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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03 13:00:22

태종 이방원(드라마)/역사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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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회차별 탐구
2.1. 1회2.2. 2회2.3. 3회2.4. 4회2.5. 5회2.6. 6회2.7. 7회2.8. 8회2.9. 9회2.10. 10회2.11. 11회2.12. 12회2.13. 13회2.14. 14회2.15. 15회2.16. 16회2.17. 17회2.18. 18회2.19. 19회2.20. 20회2.21. 21회2.22. 22회2.23. 23회2.24. 24회2.25. 25회2.26. 26회2.27. 27회2.28. 28회2.29. 29회2.30. 30회2.31. 31회2.32. 32회

1. 개요

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역사적 내용에 대한 탐구 문서이다.

2. 회차별 탐구

2.1. 1회

2.2. 2회

2.3. 3회

2.4. 4회

2.5. 5회

2.6. 6회

2.7. 7회

2.8. 8회

2.9. 9회

2.10. 10회

2.11. 11회

2.12. 12회

2.13. 13회

2.14. 14회

2.15. 15회

2.16. 16회

2.17. 17회

2.18. 18회

2.19. 19회

2.20. 20회

2.21. 21회

2.22. 22회

2.23. 23회

2.24. 24회

2.25. 25회

2.26. 26회

2.27. 27회

2.28. 28회

2.29. 29회

2.30. 30회

2.31. 31회

2.32. 32회


[1] 자세히 보면, 말 안장에 칼이 매달려 있는데, 등청하러 갈 때 부인 민씨가 건내둔 말이었다. 즉 방원의 말 다루는 수준은 집에서 키우던 익숙한 말이 아닌 낯선 말은 단번에 다루지 못하는 정도임을 표현한 것이다.[2] 나중에 겨우 머리를 써서 말발굽으로 그 병사의 얼굴을 후려치고 달아난다.[3] 재미있게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아버지부하 역을 맡았던 조상기가 일회성으로 맡았다.[4] 실제 역사에서 두들겨 패고 달아났으리라는 추측은 다소 무리이다. 아마 실제 역사에서는 보초병들에게 술을 먹여 재우고 달아났거나, 감시가 생각보다 심하지 않아 뇌물을 바치고 도주했을 가능성이 더 확실시된다.[5] 메이킹 필름에서 해당 배역을 맡은 아이와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때 아이가 6살이라고 말하긴 했다.[6] 굳이 변명을 하자면 한 화 만에 개경 함락 직전까지 밀고 가야 하는 제작진의 사정상 개연성보다 압축적인 묘사를 우선해서 투석기 공격과 성벽 근접을 한 프레임에 우겨넣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우겨넣기를 통해서 개연성이라는걸 날려먹었다는 점에서 잘한 결정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보병의 상륙과 공수부대의 강하를 한장면에 우겨넣은 마이웨이의 연출이 결코 좋은 평을 못 듣는 것과 같다.[7] 물론 우왕 입장에선 이성계의 가족들이라도 도모해 볼 가능성이라도 잡아야 했다.[8]정도전〉에서도 '성계탕' 에피소드로 좀 더 긴 시간을 할애해 이 각색을 쓴 바 있다.[9] 지금은 조선인민군이 주둔하고 있는 군사기지다.[10] 심지어 이후 4회에서 이색이 귀양 갈 때, 6회에서 정도전이 귀양을 갈 때, 26회에서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귀양을 갈 때에도 똑같이 사용했다.[11] 여태까지 한국 사극에서 '상왕'이란 작호와 '폐하'란 경칭이 결합되어 나타난 적이 없었다. 왕이 죽을 때까지 하는 게 일반적이라서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 많지 않아서.[12] 흥국사 회동에서 우창비왕(禑昌非王)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논의에 따라 종실 중 가장 가까운 족속으로 거명되었고, 논란을 없애기 위해 종친 여러 명에 대한 명단을 써서 계명전(啓明殿)에 나아가 태조 왕건에게 고하고 탐주(探籌)하는 절차까지 거쳐 이성계 등 흥국사 9공신이 함께 정비(定妃)의 뜻을 받들어 추대하였다. 그리고 공양왕은 즉위 후 순안군(順安君) 왕방(王昉)과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조반(趙胖)을 명에 보내 즉위를 알리고 친조(親朝)하여 면주(面奏, 마주보고 상주함)일을 허락받게끔 했다. 친조면주는 이행되지 않았으나 공양왕 3년 12월 명에서 승휘원사(承徽院使) 강완자독(康完者篤) 등 3인을 보내와 공양왕의 국가 운영을 위로하며 정사를 살피라는 조서를 내림으로서 실질적으로 명의 승인도 떨어졌다.[13] 폐가입진을 명분으로 즉위한 공양왕이기에 신우와 신창을 죽이면 정통성은 더욱 강화되고, 그 정통성 있는 임금이 선양을 거부하고 버티면 이성계가 모양 좋게 즉위하기 난감해진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우, 창에 대한 동정여론을 환기시켜 민심을 이성계에서 등돌리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설명하는데, 개경 민심이 나빴을 때는 최영이 죽었을 때고 왕씨들에 대해선 이성계가 공양왕 부자와 공양왕의 삼촌들을 포함 유력 왕씨 135명을 목 매달고 바다에 던져도 아무 문제없었다. 정치적 실책이 분명한 우왕과 너무 어려 권위가 없었던 창왕의 죽음으로 민심이 동요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고 그런 기록도 없다. 무엇보다 공양왕은 우, 창이 역적이어여만 권위가 올라가는 사람인데 그들에 대한 동정여론을 기대하고 적극적으로 처형을 추진했다는 건 무리한 주장으로서 비전공자들이 민심이라는 모호한 요소를 너무 쉽게 가져다 붙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 케이스다.[14] 그 동안 대부분의 사극들에서는 창왕의 실제 나이를 추정했을 때, 어린 나이의 아역 배우들이 배역을 맡다 보니 시청자의 정서를 의식해서 사약을 먹고 죽는 걸로 순화시켜 묘사했었다. 개국에서는 창왕의 처형이 역사대로 묘사되지만 직접 베는 장면은 넣지 않았다.[15] 우왕은 이성계와 전주 이씨 가문에게 반복해서 저주를 남기며 완전히 죽을 때까지 몇 번이나 칼에 베이고 찔리지만, 창왕은 죽음이 두려워 눈물을 흘리며 눈을 꼭 감은 채로 한 번에 베여 죽어 유모의 품에서 숨을 거뒀다.[16] 거의 200년 만이다(...)[17] '마파리(mafari)'는 조상님들, 아지는 '형(age)'이라는 뜻이다.[18] 예컨대, 영어로 된 한국 역사물에서 '김치를 만들었다.'를 두고, '딤채를 맹그난다.'가 아닌 'I made 딤채.'라고 하는 거랑 비슷하다.[19] 용재총화에 기록된 야사에 따르면 권근이 이때 정몽주를 만났는데 일단의 군사들이 정몽주 일행을 앞질러가니 정몽주가 권근더러 나를 따라오지 말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20] 정몽주의 피살은 1390년 윤이, 이초 사건 이듬해부터 이어지는 급박한 흐름속에 있다. 1391년 9월 정도전 유배&세자 왕석의 명 입조 -> 1392년 3월 세자의 귀국행렬 맞으러 간 이성계 해주에서 낙마 -> 1392년 4월 정몽주 피살 -> 1392년 6월 말 공양왕 명에 책봉요청 사신 파견 -> 1392년 7월 공양왕 폐위와 사신단 중도귀환까지 숨 쉴 틈없이 돌아갔고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부터 이어진 정치적 숙청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정몽주 격살 파트에 들어가면 '죽고 사는건 하늘에 달렸다'며 손놓고 방관하고, 이걸 이방원이 해결하는 전개가 튀어나온다. 그것도 이방과, 이화, 이제 같이 쟁쟁한 무장들을 그때까지 다른 사람 보좌역만 했고, 군무에 인연 없던 20대 문관 이방원이 다 끌고가는 전개로. 다섯째가 3년상을 치르는 (정통성을 위해 가필했다는 의심을 해볼수 있는)기술까지 더해서.[21] 실제로 성격이 포악하긴 했다.[22] 여담으로 저 장면은 <다큐멘터리 3일> 방송이나 이화 역의 이원발 배우의 유튜브에서도 나왔는데, 저 당시 날짜가 2021년 11월 28일이다.[23] 위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용의 눈물이나 정도전과는 달리 고려 국왕은 고려가 멸망하는 날까지 관모로 각진 절상건을 착용했다.[24] 본작에서도 이방번을 먼저 지목하다가 약간의 반발 이후에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겠다고 선언한다.[25] 드라마 제작 예산이 빡빡하기 때문에 그렇게 진행에 필요없는 경우는 쳐내면서 각색으로 바꿔버리는 경우가 많다. 전작 정도전에서 그렇게 등장할 필요가 없는 이방의이방간이 각각 직접 나오지 않았거나 언급만 되었으며, 배극렴이 사라진 것도 위화도 회군으로 시작하고 한동안은 고려를 무너트리기 위해 정치적 충돌이 주가 되기 때문에 뺀 것으로 보인다. 물론 건국 후에 얼마 안 가 죽었다는 것도 사실이기도 하다.[26] 그나마 2014년의 정도전은 대군 마마 호칭을 쓰지 않고 정확하게 (누구누구) 군 대감 호칭을 썼지만, 그 작품도 이방석을 의안군으로 칭하는 오류를 범했다.[27] 해당 대목의 시기인 여말선초보다는 후대인 세종 시기에 편찬된 훈민정음에도 이 단어가 해당 뜻으로 쓰였다. 이렇게 쓰인 부분이 (내〮이〮ᄅᆞᆯ〮為윙〮ᄒᆞ〮야〮어〯엿비〮너겨〮 새〮로〮스〮믈〮여듧〮字ᄍᆞᆼ〮ᄅᆞᆯ〮ᄆᆡᇰᄀᆞ〮노니〮) 내가 이를 위해 가엽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노니 부분에서 이런 의도로 쓰였다.[28] 이방석은 생전엔 세자였으니 군호가 없었고, 태종때 소도군, 숙종때 가서야 의안대군으로 추증받는다. 즉, 숙종 대 전에 실록에서 언급되는 의안대군은 십중팔구 이화다.[29] 뒤에 양녕대군의 경우는 좀 더 알려져서인지 이름을 지어줄 때 군호가 나오지 않았다.[30] 중국에서는 송나라 시절부터 활용되었던 황후의 예복으로 원나라 때 잠깐 자취를 감추었다가 명나라 때 다시 부활한 예복이다. 그래서 송나라를 배경으로 한 중국 사극에서 많이 등장하는 예복이기도 하다.[31] 실제로 SBS 홍천기의 경우 극 중 조선초기식 장저고리가 나왔다는 이유로 중국 네티즌들로부터 어이없게 명나라 한푸가 나왔다고 공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32] 조선 전기 한복은 명나라 의상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확실한 반면 조선 후기 한복은 조선만의 색채가 점차 강해졌기 때문인 측면도 있다. 명나라 등 한족 왕조에서 찾을 수 없는 한민족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빼앗는 것이 중국의 한국 문화 예속화 시도의 주된 의도이니 말이다.[33] 다만 칠적관까지 썼으면 다소 중국색이 짙어보이게 되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중국 소분홍들로부터는 “저 봐라, 우리 중국옷을 입으니까 허구한날 한국은 중국을 따라한다”, 한국의 국수주의자들로부터는 “왜 한국 사극에 한복이 안나오고 중국 소품과 중국 의상이 나왔냐”라고 양쪽으로 뭇매를 맞았을 가능성도 있기때문에 칠적관은 빼서 그나마 중국색이 옅어보이게 만드려고 연출한 걸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실 조선 국왕이 착용한 곤룡포익선관부터가 명나라에서 넘어온 건데 대중적으로 이 사실은 많이 알려져있지 않다. 결국에는 실제 중국에서 넘어왔냐 아니냐 역사적 사실보다는 대중적 인식이 더 좌지우지를 한 셈. 이 점을 감안하면 제작진의 설레발로도 볼 수 있다.[34] 다만 SBS 조선구마사에서 극 중 무녀가 중국색이 꽤 짙은 의상을 입고나왔다가 크게 비난당하고 드라마 자체가 폐지되었던 전적이 있는만큼 사극 제작진들 입장에서는 중국색이 짙은 의상이나 소품은 거의 지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35] 정도전에서는 정도전과 남은 윤소종 등의 대화에 언급이 되었다. 육룡이 나르샤에서도 첫 과거장에 선비들이 거부하여 아무도 없는 것처럼 묘사하는 건 물론 이 일이 그 두문동 72현 전설으로 넘어갔다.[36] 유배 중이었던 정몽주 일파의 장살에 관련된 인물이기도 하다[37] 후일 무인정사 직후 정도전 일파로서 처형을 당하게 되는 인물이다.[38] 공양왕 가계만쳐도 단양 우씨, 진주 강씨, 전주 이씨, 청송 심씨, 순천 박씨 등 폭넓게 엮여 있다. 여자들까지 건드렸다간 이 집안들까지 다 건드린다는건데 그게 될리가 있나.[39] 그나마 중국풍을 표현한 세트가 과거 대조영을 촬영했던 강원도 속초 설악씨네라마가 있었지만, 2019년 산불로 인해 완전 전소되었다.[40] 실제로 정릉은 처음엔 왕릉은 도성에서 10리(4km) 밖에 위치해야 한다는 예법마저 무시하고 4대문 안인 서울 중구 정동에 조성되었었다. 현재 정릉의 위치는 태조 사후에 태종에 의해 도성 10리 밖으로 이장된 것이다.(현 성북구 정릉동은 당시 도성 밖이었다.) 태종은 그때 정릉을 왕비의 능에서 후궁의 묘로 격하시킬 뿐만 아니라 석물들은 당시 준설 공사를 하던 청계천광통교를 세울 때 그 재료로 사용하면서 거꾸로 뒤집어 박아버린다.[41] 이럴수 밖에 없는게 시간이 너무 없다. 1400년에 일어난 2차 왕자의 난부터 태종 승하까지 22년이나 남았는데 남은 홧수가 달랑 13화 밖에 없다(...)[42] 물론 이방간을 죽이지 않으려는 것은 진심이었다. 전투중에도 이방간에게 활을 쏘는 자는 베겠다며 수시로 외쳤고, 승리 이후에도 어떻게든 이방간을 죽이지 않기 위해 박포에게 독박을 씌워 박포만 죽이고 이방간은 귀양을 보냈다.[43] 오죽하면 2차 왕자의 난은 이방원이 경쟁자인 방간을 없애기 위해 기획했다고 보는 의견들도 있을 정도다. 박포를 이용해서 쿠데타를 부추키고 이로써 명분을 얻은 후에 방간의 정치적 생명을 끊어버린 것이 아니냐는 것.[44] 태종 2년 4월 1일 계축 1번째기사[45] 다만 실제로는 호색 문제만 아니라 다른 정책들에 대해서도 주장한 상소였다. 그런데 호색 문제 지적에 대한 표현이 문제가 되어 논란이 되었다.[46] 태종 2년 5월 11일 계사 1번째기사[47] 태종 8년 10월 1일 을해 4번째기사[48] 태종 2년 10월 15일 을축 2번째기사, 태종 3년 3월 17일 갑오 1번째기사[49] 넙데데한 곤장으로 때리는 형벌은 곤형이고, 장형은 태형 매보다 조금 더 굵은 회초리~몽둥이로 때리는 형벌이다. 게다가 곤장은 특수한 영역에서만 쓰는 형벌 도구이다.[50] 과거에 방영된 용의 눈물에서는 하륜, 조영무를 정승에서 해임하고 이화를 영의정에 앉혀서 민씨 형제 탄핵을 주도시키는 장면이 자세히 그려진 바 있다. 같은 공신들보다는 왕족인 이화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한 이방원의 정치적 판단이었던 것. 이화 역시 태종의 뜻을 알고 영의정이 되자마자 민씨 형제 탄핵을 주도하고, 둘의 유배 이후 바로 자리에서 물러나고 하륜과 조영무가 다시 복귀한다.[51] 이 발언이 왜 위험한고 하니, 이방원은 세자 출신이 아니면서 다른 형제들을 죽이거나 쫓아내며 왕에 오른 인물이다. 당연히 가족간의 피를 보는 것이 좋던 싫던 트라우마로 남았을 텐데, 이 트라우마를 제대로 건드린 것. 또한 정도전이 죽은 뒤에 어떤 중죄가 씌워졌는지 생각해보자. 왕자를 죽이려 한 종친 모해죄였다. 이방원 입장에서 나쁘게 들으면 '효령, 충녕, 성녕대군이 죽어도 아무튼 가벼운 죄에요'라고 해석할 수도 있으므로 나이 들어서 자꾸 헛소리 하는 하륜이 아니었으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위험한 발언이다.[52] 1408년 6월 사망[53] 이 무렵에 양녕대군이 사춘기 나이에 들어서는데다 주요 사건들이 촘촘한 간격으로 일어나 긴 시간을 한번에 넘길만한 시점을 찾기 힘들고 아역에서 성인 배역으로 넘어가기 전에 청소년 배역을 더 넣으면 배우의 얼굴이 달라지는게 너무 눈에 띄어 몰입감이 떨어지기에 나이에 얽매이지 않고 성인 배역으로 바로 교체할 수 밖에 없다.[54] 태종 14년 1월 2일 정축 1번째기사 중 : 이숙번이 임금의 총애(寵愛)를 믿고 친히 성석린과 남재의 집에 가서 강제로 서명하게 하니, 성석린이 부득이하여 서명하였다. 그러나 임금에게 올리지는 못하였다. 이숙번이 또 헌부(憲府)를 사주(使嗾)하여 간관(諫官)의 죄를 탄핵하여 청하였다.[55] 태종 입장에서는 어쩔 수가 없는 게 세종 4년인 1422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사망한 해가 앞에 썼던 것처럼 1422년인데, 문종은 1414년, 세조는 1417년에 각각 출생했다. 훗날의 왕이 되는 두 사람은 할아버지 태종이 사망하는 해에 백부 양녕대군이 세자에 책봉된 나이보다 훨씬 어렸기 때문에 태종 입장에서는 그저 귀여운 손자들일 뿐이었다. 설마 둘째 손자가 증손자를 죽이고 왕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56] 애초에 항의문이 다음 문장으로 시작한다. 전하(殿下)의 시녀(侍女)는 다 궁중(宮中)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입니까?[57] 2011년 KBS 공주의 남자에서 정종 역을 맡은 이민우는 허리에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거열형 촬영을 강행하는 투혼을 발휘했는데 이 대가로 허리부상이 심하게 도져서 하무지 역으로 출연이 예정되어 있던 광개토태왕 출연이 불발되고, 종영 2달 뒤 열린 연말 시상식에도 불참했다. 공교롭게도 온녕군 역의 윤승원이 하무지 역으로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