그리고 뱃길에서 프랑스 왕이 몹시 울부짖었다'고 증언하고, 잉글랜드 왕을 향한 불신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들은 '프랑스 왕이 교황을 방문해 잉글랜드 왕이 사악한 짓들을 저질렀기 때문에 자신이 성지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잉글랜드 왕이 배신자라 주장했다', '프랑스 왕이 교황을 방문해 잉글랜드 왕과 한 맹세들을 철회해줄 것을 청하고 이는 자신이 강제로 예속된 것이라 말했다고들 한다'고 기술했다.[76]

리처드 1세와 살라딘이 아르수프에서 대격돌을 펼칠 무렵, 필리프 2세는 지중해에서 거대한 폭풍우를 맞닥뜨렸다.
신하들이 바다에서 길을 잃었다며 공포로 초토화되자 프랑스 왕이 침착하게 물었다.

"지금이 몇 시인가?"

부하가 자정이라고 대답하자 그렇다면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바로 이 순간 프랑스 신부들이 깨어나 우릴 위해 신께 기도하고 있다. 더 이상 위기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러더니 얼마 후 바다가 고요해졌다. 그 후 프랑스 왕은 적법한 절차를 밟고 브린디시에 상륙했다.
《십자군 역사에 관한 수록본》

리처드 1세는 카이사레아, 아르수프 전투 후에도 공식 서신들에서 필리프 2세에 대해 혹독한 비난을 퍼부었고, 이후에도 그의 귀국을 의식하는 모습을 보였다.
잉글랜드 왕이자 노르망디와 아키텐 공작, 그리고 앙주 백작 리처드가 안부를 전하오. 아크레를 점령한 후 나의 주군은 우리를 떠났소. 그는 비천하기 짝이 없게 순례의 목적을 저버리고 신의 의지에 반하여 자신의 맹세를 배반하였소. 그는 자신과 왕국에 대해 영원한 수치를 범한 것이오. 우리는 야파로 가는 중이오. ... 깊은 신실함과 진실한 신념을 품은 자크 드 아벤은 가장 용맹하고 헌신적인 기사였소.[77] ... 기필코 성지를 탈환할 때까지 우리는 결코 귀환하지 않겠소. 야파에서 우리를 굽어보시오.

1191년 12월, 필리프 2세는 아크레 공성전 승리를 축하 받으며 프랑스로 금의환향했다. 그는 퐁텐블로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냈는데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이날 프랑스 왕이 잉글랜드 왕의 영지를 침공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고 기술했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가 나를 독살하려고 했으며, 살라딘과 손잡고 십자군을 배신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가 남긴 아르투아를 차지했다. 1192년 1월 20일, 필리프 2세는 1191년 3월 메시나에서의 협약서를, 잉글랜드 왕이 지조흐와 벡쌍을 프랑스 왕에게 넘기겠다는 내용으로 위조하여 노르망디로 가져갔다. 노르망디의 세네샬은 이를 의심하여 영유권을 넘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문서는 침공을 위한 법적인 명분이었고 수년에 걸쳐 이루어질 대륙내 앙주 제국 멸망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4.5. 전쟁 준비

1192년 1월, 필리프 2세는 노르망디의 루앙에 유폐된 누나 아델을 풀어줄 것을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에게 재차 요구했으나 아들 리처드 1세의 승인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즉시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에게 대항할 동맹자들을 모았다. , 첫 왕비 에노의 이사벨의 부친이자 플랑드르와 에노 백작 보두앵, 툴루즈 백작 레몽 5세, 앙굴렘 백작 임마흐, 불로뉴 백작 르노 드 다마르탱[78] 등이 가세했고, 지조흐와 벡쌍의 영주들에게도 압박을 가하여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길링엄의 말을 빌리자면 중립적이던 영주들도 어느 마차던 뛰어들지 않으면 깔려 죽을 판국이었다.

또한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남프랑스 봉신들의 충성심을 뒤흔들었다. 아키텐에서는 조프루아 드 랑송을 중심으로 공공연한 반역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스코뉴에서는 툴루즈의 지원으로 반란이 터졌으나, 이곳의 세네샬이 리처드 1세의 왕비 베렝겔라의 오빠이자 훗날의 나바라 왕 산초 7세의 도움을 받아 진압했다.

한편 리처드 1세는 코라도 델 몬페라토가 예루살렘 왕위를 이어받는 것에 동의하고, 기 드 뤼지냥에게 키프로스 섬을 영지로 주었다.

1192년 4월 28일, 코라도가 예루살렘 왕으로 즉위 직전 '해시시를 피우는 남자들'을 이끌던 '산의 노인'으로부터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용의자는 리처드 1세, 살라흐 앗 딘, 코라도의 부인 이사벨 1세의 전 남편으로 좁혀졌으나 산의 노인이 자신의 명예를 걸고 암살 배후는 리처드 1세가 아니라고 밝혔다. 5월 5일, 리처드 1세는 자신과 필리프 2세의 조카인 앙리 드 샹파뉴를 이사벨 1세와 결혼시켜 예루살렘 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리처드 1세가 코라도 암살의 배후란 소문을 퍼뜨렸고, 보베 주교는 필리프 2세에게 "잉글랜드 왕이 그대를 살해하기 위해 암살단을 파리로 보냈소."라는 허위 급서를 보냈다.[79]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서신을 읽은 즉시, 왕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중무장한 호위들을 두었다고 증언했다.

하단은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의 기록이다.
프랑스 왕이 파리에서 머물고 있었으나 성지에 있는 잉글랜드 왕을 근거없이 두려워했다. 잉글랜드 왕을 음해하기 위해 일부러 저렇게 행동하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 지금까지 전해진 바에 따르면 프랑스 왕에게 예전처럼 매우 친밀히 다가간 몇몇 이들이 위험에 빠졌다고 한다.[80] 많은 사람들이 왕의 이 희한한 행동을 의아해하자 그는 그들을 납득시키고, 잉글랜드 왕을 향한 적대감을 선동하기 위해 파리에서 전 대신들을 소집했다.

여기서 그는 잉글랜드 왕에게 불리한 많은 사실을 주장하고 무엇보다도 잉글랜드 왕이 잔인한 암살자들을 고용해 극악무도하게 코라도 델 몬페라토를 살해했다고 확언했다. 그리고 신뢰할 만한 자들이 신변을 삼엄히 호위할 것을 강력히 충고한 서신을 보여주고, 잉글랜드 왕이 자신을 죽이려 음모를 꾸몄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런 이유로 평상시보다 많은 염려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지 말아라. 하지만 그대들이 여전히 이를 부적절하고 불필요하다 여긴다면 그것을 제거하겠다고 결정하라."

또한 이 명백한 배신자로부터 받은 상처를 당장 복수하는 것이 자신의 간절한 소망이라고 덧붙였다. ... 신중한 몇몇 이들이 그의 맹렬한 충동이 잉글랜드 왕의 영토를 침공하는 것을 잠시나마 저지했다. 그리고 그의 행동에 대해 지나치게 세심하게 경계하고 있다고 말했다.
《잉글랜드 국정의 역사》

1192년 5월 30일, 리처드 1세는 예루살렘 코앞에서 필리프 2세와 존이 공모를 꾸미고 있으니 당장 잉글랜드로 귀환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이것을 들은 왕은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골몰히 생각한 끝에 그는 상속받은 땅과 왕국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귀국하겠다고 말했다.

... (예루살렘을 앞에 두고 기대감으로 들떠서 파티를 벌이는 십자군 막사에서)자정까지 수많은 불빛이 타오르고, 여러 종류의 노래를 부르는 음유시인들이 시끄럽게 돌아다녔다. 오직 왕의 마음만이 깊은 근심에 잠겨 있었다. 그는 화난 기분으로 잠자리를 찾았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결국 다음날, 리처드 1세는 성지에 더 머물기로 결정했다. 7월 27일, 리처드 1세의 80명의 병사와 3필의 말이 살라딘의 약 60,000명의 병력을 몰아낸 야파 전투가 벌어졌다.

8월 25일,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가 아크레에서 병사했고, 9월 2일, 리처드 1세가 살라딘과 라믈라 평화 협정을 체결한 후 10월 9일, 아크레를 떠났다. 리처드 1세는 크리스마스에 맞춰 귀국할 것이란 서신을 잉글랜드로 보냈으나 함대가 지중해에서 폭풍우를 만나 불시착을 거듭하였다. 그러다 갑자기 소식이 끊겼다.

12월 28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필리프 2세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대가 들으면 기쁘기 그지 없을 소식을 전하오. 우리 제국의 적이자 그대 왕국의 방해꾼, 잉글랜드 왕 리처드가 사랑해 마지않는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에게 잡혀있소.'

교황이 분노하여 레오폴드 5세를 파문하고, 프랑스 왕이 잉글랜드 왕의 영지를 침범하면 성무 금지령을 내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필리프 2세는 우선 리처드 1세의 투옥 기간을 늘리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에 로비를 했다.

1193년 1월, 필리프 2세는 존에게 잉글랜드 왕위를 찬탈하라고 충동질했다. 존이 아키텐의 영지 일부와 센 강 동쪽 부근의 땅 대부분, 지조흐와 벡쌍을 내놓고 아델과 결혼한다면 그 대가로 대륙의 플랜태저넷령 전체를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존은 모든 조건을 수락하고, 대륙의 플랜태저넷령에 대해 충성 서약을 했다.

존은 잉글랜드로 건너와 형에 대한 온갖 험악한 소문을 사실처럼 떠들고, 심지어 형이 이미 죽었으니 제프리 2세의 아들인 아르튀르(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잉글랜드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윌리엄 마셜과 필리프 2세의 궁정에 심어둔 첩자 덕에 리처드 1세의 소식을 알게 된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이 아들 존의 계획을 결사적으로 막았고, 런던의 섭정위원회는 존을 지지하지 않았다.

잉글랜드 왕위 찬탈이 실패했단 소식을 들은 필리프 2세는 당장 출군하여 지조흐 요새를 첫 목표로 삼았다. 4월 12일, 성주는 순순히 성문을 열고 필리프 2세에게 투항했는데, 역사가들은 사전 모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이 기세를 몰아 노르망디를 관통하여 순식간에 해안지대인 디에프와 르 뜨헤뽀흐에 다다랐다.

필리프 2세와 에노•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의 군세는 노르망디의 중심지, 즉 아델이 유폐된 루앙을 포위했다. 루앙의 세네샬 레지스터 백작이 도시 방어선을 공들여 구축해 공격이 순탄치 않자, 필리프 2세는 항복을 권유했다. 레지스터 백작은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방문할 수 있고 혼자 성 안으로 들어오면 아델을 보내주겠다고 조롱했다.

이를 본 필리프 2세는 분을 이기지 못해 포도주 부대를 때려 부수고 강에 던지며, 자신의 공성전 무기를 불태우고는 "반드시 루앙을 정복하겠다."라고 외쳤다. 즉시 전략을 변경하여, 일거에 노르망디의 전략적 가치를 자랑하는 요새들을 점령해 루앙을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는 한편, 뚜헨느와 베리 사이의 영지를 차지했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 법정은 리처드 1세를 기소하여 그 죄목으로 시칠리아를 점거하려 한 무력 행위, 키프로스 정복, 코라도 암살 배후를 내걸었다. 리처드 1세는 "나는 신 바로 아래 계급에서 태어났다."라고 외치고, 하인리히 6세에 대한 경의를 거부했다. 당당한 태도로 스스로를 열렬히 변호하여 청중을 감동시키자, 거액의 보석금을 지불해야 석방될 수 있다는 판결을 받았다.

참고로, 리처드 1세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의 뒤른슈타인 성에 수감된 시기를 다룬 트루베르 블롱델드 넬르의 유명한 전설이 있다.[81] 문학 사학자 포스뻬 따비는 흥미로운 점은 실제 인물로서의 블롱델이 필리프 2세에 대해 노래하는 대목이라고 지목했다. 하단은 그 중 일례이다.
Mon cuers doi hair, se longument prie / Cuidiez ke li maus d'amer ne m'anuit. Nenil. Par foi. dit ai grande foli. Ja ne quiers avoir nul autre deduit. Tan com li plaira, serai roi de France; / Car en tot mont na de sa vailance / Pucele ne dame; me ke trop me fuit.

신성 로마 제국 연대기 작가들과 프랑스 연대기 작가들은 하인리히 6세와 필리프 2세의 접촉에 대해 침묵한 반면,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하인리히 황제가 프랑스 왕과 동맹을 맺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82] 이는 그가 개입한 주교 살해로 말미암아 유발된 반란군을 그렇게나 더욱 잘 제압했을 정도였다.
《호버든의 연대기》

1193년 7월 9일, 망트에서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의 사절단이 만나 회담을 열었다. 리처드 1세는 그들을 통해 노르망디 침공을 중단하면 지금까지 얻은 영지를 계속 유지하는 동시에 추가로 다른 영지도 넘길 수 있단 조건을 제시했다. 또한 리처드 1세가 이 영지를 되찾으려면 20,000마르크를 지불하고 조공을 바치겠다는 조항이 더해졌다.[83] 필리프 2세는 정복한 영지들을 잘 통합하여 그의 세력으로 흡수했다.

8월 15일, 필리프 2세는 덴마크 왕 발데마르 1세의 딸 잉에보어와 결혼식을 올리고, 지참금으로 10,000마르크를 받았다.[84] 역사가들은 필리프 2세가 이 결혼으로 리처드 1세를 대항하기 위한 덴마크 함대의 군사적 협업을 도모하려 했고, 왕세자 루이가 병치레를 겪었기 때문에 상속인이 더 필요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결혼식 첫날밤을 치른 이튿날, 왕비 대관식에서 다음과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
대관식 절차를 치르는 동안 악마의 농간에 빠진 프랑스 왕이 덴마크의 잉에보어에게 깊은 혐오감을 품었다. 그는 그녀의 눈앞에서 창백하게 질려서 온 몸을 격렬하게 떨었다. 그는 정신적으로 극도의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고 그 장소를 떠나고 싶어하는 모든 징후를 보여주었다.
《인노첸시의 업적》

필리프 2세는 대관식이 끝나자마자 덴마크 사절단에게 잉에보어를 돌려보낼 것을 요구했다.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잉에보어는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그는 잉에보어와 첫 왕비 에노의 이사벨의 가계도를 위조하고, 주교들을 설득해 근친혼을 주장하여 일방적으로 혼인을 무효화했다.

결혼식 첫날밤 사건은 미제로 남아있으나, 많은 역사가들은 정치적 문제와 분리하여 필리프 2세의 반응은 성적인 문제로 확언했다.[85] [86] 또한, 그가 팔레스타인을 떠난 후 온갖 타각적 불안 증세를 보인 기록들을 근거하여 그곳에서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인해 빈발하는 손떨림 증상, 잦은 병치레, 그리고 남은 평생 신경증에 시달렸으며 첫날밤 사건은 이의 연장선이라고 분석했다. J W. 볼드윈 교수는 첫날밤 반응을 원인을 알 수 없는 급성 섹슈얼 트라우마 발현으로 설명했다.[87]

리처드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하게나우로 이송되어 포로로 잡혀 있었으나 밝은 모습을 보였다.[88] 신세를 한탄하지만 않고 신성 로마 제국의 인사 및 고위 성직자들과 인맥을 다졌다. 하지만 보석금을 모으는 시간은 길었고, 리처드 1세는 루이 7세와 모후 엘레오노르의 딸이자 이부 누나인 샹파뉴 백작 부인 마리에게 작사한 시를 보내어 심정을 표현했다.[89]
어떤 포로도 진심을 말하지 않소
능숙히, 슬픔에 빠져 있지 않으면.
하지만 위로를 위해 그는 노래하오.
나는 많은 친우가 있으나 그들의 선물은 적소.
그들에게 불명예가 있으리, 나의 보석금 때문에
두 번의 겨울이 지나도록 포로로 남아 있다면.

나의 부하들과 봉신들은 잘 알고 있소,
잉글랜드, 노르망디, 푸아투와 가스코뉴인들이여,
나는 그리 가난한 동료가 없다는 것을
그들을 나는 돈을 탐내어 감옥에 저버리지 않음을.
질책하려 말하는 것이 아니오만
여전히 나는 포로라네.

확실히 보고 나는 비로소 깨달았소
망자와 포로는 친우도 가족도 없음을.
그들이 금과 은을 탐내어 나를 저버렸기 때문이오.
나를 향한 질책이 많으나, 나의 사람들을 향한 질책은 더 많소,
내가 죽은 후 그들이 질책받을 것이므로,
오래도록 포로로 남아 있다면.[90]

나의 심장이 슬픈 것은 더이상 놀랍지 않소.
나의 주군이 내 영지를 가혹함에 빠뜨렸기 때문이오.
그가 우리의 맹세를 기억한다면
우리 둘이 함께 하였던,
나는 실로 잘 알고 있네 오래도록
포로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을.

앙주인들과 투렌인들은 잘 알고 있소,
부유하고 무사한 이 젊은이들이여,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는 다른 이의 손에서 포로라는 것을.
그들은 나를 많이 사랑했으나,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소.
훌륭한 군대는 더이상 평야에 존재하지 않소
내가 포로이기 때문이오.

나의 동료들이여, 그들을 나는 사랑했고 사랑하오,
캉의 동료들이여 페르슈의 동료들이여,
나에게 말하게, 노래하게 그들이 믿지 않음을,
그들을 향한 나의 심장이 거짓과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이 나와 싸운다면, 그들은 몹시 극악무도하오,
내가 포로로 남아 있을 동안.[91]

백작 부인인 누이여, 그대의 고귀한 영지는
그로부터 보살핌을 받고 보호받을 것이오.
나는 그에게 호소하오.
그리고 그 때문에 나는 포로로 남아 있네.

나는 샤르트르 백작 부인인 누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오,
루이의 모친 말이오.[92]
《어떤 포로도 진심을 말하지 않소Youtube

필리프 2세는 보베 주교를 신성 로마 제국으로 파견하여 리처드 1세의 석방을 반대하고, 포로 생활을 가혹하게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존과 합세하여 재빨리 60,000마르크를 긁어모으고, 하인리히 6세에게 더 큰 금액을 지불할 테니 리처드 1세를 넘기든가 아니면 9월 29일까지 수감을 늘려줄 것을 제의했다.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이 직접 하인리히 6세에게 100,000마르크를 전달했으나 이 때문에 리처드 1세는 석방일인 이듬해 1194년 1월 17일이 되어도 풀려나지 못했다. 필리프 2세는 하인리히 6세에게 전할 서신을 썼다.
'그대는 잉글랜드 왕이 모두에게 위협적인 존재임을 정녕 모르는 것인가? 그의 생명을 대가로 그가 가진 것의 반을 차지할 기회를 이대로 놓칠 것인가?'
그 사이 하인리히 6세는 리처드 1세에게 자신을 잉글랜드에 대한 상위 주군으로 인정할 것과 루앙 대주교 월터를 볼모로 요구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잉글랜드만으로 양보하는 것으로 조건을 낮추느라 애를 쓴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의 설득에 따라 잉글랜드 왕이 조건을 수락했다고 기술했다.[93]
2월 2일 ... 하인리히 황제가 잉글랜드 왕에게 프랑스 왕과 존 백작이 보냈던 서신들을 전했다. 그것을 읽고 잉글랜드 왕이 몹시 심하게 동요하고, 혼란스러워하며, 절망했다.
《호버든의 연대기》

1194년 2월 4일, 리처드 1세가 풀려났다.

필리프 2세는 급히 존에게 서신을 보냈다.
'자신의 몸을 돌보도록 하시오. 사탄이 풀려났소.'

4.6. 전쟁의 시작

은 서신을 읽고 당장 파리로 도주했다. 필리프 2세는 존으로부터 노르망디와 뚜헨느의 영지 일부를 더 뜯어내고, 노르망디 공략에 박차를 가하여 전략적 요충지인 뇌브흑, 에브회, 보드회이를 점령했다. 마침내 루앙에서 10마일 떨어진 뽕드라흑슈로에 이르렀고, 협력의 대가로 존에게 에브회를 주었다.

1194년 3월 13일,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로 귀국하여 존의 지지자들을 숙청하고 4월 17일, 두 번째 대관식을 치렀다. 리처드 1세는 군자금을 모으며 프랑스 출정을 선포했다. 5월 12일, 리처드 1세가 300척의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노르망디에 상륙한 후, 훗날의 나바라 왕 산초 7세가 이끄는 석궁병 부대와 합세했다.

존이 바로 필리프 2세를 배반하고 형의 발치에 엎드려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도 리처드 1세를 달랬기에 리처드 1세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사악한 동료들의 꼬임에 넘어간 어린아이일 뿐이다. 너의 조언자는 응당 대가를 치를 것이다."라고 말하고 동생을 공개적으로 용서했다.[94] 그 후 존이 에브회로 달려가 프랑스 수비대를 죽이고 에브회를 형에게 바쳤다.

이에 필리프 2세가 격분하여 보복으로 에브회를 탈환하고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리처드 1세의 병력이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즉시, 필리프 2세는 병력을 차출해 남겨두고 루앙 남쪽 베흐뇌이로 진군했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다음날, 병사들이 왕이 떠나자 철수했다고만 기술했다.

5월 28일, 베흐뇌이 공성전 승리를 코 앞에 두고 노르망디가 필리프 2세의 수중에 떨어지기 일보 직전, 리처드 1세가 분견대를 차출하여 포위망을 기습하고, 본대를 이끌고 가 필리프 2세군의 보급로를 끊자 이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5월 30일, 리처드 1세가 에브회에 당도하자, 수비대가 투항했다. 6월 5일, 빠씨에서 필리프 2세는 자신을 조롱했던 루앙의 세네샬 레지스터 백작을 생포했다.

리처드 1세가 노르망디의 요새들을 하나씩 탈환하자,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아키텐 봉신들을 선동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 때문에 리처드 1세가 남프랑스로 진군하던 중인 6월 27일, 나바라 왕 산초 6세가 사망하여 그의 아들 산초가 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귀국길에 올랐다. 리처드 1세가 푸아티에로 넘어가려면 필리프 2세가 점거한 로슈를 거쳐야 했기에, 리처드 1세는 공성전을 벌이고 로슈를 탈환했다.

필리프 2세는 이 틈을 타서 북프랑스 공략 대신 군세를 재정비하여 동맹군 지원으로 전략을 변경, 남프랑스로 진군했다. 리처드 1세는 정보를 입수하고 벙돔므 평야에 진을 쳤다. 필리프 2세는 프레티발 부근에 진을 치고 리처드 1세에게 서신을 보냈다.
'내일 그대를 적대하는 무리를 이끌고 방문할 줄 알게.'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왕이 서신을 읽고 기뻐하며 답신했다고 기술했다.
'기꺼이 기다리겠소. 만약 안 오면 내일 아침에 내가 직접 방문하리다.'

필리프 2세는 그날 밤 막사를 걷고 퇴각했다.

1194년 7월 3일, 리처드 1세가 윌리엄 마셜에게 후발대를 맡기고 직접 필리프 2세를 추격했다.
아침 일찍, 잉글랜드 왕이 무장을 명령하고 교전을 준비했다. 그는 맹렬하게 추격하여 프레티발 숲에서 프랑스 왕의 후위를 따라잡았다. 프랑스 왕의 많은 군사가 죽고 포로로 잡혔다. 그곳에서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의 막대한 보물을 탈취하고 심지어 프랑스 왕의 인장과 그와 백작 존을 지지한 배반자 명단까지 손에 넣었다.

프랑스 왕은 황급히 그 길을 벗어나서 교회로 숨어 들어가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잉글랜드 왕은 이 사실을 모른 채 프랑스 군사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했다. 그는 위협적인 숨소리를 내며 프랑스 왕을 찾았고 사생결단을 내거나 아니면 생포할 것처럼 보였다.

한 플랑드르인이 프랑스 왕이 멀리 떠난 것을 보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 말에 속은 잉글랜드 왕이 가장 날쌘 말로 바꿔 타고 노르망디 국경 지대까지 추격했다. 그가 탄 말이 쓰러지기도 하여 돌아올 때 용병대장 메르카디에의 말을 타야 했다.
《호버든의 연대기》

이 전투가 바로 프레티발 전투이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이 전투로 귀한 보물을 잃어버렸다고만 기술했다.[95]

리처드 1세는 남프랑스로 진군하여 조프루아 드 랑송과 앙굴렘 백작 임마흐의 반란을 단번에 격파하고, 기사 300명과 병사 40,000명을 생포했다. 필리프 2세는 북프랑스로 진군하여 리처드 1세의 봉신들의 군세를 와해시키고, 존과 아룬델 백작의 수하물을 탈취하여 프레티발 전투의 굴욕을 되갚았다.

7월 23일, 교황이 파견한 사절단의 중재로 띠예흐에서 두 왕의 대리인이 만나 다음해 1195년 11월 1일까지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에게 각국의 기사 5명을 결투시켜서 결론을 짓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리처드 1세가 두 왕이 참여해야한다는 조건을 걸자 포기했다.

4.7. 4년 만의 재회

1195년 초, 하단은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의 기록이다.[96]
잉글랜드 왕이 시농에서 머무는 동안, 15명의 암살자가 왕궁으로 왔다. 그러나 그들이 잉글랜드 왕을 살해하기 위해 접근을 시도했을 때, 그들 중 몇몇이 붙잡히고 수감되었다. 그들은 프랑스 왕의 명령을 받았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은 그들의 동료들이 마저 체포되는 것과 같은 그러한 때까지 이 일이 프랑스 왕의 음모임을 모르는 것처럼 굴고, 판단을 표시하는 것을 미루었다.
《호버든의 연대기》

1195년 3월, 교황 첼레스티노 3세가 필리프 2세와 덴마크의 잉에보어의 혼인 무효화를 다시 무효화했으나, 필리프 2세는 이 결정을 무시했다. 덴마크 사절단이 이 문제로 교황과 회신하느라 부르고뉴를 통과하자 필리프 2세는 즉시 부르고뉴 공작 외드 3세에게 접근했다. 외드 3세는 사절단이 부르고뉴를 지날 때 그들을 감옥에 처넣고 서신을 압수했다.

그런데 이후 부르고뉴 공작 외드 3세도 부인인 포르투갈 공주 테레사와 혼인 무효화를 했다. 18세기 학자들은 정치적 문제와 별도로, 개인적 사유로 자식이 없던 것도 있거니와 필리프 2세를 향한 남편 외드 3세의 맹목적 호의가 아내를 격분케 하여 결혼이 파탄이 났다고 추측했다.

1195년 4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한 은자가 잉글랜드 왕을 찾아가 그에게 경고했다.

"소돔의 멸망을 기억하여 불법적인 성관계를 그만두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에 마땅한 신의 벌을 받을 것이오!"

그러나 잉글랜드 왕은 은자의 말을 무시했다. 얼마 후 그가 목숨이 위급할 지경으로 병이 악화되자 은자의 경고를 기억했다. ... 잉글랜드 왕은 주교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는 죄를 뉘우치고 오랫동안 찾지 않았던 자신의 아내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금지된 성관계를 포기하고 아내와 어울렸다. 그들의 육신은 하나로 결합하고 신께서 왕의 몸과 영혼에 건강을 내리셨다.
《호버든의 연대기》

C. 재거는 소돔을 규정하지 않았으나, 이 기록과 대조하여 1187년 6월 호버든이 목격한 샤토루에서의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의 관계는 소돔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플로리는 소돔을 동성애로 규정, 리처드 1세가 동성애를 했다고 주장했으나 그 논거를 대기 위해 무리하게 사료를 끌어와 자의적 규정을 했다는 지적이 있다. 최근에는 존 M. 쉡이 소돔을 '임신을 유발하지 않는 모든 종류의 성행위'로 주장했다. 현재까지의 연구에 비추어 소돔 사건을 성적 성향의 근거로 포함하기에는 논란이 있다.

확실한 점은 소돔을 저질렀다는 경고를 들은 잉글랜드 왕 중 유일한 선례가 윌리엄 루푸스였다는 것이다.[97]

이후 리처드 1세는 콘월과 데번에서 나오는 수익을 왕비 베렝겔라에게 주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부부가 함께 르망 근처를 방문하여, 그곳의 영지를 사들인 후 집을 짓기 시작했다고 기술했다.[98]

1195년 여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가 잉글랜드 왕 리처드에게 상호간 사랑의 증표로 대단한 가치를 지닌 거대한 금관을 보냈다. 그리고 그가 한 충성 서약에 대해 프랑스 왕의 영토를 침공할 것을 요청했다. 황제는 그가 프랑스 왕으로부터 입은 피해를 복수하고자 한다면 직접 충분한 도움을 줄 것이라 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은 이 전언에 어떤 숨겨진 배반이 있을 것을 염려하고, 그 도움이 무엇인지 묻기 위해 엘리 주교이자 고문인 기욤 드 롱샴을 황제에게 사절단으로 파견했다. 왜냐하면 잉글랜드 왕이 황제가 프랑스 왕을 복종시키길 무엇보다도 원했다는 것을 잘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황제와 프랑스 왕 사이에 동맹이 형성되면 그 모든 것은 자신의 손해가 될 것이라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사절단이 프랑스 영토를 지날 때 필리프 2세가 그들을 억류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필리프 2세는 이것으로 리처드 1세가 띠예흐 협정을 위반했다고 선언하며 노르망디를 기습했다. 필리프 2세가 주요 전략적 요충지인 보드회이를 침공, 공성전을 벌여 요새들을 파괴하자 리처드 1세가 군대를 이끌고 그곳에 당도했다.

1195년 7월, 리처드 1세가 회담을 위해 필리프 2세를 방문했다. 아크레에서 헤어진 후 4년만의 대면이었다.

적이라도 이때는 전투를 중지하는 것이 당대 관례였으나 필리프 2세는 요새 벽 밑에 땅굴을 파게 했다.
두 왕이 요새 바로 옆에서 회담하던 중 요새의 커다란 벽면이 엄청난 굉음을 내며 무너졌다. 이를 본 잉글랜드 왕이 극도로 분노하여 당장 회담장을 떠났다.

그 틈에 프랑스 왕과 그의 군사들이 재빨리 퇴각했다. 잉글랜드 왕이 군사들을 이끌고 프랑스 왕을 추격했다. 프랑스 왕과 그의 군사들이 센 강을 건널 때 다리가 부서져 거의 익사할 뻔했다. 그들은 힘겹게 육지에 다다르고, 강둑에 막사를 세웠다.

잉글랜드 왕은 그 요새로 돌아가 프랑스 왕이 남기고 간 많은 것들을 차지했다. 그리고는 바다 양 쪽에 위치한 자신의 모든 영토에서 대규모 군사를 일으켜 프랑스 왕의 영토로 침입했다. 저항하는 수많은 이들을 학살하고, 풋곡식을 거두고, 포도나무와 잘 익은 열매가 열린 나무들을 뿌리채 뽑았다. 그리고 도시들을 불태웠다.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1195년 7월 18일, 카스티야 왕 알폰소 8세가 야쿱 알 만수르에게 패배한 알라르코스 전투 소식이 전 그리스도교 세계에 전해졌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와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이 때문에, 잉글랜드 왕과 프랑스 왕이 휴전했다고 기술했다.

1195년 8월, 두 왕이 회담을 열었다. 이때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에게 누나인 프랑스의 아델을 돌려주었다. 제프리 2세의 딸 엘레오노르 드 브르타뉴와 필리프 2세의 왕세자 루이의 결혼 협상이 오갔는데, 리처드 1세는 질녀의 지참금으로 지조흐, 부드몽, 노르망 벡쌍, 베흐농, 이브히, 빠씨 등의 영지와 20,000마르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필리프 2세는 오말르, 오슈, 아흑슈와 노르망디 요새 몇 채를 반환하기로 했고, 최종 합의는 11월 1일에 의결하기로 미루어졌다.

8월 20일, 필리프 2세는 누나 아델를 뽕띠유 백작 기욤 3세와 결혼시키고, 지참금으로 아흑끄와 우를 주었다.[99]

이즈음 산의 노인의 서신이 필리프 2세에게 전해졌다.
우리는 잉글랜드의 영화로운 왕 리처드가 몬페라토 후작을 살해했다고 수많은 이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잘못된 의심에 가려진 그의 명성을 씻기 위해 여태까지 우리가 감췄던 이 사건의 진실을 선언한다. 우리의 행동들로 무고한 이가 고통받지 않기를 원한다. ... 몬페라토 후작이 우리를 불쾌하게 하고 충고가 그를 바꾸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의 손으로 정당하게 그를 죽였다. ... 또한, 우리는 잉글랜드 왕이 우리를 사주하여 프랑스 왕 주변에 매복을 심었다는 공개적으로 알려진 말을 들었다.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거짓이자 가장 근거 없이 날조된 의심이다. 신께서 그의 결백을 알고 계시며, 우리는 그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될 이를 향한 음해를 좌시하지 않는다. 작별을 고한다.

하단은 당대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이다.
프랑스 왕이 산의 노인의 서신 낭독을 들은 즉각 잉글랜드 왕의 무죄를 선언했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친우인 후작 암살 사건에서 잉글랜드 왕을 오판했기 때문에 조만간 어려움 없이 그와 동맹을 맺을 수 있다 말했다.

이 무렵 프랑스 왕은 잉글랜드 왕의 누이이자, 시칠리아 왕의 배우자였던 조안을 비롯해 몇몇 독일 처녀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그녀들이 덴마크 소녀(잉에보어)의 최근 사건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거절했다. 나는 프랑스 왕이 덴마크의 가장 고귀한 소녀를 얼마나 수없이 거부했는지 들었고, 그 예들은 나를 깜짝 놀라게 한다. 프랑스 왕은 한 백작의 딸 외에 독일의 고귀한 몇몇 쳐녀와의 결혼을 진정으로 바라고 고대했으나 연이어 퇴짜맞았다. .... 덴마크 왕 크누트가 누이의 불명예를 심장에 새겼다.

... 휴전 중, 때때로 잉글랜드 왕의 심장이 쉽게 누그러져 프랑스 왕과의 화해가 짐작되었다.

... 잉글랜드 왕과 프랑스 왕 사이의 평화가 하인리히 황제를 불쾌하게 했다.

그런데 11월 1일,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두 왕이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은 아침 9시였다. 그런데 아침 6시에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을 만날 것을 서둘렀다. 랭스 대주교가 나와서 그를 맞이했다.

"왕이시여. 안으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지금은 프랑스 왕이 대신들과 자문을 나누는 중입니다. 그러니 이렇게까지 재촉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 잉글랜드 왕은 랭스 대주교의 말을 믿고 자신의 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9시간이 지나도록 프랑스 왕이 그곳으로 오기를 계속해서 기다렸다. 잉글랜드 왕은 더이상 기다리지 않고 다시 약속한 장소로 갔다. 그리고 프랑스 왕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바로 이 때 보베 주교가 프랑스 왕 바로 앞에서 잉글랜드 왕을 가로막고 말했다.

"나의 주군은 당신을 위증과 불성실로 고발한다. 당신은 아침 9시에 오기로 했으나 오후 3시가 넘어서 왔소. 나의 주군은 당신을 거절한다."
두 왕이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고 전쟁이 재개됐다.

4.8. 그 후

두 왕이 전쟁과 휴전을 반복한 끝에 5년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자세한 내용은 리처드 1세 항목 참조.

필리프 2세의 주요 동맹국이자 대륙의 세력 균형자에 가까운 역할을 한 플랑드르와 툴루즈를 연이어 이탈시키고,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 계승에도 관여한 리처드 1세의 정치적 행보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 반대로 우수한 정치적 식견과 기민한 외교술을 방증한다. 여기에는 헨리 2세가 일생을 바쳐 일구어낸 개혁과 축적한 국력이 원동력이 되었고, 리처드 1세가 잉글랜드를 비운 사이 섭정으로 임명한 휴버트 월터의 내정 능력을 십분 발휘하게 했다. 또한, 잉글랜드보다 몇 배의 병력을 동원했던 살라흐 앗 딘도 경악한 리처드 1세의 개인 용력과 별도로 야전 사령관으로서의 역량은 당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수준이었고, 필리프 2세가 권모술수를 동원하여 리처드 1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상황을 조성하기까지 전면전을 피한 이유는 전력으로도 그리고 국력으로도 열세임을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상단의 사례로 1197년 리처드 1세가 대륙의 세력 균형자 역할을 한 플랑드르 백국을 필리프 2세의 동맹으로부터 이탈하도록 유도한 방책 즉, 교역 봉쇄와 같은 외교경제압력을 가동하고, 거액의 보상금과 같이 유인조치를 구사하는 데 전념할 수 있었던 주요 원동력은 국력에 근간했다. 이를 최대한 살릴 수 있었던 것이 군사적 능력을 포괄한 리처드 1세의 개인 협상력일 것이다. 다만, 1198년 필리프 2세가 지조흐에서 리처드 1세로부터 기습받아 참패하고 궁지로 몰렸던 때, 거대 동맹 연합을 건설한 리처드 1세가 부르고뉴 공작 외드 3세에게 제프리 2세의 딸 엘레오노르와의 결혼뿐만 아니라 거절못 할 당근을 제시하여 동맹을 꾀한 전적이 있었으나, 필리프 2세가 외드 3세에게 개인 교섭 능력을 발휘하여 실패로 돌아간 결과도 존재했다.

5. 존 왕과의 대립

1199년 4월 6일, 리처드 1세가 리모주 자작의 농성을 제압하던 중 석궁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자 이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

이렇듯 플랜태저넷 왕가를 우환에 빠뜨려 약화시킨 필리프 2세는 존의 실정을 명분으로 삼아 봉건법 위반에 따른 존의 대륙령의 몰수를 선언했으며[100] 이에 노르망디로 상륙한 존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후 앙주, 멘, 푸아투, 투렌 등 대부분의 노르망디 공국과 아키텐 공국의 영토를 점령하여 카페 왕령지로 삼았다.

이후 복수의 칼을 갈던 존은 당시 필리프 2세의 계략에 의해 자신의 영역을 왕실 직할지로 빼앗기게 된 페르디낭 드 부르고뉴[101]가 필리프 2세에게 큰 불만을 품게 된 것을 알고, 그와 연계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4세까지 끌어들였으며, 이 외에도 판 플란데런 가[102], 레히나르 가[103] 등의 여러 영주 세력들을 끌어들여 대규모 연합군을 구성, 약 30,000명에 달하는 전력으로 프랑스를 침공했다.

필리프 2세는 잉글랜드와 플랑드르 연합군에 의해 담 해전에서 패배하기도 했으나, 이후 상륙한 존 왕을 아들 루이 8세가 로슈 오무안 공방전에서 격파하면서 전세를 유리하게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다. 전쟁이 일어나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에 프랑스 남부 지방을 순회 중이어서 자신의 본거지이자 수도인 파리를 비우고 있었던 필리프 2세는 존이나 오토 4세의 예상과는 달리 재빠르게 남부 친국왕파 영주 세력들을 규합하여 15,000여명에 달하는 병력을 구성하고 굉장한 속도로 북쪽으로 진격해, 파리 북부를 제압하고 발랑시엔 인근에나 와있던 오토 4세의 연합군을 부빈 평야에서 맞닥뜨림으로써 결전을 강제했다.[104]

이 부빈 평야에서 필리프 2세의 총지휘하에 유드 드 부르고뉴, 로베르 드 드뢰 등의 영주들이 가세한 7,000여명의 프랑스군이 오토 4세의 총지휘하에 윌리엄 롱제스피[105], 페르디낭 드 플랑드르, '용기공' 앙리 레히나르, 르노 드 다마르탱 등이 참전한 신성 로마, 잉글랜드, 플랑드르 연합군 9,000명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으며, 연합군은 다마르탱이 인솔하던 장창병들이 마지막 발악에 가까운 용전을 선보인 것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완벽한 졸전을 선보이고, 프랑스군에게 압도당하며 대패했다. 이 전투를 역사상 부빈 전투라고 하며(영문 위키 부빈 전투) 이 전투에서 대패한 연합군측은 황제 오토 4세를 비롯한 신성 로마 제국 수뇌부만이 도주에 성공하고, 연합군의 나머지 핵심 수뇌 인원들의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필리프 2세에게 사로잡혀[106] 감옥살이를 했다.[107]

존 왕이 포로로 잡은 귀족들을 감옥에 가두고 죽여 폭군으로 악명을 얻은 것과는 달리 필리프 2세는 물론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다. 부빈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주요 귀족으로는 연합군의 좌익을 지휘한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롱제스피, 우익을 지휘한 플랑드르 백작 페르디낭이 있었는데 모두 몸값을 내고 풀려났다. 그 밖에 남작들도 25명이나 포로로 잡혔지만 딱히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관례대로 몸값을 내고 풀려난 것으로 보인다. 예외적으로 다마르탱(파리 근교 북동부) 백작 르노는 원래 필리프 2세의 봉신이었다가 오토 4세 측에 붙었는데 최후까지 용감히 싸우다가 포로로 잡혔다. 이후에도 끝까지 필리프 2세에 복종맹세를 하지 않았고, 결국 영지를 몰수당한 채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자살했다. 물론 이런 경우는 필리프 2세가 비난받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 부빈 전투 이후, 프랑스와 카페 왕조의 위용은 전 유럽에 드날리게 되었으며 필리프 2세가 원했던 왕권 강화 계획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후 필리프 2세에게 거의 모든 프랑스 내의 영지를 빼앗기게 되고 잉글랜드 본토 외에 남은 게 없게 된 존이 계속 잉글랜드 국내에서 찌질거리다 잉글랜드 귀족들이 도저히 참지 못해 들고 일어나 존 왕을 협박해서 얻어낸 것이 <마그나 카르타>, 즉 <대헌장>이다.

6. 내정

그의 치세 대부분이 앙주 제국의 플랜태저넷 왕가와 싸워 땅을 뜯은 것으로 점철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국가 내정 운영면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군이었다. 오히려 국토의 확장보다도 필리프 2세를 높이 평가하는 더 큰 요소는 바로 그의 유능한 행정 운영과 선진적인 정책 시행이었다.

필리프 2세는 치세 동안, 자치 도시(코뮌)를 조성했고,[108] 영주 세력들을 견제할 수 있는 관료 집단[109] 및 직속 슈발리에[110]들을 육성하였다. 이들 관료들은 자치 도시의 부유한 시민들로 구성된 바이이(대관), 기사 계급으로 구성된 세네샬(지사)이라 하는데, 카페 왕령지의 수입을 관할하며 지방 유력자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111] 그리고 일종의 재지 영주층인 프레보[112]들을 억제하고 직할지의 관료 위주 행정 체계 구축을 이룩함으로써 초기 봉건제의 문제점을 최소화하며 중앙집권체제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카페 왕령지의 대대적인 확대와 더불어 왕실에 직접적인 세수 수입 증대를 불러일으켰으며, 이러한 부의 증진은 필리프 2세가 시도한 여러 건설 사업, 정책 시행 등에 차질없는 재정적 바탕이 될 수 있었다.[113] 또한 도시의 발전과 관료 집단의 직할지 통제, 프레보 세력의 약화라는 효과들과 맞물려 국가의 전반적인 경제적•정치적 발전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자신의 본거지였던 파리를 수도로서 크게 확장시켰으며 대학을 대대적으로 지원 및 보호하는 등[114] 파리의 도시 미관에도 신경을 써 카페 왕조의 권위를 대내외적으로 더욱 크게 신장시켰다.

7. 평가

파일:Territorial_Conquests_of_Philip_II_of_France.png
필리프 2세 '오귀스트'가 재위 기간내에 확보한 영토[115]
"약삭빠르고 예리하고 교활하고 수완이 뛰어나며 사람을 조종하는 데 능수능란한 통치자."
존스 홉킨스 대학(The Johns Hopkins University) 교수 J W. Baldwin(1929~2015)

말 그대로 제대로 된 정치가이자 라이벌 리처드 1세에 가려진 진정한 만능왕. 오늘날 프랑스의 토대를 세웠다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116] 용맹함과 낭만적인 성격 덕분에 여러 서사시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국가 내정은 휴버트 월터에게 떠맡긴 리처드 1세와는 달리 정치적 술수와 계략을 동원하여 프랑스 카페 왕실 직할지를 넓혀 왕권을 강화시키고, 프랑스내에서의 잉글랜드의 영향력을 크게 축소시켰다. 전쟁에서도 비록 그리 많은 전투를 하지는 않았지만 부빈 전투와 같은 굵직한 결정적 전투에서 으레 승리를 거두며, 거의 패배하지 않았던 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 내정 분야에 있어서는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러 선진적인 정책을 실시하고, 이를 뒷받침할 재정을 확보하는 데도 성공했기에 이는 이후의 100년간 카페 왕조가 경제적, 정치적 전성기를 맞이하는 기반이 되었으며[117] 옆 나라 독일이 14, 15세기가 될 때까지 계속 깡촌으로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 무렵 신성 로마 제국은 땅만 넓었지 인구상으로는 프랑스의 3분의 1도 안되는 빛 좋은 개살구와 같은 국가였다.[118] 필리프 2세 이전까지의 프랑스와 달리 꽤 강력한 황권 덕분에 대외적인 위상을 갖출 수 있었던 것뿐. 지금의 독일 인구를 생각하면 놀라울 따름이다. 참고로 현대 독일의 위엄쩌는 인구는 14세기 이후 급속도로 발전한 독일 지역의 상공업 덕분이다. 13세기 이후 17세기까지 독일의 인구는 무려 3배 이상 증가하는 반면 프랑스의 인구는 불과 20% 정도 증가하는데 그친다.[119]

필리프 2세가 처했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프랑스내 주변에는 강대한 잉글랜드가 위대한 왕인 헨리 2세와 뛰어난 전쟁군주인 리처드 1세의 통치를 받으며 필리프 2세와 프랑스를 거침없이 압박했다.

그러나 필리프 2세는 뛰어난 개인적인 정략과 계략, 정교함 그리고 역사를 통틀어서 손에 꼽힐 법한 수준의 역대급 권모술수를 가졌으니, 헨리 2세와 그의 아들들인 리처드 1세, 존의 사이를 이간질하여 자신은 손 하나 까딱 안하고 까다로운 적수인 헨리 2세를 제거한 것을 비롯, 남프랑스의 대영주 가문인 툴루즈 가문을 이용하여 플랜태저넷과 카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강대한 아키텐 가문을 견제했고, 그러면서도 이러한 아키텐 가문의 인사들을 선동하여 헨리 2세가 죽고 리처드 1세3차 십자군에 종군하자마자 잉글랜드령 남프랑스를 혼돈스러운 상황으로 몰아갔으며, 상대적으로 약한 일대의 프레보들을 제거하며 다량의 토지를 왕령지[120]에 입수함에 따라 그 자신의 군사력을 증진, 이를 바탕으로 주변의 영주 세력들의 영지를 강압적으로 전봉시키거나 반발할 경우, 무력으로 짓밟아 제거하면서 자신의 직할지를 지속적으로 늘려나갔으며[121] 리모주 자작이 리처드 1세에게 대항하여 끝내 리처드 1세의 죽음을 초래한 리모주 샬루-샤브롤 공성전의 배후에 필리프 2세가 있었다는 설이 제기될 정도였다.

전쟁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대부분 승리했다. 리처드 1세를 포함한 동 시대의 명장들에 비해서 필리프 2세는 전술적으로 특출나다고 하기는 어려우나, 기본적으로 상대하는 적수에 맞춘 대국적인 견지와 전략적 재능이 뛰어났다.[122] 강대한 플랜태저넷 왕조 앙주 제국을 무너뜨림에 있어서도 다짜고짜 전쟁을 벌이는 것이 아닌, 혈통과 클레임 명분을 이용하여 지방 영주들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거나 최소한 플랜태저넷 왕조에 반항하게 만들며 자신이 유리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지속적으로 조성하였으며, 리처드 1세가 끝내 살라딘과의 승부를 내지 못하고 프랑스로 복귀했을 때에는 리처드 1세의 실력을 정확하게 판단하여 그와의 전면전을 최대한 회피하면서 끝내 차도살인의 형식으로 리처드 1세의 죽음을 유도했고, 리처드 1세가 사망하자마자 곧바로 플랜태저넷 가문에 대한 전략을 전면적인 공세로 순식간에 전환하면서 이제 막 즉위한 존 왕의 군대를 철저하게 박살내고, 잉글랜드의 프랑스 대륙령 영토를 거의 모조리 순식간에 집어삼킨 것은 필리프 2세 본인의 전략적 식견의 뛰어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유리한 위치에서 결전을 강제했다고는 하나 애당초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 자체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이순신 등에게서도 자주 보이는 분명한 명장의 자질이다.[123] 게다가 샤또 가야르 전투에서는 7개월 간 공성 준비를 하여 단 1개월만에 난공불략인 그 샤또 가야르를 함락하였고, 수적으로 거의 두 배 가까이 열세에 있었던 부빈 전투에서조차도 신성 로마 제국과 잉글랜드 연합군을 격파하며 필리프 2세는 전술적으로도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모자란 사람은 아님을 증명했다.

리처드 1세의 정치, 외교적 능력이 일반의 오해와 달리 뛰어났다는 것이 재조명되면서 이런 리처드 1세를 상대하고 결국 죽게 만드는 데 일조한 필리프 2세의 정략적 능력이 매우 대단했음이 재차 드러난다. 지금까지 인식되어온, 싸움만 잘하지 외교, 정치에서 무능한 이를 편하게 상대해온 것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말 수가 적고 쾌활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 상대방의 마음을 파고들어 장악하는 능력이 타의 추총을 불허했다고 하는데 '타인의 마음을 마음대로 조종할 줄 아는 남자', '왕을 사랑하는 만큼 왕도 그들을 사랑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들은 왕의 사랑을 두고 흥미진진한 싸움을 벌였고 어떤 이는 누가 가장 왕과 사랑이 깊은지 궁금해 했는데 이로써 사랑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그의 달콤한 미소와 명량한 표정은 그의 엄숙한 모습을 보고 겁 먹은 사람들의 경계심을 재빨리 허문다.' 라고 평할만 했다.

8. Rex Francorum et Rex Franciae

1190년 필리프 2세의 첫 왕비인 아르투아 여백작 이사벨 드 에노가 난산으로 사망하자, 필리프 2세는 아르투아 백작위 칭호를 삭제하며, 이전까지 사용한 Rex FrancorumRex Franciae로 바꾸어 공문서를 발행했다. 공문서는 중세 프랑스어가 아니라 라틴어로 기재되었다. 1205년에는 Regnum Franciae 사용이 발견되었다.[124] Rex Francorum은 공문서가 라틴어로부터 프랑스어로 대체될 때까지 외교 문서 등에서 여전히 사용되었고, 17세기 후반 동전에도 각인되었다. 왕국의 명칭은 왕의 호칭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프랑스 왕국이 언제 수립되었는가에 대해 다분한 논쟁이 있어왔고, 대개 987년 위그 카페의 즉위 이후로 보는 시각에 동의한다. 샤를마뉴Regnum Francorum/Francia를 전신으로 한 Francia Occidentalis/Regnum Francorum Occidentalium 카롤루스 왕가 루이 5세로부터 위그 카페Dux Francorum로 지목되었다. 987년 6월 1일 위그 카페는 Francia Occidentalis/Regnum Francorum Occidentalium 왕으로 선출되어 7월, 노용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카페 왕조를 개창하며 공동왕 제도를 도입했다. 그는 공문서에서 Rex Francorum으로 호칭했다.

1179~1190 : Rex Francorum
1190~1223 : Rex Franciae

9. 금발? 흑발?

파일:Philippe_II_Auguste.jpg
파일:필리프2세5.jpg
1555년 상상화 1837년 상상화
19세기의 화가인 Louis-Félix Amie는 필리프 2세를 흑발로 묘사했는데[125] 19세기 이전에도, 그리고 그림 제작 시기의 전후를 통틀어 흑발이었단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현대 전기문에서는 머리색이 언급되지 않는다. 장남인 '사자왕' 루이 8세은 금발이었고, 손자인 '성왕' 루이 9세는 금발이었다.[126] 며느리인 카스티야의 블랑카는 흑발이었다.[127] 루이 8세가 '에노 친족을 닮은 금발'이라서 필리프 2세가 흑발일 수도 있겠지만 금발에도 종류가 있다보니까[128] 필리프 2세는 대부분의 19세기의 프랑스인들에게 사학자 세구르 백작 Philippe-Paul이 서술했듯이 '큰 키에 발그스름한 살빛, 금발 곱슬머리'로 믿어졌다. 16세기에 Recueil des rois de France에서 카페 왕조 왕들의 미니어쳐를 맡았던 Jean Du Tillet는 필리프 2세를 금발로 그렸다. 여기서 메로베우스 왕조를 비롯 카페 왕조의 왕들은 개인성보다는 왕을 표상하는 도상에 더 가깝게 묘사됐기에 외양 판단의 근거로 보기에는 부적절하다. 볼드윈은 저작에서 동시대인들이 그의 외모를 매우 드물게 묘사했다고 단언했지만 브래드버리가 오류를 지적했으며 문예가 배제된 주장이었다. 위의 왼쪽 상상화를 보면 금발로 묘사하고 있다.

여담으로 필리프 2세와 첫 왕비인 에노의 이사벨은 부부의 풍채가 훌륭했다고 전해진다. 필립 무스케스는 이사벨의 체격에 대해 남자들에게 쓰였던 단어를 적었으며떡대 19세기에 발견된 유해의 일부에 의하면 신장이 최소 172~5cm.(...)

필리프 2세 생전에 필리프 2세의 외모를 묘사한 그림은 무채색의 직인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거의 다 14세기에 나온 상상화다.

10. 그 외

중혼으로 인한 파문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그는 왕실의 보검에 대고 이렇게 맹세했다고 전해진다.
"왕국의 반을 잃을지언정, 아녜스 그대를 잃을 수 없소."
그(i.e. 나)는 노동을 위한 남자가 아니라 세계를 뛰놀며 날아다니는 새에 걸맞은 남자로 태어나, 혹은 감언으로 혹은 가혹함으로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자 한 어떤 이 도처에서 어슬렁거리며 노렸기 때문이오. 이보게. 수도원에서는 모든 세계가 수도원일 뿐만 아니라 감옥일세. 하지만 그 자체로 빛처럼 빛난다오. ... 온 세상의 즐거움을 누려도 영혼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 트루베르들의 후원을 중단했기에 정적들이 조롱하는 노래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친우였던 리처드 1세는 십자군에서 사이가 나빠진 뒤에 보복으로 신임하던 여론 관리자인 베르트랑 드 보른을 이용하여 필리프 2세를 trop mols(very soft)라고 짓궂게 놀리기도 했다.[137]

11. 가족

11.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에노의 이사벨
(Isabella of Hainault)
1남 루이 8세
(Louis VIII)
1187년 9월 5일 1226년 11월 8일 카스티야의 블랑카
슬하 10남 1녀[140]
2남 로베르[141]
(Robert)
1190년 3월 14일 1190년 3월 14일
3남 필리프[142]
(Philip)
1190년 3월 14일 1190년 3월 17일
메라니의 아녜스
(Agnes of Merania)
1녀 브라반트 공작부인 마리
(Marie, Duchess of Brabant)
1198년 1224년 8월 15일 나무르의 필리프 1세
브라반트 공작 앙리 1세
슬하 2녀
4남 불로뉴 백작 필리프 1세
(Philip I, Count of Boulogne)
1200년 9월 1235년 불로뉴 여백작 마틸드 2세
슬하 1남 1녀

12. 대중문화에서

일반적으로, 라이벌격으로 묘사되는 리처드 1세에 비하자면 거의 항상 악역 배역이다. 낭만적이고 기사의 의무, 기사도 등에 가치를 무겁게 두며 행동한 리처드 1세에 비해 현실적이고 이해타산적이며 종교에 열정적이지도 않은 권모술수의 숙련가라는 점에 있어서 좀 비열한 이미지가 강했던 모양새다.[143]
파일:attachment/필리프 2세/필리프2세.png
징기스칸 4 일러스트

[1] 후술하겠지만 외모에 대하여 논란이 좀 있는 편이다.[2] 에노의 이사벨이 결혼할 때 지참금으로 가지고 왔으며 그녀가 죽은 후 아들 루이 8세가 물려받았다, 이후 아르투아 백작위는 프랑스 왕실의 작위가 되어 훗날 왕이 되기 전의 샤를 10세의 대표 작위가 되었다.[3] 필리프 2세의 스승이자 연대기 작가였던 성직자.[4] 이전에는 서프랑크의 카롤링거 왕조부터 카페 왕조 초기까지 프랑크인의 왕(Rex Francorum / 英 : King of the Franks)이라는 표현을 썼으나, 1190년 필리프 2세는 처음으로 프랑스의 왕(Roi de France / 英 : King of France)이라는 프랑스어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전 칭호 프랑크인의 왕프랑크인, 곧 프랑크 백성의 지지를 받아야 왕의 구실을 할 수 있는 선거군주제 및 대중군주제의 의미를 지니는 반면, 프랑스의 왕은 왕이 프랑스라는 나라를 온전히 소유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왕권이 강대해졌음을 암시한다. Rex Francorum et Rex Franciae 문 참고.[5] 유래의 이유는 링크 참고.[6] 종주권 행사의 가장 큰 장애물이자 당대 최고 정적인 노르망디 공작, 앙주와 멘 및 투렌 백작 앙리 플랜태저넷이 필리프 2세의 부친 루이 7세의 첫 왕비였으나 이혼했던 아키텐과 가스코뉴 여공작, 푸아티에 여백작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과 결혼한 후 잉글랜드 왕 헨리 2세로 즉위하여 강대한 남프랑스의 넓은 영지를 차지하고 서부 브르타뉴까지 잠식하여, 프랑스 문화권 영토의 절반을 넘게 독식하고 있었다. 파일:1154.png[7] 비옥한 도시인 쌩토메흐, 에흐, 아하스, 보켄, 비에이 에스당, 바뽐므 등을 포함하여 수많은 백작령, 자작령에 대한 상위 주군의 권한을 행사케 했던 영지였다. 당시 북프랑스 일대는 물론이고 잉글랜드마저 경악하게 한 결정이었다. 플랑드르 백작령은 영역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프랑스 왕이 종주권을 행사한 이중 봉신이라는 형국에서 여타 군벌들처럼 독자적인 권한을 확립하려는 지속적인 정책을 견지해왔는데 이러한 합의안은 당시의 시대상의 흐름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당연지사 "플랑드르 백작이 플랑드르를 팔아 치운다, 미치지 않았다면 뭔가 우리는 모르는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필시 소년왕을 좌지우지 할 야욕을 실현하기 위한 고도의 교란일 것이다"라는 말들이 광범위하게 돌았고, 당시 필리프 2세와의 관계를 따져도 너무 많은 것을 퍼줬던지라 필리프 1세의 의도에 대해 현재도 갑론을박이 이어진다.[8] 필리프 1세는 적자가 없었고 이는 필리프 2세가 플랑드르 영지 상속 문제에 관여할 빌미가 되었다.[9]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헨리 2세의 정부 로자문드 클리포드가 수녀원에 들어간 후 1175년에 그가 공공연하고 태연하게 15세였던 아델과 염문을 뿌리고 다니며 결혼까지 염두에 두었다고 기술했다. 이 시기 루이 7세교황청까지 개입시켜 "즉각 리처드와 아델이 결혼식을 올리지 않으면 헨리 2세의 모든 영지에 성무 금지령을 내려 달라"며 헨리 2세에게 압박을 가했다. 몇몇 저술가들은 이 기록으로 루이 7세가 헨리 2세와 아델의 소문을 들은 바가 있으리라 추측했으나, 뒷받침할 증거로 프랑스 기록을 인용하지 않았다.[10] 학자들은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상속받았어야 할 청년왕 헨리 사후에 헨리 2세가 상속 문제에 관한 모든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아들들에게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 있었고, 필리프 2세는 이것으로 헨리 2세의 아들들의 불만이 자라날 것을 예견했다고 해석했다.[11] 프랑스 왕 루이 7세엘레오노르 다키텐의 장녀. 청년왕 헨리, 조프루아 2세, 리처드 1세의 이부 누나이자 필리프 2세의 이복 누나[12] 이런 저런 일이 있어도 시간이 지나 에노의 이사벨은 결국 끔찍이도 사랑한 남편의 진심어린 사랑을 얻었고, 무려 연서까지 받았다고 한다.[13] 필리프 2세의 이복 누나 아델 공주의 지참금[14] 앙브루아즈는 리처드가 푸아티에 백작 시절부터 베렝겔라를 열렬히 사모하고 깊이 마음에 품었다고 주장했으며, 1177년 리처드가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에서 열린 마상창시합에 참여한 전적을 들어 역사가들은 최소 과거에 리처드와 베렝겔라가 안면이 있었다고 해석했다. 산초 6세 부부는 엘레오노르 다키텐에게 우호적이었고, 엘레오노르가 유폐에서 풀려나도록 헨리 2세에게 청을 보내기도 했다.[15] 아직까진 프랑스 왕이 실질적으로 일드프랑스의 지배자에 지나지 않았던 시점이라고(...).[16] 필리프 1세가 전투를 하지 않고 갑자기 회담을 제의한 이유는 알려진 바 없다. 또한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의 당시 주요 측근 중 하나였던 자크 드 아벤이 이 때 그를 배반하고 에노 백작 보두앵과 동맹을 맺었다. 이에 몇몇 역사가들은 필리프 2세가 자크 드 아벤과 비밀리에 우정을 나누었거나 혹은 매수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참고로 자크 드 아벤(1152-1191)은 생전 기사 중의 기사이자 기사도의 꽃이란 칭송을 받았으며, 리처드가 최고의 남자라고 인정할 정도였다고 한다.[17] 몇몇 역사가들은 이 놀라운 행적을 필리프 2세가 북프랑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권위를 확립하도록 원조하여 받아낼 수 있었던 사적인 대가로 해석했다.[18]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제프리가 필리프 2세를 기다리던 곳에서 필리프 2세가 없었단 것을 강조하면서도 그 이유들은 침묵했고, 이에 대해 몇몇 학자들은 제프리와의 어떤 사건 혹은 음모에서 필리프 2세의 개입을 감추고자 한 의도로 해석했다. 또한, 호버든의 마상창시합 언급에 대해 제프리가 낙마 사고로 죽었단 소식을 전한 사절단을 필리프 2세가 보냈다면, 마상창시합 낙마 사고는 필리프 2세가 발표한 제프리의 공식적 사인이며, 이는 그가 제프리와 관련된 어떤 중대한 사실을 헨리 2세와 세간으로부터 숨기려는 의도가 있었으리라 추측했다. 몇몇 학자들은 낭트 국경 요새화와 제프리가 파리에서 발행한 공작 헌장의 증인 명단에 제프리와 필리프 2세의 주요 군사 사령관이 기재되었단 점을 들어, 그들이 헨리 2세와 리처드를 대항할 군사 행동을 도모하고 있었으리라 추측했다. 이 외에, 제프리가 병이 들었으나 호전된 후 마상창시합에 참가하여 사고를 당했을 것이란 추측도 있다.[19] 이유는 알려진 바 없으나 약 3년 후, 르노가 부친 다마르탱 백작 알베릭 3세의 충고를 따랐다고 하여 필리프 2세의 용서를 받았다.[20] 플로리는 이 일로 말미암아 각 군영의 지휘관들이 군사 작전에 참여하기를 꺼렸으리라고 추측했다.[21] 리처드가 필리프 2세의 편에 선 이유로 리처드가 약혼녀 아델뿐만 아니라 아키텐을 두고 부친과 반목한 전적이 있고, 당시 노르망디 및 앙주의 공식 상속인으로 지명되지 않은 상황이라 불만을 품은 참에, 부친을 향한 적대감을 충동질하는 필리프 2세의 설득에 넘어갔을 것으로 추측했다.[22] 여러 검증을 거쳐 연구적 가치를 인정받는 사료이나 이 사건에 한해 현대 역사가들에 의해 거의 누락되는 대목이다. 19세기 역사가들은 하단의 기록을 다루어 당시 권세가들도 불가사의한 광경들로 목격한 샤토루 평화 협정 체결 과정에서, 헨리 2세가 전투 한 번 치르지 않고 필리프 2세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약을 제안했기에, 샤토루의 평화를 동일하게 '불가사의한 평화'로 일컫기도 했다. 헨리 2세가 아들 리처드와의 지속적인 갈등으로 말미암아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배반을 두려워 했을 것이며, 또한 1180년 지조흐 협정을 기점으로 1187년까지 알 수 없는 이유로 헨리 2세가 필리프 2세와의 평화 교류에 집착한 나머지 이는 고스란히 샤토루 협정 조약에 반영되었으므로, 필리프 2세에게 2년 간의 평화와 프레티발 및 이쑤덩 영유권 양도를 조약으로 제의했을 것으로 추측했다.[23] 1184년에 필리프 2세가 왕비 이사벨 드 에노와 일방적으로 이혼하기 직전 이사벨이 맨발로 거리를 돌아다니며 군중에게 도움을 호소하여 결사적으로 반대했던 이 사건은 당대에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24] 잉글랜드와 프랑스 연대기 작가들은 헨리 2세가 2년 간의 평화와 프레티발, 이쑤덩 영유권 양도를 평화 협정 조약으로 제의하여, 필리프 2세가 전투 없이 승리했다고 기술했다.[25]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리처드가 평화를 간청한 이유가 타인의 마음을 마음대로 조종할 줄 아는 남자에게 이끌렸기 때문이라고 기술했다.[26] 기욤 드 롱샴 또한 카이사르라는 평을 들었다. 뉴버그의 윌리엄은 1190년부터 잉글랜드 섭정으로 임명된 그에 대해 "신자들은 그를 왕보다 더 높이 보고, 성직자들은 교황보다, 이들 모두가 그를 견디기 힘든 군주로 보았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그가 카이사르보다 더 카이사르하다고 믿었다."라고 기술했다. 학자들은 그 시기 잉글랜드에서 기욤 드 롱샴의 저조한 인기와 정치적 행보로 말미암아 이같은 말을 들었으리라고 추측했다.[27] 이 연구는 리처드가 동성애 혹은 양성애 성향이란 가정하에, 리처드가 지배적, 능동적, 남성적 위치에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28] 삭제 이유: 이는 약 한 세기 후 집필된 이탈리아 베네토 연대기 원문을 재구성한 2차 사료를 직접 인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원문과 대조한 결과 정확한 날짜의 기술이 없다는 점, '그 외' 항목에 번역한 당대 독일 연대기《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vol. 21》와 동일한 사건으로 확인된다. 1187년은 영지 몰수령에 이어 추방당한 하인리히 사자공과 대조적으로, 호엔슈타우펜 황실의 위세는 건재한 때였다. 삭제.[29] 이 갑작스러운 포기에 대한 이유는 알려진 바 없다.[30] 필리프 2세가 주장한 피해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다. 몇몇 학자들은 필리프 2세가 툴루즈 영지를 자신의 복속으로 간주하여 리처드의 툴루즈 공격을 샤토루 휴전 협정의 최초 위반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31] 몇몇 학자들은 이 대목으로 리처드와 베렝겔라 나파로아코아의 결혼 협상이 1188년에는 비밀에 부쳐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32] 리처드의 갑작스러운 제안의 이유는 알려진 바 없다. 리처드가 툴루즈를 침공했을 때 이익을 봤다는 점을 들어서 이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었으리란 추측이 있다만, 주류는 아니다.[33] 첫 번째 조건이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이었는데, 길링엄은 필리프 2세가 줄곧 둘의 결혼 문제를 우려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34] 힐턴은 이 조건이 리처드가 이미 새 신부로 베렝겔라 나파로아코아를 점찍은 방증이며, 리처드가 둘의 결혼 문제를 전부터 우려한 것으로 보이는 필리프 2세를 열심히 설득한 결과라고 추측했다.[35] 이는 3차 십자군 원정 기간 남프랑스를 비울 동안 전쟁이 다발할 가능성이 농후한, 즉 40년 간 분쟁했던 툴루즈 백작령과 근접한 국경에서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나바라 왕국의 역할이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견지에서 전략적인 책임 분담을 요구하는 것이었다.[36] 이와 관련하여 13세기에 쓰인 카스티야 왕국의 "엘레오노르 다키텐이 아들의 신부로 아델 드 프랑스를 못마땅해하여 이 혼담을 무효로 돌릴 방법을 고민하고 직접 아들의 신부를 물색했다. 그 결과 나바라 왕 산초의 맏딸 베렝겔라를 맞아들이기로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주장은 캔터베리의 저베이스의 "캔터베리 주교 볼드윈을 통해 전해 들은 바, 1185년에 엘레오노르가 유폐에서 풀려났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엘레오노르가 1185년부터 리처드 1세의 신부를 물색했다고 말한다. 뉴버그의 윌리엄은 "엘레오노르가 아들의 신붓감을 고르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디스의 랄프는 "왕위에 오른 직후 리처드가 모후의 이름에 명예가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고자 했다."라고 기술했다. 역사가들은 엘레오노르가 아델을 싫어한 건 확실하다고 동의했다. 역사가들은 루이 7세의 왕비였던 시절 엘레오노르도 예비 시아버지와 불륜을 저질렀을 것으로 추정했다. 상대는 두 번째 남편 헨리 2세의 부친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 플랑타주네였다. 월터 맵은 "왕비가 루이 왕의 침대를 조프루아와 나누었다는 소문이 비밀리에 돌았다."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링컨 주교를 통해 전해 들은 바, 조프루아가 아들 헨리에게 이것을 털어놓았다."라고 기술했다. 이 사건은 루이 7세가 알지 못하도록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37] 길링엄은 십자군 출정 지연 논의가 있었을 것이라 추측했다.[38] 필리프 2세는 1185년에 더 이상 트루베르를 후원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바 있다. '그 외' 항목 참조.[39] 리처드 1세는 1172년에 서임된 '푸아티에 백작'으로 불리는 것을 선호할 정도로 푸아티에와 남프랑스에 애착이 깊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몇몇 19세기 역사가들은 루앙이 필리프 2세의 왕실 직할지와 가까우며, 필리프 2세가 가장 잘 아는 지역이었단 점을, 리처드 1세가 이 시기 필리프 2세가 관련된 조약에서 루앙을 수도로 삼은 이유로 추측했다.[40] 당시 인장의 방패 표현 때문에 사자가 한 마리 혹은 두 마리라는 추측이 있다. 리처드 왕 편력기의 저자는 1191년 5월 리처드 1세가 키프로스 섬을 점령할 때 "왕의 안장이 붉은색이 흩뿌려진 금색 장식으로 번쩍이고, 후부에는 두 마리 금색 사자가 서로 마주보며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라고 기술했다. 리처드 1세는 말년에 세 마리 금색 사자로 문양을 바꾸었다.[41]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배멀미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몇몇 역사가들은 필리프 2세가 제노바까지 육로를 이용했단 점을 지적하여, 파리 부근에서만 지내왔던 그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처음으로 장기간의 여정을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42] 필리프 2세가 이후 갤리선을 따로 고용했다는 당대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은 없다. daoud 뇌피셜: 당시 프랑스 카페 왕실 재무기록표를 확인한 결과 포도주 구매로 약 55파운드를 지출하고 "출발일에 맞춰서 준비하라."라며 주문한 기록이 전부이다. 참고로 필리프 2세는 급이 다른 애주가였다고 한다.[43]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도 필리프 2세가 하인리히 6세와 외교적 갈등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거절했다고 기술했다.[44] 역사가들은 리처드 1세가 필리프 2세와 여동생 조안의 조합을 못마땅해했을 것으로 보았다. 이유는 알려진 바 없다. 참고로, 필리프 2세와 조안(1165~1199)은 나이가 같았다.[45] 몇몇 역사가들은 리처드 1세가 헤이해지는 군대의 기강을 세우고, 인구 밀집으로 말미암아 굉장히 혼잡한 메시나의 치안을 단속하기 위함이었다고 추측했다.[46] 몇몇 역사가들은 필리프 2세가 병사들과 현지인들의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리처드 1세와 잉글랜드군을 향한 메시나인들의 반발을 등에 업고 그를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으리라고 추측했다.[47] 점령한 지역의 성벽에 깃발을 올리는 것은 지배권의 상징이었다. 앨리오는 리처드 1세가 조안을 구실로 시칠리아를 정복하려 했는데, 앙주 제국이 잘 되는 광경을 손놓고 구경할 리 없었던 필리프 2세의 방해 공작 때문에 포기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48] 이에 대해 길링엄은 리처드 1세가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함으로 해석했다.[49] 이 기사의 죽음에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 1190년대 말에 포로로 붙잡혀 양 눈이 모두 실명되어 곧 사망했을 것, 반면 Walterus de Coventria는 이 기사가 곧 사망하지 않았고 양 눈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프 2세를 섬기고 싶어해 프랑스로 가던 중 부하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했다.[50] 학자들은 리처드 1세가 자신에게 유리한 조약을 탕크레드와 체결한 후에도 메시나 주민들을 경계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51] 또한 잉글랜드 왕 중 '자연을 거스른 죄'의 유일한 선례는 정복왕 윌리엄의 아들들인 윌리엄 루푸스헨리 1세였다. 정복왕 윌리엄 1세의 차남인 단명한 리처드를 제외한 적자 모두, 즉 장남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 커더스, 3남 윌리엄 루푸스, 막내 헨리 1세가 생전 자연을 거스른 죄에 중독되었다는 성직자들의 비난을 받았다.[52] 필리프 2세도 선물했다는 기록은 재무기록표에도 없다.[53] 당나귀에 이걸 싣고 오는 농부를 만났다고 한다.[54] 1188년 8월, 기욤 드 바흐와 부하들이 리처드 1세의 포로로 잡혔을 때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도주한 악연이 있었다. 역사가들은 그렇다 할지라도 이 사건은 리처드 1세의 지나친 승부욕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추측했다.[55] 기욤 2세 드 바흐(생몰년: 1160-1234)는 필리프 2세의 충복이자 절친이었으며, 생전 기사도의 꽃으로 칭송받았다. 별칭은 '프랑스의 아킬레우스'. 그의 숙부 이브하 드 바흐는 성전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필리프 2세는 서신에서 절친들을 '좋은 친우'로 칭했으나 기욤 드 바흐는 '변함없는, 사랑하는 친우'로 칭했을 정도로 서로 사이가 깊었다고 전해진다.[56] 필리프 2세는 메시나 도시 안에 있는 궁정에서 머물고 있었다.[57] 이 사건 직후 리처드 1세와 기욤 드 바흐가 개인적으로 화해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아크레에서' 항목 참고.[58] 리처드 1세의 일방적인 설명이며 교차 검증을 할 수 있는 나바라 왕국의 기록이 밝혀진 바 없다.[59] 몇몇 학자들은 이 불미스러운 일을 교차 검증할 다른 기록이 없다는 점을 들어, 리처드 1세의 주장의 타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반면 리처드 1세에게 우호적인 경향이 있는 몇몇 저술가들은 헨리 2세와 아델의 관계에 대해 필리프 2세가 일체 모르고 있지는 않았으리라고 추측했다. 참고로, 《캐논법》은 아버지와 성관계를 맺은 여성과의 결혼을 금지했다.[60] 당대 연대기 작가들과 기랄두스 캄브렌시스 등의 신빙성 있는 문헌들은 이 사건에 대해 엘레오노르에게 비난조의 기술을 했고, 역사가들은 엘레오노르가 루이 7세와의 결혼에 신물이 나 이혼을 염두에 둔 것은 확실하다고 보았다. 또한 엘레오노르는 에데사와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자는 레몽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루이 7세에게 이혼을 하겠다고 협박했고, 이로 인해 루이 7세는 놀라고, 대노하여, 큰 상처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61] 길링엄은 이 기록으로 필리프 2세가 열세인 상황이라고 추측했다.[62] 상속인을 생산하는 것은 왕의 중대한 의무 중 하나였다. 리처드 1세가 그녀에게 상속인을 볼 의지가 없었다는 연구가 있고, 그의 슬하에 1180년 초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서자 필리프가 있기 때문에 베렝겔라가 불임일 것이란 의견도 있기는 하다.[63] 최근에는 이 대목으로 필리프 2세가 길링엄의 분석처럼 완전히 열세는 아니었으리란 이견이 있다.[64] 사실 이게 대단한 것이 군주가 직접 정찰하면 적군의 표적이 되어 저격수한테 저격당하기 쉬워서 위험한 일인데 직접 한 것이다. 실제로 리처드 1세가 직접 정찰하다가 적군의 저격을 당해 사망했다.[65] 편력기 저자는 리처드 1세가 키프로스 섬에 정박한 후 "걱정스럽게 찾았던 모든 갤리선이 항구에 도착했다. 리처드 왕은 그것들을 황제(이사키오스 콤니노스)에게서 차지한 갤리선 다섯 척에 더했다"라고 후술했다.[66] 학자들은 원인을 알 수 없긴 하나 리처드 1세가 아크레에 도착하자마자 전염병에 옮을 정도로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다고 보았다.[67] 역사가들은 이 기록을 비록 정치적 차이가 있으나 성지 탈환 목적 앞에서 필리프 2세가 협력을 우선시했다고 해석했다.[68] 이사키오스의 어린 딸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대신 '키프로스의 처녀'로 불렸고, 당시 13~14세로 추정된다. 이때를 마지막으로 부녀가 얼싸안은 채 눈물로 생이별을 했고, 딸은 리처드 1세의 볼모가 되어 키프로스를 떠나 끌려갔다고 한다. 키프로스 처녀를 편력기 저자는 "어린 소녀" 앙브루아즈는 "매우 아름답고 나이가 어리다."라고 기술했다. 역사가 앨리슨 위어는 "몇몇 연대기 작가들이 리처드 1세가 이 아이와 단둘이 오랜 시간을 보냈으며, 그녀에 대한 관심이 도저히 명예롭다고 말할 수 없음을 비관적으로 암시했다."라고 저술했다.[69] 길링엄을 비롯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두 왕의 불화가 심했다는 선까지 다루었다. 필리프 1세 드 알자스는 1191년 3월 30일에 필리프 2세와 함께 메시나에서 출항했는데, 이후 리처드 1세를 만난 적이 없었다.[70] 학자들은 필리프 2세가 십자군 앞에서 두 왕의 갈등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베렝겔라를 맞이했다고 해석했다.[71] 그는 원래 욕을 싫어하여 욕설 금지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플랜태저넷 왕가와 달리 '프랑스 왕은 말씨가 고상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 외 참고.[72] 랭스의 트루베르의 작품을 편찬한 역사가는 원문을 제시하기에 앞서, 랭스의 트루베르가 리처드 1세와 기욤 드 바흐가 아크레 거리들에서 싸움을 벌였던 사건의 유일한 화자가 아닌 것까지만 언급했다.[73] 세인트올번스 수사는 이 비밀스러운 다툼으로 인해 프랑스 왕이 귀환을 결정했으리라고 주장했다.[74] 피에흐 드 꾸흑뜨네는 루이 6세의 손자로 필리프 2세의 사촌이자 절친, 충복이었다. 후에 라틴 제국 황제로 등극했다.[75] 브래드버리는 이 대목을, 길링엄을 주축으로 한 영국 역사가들이 아크레 공성전에서 필리프 2세의 활약을 평가절하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채택한다.[76] 교황의 반응은 '호의와 자비를 담아 프랑스 왕을 달래면서도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십자군을 이런 식으로 종군하면 교황과의 마찰은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에 대해 일방적 주장까지 늘어놓았다. 뇌물이 오고간 정황은 없다고 한다.[77] 자크 드 아벤은 아르수프 전투에서 2차 공격 중 치명상을 입고 "오, 리처드! 반드시 이 복수를 갚아 주시오."라며 유언을 남겼다. 아르수프 전투는 당대 유명한 기사들이 전사했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고 한다.[78] 1191년, 르노 드 다마르탱이 불로뉴 여백작 이다를 납치하여 결혼을 올렸고, 필리프 2세는 헌장을 발행하여 이 결혼과 르노를 불로뉴 백작으로 인정했다. 조흐덩은 이것으로 필리프 2세가 르노의 충성심을 유지하고 군사적 지원을 받으려 했다고 추측했다.[79]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들은 이 사건 이후로도 보베 주교가 두 왕의 관계를 서슴없이 이간질했다고 비난했다. 보베 주교(생몰년: 1158-1217)는 필리프 2세의 사촌이자 절친이고 충복이었다. 그는 《캐논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칼 대신 전곤을 무기로 사용했고, 3차 십자군 원정을 비롯한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며, 역사상 유명한 부빈 전투에서 헨리 2세의 서자인 윌리엄 롱제스피와 결투해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또한 필리프 2세의 절친에서 적으로 돌변한 리처드 1세, 불로뉴 백작 르노 드 다마르탱과는 사적으로 관계가 최악이었고, 몇몇 역사가들은 그들과 보베 주교와의 사적인 충돌이 필리프 2세를 향한 그들의 증오가 깊어지는 데 일조했다고 추측했다.[80]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왕이 온갖 두려움의 먹잇감이 되고, 영혼이 병들었다"라고 증언했다.[81] 사방으로 리처드 1세를 찾아다니던 블롱델이 그곳을 지날 때 노래를 부르자, 리처드 1세가 다음 구절을 노래해 자신이 있는 위치를 알리고 구출되었다는 허구의 내용이다. 다만, 블롱델은 당시에 실존한 트루베르가 맞다.[82]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하인리히 6세의 진짜 목적은 필리프 2세를 복종시키고 동맹을 맺는 것이었으며, 이를 리처드 1세가 잘 간파하고 있었다고 후술했다.[83] 보석금이 모일 동안 무리를 해서라도 필리프 2세의 공세를 저지해야 했기 때문이란 추측이 있다.[84] 잉에보어(생몰년: 1175-1237)는 키가 크고, 금발이었으며, 덴마크 귀족들 사이에서 '덴마크 최고의 미모의 소유자'라는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잉에보어에 대해 당대 사가들은 "얼굴이 아름답고, 영혼은 더욱 아름답다.", "귀중한 진주", "경이적인 아름다움의 소유자",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 "미덕의 표상", "라헬보다 우아하며 트로이의 폴릭세네와 그리스의 헬레네의 맞수"라고 칭송했다. B. P. 맥과이어는 연대기 작가들이 일국의 공주에 대해 이 정도까지 우호적으로 기술하는 건 흔치 않았다고 말한다.[85] 반면 thomas k. heebøll-holm 교수는 굳이 첫날밤과 대관식을 지낸 후에 이혼을 선언한 이유로 필리프 2세가 막대한 지참금을 포기하기 싫었으며, 이혼 소송이 진행되는 중 이 거금을 (주로 리처드 1세에게 대항하는 목적으로) 마음대로 전용할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또한 필리프 2세는 이 때 교황이 이혼에 관대했던 전례와 교황청과의 긴밀한 관계를 들어 낙관하고 있었다.[86] 새로이 교황이 된 인노첸시오 3세는 그동안 허술하게 적용되던 교회법을 정비하고, 시성 절차를 까다롭게 하는 등 강한 개혁의지를 가진 인물이었다. 이러한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존과 필리프 2세 모두에게 성무 금지령을 내린 바 있었다.[87] 그 외 항목 참고[88] 존의 반란 소식을 듣고 '내 아우는 손톱만큼의 저항이라도 있는 곳이라면 절대 정복하려 들지 않을 놈'이라 말했다고 한다. 사냥을 즐기며 감시인들과 레슬링 시합을 하고, 저속한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으며, 함께 술을 마시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89] 리처드 1세는 1194년에 석방된 이후 이부 누나 마리에게 보낸 시를 노래로 작곡했다. 이후 몇 군데의 내용이 몇 번 수정되었다. 수정본 각각을 리처드 1세 혼자 수정한 것인지, 리처드 1세의 주문을 받은 피후원자 트루바두르가 수정한 것인지, 혹은 둘의 협력으로 수정한 것인지 알려진 바 없다. 하단은 전체 번역이다. 중세 프랑스어로부터 한국어로.[90] 직역:
나의 것은 많으나(크나), 나의 사람들의 것은 더 많소(크오),
내가 죽은 후 그들이 질책받을 것이니,
오래도록 포로로 남아 있다면.

의역 2):
나는 몹시 질책받을 것이나, 나의 사람들은 더 질책받으리,
내가 (포로로 남은 상태에서)죽은 후 그들이 질책받을 것이므로,
오래도록 포로로 남아 있다면.

의역 3):
나를 향한 질책은 많으나, 나의 사람들을 향한 질책은 더 많소,
내가 죽은 후 그들이 질책받을 것이니,
오래도록 포로로 남아 죽는다면.

의역 4):
내가 오래도록 포로로 남아 죽으면 나의 사람들이 질책받을 것이니, 나를 향한 질책이 많으나 그들을 향한 질책은 더 많으리.
[91] 의역 1):
내가 포로로 남아 있을 동안, 그들이 나와 대적한다면, 그들은 몹시 극악무도하오.
[92] 마지막 연 8연. 샤르트르 백작 부인은 루이 7세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의 차녀 알릭스 드 프랑스이다. 블루아 백작 티보와 결혼하여 루이를 낳았다.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를 비롯한 이복 이부 형제들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친언니 샹파뉴 백작 부인 마리와 달리 알릭스는 형제들과 서로 무관심하게 지냈다.[93] 1197년 9월, 하인리히 6세는 임종 직전 잉글랜드를 해방시키라는 유언을 남겼다.[94] 존은 필리프 2세보다 한 살 어렸다.[95] 필리프 2세는 패배를 돌이켜 국정 문서를 루브르 궁에 보관했는데 이는 중앙집권제의 기반이 되었다. 역사가들은 리처드 1세의 군대가 상대적으로 짐이 가벼웠던 반면, 필리프 2세의 군대는 전투를 하지 않을 때 그가 틈틈이 정무를 보느라 수하물이 많아서 행차나 다름없는 상황이었고, 이 때문에 진군 속도가 느려져 자칫하면 큰 손실로 이어질 위험이 컸다고 보았다.[96] 교차 검증을 할 수 있는 다른 기록이 밝혀진 바 없다.[97] 최근 들어 길링엄은 소돔이 '임신을 유발하지 않는 모든 종류의 성행위'란 연구를 들어, 윌리엄 루푸스가 생전 소돔의 경고를 들은 것은 그의 성적 성향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98] 알럼은 부부가 화해하고, 죄를 뉘우친 리처드 1세가 아내에게 전념하며 평화롭게 살기로 했으리라고 해석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들은 베렝겔라를 "미모와 언변으로 명성이 자자한 여인", "미모보다 현명함으로 명성이 더 높다", "나바라의 아름다운 여인", "검은색 머리와 검은색 눈을 한 사랑스럽고 훌륭한 음악가", "교양있고 온화하고 모든 면에서 리처드 왕과 어울리는 배우자"라고 칭송했다. 역사가들은 베렝겔라가 남프랑스 문화에 익숙하고, 음악에 조예가 깊다는 점에서 부부가 공통점이 많았다고 보았다.[99] 기욤 3세는 프랑스 왕국과 앙주 제국 사이의 대립에서 필리프 2세를 항시 지원하여 핵심 동맹국으로 활약했고, 부빈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의 왼쪽 날개를 지휘했다. 참고로, 기욤 3세 드 뽕띠유는 36세인 아델보다 19살 연하였으며 아델이 헨리 2세의 정부였다는 추문은 필리프 2세가 그런 아델과 혼인한 기욤 3세에게 호의를 베푼 이유일 것이라고 한다.[100]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했으므로 플랜태저넷 가문의 대륙령, 즉 프랑스 내의 영지를 몰수하겠다는 논리였다[101] 플랑드르의 영주였다.[102] 당시 불로뉴를 통치하던 백작 가문[103] 당시 브라반트를 통치하던 공작 가문[104] 아마도 존이나 오토 4세는 필리프 2세가 북부를 포기하고, 남부의 친국왕파 영주들과 연계하여 장기전으로 몰고 가거나 병력을 규합하더라도 산지나 요새에 틀어박혀 공성을 유도했으리라 예상했던 듯한데 오토 4세가 필리프 2세의 군세를 맞닥뜨리고, 예상치 못함으로 인해 당황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실제로 이후 오토 4세는 결전을 원하는 필리프 2세를 상대로 수 차례 휴전 협정을 맺고자 시도했다. 결국 실패했지만.[105] 부빈 전투에서 존 왕의 대리로 잉글랜드군을 지휘했다.[106] 연합군측 기사 169명이 전사하고, 131명이 포로가 되었다.[107] 다만 그렇다고 부빈 전투가 졸전은 아니었던 것이 양측의 군주들이 모두 죽을 위기를 한 번씩 만났던 상당히 치열한 전투였다. 필리프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보병들이 본진까지 밀고 들어왔기에 맞서 싸우다가 창에 찔리며 말에서 떨어지기까지 했다가 왕의 위기를 보고 몰려온 프랑스 기사들의 도움으로 살아남았고, 황제 오토 4세도 프랑스 기사들에게 공격당하여 말고삐를 붙잡히고, 말이 칼을 맞아 낙마했다가 황제를 호위하는 근위병들과 기사들의 희생에 더해 다른 귀족이 얼른 자기 말을 내줘서야 그 말을 타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108] 이 코뮌에서 징발할 수 있게 된 직속 보병 전력은 이후 부빈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요긴하게 쓰였다.[109] 후술할 대학 지원을 통해 많은 인재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110] 당시 프랑스의 일종의 궁중 수석 기사들로 근대적 상비군의 개념이 많이 미비했던 중세 시기의 프랑스에서 실질적인 국왕 상비군 장교 전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직속 슈발리에들은 부빈 전투에서도 중앙에서 필리프 2세를 보좌하며 많은 활약을 펼쳤다.[111] 성왕 루이 9세 시기에는 지방에서 바이이와 세네샬의 세력이 지나치게 강화되는 것을 막고자 감찰관을 파견했다.[112] 일전의 설명에서 '행정 재판관'이라고 표기되어있으나 이는 근세 및 근대에 쓰이던, 행정관, 재판관, 장교 등의 의미를 함유한 '프레보'라는 명칭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이해력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필리프 2세가 살아가던 중세 프랑스에서의 프레보는 근세나 근대 시기에 쓰이던 위의 의미가 아닌 토착 재지 영주층, 즉 호족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었다. 공작이나 백작과 같은 정식 작위를 받고 지방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대영주들과는 달리 뚜렷한 작위는 없으나 자신과 자신의 집안이 특권적 권한을 가지고 있는, 일대의 자그마한 지역을 암묵적으로 다스리던 토호 세력들이 바로 중세 프랑스의 '프레보'들이었으며, 필리프 2세는 이러한 '프레보'들을 무력으로 제거하거나 회유책으로 그들을 궁정으로 불러들여 그들의 토착 권한을 제거하는 방식을 사용해, 그 세력을 축소시킨 것이다.[113] 역사적으로 여러 토목 사업과 혁신적 정책을 재정적 밑바탕도 없이 시행하다가 국정 말아먹은 나라가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자.[114] 이 대학에 대한 지원도 결국 카페 왕조에 유익한 쪽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 법학이 발전하게 되면서 프랑스 왕들은 영주들의 단순한 암묵적 대표가 아니라 국가의 최고 통솔자라는 성문화된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으며 동시에 과거 로마 시대의 최고 원수의 의미를 지닌 '임페라토르'의 직함도 겸할 수 있었다.[115] 보다시피 앙주 제국이 가져갔던 프랑스 내 영토를 죄다 프랑스 왕령 혹은 우호적인 제후령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116]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동맹한 대가로, 명목상으로나마 서유럽 전역을 지배하던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프랑스가 처음으로 독립 왕국으로 인정받았다.[117] 이 때 프랑스의 경제 성장률은 르네상스 시기에도, 부르봉 왕조의 전성기에도 상승했고 산업혁명 이전까지 계속되었다.[118]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이 이탈리아만 신경썼다고 까는데 교황이라는 명분적 중요성은 물론 경제적 부유도를 따졌을 때 유럽에서 손꼽힐 정도로 부유한지라 절대 놓쳐선 안 될 땅이었기에 이탈리아에 집중한 것이었다. 즉 개살구같은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들 중에서 그나마 알토란 땅이 이탈리아였던 것.[119] 그후 30년 전쟁 때문에 독일 인구가 줄었지만, 19세기에 다시 독일 인구가 프랑스를 추월했다.[120] 영어로 Royal Domain. 중세~근세 유럽 지도들의 비고란에 많이 나오는 표현이다.[121] 플랑드르 지역의 영주였던 페르디낭 드 부르고뉴가 이에 반발하여 부빈 전투의 단초를 제공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122] 오히려 군주로서 (큰 단위의 전략 능력에 대비되는 의미의) 일신의 무용이나 작은 단위의 전술 능력이 너무 높으면, 거기에 도취되어 본인이 무(武)만 신경쓰면 되는 일개 사령관이나 장수가 아닌, 문무를 모두 통할하는 군주라는 점을 잊어버리는 사례가 (항우처럼)역사적으로 꽤 보였다.[123] 춘추시대 말기의 병법가 손자는 명장의 유형을 2개로 정리했는데, 첫 번째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 이기는 장수고, 2번째는 애초에 이길 판을 만들고서 싸우는 장수라고 명했다. 이 중에서 손자는 애초에 이길 판을 만들고서 싸우는 장수를 더 높게 평가했다.[124] 바꾼 이유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의의는 후세 역사가들에 의해 창조되었다.[125]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hilip_II,_King_of_France,_in_a_19th-century_portrait_by_Louis-F%C3%A9lix_Amiel.jpg
19세기 상상화. Louis-Félix Amie, <King Philip II of France>, 90*72cm, 1837
[126] Pernoud Régine, Blanche of Castile (Coward, McCann & Geoghegan, 1975)[127] 루이 8세와 카스티야의 블랑카의 11남인 샤를은 머리칼과 수염이 검은색이었다.[128] 에노 가문의 일원들이 밝은 금발이었다. 또 에노의 이사벨의 부친인 보두앵 5세의 눈 색의 파란 정도가 인상적으로 유달리 짙었던 까닭에 별명부터가 '파란 눈'이었다. 루이 8세는 '에노 친척을 닮은 파란 눈'도 물려받았다. 여담이긴 한데 자식이 금발의 형질을 물려받을 확률이 높은 부모의 결합은 금발+금발 > 금발+적발 > 금발+브라운(계열)이다. 자식이 파란 눈의 형질을 받을 확률이 높은 부모의 결합은 순서대로 99% 파란+파란 > 50% 파란+초록 = 50% 파란+브라운(계열).[129] 당시 필리프 2세는 14세이고, 리처드 1세는 그보다 8살 연상이었다.[130] 이들의 혼담은 리처드 1세가 추진한 결과였다. 리처드 1세 여기 참고.[131] 헨리 2세와 필리프 2세의 이복누나 아델도 동일하게 언급된다. 이들의 직계 후손은 에드워드 1세, 카스티야의 엘레오노르였으며 이 부부도 필리프 4세와 호아나 1세 못지 않게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132] John Baldwin, ‘The Many Loves of Philip Augustus’, in The Medieval Marriage Scene: Prudence, Passion, Policy, eds Sherry Roush and Cristelle L. Baskins (2005), 68-72.[133] 참고로, 리처드는 아키텐에서 장성하여 모친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과 아주 각별한 사랑을 쌓게 되고, 남프랑스 지배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고 한다.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의 적자들과 정반대로, 모친인 아델보다 부친인 루이 7세와 아주 각별한 사랑을 쌓았다고 한다.[134] 투구를 썼기 때문에 안 벗으면 얼굴도 알 수 없다.[135] 윌킨스와 메즈헤는 1181년, 엘루드는 1182년으로 상술했으나, 뻬흐씨는 원문을 제시하여 1185년으로 정정했다.[136] 이유는 알려진 바 없다. 몇몇 저술가들은 그가 죽음을 떠올릴 정도로 큰 사건을 겪었거나 병을 앓지 않았을까 추측했다.[137] mols를 라틴어로 옮기면 mollis이며 당대 서유럽에서 가장 열광적으로 읽혀진 아우렐리우스 프루덴티우스 클레멘스의 고서에서 헤라클레스가 동성 애인으로 삼은 힐라스의 별명이 mollis puer였다. 특히 헨리 2세의 치세 말과 리처드의 치세에 잉글랜드 암흑가에서 동성 성관계에서 수동적 역할, 즉 삽입당하는 역할을 맡는 미청년의 외모를 칭찬할 때도 쓰였다. Pietrini, Spettacolo e immaginario teatrale nel Medioevo (Roma: Bulzoni, 2001)[138] 장 1세는 3차 십자군 참전을 제외하면 알려진 것이 적은 반면에 장 2세는 20대 중반에 4차 십자군의 군사령관, 잔학무도함, 미남, 트루베르로 유명했으며 딕프의 표현에 따르면 '플랑드르에서 필리프 2세의 스파이'였다. 당대의 평에 의하면 '아름답지만 전투에서 덩치값을 못하는 남자', '아름다운데 겁쟁이’였으나 필리프 2세가 가장 총애했던 피카르디의 귀족이었다. 플랑드르에서 친필리프 2세의 중추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대리인이었고 부빈 전투에 참전, 훗날 필리프에 의해 플랑드르 바이으로 임명되기까지 했다. Dyggve, Trouvères et protecteurs de trouvères dans les cours seigneuriales de France (Helsinki:Société de Littérature Finnoise, 1942)[139] 말라리아에 감염된 환자들은 높은 열 때문에 탈모를 겪는다.[140] 루이 9세, 카를루 1세[141] 아래의 필리프와 쌍둥이.[142] 위의 로베르와 쌍둥이.[143] 이런 이미지는 필리프 2세가 살았던 중세 당시부터 유래한 것으로 《윌리엄 마셜의 생애》저자는 “프랑스 왕은 간교하고 교활하기가 여우보다 더하다”고 적었다.[144] 한국에서는 《겨울의 라이온》 혹은 《겨울의 라이언》 등의 제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스포일러] 또한 재미있게도 필리프 2세가 과거에 리처드 1세와 동성연인이었음이 암시되는 묘사가 있으며, 결국 필리프 2세는 이 복잡한 관계를 이용하여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실에 화끈하게 복수한다. 이는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서로 동성연인이었다는 소문을 바탕으로 작가가 창작한 설정으로 보인다.[146] 다만 직접적인 묘사는 없다.[147] 고프리는 가상인물로, 프랑스 출신으로서 존의 절친이자 심복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필리프의 사주에 따라 북쪽 영주들로부터 강제로 세금을 뜯어내 왕실과 귀족들의 분열을 부추기도록 하는 등 매국노적인 만행을 저지른다.[148] 사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왕들은 대체로 취급이 좋지 않다. 리처드 1세는 전쟁터에서는 무적 그 자체인 영웅호걸이기는 하지만 명분도 실속도 없는 전쟁을 일삼아 백성들의 등골을 빼먹는 전쟁광으로 묘사되고, 존 또한 잉글랜드의 재정이 엉망이 된 것을 모두 형의 탓으로 돌리면서도 정작 필리프 2세의 계략에 휘둘려 형과 별 다를바 없이 무거운 세금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찌질이로 묘사된다. 이에 비하면 마지막에 처참히 털리기는 하지만 그나마 교활하고 영악한 면모만 강조된 필리프 2세는 오히려 취급이 나쁘지만은 않은 편이다.[149]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하자면 같은 코에이 사의 게임인 노부나가의 야망에서 등장하는 군웅 다케다 신겐은 시리즈 중 천상기, 창조를 제외하고 나머지 전 시리즈 능력치 1위이다. 그리고 징기스칸 4의 필리프 2세 역시 종합 능력치가 1위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최소 능력치 1위로 최소 능력치인 무력이 89이다. 필리프 4세 역시 최소 능력치인 전투가 90으로 역시 최소 능력치도 1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