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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4:45:32

최순실/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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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건 이전의 생애2. 사건 이후 행적

1. 사건 이전의 생애

"도대체 최순실이라는 사람이 누구이관대, 나라를 불신과 불통의 아수라장이 되게 해놓고 정작 당사자는 말 한마디 없는가? 아니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인가?"
- 김용태새누리당 국회의원 #[1]
-- 최순실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 참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어떻게 봐야 할까.
-- 욕심이 많았던 사람인가.
▲ 욕심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욕심이 없었다면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다). 그런데 주변에 사람이 굉장히 많지는 않다. 주변에 폭넓게 사람이 있었다면 인사 농단이 없었겠지. 너무 대통령하고 너무 가까웠다 그럴까. 사람이 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아버지 때부터 그렇게 인연 있어서 도와주고 그렇게 하면. 안타까운 사건이다. 나는 최순실이 좀 국민 앞에 죄가 어떻든 "제 불찰로 이렇게 잘못했다"라고 사죄하는 것이 더 좋았을 텐데 안 하니까 그게 안타깝다.
- 박영수 특별검사 #
1956년 7월 30일[2] 서울특별시 마포구 아현동에서 #, 아버지 최태민(당시 이름 최봉운)과 어머니 임선이[3][4][5] 사이에서 차녀로 (최태민에게는 5녀, 임선이에게는 3녀) 태어났다. 박근혜 대통령보다는 4살 연하다. 본명은 최필녀이지만, 1979년 최순실로 개명했으며, 그 이후 2014년 2월경 최서원으로 개명했다고 한다.[6] 하지만 최순실로 부르는 것은 아마 최서원으로 활동한 날보다 최순실로 활동한 날이 훨씬 많아 최순실로 부르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로 보도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최서원이라는 이름의 언급이 꼭 필요한 경우[7]를 빼면 무조건 최순실로 보도한다. 해외언론까지 포함하여 거의 100%의 언론이 최순실로만 그녀를 거론하고 있는 상태.[8]

최순실이 이렇게 잦은 개명을 한 것은 자신의 신분을 최대한 노출시키지 않기 위함도 있지만, 성명수리학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다. 최순실만 그런 게 아니라 그 부친 최태민 역시 이름을 7개나 갖고 있으며 딸 정유연정유라로 개명했고, 조카 장유진도 장시호로 개명했다. 최태민 일가는 1인당 최소 3개 이상의 이름을 보유하고 있다.

최순실의 부친 최태민은 1975~1994년에 "육영수의 혼령과 통한다"고 주장하면서 무려 20년 동안이나 박근혜와 매우 가깝게 지내왔던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예지몽을 꾸는 능력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는데 당연히 증명이 불가능한 관계로 믿거나 말거나다.[9]

최태민은 6명의 아내[10]로부터 9명의 자녀를 뒀다. 최태민은 그중 다섯째인 최순실을 특히 총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호의 사실은>은 ‘태자마마 최태민이 최순실을 총애한 이유’에 대해 “아버지의 현몽(現夢)[11], 꿈을 통한 예지력을 이어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박근혜에게 최순실이 꿈 이야기하는 장면을 종종 목격했다”고 증언한 사람들도 있다.#

1975년 단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청강생으로 등록했다. 학부 수업에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고 하며, 수료증을 받고 졸업 후 같은 과 대학원을 수료하였지만 그러나 수료는 학위를 취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학위를 취득한 게 아니라면 고졸인 셈이다.

일설에 의하면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에 위치한 퍼시픽스테이츠 대학교에서 4년 만에 석사 학위를, 2년 만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고 하며, 이를 기반으로 유치원 원장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취재 결과, 미국에서 유아교육 관련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고 하는 기간 동안 대한민국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참고로 미국 퍼시픽스테이츠 대학교는 경영학 관련 학위 과정만 있는 대학교로, 박사 학위도 경영학 박사(Doctorate of Business Administration) 과정만 있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학력위조 의혹을 받고 있다.# 결국은 학력위조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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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옆에 앉은 남자는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었던 이명박이다. 3은 2010년대 후반에 사이좋게 감옥으로 들어갔다.

최순실의 아버지인 최태민은 ‘새마음 갖기 운동본부’를 창설한 뒤 스스로 본부장을 맡았고, 박근혜는 ‘새마음 봉사단’ 총재를, 최순실은 ‘새마음 대학생 총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아버지 최태민 못지않게, 최순실도 '대학생 총연합회 회장'이라는 감투를 쓰고서 온갖 활동을 다 펼쳤다. 사명감으로 가득 찬 내 마음 - 사업에 정열을 바치겠습니다.

1978년 당시, 새마음 대학생 총연합회 회장이던 최순실이 KBS와 인터뷰한 영상이 독점공개 되었다. 70년대 영상을 방송국에서 공개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며, 당시 옛날 말 억양이 나온다. 영상 대한뉴스 영상도 나온다.

1979년 6월 10일 한양대학교 운동장에서 박근혜 새마음 봉사단 총재가 축사를 한 '제1회 새마음 제전'에서 당시 대학원생으로 이 날 행사를 주최한 ‘새마음 대학생 총연합회’의 회장이었던 최순실이 그날 ’새마음 제전’의 개회 선언을 한 일이 당시 언론에 보도되었다. 하지만 그때에는 그녀가 최태민의 딸이라는 사실까지 보도되지는 않았다. 여기서 당시 박근혜와 경호원의 제지도 없이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12] 인터넷 뉴스 '뉴스타파'의 심층 보도




대한뉴스 원본 영상. 28초부터 문제의 장면이 나온다.

동영상을 보면, 마치 연예인처럼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손을 흔드는 박근혜 총재의 옆을 최순실이 그림자처럼 수행하고 있다. 당시 박근혜 총재의 나이는 불과 27세, 최순실의 나이는 23세였다.

1979년 박정희김재규에게 암살 당하고 이듬 해인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박근혜가 6억 먹고 떨어져야 했던[13] 인생 최대의 시련기를 보낼 때도 최순실은 충실하게 박근혜의 옆을 지켰던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박근혜는 1984년 6월 좋은 환경을 버리고 성북동 집을 판 후, 삼성동에 있던 최태민의 집 앞으로 이사했다. 박근혜와 최태민의 집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최순실의 집이 있었으며, 이 주변은 최태민, 최순실, 박근혜의 부동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14]

시사저널이 입수한 문건에 의하면, 1982년 김영호(최순실보다 연하)와 결혼해서 1983년 김기대([age(1983-01-01)]세)를 낳았고 1985년 이혼했다고 한다. 아들에 대한 친권은 김영호가 갖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15] 그런데, 같은 잡지의 취재에 의하면, 공교롭게도 김기대는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청와대 총무구매팀에서 근무했다. 문제는 김기대가 공무원도 아니고, 정치권 출신도 아니고, 일반 직장 경력이 화려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1986년 3월에는 육영재단 부설 유치원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무렵 최태민과 최순실이 육영재단 사업에 개입해 전횡을 일삼았고, 이로 인해 140여 명의 육영재단 직원들은 최태민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직당했다.# 당시 최태민의 사촌인 김창완이 어린이회관 관장에 임명됐고, 육영재단 이사진에 영남투자금융 비리의 핵심인 김정욱이 임명됐으며, 새마음병원 사무국장[16], 명덕재단 사무국장 등에도 최태민의 친인척 및 하수인이 임명되었다. 이로 인해 1990년 육영재단 분규 때 직원들이 최태민과 최순실의 전횡을 비판하는 플래카드를 걸고 데모를 한 일이 있었다.[17] 이에 대해 2007년 6월 17일 당시 한나라당 당원이었던 김해호는 이렇게 주장했다.#
"최태민로열패밀리는 육영재단을 재산 증식의 장으로 이용했고, 박 전 대표는 육영재단 이사장이었지만 아무런 실권도 행사하지 못하고 최태민과 그의 딸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측근에 의해 작은 재단 하나도 소신껏 꾸려가지 못하고 농락당해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된 사람이, 어떻게 한 나라 지도자가 되고 험난한 21세기 글로벌 시대를 넘어갈 수 있겠나?"
육영재단 유치원에서 나온 1988년 3월, 대구광역시에 있는 영진전문대학 유아교육과 교수 및 병설 유치원 부원장으로 임용되어 1993년 2월까지 근무하였다. 위에 설명한 가짜 학위로 교수 직함까지 달게 된 것이다. 그런데 대구로 이사를 간 것도 아니고, 서울에서 주 1회 내려와서 달랑 2시간 수업하고 돌아간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이는 '주 7시간 이상 강의를 하여야 한다'는 당시의 학칙까지 어긴 것.# 시간강사 마냥 달랑 2시간 수업만 할 사람이 교수로 임용된 것, 교수직을 그만 둔 이듬해인 1994년에는 정윤회가 같은 학교에 시간강사로 위촉된 점, 비리사학임에도 교육부의 사업에 참여한 점, 박근혜가 대통령 재임기간 중 유일하게 방문한 전문대학이라는 점에서 영진전문대학박근혜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으며, 그 덕에 최순실이 교수까지 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1993년에는 압구정동에서 초이유치원을 설립해, 운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당시 "최순실 명의의 상당한 재산이 박근혜의 차명 재산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데 대해, 최순실은 "유치원 사업이 잘 되어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고 해명한 바 있는데, 실제로도 사업이 잘 되기는 하였다고 한다. 초이유치원은 국내 최고의 부촌강남권 부유층의 자녀들이 다녔던 유치원이었다.

1994년 아버지 최태민이 사망하였을 때 아버지에게서 수백억 원의 재산을 물려받았다는 소문이 있다. 실제로 최순실의 자매들은 최태민에게서 거의 그 정도의 재산을 물려받았다고 한다.[18] 참고로 최태민과 최순실은 박근혜를 만나기 전까지 아무 자산이 없던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박근혜를 만나기 이전에는 최태민과 그의 가족들은 단칸 방을 전전하며 살 만큼 가난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근혜를 만난 이후, 최태민은 순식간에 수천억 원대 준재벌 급 부동산 자산가로 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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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최태민 사망 이후 최순실이 최태민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시사인 주진우 기자는 2016년 10월 14일자 한겨레 TV 김어준의 파파이스에서 "최태민은 교주였는데, 최순실이 현몽을 물려받았다고 해서 최태민의 후계자가 되었다"고 말했다.[19][20]

여성 잡지 <우먼센스> 1994년 8월 호에 가명의 인터뷰가 실린 적이 있다. 인터뷰 내용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는 미상이지만 (최태민에 대한 의혹을 부인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하여간 본인 말로는 박근혜와 처음 알게 된 것은 1976년경이었다고 한다.#

1995년 정윤회[21]재혼했다.# 그리고 1996년, 딸 정유라[22]를 낳았다는 것이 공식 기록이다.[23]

1998년 오랜 은둔의 시기를 마친 박근혜가 정치계에 입문했을 때에도, 박근혜의 곁에 그림자로서 자리하고 있었다. 남편 정윤회를 박근혜의 비서실장으로 밀어넣은 것이다. 2008년 이후 박근혜 정부의 국정을 좌지우지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이른바 ‘문고리 3인방’ 이재만, 정호성, 안봉근 비서 역시 그때 정윤회에 의해 발탁된 인물들이었다.[24]

2006년에 박근혜서울특별시장 선거 유세 현장에서 피습을 당했을 때 박근혜를 간호했다고 한다. 2007년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한나라당 경선에서도, 박근혜 캠프를 비선에서 지휘한 것은 최순실의 남편인 정윤회였다는 얘기 역시 떠돌아 다녔다.

MBN의 단독 보도에 따르면, 2007년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후보 검증 청문회 때문에 큰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인지 정신과 진료까지 받았다고 한다.# 또, 최순실이 쓴 논문에는 영재 교육을 찬양하는 글이 있다.#

"최순실은 겉으로는 박근혜공주처럼 떠받드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박근혜를 호구 취급하였다"는 증언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최순실의 운전기사의 증언에 의하면 최순실은 박근혜와 통화한 후 혼잣말로 "아직도 지가 공주인 줄 아나봐"라고 중얼거리며 박근혜의 흉을 보았다고 한다.# 최순실의 측근이었던 노승일도 최순실이 박근혜로 추정되는 인물과 통화한 후 "이 여편네가 짜증나게 하네"라고 중얼거리는 걸 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 박근혜도 탄핵사태 당시 기자회견에서는 최순실에 대해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이라고 좋게 얘기하였으나, 막상 탄핵당한 뒤 구속되고 실형선고를 받을 위기에 처하자, "모든 잘못은 최순실이 한 거"라며 덮어씌우기 작전에 나셨다.

김성태 국회의원이 "구치소의 옥중청문회에서 본 최순실은, 박근혜를 위하는 마음이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술회하였다. 김성태 의원이 "혹시 최순실 당신이 죽었을 때 박 대통령이 탄핵에서 살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자 아주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며 ‘박근혜를 대신해서 내가 왜 죽어’라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전여옥 전 의원이 목격한 바에 의하면 박근혜는 당대표시절 최순실을 대동하여 대구방송 임원들과 식사자리를 함께 한 일이 있었는데, 최순실은 먹던 젓가락으로 특정반찬을 가리키며 '저 반찬 좀 이리 줘 봐요'라고 임원에게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 반찬을 박근혜 앞에 갖다 놓자 박근혜는 만족해하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는데, 그때 박근혜의 표정은 엄마가 자기 앞에 좋아하는 반찬을 놓아줬을 때 아이가 짓는 바로 그 표정이었다고 한다. 또한 박근혜는 무슨 이야기를 할 때마다 최순실의 반응을 살폈고, 최순실이 고개를 끄덕여줄 때마다 흐뭇해했다고 한다.

대략 2006년~2012년경에 강남의 한 유흥업소에서 고영태를 만난 것으로 추측된다. 고영태는 전직 펜싱 국가대표 선수로 한때는 호스트 생활을 한 적도 있었고, # 마약사범으로 형벌을 받은 적도 있는 자였다.# 20세 연하인 호빠 출신 고영태와 서로 ‘반말’을 하는 사이로서 매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고영태와 가까워진 후, 고영태가 만든 가방 브랜드 빌로밀로를 박근혜에게 소개하였는지, 박근혜는 2013년 초 당선인 신분으로 빌로밀로 가방을 자주 들고 다녔다. 평소에는 고영태를 "조카 같은 아이"라고 소개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선거 운동원으로 등록하지도 않고 사실상 비선 선거 캠프의 본부장 노릇을 한 것으로 보인다.[25] JTBC의 보도에 따르면, 후에 청와대 행정관이 되는 김한수태블릿에 담긴 박근혜의 대선 유세 연설문들이 최순실 또는 정유라에 의해 최종 수정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 이 밖에 대선 TV 토론이나 홍보 영상 신문 광고까지 모두 최순실에게 전달됐고 이후 수정한 흔적도 여러 부분 나타난다. 법적 논란도 예상되는 부분.# 어쨌든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에 큰 공로를 세웠다.

떠도는 루머에 따르면, 한나라당의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도록 한 것도 최순실이라고 한다. 새누리를 한자어로 바꾸면 신천지인데, 신천지는 최태민이 만든 영세교의 분파로서 최태민의 제자가 만든 사이비 종교의 이름이라는 것. 우연히도 미르재단의 미르와 K스포츠재단의 K를 합치면 미륵인데, 미륵은 최태민의 자칭이라고 한다. 물론 이런 얘기는 어디까지나 루머로서 믿거나 말거나. 관련 글[26]

박근혜의 당선 이후인 2014년에 정윤회이혼하였다. 개명 직후에 최순실이 정윤회를 상대로 가사 조정 신청을 했고 조정이 성립되어 이혼했다고 하며, 신청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매우 특이한 것은, '결혼 기간 중에 있었던 일들을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지 않기로 하고, 이혼한 뒤 서로 비난하지 않는다'라는 조정 조항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 까닭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정윤회는 황당하게도 '남들도 이혼할 때는 다 그렇게 한다고 들었다.'라는 해명[27]을 한 바 있다. 위장 이혼 의혹을 제기하는 이도 있었으나, 주진우에 의하면 정윤회와 사이가 나빴던 것은 사실이고, 딸도 부친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다고 한다.# 팟캐스트 <김용민 브리핑>에서 주진우가 한 말에 따르면, 최순실과 정윤회는 ‘프라이팬식칼을 들고 싸울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2014년 2월 조응천 청와대 공직기간 비서관이 최순실 관련 내사를 벌이기 시작하면서, 잠시 위기에 봉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14년 4월 15일 저녁에 조응천이 청와대의 누군가로부터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통보를 받는 것으로 최순실 관련 내사는 종결되었다. 바로 다음 날인 2014년 4월 16일에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당일 세월호 7시간 동안 박근혜의 행적이 묘연하여 당시에 여러 가지 의문을 자아냈다.

전직 차움의원 피트니스센터 직원의 언론 제보에 따르면, "최순실은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차움의원 내 베네핏센터에서 트레드밀(런닝머신)을 타다가, 오전 8시 50분 세월호 침몰 관련 TV 뉴스를 보더니 황급히 차움의원을 빠져나갔다"고 한다.뉴스1 또한, 검찰의 2018년 3월 28일 수사결과 발표에 따르면, "최순실은 이영선이 운전하는 카니발 차량을 타고 오후 2시 15분 청와대 관저에 들어가서 박근혜·문고리 3인방와 회의를 해서 '박근혜의 중대본 방문'을 결정했다. 종합하면, 최순실은 2014년 4월 16일 오전에 세월호 참사 소식을 접한 뒤, 오후에 청와대에 들어가 '박근혜의 중대본 방문'을 결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2014년 여름에는 딸 정유라가 현역 고등학생 신분으로 임신하는 등 파란이 많았다. 낙태를 하라고 했으나 정유라가 말을 듣지 않는 등 맘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어쨌든 정유라를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승마 단체전 금메달리스트로 만들었고, 이화여자대학교 체육학과에 15학번으로 입학시키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2015년 10월 27일에는 미르재단을 출범시켰다. 미르재단 이사장으로는 차은택의 대학원 은사인 김형수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원장을 선임하였다. 당시 고영태와의 관계는 아예 사업을 같이 하는 관계로까지 발전하였다. 최순실의 개명 후 이름인 최서원과 고영태의 이름 한 글자씩을 따서 ‘고.원.기획’이라는 회사를 만들기도 했다. 이성한 전 미르 재단 사무총장 증언에 따르면, 최순실의 진짜 핵심 측근은 고영태라고 한다.#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시가 30억 원짜리 117평 주상복합 아파트피엔폴루스에 거주하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해당 주상복합 아파트 지하주차장에는 최순실 소유의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차량과 벤츠 S500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2. 사건 이후 행적

2.1.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및 탄핵 정국


2016년 10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을 당시 독일에 있었으며 계속 연락두절 상태였다. 그러다가 10월 30일 급거 귀국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종신형을 피하기 위함'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독일 검찰에 의해 자금세탁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독일에서 자금세탁을 한 자는 종신형에 처한다는 것.[28]

귀국 당시 독일 공항이 아닌 영국 런던 히스로 공항에서 영국항공 소속 보잉 787(등록번호는 G-ZBJG)을 타고 들어왔다. 그러나 대한민국 검찰은 최순실을 인천국제공항에서 체포하지 않았다. 그 후 최순실은 33시간 동안 국내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그 시간 동안 돈 찾고, 입 맞추고, 증거인멸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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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31일, 드디어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했다. 출석 당시 검은색 현대 에쿠스 차량을 타고 등장했으며, 취재진을 피해서 이동하던 중 넘어지면서 신고 왔던 프라다 신발이 벗겨지기도 했다.[29] "검찰 수사를 받고, 저녁 식사로는 인근 식당에서 배달한 곰탕을 거의 다 먹었다"고 뉴스에 특보로(...) 나왔다.

2016년 12월 26일, 사상 유례없는 옥중 청문회를 했다.# 홍남식 서울구치소장이 최순실에게 "청문회에 출석하라"고 요구했지만, 최순실이 계속 거절하는 바람에 아예 김성태 국조특위 위원장이 구치소로 찾아가서 청문회를 실시했다. 박영선 의원에 의하면, 최순실구치소장도 쩔쩔 맬정도로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옥중 청문회에서도 자기가 필요할 때만 고개를 들고 답하고, 아닐 땐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고 한다.#

2017년 1월 25일 11시경, 서울 대치동 박영수 특검 사무실에 업무방해 협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강제 출석하였다. 특검 수사가 강압적이라는 이유로 특검 수사를 거부하려고 했지만 결국 강제 출석하게 된 것이다. 들어갈 때까지도 "이 특검은 민주주의 특검이 아니다.", "자백을 강요당하고 있다."라 하면서 큰 소리로 들어갔다고 한다.#[30]

2.2. 문재인 정부

2017년 10월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속행공판에서 발언 기회를 얻었을 때 "나는 지금 약으로 버티는데, 정신 고문이나 고문이 있었다면 오토 웜비어와 같은 사망 상태에 이를 정도로 견디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리고 검찰을 향해 "딸 정유라를 새벽에 남자 조사관이 데려간 건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비판했고, 재판부에는 "재판이 더 늦어지면 삶의 의미를 갖기 힘든 만큼, 공정히 재판해서 검찰의 의혹 제기는 과감히 걸러달라"고 호소했다.#

결국 웜비어 건으로 중앙일보 만평에서 까였다. 그것도 컴퓨터로 남한 인터넷을 모니터링하는 김정은을 등장시키면서 11월 24일 열린 서울중앙지법 재판에선 피고인석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하면서 "빨리 사형을 시키든지 해라, 난 더 살고 싶지도 않다"고 외치며 오열했다. # 이후 자신은 빠지고 본인의 변호인만 남았다. 이 깽판 때문에 재판 진행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2017년 12월 14일, 결국 징역 25년형과 벌금 1,185억, 추징금 77억을 구형받았다.# 판결은 재판부가 판단할 일이지만, 검찰의 구형이 확정되면 다른 재판들에서 받은 형량까지 추가해서, 실질적으로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다. 검찰은 "유기징역의 최대형량을 구형했다"고 하지만, 61세의 나이를 고려하면 사실상 무기징역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1심 선고는 2018년 2월 13일 내려진다.

여담으로 검찰의 구형을 듣고, 최순실은 대기실로 가서 방청석에서 생생히 들릴 정도로 크게 괴성을 질렀다고 한다. 최순실의 변호인인 이경재 변호사의 언급에 따르면 25년 형량이 아니라 벌금 때문이라고 하는데, 최순실이 그 동안 돈에 대해서 비정상적인 탐욕을 보여왔던 것을 보면 형이 확정될 경우 앞으로 이어질 검찰의 재산 추적과 추징으로 자기 재산이 증발할 수도 있는 것에 대한 한탄과 분노일 것이다.

결국 2018년 2월 13일 1심 선고에서 20년 징역을 선고받고 벌금 180억원, 뇌물에 대한 추징금 72억원을 언도받았다. 기존에 이화여대 입시 비리로 인해 3년형을 선고 받았기 때문에, 현재까지 최순실의 총 수감기간은 23년이 된다.[31] 벌금과 추징금을 완납하고 형을 정상적으로 마칠 경우 80대 초반이 되어서야 출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벌금과 추징금을 노역으로 대신할 거라는 전망이 있는데, 최순실의 공식적인 수입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노역 수당이 적게 책정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생물학적 수명이 다할 때까지 출소할 수 없을 수도 있다.

1심 재판을 맡은 김세윤 판사는, 피고인들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며 부드럽게 대해주지만 판결은 엄격하게 내리는 '외유내강형' 판사였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최순실은, 김 판사가 자신의 요구사항을 잘 들어주는 걸 보고 재판이 잘 돌아가는 걸로 착각하였다. 최순실김세윤 판사를 "우리 부장님"이라고 부르며 좋아했고, 2017년 12월 결심 재판에선 “구속된 지 1년이 지났는데 오늘 여기까지 버틸 수 있게 해 준 것에 대해 재판장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며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판결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중형이 선고되자, 최순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고 한다. 이를 두고 서울중앙지법 일부 판사들 사이에서는 “오늘은 최순실이 배신당한 날”이라는 말들이 오갔다고 한다.# 최순실은 구치소로 돌아간 뒤, "김 부장판사가 어쩜 그런 의외의 판결을 했느냐"고 말하며 실망감을 내비치기도 하였다.

2019년 7월 18일 서울동부구치소 내 목욕탕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며 그곳에 있던 구조물 모서리에 이마를 박아 찢어졌고, 구치소 인근 병원에서 28바늘을 꿰매는 봉합 수술을 받았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2020년 6월 8일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희대의 불쏘시개자서전이랍시고 출간했다. 내용의 상당수는 당연히 자기미화와 궤변으로 점철되었다.

2020년 6월 11일, 대법원에서 징역 18년·벌금 200억원을 확정지으면서 국정농단 재판들 중에 가장 먼저 종지부를 찍었다. 검찰이 2016년에 구속기소한지 3년 7개월 만이다.#

2021년 12월 31일에 박근혜 사면이 결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순실 사면에 대한 논의는 전혀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보수 진영에서조차 박근혜 사면 결정을 환영하는 것과 별개로 최순실 사면까지 주장하는 이들은 없다. 박근혜가 최악의 무능한 대통령이 되는 데 있어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핵심적 역할을 했기 때문인 듯하다.

2.3. 윤석열 정부

이후 2022년 3월 9일 20대 대선에서 보수당인 국민의힘 윤석열로 정권교체가 되었으나, 2022년 8월 현재까지도 윤석열 정부에서의 최순실 사면 논의는 없었지만 최순실 본인이 윤석열한테 직접 사면을 해달라고 탄원서를 썼었다. # 2022년 광복절 특사에서도 거론조차 되지 못했다. 애초에 윤석열 본인부터가 추미애와의 갈등으로 보수진영에 넘어온 것이지, 본인과 박근혜를 수감시킨 장본인이기도 했었다. 또한, 자신이 조종했던 그 박근혜조차도 2023년에 들어서는 최순실 국정농단이 자신의 불찰이라고 발언하면서 자신이 조종하던 존재에게도 사실상 버림받았다.[32]

2022년 10월 6일에 자신에게 악성 댓글을 단 네티즌들을 무더기로 고소했다. #

2022년 10월 17일에는 '굿판을 벌였다'는 보도를 한 언론사 3개 곳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지만 한 곳은 부산에 위치해 서울에서 재판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해서, 또 한 곳은 정정보도를 내서 취하했다고 한다. #

2022년 12월 21일에는 윤석열한테 또 사면을 요청한다고 탄원서를 썼었다. #

2022년 12월 26일에 척추 수술 필요성이 인정되어 6년 만에 임시 석방 되어 1개월간 형집행정지 결정을 받았다. #

2023년 1윌 25일 수술 이후 재활 치료 필요성이 인정되어 형집행정지 기간이 5주 연장되었다. 재입소일은 오는 3월 1일이다.#

수사 과정에서 본인이 임의제출했던 태블릿 PC를 돌려달라는 취지로 제기한 유체 동산 인도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였다. # 12월 29일 상고심에서 최종 승소하였다.#

22대 총선에서 박근혜의 변호인이었던 유영하국민의힘 공천을 받아 대구에서 당선되자, "국정농단 사건을 모른 것을 나의 책임으로 돌리면서 유영하 변호사를 곁에 둔 이유가 그가 원하는 국회의원을 만들어 주기 위함이었는가"라며 박근혜를 비난했다. #

2024년 7월 3일 정유라의 증언에 따르면 치매 증세가 있다고 한다. #

[1] 대통령을 감싸고 도는 여당인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이 이랬다. 그만큼 상황은 심각하다. 물론 김용태 의원은 친박계와 많이 다투었으며, 유승민 의원과 더불어 대표적인 비박의 강경파이긴 하지만 같은 당원 입에서 이런 얘기가 나오고 말았다. 이것은 여당도 옹호가 힘들다는 뜻이며, 2016년 11월 22일 새누리당을 탈당했다.(하지만 2017년 11월 9일 되돌아갔다고 한다.)[2] 음력 1956년 6월 23일.[3] 최태민의 5번째 아내다. 나중에 박근혜정치 입문에 많은 힘을 썼고, 사위 정윤회에게 박근혜의 비서 실장으로 들어가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4] 임선이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조순제(즉, 최순실의 의붓 오빠)를 두었다. 조순제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영남대 비리 4인방(곽완석 사무부처장, 김정욱 이사, 영남투자금융 조순제 전무, 영남의료원 손윤호 부원장)을 아느냐'라는 질문에 박근혜 후보가 "김정욱만 알고 나머지는 모른다"고 대답하자, "박 후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한나라당에 진정서를 제출한 일이 있다.#[5]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같은 동복형제는 최순득, 최순천 뿐이다.[6] 일부 언론에서는 "최서연"으로 개명했다고 보도하기도 했으나, 그 후에 모든 언론이 다 '최서원'으로 보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보였던 것으로 보인다.[7] 최서원으로 서명된 공식 문서 등을 다룰 때 그리하며, 박근혜 탄핵 심판 선고 결정문에도 최서원으로 표기되어 있다. 선고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편의를 위해 최순실로 표기할 수도 있었겠지만, 2014년 2월 이후 주민등록상의 이름은 최서원인 상황에서 헌법재판소가 이를 거스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8] 썰전에서 이에 대해 한번 농담삼아 의문을 던지기는 했다. 여기서는 "최순실이라는 이름이 이미 공공재가 된 것 아닌가"로 해석하였다.[9] 김형욱 중앙정보부장도 회고록에서 최태민의 ‘예지력’에 대해 언급했다. 당시 최태민이 청와대로 보낸 편지에는 “육영수 여사가 꿈에 나타나 '내 딸 박근혜가 우매해 아무것도 모르니 가서 그를 도우라고 했다’고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10] 그중 일부는 정식 혼인신고 없이 사실혼 관계였다 헤어진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단, 최순실의 모친 임선이는 그런 경우가 아니다.[11] 죽은 사람이나 신령 따위가 꿈에 나타나는 것.[12] 여담으로 박근혜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남자는 다름 아닌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다. 이 두 사람이 훗날 대권을 위해 최순실 관련 폭로까지 해가며 양보 없는 싸움을 벌였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흥미로운 장면이다.[13] 2019년 현재도 많기도 하지만 1970년대 6억 원이다. 현재 가치로는 대략 300억~600억원 가량이다. 당시 은행원 월급이 5만원이었다.[14] 2007년 6월 17일 당시 한나라당 당원이었던 김해호가 주장한 내용이다.#[15] 정윤회의 아버지와의 인터뷰에서 '전 남편과 사이에 다른 자식이 있다'#라고 하여 딸 정유라가 실은 재혼 전에 태어난 것 아니었느냐는 억측이 있었다.[16] 공교롭게도 새마음병원은 1987년에 명지학원에 매각되면서 사라진다. 명지병원 홈페이지에 언급된 내용이다.[17] 최태민이 1987년 재단 직원들에게 반감을 산 이유는 당시 <어깨동무>, <꿈나라> 등 어린이 잡지 편집에 딸 최순실을 관여시키는 등 육영이 목적인 어린이회관을 수익 사업체로 전환시키려 한 데 있었다. 어쨌든 이 일로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는 육영재단에 경찰 2개 중대를 파견하는 등 육영재단 ‘정상화’를 시도하였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는 육영재단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18] 다만 최재석은 예외. 이 사람은 최태민의 4번째 부인의 자식이기 때문에, 최태민의 5번째 부인인 임선이와 그녀의 자식들에게 유산도 거의 다 빼앗기다시피 했다.[19] 주진우 시사인 기자는 김어준의 파파이스에서 “최순실 곁을 봐준다는 무속인을 2명 만났다”며 “정윤회 씨를 봐주는 무속인도 있었고 최순실의 딸을 봐주는 점쟁이도 있었다”고 밝혔다. 주 기자는 “최태민 씨는 교주였다”며 “최순실 씨가 현몽을 물려받았다고 해서 (최태민의) 후계자가 된 것으로 듣고 있다”고 말했다.#[20] CBS 표준 FM 시사 자키 정관용입니다, 집중 인터뷰 "최순실 쫓는 '악마 기자' 주진우" - 주진우 기자 (시사IN), 유튜브 링크[21] 훗날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의 당사자로 지목된다.[22] 2015년 6월 12일경 정유연에서 정유라로 개명했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대회 진행 문서에 나오는 그 정유연이다. 단체 마장마술에서 금메달을 땄다. 아시안 게임 이전 국가대표들 인터뷰 때 방송에 잠깐 나온 바도 있다.#[23] 실질적으로는 1992년에 했다.[24] 정호성은 정윤회의 지인인 대학원 시절의 지도교수의 추천을 받아서 1998년에 들어갔다. 이재만은 박사학위를 땄지만 백수 신세였는데, 학교선배가 그만두면서, 대신 추천해서 들어간 케이스. 안봉근은 본래 김석원을 모셨으나, 김석원이 떠나고, 박근혜가 후보로 나서자, 그대로 박근혜가 자신의 비서관으로 데려간 사람이다.[25] 공식적인 총괄선대본부장은 前 국회의원이었던 김무성이었지만, 김무성이나 다른 의원, 당원들도 모르게, 뒤에서 박근혜를 조종한 자는 최순실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26] 물론 공식적인 신천지의 뿌리는 신앙촌과 유재열의 장막성전이다.[27] 참고로 정윤회최순실과 결혼하기 전에 결혼도 했고 자식도 낳았고 이혼도 했다. 처음 이혼할 때는 그런 적도 없는 사람이, 2번째 이혼 때만 "남들도 다 하는 줄 알고 했다"[28] 더불어민주당 안민석 의원의 제보에 따르면, 독일 검찰은 최순실에 대해 매우 열심히 수사를 했는데, “아직까지도 대한민국 검찰에서 아무런 협조 요청이 없다”면서 “한국 검찰에서 협조요청이 오면 기꺼이 적극적으로 협력을 할 텐데 왜 한국 검찰이 아무런 협력 요청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29] 아마도 가장 값이 싼 신발을 신고 왔을 텐데, 그 신발이 프라다였다. 어쨌든 그렇게 로비에 남겨진 시가 72만 원 정도의 프라다 신발은, 나중에 최순실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30] 이때 청소아줌마가 "염병하네." 라고 맞받아친 영상이 인터넷에 올려지는 바람에, 포털사이트 검색어에는 '최순실'과 '청소아줌마'가 연신 오르내렸다.[31] 다만 최순실은 2016년 11월에 구속된 이후 1년 3개월가량 구치소에 있었기 때문에, 이 기간을 제외한 남은 기간만 수감된다. 한편 이 23년은 벌금과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을 경우 대신 부과되는 노역 기간을 제외한 수감 기간이다.[32] 이후 딸인 정유라가 박근혜에게 서운함을 토로했으나, 거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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