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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처음에 이단의 음식이라고 하던 유럽 쪽의 생각과 달리 커피 열매를 최초로 먹고 마신 지역은 그리스도교 분파인 에티오피아의 고원 지대이다. 에티오피아 내의 이야기에 따르면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염소를 치던 젊은 목동 '칼디'가 하루는 염소들을 데리고 좋은 목초지로 가던 중 염소 몇 마리가 이상한 열매를 먹고 잠도 안 자고 밤새 뛰어노는 걸 보고는 신기해서 먹어 보고는 각성 효과가 있음을 발견해서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편 에티오피아에서는 '커피의 발견자' 칼디에서 유래된 브랜드인 칼디스가 대표적인 카페라고 한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서기 500~1000년 무렵부터 커피를 먹고 마셨는데[1] 실제로 초창기 커피는 콩을 빻고 볶아서 빵에 발라 먹었다. 유목민들 식습관에 어울리게 원두를 동물성 기름으로 뭉쳐 보존식품처럼 쓰는 방법도 있었다고 한다. 서기 9~10세기에는 알 라지가 커피 열매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에서 보듯 이미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들 사이에 커피가 알려져 있었지만 당시에는 커피를 갈아서 음료수로 마시는 방식이 보편화되지 못해서 그냥 약재로 알려졌다.
잘 알려져 있듯이 커피는 콩을 볶아서 물을 걸러 먹는 것인데 이 콩을 볶아 먹게 된 이유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고 한다. 위의 그 목동이 커피콩을 먹은 뒤 각성 효과가 있음을 깨닫고, 인근 에티오피아 정교회 수도원의 수도자들에게 "양들이 이 콩을 먹더니 밤새 뛰어놀더라. 그래서 내가 먹어 봤더니 각성 효과가 있더라."라고 했는데, 수도자들은 이 열매가 악마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불 속에 던져버렸다. 그런데 그 향기에 모두가 빠져서 커피를 볶아 먹게 됐다고 한다.[2]
야생에서 자라는 커피나무속(Coffea)에 속하는 종은 현재까지 밝혀진 것만 124종이지만 이 중 맛과 향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품종이 바로 에티오피아에서 자라는 아라비카 종(Coffea arabica)이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오늘날에도 야생/반야생으로 자란 커피를 수확해서 판매한다. # 그러나 아라비카 품종은 맛과 향이 좋은 대신 병충해에 약했고, 이는 커피 재배가 빨리 확산되지 못하는 장애요인으로 남았다. 보통 과일이나 곡물 같은 농작물은 품종 개량을 거치면서 크기와 맛과 향이 개선되기 마련인데, 아라비카 커피의 경우 크기나 맛을 변형시키는 것보다는 병충해 저항성을 개선하는 방식으로 품종 개량이 이루어져 왔다.
화석상의 최초 기록으로는 커피 나무 및 해바라기, 담배, 고추, 감자, 박하의 조상되는 스트리크노스 일렉트리(Strychnos electri)"이라는 식물으로 에오세 중기 시절인 4500만년경에 형성된 도미니카 공화국 광상에서 발견된 호박에서 나왔다. 영어 신문기사
2. 칼디의 전설과 오마르의 전설
커피가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기원설로는 에티오피아의 칼디의 전설과 아랍에서 내려오는 오마르의 전설이 있다.- 칼디의 전설: 에티오피아의 목동 소년인 칼디라는 소년이 양떼를 몰던 중 양 한 마리가 붉은 열매를 먹고 힘차고 기운찬 모습이 있는 것을 보고 그 붉은 열매가 원인으로 보고 수도원으로 달려가서 알렸다고 전해진다. 수도원의 수도승이 처음에는 피와 같은 열매라고 하여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나중에 칼디를 부르면서 그 열매를 몇 개 더 따오라는 말을 해주는 것으로 전해진다.
- 오마르의 전설: 아라비아의 기도자로 알려진 오마르가 예멘의 모카 지역에 들리다가 전염병이 창궐하게 되고 성주의 딸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치료를 해주면서 공주가 기운을 차렸고 둘이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었으나 성주가 이를 알고 노하여 오마르를 추방하였고 추방당한 오마르가 산 속에서 붉은 열매를 먹는 새를 보고 그 열매를 먹으니 배고픔이 가시고 기운이 차려지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커피 학계에서는 대부분이 칼디의 전설을 유력하게 커피의 기원설로 보고 있는데 에티오피아가 아프리카 최대의 아라비카 원두를 생산하는 커피 생산국이었고 또한 아라비카 품종도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3. 중동으로의 전파와 집대성
커피는 이슬람 세력이 확장하면서 함께 전세계로 퍼졌다. 본격적으로 유럽으로 전파된 시기는 오스만 제국 때다.먼저 에티오피아의 홍해 건너편 예멘에서 14-15세기 무렵 수피들에게 지크르[3] 시의 졸음 방지 목적으로 쓰이며 도입되었다. 그리고 아덴의 수피 출신 무프티(이슬람 율법학자) 자말 앗 딘 무함마드 알 자부하니가 까흐와, 즉 커피가 할랄이라는 파트와(이슬람 율법 해석)를 내렸다. 이로써 예멘 일대에서 커피가 공인되었고 널리 퍼지게 되었다. 15세기 말엽 예멘 북쪽의 이슬람 성지 메카로 전파된 커피는 예배를 드릴 때 졸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목적[4]으로 음용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예배 때문에 커피가 사랑받은 것은 아니다. 이들이 사는 사막은 낮에는 살인적인 더위로 이동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유목민들이 소, 양이 뜯어 먹을 풀이 떨어져 이주하려고 하면, 해가 떠있을 때는 그늘 주변에 조용히 있다가 해가 지고 나서야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기약 없이 이동했다가 사막에 하루종일 해가 뜬 채 노출되면 제 아무리 사막에 적응한 유목민들도 버틸 수 없다.[5] 커피도 결국 유목민들의 야간이동을 위해서이다. 밤에 이동하려면 깨어 있어야 되니까. 그런 이유로 커피는 이슬람 유목민들에게 중요한 생존을 위한 식품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16세기 무렵에는 이슬람 성원의 주변에 카흐베하네(kahvehane), 즉 커피하우스가 생겼는데, 알콜을 금하는 이슬람 사회에서 카흐베하네는 여러 의견이 오가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한편 카흐베하네가 반체제 세력의 회동 장소가 될 것으로 우려한 메카의 시장 감찰관 카이르 베이가 카흐베하네를 폐쇄하고 커피 금지령을 내렸다. (일명 '메카 사건') 이후 그는 주군인 이집트의 술탄에게 커피를 불순한 음료라면서 유통 금지를 의뢰하였는데 커피를 마셔본 술탄은 술이 금지된 이슬람 세계에서 유용한 대체음료가 될 수 있고, 각성작용이 경건함을 일깨운다며 오히려 커피를 장려했다.
한편 1510년엔 맘루크 왕조의 수도 카이로에도 예멘인 공동체를 중심으로 카흐베하네가 생겨났다. 그리고 1517년 이집트를 정복한 오스만 술탄 셀림 1세는 이스탄불로 귀환하며 커피를 가져왔다. 다만 원산지에서 매우 멀었기에 커피는 희귀품이자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는데, 같은 해(1517) 커피의 중심지 예멘이 오스만 제국령이 된 후로[6] 점차 수급량이 늘었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 하에 예멘의 커피 생산이 1544년 당국이 기존의 주요작물이전 마약성 식물 까트 재배를 제한하고 그 부지를 외화벌이에 유용한 커피나무 제배에 할당하며 크게 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덕에 16세기 중반 무렵부터는 이스탄불의 서민들도 커피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예멘 중에서도 북부의 내륙 도시 자비드 일대의 바이트 알 파키프에서 주로 생산되던 커피는 예멘의 주요 항구였던 모카와 아덴 항을 통해 이슬람권 전역으로 유통되었다. 그리고 전자의 이름 '모카' (المخا / Mocha)는 커피에 관련해서 수많은 뜻이 담긴 단어가 되었고 한때 커피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였다.
다만 술, 돼지고기 등 음식과 기타 비종교적 사교 활동에 규제가 많은 이슬람의 특성상 커피의 보급이 항상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511년의 메카 사건을 시작으로 1534년 카이로에선 커피 반대파가 카흐베하네를 습격하였고 이스탄불의 보수적인 학자들이 카페와 커피를 비난하였다. 이슬람에선 쿠란과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를 근거로 사리 판단을 하는데, 무함마드 사후 등장한 신문물에 대해선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전통인 순나를 중시하는 학자들은 커피를 비드아, 즉 일탈로 보았고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술과 같다 하여 비난하였다. 한 마디로 '선지자께서 계셨다면 거부하셨을 것'이라는 주장. 그럼에도 16세기 말엽에 이르면 '커피의 합법성 옹호'와 같은 논문 등이 발표되는 등, 커피가 이슬람 세계에서 대중적이 되면서 결국 종교적 비판 또한 수그러들었다.
다만 커피 자체 대신 카흐베하네는 계속 탄압하였는데, 메카 사건과 마찬가지로 정치 공작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적 투쟁과는 무관하게 커피 문화는 서민들을 중심으로 이슬람권 대부분을 지배하던 오스만 제국을 중심으로 각지에 퍼져나갔다.
원래 이슬람권에서 커피가 알려진 시점은 서기 9~10세기 경이었다. 당시 아랍인/페르시아인들은 커피를 분춤(Bunchum)이라고 부르며, 약재로 사용하였다. 문제는 당시 알 라지 같은 무슬림 의학자들이 커피가 정력을 감퇴시킨다고 오해하였고,# 이 때문에 커피를 따로 음료수로 만들어 마시는 문화는 수백년 후에야 유행하게 되었다. 당시 아랍인들이 커피가 정력을 감퇴시킨다는 식의 잘못된 상식이 없었다면 커피 음용 문화는 훨씬 더 빨리 확대되었을 수도 있다.
오스만 제국의 카흐베 하네 (커피하우스) |
이런 여러 가지 상황 덕분에, 이슬람권에서는 커피가 널리 사랑받을 수 있었다. 흔히 영국을 보고 전쟁도 티타임 후에 한다 할 정도로 차에 목매는 나라로 묘사하지만 당시 이슬람 세력의 커피 사랑 역시 이에 지지 않아서, 그들이 유럽과 싸울 때 전장까지 커피나무를 가지고 와 심어서 유럽에 커피가 본격적으로 퍼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사실 영국도 커피가 휩쓸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커피가 평민들에게까지 보급되다 보니 귀족들이 평민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커피를 끊고 차로 돌아선 것. 그 외에도 커피를 여성들을 못 마시게 했다가, 여성들이 차별에 화가 난 상황에서 차가 도입되니까 차를 마시고, 점점 상류층의 기품 넘치는 취미가 되면서 차에 목숨을 걸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 부분은 홍차 문서로. 근데 홍차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슬람권 사람들은 홍차 (일명 black tea)도 영국과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많이 마신다.
4. 유럽으로의 전파
현존하는 유럽인의 커피에 대한 첫 기록은 1573년 독일의 학자 레온하르트 라이발프가 레반트(시리아-팔레스타인)를 여행하고 남긴 동방여행기(1582년 저술)에서 현지인들이 '카우베'(chauwe)[7]라는 음료를 마신다고 기록한 것이었다. 커피 나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580년 이탈리아의 식물학자 프로스페로 알피니가 이집트를 다녀오고 저술한 이집트 식물(1592년)에서 언급한 것이었다. 16세기 말엽 동방 무역의 거점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커피는 이탈리아 일대에 소개되었다.커피가 이슬람 세력을 통해 알려지다 보니, 기독교권인 유럽에서는 '이교도들'이 마시는 음료인 커피를 나쁘게 인식했다. 이교도의 음료, 이슬람의 와인, 악마의 유혹[8], 야만인의 음료, 사악한 나무의 검은 썩은 물 등으로 폄칭하며 마시지 말라고 권장했지만, 한번 커피의 맛을 본 사람들은 계속 빠져들었다.
야사에 따르면 대략 1600년, 교황 클레멘스 8세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커피를 공식적으로 금지해달라는 압력을 받았다. 그리고, 신자들의 합리적인 요청에 따라 교황청에서는 공개적으로 커피 나무의 화형식을 거행했는데 오히려 커피 나무가 불에 타들어갈 때 나오는 커피열매의 향기가 너무 좋아서 반대파들까지 모두 매료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결국, 클레멘스 8세 교황은 직접 커피를 맛본 뒤에 "이 사탄의 음료는 왜 이렇게 맛이 좋은가? 커피는 이교도 놈들만 마시도록 놔두기엔 너무나도 아깝도다." 라면서 반대파들을 물리치고 공식적으로 커피를 축복함으로써 마실 수 있도록 승인하였다고 한다.[9] 이 야사가 실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커피가 대략 이 시점부터 유럽에서 대중화된 것은 사실이다.[10] 커피는 족쇄가 풀리자 단숨에 유럽을 휩쓸었다.
1616년 커피의 본산지인 모카 항구에 네덜란드 상인 피터 판 덴 부르크가 나타났다. 그는 기념품으로 커피콩을 본국에 가져가 심었는데, 이는 서유럽에 뿌리를 내린 첫 커피나무였다. 이루 커피는 네덜란드에서 유행하였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모카에 상관을 세우게 되었다.[11] 영국에선 1627년, 이탈리아의 파도바 대학에서 공부하다 커피를 접한 영국인 해부학자 윌리엄 하비에 의해 커피가 처음 도입되었다. 프랑스에선 1644년 마르세유의 상인 비엘 드 라 로크가 도시에 커피를 들여오기도 하였지만 도시 외부로 퍼지진 않았다.[12] 한편 1635년 북에멘의 라시드 왕조가 오스만 제국군을 몰아내고 모카, 아덴 등등을 점령해 예멘을 통일한다. 이로써 유럽 상인들은 오스만 제국을 거치지 않고 예멘과의 직접 교역을 통해 커피를 들여올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교역은 1640년을 시작으로 1663년 정기적인 수출로 자리잡았다.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외에 영국 레반트 회사 등도 동참하며 모카는 커피의 대명사로 유럽에 알려졌다.
TED 강연 / "좋은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
(카페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진은 여기서 10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서 불과 몇 분 전에 찍은 겁니다. 바로 여기 옥스포드에 있는 '그랜드 카페'입니다. 제가 이 사진을 찍은 이유는 이곳이 바로 1650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커피 전문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우 유명한 곳입니다. 제가 이곳을 소개한 것은 역사적인 영국의 스타벅스 같은 커피 전문점을 안내해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영국의 커피 전문점이 이제는 계몽주의라고 부르는 지난 500년 동안의 위대한 지적 개화기를 성장시키고 퍼뜨리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중략)
커피 전문점이 계몽주의의 태동에 그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의 일정 부분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마셨던 것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커피나 홍차가 영국 문화로 전파되기 전에는 지식인이건 대다수 농부건 할 것 없이 다들 날이면 날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술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술은 주간에 마시는 음료였습니다. 아침 먹으면서 맥주 조금, 점심에는 와인 약간, 특히 1650년 경에는 여기에 약간의 진도 곁들이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 거기에 약간의 맥주와 와인을 더하죠.
그 시절 물은 마시기에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술이 건강을 위해 옳은 선택이었습니다.[13] 그리고 사실상 커피 전문점이 번창할 때까지 실제로 전체 인구가 하루종일 술에 취해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땠을지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이 살면서 만일 온종일 술을 마신다면 말이죠. 뭐 더러 그런 분도 있으시겠지만.
그러다 여러분의 삶에서 억제제를 흥분제로 바꾸었다면 당연히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겠어요? 여러분은 좀 더 영리해지고 기민해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국이 홍차나 커피 같은 음료를 마시면서부터 위대한 혁신이 꽃을 피웠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 미국의 작가 스티브 존슨.
(중략)
커피 전문점이 계몽주의의 태동에 그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의 일정 부분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마셨던 것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커피나 홍차가 영국 문화로 전파되기 전에는 지식인이건 대다수 농부건 할 것 없이 다들 날이면 날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술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술은 주간에 마시는 음료였습니다. 아침 먹으면서 맥주 조금, 점심에는 와인 약간, 특히 1650년 경에는 여기에 약간의 진도 곁들이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 거기에 약간의 맥주와 와인을 더하죠.
그 시절 물은 마시기에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술이 건강을 위해 옳은 선택이었습니다.[13] 그리고 사실상 커피 전문점이 번창할 때까지 실제로 전체 인구가 하루종일 술에 취해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땠을지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이 살면서 만일 온종일 술을 마신다면 말이죠. 뭐 더러 그런 분도 있으시겠지만.
그러다 여러분의 삶에서 억제제를 흥분제로 바꾸었다면 당연히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겠어요? 여러분은 좀 더 영리해지고 기민해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국이 홍차나 커피 같은 음료를 마시면서부터 위대한 혁신이 꽃을 피웠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 미국의 작가 스티브 존슨.
그 이전까지 식수 품질이 좋지 못해 대용으로 중세까지는 술을 마시다가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이후부터 술에서 깬 유럽인들은 르네상스를 이루어냈다는 TED 강연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16세기 함부르크 사람들은 1년에 맥주 약 200갤런(757.082리터)을 마셨었다.[14][15] 하지만 1990년대 들어서 1년에 33갤런 수준으로 급감했다.
이런 대체음료가 나오기 전에는 음주량이 쉽게 줄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높았던 술 소비량이 유의미하게 감소한 시기는 콜라, 홍차가 퍼진 이후다.
이렇듯 커피는 주로 이슬람권에서 전파가 되었기에, 19세기까지만 해도 아라비카를 비롯하여 이슬람권 커피가 유럽 커피를 휘어잡았다. 현대 카페의 원형인 카흐베하네[16] (커피 하우스)도 중동을 중심으로 퍼졌는데, 유럽에선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에 처음 생겼다.[17] 1554년 시리아인 하킴과 샴스가 개업하였다고 한다.[18] 카흐베하네는 17세기 무렵부터 이스탄불에 보편화되었는데, 늘어나는 카흐베하네에 대한 불만이 생겨났다. 1611년에는 이집트 총독이 카흐베하네에서 반정부적인 언동이 많다고 커피 판매와 같이 카흐베하네를 금지했다가 커피를 좋아하던 술탄 아흐메트 2세의 분노를 사서 총독에서 쫓겨난 일도 있었다. 특히 17세기 오스만 제국에선 특권 계급인 예니체리와 황태후 등 하렘이 무능한 술탄 대신 정국을 주도했는데, 이들과 결탁하여 사치와 부패를 이어가던 세력이 바로 커피의 확산을 주도한 수피들이었다.
카흐베하네는 이러한 수피들의 거점이었고, 동시에 예니체리의 군대 외 사업으로서 그들의 고수익원이었다. 당시 이스탄불의 카흐베하네는 대부분 예니체리 수중에 있었다. 따라서 기강이 해이해지는 제국을 바로잡고자 출현한 이슬람 원리주의 계통인 카디자델리 파는 이를 매우 혐오하였다. 그들은 오랜만에 출현한 야심찬 술탄 무라트 4세 시대에 집권 세력이 되었고, 술탄이 실권을 장악한 이듬해 1633년에 1차 커피 금지령을 내리며 카흐베하네에 탄압을 시작하였다.[19]
무라트 4세 본인 역시 커피 자체는 좋아했지만 카흐베하네에서 벌어지는 지식인들의 비난은 싫어했다고. 가혹한 금주령, 금연령으로 유명했던 그는 커피에 대해서도 원스트라이크 아웃을 적용해 약 3만여 명이 처형되었다고도 한다. 이에 대한 반동인지 무라트 4세 사후 즉위한 술탄 이브라힘은 예니체리에 의해 폐위되었다. 뒤이어 옹립된 메흐메트 4세의 시대엔 1651년 태후 쾨셈이 암살되고 카디자델리 파를 후원하던 쾨프륄뤼 가문의 섭정이 시작되며 카흐베하네에 대한 탄압이 재개되었다. 1656년 지정된 2차 커피 금지령을 통해 쾨프륄뤼 가문은 정적들을 제거하며 무소불위의 권위를 누렸다. 비록 1차와는 달리 투 스트라이크 아웃제로 바뀌긴 했지만 정치적 이용은 극대화된 경우였다.
오스만 제국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네덜란드, 영국, 마르세유 등지에 커피가 보급되는 동안 '위대한 세기'를 맞던 프랑스 왕실과 파리는 유행의 물결에서 비켜나 있었다. 비록 스페인을 통해 1615년 코코아를, 네덜란드를 통해 1636년 차가 보급되어 유행을 탔지만 커피는 아직이었다. 그러던 1669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계획하던 오스만 술탄 메흐메트 4세는 측근 뮈테페리카 쉴레이만 아아(Müteferrika Süleyman ağa)를 파리에 보내 루이 14세에게 친서를 전달하였다. 쉴레이만 아아는 파리에 집을 빌려 튀르키예식으로 꾸미곤 방문자들에게 커피를 아낌없이 대접했는데, 이는 엄청난 인기로 이어져 귀천을 막론한 파리 시민들이 그의 임시 거처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비록 쉴레이만 아아는 당초 목적인 프랑스와의 동맹 강화에는 실패했지만[20] 커피와 튀르크리, 즉 튀르키예 문화에 대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사실 루이 14세도 커피를 즐겼기에 커피콩 선물 자체는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14년 후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쟁 (대튀르크 전쟁)에 나선 오스만 제국은 빈에서 참패를 겪고 후퇴하였다. 크로와상과 윙드 후사르의 활약으로 유명한 이 전투에서 황급히 후퇴한 오스만 제국군은 대부분의 보급품을 놓고 갔는데, 그중엔 대량의 커피 포대도 있었다. 오스트리아 군은 전리품인 커피콩을 두고 쟁탈전을 벌였는데, 사망자까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커피 원두를 구하긴 쉽지 않았다. 결국 커피콩은 공방전 도중 튀르키예군으로 변장해 내부와 폴란드 원군 측에 소식을 전달한 폴란드 출신의 병사 콜시츠키에게 상당 부분 돌아갔다. 그는 빈에 '파란 병 아래 집'이란 카페를 열었고, 이는 빈 최초의 카페이다.. 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이미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1665년 빈에 당도한 오스만 사절에 의해 커피가 전해졌고 공방전 4년 전엔 1685년에 이미 아르메니아인 요하네스 디오다트가 빈에 카페를 열었다고 한다. 영국에선 그보다 앞선 1650년 유대인 제이콥이 옥스퍼드에 개업한 카페가 최초였는데, 이는 단명하였고 2년 후 아르메니아인 파스카 로제가 런던에 오픈한 커피하우스가 대성공하였다. 1680년대 당시 런던 인구는 50만이었는데 커피하우스는 3천 곳이 있었다고 한다.
영국에서의 커피하우스는 정치적 의견을 교류하는 장소로 애용되었고, 이슬람권의 영향으로 술을 팔지 않아 진지한 대화가 이어질 수 있었다. 1657년 영국은 이후 국가적인 인기를 얻게 되는 음료인 차를 수입하게 되었지만 커피의 위세 하에 별 인기를 얻지 못하였다. 그리고 코코아 같은 경우는 영국의 적국인 스페인을 통해 막대한 관세를 거쳐 유통되었기에 역시 인기가 없었다. 한편 커피에 반발하는 계층도 있었다. 부인들이 커피하우스가 남편들을 잡아둔다며 항의한 결과 국왕 찰스 2세가 커피하우스 폐쇄령을 내렸다가 시민들의 분노에 열흘 만에 철회하기도 하였다.
당시 정치, 학문적 토론이 벌어지던 커피하우스에는 입장료 1페니만 내면 들어갈 수 있었기에 커피를 마시려는 사람들 외에 단순히 수준 높은 대화에 참석하려는 사람들도 많았다. 런던의 주식 거래소 주변의 커피하우스에선 주식 상담이 이루어졌는데, 사람들이 모두 커피하우스에서 상담을 받자 거래소 자체는 한산해지기도 하였다. 무역상들이 모이던 커피하우스에선 고객 유치를 시도하던 중개상들이 위험 부담을 미끼로 하며 보험의 시초가 마련되기도 하였고, 토리당과 휘그당 같은 정당들도 각각 선정한 커피하우스를 중심으로 지지자들을 규합하였다.
17세기 후반 영국 시민 사회의 거점이던 커피하우스는 (비록 신분의 차별은 없었지만) 여성 출입 금지라는 차별성과 네덜란드,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커피 선점으로 영국에선 점차 쇠퇴하였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경쟁이 과열된 커피 대신 차 시장을 확보하였고, 이에 영국 정부가 홍차 소비를 촉진하며 커피에 대해 규제를 내리자 커피의 나라는 점차 홍차의 나라로 변하였다. 한편 영국의 커피 사랑이 절정에 달할 무렵인 1672년, 쉴레이만 아아의 방문 후 7년이 지난 파리에도 아르메니아인 파스칼이 개업한 최초의 카페가 문을 열었다. 그외에 길거리 커피 판매상인 칸디오들도 있었다.
파리지앵들은 카페를 애용하였고, 프랑스어였던 카페는 곧 국제적으로 커피를 마시는 장소를 지칭하게 되었다. 1686년엔 바로크 양식의 웅장한 카페 프로코프가 개업하여 중산층에게 사랑받았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한데 모여 백과전서 편집 회의를 개최한 곳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개업한 카페 드 라 레장스[21] 역시 유명하였다. 18세기 초엽 인구 50만인 파리에는 카페 3백여 곳이 있었고, 프랑스 혁명 직전인 1788년엔 60만 인구에 카페는 1800개에 이르렀다.
프랑스 혁명도 어떻게 보면 커피의 위력으로 일으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폐쇄적인 귀족들의 사교 문화인 살롱과는 달리 카페[22]는 지식인뿐만 아니라 서민들이 주로 드나들며 대중적이고 개방적인 편이었던지라,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치열하게 토론하며 개혁의식을 키워 간 부르주아의 이론들이 혁명의 기폭제로 이어지게 된 것. 특히 앞서 언급되었던 카페 드 라 레장스의 주인인 오를레앙 공 루이필리프 2세는 경찰의 출입을 제한하여 각종 사상가들의 자유로운 의견 교환에 힘썼다. 1789년 7월 12일, 자코뱅 클럽에 속한 카뮤 데물랭이 민중에게 무장 봉기를 연설한 곳도 오를레앙 공의 저택인 팔레 루아얄에 속한 카페 드 포에였다. 2일 후 시민들은 무기를 들고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며 프랑스 혁명이 시작된다. 그외에 북독일의 프로이센 왕국도 1670년 커피가 처음 전해진 후 유행했는데, 특이하게도 여성들의 음료로 인기를 끌었다. 커피 수입으로 국고 유출이 우려되자 프리드리히 2세가 1777년 커피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으나 일시적이었으며 이후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버금가는 커피 소비국이 되었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3세는 커피를 매우 싫어해 금지령을 내리려 했지만 귀족들도 반대가 심했다. 그래서, 그는 커피가 몸에 나쁘다고 주장하면서 사형수 형제들을 종신형으로 살려주는 대신, 각자 커피와 차를 매일 마시게 하여 실험해 커피가 싫음을 입증하려고 했다. 하지만, 왕은 암살당하는 통에 실험결과를 보지 못했는데 커피를 마신 사형수 형제가 더 오래 살았고 그 시대에서도 커피가 나쁜 게 아님을 입증하고 말았다.
직접 발견은 아니긴 하지만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카페인이 발견되는 것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괴테는 독일의 과학자 프리들리프 페르디난트 룽게의 친우로, 1819년 당시 25살이던 룽게가 고양이의 동공에 근육 이완 효과가 있는 벨라돈나라는 식물의 추출물을 떨어뜨린 후 동공이 확장되는 실험을 시연했는데, 이에 감명을 받은 괴테가 그에게 아라비안 모카 커피콩을 선물하면서 '여기에 들어있는 성분을 분석해서 왜 커피가 사람들을 깨우는 효과가 있는지를 알려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룽게는 이 성분을 단순히 커피의 유효성분이라는 뜻으로 카페바제(Kaffebase)라고 불렀으나, 1821년에 룽게와는 별도로 독자적으로 카페인을 발견한 프랑스의 피에르 장 로비케(Pierre Jean Robiquet), 피에르 조제프 펠티에(Pierre Joseph Pelletier), 조제프 비앵네메 카방투(Joseph Bienaimé Caventou)가 논문을 내고 caféine[23]이라는 명칭을 널리 정착시켜서 이쪽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다만, 후에 펠티에는 룽게가 자기보다 먼저 한발 앞서 카페인을 발견했음을 인정하고 공표했다.
5. 세계 각국으로의 전파
커피 수출로 막대한 이득을 보던 예멘인들은 커피를 독점하기 위해 커피 종자의 반출을 금지하였고 수출할 때에도 구운 커피콩만을 내주었다. 하지만 1685년 네덜란드가 스리랑카(실론)를 식민화 했을 당시 현지 무슬림들이 커피나무를 길렀다는 기록을 보아 이미 17세기에 외부로 반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670년대 수피 성인 바바 부단이 메카 순례 후 경유한 모카에서 7알의 커피 열매를 품에 숨겨와 인도 남서부 해안에서 커피 재배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곳에서 실론으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24] 한편 1619년부터 바타비아를 중심으로 자바에 대한 식민 지배에 나선 네덜란드는 1690년부터 아덴에서 밀수한 커피 재배를 시도하였다. 몇 차례 실패 끝에 1699년 안정적인 재배가 시작되었고 18세기 초엽 자바는 모카에 이은 커피 생산지로 부상하였다. 더 나아가 네덜란드는 1718년부터 수리남에서도 커피 재배에 나섰다.한편 당시 커피 열풍이 불던 프랑스에서 커피 사재기에 나서자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 커피가 부족해졌고, 이에 술탄이 대유럽 커피 수출을 금하였다. 그러자 프랑스는 1713년 네덜란드와 위트레흐트 조약을 맺으며 암스테르담 식물원의 커피나무를 입수한 것을 바탕으로 1697년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은 식민지 생도맹그(아이티)에서 재배를 시작하였다. (1715년) 비록 첫 시도는 10년 만에 실패했지만 1723년 카리브 해의 다른 섬 마르티니크에서 해군 장교 마티유 드 클리외가 티피카 품종 재배에 성공하였다. 이를 다시 아이티[25]와 과들루프 등에 옮겨심어 역시 성공하였고, 1730년대부터 프랑스의 커피 공급은 안정화되었다. 당시엔 수에즈 운하가 없었기에 모카나 자바로 향하는 노선보다 카리브 해의 식민지가 훨씬 가까웠고, 이로써 아이티의 커피는 운송비가 적게 들었다. 게다가 노예들의 무상 노동력 덕분에 가격 경쟁에서도 아이티산 커피는 저렴한 값을 자랑, 프랑스는 기존에 수입처이던 중동에 커피를 수출하게 되었다. 1750년 아이티는 전 세계의 커피 중 절반을 생산하였다.
남아메리카 대륙에선 앞서 언급했듯 네덜란드령 기아나인 수리남에서 커피 재배가 시작되었다. 그러던 1722년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죄를 짓고 수리남으로 도주한 물루주라는 사람이 기아나의 연인을 만나는 대가로 수리남의 커피나무를 밀수해주는 계약을 통해 기아나에도 커피가 전해졌다. 그리고 1727년 수리남의 네덜란드 인들과 기아나의 프랑스인들이 대립하자 남쪽 브라질의 포르투갈 인들이 중재에 나섰다. 그때 파견된 포르투갈인 프란시스코 드 메료 파리에타가 프랑스 영사 부인을 유혹한 후 작별 선물로 받은 꽃다발에 숨겨진 5그루의 커피 묘목을 심은 것이 후에 세계 최대의 커피 생산국이 되는 브라질에 커피가 들어온 경위라 한다. 다만 파리에타가 금을 주고 밀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커피 재배를 도입하는 과정이 속임수와 권모술수로 얼룩진 것과 달리, 인도양에서는 합법적으로 재배를 시작했다. 1712년 프랑스 사절단이 예멘을 방문했을 때에 중이염을 앓던 라시드 왕조의 군주 알 마후지 무함마드를 동행한 의사가 치료해 주었다. 보답으로 사절단은 커피 나무를 청하였고 왕은 1715년 프랑스 상인 안벨에게 커피 묘목 60그루를 하사하였다. 그는 프랑스 동인도 회사가 막 식민화한 마다가스카르 인근의 부르봉(레위니옹)섬을 향하였는데, 항해 도중 40그루가 말라죽었다. 나머지 20그루는 현지 수도원 정원에 심었는데 그중 단 두 그루만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이듬해 둘 중 하나도 말라죽고 남은 한 그루가 열매를 맺으며 부르봉 품종의 조상이 되었다. (1716년)
5.1. 일본으로의 전래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문호개방을 하면서 커피도 이 때 유입된 것으로 전해진다.일본인 중에서 대표적으로 커피를 즐겨마신 사람이 바로 조선의 침략자로 악명높았던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는 영국에서 유학생활할 때 커피를 접하였고, 메이지 유신 이후로 커피가 열도에 전래되면서 자국에서도 커피를 즐겨 마셨다고 알려졌다.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을 당하였던 1909년 10월 하얼빈 의거 당일에도 특별열차 안에서 커피를 마셨던 것으로 전해진다.
5.2. 한국으로의 전래
19세기 말 무역이나 선교 등 여러 목적으로 방문한 서양인들을 통해 커피가 퍼지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커피를 양탕국(洋湯국)이나 가배(珈琲)차, 가비(珈非)차라고 부르기도 했다. 1884년 1월 미국인 퍼시벌 로웰이 한강변 창랑정(滄浪亭)[26]에서 '조선에서는 최신 문물(that latest nouveauté[27] in Korea)이었던 커피를 식후에 마셨다[28]'고 회고록으로 적은 것이 대한민국에서의 커피와 관련한 가장 오래 된 기록이다. 1884년 호러스 뉴턴 알렌도 조선 궁중 시종들이 커피를 대접하였다고 기록했다.다른 나라들처럼 커피가 처음 유행할 땐 귀하고 비쌌다 보니 상류층 위주로 즐겨 마시는 고급스러운 기호식품이었다. 양반들은 외국인에게 커피를 선물받으면 두고두고 아껴 마셨다고 전해지며, 특히 당시 국왕이었던 고종도 커피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넘어 조예가 깊었는지, 1898년 권신인 김홍륙이 실각한 것에 앙심을 품고, 고종을 암살하려고 고종이 마실 커피에 아편을 탔는데 평소 마시던 커피와 향이 다름을 눈치채고 볕어서 독살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같이 마셨던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은 맛의 차이를 눈치채지 못한 채 한모금 마셔버려 이 후유증으로 두고두고 고생했다.
일제강점기 때와 한국 전쟁을 거치고 나서도 한국인의 커피 사랑을 이어졌지만 1960~70년대에도 커피는 자주 마시기 어려운 고급 음료라는 인식이 남아 있었다. 한국전 직후에는 미군부대에서 밀반출된 군납품이 암암리에 유통되었고, 서울 시내 몇몇 번화가의 다방에서는 꽤나 비싼 값으로 팔던 특별한 음료여서 흔하게 마실 수는 없었다.[29] 그 당시 한국에서는 커피는 전량 수입품인 사치품이었기 때문에 5.16 군사정변 직후 한동안 커피 수입을 금지시켰고, 콩껍질을 태워 대용 커피를 만들거나 커피 대신 쌍화탕을 대접하는 등 커피 대용품을 제공하던 시절도 있었다.
모든 계층에서 일상적으로 흔하게 마실 수 있는 대중 음료로 자리잡은 시기는 1980년대부터이다. 1988 서울 올림픽을 대비하여 198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커피 생산을 늘린 이후 남녀노소가 즐기는 대중적인 기호식품으로 자리잡았다. 식후에 커피 한 잔은 한국인의 대중적 식문화 가운데 하나로 정착했으며, 한국인이 많이 먹는 음식으로 커피가 김치를 뛰어넘어 1위를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 1970년대 처음 출시된 한국식 인스턴트 커피는 세월이 흘러 커피믹스라는 혁신적인 발명품까지 만들었고, 해외로 수출되어 좋은 평을 듣고 있다. 그리고 한국발 달고나 커피가 한류를 타고 여러 나라에서 유행하는 등 현재 대한민국의 커피 문화는 서유럽 못지 않게 발달되어 있다.
여담으로 전 세계에서 커피와 차 중에서 어느 것을 더 많이 소비하는지 조사한 해외발 통계가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주변국인 중국, 일본,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국가들은 거의 대부분 차를 더 선호하며, 커피의 발상지인 서아시아에서도 홍차가 더 대중적이다. 이와 달리 한국은 차보다 커피를 마시는 비중이 더 높게 나온다. 이러한 나라들에서도 커피 소비량이 많기는 하지만 차 소비량도 무시못할 수준으로 많은 반면, 한국은 커피에 쏠린 비중이 유별나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상당히 크다. 한국을 제외하면 필리핀, 태국 정도가 아시아 중에서는 커피 소비량이 더 많은 나라에 속한다.[30]
5.2.1. '양탕국'과 '가배차'
구한말까지는 커피를 민간에서는 양탕국(洋湯국), 왕실이나 사대부들은 커피를 한자로 음역하여 가배차(珈琲茶) 또는 가비차(珈非茶)라고 불렀다.한자어 본래의 의미로는 차는 차나무 잎을 우린 음료, 탕(湯)은 다른 재료를 우린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미 조선시대 정약용이 저서 아언각비(雅言覺非)를 쓰면서 "원래는 차나무 잎을 우린 것만 차라고 불러야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탕(湯)이나 환(丸), 고(膏)처럼 먹는 방법으로 착각하여 한 가지 재료를 우린 것을 모두 차라고 부르니 생강차, 귤피차니 하는 것이 나왔다." 하면서 지적한 바 있다. 즉, 조선시대부터 차와 탕의 의미가 제대로 구분되지 않은 것이다. '양탕국'과 '가배차'란 표현이 병용되었다는 것은 차와 탕의 의미 혼동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민간에서 흔히 커피를 '양탕국'이라 불렀음은 특이한 일이다. 정약용은 본래 탕이라 불러야 하는 것도 조선에서는 차라고 부른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양탕국'보다는 '양차'가 더 통용되었음 직한 표현인데 실제 역사에선 반대가 되었다. 이것은 조선 민중이 커피의 검은색과 쌉사레한 맛에서 한의학에서 자주 사용하는 탕약을 연상했기 때문이다. 현대야 평생 한의원 문턱 안 밟아본 사람도 흔하지만, 저 무렵에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커피를 보고 한의원의 탕약을 떠올림은 무리가 아니었다. 다만 약이 아닌 것은 확실하니 탕약이 아니라 탕국.
6. 현대의 커피 대중화
20세기에 들어와서 멜리타 드립 커피, 에스프레소 등이 발명되고, 1930년경에 프렌치프레스, 에스프레소를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모카포트, 이탈리아인들이 미국에 가져간 에스프레소를 현지인들에게 맞춘 아메리카노 등이 탄생한다. 이전까지는 이브릭 같은 튀르크 커피를 그냥 마시거나, 커피박을 거르기 위해 면보 등을 쓰기도 했었다.
1946년 전후, 커피 추출물을 건조시킨 인스턴트 커피가 등장하여 유럽인이 아닌 다른 국가의 대중들에게도 커피가 친숙해지고 잠을 깨는 대표적인 각성제로서의 역할을 맡게 된다. 이당시의 커피의 인식은 카페인 섭취가 주 목적이었다. 이를 제1의 물결이라고 부른다.
1960년 이후, 스타벅스와 같은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강배전된 에스프레소를 이용한 베리에이션 커피가 본격적으로 세계에 대중화되었으며 이것을 제2의 물결이라고 한다. 서구권에만 있던 카페 문화가 본격적으로 세계에 퍼진 것이다.
1970년대 당시 커피 광고 |
2010년대 이르러 강배전 커피들의 몰개성함에서 탈피하고, 커피 본연의 다양한 맛을 살리기 위해 생두의 원산지와 농장, 산미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지고 이 과정에서 한 국가에서도 여러 가지 다양한 품종과 맛의 커피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섬세한 맛을 살리기 위해 강배전으로 획일화된 로스팅에서 탈피하여 여러 가지 변수를 실험하는 경향과, 기존에 경험적인 부분을 신뢰하며 등한시했던 추출 과정에 대한 과학적인 증명 등 대규모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이를 제3의 물결이라고 한다.
2020년대 들어 커피 문화는 지속 가능성에 있어서 큰 도전을 받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흉작, 중국의 커피원두 입도선매 등으로 인해 2021년에는 원두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이 기조는 그 이후로도 이어지고 있다.
[1] #[2] (‘Selam’ 에티오피아인의 시각) “칼디” 커피의 전설 / 테스파예[3] 불교의 염불 비슷하게 이슬람에서 특정 종교문구를 계속 암송하는 수행의 일종[4] 커피콩을 먹은 염소들이 졸지 않는데서 착안했다고 한다.[5] 그래서 이들이 천문학이 발달한 것이다. 밤에 정확하게 목적지를 찾아 이동해 낮에 쉴 그늘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야간 이동을 위해서 방향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기 때문에 천문학이 발달한 것.[6] 오스만 제국의 정복 전에 포르투갈에 맞서 인도양에 파견되었던 맘루크 함대가 예멘의 항구에서 커피 보급이 거절되자 약탈을 벌였고, 기세를 몰아 타히르 왕조를 무너뜨렸다. 당시 맘루크 군은 총포가 있었고 예멘엔 없었기에 정복은 수월히 이루어졌다. 한편 그로부터 불과 12일 후 오스만 제국군이 카이로에 입성하며 맘루크 조를 무너뜨렸다. 그러자 예멘의 맘루크 장교들이 오스만 측에 복속하며 예멘이 오스만령이 된 것이다. 한편 타히르 조의 잔당은 아덴에서 저항했는데 그마저 1538년 오스만 군에게 함락되었다.[7] 튀르키예어 kahve를 독일식으로 표기한 것[8] 국내 커피 음료 '프렌치 카페'가 이 문구를 광고 멘트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9] 커피에게 '세례'를 주었다고도 하는데, 커피를 내리느라 물을 붓는 것을 '세례'라고 장난스럽게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10]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신앙심이 깊고 경건한 인물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우유부단하고 화려함을 좋아하는 면이 있어서 교황청 재정에 부담을 줄 정도였다. 만약 커피 야사가 사실이라면, 화려함을 좋아하는 성격 덕분에 우유부단함마저 물리치고 커피를 공인하였을 것이다.[11] 본래 아덴에 세웠는데 1620년 현지에서 내전이 터지자 모카로 이전한 것이다.[12] 다만 마르세유 자체에선 1660년경엔 톤 단위의 커피콩 거래가 나타나기도 하는 등 커피가 대유행하였다.[13] 다만 현재는 수질 때문에 술을 마셨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연구가 계속 나온다. 사실 술을 빚는 데에 물이 상당량을 차지함을 생각해보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일상식으로 소비할 만한 품질의 술을 빚으려면 물도 적합한 품질이어야 한다. 자세한 것은 맥주와 와인 문서로.[14] 출처 : 케임브리지 독일사[15] 즉, 하루에 약 2리터 가량.[16] 튀르키예어로 커피를 뜻하는 Kahve와 페르시아어로 집을 뜻하는 Hane의 합성어이다. 참고로 현대 튀르키예어로는 커피가게라는 뜻의 Kahveci(카흐베지) 혹은 책읽는 곳이란 뜻의 Kıraathane 크라앗하네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재밌는 점은 카흐베지에서나 크라앗하네에서나 사람들은 커피보단 차를 더 자주 마신다는 점이다(...) 튀르키예어로 아침식사를 뜻하는 Kahvaltı(카흐발트)도 원래는 커피를 마시기 전에 가벼운 식사를 하던 데서 유래된 말이지만 지금은 여전히 아침식사를 카흐발트라 하면서도 커피 대신 차를 마신다.[17] 오늘날 시르케지역 근처와 이집트 바자르 사이에 위치한 타흐타칼레(Tahtakale)라는 곳에서 최초로 영업을 시작했다는데, 현재는 그 장소가 남아있지 않지만 한때 이 일대가 카페거리처럼 카흐베하네들이 즐비하게 늘어졌다고 한다. 근처에 총리대신의 관저와 톱카프 궁전, 에미뇌뉘 항구를 오가는 상인들과 갈라타의 외국대사와 수행원들, 페네르와 페라의 룸인들이 서로 만나는 번화가라 금방 커피문화가 퍼질 수 있었다.[18] 아르메니아계 시리아인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둘 다 아랍어 이름이고, 무슬림 이름이라 신빙성은 낮다.[19] 후기인 18세기 이후에는 우후죽순으로 늘어난 카흐베하네를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걸 깨달은 오스만 조정도 정책을 바꿔서 동네 주민들에서 뽑거나, 위장전입을 시킨 요원들을 이용해 카흐베하네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용의선상의 인물의 행보, 동네에서 퍼지는 소문 등을 수집해서 경찰에 보고하는 프락치들을 심어서 여론을 감시했다.[20] 베르사유 궁에서 접대 받을 때에 루이 14세가 환영식의 소감을 묻자 튀르키예 황궁이 훨씬 호화롭다 답하여 태양왕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결국 쉴레이만 아아가 전권대사가 아닌 일개 사절에 불과함을 깨달은 루이 14세는 그에게 귀국을 명한다. 다만 대튀르크 전쟁에서 참전하지는 않았다.[21] 레장스는 불어로 섭정이란 뜻. 루이 14세의 조카 오를레앙 공의 저택인 팔레 루아얄 앞에 세워졌는데, 오를레앙 공이 후에 루이 15세의 섭정이 되며 레장스란 이름이 붙여졌다.[22] 프랑스에서는 커피를 마시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카페(café)'라고 부르며 카페 문화에 자부심이 큰 편이다. 프랑스 최초의 카페 르프로코프[23] 프랑스어로 커피를 뜻하는 café에 접미사 -ine을 합쳤다. 지금도 프랑스에서는 카페인을 caféine이라고 표기한다.[24] 이전의 수피 성인 다다 하야트의 사당 근처에 심었는데 단 한 알만이 싹을 틔웠고 19세기까지 이어진 티파카계의 최고급 품종 올드 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25] 본래 카카오, 사탕수수 재배에 주력했으나 1725년의 허리케인과 1727년의 대지진으로 플랜테이션이 붕괴하자 아예 커피로 새 시작을 한 것이다.[26] 회고록 원문에서는 The House of the Sleeping Waves라고 써있다. '넓은 파도(滄浪)'라는 뜻인 한자 이름과 거리가 있는 이름이지만 그나마 추측할 수 있는 장소가 여기밖에 없다. 영어로 통역하는 과정에서 sweeping waves(광대한 파도, 滄浪)가 발음이 비슷한 sleeping waves로 잘못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27] 프랑스어에서 유래된 말로 영어 novelty와 같은 뜻이다. 한국에서는 '최신 유행품'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다르다.[28] 전문가들은 식사 뒤 숭늉, 식혜, 수정과 등을 마시던 문화가 커피로 대체된 것으로 추측한다.[29] 1960~70년대를 배경으로 한 검정 고무신 애니에는 미국에서 사는 기영이 엄마 후배가 귀한 선물이라며 커피를 가져왔고, 커피잔이 없어 사발에 커피를 따라 주는 장면이 있다.[30] 원래 한국에서도 차 문화가 발달했었지만 차문화와 접점이 큰 불교가 조선왕조가 들어선 이후 숭유억불 기조로 탄압받자 차 문화도 함께 쇠퇴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7세기 이후 소빙하기에 접어들면서 차 재배 가능 지역이 제주도와 남해안 일대로 축소된 것도 한반도에서 차 문화가 위축되는 요인으로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